어지간한 날씨의 여하와 관계없이 일할 수 있는 현대와는 달리 중세엔 사람이 일할 수 있는 계절과 시간, 상황이 한정되어 있었고, 그건 아이스랜드도 같았다. 하지만 이를 가로막던 가장 큰 문턱.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찾아왔다. 콜던 또한 사람으로 넘쳐나던 옵시디언베리처럼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비슷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모두 모험가 혹은 노동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상인들이 물건을 가져와 돈을 흐르게 했다. 지엄한 욕망의 원칙에 따라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는 아이스랜드 공작의 본성인 윈터홈도 마찬가지. 공작이 복귀하기 전부터 윈터홈은 방문객으로 붐볐다. 대부분은 아이스랜드 각지의 유력자들이었지만, 다른 지방 혹은 국가의 손님도 종종 있었다. 당연하지만 마법사의 탑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르케를 시작으로 아이스랜드 공작의 모집 공고에 혹했거나, 더 뒤가 없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마법사들이 봄이 되자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주민이 늘면 식당은 바빠지는 법. 당연하지만 식당을 총괄하는 카렘은 바쁘기는커녕 오히려 여유로워졌다. 아니. 단순히 여유로운 것이 아닌 여유가 넘쳐 흘렀다. 그것도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이유는 단순했다. 카렘은 이제 겨우 11살이었고 혼자였다. 올리비에만 있을 때까지만 해도 상관없었지만 이젠 무리였다. 탑의 노동자, 아니 마법사만 10명이 늘었다. 그 말은 10인분 혹은 그 이상의 음식을 끼니마다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카렘 혼자서 물리적으로 상황을 컨트롤하기 버겁기 시작했고 캐서린은 이를 진작에 감지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꼬마. 오늘부터 넌 마법사의 탑 주방장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나와 메리가 먹을 음식에만 집중하거라." "음?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그건 앞으로 메리가 맡을 거다." "아자!" 그리고 그 일을 옆에서 듣고 있던 메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짧고 강렬하게 환호성을 내지르는 것으로 답했다. 이는 빼앗겼던 주방을 일부 탈환하게 된 집요정의 승리였다. 안 그래도 메리는 마법사의 탑 전체를 관리하고 있었다. 과연 집요정이라고 할지, 단 하나의 실수조차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주방일이 더해져봤자 그저 그뿐인 일이었다. 카렘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심정을 느꼈다. 하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4, 5인분쯤 준비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10인분 이상의 대량 조리는 전생에도 경험이 없었고 현생의 어린 몸으로는 더더욱 무리였으니까. 그 증거로 카렘은 취직하고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실수를 하기 시작했었다. 어떻게 보면 카렘은 윈터홈의 초창기로 돌아왔다고 볼 수 있었다. 늦가을과 초겨울의 캐서린과 메리를 먹이던 나날. 그 말은 자유시간이 흘러넘치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여기서 직접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고?" "흙장난이라니요. 화단을 가꾸는 겁니다." "화단이라기엔 온통 붉은 마녀의 손가락 모종뿐인데?" 캐서린은 마법사의 탑 뒤쪽 마당의 큼지막한 구역에 작은 군락을 이루고 자라는 파릇파릇한 이파리를 보며 지적했다. "그래서, 이 많은 붉은 마녀의 손가락으로 뭘 하려고? 설마 네가 온실에서 구해온 거냐?" "제가 아니라 알리시아님한테 부탁했지요." "키우는 방법은? "알리시아님한테 간식 몇 개 찔러드리니까 수분(受粉) 방법까지 구해서 알려주던데요?" "그 공녀가 수분 방법은 또 어떻게 안 거지? 아니, 그 전에 무려 공녀인데 부려먹는 건 좀 이상한 거 아니냐?" "부려먹다니. 보다는 상호이익 관계라 해주십사." 캐서린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지적했다. 하지만 카렘은 당당했다. 