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를 감싸던 뚜껑이 차례대로 열리자 훈훈한 온기가 감돌던 식당의 공기가 변했다. "비트 칩과 버터에 볶은 채소, 볶은 햄을 넣은 구름 오믈렛, 다섯 가지 버섯을 넣은 크림 파스타, 미트 파이, 웰링턴 스테이크입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만큼이나 준비했다고?"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음." 코스 요리가 등장한 시기는 중세의 끝자락. 보통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르는 때. 그렇기에 판타지라고는 하나 아직 중세에 머무르고 있는 에우로파 대륙은 요리를 되도록 한꺼번에 식탁에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차라리 음식과 음식 사이에 시간이 충분한 코스 식이었다면 모를까. 안 그래도 시간이 부족한데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떠올리느라 웰링턴 스테이크와 고기 파이를 빼고는 날치기로 해치우는 수밖에. 이마저도 메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카렘은 대놓고 캐서린에게 푸념했고 캐서린도 이를 알았기에 수고했다며 칭찬하는 수밖에 없었다. 손님을 앞에 두고도 카렘이 캐서린과 투덕거리는 사이, 고드윈과 빅토르는 눈만 끔뻑거리며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요리가 담긴 접시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빅토르." "무엇입니까. 고드윈 공자님." "여기 요리들. 아는 것이 있나?" "저기 있는 고기 파이랑 큰 빵 덩어리랑 오믈렛으로 보이는 것 말고는 도통 모르겠군요. 같이 나온 소스도 머스터드 말고는 모르겠습니다." "이봐. 자네는 나보다 경험도 나이도 더 많지 않나." "그런데도 모르겠다고 하는 겁니다. 도련님." "허, 전 에우로파를 진동시킨 밀수업자였던 자네가 말인가?" 고드윈은 놀리듯이 말했다. 하지만 빅토르가 진지하게 긍정하자 깜짝 놀랐다. 고드윈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선대 아이스랜드 공작에게 발탁되기 전까지 빅토르가 마약과 사람을 뺀 모든 것을 사고 팔았다는 것은 아는 사람들은 전부 아는 경력이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를 밀수왕이라고 불렀다. 누구는 그를 보며 감탄했고 누구는 경멸했다. 그리고 밀수왕의 주된 고객은 각 나라의 권력자. 즉 부농과 대상, 귀족과 왕족. 덕분에 고객들에게 온갖 산해진미를 대접 받았다. 그런데 대체 이것들은 뭐지? “파스타가 세르비아누스 쪽 요리라고 했었지?” "예. 확실합니다. 다만 생김새는 전혀 다른 물건들이로군요." "음, 일단 직접 물어보는 게 제일 빠르겠지. 어이! 꼬마 요리사!" 고드윈의 부름에 캐서린과 투덕거리고 있던 카렘이 퍼뜩 고개를 들고 잽싸게 달려왔다. 손님을 앞에 두고 말다툼이라니. 불찰이었다. "네. 펠윈터 공자님." "이 성에 펠윈터가 몇 명인데. 그냥 고드윈이라 부르라고. 그나저나 처음 보는 음식들이 많군. 대체 뭐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되는데." "파스타와 스테이크부터 드시면 됩니다." 다른 음식들은 식어도 먹을 만했다. 하지만 파스타는 시간이 지나면 불고 식었다. 웰링턴 스테이크도 마찬가지. 겉을 감싼 바삭한 빵은 뻣뻣해지고 속의 고기는 질겨지기 마련이었다. 마침 어떻게 먹는 지는 메리가 수행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고드윈과 빅토르도 능숙하게 따라 했다. 그리고 포크에 소스와 함께 말린 파스타가 입에 들어가자 두 눈을 크게 떴다. 폭발적인 버섯의 향기를 감싸는 부드럽게 감싸는 크림의 맛. 좀 더 음미하기도 전에 기다란 면발은 순식간에 목구멍 속으로 넘어가 버렸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맛에 아쉬움이 입안을 감돌았다. 두 손님의 파스타 접시가 반쯤 비자 카렘은 곧바로 웰링턴 스테이크를 썰었다. 그저 빵 덩어리로만 보인 그것의 단면이 드러났다. 큼지막한 조각을 받은 빅토르는 작게 감탄했다. 조각을 자르자 과연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을 감싼 버터 향이 가득한 빵과 속을 가득 채운 다진 버섯의 폭발적인 향과 어우러지는 진한 소고기 안심의 육향. 그냥 큼지막한 파이로 생각한 것이 미안했을 따름이었다. 