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은 그 자체만으로도 피곤하다고 했던가. 수레는 부산물로 그득하고, 피로감으로 그득한 탓인지 토벌대는 드라이우드 마을로 향하던 때보다 속도가 느렸다. "생각보다 돌아가는 건 오래 걸리네요." "빈 수레에 아이스웜 부산물을 잔뜩 실어 놨으니까 당연합니다." "그 대답도 세 번째네요." 사람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말이 있다. 허나 수다도 계속되면 소재가 떨어지는 법이었다. 하물며 캐서린은 성에서 들고 온 일거리에 치이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지금까지. 마차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캐서린은 들고 있던 양피지에 점을 찍었다. 실수라도 할까 조심스럽게 잉크통을 밀봉하고 깃펜을 내려놓고 소리쳤다. "망할! 드디어! 끝냈다! 이건 사기야!" 해방감, 성취감, 희열이 같이 느껴지는 환호성. 소리만 들어도 카렘은 캐서린의 감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야 토벌대가 귀환하는 그 순간부터 피로감에 절어 음영이 져 있던 얼굴에 한 줄기의 햇살 같은 미소가 깃들어있으면 누가 모를까. "망할 것을 끝냈다!" "아타니타스님. 그러면 일거리에서 완전히 해방된 건가요?" "그래! 아니, 완전히는 아니로군. 인력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니까. 후우, 내가 이런 잡스러운 일까지 도맡아 해야 한다니." 그야 당연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처리한 일들은 전속 마법사들이 부재한 동안에 쌓인 일거리들이었고, 인력이 부족한 것은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은 안심해도 되겠지. 성에서 자리를 비운 동안 쌓인 업무가 있겠지만, 지금까지 처리한 업무에 비한다면 고작 그건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나저나 작은 동산같이 쌓였군요." "계약자. 정리하면 되겠습니까?" 여운을 느끼는 듯 의자에 늘어진 캐서린은 손을 내저었다. 그 귀찮기 짝이 없는 손동작을 본 메리는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일거리에 치여 죽는 주인과는 달리, 종자는 일거리가 없어 지루함에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아타니타스님." "후, 별일 아니면 묻지 말아라. 지금 이 여유의 여운을 느끼고 싶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요. 뭔가 씹을 거리라도 필요하십니까?" "마침 출출했는데. 잘 됐구나." 보관함에는 아직 간식거리가 조금 남아 있었다. 카렘이 곧바로 견과류와 적당히 자른 치즈를 작은 그릇에 덜어 내밀자 캐서린은 눈을 감은 채 메리가 건네는 간식을 받아 먹었다. 오독-오도독- "음, 속도가 느려도 오늘 안에는 성에 도착할 수 있겠군." "그걸 다 계산하실 수 있는 겁니까?" "그야 물론. 여행한 세월이 세월이니 말이다." 캐서린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긴, 내비게이션은커녕 정확한 지도와 시계도 없던 중세 시대에도 시간을 현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철저하게 지키는 이들은 있었다. 상인이라던가. 별의 위치, 지형지물을 기억하고 오가는 사람의 경험이 합쳐지면 거리를 계산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나저나, 곧 있으면 점심이로군. 식사는 설마 또 아이스웜인가?" "그야 지금 당장 있는 게 그거 아니면 올 때 먹었던 것들뿐인걸요?" "흐음-" 캐서린은 불만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이것만큼은 카렘도 정말 어찌할 수 없었다. 아니 그야 진작에 뭐라도 들었으면 이것저것 바리바리 준비했을 텐데, 그럴 시간도 없이 토벌대에 끌려오느라 기초 양념이나마 챙겨온 것이 다행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렇게 많이 써먹지도 못했지만. "그나마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딥니까?" "정말로 어떻게 안 되겠냐?" "일단 멈추기라도 하면 뭔가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토벌대가 드라이우드를 뜬 이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지." 휴식 없이 행군이라니. 반란 일어나기 딱 좋은 소리였다. 다만 이유가 있었다. 