이전에 탑의 거주민이 소수였을 때는 상관없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마법사가 늘고, 마법 함정과 장치가 있는 데다 위험한 연구와 의뢰도 있었기 때문에 거주민 모두가 알리시아의 침입을 막으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그 누구도,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선 절대적인 메리조차 알리시아의 침입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캐서린이 가장 먼저 포기해버렸고, 뒤따른 올리비에를 따라 마법사들, 메리조차도 알리시아를 막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카렘? 카렘은 진작에 포기한 지 오래였다. 아니, 오히려 간식을 미끼로 알리시아를 부려먹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카렘이 공작 가문의 막내 공녀를 어떻게 꾀어서 부려먹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던 캐서린은 뭐라고 말하고 싶은 듯이 입을 답싹거렸지만 이내 포기했다. 지금까지 말 나오지 않은 걸 보면 알아서 잘 하겠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그나저나 여기 텃밭 관리는? 너도 농노 출신이니 농사가 장난이 아니란 건 알겠지?" "모를 리가요. 이 방면으로 뛰어난 전문가에게 맡기고 있는데요?" "음? 마법사의 탑에 텃밭 전문가가 있던가?" "메리요." "아아." 단 한마디에 캐서린은 개연성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텃밭 가꾸기 또한 엄연히 집안일 중 하나였다. 어쩐지 눈곱만한 잡초의 잡자도 안보인다 했더니 역시나 일 중독 집요정 답다고 캐서린은 수긍했다. 그나저나 빨리 자란다더니, 진짜로 어마어마하게 빨리 자라네? 카렘은 처음 얻어올 때 집게손가락보다 조금 큰 수준이었던 모종을 떠올리고는 붉은 마녀의 손가락이 맺히기까진 한참 남은 군락을 바라보았다. 카렘이 모종을 기르기 시작한 지 고작 일주일. 하지만 모종은 진작에 길이만 팔뚝만 하게 자란 상태였다. 그마저도 이른 새벽에 잠깐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자란 모습이었다. '아니지, 대나무같이 잡아당기는 것처럼 빨리 자라는 식물도 있는 마당에.' 대나무 군락에서 멋모르고 하룻밤을 보내다가 밑에서 자란 대나무 때문에 엉덩이에 꼬챙이가 되어 죽은 사람의 야사는 전생엔 책 좀 읽었다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개구리밥만 해도 번식이 아닌 증식, 침식 수준으로 수를 불리기도 하고. 그 외에 앞서 말한 두 경우처럼 자라는 식물은 얼마든지 있었다. '아니, 애초에 내가 아는 고추가 아니라 붉은 마녀의 손가락이니까 그냥 다른 것이겠지.' 고추는 붉은 마녀의 손가락처럼 불의 마력을 품지도 않았다. 만졌을 때 불타는 고통도 대부분은 느끼지 않았고. 여러 종류의 고추 맛이 다채롭게 나지도 않았다. "아무튼, 아타니타스님. 여유로워지셨다지만 이렇게 나오셔도 되는 겁니까?" "하, 내가 직접 처리할 일이 몇이나 된다고. 다 아랫선에서 끝난다." "최종 확인이랑 결재만 해도 상당하시지 않았던가요?" "그 정도야 아침, 점심, 저녁에 잠깐씩만 하면 되는 지극히 간단한 일이지." 캐서린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아이스랜드 전역에 있을 펠윈터 령의 마법 관련 서류 업무를 철야와 야근을 밥 먹듯이 했던 그녀였지만 일 처리가 늦은 적은 없었다. 적어도 카렘은 들어본 적 없었다. 그런 능력자한테 자신과 (직접 말하면 머리를 쥐어박히겠지만) 비견되는 대마법사가 하나, 그리고 그 밑에 다수의 부하 마법사가 붙었으니 일이 얼마나 쉽겠나? "그나저나 갑자기 왜 하필 불마손인거냐. 또 그 피클을 만들려고?" "음, 이번엔 피클이 목적은 아닌데요." "그러면?" "흠, 마침 일도 끝났으니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시간은-" "아까도 말했지만 내 시간은 충분하다." 고용주께서 그렇다고 하시니 카렘은 곧바로 캐서린과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주방이 아니라 그 옆에 딸린 카렘의 개인실이 목적지였다. "그래서, 뭐가 그렇게 대단하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냐?" "뜸을 들이려는 건 아니었는데 말이죠. 좀 특이하게 생긴 붉은 마녀의 손가락이에요." "특이?" 캐서린은 한쪽 눈썹을 추어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어떻게 해야 더 특이해질 수 있냐는 의문이었다. "비쩍 골은 늙은 마녀 손가락같이 생긴 그 물건이 특이해져봤자 거기서 거기 아니냐?" "알리시아님이 가지라며 주신 열매는 좀 더 짧고 오동통하던데요." "으음? 고작 그거뿐이냐?" "매운맛이 약하고 조금 단맛이 나며 향이 강합니다." 