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이 바쁘다는 이유로 만남을 미루거나, 아니면 도착이 늦어질 것 같다는 사정은 주도권을 가지고 다툴 때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다. 일단 한 번 누르면 그다음은 대화를 미룬 쪽. 주도권을 쥔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더 유리하니까. 다만 캐서린이 하드리아누스 변경백을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은 이러한 주도권 싸움의 한 과정은 결코 아니었다. 하물며 상류층에서도 이례적으로 혈족 간에 사이가 좋기로 유명한 펠윈터 가문의 전대 가주가 자기 아들과 기 싸움을 할 이유는 없다. 비록 작위와 영지를 아들에게 내던지고 도주했다고는 해도. "설마-" "오, 그런 문제는 결코 아닙니다. 아타니타스 공." 캐서린의 눈매가 휘어지려 하자 시종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사정했다. 치킨을 먹으면서 하는 게 좀 깼지만. "주군은 현 공작 각하의 능력이 뛰어남을 확인하시자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고작 주도권 싸움으로 공 같은 귀빈과의 만남을 미루실 이유가 없지요." "...그렇다면 지금 변경백께서는 요새에 없으시다?" "역시 소문대로 십니다." 시종장은 한결 풀린 얼굴로 긍정했다. "변경백 각하께서는 지금 하이랜드 지방과 산맥 너머에서 일어난 예상치 못한 사건을 직접 조사하시기 위해 직접 위력 정찰을 나가셨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라면?" "언데드 입니다." 그 말에 카렘은 무심코 고든과 눈을 마주쳤다. 이거 언데드라면...그거지? 아마도요. 제철이 아닌 언데드. "봄도, 여름도 아닌 가을철에 언데드가 발생한 목격담이 하이랜드 전역과 산맥 너머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혹여 공도 여정에서-" "아아, 아무래도 의심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꼬마. 그걸 건네라." 네? 아. 주어가 없었지만 뭘 요구하는진 분명했다. 호명된 카렘이 품에서 잘그락거리는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고...스타크 경께서 토벌하시고도 언데드 몬스터로 변한 도적들에게서 발견된 부산물...이라고 하는 게 맞죠?" "그래. 아무것도 없는 일개 도적들이 결코 생존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어 사망한 직후, 아무런 징조도 없이 제 자리에서 일어나더군." 목이 분리된 쪽은 머리만 움직였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월레스는 무심코 가죽 주머니를 받으려다 멈칫했다. 카렘은 뭔가 싶었지만, 이내 월레스의 눈이 치킨과 양동이를 번갈아 보고 있단 사실을 깨닳았다. "음, 손이 없군요." "...손을 빌려드릴까요?"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치킨은 중대 사항이니까요." 그런데, 전속 시종(추정)한테 존댓말? 게다가 치킨? 왜? 연신 물음표를 띄우며 카렘은 주머니 안의 내용물을 꺼내 묘한 눈빛의 늙은 시종장에게 팔을 쭉 뻗어 내밀었다. 월레스는 연신 치킨을 씹으면서 카렘의 손바닥 위. 작고 불투명한 검푸른 수정 조각, 마석으로 눈을 돌렸다. "마석이군요.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호오. 단번에 말이 나오는군. 그렇다면 역시 산맥 너머와 하이랜드의-" "이변에 휘말리셨던 것이겠지요." "그런데 변경백 각하 본인도 안 계신 데 괜찮나?" 그녀가 방문한 목적은 사업의 토대를 닦는 것. 그나마 가계약 수준에 불과했지만, 현장 총책임자의 부재와 갑작스러운 이변은 문제이고 변수였다. "출정하시기 전에 주군이 복귀하시기 전까지의 전권을 위임받았으니 문제없습니다. 그리고-" 월레스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최고 마법 고문과 볼턴 남작, 그리고 집요정과는 달리 공기 중에 드러난 카렘의 얼굴은 기름을 발랐는데도 추위로 인해 점점 벌게지고 있었다. "이 이상 바깥에 계시는 건 무례인 것 같으니 우선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손님 앞에서 치킨을 뜯는 건 무례가 아니고? 카렘은 무심코 튀어나오려는 속마음을 간신히 붙잡았다. 