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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흑마법사들을 때려잡은 이후. 필립은 챙겨온 비상 물품들로 부대원을 치료하고, 힐다와 칼튼은 연구실을 뒤적이는 사이.
나는 흑마법사들의 시체를 한데 모아두고 있자니, 카렌이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한 명쯤은 살려두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요 도련……가주님?”
“카렌카렌아. 그냥 편하게 불러. 나는 도련님 소리도 듣기 좋더라.”
“안 됩니다. 이미 가주님께서는 자하브 가문의 주인이시고, 제국에 셋 뿐인 대공이시잖아요. 호칭은 똑바로 해야 해요.”
“쓰읍. 난 좀 서먹해진 것 같아서 아쉽단 말이지.”
“……명령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아니, 이런 걸로 명령할 것까지야. 카렌 네 말이 맞겠지. 난 이런 쪽은 아무래도 잘 모르니 말이야.”
정식으로 계승식을 마치고 가주가 되었기 때문일까. 묘하게 고분고분하단 말이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카렌이 대충 뭉쳐놓은 흑마법사 시체를 발끝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조금 아쉽네요. 만약 한 놈 정도 살려두셨다면 뭐라도 정보를 캐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세상에. 카렌아. 그런 말랑한 얼굴로 고문 같은 것도 할 줄 아니?”
카렌의 볼따구를 양옆으로 주욱 잡아 늘리자, 얌전히 내게 불을 내어준 카렌이 무감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하는 게 아니라 할아버님이 하는 거예요.”
“아하. 뭐어, 너무 아까워하지 마. 설령 세 놈 모두를 살려서 심문한다 해도 제대로 된 정보는 얻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가요? 할아버님의 실력은 꽤 대단하십니다만…….”
“칭찬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아론이 누구 하나 고문하는 일은 잘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지.”
“가주님의 명으로 인한 것이라면 케세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 될 거예요.”
“어……그건 그것대로 재밌어 보이는 이야기지만, 애초에 흑마법사 상대로는 애초부터 전제가 잘못됐어.”
“예? 그게 무슨…….”
“잘 모르는 거 보니, 카렌 너는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보네.”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나마 머리가 멀쩡한 대장격 흑마법사의 시체를 가리켰다.
“너도 마지막에 봤지? 갑자기 말투가 연극체로 변한 거. 이게 보통 대장격 흑마법사들이 그렇게 말투가 오락가락하더라고.”
“맞습니다. 비극의 신의 신력을 받아들인 부작용이라고 들었습니다.”
“응? 그게 그런 이유였어……?”
지금껏 흑마법사는 여럿 잡았지만, 왜 그런지는 별로 궁금해한 적 없었기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일단 머릿속에 넣어둔 뒤. 하던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게 비극의 신 때문인지 그냥 미친놈이라 그런 건지 몰라도, 확실한 건 말투와 함께 머리도 오락가락한다는 거거든.”
“그럼…….”
“어. 정보를 빼내려 해도 헛소리만 하거나, 어찌어찌 정보를 알아내도 거짓이거나 함정인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경우에 따라서는 정보를 실토하는 척 이쪽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던 놈도 있었고.”
그러니 흑마법사와는 말을 섞을 이유가 없다. 말을 섞더라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일단 죽이고, 시체나 연구실 같은 곳에서 정보를 알아내는 게 훨씬 나아. 그래서 이렇게 바로 빠져나가는 대신 여기저기 뒤져보는 거잖아.”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겁니다만.”
“응?”
한데 모은 흑마법사들의 시체를 뒤적이며 대충 답해주던 도중. 카렌이 조심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혹시 흑마법사를 상대해 보신적인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 건가요. 너무 능숙하기도 하시고, 어쩐지 놈들이 가주님을 알아보는 것 같기도 해서 말입니다.”
“아……말 안 했었나.”
머리를 긁적이며 아무것도 없는 시체 하나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사실 칼립소에도 흑마법사 지부가 하나 있었거든.”
“예, 뭐. 칼립소라면 하나 있을 법도 하죠.”
“근데 좀 뭐랄까. 거슬려서? 자꾸 충돌해서? 응. 아무튼 그래서 쳐부쉈어.”
“???”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는 카렌.
하기야. 내가 좀 헷갈리게 말하긴 했지. 알고는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결국 내가 어린 시절에 흑마법사 조직에 실험체로 팔려나갔다는 이야기까지 해야 하지 않는가.
내가 사실 자하브의 사생아가 아닌 짭이라는 사실이 알려질 수도 있고……그게 아니더라도 당시의 기억은 내 가장 깊은 상처다.
지금도 흑마법사만 보면 발작을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어린 시절의 일을 말하는 건 아무래도 거부감이 든단 말이지.
스스로 약점을 밝히는 건 칼립소에서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으니까.
내가 다른 흑마법사의 시체 하나를 더 수색하는 내내 눈만 깜빡이던 카렌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으……그러고 보니 가주님께서는 칼립소에서도 자신만의 조직을 꾸리셨었죠. 가장 낮은 곳의 주인이라는 게 설마…….”
“응? 조직이라고 할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지만, 같이 사는 친구들이 좀 있긴 했지.”
일종의 고아팸이라고 해야 하려나.
쉴 새 없이 대륙의 거물급 범죄자가 유입되고, 그 이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칼립소에서 고아는 취약계층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존재하는 이들.
그렇기에 생존을 위해 자기들끼리 뭉치는 경우가 많았고, 막 흑마법사 조직에서 빠져나온 시기의 나 또한 자연스레 고아팸에 합류한 것이다.
고아팸의 가입 조건은 부모가 없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을 것이니까.
그러다 시간이 지나며 다들 머리가 굵어지며 아이라 부르기 힘들어졌을 무렵.
누군가는 범죄 조직에 들어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용병의 일원이 되기도 하고……누군가는 마음이 맞는 몇몇과 함께 새로운 모임을 만드니.
내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같이 영차영차 힘내며 집도 사고 그랬는데…….
정작 집이 생기고 나자, 어렸을 때부터 사이좋았던 놈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더라.
어떻게든 중재시키려 해도 내가 얼굴을 비추는 순간 입을 싹 다물어 버리니 중재도 힘들었고.
나 혼자 남자라 내게는 말 못 할 갈등이 있겠거니 넘어갔지만…….
그러다 너무 크게 다투는 바람에 다 같이 살던 집이 박살 난 이후.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어째서 여초 직장에 남자 혼자 다니는 게 헬이라는 건지! 누나들 사이에서 자란 막내아들이 여자만 보면 진저리를 치는지……!
결국 각자 따로 살기로 하고, 마침 찾아온 아론과 카렌을 따라 칼립소로 오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적당히 생략할 건 생략하고, 숨길 건 숨기며 말한 내 이야기를 들은 카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런 걸 조직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적어도 다른 흑마법사들은 그렇게 여겼겠죠. 과연. 이해됐습니다. 새로 생긴 조직을 견제하려다가 가주님께 역으로 당한 거군요.”
“아니? 그냥 방해라서 내 쪽에서 보이는 족족 죽인 건데?”
“…….”
입을 꾸욱 다문 카렌.
사실이기도 하지만……솔직히 말하자면 포악한 전투광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 있었다.
나름 효과가 있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카렌. 무표정은 여전하지만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속으로 자축하는 사이. 간신히 진정한 카렌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럼……소리 없는 자들의 종말이라는 건 또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도 별거 아냐. 흑마법사 놈들이 쫄리니까 암살자 길드를 동원해서 날 죽이려고 하더라고.”
“설마……?”
“응. 그래서 암살자 길드도 같이 쳐부쉈어.”
“…….”
“아잇. 여기도 아무것도 없네.”
괜히 투덜대며 마지막 시체를 내던졌다. 이쪽은 허탕인가.
어째서인지 카렌이 멍하니 굳어있길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다.
흠. 기회인가.
볼따구는 이미 많이 만져봤으니 패스한다. 그 대신 카렌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대로 번쩍 들어 올리며 어린아이와 놀아주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높다 높아~”
“…….”
아무리 그래도 이건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무감각한 카렌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가주님. 내려주세요. 제 키가 작을지언정 나이는 그리 어리지 않습니다!”
“싫은데?”
“이익……!”
마구 발버둥 치는 카렌. 하지만 이미 완전히 몸이 들어 올려진 상태에서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한참을 저항하다가 결국 축 늘어지는 카렌.
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표정. 하지만 묘하게 원망이 서린 눈빛에 낄낄 웃던 도중이었다.
연구실을 뒤져보다 무언가 발견한 걸까. 뒤에서 힐다가 살짝 신난 어조로 외쳤다.
“여기 보세요 가주님! 해석이 필요할 것 같지만 뭔가 중요해 보이는 서류를 발견……가주님? 그리고 카렌 양?”
도중부터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는 힐다.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비비적거리길래 그제야 카렌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발이 땅에 닿았음에도 가만히 멈춰선 채……아니, 정확히는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카렌.
수치스러움에 바들바들 떠는 그녀를 지나쳐 어벙하게 입술만 뻐끔대는 힐다가 쥐고 있는 종이 뭉치를 받아들었다.
아무래도 칼립소가 아니라 다른 지역이라 그런지 내가 모르는 암호체계를 사용하고 있었었다.
달리 말하면 암호화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라는 소리.
“잘했어 힐다. 챙길 것도 챙겼고, 구할 사람도 구했으니 이제 돌아가자고.”
“네? 아, 네. 그으……카렌 양은…….”
“금방 회복하겠지 뭐.”
어깨를 으쓱이고는 왔던 길을 역으로 거슬러 나가기 시작했다.
다들 눈치를 보면서 카렌을 피해 따라서 움직이던 도중.
뒤에서 카렌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계승식 준비로 쌓여있는 업무가 많았었죠.”
“뭣. 아니, 그런 건 제벨라 누님이 대신 하기로 했잖아!”
“흥! 저는 원칙대로 일할 뿐입니다.”
카렌이 치사해졌다.
……뭐, 나 때문이지만.
***
햇살이 내리쬐는 밝은 창가. 하지만 바깥의 풍경은 볼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일하던 뚱뚱한 중년의 사내가 흠칫 몸을 떨었다.
“상단주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허허.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잠깐 좀 쉬고 싶으니 나가 주겠나?”
“예? 아, 알겠습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나가는 비서. 그 모습을 확인한 중년인의 푸근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던전 진입조가 전멸했나.”