연륜과 경험이 많은 빅토르가 받는 감동이 이럴텐데. 둘 모두 빅토르보다 적은 고드윈이 받는 감동은 더했다. 순식간에 파스타를 먹어치우고 웰링턴 스테이크를 두 장째 먹는 고드윈이 감탄했다. "이 끝에서 느껴지는 산미는 머스터드로군." "느끼할 수도 있으니 고기의 겉면에 발랐습니다." "하." 요리가 맛없기로 유명한 세오폰 왕국은 역설적으로 고기구이가 제일 발달한 곳으로도 유명했다. 그런 왕국에서도 스테이크란 겉에 허브와 버터를 발라 굽는 것이 일반적인데 겨자를 발랐다니. 거기에 그레이비 소스가 어우러지자 고소함과 산미가 톱날처럼 혀를 치고 진정시키기를 반복했다. 식기로 자르는 감각조차 없이 갈라지는 오믈렛은 어떠한가. 빅토르와 고드윈은 오믈렛이 도무지 달걀로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입안에 넣고 맛을 보았을 때 더더욱. 간혹 보이는 맑은 하늘의 구름을 떼어서 구우면 식감이 이러할까 싶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볶은 햄과 같이 느껴지는 달걀의 고소한 맛이 아니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알리시아가 탐을 내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때 고드윈의 눈에 이건 뭔가 싶은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카렘. 이 소스는 뭐지?" "소스 말입니까?" "그래. 맨 왼쪽은 머스터드와 그레이비는 알겠는데. 나머지 두 개는 모르겠군." "노란 소스는 허니 머스터드, 하얀 건 마요네즈입니다." "흐음." 오믈렛이 고소하고 짭짤하지만 조금 심심했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고드윈은 곧바로 익숙한 머스터드가 아니라 나머지 둘을 조금 덜었다. 오믈렛을 찍어 먹었고, 주변의 시간이 늘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처음 맛보는, 혀에 닿자마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울리는 저릿저릿한 진하고 기름진 맛과 산미는 혹독한 추위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스랜드 사람이라면 모두 유혹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빅토르는 소스가 아니라 카렘에게 전율하고 있었다. 허니 머스타드와 마요네즈가 취향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척이나 훌륭했다. 그가 전율하고 있는 것은 카렘의 나이였다. 빅토르는 자신할 수 있었다. 대륙 전부는 아니어도 미식의 반은 먹어보았다고. 미식의 경험만 따지자면 세오폰의 공작들보다 자신 있는 그는 장담할 수 있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은 많지만. 소스를 다룰 자격이 있는 사람은 한 손에 꼽았다. 하물며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꼬마가 새로운 소스를 개발했다니. 그건 요리에 인생을 바친 늙은 요리사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카렘은 케첩을 대신해 급히 땜빵으로 내놓았을 뿐. 전생의 기억을 재현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카렘이 생각하는 것보다 마요네즈의 파급력과 영향력은 강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 요리에서 마요네즈가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하면 더더욱. 일단 빅토르는 지금 당장은 요리에 집중하기로 했다. 안 그러면 그가 모시는 도련님이 식탁의 요리를 모조리 먹어치울 기세였으니까. 그리고 이를 지켜보고 있던 카렘은 안도했다. 급한 나머지 디저트를 빼먹었다는 것을 지금 눈치채고 아차 했지만, 다행히 손님들은 지금으로도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다만 캐서린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카렘을 불렀다. "꼬마. 결국, 저질러버렸구나." "예? 손님이 좋아하면 좋은 거 아닙니까?" "그래도 결과가 너무 과하다." "예?" 캐서린은 메리가 건넨 마요네즈에 찍은 비트 칩을 씹어 삼키고 손가락으로 온갖 물건에 마요네즈를 발라먹기 시작한 빅토르와 고드윈을 가리켰다. 그리고 카렘도 그녀가 말하는 것은 눈치챘다. "넌 지금 알리시아 공녀 같은 사람을 두 명 늘렸다." "그 정도입니까?" "당연하지. 