캐서린의 얼굴에 깃들어있던 기대감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그래 봤자 붉은 마녀의 손가락 아니냐." "오호. 직접 보시면 말이 달라지실 겁니다." 카렘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붉은 마녀의 손가락이 고추라면, 알리시아가 보여준 그건 피망과 비슷했으니까. 그리고 고추랑 피망은 친척이긴 하지만 완전히 다른 식물이었다. 물론 크기는 좀 작기는 했다. 아직은. 알리시아가 신기한 걸 보여준다면서 몇 알을 내밀었을 땐 카렘도 별로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좀 영양이 과다하게 주입된 크고 뚱뚱한 불마손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무려 공녀님의 선물인데 그걸 또 안 먹을 수는 없는 게 참. 알리시아는 귀신같이 거짓말을 파악했으니 먹은 척은 논외였다. 카렘은 어쩔 수 없이 먹어볼 수밖에 없었고, 개안했다. "변종? 공녀는 또 그걸, 아." "옙. 온실에서 가져왔다고 하십니다." 메리 혼자서 뒷정리를 하느라 한창 시끄러운 주방을 지나 카렘은 바로 옆 개인실로 들어갔다. 창문 너머로 흐릿한 하늘이 보이는 개인실엔 새끼 스노우러너의 솜털을 가득 넣은 푹신한 침대와 소파, 고풍스러운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었고 고풍스러운 선반과 서랍이 놓여있었다. 물만 마셔도 쑥쑥 자랄 성장기인 카렘의 체구로도 가구들은 하나같이 컸지만, 딱히 바꿀 생각까진 없었기에 카렘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잠깐 앉아계시죠.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흐응, 그런데 뭐 간식이나 이런 건 없는 게냐?" "예? 점심 직후에 과일 케이크도 드셨으면서 또?" "꼬마야. 손님을 초대했으면 그것과 관계없이 주전부리를 내와야 하는 법이지!" 오늘 캐서린이 해치운 간식은 무려 쇼트케이크. 비록 딸기는 없었지만, 각종 베리류와 시트러스 계열 과일에 갓 만든 휘핑크림을 아낌없이 넣어 만든, 카렘이 이곳에 와서 선보인 세 손가락 안에 들만한 걸작이었다. 물론 메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그걸 무려 혼자서 그 작은 몸으로 반 판이나 해치웠는데 또 먹겠다고? (나머지는 카렘과 메리가 나눠 먹었다.) 하지만 캐서린의 의지는 굳건했는지 외형에 걸맞게 탁자를 기묘한 박자로 두드리면서 간식을 어서 내오지 못할까 노래를 불렀다. 카렘은 무심코 침음성을 흘렸다. 가사나 노래나 너무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캐서린이 흥얼거리기만 해도 그림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 짜증이 났다. 에라 모르겠다. 살이나 쪄버리, 아 안 찌시는 체질이라고 했던가. 화나네. 카렘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네에. 네. 알겠습니다. 확 그냥 살이나 쪄버리시라지." "어이. 고용주한테 하는 말이 너무 심한데!" "그래서 그거 먹는다고 살이 찌십니까?" "물론 그건 아니지." "그럼 됐죠. 뭐. 여기, 아니 접시는 또 언제 꺼내놓으셨데." 아무렴 뭐 어떻겠나. 카렘은 곧바로 서랍장에 있던 아끼고 아꼈던 실험작이 든 주머니와 아직 파릇파릇하고 싱싱한 붉은 마녀의 손가락 Ver. 피망을 집어 들어 가져왔다. "자, 이게 제가 텃밭에서 말했던 그 물건입니다." "흐응, 그보다는 간식이 좀 더 궁금한데." "아니, 당신께서 궁금하시다고 하셨잖습니까." "여자의 마음은 갈대 같이 흔들리는 법이지." "그건 남자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캐서린의 마음은 완전히 돌아섰는지 탁자에 놓인 주머니를 뚫어지도록 응시하고 있었다. 곁에 변종 불마손이 놓여있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자아, 자. 그래서 오늘의 두 번째 간식은 뭐지?" "간식! 무려 두 번째! 키티는 참 아름다운 단어를 많이 아는구나!" 캐서린의 말에 매우 익숙하고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동의한다는 듯 소리쳤다. 그 순간 흠칫한 카렘은 무심코 캐서린과 눈을 마주쳤다. 캐서린 또한 그러면 그렇지라는 눈빛이었다. "꼬마야. 내가 생각하는 그거겠지?" "예. 아마 맞을 것요." 주인과 종자가 한마음으로 시선을 돌려 그대로 내렸다. 작년보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더 자랐지만, 여전히 볼살이 투실투실한 여자아이가 까치발을 들고 탁자를 올려다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알리시아 공녀님?" "이히! 그렇다! 알리시아다! 그건 그렇고 카렘! 나도 두 번째 간식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