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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흑마법사들을 때려잡은 이후. 필립은 챙겨온 비상 물품들로 부대원을 치료하고, 힐다와 칼튼은 연구실을 뒤적이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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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흑마법사들의 시체를 한데 모아두고 있자니, 카렌이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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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쯤은 살려두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요 도련……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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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그냥 편하게 불러. 나는 도련님 소리도 듣기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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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됩니다. 이미 가주님께서는 자하브 가문의 주인이시고, 제국에 셋 뿐인 대공이시잖아요. 호칭은 똑바로 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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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읍. 난 좀 서먹해진 것 같아서 아쉽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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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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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런 걸로 명령할 것까지야. 카렌 네 말이 맞겠지. 난 이런 쪽은 아무래도 잘 모르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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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 계승식을 마치고 가주가 되었기 때문일까. 묘하게 고분고분하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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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카렌이 대충 뭉쳐놓은 흑마법사 시체를 발끝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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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조금 아쉽네요. 만약 한 놈 정도 살려두셨다면 뭐라도 정보를 캐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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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카렌아. 그런 말랑한 얼굴로 고문 같은 것도 할 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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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의 볼따구를 양옆으로 주욱 잡아 늘리자, 얌전히 내게 불을 내어준 카렌이 무감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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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하는 게 아니라 할아버님이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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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뭐어, 너무 아까워하지 마. 설령 세 놈 모두를 살려서 심문한다 해도 제대로 된 정보는 얻을 수 없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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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할아버님의 실력은 꽤 대단하십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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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아론이 누구 하나 고문하는 일은 잘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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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주님의 명으로 인한 것이라면 케세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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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그건 그것대로 재밌어 보이는 이야기지만, 애초에 흑마법사 상대로는 애초부터 전제가 잘못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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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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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는 거 보니, 카렌 너는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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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나마 머리가 멀쩡한 대장격 흑마법사의 시체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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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마지막에 봤지? 갑자기 말투가 연극체로 변한 거. 이게 보통 대장격 흑마법사들이 그렇게 말투가 오락가락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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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비극의 신의 신력을 받아들인 부작용이라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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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게 그런 이유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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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흑마법사는 여럿 잡았지만, 왜 그런지는 별로 궁금해한 적 없었기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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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머릿속에 넣어둔 뒤. 하던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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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게 비극의 신 때문인지 그냥 미친놈이라 그런 건지 몰라도, 확실한 건 말투와 함께 머리도 오락가락한다는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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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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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정보를 빼내려 해도 헛소리만 하거나, 어찌어찌 정보를 알아내도 거짓이거나 함정인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경우에 따라서는 정보를 실토하는 척 이쪽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던 놈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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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흑마법사와는 말을 섞을 이유가 없다. 말을 섞더라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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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죽이고, 시체나 연구실 같은 곳에서 정보를 알아내는 게 훨씬 나아. 그래서 이렇게 바로 빠져나가는 대신 여기저기 뒤져보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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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겁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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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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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모은 흑마법사들의 시체를 뒤적이며 대충 답해주던 도중. 카렌이 조심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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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흑마법사를 상대해 보신적인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 건가요. 너무 능숙하기도 하시고, 어쩐지 놈들이 가주님을 알아보는 것 같기도 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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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 안 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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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긁적이며 아무것도 없는 시체 하나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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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칼립소에도 흑마법사 지부가 하나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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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 칼립소라면 하나 있을 법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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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좀 뭐랄까. 거슬려서? 자꾸 충돌해서? 응. 아무튼 그래서 쳐부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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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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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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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내가 좀 헷갈리게 말하긴 했지. 알고는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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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결국 내가 어린 시절에 흑마법사 조직에 실험체로 팔려나갔다는 이야기까지 해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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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실 자하브의 사생아가 아닌 짭이라는 사실이 알려질 수도 있고……그게 아니더라도 당시의 기억은 내 가장 깊은 상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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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흑마법사만 보면 발작을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어린 시절의 일을 말하는 건 아무래도 거부감이 든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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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약점을 밝히는 건 칼립소에서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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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른 흑마법사의 시체 하나를 더 수색하는 내내 눈만 깜빡이던 카렌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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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으……그러고 보니 가주님께서는 칼립소에서도 자신만의 조직을 꾸리셨었죠. 가장 낮은 곳의 주인이라는 게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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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조직이라고 할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지만, 같이 사는 친구들이 좀 있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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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고아팸이라고 해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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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 없이 대륙의 거물급 범죄자가 유입되고, 그 이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칼립소에서 고아는 취약계층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존재하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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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생존을 위해 자기들끼리 뭉치는 경우가 많았고, 막 흑마법사 조직에서 빠져나온 시기의 나 또한 자연스레 고아팸에 합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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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팸의 가입 조건은 부모가 없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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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시간이 지나며 다들 머리가 굵어지며 아이라 부르기 힘들어졌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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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범죄 조직에 들어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용병의 일원이 되기도 하고……누군가는 마음이 맞는 몇몇과 함께 새로운 모임을 만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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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같이 영차영차 힘내며 집도 사고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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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집이 생기고 나자, 어렸을 때부터 사이좋았던 놈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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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중재시키려 해도 내가 얼굴을 비추는 순간 입을 싹 다물어 버리니 중재도 힘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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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남자라 내게는 말 못 할 갈등이 있겠거니 넘어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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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너무 크게 다투는 바람에 다 같이 살던 집이 박살 난 이후.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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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여초 직장에 남자 혼자 다니는 게 헬이라는 건지! 누나들 사이에서 자란 막내아들이 여자만 보면 진저리를 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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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각자 따로 살기로 하고, 마침 찾아온 아론과 카렌을 따라 칼립소로 오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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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생략할 건 생략하고, 숨길 건 숨기며 말한 내 이야기를 들은 카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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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그런 걸 조직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적어도 다른 흑마법사들은 그렇게 여겼겠죠. 과연. 이해됐습니다. 새로 생긴 조직을 견제하려다가 가주님께 역으로 당한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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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방해라서 내 쪽에서 보이는 족족 죽인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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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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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꾸욱 다문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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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기도 하지만……솔직히 말하자면 포악한 전투광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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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효과가 있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카렌. 무표정은 여전하지만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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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자축하는 사이. 간신히 진정한 카렌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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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소리 없는 자들의 종말이라는 건 또 무슨 의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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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별거 아냐. 흑마법사 놈들이 쫄리니까 암살자 길드를 동원해서 날 죽이려고 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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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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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래서 암살자 길드도 같이 쳐부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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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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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잇. 여기도 아무것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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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투덜대며 마지막 시체를 내던졌다. 이쪽은 허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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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카렌이 멍하니 굳어있길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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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기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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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따구는 이미 많이 만져봤으니 패스한다. 그 대신 카렌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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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번쩍 들어 올리며 어린아이와 놀아주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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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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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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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이건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무감각한 카렌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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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 하시는 겁니까 가주님. 내려주세요. 제 키가 작을지언정 나이는 그리 어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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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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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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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 발버둥 치는 카렌. 하지만 이미 완전히 몸이 들어 올려진 상태에서 뭘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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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을 저항하다가 결국 축 늘어지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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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표정. 하지만 묘하게 원망이 서린 눈빛에 낄낄 웃던 도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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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을 뒤져보다 무언가 발견한 걸까. 뒤에서 힐다가 살짝 신난 어조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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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보세요 가주님! 해석이 필요할 것 같지만 뭔가 중요해 보이는 서류를 발견……가주님? 그리고 카렌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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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부터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는 힐다.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비비적거리길래 그제야 카렌을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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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발이 땅에 닿았음에도 가만히 멈춰선 채……아니, 정확히는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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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스러움에 바들바들 떠는 그녀를 지나쳐 어벙하게 입술만 뻐끔대는 힐다가 쥐고 있는 종이 뭉치를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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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칼립소가 아니라 다른 지역이라 그런지 내가 모르는 암호체계를 사용하고 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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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말하면 암호화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라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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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어 힐다. 챙길 것도 챙겼고, 구할 사람도 구했으니 이제 돌아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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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 네. 그으……카렌 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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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회복하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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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이고는 왔던 길을 역으로 거슬러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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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눈치를 보면서 카렌을 피해 따라서 움직이던 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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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카렌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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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계승식 준비로 쌓여있는 업무가 많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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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아니, 그런 건 제벨라 누님이 대신 하기로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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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저는 원칙대로 일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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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이 치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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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나 때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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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내리쬐는 밝은 창가. 하지만 바깥의 풍경은 볼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일하던 뚱뚱한 중년의 사내가 흠칫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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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주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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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잠깐 좀 쉬고 싶으니 나가 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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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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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떨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나가는 비서. 그 모습을 확인한 중년인의 푸근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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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진입조가 전멸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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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뒤의 어둠에서 펼쳐지는 것은 동지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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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청년. 에녹이 사납게 웃으며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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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발동되는 기억의 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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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던 상단주……아니, 상단주로 위장한 흑마법사가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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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칼립소의 바깥으로 빠져나왔는가. 그나저나 저 복장은……자하브? 허어. 그런가.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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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인 흑마법사가 떨리는 손으로 차를 홀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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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우리의 고향을 부순 이가 보통 인물은 아니겠지. 아무리 업보가 목을 졸라와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니. 이제야 이해되었다. 최근에 자하브의 사생아가 가주가 되었다고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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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실험체 출신이라는 걸 알고 있던 흑마법사들마저 너무도 자하브스러운 에녹의 모습에 착각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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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고아가 아니라 자하브의 사생아를 데려와 실험체로 삼았던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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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과정에서 잠들어 있던 피가 각성한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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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착각이지만 이를 바로잡아 줄 연금술사는 진작에 에녹의 손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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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태양이라 한들 약점 없는 존재는 없는 법. 그 어떤 불길도 영원히 타오를 수는 없고, 그 어떤 빛도 언젠가는 어둠에 수렴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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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트라우마를 애써 억누른 흑마법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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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여. 네 정체를 알았으니, 이것으로 네 심장을 찌를 비수를 만들 수 있게 되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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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전역에 흩어진 흑마법사들이 같은 기억을 공유받고, 은밀한 협력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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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자하브를 죽이기 위한 무기를 주조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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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자하브가 아닌 이에게는 별다른 효과가 없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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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가 약속했던대로 가주가 되긴 했지만, 하는 일은 정말로 얼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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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힐다의 수업이 시작되기 전. 아침에 눈을 뜬 이후로 한 발짝도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뒹굴거리며 카렌에게 귀찮게 구는 도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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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곧 자하브로 돌아올 거라는 새 여동생. 유리아에 대해 생각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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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사실 나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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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여동생이 하나 생겼다고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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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하브에 들어오며, 제벨라라는 새 누나가 생긴 것처럼 유리아라는 여동생도 함께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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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유리아는 어떤 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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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아가씨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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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처음 만나는 거니까 조금 궁금해서 말이야. 역시 제벨라 누님 같은 분위기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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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아무래도 유리아 아가씨는 제벨라 아가씨와 많이 다르시죠. 정확히는 제벨라 아가씨가 다른 자하브의 여식분들과 비교해도 좀 특이한 분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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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벨라 누님에게 그 부분에 관해서는 얼추 들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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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의 혈계능력은 오직 남자에게서만 발현된다. 하지만 여자라고 하여, 완전한 일반인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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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자하브의 흔적 정도는 남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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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는 시간이 흐르며 피가 연해지자, 격세유전으로 자하브의 흔적마저 지워버리며 다른 가문의 피가 발현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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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자하브 안에서도 무척이나 특이한 경우였고, 그렇기에 전대 가주인 카인에게 학대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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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유리아가 제벨라와 크게 닮지 않았다는 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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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금발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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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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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피부도 갈색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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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건 아닙니다. 피부색은 제벨라 아가씨를 닮으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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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누님이랑? 혹시 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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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두분 모두 1부인과 전대 가주님의 사이에서 나온 분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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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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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카렌이 창문을 열어 간단하게 환기를 하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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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아가씨는 무재를 타고나셨습니다. 혈계능력은 발현시키지 못하셨기에 신체 능력은 다소 떨어지셨지만……그래도 자하브의 무재를 고스란히 물려받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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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능력은 없어도 재능은 유전되기도 하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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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혈계능력 또한 물려받았지만, 발현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제벨라 아가씨와 가주님의 혼인이 약속되어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다른 가문의 혈계능력을 각성하셨지만, 몇번이고 시행된 검사를 통해 자하브의 직계임은 확실하셨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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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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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제벨라와의 결혼 건도 있었네. 이것도 진짜 결혼식을 치르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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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이번 생의 아버지마냥 자식만 싸지르고 사라지는 건 좀 그렇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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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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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알겠네. 무재가 있으니, 그걸 키워주기 위해 아카데미에 보낸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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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일단 명목상으로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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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목상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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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제 추측이지만, 조금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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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네. 이리 와서 좀 자세히 말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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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의 이불을 들어, 옆구리 쪽을 툭툭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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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침대를 가만히 번갈아 바라보던 카렌이었으나, 결국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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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구리 옆에 카렌의 작은 엉덩이가 쏙 들어오는 모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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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우라는 뜻이었는데……이건 이것대로 괜찮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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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망나니 연기도 계속하다 보면 는다는 걸까. 이젠 이것도 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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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과하지 않은 선에서 카렌을 희롱할 수 있는 위치. 꼬리뼈와 허리의 중간쯤 되는 부분을 콕콕 찌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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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카렌 네가 생각한 다른 이유는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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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전대 가주님께서는 후계자 경쟁이 심화될 걸 예상하셨겠죠. 그래서 능력은 있지만 막내라 너무 어린 유리아 아가씨를 아카데미로 일종의 피신을 보낸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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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피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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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지는 알겠고,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만……설령 그렇다 해도 카인이 유리아를 피신 보냈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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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지만, 카인은 제벨라의 혈통을 의심하고 가문의 악재로 여기며 상당한 학대를 감행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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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이 자하브의 흔적이 보인다고는 하나, 제벨라의 친동생인 유리아를 아껴서 멀리 도망 보냈다는 건 조금 신빙성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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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은 카렌과는 조금 다르다. 아마……제벨라가 내보낸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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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제벨라가 일하는 모습을 몇번 지켜봐서 잘 안다. 그녀가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유능한 사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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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반쯤 감금된 상태고, 한계치까지 몰려있다해도 불온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한사람 내보내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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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의 언행에서 추측컨데 유리아는 여자임에도 자하브 가문 안에서 그럭저럭 인정받았던 것 같으니 더욱 쉬웠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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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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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어땠는지는 제벨라나 유리아에게 물어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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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대충 어떤 사람인지는 알겠네. 그럼 성격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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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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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고민하던 카렌이 무표정한 얼굴 위로 흐릿한 미소를 띄워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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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사람을 잘 챙겨주시는 분이었죠. 연민을 알고, 책임을 아는 분이기도 하셨고요. 다만, 약간 다혈질적인 면모가 있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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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는 자하브 가문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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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 말은 아닙니다만, 대충 그런 느낌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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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를 모시는 케세프 가문의 일원으로서 자하브의 핏줄에 안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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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게 속삭이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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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는 기본적으로는 괜찮은 녀석이지만, 성격은 급하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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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제벨라 상대로는 실패했던 가주직 떠넘기기가 먹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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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건 내 망나니짓을 고깝게 볼 것이며, 성격이 급하다는 건 살짝 긁었을 때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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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별다른 욕심 없이 나를 가주직에 앉힌 제벨라와 달리 변수가 되어줄 것은 확실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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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전생 현생을 다 합쳐 처음으로 생기는 여동생이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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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 애호하고 싶은 마음과, 마구 괴롭혀 들고 일어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머릿속에서 첨예하게 대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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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내가 정말로 귀족의 피가 섞였는지, 어째서 던전에 들어가면 컨디션이 좋아지는지로 생각할 게 많았던 상황이라 슬슬 머리가 아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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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몸을 둥글게 말아, 눈앞에 보이는 카렌의 허벅지에 머리를 묻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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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앗! 갑자기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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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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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긴 그럴 때가 되긴 했죠. 가주님도 자하브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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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인 카렌이 나쁜 계획이라도 꾸미는 사람처럼 작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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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늘 수업은 땡땡이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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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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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확 마음이 동했지만, 한참의 망설임 끝에 결국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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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됐어. 힐다 기다리겠다. 빨리 가자. 당장 급했던 계승식도 끝나고, 쉬운 내용이라면 혼자 책도 읽을 수 있게 됐으니, 오러 수련의 비중을 높인다고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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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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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그대로면서 입만 벌리며 놀란 티를 낸 카렌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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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셨습니다. 이걸로 저를 사람들 보는 앞에서 번쩍 들어 올렸을 때의 앙금은 씻어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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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참 고맙네. 근데 카렌아. 원래 이런 거 신경 쓰는 사람이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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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케세프 가문 출신이고, 가주님의 전속 시종이긴 합니다만 어엿한 한창때의 레이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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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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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편안함이라는 말은 분명 이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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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으면 굉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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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벗어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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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큿! 가주님의 충실한 집사에게 수치를 주실 생각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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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지도 못할 거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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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티 나는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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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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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지만, 슬슬 사람들이 보내오는 존경의 눈빛에 익숙해질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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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 내가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는 감도 못 잡고있는 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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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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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뵙겠습니다 자하브 대공 각하. 아카데미의 교관 역을 맡고 있는 델빈이라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실습을 허락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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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야 뭘. 듣자하니 아카데미 재학생 중에 내 동생도 있다면서? 이 정도는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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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아카데미에서 교관들과 함께 학생들을 보내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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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일은 제벨라 선에서 해결되었지만, 아카데미는 제국의 미래. 그런 곳에서 수십의 학생을 믿고 실습 보냈는데 얼굴조차 안 비칠 수는 없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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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비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좀 삐뚜름하게 앉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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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떨어진 곳에서 힐다가 이쯤 되면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의 시선을 보내왔지만, 애써 무시하며 눈앞의 학생들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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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대부분 10대 중후반. 하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꽤나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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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쪽은 정확히 알아보기 어렵지만……기사 지망생들은 대부분 평기사 수준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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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검에 인생 몰빵한 힐다에 비할 바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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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자하브를 보필하기 위해 온갖 지원을 받으며 비밀병기 비스무리한 것으로 육성 받은 카렌과 비슷한 수준은 몇몇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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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경험이 부족하고, 단장 노릇을 할 특출난 존재가 부재할 뿐이지 어지간한 정예 기사단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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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아무리 싸우는 방법을 가르치는 아카데미라지만, 학생을 던전에 밀어넣는다는 것에 약간 거부감이 있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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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곳이라면 던전에 들여보내도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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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조금 더 자세히 늘어선 학생들을 살펴보았다. 기세를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살펴볼 요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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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전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한 명. 단 한 명만큼은 초면이면서 묘한 친숙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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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빛나는 것처럼 밝은 금발. 피부는 창백하다시피 하얗지만 그것이 유약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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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다리를 짚고 선 다리, 반항적인 것을 넘어 위압적인 눈빛, 그리고 전신으로 뿜어내는 사나운 기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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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인간의 법도를 모르는 짐승을 아름다운 여인의 형태에 가둬둔 것 같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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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벨라를 닮은 연보랏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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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바로 유리아, 제벨라의 동생이자 내 새 여동생(아님)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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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인데 무어라 말부터 꺼내는 게 좋으려나. 그런 내 고민을 덜어주겠다는 듯이 유리아 쪽에서 먼저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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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그럭.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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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여리한 자신의 몸보다도 큼직한 대검이 알현실의 바닥에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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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유리아로부터 오러가 들끓으며, 목소리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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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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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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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판 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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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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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끔뻑이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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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겁한 교관 중 한 명이 유리아에게 달려가 그녀를 말리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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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학생. 아무리 이곳이 본가라도 공적인 자리고, 제국에서 인정한 대공 각하 앞에서 그러한 언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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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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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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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워! 그냥 닥치고 지켜보기나 해! 내가 다른 연놈들한테 시달릴 때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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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놀랍게도 유리아가 휘두른 주먹에 얻어맞고 멀리 튕겨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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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오러의 사용법이 너무나도 정교하다. 이제 막 오러를 익히기 시작한 나로서는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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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방금 튕겨 나간 교관은 신참인지 아니면 다른 전형이 있는 건지 다른 교관에 비해 좀 약해 보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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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래도 교관 아닌가. 조금 다르지만 선생 비슷한 사람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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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을 망설임 없이 줘패고는 내게 삿대질을 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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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겁하는 사이. 쓸데없이 쩌렁쩌렁한 유리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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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판 떠서 내가 이기면 언니는 놔주고 나랑 결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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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들으면 내가 제벨라 누님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줄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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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시치미 떼기는. 제벨라 언니 같은 사람을 너같이 발정 난 짐승이 가만 놔둘 리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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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겠는데 일단 아무 일도 없었거든? 그나저나 유리아야. 내가 이기면 어쩌려고 그런 조건을 내거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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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간단하지.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줄게. 너한테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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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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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진짜 다른 사람이 들으면 내가 무슨 근친에 미친 사람인 줄 알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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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물론이요 교관들, 심지어는 형식적으로 세워둔 자하브의 기사들마저 웅성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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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당연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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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교관에게 손찌검을 하고, 너무도 가볍게 근친 야스를 하니마니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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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설픈 망나니질은 갑질의 연장선상이건만, 유리아의 난장은 진짜 앞뒤 가리지 않고 들이받는 것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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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칼립소에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사라진 줄 알았던 내 안의 유교 드래곤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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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넌 궁디팡팡 확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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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비스듬하게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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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이 오라비랑 한번 놀아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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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던 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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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의 차이는 확연하다. 어디까지 힘 조절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주먹을 말아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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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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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가 나보다 약하고, 내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강해진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격차를 가늠하긴 힘들지만……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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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유리아의 조건 대로라면 이기건 지건, 유리아 본인은 무조건 나랑 순수한(아님) 자하브 만들기 풀코스를 조져야 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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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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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리아의 눈매와 입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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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카렌을 관찰하며 다져진 눈썰미가 잡아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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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웃음기라도 참는 것처럼 어색하게 틀어진 입가를. 기대된다는 듯이 묘한 열망으로 반짝이는 동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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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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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동생이 이렇게 미친년일 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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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새 여동생의 성벽이 뒤틀려 있다는 의심이 들었을 때의 올바른 대처법을 고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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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패배 야스가 좋은 거니? 아니면 근친 야스가 좋은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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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아하? 패배 근친 야스가 좋은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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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을 골라도 정답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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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분명 카렌은 유리아가 약간 성격이 급할 뿐, 기본적으로는 좋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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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기라도 참는 것처럼 어색하게 틀어진 입가, 기대와 열망으로 반짝이는 동공, 그리고 아까부터 단 한 순간도 내게서 떨어뜨리지 않는 시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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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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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나를 속인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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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카렌을 노려보았지만, 내 시선을 무어라 해석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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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스레 나선 카렌이 지금 이순간에도 유리아를 말리고 싶지만, 내 눈치를 보며 차마 나서지 못하는 아카데미 학생들과 교관들을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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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조금 떨어져 주십시오. 가주님과 유리아 아가씨와의 대련의 여파가 미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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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으……안 말려도 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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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빈이라고 했던가. 아카데미에서 온 교관 중 대표 격으로 보이는 이가 조심스런 어조로 되물었으나, 카렌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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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자하브이고, 가주님께선 뜻을 정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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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들으면 거창한 결정인 줄 알겠잖아. 그냥 적당히 궁디팡팡이나 하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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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혹시 책임소재가 걱정이라면 안심하시길. 가주님께서 나선 이상 이는 가주님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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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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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오히려 행운이군요. 다른 누구도 아닌 4대 대공가의 일원인 가주님께서 직접 대련을 보여주시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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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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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뒤로 물리는 교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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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카렌 또한 자하브의 가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하브는 근친 명가라는 멸칭이 붙을 정도로 미친 집안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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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입장에서는 내가 제벨라와 결혼하건, 유리아와 결혼하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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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든 다음 세대의 자하브는 피가 다시 짙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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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 상식 개변 세상인가 뭔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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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어질어질 했으나, 판은 깔려있고 해야 할 일 또한 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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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유리아를 쓰러뜨린다. 그리고 바로 학부모 면담……아, 둘다 없어서 굳이 말하자면 내가 보호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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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1대1 면담 시간을 좀 가져야겠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공개 구혼 대련을 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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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현실의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단차 위에 올려진 의자에서 일어나, 짧은 계단을 내려가 바닥 위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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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차이는 있어도 딛고 있는 바닥은 같아진 나와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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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를 닮은 연보랏빛 눈동자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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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라비가 삼초식을 양보하마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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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초식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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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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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폼 잡고 싶어서 전생의 무협지에서 봤던 대사를 따라 해 보았으나, 이곳은 판타지 대륙이라 그런지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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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까지 공격을 받아주기만 하겠다고. 그러니까 전력으로 와봐. 하늘 같은 오라비와의 격차라는 걸 알게 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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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하늘은 무슨. 애초에 밖에서 굴러들어 온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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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들으면 아무리 가주라도 사생아 출신을 무시하는 콧대 높은 귀족으로 여기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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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았다. 어째서인지 군침을 츄릅 삼키는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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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정신 나갈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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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숨을 푹푹 내쉬건 말건 땅에 박아 넣은 대검을 뽑아 올리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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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를 한껏 낮추고, 자신의 몸뚱이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을 어깨에 비스듬히 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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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변화하는 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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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조금 전까지만해도 은연중에 흘러나오던 건들거림이나, 열망 비스무리한 것이 사라지고 순수한 투지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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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포한 짐승을 작은 인간의 형태로 구겨 넣은 듯한 사나움. 노골적으로 급소를 훑어보는 시선에는 은은한 위압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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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의 혈계능력을 발현시키지 못했음에도 이 정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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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자하브라는 혈통이 대공가에 어울리는 사기 혈통이긴 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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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자하브의 혈통으로 착각 받는 내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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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키면 안 되는 입장이니 고맙긴 한데, 왜 아무도 의심 안 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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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다른 생각을 한 순간. 이를 귀신같이 눈치챈 유리아가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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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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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직한 대검을 들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몸놀림. 두어 번의 발놀림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유리아의 몸이 빙글 회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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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 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기 위해 팔 뿐만 아니라 전신을 사용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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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지만 일렁이는 오러를 머금은 대검이 내 상체를 짓이길 듯이 쏘아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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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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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를 살짝 끌어 올리며 한쪽 손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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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로를 연상시키는 기이한 문양이 심장에서부터 팔까지 뻗어나가더니,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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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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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들던 대검이 내 손에 잡혀 그대로 정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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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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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벙한 소리를 내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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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대검 위에서 일렁이던 오러는 내 손에 잡히며 사그라들었고, 걸리는 건 뭐든 찢어발길 듯한 기세로 휘둘러진 대검은 미동조차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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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빼내기 위해 끙끙대는 유리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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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재능은 있네. 하지만 순수한 힘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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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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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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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을 놔주자, 힘을 주던 반동 탓에 스스로 뒤로 튕겨진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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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묘한 스텝을 밟더니, 이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처음보다 더욱 강렬하게 대검을 휘둘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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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겐 이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일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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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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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과 똑같은 자세로 재차 대검을 잡힌 유리아. 당황하는 대신 몸을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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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꼬리는 히죽이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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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애써 무시하며 유리아의 검을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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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알겠네. 어차피 신체 능력이 아니라 오러를 이용해 더 큰 힘을 내는 것이니, 차라리 하나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별다른 방어구 없이 대검 하나만 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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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두 번 만에 알아차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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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특이한 방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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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것도 한번 막아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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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거리를 벌린 유리아가 이번에는 대놓고 동작이 큰 자세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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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이 아닌, 대검에 무게 중심을 두는 기이한 자세. 비틀거리듯이 달려든 유리아가 한보 반 거리 앞에서 땅을 박차고 공중에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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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과 대검의 표면에만 머물던 오러가 돌연, 유리아의 몸을 휘감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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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서 흩날리는 밝은 금발. 지금 이순간. 유리아의 대검은 무기가 아닌 하나의 송곳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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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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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수리를 정확히 노리고 떨어져내리는 투박한 대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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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하는 오러에 감싸인 탓인지 이전과는 비교조차 안 될 광채를 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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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도, 회피도, 심지어는 탈진마저도 고려하지 않은 묵직한 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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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아무리 나라도 약간 진심을 내야 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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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오른쪽 주먹을 한계치까지 뒤로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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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투창이라도 하는 듯한, 혹은 화살이라도 쏘아낼 법한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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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라면 취하지 않았을 자세다. 실전에서는 너무도 비효율적이니까. 차라리 지금의 유리아처럼 전신을 비틀어 모든 힘을 주먹에 집중시키는 편이 훨씬 나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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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굳이 이런 자세를 취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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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효율적인 자세를 찾고, 육신을 단련하고, 그렇게 조금 더 강하게 힘을 주는 것이 전부였던 이전과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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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나마 오러를……체내의 마나를 의도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 지금은 약간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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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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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와의 실전을 통해 익숙해진 오러의 감각이 심장을 떠나 팔 전체를 뒤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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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물든 문양에서 느껴지던 열감이 단숨에 그 기세를 부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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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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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양 위로 피어오르는 불길. 정확히는 집중된 오러가 문양을 타고 흐르다가 밖으로 삐져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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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는 엄밀히 말해서 기사들이 사용하는 유형화된 오러로 육신을 코팅하는 기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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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과할 정도의 오러를 집중시켜, 넘쳐 흘렀을 뿐인 현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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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항상 이렇게 싸워왔다.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마력을, 개조당해 얻은 것이라 제대로 세밀한 조정이 불가능한 근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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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있는 힘껏 때려 박아 눈앞의 상대를 분쇄하는 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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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하고, 단순할지 몰라도 내겐 가장 익숙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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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의 제대로 된 사용법 같은 건 나중에 배우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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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움켜쥔 주먹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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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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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흐르는 오러가 격발 되며 폭발에 가까운 굉음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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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불길을 휘감은 주먹이 그대로 유리아의 대검 옆면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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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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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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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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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이 올라 너무 힘을 줬던 탓일까. 부서진 대검과 함께 무방비한 자세로 옆으로 날아가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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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라면 벽을 부수고 처박힐 것이다. 그리고 모든 오러를 대검에 집중한 유리아는 이만한 충격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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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면 중상이라는 생각에 혀를 차며, 잽싸게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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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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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얕은 거미줄 모양 금을 내며 쏘아지는 몸뚱이. 공중에서 허우적대는 유리아를 안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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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등쪽으로 벽에 충돌하며 충격을 대신 흡수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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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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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짝을 내달리는 찌릿한 감각. 좀 아프긴 한데 이 정도면 참을만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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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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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품에 안겨 눈을 휘둥그레 뜨는 유리아를 향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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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이 오라비가 준비한 사랑의 매는 따로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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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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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에 집중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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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를 빙글 뒤집어, 내 무릎 위에 엎드린 자세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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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 팡! 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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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팟! 진짜 아파! 설마 이런 취향이야?! 언니는 몸이 약해서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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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누님을 내가 왜 때려……? 너처럼 맞을 짓한 녀석이나 맞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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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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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히는 유리아. 그런 그녀의 엉덩이를 다시 한번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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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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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탄력 있는 감각과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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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메챠쿠챠 설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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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자하브의 기사들은 물론, 아카데미 사람들도 있다는 걸 깜빡 잊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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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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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고통에 유리아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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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공개 수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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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엄한 것만 배워온 유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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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에녹을 본 유리아의 첫인상은 납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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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제벨라 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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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거의 매주마다 날아오던 제벨라의 편지가 요즘 들어 에녹에 대한 칭찬으로 도배된 이유를 이해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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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는 자하브의 혈계능력을 발현시키지 못했으나, 단 한 가지 물려받은 것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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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이 바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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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적으로 오러의 사용법을 깨우치고, 직감적으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이가 누구인지 알고, 직감적으로 승리로 이어지는 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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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의 조언에 따라 단순한 무재 정도로 포장해서 드러내긴 했으나, 그녀의 직감은 혈계능력을 발현시킨 자하브의 혈족들보다도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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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쯤 되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배우자를 통해 대를 거듭하며 자연스레 품종개량 비스무리한 것이 이루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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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능력을 제외하고도 여러 재능을 타고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가능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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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직감에 근거하여 본 에녹은 배부른 맹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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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는 반쯤 눕다시피 걸터앉았고, 막 침대에서 일어난 것처럼 눈에는 나른함이 가득하며, 실제로 하품까지 해대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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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져 보이는 몸은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눈매는 나른할지언정 동공을 쉴 새 없이 주변을 탐색하고 있으며, 하품은……그냥 하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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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나온 것이라는 사실까지는 몰랐으나 유리아에게는 그것이 일종의 자신감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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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한번 와볼 테면 와보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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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제로 겉모습만 보고 어설프게 덤벼들었다가는 저 송곳니에 목덜미를 물어뜯기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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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입장에서는 칼립소에서 살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 버릇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유리아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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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직감이 에녹을 보는 순간 계속해서 경종을 울렸다. 저건 위험한 존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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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경고. 당장 도망치거나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신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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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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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위험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리고 머리를 들이밀지만 않으면 먼저 공격해 오는 사람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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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로부터 이미 에녹이 자하브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성정의 사람인지 전해 들은 유리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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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언니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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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 가기 전. 아직 자하브 성에 살던 시절의 유리아는 보았다. 자하브의 혈족이 얼마나 잔학해질 수 있는지, 그들이 반쯤 가둬둔 제벨라에 무슨 짓을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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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벨라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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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에 의존한 판단이기에 제벨라가 자신의 형제들을 전부 죽였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유리아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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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약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제벨라가 강인한 사람이라는 정도는 안다. 그리고 잠겨있는 문 너머로 펑펑 울었던 날 이후로 자신을 아끼고 있다는 것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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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제벨라가 한 말이니 분명 허튼소리는 아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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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직감으로도, 제벨라의 안목으로도 에녹이 다른 자하브의 혈족과 달리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든 유리아의 가슴에 기대가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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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사이지만, 제벨라 이외에도 제대로된 가족이 생길 거라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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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단상 밑을 훑어보던 에녹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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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그것처럼 샛노란 동공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그녀의 직감이 시끄럽게 울어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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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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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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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 유리아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으나, 날 때부터 예리한 감각을 타고난 그녀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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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직감과 본능에 몸을 맡기고 되는대로 행동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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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첫눈에 반한다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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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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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으나, 그녀의 직감은 기본적으로 생존본능을 기반으로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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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생존을 위해서는 에녹의 옆자리가 가장 효율적이며, 이를 위해서는 그의 암컷이 될 필요가 있다고 여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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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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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아카데미의 기숙사는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가 나뉘어져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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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사고를 치는 바람에 1년을 유급하기까지 한 유리아는 꽤나 오랜 시간을 여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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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성끼리만 모여있으면, 그것도 한창때의 나이라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야한 이야기에 관심이 쏠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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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아카데미는 평민과 상위 귀족들에겐 배움의 장이지만, 하위 귀족들에게는 일생일대를 건 상향혼의 무대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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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들에게 여러 자극적인 경험담을 듣거나, 비밀스러운 책을 돌려보던 유리아는……안타깝게도 약간 성벽이 뒤틀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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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가문의 잘못된 조기교육, 직감에 과하게 의존하는 습관, 극찬 범벅인 제벨라의 편지를 읽고 쌓인 호감,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접한 금단의 지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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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 결과. 그녀는 패배 근친 야스 조아 조아를 외치는 광인이 되어버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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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대련에서 패배하여 엉덩이를 맞는 도중에도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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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공개 수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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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육이 이렇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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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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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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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의 엉덩이를 정확히 10대 때리고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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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손바닥에 눌어붙은 것 같은 말랑 쫀득한 감각을 애써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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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야. 이제 정신 좀 차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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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나, 나는 언제나 제정신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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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떤 사람이 제정신으로 자기 오라비랑 결혼하겠다는 말을 하니. 어린애도 아니라 다 큰 녀석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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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언니랑은 할 거면서 뭘 그리 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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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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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명가라 불리는 자하브에서 나고 자란 녀석이다. 나를 제외한 그 어떤 가신도, 심지어 제벨라마저 나와의 혼인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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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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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또한 필요에 따른 근친을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이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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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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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자하브 가문이 비상 상황인 것도 맞는 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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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패배 근친 야스 조아 조아 발언을 제쳐두고서라도 할 말은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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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유교 드래곤의 속삭임에 따라, 짐짓 엄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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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교관을 함부로 치는 건 잘못된 행동이야. 다른 어디도 아닌 자하브 본성에서 그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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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모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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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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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언니랑 나를 제외한 다른 자하브의 남자들이 전부 죽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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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 다툼이 격해져 서로 죽고 죽였다고 들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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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어떻게 죽었는지가 아니라 죽음 이후의 일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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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내 무릎에 엎드려 있던 유리아가 꿈틀거리며 몸을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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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렇게 내 무릎에 누워 이쪽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말을 잇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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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하브의 힘은 결국 홀로 던전을 관리할 수 있는 압도적인 힘에서 나와. 그리고 이 힘은 혈계능력을 통해 유전되는 거구. 하지만 자하브의 모든 남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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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하브가 곧 망할, 아니 이미 망한 가문이라는 소문이 돌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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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아무리 덩치가 커도 죽은 짐승을 두려워하는 이는 없잖아? 많은 사람들이 자하브에 남은 것들을 뜯어먹기 위해 접근했어. 재력, 땅, 이권, 작위……그리고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능력까지 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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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과장이 좀 심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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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알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최고급 모판이 싸게 풀린 셈이지. 모두가 탐내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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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너무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 같으니 금지. 차라리 과장해서 말하고 다니도록. 이거 가주 명령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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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입으로 모판 같은 소리를 하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자, 표정이 묘해지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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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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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아무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나를 노리더라고. 약간의 협박을 곁들여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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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문제가 터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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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홧김에 팔다리를 두어 개씩 잘라버렸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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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쪽에 문제가 생긴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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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뒷배를 잃은 유리아를 노리던 녀석들은 너굴맨……아니, 유리아에게 역으로 당했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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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니까 팔다리 정도야 금방 붙일 수 있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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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 가문이 나섰겠지. 협박이 섞이긴 했지만, 말로 했는데 검이 날아왔으니 명분도 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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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알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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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하지만 뻔한 일이니까. 아무튼 이해했어. 그때의 일이 문제가 되어서 유급한 거구만. 그리고 교관들은……매수당해서 협박에 시달리는 너를 모른 체 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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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것도 제벨라 언니랑 코넬리아. 그리고 다른 친구 몇이 도와줘서 유급 선에서 끝난 거지 처음에는 퇴학당하는 줄 알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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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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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음. 그래. 완벽히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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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방금 전의 교관 말고 또 매수된 교관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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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긴 한데……실습에 따라온 교관은 저거 하나뿐이야. 왜? 막막 여동생이 괴롭힘당했다니까 화가 나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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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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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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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가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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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벽에서 떨어진 조각 하나를 주워 손가락으로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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쐐애액……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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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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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유리아를 말리려다가 얻어맞은 교관의 팔에 돌조각이 틀어박힌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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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빈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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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예 대공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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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하니, 부상이 심해 보이는군. 아쉽게도 자하브에 상주하는 사제들은 지난 던전 역류의 부상자를 치료하느라 바쁘고, 포션도 다 떨어져서 말이야. 아카데미로 돌려보내는 게 좋아 보이는데……어떻게 생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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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각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당장 아카데미로 올려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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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치를 보던 델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바닥을 나뒹굴던 녀석이 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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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대공 각하! 억울합니다! 무슨 오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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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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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녀석의 말을 끊고 집사장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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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많이 아파서 제 발로 못 간다고 하네. 대신 배웅 좀 나가줘. ……정중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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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에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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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이지 창백해진 표정의 교관을 끌고 나가는 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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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자니, 무릎 위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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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방금 뭐 때문에 엉덩이를 맞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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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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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고민 끝에 유리아의 이마에 딱밤을 놔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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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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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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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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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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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건방지게 야라고 부르지 말고 제대로 오빠라 부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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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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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어진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싸고 있던 유리아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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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 오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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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부르라는 대로 안 부르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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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오라방. 나 엉덩이가 너무 아픈데 좀 쓰다듬어 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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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된다 이 미친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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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를 무릎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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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일생일대의 투자에 성공한 사람처럼 헤실대는 것이 묘하게 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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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소란이 있긴 했지만, 어찌어찌 무난하게 일정을 끝마치고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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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글공부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간단한 책이라면 혼자서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오러 수련의 비중을 늘리기로 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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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조금 늦었으니, 힐다가 기다릴까 발걸음을 서둘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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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방.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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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깜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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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옆구리 쪽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유리아의 말에 흠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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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피는 이어지지 않았건만, 이상할 정도로 나와 닮은 금발이 사르르 흘러내리며 햇빛에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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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뭐야. 내 머리카락이 신경 쓰여? 그으. 살짝이라면 잡아당겨도 괜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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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선을 눈치챈 걸까. 유리아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으더니, 이쪽으로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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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니 유리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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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안. 손잡이로 쓸 때는 이렇게 하는 거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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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갸웃거리면 하나로 묶었던 머리를 쪼개, 두 갈래로 만들어 양옆에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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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손으로 쥐어 고정시켰을 뿐이지만, 흔히들 말하는 트윈테일 스타일. ……그리고 조금 천박하게 말하자면 핸들을 만들어 내 앞에서 살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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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오라방은 이런 거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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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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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나갈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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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자하브의 혈계능력은 발현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유리아는 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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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그런 식으로 따지면 제벨라도 골 때리는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나한테 잘해주고, 일 잘하는 누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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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가 문제라고 하기에는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은 제정신으로 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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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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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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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런 사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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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이 워낙 자하브의 문제아들에게 익숙해져서 이 정도 언행은 귀여운 수준으로 보인 것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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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며 나름 유리아를 이해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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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해한 무언가를 접할 때 느껴지던 거부감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약간의 위기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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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에서 요구하는 망나니 인재상에는 못 미칠지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망나니 연기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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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리고 계승식까지 끝난 마당이지만 혹시라도 혈통의 진위를 의심당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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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내게는 유리아보다 더 미친 사람처럼 굴 필요가 있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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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을 것 같지만, 어떻게든 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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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유리아가 내민 양 갈래머리를 잡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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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들도 좋긴 하지만 내 취향은 좀 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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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오라방은 그럼 뭐 좋아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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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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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답하며 유리아의 머리카락을 그녀의 목에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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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목덜미 위를 교차하는 금발. 그렇게 단단히 고정시킨 뒤에는 두 갈래로 나뉜 머리를 다시 합쳐 한 손으로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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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유리아 본인의 머리카락을 목걸이이자 목줄처럼 만든 모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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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의 머리카락이 꽤나 길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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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목을 졸리듯이 붙잡힌 유리아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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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방 천재야?! 이런 건 생각도 못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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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럼. 이 오라비는 언제나 개쩔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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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나 싸구려 가죽이랑 다르게 심하게 쓸리지도 않고,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목을 조를 수도 있고, 무엇보다 다른 무엇도 아닌 내 머리카락에 내가 매인다는 사실이 너무 굴욕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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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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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유리아의 모습에 자연스레 한숨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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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자하브는 자식 교육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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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멀쩡한 제벨라는 학대했지, 유리아는 그냥 제정신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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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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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서로 후계자 다툼하다가 공멸한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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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냥 운이 없어서, 혹은 누군지 상상도 안 가는 흑막이 있어서 죄다 죽고 망한 게 아니라 그냥 죽을만해서 죽었고 망할만해서 망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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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해졌던 머리가 맑아졌다. 그래. 유리아가 아무리 골 때리는 녀석이라도, 어차피 자하브를 떠날 내게 무슨 상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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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내게 목을 내어준 채, 뒷짐을 진 유리아가 고양잇과 동물처럼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따라오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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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라방 지금 어딜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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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받으러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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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내가 없는 사이에 자하브에도 아카데미 같은 게 생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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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내 개인 교습. 힐다 경이라고 은사자 기사단 부단장이 나한테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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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흠. 힐다 경은 오라방의 애첩……기억해 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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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아니라 글이랑 예법, 오러 수련을 배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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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방 글도 읽을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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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무식하게 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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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상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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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글 읽을 줄 알아? 문맹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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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리는 전생을 포함해도 들어본 적 없는 폭력적인 질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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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얼마 전까지의 나는 정말로 문맹이 맞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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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서운함이 겉으로 드러난 걸까. 유리아가 황급히 고개를 휘휘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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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냐! 무식해 보이는 게 아니라 싸움과 여자 말고는 흥미가 없어 보일 뿐이니까! 오해하지 마 오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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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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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위로가 맞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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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애초에 광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 해선 안 된다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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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고분고분해진 만큼 크게 도드라지지는 않지만……유리아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사람보다 짐승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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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가 멍청하다거나, 인간 언저리라는 나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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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보다 본능이, 지능보다 감각이 발달한 사람 특유의 기세를 풍기고 있다는 소리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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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에서 오래 살아남은 이들 중에는 비슷한 부류가 몇몇 있어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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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중에서도 유리아가 유독 도드라진 케이스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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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에. 오라방 생각보다 열심히 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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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가문의 일을 대부분 제벨라 누님께 떠넘기고 놀러 다닐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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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원래 어려운 일은 제벨라 언니가 하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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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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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애가 바로 여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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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오라방 오러 수련을 부기사단장한테 배워? 오라방이 더 강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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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것과 기술에 능하냐는 별개니까. 오러는 자하브에 들어와서 처음 익힌 거야. 그러니 기초부터 제대로 다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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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에. 강하다고 바로 오러를 마음대로 쓰고 그런 건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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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소리를……유리아 너도 어렸을 때는 따로 오러를 배웠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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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나는 천재라서 오러는 그냥 혼자 깨우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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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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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유리아에게 혈계능력은 없어도 무재는 있었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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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의식적으로 힘을 주어 마나를 집중시키고, 오러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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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는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본능적으로 오러를 다루는 법이라도 터득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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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유리아는 뭔지 모를 혈통인 나와 달리, 찐 자하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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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귀족은 대체로 하나쯤 탈인간급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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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능력은 그중 하나일 뿐, 다른 부분에서 이게 같은 사람인가 싶었던 적이 한둘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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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각자 제 갈 길 가고 있지만……한때 같은 고아팸이었던 녀석 중에 몰락귀족 출신이 있어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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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능력도 혈계능력이지만, 이를 떼어놓고 봐도 수완이 뛰어난 녀석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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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대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파멸적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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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옛날 생각에 추억에 젖는 것도 잠시. 어느새 연무장 앞에 도착했길래 유리아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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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쉿. 도착했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이제 가봐. 여기가 집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아카데미의 재학생으로서 실습 온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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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어도 오라방이 보내줘야 갈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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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목에 감긴 머리카락을, 이를 이용해 만들어 낸 목줄을 가리키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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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내가 유리아에게 목줄을 채우고, 성안을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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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놔줄 테니까 이제 가 봐. 아카데미에 가기 싫으면 제벨라 누님한테라도 가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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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어. 제벨라 언니도 오랜만에 보고 싶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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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인 유리아가 순순히 떨어진다. 그리고는 어째서인지 목에 여전히 머리카락을 휘감은 채,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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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라방! 다음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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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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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제벨라 언니랑 같은 침대 위에서 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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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일은 없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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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익숙해진 유리아의 발언에 대충 답해주고는 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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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문밖에서 들린 대화를 전부 들은 힐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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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다가 처음으로 내게서 시선을 스윽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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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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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사로서 자하브에 영광이 재림하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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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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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오해는 좀 풀려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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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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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에게 얻어맞고, 에녹이 던진 돌에 한 번 더 얻어맞은 아카데미의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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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전직 교관 브렌트는 입술을 짓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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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빌어먹을 자하브. 숨겨진 사생아가 있을 줄 내가 알았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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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제 막 골절이 나아, 살짝 저릿함이 남아있는 팔을 부여잡은 자세로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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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한 분위기의 집사장, 아론은 두 번 다시 눈에 띄는 순간 팔이 아니라 목이 부러질 것이라 경고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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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닫힌 성문을 올려다보던 브렌트. 그런 그의 짐을 가져다준 아카데미의 책임자인 델빈은 해고 통지서를 함께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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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의 건이 아니더라도 사소한 부패를 여러 번 저질러 이미 수차례 경고받은 상태. 그렇기에 별다른 절차 없이 최후통첩이 날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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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정이라며 중급 포션을 건네주던 델빈의 싸늘한 표정이 떠올라, 브렌트가 무의식적으로 방금 막 나은 팔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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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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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같은 괴물 딱지에 비하면 손색이 있을 뿐이지, 브렌트 역시 아카데미에 취직할 만큼 나름 실력있는 기사였기에 한 번 부러지며 취약해진 팔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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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정신적으로 몰린 그는 팔이 보내는 고통의 신호를 알아차릴 여유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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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빌어먹을! 이제 더는 돈을 빌릴 구석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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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가 소소한 뇌물을 받아먹은 이유는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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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진짜 재능들과, 벽에 부딪힌 현실 사이에서 어느새 검을 놓아버린 그가 도박이라는 새로운 취미를 붙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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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교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고, 때로는 뇌물도 받아먹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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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일자리도 뭣도 없으니 갚을 길이 없어졌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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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수도에 돌아갔다가는, 그리하여 돈을 빌린 도박장의 사채업자들에게 해고 소식을 들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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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좋지 않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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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해하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브렌트. 그런 그의 앞에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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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 디에고. 아카데미의 전직 교관이자, 엘리스 패밀리에게 2만 골드의 빚을 진 도박쟁이.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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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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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겁하며 검을 뽑는 브렌트. 그제야 치료가 덜 된 팔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를 가로막은 사내는 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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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해라. 내 적은 어디까지나 에녹 자하브이니. 만일 네가 나의 일을 도와준다면, 빛을 대신 갚아주고 새로운 신분 또한 준비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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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놈을 어떻게 믿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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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으면 네놈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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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브렌트는 깨달았다. 어느 쪽이건 자신에게 미래는 없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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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다가 엘리스 패밀리에게 추적당해 죽느냐, 괜히 나대다가 아론이라는 집사장에게 살해당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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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둘 중 하나라면 차라리 뭐라도 발버둥 쳐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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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는 에녹과 유리아의 얼굴을, 그 벌레를 쳐다보듯 경멸과 무관심으로 가득한 표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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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자하브의 그 애송이들을 엿 먹일 수 있고, 내 미래까지 세탁해 준다는데 뭐든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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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했다. 우선 이걸 받아라. 그리고 내가 일러준 곳으로 향해라. 아직 수리 중인 성벽이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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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는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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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받아 든 브렌트는 순간 흠칫했다. 상자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아카데미에서 철저히 배척하라 가르치는 흑마력이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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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갈 곳도, 떨어질 곳도 없는 브렌트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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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오히려 흑마법사의 무서움을 아는 만큼 더욱 든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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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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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쟁이가 인생을 망치는 이유는 보통 자기 스스로 팔자를 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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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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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유리아 때문에 돌겠습니다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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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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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에 한 번씩 있는 정기 티타임. 정확히는 제벨라가 그간 처리한 여러 일이나,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간략하게 요약해 알려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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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도 하고, 맛있는 것도 좀 먹고, 호시탐탐 내 이미지를 망칠 기회를 노리고, 가능하면 제벨라 대신 유리아에게 가주직을 떠넘길 각을 재보는 자리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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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큼은 이러한 평소의 목적과 전혀 상관없는 푸념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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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유리아 자하브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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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들어 보십쇼. 오늘 유리아가 실습이 끝나자마자 제 방에 들이닥치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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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 정도는 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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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제 말뿐만 아니라 제벨라 누님 말도 잘 안 듣는 거였군요. 아무튼 갑자기 쳐들어온 유리아가 무슨 짓을 했는지 혹시 짐작 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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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한번 생각해 봐야겠구나. 에녹 네가 이리도 불평할 정도면 분명 중요한 무언가를 방해한 것일 터. 수련장이나 아니라 방 안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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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그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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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제벨라가 자신의 찻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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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를 수련하며 예민해진 감각이 숨결에 섞인 은은한 꽃향기를 잡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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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것이 차의 향기인지, 제벨라의 체향인지는 모르겠다. 언제나 붓꽃을 닮은 향기를 풍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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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젖은 입술을 혀로 슬쩍 닦아낸 제벨라가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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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카렌과 좋은 시간을 보내다가 도중에 방해를 받은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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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비슷하죠? 오늘 실습 때 잡은 가장 강한 몬스터라면서 포이즌 웜의 머리를 가져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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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카렌과 유니콘은 순결한 여성을 좋아한다는데, 정작 유니콘 본인은 대체 어떻게 번식하는 것인지에 대한 토론을 하는 중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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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즐거웠으니 좋은 시간은 좋은 시간 맞겠지. 제벨라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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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포이즌 웜의 머리를 가져온 건 아무런 과장도 없는 사실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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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면. 퇴화해 회색으로 변한 눈, 터널처럼 동그란 입과 그 안쪽에 빼곡히 돋아난 이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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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를 특별히 혐오하는 편이 아님에도 보는 순간 절로 소름이 오소소 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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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백번 양보해서 실내에 피 흘리는 몬스터 머리를 가져온 것도, 냅다 제 방문으로 열고 들어온 것도 이해할 수 있어요.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나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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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백번이나? 누이는 에녹의 이해심이 깊은 것 같아 감동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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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잘라 온 머리를 툭 던지고 혼자 쪼르르 나가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군요. 하아. 그거 치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심지어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 며칠 전부터 매일 일어나는 입니다 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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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그래도 귀엽지 않니. 고양이가 잡은 사냥감을 주인에게 가져다주는 것 같아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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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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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제벨라는 그냥 팔불출이 아닐까 싶다. 나한테 잘해주는 것도 그렇고, 유리아에게 무른 것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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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자니, 어느새 턱을 괴고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던 제벨라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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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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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이 사이좋아 보여서 다행이란다. 아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려나? 유리아가 다른 건 몰라도 감은 참 좋은 아이니. 좋은 사람을 알아본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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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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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감. 사실 재능이라는 게 다 그런 거잖니. 알기 쉽게 눈에 띄는 것도 아니고,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특출남.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감각을 우리는 감이라고 부르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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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제벨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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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 말을 들으니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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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첫눈에 반한다는 것도 감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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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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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아니, 차라리 여기에서는 뿜는 게 더 품위 없어 보였으려나. 그보다 제벨라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낸다는 건 유리아가 앵겨붙는 걸 알고 있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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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내가 이걸 왜 숨겨야 하는가.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당당하게 굴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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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점점 복잡해지는 사이. 제벨라가 쿡쿡 웃으며 손을 뻗어 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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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과자부스러기, 그리고 두어 방울 새어 나온 찻물을 검지로 훑어내고는 묘한 웃음과 혀를 내밀어 낼름 삼키는 제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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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야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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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에서 조금만 깊은 곳으로 가면, 보이던 헐벗은 매춘부보다 꽁꽁 싸매고 있는 제벨라가 더 매력적이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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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얼굴의 차이인가. 아니면 미드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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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진지한 고민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제벨라는 내 입가를 닦아준 것으로 만족했다는 듯이 평소와 같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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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이걸 깜빡했구나. 저번에 오크 워로드가 쳐들어오며 무너진 성벽을 기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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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거야 당연히 기억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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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자재가 도착해서 슬슬 수리를 시작하려 하는데, 에녹 네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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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도움이요? 아니, 애초에 꽤 시간이 지난 걸로 아는데 이제야 수리에 들어간다는 건 또 무슨 소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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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실은 에녹 네겐 비밀로 했지만, 자하브의 예산이 그리 넉넉치 않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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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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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물론 재정 구조나 세금에 문제 있는 건 아니란다. 어디까지나 던전 역류가 연달아 터지며 큰 지출이 겹쳤을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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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장 쓸 돈이 부족한 건 사실. 그리고 몬스터를 막아내야 하는 만큼 성벽을 싸구려 재질로 지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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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탓에 자금 조달이 늦어 이제야 수리가 시작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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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에녹 네가 영지민들에게 인기가 좋잖니. 아무래도 제대로 된 인부를 고용하기 힘드니 관리자만 뽑고 노역을 좀 시켜야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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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완벽히 이해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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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역. 정확히는 영주의 권한으로 영지민들을 소집해 일 시키는 강제노역을 말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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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역은 현대에도 형벌로서 남아있을 만큼 예로부터 악명높은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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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을 그만두고 끌려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을 대신하는데, 심지어 빡세고 부상의 위험도 크다. 이를 좋게 생각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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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피라미드 건설 같은 예외도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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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록에 따르면 급여도 넉넉하게 줬고, 다치면 치료도 해주고, 아프거나 개인 사정이 있으면 휴가도 줬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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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어디까니자 예외적인 경우. 기본적으로 노역이란 최소한의 의식주만 제공해 주고 뼛속까지 부려 먹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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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노역은 자하브에도 있던 모양이다. 하긴. 중세 봉건 사회니 당연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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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제벨라로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빠르게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노역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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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이 클 영지민들을 달래기 위해 여러 오해로 한창 평판이 좋은 나를 내세우고 싶은 것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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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인 판단이다. ……일이 잘 굴러가기만 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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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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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큰 기회 아닌가. 나를 가주라는 자리에 묶어두고 있는 가장 큰 문제중 하나인 영지민들의 지지를 무너뜨릴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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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일이 요상하게 꼬여 오히려 좋은(?) 결과를 냈지만……이번 건 결국 노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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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일이 꼬여도 밥 먹고 일만 하라는 명령에 기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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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그런 말을 하는 대상이 뻔뻔하고 오만하며 재수 없기까지 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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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 말 다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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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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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말고 제게 맡겨주십쇼 제벨라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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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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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이런 건 영주가 나서야죠. 예에. 그렇고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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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탐욕스런 영주의 래퍼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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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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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이 부족하다고 하셨죠? 저만 믿고 맡겨주십쇼 누님. 반드시 최소한의 식사와 최소한의 의료지원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뽑아낼 테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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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원래 이런 건 무급 노역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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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라고 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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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란다. 최소한의 식사와 최소한의 의료지원이라고 했니? 그래. 에녹 네가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렴. 이 누이는 언제나 에녹 너를 응원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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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제벨라.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해결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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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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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장한 영지의 건장한 청년들을 불러 모아, 무너진 성벽 앞에서 노역 이야기를 꺼내려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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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르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리아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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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뭐 하나 유리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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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라방? 그냥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산책하던 중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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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으니까 좀 나중에 해. 제벨라 누님이 시켜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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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렇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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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성벽에서 멀어져 내 옆에 서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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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아직 진정되지 않는지 대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말았다 하기도 하고, 냄새를 맡듯이 코를 킁킁거리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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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 원래도 기행을 벌이는 녀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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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를 적당히 무시하고, 벌써부터 침울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영지민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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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였다!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 같지만, 너희를 이리 불러 모은 것은 성벽을 수리하기 위해 노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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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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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터져 나온 굉음. 지축이 흔들리며, 안 그래도 무너져 있던 성벽 일부가 그 충격으로 더욱 큰 균열을 일으키며 폭삭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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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오르는 흙먼지. 그 너머로 섬뜩한 안광이 번뜩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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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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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지옥의 밑바닥을 긁어대는 것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찌나 막대한 성량인지, 방금 막 피어오른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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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완전히 무너진 성벽과 흙먼지 너머에서 드러난 것은 뒤틀리고 부풀어 오른 채, 불길한 흑마력에 휩싸인 인간 비스무리한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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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변했지만 어째 익숙한 외모에 기억을 되짚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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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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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들려오는 유리아의 기겁에 눈치챘다. 일전에 뇌물을 받고 유리아를 알게 모르게 차별한, 그리고 내가 던진 돌에 얻어맞고 쫓겨난 아카데미의 교관이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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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교관이 아니라 교관이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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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였을지 몰라도 이젠 브렌트라고 부를 수 없는 뒤틀린 존재가 검붉은 피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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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죽인다! 죽어!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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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한 기운이 담긴 저주를 내뱉는 녀석. 촉수처럼 변이된 그의 손에는 모든 빛을 흡수하는 듯한 칠흑의 검이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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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들 도망쳐! 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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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이래서 영주님께서 노역을 시켜서라도 성벽을 고치시려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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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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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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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들 도망쳐! 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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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이래서 영주님께서 노역을 시켜서라도 성벽을 고치시려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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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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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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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으로 오해가 퍼지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이를 바로잡을 여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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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리고 부풀어 올라 본래의 얼굴을 제외하면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브렌트였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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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이 지독한 흑마력을 풍기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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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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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을 여러 갈래로 찢어 놓은 것 같은 촉수가 바닥을 두드린다. 기껏 평탄화 시켜놓은 바닥이 패이고, 쌓여있던 건축 자재가 박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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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가 처음으로 아쉬운 소리를 했을 정도로 비싼 고오급 재료들이 순식간에 부서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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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저 자리에 사람이 있었다면 사람도 함께 터져나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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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역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내 앞쪽에 불러모은 것이 불행 중의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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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래도 나름 제벨라 앞에서 큰 소리 떵떵 치고 왔는데 죄다 박살 났다는 이야기는 어케 꺼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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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흑마법사 놈들은 도움이 안 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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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력을 풀풀 풍기지만, 제정신이 아니고 몸도 뒤틀린 것을 보아하니 브렌트가 사실 흑마법사였다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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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모종의 방법으로 속아 넘어갔건, 멍청하게 제 발로 스스로를 팔았건 아무튼 이용당하는 것에 가까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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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나 또한 실험체 출신이라 잘 안다. 실패한 실험체는……죽음으로만 멈출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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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뼛속까지 틀어박힌 흑마법사 혐오를 삼키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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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영지민들을 피신시켜, 그리고 오는 길에 기사들이랑, 상주하는 사제들도 데려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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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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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였던 것은 진작에 이성을 잃었는지, 자하브에 대한 저주를 늘어놓으면서 정작 내가 아니라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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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영지민들이 무사히 빠져나가고, 마지막으로 유리아 또한 이 장소를 벗어나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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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장을 금한다. 