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벌대에 참가한 대부분은 아이스랜드 토박이 인지라. 다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첫눈은 겨울의 징조. 토벌대에게 주어진 시간은 촉박했다. 그나마 첫눈은 진작에 그쳤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다만 겨울이니 언제고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할지 모르는 상황. "후, 좋아.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군요." 눈이 쌓인 덕분에 형성된 고지대. 현장을 내려다보던 캐서린은 조릭이 푸념하듯이 뱉은 한숨을 들었다. "주어진 시간이 짧긴 했지만, 용케도 여기까지 준비할 수 있었군." "흔하디흔한 대규모 토벌 준비일 뿐입니다." "글쎄." 캐서린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토벌대 드라이우드에 도착해 야영지를 꾸리고, 행군의 피로를 푸는 사이 책임자인 조릭이 부관들을 끌고 주변을 조사,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3일이었다. 미리 계획을 세워뒀던 것이 아니라면. 조릭은 캐서린의 보고를 듣자마자 대략적인 로드맵을 모두 머릿속에 구축했다는 뜻이었다. 캐서린이 생각하기에 조릭의 저건 기사가 되긴 했지만, 아직 이전의 태도를 버리지 못한 것에서 오는 겸손일 뿐이었다. 귀족 출신이었다면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뽐내기에 바빴을 것이 분명했다. "겸손으로 낮추기엔 사람 다루는 솜씨가 대단하던데." "아이스랜드에선 대규모 토벌이 일상입니다. 모든 기사는 아니더라도 많은 기사가 토벌을 지휘한 경험이 있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저런 태도라면 그냥 천성이 그런 것일지도. 캐서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휘부로 사용하기 위해 쌓아 올린 눈 언덕에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방패와 장창으로 울타리를 포위하고 있는 병사와 하마 기사들. 그 뒤로 각기 조를 짠 사냥꾼과 모험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 언덕의 옆에서 돌진과 혹시 토벌대가 후퇴해야 할 때를 대비해 준비 중인 기병대. 그리고 이 모든 이들이 바라보고 있는 중앙. 메에에에에~! 메에에! 바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울타리 안에는 털을 모조리 깎고 마법진이 그려진 양들이 추위에 떨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행히 마법진은 잘 작동하고 있는 것 같군."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 그게 보입니까?" "저기 은은하게 연둣빛으로 빛나는 거 보이나?" "잘 보입니다." "그게 아직 작동하고 있단 뜻이지. 물론 그게 아니라도 감지할 수 있지만." 캐서린이 조릭과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토벌대의 대부분은 긴장하며 오들오들떠는 양들을 뚫어지도록 응시하고 있었다. 진동, 정도 이상의 소음. 조릭이 토벌대 전체에게 신신당부한 주의점이었다. 진동과 소음에 주의한답시고 긴장한 나머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과한 긴장은 실수를 유발하는 법. 다행히 소리 없이 작은 소리로 속닥이거나, 서로 툭툭거리며 장난을 치거나, 몸짓으로 대화를 나누는 꼴을 보면 그럴 걱정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해는 어느덧 머리 위로 떠올랐다. 긴장도 오랫동안 유지하면 무뎌지기 마련. 생명체의 가장 큰 적이자 약점인 지루함이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기 시작하고, 조금은 안심한 사람들이 몸짓이 아니라 작게 말하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바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악!!! 