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종 개량. 플랜트 호더나 환경주의자들은 이를 인간이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인위적으로 자연의 법칙을 어기는 행위라고 주장하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일. 인류의 기나긴 역사에는 언제나 품종 개량이 함께했다. 인류의 번영 자체가 품종 개량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다. 식용 식물을 교접해 더 많은 작물을 얻고자 하는 행위는 가장 오래된 문명이라는 고대 이집트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보다 훨씬 먼 과거부터 이어진 행위임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작 강아지풀 수준에 불과했던 곡물. 과육보다 씨앗의 비중이 크고 그마저도 작았던 과실. 애초부터 식용이 아니었던 풀떼기에 이르기까지. 당장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양배추류와 브로콜리, 콜라비나 각양각색의 잎채소가 전부 하나의 겨자과 식물에서 비롯된 것이 이를 증명했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라 고추는 피망과 동종이며 토마토, 감자, 가지와는 사촌일 정도로 품종 개량은 인류에게 그리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물론 인위적이라고 해도 고대 역사를 언급할 만큼 개량이 오래 걸리는 것도 사실이라면 사실이었다. 개량에 걸린 시간이 이례적으로 빠르다는 옥수수조차 천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으니까. 그 사실을 카렘은 온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뭐지." 카렘은 손안에 쥔 붉은 과실을 이리저리 굴렸다.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탐스러운 과실. 척 보기에도 과즙이 풍부할 것 같은 붉은 과실은 뚱뚱한 꼭지 부분을 시작으로 열매의 끝으로 갈수록 휘어지듯이 굽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게 붉은 마녀의 손가락을 개량한 거라고? 아니 물론 카렘도 비슷한 경우를 알고 있었다. 파프리카, 아니 피망 비슷한 맛을 내던 그 뚱뚱하고 짤막한 변종. 하지만 그건 애초에 맛이 약해지고 향이 달라졌을 뿐 종 자체에서 크게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건 뭐란 말인가. 식물로 요리는 해도 그걸 기르는 지식이 없는 카렘이어도 무언가를 개량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물며 현대 문명의 각종 기상천외한 약품과 도구들이 없다면 더더욱. 그렇기에 지금 약간 형태가 다르지만, 토마토가 연상되는 열매가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딸깍거리는 소리가 났다. 카렘의 반응이 생각했던 그것이 아니라 코르부스가 부리를 부딪히고 있었다. "흠, 요리사인 카렘 씨라면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아뇨. 기쁘죠. 안 기쁠 수가요." 이게 카렘이 생각하는 그것이라면 요리사로서 싫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만으로 할 수 있는 요리의 가짓수 자체가 또 껑충 뛰어오를 텐데! 물론 페이스트로 만들고 뭐 하고 준비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거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식물을 개량하는 게 원래 이렇게 빨리 되는 거였나요? 아니 한 계절이 다 지나간 것도 아니고, 고작 몇 개월이었는데?" "하하하. 카렘 씨도 아직 순진하군요." "예?" "그야 당연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뭐 어떻게? 신비한 까마귀 몬스터의 불경한 마법이라도 사용하신 겁니까?" "흐으음." 코르부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발톱으로 부리를 긁었다. "물론 그런 비슷한 주술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있는 겁니까." "하지만 그랬다간 먹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게 되니 논외입니다. 애초에 적대적 생물을 저주하거나 공격하는 용도이기도 하고." "그렇다면요?" 그리고 코르부스는 깃털 속으로 발톱을 집어넣었다. 