모든 배우는 막이 내리기 전까지 무대에서 내려갈 수 없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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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가 풍기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아니, 내가 지금껏 상대해 온 흑마법사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강대한 흑마력이 지면에서부터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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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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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이 전개될 때 특유의 강렬한 진동과 함께 주변 일대를 직사각형 형태로 둘러싸는 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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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빠져나가려던 유리아의 몸이 안쪽으로 튕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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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이,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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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긴 뭐야. 멍청한 흑마법사가 제 손으로 자신이 묻힐 곳을 파고 있다는 증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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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에서 흑마법사 놈들의 함정에 빠졌을 때 본 적 있는 결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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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제약을 거는 것으로 결계를 대폭 강화시키는 종류의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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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흑마법이 아닌지, 아니면 내게 직접 적용되는 종류가 아니라 그런 것인지 흑마법에 내성이 있는 나조차 힘으로 부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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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오러를 익힌 지금의 나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세월 걸릴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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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 굳이 부술 필요 없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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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또 무슨 대책 없는 소리야 오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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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어느 한쪽이 전부 죽으면 알아서 열리는 구조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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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다. 우리의 대적자여, 요람을 불사른 무도한 자여. 순례자들이 갈고 닦은 복수의 검이 그대의 심장을 꿰뚫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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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오라방? 흑마법사들이 이상한 말투를 쓴다는 건 아카데미에서 배워서 알고 있는데 해석하는 법까지는 배운 적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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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나한테 처맞은 게 억울해서 복수하러 왔다는 소리……잠깐. 유리아 너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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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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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뽑을 수 있도록 대검을 움켜쥐긴 했으나, 유리아의 전신은 아까부터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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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공포에 잠식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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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 가는 것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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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익숙해졌다지만, 기본적으로 흑마력은 인간 본연의 공포를 자극하는 성질을 지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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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겪는 실전이 고위 흑마법사와, 놈이 다루는 장난감이라면 충분히 이해되는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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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움직이겠으면 거기서 잠깐 쉬고 있어. 금방 끝내고 올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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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가 본격적으로 순환하기 시작하자, 심장에서 시작된 열기가 전신을 휘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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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력이 차오르는 것과 동시에 지금껏 의식적으로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들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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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직 던전에서 찾아낸 서류를 해석하지도 못했는데, 제 발로 찾아온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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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해야 마땅한 일이다. 칼립소에서도 보기 힘든 거물이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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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고 이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날려 먹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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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자하브를 저주하며 정작 이쪽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아직도 주변을 때려 부수는 브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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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녀석의 소란에 숨어, 목소리와 존재감을 발하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는 흑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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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고, 나름의 답을 얻을 수 있었으니……흑마법사는 비대해진 브렌트의 안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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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브렌트를 갈기갈기 찢어내고, 안쪽에 숨어있던 흑마법사까지 때려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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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계획에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땅을 박차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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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사이에 두려움을 추스른 유리아가 흔들림 없는 움직임으로 대검을 꺼내 어깨에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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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괜찮아. 나도 싸울 수 있으니까 보조할게 오라방.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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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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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검. 저것만큼은 조심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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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에 나선 짐승처럼 섬뜩하게 빛나는 연보랏빛 눈동자가 빛을 흡수하는 묵색 검에 고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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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게 나 같은 짭이 아니라 진짜 자하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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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감정을 다스리고, 위험 요소를 파악하여, 우선순위에 따라 행동을 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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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분명 더할 나위 없는 전투의 재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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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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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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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 덩어리 같은 녀석이 별다른 특징도 없는 검을 저렇게 소중히 들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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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내가 누군지 아는 녀석이 이렇게 누구 하나 죽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무대까지 준비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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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뭔가 비장의 무기라도 준비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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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반사하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것 또한 감각을 속이기 위한 장치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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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유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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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이렇게 대놓고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데 모를 수가 없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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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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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상대에 집중하느라 제대로 못 들었지만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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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말아쥔 주먹에 정신을 집중하며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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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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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으로 걷어찬 힘을 견뎌내지 못하고 부서지는 지면. 유리아가 반박자 늦게 내 뒤를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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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가까워진 브렌트의 변이된 거체. 종양과 촉수로 뒤덮인 몸뚱이가 스스로의 분을 못 이기고 날뛰다 말고 이쪽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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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멀쩡한 얼굴은 검붉은 피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으며, 피눈물에 모든 색을 쏟아냈다는 듯이 동공은 빛이 바래 잿빛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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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거기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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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왜 이쪽을 놔두고 혼자 난동 부리는 건가 싶었더니, 눈이 안 좋았던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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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집이 검만큼 우수할 필요는 없으나, 너무 부족한 것도 곤란한 법. 다행히 감정은 맹목적일수록 강렬하게 타오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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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놈. 맹목적이라는 게 진짜 눈이 안 보인다는 뜻은 아닐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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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브렌트. 녀석이 우악스레 휘두른 검을 멀찍이 피하고는 옆구리를 파고들어 주먹을 내지르려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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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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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서 솟아오른 뼈로 된 손들이 서로 깍지를 끼고, 단단히 엮이며 발치를 막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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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유의미한 수준은 아니다. 약간 걸리적거릴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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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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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게 걷어차자, 산산조각나며 부서진 뼛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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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으로 흩어진 날카로운 파편이 일종의 산탄총처럼 브렌트의 하반신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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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집이 비대해지며 다리 또한 두꺼워진 탓에 큰 피해는 없었으나……고통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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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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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성을 지르며 몸을 기괴하게 뒤트는 브렌트. 어깨에 관절이 하나 더 돋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억지로 뒤틀리는 녀석의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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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쪽은 아니다. 아직 녀석의 검은 땅에 박혀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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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사람의 팔을 세로로 갈라놓은 것 같은 촉수가 채찍처럼 날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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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뼈로 이루어진 바리케이드를 걷어차며 잠깐 움직임이 지체된 탓일까. 피하기엔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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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막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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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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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팔에 오러를 집중시킨다. 피부 위로 기이한 문양이 그려지며 피어오르는 열기. 이를 믿고 촉수 다발을 향해 팔을 휘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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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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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탁한 소리와 함께 내 팔을 휘어감으며 후려치는 촉수 다발. 진득한 저주를 휘어감고, 표면에서는 강산성의 점액질을 뿜어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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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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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는 흑마법 저항력을 뚫지 못해 튕겨 나가고, 산성 점액은 대부분 오러를 뚫지 못해 피부를 살짝 태우는 선에서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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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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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연기를 자아냈을 뿐, 내 재생력조차 넘어서지 못한 탓에 팔은 멀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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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팔을 휘어감은 촉수다발을 강하게 휘어잡으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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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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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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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의 대검이 촉수다발을 중앙에서부터 베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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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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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아아아! 내 팔! 또 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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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것. 우화를 위해서는 과거의 몸을 잊고 새로운 몸이 입었음을 기억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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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무너지며 고통에 취약해진 것인지 팔이 잘려 나간 통증에 발작을 일으키려던 브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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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녀석은 흑마법사의 말 몇 마디에 금세 고통을 잊더니, 다시금 이쪽을 노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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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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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에 흑마법으로 서포트 하면서, 브렌트를 수동 컨트롤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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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으로 힘을 부풀리고, 흑마법사 본인이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부작용을 상쇄한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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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녀석의 강함 자체는 오크 워로드와 비교해도 비슷하거나 조금 더 강한 정도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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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의 특징을 생각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오크 워로드보다 더 강할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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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와는 상성이 좋지 않다. 이전처럼 던전 내부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백업은 없지만……그래도 차근차근 깎아내면 얼마든 쓰러뜨릴 수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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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뒤로 물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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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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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공략해 볼 생각으로 거리를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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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회수했을 무광의 칠흑검을 경계하며 브렌트의 오른쪽 촉수 다발에 시선을 돌렸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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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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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쥐여있어야 했을 검이 보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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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상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잘려 나간 촉수 다발 사이를 헤집고, 산성 체액 범벅이 된 검이 화살처럼 쏘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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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유리아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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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죽인다!! 자하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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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대적자를 노렸을 터인데……아니, 예상치 못한 비극도 나쁘지 않구나. 이대로 한 사람의 종막을 보여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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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해하는 흑마법사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유리아를 향해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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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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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가까워지는 거리. 하지만 조금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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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는 대검을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신체에 투자하는 오러를 의도적으로 제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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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방금 막 휘두른 대검을 회수하며 몸을 빼는 도중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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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력으로는 막아내는 것도, 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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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가 대신 받아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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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믿을 뿐이다. 꾸역꾸역 살아남은 증거로 손에 넣은 저항력을, 지금껏 오러 수련에 들인 노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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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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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앞까지 날아든 검 끝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유리아를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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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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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목소리로 눈을 뜬 유리아에게 씨익 웃어주고는 주먹에 오러를 담아, 그대로 검을 쳐내려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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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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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된 영문인지 내 주먹을 그대로 통과하여 심장에 틀어박히는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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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충격에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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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하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우리의 숙적이 숨을 거두는구나! 두려움을 먹는 자를 두려움에 떨게 하던 존재여! 너 또한 한낱 필멸자임을 자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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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 돼! 오라방! 어째서 나를……차라리 약한 내가 맞았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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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의 광소, 그리고 죄책감에 비명을 지르는 유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검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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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아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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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멀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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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하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우리의 숙적이 숨을 거두는구나! 두려움을 먹는 자를 두려움에 떨게 하던 존재여! 너 또한 한낱 필멸자임을 자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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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 돼! 오라방! 어째서 나를……차라리 약한 내가 맞았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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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이 웃어대는 흑마법사. 브렌트의 뒤틀린 육체 속에 숨어들어, 마법으로 소리를 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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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유리아의 목구멍까지 절망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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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쓰러진 에녹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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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하는 기대에 몸을 의존해 에녹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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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빛도 반사하지 않고 죄다 흡수하는, 마치 세상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을 발하는 검이 에녹의 심장을 꿰뚫고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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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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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한 방울조차 흐르지 않지만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에녹의 가슴에 박힌 검에서 풍겨오는 불길함은 유리아의 직감을 맹렬하게 자극하는 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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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든 악의와 저주, 그리고 죽음을 억지로 검의 형태로 묶어두면 이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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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의 발달된 직감은 가까이서 보는 순간 알아차렸다. 저 검은 누군가를 베어 죽이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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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형상은 체내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한 것. 진실로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외상이 아닌 내부를……그 근본을 부정하는 부정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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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 뽑아야……아직 늦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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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멍한 표정으로 쓰러진 에녹(진짜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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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 숨은 붙어있다는 듯이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보며 유리아는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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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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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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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 자루를 움켜쥐려는 순간.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며 그대로 팔이 굳는다. 마치 몸이 검에 닿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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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여! 움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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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팔뚝을 퍽퍽 때려가며 이를 악무는 유리아. 하지만, 무거운 대검조차 제 몸처럼 휘두르던 팔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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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가장 큰 무기는 근력이나 의지가 아닌 직감이고, 직감은 결국 생존본능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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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자하브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검을 자하브의 직계인 유리아가 쥐는 순간……그녀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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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는 몰라도 본능적으로 이해한 미래에 몸이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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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연극이라도 보는 기분인 걸까. 마법으로 브렌트를 제약해서라도 이 모든 광경을 느긋하게 감상하는 흑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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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결계 안에 울려 퍼진다. 흘러넘치는 희열을 숨기지 못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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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하다. 백의 죽음과, 천의 저주. 그리고 만의 비극을 담아 빚어낸 것이다. 아무리 우리의 대적자라 한들, 일찍이 남부를 밝게 비추었던 자하브의 후예라 한들 찾아올 필멸을 피할 수는 없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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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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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의 여식이여. 이제 곧 네 차례구나. 급하게 구한 것이라고는 하나 검집이 제 역할을 다했으니, 계약자로서 성의는 보여야 하니. 그래서? 어찌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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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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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원하겠는가? 혹은 무정타 원망하겠는가? 스스로에게 닥친 비극에 짓눌려 흔하디흔한 배우처럼 눈물을 흘리겠는가.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결국 이 안에서 일어난 모든 눈물은 나의 피가 될 터이니 말이다! 흐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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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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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의 광소를 들으며,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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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바닥 깊숙이 박아둔 대검을 지팡이 삼아 균형을 잡는가 싶더니, 그대로 뽑아 들어 어깨에 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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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를 한껏 낮추고, 대검은 어깨와 한 손으로 들어 올리며, 다른 한 손은 축 늘어뜨린 기이한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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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이 유리아가 전력을 내기 위한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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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의 힘을 탈력시키고, 남은 모든 힘을 대검에 집중한다. 사람이 대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대검의 궤적을 그리기 위해 사람이 보조하는 주객전도의 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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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다. 연보랏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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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버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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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인가. 얼마나 화려하게 피어나느냐가 관건이겠으나 나쁘지 않군. 좋다. 어디 한번 이 목을 벨 수 있으면 베어 보아라. 그런다고 이미 어두운 골짜기를 헤매는 대적자가 돌아오는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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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유리아는 에녹의 옆에 있어야 한다는 직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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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단순히 에녹이 주변 사람에게 무르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간파하여, 그에게 가까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충동 정도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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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자신 대신 날아오는 검을 맞고 쓰러진 지금. 유리아는 알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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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직감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측했을 뿐이라는 걸(그런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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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질색하면서도 자신의 기행을 받아주는 사람. 그리고 이제는 날아오는 검을 대신 맞기까지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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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는 그런 이를 모른 척할 만큼 영악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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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모든 오러를 쥐어짠 유리아의 대검이 밝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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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없어. 내가 죽어도 너는 반드시 데리고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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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을 각오한 전투에 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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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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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칼에 맞아 쓰러진 이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할 겸, 분명 내 가슴에 틀어박혔는데 하나도 안 아픈 검에 대해 알아볼 겸. 일단 가만히 누워있어 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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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그래서 뭔데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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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이게 내 몸에 무슨 영향을 끼치는지 전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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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죽음이니 천의 저주니 하는 말을 늘어놓는 것을 보아, 제대로 이를 갈고 준비한 비장의 무기인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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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지어 유리아마저 엄청 충격받은 것처럼 굴고, 검 자루를 제대로 쥐지도 못하는 것을 보아하니 내가 모르는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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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지. 일단 사람 심장에 칼이 박혔으니 충격받는 건 당연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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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 완전 멀쩡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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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은 물론이요, 상처조차 남지 않았다. 그저 내 주먹을 통과했듯이 검날은 내 심장을 관통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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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초에 충격으로 뒤로 넘어간 것도 검날이 박힌 충격이 아니라, 검날이 스르륵 통과하고 남은 검 자루가 부딪친 충격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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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아무리 심각한 부상을 입은 척, 시간을 끌며 정보를 캐내고 몸 상태를 확인해 보아도 달라지는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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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함, 아무튼 멀쩡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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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 둘로 귀결되었다. 아니,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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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죽음(아님)에 분노한 유리아가 눈이 반쯤 뒤집혀 무리해서라도 흑마법사와 브렌트를 상대하려 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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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가 제법 강하긴 한데……그건 어디까지나 학생 수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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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맞붙는다면 잠깐은 분발할지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흑마법사에게 당하고 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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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표정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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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나. 슬슬 일어나는 수밖에. 조금 머쓱한 게 목숨이 위험한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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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래도 날 위해서 목숨까지 걸어보겠다고 나선 건데 너무 무안하게 만드는 것도 좀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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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정도는 맞춰줘도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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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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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올린 오러를 팔다리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심장 안에서 빠르게 순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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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무의미한 공회전. 하지만 원래 일부러 일으키는 공회전은 멋있으라고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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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박힌 곳을 중심 삼아, 가슴팍 위에 그려지는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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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정제되지 않은 체내 마력이. 지금은 오러가 흐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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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미숙한 오러 조작 능력으로는 이렇게 막대한 양의 오러가, 이렇게 빠르게 순환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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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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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꽂힌 틈새를 통해 불길이 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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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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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소리를 내며 눈을 끔뻑이는 유리아. 흑마법사 녀석은 그래도 짬을 헛으로 먹은 게 아닌지 기겁하면서도 흑마법을 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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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서 엉겨 붙는 어둠이 물리적 실체를 갖고 산성 용액을 뚝뚝 흘리는 송곳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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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지 모를 괴물의 이빨이 그대로 내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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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은……안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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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의 순간 공중에 떠오르더니, 세찬 회전과 함께 휘둘러진 대검이 이를 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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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내가 막을 수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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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중간하게 들어 올린 팔이 잠시 허공을 방황하다가, 그대로 가슴팍에 꽂힌 검자루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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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단숨에 이를 뽑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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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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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상(아님)을 통해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는 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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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과 오러를 흩어내는 내 힘에 직격으로 노출된 탓인지, 뽑아낸 검의 날 부분이 힘 없이 녹아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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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그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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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루만 남은 손잡이를 땅에 떨구고는, 일부러 공회전시키던 오러를 천천히 회수해 정상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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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심장에서 흘러나오던 불길이 전신을 휘어감으며 내 몸을 불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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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불길의 형태로 낭비되던 오러를 회수한 것이지만, 겉보기에는 화염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보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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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멋만 든 흑마법사 놈들이랑 투닥이다 보니 이런 잔재주가 늘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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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눈을 땡그랗게 뜬 유리아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파르르 떠는 브렌트와 흑마법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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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도로 기겁하니 살짝 뿌듯해질 정도. 이만한 기대를 배신하는 건 오히려 멋없는 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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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흑마법사들이 좋아할 법한 지루하고 현학적인 말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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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저물어도 내일이 되면 다시 떠오르는 법. 이런 간단한 이치도 몰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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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부활……!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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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망한 목소리로 뒷걸음질 치는 흑마법사. 그런 녀석에게 다음으로 해줄 말은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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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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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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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저물어도 내일이 되면 다시 떠오르는 법. 이런 간단한 이치도 몰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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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부활……!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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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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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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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뒷걸음질 치는 흑마법사를 향해 에녹이 땅을 박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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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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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박살 내던 지금까지의 소란스러운 돌진과는 다른, 정숙하기 그지없는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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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 길드에게 시달리던 에녹이 역으로 암살자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그들의 움직임을 모방해 만든 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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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력으로 자신을 주장하는 것 같은 오러의 불꽃에 휩싸인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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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장소에서 집중이 잘 되듯, 오히려 에녹에게 유리아의 모든 신경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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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이 세상의 주인공이 에녹이 된 것만 같은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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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에녹의 몸을 휘감고 있던 불꽃이 양팔에 집중되더니, 돌연 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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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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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의 정적과 비견되는 굉음. 결계 안을 가득 채우는 열과 빛이 망막을 지지는 것 같은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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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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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뜬 유리아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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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의 변이된 육신. 단단한 근육과 구역질 나는 종양으로 가득 찬 복부에 큼직한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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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강렬한 빛에 똑바로 바라보지는 못했으나……유리아 또한 나름 경지에 오른 오러 사용자인 만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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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를 폭발시켰어? 아니, 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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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를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에녹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그의 오러 조작 능력은 미묘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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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로 형태를 잡는 것은 물론이요, 단순히 낭비 없이 이동하는 것조차 애를 먹는 게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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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에녹은 정교한 조작을 포기했다. 그저 넘쳐나는 오러를 단숨에 터뜨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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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돌아오며 심장에서 불길을 토해냈을 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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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리아를 진정으로 압도한 것은 전혀 다른 부분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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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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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이 올라가 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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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드는 촉수를 맨손으로 잡아 뜯고, 타들어 가는 복부의 구멍에 팔을 깊게 쑤셔 넣어 헤집고, 버둥대는 다리를 곤죽이 될 때까지 짓밟으며, 주문을 담는 입을 찢어 그 아래턱을 내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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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하던 검이 사라진, 그리하여 거리낄 것이 없어진 에녹이 발하는 원초적인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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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면……아니, 지성 있는 생물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할 법한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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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배운 영광스러운 승리도, 자하브에서 배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살육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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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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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가 잠자리의 날개를 뜯으며 즐거워하는 것처럼 에녹은 한때 인간이었던 브렌트의 전신을 해체하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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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브렌트를 조종하는 흑마법사 또한 순순히 당해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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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의 자재조차 녹여버리는 강산성의 체액이 피 대신 뿜어져 나왔고, 듣기만 해도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은 저주의 진언,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이차원의 괴물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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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방식을 동원하여 저항했다. 하나하나가 책에서나 보던 고위 흑마법. 만약 결계 바깥에서 쏟아졌다면 어지간한 군대와 기사들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갔을 수준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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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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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처리 된 성벽 자재조차 녹여버리는 강산성 체액을 뒤집어쓰며, 피부가 녹아내리고 근육과 뼈의 일부가 엿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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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불길이 치솟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재생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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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인체실험을 통해 인간을 벗어난 에녹의 재생력이 오러를 익히며 한층 더 강해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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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저주하는 진득한 악의는 에녹의 몸을 뚫지 못해 반절이 부스러지고, 간신히 스며든 반절이 에녹의 정신을 어지럽혔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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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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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머리를 한번 후려쳐, 오러로 불사지르더니 금세 제정신을 되찾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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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발하는 빛에서 생겨난 그림자. 이를 통로 삼아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괴이한 존재가 현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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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개의 눈을 지닌 상어의 머리와, 도마뱀의 몸을 합쳐둔 것 같은 혐오스런 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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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녀석이 입을 크게 벌리며 달려들었으나……에녹을 삼키기 직전. 망치처럼 내리친 주먹의 아랫부분에 맞고 입이 다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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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강제로 다물린 채, 관성만 날아드는 이차원의 괴물. 한 손으로는 이미 입을 다물게 하는 데 썼고, 다른 손은 브렌트와 흑마법사를 제압하느라 묶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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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에녹은 허리를 크게 꺾으며 입을 크게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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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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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 지나가듯, 괴생물의 목덜미를 크게 씹고 뜯어내는 에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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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을 닮은 피가 허공에 녹아들듯 사라지더니, 지면에 처박힌 녀석이 두어 번 꿈틀거린 끝에 이차원으로 역소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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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이 모든 것을 바라보던 유리아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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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방식이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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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고, 야만적이며, 우악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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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과 본능, 그리고 끝없는 투기를 연료 삼아 움직이는 태양을 품은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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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자하브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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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의 에녹이 그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크게 의식하지 않았을 뿐. 그는 감히 시조와 비견될 만한 자하브(아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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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들었다면 억울함에 공중제비를 돌았을 법한 생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생각은 내뱉어지지 않았기에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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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형상을 찾아볼 수도 없는, 재생이나 재조립조차 불가능하도록 잔해마저 잔불로 태워낸 끝에 브렌트의 육편 속에서 끄집어내진 흑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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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하게도 머리와 상체만 남아, 브렌트였던 것과 내장을 이어놓은 흑마법사를 향해 에녹이 낄낄 소리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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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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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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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는 다짐했다. 언젠가 자신이 됐건 제벨라가 됐건 에녹의 아이를 낳는다면, 숨바꼭질은 못 하게 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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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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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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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와 상체만 남아 내장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의 흑마법사를 보며 뿌듯함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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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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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 잡는답시고 오러를 너무 공회전시킨 탓일까. 적당히 폼 잡았다 싶어 회수하려 했는데 생각처럼 굴러가질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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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심력이라도 붙은 건지, 계속해서 바깥으로 터져나가려는 오러. 그 흐름에 밀려 자꾸만 분출했던 오러의 회수가 늦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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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발상의 전환이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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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가 안 밟히면 가드레일에 비벼서라도 멈춰야 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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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흘러넘치려는 오러를 억지로 체내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눈앞의 상대에게 전부 쏟아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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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회전하는 오러에 슬그머니 방향성만 제시해 주자, 그대로 브렌트였던 것에 들이박고는 얌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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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가 제어를 벗어나 폭주할 것 같으며, 일단 적에게 때려 박아라……메모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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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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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놈이 내게만 정신을 집중하기도 했고, 경계하던 비장의 한 수가 헛발질이었다는 것도 알았으니, 평소처럼 싸웠다. 그리고 지금에 다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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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을 전부 소모한 건지, 체념한 것인지 담담히 이쪽을 올려다보는 흑마법사. 마치 조금이라도 더 내 모습을 눈에 담으려는 것 같아 살짝 소름끼쳤지만……원래 소름 끼치는 놈들이니 그러려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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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벌레 같은 모습이 된 녀석의 목을 쥐고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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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묻겠는데, 난데없이 자하브에 쳐들어온 이유는 뭐지? 혹시 던전 역류를 일으키던 것과 관련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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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역류? 그런가……모르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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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이 새끼 또 이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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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모르겠지만, 흑마법사 놈들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아마 그만큼 돌아버린 놈들이라 그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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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렇다 보니 심문이 거의 불가능하고, 가끔은 내 질문을 통해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추측해내 지금처럼 비웃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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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나대로 얻어가는 것이 있으니 한 번씩 떠보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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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던전 역류를 이용하려 한 건 맞지만, 일으킨 건 너희들이 아닌가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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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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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자하브에 쳐들어온 이유는……뭐, 이건 안 물어봐도 알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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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이 준비해 온 것. 그리고 나를 죽였다고 착각하며 내뱉은 말들을 종합해 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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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그렇게 죽이고 싶었어? 이거 우연이네. 나도 흑마법사만 보면 죄다 죽여버리고 싶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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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자여. 너는 언제나 예상외의 존재였다. 제물이 될 운명을 거슬러, 우리를 제물 삼았으며. 이제는 우리에게 받은 힘으로 피의 근원을 일깨워 법도마저 희롱하는구나. 머지않아 그 대가를 치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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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그랬구나. 근데 그거 아냐? ……나는 네놈들이 만든 괴물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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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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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는 녀석. 목을 잡고 있는 손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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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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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가 조금씩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흑마법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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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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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곧 네놈들의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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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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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목이 부러진 녀석의 몸이 축 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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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브렌트에 이어 흑마법사까지 쓰러뜨리자, 조건을 만족한 것인지 흑마력으로 만든 결계가 흘러내리듯이 소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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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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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한숨과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을 이완시켰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오러를 공회전시키고 그걸 또 바깥으로 방출시키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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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러에 미숙한 내겐 다소 버거운 활용 때문인지 정신적으로 피로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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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발 나긴 했지만, 이번 습격은 흑마법사들 입장에서도 상당한 준비를 거친 것 같으니 한동안은 별일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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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이 풀려서일까. 평소라면 그냥 머릿속으로만 하던 말이 자연스레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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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빨리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카렌 볼따구 가지고 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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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완전히 소멸한 결계. 그 너머에는 완전 무장을 마친 기사단과 이를 이끄는 제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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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신의 양 볼을 가리며, 힐다의 뒤에 샤샥 숨는 카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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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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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걸 들었다고? 아니, 설마 내가 안쪽에서 싸우는 모습까지 다 지켜본 건가? 이 많은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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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현실에 멍하니 눈만 끔뻑이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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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금슬금 다가온 유리아가 내게 볼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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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오라방. 열심히 싸워놓고 차였네. ……내 거라도 만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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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넌 만지는 맛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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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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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유리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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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 빵떡한데다가, 잡아당기면 쭉쭉 늘어나는 카렌을 어케 이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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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저점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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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한 것들이 아닌, 고위 흑마법사를 쓰러뜨린 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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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이 던전 역류를 직접 일으킬 능력은 없다는 걸 안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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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순수하게 티배깅과, 내 죽음(아님)에 분노해 목숨을 걸어준 유리아를 위해 일종의 쇼맨십이 생중계되고 있었던 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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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아……나는 나약하고 병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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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약하고 병든 사람은 몬스터 수준으로 변이된 사람을 맨손으로 찢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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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보렴. 육체적인 힘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밤마다 나는 복수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껍데기뿐인 목표에 시선을 빼앗기고, 돌아가지 못하는 과거를 향해 끝없이 발을 옮기는 망령에 불과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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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도 잘하시네요. 어제도 자하브의 식량 창고를 거덜 낼 기세로 고기만 골라 드시고는, 배를 까놓고 시끄럽게 코 골면서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배불리 먹고, 푹 잔다. 저는 이만큼 속 편한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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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나 코 골아? 아니 애초에 내가 코 골며 자는 건 어떻게 알았니?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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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 건강을 염려하는 것은 집사의 덕목이라 그런 것일 뿐이니, 오해하지 말아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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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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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착각을 하는 거냐는 듯, 별꼴 다 보겠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이며 이쪽을 훑어보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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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무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참 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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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하고 마저 들어. 어디 보자. 어디까지 말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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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븝. 읍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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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입 막지 말고 그냥 말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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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돌아가지 못하는 과거를 향해 방황하는 망령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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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그랬었지. ……그런데 이다음이 뭐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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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저한테 물으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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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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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조금 전의 말은 전생의 내가 지구에서 뒹굴거리며 읽었던 인터넷의 뻘글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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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엄청 수려한 문장으로 헛소리하는 내용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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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그사이에 까먹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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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떠올리려 고민했으나, 여전한 막막함에 그냥 결론만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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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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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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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네 볼따구만이 정신적으로 지친 나를,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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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소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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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을 푸욱 내쉰 카렌이 무언가 작성하던 수첩을 잠시 덮고는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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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그렇게 제 볼을 주무르려고 하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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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람은 말랑말랑한 걸 만지면 기분 좋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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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여자의 가슴 같은 것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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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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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았던 터라 순간 버벅이는 목소리. 하지만 정작 스트레이트를 날린 카렌은 태연한 어조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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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그랬군요. 가주님의 취향은 가슴이 말랑한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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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또 뭐 하러 기억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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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슬슬 가주님의 반려분을 물색해 보아야 할 시기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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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누님은 어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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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반려를 말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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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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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생각은 없고, 상황이 찾아오기 전에 어떻게든 몸을 뺄 생각이지만 아무튼 일단 나는 제벨라와 약혼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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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벌써부터 다음 아내를 찾는다고? 이게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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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어 카렌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가 눈을 끔뻑이며 똑같이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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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서로 눈동자를 바라보며 끔뻑이기를 반복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입을 벌리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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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최근 가주님께 혼담이 많이 들어와서 일차적으로 거를 필요가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 당장 들이자는 의미가 아니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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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렇지? ……잠깐. 혼담? 갑자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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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일전에 가주님께서 보여주신 위업은 이미 제국 전역에서 유명하니 당연한 일 아닙니까. 당연히 혼담이 쏟아질 만하죠. 순수하고 강력한 피를 원하는 귀족은 얼마든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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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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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보 양보해서 자하브령에서, 혹은 남부에서 유명해진 건 이해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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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국 전체에서? 대체 어떻게? 무슨 수로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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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어하는 내 모습에 카렌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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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의 피로로 눈치채지 못하셨던 건가요. 그 자리에는 자하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의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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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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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아무도 안 볼거라 생각하고 폼 잡으며 했던 모든 언행을 자하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제국 각지에서 뽑힌 유수의 인재들도 봤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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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또 쪼르르 달려가 본가에 알렸고, 그 탓에 제국의 이름있는 귀족들 대부분이 내가 흑마법사 상대로 반쯤 정신줄을 놓고 싸우는 모습이나, 부활(아님)을 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소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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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음. 무슨 상황인지 완벽히 이해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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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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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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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이야. 볼따구 이리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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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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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이라는 말에 움찔한 카렌. 이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느릿하게 이쪽으로 향해 얼굴을 들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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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질끈 감은 것이 표정 변화가 드문 카렌에게서는 보기 힘든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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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카렌의 양쪽 볼을 잡고 천천히 잡아당긴다. 저항 없이 쭉쭉 늘어나는 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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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맛이지. 드디어 좀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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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을 번쩍 들어, 마주 보는 자세로 무릎 위에 앉혀놓고는 마구 볼따구를 주무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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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 살아났다고 착각할 만큼 강한 혈계능력을 보유한 나를 향해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악수의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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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모르고 있었지만, 내게는 귀족의 피가. 그것도 상상 이상으로 진하게 흐르고 있던 모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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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게 자하브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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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내가 지닌 대부분의 힘은 인체실험을 통해 강제로 얻거나, 따로 죽어라 단련해 손에 넣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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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능력을 타고난 것으로 보이는 건 분명 형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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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도 또 다른 자하브의 혈족이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였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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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정신 나간 생각인 것 같지만, 형님이 갑자기 혈통의 어두운 비밀에 눈을 떠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나를 낳았다는 건 말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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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나는 흑마법사 조직에 팔려 갈 때까지 지구에서의 기억을 제외하면 평범한 아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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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으로 만들어진 농후한 자하브의 핏줄을 타고났다고 하기에도 문제가 많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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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나이만 어렸지, 머리는 그대로인 내게 어머니와 형님은 그냥 평범한 모자 관계로 모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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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나와 형님의 나이 차이가 고작 1살밖에 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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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내가 귀족 혈통일지는 몰라도 자하브가 아니라는 건 확정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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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에서 내게 전국적인 관심이 쏠리는 것은 영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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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실각당해 내려와야 한다면 더더욱 그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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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핀치는 찬스. 위기란 곧 기회의 다른 이름인 법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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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의 남자가 전부 죽었다는 소식에 유리아의 아카데미 생활이 꼬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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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없어 어떻게든 찾아서 가주로 내세운 사생아가 너무 강함’이라는 소식은 다른 이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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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저점 매수의 기회처럼 보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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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는 제국의 4대 대공 가문이라 불릴 정도의 명문. 하지만, 최근의 연속된 던전 역류를 막느라 재정적, 군사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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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가주직에 오른 신임 자하브 대공은 사생아 출신이라 배운 것이 없고, 내부에서의 균열도 적잖이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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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지닌 힘은 무시할 수 없으니, 자하브의 권세가 약해진 지금 연을 맺어두면 나중에 더 큰 이득이 되어 돌아올 거라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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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게 혼담을 보내오는 귀족들은 지금 당장의 이득이 아니라, 언젠가 찾아올 미래의 떡상을 믿고 내게 투자하려는 것이다! 전생의 내가 처음 주식할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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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생의 나처럼 무릎에서 산 게 아니라, 사실 어깨에서 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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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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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마구 만지작대던 카렌의 볼따구를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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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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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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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담 그거 다 취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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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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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자하브와 연을 맺고 싶다면 친구비를 내라 그래. 당연한 말이지만 많이 내는 만큼 우정이 깊어질 거라는 말도 덧붙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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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말씀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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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친구비만 내면 다 친구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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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대답했건만, 어째서인지 카렌이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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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제벨라 아가씨께, 아카데미의 학생들에게, 그리고 서신을 보내오신 모든 귀족가에 그리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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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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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고개를 끄덕이고는 총총걸음으로 멀어지는 카렌의 뒷모습에 씨익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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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이제 남은 건 돈은 받아먹었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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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바보는 아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내가 뭔가 의도적으로 조지려 하면 오히려 역효과로 좋은 결과만 나온다는 건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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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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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받았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레 불만이 쏟아질 테고, 이는 고스란히 나의 평판 문제로 이어질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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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 주가는 알아서 떡락한 끝에, 최종적으로는 상장폐지에 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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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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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계획 자체는 합리적이었으나, 문제는 그가 생각치 못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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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아무도 자하브에게 품위라던가, 신의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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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비? 심심하면 근처 영지 삥 뜯는 건 자하브의 오랜 전통이었다. 빌린 돈을 갚으라고 했더니 협박이 날아오는 건 연례행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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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자하브와 연을 맺으려던 가문이 항상 존재해 온 이유는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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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사회에서는 대공 같은 최고위 귀족의 이름을 빌린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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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에녹은 친구비를 받으면 자하브와의 친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금액에 따라 줄까지 세워주겠노라 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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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받은 뒤에는 침묵할 뿐, 너네 돈 좀 많아 보인다? 같은 소리를 하며 더 내놓으라고 깽판을 부리지도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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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고위 귀족과의 연을 트기 위해서는 막대한 뇌물이 필요하단 것은 이 세계의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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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에녹은 암암리에 이루어지던 것을 양지로 끌어 올려 공정한(?) 경쟁을 시킨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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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전 세대의 자하브였다면 여식도 받아 가고, 지참금 명목으로 돈도 뜯어갔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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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은 다 필요 없고 순수하게 돈만 내놓으라고 하는 셈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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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상대적으로 에녹의 평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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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모든 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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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를 넘어선 자,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품은 사내, 흑마법사들이 두려워하는 대적자……그런 사람이 돈만 주면 친구가 되어준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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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는 돈이라면 썩어 넘치도록 쌓은 집단. 마탑이라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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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스승님께 연락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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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탑에는 해결하지 못한 오랜 문제가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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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새로운 친구가 이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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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문을 읽던 아카데미 소속의 유망한 마법사 소녀가 한참의 고민 끝에 명상 중이던 자신의 룸 메이트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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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자하브 대공 각하……그러니까 너네 오빠는 어떤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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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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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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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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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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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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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저점매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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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내 동생! 여기 있었구나. 누이가 사랑한다고 말했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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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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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 오러 수련만 좀 하고 개백수마냥 정원을 산책하던 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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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스커트를 들어 올린 제벨라가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것 같은 스텝을 밟으며 내 쪽을 향해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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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집무실이 됐건, 본인 방이 됐건 항상 실내에만 틀어박혀 있던 제벨라가 별일 없는데도 외출한 것도 놀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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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품위 있게 사뿐사뿐 걸어 다니며, 부드러운 미소 정도만 짓던 제벨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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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통통 튀어오는 모습에는 아무리 나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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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가요 제벨라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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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에녹도 참. 전부 네 덕분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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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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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제벨라의 뒤를 반보 뒤에서 따라오던 아론 집사장이 고개를 꾸벅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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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아가씨께서는 가주님께서 과감한 결단으로 자하브의 재정난을 해결해 주신 것에 기뻐하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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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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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여전히 헤실거리는 제벨라가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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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에녹 네가 받기로 한 친구비? 라는 게 있잖니. 정말 많은 상단과 귀족들이 우애의 증거를 보내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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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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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동시에 의아함도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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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친구비를 받기로 발표한 직후라면 모를까, 슬슬 아무것도 안 하는 내게 실망해서 한소리 나올 쯤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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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아직도 친구비를 보내오는 곳이 있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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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마다! 약간 규모가 부족한 이들은 줄까지 서가며 서신과 금화 주머니를 보내올 정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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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그렇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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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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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제벨라. 길게 늘어뜨린 백발이 바람결에 살랑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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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에녹 네가 자하브의 황금기를 다시 가져다줄 사람이기 때문이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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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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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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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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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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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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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기는. 요즘 나도는 소문을 한번도 못 들어 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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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인 제벨라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뭔가 심상치 않은 수식어를 나열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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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회귀, 금빛 태양, 흑마법 학살자, 고귀한 짐승,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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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거기까지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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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가 낯부끄러운 중2병 감성의 별명에 손발이 절로 뒤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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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제벨라가 나를 의도적으로 놀리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원래 이런 건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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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판타지 세상에서 중2병스러운 타이틀? 이건 그냥 순수한 칭송의 증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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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정말로 세간 사람들은 나를 아직도 엄청나게 올려 치고 있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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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그런 별명이 붙은 거죠?! 저 요즘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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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해봐야 겨우 한 달 남짓 아니니. 이제 막 소문에 불이 붙을 시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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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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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마법은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수의 특권층에게 허락된 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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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은 입에서 입으로, 가끔은 서신으로 소문이 퍼지는 것이 이 시대의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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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야 내가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본 아카데미 학생들과 그들의 집안에만 퍼졌던 정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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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상인들의 입을 통해 평민들에게도 전해지고, 자연스레 그 지역의 귀족들의 귀에도 들어가기 시작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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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일차적으로 친구비를 보내왔던 이들이 잠잠해질 무렵, 소문을 접하고 뒤늦게나마 친구비를 보내는 이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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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 잠깐, 그래도 처음 친구비를 보낸 곳은 불만이 많겠죠? 제가 아무런 대응도 뭣도 없이 가만히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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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리가. 오히려 자신들이 먼저 자하브와 연을 텄다는 것을 사교계에 자랑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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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사교계에서 제 소문이 퍼지고 있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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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지. 다른 곳은 몰라도 중앙 사교회에서는 에녹 네가 참 뜨거운 감자라는구나. 협력 관계를 맺은 코넬리아 황녀님께서 직접 서신에 담은 내용이니 확실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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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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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알았다. 그냥 제국이 내 적이고, 세상이 나를 억까하는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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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억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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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으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던 것도 잠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어 싸매는 내 귓가에 제벨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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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이렇게 잘 되고 있지만……한가지 고민이 있어 이렇게 에녹 널 찾아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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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고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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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에녹. 내 동생아. 네가 이 누이를 믿고 대소사를 맡겨준 건 고맙지만, 아무래도 이건 내 선에서 처리하기에 너무 큰 일 같아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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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제벨라가 품에서 고급스러운 서신 하나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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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 모르겠지만, 묘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걸 보아 평범한 종이가 아니라 모종의 마법이 걸려있는 마법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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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제벨라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꺼내고 내 직감도 잠잠한 걸 보아 별로 위험한 마법은 아닌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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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이가 읽어줄게. 잠시만 기다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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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이 정도는 이제 스스로 읽을 줄 알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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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몰라도 문맹은 탈출했다는 생각에 약간 으스대며 제벨라에게서 서신을 뺏어 들듯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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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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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면서도, 이내 흡족한 미소를 짓는 제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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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간지러운 기분에 그 시선을 피하고 서신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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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요약하면 친구비를 많이 줄 테니, 자기들 영지의 오랜 골칫덩이를 치워달라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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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 일단 대공 아닌가요. 용병도 아니고 이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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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끝까지 읽어보렴. 그럼 이해하게 될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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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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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을 지나 형식적인 인사말. 그리고 구체적인 금액 부분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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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골드요? 이게 얼마나 큰 금액인가요 제벨라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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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가 일종의 수용소긴 하지만, 브로커를 통해 외부와의 은밀한 교류 정도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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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반쯤 고립된 곳이라도 금화는 제대로 화폐로서 성립했다는 소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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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범죄가 판치는 암흑가의 물가에 익숙해진 내게도 100만 골드는 영 감이 안 잡히는 금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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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내가 한창 암살자 길드에게 쫓기고 있던 당시, 내 목에 걸린 의뢰금이 10만 골드였던 건 기억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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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질문에 제벨라가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조심스레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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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네……100만 골드라면 자하브 성을 하나 더 지을 수도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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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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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성은 주기적으로 터지는 던전 역류를 막아 세우기 위해, 특수 자재로 만들어진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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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 그 자체도 비싸고, 쌓아 올린 성벽에 인챈트 하는 마법은 더 비싼. 장담컨데 같은 무게의 금과 좋은 승부가 될 법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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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금으로 된 동전을 몇십만, 몇백만 단위로 거래할 만큼 이 세계는 지구에 비해 금이 흔하다지만, 이를 감안해도 말도 안 되는 금액인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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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금액을 겨우 친구비로 줄 수 있는 곳이……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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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라는 이름은 잘 알고 있다. 자하브에 들어온 뒤, 최소한의 제국 역사를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그게 아니더라도 칼립소에서도 이름이 들릴 만큼 유명한 곳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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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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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의 대공이 직접 이런 서신을 보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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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 같구나. 이그나투스 대공이라면 100만 골드도 허언이 아니니,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기 힘들어 에녹 너를 찾고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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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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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멸문한 칼립소 대공이나, 어쩌다 보니 내가 달고 있는 자하브 대공의 자리처럼 제국의 4대 대공 중 하나이자, 서부를 다스리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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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국의 유일한 마탑의 주인이며, 비극의 신에게서 살아남은 최후의 드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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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대공 가문이지, 살아있는 다른 드래곤이 없기에 이그나투스 본인의 대에서 끝나는 일대작위나 다름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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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이그나투스는 제국보다도 오래 살아온 존재. 그리고 별일 없다면 앞으로도 천년은 우습게 살아갈 장생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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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쌓아놓은 재산은 차고도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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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먹으면 제국의 경제를 박살 낼 수도 있지만, 황제가 매번 사정사정하는 바람에 참아주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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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그나투스 대공이라면 100만 골드는 어렵지 않게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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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딱 1만 골드만 슬쩍해도 평생 놀고먹을 돈으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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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하브 대공 자리에서 내려왔을 때를 대비한 비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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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생각하자 갑자기 의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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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금액이라면 이야기 정도는 들어보는 게 좋겠죠. 무엇보다 이젠 같은 대공이잖아요? 인사도 한번 해둬야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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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네 뜻이 그렇다면, 조만간 찾아가는 것으로 답장을 넣어두마. 그 사이에 이그나투스 대공의 대리인과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떻겠니? 자세한 사정은 대리인을 통해 전달하겠다고 하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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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대리인이 여기 와있나요? 벌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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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와 서부의 거리, 그리고 소문의 확산 속도를 생각하면 너무 빠른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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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아직 대답도 못 받았는데, 대리인부터 보낼 줄이야……마탑주이자 드래곤이니까 텔레포트라도 쓴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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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질문에 제벨라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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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그런 게 아니란다. 놀랍게도 이그나투스 대공의 322번째 제자가 아카데미의 졸업반이었지 뭐니. 심지어 유리아의 룸메이트기도 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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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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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오래 사신 분이라 그런 거 아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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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제국의 역사 속에서 322명의 제자밖에 안 들였다면, 오히려 적게 들이는 편이라고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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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알겠어요. 한번 만나서 이야기는 나눠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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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했단다.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이 누이에게 말해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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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는 제벨라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유리아의 방을 찾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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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성에 있는 방이 아니라, 바깥에 마련해 둔 아카데미 학생들을 위한 숙소의 방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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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메이트라고 하니, 같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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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대공의 지위를 이용해 여자 기숙사를 당당하게 정문을 통해 들어갔다. 솔직히 좀 두근거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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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찾는 것이 여동생의 방이라는 게 영 그렇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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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렇게 도착한 유리아의 방문을 여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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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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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메이킨. 드래곤은 도마뱀처럼 총배설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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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절대 스승님 앞에서 그런 이야기 하지 마! 그리고 제자인 내 앞에서 하는 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시비 거는 셈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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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메이킨 너도 우리 오라방 길이가 몇 센티인지 궁금해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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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이야기거든?!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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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머리의 소심해보이는 인상의 소녀, 메이킨과 눈이 마주쳤다. 총배설강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그녀가 이그나투스의 제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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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흠. 일단 내 키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따로 재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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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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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메이킨이지? 이그나투스 대공의 서신을 받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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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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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아무래도 걸즈 토크 중이었던 것 같은데 조금 나중에 다시 오는 게 좋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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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름의 배려가 담긴 말이었으나, 아쉽게도 이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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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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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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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야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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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이 비명을 지르며 전신으로 마나를 방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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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소용돌이치는 마나의 폭풍. 그리고 메이킨이 있던 자리에는 주인을 잃은 옷가지와, 그사이에 숨어 몸을 둥글게 만 햄스터만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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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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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마법도 쓸 줄 아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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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옷가지 사이로 슬쩍 보인 속옷은 회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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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정확히 말하자며 햄스터가 줄줄 흘리는 눈물에 젖어 살짝 색이 진해진 회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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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 숨어있던 흑마법사들을 쓰러뜨린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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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성으로 돌아온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급하게 준비한 것치고는 성대한 개선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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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 영주님이 돌아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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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의 흑마법사를 해치우시고 돌아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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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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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님이라면 한번 대드릴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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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친! 자네는 남자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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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주님은 자하브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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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가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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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들려오는 나에 대한 찬양. 중간중간에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에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이게 다 뭔지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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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부여잡으며, 어쩐지 가장 우쭐해하고 있는 힐다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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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카렌에게 물었겠으나……지금은 살짝 토라진 모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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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다 경. 표정 좋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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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 수업 첫날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출세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제가 줄을 잘 서긴 한 모양입니다. 벌써 이렇게 명예로운 자리에 설 줄은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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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칼튼 경. 당신 딸래미 좀 봐. 이거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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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흐흑! 드디어 자하브에……그래! 피가 어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 이제야 정상화가 됐을 뿐! 앞으로 더욱 잘 보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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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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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돌아본 칼튼은 어찌나 감동한 것인지 대성통곡 수준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래서야 내 말이 들릴지도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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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아저씨가 눈물 콧물 질질 짜는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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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숨을 푸욱 내쉬며, 주변의 찬양을 한껏 즐기고 있는 힐다의 귓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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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이제 즐기는 건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좀 설명해 줘 봐. 우리 분명 제대로 된 발표도 뭣도 없이 다짜고짜 계승식 도중에 박차고 나와 던전에 들어간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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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게 신경 쓰였던 거군요. 줄곧 같이 움직였으니, 저라고 주군이 모르는 걸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한가지 짐작 가는 것이 있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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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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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아가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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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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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께서도 제벨라 아가씨와 만나보셨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대충이나마 알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떠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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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나보다 더 가주직에 어울리는 사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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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건 아니죠. 자하브의 주인은 모든 분쟁의 선봉장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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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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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슬쩍 말을 꺼내봤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진짜 장난 없구나 남부의 강자 숭배 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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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사이. 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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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그만큼 주군께서 제벨라 아가씨의 격무에 느끼는 바가 컸다는 뜻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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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뭐, 그런 거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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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아가씨는 무척이나 유능하신 분입니다. 계승식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는 결론을 내리셨을 겁니다. 주군께서 이쯤이면 승리하고 돌아오시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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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가능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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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주군의 힘과 성정을 믿고 계신다면 얼마든 가능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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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환호하는 영지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때로는 귓속말하느라 붙어있는 나를 과시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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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레 주변에 자신을 각인시키던 힐다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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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아가씨께서는 결코 자하브의 가주가 되실 수 없으시지만, 자하브의 안주인으로서는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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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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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제벨라만큼이나 좋은 여자도 없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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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다른 사람들에게나 근친이고 나한테는 족외혼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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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명가라는 멸칭이 괜히 붙은 게 아닌 걸까. 어딜 가도 족내혼단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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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잠시. 개선식에 잔뜩 들떠있던 힐다의 목소리가 돌연 진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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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주군. 절대 제벨라 아가씨를 슬프게 해선 안 됩니다. 이제 정식으로 대공의 지위에 오르셨으니 자하브령에서……아니, 남부 전체에서 주군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겠죠. 그럼에도 제벨라 아가씨를 홀대하지 말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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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생각은 하나도 없었지만, 일단 묻자. 그 정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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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 정도입니다. 장담컨데 제벨라 아가씨가 파업하는 것만으로도 자하브의 재산은 반토막 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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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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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제벨라가 가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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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던전 때문에 이게 다 무슨 고생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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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혀를 차는 것도 잠시. 여전히 열렬한 환호를 가만히 방치하는 것도 좀 아니다 싶어 손을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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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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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민들의 함성이 더욱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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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흑마법사 좀 잡은 걸로 이렇게 칭송받는 건 쪽팔리긴 하지만……솔직히 말해서 약간은 기분 좋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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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힐다가 이래서 출세하고 싶어 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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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은 물론이요, 현생에서도 지금껏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출세의 맛은 꽤나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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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근데 힐다 경. 왜 아까부터 나를 주군이라 부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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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잡은 줄. 이제와서 다른 줄로 갈아탈 수 없다면, 남들에게 자랑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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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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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사라는 이미지를 알차게 써먹겠다는 뜻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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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나를 다시 보니마니 했던 날 이후로 힐다가 너무 솔직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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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한창 흑마법사들을 때려잡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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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리아는 코넬리아대로 제벨라와 함께 협상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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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깨달았다. 눈앞의 상대는 에녹과는 다른 의미로 괴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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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이란 결국 서로 취할 것은 취하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며 완성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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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벨라는 아무리 도중에 변경된 것이라지만, 코넬리아가 준비해 온 모든 조건을 부드럽게 흘려내고 자신의 조건을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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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이 서로에게 훨씬 이득이라는 사실을 코넬리아는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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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에 예상했던 이권은 하나도 챙기지 못했지만……이 정도면 오히려 당장은 더 도움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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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자세로 찻잔을 들어 한잔 들이켜는 제벨라를 흘깃 바라보는 코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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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어주는 제벨라의 모습에 코넬리아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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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순수한 얼굴을 하고,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이 자신의 계획을 쳐부쉈는지 잘 알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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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적으로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 하나 내어주지 않았으나, 코넬리아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정보와 자금을 순순히 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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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에 빠졌다고는 하나, 연속된 사업 실패와 몬스터 토벌 실패로 입지가 줄어든 코넬리아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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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가로 제벨라가 받아 간 것은 아카데미의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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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실습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아카데미 학생들을 남부의 던전으로 보낸다는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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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는 제국의 가장 재능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곳에서 실습을 보낼 정도의 이들이라면 모험가들보다 훨씬 고급 인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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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들이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알아서 몬스터를 정리해 준다는데 얼마나 좋은 일인가. 딸깍은 언제나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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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자하브는 아직 혼란스러운 집안을 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코넬리아는 자신의 적이 누군지 알고 대항할 힘을 얻은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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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든 맹수, 다른 한 사람은 양의 탈을 쓴 늑대. 확실히 대공가는 달라도 다르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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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벨라를 향한 기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감탄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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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혈통이 이 정도로 괴물들이라면, 계승권은 좀 떨어져도 아무튼 황실의 적통인 자신은 더 대단한 사람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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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혈통주의자다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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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차례 무너졌던 멘탈을 빠르게 수복한 코넬리아가 눈치를 보며 마시던 찻잔을 자신만만하게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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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아직 유리아는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었던가요. 그럼 이번 실습 때 오랜만에 얼굴을 보실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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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황녀님께서 유리아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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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녜헤? 아, 으흠. 네. 물론이죠. 유리아가 유급하는 바람에 제가 먼저 졸업하긴 했지만 아카데미 동기였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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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셨군요. 아, 차 한잔 더 어떠신가요? 최근에 좋은 찻잎을 하나 구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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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주시면 감사히 마실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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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대신 유리아가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좀 알려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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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 정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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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 다과도 차에 어울리는 것이 있으니 새로 내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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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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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자하브. 아카데미에 가 있는 동생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돌연 태도가 돌변한 제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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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동생 친구라도 대하는 것 같은 스스럼 없는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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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어요! 믿을 수 없어요! 그 음험한 여자가 어떻게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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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콧노래까지 부르는 제벨라의 뒷모습에 간신히 멘탈을 진정시켰던 코넬리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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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죠? 진짜 뭐죠?! 설마 차에 독이라도 타려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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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차에 독을 타는 것은 제벨라의 전문이었으나, 이번에는 예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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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자하브. 스스로의 손으로 아버지는 물론이요, 에녹이 오기 전의 모든 형제자매를……심지어 사생아들까지 꼼꼼하게 몰살시킨 희대의 악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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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아끼는 존재가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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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바로 대숙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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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에서 제벨라를 위해 울어주고 분노해 주던 단 한 명뿐인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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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자하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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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물론 이제는 에녹이 추가되어 단 둘뿐인 동생이라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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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코넬리아의 떨림이 심해지건 말건 제벨라의 입가에는 한층 더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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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에녹이 승리와 함께 돌아오며 계승식을 끝마쳤고, 이제 곧 유리아 또한 자하브 성을 찾아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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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가족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뜬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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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로 너무 많이 따라 찻잔에서 차가 흘러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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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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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은 제벨라가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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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네요. 이건 저희끼리의 비밀로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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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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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리아는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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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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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식을 가로질러 도착한 자하브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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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러하듯, 제벨라가 자애로운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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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렴 에녹. 금방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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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누님이랑 약속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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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런 과거를 겪고도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걸까. 분명 천성이 선하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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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급하게 인사를 하고 떠난 코넬리아 황녀의 뒷모습에 키득이던 제벨라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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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기대하렴 에녹. 이제 곧 유리아가. 아카데미에 다니던 네 동생이 돌아올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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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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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번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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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는 아무래도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가주직을 너무도 간단히 넘겨주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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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동생인 유리아는 다를지도 모르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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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유리아가 가주직을 원한다면……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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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떠있는 제벨라를 향해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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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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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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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는 항상 여동생을 가지고 싶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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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이 부분은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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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는 외동이었고, 현생에는 기간제 형이랑 새 누나밖에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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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저점매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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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 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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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팬티를 뒤집어쓴 햄스터가 잉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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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말 그대로 햄스터 눈물만 한 물기에 젖은 회색 속옷의 중앙부가 짙게 물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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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야. 이거 어떻게 하냐. 괜찮은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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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괜찮아. 메이킨은 패닉에 빠지면 햄스터로 변하는 습관이 있어. 이번 던전 실습 중에도 한 번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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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위험한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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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도 않아 오라방. 애초에 반사적으로 변신 마법을 펼칠 정도로 놀랐다는 건, 인간형의 모습일 때도 별다른 도움이 안 되는 상태라는 뜻이거든. 실제로 던전에서도 전투 도중에 햄스터가 된 적은 없었어. ……대신 식물형 몬스터인 알라우네에게 당해 산 채로 소화 당하기 직전에는 햄스터로 변해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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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정말로 정신 나갈 것 같은 상황이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햄스터로 변하는 일은 없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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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그럼 나를 무슨 알라우네 소화액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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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오라방에게 잘못 걸리나, 알라우네 위장에 갇히나 인생 끝나는 건 똑같긴 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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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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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이 터무니없는 음해는 어디서 시작된 것인가 싶어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리아는 설명 대신 으스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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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헴. 메이킨이 오라버니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길래 조금 알려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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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묻겠는데 뭐라고 말한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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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있는 그대로를 말했지. 오라방이 아카데미 학생 전체가 달려들어도 어찌하지 못하는 괴물이라던가, 나름 명예를 중요시해서 명분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지만 반대로 명분만 주어지면 마음껏 날뛸 준비를 마친 짐승이라던가……대충 이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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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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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유리아의 눈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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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체 무슨 결론에 다다랐길래 메이킨은 햄스터로 변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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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속옷을 뒤져 햄스터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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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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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손바닥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마는 갈색 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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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콕콕 찌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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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 진정해라. 나는 그저 이그나투스 대공의 조건을 자세히 알고 싶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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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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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음. 이해는 해. 친구끼리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놀랄 법도 하지. 심지어 그게 이 땅의 주인이라면 더더욱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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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그거 아닐 걸 오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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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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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어떻게 땡땡이치냐는 이야기를 하다가 선생님이 들이닥쳤다는 느낌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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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끔뻑이는 나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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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방 길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오라방이 들이닥친 거잖아. 갑자기 오라방이 ‘으흐흐. 내 길이가 궁금하다면 직접 알려주는 수밖에. 으럇으럇!’ 이럴 거라고 생각해서 겁먹은 게 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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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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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아니, 대체 어떻게 그런 결론에 다다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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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유리아의 말이 맞다는 가정하에 메이킨을 살살 꼬드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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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 오늘은 그냥 딱 말만 하고 갈 테니까. 그러니 일단 변신 모습부터 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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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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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메이킨. 내용물이 사람이라는 건 알아도, 겉보기가 햄스터다보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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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햄스터로 남아있으면 실수로 밟을지도 모르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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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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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오라방 그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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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겁하는 메이킨과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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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건 나름 진솔한 걱정을 해준 것인데 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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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대 여자들은 이해할 수 없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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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햄스터가 짧은 팔을 다급히 휘저으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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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 찌익! 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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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작은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마나.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순간. 살색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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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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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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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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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 햄스터를 올려놓고 있던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 그리고 부드러운 살을 파고드는 손가락의 감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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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알몸의 메이킨이 내 손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웅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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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옷가지는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져 있으니 당연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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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이고는 메이킨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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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옷부터 입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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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문을 닫고 잠시 나가자,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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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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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었던 여학생들이 호다닥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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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내가 어떻게 보였을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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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앞세우고, 공무를 들먹이며 여자 숙소에 들어와 당당히 여동생의 룸메이트를 희롱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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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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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 정도로 기겁할 정도의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다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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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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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안에서는 당연했던 일이, 자하브 바깥에서는 그렇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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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내 망나니짓이 항상 실패했던 이유가 오직 자하브 평균 하나 때문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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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생각이 깊어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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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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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더운 남부의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요를 돌돌 말았으며, 유리아조차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거리를 멀찍이 벌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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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진정한 메이킨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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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그러니까 이그나투스 대공께서 자하브 대공께 원하시는 바는 간단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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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아무리 생각해도 100만 골드 어치의 일은 없을 것 같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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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병의 제작을 도와달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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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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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듣는 단어에 눈을 끔뻑이자, 메이킨이 설명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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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용아병이라는 건 주기적으로 빠지는 스승님의 비늘이나 이빨 같은 걸 이용해 만드는 최상급 골렘이에요. 마법사들은 많지만, 마법사를 지킬 기사가 부족한 서부가 전선을 유지하는 핵심 기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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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이그나투스 대공은 영주이자, 마탑주긴 하지만……누군가의 충성을 받진 않는다고 들었으니 당연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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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라는 지위가 있는 만큼 필요하다면 자하브처럼 성을 짓고, 주변 영지로부터 충성을 받으며, 명예를 미끼로 기사를 양성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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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그나투스는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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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이라는 자신의 종족의 장점을 극대화 시킬 수 있도록 마탑을 짓고, 자신의 비전을 인간도 이해할 수 있게 개정하여 마법사를 키워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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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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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신 트라고데아의 토벌 후. 차마 신을 완전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없어 4조각의 재앙으로 쪼개, 4대 대공으로 하여금 이를 감당케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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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의 자하브 가문이 던전은 관리하며, 한때 트라고데아의 군대 대부분을 차지하던 몬스터 틀어막는 의무를 짊어졌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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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의 이그나투스는 죽음이 두려워 동족을 배신하고, 트라고데아의 편에 섰던 사룡(死龍) 모르테우스와 그 휘하의 언데드들을 억누를 의무를 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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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겠지만, 균형 잡힌 병력을 키우는 것보다 수준 높은 마법사를 늘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니 마탑을 세운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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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조금 전에 메이킨이 말한 것처럼 용아병이 됐건, 다른 무언가가 됐건, 어지간한 기사 수준이라면 모종의 방법으로 대체하는게 더 효율적이라 생각한 걸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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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유는 알았다. 자하브 가문이 후계자 다툼으로 약화되어, 이전처럼 수월하게 던전을 관리할 수 없을 것 같자 코넬리우스를 통해 황실의 도움을 받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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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 또한, 무슨 문제가 생겨 이전처럼 언데드 무리를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아 내 도움을 청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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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이쪽의 눈치를 보는 메이킨. 그런 그녀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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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이쪽도 대공가인 만큼 그 걱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니 얼마든 도와줄 수 있지. 그런데 구체적으로는 뭘 어떻게 하면 되지? 난 마법에 문외한이라 말이야. 마법사를 죽이는 법은 알아도, 용아병을 만드는 법 같은 건 모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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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익! 저, 저도 볼일이 다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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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건 농담이었어. 내가 죽이는 건, 나를 죽이려는 마법사랑 흑마법사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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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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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인간의 형태임에도 조심스레 담요 바깥으로 목을 빼고는 주변을 경계하듯, 두리번거리는 메이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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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그러고 있던 메이킨이 살짝 풀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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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으……용아병을 만드는 건 어차피 스승님이랑 다른 사형들이 하실 거예요. 서부에 필요한 건 용아병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더 강력한 용아병을 만들 재료.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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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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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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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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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읏. 저, 저도 그러고 싶은데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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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쭈물 거리며 말도 제대로 못하는 모습이 답답해 살짝 인상을 찌푸린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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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건 또 귀신같이 알아챈 메이킨이 발작하듯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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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자하브 대공 각하의 아기씨가 필요해욧! 