그리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뒤의 어둠에서 펼쳐지는 것은 동지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금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청년. 에녹이 사납게 웃으며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겼다.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발동되는 기억의 전이.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던 상단주……아니, 상단주로 위장한 흑마법사가 한탄했다.
“결국 칼립소의 바깥으로 빠져나왔는가. 그나저나 저 복장은……자하브? 허어. 그런가.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고개를 끄덕인 흑마법사가 떨리는 손으로 차를 홀짝였다.
“하기야. 우리의 고향을 부순 이가 보통 인물은 아니겠지. 아무리 업보가 목을 졸라와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니. 이제야 이해되었다. 최근에 자하브의 사생아가 가주가 되었다고 하던가.”
에녹이 실험체 출신이라는 걸 알고 있던 흑마법사들마저 너무도 자하브스러운 에녹의 모습에 착각하고 말았다.
그냥 고아가 아니라 자하브의 사생아를 데려와 실험체로 삼았던 거라고.
실험 과정에서 잠들어 있던 피가 각성한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착각이지만 이를 바로잡아 줄 연금술사는 진작에 에녹의 손에 죽었다.
“허나 태양이라 한들 약점 없는 존재는 없는 법. 그 어떤 불길도 영원히 타오를 수는 없고, 그 어떤 빛도 언젠가는 어둠에 수렴하니.”
과거의 트라우마를 애써 억누른 흑마법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원수여. 네 정체를 알았으니, 이것으로 네 심장을 찌를 비수를 만들 수 있게 되었음이라.”
제국 전역에 흩어진 흑마법사들이 같은 기억을 공유받고, 은밀한 협력을 시작했다.
오직 자하브를 죽이기 위한 무기를 주조하기 위하여.
……그래. 자하브가 아닌 이에게는 별다른 효과가 없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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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가 약속했던대로 가주가 되긴 했지만, 하는 일은 정말로 얼마 없었다.
하여, 힐다의 수업이 시작되기 전. 아침에 눈을 뜬 이후로 한 발짝도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뒹굴거리며 카렌에게 귀찮게 구는 도중이었다.
문득 곧 자하브로 돌아올 거라는 새 여동생. 유리아에 대해 생각난 것은.
그렇다. 사실 나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다.
정확히는 여동생이 하나 생겼다고 해야겠지.
내가 자하브에 들어오며, 제벨라라는 새 누나가 생긴 것처럼 유리아라는 여동생도 함께 생긴 것이다.
“카렌카렌아. 유리아는 어떤 애야?”
“유리아 아가씨 말인가요?”
“엉. 처음 만나는 거니까 조금 궁금해서 말이야. 역시 제벨라 누님 같은 분위기려나?”
“으음. 아무래도 유리아 아가씨는 제벨라 아가씨와 많이 다르시죠. 정확히는 제벨라 아가씨가 다른 자하브의 여식분들과 비교해도 좀 특이한 분이지만요.”
“아……제벨라 누님에게 그 부분에 관해서는 얼추 들어봤어.”
자하브의 혈계능력은 오직 남자에게서만 발현된다. 하지만 여자라고 하여, 완전한 일반인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적어도 자하브의 흔적 정도는 남아있으니까.
제벨라는 시간이 흐르며 피가 연해지자, 격세유전으로 자하브의 흔적마저 지워버리며 다른 가문의 피가 발현된 것.
그렇기에 자하브 안에서도 무척이나 특이한 경우였고, 그렇기에 전대 가주인 카인에게 학대당했던 것이다.
즉, 유리아가 제벨라와 크게 닮지 않았다는 소리는…….
“혹시 금발이니?”
“예.”
“막 피부도 갈색이고?”
“아, 그건 아닙니다. 피부색은 제벨라 아가씨를 닮으셨거든요.”
“제벨라 누님이랑? 혹시 둘의…….”
“예. 두분 모두 1부인과 전대 가주님의 사이에서 나온 분들이십니다.”
“아하.”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카렌이 창문을 열어 간단하게 환기를 하며 말을 이었다.
“유리아 아가씨는 무재를 타고나셨습니다. 혈계능력은 발현시키지 못하셨기에 신체 능력은 다소 떨어지셨지만……그래도 자하브의 무재를 고스란히 물려받으셨죠.”
“혈계능력은 없어도 재능은 유전되기도 하는구만.”
“정확히는 혈계능력 또한 물려받았지만, 발현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제벨라 아가씨와 가주님의 혼인이 약속되어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다른 가문의 혈계능력을 각성하셨지만, 몇번이고 시행된 검사를 통해 자하브의 직계임은 확실하셨으니 말이죠.”
“……아.”
그러고 보니, 제벨라와의 결혼 건도 있었네. 이것도 진짜 결혼식을 치르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번 생의 아버지마냥 자식만 싸지르고 사라지는 건 좀 그렇잖은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대충 알겠네. 무재가 있으니, 그걸 키워주기 위해 아카데미에 보낸 거구나?”
“예. 일단 명목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제 추측이지만, 조금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죠.”
“갑자기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네. 이리 와서 좀 자세히 말해봐.”
침대의 이불을 들어, 옆구리 쪽을 툭툭 두드렸다.
나와 침대를 가만히 번갈아 바라보던 카렌이었으나, 결국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 옆구리 옆에 카렌의 작은 엉덩이가 쏙 들어오는 모양새.
누우라는 뜻이었는데……이건 이것대로 괜찮네.
최소한의 망나니 연기도 계속하다 보면 는다는 걸까. 이젠 이것도 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너무 과하지 않은 선에서 카렌을 희롱할 수 있는 위치. 꼬리뼈와 허리의 중간쯤 되는 부분을 콕콕 찌르며 물었다.
“그래서? 카렌 네가 생각한 다른 이유는 뭔데?”
“아마 전대 가주님께서는 후계자 경쟁이 심화될 걸 예상하셨겠죠. 그래서 능력은 있지만 막내라 너무 어린 유리아 아가씨를 아카데미로 일종의 피신을 보낸 거고요.”
“흐음……피신이라.”
무슨 말인지는 알겠고,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만……설령 그렇다 해도 카인이 유리아를 피신 보냈을 것 같지는 않다.
카렌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지만, 카인은 제벨라의 혈통을 의심하고 가문의 악재로 여기며 상당한 학대를 감행했잖은가.
그런 사람이 자하브의 흔적이 보인다고는 하나, 제벨라의 친동생인 유리아를 아껴서 멀리 도망 보냈다는 건 조금 신빙성이 떨어진다.
내 생각은 카렌과는 조금 다르다. 아마……제벨라가 내보낸 게 아닐까.
지금껏 제벨라가 일하는 모습을 몇번 지켜봐서 잘 안다. 그녀가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유능한 사람인지.
아무리 반쯤 감금된 상태고, 한계치까지 몰려있다해도 불온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한사람 내보내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카렌의 언행에서 추측컨데 유리아는 여자임에도 자하브 가문 안에서 그럭저럭 인정받았던 것 같으니 더욱 쉬웠겠지.
……물론,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실제로 어땠는지는 제벨라나 유리아에게 물어봐야겠지.
“아무튼 대충 어떤 사람인지는 알겠네. 그럼 성격은 어때?”
“성격이요?”
한참을 고민하던 카렌이 무표정한 얼굴 위로 흐릿한 미소를 띄워 올렸다.
“아랫사람을 잘 챙겨주시는 분이었죠. 연민을 알고, 책임을 아는 분이기도 하셨고요. 다만, 약간 다혈질적인 면모가 있긴 합니다만…….”
“그 정도는 자하브 가문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다는 거지?”
“……제가 한 말은 아닙니다만, 대충 그런 느낌이긴 합니다.”
자하브를 모시는 케세프 가문의 일원으로서 자하브의 핏줄에 안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린 걸까.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게 속삭이는 카렌.
요는 기본적으로는 괜찮은 녀석이지만, 성격은 급하다는 건가.
그렇다면 제벨라 상대로는 실패했던 가주직 떠넘기기가 먹힐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건 내 망나니짓을 고깝게 볼 것이며, 성격이 급하다는 건 살짝 긁었을 때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적어도 별다른 욕심 없이 나를 가주직에 앉힌 제벨라와 달리 변수가 되어줄 것은 확실했으니.
……그래도 전생 현생을 다 합쳐 처음으로 생기는 여동생이란 말이지.
마구 애호하고 싶은 마음과, 마구 괴롭혀 들고 일어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머릿속에서 첨예하게 대립한다.
안 그래도 내가 정말로 귀족의 피가 섞였는지, 어째서 던전에 들어가면 컨디션이 좋아지는지로 생각할 게 많았던 상황이라 슬슬 머리가 아파온다.
하여 몸을 둥글게 말아, 눈앞에 보이는 카렌의 허벅지에 머리를 묻어보았다.
“흐앗! 갑자기 무슨……!”
“카렌카렌아.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구나…….”
“……아, 하긴 그럴 때가 되긴 했죠. 가주님도 자하브시니.”
음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인 카렌이 나쁜 계획이라도 꾸미는 사람처럼 작게 속삭였다.
“그럼 오늘 수업은 땡땡이치시겠습니까?”
“…….”
순간 확 마음이 동했지만, 한참의 망설임 끝에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어. 힐다 기다리겠다. 빨리 가자. 당장 급했던 계승식도 끝나고, 쉬운 내용이라면 혼자 책도 읽을 수 있게 됐으니, 오러 수련의 비중을 높인다고 했거든.”
“오.”
눈은 그대로면서 입만 벌리며 놀란 티를 낸 카렌이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이걸로 저를 사람들 보는 앞에서 번쩍 들어 올렸을 때의 앙금은 씻어내도록 하죠.”
“그거참 고맙네. 근데 카렌아. 원래 이런 거 신경 쓰는 사람이었니?”
“제가 케세프 가문 출신이고, 가주님의 전속 시종이긴 합니다만 어엿한 한창때의 레이디입니다.”
“레이디?”
카렌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편안함이라는 말은 분명 이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리라.
“……벗으면 굉장합니다.”
“그럼 벗어보던가.”
“큿! 가주님의 충실한 집사에게 수치를 주실 생각이십니까!”
“벗지도 못할 거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데…….”
너무 티 나는 거짓말이었다.
***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지만, 슬슬 사람들이 보내오는 존경의 눈빛에 익숙해질 무렵.
하지만, 아직 내가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는 감도 못 잡고있는 도중.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이 찾아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자하브 대공 각하. 아카데미의 교관 역을 맡고 있는 델빈이라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실습을 허락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 정도야 뭘. 듣자하니 아카데미 재학생 중에 내 동생도 있다면서?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렇다. 아카데미에서 교관들과 함께 학생들을 보내온 것.