전보다 풍성해진 깃털 속에 뭐가 그렇게 많이 들어있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한참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코르부스의 발톱 끝에 성인 머리 크기만 한 청아한 에메랄드빛 구체가 잡혀 나왔다. "자고로 모든 문제는 결국 돈이 없어서 생기는 법입니다." "어...마도구?" "그렇습니다. 생명의 오브라고 하죠." 코르부스가 부리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엘리자베스 공작부인에게 요청하여 빌린 원예용 마도구입니다. 식물의 생장을 빠르게하는 드루이드의 마법이 걸려 있죠." "드루이드 마법?" "물론 그것만으로 부족해 여러 조건을 마련하여 최적의 결과로 과육이 오동통하게 오른 변종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코르부스는 발톱으로 온실의 한쪽을 가리켰다. 전에 봤던 붉은 마녀의 손가락이 자라는 밭과 피망 변종이 자라는 밭의 바로 옆의 끄트머리에 작게 마련된 밭. 그곳에서 카렘의 손아귀에 쥐어진 열매가 그렁그렁 열린 덤불이 자라나고 있었다. "한데." 생명의 오브를 도로 깃털 속에 집어넣은 코르부스는 무언가를 찾는 듯 머리를 돌리며 새까만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폈다. "공녀님이 보이시지를 않는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분명히 함께 오셨으리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무슨 일이겠습니까?" "아, 역시?" 코르부스는 카렘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선을 마주친 카렘은 눈을 감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입니다." "음, 역시 포핀스 부인이라고 해야 할지." "그냥 얌전히 수업을 들으시는 게 알리시아님한테도 편한 일 아닐까요?" "그러시는데도 수업 자체는 충실하게 따라가고 계신다니, 그냥 한 자리에 얌전히 앉아있는 행동 자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게 아니겠습니까?" 하긴 알리시아는 이제 막 6살. 그리고 윈터홈은 거대한 성. 생명력이 폭발할 나이의 어린아이. 하물며 호기심이 넘치는 자유로운 성격에 알리시아는 공작의 막내딸이었다. 환경, 지위, 성격이 맞물린 알리시아가 윈터홈의 가장 자유로운 바람이 되는 것은 얼핏 당연하기까지 했다. 라는 평은 윈터홈 전체에서 자자했다. "알리시아님도 마음에 드셨는지 몇 개나 드시고 가셨었습니다." "이거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지금 당장 말씀입니까?" "네. 가능하면 정기적으로 받을 수 있으면-" "으음, 당장은 어렵겠군요." 어째서!? 하지만 코르부스도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다. "강제로 생장시킨 거라 이 이상 오브를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씨앗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어려울 듯하군요." "그건 좀 아주 아쉬운데요." 원래 기대한 만큼 실망도 크다고 하던가. 생각지 못했던 문제에 카렘은 마음속 깊이 공허함을 느꼈다. 아니지, 카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물량은 어떻게든 확보가 된다는 뜻이겠죠?" "그렇습니다. 몇 달이 지나 충분한 물량의 씨앗만 확보할 수 있다면. 그때쯤이면 성 외부로도 자유롭게 자유롭게 반출할 수 있을 겁니다." 카렘은 잠시 눈을 감고 실망하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앞으로 고작해야 몇 달. 현생에서 낭비한 10년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떻게든 상황을 이해한 카렘은 코르부스가 내민 변종의 변종, 그러니까 토마토가 제법 든 작은 바구니를 받아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캐서린의 간식을 준비할 시간. 손바닥 안에 쥔 오동통한 토마토를 굴리던 카렘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나선 코르부스가 물었다. "그런데 손에서 굴리시기만 하실 겁니까?" "네? 뭘 말입니까?" "그 손에서 굴리고 있는 열매 말입니다." "이 말랑한 감촉이 조금 마음에 들어서." "일단 먹어 보시지요. 상상 이상으로 즙이 많습니다. 제법 달콤하기도 하고요." 하긴. 코르부스의 말대로면 일단 맛은 있는 듯했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카렘이 그 맛을 알아야 하는 것. 