부디 태양의 마나로 가득한 대공 각하의 아기씨를 베풀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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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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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눈만 끔뻑이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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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떡 일어선 유리아가 메이킨의 담요를 잡고 짤짤짤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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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었는데! 믿었는데……! 거짓말쟁이 메이킨! 오라방의 아기씨는 100만 골드를 줘도 안 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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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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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감 가득한 유리아의 절규와 메이킨의 비명소리가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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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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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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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학생들 사이에는 실로 망측한 소문이 하나 나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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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의 새로운 대공, 에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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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백주 대낮부터 여자 숙소에 쳐들어와, 불쌍한 마법사 하나를 억지로 희롱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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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완전히 타락 조교에 성공하여 스스로 아기씨를 조르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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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로 향하기 위한 준비를 하던 에녹이 소문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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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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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처음으로 망나니 평판을 쌓았으니 좋았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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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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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저점매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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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기씨……그러니까 정액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조금 기겁하긴 했으나, 결국 이그나투스 대공의 요청에 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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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의 목적이었던 100만 골드 중 일부를 비자금으로 만들겠다는 것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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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그나투스 대공이라면, 제국의 탄생 이전부터 살아온 드래곤이라면 나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게 있을 거라는 기대가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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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자하브의 혈계능력과 비슷한 힘을 각성한 것? 이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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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만약 변이를 감당하지 못했다면 이렇게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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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경 쓰이는 점은 그 외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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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시조에 버금갈 정도로 진한 피를 타고났다는데, 정작 내 혈계능력이 무엇인지는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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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체 어떤 이유로 몬스터도 아니건만, 던전 내부에서 더 강해지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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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라면 이 둘에 대해 답을 모르더라도 실마리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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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당연히 이그나투스에게 내가 자하브의 혈족이 아님을 들킬 가능성이 높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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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 생각해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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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이그나투스 대공령으로 향하기로 정하고 나름의 짐을 싸는 도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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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이걸로 다 챙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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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하나 빠뜨리지 않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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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짐을 싸는 것을 도와주던 제벨라가 고개를 갸웃거리길래, 다시 한번 가방을 뒤적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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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다 챙긴 것 같은데요? 애초에 자잘한 건 카렌이 준비했을 테니, 저는 그냥 몸만 가도 충분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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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해 보렴. 정말 없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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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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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싶어 계속해서 가방을 뒤적이고, 침대와 책상도 살펴보았으나 별다른 이상은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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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자니 제벨라가 장난스레 미소 지으며 양팔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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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이에게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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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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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오렴.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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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맞나 싶어 쭈뼛쭈뼛 다가가자, 냉큼 이쪽을 끌어안는 제벨라. 남부 특유의 얇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살결. 꽃을 닮은 체향이 번져오며 따스한 체온이 몸을 달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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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든 에녹 네가 자하브에 온 뒤에 처음으로 성을 멀리 떠나는 일이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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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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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내가 자하브에 머무른 지 벌써 두어 달은 지난 것 같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성안에서 보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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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외출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던전에 드나드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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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가 나를 안고 있는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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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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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팍에 짓눌리는 부드러운 감촉. 하지만 왜일까. 지금은 제벨라가 등을 토닥이는 감각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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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위험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몸조심해서 다녀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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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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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움직임으로 나 또한 제벨라의 등을 토닥이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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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의 작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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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즘 도는 소문은 어떻게 된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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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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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니. 유리아의 룸메이트이자, 이그나투스 대공의 가장 어린 제자를 마구 범해서 부끄러운 말을 큰 소리로 외칠 만큼 타락시켰다는 소문 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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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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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 소문이 왜 벌써 제벨라의 귀에 들어간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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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내가 뭘 하건,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좋게만 해석하던 사람이지만……아무리 그래도 이런 소문까지 좋은 방향으로 해석할 것 같진 않아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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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동생들……에녹과 유리아의 말을 믿는단다. 실제로 이그나투스 대공의 조건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약간 문제가 생긴 것일 수도 있지. 메이킨이라는 아이는 아직 어린 나이고, 부끄러움이 심한 아이 같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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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돌아온 것은 괜찮다고, 이해한다는 식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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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제벨라라면 오히려 이런 소문에 시달리는 나를 위로해 주려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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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그것이 너무 빠른 판단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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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만약 소문이 진짜라면. 그러니까 에녹 너도 자하브고 남자니까 어느 날 갑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를 3일 밤낮으로 조교 해서 머릿속에 아기씨 조르는 것밖에 없는 상태로 만들고 싶은 기분이 들 수도 있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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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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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그런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적어도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라는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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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피임은 꼭 하렴. 일단은 에녹 네가 가주고, 이 누이가 첫째 부인이 될 예정이잖니. 만약 사생아가 먼저 태어난다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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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이 문제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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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종의 질투나 독점욕 같은 건 줄 알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가문의 위신이 어쩌구 하면서 줄을 세우려는 내용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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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냥 사생아가 정실 혈통보다 먼저 태어나면 복잡해지니 조심하라는 걸로 끝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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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다른 여자랑 뒹굴지 말라는 것도 아니라 피임만 제대로 하라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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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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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가주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지만, 그전까지는 내가 자하브의 핏줄이 아니라는 걸 들켜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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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아직 자하브의 다른 형제들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어땠는지 따로 알아보았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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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이 검열되거나, 기록 삭제되어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저 생긴 것처럼 금태양 집안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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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내 생각보다 훨씬 미친 집안이었을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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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서 아카데미에 그렇게 소문이 빨리 퍼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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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깨달음과 함께 제벨라를 부드럽게 밀어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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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마세요. 절대로 그럴 일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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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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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힌 제벨라. 그녀가 잠시 스스로의 뺨을 문지르더니, 이내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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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흠. 아무튼 이걸로 깜빡한 마지막까지 제대로 챙겼구나. 마음 같아서는 성문 앞까지 마중 나가고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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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바쁜 거죠? 이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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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쏟아지는 친구비의 향연. 제벨라는 이를 최대한 유용하게 써먹기 위해, 매일 같이 밤을 새며 일한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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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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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에는 특이한 아티팩트가 많다고 들었어요. 제벨라 누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하나 구해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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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니? 고맙단다 에녹. 이 누이를 그렇게나 생각해 줄 줄이야. 정말 착한 아이구나. ……그래. 정말 착한 아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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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뭇한 표정으로 내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던 제벨라였으나, 어째서인지 그 손길이 내 심장 어림을 스치는 순간.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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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순식간에 지나간 변화라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는 사이. 포옹을 하며 잠시 흐트러졌던 옷을 바로 잡아준 제벨라가 반보 뒤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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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거면 충분하겠구나. 어서 가보렴. 이그나투스 대공이라도 텔레포트 게이트를 오래 유지하는 것은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일 테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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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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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방을 나서, 광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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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내가 미처 챙기지 못했을 것들을 챙긴 카렌과, 여전히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메이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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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를 배웅하기 위한 가신들과 기사단이 도열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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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힐다도 나와 동행하는 대신, 저 사이에 끼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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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실습으로 온 아카데미 학생들을 관리 감독하고, 연속된 던전 역류 때문에 완전히 박살 난 방어선을 재건하느라 기사단의 인원을 줄이기 힘들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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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카렌만 있어도 충분하겠지. 내가 내 한 몸 지킬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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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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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나갈 때마다 양옆으로 물러서 경례를 하는 가신들. 자연스레 사람으로 이루어진 길이 열리는 모습은 몇 번 본 적 있음에도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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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그리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시선을 피할 뿐이던 메이킨이 고개를 푹 숙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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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위압감이 느껴지는 광경이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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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메이킨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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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들어.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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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 네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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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연신 꾸벅인 메이킨이 품에서 작은 수정구 하나를 꺼내 마나를 불어넣고. 무어라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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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의 보안 장치라도 있는 것인지 수정구의 안쪽이 보이지도,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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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의 통신 상대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마 이그나투스 대공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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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눈 끝에 메이킨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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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는 끝났어요오……다들 조금만 물러서 주세요. 휘말리면 위험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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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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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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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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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진짜 위험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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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둘러싼 자하브의 가신들을 바라보는 메이킨. 그런 그녀 대신 내 쪽에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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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지? 다들 세 걸음씩 물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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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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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찬 대답과 함께 그제야 거리를 벌리는 가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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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메이킨이 감탄과 억울함이 섞인 표정이 되었으나, 할 일은 하려는 건지 공터에 방금까지 쥐고 있던 수정구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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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구를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마나의 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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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 수준으로 어찌할 수 있는 양의 마나가 아니다. 당연히 마도구 따위가 버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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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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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금이 가는 수정구. 그 사이로 훨씬 더 많은 마나가 쏟아져나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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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패턴을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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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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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음과 함께 완성된 것은 거대한 타원형의 거울을 닮은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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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짜 거울은 아닌지, 너머에서 일렁이는 풍경이 자하브령과 완전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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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가 서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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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고위 마법에 내심 감탄하며, 메이킨을 따라 카렌과 함께 텔레포트 게이트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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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부유감. 그리고 살짝 선선해진 기온. 텔레포트는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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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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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구나. 본인이야말로 이그나투스 대공. 태양의 후예여, 그대를 초청한 최후의 용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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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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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위엄 넘치는 레드 드래곤 대신. 바닥을 뒹굴거리는 붉은 머리의 꼬맹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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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게 솟은 뿔과 오동통한 꼬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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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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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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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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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포트 게이트를 건넌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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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이질감 끝에 감았던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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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구나. 본인이야말로 이그나투스 대공. 태양의 후예여, 그대를 초정한 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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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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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발견했다. 위엄 넘치는 레드 드래곤이 아닌, 바닥을 뒹굴거리는 붉은 머리 꼬맹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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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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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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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끔뻑이며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생물체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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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불꽃을 닮은 선명한 적발. 뭐로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비싸 보이는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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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의 양옆으로 길게 솟은 뿔. 이를 중심으로 작은 뿔들이 엮여있는 모습은 왕관을 연상케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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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 부근에서 살랑이는 꼬리는 붉은 비늘이 촘촘하게 덮인 것이 꽤나 위협적이지만……전체적으로 오동통하고, 실루엣이 뾰족하다기보다 둥글어서 귀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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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드래곤의 특징들. 하지만 이그나투스 대공은 못 해도 제국의 역사만큼 나이를 먹은 존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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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아니, 용이 이런 꼬맹이의 모습으로 바닥을 굴러다니며 손님을 맞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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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어이가 없었으나, 마탑의 사람들에게는 대수로울 것 없는 평소의 모습이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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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바닥과 물아일체가 되어있는 이그나투스를 번쩍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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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아무리 피곤하셔도 손님을 누워서 맞이하시면 안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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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하지만 의자에 올라가는 것도 슬슬 귀찮단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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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른 사형들을 시켜서라도 하셨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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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래도 다른 사람을 전부 물리고 이렇게 혼자 게이트를 열었으니 괜찮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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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잘하셨지만, 아무튼 다음에는 꼭 의자에라도 앉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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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변의 의자에 이그나투스를 앉혀놓는 메이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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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앉은 상태로도 추욱 늘어진 모습에 카렌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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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혹시 서부에는 최대한 편한 자세로 손님을 맞이하는 관습이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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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런 건 없습니다. 애초에 메이킨 양도 깜짝 놀라 이그나투스 대공 각하를 의자에 올려두시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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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냥 귀찮음이 많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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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을까요? 어쩌면 다른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요. 적어도 저희를 무시하거나 그런 느낌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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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소곤거리고 있자니, 거의 드러눕다시피 의자에 걸터앉은 이그나투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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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손님들 앞에서 미안하게 됐구나. 허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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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다 들렸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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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 보여도 귀는 좋은 편이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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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이그나투스. 덕분에 누워있을 때는 몰랐던 그녀의 전신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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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의자에 앉았을 뿐인데, 발이 닿지 않을 정도의 단신. 하지만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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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이 빠르게 정돈해 주는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이목구비는 조각상처럼……아니, 이 세상 존재가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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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여인. 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어중간한 매력이 아닌 양쪽의 매력을 전부 품고 있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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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보다도 더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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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만 해도 선명한 붉음을 품고 있다고 여겼거늘, 이그나투스의 눈동자는 그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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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 불꽃, 리얼 레드 등등.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채도 높은 붉은색을 나타내는 단어를 떠올렸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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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무엇 하나 이그나투스의 눈동자를 온전히 표현하지는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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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리고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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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자하브가 선조 회귀에 가까운 수준으로 혈계능력을 각성했다더니……그 말이 사실인가 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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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눈으로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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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능력 자체가 보이는 것은 아니니라. 그저 체내에 품고 있는 마나의 성질과 순도를 느낄 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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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다른 자하브들과 비교하면 어떤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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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자하브들과 비교해서 말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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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한 이그나투스가 당장이라도 꾸벅거리며 졸 것 같은 나른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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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최근 500년간 보아온 자하브들과는 비교가 안 되겠군. 그전과 비교하면……순도만 따지면 샤메스. 아, 자하브의 시조이니라. 샤메스와 비슷한 것 같다만, 마나량은 다른 후예들에 비해 조금 부족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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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량이……부족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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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연금술사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먹었던 영약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고, 이후에도 여러 인체실험의 부작용을 잠재우기 위해 여러 영약을 마구잡이로 퍼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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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의 흑마법사 지부를 박살 내고, 암살자 길드를 조지며 나온 영약 중 나와 극상성인 것들과 동료들에게 줄 분량을 제외하면 전부 퍼먹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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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상이나 브로커, 때로는 용병들에게 돈을 주고 영약을 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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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마나 다루는 법은 잘 모르는데, 마나량이 너무 많아서 종종 마나가 꼬이며 내상을 입었던 적도 있으니 말 다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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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가 마나량이 적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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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무한한 마나를 생성한다는 드래곤 하트를 가진 입장에서 작아 보인다는 소리인가 싶었으나, 분명 다른 자하브들과 비교했을 때 적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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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어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이그나투스가 픽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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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자존심 상해하지 말거라. 보아하니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나이가 어리면 당연히 쌓은 마나도 적을 수밖에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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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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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초대부터 500년 전까지의 자하브는 순 괴물 딱지였다는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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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별로 체감이 안 되긴 했지만, 제벨라에게 들었던 이야기처럼 자하브의 혈통이 열화된 것 자체는 사실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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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그나투스가 나와 자하브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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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태양과 불꽃의 차이를 말하라고 하면 나도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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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해야 규모와 온도밖에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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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실망감이 차올랐을 무렵. 이그나투스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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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이렇게 자세히 보니 다른 자하브들과 조금 느낌이 다른 것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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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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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이 정도로 시간이 흘렀으면 아무리 후손이라도 조금 변하기도 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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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눈으로 보는 정도로는 정말 구분 못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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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에는 누구보다도 민감할 터인 드래곤이 이렇게 반응한다는 건, 사실상 평범한 방식으로는 구별할 수 없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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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전문적인 방식으로 깊게 파고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애초에 그 정도로 의심받는 상황이 되면 어차피 뭘 하건 들킬 수밖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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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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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던 도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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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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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는 이그나투스. 사람의 것이 아닌 뾰족뾰족한 이빨이 엿보이며, 작은 불꽃이 뿅하고 튀어나왔다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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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 덕분에 슬슬 자다 깬 꼬맹이에서, 꽃단장한 꼬맹이 수준까지 올라온 이그나투스가 머쓱하다는 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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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부터 손님맞이가 형편없어 미안하구나. 부끄러운 말이지만 몸 상태가 조금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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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별로 신경 쓰진 않아. 생각해 보면 나도 아까부터 처음 보는 사이인데 반말로 대하는 중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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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자하브가 초면인 사람에게 반말은 무례한 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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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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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는 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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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몇 번이고 곱씹게 되는 주제였기에 슬슬 감이 잡혀가고 있다. 하여, 내가 생각한 자하브스러움을 조금 발휘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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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은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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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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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이그나투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있던 카렌이 기겁을 하며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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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 또한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지만……정작 이그나투스 본인은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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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자하브는 시간이 지나도 자하브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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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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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자하브는 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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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웃음을 짓는 사이. 이그나투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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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해해 주어 고맙구나. 허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 계약 내용부터 확실히 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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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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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대답을 듣자마자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허공을 긋는 이그나투스. 그 간단한 움직임에 어마어마한 마나가 요동치더니, 이내 손가락의 궤적을 따라 허공에 세로로 금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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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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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진 공간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궤짝. 이그나투스의 손짓에 뚜껑이 열린 궤짝 너머로 반짝이는 황금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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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 100만 골드이니라. 필요하다면 직접 세어도 괜찮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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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걸 어느 세월에 다 세고 있겠어. 여기서는 명예로운 이그나투스 대공의 말을 믿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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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자하브는 제법 달콤한 말을 할 줄 아는구나. 혹시 그대도 이 몸을 노리는 것이더냐? 아쉽지만 포기하거라. 이 몸은 자하브와 달리 무의미한 번식 활동에 흥미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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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예전에는 좀 더 어른스러운 몸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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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예나 지금이나 이 몸은 그대로다만. 아, 뿔과 꼬리가 좀 더 굵어지긴 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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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자평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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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과 좋은 승부가 될 법한 키. 그리고 카렌보다도 안쓰러운 가슴팍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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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100만 골드를 지불할 능력이 있다는 건 확인했으니 됐어. 필요한 건 강력한 용아병을 만들기 위한 내 아기씨……정액이지? 양은 얼마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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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병에 가득 채울 정도면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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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허공을 열어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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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가득 채워야 하는 건가……좀 많긴 하지만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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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조건이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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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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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지만 이 근방에는 창녀가 없느니라. 서부는 전장이며, 마탑은 전초기지. 여기에 거주하는 이는 전부 이 몸이 가르치고, 이 몸을 따르는 이들이니,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지만 자하브의 손에 망가지게 두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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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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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혼자 해결하려 했다는 말을 하려던 순간. 이그나투스의 오동통한 꼬리가 꿈틀거리더니, 그 끝에 무언가를 휘어감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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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이걸 사용하거라. 이 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착정 마도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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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투명한 재질. 원통형의 생김새에서는 부들부들해 보이면서도 묘한 단단함이 느껴지며, 한쪽 끝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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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완전 오나홀이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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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랑이는 꼬리로 저걸 쥐고 있으니 엄한 상상이 마구마구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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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판타지 세상에서 이런 걸 볼 줄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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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웃음만 짓고 있자니, 이그나투스의 자랑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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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말거라. 온도 유지 마법, 69가지의 진동 패턴, 그리고 약간의 환상 마법까지 걸어 두었으니 아직 시험해 본 적은 없지만 제법 쓸만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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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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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손으로 해결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런 생각으로 이그나투스의 특제 마도구를 받아들려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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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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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존재감. 실내에 있음에도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에 반사적으로 전투태세를 취하며 감각을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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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닌지, 시종일관 늘어져 있던 이그나투스 또한 몸을 벌떡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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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손님을 맞이하는 도중이라니.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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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을 푸욱 내쉬며, 처음 보는 곧은 걸음으로 창문 쪽으로 향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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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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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창문을 열어 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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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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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투신에 다급히 창문 쪽으로 달려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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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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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더니, 창문 너머의 풍경을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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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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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대했던 위엄 넘치는 모습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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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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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가 만들어 준 오나홀이 꾸욱 짓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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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이 쏙 빠지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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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서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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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울음소리. 이를 듣자마자 이그나투스가 지금껏 보여준 나른함을 내다 버리고, 곧장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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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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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빛이 터져 나온 뒤에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거대한 레드 드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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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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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대했던 위엄 넘치는 모습. ……방금까지 내게 착정 마도구라며 판타지판 오나홀을 건넨 사람과 동일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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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아귀에서 느껴지는 말랑한 감촉에 살짝 기운이 빠지긴 했으나, 이런 내 감상과는 별개로 상황은 꽤나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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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가 멀리 날아가자, 그녀의 거체에 가려져 있던 저 멀리의 풍경이 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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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카렌카렌아 저게 다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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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서부에도 던전 역류가 일어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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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발을 서서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본 카렌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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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카렌도 놀란 모양.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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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너머로 무수히 많은 언데드들이 기어 올라오고, 그 중앙에는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드래곤이 눈두덩이에서 귀화를 불태우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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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에서 나고 자란 카렌이 보기엔 던전 역류처럼 보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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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서부에서 자란 메이킨의 눈에는 반대로 보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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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헌트네요. 요즘 들어 주기가 짧아졌단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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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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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남부의 던전에서 몬스터가 흘러넘치는 것처럼, 서부에서는 과거의 망령들이 죽음의 구덩이에서 다시 일어서 못다 한 전쟁을 이어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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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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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비극의 신 트라고데아에게 맞선 이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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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신은 단 한 명뿐인 신도의 바람을 위해 세상을 비극으로 물들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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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강신하여 오랜 시간 암약하며 준비를 마친 뒤. 이 모든 것을 일제히 터뜨려 대륙을 상대로 전쟁을 선언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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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으로 뒤덮인 세상은 어두운 밤과 같았기에, 당시의 전쟁에 비극의 밤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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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어찌어찌 막아내긴 했지만, 수많은 신들이 힘을 잃고 몰락했으며, 그 이상으로 많은 영웅들과 이름없는 병사들이 죽어 나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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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부의 재앙은 한때 비극의 신에게 맞서 일어선 이들을 언데드 삼아 군세를 일으켰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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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가장 신에 가까운 종족이었으며, 그렇기에 비극의 밤에 멸종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드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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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유일하게 종족을 배신하고 비극의 신에게 붙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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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룡 모르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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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저 멀리서 언데드를 이끄는 본 드래곤이 모르테우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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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과 힐다를 통해 기본적인 대륙의 역사를 배웠기에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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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직접 본 모르테우스와 그의 군세가 일으킨 와일드 헌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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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역류보다 빡센 것 같은데? 마탑 개쩌네. 이걸 막고 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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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핫……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자하브 대공 각하. 하지만, 마탑의 일원인 제가 보기엔 던전 역류 쪽이 더 무섭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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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물량은 비슷해도 전반적인 수준이 달라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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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가늘게 뜨고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장벽을 두드리는 언데드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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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도 느껴지는 음산한 죽음의 기운. 그리고 이것이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라는 듯, 맹렬히 몰아치는 불길한 눈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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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死氣)가 가득 담긴 눈보라와, 그 속에서 귀화를 번뜩이는 언데드들이 마탑의 방벽에 막히고, 고위 마법에 펑펑 터져나가는 모습은 솔직히 감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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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험해 본 오크들의 웨이브와 비교하면……평균 무력은 비슷하지만, 언데드와 달리 오크들은 전략을 구사하니 직접 전투력은 오크들이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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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 사기로 가득한 눈보라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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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놈들과 싸워봐서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저런 음침한 기운은 미리 대비하거나, 면역이 없는 이상 굉장히 까다롭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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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아마 실제 위협은 언데드 쪽이 더 강할 것이다. 무엇보다 저놈들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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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가장 큰 차이는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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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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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 워로드는 분명 강력했다. 익스퍼트급 강자가 여럿 있어야 간신히 쓰러뜨릴 수 있다는 시점에서 일인 군단이나 다름없는 녀석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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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르테우스는 오크 워로드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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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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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들려오는 공허한 울음소리. 동시에 한층 거세진 죽음의 눈보라가 마탑이 시전한 방벽 마법을 깨부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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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쳐들어오는 차가운 죽음을 향해 주홍빛의 장막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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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 차원에서 펼친 마법이 아닌, 마법사 개개인이 펼친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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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효과는 충분했는지, 죽음의 눈보라에서 느껴지던 불길함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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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방벽을 두드리던 언데드들이 방벽이 무너진 틈을 타, 달려드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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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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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은 땅에서 솟아오른 용아병들이 막아내며, 마법사들을 호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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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의 비늘과 이빨로 만들어 낸 이들이기 때문일까. 언데드와 비슷한 구조지만, 훨씬 날카롭고 공격적인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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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어지간한 언데드들보다 튼튼하고 힘도 좋았기에 잘 싸우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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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모르테우스가 굵직한 팔을 휘둘러 용아병들을 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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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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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언데드 상대로는 잘만 싸우던 용아병들이 순식간에 과자 부스러지듯, 간단하게 박살나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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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만족스레 바라보던 모르테우스가 돌연 뼈만 남은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몸을 웅크려 크게 도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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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본 드래곤의 몸뚱이가 마탑에 정면으로 들이받기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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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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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맞춰 도착한 이그나투스의 브레스가 모르테우스를 하늘에서부터 찍어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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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뼈를 버둥거리며 저항하는 모르테우스였으나, 결국 뿜어내던 눈보라는 레드 드래곤의 열기에 녹아내리고 날아오르려던 몸뚱이는 바닥에 처박혀 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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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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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전해지는 진동. 하지만 이그나투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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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브레스를 쏘아내며 날개를 펼치더니, 그 위로 무수히 많은 마법진이 그려지며 듣도 보도 못한 화려한 마법이 공간 전체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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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방금 막 기어 올라온 골짜기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모르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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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테우스가 사라지자, 여유가 생긴 마탑의 마법사들이 남은 용아병의 보호를 받으며 다음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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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일반 언데드들과 달리, 머리를 가루 내도 다시 살아나는 녀석들이기에 굳이 위력이 강한 마법을 사용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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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이 아닌, 주홍빛 가루의 형태로 흩뿌려지는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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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닿은 언데드들이 눈에 띄게 둔해지더니, 그 틈을 타 용아병들이 서로 달라붙어 하나의 장벽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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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완성된 마법이 물과 바람을 만들어 용아병 장벽 채로 언데드들을 밀어내기 시작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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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언데드들은 모르테우스의 뒤를 따라 골짜기 너머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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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의 용아병을 소모하긴 했으나, 최소한의 사상자로 와일드 헌트를 막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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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탑의 마법사들은 이러한 일이 일상인지, 크게 기뻐하는 기색 없이 담담히 움직여 부상자를 수습하고 깨진 방호 마법을 복구하기 시작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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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는 당당한 자태로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살펴보더니, 그대로 하늘을 날아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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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세상의 멸망……까지는 아니어도 나라 한둘쯤은 무너질 것 같은 풍경이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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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너무도 간단하게 정리하고 돌아오는 이그나투스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사이. 메이킨이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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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마탑의 모든 시스템은 언데드를 상대하는 데 특화되어 있거든요. 모르테우스와 그가 이끄는 와일드 헌트가 던전의 몬스터보다 더 강할지 모르지만……약점은 확실하고, 마법은 그러한 약점을 찌르기 참 좋은 학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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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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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깨달았다. 어째서 이그나투스가 굳이 기사들을 양성하지 않고, 용아병으로 대체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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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데드 상대로 끝나지 않는 소모전을 효율적으로 행하기엔 막 쓰고 버릴 수 있는 방패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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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병보다 더 강하다고는 하나, 살아있는 기사를 갈아 넣을 수는 없잖은가. 그러다 죽으면 언데드의 군세에 추가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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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메이킨의 말대로 마탑의 모든 시스템과, 마법은 언데드를 상대하기에 특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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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준비할수록 위력이 배가 되는 마법의 특징을 이용하여, 최대한의 효율로 와일드 헌트를 막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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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남부의 던전 역류는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랜덤 박스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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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에게 치명적인 극독을 준비했더니, 갑자기 골렘류 몬스터가 진격해 올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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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한 물리력으로 밀어버리고자 전쟁 병기를 대량으로 준비해도, 난데없이 물리 공격의 대부분을 무효화 시키는 슬라임 계열이나 정신체로만 이루어진 몬스터가 튀어나올 수도 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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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남부에 필요한 건 어떤 상황에서도 대응할 수 있는 절대적인 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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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이 마법사들 눈에는 끔찍한 도박처럼 보이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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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했어. 각자의 상성과 고충이 있다는 거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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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초대 황제께서 남부는 자하브 대공께, 서부는 스승님께 맡기신 게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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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카렌이 새로운 지식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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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방금 막 와일드 헌트를 몰아내고 온 이그나투스가 레드 드래곤의 형태에서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창틀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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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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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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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저항도 없이 철푸덕 넘어지며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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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적으로 잡아들긴 했지만, 내 팔에 안긴 이그나투스는 건어물마냥 축 늘어져 미동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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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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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을 살짝 흔들자, 힘없이 따라 움직이는 오동통 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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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 압도적인 위용으로 모르테우스를 브레스로 밀어버리던 그 레드 드래곤이라고는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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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조금이나마 회복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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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팔뚝에 침을 질질 흘리고 있던 이그나투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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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우선 이 몸을 좀 눕혀주겠느냐? 이 무례는 그 뒤에 설명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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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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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이그나투스를 번쩍 들고는 메이킨이 꺼내 놓았던 의자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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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늘어진 이그나투스를 내 무릎에 엉덩이를 대고, 가로로 눕는 자세로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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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의 인간 폼이 워낙 키가 작았기에 가능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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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딱딱한 의자 모서리에 닿으면 아플 테니, 머리 뒤편과 무릎 안쪽은 팔로 안아서 받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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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공주님 안기를 한 채로, 조금 전까지 이그나투스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은 모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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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찢어진 동공에 경계의 빛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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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자하브야. 이게 맞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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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뭐, 문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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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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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래. 아, 팔이 부족하니 이건 네가 들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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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의 말랑한 배 위에 오나홀을 올려주었다. 그러자 이를 반사적으로 붙잡은 그녀가 체념 섞인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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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이 지나도 자하브는 자하브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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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지금은 헛소리 그만하고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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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 아니니라. 처음 말한 것처럼, 요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힘을 쓰고 나니 순간적으로 탈진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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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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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제국의 4대 대공이자, 마탑주, 최후의 드래곤을 향한 말투라기엔 꽤나 무례한 일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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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나도 지금은 자하브 대공(아님)이잖나. 격은 얼추 맞는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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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 마탑이 싸우는 모습을 봤어. 용아병을 소모품처럼 쓰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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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같은 전사로서 연민이라도 느낀 게냐? 걱정말거라, 무술을 학습시키긴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이 몸의 비늘과 이빨로 만든 인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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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보이더라. ……그런데 용아병을 소모품처럼 쓸 거면, 왜 더 강한 용아병이 필요한 거지? 어차피 몇번 쓰고 버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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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거기까지만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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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골드나 들이고, 같은 4대 대공 중 하나인 내 힘까지 이용해 지금보다 훨씬 강한 용아병을 만들 이유가 뭘까. 천년에 걸쳐 최적화된 와일드 헌트 상대법을 뜯어고칠 이유가 대체 뭘까. 그런 고민을 계속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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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도 높은 붉은 눈동자가 이쪽을 빤히 바라본다. 마치 그 이상은 말하지 말아 달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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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그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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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로 찢어진 위압적인 눈동자. 하지만 묘한 위태로움을 품고 있는 이그나투스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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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죽어가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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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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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죽은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강력한 용아병을 만들려는 걸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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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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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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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라고 했느냐. 짐승같이 예리하구나. 아주 비슷하게 짚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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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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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해하는 나를 향해 이그나투스가 쓴웃음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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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은 지금 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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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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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아주 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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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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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장난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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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게 목소리를 깔고 말을 잇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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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은 본래 잠이 많은 종족이니라. 그리고 이 몸은 모르테우스를……배신한 아버지를 막아내기 위해, 헤츨링이던 시절부터 천 년간 잠에 들지 못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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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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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잠들면 그야말로 죽은듯이 잠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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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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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솔직히 말하마. 이 몸 없이 서부가 어떻게 와일드 헌트를 막을지가 걱정이었느니라. 그 대책 중 하나가 강화 용아병이었고. 이제 되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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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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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꾸러기 응애용이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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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서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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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쩍기 그지없는 이그나투스의 행적. 이를 추궁하여 숨겨진 진실을 알아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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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츨링 때부터 천 년……? 헤츨링이면 새끼 드래곤 말하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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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도 모르겠느냐. 나름 제국과 역사를 함께한 이 몸이 왜 이리 작은 거라고 생각한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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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취향인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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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여신, 천하제일인, 드래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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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최강자 라인의 존재하는 이들의 외견은 어린 여자아이인 것이 상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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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가? 이건 너무 전생의 편견일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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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그나투스가 숨기고 있었던 진실. 그것은 그녀가 잠꾸러기 응애 용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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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내 무릎에 누운 자세로 기가 차다는 듯이 콧김을 뿜는 이그나투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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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묻겠는데. 보통 드래곤은 얼마나 자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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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라면 그리 잠에 들 필요가 없느니라. 하지만, 대신 몰아서 잔다는 느낌이구나. 예를 들자면……그래. 겨울잠을 자는 곰과 비슷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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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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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먹으면 백 년도 넘게 깨어있을 수 있느니라. 물론, 항상 눈을 뜨고 있는 것은 아니고 여느 종족들이 그러하듯 중간중간에 휴식을 취해야 한다만. 대신 수면기가 찾아오면 최소 20년은 잠들어 있어야 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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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깨어있는 대신 20년 잠드는 건 너무 비효율적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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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인간도 하루의 3분의 1을 수면으로 소모하지 않느냐. 비율만 보면 이 몸이 훨씬 효율적이니라. 무엇보다 드래곤의 수면은 휴식과 재충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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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게 자는 거지 뭐가 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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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니라. 드래곤의 수면은 성장한 심장의 마나만큼 육신을 성장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느니라. 즉, 잠만 자도 강해진다는 소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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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늘어진 채로 으스대는 이그나투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가느다란 몸에서 힘이 쪽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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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은 천 년간 잠들지 못했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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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이라. 애초에 그렇게 오래 잠을 참을 수 있다는 게 대단한데. 아니, 참으면 안 되는 걸 억지로 참아서 지금 상태가 영 안 좋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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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다. 처음 300년 정도는 의지로 버텼느니라. 허나, 이 몸의 의지는 완벽하지 않았고, 결국 여러 마법과 약의 도움을 받아 지금껏 버텨왔건만……슬슬 한계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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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잠들면 몇 년 뒤에 깨어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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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느니라. 이 몸이 최후의 드래곤이라 물어볼 이도 없고, 천 년간 잠을 참은 드래곤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기에.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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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한숨을 내쉬는 이그나투스. 어쩐지 이 짧은 사이에 한층 나른함이 더해진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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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십 년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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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깨어있으면 20년 잠들어 있어야 하니, 단순 계산해서 10배라 쳐도 200년은 잠들어 있어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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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헌트를 보았기에 장담할 수 있다. 마탑은 강하고, 준비는 철저하지만, 이그나투스 없이 100년 넘게 서부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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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몸도 준비를 게을리하지는 않았느니라. 결국 중요한 것은 사룡 모르테우스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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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그나저나 아까 모르테우스가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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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의 일이니라. 동족을 배신하고, 그런 주제에 미친 언데드가 되어버린 작자를 상대함에 주저라는 선택지는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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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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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잘라 말하는 이그나투스의 태도에 더는 무어라 물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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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만. 조금 전에 보니까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이며 절벽 너머로 떨어뜨리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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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다시 본론을 돌아가자면, 이 몸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몸의 부재를 준비해 왔느니라. 구체적으로는 끝없이 되살아나는 언데드 군세, 혹은 사룡 모르테우스. 둘 중 하나는 완전히 봉인하는 식으로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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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봉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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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던전의 관리자로서는 조금 듣기 불편한 말이었겠구나. 이 몸이 깨어날 때까지 버텨줄 봉인이라고 정정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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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이 악신의 하반신을 봉인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무수한 몬스터를 틀어막는 장치라는 걸 떠올린 걸까. 머쓱한 어조로 말을 덧붙이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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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대충 사정은 알겠으니까. 나를……자하브의 힘을 이용해 강화시킨 용아병도 그중 하나인 셈이겠네. 이그나투스 네가 잠들면 용아병을 지금처럼 생산하지 못할 테니, 소모품처럼 써먹는 전략에 금방 한계가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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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자하브는 영특하구나. 아니, 전투와 관련된 일에는 언제나 그러했지. 정답이니라. 한번 쓰고 버릴 수 없다면, 오래 쓸 수 있는 용아병을 만드는 것이 최선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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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말한 이그나투스가 내게서 잠시 건네받았던 오나홀을 다시 내밀었다. 힘이 없어서인지 한 손이 아닌 양손으로 조심스레 잡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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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부탁이니라. 강렬한 태양의 마나와, 이 몸의 불길을 품은 이빨과 비늘이 만나 만들어진 용아병이라면 분명 언데드들을 틀어막을 수 있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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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만으로는 부족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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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용아병들이 언데드들을 상대하는 사이에 이 몸이 준비한 다른 안배로 모르테우스를 상대할 예정이니 걱정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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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 말은 다른 준비는 없냐는 질문이 아냐. 그 모든 것들로 충분하냐는 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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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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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꾸욱 다문 이그나투스. 그런 그녀를 향해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위화감을 설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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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오래 못 버틴다는 것을 알고, 이전부터 준비해 온 것이 있다면, 그런 걸 굳이 숨길 이유가 어디 있겠어. 이곳의 언데드들은 이성을 거의 잃었다면서. 당장 와일드 헌트가 시작될 때마다 시험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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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자신의 준비가 적절했는지, 부족한 점은 어디인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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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헌트를 상대하기 수월해짐에 따라 이그나투스 본인에게 가해지는 부담도 덜 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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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그나투스는 그러지 않았다. 언제나 그러하듯, 직접 날아가 브레스와 마법을 쓰고, 마탑 사람들에게 힘을 과시하며 와일드 헌트를 밀어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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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준비한 안배라는 것들에 큰 결함이 있는 거겠지? 이번 일도 뭐라도 하나 얻어 걸려라 하는 발버둥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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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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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으로 오나홀을 쥔 채, 이쪽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이그나투스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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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자하브는 성가시구나. 천 년 전에도 지금도 이런 쪽으로는 감이 좋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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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자하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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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는 사이. 이그나투스가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 후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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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그대의 말이 옳다. 이 몸은 정말 여러 준비를 했느니라. 드래곤 하트의 조각을 넣어 마도구를 만들기도 했고, 마나만 불어넣으면 되는 설치형 대마법을 100개 이상 중첩시켜보기도 했으며, 아예 이 몸을 대신할 존재를 길러내기 위해 제자를 들여보기도 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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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메이킨 쪽을 바라보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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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이러한 사정까지는 몰랐는지 얼떨떨해하는 표정을 짓는 메이킨이었으나, 정작 이그나투스는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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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전부 실패했느니라. 드래곤 하트는 떨어져서도 본체와 연결되는 성질이 있더구나. 하여, 이 몸이 직접 인정한 자가 아니면 기껏 만든 마도구를 사용할 수 없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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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네가 몇십 년이 아니라 몇백 년 단위로 잠들어야 한다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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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니라. 이 몸이 인정한 이가 변절할지도 모를뿐더러, 설령 마지막까지 세상을 위해 헌신한다 해도 수명이 다하면 그 이후는 어찌할 방도가 없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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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너무 많은 마법을 중첩시키면 주변을 침식하여 이차원의 존재를 끌어당기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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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까지 세워 비전을 전수했건만, 정작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제자는 너무나 적고 그나마도 단신으로 모르테우스를 몰아붙일 정도는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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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몸도 크게 기대를 한 것은 아니니라.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발버둥 친 것에 불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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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테우스가 그렇게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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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암. 언데드가 되며, 이지를 잃고 자연스레 마법 또한 다룰 수 없게 되었다고 하나……마지막 드래곤 로드이니라. 육신과, 변질된 죽음의 마력만으로도 이곳의 아이들 정도는 한입에 씹어 삼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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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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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부의 몰락은 피할 수 없고, 풀려난 와일드 헌트가 제국을 종횡무진 헤집고 다니는 것 또한 확정된 미래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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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게 무슨 소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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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소소하게 몸을 팔아서(?) 비자금을 마련하려던 생각이었건만……안락한 추방 라이프 같은 건 사실 없었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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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 내가 강화 용아병 제작을 돕는다 해도 확실하게 와일드 헌트를 막아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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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가 아니라 강화 용아병으로도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니라. 물론, 자하브의 혈계능력과 이 몸의 속성은 궁합이 좋으니 어쩌면 예상외의 결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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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자하브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지닌 것은 태양의 마나가 아니라 정순한 화속성 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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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레드 드래곤인 이그나투스와 동일한 계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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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미친 연금술사가 만든 영약이 드래곤 하트에 비할 바는 아닐 테니 하위호환이라고 해야 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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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가 기대한 혹시나의 가능성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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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쩔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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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법은 정말 쓰고 싶지 않았지만, 나의 추방 라이프와 제국의 수많은 생명이 걸려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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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고 싫고를 가릴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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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오를 다진 뒤. 진지한 목소리로 이그나투스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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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 드래곤은 마법의 조종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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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 조금 보태자면, 이 몸은 현시대 모든 마법사들의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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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처음 보는 마법이나, 원리는 모르고 눈으로 외운 마법도 금방 펼칠 수 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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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마법이냐에 따라 다르겠으나, 어지간한 것은 될 것 같다만……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그러는 것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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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그나투스. 그런 그녀를 향해 쓸개를 토해내 씹어뱉는 듯한 거부감을 억지로 억누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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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타나토스의 침상이라는 흑마법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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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처음으로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흑마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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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서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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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타나토스의 침상이라는 흑마법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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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연금술사를 죽이고, 실험실에서 탈출한 이후. 살아남다 보니 어마어마한 수준의 흑마법 저항력을 지닌 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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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조차 흑마법사 놈들을 상대하며 죽기 직전까지 몰린 적은 여럿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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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는 대부분 함정에 빠지거나, 흑마법사 놈들이 다른 강자를 통해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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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하게 흑마법에 당해 죽을 뻔한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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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 타나토스의 침상이라는 마법에 당했을 때를 제외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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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에서 튀어나온 마법 이름에 이그나투스가 움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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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본 적은 있는 마법이니라. 허나, 들어보기만 했을 뿐. 이 몸조차 실제로 본 적은 없는 마법이거늘. 에녹. 그대는 방금 말한 것이 어떤 마법인지 알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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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직접 당해보기까지 했으니 잘 알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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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신이 조금 특수한 신이라고는 하나, 어찌됐건 신의 이름이 들어간 마법 아니느냐. 권능의 일부를 담았거나, 적어도 권능을 닮은 마법일 터. 그걸 맞고도 이리 살아있단 말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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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사정이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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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사정이 있었길래 비극의 밤에도 보기 힘든 마법에 당했단 말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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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내가 칼립소 영지 출신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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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들어본 적은 있느니라. 꽤나 최근까지 본인이 어떤 피를 타고났는지 모르고 있다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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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직도 내 혈통이 어디서 기인된 것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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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그리고 칼립소는 온갖 쓰레기들이 넘쳐나는 곳이라 말이지. 조금 폭력적인 유년기를 보냈다고 해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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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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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의 흑마법사 지부랑 살짝 원수진 게 있어서 죄다 박살 냈거든. 그러다 마지막 발버둥인지 지부장 같은 녀석이 자신을 제물 겸 미끼 삼아 발동한 마법이 타나토스의 침상이었어. 이야. 그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당시의 일을 이렇게 써먹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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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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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로 찢어진 눈을 멍하니 끔뻑이는 이그나투스.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손에 들고 있는 오나홀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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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컹물컹한 것이 묘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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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당대의 자하브여. 칼립소의 흑마법 지부라고 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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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문제라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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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마탑을 운영하는 입장인 만큼, 흑마법사 놈들의 행태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약간 더 알고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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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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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칼립소에는 흑마법사 지부가 없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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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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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가 상대했던 건 대체 뭐였다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칼립소에서의 모든 일이 내 망상일 리는 없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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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이그나투스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녀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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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에 있는 것은 지부가 아니라 본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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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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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다. 대륙에 퍼진 모든 흑마법사들의 고향. 모든 금지된 비의가 집중되는 곳. 신위를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들이 고인 응달……그것이 칼립소의 흑마법사들을 부르는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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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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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진짜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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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흑마법사 놈들은 말이 통하는 대상이 아니라 심문이 별 의미 없었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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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충격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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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조금 이해되는 것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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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만난 흑마법사나, 일전에 나를 노리고 자하브 성까지 찾아온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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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들은 나를 보고 고향의 파괴자라는 식으로 불렀었지. 당시에는 그냥 칼립소 출신 흑마법사 생존자인가 싶었는데……말 그대로 내가 놈들의 본부를 박살 냈다는 의미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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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안이 벙벙해져 눈만 끔뻑이는 것도 잠시. 나보다도 더 어이없어하는 이그나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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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흑마법사 놈들의 본단이라면, 신의 이름이 담긴 마법이 있을 수 있지. 놈들의 수장이 스스로를 제물 삼았다면 시전하는 것도 불가능을 아닐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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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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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거기서 살아 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만……아무래도 정말 모르고 있었던 눈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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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흑마법사 놈들과는 대화가 성립하질 않으니까. 수준 낮은 녀석이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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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확실히 그것도 그렇구나. ……뭐어.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기로 하자꾸나. 아무래도 에녹 그대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이 많은 모양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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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일단 이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기로 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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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이그나투스를 통해 나중에라도 다시 들을 수 있는 내용 아닌가. 우선은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기로 했다. 당장 급한 건 이쪽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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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종이가 필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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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 가져와 주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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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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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레 주변에서 어버버거리는 제자, 메이킨을 부려 먹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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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이 종이를 찾아 잠깐 나간 사이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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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토스의 침상이 어떤 마법인지는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직접 당해본 입장에서 한번 설명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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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더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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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하자면 타나토스의 침상을 일종의 즉사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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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껙! 하고 죽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제대로 걸리면 저항의 여지조차 없이 그냥 죽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즉사 마법인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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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이 시전된 순간 항거할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와. 나는 흑마력에 저항할 수 있는 체질이라 버틸 수 있었지만……대부분은 못 버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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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갇힌 몇몇 흑마법사 놈들의 최후를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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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이 눈을 감고, 잠에 든 순간. 육신이 빠르게 나이를 먹더니, 순식간에 쭈글쭈글한 노인이 되어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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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듯이 조용히 죽는 것을 호상이라고 하던가. 타나토스의 침상은 이를 위한 마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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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고통도, 고민도, 두려움도 없다. 그저 잠에 들고 천수를 다하여 생을 마감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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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건 수명이 100년 남짓한 인간이니까 몇 분만에 죽음에 이른 거잖아. 수명이 훨씬 긴 드래곤이라면 중간에 마법을 끊어 빠르게 필요한 수면을 보충할 수 있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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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은 있겠구나. 듣자하니 타나토스의 권능을 담은 것이 아니라, 이를 흉내 낸 닮은 마법이니 개량할 여지는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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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타나토스의 침상은 즉사 마법이라면 즉사 마법이지만, 그 원리는 결국 시간의 가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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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들 살아간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는 동시에 죽어간다는 말이기도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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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죽어가는 것들이라고도 부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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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타나토스의 침상을 처음 개발한 마법사는 이러한 부분에 착안하여 이름을 붙인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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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메이킨이 적당한 크기의 종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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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여기 종이 가져왔어요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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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느니라. 어서 여기 있는 에녹에게 건네주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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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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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에게 종이와 펜을 받아 들자마자, 기억 속의 풍경을 최대한 똑같이 따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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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직전까지 몰렸던 경험이라 그런지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는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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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터운 밀실과, 그 안에 그려진 복잡한 마법진을 옮겨 되는대로 전부 옮겨 그리고는 이그나투스에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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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빽빽하게 채워진 종이를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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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아느냐. 죽음의 신 타나토스는 신들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신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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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악신이라도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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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수는 있으나, 이는 물리쳐야 할 사악이 아니니라. 오히려 세상을 순환시키는 중요한 축이거늘. ……타나토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는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탐탁지 않아 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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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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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느니라. 어이가 없겠지. 하지만 사실이니라. 타나토스는 죽음은 완벽한 시스템이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 이를 위해서는 죽음을 지배하고, 마음대로 뒤집을 수 있는 자신의 존재는 불필요하다고 여겼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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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놈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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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밤 이후로, 살아남은 신들은 북부의 만신전에 틀어박혔기에 신언을 들을 일이 없어서 모를 뿐. 사실 필멸자들의 눈에 비친 신들은 항상 미친 것들이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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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 웃은 이그나투스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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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타나토스는 자신의 존재를 불필요한 것이라 여겨 곧장, 스스로에게 죽음을 내렸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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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했다는 소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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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죽음의 신이라 금방 부활해 버리고 말았다더구나. 아마 잠깐 잠들었다 깬 감각이 아닐까 싶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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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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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니라. 에녹 그대가 그린 마법진을 보아하니, 타나토스의 침상은 타나토스의 죽음과 부활을 마법적으로 해석한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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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 대로 그린 마법진. 이를 내게서 받아 든 이그나투스.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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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라면 이 몸이 어떻게든 뜯어 고쳐볼 수 있을 것 같으니라. 같은 마법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비슷한 효과는 나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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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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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지난 몇백 년간 고민한 모든 방법들 중 가장 가능성 높은 방법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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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중얼거리는 이그나투스. 그런 그녀를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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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우면 보수는 2배로 줘. 일부는 금화 말고 보석으로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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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든 그리 하마.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으니. ……다만, 아무리 나라도 100만 골드 어치의 금화와 보석을 추가로 구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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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여기서 기다리면 되지. 내가 알려준 마법이 잘 작동하는지도 확인해 봐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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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문제 생겼다고 뒷말 나오면 곤란하니, 이런 건 확실히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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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기존 계약은 파기해도 이건 좀 받아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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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받아들며, 내게 다시 돌려준 오나홀을 흔들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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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판 오나홀? 이걸 어떻게 참아. 한번 사용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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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벼운 생각이었건만, 어째 이그나투스의 반응이 영 미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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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주려고 만든 것이니 괜찮다만……시료를 따로 채취할 것이 아님에도 그런 마도구가 필요한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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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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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그대에게는 미색이 뛰어난 종자가 하나 있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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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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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해하는 내게 보란 듯이 턱을 까딱여 카렌을 가리키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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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뜻을 눈치채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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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은 오나홀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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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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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서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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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인 뒤. 그녀는 즉시 잠들 준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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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잠시 마탑에 머무르며 이를 옆에서 지켜보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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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이유는 아니다. 이그나투스가 말했던 것처럼, 100만 골드에 달하는 골드와 현물을 재차 마련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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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내 기억에 의존해 재현한 마법에 이그나투스가 자신의 미래를 걸고 있으나, 나 몰라라 하면서 돌아가기도 좀 그렇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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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푹신한 의자에 눕듯이 기댄 자세로 열심히 일하는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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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의 본체가 들어갈 정도로 거대한 건물. 그 내벽을 꼼꼼히 감싸는 복잡한 수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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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복잡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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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느니라. 이 몸이 사용하기 위해서는 손봐야 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으니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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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내 옆에서 반쯤 누운 자세로 태연히 대답하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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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면 휴양지에 놀러 오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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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야 마법은 문외한이니 그렇다 쳐도 넌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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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모르는구나. 아카데미에서도 교수는 감독만 하지 실무는 수제자들이 하느니라. 하물며 마탑은 어떻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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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인 너는 누워서 어디 잘못된 부분 없나 확인만 하고, 실제로 마법진 그리는 건 네 제자들이 한다는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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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러하니라. 아쉽게도 당대의 제자 중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아이는 없지만, 다들 고위 마법사이니 마법진 정도는 잘 그릴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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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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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앞에서 열심히 작업 중인 마법사들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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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외모. 경지에 오른 기사나 마법사는 노화가 느려지는 것을 감안했을때, 실제 나이는 훨씬 많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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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외모의 마법사들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벽과 바닥에 마법진을 새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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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가끔 실수하면 사형으로 보이는 이가 혼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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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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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의 유구한 전통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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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는 어깨를 으쓱였지만, 내 눈에는 악덕 교수와 대학원생 정도로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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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다 늙을 때까지 논문 통과도 안 시켜주는 악덕 교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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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끔찍하기 그지 없는 풍경이었으나, 이그나투스의 모든 제자들이 마법진 작성에 동원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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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는 마탑 운영을 위해 열외되었고, 일부는 순수하게 경지가 부족하여 작업에서 제외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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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다닥 뛰어다니며, 사형들의 심부름을 하는 메이킨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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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 이 몸이 마실 음료도 같이 내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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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 알겠어요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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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마시던 것으로 부탁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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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마시던……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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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몇 년 됐다고 벌써 잊어버린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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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제자를 향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을 보낸 이그나투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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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력으로 키운 박하 잎을 우려낸 차에 설탕 대신 시럽을 다섯 스푼 추가하고, 토핑으로는 크림과 초코칩을 3:1 비율로 올린 뒤, 가장 위에는 비스킷을 올려오면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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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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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평소에 뭘 먹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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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잎으로 우린 차에 시럽을 듬뿍 섞고, 크림에 초코, 비스킷까지 올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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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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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그건가. 뒤지게 달달한데다가 심지어 따뜻하기까지 한 민트초코에 바삭한 비스킷 올려놓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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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의 괴상한 식성에 몸이 절로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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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나 또한 목이 말랐던 것은 사실이기에 손을 까딱여 카렌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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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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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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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우유로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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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말씀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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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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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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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카렌. 동시에 주변이 갑자기 웅성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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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라면……역시 그건 뜻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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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잖나. 당연히 그런 뜻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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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저 작은 곳에서 나올 게 뭐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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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말이야.저 정도면 마탑주님과 비슷한 수준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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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터무니없는 오해를 산 것 같아 황급히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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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우유라는 건 소의 젖을 말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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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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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그럼 왜 그렇게 긴장한 표정을 지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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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주님이 질 수 없다는 듯이 복잡한 음료를 주문하실 줄 알고, 한 번에 외우려 집중하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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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맛이 그렇게 특이하진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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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뇨, 입맛의 문제가 아니라 복잡한 풍미의 음료는 귀족 사회에서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니……아, 혹시 모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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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고, 알았어도 그냥 우유나 가져오라고 했을 거야. 내가 먹고 싶은 거 먹어야지, 남들 시선 신경 써서 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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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이자,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이고는 멀어지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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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에 이그나투스가 의외라는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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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젖이 아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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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집에 와서 그런 걸 찾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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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전대의 자하브는 그랬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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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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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고로 전전전대의 자하브는 코카트리스의 피를 마시고 싶다고 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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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지가 극단적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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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젖 또한 본래는 피였으니, 사실 일관된 취향이니라. 그대는 아무래도 평범한 소의 젖을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지만. ……혹시나 해서 묻겠다만 젖소 수인 여성의 젖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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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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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솔직히 좀 궁금했기에 대답 대신에 질문을 돌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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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손봐야 한다는 건 어떤 부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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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 아니니라. 본래 타나토스의 침상은 안락하지만, 절대적인 죽음을 선사하기 위한 마법. 그러나 이 몸은 중간에 깨어나야 하니, 마법이 정상 작동하는 선에서 의도적으로 틈을 만드는 것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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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근데 원래는 흑마력으로 작동하는 마법인데, 이 부분은 괜찮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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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아, 마법에는 문외한이라고 했었구나. 사실 흑마법은 그 자체로 사악한 마법이 아니니라. 당연히 흑마력 또한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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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좀 믿기 어려운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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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사람을 죽인다면, 죽인 사람의 잘못이지 도구인 검에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건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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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껏 흑마법사와 싸우며 수많은 흑마법을 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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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확언할 수 있다. 흑마력은 사람의 어두운 면을 자극하고, 흑마법은 잔혹한 방식으로 수련하는 마법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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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흑마법의 대부분은 저주, 네크로맨시, 이차원 간섭 같은 흉흉한 것들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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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그나투스는 내 말을 듣고도 희미한 미소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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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이 다른 마법과 다를 것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그저 선악의 구분 이전에 존재하던 것이라는 의미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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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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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선과 악의 경계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하는 것 아니더냐. 지금이야 대부분의 나라가 네크로맨시를 금지하지만, 비극의 밤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죽음을 다루는 마법이 금기가 아니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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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럼 그때는 아무나 언데드를 부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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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를 부리는 것보다 언데드를 부리는 쪽이 훨씬 효율적인데, 무턱대고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무엇보다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고대로부터 이어진 필멸자들의 숙원. 기본적인 선은 있었으나, 신들도 네크로맨시 그 자체를 문제 삼진 않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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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 볼을 익히는 것이 불법은 아니다. 당연히 사용하는 것도 문제는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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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허가 없이 사람을 향해, 누군가의 재산을 향해 파이어 볼을 날리는 건 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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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그런 느낌으로 네크로맨시가 허용된 시기가 있었다고 말하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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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이 어린 시절의 일이니라. 만약 그보다 훨씬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더 많은 것들이 허용되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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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지 알겠네. 세대를 거듭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많은 규칙이 생겼겠지.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금지된 마법이 처음부터 금지된 마법은 아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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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고, 또 올라가다 보면 맞닥뜨리는 것을 마법사들은 원류라고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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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세한 학파로 분화되기 이전. 고대 마법을 넘어, 원시 마법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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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는 공격 마법의 시초였느니라. 남을 해하고자 하는 마음 그 자체가 저주이고, 모든 공격 마법은 여기서 출발하는 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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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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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죽음을 극복하려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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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연금술, 시공간 계통 마법, 계약 마법 등등. 온갖 자질구레한 마법들은 그에 상응하는 흑마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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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색이나 되는대로 섞다 보면 결국 물감이 검게 물드는 법. 흑마력 또한 마찬가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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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흑마력에서 느껴지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성질은……마법이 원래 그런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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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았느냐. 필멸자의 눈으로 보면 아무리 친근한 신이라도 광기에 절은 존재라고. 그리고 마법은……필멸자의 몸으로 신위에 닿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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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신의 이름을 집어넣은 마법이 하나같이 대마법 취급 받으며, 가장 고난이도에 속한다고 덧붙이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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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했던 내용이긴 한데, 정작 이를 듣고 나니 한번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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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씩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자니, 이그나투스가 고개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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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대는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는구나. 내 장담하마. 역대 자하브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지성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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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갑자기 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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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는 자하브 디스에 어이가 없었으나, 이어진 이그나투스의 정리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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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생각하거라. 흑마법은 사악한 것이 아니라 야만적인 것이니라. 그리고 문명이 자리 잡고, 그만큼 제약으로 둘러싸인 지금 시대에 무절제한 야만은 불필요한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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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알겠네. 즉, 흑마법은 지난 시대의 패배자고 흑마법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분탕종자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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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파격적인 비유지만, 얼추 그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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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메이킨이 대령한 입에 담기도 두려운 음료를 한 모금 홀짝인 이그나투스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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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비극의 밤 이후. 트라고데아의 축복을 받은 탓에 지금의 흑마법사들은 많이 변질되었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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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달랐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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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어기고, 멋대로 사람을 납치해 인체 실험 재료로 삼으며, 새 마법을 시험해 보겠다며 마을 하나를 몰살시키는 건 예전부터 그러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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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부분이 있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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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필요에 의해 저지른 일들이라면 비극의 밤 이후에는 불필요함에도 그것이 더 비극적이라는 이유로 저지르는 경우가 많아졌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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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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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흑마법사들의 과장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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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가 높아질수록, 그러니까 자신의 마력에 트라고데아의 신력을 많이 섞을수록 흑마법사의 정신은 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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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투는 연극투처럼 변하고, 효율이 아닌 흥미를 쫓기 시작하며, 스스로의 죽음마저 유희의 일종처럼 여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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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그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난 시대의 꿈을 잊지 못한 분탕종자들이 이제는 자신의 의지로 분탕을 치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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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히 이해했어. 갱생의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보이는 족족 죽이면 된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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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다만,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그대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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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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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마법사들은 신위에 매료되어 스스로를 광기에 빠뜨린 자들. 그런 이들이 트라고데아의 신성에 휘둘려 한층 본질에서 멀어졌느니라.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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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소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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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다. 그리고 에녹 그대는 흑마법사들의 본부를 무너뜨리고, 수장을 쓰러뜨렸느니라. 이루어질 수 없기에 더욱 집착하는 비원을, 천 년간의 성취를 박살 낸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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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히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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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이고는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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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마법사 놈들이 나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소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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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의 집착이 상상 이상으로 지독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만, 그럴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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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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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오하구나. 허나, 그것이 사람의 몸으로 태양을 담은 자하브라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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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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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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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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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시간은 훌쩍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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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헌트를 한차례 밀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위험한 낌새도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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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위 마법사들이 이그나투스의 감독하에 뺑뺑이 치다 보니 타나토스의 침상을 개량하고 준비하는 과정 또한 순식간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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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가 마탑에 도착한 지 열흘째 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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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는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와, 마법진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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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이 몸이 잠에 들면 정확히 20시간 뒤에 깨어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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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금방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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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이 20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거든 대신 처리해 줄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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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금만 제대로 지급한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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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다른 어디도 아닌 드래곤이자, 마탑주인 이 몸 아니더냐. 세월에 묻힌 다른 동족의 레어를 털어서라도 지불할 테니 걱정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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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게까지는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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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드래곤이 한참을 키득이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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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일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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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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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농담과, 그보다도 더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건물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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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오는 것과 동시에 문이 닫히며 완전한 암실이자, 밀실이 되는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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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조차 흠칫할 정도로 막대한 마나가 집중되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두터운 벽 너머로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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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밖에서도 숨소리가 들리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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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자고 일어나면 덩치가 더 커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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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감안하고 건물을 준비했다고 들었지만, 잘 상상이 안 간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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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웃으며 내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갔다. 20시간이면 나도 한 숨자고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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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밤중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괴성에 잠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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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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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룡, 모르테우스의 울음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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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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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헌트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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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와일드 헌트로부터 고작 열흘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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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와일드 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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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가 천년만의 잠에 들고 한나절쯤 지났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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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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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괴성에 잠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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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오는 듯한, 끝 모를 울림. 사람의 본능적인 공포와 거부감을 자극하는 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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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번 들어본 것이지만, 잊을 수 없는 소리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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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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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의 울음소리는 사룡 모르테우스의 비명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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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자마자 습관적으로 몸 상태를 확인했다. 딱히 이상은 없다. 짧게나마 방금까지 잠을 자고 있었던 덕분인지 오히려 컨디션은 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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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문을 열고 바깥을 살펴보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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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조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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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서 일렁이는 마력의 방벽이 보였다. 마탑에 설치된 대 언데드용 방호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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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차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거칠게 열리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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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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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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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냐 카렌. 하긴. 방금 전의 소란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없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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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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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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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만, 본래 한참 뒤에 일어나야 할 와일드 헌트가 열흘 만에 재개됐습니다! 분명 이상현상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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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지. 남부의 던전 역류가 1년 만에 다시 일어난 것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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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하게 대답하실 때가 아닙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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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될 수 있는 만큼은 싸워볼 생각인데. 이그나투스가 아침 먹고 잠들었으니 해 뜰 때쯤이면 깨어나겠지. 그때까지만 버티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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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오러를 순환했다. 약간 남아있던 잠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고, 정신이 또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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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지금 상황 또한 선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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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카렌은 조금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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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리고 가주님께서는 이 땅의 주인이 아니십니다. 이곳에서 굳이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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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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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막한 목소리로 카렌을 불렀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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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말랑한 볼살과,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 이제야 좀 조용해진 카렌을 향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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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다면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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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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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여기까지 텔레포트로 한 번에 왔어. 돌아가는 길 따위는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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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 으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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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그래. 남아있는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에게 자하브로 향하는 텔레포트를 시전해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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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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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끔뻑이는 카렌. 이제 좀 침착해진 그녀의 모습에 낄낄 웃으며 손을 놔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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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이야기야. 마탑은 절대 혼자의 힘만으로 와일드 헌트를 이겨낼 수 없어. 어쩌면 동이 틀 때까지 버티는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버티지 못할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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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일이지만 자하브와는 관련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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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짧구나 카렌아. 하긴. 거의 평생을 자하브에서만 살았다고 했지. 이참에 잘 기억해 둬. 남부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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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경우를 상정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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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열흘 전에 와일드 헌트를 막아내느라 비축해 둔 자원 대부분을 소모한 탓이건, 이그나투스 없이는 힘이 부족하건, 그냥 운이 없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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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마탑이 지금의 와일드 헌트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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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저 장벽은 부서지고, 모르테우스와 막대한 언데드들이 구덩이를 기어나와 대륙으로 쏟아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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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이그나투스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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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그나투스 또한 새로운 본 드래곤이 되어 와일드 헌트에 합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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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로도 버거웠던 본 드래곤이 두 마리로 늘어난 와일드 헌트를 과연 제국이 막아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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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 혈통 그 자체에 힘이 흐르는 이 세계의 특성상 황실의 무력은 막강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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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많은 피해가 있을 것은 확실하다. 약해진 자하브는 덩달아 휘청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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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황실마저도 와일드 헌트를 제때 막아내지 못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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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정말 최악 중에서도 최악으로 손꼽히는 가능성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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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헌트는 막대한 죽음의 기운을 몰고 다니며, 그 탓에 희생자들을 언데드로 삼아 합류시키는 특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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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기사를 쓰지 않고 무생물인 용아병을 쓰는 것도, 사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여차하면 이그나투스 본인이 직접 나선 것도 그래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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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막을 타이밍을 놓친 와일드 헌트는 대륙의 재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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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드래곤이 앞장서고, 과거의 영웅들이 못다 한 전투를 이어가며, 마탑의 마법사들은 물론, 이를 막아 세우기 위한 현시대의 용맹한 자들까지 집어삼킨 죽음의 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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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은 죽은 자들의 것이 되겠지. 산 사람들은 오히려 숨어 살아야 할 테고. ……자하브는 그런 상황을 버텨낼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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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막으며 언데드 군세까지 막아낸다? 