허나 행렬의 마차와 수레가 마구간으로, 시종과 하녀 및 호위병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월레스가 일행을 요새로 안내할 때까지 시종의 손에서 치킨과 그걸 담은 양동이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다만, 일행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다. 아니, 그래서 조금 전의 그 황당한 일의 정체는 뭔데? 그리고 치킨은 대체 왜 여기 와서 양동이째 먹는 거고? 얼마 뒤 카렘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 * 아이스랜드에서 보낸 세월은 이제 막 1년에 불과했지만, 카렘이 아이스랜드의 식문화를 낱낱이 파헤치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아이스랜드의 식문화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다만, 일단 고기와 기름지다는 것은 아니었다. 고기에 진심인 것이 어디 아이스랜드만의 특징일까. 주점에서 그 말을 꺼냈다간 순식간에 세오폰 왕국의 모든 지방 사람이 얽힌 (진짜로) 피를 튀기는 설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했다. 기름지다는 것도 마찬가지. 아이스랜드도 추운 지방이라 기름진 음식을 선호하기는 했지만, 기름지기는 오히려 베르생제토와 아도비스 신왕국(의 일부 지방)이 더하다면 더했다. 전자 국가 요리의 기본은 주재료와 같은 양의 버터로 시작하고, 후자는 기름과 버터를 넣다 못해 들이부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근래 들어 아이스랜드 요리의 기름 농도에 비례해 사람들의 뱃살 둘레가 전보다 더 두꺼워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두 나라와 비교하기엔 무리. 그렇다면 아이스랜드만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풍성함이다. 아이스랜드에서 태어나 나이가 좀 찼다는 이들은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같이 모두 먹는 것에 한이 맺혔다. 어느 날 한순간 갑자기 아이스랜드의 기근이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농담으로 아이스랜드의 언데드 발생 요인은 세 가지. 굶어 죽거나, 얼어 죽거나, 싸우다 죽어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 심지어 자조가 진짜가 아니냐고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 쏟아지기 시작한 밀(아도비스 신왕국산) 그 분량은 아이스랜드의 기근을 단번에 몰아낼 정도. 심지어 대가는 안 그래도 추운데 더 춥게 만드는 데다 불도 제대로 안 붙는 쓸모라고는 하나도 없는 나무(살아있는 에어컨)에 불과하다니. 극적으로 개선된 식량 사정은 위아래 가릴 것 없이 먹는데 한이 맺힌 아이스랜드 사람들의 식문화를 하루아침에 바꿔버리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그 풍성함도 아도비스에 비하면 빛이 바라지만 아무튼. 아이스랜드 사람은 누구나 고기를 사랑하고, 기름진 요리를 선호하며, 가능하면 풍성하게 차리는 문화는 아이스랜드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더 강했다. 그게 대저 치킨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치킨은 '기름에 튀긴' '닭고기'였다. 게다가 쌓아 놓으면 튀김옷 때문에 '양이 많아 보이고.' "그래서 그게 지금 하이랜드 전체에서 유행하고 있다고요?" "프레젠트를 잠깐만 돌아다녔는데 뻔하던데? 여기저기 다 치킨치킨." "아니, 그러면 그 많은 기름은 대체 어디서-" "마법사님네 영지에서 나오는 거 아니냐? 그 펑-뭐시기." 카렘의 방에 들어온 고든은 테이블 앞에 앉아 나무 양동이에 잔뜩 담긴 치킨에 손을 뻗었다. 치킨은 조사 의뢰에 대한 대가였다. "아니, 그런데 부탁한 내용은 그게 아니었잖아요." "응?" "왜 다들 저한테 뭐랄까..." 순간 카렘은 숨이 턱 막혔다. 뭐 어떻게 말을 묘사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잊어버렸다는 건 아니고, 자기 입으로 말하기에는 좀 부끄러웠다. 그러건 말건 고든은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치킨을 물어 뜯으며 감탄했다. "이거 뭔가 좀 다른데. 부드럽고, 매콤한 맛?" "버터밀크에 여러 향신료를 넣고 재워서 그런,아니. 이게 아니라." "왜 그렇게 공손하게 대하고 존댓말을 하냐는?" 한 입 베어 문 치킨을 고든이 허공에 휘저었다. 카렘은 고든을 가리키며 손가락을 튕겼다. 바로 그거였다. "예? 바로 그거요. 그거." "뭐, 대우 받는 거니까 좋은 거지? 