메에에에에~ 메에에에에~ "하아아아암.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군." 특히나 남들보다 오래 사는 캐서린에게 지루함이란 독약이나 마찬가지였다. 더불어 양에 마법진을 새기느라 철야를 한 덕택인지 눈꺼풀에 모루를 매단 그것처럼 무거웠다. 캐서린만큼은 아니지만, 지휘부에 있던 부관과 종자, 전령들도 마찬가지였다. 졸림이 묻어나는 캐서린의 하품에 조릭도 팔짱을 꼈다. "글쎄요. 일단 조금 더...음?" "조릭 경?" "잠깐." -가 고개를 울타리 쪽으로 돌렸다. 아니, 그보다 더 뒤에 있는 숲을 향해. 미약하지만 일정한 박자감이 느껴지는 진동. 얼핏 질주하는 말 무리와 같은 여러 개의 다리가 움직이는 느낌은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한 지진 같은 것이 아니었다. 지휘부에 있던 조릭만이 느낀 것이 아니었다. 울타리를 포위한 병사와 모험가 일부, 사냥꾼과 기사들 대부분이 조릭과 같은 것을 공유했다. 이렇게 대놓고 함정을 꾸렸는데, 이런 진동이 느껴진다면 답은 하나였다. 한발 먼저 눈치챈 이들이 긴장이 풀어진 이들을 다그쳤다. 두두두두두- 두두두-! 토벌대가 소리 없이 태세를 재정비하는 사이, 진동은 점차 커져 집중하지 않아도 귀에 들릴 정도로 커졌다. 땅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숨길 수 없는 진동도 마찬가지. 바아아아아악! 바아아아아아악! 앞서 상황을 설명받은 이들과는 달리 난데없이 끌려와 상황을 파악할 수 없는 양들은 본능적으로 위기 상황이라는 것을 파악하고는 울타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발악했다. 그리고 진동을 일으키는 원인은 먹잇감이 도망갈세라 더욱 빨리 움직였고 그만큼 진동은 더 강렬하게 울렸다. 그리고 갑자기 진동이 끊겼다. 꿀꺽. 옆에 선 사람이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 고요했다. 이른 겨울의 세찬 칼바람이 눈 바닥과 앤틀러 숲을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다행히 미끼가 통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인가." "그러면 말했던 데로 부탁합니다." 조릭의 말에 캐서린은 곧바로 마력을 움직여 술식을 전개했다. 쿠르르르르-쿵-! 푸화아아아악! 이전에 들린 진동의 몇 배나 되는 간격의 진동이 한 번에 휘몰아치자마자 울타리의 중심에서 새하얀 눈이 폭발하듯이 솟구쳤다. 물리적으로 만들어진 눈안개에 기다란 그림자가 졌다. 눈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자 기다리고 있던 목표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 사이로 마차 몇 대는 이은 것 같은 기다란 몸체를 덮은 짙푸른 갑각과 그 틈새로 빼곡히 자라난 수많은 갈고리 같은 가시가 뾰족한 주둥이까지 빼곡히 자라나 있었다. 네 갈래로 갈라진 주둥이 사이로 연두빛으로 발광하는 가죽과 핏기, 양이었던 고기의 파편이 짓이겨지듯이 물려있었다. 지하에 있던 아이스웜이 튀어 올라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기어코 운 좋은 양 몇 마리가 울타리를 넘어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무도 양들을 붙잡지 않았다. 이때만을 기다렸다. "지금이다! 투척!“ 토벌대의 조를 맡은 조장과 기사들이 소리쳤다. 긴장과 지루함을 참아가며 기다리고 있던 사냥꾼과 모험가들이 일제히 투창. 현장에서 즉석으로 개조된, 오로지 목표를 단단히 찔러 고정하도록 개조된 수십 자루의 창이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비록 일부는 갑각에 가로막히거나, 힘이 부족해 튕겨 나왔다. 하지만 그 외의 나머지는 개조된 목적을 충실히 달성했다. 끼기기기기기기긱-!!! 생각지도 않았던 전신을 두드리는 고통. 폭발하듯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소음. 네 갈래로 벌어진 입안에서 느껴지는 먹이의 감각. 아이스웜은 본능적으로 지금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기다란 몸체를 낮춰 땅속으로 파고들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스웜은 행동을 끝마칠 수 없었다. 