상성의 문제를 제쳐두고서라도 단순히 역량이 부족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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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결국 4대 대공들이 틀어막던 재앙은 전부 풀려나겠지. ……그 뒤에는 죽지 못해 봉인 당했던 트라고데아가 깨어날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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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전과 달리, 다시금 트라고데아가 강림한 대륙에는 그를 막아설 능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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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세상은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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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기껏 판타지 세상에 환생했으니, 여기저기 둘러보고, 비자금으로 챙긴 돈을 펑펑 써대는 추방 라이프를 보내겠다는 나의 꿈도 더는 이룰 수 없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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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너무 비약적인 상상이에요 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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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도 않아. 아직 글을 읽을 줄 몰라, 카렌 네가 직접 읽어준 대륙의 역사. 그걸 들으며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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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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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롭다. 그 생각밖에 안 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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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지구에서의 삶에서 위기란 기껏해야 미친 강도를 만난다거나, 재수 없이 일어난 사고로 목숨이 위험한 정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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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의 끔찍한 방향으로 상상해 보아도,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하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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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핵무기에는 의지가 없고 이를 날려 보낼 수 있는 이들은 그 위험성을 잘 인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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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 세상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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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전에 망했어야 할 세상을 여러 영웅들과 신들이 힘을 합쳐 꾸역꾸역 살려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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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풀어져도 대륙을 망가뜨릴 수 있는 재앙이 4개나 있으며, 심지어 그중 동부에 봉인된 재앙은 풀려난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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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행방이 묘연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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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 최근의 역사를 큰 흐름으로 살펴보면 칼립소 대공가가 멸문하고, 동부의 재앙이 풀려난 이후. 던전의 역류 간격이 짧아졌고, 와일드 헌트의 발생 빈도가 불규칙적으로 변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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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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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건 그냥 선후 관계일 뿐, 인과 관계는 아닐 수도 있겠지. 다만 아까도 말했듯이 최악을 염두에 둬보자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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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 없으면 대륙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재앙 중 하나가 풀려났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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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전체는 몰라도 일단 제국은 못 버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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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된 변화라 그런 걸까. 아니면 너무 오랜 시간 봉인된 재앙을 가까이에 두고 살아 무뎌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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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은. 아니, 내가 지금껏 만난 이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멸망 위에 기적적으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하는 것 같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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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나라고 진지하게 모든 멸망을 막겠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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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일 없었으면 한다.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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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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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무언가 생각하는 바가 있는지 입을 꾹 다문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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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덕에 평소보다 뽈롱한 카렌의 볼을 양옆으로 쭈욱 잡아 늘리며 히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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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카렌 네가 말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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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를 말인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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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의무는 외적들로부터 사람을 지키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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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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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땡그래진 카렌을 향해 평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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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정말로 복잡한 일은 얼마 없어. 복잡해 보일 뿐이지 사실은 간단한 문제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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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한 적이 쳐들어왔고, 새로 사귄 친구는 푹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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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행히도 다음 날 아침까지만 버티면 모든 게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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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짱쎈 투명 드래곤……은 아니지만, 푹 자고 개운해진 응애 드래곤이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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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괜히 겁을 집어먹고 등을 돌렸다가는 모든 게 무너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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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여기서는 어떻게든 버텨봐야 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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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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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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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평소와 같은 단정한 차림과 무표정으로 돌아와 고개를 꾸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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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가주님. 주인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는 하나, 확실히 시야가 짧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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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래. 알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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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면 이제부터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마탑의 시스템은 가주님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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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나가보고 생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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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병을 소모하는 것을 전제로 짜올린 메뉴얼과 직접 몸으로 싸워야 하는 나는 상성이 좋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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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어디인가. 대륙의 유일한 마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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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똑똑한 이들이 모여있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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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이 뭔가 방법을 찾아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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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이고는 방을 나서자, 자연스레 반보 떨어진 거리에서 뒤따라오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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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나와 정문 쪽으로 향하자 점점 커지는 전투의 소음.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모르테우스의 울음소리와 누군가의 비명이 뒤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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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하게 달리는 마법사들과 이를 서포트하는 아직 어린 제자들을 지나, 정문에 도착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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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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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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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의 마력이 느껴지는 이글거리는 사슬에 묶여 발버둥 치는 모르테우스와, 말 그대로 뼈가 부서져라 장벽을 두드리는 언데드를 마법으로 폭격하는 마법사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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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생각보다 할만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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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조금 위쪽. 타나토스의 침상 마법진을 설치할 때 봤던 늙은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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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가 없는 지금, 마탑의 결정권자나 다름없는 최고참 제자가 피를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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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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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르테우스를 구속하던 사슬이 흐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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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알겠네. 저 사슬은 이그나투스가 말했던 자신이 없을 때를 대비한 마도구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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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조건이 까다로워 사실상 실패작 취급 받았다는 대 모르테우스용 마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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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실패작이 왜 실패작인지 몸소 증명하고 있는 중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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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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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차며 마탑의 외벽을 밟고 미끄러지듯이, 위쪽의 테라스 비슷한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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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흑! 누,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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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의 대제자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평정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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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대공이셨습니까. 이곳은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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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든 위험할 것 같아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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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이고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보이는 전장. 아마 이곳이 사령탑이자, 마탑의 모든 마법을 조율하는 곳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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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뒤를 돌아보자 실제로 복잡한 마도구들과, 대제자를 돕기 위해 분주하게 마력을 토해내는 다른 장로들이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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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없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저거. 얼마나 버틸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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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늙은이가 최선을 다한다면 1시간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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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 마도구는 너 혼자만 쓸 수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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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가락에서 강렬한 열기와 마나를 내뿜는 반지를 가리키자 고개를 젓는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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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스승님의 제자들 중 실력을 인정받은 이들은 모두 쓸 수 있습니다. ……다들 오래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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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짧게나마 모르테우스는 제압할 정도는 되지만, 부담이 너무 커서 사람이 못 버티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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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강렬한 마나의 흐름이다 보니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나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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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반지는 단순한 가늠좌, 내지는 열쇠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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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을 만들어 내는 마도구는 이 마탑 그 자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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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른 장로들이 번갈아 가며 마도구를 사용하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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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한다면 스승님이 깨어날 때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만……저희가 상대하는 것은 와일드 헌트이지 모르테우스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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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전력을 다하면 모르테우스를 동틀 때까지 붙잡을 수는 있지만, 다른 언데드들을 상대하지 못한다는 소리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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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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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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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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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는 그를 향해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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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 열어. 전부는 아니고, 사람 한 명 드나들 정도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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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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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테우스를 제외한 남은 언데드들. 내가 막으면 되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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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자하브 대공이시라지만, 저만한 수의 언데드를 어찌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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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 양학은 자하브의 소양이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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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나는 자하브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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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와일드 헌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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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을 열라는 말에 기겁한 표정을 짓는 이그나투스의 대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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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자하브 대공이시라지만, 저만한 수의 언데드를 어찌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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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 양학은 자하브의 소양이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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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나는 자하브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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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꺼낸 말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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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모르테우스는 좀 자신이 없어. 이그나투스에게 들어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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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은 사용하지 못하지만, 드래곤 하트는 여전합니다. 그 막대한 마력 전부를 사기(死氣)를 방출하거나, 거대한 육신을 강화하고 움직이는 데 사용할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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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렇지? 단순한 강함에는 나도 자신 있는데, 아무래도 체급 차이라는 걸 무시할 수는 없겠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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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내가 나름 열심히 살아남았고, 오러를 익히며 한층 강해졌다지만 저 거대한 괴물과 드잡이질하는 건 좀 저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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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만 남았다고는 하나, 한때는 드래곤 로드라 불린 고룡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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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른 언데드들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생전에 대단한 영웅들이었다는 건 알지만……어찌됐든 인간 사이즈고 순수 신체 스펙은 나보다 못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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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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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이대로 가면 이도 저도 못 하고 맨몸으로 와일드 헌트를 상대하게 될 거야. 그러니 뭐라도 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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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자하브 대공 각하의 계획에 저희 마탑도 동참해 보죠. 저를 포함한 고위 마법사들은 모르테우스를 구속하는 데 집중하겠지만, 그 이하의 마법사들 전부가 대공 각하를 서포트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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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반가운 소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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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 웃으며 난간에 한쪽 발을 걸쳤다. 이대로 내려가려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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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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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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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대공 각하의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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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역량을 넘어선 마도구의 힘에 괴로워하면서도 고개를 깊숙이 숙이는 대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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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기분이 간질간질해져서 퉁명스레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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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은 의무를 지는 자. 당연한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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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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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자의 반응을 일부러 보지 않고 곧장 난간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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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낙법으로 무사히 착지하고는 장벽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밑에서 기다리던 카렌이 여전히 내 곁을 따르는 모습에 손을 휘휘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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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네가 약한 건 아닌데 이번 일에는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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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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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놓고 구경하라는 소리가 아니야. 카렌 너는 발이 빠른 편이잖아? 마법사들한테 포션이라도 받아서 나한테 던져. 그거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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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션을 던지라니……대체 무슨 짓을 하시려는 겁니까 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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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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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이고는 장벽의 앞으로 향했다. 사령부에서 확인한 마탑의 어디에서건 가장 잘 보이는 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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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 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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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없이 장벽을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반투명한 마나 너머로 뼈만 남은 팔다리와 녹슬고 부러진 무기가 날아오다가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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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저 모든 것이 내 목을 노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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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짓거 한 번 해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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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전의를 다졌다. 그리고는 손을 적당히 흔들어 대제자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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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이 그러했듯, 의아해하던 주변 마법사들의 시선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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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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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게 얼어붙은 비닐이 뜯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장벽의 일부가 스스로 갈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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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작은 틈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차가운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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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에서는 느낄 수 없던 추위. 그것도 사기를 머금은 인위적인 냉기에 시선을 앞쪽에 고정하며 입만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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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아. 이번 전투에서의 첫 번째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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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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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생각보다 춥네. 마법사들한테 보온 마법 좀 걸어달라고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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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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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챈 카렌이 굳은 표정으로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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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급이 아닌 그 밑. 메이킨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강한 이들이 모인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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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이 떠나는 것과 동시에 손가락 만하던 작은 균열이 순식간에 크게 갈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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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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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 생겨난 명백한 균열. 요구했던 대로 정확히 사람 한 명 지나갈 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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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말하면, 사람 한 명이 틀어막고 있으면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의 사이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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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실력은 좋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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낄낄 웃으며 가장 먼저 균열을 통해 넘어오는 스켈레톤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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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를 순환시키되, 주먹에 집중시키지는 않은 상태. 힘을 아끼며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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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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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켈레톤이 들고 있던 도끼의 옆면으로 내 주먹을 막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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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는 부서졌으나, 뼈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멀쩡했다. 살이 없기 때문인지 흩날리는 파편에 피해를 입지도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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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내가 놀란 부분은 다 녹슨 주제에 의외로 튼튼한 무기도, 날카로운 파편 세례에도 멀쩡한 스켈레톤의 특성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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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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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힘을 뺐다지만, 겉보기엔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스켈레톤이 내 주먹을 막은 것. 그 자체에 놀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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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영웅들의 시체라는 건 이런 의미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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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도끼 자루를 내던지고 자신의 한쪽 팔을 뽑아 달려드는 스켈레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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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뭉툭한 뼈임에도 도끼의 형상이 엿보이는 것 같다. 그만큼 완벽한 자세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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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이 내리찍는 팔을 집중해서 바라보며……오러를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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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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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서부터 시작된 문양이 팔을 휘어감고, 때마침 마탑에서 온갖 버프 마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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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머금어 차가웠던 공기가 더는 아리게 느껴지지 않았으며, 시야에 비치는 모든 풍경이 조금 더 느려졌고, 근육에서는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힘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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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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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기합과 자세를 낮춰, 스켈레톤의 안쪽으로 파고든다. 휘둘러진 팔이 어깨를 두드리는 감각이 들었으나, 타점이 어긋나 별다른 타격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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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틈을 타, 녀석의 두개골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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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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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버티는가 싶더니, 간단하게 부서지는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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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잃은 몸은 여느 언데드가 그러하듯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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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걸로 끝은 아닐 터. 아무리 머리가 부서졌어도, 와일드 헌트의 충만한 사기가 있다면 금세 되살아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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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그저 차갑기만 한 줄 알았던 죽음의 기운이 의지라도 가진 것처럼, 무너진 언데드의 잔해를 회수해 안쪽으로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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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빈 자리를 통해 다음 언데드가 머리를 비집고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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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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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주변의 이 사기는 모르테우스에게서 비롯된 것. 그의 의지가 깃들어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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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 웃으며 다음 스켈레톤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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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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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터운 대검의 옆면을 쳐내고, 비틀거리는 틈을 타, 허리춤을 걷어차려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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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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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쯤은 흔한 일이라는 듯, 노련하게 자신 또한 몸을 꺾어 박투술로 대항하는 스켈레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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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내가 걷어차려 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녀석의 주먹에 얻어맞게 생긴 상황이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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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는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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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허리를 꺾어, 날아드는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뒤.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 팔을 이빨로 강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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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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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신호 삼아 꺾였던 몸을 틀자, 내 이빨에 붙들린 녀석의 몸이 둥근 반원을 그리며 땅에 처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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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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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눈두덩이 사이로 푸른 귀화가 일렁이며 당혹을 토해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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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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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브러진 녀석의 머리를 강하게 짓밟아 부수고는, 주인을 잃은 대검을 크게 휘둘러 균열을 넘어오는 다음 상대를 향해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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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스켈레톤이 방금까지 상대한 녀석들처럼 노련한 것은 아닌지, 이번에는 별다른 저항 없이 박살 난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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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균열 너머로 일렁이는 무수히 많은 귀화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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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인 적의. 그 틈에 녹아들어 있는 약간의 사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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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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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은 분명 대의를 위해 싸웠고, 내일을 부르짖으며 죽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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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는 지금도 다를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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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테우스에 의해 눈이 흐려진 저들에게 보이는 것은, 분명 목숨을 걸어서라도 쓰러뜨려야 할 거악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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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죽어서도 이용만 당하는 신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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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분명 이 자리에 선 것은 영웅이라 부르기에 아깝지 않은 자들뿐이니.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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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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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한 전쟁. 그 상대가 되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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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언데드의 본능에 휩쓸린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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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쌍의 귀화가 거칠게 타오르며 음산한 귀곡성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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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 스켈레톤들을 가로막으며, 쉴 새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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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딪히는 기예. 첨예하게 대립하는 적의. 그리고 명백하게 갈리는 승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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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겨우 통과할 법한 좁디좁은 공간이었으나……이곳은 분명 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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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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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미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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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있어 이그나투스의 제자가 되었으나, 아직 수련이 부족해 중위 마법이 한계인 메이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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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다른 전투 마법사들 사이에 껴서 방벽을 두드리는 언데드들을 향해, 모든 마력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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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정신없이 마법을 시전하고, 또 시전하고, 그러다 마나가 부족해지면 이미 마나 포션을 억지로 마시며 다시 마법을 쥐어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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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힘겨웠지만, 그녀를 가장 힘겹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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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헌트를 상대하는 건 처음이 아니지만, 그녀의 스승 없이 상대하는 것은 처음이라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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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에 대한 불안이 메이킨의 정신을 몰아붙이는 도중. 그녀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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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의 어디에서나 시야에 닿는 정중앙. 그 앞에 서서, 홀로 언데드를 유인하고, 수많은 언데드를 적수공권으로 때려 부수는 에녹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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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해요……아무리 자하브라도 스승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버티는 건 불가능해요……애초에 자신의 일이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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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에녹의 뒷모습을. 그 어떤 마법보다도 굳건히 버티고 선 등을 보는 순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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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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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은 자하브의 가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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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하브는 이그나투스와 같은 대공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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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최후의 보루이며, 메이킨과 같은 범인을 아득히 넘어선 힘을 지닌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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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힘으로 기꺼이 스스로를 희생하여 의무를 다하는 고결한 존재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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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부족하지만 이그나투스의 제자라는 이유로 위계는 높은 메이킨이 무언가에 홀린 듯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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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들 멈추세요! 저희는 이제부터 언데드가 아닌 자하브 대공께 집중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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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존재야말로 그 어떤 방벽보다도 중요한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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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탑 여기저기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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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와일드 헌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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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이 휘둘러지고 뼈가 부서진다. 피는 튀지 않았으나, 녹슬고 부서진 무기의 파편이 그 대신이라는 듯이 바닥을 붉게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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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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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주먹에서 난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굉음. 실제로 어지간한 폭발계 마법과 맞먹는 위력에 스켈레톤이 들어 올린 방패를 중심으로 충격파가 퍼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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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몸으로 느껴지는 떨림. 뒤이어 바람과 함께 흙먼지가 흩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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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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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마법사들중 하나가 황급히 바람을 일으켜 흙먼지를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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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전투를 지켜보며, 에녹에게 필요한 것들을 서포트해야 하는 마법사 입장에서 시야 가려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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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흙먼지가 옅어지며 드러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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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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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불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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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데드 특유의 부른 귀화가 아니다. 붉고 뜨겁게 타오르는……이그나투스의 브레스, 혹은 저 하늘 위의 태양을 연상시키는 화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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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문양 위로 불길을 토해내는 에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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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방금까지 성문을 닮은 거대한 쌍 방패를 부수고, 드워프로 보이는 작지만 두터운 스켈레톤의 머리를 잡고 들어올린 중이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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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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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게 주먹을 움켜쥐는 것으로 부스러지는 두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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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이기에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푸른 귀화가 에녹의 붉은 불길에 짓눌려 흩어지는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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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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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환호성.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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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건재함은 기뻐해 마땅한 것이었으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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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쁜 숨을 몰아쉬는 에녹을 향해 온갖 종류의 마법이 쏟아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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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를 잊고 활력을 북돋는 마법. 전투 중에 생긴 자잘한 상처를 회복하는 마법. 죽음의 기운을 막아내기 위한 정화 마법. 장기간 사기에 노출되면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완화하는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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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직접적으로 에녹을 강화하는 마법이 차례로 갱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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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피부가 돌처럼 단단해지며, 그 위로 투명한 실드가 둘러진다. 안 그래도 날카로웠던 반사신경과 동체시력은 한 단계 끌어 올려졌으며, 근육과 뼈에는 오러와 반발하지 않도록 정제해 낸 특수한 마나가 들어차며 육신을 보다 강건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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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녹의 움직임은 처음보다 명백히 둔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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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일이다. 에녹의 전투는 벌써 몇 시간째 계속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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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몇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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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그저 기계적으로 주먹을 휘두르고 상대를 정면으로 깨부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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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라진 뼛가루는 흩날리는 사기에 휩쓸려 안쪽으로 돌아간다지만, 부서진 무기는 그러지 못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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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뒤에는 어느새, 방해된다는 이유로 대충 던져둔 무기가 빼곡히 널브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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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 활, 창, 도끼, 대검, 방패 등등. 온갖 종류의 무기가 에녹의 등 뒤에 늘어선 모습은 공동묘지의 묘비를 연상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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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은 진작에 넘었다. 이미 천을 넘어선 부서진 무기는 그 이상의 스켈레톤이 에녹의 손에 부스러졌다는 증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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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일기당천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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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일대일 상황으로 몰아갔다지만, 홀로 군대를 틀어막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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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부부당이라 부르기 부족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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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결투이자, 홀로 치르는 전쟁. 놀랍게도 그 승기를 거머쥔 것은 에녹 자하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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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제국의 수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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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마탑의 마법사들은 깨달았다. 자하브가 어째서 대공 가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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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으로 어리다지만, 드래곤인 이그나투스와 맞먹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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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감탄과는 별개로 에녹의 움직임이 둔해진 것은, 끊임없는 전투로 지친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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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잘 알고 있는 걸까. 집사복을 입은 은발의 소녀. 카렌이 발 빠르게 움직이며, 마법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에녹을 서포트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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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상처가 나면 포션을 뿌리고,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게 대충 던진 무기를 뒤편으로 이동시키며, 가끔 에녹이 요구하는 바를 다른 마법사들에게 전달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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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싸우는 동안, 카렌 또한 쉬지 않고 그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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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이제껏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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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하며, 보조 마법을 걸어주는 사이에도 냉철한 마법사들의 머리는 희미한 불안을 떠올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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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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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지. 다만, 우리보다는 훨씬 오래 버티실 수 있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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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마법사들은 전부 모르테우스를 제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중하위 마법사들만으로 방벽을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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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에서 홀로 언데드의 군세를 감당하는 에녹의 무력은 분명 경이로운 것이었으나, 동시에 위태로운 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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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법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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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라도 마나를 아끼고, 쥐어짜 에녹을 보조하는 것 말고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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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슬슬 마나도 떨어져 가고, 회복 수단도 부족해진 마법사들 사이에서 불안이 퍼져나가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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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은 묵묵히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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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것만이 자신의 의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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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균열 너머로 비집고 나오는 또 다른 스켈레톤. 날카로운 세검 한 자루를 들고 우아한 움직임으로 팔을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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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인 가속이 어찌나 빠른지 에녹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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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잔 상처 여럿을 입은 에녹. 이대로 시간을 끌면 균열 너머로 또 다른 망자가 기어 나올 수도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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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은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가만히 팔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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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방비한 모습에 의아해하면서도 망설임 없이 목덜미를 향해 세검을 꽂아 넣는 스켈레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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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예리함을 잃지 않은 날붙이가 목젖에 닿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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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같은 금안을 번뜩이며, 에녹이 몸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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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잃은 세검은 목이 아닌 구릿빛 어깨에 박히고, 그나마도 단단한 근육에 막혀 나아가질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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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찔렸다기보다는 몸으로 칼을 붙잡은 것 같은 모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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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입꼬리가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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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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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과 함께 세검을 맨손으로 잡아채는 에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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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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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악력에 그대로 얇은 검신이 부러지며, 당황한 스켈레톤을 향해 머리를 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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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이는 에녹의 이마가 스켈레톤의 잿빛 머리를 단번에 산산조각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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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잔해가 순식간에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며 깨끗해진 전장. 그 너머로 새로운 스켈레톤이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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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어깨에 박힌 세검의 반절을 뽑아낼 시간도 주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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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에녹의 육신에 박혀있는 무기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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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벅지에는 단검이, 팔뚝에는 부러진 단창이,옆구리에는 깃이 삭아 없어진 화살이 박혀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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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박힌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단 한 번도 뒤를 돌지 않았다는 증명이기도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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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사람 몸이라는 건 무기를 주렁주렁 박아 넣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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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다. 마법사들의 보조 마법. 그리고 강철처럼 단단한 육신에 막혔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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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도 특유의 재생력과 회복마법의 영향으로 출혈까지 멈췄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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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있어도 생명이나 움직임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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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문제는 상처가 남아있다는 것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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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이 계속해서 정화하고 몰아내는 중이라지만, 그 틈을 타 죽음의 기운이 침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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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냉기는 자하브의 불길을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약화시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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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큰 문제는 와일드 헌트의 스켈레톤들이 평범한 언데드가 아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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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을 잃긴 했으나, 그 육신에 쌓아 올린 기예는 어지간한 기사를 상회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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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의 마법사들이라고 용아병을 대신할 골렘을 만들어 보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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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참이라면 누구나 시도는 해본다. 그리고 상상 이상으로 뛰어난 스켈레톤들의 무위에 처참히 박살 나고는 깨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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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 전투에는 문외한인 마법사들의 눈에도 알 수 있을 만큼 세련된 무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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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펼치는 신대의 전사가 얼마나 강인한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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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봐도 실력자로 보이는 스켈레톤의 움직임과 달리, 에녹에게서는 이러한 체계적인 동작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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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과 힘. 그리고 약간의 운에 몸을 맡기고, 실낱같은 가능성을 향해 머리를 들이미는 짐승과도 같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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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잘 버텼을지 몰라도, 에녹은 분명 언젠가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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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합리적 사고가 마법사들로 하여금 불안을 부추기는 것이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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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속에서만 차오르는 열기 또한 분명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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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형태를 한 짐승. 하지만 그 짐승은 이미 신대의 영웅들을 무수히 도살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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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가 없는 확신이자, 이성을 추종하는 마법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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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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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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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마법사가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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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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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어둡고, 동이 트려면 아직 한참은 남았다. 허나, 지상은 밝게 빛나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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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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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자하브가 피워올린 열기. 그 희망에 마법사들이 홀린 것처럼 진작에 바닥난 마력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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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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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태양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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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하늘이 아닌, 지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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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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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켜쥔 주먹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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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토해내는 목구멍에서는 피 맛이 느껴지며, 거칠게 뛰는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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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눈앞의 상대를 향해 휘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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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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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 가까운 기합 소리와 함께 뻗은 주먹이 쌍검을 든 스켈레톤을 향해 내질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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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지칠 대로 지친 육신은 제대로 된 속도를 내어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뼈만 남은 저들보다는 빨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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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응할 틈도 없이 머리를 부술 수 있었다. ……그랬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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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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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하게 휘어진 쌍검이 내 팔목을 양쪽에서 베어내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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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이 걸어준 방어 마법. 그리고 다급히 손목을 꺾어, 검신을 쳐낸 덕에 살짝 시큰하고 말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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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단번에 끝장내지 못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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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둘러진 실드와, 단단하게 긴장시킨 근육을 믿고 성큼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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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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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쌍월을 그리며 휘둘러진 검이 내 양어깨를 향해 노렸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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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드를 부수며 느려진 검 끝이 살갗에 닿는 순간. 빠르게 몸을 꺾어 베이는 각도를 흩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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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근육을 갈라놓아야 했을 쌍검이 붉은 실선만을 남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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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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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게 구른 발이 녀석의 발을 박살 낸다. 좁은 공간에서 거리를 좁혔기에 발을 놀릴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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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잃고 넘어지는 스켈레톤의 머리를 무릎으로 으스러뜨린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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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넘어올 스켈레톤을 대비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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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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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푸른 귀화만 균열 너머로 일렁일 뿐, 다음 스켈레톤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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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함에 잠시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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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다음 스켈레톤이 방벽의 균열을 통과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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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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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한껏 꺾어야 담을 수 있는 거대한 머리. 주둥이는 길쭉하고, 머리에는 왕관을 닮은 뿔이 자라 있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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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존재해야 할 자리에는 내 몸뚱이보다도 거대한 귀화가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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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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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급 마법사들은 제 역할을 다하는 중인지 녀석의 몸은 타오르는 사슬로 빈틈없이 결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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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공허한 울음소리를 내지도, 육중한 거체로 발버둥 치지도 않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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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더 큰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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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자의 것과는 너무나 다른, 하지만 분명 그 안에 지성이 깃든 것을 알 수 있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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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미친 줄 알았던 사룡이, 수많은 언데드 군세를 막아낸 장벽을 손짓 한 번으로 부술 수 있는 괴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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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의 재앙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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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놀란 나머지 요즘 들어 망나니 연기를 하며 생긴 습관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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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봐. 눈 깔아라. 뒤지기 싫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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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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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만 남은 모르테우스가 귀화를 끔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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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가 약속했던대로 가주가 되긴 했지만, 하는 일은 정말로 얼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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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힐다의 수업이 시작되기 전. 아침에 눈을 뜬 이후로 한 발짝도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뒹굴거리며 카렌에게 귀찮게 구는 도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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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곧 자하브로 돌아올 거라는 새 여동생. 유리아에 대해 생각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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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사실 나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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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여동생이 하나 생겼다고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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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하브에 들어오며, 제벨라라는 새 누나가 생긴 것처럼 유리아라는 여동생도 함께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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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유리아는 어떤 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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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아가씨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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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처음 만나는 거니까 조금 궁금해서 말이야. 역시 제벨라 누님 같은 분위기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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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아무래도 유리아 아가씨는 제벨라 아가씨와 많이 다르시죠. 정확히는 제벨라 아가씨가 다른 자하브의 여식분들과 비교해도 좀 특이한 분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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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벨라 누님에게 그 부분에 관해서는 얼추 들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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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의 혈계능력은 오직 남자에게서만 발현된다. 하지만 여자라고 하여, 완전한 일반인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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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자하브의 흔적 정도는 남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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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는 시간이 흐르며 피가 연해지자, 격세유전으로 자하브의 흔적마저 지워버리며 다른 가문의 피가 발현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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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자하브 안에서도 무척이나 특이한 경우였고, 그렇기에 전대 가주인 카인에게 학대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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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유리아가 제벨라와 크게 닮지 않았다는 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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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금발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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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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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피부도 갈색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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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건 아닙니다. 피부색은 제벨라 아가씨를 닮으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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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누님이랑? 혹시 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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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두분 모두 1부인과 전대 가주님의 사이에서 나온 분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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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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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카렌이 창문을 열어 간단하게 환기를 하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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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아가씨는 무재를 타고나셨습니다. 혈계능력은 발현시키지 못하셨기에 신체 능력은 다소 떨어지셨지만……그래도 자하브의 무재를 고스란히 물려받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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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능력은 없어도 재능은 유전되기도 하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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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혈계능력 또한 물려받았지만, 발현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제벨라 아가씨와 가주님의 혼인이 약속되어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다른 가문의 혈계능력을 각성하셨지만, 몇번이고 시행된 검사를 통해 자하브의 직계임은 확실하셨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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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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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제벨라와의 결혼 건도 있었네. 이것도 진짜 결혼식을 치르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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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이번 생의 아버지마냥 자식만 싸지르고 사라지는 건 좀 그렇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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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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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알겠네. 무재가 있으니, 그걸 키워주기 위해 아카데미에 보낸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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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일단 명목상으로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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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목상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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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제 추측이지만, 조금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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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네. 이리 와서 좀 자세히 말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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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의 이불을 들어, 옆구리 쪽을 툭툭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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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침대를 가만히 번갈아 바라보던 카렌이었으나, 결국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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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구리 옆에 카렌의 작은 엉덩이가 쏙 들어오는 모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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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우라는 뜻이었는데……이건 이것대로 괜찮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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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망나니 연기도 계속하다 보면 는다는 걸까. 이젠 이것도 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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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과하지 않은 선에서 카렌을 희롱할 수 있는 위치. 꼬리뼈와 허리의 중간쯤 되는 부분을 콕콕 찌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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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카렌 네가 생각한 다른 이유는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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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전대 가주님께서는 후계자 경쟁이 심화될 걸 예상하셨겠죠. 그래서 능력은 있지만 막내라 너무 어린 유리아 아가씨를 아카데미로 일종의 피신을 보낸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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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피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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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지는 알겠고,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만……설령 그렇다 해도 카인이 유리아를 피신 보냈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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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지만, 카인은 제벨라의 혈통을 의심하고 가문의 악재로 여기며 상당한 학대를 감행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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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이 자하브의 흔적이 보인다고는 하나, 제벨라의 친동생인 유리아를 아껴서 멀리 도망 보냈다는 건 조금 신빙성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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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은 카렌과는 조금 다르다. 아마……제벨라가 내보낸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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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제벨라가 일하는 모습을 몇번 지켜봐서 잘 안다. 그녀가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유능한 사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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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반쯤 감금된 상태고, 한계치까지 몰려있다해도 불온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한사람 내보내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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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의 언행에서 추측컨데 유리아는 여자임에도 자하브 가문 안에서 그럭저럭 인정받았던 것 같으니 더욱 쉬웠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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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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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어땠는지는 제벨라나 유리아에게 물어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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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대충 어떤 사람인지는 알겠네. 그럼 성격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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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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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고민하던 카렌이 무표정한 얼굴 위로 흐릿한 미소를 띄워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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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사람을 잘 챙겨주시는 분이었죠. 연민을 알고, 책임을 아는 분이기도 하셨고요. 다만, 약간 다혈질적인 면모가 있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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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는 자하브 가문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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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 말은 아닙니다만, 대충 그런 느낌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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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를 모시는 케세프 가문의 일원으로서 자하브의 핏줄에 안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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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게 속삭이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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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는 기본적으로는 괜찮은 녀석이지만, 성격은 급하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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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제벨라 상대로는 실패했던 가주직 떠넘기기가 먹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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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건 내 망나니짓을 고깝게 볼 것이며, 성격이 급하다는 건 살짝 긁었을 때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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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별다른 욕심 없이 나를 가주직에 앉힌 제벨라와 달리 변수가 되어줄 것은 확실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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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전생 현생을 다 합쳐 처음으로 생기는 여동생이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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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 애호하고 싶은 마음과, 마구 괴롭혀 들고 일어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머릿속에서 첨예하게 대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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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내가 정말로 귀족의 피가 섞였는지, 어째서 던전에 들어가면 컨디션이 좋아지는지로 생각할 게 많았던 상황이라 슬슬 머리가 아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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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몸을 둥글게 말아, 눈앞에 보이는 카렌의 허벅지에 머리를 묻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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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앗! 갑자기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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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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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긴 그럴 때가 되긴 했죠. 가주님도 자하브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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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인 카렌이 나쁜 계획이라도 꾸미는 사람처럼 작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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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늘 수업은 땡땡이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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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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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확 마음이 동했지만, 한참의 망설임 끝에 결국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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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됐어. 힐다 기다리겠다. 빨리 가자. 당장 급했던 계승식도 끝나고, 쉬운 내용이라면 혼자 책도 읽을 수 있게 됐으니, 오러 수련의 비중을 높인다고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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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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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그대로면서 입만 벌리며 놀란 티를 낸 카렌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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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셨습니다. 이걸로 저를 사람들 보는 앞에서 번쩍 들어 올렸을 때의 앙금은 씻어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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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참 고맙네. 근데 카렌아. 원래 이런 거 신경 쓰는 사람이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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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케세프 가문 출신이고, 가주님의 전속 시종이긴 합니다만 어엿한 한창때의 레이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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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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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편안함이라는 말은 분명 이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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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으면 굉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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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벗어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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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큿! 가주님의 충실한 집사에게 수치를 주실 생각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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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지도 못할 거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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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티 나는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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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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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지만, 슬슬 사람들이 보내오는 존경의 눈빛에 익숙해질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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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 내가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는 감도 못 잡고있는 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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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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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뵙겠습니다 자하브 대공 각하. 아카데미의 교관 역을 맡고 있는 델빈이라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실습을 허락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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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야 뭘. 듣자하니 아카데미 재학생 중에 내 동생도 있다면서? 이 정도는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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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아카데미에서 교관들과 함께 학생들을 보내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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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일은 제벨라 선에서 해결되었지만, 아카데미는 제국의 미래. 그런 곳에서 수십의 학생을 믿고 실습 보냈는데 얼굴조차 안 비칠 수는 없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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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비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좀 삐뚜름하게 앉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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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떨어진 곳에서 힐다가 이쯤 되면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의 시선을 보내왔지만, 애써 무시하며 눈앞의 학생들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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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대부분 10대 중후반. 하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꽤나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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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쪽은 정확히 알아보기 어렵지만……기사 지망생들은 대부분 평기사 수준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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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검에 인생 몰빵한 힐다에 비할 바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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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자하브를 보필하기 위해 온갖 지원을 받으며 비밀병기 비스무리한 것으로 육성 받은 카렌과 비슷한 수준은 몇몇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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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경험이 부족하고, 단장 노릇을 할 특출난 존재가 부재할 뿐이지 어지간한 정예 기사단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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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아무리 싸우는 방법을 가르치는 아카데미라지만, 학생을 던전에 밀어넣는다는 것에 약간 거부감이 있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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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곳이라면 던전에 들여보내도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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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조금 더 자세히 늘어선 학생들을 살펴보았다. 기세를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살펴볼 요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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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전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한 명. 단 한 명만큼은 초면이면서 묘한 친숙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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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빛나는 것처럼 밝은 금발. 피부는 창백하다시피 하얗지만 그것이 유약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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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다리를 짚고 선 다리, 반항적인 것을 넘어 위압적인 눈빛, 그리고 전신으로 뿜어내는 사나운 기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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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인간의 법도를 모르는 짐승을 아름다운 여인의 형태에 가둬둔 것 같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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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벨라를 닮은 연보랏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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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바로 유리아, 제벨라의 동생이자 내 새 여동생(아님)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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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인데 무어라 말부터 꺼내는 게 좋으려나. 그런 내 고민을 덜어주겠다는 듯이 유리아 쪽에서 먼저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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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그럭.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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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여리한 자신의 몸보다도 큼직한 대검이 알현실의 바닥에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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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유리아로부터 오러가 들끓으며, 목소리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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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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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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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판 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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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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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끔뻑이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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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겁한 교관 중 한 명이 유리아에게 달려가 그녀를 말리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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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학생. 아무리 이곳이 본가라도 공적인 자리고, 제국에서 인정한 대공 각하 앞에서 그러한 언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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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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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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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워! 그냥 닥치고 지켜보기나 해! 내가 다른 연놈들한테 시달릴 때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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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놀랍게도 유리아가 휘두른 주먹에 얻어맞고 멀리 튕겨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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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오러의 사용법이 너무나도 정교하다. 이제 막 오러를 익히기 시작한 나로서는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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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방금 튕겨 나간 교관은 신참인지 아니면 다른 전형이 있는 건지 다른 교관에 비해 좀 약해 보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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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래도 교관 아닌가. 조금 다르지만 선생 비슷한 사람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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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을 망설임 없이 줘패고는 내게 삿대질을 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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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겁하는 사이. 쓸데없이 쩌렁쩌렁한 유리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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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판 떠서 내가 이기면 언니는 놔주고 나랑 결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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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들으면 내가 제벨라 누님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줄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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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시치미 떼기는. 제벨라 언니 같은 사람을 너같이 발정 난 짐승이 가만 놔둘 리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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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겠는데 일단 아무 일도 없었거든? 그나저나 유리아야. 내가 이기면 어쩌려고 그런 조건을 내거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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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간단하지.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줄게. 너한테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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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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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진짜 다른 사람이 들으면 내가 무슨 근친에 미친 사람인 줄 알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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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물론이요 교관들, 심지어는 형식적으로 세워둔 자하브의 기사들마저 웅성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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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당연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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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교관에게 손찌검을 하고, 너무도 가볍게 근친 야스를 하니마니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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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설픈 망나니질은 갑질의 연장선상이건만, 유리아의 난장은 진짜 앞뒤 가리지 않고 들이받는 것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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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칼립소에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사라진 줄 알았던 내 안의 유교 드래곤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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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넌 궁디팡팡 확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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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비스듬하게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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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이 오라비랑 한번 놀아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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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던 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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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의 차이는 확연하다. 어디까지 힘 조절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주먹을 말아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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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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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가 나보다 약하고, 내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강해진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격차를 가늠하긴 힘들지만……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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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유리아의 조건 대로라면 이기건 지건, 유리아 본인은 무조건 나랑 순수한(아님) 자하브 만들기 풀코스를 조져야 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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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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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리아의 눈매와 입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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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카렌을 관찰하며 다져진 눈썰미가 잡아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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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웃음기라도 참는 것처럼 어색하게 틀어진 입가를. 기대된다는 듯이 묘한 열망으로 반짝이는 동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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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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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동생이 이렇게 미친년일 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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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흑마법사들을 때려잡은 이후. 필립은 챙겨온 비상 물품들로 부대원을 치료하고, 힐다와 칼튼은 연구실을 뒤적이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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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흑마법사들의 시체를 한데 모아두고 있자니, 카렌이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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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쯤은 살려두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요 도련……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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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그냥 편하게 불러. 나는 도련님 소리도 듣기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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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됩니다. 이미 가주님께서는 자하브 가문의 주인이시고, 제국에 셋 뿐인 대공이시잖아요. 호칭은 똑바로 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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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읍. 난 좀 서먹해진 것 같아서 아쉽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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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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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런 걸로 명령할 것까지야. 카렌 네 말이 맞겠지. 난 이런 쪽은 아무래도 잘 모르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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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 계승식을 마치고 가주가 되었기 때문일까. 묘하게 고분고분하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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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카렌이 대충 뭉쳐놓은 흑마법사 시체를 발끝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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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조금 아쉽네요. 만약 한 놈 정도 살려두셨다면 뭐라도 정보를 캐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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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카렌아. 그런 말랑한 얼굴로 고문 같은 것도 할 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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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의 볼따구를 양옆으로 주욱 잡아 늘리자, 얌전히 내게 불을 내어준 카렌이 무감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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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하는 게 아니라 할아버님이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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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뭐어, 너무 아까워하지 마. 설령 세 놈 모두를 살려서 심문한다 해도 제대로 된 정보는 얻을 수 없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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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할아버님의 실력은 꽤 대단하십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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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아론이 누구 하나 고문하는 일은 잘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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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주님의 명으로 인한 것이라면 케세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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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그건 그것대로 재밌어 보이는 이야기지만, 애초에 흑마법사 상대로는 애초부터 전제가 잘못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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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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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는 거 보니, 카렌 너는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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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나마 머리가 멀쩡한 대장격 흑마법사의 시체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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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마지막에 봤지? 갑자기 말투가 연극체로 변한 거. 이게 보통 대장격 흑마법사들이 그렇게 말투가 오락가락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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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비극의 신의 신력을 받아들인 부작용이라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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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게 그런 이유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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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흑마법사는 여럿 잡았지만, 왜 그런지는 별로 궁금해한 적 없었기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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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머릿속에 넣어둔 뒤. 하던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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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게 비극의 신 때문인지 그냥 미친놈이라 그런 건지 몰라도, 확실한 건 말투와 함께 머리도 오락가락한다는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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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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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정보를 빼내려 해도 헛소리만 하거나, 어찌어찌 정보를 알아내도 거짓이거나 함정인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경우에 따라서는 정보를 실토하는 척 이쪽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던 놈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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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흑마법사와는 말을 섞을 이유가 없다. 말을 섞더라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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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죽이고, 시체나 연구실 같은 곳에서 정보를 알아내는 게 훨씬 나아. 그래서 이렇게 바로 빠져나가는 대신 여기저기 뒤져보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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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겁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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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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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모은 흑마법사들의 시체를 뒤적이며 대충 답해주던 도중. 카렌이 조심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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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흑마법사를 상대해 보신적인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 건가요. 너무 능숙하기도 하시고, 어쩐지 놈들이 가주님을 알아보는 것 같기도 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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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 안 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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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긁적이며 아무것도 없는 시체 하나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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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칼립소에도 흑마법사 지부가 하나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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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 칼립소라면 하나 있을 법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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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좀 뭐랄까. 거슬려서? 자꾸 충돌해서? 응. 아무튼 그래서 쳐부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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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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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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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내가 좀 헷갈리게 말하긴 했지. 알고는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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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결국 내가 어린 시절에 흑마법사 조직에 실험체로 팔려나갔다는 이야기까지 해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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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실 자하브의 사생아가 아닌 짭이라는 사실이 알려질 수도 있고……그게 아니더라도 당시의 기억은 내 가장 깊은 상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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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흑마법사만 보면 발작을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어린 시절의 일을 말하는 건 아무래도 거부감이 든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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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약점을 밝히는 건 칼립소에서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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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른 흑마법사의 시체 하나를 더 수색하는 내내 눈만 깜빡이던 카렌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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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으……그러고 보니 가주님께서는 칼립소에서도 자신만의 조직을 꾸리셨었죠. 가장 낮은 곳의 주인이라는 게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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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조직이라고 할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지만, 같이 사는 친구들이 좀 있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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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고아팸이라고 해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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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 없이 대륙의 거물급 범죄자가 유입되고, 그 이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칼립소에서 고아는 취약계층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존재하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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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생존을 위해 자기들끼리 뭉치는 경우가 많았고, 막 흑마법사 조직에서 빠져나온 시기의 나 또한 자연스레 고아팸에 합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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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팸의 가입 조건은 부모가 없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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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시간이 지나며 다들 머리가 굵어지며 아이라 부르기 힘들어졌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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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범죄 조직에 들어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용병의 일원이 되기도 하고……누군가는 마음이 맞는 몇몇과 함께 새로운 모임을 만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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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같이 영차영차 힘내며 집도 사고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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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집이 생기고 나자, 어렸을 때부터 사이좋았던 놈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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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중재시키려 해도 내가 얼굴을 비추는 순간 입을 싹 다물어 버리니 중재도 힘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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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남자라 내게는 말 못 할 갈등이 있겠거니 넘어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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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너무 크게 다투는 바람에 다 같이 살던 집이 박살 난 이후.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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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여초 직장에 남자 혼자 다니는 게 헬이라는 건지! 누나들 사이에서 자란 막내아들이 여자만 보면 진저리를 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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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각자 따로 살기로 하고, 마침 찾아온 아론과 카렌을 따라 칼립소로 오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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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생략할 건 생략하고, 숨길 건 숨기며 말한 내 이야기를 들은 카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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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그런 걸 조직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적어도 다른 흑마법사들은 그렇게 여겼겠죠. 과연. 이해됐습니다. 새로 생긴 조직을 견제하려다가 가주님께 역으로 당한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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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방해라서 내 쪽에서 보이는 족족 죽인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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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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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꾸욱 다문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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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기도 하지만……솔직히 말하자면 포악한 전투광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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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효과가 있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카렌. 무표정은 여전하지만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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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자축하는 사이. 간신히 진정한 카렌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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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소리 없는 자들의 종말이라는 건 또 무슨 의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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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별거 아냐. 흑마법사 놈들이 쫄리니까 암살자 길드를 동원해서 날 죽이려고 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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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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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래서 암살자 길드도 같이 쳐부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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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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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잇. 여기도 아무것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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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투덜대며 마지막 시체를 내던졌다. 이쪽은 허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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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카렌이 멍하니 굳어있길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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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기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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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따구는 이미 많이 만져봤으니 패스한다. 그 대신 카렌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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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번쩍 들어 올리며 어린아이와 놀아주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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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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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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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이건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무감각한 카렌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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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 하시는 겁니까 가주님. 내려주세요. 제 키가 작을지언정 나이는 그리 어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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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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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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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 발버둥 치는 카렌. 하지만 이미 완전히 몸이 들어 올려진 상태에서 뭘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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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을 저항하다가 결국 축 늘어지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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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표정. 하지만 묘하게 원망이 서린 눈빛에 낄낄 웃던 도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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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을 뒤져보다 무언가 발견한 걸까. 뒤에서 힐다가 살짝 신난 어조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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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보세요 가주님! 해석이 필요할 것 같지만 뭔가 중요해 보이는 서류를 발견……가주님? 그리고 카렌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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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부터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는 힐다.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비비적거리길래 그제야 카렌을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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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발이 땅에 닿았음에도 가만히 멈춰선 채……아니, 정확히는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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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스러움에 바들바들 떠는 그녀를 지나쳐 어벙하게 입술만 뻐끔대는 힐다가 쥐고 있는 종이 뭉치를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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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칼립소가 아니라 다른 지역이라 그런지 내가 모르는 암호체계를 사용하고 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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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 말하면 암호화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라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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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어 힐다. 챙길 것도 챙겼고, 구할 사람도 구했으니 이제 돌아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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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 네. 그으……카렌 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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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회복하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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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이고는 왔던 길을 역으로 거슬러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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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눈치를 보면서 카렌을 피해 따라서 움직이던 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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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에서 카렌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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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 보니, 계승식 준비로 쌓여있는 업무가 많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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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뭣. 아니, 그런 건 제벨라 누님이 대신 하기로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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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 저는 원칙대로 일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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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이 치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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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나 때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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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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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내리쬐는 밝은 창가. 하지만 바깥의 풍경은 볼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일하던 뚱뚱한 중년의 사내가 흠칫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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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주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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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잠깐 좀 쉬고 싶으니 나가 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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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아,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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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떨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나가는 비서. 그 모습을 확인한 중년인의 푸근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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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던전 진입조가 전멸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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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뒤의 어둠에서 펼쳐지는 것은 동지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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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청년. 에녹이 사납게 웃으며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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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발동되는 기억의 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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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던 상단주……아니, 상단주로 위장한 흑마법사가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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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칼립소의 바깥으로 빠져나왔는가. 그나저나 저 복장은……자하브? 허어. 그런가.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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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인 흑마법사가 떨리는 손으로 차를 홀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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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우리의 고향을 부순 이가 보통 인물은 아니겠지. 아무리 업보가 목을 졸라와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니. 이제야 이해되었다. 최근에 자하브의 사생아가 가주가 되었다고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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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실험체 출신이라는 걸 알고 있던 흑마법사들마저 너무도 자하브스러운 에녹의 모습에 착각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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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고아가 아니라 자하브의 사생아를 데려와 실험체로 삼았던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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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과정에서 잠들어 있던 피가 각성한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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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착각이지만 이를 바로잡아 줄 연금술사는 진작에 에녹의 손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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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태양이라 한들 약점 없는 존재는 없는 법. 그 어떤 불길도 영원히 타오를 수는 없고, 그 어떤 빛도 언젠가는 어둠에 수렴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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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트라우마를 애써 억누른 흑마법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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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여. 네 정체를 알았으니, 이것으로 네 심장을 찌를 비수를 만들 수 있게 되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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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전역에 흩어진 흑마법사들이 같은 기억을 공유받고, 은밀한 협력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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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자하브를 죽이기 위한 무기를 주조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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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자하브가 아닌 이에게는 별다른 효과가 없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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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 숨어있던 흑마법사들을 쓰러뜨린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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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성으로 돌아온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급하게 준비한 것치고는 성대한 개선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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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 영주님이 돌아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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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의 흑마법사를 해치우시고 돌아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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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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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님이라면 한번 대드릴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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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친! 자네는 남자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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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주님은 자하브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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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가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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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들려오는 나에 대한 찬양. 중간중간에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에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이게 다 뭔지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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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부여잡으며, 어쩐지 가장 우쭐해하고 있는 힐다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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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카렌에게 물었겠으나……지금은 살짝 토라진 모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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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다 경. 표정 좋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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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 수업 첫날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출세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제가 줄을 잘 서긴 한 모양입니다. 벌써 이렇게 명예로운 자리에 설 줄은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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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칼튼 경. 당신 딸래미 좀 봐. 이거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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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흐흑! 드디어 자하브에……그래! 피가 어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 이제야 정상화가 됐을 뿐! 앞으로 더욱 잘 보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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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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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돌아본 칼튼은 어찌나 감동한 것인지 대성통곡 수준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래서야 내 말이 들릴지도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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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아저씨가 눈물 콧물 질질 짜는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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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숨을 푸욱 내쉬며, 주변의 찬양을 한껏 즐기고 있는 힐다의 귓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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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이제 즐기는 건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좀 설명해 줘 봐. 우리 분명 제대로 된 발표도 뭣도 없이 다짜고짜 계승식 도중에 박차고 나와 던전에 들어간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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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게 신경 쓰였던 거군요. 줄곧 같이 움직였으니, 저라고 주군이 모르는 걸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한가지 짐작 가는 것이 있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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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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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아가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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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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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께서도 제벨라 아가씨와 만나보셨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대충이나마 알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떠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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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나보다 더 가주직에 어울리는 사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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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건 아니죠. 자하브의 주인은 모든 분쟁의 선봉장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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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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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슬쩍 말을 꺼내봤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진짜 장난 없구나 남부의 강자 숭배 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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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사이. 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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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그만큼 주군께서 제벨라 아가씨의 격무에 느끼는 바가 컸다는 뜻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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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뭐, 그런 거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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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아가씨는 무척이나 유능하신 분입니다. 계승식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는 결론을 내리셨을 겁니다. 주군께서 이쯤이면 승리하고 돌아오시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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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가능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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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주군의 힘과 성정을 믿고 계신다면 얼마든 가능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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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환호하는 영지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때로는 귓속말하느라 붙어있는 나를 과시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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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레 주변에 자신을 각인시키던 힐다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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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아가씨께서는 결코 자하브의 가주가 되실 수 없으시지만, 자하브의 안주인으로서는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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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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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제벨라만큼이나 좋은 여자도 없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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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다른 사람들에게나 근친이고 나한테는 족외혼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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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명가라는 멸칭이 괜히 붙은 게 아닌 걸까. 어딜 가도 족내혼단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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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잠시. 개선식에 잔뜩 들떠있던 힐다의 목소리가 돌연 진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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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주군. 절대 제벨라 아가씨를 슬프게 해선 안 됩니다. 이제 정식으로 대공의 지위에 오르셨으니 자하브령에서……아니, 남부 전체에서 주군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겠죠. 그럼에도 제벨라 아가씨를 홀대하지 말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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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생각은 하나도 없었지만, 일단 묻자. 그 정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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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 정도입니다. 장담컨데 제벨라 아가씨가 파업하는 것만으로도 자하브의 재산은 반토막 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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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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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제벨라가 가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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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던전 때문에 이게 다 무슨 고생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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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혀를 차는 것도 잠시. 여전히 열렬한 환호를 가만히 방치하는 것도 좀 아니다 싶어 손을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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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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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민들의 함성이 더욱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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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흑마법사 좀 잡은 걸로 이렇게 칭송받는 건 쪽팔리긴 하지만……솔직히 말해서 약간은 기분 좋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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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힐다가 이래서 출세하고 싶어 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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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은 물론이요, 현생에서도 지금껏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출세의 맛은 꽤나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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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근데 힐다 경. 왜 아까부터 나를 주군이라 부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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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잡은 줄. 이제와서 다른 줄로 갈아탈 수 없다면, 남들에게 자랑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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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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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사라는 이미지를 알차게 써먹겠다는 뜻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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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나를 다시 보니마니 했던 날 이후로 힐다가 너무 솔직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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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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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한창 흑마법사들을 때려잡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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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리아는 코넬리아대로 제벨라와 함께 협상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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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깨달았다. 눈앞의 상대는 에녹과는 다른 의미로 괴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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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이란 결국 서로 취할 것은 취하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며 완성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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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벨라는 아무리 도중에 변경된 것이라지만, 코넬리아가 준비해 온 모든 조건을 부드럽게 흘려내고 자신의 조건을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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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이 서로에게 훨씬 이득이라는 사실을 코넬리아는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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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에 예상했던 이권은 하나도 챙기지 못했지만……이 정도면 오히려 당장은 더 도움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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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자세로 찻잔을 들어 한잔 들이켜는 제벨라를 흘깃 바라보는 코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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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어주는 제벨라의 모습에 코넬리아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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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순수한 얼굴을 하고,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이 자신의 계획을 쳐부쉈는지 잘 알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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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적으로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 하나 내어주지 않았으나, 코넬리아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정보와 자금을 순순히 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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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에 빠졌다고는 하나, 연속된 사업 실패와 몬스터 토벌 실패로 입지가 줄어든 코넬리아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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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가로 제벨라가 받아 간 것은 아카데미의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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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실습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아카데미 학생들을 남부의 던전으로 보낸다는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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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는 제국의 가장 재능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곳에서 실습을 보낼 정도의 이들이라면 모험가들보다 훨씬 고급 인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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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들이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알아서 몬스터를 정리해 준다는데 얼마나 좋은 일인가. 딸깍은 언제나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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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자하브는 아직 혼란스러운 집안을 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코넬리아는 자신의 적이 누군지 알고 대항할 힘을 얻은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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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든 맹수, 다른 한 사람은 양의 탈을 쓴 늑대. 확실히 대공가는 달라도 다르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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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벨라를 향한 기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감탄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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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혈통이 이 정도로 괴물들이라면, 계승권은 좀 떨어져도 아무튼 황실의 적통인 자신은 더 대단한 사람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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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혈통주의자다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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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차례 무너졌던 멘탈을 빠르게 수복한 코넬리아가 눈치를 보며 마시던 찻잔을 자신만만하게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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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아직 유리아는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었던가요. 그럼 이번 실습 때 오랜만에 얼굴을 보실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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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황녀님께서 유리아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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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녜헤? 아, 으흠. 네. 물론이죠. 유리아가 유급하는 바람에 제가 먼저 졸업하긴 했지만 아카데미 동기였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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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셨군요. 아, 차 한잔 더 어떠신가요? 최근에 좋은 찻잎을 하나 구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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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주시면 감사히 마실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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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대신 유리아가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좀 알려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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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 정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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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 다과도 차에 어울리는 것이 있으니 새로 내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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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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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자하브. 아카데미에 가 있는 동생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돌연 태도가 돌변한 제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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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동생 친구라도 대하는 것 같은 스스럼 없는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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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어요! 믿을 수 없어요! 그 음험한 여자가 어떻게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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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콧노래까지 부르는 제벨라의 뒷모습에 간신히 멘탈을 진정시켰던 코넬리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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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죠? 진짜 뭐죠?! 설마 차에 독이라도 타려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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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차에 독을 타는 것은 제벨라의 전문이었으나, 이번에는 예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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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자하브. 스스로의 손으로 아버지는 물론이요, 에녹이 오기 전의 모든 형제자매를……심지어 사생아들까지 꼼꼼하게 몰살시킨 희대의 악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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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아끼는 존재가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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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바로 대숙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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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에서 제벨라를 위해 울어주고 분노해 주던 단 한 명뿐인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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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자하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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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물론 이제는 에녹이 추가되어 단 둘뿐인 동생이라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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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코넬리아의 떨림이 심해지건 말건 제벨라의 입가에는 한층 더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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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에녹이 승리와 함께 돌아오며 계승식을 끝마쳤고, 이제 곧 유리아 또한 자하브 성을 찾아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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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가족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뜬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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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로 너무 많이 따라 찻잔에서 차가 흘러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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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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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은 제벨라가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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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네요. 이건 저희끼리의 비밀로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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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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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리아는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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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식을 가로질러 도착한 자하브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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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러하듯, 제벨라가 자애로운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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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렴 에녹. 금방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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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누님이랑 약속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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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런 과거를 겪고도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걸까. 분명 천성이 선하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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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급하게 인사를 하고 떠난 코넬리아 황녀의 뒷모습에 키득이던 제벨라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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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기대하렴 에녹. 이제 곧 유리아가. 아카데미에 다니던 네 동생이 돌아올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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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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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번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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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는 아무래도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가주직을 너무도 간단히 넘겨주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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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동생인 유리아는 다를지도 모르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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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유리아가 가주직을 원한다면……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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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떠있는 제벨라를 향해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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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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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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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는 항상 여동생을 가지고 싶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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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이 부분은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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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는 외동이었고, 현생에는 기간제 형이랑 새 누나밖에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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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가 약속했던대로 가주가 되긴 했지만, 하는 일은 정말로 얼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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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힐다의 수업이 시작되기 전. 아침에 눈을 뜬 이후로 한 발짝도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뒹굴거리며 카렌에게 귀찮게 구는 도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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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곧 자하브로 돌아올 거라는 새 여동생. 유리아에 대해 생각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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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사실 나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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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여동생이 하나 생겼다고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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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하브에 들어오며, 제벨라라는 새 누나가 생긴 것처럼 유리아라는 여동생도 함께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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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유리아는 어떤 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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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아가씨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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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처음 만나는 거니까 조금 궁금해서 말이야. 역시 제벨라 누님 같은 분위기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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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아무래도 유리아 아가씨는 제벨라 아가씨와 많이 다르시죠. 정확히는 제벨라 아가씨가 다른 자하브의 여식분들과 비교해도 좀 특이한 분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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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벨라 누님에게 그 부분에 관해서는 얼추 들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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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의 혈계능력은 오직 남자에게서만 발현된다. 하지만 여자라고 하여, 완전한 일반인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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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자하브의 흔적 정도는 남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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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는 시간이 흐르며 피가 연해지자, 격세유전으로 자하브의 흔적마저 지워버리며 다른 가문의 피가 발현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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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자하브 안에서도 무척이나 특이한 경우였고, 그렇기에 전대 가주인 카인에게 학대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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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유리아가 제벨라와 크게 닮지 않았다는 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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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금발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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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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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피부도 갈색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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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건 아닙니다. 피부색은 제벨라 아가씨를 닮으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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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누님이랑? 혹시 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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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두분 모두 1부인과 전대 가주님의 사이에서 나온 분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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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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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카렌이 창문을 열어 간단하게 환기를 하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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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아가씨는 무재를 타고나셨습니다. 혈계능력은 발현시키지 못하셨기에 신체 능력은 다소 떨어지셨지만……그래도 자하브의 무재를 고스란히 물려받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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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능력은 없어도 재능은 유전되기도 하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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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혈계능력 또한 물려받았지만, 발현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제벨라 아가씨와 가주님의 혼인이 약속되어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다른 가문의 혈계능력을 각성하셨지만, 몇번이고 시행된 검사를 통해 자하브의 직계임은 확실하셨으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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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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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제벨라와의 결혼 건도 있었네. 이것도 진짜 결혼식을 치르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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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이번 생의 아버지마냥 자식만 싸지르고 사라지는 건 좀 그렇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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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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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알겠네. 무재가 있으니, 그걸 키워주기 위해 아카데미에 보낸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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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일단 명목상으로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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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목상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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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제 추측이지만, 조금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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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네. 이리 와서 좀 자세히 말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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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의 이불을 들어, 옆구리 쪽을 툭툭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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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침대를 가만히 번갈아 바라보던 카렌이었으나, 결국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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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구리 옆에 카렌의 작은 엉덩이가 쏙 들어오는 모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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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우라는 뜻이었는데……이건 이것대로 괜찮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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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망나니 연기도 계속하다 보면 는다는 걸까. 이젠 이것도 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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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과하지 않은 선에서 카렌을 희롱할 수 있는 위치. 꼬리뼈와 허리의 중간쯤 되는 부분을 콕콕 찌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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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카렌 네가 생각한 다른 이유는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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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전대 가주님께서는 후계자 경쟁이 심화될 걸 예상하셨겠죠. 그래서 능력은 있지만 막내라 너무 어린 유리아 아가씨를 아카데미로 일종의 피신을 보낸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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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피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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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지는 알겠고,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만……설령 그렇다 해도 카인이 유리아를 피신 보냈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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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지만, 카인은 제벨라의 혈통을 의심하고 가문의 악재로 여기며 상당한 학대를 감행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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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이 자하브의 흔적이 보인다고는 하나, 제벨라의 친동생인 유리아를 아껴서 멀리 도망 보냈다는 건 조금 신빙성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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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은 카렌과는 조금 다르다. 아마……제벨라가 내보낸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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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제벨라가 일하는 모습을 몇번 지켜봐서 잘 안다. 그녀가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유능한 사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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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반쯤 감금된 상태고, 한계치까지 몰려있다해도 불온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한사람 내보내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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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의 언행에서 추측컨데 유리아는 여자임에도 자하브 가문 안에서 그럭저럭 인정받았던 것 같으니 더욱 쉬웠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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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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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어땠는지는 제벨라나 유리아에게 물어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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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대충 어떤 사람인지는 알겠네. 그럼 성격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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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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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고민하던 카렌이 무표정한 얼굴 위로 흐릿한 미소를 띄워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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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사람을 잘 챙겨주시는 분이었죠. 연민을 알고, 책임을 아는 분이기도 하셨고요. 