대부분의 일은 제벨라 선에서 해결되었지만, 아카데미는 제국의 미래. 그런 곳에서 수십의 학생을 믿고 실습 보냈는데 얼굴조차 안 비칠 수는 없잖은가.
오랜만에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비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좀 삐뚜름하게 앉긴 했지만.
약간 떨어진 곳에서 힐다가 이쯤 되면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의 시선을 보내왔지만, 애써 무시하며 눈앞의 학생들을 살펴보았다.
나이는 대부분 10대 중후반. 하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꽤나 훌륭하다.
마법사 쪽은 정확히 알아보기 어렵지만……기사 지망생들은 대부분 평기사 수준은 넘었다.
물론 검에 인생 몰빵한 힐다에 비할 바는 아니지.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자하브를 보필하기 위해 온갖 지원을 받으며 비밀병기 비스무리한 것으로 육성 받은 카렌과 비슷한 수준은 몇몇 보인다.
이 정도면 경험이 부족하고, 단장 노릇을 할 특출난 존재가 부재할 뿐이지 어지간한 정예 기사단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전생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아무리 싸우는 방법을 가르치는 아카데미라지만, 학생을 던전에 밀어넣는다는 것에 약간 거부감이 있긴 했는데…….
얕은 곳이라면 던전에 들여보내도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조금 더 자세히 늘어선 학생들을 살펴보았다. 기세를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살펴볼 요량으로.
당연한 말이지만, 전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한 명. 단 한 명만큼은 초면이면서 묘한 친숙함이 느껴졌다.
홀로 빛나는 것처럼 밝은 금발. 피부는 창백하다시피 하얗지만 그것이 유약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니.
짝다리를 짚고 선 다리, 반항적인 것을 넘어 위압적인 눈빛, 그리고 전신으로 뿜어내는 사나운 기세까지.
마치 인간의 법도를 모르는 짐승을 아름다운 여인의 형태에 가둬둔 것 같은 존재.
하지만 제벨라를 닮은 연보랏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저게 바로 유리아, 제벨라의 동생이자 내 새 여동생(아님)이라는 것을.
첫 만남인데 무어라 말부터 꺼내는 게 좋으려나. 그런 내 고민을 덜어주겠다는 듯이 유리아 쪽에서 먼저 나섰다.
절그럭. 쿵!
여리여리한 자신의 몸보다도 큼직한 대검이 알현실의 바닥에 박힌다.
동시에 유리아로부터 오러가 들끓으며, 목소리에 실린다.
“야.”
“……야?”
“한판 뜨자.”
“???”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끔뻑이는 사이.
기겁한 교관 중 한 명이 유리아에게 달려가 그녀를 말리려 했다.
“유리아 학생. 아무리 이곳이 본가라도 공적인 자리고, 제국에서 인정한 대공 각하 앞에서 그러한 언동은…….”
퍼억!
“크흑!”
“시끄러워! 그냥 닥치고 지켜보기나 해! 내가 다른 연놈들한테 시달릴 때처럼 말이야!”
그리고 놀랍게도 유리아가 휘두른 주먹에 얻어맞고 멀리 튕겨 나갔다.
힘이 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오러의 사용법이 너무나도 정교하다. 이제 막 오러를 익히기 시작한 나로서는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들 정도.
물론, 방금 튕겨 나간 교관은 신참인지 아니면 다른 전형이 있는 건지 다른 교관에 비해 좀 약해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교관 아닌가. 조금 다르지만 선생 비슷한 사람이란 말이다.
그런 사람을 망설임 없이 줘패고는 내게 삿대질을 할 줄이야.
기겁하는 사이. 쓸데없이 쩌렁쩌렁한 유리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판 떠서 내가 이기면 언니는 놔주고 나랑 결혼해.”
“누가 들으면 내가 제벨라 누님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줄 알겠네.”
“흥! 시치미 떼기는. 제벨라 언니 같은 사람을 너같이 발정 난 짐승이 가만 놔둘 리 없잖아?”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겠는데 일단 아무 일도 없었거든? 그나저나 유리아야. 내가 이기면 어쩌려고 그런 조건을 내거는 거냐.”
“그거야 간단하지.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줄게. 너한테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
이건 진짜 다른 사람이 들으면 내가 무슨 근친에 미친 사람인 줄 알겠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물론이요 교관들, 심지어는 형식적으로 세워둔 자하브의 기사들마저 웅성이고 있었다.
하긴. 당연한 일인가.
돌연 교관에게 손찌검을 하고, 너무도 가볍게 근친 야스를 하니마니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내 어설픈 망나니질은 갑질의 연장선상이건만, 유리아의 난장은 진짜 앞뒤 가리지 않고 들이받는 것에 가까웠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칼립소에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사라진 줄 알았던 내 안의 유교 드래곤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든다.
일단 넌 궁디팡팡 확정이다.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비스듬하게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냐. 이 오라비랑 한번 놀아보자꾸나.”
“바라던 바야.”
실력의 차이는 확연하다. 어디까지 힘 조절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주먹을 말아쥔 순간.
문득 깨달았다.
유리아가 나보다 약하고, 내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강해진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격차를 가늠하긴 힘들지만……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닐 터.
심지어 유리아의 조건 대로라면 이기건 지건, 유리아 본인은 무조건 나랑 순수한(아님) 자하브 만들기 풀코스를 조져야 한다는 사실을.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리아의 눈매와 입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카렌을 관찰하며 다져진 눈썰미가 잡아내 버렸다.
마치 웃음기라도 참는 것처럼 어색하게 틀어진 입가를. 기대된다는 듯이 묘한 열망으로 반짝이는 동공을 말이다.
“이런 씹.”
내 여동생이 이렇게 미친년일 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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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새 여동생의 성벽이 뒤틀려 있다는 의심이 들었을 때의 올바른 대처법을 고르시오.
1)패배 야스가 좋은 거니? 아니면 근친 야스가 좋은 거니?
2)아하? 패배 근친 야스가 좋은 거구나?
……어느 쪽을 골라도 정답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카렌은 유리아가 약간 성격이 급할 뿐, 기본적으로는 좋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웃음기라도 참는 것처럼 어색하게 틀어진 입가, 기대와 열망으로 반짝이는 동공, 그리고 아까부터 단 한 순간도 내게서 떨어뜨리지 않는 시선까지.
“이런 씹.”
카렌카렌아. 나를 속인 거니??
괜히 카렌을 노려보았지만, 내 시선을 무어라 해석한 걸까.
태연스레 나선 카렌이 지금 이순간에도 유리아를 말리고 싶지만, 내 눈치를 보며 차마 나서지 못하는 아카데미 학생들과 교관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조금 떨어져 주십시오. 가주님과 유리아 아가씨와의 대련의 여파가 미칠지도 모릅니다.”
“그으……안 말려도 되는 겁니까?”
델빈이라고 했던가. 아카데미에서 온 교관 중 대표 격으로 보이는 이가 조심스런 어조로 되물었으나, 카렌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자하브이고, 가주님께선 뜻을 정하셨습니다.”
누가 들으면 거창한 결정인 줄 알겠잖아. 그냥 적당히 궁디팡팡이나 하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아, 혹시 책임소재가 걱정이라면 안심하시길. 가주님께서 나선 이상 이는 가주님의 일입니다.”
“그, 그렇습니까?”
“예. 오히려 행운이군요. 다른 누구도 아닌 4대 대공가의 일원인 가주님께서 직접 대련을 보여주시는 것이니.”
“어……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뒤로 물리는 교관들.
그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카렌 또한 자하브의 가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하브는 근친 명가라는 멸칭이 붙을 정도로 미친 집안이라는 것을……!
카렌 입장에서는 내가 제벨라와 결혼하건, 유리아와 결혼하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
어찌됐든 다음 세대의 자하브는 피가 다시 짙어질 테니까……!
이게 그 상식 개변 세상인가 뭔가인가.
머리는 어질어질 했으나, 판은 깔려있고 해야 할 일 또한 명확했다.
일단 유리아를 쓰러뜨린다. 그리고 바로 학부모 면담……아, 둘다 없어서 굳이 말하자면 내가 보호자인가.
아무튼 1대1 면담 시간을 좀 가져야겠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공개 구혼 대련을 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으니까.
알현실의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단차 위에 올려진 의자에서 일어나, 짧은 계단을 내려가 바닥 위에 선다.
키 차이는 있어도 딛고 있는 바닥은 같아진 나와 유리아.
제벨라를 닮은 연보랏빛 눈동자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 오라비가 삼초식을 양보하마 유리아.”
“삼초식이 뭐야?”
“아”
괜히 폼 잡고 싶어서 전생의 무협지에서 봤던 대사를 따라 해 보았으나, 이곳은 판타지 대륙이라 그런지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
“……3번까지 공격을 받아주기만 하겠다고. 그러니까 전력으로 와봐. 하늘 같은 오라비와의 격차라는 걸 알게 해줄 테니.”
“흥! 하늘은 무슨. 애초에 밖에서 굴러들어 온 주제에.”
누가 들으면 아무리 가주라도 사생아 출신을 무시하는 콧대 높은 귀족으로 여기겠으나…….
나는 보았다. 어째서인지 군침을 츄릅 삼키는 모습을.
……진짜 정신 나갈 것 같네.
내가 한숨을 푹푹 내쉬건 말건 땅에 박아 넣은 대검을 뽑아 올리는 유리아.
자세를 한껏 낮추고, 자신의 몸뚱이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을 어깨에 비스듬히 걸친다.
동시에 변화하는 기세.
분명 조금 전까지만해도 은연중에 흘러나오던 건들거림이나, 열망 비스무리한 것이 사라지고 순수한 투지만이 남는다.
흉포한 짐승을 작은 인간의 형태로 구겨 넣은 듯한 사나움. 노골적으로 급소를 훑어보는 시선에는 은은한 위압이 담겨있었다.
자하브의 혈계능력을 발현시키지 못했음에도 이 정도인가.
확실히 자하브라는 혈통이 대공가에 어울리는 사기 혈통이긴 한가 보다.
……그런 자하브의 혈통으로 착각 받는 내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지만.
들키면 안 되는 입장이니 고맙긴 한데, 왜 아무도 의심 안 하냐고.
