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를 만드는 데 있어 음식물 쓰레기. 전문 용어로 폐기는 상수, 발생할 수밖에 없다. 재료 손질에서 조금. 실수가 발생하면 또 조금. 다 만든 요리를 남기거나 먹지 않아서 또 조금. 조금이 쌓이고 쌓여 대량의 폐기물은 매일 발생한다. 폐기는 조리하는 양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그렇기에 요식업에서 폐기물을 처리하는 방법은 매우 중요하다. 폐기 관리는 그 여부에 매출로 직결된다. 특히 하루에 최소 수백 명이 오가며 준비된 요리가 식기만 해도 폐기 처분 되는, 장사가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폐기가 발생하는 뷔페. 따라서 버려지는 멀쩡한 메뉴를 보관해 다음 장사 전 가능한 한계까지 재가공해 버젓이 내놓는 일은 비밀 아닌 비밀. 당연한 말이지만, 완전히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조리된다. 예를 들어, 오늘 나온 탕국은 전날 남은 고기구이를 손질해 나물을 함께 혹은 채소만 넣고 향신료를 넣고 푹 우려낸 물건. 해물 완자와 토스트 튀김에는 시간이 지나 차갑게 식거나 하루 지나 건조해진 해산물의 회나 튀김을 으깨 만든 소. 딱딱하게 굳은 식사용 빵이 튀김 가루로 재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왕실 혹은 귀족의 주방에서 또한 마찬가지로 벌어지는 일. 물론 당연하지만, 이전에 말했듯 대상은 고용주가 아니다. (애초에 왕이나 귀족 같은 권력자한테 재가공한 물건을 가져갔다가 누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로 시설에서 일하는 피고용인에게 1차. 그러고도 남으면 인근의 빈민, 하층민들에게 2차. 물론 저가 혹은 무료로 제공된다. 비단 아이스랜드가 아닌 에우로파를 넘어 어느 나라에서나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드리아누스 변경백령, 구체적으론 애프터글로우 요새의 하층민과 그 이하의 사람들은 다른 지역보다 운이 좋은 편이다. 적어도 하루 한 끼 이상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치(?)는 대귀족급 이상이 머무는 장소 이외엔 보기 드물다. 그리고 이런 일을 전담하는 것은 주로 말단 요리사. 오늘도 프레젠트의 빈민과 하층민들의 은혜로운 저가 스튜를 만들기 위해 말단은 소고기를 손질 중인 선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도축이 끝나기는커녕 이제 겨우 반 밖에 안됐다. 심지어 어딜 봐도 가장 큰 고깃덩어리가 보이지 않았다. "뭔, 도축이 아직도 안 끝났다고? 가장 질기고 큰 물건은 어디 갔소? 설마 빼돌리신 건 아니시겠지?" "..." "이보시오? 어이! 죽었소!?" "아잇 깜짝이야! 호로 뒤질 신호 좀 해!" "댁이 놀라건 말건 내 알 바 아니고. 어디 뭐 다치셨소?" 선임의 뭐라는 거냔 눈초리에 말단은 반대로 턱짓했다. 처리가 덜 끝난 고기와 얼마 담기지 않은 잡육 양동이. 아, 선임은 작게 탄식하며 이해했다. "이거 내가 실수했군. 플레이트(Plate)는 손님이 가져가셨다." "...거 참 고어 쓰지 말라니까. 그런데, 브리스킷을? 그 덩치 큰 잡육을 대체 왜?"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걸로 뭘 하시려는 진 아시오?" 직접 보던가. 그런 의미를 담아 선임은 말없이 브리스킷을 손질 중인 카렘을 도축용 칼로 가리켰다. 브리스킷의 질긴 살코기 부위(양지머리)를 분리해낸 카렘은 기름기 많은 부위(차돌박이)를 몇 토막 낸 후 얇게 썰고 있었다. "대체 저 질긴 부위를 왜...아니지. 저렇게 얇게 썰면..." "질긴 식감은 씹는 맛으로 바뀌지." "저거면 진탕 끓이지 않아도 그냥 구워 먹어도 되겠소. 삶아도 익는 데 그리 시간은 걸리지 않겠고." "햐, 그래. 질기고 단단하면 얇게 썰면 되는데. 