다만, 약간 다혈질적인 면모가 있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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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는 자하브 가문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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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 말은 아닙니다만, 대충 그런 느낌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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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를 모시는 케세프 가문의 일원으로서 자하브의 핏줄에 안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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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게 속삭이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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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는 기본적으로는 괜찮은 녀석이지만, 성격은 급하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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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제벨라 상대로는 실패했던 가주직 떠넘기기가 먹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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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건 내 망나니짓을 고깝게 볼 것이며, 성격이 급하다는 건 살짝 긁었을 때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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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별다른 욕심 없이 나를 가주직에 앉힌 제벨라와 달리 변수가 되어줄 것은 확실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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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전생 현생을 다 합쳐 처음으로 생기는 여동생이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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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 애호하고 싶은 마음과, 마구 괴롭혀 들고 일어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머릿속에서 첨예하게 대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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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내가 정말로 귀족의 피가 섞였는지, 어째서 던전에 들어가면 컨디션이 좋아지는지로 생각할 게 많았던 상황이라 슬슬 머리가 아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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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몸을 둥글게 말아, 눈앞에 보이는 카렌의 허벅지에 머리를 묻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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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앗! 갑자기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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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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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긴 그럴 때가 되긴 했죠. 가주님도 자하브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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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인 카렌이 나쁜 계획이라도 꾸미는 사람처럼 작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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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늘 수업은 땡땡이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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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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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확 마음이 동했지만, 한참의 망설임 끝에 결국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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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됐어. 힐다 기다리겠다. 빨리 가자. 당장 급했던 계승식도 끝나고, 쉬운 내용이라면 혼자 책도 읽을 수 있게 됐으니, 오러 수련의 비중을 높인다고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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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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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그대로면서 입만 벌리며 놀란 티를 낸 카렌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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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셨습니다. 이걸로 저를 사람들 보는 앞에서 번쩍 들어 올렸을 때의 앙금은 씻어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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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참 고맙네. 근데 카렌아. 원래 이런 거 신경 쓰는 사람이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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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케세프 가문 출신이고, 가주님의 전속 시종이긴 합니다만 어엿한 한창때의 레이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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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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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편안함이라는 말은 분명 이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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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으면 굉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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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벗어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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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큿! 가주님의 충실한 집사에게 수치를 주실 생각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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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지도 못할 거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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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티 나는 거짓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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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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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지만, 슬슬 사람들이 보내오는 존경의 눈빛에 익숙해질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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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 내가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는 감도 못 잡고있는 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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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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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뵙겠습니다 자하브 대공 각하. 아카데미의 교관 역을 맡고 있는 델빈이라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실습을 허락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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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야 뭘. 듣자하니 아카데미 재학생 중에 내 동생도 있다면서? 이 정도는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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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아카데미에서 교관들과 함께 학생들을 보내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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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일은 제벨라 선에서 해결되었지만, 아카데미는 제국의 미래. 그런 곳에서 수십의 학생을 믿고 실습 보냈는데 얼굴조차 안 비칠 수는 없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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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비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좀 삐뚜름하게 앉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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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떨어진 곳에서 힐다가 이쯤 되면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의 시선을 보내왔지만, 애써 무시하며 눈앞의 학생들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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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대부분 10대 중후반. 하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꽤나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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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쪽은 정확히 알아보기 어렵지만……기사 지망생들은 대부분 평기사 수준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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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검에 인생 몰빵한 힐다에 비할 바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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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자하브를 보필하기 위해 온갖 지원을 받으며 비밀병기 비스무리한 것으로 육성 받은 카렌과 비슷한 수준은 몇몇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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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경험이 부족하고, 단장 노릇을 할 특출난 존재가 부재할 뿐이지 어지간한 정예 기사단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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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아무리 싸우는 방법을 가르치는 아카데미라지만, 학생을 던전에 밀어넣는다는 것에 약간 거부감이 있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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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곳이라면 던전에 들여보내도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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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조금 더 자세히 늘어선 학생들을 살펴보았다. 기세를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살펴볼 요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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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전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한 명. 단 한 명만큼은 초면이면서 묘한 친숙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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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빛나는 것처럼 밝은 금발. 피부는 창백하다시피 하얗지만 그것이 유약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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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다리를 짚고 선 다리, 반항적인 것을 넘어 위압적인 눈빛, 그리고 전신으로 뿜어내는 사나운 기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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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인간의 법도를 모르는 짐승을 아름다운 여인의 형태에 가둬둔 것 같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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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벨라를 닮은 연보랏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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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바로 유리아, 제벨라의 동생이자 내 새 여동생(아님)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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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인데 무어라 말부터 꺼내는 게 좋으려나. 그런 내 고민을 덜어주겠다는 듯이 유리아 쪽에서 먼저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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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그럭.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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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여리한 자신의 몸보다도 큼직한 대검이 알현실의 바닥에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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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유리아로부터 오러가 들끓으며, 목소리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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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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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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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판 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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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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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끔뻑이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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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겁한 교관 중 한 명이 유리아에게 달려가 그녀를 말리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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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학생. 아무리 이곳이 본가라도 공적인 자리고, 제국에서 인정한 대공 각하 앞에서 그러한 언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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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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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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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워! 그냥 닥치고 지켜보기나 해! 내가 다른 연놈들한테 시달릴 때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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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놀랍게도 유리아가 휘두른 주먹에 얻어맞고 멀리 튕겨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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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오러의 사용법이 너무나도 정교하다. 이제 막 오러를 익히기 시작한 나로서는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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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방금 튕겨 나간 교관은 신참인지 아니면 다른 전형이 있는 건지 다른 교관에 비해 좀 약해 보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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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래도 교관 아닌가. 조금 다르지만 선생 비슷한 사람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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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을 망설임 없이 줘패고는 내게 삿대질을 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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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겁하는 사이. 쓸데없이 쩌렁쩌렁한 유리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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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판 떠서 내가 이기면 언니는 놔주고 나랑 결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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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들으면 내가 제벨라 누님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줄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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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시치미 떼기는. 제벨라 언니 같은 사람을 너같이 발정 난 짐승이 가만 놔둘 리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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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겠는데 일단 아무 일도 없었거든? 그나저나 유리아야. 내가 이기면 어쩌려고 그런 조건을 내거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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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간단하지.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줄게. 너한테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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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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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진짜 다른 사람이 들으면 내가 무슨 근친에 미친 사람인 줄 알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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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물론이요 교관들, 심지어는 형식적으로 세워둔 자하브의 기사들마저 웅성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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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당연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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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교관에게 손찌검을 하고, 너무도 가볍게 근친 야스를 하니마니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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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설픈 망나니질은 갑질의 연장선상이건만, 유리아의 난장은 진짜 앞뒤 가리지 않고 들이받는 것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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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칼립소에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사라진 줄 알았던 내 안의 유교 드래곤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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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넌 궁디팡팡 확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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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비스듬하게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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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이 오라비랑 한번 놀아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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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던 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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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의 차이는 확연하다. 어디까지 힘 조절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주먹을 말아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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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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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가 나보다 약하고, 내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강해진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격차를 가늠하긴 힘들지만……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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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유리아의 조건 대로라면 이기건 지건, 유리아 본인은 무조건 나랑 순수한(아님) 자하브 만들기 풀코스를 조져야 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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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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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리아의 눈매와 입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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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카렌을 관찰하며 다져진 눈썰미가 잡아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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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웃음기라도 참는 것처럼 어색하게 틀어진 입가를. 기대된다는 듯이 묘한 열망으로 반짝이는 동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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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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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동생이 이렇게 미친년일 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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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새 여동생의 성벽이 뒤틀려 있다는 의심이 들었을 때의 올바른 대처법을 고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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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패배 야스가 좋은 거니? 아니면 근친 야스가 좋은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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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아하? 패배 근친 야스가 좋은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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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을 골라도 정답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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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분명 카렌은 유리아가 약간 성격이 급할 뿐, 기본적으로는 좋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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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기라도 참는 것처럼 어색하게 틀어진 입가, 기대와 열망으로 반짝이는 동공, 그리고 아까부터 단 한 순간도 내게서 떨어뜨리지 않는 시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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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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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나를 속인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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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카렌을 노려보았지만, 내 시선을 무어라 해석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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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스레 나선 카렌이 지금 이순간에도 유리아를 말리고 싶지만, 내 눈치를 보며 차마 나서지 못하는 아카데미 학생들과 교관들을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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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조금 떨어져 주십시오. 가주님과 유리아 아가씨와의 대련의 여파가 미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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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으……안 말려도 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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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빈이라고 했던가. 아카데미에서 온 교관 중 대표 격으로 보이는 이가 조심스런 어조로 되물었으나, 카렌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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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자하브이고, 가주님께선 뜻을 정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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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들으면 거창한 결정인 줄 알겠잖아. 그냥 적당히 궁디팡팡이나 하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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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혹시 책임소재가 걱정이라면 안심하시길. 가주님께서 나선 이상 이는 가주님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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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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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오히려 행운이군요. 다른 누구도 아닌 4대 대공가의 일원인 가주님께서 직접 대련을 보여주시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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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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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뒤로 물리는 교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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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카렌 또한 자하브의 가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하브는 근친 명가라는 멸칭이 붙을 정도로 미친 집안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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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입장에서는 내가 제벨라와 결혼하건, 유리아와 결혼하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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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든 다음 세대의 자하브는 피가 다시 짙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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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 상식 개변 세상인가 뭔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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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어질어질 했으나, 판은 깔려있고 해야 할 일 또한 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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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유리아를 쓰러뜨린다. 그리고 바로 학부모 면담……아, 둘다 없어서 굳이 말하자면 내가 보호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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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1대1 면담 시간을 좀 가져야겠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공개 구혼 대련을 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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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현실의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단차 위에 올려진 의자에서 일어나, 짧은 계단을 내려가 바닥 위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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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차이는 있어도 딛고 있는 바닥은 같아진 나와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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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를 닮은 연보랏빛 눈동자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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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라비가 삼초식을 양보하마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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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초식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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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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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폼 잡고 싶어서 전생의 무협지에서 봤던 대사를 따라 해 보았으나, 이곳은 판타지 대륙이라 그런지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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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까지 공격을 받아주기만 하겠다고. 그러니까 전력으로 와봐. 하늘 같은 오라비와의 격차라는 걸 알게 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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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하늘은 무슨. 애초에 밖에서 굴러들어 온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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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들으면 아무리 가주라도 사생아 출신을 무시하는 콧대 높은 귀족으로 여기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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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았다. 어째서인지 군침을 츄릅 삼키는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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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정신 나갈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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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숨을 푹푹 내쉬건 말건 땅에 박아 넣은 대검을 뽑아 올리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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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를 한껏 낮추고, 자신의 몸뚱이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을 어깨에 비스듬히 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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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변화하는 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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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조금 전까지만해도 은연중에 흘러나오던 건들거림이나, 열망 비스무리한 것이 사라지고 순수한 투지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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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포한 짐승을 작은 인간의 형태로 구겨 넣은 듯한 사나움. 노골적으로 급소를 훑어보는 시선에는 은은한 위압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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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하브의 혈계능력을 발현시키지 못했음에도 이 정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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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자하브라는 혈통이 대공가에 어울리는 사기 혈통이긴 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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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자하브의 혈통으로 착각 받는 내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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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키면 안 되는 입장이니 고맙긴 한데, 왜 아무도 의심 안 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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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다른 생각을 한 순간. 이를 귀신같이 눈치챈 유리아가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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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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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직한 대검을 들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몸놀림. 두어 번의 발놀림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유리아의 몸이 빙글 회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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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 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기 위해 팔 뿐만 아니라 전신을 사용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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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지만 일렁이는 오러를 머금은 대검이 내 상체를 짓이길 듯이 쏘아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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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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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를 살짝 끌어 올리며 한쪽 손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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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로를 연상시키는 기이한 문양이 심장에서부터 팔까지 뻗어나가더니,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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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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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들던 대검이 내 손에 잡혀 그대로 정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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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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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벙한 소리를 내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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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대검 위에서 일렁이던 오러는 내 손에 잡히며 사그라들었고, 걸리는 건 뭐든 찢어발길 듯한 기세로 휘둘러진 대검은 미동조차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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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빼내기 위해 끙끙대는 유리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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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재능은 있네. 하지만 순수한 힘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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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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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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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을 놔주자, 힘을 주던 반동 탓에 스스로 뒤로 튕겨진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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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묘한 스텝을 밟더니, 이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처음보다 더욱 강렬하게 대검을 휘둘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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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겐 이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일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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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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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과 똑같은 자세로 재차 대검을 잡힌 유리아. 당황하는 대신 몸을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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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꼬리는 히죽이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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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애써 무시하며 유리아의 검을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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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알겠네. 어차피 신체 능력이 아니라 오러를 이용해 더 큰 힘을 내는 것이니, 차라리 하나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별다른 방어구 없이 대검 하나만 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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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두 번 만에 알아차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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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특이한 방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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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것도 한번 막아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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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거리를 벌린 유리아가 이번에는 대놓고 동작이 큰 자세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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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이 아닌, 대검에 무게 중심을 두는 기이한 자세. 비틀거리듯이 달려든 유리아가 한보 반 거리 앞에서 땅을 박차고 공중에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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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과 대검의 표면에만 머물던 오러가 돌연, 유리아의 몸을 휘감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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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서 흩날리는 밝은 금발. 지금 이순간. 유리아의 대검은 무기가 아닌 하나의 송곳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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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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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수리를 정확히 노리고 떨어져내리는 투박한 대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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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하는 오러에 감싸인 탓인지 이전과는 비교조차 안 될 광채를 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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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도, 회피도, 심지어는 탈진마저도 고려하지 않은 묵직한 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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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아무리 나라도 약간 진심을 내야 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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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오른쪽 주먹을 한계치까지 뒤로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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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투창이라도 하는 듯한, 혹은 화살이라도 쏘아낼 법한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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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라면 취하지 않았을 자세다. 실전에서는 너무도 비효율적이니까. 차라리 지금의 유리아처럼 전신을 비틀어 모든 힘을 주먹에 집중시키는 편이 훨씬 나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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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굳이 이런 자세를 취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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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효율적인 자세를 찾고, 육신을 단련하고, 그렇게 조금 더 강하게 힘을 주는 것이 전부였던 이전과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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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나마 오러를……체내의 마나를 의도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 지금은 약간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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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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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와의 실전을 통해 익숙해진 오러의 감각이 심장을 떠나 팔 전체를 뒤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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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물든 문양에서 느껴지던 열감이 단숨에 그 기세를 부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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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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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양 위로 피어오르는 불길. 정확히는 집중된 오러가 문양을 타고 흐르다가 밖으로 삐져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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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는 엄밀히 말해서 기사들이 사용하는 유형화된 오러로 육신을 코팅하는 기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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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과할 정도의 오러를 집중시켜, 넘쳐 흘렀을 뿐인 현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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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항상 이렇게 싸워왔다.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마력을, 개조당해 얻은 것이라 제대로 세밀한 조정이 불가능한 근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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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있는 힘껏 때려 박아 눈앞의 상대를 분쇄하는 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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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하고, 단순할지 몰라도 내겐 가장 익숙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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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의 제대로 된 사용법 같은 건 나중에 배우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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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움켜쥔 주먹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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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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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흐르는 오러가 격발 되며 폭발에 가까운 굉음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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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불길을 휘감은 주먹이 그대로 유리아의 대검 옆면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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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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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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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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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이 올라 너무 힘을 줬던 탓일까. 부서진 대검과 함께 무방비한 자세로 옆으로 날아가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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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라면 벽을 부수고 처박힐 것이다. 그리고 모든 오러를 대검에 집중한 유리아는 이만한 충격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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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면 중상이라는 생각에 혀를 차며, 잽싸게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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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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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얕은 거미줄 모양 금을 내며 쏘아지는 몸뚱이. 공중에서 허우적대는 유리아를 안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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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등쪽으로 벽에 충돌하며 충격을 대신 흡수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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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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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짝을 내달리는 찌릿한 감각. 좀 아프긴 한데 이 정도면 참을만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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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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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품에 안겨 눈을 휘둥그레 뜨는 유리아를 향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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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이 오라비가 준비한 사랑의 매는 따로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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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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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에 집중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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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를 빙글 뒤집어, 내 무릎 위에 엎드린 자세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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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 팡! 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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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팟! 진짜 아파! 설마 이런 취향이야?! 언니는 몸이 약해서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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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누님을 내가 왜 때려……? 너처럼 맞을 짓한 녀석이나 맞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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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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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히는 유리아. 그런 그녀의 엉덩이를 다시 한번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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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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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탄력 있는 감각과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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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메챠쿠챠 설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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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자하브의 기사들은 물론, 아카데미 사람들도 있다는 걸 깜빡 잊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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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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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고통에 유리아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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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공개 수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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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엄한 것만 배워온 유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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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에녹을 본 유리아의 첫인상은 납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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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제벨라 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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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거의 매주마다 날아오던 제벨라의 편지가 요즘 들어 에녹에 대한 칭찬으로 도배된 이유를 이해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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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는 자하브의 혈계능력을 발현시키지 못했으나, 단 한 가지 물려받은 것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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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이 바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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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적으로 오러의 사용법을 깨우치고, 직감적으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이가 누구인지 알고, 직감적으로 승리로 이어지는 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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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의 조언에 따라 단순한 무재 정도로 포장해서 드러내긴 했으나, 그녀의 직감은 혈계능력을 발현시킨 자하브의 혈족들보다도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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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쯤 되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배우자를 통해 대를 거듭하며 자연스레 품종개량 비스무리한 것이 이루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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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능력을 제외하고도 여러 재능을 타고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가능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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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직감에 근거하여 본 에녹은 배부른 맹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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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는 반쯤 눕다시피 걸터앉았고, 막 침대에서 일어난 것처럼 눈에는 나른함이 가득하며, 실제로 하품까지 해대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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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져 보이는 몸은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눈매는 나른할지언정 동공을 쉴 새 없이 주변을 탐색하고 있으며, 하품은……그냥 하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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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나온 것이라는 사실까지는 몰랐으나 유리아에게는 그것이 일종의 자신감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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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한번 와볼 테면 와보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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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제로 겉모습만 보고 어설프게 덤벼들었다가는 저 송곳니에 목덜미를 물어뜯기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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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입장에서는 칼립소에서 살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 버릇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유리아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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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직감이 에녹을 보는 순간 계속해서 경종을 울렸다. 저건 위험한 존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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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경고. 당장 도망치거나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신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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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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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위험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리고 머리를 들이밀지만 않으면 먼저 공격해 오는 사람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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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로부터 이미 에녹이 자하브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성정의 사람인지 전해 들은 유리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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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언니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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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 가기 전. 아직 자하브 성에 살던 시절의 유리아는 보았다. 자하브의 혈족이 얼마나 잔학해질 수 있는지, 그들이 반쯤 가둬둔 제벨라에 무슨 짓을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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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벨라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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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에 의존한 판단이기에 제벨라가 자신의 형제들을 전부 죽였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유리아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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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약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제벨라가 강인한 사람이라는 정도는 안다. 그리고 잠겨있는 문 너머로 펑펑 울었던 날 이후로 자신을 아끼고 있다는 것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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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제벨라가 한 말이니 분명 허튼소리는 아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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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직감으로도, 제벨라의 안목으로도 에녹이 다른 자하브의 혈족과 달리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든 유리아의 가슴에 기대가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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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사이지만, 제벨라 이외에도 제대로된 가족이 생길 거라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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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단상 밑을 훑어보던 에녹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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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그것처럼 샛노란 동공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그녀의 직감이 시끄럽게 울어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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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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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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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 유리아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으나, 날 때부터 예리한 감각을 타고난 그녀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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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직감과 본능에 몸을 맡기고 되는대로 행동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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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첫눈에 반한다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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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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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으나, 그녀의 직감은 기본적으로 생존본능을 기반으로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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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생존을 위해서는 에녹의 옆자리가 가장 효율적이며, 이를 위해서는 그의 암컷이 될 필요가 있다고 여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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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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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아카데미의 기숙사는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가 나뉘어져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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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사고를 치는 바람에 1년을 유급하기까지 한 유리아는 꽤나 오랜 시간을 여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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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성끼리만 모여있으면, 그것도 한창때의 나이라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야한 이야기에 관심이 쏠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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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아카데미는 평민과 상위 귀족들에겐 배움의 장이지만, 하위 귀족들에게는 일생일대를 건 상향혼의 무대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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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들에게 여러 자극적인 경험담을 듣거나, 비밀스러운 책을 돌려보던 유리아는……안타깝게도 약간 성벽이 뒤틀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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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가문의 잘못된 조기교육, 직감에 과하게 의존하는 습관, 극찬 범벅인 제벨라의 편지를 읽고 쌓인 호감,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접한 금단의 지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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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 결과. 그녀는 패배 근친 야스 조아 조아를 외치는 광인이 되어버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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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대련에서 패배하여 엉덩이를 맞는 도중에도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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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공개 수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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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육이 이렇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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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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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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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의 엉덩이를 정확히 10대 때리고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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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손바닥에 눌어붙은 것 같은 말랑 쫀득한 감각을 애써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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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야. 이제 정신 좀 차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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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나, 나는 언제나 제정신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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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떤 사람이 제정신으로 자기 오라비랑 결혼하겠다는 말을 하니. 어린애도 아니라 다 큰 녀석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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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언니랑은 할 거면서 뭘 그리 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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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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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명가라 불리는 자하브에서 나고 자란 녀석이다. 나를 제외한 그 어떤 가신도, 심지어 제벨라마저 나와의 혼인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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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또한 필요에 따른 근친을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이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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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자하브 가문이 비상 상황인 것도 맞는 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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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패배 근친 야스 조아 조아 발언을 제쳐두고서라도 할 말은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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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유교 드래곤의 속삭임에 따라, 짐짓 엄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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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교관을 함부로 치는 건 잘못된 행동이야. 다른 어디도 아닌 자하브 본성에서 그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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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모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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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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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언니랑 나를 제외한 다른 자하브의 남자들이 전부 죽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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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 다툼이 격해져 서로 죽고 죽였다고 들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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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어떻게 죽었는지가 아니라 죽음 이후의 일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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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내 무릎에 엎드려 있던 유리아가 꿈틀거리며 몸을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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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 무릎에 누워 이쪽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말을 잇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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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의 힘은 결국 홀로 던전을 관리할 수 있는 압도적인 힘에서 나와. 그리고 이 힘은 혈계능력을 통해 유전되는 거구. 하지만 자하브의 모든 남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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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하브가 곧 망할, 아니 이미 망한 가문이라는 소문이 돌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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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아무리 덩치가 커도 죽은 짐승을 두려워하는 이는 없잖아? 많은 사람들이 자하브에 남은 것들을 뜯어먹기 위해 접근했어. 재력, 땅, 이권, 작위……그리고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능력까지 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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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과장이 좀 심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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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알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최고급 모판이 싸게 풀린 셈이지. 모두가 탐내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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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너무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 같으니 금지. 차라리 과장해서 말하고 다니도록. 이거 가주 명령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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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입으로 모판 같은 소리를 하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자, 표정이 묘해지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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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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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아무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나를 노리더라고. 약간의 협박을 곁들여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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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문제가 터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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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홧김에 팔다리를 두어 개씩 잘라버렸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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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쪽에 문제가 생긴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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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뒷배를 잃은 유리아를 노리던 녀석들은 너굴맨……아니, 유리아에게 역으로 당했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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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니까 팔다리 정도야 금방 붙일 수 있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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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 가문이 나섰겠지. 협박이 섞이긴 했지만, 말로 했는데 검이 날아왔으니 명분도 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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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알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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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하지만 뻔한 일이니까. 아무튼 이해했어. 그때의 일이 문제가 되어서 유급한 거구만. 그리고 교관들은……매수당해서 협박에 시달리는 너를 모른 체 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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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것도 제벨라 언니랑 코넬리아. 그리고 다른 친구 몇이 도와줘서 유급 선에서 끝난 거지 처음에는 퇴학당하는 줄 알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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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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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음. 그래. 완벽히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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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방금 전의 교관 말고 또 매수된 교관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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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긴 한데……실습에 따라온 교관은 저거 하나뿐이야. 왜? 막막 여동생이 괴롭힘당했다니까 화가 나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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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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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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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가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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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벽에서 떨어진 조각 하나를 주워 손가락으로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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쐐애액……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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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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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유리아를 말리려다가 얻어맞은 교관의 팔에 돌조각이 틀어박힌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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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빈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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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예 대공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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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하니, 부상이 심해 보이는군. 아쉽게도 자하브에 상주하는 사제들은 지난 던전 역류의 부상자를 치료하느라 바쁘고, 포션도 다 떨어져서 말이야. 아카데미로 돌려보내는 게 좋아 보이는데……어떻게 생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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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각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당장 아카데미로 올려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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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치를 보던 델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바닥을 나뒹굴던 녀석이 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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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대공 각하! 억울합니다! 무슨 오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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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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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녀석의 말을 끊고 집사장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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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많이 아파서 제 발로 못 간다고 하네. 대신 배웅 좀 나가줘. ……정중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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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에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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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이지 창백해진 표정의 교관을 끌고 나가는 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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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자니, 무릎 위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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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방금 뭐 때문에 엉덩이를 맞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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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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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고민 끝에 유리아의 이마에 딱밤을 놔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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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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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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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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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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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건방지게 야라고 부르지 말고 제대로 오빠라 부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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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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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어진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싸고 있던 유리아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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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 오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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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부르라는 대로 안 부르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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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오라방. 나 엉덩이가 너무 아픈데 좀 쓰다듬어 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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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된다 이 미친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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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를 무릎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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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일생일대의 투자에 성공한 사람처럼 헤실대는 것이 묘하게 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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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소란이 있긴 했지만, 어찌어찌 무난하게 일정을 끝마치고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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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글공부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간단한 책이라면 혼자서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오러 수련의 비중을 늘리기로 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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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조금 늦었으니, 힐다가 기다릴까 발걸음을 서둘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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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방.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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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깜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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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옆구리 쪽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유리아의 말에 흠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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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피는 이어지지 않았건만, 이상할 정도로 나와 닮은 금발이 사르르 흘러내리며 햇빛에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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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뭐야. 내 머리카락이 신경 쓰여? 그으. 살짝이라면 잡아당겨도 괜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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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선을 눈치챈 걸까. 유리아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으더니, 이쪽으로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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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니 유리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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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안. 손잡이로 쓸 때는 이렇게 하는 거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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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갸웃거리면 하나로 묶었던 머리를 쪼개, 두 갈래로 만들어 양옆에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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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손으로 쥐어 고정시켰을 뿐이지만, 흔히들 말하는 트윈테일 스타일. ……그리고 조금 천박하게 말하자면 핸들을 만들어 내 앞에서 살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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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오라방은 이런 거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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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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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나갈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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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자하브의 혈계능력은 발현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유리아는 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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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그런 식으로 따지면 제벨라도 골 때리는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나한테 잘해주고, 일 잘하는 누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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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가 문제라고 하기에는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은 제정신으로 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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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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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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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런 사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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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이 워낙 자하브의 문제아들에게 익숙해져서 이 정도 언행은 귀여운 수준으로 보인 것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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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며 나름 유리아를 이해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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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해한 무언가를 접할 때 느껴지던 거부감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약간의 위기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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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에서 요구하는 망나니 인재상에는 못 미칠지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망나니 연기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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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리고 계승식까지 끝난 마당이지만 혹시라도 혈통의 진위를 의심당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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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내게는 유리아보다 더 미친 사람처럼 굴 필요가 있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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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을 것 같지만, 어떻게든 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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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유리아가 내민 양 갈래머리를 잡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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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들도 좋긴 하지만 내 취향은 좀 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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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오라방은 그럼 뭐 좋아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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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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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답하며 유리아의 머리카락을 그녀의 목에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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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목덜미 위를 교차하는 금발. 그렇게 단단히 고정시킨 뒤에는 두 갈래로 나뉜 머리를 다시 합쳐 한 손으로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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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유리아 본인의 머리카락을 목걸이이자 목줄처럼 만든 모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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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의 머리카락이 꽤나 길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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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목을 졸리듯이 붙잡힌 유리아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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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방 천재야?! 이런 건 생각도 못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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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럼. 이 오라비는 언제나 개쩔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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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나 싸구려 가죽이랑 다르게 심하게 쓸리지도 않고,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목을 조를 수도 있고, 무엇보다 다른 무엇도 아닌 내 머리카락에 내가 매인다는 사실이 너무 굴욕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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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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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유리아의 모습에 자연스레 한숨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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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자하브는 자식 교육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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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멀쩡한 제벨라는 학대했지, 유리아는 그냥 제정신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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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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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서로 후계자 다툼하다가 공멸한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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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냥 운이 없어서, 혹은 누군지 상상도 안 가는 흑막이 있어서 죄다 죽고 망한 게 아니라 그냥 죽을만해서 죽었고 망할만해서 망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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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해졌던 머리가 맑아졌다. 그래. 유리아가 아무리 골 때리는 녀석이라도, 어차피 자하브를 떠날 내게 무슨 상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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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내게 목을 내어준 채, 뒷짐을 진 유리아가 고양잇과 동물처럼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따라오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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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라방 지금 어딜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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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받으러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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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내가 없는 사이에 자하브에도 아카데미 같은 게 생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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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내 개인 교습. 힐다 경이라고 은사자 기사단 부단장이 나한테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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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흠. 힐다 경은 오라방의 애첩……기억해 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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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아니라 글이랑 예법, 오러 수련을 배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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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방 글도 읽을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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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무식하게 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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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상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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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글 읽을 줄 알아? 문맹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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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리는 전생을 포함해도 들어본 적 없는 폭력적인 질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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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얼마 전까지의 나는 정말로 문맹이 맞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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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서운함이 겉으로 드러난 걸까. 유리아가 황급히 고개를 휘휘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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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냐! 무식해 보이는 게 아니라 싸움과 여자 말고는 흥미가 없어 보일 뿐이니까! 오해하지 마 오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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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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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위로가 맞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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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애초에 광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 해선 안 된다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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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고분고분해진 만큼 크게 도드라지지는 않지만……유리아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사람보다 짐승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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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가 멍청하다거나, 인간 언저리라는 나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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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보다 본능이, 지능보다 감각이 발달한 사람 특유의 기세를 풍기고 있다는 소리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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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에서 오래 살아남은 이들 중에는 비슷한 부류가 몇몇 있어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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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중에서도 유리아가 유독 도드라진 케이스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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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에. 오라방 생각보다 열심히 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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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가문의 일을 대부분 제벨라 누님께 떠넘기고 놀러 다닐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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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원래 어려운 일은 제벨라 언니가 하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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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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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애가 바로 여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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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오라방 오러 수련을 부기사단장한테 배워? 오라방이 더 강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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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것과 기술에 능하냐는 별개니까. 오러는 자하브에 들어와서 처음 익힌 거야. 그러니 기초부터 제대로 다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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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에. 강하다고 바로 오러를 마음대로 쓰고 그런 건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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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소리를……유리아 너도 어렸을 때는 따로 오러를 배웠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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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나는 천재라서 오러는 그냥 혼자 깨우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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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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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유리아에게 혈계능력은 없어도 무재는 있었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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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의식적으로 힘을 주어 마나를 집중시키고, 오러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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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는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본능적으로 오러를 다루는 법이라도 터득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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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유리아는 뭔지 모를 혈통인 나와 달리, 찐 자하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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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귀족은 대체로 하나쯤 탈인간급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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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능력은 그중 하나일 뿐, 다른 부분에서 이게 같은 사람인가 싶었던 적이 한둘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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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각자 제 갈 길 가고 있지만……한때 같은 고아팸이었던 녀석 중에 몰락귀족 출신이 있어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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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능력도 혈계능력이지만, 이를 떼어놓고 봐도 수완이 뛰어난 녀석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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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대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파멸적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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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옛날 생각에 추억에 젖는 것도 잠시. 어느새 연무장 앞에 도착했길래 유리아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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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쉿. 도착했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이제 가봐. 여기가 집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아카데미의 재학생으로서 실습 온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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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어도 오라방이 보내줘야 갈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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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목에 감긴 머리카락을, 이를 이용해 만들어 낸 목줄을 가리키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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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내가 유리아에게 목줄을 채우고, 성안을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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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놔줄 테니까 이제 가 봐. 아카데미에 가기 싫으면 제벨라 누님한테라도 가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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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어. 제벨라 언니도 오랜만에 보고 싶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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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인 유리아가 순순히 떨어진다. 그리고는 어째서인지 목에 여전히 머리카락을 휘감은 채,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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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라방! 다음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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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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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제벨라 언니랑 같은 침대 위에서 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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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일은 없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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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익숙해진 유리아의 발언에 대충 답해주고는 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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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문밖에서 들린 대화를 전부 들은 힐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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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다가 처음으로 내게서 시선을 스윽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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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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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사로서 자하브에 영광이 재림하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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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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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오해는 좀 풀려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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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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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에게 얻어맞고, 에녹이 던진 돌에 한 번 더 얻어맞은 아카데미의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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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전직 교관 브렌트는 입술을 짓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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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빌어먹을 자하브. 숨겨진 사생아가 있을 줄 내가 알았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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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제 막 골절이 나아, 살짝 저릿함이 남아있는 팔을 부여잡은 자세로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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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한 분위기의 집사장, 아론은 두 번 다시 눈에 띄는 순간 팔이 아니라 목이 부러질 것이라 경고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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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닫힌 성문을 올려다보던 브렌트. 그런 그의 짐을 가져다준 아카데미의 책임자인 델빈은 해고 통지서를 함께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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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의 건이 아니더라도 사소한 부패를 여러 번 저질러 이미 수차례 경고받은 상태. 그렇기에 별다른 절차 없이 최후통첩이 날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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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정이라며 중급 포션을 건네주던 델빈의 싸늘한 표정이 떠올라, 브렌트가 무의식적으로 방금 막 나은 팔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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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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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같은 괴물 딱지에 비하면 손색이 있을 뿐이지, 브렌트 역시 아카데미에 취직할 만큼 나름 실력있는 기사였기에 한 번 부러지며 취약해진 팔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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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정신적으로 몰린 그는 팔이 보내는 고통의 신호를 알아차릴 여유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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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빌어먹을! 이제 더는 돈을 빌릴 구석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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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가 소소한 뇌물을 받아먹은 이유는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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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진짜 재능들과, 벽에 부딪힌 현실 사이에서 어느새 검을 놓아버린 그가 도박이라는 새로운 취미를 붙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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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교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고, 때로는 뇌물도 받아먹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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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일자리도 뭣도 없으니 갚을 길이 없어졌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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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수도에 돌아갔다가는, 그리하여 돈을 빌린 도박장의 사채업자들에게 해고 소식을 들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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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좋지 않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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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해하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브렌트. 그런 그의 앞에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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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 디에고. 아카데미의 전직 교관이자, 엘리스 패밀리에게 2만 골드의 빚을 진 도박쟁이.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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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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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겁하며 검을 뽑는 브렌트. 그제야 치료가 덜 된 팔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를 가로막은 사내는 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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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해라. 내 적은 어디까지나 에녹 자하브이니. 만일 네가 나의 일을 도와준다면, 빛을 대신 갚아주고 새로운 신분 또한 준비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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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놈을 어떻게 믿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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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으면 네놈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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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브렌트는 깨달았다. 어느 쪽이건 자신에게 미래는 없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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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다가 엘리스 패밀리에게 추적당해 죽느냐, 괜히 나대다가 아론이라는 집사장에게 살해당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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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둘 중 하나라면 차라리 뭐라도 발버둥 쳐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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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는 에녹과 유리아의 얼굴을, 그 벌레를 쳐다보듯 경멸과 무관심으로 가득한 표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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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자하브의 그 애송이들을 엿 먹일 수 있고, 내 미래까지 세탁해 준다는데 뭐든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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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했다. 우선 이걸 받아라. 그리고 내가 일러준 곳으로 향해라. 아직 수리 중인 성벽이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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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는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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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받아 든 브렌트는 순간 흠칫했다. 상자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아카데미에서 철저히 배척하라 가르치는 흑마력이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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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갈 곳도, 떨어질 곳도 없는 브렌트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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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오히려 흑마법사의 무서움을 아는 만큼 더욱 든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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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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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쟁이가 인생을 망치는 이유는 보통 자기 스스로 팔자를 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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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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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유리아 때문에 돌겠습니다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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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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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에 한 번씩 있는 정기 티타임. 정확히는 제벨라가 그간 처리한 여러 일이나,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간략하게 요약해 알려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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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도 하고, 맛있는 것도 좀 먹고, 호시탐탐 내 이미지를 망칠 기회를 노리고, 가능하면 제벨라 대신 유리아에게 가주직을 떠넘길 각을 재보는 자리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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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큼은 이러한 평소의 목적과 전혀 상관없는 푸념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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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유리아 자하브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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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들어 보십쇼. 오늘 유리아가 실습이 끝나자마자 제 방에 들이닥치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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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 정도는 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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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제 말뿐만 아니라 제벨라 누님 말도 잘 안 듣는 거였군요. 아무튼 갑자기 쳐들어온 유리아가 무슨 짓을 했는지 혹시 짐작 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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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한번 생각해 봐야겠구나. 에녹 네가 이리도 불평할 정도면 분명 중요한 무언가를 방해한 것일 터. 수련장이나 아니라 방 안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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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그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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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제벨라가 자신의 찻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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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를 수련하며 예민해진 감각이 숨결에 섞인 은은한 꽃향기를 잡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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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것이 차의 향기인지, 제벨라의 체향인지는 모르겠다. 언제나 붓꽃을 닮은 향기를 풍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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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젖은 입술을 혀로 슬쩍 닦아낸 제벨라가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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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카렌과 좋은 시간을 보내다가 도중에 방해를 받은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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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비슷하죠? 오늘 실습 때 잡은 가장 강한 몬스터라면서 포이즌 웜의 머리를 가져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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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카렌과 유니콘은 순결한 여성을 좋아한다는데, 정작 유니콘 본인은 대체 어떻게 번식하는 것인지에 대한 토론을 하는 중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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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즐거웠으니 좋은 시간은 좋은 시간 맞겠지. 제벨라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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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포이즌 웜의 머리를 가져온 건 아무런 과장도 없는 사실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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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면. 퇴화해 회색으로 변한 눈, 터널처럼 동그란 입과 그 안쪽에 빼곡히 돋아난 이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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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를 특별히 혐오하는 편이 아님에도 보는 순간 절로 소름이 오소소 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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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백번 양보해서 실내에 피 흘리는 몬스터 머리를 가져온 것도, 냅다 제 방문으로 열고 들어온 것도 이해할 수 있어요.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나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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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백번이나? 누이는 에녹의 이해심이 깊은 것 같아 감동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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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잘라 온 머리를 툭 던지고 혼자 쪼르르 나가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군요. 하아. 그거 치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심지어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 며칠 전부터 매일 일어나는 입니다 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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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그래도 귀엽지 않니. 고양이가 잡은 사냥감을 주인에게 가져다주는 것 같아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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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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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제벨라는 그냥 팔불출이 아닐까 싶다. 나한테 잘해주는 것도 그렇고, 유리아에게 무른 것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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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자니, 어느새 턱을 괴고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던 제벨라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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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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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이 사이좋아 보여서 다행이란다. 아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려나? 유리아가 다른 건 몰라도 감은 참 좋은 아이니. 좋은 사람을 알아본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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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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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감. 사실 재능이라는 게 다 그런 거잖니. 알기 쉽게 눈에 띄는 것도 아니고,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특출남.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감각을 우리는 감이라고 부르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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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제벨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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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 말을 들으니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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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첫눈에 반한다는 것도 감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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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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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아니, 차라리 여기에서는 뿜는 게 더 품위 없어 보였으려나. 그보다 제벨라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낸다는 건 유리아가 앵겨붙는 걸 알고 있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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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내가 이걸 왜 숨겨야 하는가.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당당하게 굴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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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점점 복잡해지는 사이. 제벨라가 쿡쿡 웃으며 손을 뻗어 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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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과자부스러기, 그리고 두어 방울 새어 나온 찻물을 검지로 훑어내고는 묘한 웃음과 혀를 내밀어 낼름 삼키는 제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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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야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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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에서 조금만 깊은 곳으로 가면, 보이던 헐벗은 매춘부보다 꽁꽁 싸매고 있는 제벨라가 더 매력적이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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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얼굴의 차이인가. 아니면 미드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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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진지한 고민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제벨라는 내 입가를 닦아준 것으로 만족했다는 듯이 평소와 같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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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이걸 깜빡했구나. 저번에 오크 워로드가 쳐들어오며 무너진 성벽을 기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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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거야 당연히 기억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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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자재가 도착해서 슬슬 수리를 시작하려 하는데, 에녹 네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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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도움이요? 아니, 애초에 꽤 시간이 지난 걸로 아는데 이제야 수리에 들어간다는 건 또 무슨 소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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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실은 에녹 네겐 비밀로 했지만, 자하브의 예산이 그리 넉넉치 않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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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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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물론 재정 구조나 세금에 문제 있는 건 아니란다. 어디까지나 던전 역류가 연달아 터지며 큰 지출이 겹쳤을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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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장 쓸 돈이 부족한 건 사실. 그리고 몬스터를 막아내야 하는 만큼 성벽을 싸구려 재질로 지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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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탓에 자금 조달이 늦어 이제야 수리가 시작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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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에녹 네가 영지민들에게 인기가 좋잖니. 아무래도 제대로 된 인부를 고용하기 힘드니 관리자만 뽑고 노역을 좀 시켜야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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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완벽히 이해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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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역. 정확히는 영주의 권한으로 영지민들을 소집해 일 시키는 강제노역을 말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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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역은 현대에도 형벌로서 남아있을 만큼 예로부터 악명높은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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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을 그만두고 끌려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을 대신하는데, 심지어 빡세고 부상의 위험도 크다. 이를 좋게 생각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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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피라미드 건설 같은 예외도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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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록에 따르면 급여도 넉넉하게 줬고, 다치면 치료도 해주고, 아프거나 개인 사정이 있으면 휴가도 줬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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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어디까니자 예외적인 경우. 기본적으로 노역이란 최소한의 의식주만 제공해 주고 뼛속까지 부려 먹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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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노역은 자하브에도 있던 모양이다. 하긴. 중세 봉건 사회니 당연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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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제벨라로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빠르게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노역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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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이 클 영지민들을 달래기 위해 여러 오해로 한창 평판이 좋은 나를 내세우고 싶은 것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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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인 판단이다. ……일이 잘 굴러가기만 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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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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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큰 기회 아닌가. 나를 가주라는 자리에 묶어두고 있는 가장 큰 문제중 하나인 영지민들의 지지를 무너뜨릴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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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일이 요상하게 꼬여 오히려 좋은(?) 결과를 냈지만……이번 건 결국 노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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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일이 꼬여도 밥 먹고 일만 하라는 명령에 기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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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그런 말을 하는 대상이 뻔뻔하고 오만하며 재수 없기까지 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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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 말 다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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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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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말고 제게 맡겨주십쇼 제벨라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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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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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이런 건 영주가 나서야죠. 예에. 그렇고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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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탐욕스런 영주의 래퍼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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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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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이 부족하다고 하셨죠? 저만 믿고 맡겨주십쇼 누님. 반드시 최소한의 식사와 최소한의 의료지원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뽑아낼 테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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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원래 이런 건 무급 노역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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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라고 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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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란다. 최소한의 식사와 최소한의 의료지원이라고 했니? 그래. 에녹 네가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렴. 이 누이는 언제나 에녹 너를 응원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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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제벨라.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해결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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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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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장한 영지의 건장한 청년들을 불러 모아, 무너진 성벽 앞에서 노역 이야기를 꺼내려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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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르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리아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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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뭐 하나 유리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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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라방? 그냥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산책하던 중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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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으니까 좀 나중에 해. 제벨라 누님이 시켜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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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렇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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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성벽에서 멀어져 내 옆에 서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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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아직 진정되지 않는지 대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말았다 하기도 하고, 냄새를 맡듯이 코를 킁킁거리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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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 원래도 기행을 벌이는 녀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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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를 적당히 무시하고, 벌써부터 침울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영지민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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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였다!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 같지만, 너희를 이리 불러 모은 것은 성벽을 수리하기 위해 노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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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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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터져 나온 굉음. 지축이 흔들리며, 안 그래도 무너져 있던 성벽 일부가 그 충격으로 더욱 큰 균열을 일으키며 폭삭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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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오르는 흙먼지. 그 너머로 섬뜩한 안광이 번뜩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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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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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지옥의 밑바닥을 긁어대는 것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찌나 막대한 성량인지, 방금 막 피어오른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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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완전히 무너진 성벽과 흙먼지 너머에서 드러난 것은 뒤틀리고 부풀어 오른 채, 불길한 흑마력에 휩싸인 인간 비스무리한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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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변했지만 어째 익숙한 외모에 기억을 되짚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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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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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들려오는 유리아의 기겁에 눈치챘다. 일전에 뇌물을 받고 유리아를 알게 모르게 차별한, 그리고 내가 던진 돌에 얻어맞고 쫓겨난 아카데미의 교관이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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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교관이 아니라 교관이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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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였을지 몰라도 이젠 브렌트라고 부를 수 없는 뒤틀린 존재가 검붉은 피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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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죽인다! 죽어!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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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한 기운이 담긴 저주를 내뱉는 녀석. 촉수처럼 변이된 그의 손에는 모든 빛을 흡수하는 듯한 칠흑의 검이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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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들 도망쳐! 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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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이래서 영주님께서 노역을 시켜서라도 성벽을 고치시려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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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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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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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들 도망쳐! 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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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이래서 영주님께서 노역을 시켜서라도 성벽을 고치시려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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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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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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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으로 오해가 퍼지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이를 바로잡을 여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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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리고 부풀어 올라 본래의 얼굴을 제외하면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브렌트였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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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이 지독한 흑마력을 풍기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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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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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을 여러 갈래로 찢어 놓은 것 같은 촉수가 바닥을 두드린다. 기껏 평탄화 시켜놓은 바닥이 패이고, 쌓여있던 건축 자재가 박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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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가 처음으로 아쉬운 소리를 했을 정도로 비싼 고오급 재료들이 순식간에 부서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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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저 자리에 사람이 있었다면 사람도 함께 터져나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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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역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내 앞쪽에 불러모은 것이 불행 중의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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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래도 나름 제벨라 앞에서 큰 소리 떵떵 치고 왔는데 죄다 박살 났다는 이야기는 어케 꺼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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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흑마법사 놈들은 도움이 안 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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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력을 풀풀 풍기지만, 제정신이 아니고 몸도 뒤틀린 것을 보아하니 브렌트가 사실 흑마법사였다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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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모종의 방법으로 속아 넘어갔건, 멍청하게 제 발로 스스로를 팔았건 아무튼 이용당하는 것에 가까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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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나 또한 실험체 출신이라 잘 안다. 실패한 실험체는……죽음으로만 멈출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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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뼛속까지 틀어박힌 흑마법사 혐오를 삼키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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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영지민들을 피신시켜, 그리고 오는 길에 기사들이랑, 상주하는 사제들도 데려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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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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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였던 것은 진작에 이성을 잃었는지, 자하브에 대한 저주를 늘어놓으면서 정작 내가 아니라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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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영지민들이 무사히 빠져나가고, 마지막으로 유리아 또한 이 장소를 벗어나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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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장을 금한다. 모든 배우는 막이 내리기 전까지 무대에서 내려갈 수 없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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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가 풍기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아니, 내가 지금껏 상대해 온 흑마법사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강대한 흑마력이 지면에서부터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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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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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이 전개될 때 특유의 강렬한 진동과 함께 주변 일대를 직사각형 형태로 둘러싸는 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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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빠져나가려던 유리아의 몸이 안쪽으로 튕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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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이, 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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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긴 뭐야. 멍청한 흑마법사가 제 손으로 자신이 묻힐 곳을 파고 있다는 증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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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에서 흑마법사 놈들의 함정에 빠졌을 때 본 적 있는 결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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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제약을 거는 것으로 결계를 대폭 강화시키는 종류의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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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흑마법이 아닌지, 아니면 내게 직접 적용되는 종류가 아니라 그런 것인지 흑마법에 내성이 있는 나조차 힘으로 부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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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오러를 익힌 지금의 나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세월 걸릴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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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 굳이 부술 필요 없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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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또 무슨 대책 없는 소리야 오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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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 어느 한쪽이 전부 죽으면 알아서 열리는 구조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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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다. 우리의 대적자여, 요람을 불사른 무도한 자여. 순례자들이 갈고 닦은 복수의 검이 그대의 심장을 꿰뚫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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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오라방? 흑마법사들이 이상한 말투를 쓴다는 건 아카데미에서 배워서 알고 있는데 해석하는 법까지는 배운 적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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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나한테 처맞은 게 억울해서 복수하러 왔다는 소리……잠깐. 유리아 너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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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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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뽑을 수 있도록 대검을 움켜쥐긴 했으나, 유리아의 전신은 아까부터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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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공포에 잠식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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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 가는 것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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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익숙해졌다지만, 기본적으로 흑마력은 인간 본연의 공포를 자극하는 성질을 지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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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겪는 실전이 고위 흑마법사와, 놈이 다루는 장난감이라면 충분히 이해되는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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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움직이겠으면 거기서 잠깐 쉬고 있어. 금방 끝내고 올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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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가 본격적으로 순환하기 시작하자, 심장에서 시작된 열기가 전신을 휘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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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력이 차오르는 것과 동시에 지금껏 의식적으로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들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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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직 던전에서 찾아낸 서류를 해석하지도 못했는데, 제 발로 찾아온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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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해야 마땅한 일이다. 칼립소에서도 보기 힘든 거물이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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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고 이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날려 먹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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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자하브를 저주하며 정작 이쪽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아직도 주변을 때려 부수는 브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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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녀석의 소란에 숨어, 목소리와 존재감을 발하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는 흑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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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고, 나름의 답을 얻을 수 있었으니……흑마법사는 비대해진 브렌트의 안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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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브렌트를 갈기갈기 찢어내고, 안쪽에 숨어있던 흑마법사까지 때려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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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계획에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땅을 박차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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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사이에 두려움을 추스른 유리아가 흔들림 없는 움직임으로 대검을 꺼내 어깨에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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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괜찮아. 나도 싸울 수 있으니까 보조할게 오라방. 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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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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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검. 저것만큼은 조심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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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에 나선 짐승처럼 섬뜩하게 빛나는 연보랏빛 눈동자가 빛을 흡수하는 묵색 검에 고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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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게 나 같은 짭이 아니라 진짜 자하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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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감정을 다스리고, 위험 요소를 파악하여, 우선순위에 따라 행동을 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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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분명 더할 나위 없는 전투의 재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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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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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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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 덩어리 같은 녀석이 별다른 특징도 없는 검을 저렇게 소중히 들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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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내가 누군지 아는 녀석이 이렇게 누구 하나 죽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무대까지 준비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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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뭔가 비장의 무기라도 준비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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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반사하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것 또한 감각을 속이기 위한 장치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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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유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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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이렇게 대놓고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데 모를 수가 없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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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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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상대에 집중하느라 제대로 못 들었지만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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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말아쥔 주먹에 정신을 집중하며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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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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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으로 걷어찬 힘을 견뎌내지 못하고 부서지는 지면. 유리아가 반박자 늦게 내 뒤를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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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가까워진 브렌트의 변이된 거체. 종양과 촉수로 뒤덮인 몸뚱이가 스스로의 분을 못 이기고 날뛰다 말고 이쪽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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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멀쩡한 얼굴은 검붉은 피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으며, 피눈물에 모든 색을 쏟아냈다는 듯이 동공은 빛이 바래 잿빛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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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거기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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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왜 이쪽을 놔두고 혼자 난동 부리는 건가 싶었더니, 눈이 안 좋았던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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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집이 검만큼 우수할 필요는 없으나, 너무 부족한 것도 곤란한 법. 다행히 감정은 맹목적일수록 강렬하게 타오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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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놈. 맹목적이라는 게 진짜 눈이 안 보인다는 뜻은 아닐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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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브렌트. 녀석이 우악스레 휘두른 검을 멀찍이 피하고는 옆구리를 파고들어 주먹을 내지르려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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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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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서 솟아오른 뼈로 된 손들이 서로 깍지를 끼고, 단단히 엮이며 발치를 막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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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유의미한 수준은 아니다. 약간 걸리적거릴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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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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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게 걷어차자, 산산조각나며 부서진 뼛조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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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으로 흩어진 날카로운 파편이 일종의 산탄총처럼 브렌트의 하반신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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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집이 비대해지며 다리 또한 두꺼워진 탓에 큰 피해는 없었으나……고통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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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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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성을 지르며 몸을 기괴하게 뒤트는 브렌트. 어깨에 관절이 하나 더 돋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억지로 뒤틀리는 녀석의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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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든 쪽은 아니다. 아직 녀석의 검은 땅에 박혀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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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사람의 팔을 세로로 갈라놓은 것 같은 촉수가 채찍처럼 날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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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뼈로 이루어진 바리케이드를 걷어차며 잠깐 움직임이 지체된 탓일까. 피하기엔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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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막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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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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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팔에 오러를 집중시킨다. 피부 위로 기이한 문양이 그려지며 피어오르는 열기. 이를 믿고 촉수 다발을 향해 팔을 휘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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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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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탁한 소리와 함께 내 팔을 휘어감으며 후려치는 촉수 다발. 진득한 저주를 휘어감고, 표면에서는 강산성의 점액질을 뿜어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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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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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는 흑마법 저항력을 뚫지 못해 튕겨 나가고, 산성 점액은 대부분 오러를 뚫지 못해 피부를 살짝 태우는 선에서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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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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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연기를 자아냈을 뿐, 내 재생력조차 넘어서지 못한 탓에 팔은 멀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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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팔을 휘어감은 촉수다발을 강하게 휘어잡으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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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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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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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의 대검이 촉수다발을 중앙에서부터 베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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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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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아아아! 내 팔! 또 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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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것. 우화를 위해서는 과거의 몸을 잊고 새로운 몸이 입었음을 기억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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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무너지며 고통에 취약해진 것인지 팔이 잘려 나간 통증에 발작을 일으키려던 브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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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녀석은 흑마법사의 말 몇 마디에 금세 고통을 잊더니, 다시금 이쪽을 노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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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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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에 흑마법으로 서포트 하면서, 브렌트를 수동 컨트롤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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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으로 힘을 부풀리고, 흑마법사 본인이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부작용을 상쇄한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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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녀석의 강함 자체는 오크 워로드와 비교해도 비슷하거나 조금 더 강한 정도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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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의 특징을 생각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오크 워로드보다 더 강할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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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와는 상성이 좋지 않다. 이전처럼 던전 내부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백업은 없지만……그래도 차근차근 깎아내면 얼마든 쓰러뜨릴 수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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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뒤로 물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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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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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공략해 볼 생각으로 거리를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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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회수했을 무광의 칠흑검을 경계하며 브렌트의 오른쪽 촉수 다발에 시선을 돌렸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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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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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쥐여있어야 했을 검이 보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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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상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잘려 나간 촉수 다발 사이를 헤집고, 산성 체액 범벅이 된 검이 화살처럼 쏘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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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유리아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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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죽인다!! 자하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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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대적자를 노렸을 터인데……아니, 예상치 못한 비극도 나쁘지 않구나. 이대로 한 사람의 종막을 보여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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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해하는 흑마법사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유리아를 향해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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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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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가까워지는 거리. 하지만 조금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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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는 대검을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신체에 투자하는 오러를 의도적으로 제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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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방금 막 휘두른 대검을 회수하며 몸을 빼는 도중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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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력으로는 막아내는 것도, 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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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가 대신 받아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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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믿을 뿐이다. 꾸역꾸역 살아남은 증거로 손에 넣은 저항력을, 지금껏 오러 수련에 들인 노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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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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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앞까지 날아든 검 끝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유리아를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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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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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목소리로 눈을 뜬 유리아에게 씨익 웃어주고는 주먹에 오러를 담아, 그대로 검을 쳐내려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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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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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된 영문인지 내 주먹을 그대로 통과하여 심장에 틀어박히는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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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충격에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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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하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우리의 숙적이 숨을 거두는구나! 두려움을 먹는 자를 두려움에 떨게 하던 존재여! 너 또한 한낱 필멸자임을 자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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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 돼! 오라방! 어째서 나를……차라리 약한 내가 맞았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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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의 광소, 그리고 죄책감에 비명을 지르는 유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검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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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아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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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멀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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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하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우리의 숙적이 숨을 거두는구나! 두려움을 먹는 자를 두려움에 떨게 하던 존재여! 너 또한 한낱 필멸자임을 자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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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 돼! 오라방! 어째서 나를……차라리 약한 내가 맞았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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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이 웃어대는 흑마법사. 브렌트의 뒤틀린 육체 속에 숨어들어, 마법으로 소리를 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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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유리아의 목구멍까지 절망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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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쓰러진 에녹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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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하는 기대에 몸을 의존해 에녹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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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빛도 반사하지 않고 죄다 흡수하는, 마치 세상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을 발하는 검이 에녹의 심장을 꿰뚫고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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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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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한 방울조차 흐르지 않지만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에녹의 가슴에 박힌 검에서 풍겨오는 불길함은 유리아의 직감을 맹렬하게 자극하는 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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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든 악의와 저주, 그리고 죽음을 억지로 검의 형태로 묶어두면 이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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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의 발달된 직감은 가까이서 보는 순간 알아차렸다. 저 검은 누군가를 베어 죽이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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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형상은 체내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한 것. 진실로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외상이 아닌 내부를……그 근본을 부정하는 부정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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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 뽑아야……아직 늦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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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멍한 표정으로 쓰러진 에녹(진짜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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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 숨은 붙어있다는 듯이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보며 유리아는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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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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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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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 자루를 움켜쥐려는 순간.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며 그대로 팔이 굳는다. 마치 몸이 검에 닿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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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여! 움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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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팔뚝을 퍽퍽 때려가며 이를 악무는 유리아. 하지만, 무거운 대검조차 제 몸처럼 휘두르던 팔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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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가장 큰 무기는 근력이나 의지가 아닌 직감이고, 직감은 결국 생존본능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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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자하브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검을 자하브의 직계인 유리아가 쥐는 순간……그녀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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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는 몰라도 본능적으로 이해한 미래에 몸이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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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연극이라도 보는 기분인 걸까. 마법으로 브렌트를 제약해서라도 이 모든 광경을 느긋하게 감상하는 흑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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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결계 안에 울려 퍼진다. 흘러넘치는 희열을 숨기지 못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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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하다. 백의 죽음과, 천의 저주. 그리고 만의 비극을 담아 빚어낸 것이다. 아무리 우리의 대적자라 한들, 일찍이 남부를 밝게 비추었던 자하브의 후예라 한들 찾아올 필멸을 피할 수는 없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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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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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의 여식이여. 이제 곧 네 차례구나. 급하게 구한 것이라고는 하나 검집이 제 역할을 다했으니, 계약자로서 성의는 보여야 하니. 그래서? 어찌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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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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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원하겠는가? 혹은 무정타 원망하겠는가? 스스로에게 닥친 비극에 짓눌려 흔하디흔한 배우처럼 눈물을 흘리겠는가.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결국 이 안에서 일어난 모든 눈물은 나의 피가 될 터이니 말이다! 흐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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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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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의 광소를 들으며,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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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바닥 깊숙이 박아둔 대검을 지팡이 삼아 균형을 잡는가 싶더니, 그대로 뽑아 들어 어깨에 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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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를 한껏 낮추고, 대검은 어깨와 한 손으로 들어 올리며, 다른 한 손은 축 늘어뜨린 기이한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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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이 유리아가 전력을 내기 위한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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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의 힘을 탈력시키고, 남은 모든 힘을 대검에 집중한다. 사람이 대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대검의 궤적을 그리기 위해 사람이 보조하는 주객전도의 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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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다. 연보랏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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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버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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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인가. 얼마나 화려하게 피어나느냐가 관건이겠으나 나쁘지 않군. 좋다. 어디 한번 이 목을 벨 수 있으면 베어 보아라. 그런다고 이미 어두운 골짜기를 헤매는 대적자가 돌아오는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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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유리아는 에녹의 옆에 있어야 한다는 직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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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단순히 에녹이 주변 사람에게 무르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간파하여, 그에게 가까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충동 정도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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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자신 대신 날아오는 검을 맞고 쓰러진 지금. 유리아는 알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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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직감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측했을 뿐이라는 걸(그런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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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질색하면서도 자신의 기행을 받아주는 사람. 그리고 이제는 날아오는 검을 대신 맞기까지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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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아는 그런 이를 모른 척할 만큼 영악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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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은 모든 오러를 쥐어짠 유리아의 대검이 밝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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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없어. 내가 죽어도 너는 반드시 데리고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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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을 각오한 전투에 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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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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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칼에 맞아 쓰러진 이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할 겸, 분명 내 가슴에 틀어박혔는데 하나도 안 아픈 검에 대해 알아볼 겸. 일단 가만히 누워있어 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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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래서 뭔데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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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이게 내 몸에 무슨 영향을 끼치는지 전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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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죽음이니 천의 저주니 하는 말을 늘어놓는 것을 보아, 제대로 이를 갈고 준비한 비장의 무기인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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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유리아마저 엄청 충격받은 것처럼 굴고, 검 자루를 제대로 쥐지도 못하는 것을 보아하니 내가 모르는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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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지. 일단 사람 심장에 칼이 박혔으니 충격받는 건 당연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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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 완전 멀쩡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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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물론이요, 상처조차 남지 않았다. 그저 내 주먹을 통과했듯이 검날은 내 심장을 관통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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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충격으로 뒤로 넘어간 것도 검날이 박힌 충격이 아니라, 검날이 스르륵 통과하고 남은 검 자루가 부딪친 충격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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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심각한 부상을 입은 척, 시간을 끌며 정보를 캐내고 몸 상태를 확인해 보아도 달라지는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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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함, 아무튼 멀쩡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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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 둘로 귀결되었다. 아니,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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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아님)에 분노한 유리아가 눈이 반쯤 뒤집혀 무리해서라도 흑마법사와 브렌트를 상대하려 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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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가 제법 강하긴 한데……그건 어디까지나 학생 수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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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맞붙는다면 잠깐은 분발할지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흑마법사에게 당하고 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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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표정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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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나. 슬슬 일어나는 수밖에. 조금 머쓱한 게 목숨이 위험한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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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래도 날 위해서 목숨까지 걸어보겠다고 나선 건데 너무 무안하게 만드는 것도 좀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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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정도는 맞춰줘도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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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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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올린 오러를 팔다리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심장 안에서 빠르게 순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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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무의미한 공회전. 