자식. 출세했네!" "조사를 부탁했는데 그렇게 말하시는 거면-" "아, 아아아. 농담이야. 농담! 거 농담도 못 해?" 고든은 양동이를 붙잡고 가져가려는 카렘의 시늉에 잽싸게 치킨 양동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뭐, 뭐 이유는 간단하던데? 심지어 이건 어느 정도 네 책임도 있는 것 같고." 가루를 뚝뚝 흘리며 다시 한번 치킨을 크게 베어 문 고든은 우물거리며 카렘이 입을 열기 전에 말을 이었다. "음. 결국, 이걸 처음 만든 사람이 누구겠어." 답은 뻔했다. 떨떠름한 기색으로 카렘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고든이 치킨을 흔들었다. "그래. 콜던과 윈터홈의 내로라하는 미식가들이 극찬하는 천재 꼬마 요리사. 심지어 이 치킨이란 물건을 개발한 사람이라?" "그러니까, 제가 여기서 유명인이다?" "바로 그렇지. 유명인 꼬마." "요새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하이랜드에서도 그렇다는 말입니까?" 으흠, 어느새 치킨을 다 발라 먹은 고든에게 카렘은 빈 통을 내밀며 자신이 묵게 된 방. 랄까, 캐서린의 전속이라고 해도 시종 겸 요리사가 쓰기엔 과할 정도로 좋은 방을 둘러보았다. 양탄자와 가구를 비롯한 내부 장식. 푹신한 침대와 부드러운 비단 커버. 창문에 매달린 커튼의 재질. 그간 카렘은 설마 했지만, 이젠 외면할 수 없었다. 여긴 귀족용 손님방이다. "솔직히 마법사님이나 내가 머무는 방보다는 급이 딸리기는 하지만, 너도 네가 머물기에는 이 방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후, 그냥 방이 남아 돌아서라고 외면하고 있었는데." "며칠이나 지났는데 그냥 받아 들이지 그래?" 고든은 뼈다귀를 통에 가볍게 던져 넣었다. "인기남." "아, 시끄러워요." "왜? 윈터홈에서도 비슷한 거 아녔어?" "거기랑 여기랑 같아요?" 카렘은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아니 윈터홈에서처럼 그냥 다가와서 말하면 될 것이지 뭘 이렇게 간을 보는지 사람 부담스럽게." "그거야 당연히 손님이니까 그렇지." "당연하다고요?" "그래. 게다가 네 뒷배가 어지간히도 뒷배냐?" 요점은 간단하다. 인기인을 직접 본 호기심에 함부로 대하기 힘든 뒷배. 요새에 방문한 손님이라는 입장이 더해지자 자연스럽게 접촉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뭐, 그래 봐야 하루밖에 안 지났잖아. 슬슬 뭔가 변화가 있겠지. 그런데, 그렇게 신기해 했으면서 방에 틀어박혀 있던 이유가 그럼 설마?" 혹시나 하는 물음에 카렘은 획하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고든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튀김옷을 흩날리며 피식거렸다. "무도회가 처음인 소녀 같은 반응이네." "네에. 네. 뭐라 하시든 간에 다 그쪽 말이 맞아요." "아니, 생각해보니 너 윈터센드에서 최연소 번제자였고, 광장 한복판의 시연회에서 관객들을 통째로 도발했던 적도 있다고? 그거에 비하면 지금 이건 아무것도 아닌데?" "음." 확실히 그렇게 말하니 또 확실히. 카렘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선에서 느껴지는 감정들과 대우도 윈터홈 본성의 지그메서나 요리사들을 위시로 시종과 시녀, 하녀들이랑 별반 다를 것도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과 기분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야말로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호들갑을 떨고 있었던가. "...그래도 시선은 여전히 부담스러운데." "이 녀석 귀찮네-" "아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고요." "그냥 적응해. 윈터홈에서도 비슷하지 않았어?" "아니, 그쪽엔 좀 더 신경 쓸 게 있었다고 할까요." 그도 그럴게 그땐 뭐만 하면 살기를 날리는 집요정의 안전선을 파악함과 동시에 먹이(?)로 길들이기에 급급했으니까. 때마침 문을 두드리고 메리가 방 안에 들어오고 있었다. 카렘이 그녀를 향해 고갯짓하자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법사의 탑이 돌아가는 사정을 모두 파악한 고든은 아, 그러면 그럴 수 있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 대체 무슨 말을 했는데 저를 보자마자 말없이 수긍하는 겁니까." 메리는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