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마음을 내뱉은 카렘은 아차 했다. 무심코 있어서는 안 될 시도에 급발진을 해버렸다. 분위기가 싸해지는가 싶었지만, 다행히 다른 요리사들이 동조해줘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역시 차돌 된장에 치즈는 아니지. 그렇다고 해도 냅다 쌍욕을 밖은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카렘은 괜히 켕기는 기분이 들어 보르고에게 신전의 위치를 물어본 후 쟁반을 들고 얼른 주방을 나섰다. '그런데, 된장은 아니라도 다른 종류엔 좀 들어가던가?' 찌개와 치즈. 언뜻 보기에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카렘은 의외로 많은 찌개에 치즈를 넣는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당장 싫어하는 사람을 찾기 힘든 부대찌개에서 치즈는 안 들어가는 곳을 찾기 힘들 정도이고, 김치찌개에 체더 치즈를 넣는 곳도 종종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동안 관심이 없어서 넘어가서 그렇지. 의외로 치즈랑 찌개, 어울리는 조합인가? 사실, 생각해보면 치즈라고만 해서 그렇지 방면을 유제품으로 넓힌다면 생각보다 유제품을 곁들여 먹는 음식은 많다. 치즈를 넣은 김밥은 너무 유명해서 언급할 가치도 없다. 프랜차이즈, 레토르트 설렁탕에 무수히 들어가는 우유. 다양한 치즈와 곁들여 먹는 매콤한 등갈비, 닭갈비, 찜닭 등등. 싫어하는 사람을 찾기 힘든 콘치즈까지. 차돌된장 국수 그릇과 차돌박이가 수북하게 접시가 세 개 씩 놓인 쟁반을 들고 넓은 복도를 걸어가며 카렘은 점차 혹시나?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휘저어 생각의 거품을 흩날렸다. 아무리 그래도 된장찌개에 치즈는 선을 좀 넘었지. "아무튼, 그런 것보다." 카렘은 계단 앞에 멈춰 섰다. "이게 문제인데." 그리고 몸을 슬쩍 돌렸다. 사실, 카렘은 계단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증오하는 쪽에 가까웠다. 아파트는 반드시 엘리베이터. 계단과 에스컬레이터가 있다면 반드시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 쪽.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농노로 환생하고 현실에 익숙해지며 카렘은 자연스럽게 계단을 수용하는 겸허함을 수용할 수 있었다. 윈터홈과 마법사의 탑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다 정도가 있다. "하, 씨. 이거 내려가기 전에 다 불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계단은 폭이 넓고 경사가 완만했다. 그뿐만 아니라 층의 높이 또한 낮았다. 어린아이조차 무리 없이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문제라면 애프터글로우 요새를. 그 넓고 기다란 요새를 오가는 통로가 이것뿐. 이것만으로 오르락내리락 해야 한다는 것. 게다가 계단 옆의 빈 공간의 바람 소리는 오금을 다 저리게 만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새의 규모가 규모였기에 내성, 외성뿐만이 아니라 요새 내부에도 간이 신전이 마련되어 있었다. 원래는 내성 안의 신전에 내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계단을 본 순간 카렘의 마음속에서 싹 사라졌다. 아무렴. 그걸 다 내려갔다가는 제물을 바칠 수 없지. 아무리 그래도 신에게 다 불어터진 면을 바치는 불경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결코, 이 높이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아니다. 카렘은 마음을 다잡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언제까지고 불편해할 수는 없다. 여기서 얼마나 더 머무를지 모르니까. 그래도 카렘에겐 다행히 간이 신전은 주방과 가까웠다. 3층 정도 내려오자 간이 신전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입구부터 다양한 동물 석상으로 장식된 간이 신전. 펑거스비와 콜던, 윈터홈에서 봤던 것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카렘은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간이 신전은 신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무식할 정도로 넓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주방만큼 넓은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내부도 접두사로 '간이'가 붙은 것 치고 있을 건 다 있다 못해 접두사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벽부터 바닥까지 오르간처럼 배치된 불 꺼진 초 위로 투타티스의 업적을 묘사한 성화와 곳곳에 배치된 다양한 재질의 수많은 크고 작은 동물의 조각상 외에 각종 장비와 통가죽, 머리 박제 장식은 간이 신전에도 가득했다. 