잠시 다른 생각을 한 순간. 이를 귀신같이 눈치챈 유리아가 달려들었다.
퉁.
큼직한 대검을 들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몸놀림. 두어 번의 발놀림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유리아의 몸이 빙글 회전한다.
자신의 몸 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기 위해 팔 뿐만 아니라 전신을 사용하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일렁이는 오러를 머금은 대검이 내 상체를 짓이길 듯이 쏘아졌지만.
“흠.”
오러를 살짝 끌어 올리며 한쪽 손에 집중한다.
회로를 연상시키는 기이한 문양이 심장에서부터 팔까지 뻗어나가더니,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텁.
날아들던 대검이 내 손에 잡혀 그대로 정지한다.
“……에.”
어벙한 소리를 내는 유리아.
그녀의 대검 위에서 일렁이던 오러는 내 손에 잡히며 사그라들었고, 걸리는 건 뭐든 찢어발길 듯한 기세로 휘둘러진 대검은 미동조차 않는다.
검을 빼내기 위해 끙끙대는 유리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확실히 재능은 있네. 하지만 순수한 힘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
“이거 놔……!”
“그래.”
대검을 놔주자, 힘을 주던 반동 탓에 스스로 뒤로 튕겨진 유리아.
하지만 묘한 스텝을 밟더니, 이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처음보다 더욱 강렬하게 대검을 휘둘러온다.
물론, 내겐 이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일격이었다.
텁.
방금과 똑같은 자세로 재차 대검을 잡힌 유리아. 당황하는 대신 몸을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입꼬리는 히죽이고 있었지만.
이를 애써 무시하며 유리아의 검을 평가했다.
“대충 알겠네. 어차피 신체 능력이 아니라 오러를 이용해 더 큰 힘을 내는 것이니, 차라리 하나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별다른 방어구 없이 대검 하나만 든 건가.”
“겨우 두 번 만에 알아차린 거야?”
“워낙 특이한 방식이니까.”
“그럼 이것도 한번 막아보던가!”
다시금 거리를 벌린 유리아가 이번에는 대놓고 동작이 큰 자세를 취했다.
자신의 몸이 아닌, 대검에 무게 중심을 두는 기이한 자세. 비틀거리듯이 달려든 유리아가 한보 반 거리 앞에서 땅을 박차고 공중에 뜬다.
전신과 대검의 표면에만 머물던 오러가 돌연, 유리아의 몸을 휘감기 시작한다.
허공에서 흩날리는 밝은 금발. 지금 이순간. 유리아의 대검은 무기가 아닌 하나의 송곳니였다.
“하아앗!”
내 정수리를 정확히 노리고 떨어져내리는 투박한 대검.
회전하는 오러에 감싸인 탓인지 이전과는 비교조차 안 될 광채를 뿜어낸다.
방어도, 회피도, 심지어는 탈진마저도 고려하지 않은 묵직한 한방.
이쯤 되면 아무리 나라도 약간 진심을 내야 할 터.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오른쪽 주먹을 한계치까지 뒤로 당긴다.
마치 투창이라도 하는 듯한, 혹은 화살이라도 쏘아낼 법한 자세.
본래라면 취하지 않았을 자세다. 실전에서는 너무도 비효율적이니까. 차라리 지금의 유리아처럼 전신을 비틀어 모든 힘을 주먹에 집중시키는 편이 훨씬 나을 터.
하지만 굳이 이런 자세를 취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단순히 효율적인 자세를 찾고, 육신을 단련하고, 그렇게 조금 더 강하게 힘을 주는 것이 전부였던 이전과 달리.
조금이나마 오러를……체내의 마나를 의도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 지금은 약간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됐으니까.
“흐읍!”
흑마법사와의 실전을 통해 익숙해진 오러의 감각이 심장을 떠나 팔 전체를 뒤덮는다.
붉게 물든 문양에서 느껴지던 열감이 단숨에 그 기세를 부풀린다.
화르륵.
문양 위로 피어오르는 불길. 정확히는 집중된 오러가 문양을 타고 흐르다가 밖으로 삐져나온 것이다.
물론, 이는 엄밀히 말해서 기사들이 사용하는 유형화된 오러로 육신을 코팅하는 기술이 아니다.
그저 과할 정도의 오러를 집중시켜, 넘쳐 흘렀을 뿐인 현상이니까.
하지만 나는 항상 이렇게 싸워왔다.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마력을, 개조당해 얻은 것이라 제대로 세밀한 조정이 불가능한 근력을.
그저 있는 힘껏 때려 박아 눈앞의 상대를 분쇄하는 식으로 말이다.
투박하고, 단순할지 몰라도 내겐 가장 익숙한 방법.
오러의 제대로 된 사용법 같은 건 나중에 배우면 그만이지.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움켜쥔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넘쳐흐르는 오러가 격발 되며 폭발에 가까운 굉음을 낸다.
그리고 불길을 휘감은 주먹이 그대로 유리아의 대검 옆면을 후려쳤다.
콰직!
“꺄아아악!”
“아.”
흥이 올라 너무 힘을 줬던 탓일까. 부서진 대검과 함께 무방비한 자세로 옆으로 날아가는 유리아.
이대로라면 벽을 부수고 처박힐 것이다. 그리고 모든 오러를 대검에 집중한 유리아는 이만한 충격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을 터.
이대로면 중상이라는 생각에 혀를 차며, 잽싸게 땅을 박찼다.
파앙!
바닥에 얕은 거미줄 모양 금을 내며 쏘아지는 몸뚱이. 공중에서 허우적대는 유리아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등쪽으로 벽에 충돌하며 충격을 대신 흡수해 주었다.
콰앙!
등짝을 내달리는 찌릿한 감각. 좀 아프긴 한데 이 정도면 참을만한 수준이다.
“어, 어째서……?”
내 품에 안겨 눈을 휘둥그레 뜨는 유리아를 향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야 이 오라비가 준비한 사랑의 매는 따로 있거든.”
“사랑?!”
“그쪽에 집중하지 말라고…….”
유리아를 빙글 뒤집어, 내 무릎 위에 엎드린 자세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팡! 팡! 팡!
“아팟! 진짜 아파! 설마 이런 취향이야?! 언니는 몸이 약해서 안 되는데!”
“제벨라 누님을 내가 왜 때려……? 너처럼 맞을 짓한 녀석이나 맞는 거지.”
“흐읏?!”
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히는 유리아. 그런 그녀의 엉덩이를 다시 한번 때렸다.
파앙!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탄력 있는 감각과 온기.
이후. 메챠쿠챠 설교했다.
……여기에 자하브의 기사들은 물론, 아카데미 사람들도 있다는 걸 깜빡 잊고서.
***
엉덩이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고통에 유리아는 생각했다.
‘와! 공개 수치플!
아카데미에서 엄한 것만 배워온 유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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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에녹을 본 유리아의 첫인상은 납득이었다.
‘이래서 제벨라 언니가…….
그제야 거의 매주마다 날아오던 제벨라의 편지가 요즘 들어 에녹에 대한 칭찬으로 도배된 이유를 이해했으니까.
유리아는 자하브의 혈계능력을 발현시키지 못했으나, 단 한 가지 물려받은 것이 있었으니.
직감이 바로 그러했다.
직감적으로 오러의 사용법을 깨우치고, 직감적으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이가 누구인지 알고, 직감적으로 승리로 이어지는 길을 찾는다.
제벨라의 조언에 따라 단순한 무재 정도로 포장해서 드러내긴 했으나, 그녀의 직감은 혈계능력을 발현시킨 자하브의 혈족들보다도 뛰어났다.
대공가쯤 되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배우자를 통해 대를 거듭하며 자연스레 품종개량 비스무리한 것이 이루어지니.
혈계능력을 제외하고도 여러 재능을 타고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가능한 일.
그리고 이러한 직감에 근거하여 본 에녹은 배부른 맹수였다.
의자에는 반쯤 눕다시피 걸터앉았고, 막 침대에서 일어난 것처럼 눈에는 나른함이 가득하며, 실제로 하품까지 해대고 있었지만.
늘어져 보이는 몸은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눈매는 나른할지언정 동공을 쉴 새 없이 주변을 탐색하고 있으며, 하품은……그냥 하품이었다.
진짜로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나온 것이라는 사실까지는 몰랐으나 유리아에게는 그것이 일종의 자신감으로 보였다.
‘어디 한번 와볼 테면 와보라는 거지?
하지만 실제로 겉모습만 보고 어설프게 덤벼들었다가는 저 송곳니에 목덜미를 물어뜯기고 말 것이다.
……에녹 입장에서는 칼립소에서 살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 버릇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유리아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날카로운 직감이 에녹을 보는 순간 계속해서 경종을 울렸다. 저건 위험한 존재라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경고. 당장 도망치거나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신호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한테 위험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리고 머리를 들이밀지만 않으면 먼저 공격해 오는 사람이 아니니까.
제벨라로부터 이미 에녹이 자하브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성정의 사람인지 전해 들은 유리아다.
‘제벨라 언니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지. 응.
아카데미에 가기 전. 아직 자하브 성에 살던 시절의 유리아는 보았다. 자하브의 혈족이 얼마나 잔학해질 수 있는지, 그들이 반쯤 가둬둔 제벨라에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제벨라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말이다.
직감에 의존한 판단이기에 제벨라가 자신의 형제들을 전부 죽였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유리아였으나.
유약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제벨라가 강인한 사람이라는 정도는 안다. 그리고 잠겨있는 문 너머로 펑펑 울었던 날 이후로 자신을 아끼고 있다는 것 또한.
그런 제벨라가 한 말이니 분명 허튼소리는 아닐 터.
자신의 직감으로도, 제벨라의 안목으로도 에녹이 다른 자하브의 혈족과 달리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든 유리아의 가슴에 기대가 차올랐다.
처음 보는 사이지만, 제벨라 이외에도 제대로된 가족이 생길 거라는 기대.
하지만 단상 밑을 훑어보던 에녹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짐승의 그것처럼 샛노란 동공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그녀의 직감이 시끄럽게 울어대더니.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살면서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 유리아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으나, 날 때부터 예리한 감각을 타고난 그녀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직감과 본능에 몸을 맡기고 되는대로 행동하는 것.
‘이게 첫눈에 반한다는 거겠지?
사실 아니다.
유리아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으나, 그녀의 직감은 기본적으로 생존본능을 기반으로 하는 것.