음. 체감이 안 되냐?" “어, 일단 맛있게 드셔서 다행이긴 합니다?” 당연히 카렘은 체감이 되지 않았다. 아니, 다른 요리들은 그냥 캐서린같은 반응이었는데. 마요네즈에 저렇게 눈깔을 뒤집고 반응한다니? 그렇지만 카렘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 비교적 요리가 덜 발달한 중세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비슷한 음식들은 있었다. 오믈렛도 있었고, 파스타도 있었고, 웰링턴 스테이크도 덩어리라서 그렇지 따지고 보면 파이의 한 형태였다. 그렇지만 마요네즈. 마요네즈와 그에서 비롯된 허니 머스타드만큼은 달랐다. 그 어디에서도 선보인 적 없는 맛과 질감의 소스. 술을 베이스로 하거나 새콤달콤한 과일 소스, 느끼하고 고소한 버터 소스와 육즙을 졸인 그레이비 소스가 전부였던 중세 시대에 등장한 18세기의 소스는 그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쉽게 비유하자면 북유럽-러시아 사람에게 마요네즈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다만 당장 그렇게 연관이 지어지지 않았던 카렘은 그저 그런가 보다 할 뿐이었고 그게 캐서린을 조금 열받게 했다. 한동안 식사에만 집중하던 고드윈은 잠시 식기를 내려놓고 들뜬 표정으로 캐서린에게 말을 걸었다. "아타니타스. 대체 이런 요리사는 어디서 구한 겁니까?" "킹스랜드에서 아이스랜드로 오다가 우연히 주웠다고 하면 믿겠나?" "거짓말하지 마시죠. 실력만 보면 왕궁 주방장이라고 해도 믿기 힘들 정도인데." "하지만 정말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잠시 카렘과 눈을 마주친 캐서린은 그때 상황을 설명했다. 딱히 숨길 내용도 아니었다. 아이스랜드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도망쳐왔으니까. 당장에 고드윈의 수행원으로 따라온 빅토르부터가 아이스랜드로 도망쳤다가 귀족이 된 대명사였다. "허, 농노라니." "내가 꼬마를 주웠을 때의 마음이 딱 그 마음이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군요." "자기가 요리에 천재적이라서 그렇다고 하더군." 그 말에 고드윈과 빅토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카렘을 쳐다보았다. 어이없다는 시선에 카렘이 할 행동은 하나뿐이었다. 카렘은 뭐 어떠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것저것 설명하기도 귀찮은데 그냥 천재라고 착각하라지. 그리고 빅토르와 고드윈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이후로 완전히 까먹고 있었던 미트 파이를 뺀 나머지는 하나같이 처음이거나 처음 보는 형태의 요리들뿐이었다. 무엇보다 마요네즈라는 소스는 카렘의 나이를 생각하면 천재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오랜 역사에 어린 나이에도 두각을 드러낸 천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마요네즈의 여운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빅토르가 눈가를 주물렀다. "천재라. 하긴 당장 아타니타스공만 하더라도 천재의 대표주자이니 말은 됩니다. 허, 저 어린 나이에 이만한 요리라니." "이 정도면 윈터센드(Winter-Ascend)때 번제자를 해도 되겠는데?" "확실히 이만한 실력이면 자격이 충분하겠군요." 윈터센드? 번제자? 뭐 제물을 바치기라도 하나? 그게 뭐냐고 카렘이 묻기도 전에 내 요리사가 어떠냐는 듯 자랑하던 캐서린이 반박했다. "아니, 번제자의 자격은 세 명의 추천인...." "나와 알리시아, 그리고 그대까지 포함하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아타니타스." "공을 포함하면 세 명. 숫자는 딱 되겠군요." "....진짜로 되겠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손을 내저으려던 그녀는 고드윈과 빅토르의 말이 이어질수록 혹한 기색을 보였다. 아니 윈터센드고 나발이고 간에. "윈터센드가 뭔데 제물을 바친다는 겁니까?" "아, 거기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자료첨부*** -비트칩- -버섯 크림 파스타- -구름 오믈렛(수플레 오믈렛)- -웰링턴 스테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