겨울이 평소보다 이르게 찾아왔는데, 시간이 지체됐다가 본격적으로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면 복귀 이전에 고립이 되리란 건 뻔했다. 무엇보다 올 때와는 다르게 수레는 아이스웜 부산물로 가득했다. 부산물을 버리면 속도야 빨라지겠지만 그럴 수야 있겠나. 그렇다면 행군 시간으로 벌충해야 하는 상황. 불만이 가득할 이들도 이를 알기에 입으로는 욕을 내뱉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튀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카렘 탓에 인내심이 미각 타락해버린 캐서린이 머리를 헝클었다. "하! 이럴 줄 알았으면 마법 도구를 좀 챙겨올 것을." * * * 그래도 덕분에 토벌대는 콜던에 도착했다. 토벌대가 해산하고, 결산하는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지만, 캐서린은 알 바 아니라는 듯이 공적과 함께 대부분의 일을 훌훌 털어내고는 오랜 구속 끝에 자유를 만끽하는 동물처럼 거침없이 마법사의 탑으로 복귀했다. 토벌대가 도착한 시간은 늦은 저녁. 오는 길에 대충이나마 먹었던 저녁밥은 진작에 뱃속에서 꺼졌고, 윈터홈의 저녁 연회는 종료한 지 오래였다. 그렇지만 캐서린은 배가 고팠다. 그건 메리도 마찬가지였으며 카렘도 같은 생각이었다. 배고픈 카렘은 고용주에게 제안했다. "모두 같은 마음인 것 같은데, 다 같이 뭐라도 하나 가볍게 먹는 게 어떠신지?" "이렇게나 늦은 시간에 말이냐?" 말로는 아닌 척하지만, 목소리에서 들뜬 기색을 지적할까 싶었지만, 카렘은 캐서린의 위엄을 위해서라도 모른척하기로 했다. "네. 그런 의미에서 메리." "카렘 후배?" "좀 도와주시겠어요?" 만장일치로 모두가 동의하자 카렘은 곧바로 식료품 보관고에 들러 식재료를 한 아름 들고 메리에게 떠맡겼다. 이런 사소한 일이라도 잊지 않고 자신을 시킨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는 메리는 딱히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저녁, 아니 야식 메뉴. 그리고 카렘은 윈터홈의 대문에서 마법사의 탑까지 오는 동안 진작에 메뉴를 정한 상태였다. "마늘은 있고, 밀가루, 달걀도 있고 올리브오일도 아직 남아있고-" "카렘 후배. 뭐 더 챙길 거 있습니까?" "아, 이 치즈도 챙기죠. 냄새는 딱 맞는데,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파르마 치즈로군요." 야식이라면 모름지기 면을 먹어야 하는 법. 카렘은 그 생각을 하자마자 맹렬하게 라면이 땅겼다. 매콤한 국물과 혀뿌리를 자극하는 감칠맛.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그런 매콤한 라면이 있을 리가. 다만 양식 재료는 충분히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파스타나 후루룩 말아버리는 수밖에. 하물며 이름도 비슷한데 형태와 향, 맛도 같은 치즈를 발견했으니 이건 신의 계시나 마찬가지였다. * * * 맑은 하늘을 손에 꼽을 정도로 보기 힘든 세오폰 왕국이지만, 간만에 달과 별 무리가 보일 만큼 하늘이 맑게 개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에 고요하기 짝이 없는 식당에서 턱을 괴고 탁자를 두드리던 캐서린은 돌연 진하게 풍기기 시작하는 냄새에 움찔거렸다. 각기 두 종류의 냄새가 흘렀다. 코끝을 알싸하게 감도는 향의 정체는 분명 마늘. 코 뒤에서 약간의 산미와 함께 은은하게 감도는 올리브오일의 냄새. 둘 다 그녀에겐 익숙한 식재료였으나, 도대체 무엇을 만들길래 이 만큼이나 냄새가 진동하는지 호기심이 잔뜩 피어오르는 그때. 쟁반을 든 메리와 함께 카렘이 식당에 들어섰다. "꼬마야. 대체 뭘 만들었길래 이리 마늘 냄새가..." "우선 직접 보시는 게 빠르실걸요." "아니 대체 마늘을 얼마나 넣은 거냐!?" "20알 정도?" "맙소사." 마늘에 미쳤다는 한국인과는 달리 일반적으로 서양 요리에서 마늘이란 한 알, 혹은 반 알만 넣어도 많았고 한 번 문지르고 버리는 예도 있었다. 메리는 곧바로 폭발적인 마늘 향의 주인공이 담긴 접시를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캐서린의 앞에 놓았다. 커다란 접시에 담긴 음식은. 그녀로서도 본 적이 없는 형태였다. 접시에 담긴 노란색의 굵은 머리카락 같은 음식은 마늘과 가루를 낸 치즈에 범벅이 되어 후추가 알알이 박혀있었다. "이, 거의 이름은?" "알리오 올리오(alio olio)입니다." "아니, 마늘이랑 올리브오일이 들어간 건 알겠다만." "네. 이거 이름이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에요." 그 말을 듣자 캐서린은 음식의 이름이 그것인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치즈 가루를 이만큼이나 올렸는데도 마늘과 올리브오일 냄새가 진동했다. 