그저 생존을 위해서는 에녹의 옆자리가 가장 효율적이며, 이를 위해서는 그의 암컷이 될 필요가 있다고 여겼을 뿐이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이 문제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카데미의 기숙사는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가 나뉘어져있고.
몇 가지 사고를 치는 바람에 1년을 유급하기까지 한 유리아는 꽤나 오랜 시간을 여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동성끼리만 모여있으면, 그것도 한창때의 나이라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야한 이야기에 관심이 쏠리는 법.
하물며 아카데미는 평민과 상위 귀족들에겐 배움의 장이지만, 하위 귀족들에게는 일생일대를 건 상향혼의 무대였으니.
그런 이들에게 여러 자극적인 경험담을 듣거나, 비밀스러운 책을 돌려보던 유리아는……안타깝게도 약간 성벽이 뒤틀리고 말았다.
자하브 가문의 잘못된 조기교육, 직감에 과하게 의존하는 습관, 극찬 범벅인 제벨라의 편지를 읽고 쌓인 호감,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접한 금단의 지식(?)까지.
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 결과. 그녀는 패배 근친 야스 조아 조아를 외치는 광인이 되어버렸고.
이는 대련에서 패배하여 엉덩이를 맞는 도중에도 변하지 않았다.
‘와! 공개 수치플!
가정교육이 이렇게 중요하다.
***
“후우.”
유리아의 엉덩이를 정확히 10대 때리고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손바닥에 눌어붙은 것 같은 말랑 쫀득한 감각을 애써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유리아야. 이제 정신 좀 차렸니?”
“흐으……나, 나는 언제나 제정신이었는데?”
“대체 어떤 사람이 제정신으로 자기 오라비랑 결혼하겠다는 말을 하니. 어린애도 아니라 다 큰 녀석이 말이야.”
“어차피 언니랑은 할 거면서 뭘 그리 빼.”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맞나?”
근친명가라 불리는 자하브에서 나고 자란 녀석이다. 나를 제외한 그 어떤 가신도, 심지어 제벨라마저 나와의 혼인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니.
유리아 또한 필요에 따른 근친을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이는 거겠지.
실제로 자하브 가문이 비상 상황인 것도 맞는 말이고.
하지만, 패배 근친 야스 조아 조아 발언을 제쳐두고서라도 할 말은 남아있었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유교 드래곤의 속삭임에 따라, 짐짓 엄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하지만, 교관을 함부로 치는 건 잘못된 행동이야. 다른 어디도 아닌 자하브 본성에서 그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너. 모르는 거야?”
“뭐를.”
“제벨라 언니랑 나를 제외한 다른 자하브의 남자들이 전부 죽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후계자 다툼이 격해져 서로 죽고 죽였다고 들었다만.”
“으응. 어떻게 죽었는지가 아니라 죽음 이후의 일을 말이야.”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내 무릎에 엎드려 있던 유리아가 꿈틀거리며 몸을 뒤집었다.
그렇게 내 무릎에 누워 이쪽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말을 잇는 유리아.
“자하브의 힘은 결국 홀로 던전을 관리할 수 있는 압도적인 힘에서 나와. 그리고 이 힘은 혈계능력을 통해 유전되는 거구. 하지만 자하브의 모든 남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진 거야.”
“……자하브가 곧 망할, 아니 이미 망한 가문이라는 소문이 돌았겠군.”
“맞아. 아무리 덩치가 커도 죽은 짐승을 두려워하는 이는 없잖아? 많은 사람들이 자하브에 남은 것들을 뜯어먹기 위해 접근했어. 재력, 땅, 이권, 작위……그리고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능력까지 있는 나.”
“마지막은 과장이 좀 심한 것 같은데.”
“알았어 알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최고급 모판이 싸게 풀린 셈이지. 모두가 탐내지 않겠어?”
“……그건 너무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 같으니 금지. 차라리 과장해서 말하고 다니도록. 이거 가주 명령이야.”
자기 입으로 모판 같은 소리를 하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자, 표정이 묘해지는 유리아.
그녀가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아무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나를 노리더라고. 약간의 협박을 곁들여서 말이야.”
“그래서 문제가 터진 건가.”
“맞아. 홧김에 팔다리를 두어 개씩 잘라버렸거든.”
“……아, 그쪽에 문제가 생긴 거였구나.”
아무래도 뒷배를 잃은 유리아를 노리던 녀석들은 너굴맨……아니, 유리아에게 역으로 당했던 모양.
“아카데미니까 팔다리 정도야 금방 붙일 수 있긴 한데…….”
“그쪽 가문이 나섰겠지. 협박이 섞이긴 했지만, 말로 했는데 검이 날아왔으니 명분도 있을 테고.”
“뭐야. 알고 있었어?”
“아니. 하지만 뻔한 일이니까. 아무튼 이해했어. 그때의 일이 문제가 되어서 유급한 거구만. 그리고 교관들은……매수당해서 협박에 시달리는 너를 모른 체 했을 테고?”
“응. 이것도 제벨라 언니랑 코넬리아. 그리고 다른 친구 몇이 도와줘서 유급 선에서 끝난 거지 처음에는 퇴학당하는 줄 알았다니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는 유리아.
음음. 그래. 완벽히 이해했다.
“혹시 방금 전의 교관 말고 또 매수된 교관이 있었나?”
“있긴 한데……실습에 따라온 교관은 저거 하나뿐이야. 왜? 막막 여동생이 괴롭힘당했다니까 화가 나고 그래?”
“어.”
“……어?”
유리아가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부서진 벽에서 떨어진 조각 하나를 주워 손가락으로 튕겼다.
쐐애액……퍼억!
“아아아악!!”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유리아를 말리려다가 얻어맞은 교관의 팔에 돌조각이 틀어박힌 탓이었다.
“델빈 교관.”
“예, 예 대공 각하.”
“보아하니, 부상이 심해 보이는군. 아쉽게도 자하브에 상주하는 사제들은 지난 던전 역류의 부상자를 치료하느라 바쁘고, 포션도 다 떨어져서 말이야. 아카데미로 돌려보내는 게 좋아 보이는데……어떻게 생각하지?”
“대공 각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당장 아카데미로 올려보내겠습니다.”
내 눈치를 보던 델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바닥을 나뒹굴던 녀석이 악을 썼다.
“대, 대공 각하! 억울합니다! 무슨 오해가……!”
“아론.”
하여, 녀석의 말을 끊고 집사장을 불렀다.
“손님이 많이 아파서 제 발로 못 간다고 하네. 대신 배웅 좀 나가줘. ……정중히 말이야.”
“명에 따르겠습니다.”
어째서이지 창백해진 표정의 교관을 끌고 나가는 아론.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자니, 무릎 위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여왔다.
“그래서? 나는 방금 뭐 때문에 엉덩이를 맞은 거야?”
“…….”
잠깐의 고민 끝에 유리아의 이마에 딱밤을 놔주었다.
빠악!
“흐약!”
“호칭.”
“뭐, 뭐가?”
“앞으로는 건방지게 야라고 부르지 말고 제대로 오빠라 부르도록.”
“어…….”
붉어진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싸고 있던 유리아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오라방.”
죽어도 부르라는 대로 안 부르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잠시.
“근데 오라방. 나 엉덩이가 너무 아픈데 좀 쓰다듬어 주면 안 돼?”
“……안 된다 이 미친년아.”
유리아를 무릎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그럼에도 일생일대의 투자에 성공한 사람처럼 헤실대는 것이 묘하게 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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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소란이 있긴 했지만, 어찌어찌 무난하게 일정을 끝마치고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제 글공부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간단한 책이라면 혼자서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오러 수련의 비중을 늘리기로 했기 때문.
아카데미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조금 늦었으니, 힐다가 기다릴까 발걸음을 서둘렀으나.
“오라방.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아오, 깜짝이야.”
돌연 옆구리 쪽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유리아의 말에 흠칫했다.
분명 피는 이어지지 않았건만, 이상할 정도로 나와 닮은 금발이 사르르 흘러내리며 햇빛에 반짝인다.
“뭐야 뭐야. 내 머리카락이 신경 쓰여? 그으. 살짝이라면 잡아당겨도 괜찮은데.”
내 시선을 눈치챈 걸까. 유리아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으더니, 이쪽으로 내밀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니 유리아야…….”
“아, 미안. 손잡이로 쓸 때는 이렇게 하는 거였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 하나로 묶었던 머리를 쪼개, 두 갈래로 만들어 양옆에서 잡았다.
그냥 손으로 쥐어 고정시켰을 뿐이지만, 흔히들 말하는 트윈테일 스타일. ……그리고 조금 천박하게 말하자면 핸들을 만들어 내 앞에서 살랑였다.
“어때? 오라방은 이런 거 좋아해?”
“…….”
정신 나갈 것 같네.
분명 자하브의 혈계능력은 발현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유리아는 대체 뭘까.
아니지. 그런 식으로 따지면 제벨라도 골 때리는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나한테 잘해주고, 일 잘하는 누나잖아.
아카데미가 문제라고 하기에는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은 제정신으로 보였는데…….
“아.”
이해했다.
그냥 이런 사람이구나.
카렌이 워낙 자하브의 문제아들에게 익숙해져서 이 정도 언행은 귀여운 수준으로 보인 것일 테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며 나름 유리아를 이해한 순간.
불가해한 무언가를 접할 때 느껴지던 거부감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약간의 위기감이었다.
자하브에서 요구하는 망나니 인재상에는 못 미칠지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망나니 연기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리고 계승식까지 끝난 마당이지만 혹시라도 혈통의 진위를 의심당할지도 모르니까.
즉, 내게는 유리아보다 더 미친 사람처럼 굴 필요가 있다는 소리다.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어떻게든 해보는 수밖에.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유리아가 내민 양 갈래머리를 잡아들었다.
“핸들도 좋긴 하지만 내 취향은 좀 다르네.”
“으응? 오라방은 그럼 뭐 좋아하는데?”
“목줄.”
짧게 답하며 유리아의 머리카락을 그녀의 목에 휘감았다.
하얀 목덜미 위를 교차하는 금발. 그렇게 단단히 고정시킨 뒤에는 두 갈래로 나뉜 머리를 다시 합쳐 한 손으로 쥐었다.
마치 유리아 본인의 머리카락을 목걸이이자 목줄처럼 만든 모양새.
유리아의 머리카락이 꽤나 길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순식간에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목을 졸리듯이 붙잡힌 유리아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오라방 천재야?! 이런 건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럼 그럼. 이 오라비는 언제나 개쩔었단다.”