하지만 원래 일부러 일으키는 공회전은 멋있으라고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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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박힌 곳을 중심 삼아, 가슴팍 위에 그려지는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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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정제되지 않은 체내 마력이. 지금은 오러가 흐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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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미숙한 오러 조작 능력으로는 이렇게 막대한 양의 오러가, 이렇게 빠르게 순환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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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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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 꽂힌 틈새를 통해 불길이 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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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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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소리를 내며 눈을 끔뻑이는 유리아. 흑마법사 녀석은 그래도 짬을 헛으로 먹은 게 아닌지 기겁하면서도 흑마법을 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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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서 엉겨 붙는 어둠이 물리적 실체를 갖고 산성 용액을 뚝뚝 흘리는 송곳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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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지 모를 괴물의 이빨이 그대로 내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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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은……안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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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의 순간 공중에 떠오르더니, 세찬 회전과 함께 휘둘러진 대검이 이를 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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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내가 막을 수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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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중간하게 들어 올린 팔이 잠시 허공을 방황하다가, 그대로 가슴팍에 꽂힌 검자루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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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단숨에 이를 뽑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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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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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상(아님)을 통해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는 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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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과 오러를 흩어내는 내 힘에 직격으로 노출된 탓인지, 뽑아낸 검의 날 부분이 힘 없이 녹아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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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그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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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루만 남은 손잡이를 땅에 떨구고는, 일부러 공회전시키던 오러를 천천히 회수해 정상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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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심장에서 흘러나오던 불길이 전신을 휘어감으며 내 몸을 불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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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불길의 형태로 낭비되던 오러를 회수한 것이지만, 겉보기에는 화염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보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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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멋만 든 흑마법사 놈들이랑 투닥이다 보니 이런 잔재주가 늘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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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눈을 땡그랗게 뜬 유리아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파르르 떠는 브렌트와 흑마법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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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도로 기겁하니 살짝 뿌듯해질 정도. 이만한 기대를 배신하는 건 오히려 멋없는 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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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흑마법사들이 좋아할 법한 지루하고 현학적인 말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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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저물어도 내일이 되면 다시 떠오르는 법. 이런 간단한 이치도 몰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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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부활……!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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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망한 목소리로 뒷걸음질 치는 흑마법사. 그런 녀석에게 다음으로 해줄 말은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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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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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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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저물어도 내일이 되면 다시 떠오르는 법. 이런 간단한 이치도 몰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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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부활……!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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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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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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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뒷걸음질 치는 흑마법사를 향해 에녹이 땅을 박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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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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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박살 내던 지금까지의 소란스러운 돌진과는 다른, 정숙하기 그지없는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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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 길드에게 시달리던 에녹이 역으로 암살자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그들의 움직임을 모방해 만든 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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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력으로 자신을 주장하는 것 같은 오러의 불꽃에 휩싸인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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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장소에서 집중이 잘 되듯, 오히려 에녹에게 유리아의 모든 신경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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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이 세상의 주인공이 에녹이 된 것만 같은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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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에녹의 몸을 휘감고 있던 불꽃이 양팔에 집중되더니, 돌연 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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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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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의 정적과 비견되는 굉음. 결계 안을 가득 채우는 열과 빛이 망막을 지지는 것 같은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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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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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뜬 유리아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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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의 변이된 육신. 단단한 근육과 구역질 나는 종양으로 가득 찬 복부에 큼직한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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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강렬한 빛에 똑바로 바라보지는 못했으나……유리아 또한 나름 경지에 오른 오러 사용자인 만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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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를 폭발시켰어? 아니, 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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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를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에녹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그의 오러 조작 능력은 미묘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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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로 형태를 잡는 것은 물론이요, 단순히 낭비 없이 이동하는 것조차 애를 먹는 게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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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에녹은 정교한 조작을 포기했다. 그저 넘쳐나는 오러를 단숨에 터뜨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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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서 돌아오며 심장에서 불길을 토해냈을 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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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리아를 진정으로 압도한 것은 전혀 다른 부분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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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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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이 올라가 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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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드는 촉수를 맨손으로 잡아 뜯고, 타들어 가는 복부의 구멍에 팔을 깊게 쑤셔 넣어 헤집고, 버둥대는 다리를 곤죽이 될 때까지 짓밟으며, 주문을 담는 입을 찢어 그 아래턱을 내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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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하던 검이 사라진, 그리하여 거리낄 것이 없어진 에녹이 발하는 원초적인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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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면……아니, 지성 있는 생물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할 법한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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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배운 영광스러운 승리도, 자하브에서 배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살육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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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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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가 잠자리의 날개를 뜯으며 즐거워하는 것처럼 에녹은 한때 인간이었던 브렌트의 전신을 해체하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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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브렌트를 조종하는 흑마법사 또한 순순히 당해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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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의 자재조차 녹여버리는 강산성의 체액이 피 대신 뿜어져 나왔고, 듣기만 해도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은 저주의 진언,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이차원의 괴물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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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방식을 동원하여 저항했다. 하나하나가 책에서나 보던 고위 흑마법. 만약 결계 바깥에서 쏟아졌다면 어지간한 군대와 기사들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갔을 수준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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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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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처리 된 성벽 자재조차 녹여버리는 강산성 체액을 뒤집어쓰며, 피부가 녹아내리고 근육과 뼈의 일부가 엿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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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불길이 치솟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재생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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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인체실험을 통해 인간을 벗어난 에녹의 재생력이 오러를 익히며 한층 더 강해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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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저주하는 진득한 악의는 에녹의 몸을 뚫지 못해 반절이 부스러지고, 간신히 스며든 반절이 에녹의 정신을 어지럽혔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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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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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머리를 한번 후려쳐, 오러로 불사지르더니 금세 제정신을 되찾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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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발하는 빛에서 생겨난 그림자. 이를 통로 삼아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괴이한 존재가 현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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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개의 눈을 지닌 상어의 머리와, 도마뱀의 몸을 합쳐둔 것 같은 혐오스런 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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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녀석이 입을 크게 벌리며 달려들었으나……에녹을 삼키기 직전. 망치처럼 내리친 주먹의 아랫부분에 맞고 입이 다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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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강제로 다물린 채, 관성만 날아드는 이차원의 괴물. 한 손으로는 이미 입을 다물게 하는 데 썼고, 다른 손은 브렌트와 흑마법사를 제압하느라 묶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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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에녹은 허리를 크게 꺾으며 입을 크게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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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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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 지나가듯, 괴생물의 목덜미를 크게 씹고 뜯어내는 에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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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을 닮은 피가 허공에 녹아들듯 사라지더니, 지면에 처박힌 녀석이 두어 번 꿈틀거린 끝에 이차원으로 역소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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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이 모든 것을 바라보던 유리아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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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방식이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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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고, 야만적이며, 우악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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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과 본능, 그리고 끝없는 투기를 연료 삼아 움직이는 태양을 품은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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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자하브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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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의 에녹이 그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크게 의식하지 않았을 뿐. 그는 감히 시조와 비견될 만한 자하브(아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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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들었다면 억울함에 공중제비를 돌았을 법한 생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생각은 내뱉어지지 않았기에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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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형상을 찾아볼 수도 없는, 재생이나 재조립조차 불가능하도록 잔해마저 잔불로 태워낸 끝에 브렌트의 육편 속에서 끄집어내진 흑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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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하게도 머리와 상체만 남아, 브렌트였던 것과 내장을 이어놓은 흑마법사를 향해 에녹이 낄낄 소리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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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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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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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는 다짐했다. 언젠가 자신이 됐건 제벨라가 됐건 에녹의 아이를 낳는다면, 숨바꼭질은 못 하게 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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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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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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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와 상체만 남아 내장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의 흑마법사를 보며 뿌듯함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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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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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 잡는답시고 오러를 너무 공회전시킨 탓일까. 적당히 폼 잡았다 싶어 회수하려 했는데 생각처럼 굴러가질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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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심력이라도 붙은 건지, 계속해서 바깥으로 터져나가려는 오러. 그 흐름에 밀려 자꾸만 분출했던 오러의 회수가 늦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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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발상의 전환이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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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가 안 밟히면 가드레일에 비벼서라도 멈춰야 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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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흘러넘치려는 오러를 억지로 체내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눈앞의 상대에게 전부 쏟아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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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회전하는 오러에 슬그머니 방향성만 제시해 주자, 그대로 브렌트였던 것에 들이박고는 얌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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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가 제어를 벗어나 폭주할 것 같으며, 일단 적에게 때려 박아라……메모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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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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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놈이 내게만 정신을 집중하기도 했고, 경계하던 비장의 한 수가 헛발질이었다는 것도 알았으니, 평소처럼 싸웠다. 그리고 지금에 다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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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을 전부 소모한 건지, 체념한 것인지 담담히 이쪽을 올려다보는 흑마법사. 마치 조금이라도 더 내 모습을 눈에 담으려는 것 같아 살짝 소름끼쳤지만……원래 소름 끼치는 놈들이니 그러려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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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벌레 같은 모습이 된 녀석의 목을 쥐고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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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묻겠는데, 난데없이 자하브에 쳐들어온 이유는 뭐지? 혹시 던전 역류를 일으키던 것과 관련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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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역류? 그런가……모르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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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이 새끼 또 이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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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모르겠지만, 흑마법사 놈들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아마 그만큼 돌아버린 놈들이라 그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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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렇다 보니 심문이 거의 불가능하고, 가끔은 내 질문을 통해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추측해내 지금처럼 비웃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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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나대로 얻어가는 것이 있으니 한 번씩 떠보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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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던전 역류를 이용하려 한 건 맞지만, 일으킨 건 너희들이 아닌가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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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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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자하브에 쳐들어온 이유는……뭐, 이건 안 물어봐도 알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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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이 준비해 온 것. 그리고 나를 죽였다고 착각하며 내뱉은 말들을 종합해 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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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그렇게 죽이고 싶었어? 이거 우연이네. 나도 흑마법사만 보면 죄다 죽여버리고 싶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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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자여. 너는 언제나 예상외의 존재였다. 제물이 될 운명을 거슬러, 우리를 제물 삼았으며. 이제는 우리에게 받은 힘으로 피의 근원을 일깨워 법도마저 희롱하는구나. 머지않아 그 대가를 치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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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그랬구나. 근데 그거 아냐? ……나는 네놈들이 만든 괴물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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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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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는 녀석. 목을 잡고 있는 손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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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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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가 조금씩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흑마법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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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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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곧 네놈들의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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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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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목이 부러진 녀석의 몸이 축 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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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브렌트에 이어 흑마법사까지 쓰러뜨리자, 조건을 만족한 것인지 흑마력으로 만든 결계가 흘러내리듯이 소멸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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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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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한숨과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을 이완시켰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오러를 공회전시키고 그걸 또 바깥으로 방출시키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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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오러에 미숙한 내겐 다소 버거운 활용 때문인지 정신적으로 피로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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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발 나긴 했지만, 이번 습격은 흑마법사들 입장에서도 상당한 준비를 거친 것 같으니 한동안은 별일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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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이 풀려서일까. 평소라면 그냥 머릿속으로만 하던 말이 자연스레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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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빨리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카렌 볼따구 가지고 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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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완전히 소멸한 결계. 그 너머에는 완전 무장을 마친 기사단과 이를 이끄는 제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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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신의 양 볼을 가리며, 힐다의 뒤에 샤샥 숨는 카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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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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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걸 들었다고? 아니, 설마 내가 안쪽에서 싸우는 모습까지 다 지켜본 건가? 이 많은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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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는 현실에 멍하니 눈만 끔뻑이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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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금슬금 다가온 유리아가 내게 볼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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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오라방. 열심히 싸워놓고 차였네. ……내 거라도 만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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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넌 만지는 맛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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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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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유리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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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 빵떡한데다가, 잡아당기면 쭉쭉 늘어나는 카렌을 어케 이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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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새 여동생의 성벽이 뒤틀려 있다는 의심이 들었을 때의 올바른 대처법을 고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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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패배 야스가 좋은 거니? 아니면 근친 야스가 좋은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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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아하? 패배 근친 야스가 좋은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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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을 골라도 정답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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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분명 카렌은 유리아가 약간 성격이 급할 뿐, 기본적으로는 좋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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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기라도 참는 것처럼 어색하게 틀어진 입가, 기대와 열망으로 반짝이는 동공, 그리고 아까부터 단 한 순간도 내게서 떨어뜨리지 않는 시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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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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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나를 속인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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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카렌을 노려보았지만, 내 시선을 무어라 해석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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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스레 나선 카렌이 지금 이순간에도 유리아를 말리고 싶지만, 내 눈치를 보며 차마 나서지 못하는 아카데미 학생들과 교관들을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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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조금 떨어져 주십시오. 가주님과 유리아 아가씨와의 대련의 여파가 미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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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으……안 말려도 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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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빈이라고 했던가. 아카데미에서 온 교관 중 대표 격으로 보이는 이가 조심스런 어조로 되물었으나, 카렌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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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자하브이고, 가주님께선 뜻을 정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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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들으면 거창한 결정인 줄 알겠잖아. 그냥 적당히 궁디팡팡이나 하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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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혹시 책임소재가 걱정이라면 안심하시길. 가주님께서 나선 이상 이는 가주님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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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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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오히려 행운이군요. 다른 누구도 아닌 4대 대공가의 일원인 가주님께서 직접 대련을 보여주시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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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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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뒤로 물리는 교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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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카렌 또한 자하브의 가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하브는 근친 명가라는 멸칭이 붙을 정도로 미친 집안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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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입장에서는 내가 제벨라와 결혼하건, 유리아와 결혼하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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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든 다음 세대의 자하브는 피가 다시 짙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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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 상식 개변 세상인가 뭔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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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어질어질 했으나, 판은 깔려있고 해야 할 일 또한 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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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유리아를 쓰러뜨린다. 그리고 바로 학부모 면담……아, 둘다 없어서 굳이 말하자면 내가 보호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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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1대1 면담 시간을 좀 가져야겠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공개 구혼 대련을 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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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현실의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단차 위에 올려진 의자에서 일어나, 짧은 계단을 내려가 바닥 위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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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차이는 있어도 딛고 있는 바닥은 같아진 나와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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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를 닮은 연보랏빛 눈동자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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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라비가 삼초식을 양보하마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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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초식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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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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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폼 잡고 싶어서 전생의 무협지에서 봤던 대사를 따라 해 보았으나, 이곳은 판타지 대륙이라 그런지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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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까지 공격을 받아주기만 하겠다고. 그러니까 전력으로 와봐. 하늘 같은 오라비와의 격차라는 걸 알게 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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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하늘은 무슨. 애초에 밖에서 굴러들어 온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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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들으면 아무리 가주라도 사생아 출신을 무시하는 콧대 높은 귀족으로 여기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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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았다. 어째서인지 군침을 츄릅 삼키는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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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정신 나갈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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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숨을 푹푹 내쉬건 말건 땅에 박아 넣은 대검을 뽑아 올리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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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를 한껏 낮추고, 자신의 몸뚱이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을 어깨에 비스듬히 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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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변화하는 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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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조금 전까지만해도 은연중에 흘러나오던 건들거림이나, 열망 비스무리한 것이 사라지고 순수한 투지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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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포한 짐승을 작은 인간의 형태로 구겨 넣은 듯한 사나움. 노골적으로 급소를 훑어보는 시선에는 은은한 위압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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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의 혈계능력을 발현시키지 못했음에도 이 정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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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자하브라는 혈통이 대공가에 어울리는 사기 혈통이긴 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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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자하브의 혈통으로 착각 받는 내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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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키면 안 되는 입장이니 고맙긴 한데, 왜 아무도 의심 안 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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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다른 생각을 한 순간. 이를 귀신같이 눈치챈 유리아가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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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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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직한 대검을 들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몸놀림. 두어 번의 발놀림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유리아의 몸이 빙글 회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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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 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기 위해 팔 뿐만 아니라 전신을 사용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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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지만 일렁이는 오러를 머금은 대검이 내 상체를 짓이길 듯이 쏘아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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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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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를 살짝 끌어 올리며 한쪽 손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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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로를 연상시키는 기이한 문양이 심장에서부터 팔까지 뻗어나가더니,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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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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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들던 대검이 내 손에 잡혀 그대로 정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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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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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벙한 소리를 내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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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대검 위에서 일렁이던 오러는 내 손에 잡히며 사그라들었고, 걸리는 건 뭐든 찢어발길 듯한 기세로 휘둘러진 대검은 미동조차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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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빼내기 위해 끙끙대는 유리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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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재능은 있네. 하지만 순수한 힘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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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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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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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검을 놔주자, 힘을 주던 반동 탓에 스스로 뒤로 튕겨진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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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묘한 스텝을 밟더니, 이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처음보다 더욱 강렬하게 대검을 휘둘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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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겐 이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일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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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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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과 똑같은 자세로 재차 대검을 잡힌 유리아. 당황하는 대신 몸을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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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꼬리는 히죽이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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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애써 무시하며 유리아의 검을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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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알겠네. 어차피 신체 능력이 아니라 오러를 이용해 더 큰 힘을 내는 것이니, 차라리 하나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별다른 방어구 없이 대검 하나만 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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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두 번 만에 알아차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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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특이한 방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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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것도 한번 막아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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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거리를 벌린 유리아가 이번에는 대놓고 동작이 큰 자세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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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이 아닌, 대검에 무게 중심을 두는 기이한 자세. 비틀거리듯이 달려든 유리아가 한보 반 거리 앞에서 땅을 박차고 공중에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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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과 대검의 표면에만 머물던 오러가 돌연, 유리아의 몸을 휘감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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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서 흩날리는 밝은 금발. 지금 이순간. 유리아의 대검은 무기가 아닌 하나의 송곳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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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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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수리를 정확히 노리고 떨어져내리는 투박한 대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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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하는 오러에 감싸인 탓인지 이전과는 비교조차 안 될 광채를 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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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도, 회피도, 심지어는 탈진마저도 고려하지 않은 묵직한 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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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아무리 나라도 약간 진심을 내야 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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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오른쪽 주먹을 한계치까지 뒤로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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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투창이라도 하는 듯한, 혹은 화살이라도 쏘아낼 법한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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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라면 취하지 않았을 자세다. 실전에서는 너무도 비효율적이니까. 차라리 지금의 유리아처럼 전신을 비틀어 모든 힘을 주먹에 집중시키는 편이 훨씬 나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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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굳이 이런 자세를 취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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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효율적인 자세를 찾고, 육신을 단련하고, 그렇게 조금 더 강하게 힘을 주는 것이 전부였던 이전과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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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나마 오러를……체내의 마나를 의도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 지금은 약간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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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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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와의 실전을 통해 익숙해진 오러의 감각이 심장을 떠나 팔 전체를 뒤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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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물든 문양에서 느껴지던 열감이 단숨에 그 기세를 부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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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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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양 위로 피어오르는 불길. 정확히는 집중된 오러가 문양을 타고 흐르다가 밖으로 삐져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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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는 엄밀히 말해서 기사들이 사용하는 유형화된 오러로 육신을 코팅하는 기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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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과할 정도의 오러를 집중시켜, 넘쳐 흘렀을 뿐인 현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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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항상 이렇게 싸워왔다.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마력을, 개조당해 얻은 것이라 제대로 세밀한 조정이 불가능한 근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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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있는 힘껏 때려 박아 눈앞의 상대를 분쇄하는 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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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하고, 단순할지 몰라도 내겐 가장 익숙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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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의 제대로 된 사용법 같은 건 나중에 배우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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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움켜쥔 주먹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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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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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흐르는 오러가 격발 되며 폭발에 가까운 굉음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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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불길을 휘감은 주먹이 그대로 유리아의 대검 옆면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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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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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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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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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이 올라 너무 힘을 줬던 탓일까. 부서진 대검과 함께 무방비한 자세로 옆으로 날아가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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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라면 벽을 부수고 처박힐 것이다. 그리고 모든 오러를 대검에 집중한 유리아는 이만한 충격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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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면 중상이라는 생각에 혀를 차며, 잽싸게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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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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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얕은 거미줄 모양 금을 내며 쏘아지는 몸뚱이. 공중에서 허우적대는 유리아를 안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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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등쪽으로 벽에 충돌하며 충격을 대신 흡수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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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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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짝을 내달리는 찌릿한 감각. 좀 아프긴 한데 이 정도면 참을만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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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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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품에 안겨 눈을 휘둥그레 뜨는 유리아를 향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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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이 오라비가 준비한 사랑의 매는 따로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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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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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에 집중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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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를 빙글 뒤집어, 내 무릎 위에 엎드린 자세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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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 팡! 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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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팟! 진짜 아파! 설마 이런 취향이야?! 언니는 몸이 약해서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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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누님을 내가 왜 때려……? 너처럼 맞을 짓한 녀석이나 맞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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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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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히는 유리아. 그런 그녀의 엉덩이를 다시 한번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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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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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탄력 있는 감각과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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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메챠쿠챠 설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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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자하브의 기사들은 물론, 아카데미 사람들도 있다는 걸 깜빡 잊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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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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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고통에 유리아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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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공개 수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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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엄한 것만 배워온 유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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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저점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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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잘한 것들이 아닌, 고위 흑마법사를 쓰러뜨린 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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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이 던전 역류를 직접 일으킬 능력은 없다는 걸 안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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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순수하게 티배깅과, 내 죽음(아님)에 분노해 목숨을 걸어준 유리아를 위해 일종의 쇼맨십이 생중계되고 있었던 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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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아……나는 나약하고 병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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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약하고 병든 사람은 몬스터 수준으로 변이된 사람을 맨손으로 찢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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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보렴. 육체적인 힘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밤마다 나는 복수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껍데기뿐인 목표에 시선을 빼앗기고, 돌아가지 못하는 과거를 향해 끝없이 발을 옮기는 망령에 불과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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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도 잘하시네요. 어제도 자하브의 식량 창고를 거덜 낼 기세로 고기만 골라 드시고는, 배를 까놓고 시끄럽게 코 골면서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배불리 먹고, 푹 잔다. 저는 이만큼 속 편한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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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나 코 골아? 아니 애초에 내가 코 골며 자는 건 어떻게 알았니?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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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 건강을 염려하는 것은 집사의 덕목이라 그런 것일 뿐이니, 오해하지 말아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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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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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착각을 하는 거냐는 듯, 별꼴 다 보겠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이며 이쪽을 훑어보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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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무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참 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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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하고 마저 들어. 어디 보자. 어디까지 말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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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븝. 읍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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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으로 입 막지 말고 그냥 말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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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돌아가지 못하는 과거를 향해 방황하는 망령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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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그랬었지. ……그런데 이다음이 뭐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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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저한테 물으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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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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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조금 전의 말은 전생의 내가 지구에서 뒹굴거리며 읽었던 인터넷의 뻘글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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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엄청 수려한 문장으로 헛소리하는 내용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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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그사이에 까먹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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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떠올리려 고민했으나, 여전한 막막함에 그냥 결론만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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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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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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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네 볼따구만이 정신적으로 지친 나를,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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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소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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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을 푸욱 내쉰 카렌이 무언가 작성하던 수첩을 잠시 덮고는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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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그렇게 제 볼을 주무르려고 하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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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람은 말랑말랑한 걸 만지면 기분 좋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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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여자의 가슴 같은 것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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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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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았던 터라 순간 버벅이는 목소리. 하지만 정작 스트레이트를 날린 카렌은 태연한 어조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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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그랬군요. 가주님의 취향은 가슴이 말랑한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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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또 뭐 하러 기억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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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슬슬 가주님의 반려분을 물색해 보아야 할 시기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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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누님은 어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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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반려를 말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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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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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생각은 없고, 상황이 찾아오기 전에 어떻게든 몸을 뺄 생각이지만 아무튼 일단 나는 제벨라와 약혼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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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벌써부터 다음 아내를 찾는다고? 이게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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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어 카렌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가 눈을 끔뻑이며 똑같이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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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서로 눈동자를 바라보며 끔뻑이기를 반복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입을 벌리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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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최근 가주님께 혼담이 많이 들어와서 일차적으로 거를 필요가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 당장 들이자는 의미가 아니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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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렇지? ……잠깐. 혼담? 갑자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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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일전에 가주님께서 보여주신 위업은 이미 제국 전역에서 유명하니 당연한 일 아닙니까. 당연히 혼담이 쏟아질 만하죠. 순수하고 강력한 피를 원하는 귀족은 얼마든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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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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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보 양보해서 자하브령에서, 혹은 남부에서 유명해진 건 이해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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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국 전체에서? 대체 어떻게? 무슨 수로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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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어하는 내 모습에 카렌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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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의 피로로 눈치채지 못하셨던 건가요. 그 자리에는 자하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의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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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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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아무도 안 볼거라 생각하고 폼 잡으며 했던 모든 언행을 자하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제국 각지에서 뽑힌 유수의 인재들도 봤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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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또 쪼르르 달려가 본가에 알렸고, 그 탓에 제국의 이름있는 귀족들 대부분이 내가 흑마법사 상대로 반쯤 정신줄을 놓고 싸우는 모습이나, 부활(아님)을 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소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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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음. 무슨 상황인지 완벽히 이해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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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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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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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이야. 볼따구 이리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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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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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이라는 말에 움찔한 카렌. 이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느릿하게 이쪽으로 향해 얼굴을 들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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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질끈 감은 것이 표정 변화가 드문 카렌에게서는 보기 힘든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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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카렌의 양쪽 볼을 잡고 천천히 잡아당긴다. 저항 없이 쭉쭉 늘어나는 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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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맛이지. 드디어 좀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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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을 번쩍 들어, 마주 보는 자세로 무릎 위에 앉혀놓고는 마구 볼따구를 주무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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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 살아났다고 착각할 만큼 강한 혈계능력을 보유한 나를 향해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악수의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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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모르고 있었지만, 내게는 귀족의 피가. 그것도 상상 이상으로 진하게 흐르고 있던 모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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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게 자하브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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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내가 지닌 대부분의 힘은 인체실험을 통해 강제로 얻거나, 따로 죽어라 단련해 손에 넣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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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능력을 타고난 것으로 보이는 건 분명 형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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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도 또 다른 자하브의 혈족이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였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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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정신 나간 생각인 것 같지만, 형님이 갑자기 혈통의 어두운 비밀에 눈을 떠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나를 낳았다는 건 말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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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나는 흑마법사 조직에 팔려 갈 때까지 지구에서의 기억을 제외하면 평범한 아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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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으로 만들어진 농후한 자하브의 핏줄을 타고났다고 하기에도 문제가 많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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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나이만 어렸지, 머리는 그대로인 내게 어머니와 형님은 그냥 평범한 모자 관계로 모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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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나와 형님의 나이 차이가 고작 1살밖에 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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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내가 귀족 혈통일지는 몰라도 자하브가 아니라는 건 확정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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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에서 내게 전국적인 관심이 쏠리는 것은 영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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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실각당해 내려와야 한다면 더더욱 그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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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핀치는 찬스. 위기란 곧 기회의 다른 이름인 법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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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의 남자가 전부 죽었다는 소식에 유리아의 아카데미 생활이 꼬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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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없어 어떻게든 찾아서 가주로 내세운 사생아가 너무 강함’이라는 소식은 다른 이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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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저점 매수의 기회처럼 보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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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는 제국의 4대 대공 가문이라 불릴 정도의 명문. 하지만, 최근의 연속된 던전 역류를 막느라 재정적, 군사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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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가주직에 오른 신임 자하브 대공은 사생아 출신이라 배운 것이 없고, 내부에서의 균열도 적잖이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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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지닌 힘은 무시할 수 없으니, 자하브의 권세가 약해진 지금 연을 맺어두면 나중에 더 큰 이득이 되어 돌아올 거라 여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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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내게 혼담을 보내오는 귀족들은 지금 당장의 이득이 아니라, 언젠가 찾아올 미래의 떡상을 믿고 내게 투자하려는 것이다! 전생의 내가 처음 주식할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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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생의 나처럼 무릎에서 산 게 아니라, 사실 어깨에서 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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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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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마구 만지작대던 카렌의 볼따구를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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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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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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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담 그거 다 취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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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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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자하브와 연을 맺고 싶다면 친구비를 내라 그래. 당연한 말이지만 많이 내는 만큼 우정이 깊어질 거라는 말도 덧붙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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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말씀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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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친구비만 내면 다 친구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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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대답했건만, 어째서인지 카렌이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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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제벨라 아가씨께, 아카데미의 학생들에게, 그리고 서신을 보내오신 모든 귀족가에 그리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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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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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고개를 끄덕이고는 총총걸음으로 멀어지는 카렌의 뒷모습에 씨익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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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이제 남은 건 돈은 받아먹었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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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바보는 아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내가 뭔가 의도적으로 조지려 하면 오히려 역효과로 좋은 결과만 나온다는 건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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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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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받았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레 불만이 쏟아질 테고, 이는 고스란히 나의 평판 문제로 이어질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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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 주가는 알아서 떡락한 끝에, 최종적으로는 상장폐지에 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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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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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계획 자체는 합리적이었으나, 문제는 그가 생각치 못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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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아무도 자하브에게 품위라던가, 신의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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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비? 심심하면 근처 영지 삥 뜯는 건 자하브의 오랜 전통이었다. 빌린 돈을 갚으라고 했더니 협박이 날아오는 건 연례행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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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자하브와 연을 맺으려던 가문이 항상 존재해 온 이유는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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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사회에서는 대공 같은 최고위 귀족의 이름을 빌린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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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에녹은 친구비를 받으면 자하브와의 친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금액에 따라 줄까지 세워주겠노라 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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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받은 뒤에는 침묵할 뿐, 너네 돈 좀 많아 보인다? 같은 소리를 하며 더 내놓으라고 깽판을 부리지도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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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고위 귀족과의 연을 트기 위해서는 막대한 뇌물이 필요하단 것은 이 세계의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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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에녹은 암암리에 이루어지던 것을 양지로 끌어 올려 공정한(?) 경쟁을 시킨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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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전 세대의 자하브였다면 여식도 받아 가고, 지참금 명목으로 돈도 뜯어갔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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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은 다 필요 없고 순수하게 돈만 내놓으라고 하는 셈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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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상대적으로 에녹의 평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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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모든 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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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를 넘어선 자,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품은 사내, 흑마법사들이 두려워하는 대적자……그런 사람이 돈만 주면 친구가 되어준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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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에는 돈이라면 썩어 넘치도록 쌓은 집단. 마탑이라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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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스승님께 연락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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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탑에는 해결하지 못한 오랜 문제가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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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새로운 친구가 이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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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문을 읽던 아카데미 소속의 유망한 마법사 소녀가 한참의 고민 끝에 명상 중이던 자신의 룸 메이트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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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자하브 대공 각하……그러니까 너네 오빠는 어떤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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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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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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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형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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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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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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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저점매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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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내 동생! 여기 있었구나. 누이가 사랑한다고 말했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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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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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 오러 수련만 좀 하고 개백수마냥 정원을 산책하던 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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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스커트를 들어 올린 제벨라가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것 같은 스텝을 밟으며 내 쪽을 향해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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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집무실이 됐건, 본인 방이 됐건 항상 실내에만 틀어박혀 있던 제벨라가 별일 없는데도 외출한 것도 놀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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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품위 있게 사뿐사뿐 걸어 다니며, 부드러운 미소 정도만 짓던 제벨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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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통통 튀어오는 모습에는 아무리 나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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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가요 제벨라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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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에녹도 참. 전부 네 덕분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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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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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제벨라의 뒤를 반보 뒤에서 따라오던 아론 집사장이 고개를 꾸벅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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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아가씨께서는 가주님께서 과감한 결단으로 자하브의 재정난을 해결해 주신 것에 기뻐하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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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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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여전히 헤실거리는 제벨라가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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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에녹 네가 받기로 한 친구비? 라는 게 있잖니. 정말 많은 상단과 귀족들이 우애의 증거를 보내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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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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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동시에 의아함도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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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친구비를 받기로 발표한 직후라면 모를까, 슬슬 아무것도 안 하는 내게 실망해서 한소리 나올 쯤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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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아직도 친구비를 보내오는 곳이 있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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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마다! 약간 규모가 부족한 이들은 줄까지 서가며 서신과 금화 주머니를 보내올 정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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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그렇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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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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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제벨라. 길게 늘어뜨린 백발이 바람결에 살랑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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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에녹 네가 자하브의 황금기를 다시 가져다줄 사람이기 때문이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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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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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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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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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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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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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기는. 요즘 나도는 소문을 한번도 못 들어 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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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인 제벨라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뭔가 심상치 않은 수식어를 나열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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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회귀, 금빛 태양, 흑마법 학살자, 고귀한 짐승,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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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거기까지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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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가 낯부끄러운 중2병 감성의 별명에 손발이 절로 뒤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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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제벨라가 나를 의도적으로 놀리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원래 이런 건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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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판타지 세상에서 중2병스러운 타이틀? 이건 그냥 순수한 칭송의 증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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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정말로 세간 사람들은 나를 아직도 엄청나게 올려 치고 있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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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그런 별명이 붙은 거죠?! 저 요즘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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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해봐야 겨우 한 달 남짓 아니니. 이제 막 소문에 불이 붙을 시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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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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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마법은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수의 특권층에게 허락된 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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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은 입에서 입으로, 가끔은 서신으로 소문이 퍼지는 것이 이 시대의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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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야 내가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본 아카데미 학생들과 그들의 집안에만 퍼졌던 정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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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상인들의 입을 통해 평민들에게도 전해지고, 자연스레 그 지역의 귀족들의 귀에도 들어가기 시작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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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일차적으로 친구비를 보내왔던 이들이 잠잠해질 무렵, 소문을 접하고 뒤늦게나마 친구비를 보내는 이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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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 잠깐, 그래도 처음 친구비를 보낸 곳은 불만이 많겠죠? 제가 아무런 대응도 뭣도 없이 가만히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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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리가. 오히려 자신들이 먼저 자하브와 연을 텄다는 것을 사교계에 자랑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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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사교계에서 제 소문이 퍼지고 있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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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지. 다른 곳은 몰라도 중앙 사교회에서는 에녹 네가 참 뜨거운 감자라는구나. 협력 관계를 맺은 코넬리아 황녀님께서 직접 서신에 담은 내용이니 확실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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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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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알았다. 그냥 제국이 내 적이고, 세상이 나를 억까하는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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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억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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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으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던 것도 잠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어 싸매는 내 귓가에 제벨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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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이렇게 잘 되고 있지만……한가지 고민이 있어 이렇게 에녹 널 찾아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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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고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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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에녹. 내 동생아. 네가 이 누이를 믿고 대소사를 맡겨준 건 고맙지만, 아무래도 이건 내 선에서 처리하기에 너무 큰 일 같아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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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제벨라가 품에서 고급스러운 서신 하나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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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 모르겠지만, 묘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걸 보아 평범한 종이가 아니라 모종의 마법이 걸려있는 마법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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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제벨라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꺼내고 내 직감도 잠잠한 걸 보아 별로 위험한 마법은 아닌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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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이가 읽어줄게. 잠시만 기다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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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이 정도는 이제 스스로 읽을 줄 알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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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몰라도 문맹은 탈출했다는 생각에 약간 으스대며 제벨라에게서 서신을 뺏어 들듯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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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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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면서도, 이내 흡족한 미소를 짓는 제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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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간지러운 기분에 그 시선을 피하고 서신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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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요약하면 친구비를 많이 줄 테니, 자기들 영지의 오랜 골칫덩이를 치워달라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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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 일단 대공 아닌가요. 용병도 아니고 이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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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끝까지 읽어보렴. 그럼 이해하게 될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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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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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을 지나 형식적인 인사말. 그리고 구체적인 금액 부분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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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골드요? 이게 얼마나 큰 금액인가요 제벨라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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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가 일종의 수용소긴 하지만, 브로커를 통해 외부와의 은밀한 교류 정도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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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반쯤 고립된 곳이라도 금화는 제대로 화폐로서 성립했다는 소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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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범죄가 판치는 암흑가의 물가에 익숙해진 내게도 100만 골드는 영 감이 안 잡히는 금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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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내가 한창 암살자 길드에게 쫓기고 있던 당시, 내 목에 걸린 의뢰금이 10만 골드였던 건 기억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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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질문에 제벨라가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조심스레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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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네……100만 골드라면 자하브 성을 하나 더 지을 수도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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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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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성은 주기적으로 터지는 던전 역류를 막아 세우기 위해, 특수 자재로 만들어진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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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 그 자체도 비싸고, 쌓아 올린 성벽에 인챈트 하는 마법은 더 비싼. 장담컨데 같은 무게의 금과 좋은 승부가 될 법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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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금으로 된 동전을 몇십만, 몇백만 단위로 거래할 만큼 이 세계는 지구에 비해 금이 흔하다지만, 이를 감안해도 말도 안 되는 금액인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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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금액을 겨우 친구비로 줄 수 있는 곳이……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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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라는 이름은 잘 알고 있다. 자하브에 들어온 뒤, 최소한의 제국 역사를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그게 아니더라도 칼립소에서도 이름이 들릴 만큼 유명한 곳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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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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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의 대공이 직접 이런 서신을 보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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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 같구나. 이그나투스 대공이라면 100만 골드도 허언이 아니니,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기 힘들어 에녹 너를 찾고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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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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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멸문한 칼립소 대공이나, 어쩌다 보니 내가 달고 있는 자하브 대공의 자리처럼 제국의 4대 대공 중 하나이자, 서부를 다스리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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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국의 유일한 마탑의 주인이며, 비극의 신에게서 살아남은 최후의 드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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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대공 가문이지, 살아있는 다른 드래곤이 없기에 이그나투스 본인의 대에서 끝나는 일대작위나 다름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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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이그나투스는 제국보다도 오래 살아온 존재. 그리고 별일 없다면 앞으로도 천년은 우습게 살아갈 장생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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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쌓아놓은 재산은 차고도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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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먹으면 제국의 경제를 박살 낼 수도 있지만, 황제가 매번 사정사정하는 바람에 참아주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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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그나투스 대공이라면 100만 골드는 어렵지 않게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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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딱 1만 골드만 슬쩍해도 평생 놀고먹을 돈으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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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하브 대공 자리에서 내려왔을 때를 대비한 비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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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생각하자 갑자기 의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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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금액이라면 이야기 정도는 들어보는 게 좋겠죠. 무엇보다 이젠 같은 대공이잖아요? 인사도 한번 해둬야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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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네 뜻이 그렇다면, 조만간 찾아가는 것으로 답장을 넣어두마. 그 사이에 이그나투스 대공의 대리인과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떻겠니? 자세한 사정은 대리인을 통해 전달하겠다고 하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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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대리인이 여기 와있나요? 벌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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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와 서부의 거리, 그리고 소문의 확산 속도를 생각하면 너무 빠른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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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아직 대답도 못 받았는데, 대리인부터 보낼 줄이야……마탑주이자 드래곤이니까 텔레포트라도 쓴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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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질문에 제벨라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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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그런 게 아니란다. 놀랍게도 이그나투스 대공의 322번째 제자가 아카데미의 졸업반이었지 뭐니. 심지어 유리아의 룸메이트기도 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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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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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오래 사신 분이라 그런 거 아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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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제국의 역사 속에서 322명의 제자밖에 안 들였다면, 오히려 적게 들이는 편이라고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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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알겠어요. 한번 만나서 이야기는 나눠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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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했단다.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이 누이에게 말해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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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는 제벨라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유리아의 방을 찾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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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성에 있는 방이 아니라, 바깥에 마련해 둔 아카데미 학생들을 위한 숙소의 방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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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메이트라고 하니, 같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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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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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대공의 지위를 이용해 여자 기숙사를 당당하게 정문을 통해 들어갔다. 솔직히 좀 두근거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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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찾는 것이 여동생의 방이라는 게 영 그렇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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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렇게 도착한 유리아의 방문을 여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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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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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메이킨. 드래곤은 도마뱀처럼 총배설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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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절대 스승님 앞에서 그런 이야기 하지 마! 그리고 제자인 내 앞에서 하는 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시비 거는 셈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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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메이킨 너도 우리 오라방 길이가 몇 센티인지 궁금해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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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이야기거든?!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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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머리의 소심해보이는 인상의 소녀, 메이킨과 눈이 마주쳤다. 총배설강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그녀가 이그나투스의 제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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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흠. 일단 내 키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따로 재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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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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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메이킨이지? 이그나투스 대공의 서신을 받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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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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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아무래도 걸즈 토크 중이었던 것 같은데 조금 나중에 다시 오는 게 좋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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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름의 배려가 담긴 말이었으나, 아쉽게도 이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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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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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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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야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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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이 비명을 지르며 전신으로 마나를 방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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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소용돌이치는 마나의 폭풍. 그리고 메이킨이 있던 자리에는 주인을 잃은 옷가지와, 그사이에 숨어 몸을 둥글게 만 햄스터만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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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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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마법도 쓸 줄 아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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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옷가지 사이로 슬쩍 보인 속옷은 회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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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정확히 말하자며 햄스터가 줄줄 흘리는 눈물에 젖어 살짝 색이 진해진 회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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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저점매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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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 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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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팬티를 뒤집어쓴 햄스터가 잉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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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말 그대로 햄스터 눈물만 한 물기에 젖은 회색 속옷의 중앙부가 짙게 물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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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야. 이거 어떻게 하냐. 괜찮은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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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괜찮아. 메이킨은 패닉에 빠지면 햄스터로 변하는 습관이 있어. 이번 던전 실습 중에도 한 번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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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위험한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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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도 않아 오라방. 애초에 반사적으로 변신 마법을 펼칠 정도로 놀랐다는 건, 인간형의 모습일 때도 별다른 도움이 안 되는 상태라는 뜻이거든. 실제로 던전에서도 전투 도중에 햄스터가 된 적은 없었어. ……대신 식물형 몬스터인 알라우네에게 당해 산 채로 소화 당하기 직전에는 햄스터로 변해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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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정말로 정신 나갈 것 같은 상황이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햄스터로 변하는 일은 없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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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그럼 나를 무슨 알라우네 소화액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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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오라방에게 잘못 걸리나, 알라우네 위장에 갇히나 인생 끝나는 건 똑같긴 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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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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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이 터무니없는 음해는 어디서 시작된 것인가 싶어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리아는 설명 대신 으스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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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헴. 메이킨이 오라버니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길래 조금 알려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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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묻겠는데 뭐라고 말한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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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있는 그대로를 말했지. 오라방이 아카데미 학생 전체가 달려들어도 어찌하지 못하는 괴물이라던가, 나름 명예를 중요시해서 명분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지만 반대로 명분만 주어지면 마음껏 날뛸 준비를 마친 짐승이라던가……대충 이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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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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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유리아의 눈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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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체 무슨 결론에 다다랐길래 메이킨은 햄스터로 변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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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속옷을 뒤져 햄스터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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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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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손바닥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마는 갈색 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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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콕콕 찌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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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 진정해라. 나는 그저 이그나투스 대공의 조건을 자세히 알고 싶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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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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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음. 이해는 해. 친구끼리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놀랄 법도 하지. 심지어 그게 이 땅의 주인이라면 더더욱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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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그거 아닐 걸 오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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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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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어떻게 땡땡이치냐는 이야기를 하다가 선생님이 들이닥쳤다는 느낌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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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끔뻑이는 나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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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방 길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오라방이 들이닥친 거잖아. 갑자기 오라방이 ‘으흐흐. 내 길이가 궁금하다면 직접 알려주는 수밖에. 으럇으럇!’ 이럴 거라고 생각해서 겁먹은 게 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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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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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아니, 대체 어떻게 그런 결론에 다다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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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유리아의 말이 맞다는 가정하에 메이킨을 살살 꼬드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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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마. 오늘은 그냥 딱 말만 하고 갈 테니까. 그러니 일단 변신 모습부터 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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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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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메이킨. 내용물이 사람이라는 건 알아도, 겉보기가 햄스터다보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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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햄스터로 남아있으면 실수로 밟을지도 모르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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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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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오라방 그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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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겁하는 메이킨과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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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건 나름 진솔한 걱정을 해준 것인데 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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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대 여자들은 이해할 수 없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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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햄스터가 짧은 팔을 다급히 휘저으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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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 찌익! 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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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작은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마나.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순간. 살색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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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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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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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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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 햄스터를 올려놓고 있던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 그리고 부드러운 살을 파고드는 손가락의 감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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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알몸의 메이킨이 내 손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웅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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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옷가지는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져 있으니 당연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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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이고는 메이킨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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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옷부터 입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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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문을 닫고 잠시 나가자,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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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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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었던 여학생들이 호다닥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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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내가 어떻게 보였을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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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앞세우고, 공무를 들먹이며 여자 숙소에 들어와 당당히 여동생의 룸메이트를 희롱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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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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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 정도로 기겁할 정도의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다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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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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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안에서는 당연했던 일이, 자하브 바깥에서는 그렇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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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내 망나니짓이 항상 실패했던 이유가 오직 자하브 평균 하나 때문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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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생각이 깊어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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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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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더운 남부의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요를 돌돌 말았으며, 유리아조차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거리를 멀찍이 벌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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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진정한 메이킨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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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그러니까 이그나투스 대공께서 자하브 대공께 원하시는 바는 간단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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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아무리 생각해도 100만 골드 어치의 일은 없을 것 같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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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병의 제작을 도와달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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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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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듣는 단어에 눈을 끔뻑이자, 메이킨이 설명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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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용아병이라는 건 주기적으로 빠지는 스승님의 비늘이나 이빨 같은 걸 이용해 만드는 최상급 골렘이에요. 마법사들은 많지만, 마법사를 지킬 기사가 부족한 서부가 전선을 유지하는 핵심 기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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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이그나투스 대공은 영주이자, 마탑주긴 하지만……누군가의 충성을 받진 않는다고 들었으니 당연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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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라는 지위가 있는 만큼 필요하다면 자하브처럼 성을 짓고, 주변 영지로부터 충성을 받으며, 명예를 미끼로 기사를 양성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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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그나투스는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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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이라는 자신의 종족의 장점을 극대화 시킬 수 있도록 마탑을 짓고, 자신의 비전을 인간도 이해할 수 있게 개정하여 마법사를 키워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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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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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신 트라고데아의 토벌 후. 차마 신을 완전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없어 4조각의 재앙으로 쪼개, 4대 대공으로 하여금 이를 감당케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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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의 자하브 가문이 던전은 관리하며, 한때 트라고데아의 군대 대부분을 차지하던 몬스터 틀어막는 의무를 짊어졌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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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의 이그나투스는 죽음이 두려워 동족을 배신하고, 트라고데아의 편에 섰던 사룡(死龍) 모르테우스와 그 휘하의 언데드들을 억누를 의무를 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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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겠지만, 균형 잡힌 병력을 키우는 것보다 수준 높은 마법사를 늘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니 마탑을 세운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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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조금 전에 메이킨이 말한 것처럼 용아병이 됐건, 다른 무언가가 됐건, 어지간한 기사 수준이라면 모종의 방법으로 대체하는게 더 효율적이라 생각한 걸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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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유는 알았다. 자하브 가문이 후계자 다툼으로 약화되어, 이전처럼 수월하게 던전을 관리할 수 없을 것 같자 코넬리우스를 통해 황실의 도움을 받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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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 또한, 무슨 문제가 생겨 이전처럼 언데드 무리를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아 내 도움을 청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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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이쪽의 눈치를 보는 메이킨. 그런 그녀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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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이쪽도 대공가인 만큼 그 걱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니 얼마든 도와줄 수 있지. 그런데 구체적으로는 뭘 어떻게 하면 되지? 난 마법에 문외한이라 말이야. 마법사를 죽이는 법은 알아도, 용아병을 만드는 법 같은 건 모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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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익! 저, 저도 볼일이 다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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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건 농담이었어. 내가 죽이는 건, 나를 죽이려는 마법사랑 흑마법사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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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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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인간의 형태임에도 조심스레 담요 바깥으로 목을 빼고는 주변을 경계하듯, 두리번거리는 메이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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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그러고 있던 메이킨이 살짝 풀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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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으……용아병을 만드는 건 어차피 스승님이랑 다른 사형들이 하실 거예요. 서부에 필요한 건 용아병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더 강력한 용아병을 만들 재료.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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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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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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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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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읏. 저, 저도 그러고 싶은데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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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쭈물 거리며 말도 제대로 못하는 모습이 답답해 살짝 인상을 찌푸린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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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건 또 귀신같이 알아챈 메이킨이 발작하듯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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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자하브 대공 각하의 아기씨가 필요해욧! 부디 태양의 마나로 가득한 대공 각하의 아기씨를 베풀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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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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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눈만 끔뻑이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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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떡 일어선 유리아가 메이킨의 담요를 잡고 짤짤짤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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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었는데! 믿었는데……! 거짓말쟁이 메이킨! 오라방의 아기씨는 100만 골드를 줘도 안 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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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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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감 가득한 유리아의 절규와 메이킨의 비명소리가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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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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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학생들 사이에는 실로 망측한 소문이 하나 나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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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의 새로운 대공, 에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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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백주 대낮부터 여자 숙소에 쳐들어와, 불쌍한 마법사 하나를 억지로 희롱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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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완전히 타락 조교에 성공하여 스스로 아기씨를 조르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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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로 향하기 위한 준비를 하던 에녹이 소문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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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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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처음으로 망나니 평판을 쌓았으니 좋았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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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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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저점매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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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기씨……그러니까 정액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조금 기겁하긴 했으나, 결국 이그나투스 대공의 요청에 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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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의 목적이었던 100만 골드 중 일부를 비자금으로 만들겠다는 것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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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그나투스 대공이라면, 제국의 탄생 이전부터 살아온 드래곤이라면 나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게 있을 거라는 기대가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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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자하브의 혈계능력과 비슷한 힘을 각성한 것? 이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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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만약 변이를 감당하지 못했다면 이렇게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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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신경 쓰이는 점은 그 외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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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시조에 버금갈 정도로 진한 피를 타고났다는데, 정작 내 혈계능력이 무엇인지는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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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체 어떤 이유로 몬스터도 아니건만, 던전 내부에서 더 강해지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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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라면 이 둘에 대해 답을 모르더라도 실마리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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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당연히 이그나투스에게 내가 자하브의 혈족이 아님을 들킬 가능성이 높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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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 생각해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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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이그나투스 대공령으로 향하기로 정하고 나름의 짐을 싸는 도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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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이걸로 다 챙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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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하나 빠뜨리지 않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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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짐을 싸는 것을 도와주던 제벨라가 고개를 갸웃거리길래, 다시 한번 가방을 뒤적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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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다 챙긴 것 같은데요? 애초에 자잘한 건 카렌이 준비했을 테니, 저는 그냥 몸만 가도 충분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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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해 보렴. 정말 없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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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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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싶어 계속해서 가방을 뒤적이고, 침대와 책상도 살펴보았으나 별다른 이상은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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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자니 제벨라가 장난스레 미소 지으며 양팔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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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이에게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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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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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오렴.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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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맞나 싶어 쭈뼛쭈뼛 다가가자, 냉큼 이쪽을 끌어안는 제벨라. 남부 특유의 얇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살결. 꽃을 닮은 체향이 번져오며 따스한 체온이 몸을 달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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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든 에녹 네가 자하브에 온 뒤에 처음으로 성을 멀리 떠나는 일이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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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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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내가 자하브에 머무른 지 벌써 두어 달은 지난 것 같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성안에서 보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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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외출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던전에 드나드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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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가 나를 안고 있는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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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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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팍에 짓눌리는 부드러운 감촉. 하지만 왜일까. 지금은 제벨라가 등을 토닥이는 감각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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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위험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몸조심해서 다녀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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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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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움직임으로 나 또한 제벨라의 등을 토닥이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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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의 작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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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즘 도는 소문은 어떻게 된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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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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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니. 유리아의 룸메이트이자, 이그나투스 대공의 가장 어린 제자를 마구 범해서 부끄러운 말을 큰 소리로 외칠 만큼 타락시켰다는 소문 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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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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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 소문이 왜 벌써 제벨라의 귀에 들어간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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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내가 뭘 하건,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좋게만 해석하던 사람이지만……아무리 그래도 이런 소문까지 좋은 방향으로 해석할 것 같진 않아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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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동생들……에녹과 유리아의 말을 믿는단다. 실제로 이그나투스 대공의 조건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약간 문제가 생긴 것일 수도 있지. 메이킨이라는 아이는 아직 어린 나이고, 부끄러움이 심한 아이 같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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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돌아온 것은 괜찮다고, 이해한다는 식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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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제벨라라면 오히려 이런 소문에 시달리는 나를 위로해 주려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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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그것이 너무 빠른 판단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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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만약 소문이 진짜라면. 그러니까 에녹 너도 자하브고 남자니까 어느 날 갑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를 3일 밤낮으로 조교 해서 머릿속에 아기씨 조르는 것밖에 없는 상태로 만들고 싶은 기분이 들 수도 있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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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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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그런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적어도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라는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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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피임은 꼭 하렴. 일단은 에녹 네가 가주고, 이 누이가 첫째 부인이 될 예정이잖니. 만약 사생아가 먼저 태어난다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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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이 문제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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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종의 질투나 독점욕 같은 건 줄 알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가문의 위신이 어쩌구 하면서 줄을 세우려는 내용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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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냥 사생아가 정실 혈통보다 먼저 태어나면 복잡해지니 조심하라는 걸로 끝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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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다른 여자랑 뒹굴지 말라는 것도 아니라 피임만 제대로 하라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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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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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가주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지만, 그전까지는 내가 자하브의 핏줄이 아니라는 걸 들켜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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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아직 자하브의 다른 형제들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어땠는지 따로 알아보았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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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이 검열되거나, 기록 삭제되어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저 생긴 것처럼 금태양 집안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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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내 생각보다 훨씬 미친 집안이었을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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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서 아카데미에 그렇게 소문이 빨리 퍼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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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깨달음과 함께 제벨라를 부드럽게 밀어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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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마세요. 절대로 그럴 일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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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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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힌 제벨라. 그녀가 잠시 스스로의 뺨을 문지르더니, 이내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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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흠. 아무튼 이걸로 깜빡한 마지막까지 제대로 챙겼구나. 마음 같아서는 성문 앞까지 마중 나가고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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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바쁜 거죠? 이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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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쏟아지는 친구비의 향연. 제벨라는 이를 최대한 유용하게 써먹기 위해, 매일 같이 밤을 새며 일한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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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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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에는 특이한 아티팩트가 많다고 들었어요. 제벨라 누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하나 구해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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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니? 고맙단다 에녹. 이 누이를 그렇게나 생각해 줄 줄이야. 정말 착한 아이구나. ……그래. 정말 착한 아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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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뭇한 표정으로 내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던 제벨라였으나, 어째서인지 그 손길이 내 심장 어림을 스치는 순간.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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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순식간에 지나간 변화라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는 사이. 포옹을 하며 잠시 흐트러졌던 옷을 바로 잡아준 제벨라가 반보 뒤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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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거면 충분하겠구나. 어서 가보렴. 이그나투스 대공이라도 텔레포트 게이트를 오래 유지하는 것은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일 테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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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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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방을 나서, 광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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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내가 미처 챙기지 못했을 것들을 챙긴 카렌과, 여전히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메이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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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를 배웅하기 위한 가신들과 기사단이 도열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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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힐다도 나와 동행하는 대신, 저 사이에 끼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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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실습으로 온 아카데미 학생들을 관리 감독하고, 연속된 던전 역류 때문에 완전히 박살 난 방어선을 재건하느라 기사단의 인원을 줄이기 힘들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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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카렌만 있어도 충분하겠지. 내가 내 한 몸 지킬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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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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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나갈 때마다 양옆으로 물러서 경례를 하는 가신들. 자연스레 사람으로 이루어진 길이 열리는 모습은 몇 번 본 적 있음에도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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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그리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시선을 피할 뿐이던 메이킨이 고개를 푹 숙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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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위압감이 느껴지는 광경이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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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메이킨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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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들어.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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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 네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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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연신 꾸벅인 메이킨이 품에서 작은 수정구 하나를 꺼내 마나를 불어넣고. 무어라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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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의 보안 장치라도 있는 것인지 수정구의 안쪽이 보이지도,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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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의 통신 상대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마 이그나투스 대공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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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눈 끝에 메이킨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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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는 끝났어요오……다들 조금만 물러서 주세요. 휘말리면 위험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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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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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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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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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진짜 위험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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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둘러싼 자하브의 가신들을 바라보는 메이킨. 그런 그녀 대신 내 쪽에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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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지? 다들 세 걸음씩 물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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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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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찬 대답과 함께 그제야 거리를 벌리는 가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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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메이킨이 감탄과 억울함이 섞인 표정이 되었으나, 할 일은 하려는 건지 공터에 방금까지 쥐고 있던 수정구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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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구를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마나의 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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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 수준으로 어찌할 수 있는 양의 마나가 아니다. 당연히 마도구 따위가 버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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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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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금이 가는 수정구. 그 사이로 훨씬 더 많은 마나가 쏟아져나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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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패턴을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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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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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음과 함께 완성된 것은 거대한 타원형의 거울을 닮은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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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짜 거울은 아닌지, 너머에서 일렁이는 풍경이 자하브령과 완전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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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가 서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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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고위 마법에 내심 감탄하며, 메이킨을 따라 카렌과 함께 텔레포트 게이트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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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부유감. 그리고 살짝 선선해진 기온. 텔레포트는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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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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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구나. 본인이야말로 이그나투스 대공. 태양의 후예여, 그대를 초청한 최후의 용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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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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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위엄 넘치는 레드 드래곤 대신. 바닥을 뒹굴거리는 붉은 머리의 꼬맹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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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게 솟은 뿔과 오동통한 꼬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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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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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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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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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포트 게이트를 건넌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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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이질감 끝에 감았던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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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구나. 본인이야말로 이그나투스 대공. 태양의 후예여, 그대를 초정한 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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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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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발견했다. 위엄 넘치는 레드 드래곤이 아닌, 바닥을 뒹굴거리는 붉은 머리 꼬맹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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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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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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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끔뻑이며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생물체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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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불꽃을 닮은 선명한 적발. 뭐로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비싸 보이는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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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의 양옆으로 길게 솟은 뿔. 이를 중심으로 작은 뿔들이 엮여있는 모습은 왕관을 연상케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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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 부근에서 살랑이는 꼬리는 붉은 비늘이 촘촘하게 덮인 것이 꽤나 위협적이지만……전체적으로 오동통하고, 실루엣이 뾰족하다기보다 둥글어서 귀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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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드래곤의 특징들. 하지만 이그나투스 대공은 못 해도 제국의 역사만큼 나이를 먹은 존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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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아니, 용이 이런 꼬맹이의 모습으로 바닥을 굴러다니며 손님을 맞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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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어이가 없었으나, 마탑의 사람들에게는 대수로울 것 없는 평소의 모습이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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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바닥과 물아일체가 되어있는 이그나투스를 번쩍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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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아무리 피곤하셔도 손님을 누워서 맞이하시면 안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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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하지만 의자에 올라가는 것도 슬슬 귀찮단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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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른 사형들을 시켜서라도 하셨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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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래도 다른 사람을 전부 물리고 이렇게 혼자 게이트를 열었으니 괜찮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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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잘하셨지만, 아무튼 다음에는 꼭 의자에라도 앉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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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변의 의자에 이그나투스를 앉혀놓는 메이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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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앉은 상태로도 추욱 늘어진 모습에 카렌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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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혹시 서부에는 최대한 편한 자세로 손님을 맞이하는 관습이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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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런 건 없습니다. 애초에 메이킨 양도 깜짝 놀라 이그나투스 대공 각하를 의자에 올려두시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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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냥 귀찮음이 많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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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을까요? 어쩌면 다른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요. 적어도 저희를 무시하거나 그런 느낌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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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소곤거리고 있자니, 거의 드러눕다시피 의자에 걸터앉은 이그나투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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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손님들 앞에서 미안하게 됐구나. 허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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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다 들렸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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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 보여도 귀는 좋은 편이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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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이그나투스. 덕분에 누워있을 때는 몰랐던 그녀의 전신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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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의자에 앉았을 뿐인데, 발이 닿지 않을 정도의 단신. 하지만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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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이 빠르게 정돈해 주는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이목구비는 조각상처럼……아니, 이 세상 존재가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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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여인. 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어중간한 매력이 아닌 양쪽의 매력을 전부 품고 있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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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보다도 더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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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만 해도 선명한 붉음을 품고 있다고 여겼거늘, 이그나투스의 눈동자는 그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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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 불꽃, 리얼 레드 등등.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채도 높은 붉은색을 나타내는 단어를 떠올렸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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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무엇 하나 이그나투스의 눈동자를 온전히 표현하지는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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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리고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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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자하브가 선조 회귀에 가까운 수준으로 혈계능력을 각성했다더니……그 말이 사실인가 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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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눈으로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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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능력 자체가 보이는 것은 아니니라. 그저 체내에 품고 있는 마나의 성질과 순도를 느낄 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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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다른 자하브들과 비교하면 어떤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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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자하브들과 비교해서 말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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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한 이그나투스가 당장이라도 꾸벅거리며 졸 것 같은 나른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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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최근 500년간 보아온 자하브들과는 비교가 안 되겠군. 그전과 비교하면……순도만 따지면 샤메스. 아, 자하브의 시조이니라. 샤메스와 비슷한 것 같다만, 마나량은 다른 후예들에 비해 조금 부족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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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량이……부족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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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연금술사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먹었던 영약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고, 이후에도 여러 인체실험의 부작용을 잠재우기 위해 여러 영약을 마구잡이로 퍼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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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의 흑마법사 지부를 박살 내고, 암살자 길드를 조지며 나온 영약 중 나와 극상성인 것들과 동료들에게 줄 분량을 제외하면 전부 퍼먹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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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상이나 브로커, 때로는 용병들에게 돈을 주고 영약을 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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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마나 다루는 법은 잘 모르는데, 마나량이 너무 많아서 종종 마나가 꼬이며 내상을 입었던 적도 있으니 말 다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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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가 마나량이 적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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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무한한 마나를 생성한다는 드래곤 하트를 가진 입장에서 작아 보인다는 소리인가 싶었으나, 분명 다른 자하브들과 비교했을 때 적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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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어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이그나투스가 픽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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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자존심 상해하지 말거라. 보아하니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나이가 어리면 당연히 쌓은 마나도 적을 수밖에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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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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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초대부터 500년 전까지의 자하브는 순 괴물 딱지였다는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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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별로 체감이 안 되긴 했지만, 제벨라에게 들었던 이야기처럼 자하브의 혈통이 열화된 것 자체는 사실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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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그나투스가 나와 자하브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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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태양과 불꽃의 차이를 말하라고 하면 나도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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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해야 규모와 온도밖에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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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실망감이 차올랐을 무렵. 