캐서린과 메리의 머릿속에 같은 고민이 불쑥 솟아올랐다. 대체 이 물건은 어떻게 먹는 물건이란 말인가. 구불구불한 생김새와 우선 포크를 같이 내온 것을 생각한다면 우선 손으로 먹는 물건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 전에 파스타? 이렇게 생긴 파스타는 듣도 보도 못했는데. 그녀의 고민을 알아차린 듯, 카렘은 곧바로 포크로 익숙하다는 듯이 자기 앞에 놓인 면발을 후루룩 말았다. "메리, 이렇게 포크로 한입 크기로 말면 돼요." "음, 요령을 몰라도 간단하군요." 메리는 곧바로 캐서린의 작은 입 크기에 맞춰 파스타를 말아 내밀었다. 강렬한 마늘 향에 주춤거렸다. 그야 이렇게나 마늘 향이 강렬한데 한국인이 아니고서야 망설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동안 카렘이 그녀를 실망하게 한 적은 없었으니 캐서린은 눈을 딱 감고 파스타를 받아먹었다. 향만큼이나 알싸함도 강했지만 그건 처음뿐. 뒤이은 파르마 치즈의 향이 알싸함을 억누르는 폭발적인 고소함이 입안을 감돌다가 질릴 때쯤 올리브오일의 산미와 후추의 매콤함이 이를 바로잡았다. "으음? 음?" "생각했던 것관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 정말 많이 다르긴 하군. 마늘에 가려져서 그렇지 확실히 파르마 치즈의 고소함이 올리브오일에 극대화되고, 느끼함은 후추로 잡은 거로군. 이 크림 같은 질감은..." "파스타 삶은 물을 기름에 섞어 유화시켰습니다." 과연 캐서린은 요리를 해주는 보람이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크러쉬드 레드페퍼가 없어서 후추를 뿌리기는 했지만. 카렘이 노리는 대로였다. "그나저나 이런 형태의 파스타는 처음 보는데. 길쭉길쭉한데. 이름은?" "어, 딱히 생각한 이름은 없는데요." "그래서는 안 되지." 물론 이런 면발 파스타의 이름은 카렘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스파게티라는 지극히 보편적이고 널리 알려진 이름이. 하지만 캐서린의 반응을 보면 적어도 이런 형태의 파스타가 처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에 카렘은 재빠르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했다. 이리저리 고민하던 캐서린은 손가락을 튕겼다. "파스타는 세르비아누스 왕국의 음식이니 이름도 그쪽이 어울리겠군. 기다란 모양이 밧줄(spago)같지만, 그보다는 작고(spaghetto) 여러 다발이니 스파게티(spaghetti)가 딱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지? 메리?" "길게 고민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럴듯한 이름을." "그야 마법을 개발하고 마법 도구를 만들다 보면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는 건 중요하니까 당연하지. 꼬마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어, 어감이 입에 착착 달라붙네요." 본래 음식의 이름은 겉모습과 유래에 따라 달라지는 법. 소동파가 만든 고기 요리이니 동파육이라고 불렸고, 콜라나무를 넣어서 콜라라고 부르는 탄산음료의 대명사가 그러했다. 그런 것을 고려했을 때 캐서린의 작명은 빠르기는 했지만, 매우 적절했다. "그나저나 이만한 양의 마늘에 기름, 치즈까지. 분명 무겁기는 한데 굉장히 거부감없이 잘 넘어가는군. 신기할 정도로 말이지." "일단 길쭉길쭉하기도 하니까 잘 넘어가는 거죠." "그나저나 더 먹고 싶은데." "...이거 한 접시 더 드시면 분명히 살이 찌실걸요." 카렘은 질린 기색으로 말했지만, 캐서린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하, 나는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라서 말이다." "오, 계약자도 그렇습니까?" 카렘은 정색했다. "...그거 절대로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하지는 마시죠." 여자, 아니면 다른 귀족이 들었다가 무슨 해코지를 당할라. 무엇보다 남자라지만 부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카렘은 속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접시를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자료첨부*** -알리오 올리오- 챗GPT가 그려준 그림입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