“철제나 싸구려 가죽이랑 다르게 심하게 쓸리지도 않고,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목을 조를 수도 있고, 무엇보다 다른 무엇도 아닌 내 머리카락에 내가 매인다는 사실이 너무 굴욕적이야!”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네.”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유리아의 모습에 자연스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일단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자하브는 자식 교육 망했다.
그나마 멀쩡한 제벨라는 학대했지, 유리아는 그냥 제정신이 아니지…….
아!
그래서 서로 후계자 다툼하다가 공멸한 거구나?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냥 운이 없어서, 혹은 누군지 상상도 안 가는 흑막이 있어서 죄다 죽고 망한 게 아니라 그냥 죽을만해서 죽었고 망할만해서 망한 것이리라.
복잡해졌던 머리가 맑아졌다. 그래. 유리아가 아무리 골 때리는 녀석이라도, 어차피 자하브를 떠날 내게 무슨 상관인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내게 목을 내어준 채, 뒷짐을 진 유리아가 고양잇과 동물처럼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따라오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라방 지금 어딜 가는 거야?”
“수업받으러 가는 중이다.”
“수업? 내가 없는 사이에 자하브에도 아카데미 같은 게 생겼나…….”
“아니, 그냥 내 개인 교습. 힐다 경이라고 은사자 기사단 부단장이 나한테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있거든.”
“흠흠. 힐다 경은 오라방의 애첩……기억해 둘게.”
“……그런 게 아니라 글이랑 예법, 오러 수련을 배우는 거야.”
“오라방 글도 읽을 줄 알아?!”
“내가 그렇게 무식하게 보였어……?”
약간 상처받았다.
너 글 읽을 줄 알아? 문맹 아니었어?
이런 소리는 전생을 포함해도 들어본 적 없는 폭력적인 질문이었으니까.
뭐어. 얼마 전까지의 나는 정말로 문맹이 맞긴 했지만.
나도 모르게 서운함이 겉으로 드러난 걸까. 유리아가 황급히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 아냐! 무식해 보이는 게 아니라 싸움과 여자 말고는 흥미가 없어 보일 뿐이니까! 오해하지 마 오라방!”
“……?”
이게 위로가 맞는 건가?
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애초에 광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 해선 안 된다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지금은 고분고분해진 만큼 크게 도드라지지는 않지만……유리아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사람보다 짐승에 가까웠다.
유리아가 멍청하다거나, 인간 언저리라는 나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성보다 본능이, 지능보다 감각이 발달한 사람 특유의 기세를 풍기고 있다는 소리였지.
칼립소에서 오래 살아남은 이들 중에는 비슷한 부류가 몇몇 있어 잘 안다.
물론, 그중에서도 유리아가 유독 도드라진 케이스 같지만.
“헤에. 오라방 생각보다 열심히 사는구나?”
“하! 가문의 일을 대부분 제벨라 누님께 떠넘기고 놀러 다닐 뿐이야.”
“응? 원래 어려운 일은 제벨라 언니가 하는 거 아냐?”
“…….”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애가 바로 여기 있었다.
“그나저나 오라방 오러 수련을 부기사단장한테 배워? 오라방이 더 강하잖아.”
“강한 것과 기술에 능하냐는 별개니까. 오러는 자하브에 들어와서 처음 익힌 거야. 그러니 기초부터 제대로 다져야지.”
“헤에. 강하다고 바로 오러를 마음대로 쓰고 그런 건 아니구나.”
“당연한 소리를……유리아 너도 어렸을 때는 따로 오러를 배웠을 텐데?”
“으음. 나는 천재라서 오러는 그냥 혼자 깨우쳤어.”
“…….”
맞다. 유리아에게 혈계능력은 없어도 무재는 있었다고 했던가.
내가 무의식적으로 힘을 주어 마나를 집중시키고, 오러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처럼.
유리아는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본능적으로 오러를 다루는 법이라도 터득한 거겠지.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유리아는 뭔지 모를 혈통인 나와 달리, 찐 자하브니까.
이 세계의 귀족은 대체로 하나쯤 탈인간급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된다.
혈계능력은 그중 하나일 뿐, 다른 부분에서 이게 같은 사람인가 싶었던 적이 한둘이 아니니까.
지금은 각자 제 갈 길 가고 있지만……한때 같은 고아팸이었던 녀석 중에 몰락귀족 출신이 있어 잘 안다.
혈계능력도 혈계능력이지만, 이를 떼어놓고 봐도 수완이 뛰어난 녀석이었지.
……대신, 대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파멸적이었지만.
괜히 옛날 생각에 추억에 젖는 것도 잠시. 어느새 연무장 앞에 도착했길래 유리아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쉿쉿. 도착했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이제 가봐. 여기가 집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아카데미의 재학생으로서 실습 온 거잖아?”
“가고 싶어도 오라방이 보내줘야 갈 수 있는데?”
자신의 목에 감긴 머리카락을, 이를 이용해 만들어 낸 목줄을 가리키는 유리아.
그제야 내가 유리아에게 목줄을 채우고, 성안을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놔줄 테니까 이제 가 봐. 아카데미에 가기 싫으면 제벨라 누님한테라도 가보고.”
“응.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어. 제벨라 언니도 오랜만에 보고 싶었거든.”
고개를 끄덕인 유리아가 순순히 떨어진다. 그리고는 어째서인지 목에 여전히 머리카락을 휘감은 채, 손을 흔들었다.
“그럼 오라방! 다음에 봐!”
“오냐.”
“그때는 제벨라 언니랑 같은 침대 위에서 보는 거지?”
“그럴 일은 없을걸.”
슬슬 익숙해진 유리아의 발언에 대충 답해주고는 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문밖에서 들린 대화를 전부 들은 힐다가 있었다.
힐다가 처음으로 내게서 시선을 스윽 돌렸다.
“아냐.”
“……저는 기사로서 자하브에 영광이 재림하길 바랄 뿐입니다.”
“아니라고.”
이런 오해는 좀 풀려도 좋지 않을까.
***
유리아에게 얻어맞고, 에녹이 던진 돌에 한 번 더 얻어맞은 아카데미의 교관.
아니, 전직 교관 브렌트는 입술을 짓씹었다.
“큭……빌어먹을 자하브. 숨겨진 사생아가 있을 줄 내가 알았겠냐고.”
그는 이제 막 골절이 나아, 살짝 저릿함이 남아있는 팔을 부여잡은 자세로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섬뜩한 분위기의 집사장, 아론은 두 번 다시 눈에 띄는 순간 팔이 아니라 목이 부러질 것이라 경고했고.
멍하니 닫힌 성문을 올려다보던 브렌트. 그런 그의 짐을 가져다준 아카데미의 책임자인 델빈은 해고 통지서를 함께 건넸다.
유리아의 건이 아니더라도 사소한 부패를 여러 번 저질러 이미 수차례 경고받은 상태. 그렇기에 별다른 절차 없이 최후통첩이 날아온 것이다.
마지막 정이라며 중급 포션을 건네주던 델빈의 싸늘한 표정이 떠올라, 브렌트가 무의식적으로 방금 막 나은 팔을 움켜쥐었다.
뚜둑.
자하브 같은 괴물 딱지에 비하면 손색이 있을 뿐이지, 브렌트 역시 아카데미에 취직할 만큼 나름 실력있는 기사였기에 한 번 부러지며 취약해진 팔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미 정신적으로 몰린 그는 팔이 보내는 고통의 신호를 알아차릴 여유조차 없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이제 더는 돈을 빌릴 구석도 없는데……!”
브렌트가 소소한 뇌물을 받아먹은 이유는 간단하다.
빛나는 진짜 재능들과, 벽에 부딪힌 현실 사이에서 어느새 검을 놓아버린 그가 도박이라는 새로운 취미를 붙였기 때문.
아카데미의 교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고, 때로는 뇌물도 받아먹었으나…….
이젠 일자리도 뭣도 없으니 갚을 길이 없어졌잖은가.
이대로 수도에 돌아갔다가는, 그리하여 돈을 빌린 도박장의 사채업자들에게 해고 소식을 들킨다면.
분명 좋지 않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터.
초조해하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브렌트. 그런 그의 앞에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나타났다.
“브렌트 디에고. 아카데미의 전직 교관이자, 엘리스 패밀리에게 2만 골드의 빚을 진 도박쟁이. 맞나?”
“누, 누구냐!”
기겁하며 검을 뽑는 브렌트. 그제야 치료가 덜 된 팔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를 가로막은 사내는 태연했다.
“진정해라. 내 적은 어디까지나 에녹 자하브이니. 만일 네가 나의 일을 도와준다면, 빛을 대신 갚아주고 새로운 신분 또한 준비해 주마.”
“……내가 네놈을 어떻게 믿지?”
“믿지 않으면 네놈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일 텐데?”
그 말에 브렌트는 깨달았다. 어느 쪽이건 자신에게 미래는 없다는걸.
도망치다가 엘리스 패밀리에게 추적당해 죽느냐, 괜히 나대다가 아론이라는 집사장에게 살해당하느냐.
어차피 둘 중 하나라면 차라리 뭐라도 발버둥 쳐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브렌트는 에녹과 유리아의 얼굴을, 그 벌레를 쳐다보듯 경멸과 무관심으로 가득한 표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하브의 그 애송이들을 엿 먹일 수 있고, 내 미래까지 세탁해 준다는데 뭐든 해줘야지.”
“잘 생각했다. 우선 이걸 받아라. 그리고 내가 일러준 곳으로 향해라. 아직 수리 중인 성벽이 있을 거다.”
그리 말하며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는 사내.
이를 받아 든 브렌트는 순간 흠칫했다. 상자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아카데미에서 철저히 배척하라 가르치는 흑마력이었기 때문.
하지만 이미 갈 곳도, 떨어질 곳도 없는 브렌트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흑마법사의 무서움을 아는 만큼 더욱 든든해졌다.
“이거라면…….”
도박쟁이가 인생을 망치는 이유는 보통 자기 스스로 팔자를 꼬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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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유리아 때문에 돌겠습니다 누님.”
“어머. 그러니?”
2~3일에 한 번씩 있는 정기 티타임. 정확히는 제벨라가 그간 처리한 여러 일이나,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간략하게 요약해 알려주고.
잡담도 하고, 맛있는 것도 좀 먹고, 호시탐탐 내 이미지를 망칠 기회를 노리고, 가능하면 제벨라 대신 유리아에게 가주직을 떠넘길 각을 재보는 자리였으나.