옷자락에 껍질을 슥슥 닦은 카렘은 망설임 없이 붉은 마녀의 손가락 변종 그 두번째의 끄트머리를 넣고 씹었다. 툭! 서걱! 첫 번째 감상은, 의외로 질감이 단단하다는 것. 전생의 카렘이 기억하는 그것보다도 훨씬 단단했다. 두 번째는 상상 이상으로 과즙이 적었다. 카렘에게 익숙한 토마토라면 본래 과육 안에 씨앗을 품을 과즙이 한가득 들어있어 씹는 순간 과즙이 푸화학 터져 나왔다. 그 맛도 그 자체로는 오묘하기 짝이 없어 편식하지 않는 전생의 그라도 토마토를 생으로 먹는 것은 꺼렸었다. 그렇지만 지금 먹은 변종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즙이 적을 뿐. 오히려 맛은 전생의 것보다 훨씬 풍부했다. 전생에 먹었던 토마토에 비하면 페이스트를 열매로 응축해놓은 것 같은 풍부한 감칠맛과 은은한 단맛. 씹으면 씹는 데로 서걱서걱 썰리는 높은 밀도의 과육은 이빨에 부서지며 입자 사이사이에 감칠맛과 달콤함이 빠짐없이 깃들어 있었다. 기대했던 전생의 그 감칠맛이 아니었더라면 얼핏 과일로 착각할 만큼 달콤함이 함께 퍼져나갔다. 그래, 적어도 카렘에게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익숙한. 그런 모순적이기 그지없는 맛이었다. 전생에 먹었던 생토마토와 토마토소스와는 달랐다. 비교하면 외국산 페이스트나 소스 쪽과 더 유사하다고 할까. 외국산 토마토소스, 페이스트가 더 맛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건 매우 좋은 오산이었다. 한참 맛을 음미하던 카렘은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맛을 느끼느라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허! 와 씨 진짜. 허어어어어어." "어째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드냐고요?" 카렘은 숨을 몰아쉬며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반절 잘린 열매와 코르부스를 번갈아서 쳐다보다가 다시 반을 잘라먹었다. "이거면 할 수 있는 요리가 십 단위는 가볍게 넘을걸요?" "극찬이로군요." 카렘은 진심이었다. 동서양을 대표하는 소스를 하나씩 꼽자면 간장, 토마토 페이스트가 양 끝에 설 정도로 서양 요리에 많이 쓰이는 것이 토마토였으니까. 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간장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음과 양, 플러스와 마이너스, 빛과 어둠이 있듯이 토마토 페이스트를 만들 수 있는데 간장이 없다는 것은 카렘으로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아무튼 완두콩도 콩, 식물성 단백질이다. 밀짚도 엄연히 따져서 지푸라기고. 그러면 간장을 만들 수 있겠지! 그 이전에 메주부터 이리저리 실험해봐야겠지만! 그리고 카렘에겐 때마침 정말 다행히 메주와 간장을 실험하는데 들 시간을 대폭 줄일 마법 도구도 있었다. “이제 적당한 이름을 붙이기만 하면 될 텐데-” “토마토로 하죠.” “토마토?” “저번에 그 다른 변종도 이름은 안 정했죠?” “예. 지금은 그저 변종 붉은 마녀의 손가락이라고 하고 있을 겁니다. 그나저나 변종이 이제 둘이나 되니 이름이 필요하긴 하겠군요.” “그건 피망이라고-” 카렘은 그렇게 잠깐 코르부스와 수다를 떨었다. * * * 담소를 나누던 카렘에게 선물을 한 바구니 쥐여주고 돌아오는 길. 코르부스는 찜찜하다는 듯이 부리를 두드렸다. "뭔가 빼먹은 것 같은데. 흠, 그게 무엇일까..." 팔짱을 끼고 발톱으로 연신 부리를 두드리며 둥지를 지나 불마손과 그 변종인 피망, 토마토가 자라는 밭을 밟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멈칫. "아, 맞다." 코르부스는 머리 깃털을 긁적이며 온실의 출입구를 봤다. 원래 이전에 맡긴 콩도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카렘이 나가는 것을 보고 돌아왔으니 아마 지금쯤 온실을 나간 지 한참은 됐다. 다시 부르려면 경비병에게 부탁해 파발을 보내야겠는데... "뭐, 아직 당장 다 자란 것도 아닌 것 같으니. 나중에 더 크면 보여드려도 상관없겠지." 코르부스는 마도구가 설치된 밭을 가로질러 그 뒤에 작게 마련된 밭으로. 아니, 밭보다는 취미용 화단에 가까운 작은 개간지로 이동했다. 흑갈색의 기름진 토양. 그 위에 덩그러니 자라난 알 같은 모양의 꽃봉오리. 코르부스는 부리 밑을 발톱으로 쓰다듬으며 갸웃거렸다. "콩인 줄 알았는데. 콩이 아니었단 말인가?" ***자료첨부*** -작중 토마토와 최대한 비슷한 외형- 챗GPT가 그려준 그림입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