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으로 캐서린에게 고용되어 마법사의 탑에서 근무하는 카렘이 탑 밖으로 나올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어지간한 일은 브라우니인 메리의 선에서 끝났다. 아니, 오히려 카렘이 요리 이상의 일을 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덕분에 여태 카렘이 탑 밖으로 나올 때는 하나의 경우. 식료품이 떨어졌을 때 뿐이었다. 탑에 사는 사람이라고는 고작 셋 뿐이지만, 그 셋에 성장기의 소년과 성장기의 몸으로 고정된 여마법사 하나, 그리고 배부르게 먹었다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브라우니라면 말이 달라졌다. 그 덕인지 카렘은 탑 밖으로 외출하는 빈도가 높았지만, 그마저도 오가는 경로는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을의 막바지에 첫눈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카렘은 난데없이 끝난 줄로만 알았던 전속 시종의 업무로 복귀해야만 했다. "카렘 후배. 전속 시종 일은 끝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억울한데요!" "하지만 계약자가 안 끝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의도치 않게 거짓말을 하게 된 카렘은 억울한 나머지 소리쳤지만, 그 마음을 딱히 알아주고 싶은 생각이 없던 메리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쉿, 말이 많습니다. 변명은 그만." "아타니타스 님. 전속 시종 일은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계약자한테 방향을 돌리는군요. 이럴 줄 알았지. 드디어 제 업무를 빼앗기 위해 행동하기 시작했습니까." 투덕거리는 카렘과 메리의 앞에 가던 캐서린이 고개만 돌려 어깨를 으쓱했다. "꼬마. 난 한 번도 네 전속 시종 일이 끝났다고 한 적이 없었다만." "네? 하지만 그동안은-" "아니지, 잘 생각해 봐라. 내가 언제 끝난다고 말 한 적 있던가? 하물며 계약서에는?" 그 말에 카렘은 멀다면 멀고 짧다면 짧은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모든 일이 시작된 보더스터의 내성, 카스테라를 앞에 두고서 오갔던 대화를. '연봉 6크라운' '꼬마. 네가 머무를 수 있는 개인실과 가구 제공.' '1년에 두 번 물가 상승을 고려한 급여 조정.' '직무는 전속 요리사를 겸한 전속 시종.‘ "그리고 계약서의 내용도 얼추 기억해보지 그러냐?" "계약서요?" 그 독소 조항 하나도 없이 나한테 이득이 가득했던 계약서라면 카렘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그런 깨끗하고 친-노동자적인 계약서를 본 적은 없었으니-잠깐만. "전속 시종일이 끝나는 문구가 없다...?" "킬킬킬. 계약서를 꼼꼼히 읽기는 했지만, 이런 변화구도 있다는 걸 알아야지." 카렘은 아차 싶었다. 설마 이런 함정이 있었을 줄은....! 그리고 그 반응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메리의 눈초리는 점점 가늘어졌다. "카렘 후배애애애애-" "아니, 이건 불가항력입니다." "과연 제 영역을 넘보는 것이었습니까." "아니, 그런 영역 줘도 안 가진 다니까요?" "감히 집안일을 우습게 여기는 겁니까!?" “이거 음해에요.” 일부러 했다는 것이 확 느껴지는 확대 해석을 통한 의견 왜곡에 카렘이 밀리기 시작하고 싸움이 길어질 것 같아지자 캐서린은 곧바로 중재에 나섰다. "뭐, 메리. 너도 거기까지만 해라." "자고로 브라우니에게 집안일이라는 것은 영혼과도 같은 것이며-" "꼬마가 전속 시종을 겸한다고는 했지만, 네 일까지 한다는 것은 아니지." 캐서린은 팔을 높이 뻗어 진정하라는 듯 메리의 이마를 가볍게 손 날로 쳤다. "어디까지나 내 수행은 메리, 네가 전담할 일이지. 꼬마의 전속 시종 일은 명목상일 뿐이다." "...계약자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계약자의 단언에 자신의 영역을 다짐받은 메리는 안도했고, 난데없이 불똥이 튈 뻔했던 카렘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아, 물론 어쨌든 마법사의 탑에서 사는 덕분에 귀찮은 일은 모두 도맡아 하는 메리를 화나게 해 봤자 좋을 건 없었으니까. 아 물론 캐서린의 시중을 안 들어도 돼서 안도한 것도 있었다. 시간이 지났다고는 하나 캐서린의 외모는 너무 과했다. 물론 긍정적인 부분으로. "...응? 근데 이렇게 되면 난 안 따라와-" "무얼 꿍얼거리고 있는 거냐. 도착했다." "아."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출발하기 전에 했다면 모를까, 지금 와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성, 윈터홈의 주인인 아이스랜드 공작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으니까. 여기까지 와서 혼자 마법사의 탑으로 돌아간다고 할 정도로 그는 간이 크지는 않았다. * * * 콜던의 중심부에 자리를 잡은 성, 윈터홈. 아이스랜드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알프레드 펠윈터의 집무실은 카렘이 생각했던 것과는 영 딴판이었다. 공작치고는 소탈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사치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소파, 의자, 벽난로, 책장. 하다못해 벽에 걸린 뭔지 모를 생명체의 가죽과 박제에 이르기까지 고급스러움이 한눈에 들어왔으니까. 하지만 생각도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그쪽이 직접 고용했다는 전속 요리사인가?" 집무실의 책상에 앉은 알프레드가 두 눈에 흥미를 가득 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대상은 하필이면 메리를 따라 캐서린의 뒤에 선 카렘에게 향하고 있었다. "넵." "긴장할 필요는 없네.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것 뿐이니." 알프레드의 호기심은 진심이었다. 대마법사가 잊은 물건을 가져오겠답시고 들고 온 짐이랑 계약조차 내팽개치고 돌아갔다가 왔는데, 그 곁에 왠지 모를 소년이 같이 있다? 관심이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 없었다. 다만 카렘은 그 관심이 불편하기만 했다. 아니, 오히려 이 상황에서 긴장하지 않는 일반 사람이 과연 있을까? 물론 카렘이 생각하는 일반 사람이란 권력자가 아닌 길거리에 차고 넘치는 평민과 농노를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미 전생을 기억한다는 시점에서 평범은 저 멀리 가버린 상황. 물론 카렘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지는 않았다. "알리시아의 자랑을 들었지. 