오늘만큼은 이러한 평소의 목적과 전혀 상관없는 푸념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유리아 자하브 때문.
“예. 들어 보십쇼. 오늘 유리아가 실습이 끝나자마자 제 방에 들이닥치지 뭡니까.”
“노크 정도는 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아하. 제 말뿐만 아니라 제벨라 누님 말도 잘 안 듣는 거였군요. 아무튼 갑자기 쳐들어온 유리아가 무슨 짓을 했는지 혹시 짐작 가십니까?”
“어디 보자……한번 생각해 봐야겠구나. 에녹 네가 이리도 불평할 정도면 분명 중요한 무언가를 방해한 것일 터. 수련장이나 아니라 방 안이라…….”
달그락.
거기까지 제벨라가 자신의 찻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내려놓았다.
오러를 수련하며 예민해진 감각이 숨결에 섞인 은은한 꽃향기를 잡아낸다.
다만 이것이 차의 향기인지, 제벨라의 체향인지는 모르겠다. 언제나 붓꽃을 닮은 향기를 풍기니까.
차에 젖은 입술을 혀로 슬쩍 닦아낸 제벨라가 빙긋 웃었다.
“역시 카렌과 좋은 시간을 보내다가 도중에 방해를 받은 거니?”
“비, 비슷하죠? 오늘 실습 때 잡은 가장 강한 몬스터라면서 포이즌 웜의 머리를 가져왔으니까요.”
사실 카렌과 유니콘은 순결한 여성을 좋아한다는데, 정작 유니콘 본인은 대체 어떻게 번식하는 것인지에 대한 토론을 하는 중이었지만.
아무튼 즐거웠으니 좋은 시간은 좋은 시간 맞겠지. 제벨라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지만…….
뭐어. 포이즌 웜의 머리를 가져온 건 아무런 과장도 없는 사실이었지만.
녹색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면. 퇴화해 회색으로 변한 눈, 터널처럼 동그란 입과 그 안쪽에 빼곡히 돋아난 이빨들.
벌레를 특별히 혐오하는 편이 아님에도 보는 순간 절로 소름이 오소소 돋더라.
“그래요. 백번 양보해서 실내에 피 흘리는 몬스터 머리를 가져온 것도, 냅다 제 방문으로 열고 들어온 것도 이해할 수 있어요.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나 보죠.”
“어머? 백번이나? 누이는 에녹의 이해심이 깊은 것 같아 감동이란다.”
“……하지만, 잘라 온 머리를 툭 던지고 혼자 쪼르르 나가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군요. 하아. 그거 치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심지어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 며칠 전부터 매일 일어나는 입니다 매일.”
“에이. 그래도 귀엽지 않니. 고양이가 잡은 사냥감을 주인에게 가져다주는 것 같아서 말이야.”
“…….”
이렇게 보면 제벨라는 그냥 팔불출이 아닐까 싶다. 나한테 잘해주는 것도 그렇고, 유리아에게 무른 것도 그렇고.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자니, 어느새 턱을 괴고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던 제벨라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누님.”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이 사이좋아 보여서 다행이란다. 아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려나? 유리아가 다른 건 몰라도 감은 참 좋은 아이니. 좋은 사람을 알아본 거겠지.”
“감……인가요.”
“그래 감. 사실 재능이라는 게 다 그런 거잖니. 알기 쉽게 눈에 띄는 것도 아니고,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특출남.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감각을 우리는 감이라고 부르니 말이야.”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제벨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 말을 들으니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 의미에서 첫눈에 반한다는 것도 감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단다.”
“푸흡!”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아니, 차라리 여기에서는 뿜는 게 더 품위 없어 보였으려나. 그보다 제벨라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낸다는 건 유리아가 앵겨붙는 걸 알고 있다는 건가.
아니지. 내가 이걸 왜 숨겨야 하는가.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당당하게 굴어야…….
생각이 점점 복잡해지는 사이. 제벨라가 쿡쿡 웃으며 손을 뻗어 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약간의 과자부스러기, 그리고 두어 방울 새어 나온 찻물을 검지로 훑어내고는 묘한 웃음과 혀를 내밀어 낼름 삼키는 제벨라.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야한 걸까.
칼립소에서 조금만 깊은 곳으로 가면, 보이던 헐벗은 매춘부보다 꽁꽁 싸매고 있는 제벨라가 더 매력적이란 말이지.
역시 얼굴의 차이인가. 아니면 미드 차이?
제법 진지한 고민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제벨라는 내 입가를 닦아준 것으로 만족했다는 듯이 평소와 같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이걸 깜빡했구나. 저번에 오크 워로드가 쳐들어오며 무너진 성벽을 기억하니?”
“네? 그거야 당연히 기억하죠.”
“이번에 자재가 도착해서 슬슬 수리를 시작하려 하는데, 에녹 네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구나.”
“제 도움이요? 아니, 애초에 꽤 시간이 지난 걸로 아는데 이제야 수리에 들어간다는 건 또 무슨 소립니까.”
“으음. 실은 에녹 네겐 비밀로 했지만, 자하브의 예산이 그리 넉넉치 않단다.”
“……예?”
“아, 물론 재정 구조나 세금에 문제 있는 건 아니란다. 어디까지나 던전 역류가 연달아 터지며 큰 지출이 겹쳤을 뿐이니.”
하지만 당장 쓸 돈이 부족한 건 사실. 그리고 몬스터를 막아내야 하는 만큼 성벽을 싸구려 재질로 지을 수도 없었다.
그탓에 자금 조달이 늦어 이제야 수리가 시작된다는 뜻.
“다행히 에녹 네가 영지민들에게 인기가 좋잖니. 아무래도 제대로 된 인부를 고용하기 힘드니 관리자만 뽑고 노역을 좀 시켜야 할 것 같은데…….”
“과연. 완벽히 이해했어요.”
노역. 정확히는 영주의 권한으로 영지민들을 소집해 일 시키는 강제노역을 말하는 거겠지.
노역은 현대에도 형벌로서 남아있을 만큼 예로부터 악명높은 시스템이다.
생업을 그만두고 끌려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을 대신하는데, 심지어 빡세고 부상의 위험도 크다. 이를 좋게 생각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물론, 피라미드 건설 같은 예외도 있긴 하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급여도 넉넉하게 줬고, 다치면 치료도 해주고, 아프거나 개인 사정이 있으면 휴가도 줬다고 하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니자 예외적인 경우. 기본적으로 노역이란 최소한의 의식주만 제공해 주고 뼛속까지 부려 먹는 일.
그리고 이러한 노역은 자하브에도 있던 모양이다. 하긴. 중세 봉건 사회니 당연한 일인가.
아마 제벨라로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빠르게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노역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불만이 클 영지민들을 달래기 위해 여러 오해로 한창 평판이 좋은 나를 내세우고 싶은 것일 테고.
합리적인 판단이다. ……일이 잘 굴러가기만 하면 말이다.
“흐.”
오랜만이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큰 기회 아닌가. 나를 가주라는 자리에 묶어두고 있는 가장 큰 문제중 하나인 영지민들의 지지를 무너뜨릴 기회.
지금껏 일이 요상하게 꼬여 오히려 좋은(?) 결과를 냈지만……이번 건 결국 노역이다.
아무리 일이 꼬여도 밥 먹고 일만 하라는 명령에 기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그런 말을 하는 대상이 뻔뻔하고 오만하며 재수 없기까지 하다면?
이건 뭐, 말 다 했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말고 제게 맡겨주십쇼 제벨라 누님.”
“그래도 되겠니?”
“제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이런 건 영주가 나서야죠. 예에. 그렇고 말고요.”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탐욕스런 영주의 래퍼런스.
이거라면……!
“재정이 부족하다고 하셨죠? 저만 믿고 맡겨주십쇼 누님. 반드시 최소한의 식사와 최소한의 의료지원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뽑아낼 테니 말이죠.”
“으응? 원래 이런 건 무급 노역인데…….”
“네? 뭐라고 하셨나요?”
“……아무것도 아니란다. 최소한의 식사와 최소한의 의료지원이라고 했니? 그래. 에녹 네가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렴. 이 누이는 언제나 에녹 너를 응원하고 있단다.”
어째서인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제벨라.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해결된 모양이다.
***
건장한 영지의 건장한 청년들을 불러 모아, 무너진 성벽 앞에서 노역 이야기를 꺼내려 했으나.
평소와 다르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리아와 마주쳤다.
“여기서 뭐 하나 유리아야.”
“아, 오라방? 그냥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산책하던 중이었지.”
“됐으니까 좀 나중에 해. 제벨라 누님이 시켜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어? 그렇다면야…….”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성벽에서 멀어져 내 옆에 서는 유리아.
그럼에도 아직 진정되지 않는지 대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말았다 하기도 하고, 냄새를 맡듯이 코를 킁킁거리기도 하지만.
뭐,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 원래도 기행을 벌이는 녀석이니까.
유리아를 적당히 무시하고, 벌써부터 침울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영지민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잘 모였다!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 같지만, 너희를 이리 불러 모은 것은 성벽을 수리하기 위해 노역을…….”
쿠웅!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터져 나온 굉음. 지축이 흔들리며, 안 그래도 무너져 있던 성벽 일부가 그 충격으로 더욱 큰 균열을 일으키며 폭삭 무너진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그 너머로 섬뜩한 안광이 번뜩이더니.
-아아아아아!
뒤이어 지옥의 밑바닥을 긁어대는 것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찌나 막대한 성량인지, 방금 막 피어오른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질 정도.
그렇게 완전히 무너진 성벽과 흙먼지 너머에서 드러난 것은 뒤틀리고 부풀어 오른 채, 불길한 흑마력에 휩싸인 인간 비스무리한 무언가.
많이 변했지만 어째 익숙한 외모에 기억을 되짚는 사이.
“브렌트 교관?!”
옆에서 들려오는 유리아의 기겁에 눈치챘다. 일전에 뇌물을 받고 유리아를 알게 모르게 차별한, 그리고 내가 던진 돌에 얻어맞고 쫓겨난 아카데미의 교관이었다는 사실을.
그렇다. 교관이 아니라 교관이었던 것.
브렌트였을지 몰라도 이젠 브렌트라고 부를 수 없는 뒤틀린 존재가 검붉은 피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자하브!!! 죽인다! 죽어! 죽어라!!!
