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시디언베리의 위치는 두 개의 강과 바다가 만나는 Y자 지형의 꼭짓점. 육지 쪽에는 성벽을 쌓고 반대쪽엔 항구가 세워져 콜던의 외항으로 기능하는 도시였다. 아이스랜드에서 가장 거대한 항구라고는 해도 콜던만큼 큰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지간한 도시는 명함도 못 내밀 만큼 거대한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카렘은 외쳤다. "흐억! 맙소사! 습기!" 전생부터 카렘은 여름만 되면 습기에 초주검이 되기 일수였다. 봄의 콜던만 하더라도 끔찍했는데, 옵시디언베리는 혐오감이 일어날 정도로 습했다. 겨울의 눈이 녹고 있고 거기에 강과 바다의 습기가 바람을 타고 도시에 밀려들어 오니 당연했다. 기온이 높은 것도 아닌데 숨이 아니라 물을 호흡하는 것 같은 습기라니. 신이시여, 이게 날씨란 말입니까? 게다가 행렬이 도시에 도착하기 무섭게 카렘은 짐을 풀고 곧바로 아도비스의 사절을 맞이할 환영단의 예행연습에 참여해야 했다. 습기가 도를 넘어서 가만히 있어도 피부에 물기가 맺힐 정도였지만 대다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카렘은 예행연습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후, 연습은 이제 끝인 겁니까?" "설마. 아도비스 사절이 도착하는 날까지 매일 할 거다." "예?" 맑은 하늘의 날벼락 같은 발언. 카렘은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도비스는 아이스랜드를 반쯤 먹여 살리다시피 했으니 그런 국가의 사절을 맞이하는데 이만한 공을 들이는 것은 당연했다. 하다못해 사람이라도 좀 없었으면 한결 편했겠지만, 카렘의 바램과는 달리 옵시디언베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이 오히려 늘었다. 철새처럼 일거리를 찾아서 봄에 왔다가 가을에 떠나는 이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봄이었다. 거기서 항구 한쪽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으니 인구 밀도에서 오는 압박감은 더했다. 멀쩡해 보였던 캐서린도 습하긴 했는지 연신 부채질했다. "후. 겨울이 일찍 찾아와서 유난히 더 찌는 느낌이긴 하구나." "그거 사람이 몰려, 아니지. 원래 이 정도로 습한 건 아니란 말입니까?" "카렘 후배. 해안가라서 더 심한 감이 있는 겁니다. 게다가 사람이 이만큼 몰려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데 원래 아이스랜드의 봄은 습합니다. 적어도 여름까지는." "하이고 맙소사." 메리의 답변에 카렘은 이마를 탁 쳤다. 이제부터 이 끔찍한 습기를 매년 느껴야 한다니. 쪄 죽기보다는 더워 죽기를. 더워 죽기보단 얼어 죽기를. 그만큼 습기를 증오하는 카렘에겐 끔찍한 현실이었다. 육지로 나와 흐느적거리는 미역 같은 소년의 모습에 캐서린의 옆에 서 있던 메리가 피식 웃었다. 사절이 오기 전까지 예행 연습 말고는 두 대마법사가 할 일은 없었다. 캐서린과 올리비에가 맡은 일은 간단했다. 사절과 함께 올 상인들의 거래품의 견본을 확인하는 것. 당연히 그들이 확인할 견본은 마법과 연금술에 사용될 재료들이었다. 수입품이라지만 두 대마법사, 하물며 최고 마법 고문이 직접 확인하기엔 조금 급수가 딸리는 일이었지만, 아무렴 사람이 없으면 사장이라도 발로 뛰어서 일해야 하는 법. 그나마 날씨가 풀려 추가로 전속 계약을 맺은 마법사들이 오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며 캐서린은 한숨을 내뱉었다. "후, 윈터홈으로 돌아갈 때쯤엔 전보다 더 여유로워지겠지." "실례지만 계약자. 올리비에 공이 오셨을 때 투덜거리시다가도 일이 반으로 줄었다고 좋아하시지-" "그걸 고려해도 일이 너무 많아!" 캐서린이 빽 내질렀고 이것만큼은 올리비에도 공감하는지 진지하게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단순히 윈터홈에서 벌어지는 일만이라면 모를까, 콜던에 펠윈터 가문의 직할령에서 쏟아지는 일거리들을 생각한다면 아직은 개인적인 연구 시간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나마 민간 마법사, 모험가, 다른 귀족의 마법사를 고용하거나 빌린 덕분에 줄어들었기는 했다. 물론 정작 가장 중요하고 일이 많은 직할령과 가문 내의 일거리들은 전혀 줄어들지 않아서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빽 내지르고 속이 한결 편해졌는지 캐서린은 이마를 문지르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니지, 아니야. 