요리를 굉장히 잘 한다고?" "어, 알리시아 공녀님이 말입니까?" "그래. 그 아이가 마법사의 탑에 침입해서 먹었다는 간식을 그렇게나 자랑하고 다니더군." 그리고 알프레드의 호기심은 의문으로 바뀌었다. 긴장을 하긴 했지만 같은 나이 또래에 비하면 조숙한 모습. "부족한 실력입니다." "아니지, 그 애의 입맛이 까다로운 건 아비인 나도 무척 잘 아니까. 그나마 편식만큼은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할까." "공녀님이 말입니까?" "그래. 성을 돌아다니며 어찌나 자랑하던지. 본성의 주방장이 라이벌 의식을 가지기 시작하더군?" 그렇게 말하면서 알프레드는 카렘을 살폈다. 손에 굳은살이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지만, 그것 외에는 딱히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알리시아가 내게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으니, 실력은 진짜인 것 같은데." "칭찬 감사합니다." 카렘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한 문장뿐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있을 줄이야. 물론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높으신 분과 마주할 일이 벌어졌겠지, 근데 너무 높으신데? 환경과 여건을 따지더라도 높으신 분들과 안 마주치는 것이 마주치는 것보다 힘든 것이 당연했다. 당장에 지금을 포함해 세 번이나 마주쳤으니까. "자아, 자. 거기까지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때, 나 불만있소라는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있던 캐서린이 팔짱을 풀었다. "제 전속 요리사를 괴롭히는 건 그만하시지요?" "괴롭히다니. 알리시아의 까다로운 입맛을 어떻게 만족하게 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그 아이의 아버지로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만." "아니 그 이전에, 꼬마의 모습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그 말에 카렘을 이리저리 살피던 알프레드는 빠르게 알아차렸다. 나이에 맞지 않게 차분히 대응한다고 생각했건만, 정작 당사자인 카렘은 얼굴이 새파랗다 못해 새하얗게 질려버리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긴장의 한계에 도달한 모습이 분명했다. "음, 그건 내 불찰이로군." "알아차리셨으니 다행입니다. 주군." "그 전에, 우선 귀족이기 전에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말하는 건데." 집무실의 책상에 앉은 알프레드가 양피지와 깃펜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 진중한 시선의 끝엔 카렘과 메리를 대동한 캐서린이 앉아 있었다. "알리시아가 뭔가 크나큰 무례를 저지르지는 않았나?" "사고를 치지는 않았지요." "정말로?" "멋대로 탑에 잠입했다가 들키고 간식을 먹어 치웠을 뿐입니다." 알프레드는 캐서린의 그 말을 듣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안도했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그것뿐이라면 정말로 다행이로군. 사과하도록 하지."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여기 꼬마보다도 나이가 어리신데 그러실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사과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캐서린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알프레드는 넘어갈 수 없었다. "아니, 이건 그냥 그렇게 넘길 수야 없지. 주인의 초대도 받지 않고서 숨어들었다니. 도둑이나 다른 바 없는 짓이야." "엄밀히 말하자면 이 성, 도시 전체가 그쪽의 소유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타니타스. 그대는 내 초대를 받아 내가 제공한 곳에 머물고 있지." "접대의 관습. 거기까지?" "신상필벌은 확실해야 하니까. 아무래도 내가 알리시아를 너무 오냐오냐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알프레드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어린아이는 넘치는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는 법. 알리시아는 바로 그런 어린이였으며 공작가의 막내딸인 그녀를 직접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하물며 그녀의 집은 면적만으로 작은 마을만큼이나 거대한 펠윈터 가문의 본성인 윈터홈이었으니까. 모험의 욕망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고보니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공녀를 찾기 위해 성이 시끄러웠지." "막내딸이라 너무 이뻐해서 버릇이 잘못 들은 것일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교육과 체벌이 필요했다. 하물며 집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침입하다니. 이는 캐서린을 초대하고 주거를 제공한 알프레드의 위신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긴장하고 있던 카렘은 감탄하다 못해 감격할 것만 같았다. 현생의 애미애비mk.2에 비하면 참된 아버지였으니까. "후우, 좋습니다. 주군. 아시다시피 무척 바쁜 와중에 어떤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바쁘다라...역시?" "....크흠. 주군.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뭔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음.” 옆자리에 앉아있던 카렘은 순간 욱하는 캐서린의 어깨를 붙잡았다. 메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지 않았으면 캐서린이 대뜸 앞으로 튀어나갔을 터. 그야 당연했다. 비록 그녀가 현자에 다다른 대마법사라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살아 숨 쉬는 인간이었다. 이미 죽었다가 일어난 언데드가 아니라. 본래 같이 혹사당했을 마법사들이 산화된 탓에 그 모든 업무를 그녀 혼자서 담당해야만 했다. 왕에 비견되는 공작이라 예의를 차리고는 있었지만, 이건 선 넘었지. "그렇다면 안그래도 맡긴 일거리가 많은 터. 미리 사과하도록 하지." 그리고 이어진 알프레드의 말은 그녀를 분노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