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에게는 다른 선택지도 있었다. 요청만 한다면 주군인 알프레드는 얼마든지 윈터홈에 방을 내어주고 원한다면 겨울을 지나 영지가 복구될 때까지 묵는 것을 허락했을 것이다. 고든의 가신들이 묵을 자리 또한 기꺼이 마련해줄 것은 분명했다. 아니, 굳이 알프레드까지 나설 것도 없었다. 지난 연회에서 얼굴을 익히고 교류를 나눈 그 수 많은 귀족과 기사들 그리고 유력자들. 말만 하면 도와줄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고든의 영지인 볼턴 남작령과 영지를 맞댈 예정인 귀족이라면 더더욱. 사실, 이웃한 영지끼리 사이가 좋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경계에 인접한 마을 간의 사소한 분쟁부터 영지에 걸친 숲, 강, 호수 산 등의 이권 다툼은 매년 벌어지는 일. 설령 어찌어찌 밑 사람들이 사이가 좋다 하더라도 영주의 친족간에 다툼이라도 벌어졌다간 짠. 순식간에 가문을 통해 내려오는 원한의 사슬이 완성된다. '그런 쪽에서 나는 제법 자유롭지.' 아무렴 떠돌이 용병한테 원한을 가질 귀족이 얼마나 있을까. 적어도 아이스랜드에 없겠지. 물론 영지의 이웃들이라면 조금 다를 수도 있겠으나, 이번에 볼턴 영지의 주인으로 임명받은 볼턴 남작 고든 스타크는 보통 방랑용병이 아니었다. 그는 소드마스터였다. 그것도 세오폰 왕국엔 어떤 연고와 원한이 없는 소드마스터. 하물며 그런 존재가 공작가와 직접 끈이 닿아있다니? '그렇지만 그게 다 빚이고 부담이란 말이지.' 물론 귀족들은 딱히 은혜를 갚을 필요는 없다 할 것이다. 대다수는 좋은 인식을 심어주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본래라면 사이가 나쁠 볼턴 영지의 이웃 영주들도 서로 사이좋게 앞다투어 흔쾌히 자신들의 성에서 가장 좋은 손님방을 내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은혜만 받고 입을 싹 닦아버리면 적어도 뒤로 염치없다며 말이 나올 것은 분명했다. 과장을 조금 하면, 평판 박살나기 딱 좋았다. 물론 주군인 알프레드에게 요청하면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다. 아무렴 영지를 받은 당사자가 도착하기도 전에 해당 영지가 초토화됐다면 그건 영지를 수여한 알프레드의 책임이 맞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손을 벌리는 건 좀.'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첫인상이라는 것이 있다. 아이오나를 구출하고, 소드마스터의 위용을 보였지만, 영지에 부임한 첫날부터 문제가 생겼다고 주군에게 쪼르르 달려가 손을 벌린다? 사정은 알겠지만, 앞서 말했듯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만한 실력자가 문제 조금 생겼다고 자기 주군한테 쪼르르 달려가다니? 권력자란, 귀족이란 그 누구보다 그 모양새란 것을 중요시했다. '그런데 어느 쪽이나 도움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단 말이지.' 콜던 내성의 목 좋은 곳에서 겨울을 나는 방법도 있었다. 혼자였다면 주저하지도 않고 이쪽을 골랐겠지. 그렇지만 지금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가신으로 받아들인 용병단이 있었다. 어쨌든 마음 넓으신 주군께서 그들을 위해 위로금 명목으로 일부나마 지원해주신다니 한숨 놓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충분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귀족'들'에게 빚을 지지 않고, 겉으로 보기에도 그럴듯하면서, 나름대로 꾸준한 소득을 올리는 방법을 제공해줄 수 있는 사람은? 고든은 딱 한 사람 떠올랐다. 캐서린 메리골드 아타니타스. '지금 콜던의 기름 절반이 마법사님의 영지에서 공급된다고 했지.' 정확히는 마법사의 탑에 속한 장원이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겨울 동안 가신들에게 비교적 안정적인 일을 소개해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 가버린 줄 알았던 사람이 갑자기 돌아와 황당해하던 캐서린도 그 사정과 생각을 듣고는 그럴 수 있겠다며 흔쾌하게 펑거스비 마을에 고든의 신하들을 소개했다. 영지 복구가 시작되는 봄까지 가신들의 주거 및 수입. 고든 자신의 주거 문제. 나름의 친분으로 사정을 무마하기까지. 한 사람에게 빚을 지는 것으로 모든 걱정거리가 해결됐다. "그게 절 졸졸 따라다니시는 이유가 되진 않는데요." 카렘은 크고 긴 국자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거대한 냄비 속의 붉은 소스를 휘젓던 손을 멈추고는 흘러내린 땀을 닦고 팔과 손을 주물렀다. 