그래도 이동하는 동안에도 일을 처리할 정도는 아니게 됐으니까 진정하자. 적어도 식사와 간식 시간에도 일하지 않아도 되니까." "허, 그때도 일에 치였다는 말인가?" "전속 마법사들의 공백 기간이 길어서 밀린 일을 처리해서 그나마 이 만큼인 거다. 돌아가면 또 일에 치이겠군." 그러는 사이 항구의 빈 곳에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하자 일행은 우선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처 없이 캐서린의 뒤를 따르는 동안에도 카렘은 관광객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항구이니만큼 다양한 상인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호객 행위를 벌이고 있었고, 짐꾼들이 항구, 도시에서 창고로, 혹은 그 반대로 짐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렘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신선하기 그지없는 해산물이었다. 대구와 그 친척, 볼락, 멸치, 청어같이 익숙한 물고기부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바닷고기가 가득했다. 백합과 홍합, 맛조개를 빼면 조개 쪽도 마찬가지. 카렘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요리사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아타니타스님. 저 잠시 따로 움직여도 되겠습니까?" 보더스터에서도, 콜던에서도 들어본 적 없었던 말에 캐서린은 무심코 한쪽 눈을 치켜떴지만, 이내 스스로 수긍했다. 아무렴 평상시에도 탑의 주방, 혹은 교류회에서 이것저것 실험하던 꼬마였으니 콜던에서 보기 힘들었던 각종 바닷고기에 눈이 돌아갈 법도 한가? "음? 흠. 그래. 해가 지기 전까지는 돌아와라. 돈은 충분하겠지?" "옙." "혹시 모르니 메리를 붙여주도록 하지. 비용은 부족하면 청구하도록." 허락까지 떨어졌으니 더 그를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마땅찮은 표정을 지은 메리를 대동한 카렘은 곧바로 눈여겨보았던 가게로 척척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보는 해산물과 처음 보는 해산물에 호기심과 손이 근질거렸지만, 카렘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거리고 냉정한 머리로 매대의 상품을 관찰했다. "꼬마야. 심부름을 온 거냐? 뭐 찾는 거라도?" "일단 둘러 보겠습니다." 멀리서 봤을때는 몰랐지만, 가까이서 관찰하니 알 수 있었다. 신선한 생물과 육지로 나온 지 제법 시간이 된 물건들이 섞여 있는 것을. 그 증거로 눈동자가 또렷한 생선 사이에 유난히 비린내가 강한 눈이 죽은 생선이 섞여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생선의 내장은 진작에 발라 놓은 것인지 하나같이 배와 멱, 아가미를 따 놓았다는 것. 일단은 익숙한 것들을 목표로 할까? "오늘 들어온 홍합과 백합의 질이 좋은데. 이건 어떠십니까?" "확실히 그렇네요. 손댄 그거 말고 그 옆에 있는 것으로 주시죠. 그리고 맛조개도 바구니만큼. 거기에 대구랑 볼락도 주시죠." "물론입니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권하려던 매장 주인도 카렘이 냉정한 눈빛으로 프로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아는 사람의 손길로 관찰하는 것에 재빨리 강매하려는 마음을 버렸다. 거기에 소년과 뒤에 선 왠지 모르게 사람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은 시녀의 복식 재질. 어린 나이와는 달리 거침없는 태도로 돈을 쓰는 것에 매장 주인은 슬쩍 물었다. "안쪽에 귀한 물건이 하나 있는데." "음? 귀한 물건이요?" "여기서는 보여줄 수 없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네. 일행이랑 같이 가도 상관없겠죠?" 그 말에 카렘은 엄지손가락으로 뒤쪽에 묵묵히 서 있는 메리를 가리켰다. 상관없다며 매장을 직원에게 맡긴 주인은 곧바로 선물의 안쪽으로 소년을 안내했다. 주인을 따라 들어간 건물 안에는 건어물을 취급하는지 하나같이 바짝 훈제하거나 말린 생선. 주로 청어같이 생긴 물건들로 가득했다. 카운터의 안쪽 밑에서 상자를 꺼낸 주인은 곧바로 확인해보라는 듯이 뚜껑을 열었다. 안에 들어있는 것은 몸통만 해도 어지간한 성인 머리보다 인상적인 게였다. 하나 만으로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는 커다란 두 집게와 몸에 한껏 오므린 짧지만 도톰한 뾰족한 다리와 얼핏 썩은 나무처럼 보이는 빛깔의 껍데기를 뒤덮은 따개비. 