저 간단한 생각을 못 했네." "뭐랄까, 가죽장이가 양피지를 뜯는 것 같기도 하고." "너 그런 것도 아냐?" "이래 보여도 친가가 가죽장이요." "허! 무식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지식인이셨군?" 말단은 할 말이 없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어차피 다 같은 근육질 산도적 수염쟁이 야만인 꼴인데 누가 누굴보고 생김새 타령을 한다고? 말단이 선임의 대가리를 후릴지 말지 고민하는 사이. 선임은 도축용 칼을 다시 놀리면서 유심히 카렘의 행동을 지켜봤다. 양피지보다 조금 두껍게 썰린 얇은 고기가 도마의 한쪽에 차곡차곡 쌓여 작은 언덕을 만들기 시작하자 문득 호기심이 들었다. "브리스킷 맛은 좀 아나?" "그야 매일같이 먹는데 당연한 거 아니오?" 말단은 별걸 다 물어본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댁은 먹어본 적 없소?" "돈이 있는데. 굳이?" "하긴." 말단은 머리를 긁적이며 수긍했다. "일단, 맛이 없진 않소. 아무렴 브리스킷으로 육수를 우리면 진국이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고기 자체를 먹으려면 너무 오래 끓여야 한단 말이지." 그리고 그렇게 먹을 만해질 때까지 오래 끓인 브리스킷의 맛은 육수로 전부 우러나와 문자 의미 그대로 아무 맛이 없었다. "그러면 저기 저 고기는 어떤 맛일지 상상이 가나?" 말단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야 같은 고기라도 어떻게 썰고, 굽고, 양념하는지에 따라서 맛이 천차만별로 갈리는데 여태껏 딥다 삶아 맛이란 맛은 모조리 국물에 빠져나온 고기 말고 다르게 먹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요리 전에 맛은 알아야 해서 한 토막 구워 먹었는데..." "먹어보기는 했군?" "육질이 워낙 단단해서 그렇게 먹을 물건은 못되오." "그러면, 저렇게 얇게 저며 먹으-" 그러나 선임은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뭐지? 지금쯤이면 도축이 다 끝났어야 할 텐데? 왜 내 눈앞에 아직도 뼈에 고기가 뭉텅이로 붙어있지?" 말이 끊긴 선임은 총주방장 보르고에게 말단에게 그랬던 것처럼 카렘 쪽을 가리켰다. 얼굴이 와락 찌푸려진 보르고가 고개를 돌리자 단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고소하고 이질적이지만, 거부감이 들지 않는 냄새가 카이저 콧수염 주변을 훑고 지나갔다. * * * "오랜만에 끓이는 건데. 뭐, 별 차이는 없는 듯한데?" 완두콩과 삼신교 기도메타로 빚은 메주로 만든 된장으로 만들었지만, 어쨌든 냄새 하나는 전생의 된장찌개와 거의 비슷했다. 주방에 구비된 붉은 마녀의 손가락 가루를 반 스푼 넣고 찌개를 섞어준 카렘은 간을 보기 위해 조금.... "아차차." 가장 중요한 것을 빠트릴 뻔했다. 카렘은 수북하게 쌓인 차돌박이를 잔뜩 집어 냄비에 투하. 생이라 조금 두껍게 썰린 데다가 일반적인 음식점에 넣는 양보다 월등히 많이 들어간 차돌박이는 조금 저항하는가 싶었지만, 이내 뜨거운 화력에 순식간에 찌개 빛깔로 물들었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붉게 물든 소기름. 차돌박이가 들어가자마자 달라진 진한 냄새. 전생과 그리 큰 차이는 없는 감각에 카렘은 재빠르게 덜어서 조심스럽게 맛을 봤다. 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전생을 포함해 요리한 세월이 몇 년인데 간 정도는 맞춰야 정상이다. 그보다는.... "...씁. 그 맛이 아닌데." 기억하는 그 맛이 맞지만, 미묘하게 불만족스러웠다. 구체적으로는 2% 부족한 맛. 차원을 넘어 부활한 된장찌개는 분명 맛있었다. 완두콩으로 만들었는데도 느껴지는 특유의 구수함. 채수와 다시마 육수의 시원함과 매콤함. 차돌박이의 풍미와 육향과의 조화. 두부가 없긴 한데 그 정도야 뭐 애교로 넘어갈 수 있지만, 역시 머릿속에 또렷한 그 숟가락이 계속 가는 특유의 중독적인 감칠맛은 부족했다. '역시 다시마를 어떻게 썼다고는 해도 현대의 MSG를 이길 수는 없다는 건가?' 