어린 몸으로 밀도가 높은 소스를 쉴 틈 없이 휘저었기 때문이었다. 성인 남성에게도 버거운 일인데 청소년도 안된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쉴 순 없었다. "그렇게 힘든 일이면 너네 집요정에 시키면 되잖아." 고든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투로 말했다. "그동안 뭐 힘든 일은 다 그쪽한테 시켰다면서."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아닌데?" "워낙 하는 일이 많아서 말이죠." "그 많은 일에 그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물건을 휘젓는 일이 더해져봤자 아니냐?" 그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닌데. "여기저기 속도 조절하면서 뿅뿅 돌아다니는 사람한테 한 자리에 계속 머무르면서 냄비를 휘저어달라고 할 순 없죠." "뭐, 정 그러면 심심한 나한테 시키면 되잖아." "아니, 백수 신세라고 해도 손님한테 집안일?" "백수는 아니지 백수는!" 고든은 순간 발끈했다. "그냥, 이건. 뭐라고 해야 하나.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좀 이른 겨울 휴가를 맞이한 거라고." "그게 백수랑 차이점이 뭐죠." "아주 큰 차이점이 있지." "어떤 건데요?" "백수는 귀족이 아니라는 거." 크으으으으. 고든은 뭐에 감동하며 감탄하는지 모르겠지만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던 카렘은 적당히 근육이 풀어지자 다시 냄비를 휘젓기 시작했다. "근데 그 냄비를 쉴 틈 없이 휘젓는 이유가 뭔데? 나 오기 전부터 계속 휘젓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그렇죠?" "나름 체력이 상당한데. 언제부터?" "아침부터 계속 휘젓고 있었죠." "굳이?" "그야 당연하죠." 고든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하지만 카렘은 결코 쉴 수 없었다. 국자를 휘저을 때마다 양파를 포함한 각종 채소가 녹아내린 토마토 소스와 소스보다 많은 양의 다져서 볶은 고기가 소용돌이쳤다. 그러니 방심이라도 했다간 이 많은 고기가 모조리 냄비 바닥에 눌어붙어 타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가 당장 만들고 있는 소스. 아니 요리 그 자체나 다름없는 물건은 소스보다 고기가 많은 요리의 대명사. 라구 볼로네제 소스 흔하게 미트소스라고 부르는 물건이었으니까. 카레보다 많은 양의 고기. 짜장보다 많은 양의 고기. 소스보다 많은 양의 고기. 미트소스! 이는 전생의 카렘이 가진 수많은 로망 중 하나였다. 전생엔 환경과 비용은 둘째 치더라도 뒤처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꿈으로만 꾸고 영상으로 만족하며 사다가 먹을 수밖에 없지만. 하지만 지금의 카렘은 달랐다. 그에겐 주방이 있었다. 비용 또한 전혀 들지 않았다. 게다가 쉬지 않고 냄비를 대신 휘저어줄 집요정 메리까지! 정작 메리는 낮엔 한 장소에 오래 있을 수가 없어 아차 했다. 하지만, 깨달았을 땐 이미 휘젓고 있었던 상황. 메리도 그에 매우 안타까워했다. 시간을 잘 조정했으면 팔 아프게 국자를 젓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 이것 봐라. 죽여주네." 풍겨오는 냄새를 못 참고 카렘에게 다가간 고든은 냄비 속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 쯔뻐어어억- 국자가 카렘의 손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냄비 속에 가득 담긴 소스가 물리력에 저항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올 만큼 농도는 뻑뻑했다. 고든은 슬쩍 옆으로 눈을 돌렸다. 냄비 옆에 눌어붙어 지층처럼 보이는 붉은 소스. 두께는 약 새끼손가락 길이. 즉, 소스는 본래 저 높이까지 차 있었으며, 수분이 증발한 끝에 소스보다 고기가 더 많은, 고기 죽에 가까운 물건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냄새 끝내주죠? 맛도 끝내줄 겁니다." "척 보기에도 그래 보인다 야." "정작 만드는 제 팔은 죽어버릴 것 같지만요...!" "얼마나 더 휘저어야 하는 건데?" "어디 봅시다." 국자를 놓은 카렘은 재빨리 스푼으로 미트소스를 한가득 퍼 올렸다. 수분감이 없어 뻑뻑하기까지 한 소스는 얼핏 보면 큼직한 고깃덩어리. 미트볼로 보이기까지 했다. "하, 씨. 얼른 좀 먹어봐." "좀 기다려봐요. 감상하는 중이었는데 참." 하지만 고든의 재촉이 계속되자 카렘은 곧바로 스푼을 앙 물었다. 그리고 침묵했다. 