이그나투스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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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이렇게 자세히 보니 다른 자하브들과 조금 느낌이 다른 것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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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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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이 정도로 시간이 흘렀으면 아무리 후손이라도 조금 변하기도 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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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눈으로 보는 정도로는 정말 구분 못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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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에는 누구보다도 민감할 터인 드래곤이 이렇게 반응한다는 건, 사실상 평범한 방식으로는 구별할 수 없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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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전문적인 방식으로 깊게 파고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애초에 그 정도로 의심받는 상황이 되면 어차피 뭘 하건 들킬 수밖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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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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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던 도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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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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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는 이그나투스. 사람의 것이 아닌 뾰족뾰족한 이빨이 엿보이며, 작은 불꽃이 뿅하고 튀어나왔다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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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 덕분에 슬슬 자다 깬 꼬맹이에서, 꽃단장한 꼬맹이 수준까지 올라온 이그나투스가 머쓱하다는 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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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부터 손님맞이가 형편없어 미안하구나. 부끄러운 말이지만 몸 상태가 조금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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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별로 신경 쓰진 않아. 생각해 보면 나도 아까부터 처음 보는 사이인데 반말로 대하는 중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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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자하브가 초면인 사람에게 반말은 무례한 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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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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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는 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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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몇 번이고 곱씹게 되는 주제였기에 슬슬 감이 잡혀가고 있다. 하여, 내가 생각한 자하브스러움을 조금 발휘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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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은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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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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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이그나투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있던 카렌이 기겁을 하며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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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 또한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지만……정작 이그나투스 본인은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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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자하브는 시간이 지나도 자하브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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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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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자하브는 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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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웃음을 짓는 사이. 이그나투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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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해해 주어 고맙구나. 허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 계약 내용부터 확실히 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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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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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대답을 듣자마자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허공을 긋는 이그나투스. 그 간단한 움직임에 어마어마한 마나가 요동치더니, 이내 손가락의 궤적을 따라 허공에 세로로 금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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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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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진 공간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궤짝. 이그나투스의 손짓에 뚜껑이 열린 궤짝 너머로 반짝이는 황금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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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한 100만 골드이니라. 필요하다면 직접 세어도 괜찮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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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걸 어느 세월에 다 세고 있겠어. 여기서는 명예로운 이그나투스 대공의 말을 믿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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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자하브는 제법 달콤한 말을 할 줄 아는구나. 혹시 그대도 이 몸을 노리는 것이더냐? 아쉽지만 포기하거라. 이 몸은 자하브와 달리 무의미한 번식 활동에 흥미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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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예전에는 좀 더 어른스러운 몸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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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예나 지금이나 이 몸은 그대로다만. 아, 뿔과 꼬리가 좀 더 굵어지긴 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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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자평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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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과 좋은 승부가 될 법한 키. 그리고 카렌보다도 안쓰러운 가슴팍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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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100만 골드를 지불할 능력이 있다는 건 확인했으니 됐어. 필요한 건 강력한 용아병을 만들기 위한 내 아기씨……정액이지? 양은 얼마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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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병에 가득 채울 정도면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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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허공을 열어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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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가득 채워야 하는 건가……좀 많긴 하지만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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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조건이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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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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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지만 이 근방에는 창녀가 없느니라. 서부는 전장이며, 마탑은 전초기지. 여기에 거주하는 이는 전부 이 몸이 가르치고, 이 몸을 따르는 이들이니,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지만 자하브의 손에 망가지게 두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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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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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혼자 해결하려 했다는 말을 하려던 순간. 이그나투스의 오동통한 꼬리가 꿈틀거리더니, 그 끝에 무언가를 휘어감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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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이걸 사용하거라. 이 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착정 마도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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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투명한 재질. 원통형의 생김새에서는 부들부들해 보이면서도 묘한 단단함이 느껴지며, 한쪽 끝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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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완전 오나홀이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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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랑이는 꼬리로 저걸 쥐고 있으니 엄한 상상이 마구마구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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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판타지 세상에서 이런 걸 볼 줄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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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웃음만 짓고 있자니, 이그나투스의 자랑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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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 말거라. 온도 유지 마법, 69가지의 진동 패턴, 그리고 약간의 환상 마법까지 걸어 두었으니 아직 시험해 본 적은 없지만 제법 쓸만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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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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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손으로 해결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런 생각으로 이그나투스의 특제 마도구를 받아들려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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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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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존재감. 실내에 있음에도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에 반사적으로 전투태세를 취하며 감각을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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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닌지, 시종일관 늘어져 있던 이그나투스 또한 몸을 벌떡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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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손님을 맞이하는 도중이라니.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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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을 푸욱 내쉬며, 처음 보는 곧은 걸음으로 창문 쪽으로 향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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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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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창문을 열어 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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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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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투신에 다급히 창문 쪽으로 달려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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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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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더니, 창문 너머의 풍경을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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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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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대했던 위엄 넘치는 모습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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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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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가 만들어 준 오나홀이 꾸욱 짓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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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이 쏙 빠지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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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서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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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울음소리. 이를 듣자마자 이그나투스가 지금껏 보여준 나른함을 내다 버리고, 곧장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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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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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빛이 터져 나온 뒤에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거대한 레드 드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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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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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대했던 위엄 넘치는 모습. ……방금까지 내게 착정 마도구라며 판타지판 오나홀을 건넨 사람과 동일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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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아귀에서 느껴지는 말랑한 감촉에 살짝 기운이 빠지긴 했으나, 이런 내 감상과는 별개로 상황은 꽤나 심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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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가 멀리 날아가자, 그녀의 거체에 가려져 있던 저 멀리의 풍경이 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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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카렌카렌아 저게 다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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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서부에도 던전 역류가 일어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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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발을 서서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본 카렌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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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카렌도 놀란 모양.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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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너머로 무수히 많은 언데드들이 기어 올라오고, 그 중앙에는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드래곤이 눈두덩이에서 귀화를 불태우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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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에서 나고 자란 카렌이 보기엔 던전 역류처럼 보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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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서부에서 자란 메이킨의 눈에는 반대로 보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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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헌트네요. 요즘 들어 주기가 짧아졌단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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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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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남부의 던전에서 몬스터가 흘러넘치는 것처럼, 서부에서는 과거의 망령들이 죽음의 구덩이에서 다시 일어서 못다 한 전쟁을 이어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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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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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비극의 신 트라고데아에게 맞선 이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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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신은 단 한 명뿐인 신도의 바람을 위해 세상을 비극으로 물들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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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강신하여 오랜 시간 암약하며 준비를 마친 뒤. 이 모든 것을 일제히 터뜨려 대륙을 상대로 전쟁을 선언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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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으로 뒤덮인 세상은 어두운 밤과 같았기에, 당시의 전쟁에 비극의 밤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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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어찌어찌 막아내긴 했지만, 수많은 신들이 힘을 잃고 몰락했으며, 그 이상으로 많은 영웅들과 이름없는 병사들이 죽어 나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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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부의 재앙은 한때 비극의 신에게 맞서 일어선 이들을 언데드 삼아 군세를 일으켰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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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가장 신에 가까운 종족이었으며, 그렇기에 비극의 밤에 멸종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드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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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유일하게 종족을 배신하고 비극의 신에게 붙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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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룡 모르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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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저 멀리서 언데드를 이끄는 본 드래곤이 모르테우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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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과 힐다를 통해 기본적인 대륙의 역사를 배웠기에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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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직접 본 모르테우스와 그의 군세가 일으킨 와일드 헌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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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역류보다 빡센 것 같은데? 마탑 개쩌네. 이걸 막고 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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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핫……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자하브 대공 각하. 하지만, 마탑의 일원인 제가 보기엔 던전 역류 쪽이 더 무섭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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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물량은 비슷해도 전반적인 수준이 달라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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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가늘게 뜨고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장벽을 두드리는 언데드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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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도 느껴지는 음산한 죽음의 기운. 그리고 이것이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라는 듯, 맹렬히 몰아치는 불길한 눈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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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死氣)가 가득 담긴 눈보라와, 그 속에서 귀화를 번뜩이는 언데드들이 마탑의 방벽에 막히고, 고위 마법에 펑펑 터져나가는 모습은 솔직히 감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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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험해 본 오크들의 웨이브와 비교하면……평균 무력은 비슷하지만, 언데드와 달리 오크들은 전략을 구사하니 직접 전투력은 오크들이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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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 사기로 가득한 눈보라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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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놈들과 싸워봐서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저런 음침한 기운은 미리 대비하거나, 면역이 없는 이상 굉장히 까다롭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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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아마 실제 위협은 언데드 쪽이 더 강할 것이다. 무엇보다 저놈들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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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가장 큰 차이는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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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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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 워로드는 분명 강력했다. 익스퍼트급 강자가 여럿 있어야 간신히 쓰러뜨릴 수 있다는 시점에서 일인 군단이나 다름없는 녀석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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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르테우스는 오크 워로드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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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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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들려오는 공허한 울음소리. 동시에 한층 거세진 죽음의 눈보라가 마탑이 시전한 방벽 마법을 깨부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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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쳐들어오는 차가운 죽음을 향해 주홍빛의 장막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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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 차원에서 펼친 마법이 아닌, 마법사 개개인이 펼친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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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효과는 충분했는지, 죽음의 눈보라에서 느껴지던 불길함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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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방벽을 두드리던 언데드들이 방벽이 무너진 틈을 타, 달려드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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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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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은 땅에서 솟아오른 용아병들이 막아내며, 마법사들을 호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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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의 비늘과 이빨로 만들어 낸 이들이기 때문일까. 언데드와 비슷한 구조지만, 훨씬 날카롭고 공격적인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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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어지간한 언데드들보다 튼튼하고 힘도 좋았기에 잘 싸우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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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모르테우스가 굵직한 팔을 휘둘러 용아병들을 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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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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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언데드 상대로는 잘만 싸우던 용아병들이 순식간에 과자 부스러지듯, 간단하게 박살나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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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만족스레 바라보던 모르테우스가 돌연 뼈만 남은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몸을 웅크려 크게 도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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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본 드래곤의 몸뚱이가 마탑에 정면으로 들이받기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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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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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맞춰 도착한 이그나투스의 브레스가 모르테우스를 하늘에서부터 찍어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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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뼈를 버둥거리며 저항하는 모르테우스였으나, 결국 뿜어내던 눈보라는 레드 드래곤의 열기에 녹아내리고 날아오르려던 몸뚱이는 바닥에 처박혀 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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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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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전해지는 진동. 하지만 이그나투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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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브레스를 쏘아내며 날개를 펼치더니, 그 위로 무수히 많은 마법진이 그려지며 듣도 보도 못한 화려한 마법이 공간 전체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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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방금 막 기어 올라온 골짜기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모르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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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테우스가 사라지자, 여유가 생긴 마탑의 마법사들이 남은 용아병의 보호를 받으며 다음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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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일반 언데드들과 달리, 머리를 가루 내도 다시 살아나는 녀석들이기에 굳이 위력이 강한 마법을 사용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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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이 아닌, 주홍빛 가루의 형태로 흩뿌려지는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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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닿은 언데드들이 눈에 띄게 둔해지더니, 그 틈을 타 용아병들이 서로 달라붙어 하나의 장벽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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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완성된 마법이 물과 바람을 만들어 용아병 장벽 채로 언데드들을 밀어내기 시작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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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언데드들은 모르테우스의 뒤를 따라 골짜기 너머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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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의 용아병을 소모하긴 했으나, 최소한의 사상자로 와일드 헌트를 막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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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탑의 마법사들은 이러한 일이 일상인지, 크게 기뻐하는 기색 없이 담담히 움직여 부상자를 수습하고 깨진 방호 마법을 복구하기 시작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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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는 당당한 자태로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살펴보더니, 그대로 하늘을 날아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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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세상의 멸망……까지는 아니어도 나라 한둘쯤은 무너질 것 같은 풍경이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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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너무도 간단하게 정리하고 돌아오는 이그나투스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사이. 메이킨이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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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마탑의 모든 시스템은 언데드를 상대하는 데 특화되어 있거든요. 모르테우스와 그가 이끄는 와일드 헌트가 던전의 몬스터보다 더 강할지 모르지만……약점은 확실하고, 마법은 그러한 약점을 찌르기 참 좋은 학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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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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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깨달았다. 어째서 이그나투스가 굳이 기사들을 양성하지 않고, 용아병으로 대체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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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데드 상대로 끝나지 않는 소모전을 효율적으로 행하기엔 막 쓰고 버릴 수 있는 방패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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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병보다 더 강하다고는 하나, 살아있는 기사를 갈아 넣을 수는 없잖은가. 그러다 죽으면 언데드의 군세에 추가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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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메이킨의 말대로 마탑의 모든 시스템과, 마법은 언데드를 상대하기에 특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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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준비할수록 위력이 배가 되는 마법의 특징을 이용하여, 최대한의 효율로 와일드 헌트를 막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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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남부의 던전 역류는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랜덤 박스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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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에게 치명적인 극독을 준비했더니, 갑자기 골렘류 몬스터가 진격해 올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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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한 물리력으로 밀어버리고자 전쟁 병기를 대량으로 준비해도, 난데없이 물리 공격의 대부분을 무효화 시키는 슬라임 계열이나 정신체로만 이루어진 몬스터가 튀어나올 수도 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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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남부에 필요한 건 어떤 상황에서도 대응할 수 있는 절대적인 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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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이 마법사들 눈에는 끔찍한 도박처럼 보이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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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했어. 각자의 상성과 고충이 있다는 거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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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초대 황제께서 남부는 자하브 대공께, 서부는 스승님께 맡기신 게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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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카렌이 새로운 지식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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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방금 막 와일드 헌트를 몰아내고 온 이그나투스가 레드 드래곤의 형태에서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창틀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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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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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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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저항도 없이 철푸덕 넘어지며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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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적으로 잡아들긴 했지만, 내 팔에 안긴 이그나투스는 건어물마냥 축 늘어져 미동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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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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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을 살짝 흔들자, 힘없이 따라 움직이는 오동통 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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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 압도적인 위용으로 모르테우스를 브레스로 밀어버리던 그 레드 드래곤이라고는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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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조금이나마 회복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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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팔뚝에 침을 질질 흘리고 있던 이그나투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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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우선 이 몸을 좀 눕혀주겠느냐? 이 무례는 그 뒤에 설명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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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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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이그나투스를 번쩍 들고는 메이킨이 꺼내 놓았던 의자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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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늘어진 이그나투스를 내 무릎에 엉덩이를 대고, 가로로 눕는 자세로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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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의 인간 폼이 워낙 키가 작았기에 가능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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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딱딱한 의자 모서리에 닿으면 아플 테니, 머리 뒤편과 무릎 안쪽은 팔로 안아서 받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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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공주님 안기를 한 채로, 조금 전까지 이그나투스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은 모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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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찢어진 동공에 경계의 빛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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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자하브야. 이게 맞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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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뭐, 문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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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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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래. 아, 팔이 부족하니 이건 네가 들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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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의 말랑한 배 위에 오나홀을 올려주었다. 그러자 이를 반사적으로 붙잡은 그녀가 체념 섞인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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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이 지나도 자하브는 자하브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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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지금은 헛소리 그만하고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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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 아니니라. 처음 말한 것처럼, 요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힘을 쓰고 나니 순간적으로 탈진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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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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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제국의 4대 대공이자, 마탑주, 최후의 드래곤을 향한 말투라기엔 꽤나 무례한 일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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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나도 지금은 자하브 대공(아님)이잖나. 격은 얼추 맞는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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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 마탑이 싸우는 모습을 봤어. 용아병을 소모품처럼 쓰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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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같은 전사로서 연민이라도 느낀 게냐? 걱정말거라, 무술을 학습시키긴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이 몸의 비늘과 이빨로 만든 인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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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보이더라. ……그런데 용아병을 소모품처럼 쓸 거면, 왜 더 강한 용아병이 필요한 거지? 어차피 몇번 쓰고 버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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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거기까지만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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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골드나 들이고, 같은 4대 대공 중 하나인 내 힘까지 이용해 지금보다 훨씬 강한 용아병을 만들 이유가 뭘까. 천년에 걸쳐 최적화된 와일드 헌트 상대법을 뜯어고칠 이유가 대체 뭘까. 그런 고민을 계속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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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도 높은 붉은 눈동자가 이쪽을 빤히 바라본다. 마치 그 이상은 말하지 말아 달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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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그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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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로 찢어진 위압적인 눈동자. 하지만 묘한 위태로움을 품고 있는 이그나투스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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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죽어가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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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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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죽은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강력한 용아병을 만들려는 걸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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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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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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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라고 했느냐. 짐승같이 예리하구나. 아주 비슷하게 짚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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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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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해하는 나를 향해 이그나투스가 쓴웃음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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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은 지금 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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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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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아주 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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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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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장난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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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게 목소리를 깔고 말을 잇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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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은 본래 잠이 많은 종족이니라. 그리고 이 몸은 모르테우스를……배신한 아버지를 막아내기 위해, 헤츨링이던 시절부터 천 년간 잠에 들지 못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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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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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잠들면 그야말로 죽은듯이 잠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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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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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솔직히 말하마. 이 몸 없이 서부가 어떻게 와일드 헌트를 막을지가 걱정이었느니라. 그 대책 중 하나가 강화 용아병이었고. 이제 되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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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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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꾸러기 응애용이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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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서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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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쩍기 그지없는 이그나투스의 행적. 이를 추궁하여 숨겨진 진실을 알아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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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츨링 때부터 천 년……? 헤츨링이면 새끼 드래곤 말하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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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도 모르겠느냐. 나름 제국과 역사를 함께한 이 몸이 왜 이리 작은 거라고 생각한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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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취향인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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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여신, 천하제일인, 드래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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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최강자 라인의 존재하는 이들의 외견은 어린 여자아이인 것이 상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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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가? 이건 너무 전생의 편견일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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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그나투스가 숨기고 있었던 진실. 그것은 그녀가 잠꾸러기 응애 용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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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내 무릎에 누운 자세로 기가 차다는 듯이 콧김을 뿜는 이그나투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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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묻겠는데. 보통 드래곤은 얼마나 자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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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라면 그리 잠에 들 필요가 없느니라. 하지만, 대신 몰아서 잔다는 느낌이구나. 예를 들자면……그래. 겨울잠을 자는 곰과 비슷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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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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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만 먹으면 백 년도 넘게 깨어있을 수 있느니라. 물론, 항상 눈을 뜨고 있는 것은 아니고 여느 종족들이 그러하듯 중간중간에 휴식을 취해야 한다만. 대신 수면기가 찾아오면 최소 20년은 잠들어 있어야 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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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깨어있는 대신 20년 잠드는 건 너무 비효율적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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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인간도 하루의 3분의 1을 수면으로 소모하지 않느냐. 비율만 보면 이 몸이 훨씬 효율적이니라. 무엇보다 드래곤의 수면은 휴식과 재충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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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게 자는 거지 뭐가 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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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니라. 드래곤의 수면은 성장한 심장의 마나만큼 육신을 성장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느니라. 즉, 잠만 자도 강해진다는 소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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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늘어진 채로 으스대는 이그나투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가느다란 몸에서 힘이 쪽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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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은 천 년간 잠들지 못했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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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이라. 애초에 그렇게 오래 잠을 참을 수 있다는 게 대단한데. 아니, 참으면 안 되는 걸 억지로 참아서 지금 상태가 영 안 좋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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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옳다. 처음 300년 정도는 의지로 버텼느니라. 허나, 이 몸의 의지는 완벽하지 않았고, 결국 여러 마법과 약의 도움을 받아 지금껏 버텨왔건만……슬슬 한계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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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잠들면 몇 년 뒤에 깨어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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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느니라. 이 몸이 최후의 드래곤이라 물어볼 이도 없고, 천 년간 잠을 참은 드래곤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기에.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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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한숨을 내쉬는 이그나투스. 어쩐지 이 짧은 사이에 한층 나른함이 더해진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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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십 년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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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깨어있으면 20년 잠들어 있어야 하니, 단순 계산해서 10배라 쳐도 200년은 잠들어 있어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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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헌트를 보았기에 장담할 수 있다. 마탑은 강하고, 준비는 철저하지만, 이그나투스 없이 100년 넘게 서부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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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몸도 준비를 게을리하지는 않았느니라. 결국 중요한 것은 사룡 모르테우스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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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그나저나 아까 모르테우스가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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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의 일이니라. 동족을 배신하고, 그런 주제에 미친 언데드가 되어버린 작자를 상대함에 주저라는 선택지는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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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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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잘라 말하는 이그나투스의 태도에 더는 무어라 물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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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만. 조금 전에 보니까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이며 절벽 너머로 떨어뜨리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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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다시 본론을 돌아가자면, 이 몸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몸의 부재를 준비해 왔느니라. 구체적으로는 끝없이 되살아나는 언데드 군세, 혹은 사룡 모르테우스. 둘 중 하나는 완전히 봉인하는 식으로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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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봉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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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던전의 관리자로서는 조금 듣기 불편한 말이었겠구나. 이 몸이 깨어날 때까지 버텨줄 봉인이라고 정정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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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이 악신의 하반신을 봉인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무수한 몬스터를 틀어막는 장치라는 걸 떠올린 걸까. 머쓱한 어조로 말을 덧붙이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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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대충 사정은 알겠으니까. 나를……자하브의 힘을 이용해 강화시킨 용아병도 그중 하나인 셈이겠네. 이그나투스 네가 잠들면 용아병을 지금처럼 생산하지 못할 테니, 소모품처럼 써먹는 전략에 금방 한계가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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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자하브는 영특하구나. 아니, 전투와 관련된 일에는 언제나 그러했지. 정답이니라. 한번 쓰고 버릴 수 없다면, 오래 쓸 수 있는 용아병을 만드는 것이 최선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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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말한 이그나투스가 내게서 잠시 건네받았던 오나홀을 다시 내밀었다. 힘이 없어서인지 한 손이 아닌 양손으로 조심스레 잡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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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부탁이니라. 강렬한 태양의 마나와, 이 몸의 불길을 품은 이빨과 비늘이 만나 만들어진 용아병이라면 분명 언데드들을 틀어막을 수 있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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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만으로는 부족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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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용아병들이 언데드들을 상대하는 사이에 이 몸이 준비한 다른 안배로 모르테우스를 상대할 예정이니 걱정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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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 말은 다른 준비는 없냐는 질문이 아냐. 그 모든 것들로 충분하냐는 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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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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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꾸욱 다문 이그나투스. 그런 그녀를 향해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위화감을 설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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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오래 못 버틴다는 것을 알고, 이전부터 준비해 온 것이 있다면, 그런 걸 굳이 숨길 이유가 어디 있겠어. 이곳의 언데드들은 이성을 거의 잃었다면서. 당장 와일드 헌트가 시작될 때마다 시험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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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자신의 준비가 적절했는지, 부족한 점은 어디인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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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헌트를 상대하기 수월해짐에 따라 이그나투스 본인에게 가해지는 부담도 덜 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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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그나투스는 그러지 않았다. 언제나 그러하듯, 직접 날아가 브레스와 마법을 쓰고, 마탑 사람들에게 힘을 과시하며 와일드 헌트를 밀어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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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준비한 안배라는 것들에 큰 결함이 있는 거겠지? 이번 일도 뭐라도 하나 얻어 걸려라 하는 발버둥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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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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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으로 오나홀을 쥔 채, 이쪽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이그나투스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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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자하브는 성가시구나. 천 년 전에도 지금도 이런 쪽으로는 감이 좋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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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자하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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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는 사이. 이그나투스가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 후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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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그대의 말이 옳다. 이 몸은 정말 여러 준비를 했느니라. 드래곤 하트의 조각을 넣어 마도구를 만들기도 했고, 마나만 불어넣으면 되는 설치형 대마법을 100개 이상 중첩시켜보기도 했으며, 아예 이 몸을 대신할 존재를 길러내기 위해 제자를 들여보기도 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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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메이킨 쪽을 바라보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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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이러한 사정까지는 몰랐는지 얼떨떨해하는 표정을 짓는 메이킨이었으나, 정작 이그나투스는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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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전부 실패했느니라. 드래곤 하트는 떨어져서도 본체와 연결되는 성질이 있더구나. 하여, 이 몸이 직접 인정한 자가 아니면 기껏 만든 마도구를 사용할 수 없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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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네가 몇십 년이 아니라 몇백 년 단위로 잠들어야 한다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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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니라. 이 몸이 인정한 이가 변절할지도 모를뿐더러, 설령 마지막까지 세상을 위해 헌신한다 해도 수명이 다하면 그 이후는 어찌할 방도가 없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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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너무 많은 마법을 중첩시키면 주변을 침식하여 이차원의 존재를 끌어당기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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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까지 세워 비전을 전수했건만, 정작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제자는 너무나 적고 그나마도 단신으로 모르테우스를 몰아붙일 정도는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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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몸도 크게 기대를 한 것은 아니니라.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발버둥 친 것에 불과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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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테우스가 그렇게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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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암. 언데드가 되며, 이지를 잃고 자연스레 마법 또한 다룰 수 없게 되었다고 하나……마지막 드래곤 로드이니라. 육신과, 변질된 죽음의 마력만으로도 이곳의 아이들 정도는 한입에 씹어 삼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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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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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부의 몰락은 피할 수 없고, 풀려난 와일드 헌트가 제국을 종횡무진 헤집고 다니는 것 또한 확정된 미래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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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게 무슨 소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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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소소하게 몸을 팔아서(?) 비자금을 마련하려던 생각이었건만……안락한 추방 라이프 같은 건 사실 없었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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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 내가 강화 용아병 제작을 돕는다 해도 확실하게 와일드 헌트를 막아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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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가 아니라 강화 용아병으로도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니라. 물론, 자하브의 혈계능력과 이 몸의 속성은 궁합이 좋으니 어쩌면 예상외의 결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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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자하브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지닌 것은 태양의 마나가 아니라 정순한 화속성 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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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레드 드래곤인 이그나투스와 동일한 계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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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미친 연금술사가 만든 영약이 드래곤 하트에 비할 바는 아닐 테니 하위호환이라고 해야 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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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가 기대한 혹시나의 가능성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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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쩔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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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법은 정말 쓰고 싶지 않았지만, 나의 추방 라이프와 제국의 수많은 생명이 걸려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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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고 싫고를 가릴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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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오를 다진 뒤. 진지한 목소리로 이그나투스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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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 드래곤은 마법의 조종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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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 조금 보태자면, 이 몸은 현시대 모든 마법사들의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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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처음 보는 마법이나, 원리는 모르고 눈으로 외운 마법도 금방 펼칠 수 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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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마법이냐에 따라 다르겠으나, 어지간한 것은 될 것 같다만……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그러는 것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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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그나투스. 그런 그녀를 향해 쓸개를 토해내 씹어뱉는 듯한 거부감을 억지로 억누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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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타나토스의 침상이라는 흑마법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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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처음으로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흑마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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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서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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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타나토스의 침상이라는 흑마법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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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연금술사를 죽이고, 실험실에서 탈출한 이후. 살아남다 보니 어마어마한 수준의 흑마법 저항력을 지닌 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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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조차 흑마법사 놈들을 상대하며 죽기 직전까지 몰린 적은 여럿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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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는 대부분 함정에 빠지거나, 흑마법사 놈들이 다른 강자를 통해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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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하게 흑마법에 당해 죽을 뻔한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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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 타나토스의 침상이라는 마법에 당했을 때를 제외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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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에서 튀어나온 마법 이름에 이그나투스가 움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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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본 적은 있는 마법이니라. 허나, 들어보기만 했을 뿐. 이 몸조차 실제로 본 적은 없는 마법이거늘. 에녹. 그대는 방금 말한 것이 어떤 마법인지 알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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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직접 당해보기까지 했으니 잘 알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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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신이 조금 특수한 신이라고는 하나, 어찌됐건 신의 이름이 들어간 마법 아니느냐. 권능의 일부를 담았거나, 적어도 권능을 닮은 마법일 터. 그걸 맞고도 이리 살아있단 말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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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사정이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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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사정이 있었길래 비극의 밤에도 보기 힘든 마법에 당했단 말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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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내가 칼립소 영지 출신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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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들어본 적은 있느니라. 꽤나 최근까지 본인이 어떤 피를 타고났는지 모르고 있다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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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직도 내 혈통이 어디서 기인된 것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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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그리고 칼립소는 온갖 쓰레기들이 넘쳐나는 곳이라 말이지. 조금 폭력적인 유년기를 보냈다고 해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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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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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의 흑마법사 지부랑 살짝 원수진 게 있어서 죄다 박살 냈거든. 그러다 마지막 발버둥인지 지부장 같은 녀석이 자신을 제물 겸 미끼 삼아 발동한 마법이 타나토스의 침상이었어. 이야. 그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당시의 일을 이렇게 써먹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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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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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로 찢어진 눈을 멍하니 끔뻑이는 이그나투스.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손에 들고 있는 오나홀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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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컹물컹한 것이 묘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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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당대의 자하브여. 칼립소의 흑마법 지부라고 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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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문제라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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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마탑을 운영하는 입장인 만큼, 흑마법사 놈들의 행태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약간 더 알고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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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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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칼립소에는 흑마법사 지부가 없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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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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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가 상대했던 건 대체 뭐였다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칼립소에서의 모든 일이 내 망상일 리는 없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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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이그나투스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녀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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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에 있는 것은 지부가 아니라 본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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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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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다. 대륙에 퍼진 모든 흑마법사들의 고향. 모든 금지된 비의가 집중되는 곳. 신위를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들이 고인 응달……그것이 칼립소의 흑마법사들을 부르는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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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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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진짜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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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흑마법사 놈들은 말이 통하는 대상이 아니라 심문이 별 의미 없었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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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충격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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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조금 이해되는 것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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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서 만난 흑마법사나, 일전에 나를 노리고 자하브 성까지 찾아온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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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들은 나를 보고 고향의 파괴자라는 식으로 불렀었지. 당시에는 그냥 칼립소 출신 흑마법사 생존자인가 싶었는데……말 그대로 내가 놈들의 본부를 박살 냈다는 의미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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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안이 벙벙해져 눈만 끔뻑이는 것도 잠시. 나보다도 더 어이없어하는 이그나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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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흑마법사 놈들의 본단이라면, 신의 이름이 담긴 마법이 있을 수 있지. 놈들의 수장이 스스로를 제물 삼았다면 시전하는 것도 불가능을 아닐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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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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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거기서 살아 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만……아무래도 정말 모르고 있었던 눈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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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흑마법사 놈들과는 대화가 성립하질 않으니까. 수준 낮은 녀석이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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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확실히 그것도 그렇구나. ……뭐어.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기로 하자꾸나. 아무래도 에녹 그대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이 많은 모양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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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일단 이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기로 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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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이그나투스를 통해 나중에라도 다시 들을 수 있는 내용 아닌가. 우선은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기로 했다. 당장 급한 건 이쪽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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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종이가 필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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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 가져와 주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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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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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레 주변에서 어버버거리는 제자, 메이킨을 부려 먹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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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이 종이를 찾아 잠깐 나간 사이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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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토스의 침상이 어떤 마법인지는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직접 당해본 입장에서 한번 설명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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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더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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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하자면 타나토스의 침상을 일종의 즉사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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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껙! 하고 죽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제대로 걸리면 저항의 여지조차 없이 그냥 죽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즉사 마법인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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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이 시전된 순간 항거할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와. 나는 흑마력에 저항할 수 있는 체질이라 버틸 수 있었지만……대부분은 못 버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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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갇힌 몇몇 흑마법사 놈들의 최후를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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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이 눈을 감고, 잠에 든 순간. 육신이 빠르게 나이를 먹더니, 순식간에 쭈글쭈글한 노인이 되어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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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듯이 조용히 죽는 것을 호상이라고 하던가. 타나토스의 침상은 이를 위한 마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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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고통도, 고민도, 두려움도 없다. 그저 잠에 들고 천수를 다하여 생을 마감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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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건 수명이 100년 남짓한 인간이니까 몇 분만에 죽음에 이른 거잖아. 수명이 훨씬 긴 드래곤이라면 중간에 마법을 끊어 빠르게 필요한 수면을 보충할 수 있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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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은 있겠구나. 듣자하니 타나토스의 권능을 담은 것이 아니라, 이를 흉내 낸 닮은 마법이니 개량할 여지는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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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타나토스의 침상은 즉사 마법이라면 즉사 마법이지만, 그 원리는 결국 시간의 가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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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들 살아간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는 동시에 죽어간다는 말이기도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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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죽어가는 것들이라고도 부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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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타나토스의 침상을 처음 개발한 마법사는 이러한 부분에 착안하여 이름을 붙인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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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메이킨이 적당한 크기의 종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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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여기 종이 가져왔어요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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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느니라. 어서 여기 있는 에녹에게 건네주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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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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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에게 종이와 펜을 받아 들자마자, 기억 속의 풍경을 최대한 똑같이 따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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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직전까지 몰렸던 경험이라 그런지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는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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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터운 밀실과, 그 안에 그려진 복잡한 마법진을 옮겨 되는대로 전부 옮겨 그리고는 이그나투스에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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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빽빽하게 채워진 종이를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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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아느냐. 죽음의 신 타나토스는 신들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신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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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악신이라도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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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수는 있으나, 이는 물리쳐야 할 사악이 아니니라. 오히려 세상을 순환시키는 중요한 축이거늘. ……타나토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는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탐탁지 않아 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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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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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느니라. 어이가 없겠지. 하지만 사실이니라. 타나토스는 죽음은 완벽한 시스템이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 이를 위해서는 죽음을 지배하고, 마음대로 뒤집을 수 있는 자신의 존재는 불필요하다고 여겼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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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놈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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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밤 이후로, 살아남은 신들은 북부의 만신전에 틀어박혔기에 신언을 들을 일이 없어서 모를 뿐. 사실 필멸자들의 눈에 비친 신들은 항상 미친 것들이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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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 웃은 이그나투스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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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타나토스는 자신의 존재를 불필요한 것이라 여겨 곧장, 스스로에게 죽음을 내렸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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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했다는 소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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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죽음의 신이라 금방 부활해 버리고 말았다더구나. 아마 잠깐 잠들었다 깬 감각이 아닐까 싶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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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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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니라. 에녹 그대가 그린 마법진을 보아하니, 타나토스의 침상은 타나토스의 죽음과 부활을 마법적으로 해석한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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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 대로 그린 마법진. 이를 내게서 받아 든 이그나투스.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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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라면 이 몸이 어떻게든 뜯어 고쳐볼 수 있을 것 같으니라. 같은 마법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비슷한 효과는 나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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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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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지난 몇백 년간 고민한 모든 방법들 중 가장 가능성 높은 방법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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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중얼거리는 이그나투스. 그런 그녀를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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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우면 보수는 2배로 줘. 일부는 금화 말고 보석으로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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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든 그리 하마.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으니. ……다만, 아무리 나라도 100만 골드 어치의 금화와 보석을 추가로 구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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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여기서 기다리면 되지. 내가 알려준 마법이 잘 작동하는지도 확인해 봐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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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문제 생겼다고 뒷말 나오면 곤란하니, 이런 건 확실히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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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기존 계약은 파기해도 이건 좀 받아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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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받아들며, 내게 다시 돌려준 오나홀을 흔들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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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판 오나홀? 이걸 어떻게 참아. 한번 사용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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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벼운 생각이었건만, 어째 이그나투스의 반응이 영 미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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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주려고 만든 것이니 괜찮다만……시료를 따로 채취할 것이 아님에도 그런 마도구가 필요한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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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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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그대에게는 미색이 뛰어난 종자가 하나 있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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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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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해하는 내게 보란 듯이 턱을 까딱여 카렌을 가리키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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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뜻을 눈치채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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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은 오나홀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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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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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서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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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인 뒤. 그녀는 즉시 잠들 준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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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잠시 마탑에 머무르며 이를 옆에서 지켜보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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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이유는 아니다. 이그나투스가 말했던 것처럼, 100만 골드에 달하는 골드와 현물을 재차 마련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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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내 기억에 의존해 재현한 마법에 이그나투스가 자신의 미래를 걸고 있으나, 나 몰라라 하면서 돌아가기도 좀 그렇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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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푹신한 의자에 눕듯이 기댄 자세로 열심히 일하는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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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의 본체가 들어갈 정도로 거대한 건물. 그 내벽을 꼼꼼히 감싸는 복잡한 수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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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복잡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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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느니라. 이 몸이 사용하기 위해서는 손봐야 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으니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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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내 옆에서 반쯤 누운 자세로 태연히 대답하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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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면 휴양지에 놀러 오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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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야 마법은 문외한이니 그렇다 쳐도 넌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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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모르는구나. 아카데미에서도 교수는 감독만 하지 실무는 수제자들이 하느니라. 하물며 마탑은 어떻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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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인 너는 누워서 어디 잘못된 부분 없나 확인만 하고, 실제로 마법진 그리는 건 네 제자들이 한다는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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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러하니라. 아쉽게도 당대의 제자 중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아이는 없지만, 다들 고위 마법사이니 마법진 정도는 잘 그릴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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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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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앞에서 열심히 작업 중인 마법사들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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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외모. 경지에 오른 기사나 마법사는 노화가 느려지는 것을 감안했을때, 실제 나이는 훨씬 많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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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외모의 마법사들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벽과 바닥에 마법진을 새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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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가끔 실수하면 사형으로 보이는 이가 혼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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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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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의 유구한 전통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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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는 어깨를 으쓱였지만, 내 눈에는 악덕 교수와 대학원생 정도로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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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다 늙을 때까지 논문 통과도 안 시켜주는 악덕 교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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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끔찍하기 그지 없는 풍경이었으나, 이그나투스의 모든 제자들이 마법진 작성에 동원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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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는 마탑 운영을 위해 열외되었고, 일부는 순수하게 경지가 부족하여 작업에서 제외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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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다닥 뛰어다니며, 사형들의 심부름을 하는 메이킨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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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킨. 이 몸이 마실 음료도 같이 내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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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 알겠어요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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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마시던 것으로 부탁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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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마시던……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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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몇 년 됐다고 벌써 잊어버린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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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제자를 향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을 보낸 이그나투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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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력으로 키운 박하 잎을 우려낸 차에 설탕 대신 시럽을 다섯 스푼 추가하고, 토핑으로는 크림과 초코칩을 3:1 비율로 올린 뒤, 가장 위에는 비스킷을 올려오면 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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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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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평소에 뭘 먹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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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잎으로 우린 차에 시럽을 듬뿍 섞고, 크림에 초코, 비스킷까지 올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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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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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그건가. 뒤지게 달달한데다가 심지어 따뜻하기까지 한 민트초코에 바삭한 비스킷 올려놓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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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의 괴상한 식성에 몸이 절로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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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나 또한 목이 말랐던 것은 사실이기에 손을 까딱여 카렌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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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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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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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우유로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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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말씀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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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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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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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카렌. 동시에 주변이 갑자기 웅성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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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라면……역시 그건 뜻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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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잖나. 당연히 그런 뜻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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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저 작은 곳에서 나올 게 뭐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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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말이야.저 정도면 마탑주님과 비슷한 수준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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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터무니없는 오해를 산 것 같아 황급히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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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우유라는 건 소의 젖을 말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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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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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그럼 왜 그렇게 긴장한 표정을 지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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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주님이 질 수 없다는 듯이 복잡한 음료를 주문하실 줄 알고, 한 번에 외우려 집중하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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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맛이 그렇게 특이하진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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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뇨, 입맛의 문제가 아니라 복잡한 풍미의 음료는 귀족 사회에서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니……아, 혹시 모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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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고, 알았어도 그냥 우유나 가져오라고 했을 거야. 내가 먹고 싶은 거 먹어야지, 남들 시선 신경 써서 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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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이자,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이고는 멀어지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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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에 이그나투스가 의외라는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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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젖이 아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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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집에 와서 그런 걸 찾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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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전대의 자하브는 그랬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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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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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고로 전전전대의 자하브는 코카트리스의 피를 마시고 싶다고 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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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지가 극단적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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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젖 또한 본래는 피였으니, 사실 일관된 취향이니라. 그대는 아무래도 평범한 소의 젖을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지만. ……혹시나 해서 묻겠다만 젖소 수인 여성의 젖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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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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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솔직히 좀 궁금했기에 대답 대신에 질문을 돌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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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손봐야 한다는 건 어떤 부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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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 아니니라. 본래 타나토스의 침상은 안락하지만, 절대적인 죽음을 선사하기 위한 마법. 그러나 이 몸은 중간에 깨어나야 하니, 마법이 정상 작동하는 선에서 의도적으로 틈을 만드는 것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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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근데 원래는 흑마력으로 작동하는 마법인데, 이 부분은 괜찮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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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아, 마법에는 문외한이라고 했었구나. 사실 흑마법은 그 자체로 사악한 마법이 아니니라. 당연히 흑마력 또한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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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좀 믿기 어려운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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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사람을 죽인다면, 죽인 사람의 잘못이지 도구인 검에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건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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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껏 흑마법사와 싸우며 수많은 흑마법을 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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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확언할 수 있다. 흑마력은 사람의 어두운 면을 자극하고, 흑마법은 잔혹한 방식으로 수련하는 마법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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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흑마법의 대부분은 저주, 네크로맨시, 이차원 간섭 같은 흉흉한 것들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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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그나투스는 내 말을 듣고도 희미한 미소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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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이 다른 마법과 다를 것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그저 선악의 구분 이전에 존재하던 것이라는 의미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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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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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선과 악의 경계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하는 것 아니더냐. 지금이야 대부분의 나라가 네크로맨시를 금지하지만, 비극의 밤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죽음을 다루는 마법이 금기가 아니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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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럼 그때는 아무나 언데드를 부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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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를 부리는 것보다 언데드를 부리는 쪽이 훨씬 효율적인데, 무턱대고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무엇보다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고대로부터 이어진 필멸자들의 숙원. 기본적인 선은 있었으나, 신들도 네크로맨시 그 자체를 문제 삼진 않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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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 볼을 익히는 것이 불법은 아니다. 당연히 사용하는 것도 문제는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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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허가 없이 사람을 향해, 누군가의 재산을 향해 파이어 볼을 날리는 건 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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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그런 느낌으로 네크로맨시가 허용된 시기가 있었다고 말하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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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이 어린 시절의 일이니라. 만약 그보다 훨씬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더 많은 것들이 허용되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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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지 알겠네. 세대를 거듭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많은 규칙이 생겼겠지.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금지된 마법이 처음부터 금지된 마법은 아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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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고, 또 올라가다 보면 맞닥뜨리는 것을 마법사들은 원류라고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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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세한 학파로 분화되기 이전. 고대 마법을 넘어, 원시 마법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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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는 공격 마법의 시초였느니라. 남을 해하고자 하는 마음 그 자체가 저주이고, 모든 공격 마법은 여기서 출발하는 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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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맨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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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죽음을 극복하려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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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연금술, 시공간 계통 마법, 계약 마법 등등. 온갖 자질구레한 마법들은 그에 상응하는 흑마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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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색이나 되는대로 섞다 보면 결국 물감이 검게 물드는 법. 흑마력 또한 마찬가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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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흑마력에서 느껴지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성질은……마법이 원래 그런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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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았느냐. 필멸자의 눈으로 보면 아무리 친근한 신이라도 광기에 절은 존재라고. 그리고 마법은……필멸자의 몸으로 신위에 닿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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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신의 이름을 집어넣은 마법이 하나같이 대마법 취급 받으며, 가장 고난이도에 속한다고 덧붙이는 이그나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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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했던 내용이긴 한데, 정작 이를 듣고 나니 한번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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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씩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자니, 이그나투스가 고개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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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대는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는구나. 내 장담하마. 역대 자하브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지성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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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갑자기 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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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는 자하브 디스에 어이가 없었으나, 이어진 이그나투스의 정리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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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생각하거라. 흑마법은 사악한 것이 아니라 야만적인 것이니라. 그리고 문명이 자리 잡고, 그만큼 제약으로 둘러싸인 지금 시대에 무절제한 야만은 불필요한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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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알겠네. 즉, 흑마법은 지난 시대의 패배자고 흑마법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분탕종자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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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파격적인 비유지만, 얼추 그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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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메이킨이 대령한 입에 담기도 두려운 음료를 한 모금 홀짝인 이그나투스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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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비극의 밤 이후. 트라고데아의 축복을 받은 탓에 지금의 흑마법사들은 많이 변질되었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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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달랐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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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어기고, 멋대로 사람을 납치해 인체 실험 재료로 삼으며, 새 마법을 시험해 보겠다며 마을 하나를 몰살시키는 건 예전부터 그러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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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부분이 있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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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필요에 의해 저지른 일들이라면 비극의 밤 이후에는 불필요함에도 그것이 더 비극적이라는 이유로 저지르는 경우가 많아졌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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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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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흑마법사들의 과장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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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가 높아질수록, 그러니까 자신의 마력에 트라고데아의 신력을 많이 섞을수록 흑마법사의 정신은 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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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투는 연극투처럼 변하고, 효율이 아닌 흥미를 쫓기 시작하며, 스스로의 죽음마저 유희의 일종처럼 여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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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그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난 시대의 꿈을 잊지 못한 분탕종자들이 이제는 자신의 의지로 분탕을 치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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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히 이해했어. 갱생의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보이는 족족 죽이면 된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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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다만,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그대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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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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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들은 신위에 매료되어 스스로를 광기에 빠뜨린 자들. 그런 이들이 트라고데아의 신성에 휘둘려 한층 본질에서 멀어졌느니라.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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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소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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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다. 그리고 에녹 그대는 흑마법사들의 본부를 무너뜨리고, 수장을 쓰러뜨렸느니라. 이루어질 수 없기에 더욱 집착하는 비원을, 천 년간의 성취를 박살 낸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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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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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이고는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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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마법사 놈들이 나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소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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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놈들의 집착이 상상 이상으로 지독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만, 그럴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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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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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오하구나. 허나, 그것이 사람의 몸으로 태양을 담은 자하브라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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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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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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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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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시간은 훌쩍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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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헌트를 한차례 밀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위험한 낌새도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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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마법사들이 이그나투스의 감독하에 뺑뺑이 치다 보니 타나토스의 침상을 개량하고 준비하는 과정 또한 순식간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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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가 마탑에 도착한 지 열흘째 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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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는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와, 마법진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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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이 몸이 잠에 들면 정확히 20시간 뒤에 깨어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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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금방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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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이 20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거든 대신 처리해 줄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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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금만 제대로 지급한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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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다른 어디도 아닌 드래곤이자, 마탑주인 이 몸 아니더냐. 세월에 묻힌 다른 동족의 레어를 털어서라도 지불할 테니 걱정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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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게까지는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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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드래곤이 한참을 키득이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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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일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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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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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농담과, 그보다도 더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건물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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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오는 것과 동시에 문이 닫히며 완전한 암실이자, 밀실이 되는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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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조차 흠칫할 정도로 막대한 마나가 집중되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두터운 벽 너머로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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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밖에서도 숨소리가 들리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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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자고 일어나면 덩치가 더 커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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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감안하고 건물을 준비했다고 들었지만, 잘 상상이 안 간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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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웃으며 내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갔다. 20시간이면 나도 한 숨자고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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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밤중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괴성에 잠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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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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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룡, 모르테우스의 울음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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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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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헌트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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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와일드 헌트로부터 고작 열흘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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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와일드 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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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가 천년만의 잠에 들고 한나절쯤 지났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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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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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괴성에 잠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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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오는 듯한, 끝 모를 울림. 사람의 본능적인 공포와 거부감을 자극하는 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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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번 들어본 것이지만, 잊을 수 없는 소리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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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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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의 울음소리는 사룡 모르테우스의 비명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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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자마자 습관적으로 몸 상태를 확인했다. 딱히 이상은 없다. 짧게나마 방금까지 잠을 자고 있었던 덕분인지 오히려 컨디션은 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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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문을 열고 바깥을 살펴보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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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조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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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서 일렁이는 마력의 방벽이 보였다. 마탑에 설치된 대 언데드용 방호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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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차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거칠게 열리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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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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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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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냐 카렌. 하긴. 방금 전의 소란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없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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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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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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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만, 본래 한참 뒤에 일어나야 할 와일드 헌트가 열흘 만에 재개됐습니다! 분명 이상현상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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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지. 남부의 던전 역류가 1년 만에 다시 일어난 것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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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하게 대답하실 때가 아닙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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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될 수 있는 만큼은 싸워볼 생각인데. 이그나투스가 아침 먹고 잠들었으니 해 뜰 때쯤이면 깨어나겠지. 그때까지만 버티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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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오러를 순환했다. 약간 남아있던 잠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고, 정신이 또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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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지금 상황 또한 선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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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카렌은 조금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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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리고 가주님께서는 이 땅의 주인이 아니십니다. 이곳에서 굳이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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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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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막한 목소리로 카렌을 불렀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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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말랑한 볼살과,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 이제야 좀 조용해진 카렌을 향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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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다면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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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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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여기까지 텔레포트로 한 번에 왔어. 돌아가는 길 따위는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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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 으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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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그래. 남아있는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에게 자하브로 향하는 텔레포트를 시전해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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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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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끔뻑이는 카렌. 이제 좀 침착해진 그녀의 모습에 낄낄 웃으며 손을 놔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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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이야기야. 마탑은 절대 혼자의 힘만으로 와일드 헌트를 이겨낼 수 없어. 어쩌면 동이 틀 때까지 버티는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버티지 못할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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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일이지만 자하브와는 관련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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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짧구나 카렌아. 하긴. 거의 평생을 자하브에서만 살았다고 했지. 이참에 잘 기억해 둬. 남부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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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경우를 상정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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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열흘 전에 와일드 헌트를 막아내느라 비축해 둔 자원 대부분을 소모한 탓이건, 이그나투스 없이는 힘이 부족하건, 그냥 운이 없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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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마탑이 지금의 와일드 헌트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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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저 장벽은 부서지고, 모르테우스와 막대한 언데드들이 구덩이를 기어나와 대륙으로 쏟아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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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이그나투스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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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그나투스 또한 새로운 본 드래곤이 되어 와일드 헌트에 합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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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로도 버거웠던 본 드래곤이 두 마리로 늘어난 와일드 헌트를 과연 제국이 막아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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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 혈통 그 자체에 힘이 흐르는 이 세계의 특성상 황실의 무력은 막강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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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많은 피해가 있을 것은 확실하다. 약해진 자하브는 덩달아 휘청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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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황실마저도 와일드 헌트를 제때 막아내지 못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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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정말 최악 중에서도 최악으로 손꼽히는 가능성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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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헌트는 막대한 죽음의 기운을 몰고 다니며, 그 탓에 희생자들을 언데드로 삼아 합류시키는 특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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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기사를 쓰지 않고 무생물인 용아병을 쓰는 것도, 사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여차하면 이그나투스 본인이 직접 나선 것도 그래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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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막을 타이밍을 놓친 와일드 헌트는 대륙의 재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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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드래곤이 앞장서고, 과거의 영웅들이 못다 한 전투를 이어가며, 마탑의 마법사들은 물론, 이를 막아 세우기 위한 현시대의 용맹한 자들까지 집어삼킨 죽음의 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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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은 죽은 자들의 것이 되겠지. 산 사람들은 오히려 숨어 살아야 할 테고. ……자하브는 그런 상황을 버텨낼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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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을 막으며 언데드 군세까지 막아낸다? 상성의 문제를 제쳐두고서라도 단순히 역량이 부족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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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결국 4대 대공들이 틀어막던 재앙은 전부 풀려나겠지. ……그 뒤에는 죽지 못해 봉인 당했던 트라고데아가 깨어날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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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전과 달리, 다시금 트라고데아가 강림한 대륙에는 그를 막아설 능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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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세상은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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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기껏 판타지 세상에 환생했으니, 여기저기 둘러보고, 비자금으로 챙긴 돈을 펑펑 써대는 추방 라이프를 보내겠다는 나의 꿈도 더는 이룰 수 없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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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너무 비약적인 상상이에요 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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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도 않아. 아직 글을 읽을 줄 몰라, 카렌 네가 직접 읽어준 대륙의 역사. 그걸 들으며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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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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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롭다. 그 생각밖에 안 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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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지구에서의 삶에서 위기란 기껏해야 미친 강도를 만난다거나, 재수 없이 일어난 사고로 목숨이 위험한 정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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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의 끔찍한 방향으로 상상해 보아도,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하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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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핵무기에는 의지가 없고 이를 날려 보낼 수 있는 이들은 그 위험성을 잘 인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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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 세상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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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전에 망했어야 할 세상을 여러 영웅들과 신들이 힘을 합쳐 꾸역꾸역 살려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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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풀어져도 대륙을 망가뜨릴 수 있는 재앙이 4개나 있으며, 심지어 그중 동부에 봉인된 재앙은 풀려난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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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행방이 묘연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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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 최근의 역사를 큰 흐름으로 살펴보면 칼립소 대공가가 멸문하고, 동부의 재앙이 풀려난 이후. 던전의 역류 간격이 짧아졌고, 와일드 헌트의 발생 빈도가 불규칙적으로 변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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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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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건 그냥 선후 관계일 뿐, 인과 관계는 아닐 수도 있겠지. 다만 아까도 말했듯이 최악을 염두에 둬보자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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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 없으면 대륙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재앙 중 하나가 풀려났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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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전체는 몰라도 일단 제국은 못 버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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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된 변화라 그런 걸까. 아니면 너무 오랜 시간 봉인된 재앙을 가까이에 두고 살아 무뎌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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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은. 아니, 내가 지금껏 만난 이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멸망 위에 기적적으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하는 것 같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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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나라고 진지하게 모든 멸망을 막겠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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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일 없었으면 한다.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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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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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무언가 생각하는 바가 있는지 입을 꾹 다문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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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덕에 평소보다 뽈롱한 카렌의 볼을 양옆으로 쭈욱 잡아 늘리며 히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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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카렌 네가 말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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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를 말인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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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의무는 외적들로부터 사람을 지키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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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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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땡그래진 카렌을 향해 평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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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정말로 복잡한 일은 얼마 없어. 복잡해 보일 뿐이지 사실은 간단한 문제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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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한 적이 쳐들어왔고, 새로 사귄 친구는 푹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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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행히도 다음 날 아침까지만 버티면 모든 게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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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짱쎈 투명 드래곤……은 아니지만, 푹 자고 개운해진 응애 드래곤이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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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괜히 겁을 집어먹고 등을 돌렸다가는 모든 게 무너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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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여기서는 어떻게든 버텨봐야 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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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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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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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평소와 같은 단정한 차림과 무표정으로 돌아와 고개를 꾸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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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가주님. 주인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는 하나, 확실히 시야가 짧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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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래. 알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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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면 이제부터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마탑의 시스템은 가주님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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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나가보고 생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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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병을 소모하는 것을 전제로 짜올린 메뉴얼과 직접 몸으로 싸워야 하는 나는 상성이 좋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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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어디인가. 대륙의 유일한 마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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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똑똑한 이들이 모여있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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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이 뭔가 방법을 찾아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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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이고는 방을 나서자, 자연스레 반보 떨어진 거리에서 뒤따라오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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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나와 정문 쪽으로 향하자 점점 커지는 전투의 소음.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모르테우스의 울음소리와 누군가의 비명이 뒤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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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하게 달리는 마법사들과 이를 서포트하는 아직 어린 제자들을 지나, 정문에 도착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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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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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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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의 마력이 느껴지는 이글거리는 사슬에 묶여 발버둥 치는 모르테우스와, 말 그대로 뼈가 부서져라 장벽을 두드리는 언데드를 마법으로 폭격하는 마법사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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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생각보다 할만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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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조금 위쪽. 타나토스의 침상 마법진을 설치할 때 봤던 늙은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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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가 없는 지금, 마탑의 결정권자나 다름없는 최고참 제자가 피를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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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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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르테우스를 구속하던 사슬이 흐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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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알겠네. 저 사슬은 이그나투스가 말했던 자신이 없을 때를 대비한 마도구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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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조건이 까다로워 사실상 실패작 취급 받았다는 대 모르테우스용 마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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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실패작이 왜 실패작인지 몸소 증명하고 있는 중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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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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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차며 마탑의 외벽을 밟고 미끄러지듯이, 위쪽의 테라스 비슷한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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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흑! 누,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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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나투스의 대제자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평정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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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대공이셨습니까. 이곳은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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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든 위험할 것 같아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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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이고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보이는 전장. 아마 이곳이 사령탑이자, 마탑의 모든 마법을 조율하는 곳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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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뒤를 돌아보자 실제로 복잡한 마도구들과, 대제자를 돕기 위해 분주하게 마력을 토해내는 다른 장로들이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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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없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저거. 얼마나 버틸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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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늙은이가 최선을 다한다면 1시간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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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 마도구는 너 혼자만 쓸 수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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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가락에서 강렬한 열기와 마나를 내뿜는 반지를 가리키자 고개를 젓는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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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스승님의 제자들 중 실력을 인정받은 이들은 모두 쓸 수 있습니다. ……다들 오래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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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짧게나마 모르테우스는 제압할 정도는 되지만, 부담이 너무 커서 사람이 못 버티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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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강렬한 마나의 흐름이다 보니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나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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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반지는 단순한 가늠좌, 내지는 열쇠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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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을 만들어 내는 마도구는 이 마탑 그 자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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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른 장로들이 번갈아 가며 마도구를 사용하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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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한다면 스승님이 깨어날 때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만……저희가 상대하는 것은 와일드 헌트이지 모르테우스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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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전력을 다하면 모르테우스를 동틀 때까지 붙잡을 수는 있지만, 다른 언데드들을 상대하지 못한다는 소리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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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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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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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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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는 그를 향해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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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 열어. 전부는 아니고, 사람 한 명 드나들 정도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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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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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테우스를 제외한 남은 언데드들. 내가 막으면 되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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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자하브 대공이시라지만, 저만한 수의 언데드를 어찌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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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 양학은 자하브의 소양이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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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나는 자하브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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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에녹을 본 유리아의 첫인상은 납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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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제벨라 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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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거의 매주마다 날아오던 제벨라의 편지가 요즘 들어 에녹에 대한 칭찬으로 도배된 이유를 이해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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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는 자하브의 혈계능력을 발현시키지 못했으나, 단 한 가지 물려받은 것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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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이 바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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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적으로 오러의 사용법을 깨우치고, 직감적으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이가 누구인지 알고, 직감적으로 승리로 이어지는 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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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의 조언에 따라 단순한 무재 정도로 포장해서 드러내긴 했으나, 그녀의 직감은 혈계능력을 발현시킨 자하브의 혈족들보다도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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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쯤 되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배우자를 통해 대를 거듭하며 자연스레 품종개량 비스무리한 것이 이루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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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능력을 제외하고도 여러 재능을 타고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가능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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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직감에 근거하여 본 에녹은 배부른 맹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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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는 반쯤 눕다시피 걸터앉았고, 막 침대에서 일어난 것처럼 눈에는 나른함이 가득하며, 실제로 하품까지 해대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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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져 보이는 몸은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눈매는 나른할지언정 동공을 쉴 새 없이 주변을 탐색하고 있으며, 하품은……그냥 하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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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나온 것이라는 사실까지는 몰랐으나 유리아에게는 그것이 일종의 자신감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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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한번 와볼 테면 와보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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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제로 겉모습만 보고 어설프게 덤벼들었다가는 저 송곳니에 목덜미를 물어뜯기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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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입장에서는 칼립소에서 살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 버릇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유리아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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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직감이 에녹을 보는 순간 계속해서 경종을 울렸다. 저건 위험한 존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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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경고. 당장 도망치거나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신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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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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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위험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리고 머리를 들이밀지만 않으면 먼저 공격해 오는 사람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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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로부터 이미 에녹이 자하브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성정의 사람인지 전해 들은 유리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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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언니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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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 가기 전. 아직 자하브 성에 살던 시절의 유리아는 보았다. 자하브의 혈족이 얼마나 잔학해질 수 있는지, 그들이 반쯤 가둬둔 제벨라에 무슨 짓을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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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벨라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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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에 의존한 판단이기에 제벨라가 자신의 형제들을 전부 죽였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유리아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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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약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제벨라가 강인한 사람이라는 정도는 안다. 그리고 잠겨있는 문 너머로 펑펑 울었던 날 이후로 자신을 아끼고 있다는 것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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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제벨라가 한 말이니 분명 허튼소리는 아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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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직감으로도, 제벨라의 안목으로도 에녹이 다른 자하브의 혈족과 달리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든 유리아의 가슴에 기대가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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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사이지만, 제벨라 이외에도 제대로된 가족이 생길 거라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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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단상 밑을 훑어보던 에녹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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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그것처럼 샛노란 동공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그녀의 직감이 시끄럽게 울어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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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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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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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 유리아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으나, 날 때부터 예리한 감각을 타고난 그녀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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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직감과 본능에 몸을 맡기고 되는대로 행동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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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첫눈에 반한다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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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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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으나, 그녀의 직감은 기본적으로 생존본능을 기반으로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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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생존을 위해서는 에녹의 옆자리가 가장 효율적이며, 이를 위해서는 그의 암컷이 될 필요가 있다고 여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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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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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아카데미의 기숙사는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가 나뉘어져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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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사고를 치는 바람에 1년을 유급하기까지 한 유리아는 꽤나 오랜 시간을 여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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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성끼리만 모여있으면, 그것도 한창때의 나이라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야한 이야기에 관심이 쏠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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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아카데미는 평민과 상위 귀족들에겐 배움의 장이지만, 하위 귀족들에게는 일생일대를 건 상향혼의 무대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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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들에게 여러 자극적인 경험담을 듣거나, 비밀스러운 책을 돌려보던 유리아는……안타깝게도 약간 성벽이 뒤틀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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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가문의 잘못된 조기교육, 직감에 과하게 의존하는 습관, 극찬 범벅인 제벨라의 편지를 읽고 쌓인 호감,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접한 금단의 지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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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 결과. 그녀는 패배 근친 야스 조아 조아를 외치는 광인이 되어버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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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대련에서 패배하여 엉덩이를 맞는 도중에도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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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공개 수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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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육이 이렇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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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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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의 엉덩이를 정확히 10대 때리고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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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손바닥에 눌어붙은 것 같은 말랑 쫀득한 감각을 애써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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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야. 이제 정신 좀 차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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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나, 나는 언제나 제정신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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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떤 사람이 제정신으로 자기 오라비랑 결혼하겠다는 말을 하니. 어린애도 아니라 다 큰 녀석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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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언니랑은 할 거면서 뭘 그리 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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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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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명가라 불리는 자하브에서 나고 자란 녀석이다. 나를 제외한 그 어떤 가신도, 심지어 제벨라마저 나와의 혼인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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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또한 필요에 따른 근친을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이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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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자하브 가문이 비상 상황인 것도 맞는 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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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패배 근친 야스 조아 조아 발언을 제쳐두고서라도 할 말은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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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유교 드래곤의 속삭임에 따라, 짐짓 엄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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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교관을 함부로 치는 건 잘못된 행동이야. 다른 어디도 아닌 자하브 본성에서 그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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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모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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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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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언니랑 나를 제외한 다른 자하브의 남자들이 전부 죽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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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계자 다툼이 격해져 서로 죽고 죽였다고 들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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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어떻게 죽었는지가 아니라 죽음 이후의 일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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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내 무릎에 엎드려 있던 유리아가 꿈틀거리며 몸을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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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 무릎에 누워 이쪽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말을 잇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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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의 힘은 결국 홀로 던전을 관리할 수 있는 압도적인 힘에서 나와. 그리고 이 힘은 혈계능력을 통해 유전되는 거구. 하지만 자하브의 모든 남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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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가 곧 망할, 아니 이미 망한 가문이라는 소문이 돌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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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아무리 덩치가 커도 죽은 짐승을 두려워하는 이는 없잖아? 많은 사람들이 자하브에 남은 것들을 뜯어먹기 위해 접근했어. 재력, 땅, 이권, 작위……그리고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능력까지 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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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과장이 좀 심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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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알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최고급 모판이 싸게 풀린 셈이지. 모두가 탐내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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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너무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 같으니 금지. 차라리 과장해서 말하고 다니도록. 이거 가주 명령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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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입으로 모판 같은 소리를 하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자, 표정이 묘해지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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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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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아무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나를 노리더라고. 약간의 협박을 곁들여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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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문제가 터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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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홧김에 팔다리를 두어 개씩 잘라버렸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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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쪽에 문제가 생긴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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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뒷배를 잃은 유리아를 노리던 녀석들은 너굴맨……아니, 유리아에게 역으로 당했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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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니까 팔다리 정도야 금방 붙일 수 있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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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 가문이 나섰겠지. 협박이 섞이긴 했지만, 말로 했는데 검이 날아왔으니 명분도 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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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알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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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하지만 뻔한 일이니까. 아무튼 이해했어. 그때의 일이 문제가 되어서 유급한 거구만. 그리고 교관들은……매수당해서 협박에 시달리는 너를 모른 체 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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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것도 제벨라 언니랑 코넬리아. 그리고 다른 친구 몇이 도와줘서 유급 선에서 끝난 거지 처음에는 퇴학당하는 줄 알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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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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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음. 그래. 완벽히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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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방금 전의 교관 말고 또 매수된 교관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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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긴 한데……실습에 따라온 교관은 저거 하나뿐이야. 왜? 막막 여동생이 괴롭힘당했다니까 화가 나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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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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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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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가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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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벽에서 떨어진 조각 하나를 주워 손가락으로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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쐐애액……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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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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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유리아를 말리려다가 얻어맞은 교관의 팔에 돌조각이 틀어박힌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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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빈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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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예 대공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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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하니, 부상이 심해 보이는군. 아쉽게도 자하브에 상주하는 사제들은 지난 던전 역류의 부상자를 치료하느라 바쁘고, 포션도 다 떨어져서 말이야. 