쿵-! 패애애애애앵-! 아이스웜의 몸체에 단단히 들어박힌 작살 같은 창끝엔 밧줄들이 길게 묶여 있었고, 그 끝을 사람들이 안간힘을 쓰며 잡아당기고 있었다. "놈이 땅속으로 파고들려 한다!" "젖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흐아아아아아악!!!” 아이스웜의 본진은 애초에 지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땅 위에서 일을 끝내야 했다. 하지만 점차 아이스웜쪽으로 줄이 이끌리기 시작했다. "아타니타스공. 아슬아슬한 상황인데, 아직 안 끝났습니까?" "마침 딱 좋군." 쳐다보는 것만으로 얼어붙은 한기를 전신에서 줄기차게 내뿜으며 마력을 운용하던 캐서린은 그 모든 한기를 양손으로 끌어모았다. 캐서린의 눈이 새파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토벌대와 아이스웜의 사이의 눈이 일제히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야!?" 토벌대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벌판에 두껍게 깔린 눈이 일제히 모여들어 단단히 뭉쳤다. 하얀 눈이 수많은 얼음 손팔, 촉수, 사슬이 되어 아이스웜을 붙들고 옭아매기 시작했다. "진정해라! 우리 편이다!" "절대로 줄을 놓지 마!" 머리로 전해 듣기는 했지만, 막상 마법이 실행되는 것을 보자마자 머리가 잠시 굳은 사람들을 기사들이 다그쳤다. "뭘 멍하니 보고만 있어! 공격해!" 정신을 먼저 차린 사람들이 다그치자 토벌대가 하나둘 함성을 내지르며 아이스웜에게 달려들었다. 누군지 모를 사람들의 말 그대로 지금은 공격할 때였다. 그리고 아이스웜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구속하는 캐서린은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후, 얼음 마법에 저항력을 가졌다고는 들었지만, 상당하군." "별로 힘들어 보이지는 않으시군요." "저항력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물리력까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과연, 캐서린은 얼음 마법에 내성을 지녔다는 조릭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즉석으로 짜올린 마법이기는 했다. 하지만 엄연히 현자에 다다른 마법사가 펼치는 마법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얼음 마법으로 형성한 수많은 구속진이 아이스웜과 접촉하는 순간부터 마력이 점차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루에 마법 몇 번 쓰는 마법사의 수준이라면 수레 하나는 필요하겠지. 그녀처럼 얼음 마법 전공이었으면 몇 명이어도 사냥할 수 없을 수준이고. 하지만 그녀 정도의 수준에 이른 마법사라면 말이 달랐다. 얼음 마법에 대한 저항력? 수로 찍어누르면 된다는 말이겠지. 완력으로 구속진을 깨부순다? 아무튼, 수로 찍어누르라는 말이렷다. 물론 얼음 마법으로 적을 공격하는 것은 무리였다. 썩어도 저항력이라고. 하지만 캐서린은 그에 대한 대비도 진작에 끝마친 상태. 철야를 한 이유가 바로 그를 위해서였다. '끊임없이 구속을 유지하며 이대로 속성을 변화 시키면 되겠군. 그러면 일단 매개체가...응?' 그러고 보니 내가 그 가방을 어디에 뒀더라? 갑자기 몰려오는 불안감에 캐서린은 빠르게 지휘부 안을 눈으로 훑었다. 없다. 어디를 봐도 없다. ...아니, 일단 생각은 나중에. 조릭이 그녀의 심정 변화를 느낀 것이 분명했다. 캐서린은 우선 대응부터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타니타스공. 뭔가 문제라도." “흠, 흠흠. 조릭 경. 나는 이만하도록 하지” “음?” “그야, 기병대도 공적을 세워야겠지? 기사라던가." "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괜찮아야지. 안 그러면 모양 빠지게 내가 준비물도 깜빡했단 사실이 드러날 거 아니냐? 응? 라고 할 수는 없었다. "무울론 괜찮지." 캐서린은 필사적으로 감정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