짧은 더듬이와 양옆으로 눕듯이 자라있는 타원형의 눈이 천천히 움직이는 인상적인 게가 두껍고 어둡고 두꺼운 천 같은 미역에 둘러싸여 있었다. 카렘은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크기에 비해 그다지 먹음직스러운 비주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메리는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이건 보물게로군요." "메리. 아는 물건입니까?" "아주 가끔 보물 상자를 발견하는 모험가처럼 바다에 나간 어부들의 그물에 드물게 잡히는 게입니다. 귀한 어물이라 돈 좀 있는 사람들이 구하지 못해서 안달이 났죠." 이채를 발하던 메리가 이번엔 미심쩍은 눈빛으로 주인을 응시했다. "그런데 뒤가 구린 물건이 아닙니까?" "어휴, 아닙니다! 옷차림만 봐도 지체 높으신 분을 모시는 두 분한테 그런 수상한 물건을 팔 리가 있겠습니까?" 카렘과 메리가 누구를 모시는지는 매장 주인도 알 바가 없었지만, 일단 범상치 않은 복식의 재질부터 대충이나마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카렘은 그렇다고 쳐도 묘한 아우라까지 뿜어내는 메리가 압박하자 주인은 사정을 모두 토해냈다. "원래 이걸 먼저 예약한 귀족분이 있었는데 인수날짜인 어제 당일에 갑자기 일방적으로 주문을 취소하셨지 뭡니까? 구매자를 못 구할 것도 없지만 그 전에 보물게가 상해버리면 적자라 사정을 좀 봐주십쇼!" 해산물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신선함. 아무리 맛있게 조리하더라도 다른 요리들과는 달리 유난히 신선도를 따지는 것이 바로 해산물이었다. 카렘은 잠시 보물게에 머리를 처박을 기세로 냄새를 맡았다. 다행히 주인이 보인 보물게는 아직 움직이는 더듬이와 눈처럼 매우 신선한지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다. 카렘은 주인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짐작했다. 지금의 아이스랜드는 건조하고 추운 겨울이 아니었다. 습하다 못해 습기로 무겁기 짝이 없는 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날씨가 쌀쌀하다는 것이었지만, 부패하기 시작하면 그대로 적자이고 메리의 말에 따르면 그 비용도 상당할 테니 초조해하는 것이 당연했다. "가격은 얼마입니까?" "딱 40실링! 적자만 면하게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흐음." 카렘은 잠시 간을 보듯이 침음성을 흘리며 팔짱을 꼈다. 실상은 감을 잡을 수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다. 직접 돈을 주고 재료를 구할 일이 없다 보니 도무지 이게 비싼 것인지 아닌지 원 참. 그때, 옆에서 찌르는 시선이 느껴져 눈만 대굴 굴려 응시했다. 메리가 뚫어지게 소리 없이 의지를 보내고 있었다. '카렘 후배. 들리십니까. 카렘 후배. 들린다면 망설임은 버리는 겁니다.' '네. 메리. 들립니다.' '고민하지 말고 당장 사는 겁니다. 카렘 후배. 들리십니까. 이건 못 먹으면 슬라임만도 못한 머리로 길이길이 박제될 겁니다.' 그리고 슬라임은 뇌가 없었다. 카렘은 그 사실에 고민을 집어치웠다. "좋습니다. 바로 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만큼이나 샀는데. 하나만 요구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밖에서 구매하신 것들을 할인, 아니지. 무료로 드릴까요?" 주인은 기쁨을 숨기지 않고 진지하게 제안했다. 자리만 차지하고 마음을 떨리게 만든 고가품을 치워버릴 수 있었으니 당연히 생선 몇 마리, 조개 얼마 정도는 서비스로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카렘은 고개를 단호하게 젓고 상자를 짚었다. "무료는 됐고, 말린 멸치 있습니까?" "예? 아, 물론입니다. 그런데 귀하신 분에겐 그냥 말린 것보다는 훈연한 것이-." "말린 멸치랑 이게 있으면 좀 주십쇼." "어, 예? 보물게를 말입니까?" "아뇨. 그걸 감싼 이거." 카렘은 조금 전에 구입한 물품을 감싼 검은 해조류. 형태도 냄새도 빛깔도 분명 다시마가 틀림없었다. "어, 미역을 말입니까? 이걸 왜...?" “말린 물건이면 더 좋고요.” “혹시 싸구려 불쏘시개가 필요하십니까?” 주인장은 진심으로 당황했고, 메리도 당황했다. 장작도 많은데 불쏘시개로 쓰는 저걸 왜 구한단 말인가? 하지만 카렘은 진지했다. ‘이 사람들이 미쳤나. 이만큼 질 좋은 다시마를 불쏘시개로 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