아카데미로 돌려보내는 게 좋아 보이는데……어떻게 생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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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각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당장 아카데미로 올려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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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치를 보던 델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바닥을 나뒹굴던 녀석이 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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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대공 각하! 억울합니다! 무슨 오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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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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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녀석의 말을 끊고 집사장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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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많이 아파서 제 발로 못 간다고 하네. 대신 배웅 좀 나가줘. ……정중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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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에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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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이지 창백해진 표정의 교관을 끌고 나가는 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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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자니, 무릎 위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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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방금 뭐 때문에 엉덩이를 맞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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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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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고민 끝에 유리아의 이마에 딱밤을 놔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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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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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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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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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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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건방지게 야라고 부르지 말고 제대로 오빠라 부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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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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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어진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싸고 있던 유리아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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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 오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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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부르라는 대로 안 부르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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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오라방. 나 엉덩이가 너무 아픈데 좀 쓰다듬어 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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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된다 이 미친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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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를 무릎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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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일생일대의 투자에 성공한 사람처럼 헤실대는 것이 묘하게 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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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와일드 헌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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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을 열라는 말에 기겁한 표정을 짓는 이그나투스의 대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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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자하브 대공이시라지만, 저만한 수의 언데드를 어찌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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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 양학은 자하브의 소양이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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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나는 자하브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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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꺼낸 말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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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모르테우스는 좀 자신이 없어. 이그나투스에게 들어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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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은 사용하지 못하지만, 드래곤 하트는 여전합니다. 그 막대한 마력 전부를 사기(死氣)를 방출하거나, 거대한 육신을 강화하고 움직이는 데 사용할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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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렇지? 단순한 강함에는 나도 자신 있는데, 아무래도 체급 차이라는 걸 무시할 수는 없겠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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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내가 나름 열심히 살아남았고, 오러를 익히며 한층 강해졌다지만 저 거대한 괴물과 드잡이질하는 건 좀 저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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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만 남았다고는 하나, 한때는 드래곤 로드라 불린 고룡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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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른 언데드들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생전에 대단한 영웅들이었다는 건 알지만……어찌됐든 인간 사이즈고 순수 신체 스펙은 나보다 못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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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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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이대로 가면 이도 저도 못 하고 맨몸으로 와일드 헌트를 상대하게 될 거야. 그러니 뭐라도 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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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자하브 대공 각하의 계획에 저희 마탑도 동참해 보죠. 저를 포함한 고위 마법사들은 모르테우스를 구속하는 데 집중하겠지만, 그 이하의 마법사들 전부가 대공 각하를 서포트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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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반가운 소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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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 웃으며 난간에 한쪽 발을 걸쳤다. 이대로 내려가려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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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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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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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대공 각하의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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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역량을 넘어선 마도구의 힘에 괴로워하면서도 고개를 깊숙이 숙이는 대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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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기분이 간질간질해져서 퉁명스레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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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은 의무를 지는 자. 당연한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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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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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자의 반응을 일부러 보지 않고 곧장 난간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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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낙법으로 무사히 착지하고는 장벽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밑에서 기다리던 카렌이 여전히 내 곁을 따르는 모습에 손을 휘휘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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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네가 약한 건 아닌데 이번 일에는 부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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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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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놓고 구경하라는 소리가 아니야. 카렌 너는 발이 빠른 편이잖아? 마법사들한테 포션이라도 받아서 나한테 던져. 그거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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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션을 던지라니……대체 무슨 짓을 하시려는 겁니까 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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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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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이고는 장벽의 앞으로 향했다. 사령부에서 확인한 마탑의 어디에서건 가장 잘 보이는 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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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 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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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없이 장벽을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반투명한 마나 너머로 뼈만 남은 팔다리와 녹슬고 부러진 무기가 날아오다가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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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저 모든 것이 내 목을 노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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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짓거 한 번 해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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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전의를 다졌다. 그리고는 손을 적당히 흔들어 대제자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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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이 그러했듯, 의아해하던 주변 마법사들의 시선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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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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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게 얼어붙은 비닐이 뜯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장벽의 일부가 스스로 갈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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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작은 틈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차가운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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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에서는 느낄 수 없던 추위. 그것도 사기를 머금은 인위적인 냉기에 시선을 앞쪽에 고정하며 입만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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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아. 이번 전투에서의 첫 번째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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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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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생각보다 춥네. 마법사들한테 보온 마법 좀 걸어달라고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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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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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챈 카렌이 굳은 표정으로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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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급이 아닌 그 밑. 메이킨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강한 이들이 모인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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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이 떠나는 것과 동시에 손가락 만하던 작은 균열이 순식간에 크게 갈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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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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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 생겨난 명백한 균열. 요구했던 대로 정확히 사람 한 명 지나갈 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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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말하면, 사람 한 명이 틀어막고 있으면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의 사이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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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실력은 좋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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낄낄 웃으며 가장 먼저 균열을 통해 넘어오는 스켈레톤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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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를 순환시키되, 주먹에 집중시키지는 않은 상태. 힘을 아끼며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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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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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켈레톤이 들고 있던 도끼의 옆면으로 내 주먹을 막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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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는 부서졌으나, 뼈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멀쩡했다. 살이 없기 때문인지 흩날리는 파편에 피해를 입지도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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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내가 놀란 부분은 다 녹슨 주제에 의외로 튼튼한 무기도, 날카로운 파편 세례에도 멀쩡한 스켈레톤의 특성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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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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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힘을 뺐다지만, 겉보기엔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스켈레톤이 내 주먹을 막은 것. 그 자체에 놀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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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영웅들의 시체라는 건 이런 의미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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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도끼 자루를 내던지고 자신의 한쪽 팔을 뽑아 달려드는 스켈레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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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뭉툭한 뼈임에도 도끼의 형상이 엿보이는 것 같다. 그만큼 완벽한 자세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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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이 내리찍는 팔을 집중해서 바라보며……오러를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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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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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서부터 시작된 문양이 팔을 휘어감고, 때마침 마탑에서 온갖 버프 마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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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머금어 차가웠던 공기가 더는 아리게 느껴지지 않았으며, 시야에 비치는 모든 풍경이 조금 더 느려졌고, 근육에서는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힘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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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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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기합과 자세를 낮춰, 스켈레톤의 안쪽으로 파고든다. 휘둘러진 팔이 어깨를 두드리는 감각이 들었으나, 타점이 어긋나 별다른 타격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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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틈을 타, 녀석의 두개골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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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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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버티는가 싶더니, 간단하게 부서지는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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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잃은 몸은 여느 언데드가 그러하듯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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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걸로 끝은 아닐 터. 아무리 머리가 부서졌어도, 와일드 헌트의 충만한 사기가 있다면 금세 되살아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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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그저 차갑기만 한 줄 알았던 죽음의 기운이 의지라도 가진 것처럼, 무너진 언데드의 잔해를 회수해 안쪽으로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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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빈 자리를 통해 다음 언데드가 머리를 비집고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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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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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주변의 이 사기는 모르테우스에게서 비롯된 것. 그의 의지가 깃들어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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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 웃으며 다음 스켈레톤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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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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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터운 대검의 옆면을 쳐내고, 비틀거리는 틈을 타, 허리춤을 걷어차려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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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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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쯤은 흔한 일이라는 듯, 노련하게 자신 또한 몸을 꺾어 박투술로 대항하는 스켈레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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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내가 걷어차려 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녀석의 주먹에 얻어맞게 생긴 상황이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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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는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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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허리를 꺾어, 날아드는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뒤.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 팔을 이빨로 강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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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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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신호 삼아 꺾였던 몸을 틀자, 내 이빨에 붙들린 녀석의 몸이 둥근 반원을 그리며 땅에 처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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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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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눈두덩이 사이로 푸른 귀화가 일렁이며 당혹을 토해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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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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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브러진 녀석의 머리를 강하게 짓밟아 부수고는, 주인을 잃은 대검을 크게 휘둘러 균열을 넘어오는 다음 상대를 향해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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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스켈레톤이 방금까지 상대한 녀석들처럼 노련한 것은 아닌지, 이번에는 별다른 저항 없이 박살 난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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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균열 너머로 일렁이는 무수히 많은 귀화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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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인 적의. 그 틈에 녹아들어 있는 약간의 사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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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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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은 분명 대의를 위해 싸웠고, 내일을 부르짖으며 죽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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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는 지금도 다를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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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테우스에 의해 눈이 흐려진 저들에게 보이는 것은, 분명 목숨을 걸어서라도 쓰러뜨려야 할 거악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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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죽어서도 이용만 당하는 신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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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분명 이 자리에 선 것은 영웅이라 부르기에 아깝지 않은 자들뿐이니.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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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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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한 전쟁. 그 상대가 되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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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언데드의 본능에 휩쓸린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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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쌍의 귀화가 거칠게 타오르며 음산한 귀곡성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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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 스켈레톤들을 가로막으며, 쉴 새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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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딪히는 기예. 첨예하게 대립하는 적의. 그리고 명백하게 갈리는 승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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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겨우 통과할 법한 좁디좁은 공간이었으나……이곳은 분명 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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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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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미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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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있어 이그나투스의 제자가 되었으나, 아직 수련이 부족해 중위 마법이 한계인 메이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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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다른 전투 마법사들 사이에 껴서 방벽을 두드리는 언데드들을 향해, 모든 마력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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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정신없이 마법을 시전하고, 또 시전하고, 그러다 마나가 부족해지면 이미 마나 포션을 억지로 마시며 다시 마법을 쥐어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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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힘겨웠지만, 그녀를 가장 힘겹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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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헌트를 상대하는 건 처음이 아니지만, 그녀의 스승 없이 상대하는 것은 처음이라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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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에 대한 불안이 메이킨의 정신을 몰아붙이는 도중. 그녀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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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의 어디에서나 시야에 닿는 정중앙. 그 앞에 서서, 홀로 언데드를 유인하고, 수많은 언데드를 적수공권으로 때려 부수는 에녹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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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해요……아무리 자하브라도 스승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버티는 건 불가능해요……애초에 자신의 일이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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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에녹의 뒷모습을. 그 어떤 마법보다도 굳건히 버티고 선 등을 보는 순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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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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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은 자하브의 가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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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하브는 이그나투스와 같은 대공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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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최후의 보루이며, 메이킨과 같은 범인을 아득히 넘어선 힘을 지닌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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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힘으로 기꺼이 스스로를 희생하여 의무를 다하는 고결한 존재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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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부족하지만 이그나투스의 제자라는 이유로 위계는 높은 메이킨이 무언가에 홀린 듯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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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들 멈추세요! 저희는 이제부터 언데드가 아닌 자하브 대공께 집중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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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존재야말로 그 어떤 방벽보다도 중요한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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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탑 여기저기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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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와일드 헌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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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이 휘둘러지고 뼈가 부서진다. 피는 튀지 않았으나, 녹슬고 부서진 무기의 파편이 그 대신이라는 듯이 바닥을 붉게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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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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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주먹에서 난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굉음. 실제로 어지간한 폭발계 마법과 맞먹는 위력에 스켈레톤이 들어 올린 방패를 중심으로 충격파가 퍼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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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몸으로 느껴지는 떨림. 뒤이어 바람과 함께 흙먼지가 흩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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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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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마법사들중 하나가 황급히 바람을 일으켜 흙먼지를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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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전투를 지켜보며, 에녹에게 필요한 것들을 서포트해야 하는 마법사 입장에서 시야 가려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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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흙먼지가 옅어지며 드러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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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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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불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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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데드 특유의 부른 귀화가 아니다. 붉고 뜨겁게 타오르는……이그나투스의 브레스, 혹은 저 하늘 위의 태양을 연상시키는 화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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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문양 위로 불길을 토해내는 에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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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방금까지 성문을 닮은 거대한 쌍 방패를 부수고, 드워프로 보이는 작지만 두터운 스켈레톤의 머리를 잡고 들어올린 중이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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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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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게 주먹을 움켜쥐는 것으로 부스러지는 두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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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이기에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푸른 귀화가 에녹의 붉은 불길에 짓눌려 흩어지는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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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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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환호성.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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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건재함은 기뻐해 마땅한 것이었으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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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쁜 숨을 몰아쉬는 에녹을 향해 온갖 종류의 마법이 쏟아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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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를 잊고 활력을 북돋는 마법. 전투 중에 생긴 자잘한 상처를 회복하는 마법. 죽음의 기운을 막아내기 위한 정화 마법. 장기간 사기에 노출되면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완화하는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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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직접적으로 에녹을 강화하는 마법이 차례로 갱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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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피부가 돌처럼 단단해지며, 그 위로 투명한 실드가 둘러진다. 안 그래도 날카로웠던 반사신경과 동체시력은 한 단계 끌어 올려졌으며, 근육과 뼈에는 오러와 반발하지 않도록 정제해 낸 특수한 마나가 들어차며 육신을 보다 강건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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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녹의 움직임은 처음보다 명백히 둔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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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일이다. 에녹의 전투는 벌써 몇 시간째 계속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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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몇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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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그저 기계적으로 주먹을 휘두르고 상대를 정면으로 깨부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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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라진 뼛가루는 흩날리는 사기에 휩쓸려 안쪽으로 돌아간다지만, 부서진 무기는 그러지 못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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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뒤에는 어느새, 방해된다는 이유로 대충 던져둔 무기가 빼곡히 널브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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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 활, 창, 도끼, 대검, 방패 등등. 온갖 종류의 무기가 에녹의 등 뒤에 늘어선 모습은 공동묘지의 묘비를 연상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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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은 진작에 넘었다. 이미 천을 넘어선 부서진 무기는 그 이상의 스켈레톤이 에녹의 손에 부스러졌다는 증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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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일기당천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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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일대일 상황으로 몰아갔다지만, 홀로 군대를 틀어막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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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부부당이라 부르기 부족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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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결투이자, 홀로 치르는 전쟁. 놀랍게도 그 승기를 거머쥔 것은 에녹 자하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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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제국의 수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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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마탑의 마법사들은 깨달았다. 자하브가 어째서 대공 가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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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으로 어리다지만, 드래곤인 이그나투스와 맞먹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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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감탄과는 별개로 에녹의 움직임이 둔해진 것은, 끊임없는 전투로 지친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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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잘 알고 있는 걸까. 집사복을 입은 은발의 소녀. 카렌이 발 빠르게 움직이며, 마법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에녹을 서포트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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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상처가 나면 포션을 뿌리고,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게 대충 던진 무기를 뒤편으로 이동시키며, 가끔 에녹이 요구하는 바를 다른 마법사들에게 전달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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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싸우는 동안, 카렌 또한 쉬지 않고 그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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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이제껏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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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하며, 보조 마법을 걸어주는 사이에도 냉철한 마법사들의 머리는 희미한 불안을 떠올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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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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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지. 다만, 우리보다는 훨씬 오래 버티실 수 있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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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마법사들은 전부 모르테우스를 제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중하위 마법사들만으로 방벽을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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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에서 홀로 언데드의 군세를 감당하는 에녹의 무력은 분명 경이로운 것이었으나, 동시에 위태로운 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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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법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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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라도 마나를 아끼고, 쥐어짜 에녹을 보조하는 것 말고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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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슬슬 마나도 떨어져 가고, 회복 수단도 부족해진 마법사들 사이에서 불안이 퍼져나가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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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은 묵묵히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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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것만이 자신의 의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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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균열 너머로 비집고 나오는 또 다른 스켈레톤. 날카로운 세검 한 자루를 들고 우아한 움직임으로 팔을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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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인 가속이 어찌나 빠른지 에녹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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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잔 상처 여럿을 입은 에녹. 이대로 시간을 끌면 균열 너머로 또 다른 망자가 기어 나올 수도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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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은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가만히 팔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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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방비한 모습에 의아해하면서도 망설임 없이 목덜미를 향해 세검을 꽂아 넣는 스켈레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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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예리함을 잃지 않은 날붙이가 목젖에 닿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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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같은 금안을 번뜩이며, 에녹이 몸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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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잃은 세검은 목이 아닌 구릿빛 어깨에 박히고, 그나마도 단단한 근육에 막혀 나아가질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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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찔렸다기보다는 몸으로 칼을 붙잡은 것 같은 모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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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의 입꼬리가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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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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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과 함께 세검을 맨손으로 잡아채는 에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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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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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악력에 그대로 얇은 검신이 부러지며, 당황한 스켈레톤을 향해 머리를 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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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이는 에녹의 이마가 스켈레톤의 잿빛 머리를 단번에 산산조각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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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잔해가 순식간에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며 깨끗해진 전장. 그 너머로 새로운 스켈레톤이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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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어깨에 박힌 세검의 반절을 뽑아낼 시간도 주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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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에녹의 육신에 박혀있는 무기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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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벅지에는 단검이, 팔뚝에는 부러진 단창이,옆구리에는 깃이 삭아 없어진 화살이 박혀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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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박힌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단 한 번도 뒤를 돌지 않았다는 증명이기도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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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사람 몸이라는 건 무기를 주렁주렁 박아 넣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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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다. 마법사들의 보조 마법. 그리고 강철처럼 단단한 육신에 막혔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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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도 특유의 재생력과 회복마법의 영향으로 출혈까지 멈췄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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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있어도 생명이나 움직임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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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문제는 상처가 남아있다는 것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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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이 계속해서 정화하고 몰아내는 중이라지만, 그 틈을 타 죽음의 기운이 침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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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냉기는 자하브의 불길을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약화시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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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큰 문제는 와일드 헌트의 스켈레톤들이 평범한 언데드가 아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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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을 잃긴 했으나, 그 육신에 쌓아 올린 기예는 어지간한 기사를 상회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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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의 마법사들이라고 용아병을 대신할 골렘을 만들어 보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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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참이라면 누구나 시도는 해본다. 그리고 상상 이상으로 뛰어난 스켈레톤들의 무위에 처참히 박살 나고는 깨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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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 전투에는 문외한인 마법사들의 눈에도 알 수 있을 만큼 세련된 무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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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펼치는 신대의 전사가 얼마나 강인한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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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봐도 실력자로 보이는 스켈레톤의 움직임과 달리, 에녹에게서는 이러한 체계적인 동작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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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과 힘. 그리고 약간의 운에 몸을 맡기고, 실낱같은 가능성을 향해 머리를 들이미는 짐승과도 같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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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잘 버텼을지 몰라도, 에녹은 분명 언젠가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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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합리적 사고가 마법사들로 하여금 불안을 부추기는 것이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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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속에서만 차오르는 열기 또한 분명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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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형태를 한 짐승. 하지만 그 짐승은 이미 신대의 영웅들을 무수히 도살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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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가 없는 확신이자, 이성을 추종하는 마법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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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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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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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마법사가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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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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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어둡고, 동이 트려면 아직 한참은 남았다. 허나, 지상은 밝게 빛나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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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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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 자하브가 피워올린 열기. 그 희망에 마법사들이 홀린 것처럼 진작에 바닥난 마력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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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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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태양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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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하늘이 아닌, 지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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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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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켜쥔 주먹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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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토해내는 목구멍에서는 피 맛이 느껴지며, 거칠게 뛰는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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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눈앞의 상대를 향해 휘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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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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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 가까운 기합 소리와 함께 뻗은 주먹이 쌍검을 든 스켈레톤을 향해 내질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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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지칠 대로 지친 육신은 제대로 된 속도를 내어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뼈만 남은 저들보다는 빨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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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응할 틈도 없이 머리를 부술 수 있었다. ……그랬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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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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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하게 휘어진 쌍검이 내 팔목을 양쪽에서 베어내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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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이 걸어준 방어 마법. 그리고 다급히 손목을 꺾어, 검신을 쳐낸 덕에 살짝 시큰하고 말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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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단번에 끝장내지 못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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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둘러진 실드와, 단단하게 긴장시킨 근육을 믿고 성큼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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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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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쌍월을 그리며 휘둘러진 검이 내 양어깨를 향해 노렸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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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드를 부수며 느려진 검 끝이 살갗에 닿는 순간. 빠르게 몸을 꺾어 베이는 각도를 흩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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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근육을 갈라놓아야 했을 쌍검이 붉은 실선만을 남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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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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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게 구른 발이 녀석의 발을 박살 낸다. 좁은 공간에서 거리를 좁혔기에 발을 놀릴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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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잃고 넘어지는 스켈레톤의 머리를 무릎으로 으스러뜨린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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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넘어올 스켈레톤을 대비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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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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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푸른 귀화만 균열 너머로 일렁일 뿐, 다음 스켈레톤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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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함에 잠시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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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다음 스켈레톤이 방벽의 균열을 통과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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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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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한껏 꺾어야 담을 수 있는 거대한 머리. 주둥이는 길쭉하고, 머리에는 왕관을 닮은 뿔이 자라 있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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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존재해야 할 자리에는 내 몸뚱이보다도 거대한 귀화가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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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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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급 마법사들은 제 역할을 다하는 중인지 녀석의 몸은 타오르는 사슬로 빈틈없이 결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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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공허한 울음소리를 내지도, 육중한 거체로 발버둥 치지도 않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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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더 큰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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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자의 것과는 너무나 다른, 하지만 분명 그 안에 지성이 깃든 것을 알 수 있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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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미친 줄 알았던 사룡이, 수많은 언데드 군세를 막아낸 장벽을 손짓 한 번으로 부술 수 있는 괴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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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의 재앙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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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놀란 나머지 요즘 들어 망나니 연기를 하며 생긴 습관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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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봐. 눈 깔아라. 뒤지기 싫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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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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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만 남은 모르테우스가 귀화를 끔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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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소란이 있긴 했지만, 어찌어찌 무난하게 일정을 끝마치고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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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글공부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간단한 책이라면 혼자서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오러 수련의 비중을 늘리기로 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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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조금 늦었으니, 힐다가 기다릴까 발걸음을 서둘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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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방.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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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깜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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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옆구리 쪽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유리아의 말에 흠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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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피는 이어지지 않았건만, 이상할 정도로 나와 닮은 금발이 사르르 흘러내리며 햇빛에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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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뭐야. 내 머리카락이 신경 쓰여? 그으. 살짝이라면 잡아당겨도 괜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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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선을 눈치챈 걸까. 유리아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으더니, 이쪽으로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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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니 유리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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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안. 손잡이로 쓸 때는 이렇게 하는 거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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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갸웃거리면 하나로 묶었던 머리를 쪼개, 두 갈래로 만들어 양옆에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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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손으로 쥐어 고정시켰을 뿐이지만, 흔히들 말하는 트윈테일 스타일. ……그리고 조금 천박하게 말하자면 핸들을 만들어 내 앞에서 살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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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오라방은 이런 거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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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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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나갈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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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자하브의 혈계능력은 발현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유리아는 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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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그런 식으로 따지면 제벨라도 골 때리는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나한테 잘해주고, 일 잘하는 누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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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가 문제라고 하기에는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은 제정신으로 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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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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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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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런 사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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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이 워낙 자하브의 문제아들에게 익숙해져서 이 정도 언행은 귀여운 수준으로 보인 것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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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며 나름 유리아를 이해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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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해한 무언가를 접할 때 느껴지던 거부감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약간의 위기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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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에서 요구하는 망나니 인재상에는 못 미칠지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망나니 연기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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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리고 계승식까지 끝난 마당이지만 혹시라도 혈통의 진위를 의심당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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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내게는 유리아보다 더 미친 사람처럼 굴 필요가 있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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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을 것 같지만, 어떻게든 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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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유리아가 내민 양 갈래머리를 잡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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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들도 좋긴 하지만 내 취향은 좀 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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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오라방은 그럼 뭐 좋아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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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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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답하며 유리아의 머리카락을 그녀의 목에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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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목덜미 위를 교차하는 금발. 그렇게 단단히 고정시킨 뒤에는 두 갈래로 나뉜 머리를 다시 합쳐 한 손으로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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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유리아 본인의 머리카락을 목걸이이자 목줄처럼 만든 모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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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의 머리카락이 꽤나 길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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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목을 졸리듯이 붙잡힌 유리아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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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방 천재야?! 이런 건 생각도 못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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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럼. 이 오라비는 언제나 개쩔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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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나 싸구려 가죽이랑 다르게 심하게 쓸리지도 않고,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목을 조를 수도 있고, 무엇보다 다른 무엇도 아닌 내 머리카락에 내가 매인다는 사실이 너무 굴욕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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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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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유리아의 모습에 자연스레 한숨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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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자하브는 자식 교육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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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멀쩡한 제벨라는 학대했지, 유리아는 그냥 제정신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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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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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서로 후계자 다툼하다가 공멸한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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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냥 운이 없어서, 혹은 누군지 상상도 안 가는 흑막이 있어서 죄다 죽고 망한 게 아니라 그냥 죽을만해서 죽었고 망할만해서 망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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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해졌던 머리가 맑아졌다. 그래. 유리아가 아무리 골 때리는 녀석이라도, 어차피 자하브를 떠날 내게 무슨 상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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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내게 목을 내어준 채, 뒷짐을 진 유리아가 고양잇과 동물처럼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따라오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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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라방 지금 어딜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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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받으러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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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내가 없는 사이에 자하브에도 아카데미 같은 게 생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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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내 개인 교습. 힐다 경이라고 은사자 기사단 부단장이 나한테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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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흠. 힐다 경은 오라방의 애첩……기억해 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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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아니라 글이랑 예법, 오러 수련을 배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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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방 글도 읽을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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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무식하게 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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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상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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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글 읽을 줄 알아? 문맹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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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리는 전생을 포함해도 들어본 적 없는 폭력적인 질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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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얼마 전까지의 나는 정말로 문맹이 맞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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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서운함이 겉으로 드러난 걸까. 유리아가 황급히 고개를 휘휘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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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냐! 무식해 보이는 게 아니라 싸움과 여자 말고는 흥미가 없어 보일 뿐이니까! 오해하지 마 오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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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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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위로가 맞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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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애초에 광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 해선 안 된다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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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고분고분해진 만큼 크게 도드라지지는 않지만……유리아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사람보다 짐승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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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가 멍청하다거나, 인간 언저리라는 나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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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보다 본능이, 지능보다 감각이 발달한 사람 특유의 기세를 풍기고 있다는 소리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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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에서 오래 살아남은 이들 중에는 비슷한 부류가 몇몇 있어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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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중에서도 유리아가 유독 도드라진 케이스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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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에. 오라방 생각보다 열심히 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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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가문의 일을 대부분 제벨라 누님께 떠넘기고 놀러 다닐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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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원래 어려운 일은 제벨라 언니가 하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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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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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애가 바로 여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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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오라방 오러 수련을 부기사단장한테 배워? 오라방이 더 강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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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것과 기술에 능하냐는 별개니까. 오러는 자하브에 들어와서 처음 익힌 거야. 그러니 기초부터 제대로 다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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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에. 강하다고 바로 오러를 마음대로 쓰고 그런 건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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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소리를……유리아 너도 어렸을 때는 따로 오러를 배웠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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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나는 천재라서 오러는 그냥 혼자 깨우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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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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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유리아에게 혈계능력은 없어도 무재는 있었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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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의식적으로 힘을 주어 마나를 집중시키고, 오러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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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는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본능적으로 오러를 다루는 법이라도 터득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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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유리아는 뭔지 모를 혈통인 나와 달리, 찐 자하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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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귀족은 대체로 하나쯤 탈인간급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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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능력은 그중 하나일 뿐, 다른 부분에서 이게 같은 사람인가 싶었던 적이 한둘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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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각자 제 갈 길 가고 있지만……한때 같은 고아팸이었던 녀석 중에 몰락귀족 출신이 있어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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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계능력도 혈계능력이지만, 이를 떼어놓고 봐도 수완이 뛰어난 녀석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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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대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파멸적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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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옛날 생각에 추억에 젖는 것도 잠시. 어느새 연무장 앞에 도착했길래 유리아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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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쉿. 도착했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이제 가봐. 여기가 집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아카데미의 재학생으로서 실습 온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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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어도 오라방이 보내줘야 갈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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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목에 감긴 머리카락을, 이를 이용해 만들어 낸 목줄을 가리키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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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내가 유리아에게 목줄을 채우고, 성안을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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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놔줄 테니까 이제 가 봐. 아카데미에 가기 싫으면 제벨라 누님한테라도 가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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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어. 제벨라 언니도 오랜만에 보고 싶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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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인 유리아가 순순히 떨어진다. 그리고는 어째서인지 목에 여전히 머리카락을 휘감은 채,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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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라방! 다음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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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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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제벨라 언니랑 같은 침대 위에서 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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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일은 없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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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익숙해진 유리아의 발언에 대충 답해주고는 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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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문밖에서 들린 대화를 전부 들은 힐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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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다가 처음으로 내게서 시선을 스윽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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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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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사로서 자하브에 영광이 재림하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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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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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오해는 좀 풀려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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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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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에게 얻어맞고, 에녹이 던진 돌에 한 번 더 얻어맞은 아카데미의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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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전직 교관 브렌트는 입술을 짓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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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빌어먹을 자하브. 숨겨진 사생아가 있을 줄 내가 알았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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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제 막 골절이 나아, 살짝 저릿함이 남아있는 팔을 부여잡은 자세로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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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한 분위기의 집사장, 아론은 두 번 다시 눈에 띄는 순간 팔이 아니라 목이 부러질 것이라 경고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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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닫힌 성문을 올려다보던 브렌트. 그런 그의 짐을 가져다준 아카데미의 책임자인 델빈은 해고 통지서를 함께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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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의 건이 아니더라도 사소한 부패를 여러 번 저질러 이미 수차례 경고받은 상태. 그렇기에 별다른 절차 없이 최후통첩이 날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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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정이라며 중급 포션을 건네주던 델빈의 싸늘한 표정이 떠올라, 브렌트가 무의식적으로 방금 막 나은 팔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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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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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같은 괴물 딱지에 비하면 손색이 있을 뿐이지, 브렌트 역시 아카데미에 취직할 만큼 나름 실력있는 기사였기에 한 번 부러지며 취약해진 팔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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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정신적으로 몰린 그는 팔이 보내는 고통의 신호를 알아차릴 여유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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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빌어먹을! 이제 더는 돈을 빌릴 구석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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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가 소소한 뇌물을 받아먹은 이유는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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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진짜 재능들과, 벽에 부딪힌 현실 사이에서 어느새 검을 놓아버린 그가 도박이라는 새로운 취미를 붙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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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교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고, 때로는 뇌물도 받아먹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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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일자리도 뭣도 없으니 갚을 길이 없어졌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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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수도에 돌아갔다가는, 그리하여 돈을 빌린 도박장의 사채업자들에게 해고 소식을 들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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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좋지 않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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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해하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브렌트. 그런 그의 앞에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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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 디에고. 아카데미의 전직 교관이자, 엘리스 패밀리에게 2만 골드의 빚을 진 도박쟁이.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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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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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겁하며 검을 뽑는 브렌트. 그제야 치료가 덜 된 팔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를 가로막은 사내는 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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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해라. 내 적은 어디까지나 에녹 자하브이니. 만일 네가 나의 일을 도와준다면, 빛을 대신 갚아주고 새로운 신분 또한 준비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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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놈을 어떻게 믿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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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으면 네놈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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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브렌트는 깨달았다. 어느 쪽이건 자신에게 미래는 없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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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다가 엘리스 패밀리에게 추적당해 죽느냐, 괜히 나대다가 아론이라는 집사장에게 살해당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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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둘 중 하나라면 차라리 뭐라도 발버둥 쳐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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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는 에녹과 유리아의 얼굴을, 그 벌레를 쳐다보듯 경멸과 무관심으로 가득한 표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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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자하브의 그 애송이들을 엿 먹일 수 있고, 내 미래까지 세탁해 준다는데 뭐든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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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했다. 우선 이걸 받아라. 그리고 내가 일러준 곳으로 향해라. 아직 수리 중인 성벽이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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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하며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는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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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받아 든 브렌트는 순간 흠칫했다. 상자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아카데미에서 철저히 배척하라 가르치는 흑마력이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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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갈 곳도, 떨어질 곳도 없는 브렌트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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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오히려 흑마법사의 무서움을 아는 만큼 더욱 든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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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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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쟁이가 인생을 망치는 이유는 보통 자기 스스로 팔자를 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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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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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유리아 때문에 돌겠습니다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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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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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에 한 번씩 있는 정기 티타임. 정확히는 제벨라가 그간 처리한 여러 일이나,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간략하게 요약해 알려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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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도 하고, 맛있는 것도 좀 먹고, 호시탐탐 내 이미지를 망칠 기회를 노리고, 가능하면 제벨라 대신 유리아에게 가주직을 떠넘길 각을 재보는 자리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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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큼은 이러한 평소의 목적과 전혀 상관없는 푸념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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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유리아 자하브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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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들어 보십쇼. 오늘 유리아가 실습이 끝나자마자 제 방에 들이닥치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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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 정도는 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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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제 말뿐만 아니라 제벨라 누님 말도 잘 안 듣는 거였군요. 아무튼 갑자기 쳐들어온 유리아가 무슨 짓을 했는지 혹시 짐작 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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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한번 생각해 봐야겠구나. 에녹 네가 이리도 불평할 정도면 분명 중요한 무언가를 방해한 것일 터. 수련장이나 아니라 방 안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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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그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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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제벨라가 자신의 찻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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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를 수련하며 예민해진 감각이 숨결에 섞인 은은한 꽃향기를 잡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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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것이 차의 향기인지, 제벨라의 체향인지는 모르겠다. 언제나 붓꽃을 닮은 향기를 풍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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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젖은 입술을 혀로 슬쩍 닦아낸 제벨라가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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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카렌과 좋은 시간을 보내다가 도중에 방해를 받은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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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비슷하죠? 오늘 실습 때 잡은 가장 강한 몬스터라면서 포이즌 웜의 머리를 가져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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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카렌과 유니콘은 순결한 여성을 좋아한다는데, 정작 유니콘 본인은 대체 어떻게 번식하는 것인지에 대한 토론을 하는 중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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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즐거웠으니 좋은 시간은 좋은 시간 맞겠지. 제벨라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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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포이즌 웜의 머리를 가져온 건 아무런 과장도 없는 사실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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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면. 퇴화해 회색으로 변한 눈, 터널처럼 동그란 입과 그 안쪽에 빼곡히 돋아난 이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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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를 특별히 혐오하는 편이 아님에도 보는 순간 절로 소름이 오소소 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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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백번 양보해서 실내에 피 흘리는 몬스터 머리를 가져온 것도, 냅다 제 방문으로 열고 들어온 것도 이해할 수 있어요.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나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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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백번이나? 누이는 에녹의 이해심이 깊은 것 같아 감동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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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잘라 온 머리를 툭 던지고 혼자 쪼르르 나가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군요. 하아. 그거 치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심지어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 며칠 전부터 매일 일어나는 입니다 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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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그래도 귀엽지 않니. 고양이가 잡은 사냥감을 주인에게 가져다주는 것 같아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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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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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제벨라는 그냥 팔불출이 아닐까 싶다. 나한테 잘해주는 것도 그렇고, 유리아에게 무른 것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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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자니, 어느새 턱을 괴고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던 제벨라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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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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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이 사이좋아 보여서 다행이란다. 아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려나? 유리아가 다른 건 몰라도 감은 참 좋은 아이니. 좋은 사람을 알아본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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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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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감. 사실 재능이라는 게 다 그런 거잖니. 알기 쉽게 눈에 띄는 것도 아니고,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특출남.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감각을 우리는 감이라고 부르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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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제벨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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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 말을 들으니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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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첫눈에 반한다는 것도 감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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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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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아니, 차라리 여기에서는 뿜는 게 더 품위 없어 보였으려나. 그보다 제벨라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낸다는 건 유리아가 앵겨붙는 걸 알고 있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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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내가 이걸 왜 숨겨야 하는가.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당당하게 굴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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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점점 복잡해지는 사이. 제벨라가 쿡쿡 웃으며 손을 뻗어 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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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과자부스러기, 그리고 두어 방울 새어 나온 찻물을 검지로 훑어내고는 묘한 웃음과 혀를 내밀어 낼름 삼키는 제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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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야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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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에서 조금만 깊은 곳으로 가면, 보이던 헐벗은 매춘부보다 꽁꽁 싸매고 있는 제벨라가 더 매력적이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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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얼굴의 차이인가. 아니면 미드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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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진지한 고민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제벨라는 내 입가를 닦아준 것으로 만족했다는 듯이 평소와 같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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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이걸 깜빡했구나. 저번에 오크 워로드가 쳐들어오며 무너진 성벽을 기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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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거야 당연히 기억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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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자재가 도착해서 슬슬 수리를 시작하려 하는데, 에녹 네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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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도움이요? 아니, 애초에 꽤 시간이 지난 걸로 아는데 이제야 수리에 들어간다는 건 또 무슨 소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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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실은 에녹 네겐 비밀로 했지만, 자하브의 예산이 그리 넉넉치 않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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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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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물론 재정 구조나 세금에 문제 있는 건 아니란다. 어디까지나 던전 역류가 연달아 터지며 큰 지출이 겹쳤을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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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장 쓸 돈이 부족한 건 사실. 그리고 몬스터를 막아내야 하는 만큼 성벽을 싸구려 재질로 지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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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탓에 자금 조달이 늦어 이제야 수리가 시작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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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에녹 네가 영지민들에게 인기가 좋잖니. 아무래도 제대로 된 인부를 고용하기 힘드니 관리자만 뽑고 노역을 좀 시켜야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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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완벽히 이해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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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역. 정확히는 영주의 권한으로 영지민들을 소집해 일 시키는 강제노역을 말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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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역은 현대에도 형벌로서 남아있을 만큼 예로부터 악명높은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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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을 그만두고 끌려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을 대신하는데, 심지어 빡세고 부상의 위험도 크다. 이를 좋게 생각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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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피라미드 건설 같은 예외도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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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록에 따르면 급여도 넉넉하게 줬고, 다치면 치료도 해주고, 아프거나 개인 사정이 있으면 휴가도 줬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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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어디까니자 예외적인 경우. 기본적으로 노역이란 최소한의 의식주만 제공해 주고 뼛속까지 부려 먹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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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노역은 자하브에도 있던 모양이다. 하긴. 중세 봉건 사회니 당연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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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제벨라로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빠르게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노역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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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이 클 영지민들을 달래기 위해 여러 오해로 한창 평판이 좋은 나를 내세우고 싶은 것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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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인 판단이다. ……일이 잘 굴러가기만 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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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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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큰 기회 아닌가. 나를 가주라는 자리에 묶어두고 있는 가장 큰 문제중 하나인 영지민들의 지지를 무너뜨릴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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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일이 요상하게 꼬여 오히려 좋은(?) 결과를 냈지만……이번 건 결국 노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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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일이 꼬여도 밥 먹고 일만 하라는 명령에 기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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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그런 말을 하는 대상이 뻔뻔하고 오만하며 재수 없기까지 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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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 말 다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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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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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말고 제게 맡겨주십쇼 제벨라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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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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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이런 건 영주가 나서야죠. 예에. 그렇고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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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탐욕스런 영주의 래퍼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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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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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이 부족하다고 하셨죠? 저만 믿고 맡겨주십쇼 누님. 반드시 최소한의 식사와 최소한의 의료지원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뽑아낼 테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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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원래 이런 건 무급 노역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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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라고 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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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란다. 최소한의 식사와 최소한의 의료지원이라고 했니? 그래. 에녹 네가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렴. 이 누이는 언제나 에녹 너를 응원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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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제벨라.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해결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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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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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장한 영지의 건장한 청년들을 불러 모아, 무너진 성벽 앞에서 노역 이야기를 꺼내려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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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르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리아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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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뭐 하나 유리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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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라방? 그냥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산책하던 중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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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으니까 좀 나중에 해. 제벨라 누님이 시켜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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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렇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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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성벽에서 멀어져 내 옆에 서는 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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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아직 진정되지 않는지 대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말았다 하기도 하고, 냄새를 맡듯이 코를 킁킁거리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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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 원래도 기행을 벌이는 녀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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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를 적당히 무시하고, 벌써부터 침울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영지민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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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였다!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 같지만, 너희를 이리 불러 모은 것은 성벽을 수리하기 위해 노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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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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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터져 나온 굉음. 지축이 흔들리며, 안 그래도 무너져 있던 성벽 일부가 그 충격으로 더욱 큰 균열을 일으키며 폭삭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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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오르는 흙먼지. 그 너머로 섬뜩한 안광이 번뜩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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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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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지옥의 밑바닥을 긁어대는 것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찌나 막대한 성량인지, 방금 막 피어오른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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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완전히 무너진 성벽과 흙먼지 너머에서 드러난 것은 뒤틀리고 부풀어 오른 채, 불길한 흑마력에 휩싸인 인간 비스무리한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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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변했지만 어째 익숙한 외모에 기억을 되짚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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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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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들려오는 유리아의 기겁에 눈치챘다. 일전에 뇌물을 받고 유리아를 알게 모르게 차별한, 그리고 내가 던진 돌에 얻어맞고 쫓겨난 아카데미의 교관이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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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교관이 아니라 교관이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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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트였을지 몰라도 이젠 브렌트라고 부를 수 없는 뒤틀린 존재가 검붉은 피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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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죽인다! 죽어!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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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한 기운이 담긴 저주를 내뱉는 녀석. 촉수처럼 변이된 그의 손에는 모든 빛을 흡수하는 듯한 칠흑의 검이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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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들 도망쳐! 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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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이래서 영주님께서 노역을 시켜서라도 성벽을 고치시려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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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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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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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흑마법사들을 때려잡은 이후. 필립은 챙겨온 비상 물품들로 부대원을 치료하고, 힐다와 칼튼은 연구실을 뒤적이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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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흑마법사들의 시체를 한데 모아두고 있자니, 카렌이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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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쯤은 살려두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요 도련……가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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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카렌아. 그냥 편하게 불러. 나는 도련님 소리도 듣기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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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됩니다. 이미 가주님께서는 자하브 가문의 주인이시고, 제국에 셋 뿐인 대공이시잖아요. 호칭은 똑바로 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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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읍. 난 좀 서먹해진 것 같아서 아쉽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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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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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런 걸로 명령할 것까지야. 카렌 네 말이 맞겠지. 난 이런 쪽은 아무래도 잘 모르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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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 계승식을 마치고 가주가 되었기 때문일까. 묘하게 고분고분하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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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카렌이 대충 뭉쳐놓은 흑마법사 시체를 발끝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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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조금 아쉽네요. 만약 한 놈 정도 살려두셨다면 뭐라도 정보를 캐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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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카렌아. 그런 말랑한 얼굴로 고문 같은 것도 할 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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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의 볼따구를 양옆으로 주욱 잡아 늘리자, 얌전히 내게 불을 내어준 카렌이 무감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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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하는 게 아니라 할아버님이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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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뭐어, 너무 아까워하지 마. 설령 세 놈 모두를 살려서 심문한다 해도 제대로 된 정보는 얻을 수 없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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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할아버님의 실력은 꽤 대단하십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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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아론이 누구 하나 고문하는 일은 잘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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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주님의 명으로 인한 것이라면 케세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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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그건 그것대로 재밌어 보이는 이야기지만, 애초에 흑마법사 상대로는 애초부터 전제가 잘못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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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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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는 거 보니, 카렌 너는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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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나마 머리가 멀쩡한 대장격 흑마법사의 시체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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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마지막에 봤지? 갑자기 말투가 연극체로 변한 거. 이게 보통 대장격 흑마법사들이 그렇게 말투가 오락가락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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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비극의 신의 신력을 받아들인 부작용이라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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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게 그런 이유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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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흑마법사는 여럿 잡았지만, 왜 그런지는 별로 궁금해한 적 없었기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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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머릿속에 넣어둔 뒤. 하던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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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게 비극의 신 때문인지 그냥 미친놈이라 그런 건지 몰라도, 확실한 건 말투와 함께 머리도 오락가락한다는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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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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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정보를 빼내려 해도 헛소리만 하거나, 어찌어찌 정보를 알아내도 거짓이거나 함정인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경우에 따라서는 정보를 실토하는 척 이쪽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던 놈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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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흑마법사와는 말을 섞을 이유가 없다. 말을 섞더라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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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죽이고, 시체나 연구실 같은 곳에서 정보를 알아내는 게 훨씬 나아. 그래서 이렇게 바로 빠져나가는 대신 여기저기 뒤져보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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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겁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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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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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모은 흑마법사들의 시체를 뒤적이며 대충 답해주던 도중. 카렌이 조심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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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흑마법사를 상대해 보신적인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 건가요. 너무 능숙하기도 하시고, 어쩐지 놈들이 가주님을 알아보는 것 같기도 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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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 안 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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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긁적이며 아무것도 없는 시체 하나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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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칼립소에도 흑마법사 지부가 하나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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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 칼립소라면 하나 있을 법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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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좀 뭐랄까. 거슬려서? 자꾸 충돌해서? 응. 아무튼 그래서 쳐부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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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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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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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내가 좀 헷갈리게 말하긴 했지. 알고는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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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결국 내가 어린 시절에 흑마법사 조직에 실험체로 팔려나갔다는 이야기까지 해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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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실 자하브의 사생아가 아닌 짭이라는 사실이 알려질 수도 있고……그게 아니더라도 당시의 기억은 내 가장 깊은 상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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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흑마법사만 보면 발작을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어린 시절의 일을 말하는 건 아무래도 거부감이 든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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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약점을 밝히는 건 칼립소에서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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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른 흑마법사의 시체 하나를 더 수색하는 내내 눈만 깜빡이던 카렌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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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으……그러고 보니 가주님께서는 칼립소에서도 자신만의 조직을 꾸리셨었죠. 가장 낮은 곳의 주인이라는 게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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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조직이라고 할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지만, 같이 사는 친구들이 좀 있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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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고아팸이라고 해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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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 없이 대륙의 거물급 범죄자가 유입되고, 그 이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칼립소에서 고아는 취약계층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존재하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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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기에 생존을 위해 자기들끼리 뭉치는 경우가 많았고, 막 흑마법사 조직에서 빠져나온 시기의 나 또한 자연스레 고아팸에 합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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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팸의 가입 조건은 부모가 없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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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시간이 지나며 다들 머리가 굵어지며 아이라 부르기 힘들어졌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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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범죄 조직에 들어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용병의 일원이 되기도 하고……누군가는 마음이 맞는 몇몇과 함께 새로운 모임을 만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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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같이 영차영차 힘내며 집도 사고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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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집이 생기고 나자, 어렸을 때부터 사이좋았던 놈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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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중재시키려 해도 내가 얼굴을 비추는 순간 입을 싹 다물어 버리니 중재도 힘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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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남자라 내게는 말 못 할 갈등이 있겠거니 넘어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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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너무 크게 다투는 바람에 다 같이 살던 집이 박살 난 이후.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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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여초 직장에 남자 혼자 다니는 게 헬이라는 건지! 누나들 사이에서 자란 막내아들이 여자만 보면 진저리를 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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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각자 따로 살기로 하고, 마침 찾아온 아론과 카렌을 따라 칼립소로 오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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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생략할 건 생략하고, 숨길 건 숨기며 말한 내 이야기를 들은 카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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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그런 걸 조직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적어도 다른 흑마법사들은 그렇게 여겼겠죠. 과연. 이해됐습니다. 새로 생긴 조직을 견제하려다가 가주님께 역으로 당한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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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방해라서 내 쪽에서 보이는 족족 죽인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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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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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꾸욱 다문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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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기도 하지만……솔직히 말하자면 포악한 전투광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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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효과가 있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카렌. 무표정은 여전하지만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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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자축하는 사이. 간신히 진정한 카렌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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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소리 없는 자들의 종말이라는 건 또 무슨 의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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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별거 아냐. 흑마법사 놈들이 쫄리니까 암살자 길드를 동원해서 날 죽이려고 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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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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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래서 암살자 길드도 같이 쳐부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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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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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잇. 여기도 아무것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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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투덜대며 마지막 시체를 내던졌다. 이쪽은 허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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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카렌이 멍하니 굳어있길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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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기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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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따구는 이미 많이 만져봤으니 패스한다. 그 대신 카렌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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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번쩍 들어 올리며 어린아이와 놀아주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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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 높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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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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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이건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무감각한 카렌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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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 하시는 겁니까 가주님. 내려주세요. 제 키가 작을지언정 나이는 그리 어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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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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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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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 발버둥 치는 카렌. 하지만 이미 완전히 몸이 들어 올려진 상태에서 뭘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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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을 저항하다가 결국 축 늘어지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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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표정. 하지만 묘하게 원망이 서린 눈빛에 낄낄 웃던 도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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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을 뒤져보다 무언가 발견한 걸까. 뒤에서 힐다가 살짝 신난 어조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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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보세요 가주님! 해석이 필요할 것 같지만 뭔가 중요해 보이는 서류를 발견……가주님? 그리고 카렌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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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부터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는 힐다.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비비적거리길래 그제야 카렌을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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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발이 땅에 닿았음에도 가만히 멈춰선 채……아니, 정확히는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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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스러움에 바들바들 떠는 그녀를 지나쳐 어벙하게 입술만 뻐끔대는 힐다가 쥐고 있는 종이 뭉치를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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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칼립소가 아니라 다른 지역이라 그런지 내가 모르는 암호체계를 사용하고 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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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말하면 암호화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라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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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어 힐다. 챙길 것도 챙겼고, 구할 사람도 구했으니 이제 돌아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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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 네. 그으……카렌 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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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회복하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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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으쓱이고는 왔던 길을 역으로 거슬러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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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눈치를 보면서 카렌을 피해 따라서 움직이던 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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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카렌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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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계승식 준비로 쌓여있는 업무가 많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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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아니, 그런 건 제벨라 누님이 대신 하기로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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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저는 원칙대로 일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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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이 치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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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나 때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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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내리쬐는 밝은 창가. 하지만 바깥의 풍경은 볼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일하던 뚱뚱한 중년의 사내가 흠칫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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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주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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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잠깐 좀 쉬고 싶으니 나가 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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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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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떨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나가는 비서. 그 모습을 확인한 중년인의 푸근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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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진입조가 전멸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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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뒤의 어둠에서 펼쳐지는 것은 동지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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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청년. 에녹이 사납게 웃으며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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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발동되는 기억의 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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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던 상단주……아니, 상단주로 위장한 흑마법사가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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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칼립소의 바깥으로 빠져나왔는가. 그나저나 저 복장은……자하브? 허어. 그런가.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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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인 흑마법사가 떨리는 손으로 차를 홀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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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우리의 고향을 부순 이가 보통 인물은 아니겠지. 아무리 업보가 목을 졸라와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니. 이제야 이해되었다. 최근에 자하브의 사생아가 가주가 되었다고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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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실험체 출신이라는 걸 알고 있던 흑마법사들마저 너무도 자하브스러운 에녹의 모습에 착각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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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고아가 아니라 자하브의 사생아를 데려와 실험체로 삼았던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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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과정에서 잠들어 있던 피가 각성한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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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착각이지만 이를 바로잡아 줄 연금술사는 진작에 에녹의 손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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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태양이라 한들 약점 없는 존재는 없는 법. 그 어떤 불길도 영원히 타오를 수는 없고, 그 어떤 빛도 언젠가는 어둠에 수렴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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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트라우마를 애써 억누른 흑마법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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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여. 네 정체를 알았으니, 이것으로 네 심장을 찌를 비수를 만들 수 있게 되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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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전역에 흩어진 흑마법사들이 같은 기억을 공유받고, 은밀한 협력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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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자하브를 죽이기 위한 무기를 주조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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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자하브가 아닌 이에게는 별다른 효과가 없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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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 숨어있던 흑마법사들을 쓰러뜨린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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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 성으로 돌아온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급하게 준비한 것치고는 성대한 개선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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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 영주님이 돌아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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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의 흑마법사를 해치우시고 돌아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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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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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님이라면 한번 대드릴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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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친! 자네는 남자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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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주님은 자하브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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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가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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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들려오는 나에 대한 찬양. 중간중간에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에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이게 다 뭔지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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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부여잡으며, 어쩐지 가장 우쭐해하고 있는 힐다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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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카렌에게 물었겠으나……지금은 살짝 토라진 모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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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다 경. 표정 좋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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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 수업 첫날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출세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제가 줄을 잘 서긴 한 모양입니다. 벌써 이렇게 명예로운 자리에 설 줄은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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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칼튼 경. 당신 딸래미 좀 봐. 이거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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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흐흑! 드디어 자하브에……그래! 피가 어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 이제야 정상화가 됐을 뿐! 앞으로 더욱 잘 보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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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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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돌아본 칼튼은 어찌나 감동한 것인지 대성통곡 수준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래서야 내 말이 들릴지도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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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아저씨가 눈물 콧물 질질 짜는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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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숨을 푸욱 내쉬며, 주변의 찬양을 한껏 즐기고 있는 힐다의 귓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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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이제 즐기는 건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좀 설명해 줘 봐. 우리 분명 제대로 된 발표도 뭣도 없이 다짜고짜 계승식 도중에 박차고 나와 던전에 들어간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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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게 신경 쓰였던 거군요. 줄곧 같이 움직였으니, 저라고 주군이 모르는 걸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한가지 짐작 가는 것이 있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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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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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아가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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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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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께서도 제벨라 아가씨와 만나보셨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대충이나마 알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떠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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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나보다 더 가주직에 어울리는 사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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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건 아니죠. 자하브의 주인은 모든 분쟁의 선봉장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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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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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슬쩍 말을 꺼내봤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진짜 장난 없구나 남부의 강자 숭배 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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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사이. 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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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그만큼 주군께서 제벨라 아가씨의 격무에 느끼는 바가 컸다는 뜻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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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뭐, 그런 거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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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아가씨는 무척이나 유능하신 분입니다. 계승식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는 결론을 내리셨을 겁니다. 주군께서 이쯤이면 승리하고 돌아오시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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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가능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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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주군의 힘과 성정을 믿고 계신다면 얼마든 가능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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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환호하는 영지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때로는 귓속말하느라 붙어있는 나를 과시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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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레 주변에 자신을 각인시키던 힐다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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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아가씨께서는 결코 자하브의 가주가 되실 수 없으시지만, 자하브의 안주인으로서는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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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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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제벨라만큼이나 좋은 여자도 없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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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다른 사람들에게나 근친이고 나한테는 족외혼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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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친명가라는 멸칭이 괜히 붙은 게 아닌 걸까. 어딜 가도 족내혼단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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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잠시. 개선식에 잔뜩 들떠있던 힐다의 목소리가 돌연 진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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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주군. 절대 제벨라 아가씨를 슬프게 해선 안 됩니다. 이제 정식으로 대공의 지위에 오르셨으니 자하브령에서……아니, 남부 전체에서 주군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겠죠. 그럼에도 제벨라 아가씨를 홀대하지 말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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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생각은 하나도 없었지만, 일단 묻자. 그 정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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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 정도입니다. 장담컨데 제벨라 아가씨가 파업하는 것만으로도 자하브의 재산은 반토막 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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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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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제벨라가 가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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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던전 때문에 이게 다 무슨 고생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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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혀를 차는 것도 잠시. 여전히 열렬한 환호를 가만히 방치하는 것도 좀 아니다 싶어 손을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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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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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민들의 함성이 더욱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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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흑마법사 좀 잡은 걸로 이렇게 칭송받는 건 쪽팔리긴 하지만……솔직히 말해서 약간은 기분 좋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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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힐다가 이래서 출세하고 싶어 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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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은 물론이요, 현생에서도 지금껏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출세의 맛은 꽤나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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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근데 힐다 경. 왜 아까부터 나를 주군이라 부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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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잡은 줄. 이제와서 다른 줄로 갈아탈 수 없다면, 남들에게 자랑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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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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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사라는 이미지를 알차게 써먹겠다는 뜻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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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나를 다시 보니마니 했던 날 이후로 힐다가 너무 솔직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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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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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한창 흑마법사들을 때려잡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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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리아는 코넬리아대로 제벨라와 함께 협상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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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깨달았다. 눈앞의 상대는 에녹과는 다른 의미로 괴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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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이란 결국 서로 취할 것은 취하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며 완성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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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벨라는 아무리 도중에 변경된 것이라지만, 코넬리아가 준비해 온 모든 조건을 부드럽게 흘려내고 자신의 조건을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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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이 서로에게 훨씬 이득이라는 사실을 코넬리아는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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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에 예상했던 이권은 하나도 챙기지 못했지만……이 정도면 오히려 당장은 더 도움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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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자세로 찻잔을 들어 한잔 들이켜는 제벨라를 흘깃 바라보는 코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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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어주는 제벨라의 모습에 코넬리아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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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순수한 얼굴을 하고,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이 자신의 계획을 쳐부쉈는지 잘 알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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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적으로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 하나 내어주지 않았으나, 코넬리아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정보와 자금을 순순히 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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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에 빠졌다고는 하나, 연속된 사업 실패와 몬스터 토벌 실패로 입지가 줄어든 코넬리아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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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가로 제벨라가 받아 간 것은 아카데미의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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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실습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아카데미 학생들을 남부의 던전으로 보낸다는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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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는 제국의 가장 재능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곳에서 실습을 보낼 정도의 이들이라면 모험가들보다 훨씬 고급 인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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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들이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알아서 몬스터를 정리해 준다는데 얼마나 좋은 일인가. 딸깍은 언제나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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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자하브는 아직 혼란스러운 집안을 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코넬리아는 자신의 적이 누군지 알고 대항할 힘을 얻은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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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든 맹수, 다른 한 사람은 양의 탈을 쓴 늑대. 확실히 대공가는 달라도 다르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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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벨라를 향한 기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감탄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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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의 혈통이 이 정도로 괴물들이라면, 계승권은 좀 떨어져도 아무튼 황실의 적통인 자신은 더 대단한 사람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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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혈통주의자다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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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차례 무너졌던 멘탈을 빠르게 수복한 코넬리아가 눈치를 보며 마시던 찻잔을 자신만만하게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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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아직 유리아는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었던가요. 그럼 이번 실습 때 오랜만에 얼굴을 보실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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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황녀님께서 유리아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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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녜헤? 아, 으흠. 네. 물론이죠. 유리아가 유급하는 바람에 제가 먼저 졸업하긴 했지만 아카데미 동기였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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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셨군요. 아, 차 한잔 더 어떠신가요? 최근에 좋은 찻잎을 하나 구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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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주시면 감사히 마실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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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대신 유리아가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좀 알려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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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 정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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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 다과도 차에 어울리는 것이 있으니 새로 내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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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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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자하브. 아카데미에 가 있는 동생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돌연 태도가 돌변한 제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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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동생 친구라도 대하는 것 같은 스스럼 없는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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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어요! 믿을 수 없어요! 그 음험한 여자가 어떻게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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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콧노래까지 부르는 제벨라의 뒷모습에 간신히 멘탈을 진정시켰던 코넬리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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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죠? 진짜 뭐죠?! 설마 차에 독이라도 타려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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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차에 독을 타는 것은 제벨라의 전문이었으나, 이번에는 예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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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 자하브. 스스로의 손으로 아버지는 물론이요, 에녹이 오기 전의 모든 형제자매를……심지어 사생아들까지 꼼꼼하게 몰살시킨 희대의 악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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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아끼는 존재가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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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바로 대숙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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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브에서 제벨라를 위해 울어주고 분노해 주던 단 한 명뿐인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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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아 자하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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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물론 이제는 에녹이 추가되어 단 둘뿐인 동생이라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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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코넬리아의 떨림이 심해지건 말건 제벨라의 입가에는 한층 더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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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에녹이 승리와 함께 돌아오며 계승식을 끝마쳤고, 이제 곧 유리아 또한 자하브 성을 찾아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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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가족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뜬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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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로 너무 많이 따라 찻잔에서 차가 흘러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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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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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은 제벨라가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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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네요. 이건 저희끼리의 비밀로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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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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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리아는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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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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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선식을 가로질러 도착한 자하브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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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그러하듯, 제벨라가 자애로운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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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렴 에녹. 금방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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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누님이랑 약속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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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런 과거를 겪고도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걸까. 분명 천성이 선하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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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급하게 인사를 하고 떠난 코넬리아 황녀의 뒷모습에 키득이던 제벨라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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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기대하렴 에녹. 이제 곧 유리아가. 아카데미에 다니던 네 동생이 돌아올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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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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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번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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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는 아무래도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가주직을 너무도 간단히 넘겨주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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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동생인 유리아는 다를지도 모르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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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유리아가 가주직을 원한다면……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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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떠있는 제벨라를 향해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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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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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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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는 항상 여동생을 가지고 싶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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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 이 부분은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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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는 외동이었고, 현생에는 기간제 형이랑 새 누나밖에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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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뜸 사생아로 착각받았다 - 다운로드 진행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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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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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vel ID**: 383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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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URL**: https://novelpia.com/novel/383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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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 회차**: 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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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오리너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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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운로드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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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목 | 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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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다운로드 | EP.3 (3.m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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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ID | 5063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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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ewer URL | https://novelpia.com/viewer/5063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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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운로드 일시 | 2025-12-03 2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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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운로드 수 | 0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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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너뜀 | 3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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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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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Episode ID**: 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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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Viewer URL**: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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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너뛴 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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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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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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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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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다운로드 명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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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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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PIA_EMAIL="your_email" NOVELPIA_PASSWORD="your_passwor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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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thon scripts/novelpia_api_scraper.py "https://novelpia.com/viewer/No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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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references/novelpia/383597/ -n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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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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