창문을 열어둬 냉기가 조금 느껴졌다. 신전 곳곳에 마련된 벽난로의 불씨에 못 견딜 정도는 아니지만. 카렘은 잠시 목적을 잊고 주변을 감상했다. 그사이 신전 한 편에서 사제복을 푹 눌러 쓴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주름진 손으로 펼쳤던 책을 덮고 구부정한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 처음 보는구나. 새로 시종을 들였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아, 저는 아타니타스 공의 시종입니다." "아타니타스 공이면, 공작 각하의 최고 마법 고문?" 노인은 늙은 목소리로 아, 하고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호, 그러면 그쪽이 그 프라이드 치킨을 만든 카렘 공인가." "옙. 제가 그 카렘 입니다." "그래. 프라이드 치킨. 확실히 맛은 있더구나. 나이가 들어 속이 부대껴서 한 조각밖에 못 먹었지만 말이다." 확실히. 노인은 손주름만 보면 아이오나나 하트먼 경과 비슷한 연배 같았지만, 건강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난 로완이다. 부족하게나마 치료사를 하고 있지." "어, 사제복을 입고 계신데요?" "은퇴한 지 오래지만, 예우 차원에 이렇게 입을 수 있는 거란다. 덕분에 지금 사제들이 자리를 비워 잠시나마 이렇게. 이 작은 신전을 책임지고 있지." "어, 이게 작다고요? 연세가 있으신 분이 혼자 관리하시기엔 너무 넓은 거 아닙니까?" "뭐, 적적하니 책 읽기엔 좋지. 돌아오기 전까지 간이 신전에는 노구뿐이란다." 로완은 텅 비다 못해 휑하기까지 한 신전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온 것이냐. 그 음식은. 제물?" "아, 주방에서 새로 음식을 만들었는데 제물을 좀 바치려고..." "음? 새로 음식? 혹시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지?" "어, 점심시간이 막 지났죠?" "음. 어쩐지." 로완은 배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주방에 가봐야겠군. 그러면 기도 잘 하게." "어, 그냥 이렇게 가버리신다고요?" "배부른 시체가 언데드일때 빛깔도 좋은 법이다." "아니, 주의사항이라도-" "어지럽히지 말고, 물건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기도는 자유롭게 올리거라." 그리고 더는 허기를 이기지 못했는지 로완이라는 노인은 구부정한 허리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간이 신전을 휙 하고 나가버렸다. 카렘은 방치당했다. '...사제가 아니어도 대신 지켜도 된다고?' 아니, 전직 사제라서 상관없는 건가? 클리셰라면 저런 사람이 더 신앙심이 깊기는 했지. 실력이 더 뛰어나기도 하고. 그보다도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카렘은 늙은 사제가 지나가며 일으킨 바람을 깊게 들이마셨다. 조금 전에 있던 로완의 나이를 생각하면 눈살이 찌푸려질 행동.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 익숙한 냄새는 뭐지?' 얼핏 팬 위에서 요리를 태운 향기 같았다. 아니, 타기 직전까지 그을린 콩의 냄새? 허나 깊게 들이마시면 거슬리는 씁쓸함 없이 고혹적인 부드러움. 고소함이 섞인 은은하고 우아한 냄새가 산들바람처럼 코를 스쳤다. 곧바로 사라졌지만. 한순간의 유혹에 정신이 멍해졌던 카렘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국수와 차돌박이가 더 식기 전에 신전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뭐, 배가 어지간히도 고팠던 거겠지." 삼신교의 세 신도 신자가 굶어가며 기도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카렘은 재단 앞에 멈춰섰다. 조금 식기는 했지만, 쟁반에 담긴 차돌된장 국수는 여전히 뜨끈했다. 차돌박이가 조금 걱정이었지만, 식어도 맛있으니 괜찮겠지. 재단 뒤에 세워진 석상은 윈터홈에서 본 것보다는 간소했다. 펑거스비에서 봤던 것보다는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지만. 훨씬 더 세세하기도 하고. 카렘은 재단 위에 쟁반을 통째로 놓고 차돌 된장국수와 차돌박이 접시를 석상 앞에 각각 한 그릇씩 식기와 함께 놓았다.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와 석상 앞에 마주 섰다. 