볼과 혀, 이빨을 이리저리 오물오물. 한 손으로 국자를 휘저으며, 다른 손엔 빈 스푼을 쥐고 눈을 감은 카렘이 맛을 음미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든의 유혹 또한 점점 더 강해졌다.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는 요리는 조건이 간단하다. 고기, 고기, 고기에 더더욱 많은 고기! 그리고 눈앞에 냄비에 담긴 소스보다 고기 죽에 가까운 붉은 소스는 남자의 로망을 자극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오랜만에 인내심의 한계를 맞이해 이걸 그냥 퍼먹어? 말아? 고민하던 고든에겐 다행히도 카렘의 음미는 끝났다. "이거면 충분하겠네요." "오, 그러면?" "아타니타스님 점심 챙겨드려야죠. 아이고, 팔 아파 죽겠네." 카렘은 연신 투덜거리며 화덕의 불을 꺼트리고 창고에서 달걀을 꺼내와 파스타 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고든. 지금 와서 물어보는 게 좀 이상하긴 한데 먹-" "을 거다. 이걸 눈앞에 두고서 안 먹으면 그게 남자냐?" "너무 성급한 의견 같은데요." 뭐, 그렇지만 적어도 아는 남자 중에 거절할 사람이 없는 것은 분명했다. "저기 스푼으로 조금 시식하시죠." "그 말만 기다리고 있었다." "네에아니 미친. 식사 말고 시식하라고요. 시식!" * * * "이건 오산이로군." 연구실에 앉아 미뤄뒀던 업무를 해치우던 캐서린은 손에 쥔 양피지를 내려다보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양피지의 정체는 다름 아닌 결산보고서. 그것도 지난여름에 초토화 당할 뻔했던 펑거스비 마을의 결산보고서였다. 집무실에 가득한 생활감의 흔적을 치우던 메리는 지나가다가 슬쩍 캐서린이 집중하는 양피지를 들여다봤다. "수익률은 오히려 전보다 늘어났군요." "응? 너 이런 문서도 볼 줄 알았냐?" "이전에 계약자들의 가계부를 작성한 적이 있습니다." "아, 그렇다면 뭐." 캐서린은 이해했다는 듯 삐딱하게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세웠다. "좋은 소식 아닙니까?" "그래. 이건 기쁜 오산이지. 망한 줄 알았던 장원이 더 큰 금덩이가 되어서 돌아온 격이니까." "당황하신 것 같습니다만." "응? 그렇게 티가 났다고?" 메리는 트레이에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접시를 놓으며 끄덕였다. "눈 깜빡이는 것보다 서류 하나 해치우는 게 빠르신 분이 한참을 서류 하나 붙잡고 계셨다면 마탑의 누가 보더라도 알지 않겠습니까? 물론 양피지의 내용이 사실이면-" "누가 보더라도 경악하겠지." 펑거스비 마을의 한 해 결산이 담긴 장황한 미사여구로 가득한 양피지의 내용을 캐서린은 가볍게 해석했지만, 도리어 머리는 무거워졌다. "겨울부터 초여름까지 수익률은커녕 손해만 가득한데, 고작 한 계절만으로 그동안 매해 벌어들인 수익을 초과했다고?" "호오, 그런데 그걸 모르셨다는 겁니까?" "나도 듣고 나서야 찾아볼 생각이 들었는데." 어쨌거나 고든의 겨울 취업 알선을 승낙한 캐서린은 그제야 잠시 미뤄두었던 서류 더미를 뒤적여 가장 밑에 깔려있던 펑거스비 결산보고서. 그러니까, '올 한 해 세금은 이만큼입니다. 충성충성' 보고서를 쥘 수 있었다. "원래 사치재나 무기보다 소비재가 돈을 더 많이 벌기는 하지." 캐서린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그건 대량으로 거래한 차익같은 그런 거 아니었나? 뭐? 기름 팔아서 번 돈이 버섯 판 돈보다 대체 몇 배나 벌어 들인 거야?" "그야 당장 콜던에서 사용되는 기름의 절반이 펑거스비에서 생산되니 그러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거야." 나도 아는 일이긴 한데. 이해할 수 있다는 이성과 이해하기 힘들다는 본능 두 이율배반적인 충돌로 캐서린은 말을 잃었다. "콜던의 기름판을 모조리 먹어치우겠다는 편지를 받고 이건 무슨 오우거가 사교댄스 추는 소린가 싶었는데..." "머리 아픈 일은 잠시 중단하시고." 메리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캐서린의 손에서 양피지를 뺏어 들었다. "식사하실 준비를 하겠습니다." "뭐?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똑똑똑-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문틈으로 각종 향신료로 가릴 수 없는 진한 산미를 품은 은은한 소고기의 육향. 그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문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자료첨부*** -라구 소스(Ragu Sau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