카렘은 다시 한번 덜어서 맛을 보았다. 역시 다 좋은데 2%의 부족함은 여전했다. "음...뭐, 어쩔 수 없나?" 절반의 성공에 절반의 실패. 카렘은 이럴 확률이 높다고 예상했다. 아무렴 세계도 다르고 원료도 달랐다. 그런 상황에서 메주를 띄우고 된장을 만들었으면 요리사로서는 충분하지. 화학 전공자였다면 모를까 카렘은 식재료에서 순수한 MSG를 추출하는 법 따위는 몰랐다. 화학은 개뿔이. 기억도 나지 않는데. 이미 그것만으로 기함을 토할 업적이건만 그래도 영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저나 차돌박이도 있는데 쌀밥이 있었으면... 뒤에서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휙. "..." "..." "..." 카렘은 관찰하는 표정으로 코를 벌렁거리는 애프터글로우 요새 주방의 총주방장 보르고를 포함한 수많은 요리사와 눈을 마주쳤다. 뻘쭘한 상황에 보르고는 손수건으로 민머리를 닦으며 다가왔다. "흠, 흠흠. 이거 실례했소. 흥미로운 냄새가 나서 말이오." "...전부 먹어보기엔 양이 부족해서 다시 끓여야 하는데요." "아무렴. 필요한 재료가 있으면 말만 하시오." 끓여야 하는 찌개의 용량이 단번에 배 이상으로 늘었다. 그래도 준비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카렘은 방으로 돌아가 다시마를 가져왔다. 다시마 육수가 다 우러나올 때쯤 손이 빈 요리사들도 재료 손질을 끝마치고 조리를 시작. 끓는 육수에 재료들을 순서대로 투입하고 마무리로 차돌박이를 흩뿌려 다시 한번 끓여냈다. 아이스랜드 사람으로서 설령 대귀족의 주방에서 일한다고 할지라도 처음 먹어보는 콩으로 만든 가룸, 된장과 차돌박이를 넣은 찌개. 양식과 유사하다 못해 쏙 빼닮은 기존 에우로파의 요리와는 이국적이다 못해 완전히 다른 맛에 한 그릇씩 먹어보기 시작한 요리사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구수하면서 살짝 매콤하지만 진한 게 입에 쩍쩍 달라붙는고." "브리스킷을 넣었다고 해도 저만한 용량인데 채소가 이만큼이나 들어갔는데 이렇게 진한 맛이 날 수가 있나? 이게 된다고?" "...콩으로 만든 가룸? 내가 아는 콩 맛이...나나? 모르겠는데? 콩이라고?" "흠, 호. 흐음. 이거, 조금 중독적이야. 몇 그릇이라도 마실 수 있겠어." 긍정적인 사람들. "다 좋은데. 끝 맛이 좀 더러운데. 텁텁함이 오래 남아서 별로야." "으으, 이게 대체 무슨 냄새야. 쿠리쿠리하다고 해야 하나?" "진하기는 한데, 이거 너무 가볍지 않나? 이것만 식사로 먹기엔 너무 가벼워!" "음. 확실히 콩이로군. 난 콩 싫은데." 부정적인 사람들. "확실히, 얇게 써니까 오래 끓이지 않아도 우러나는군." "그것보다, 이런 식으로 저미니까 확실히 부드러운데?" "스튜라고 해도 자극이랑 간이 좀 센 데. 주식. 그러니까, 빵 남은 게-?" "아니야. 이건 빵이랑은 어울리지 않아. 버터는 별로고, 좀 더 밀도 높은 게 있으면-" 분석하는 사람들. 그중에서는 특히나 공감 가는 의견이 있었다. "빵보다는 파스타 어떻습니까?" 그 말에 빵이랑 안 어울린다는 의견을 꺼낸 사람. 보르고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파스타?" "예. 모양 있는 것들 말고, 길쭉길쭉한 것들로요." "페투치네 같은 납작한 종류를 말인가?" "스파게티를 생각했는데. 그쪽도 좋겠네요." 여기에 비록 쌀은 없다고 해도, 밀가루와 달걀은 있었다. 그렇다면 면을 만들 수 있다는 것. 된장찌개는 밥이랑 잘 어울리지만, 국수와도 어우러지니까. 단, 그러기 위해서는 소면이나 칼국수가 좋을 텐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다 만들어서 먹어보죠." 생 파스타는 어떤 면에선 칼국수랑 비슷하다. 아무튼, 오래 끓여서 불리면 비슷해지니까. 된장은 충분하다. ***자료 첨부*** -차돌박이 된장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