수염과 털 옷 하나하나까지 묘사된 도끼를 든 야만 전사. 동물, 식물, 눈 결정을 자수 놓은 드레스를 입고 눈을 감은 여인. 어깨에 까마귀를 놓은 성별을 알 수 없도록 로브를 걸친 인영. '음, 몇 번이나 하는 거지만 적응이 안 되는데.' 윈터홈에서 몇 번이나 제물을 바치며 기도했고, 아이오나와 다른 사제들을 볼 때마다 물었던 것이지만, 이것만큼은 적응하기 힘들었다. '숭배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기도해도 되는 건가.' 카렘은 전생에 신을 믿었다. 종교를 가졌다는 것이 아닌, 신이 존재함을 믿었다는 뜻으로. 그래도 눈에 직접 보이지 않아 긴가민가했던 것이 전생. 하지만 현생은 달랐다. 똑같이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긴가민가하지 않았다. 두 눈으로 신을 똑똑히 봤으니까. 그것도 두 번씩이나. 심지어 그에 대한 증거물은 카렘의 가슴팍에 매달려 묵직하게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즉, 숭배하지는 않더라도 진심으로 공경할 생각은 있었다. 경전과 야사로 들은 업적을 생각하면 세 신은 당연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뭔가 찔리는데.' 도무지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일단 움직이기로 했다. 음식이 식고 면이 불어터지기 전에 끝내야 하니까. 카렘은 잠시 앉아 포크를 그릇에 넣고 재자리로 돌아와 납작 엎드렸다. "그, 스카디님 덕분에 어떻게 생각하던 것을 만들 수 있어 그 결과물을 오늘 이렇게 바칩니다. 조금 식고 불었을 수도 있지만,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타닥, 틱. 타다닥. 탁. 카렘은 어색한 말투로 읊조렸지만, 벽난로의 불똥 튀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어색했다. 윈터홈의 신전에선 사제를 따라 행동하면 그만. 그리고 언제나 주변에는 같이 기도를 올리는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이 간이 신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카렘은 반대로 그래서 더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꼈다. "이전처럼 혼자만 드리는 건 너무 눈치 보여서 다른 분들한테도 같이 시식을 겸해 제물을 바칩니다. 일단 평가는 좋았는데. 조금 부족할 수 있으니 이것도 양해를 좀. 어떻게..." 카렘은 진심으로 양해를 구했다. 분명 찌개엔 각종 재료와 차돌박이를 아낌없이 때려 박았다. 된장도 종갓집의 백 년 묵은장보다 맛이 더 깊었다. 아마 직접 신의 손길이 닿은 덕분일지도. 하지만, 역시 msg를 이길 순 없었다. 맛은 있었지만, 여전히 감칠맛과 끝 맛이 2% 부족했다. 게다가 평소 삼신교의 신들이 주식(?)으로 먹을 음식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다른 세계의 음식이니 입맛에 맞지 않을 가능성 또한 있다. "그래도 어떻게, 처음으로 결과물을 만들어 바쳤-" ...잠깐, 그러면 된장이 먼저 아니었던 거 같은데? 떠올려보면 삼신, 구체적으로는 스카디에게 기도를 올렸던 이유는 결국 메주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메주로 먼저 만든 것은, 간장. 간장을 처음 조리해 대접한 사람은... "사적으로는 알리시아. 공적으로는 고드윈 공자...?" 이 무슨 불찰이란...아니, 아니지. 무려 신씩이나 되시는 분들이 고작 이런 것으로 꼽을 주진 않을 것이다. 아닐 거라고 카렘은 믿었다. "크흠, 그에 대한 사죄는 추후 제물로 바치기로 하고, 우선 이것을 받아주시고 부디 용서와 만족을 해주십사 하면 좋겠는데..." 조금 많이 찔린 카렘은 기도하다 말고 슬쩍 고개를 들어 석상을 바라보았다. 구체적인 이목구비가 보일 정도로 굉장히 세밀하게 묘사된 두 신의 석상이 보였지만, 역시나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이름 없는 여행자 때가 좀 예외 케이스였던지.' 바친 제물은 꼬박꼬박 드시는 건 분명했다. 그릇을 돌려받으러 갈 때면 항상 깨끗하게 비어있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기도를 올리던 카렘은 휘청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음, 역시 다리 저린 건 어떻게 적응할 수 없는데." 한참 쭈그려 앉아 기도하다 보니 다리가 저렸다. 다리를 툭툭 두드리던 카렘은 신전을 나서려다가 석상들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 뻘쭘하며 나갔다. 그리고 얼마 뒤. 까아아아악- 간이 신전에서 나지막한 까마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