섬뜩한 기운이 담긴 저주를 내뱉는 녀석. 촉수처럼 변이된 그의 손에는 모든 빛을 흡수하는 듯한 칠흑의 검이 들려있었다.
.
.
.
.
.
“다, 다들 도망쳐! 괴물이다!”
“그런가……! 이래서 영주님께서 노역을 시켜서라도 성벽을 고치시려 한 건가!”
“뭣!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아냐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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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들 도망쳐! 괴물이다!”
“그런가……! 이래서 영주님께서 노역을 시켜서라도 성벽을 고치시려 한 건가!”
“뭣!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아냐 씨발.
실시간으로 오해가 퍼지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이를 바로잡을 여유는 없었다.
뒤틀리고 부풀어 올라 본래의 얼굴을 제외하면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브렌트였던 것.
녀석이 지독한 흑마력을 풍기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으니까.
콰앙!
팔을 여러 갈래로 찢어 놓은 것 같은 촉수가 바닥을 두드린다. 기껏 평탄화 시켜놓은 바닥이 패이고, 쌓여있던 건축 자재가 박살 난다.
제벨라가 처음으로 아쉬운 소리를 했을 정도로 비싼 고오급 재료들이 순식간에 부서지고 있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저 자리에 사람이 있었다면 사람도 함께 터져나갔겠지.
노역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내 앞쪽에 불러모은 것이 불행 중의 다행이었다.
……아니, 그래도 나름 제벨라 앞에서 큰 소리 떵떵 치고 왔는데 죄다 박살 났다는 이야기는 어케 꺼내냐고.
“하여간 흑마법사 놈들은 도움이 안 된다니까.”
흑마력을 풀풀 풍기지만, 제정신이 아니고 몸도 뒤틀린 것을 보아하니 브렌트가 사실 흑마법사였다는 건 아니겠지.
아마 모종의 방법으로 속아 넘어갔건, 멍청하게 제 발로 스스로를 팔았건 아무튼 이용당하는 것에 가까우리라.
물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나 또한 실험체 출신이라 잘 안다. 실패한 실험체는……죽음으로만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뼛속까지 틀어박힌 흑마법사 혐오를 삼키며 입을 열었다.
“유리아. 영지민들을 피신시켜, 그리고 오는 길에 기사들이랑, 상주하는 사제들도 데려오고.”
“아, 알았어!”
브렌트였던 것은 진작에 이성을 잃었는지, 자하브에 대한 저주를 늘어놓으면서 정작 내가 아니라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덕분에 영지민들이 무사히 빠져나가고, 마지막으로 유리아 또한 이 장소를 벗어나려는 순간.
[퇴장을 금한다. 모든 배우는 막이 내리기 전까지 무대에서 내려갈 수 없음이라.]
브렌트가 풍기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아니, 내가 지금껏 상대해 온 흑마법사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강대한 흑마력이 지면에서부터 치솟았다.
우웅!
마력이 전개될 때 특유의 강렬한 진동과 함께 주변 일대를 직사각형 형태로 둘러싸는 결계.
막 빠져나가려던 유리아의 몸이 안쪽으로 튕겨진다.
“악! 이,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멍청한 흑마법사가 제 손으로 자신이 묻힐 곳을 파고 있다는 증거지.”
칼립소에서 흑마법사 놈들의 함정에 빠졌을 때 본 적 있는 결계다.
몇 가지 제약을 거는 것으로 결계를 대폭 강화시키는 종류의 마법.
순수 흑마법이 아닌지, 아니면 내게 직접 적용되는 종류가 아니라 그런 것인지 흑마법에 내성이 있는 나조차 힘으로 부술 수는 없다.
……아니, 오러를 익힌 지금의 나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세월 걸릴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걱정 마. 굳이 부술 필요 없는 거니까.”
“그건 또 무슨 대책 없는 소리야 오라방.”
“우리 중 어느 한쪽이 전부 죽으면 알아서 열리는 구조일 테니까.”
[옳다. 우리의 대적자여, 요람을 불사른 무도한 자여. 순례자들이 갈고 닦은 복수의 검이 그대의 심장을 꿰뚫으리라.]
“저,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오라방? 흑마법사들이 이상한 말투를 쓴다는 건 아카데미에서 배워서 알고 있는데 해석하는 법까지는 배운 적 없는데…….”
“대충 나한테 처맞은 게 억울해서 복수하러 왔다는 소리……잠깐. 유리아 너 왜 그래?”
“어?”
언제든 뽑을 수 있도록 대검을 움켜쥐긴 했으나, 유리아의 전신은 아까부터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공포에 잠식된 것처럼.
……짐작 가는 것은 있다.
나야 익숙해졌다지만, 기본적으로 흑마력은 인간 본연의 공포를 자극하는 성질을 지녔으니.
처음 겪는 실전이 고위 흑마법사와, 놈이 다루는 장난감이라면 충분히 이해되는 반응이다.
“못 움직이겠으면 거기서 잠깐 쉬고 있어. 금방 끝내고 올 테니.”
오러가 본격적으로 순환하기 시작하자, 심장에서 시작된 열기가 전신을 휘감는다.
활력이 차오르는 것과 동시에 지금껏 의식적으로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들끓는다.
그래. 아직 던전에서 찾아낸 서류를 해석하지도 못했는데, 제 발로 찾아온 것 아닌가.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다. 칼립소에서도 보기 힘든 거물이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니.
나라고 이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날려 먹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자하브를 저주하며 정작 이쪽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아직도 주변을 때려 부수는 브렌트.
그런 녀석의 소란에 숨어, 목소리와 존재감을 발하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는 흑마법사.
놈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고, 나름의 답을 얻을 수 있었으니……흑마법사는 비대해진 브렌트의 안쪽에 있다.
우선 브렌트를 갈기갈기 찢어내고, 안쪽에 숨어있던 흑마법사까지 때려죽인다.
완벽한 계획에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땅을 박차려는 순간.
이 짧은 사이에 두려움을 추스른 유리아가 흔들림 없는 움직임으로 대검을 꺼내 어깨에 얹는다.
“……이제 괜찮아. 나도 싸울 수 있으니까 보조할게 오라방. 다만.”
“다만?”
“저 검. 저것만큼은 조심해야 해.”
사냥에 나선 짐승처럼 섬뜩하게 빛나는 연보랏빛 눈동자가 빛을 흡수하는 묵색 검에 고정된다.
과연. 이게 나 같은 짭이 아니라 진짜 자하브인가.
순식간에 감정을 다스리고, 위험 요소를 파악하여, 우선순위에 따라 행동을 개시한다.
이는 분명 더할 나위 없는 전투의 재능이었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흑마법 덩어리 같은 녀석이 별다른 특징도 없는 검을 저렇게 소중히 들고 다닌다?
하물며 내가 누군지 아는 녀석이 이렇게 누구 하나 죽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무대까지 준비했다고?
분명 뭔가 비장의 무기라도 준비한 거겠지.
빛을 반사하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것 또한 감각을 속이기 위한 장치일 터.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유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하긴. 이렇게 대놓고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데 모를 수가 없긴 하지.”
“?”
눈앞의 상대에 집중하느라 제대로 못 들었지만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겠지.
그저 말아쥔 주먹에 정신을 집중하며 땅을 박찼다.
콰앙!
전력으로 걷어찬 힘을 견뎌내지 못하고 부서지는 지면. 유리아가 반박자 늦게 내 뒤를 따라온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브렌트의 변이된 거체. 종양과 촉수로 뒤덮인 몸뚱이가 스스로의 분을 못 이기고 날뛰다 말고 이쪽을 바라본다.
그나마 멀쩡한 얼굴은 검붉은 피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으며, 피눈물에 모든 색을 쏟아냈다는 듯이 동공은 빛이 바래 잿빛을 띠고 있었다.
-자하브……거기 있었구나!!!
“하! 왜 이쪽을 놔두고 혼자 난동 부리는 건가 싶었더니, 눈이 안 좋았던 거냐.”
[검집이 검만큼 우수할 필요는 없으나, 너무 부족한 것도 곤란한 법. 다행히 감정은 맹목적일수록 강렬하게 타오르는구나.]
“미친놈. 맹목적이라는 게 진짜 눈이 안 보인다는 뜻은 아닐텐데.”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브렌트. 녀석이 우악스레 휘두른 검을 멀찍이 피하고는 옆구리를 파고들어 주먹을 내지르려 했으나.
우드득.
지면에서 솟아오른 뼈로 된 손들이 서로 깍지를 끼고, 단단히 엮이며 발치를 막아 세운다.
물론 유의미한 수준은 아니다. 약간 걸리적거릴 뿐이니까.
콰앙!
강하게 걷어차자, 산산조각나며 부서진 뼛조각들.
사방으로 흩어진 날카로운 파편이 일종의 산탄총처럼 브렌트의 하반신을 파고든다.
몸집이 비대해지며 다리 또한 두꺼워진 탓에 큰 피해는 없었으나……고통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크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몸을 기괴하게 뒤트는 브렌트. 어깨에 관절이 하나 더 돋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억지로 뒤틀리는 녀석의 팔.
검을 든 쪽은 아니다. 아직 녀석의 검은 땅에 박혀있으니까.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사람의 팔을 세로로 갈라놓은 것 같은 촉수가 채찍처럼 날아든다.
손뼈로 이루어진 바리케이드를 걷어차며 잠깐 움직임이 지체된 탓일까. 피하기엔 늦었다.
그렇다면 막아야지.
“흐읍……!”
한쪽 팔에 오러를 집중시킨다. 피부 위로 기이한 문양이 그려지며 피어오르는 열기. 이를 믿고 촉수 다발을 향해 팔을 휘두른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내 팔을 휘어감으며 후려치는 촉수 다발. 진득한 저주를 휘어감고, 표면에서는 강산성의 점액질을 뿜어내지만.
“이 정도쯤이야.”
저주는 흑마법 저항력을 뚫지 못해 튕겨 나가고, 산성 점액은 대부분 오러를 뚫지 못해 피부를 살짝 태우는 선에서 그쳤다.
치이익.
약간의 연기를 자아냈을 뿐, 내 재생력조차 넘어서지 못한 탓에 팔은 멀쩡하다.
오히려 팔을 휘어감은 촉수다발을 강하게 휘어잡으며 외쳤다.
“지금!”
“하아앗!”
유리아의 대검이 촉수다발을 중앙에서부터 베어낸다.
촤아악!
-크아아아! 내 팔! 또 팔이……!
[어리석은 것. 우화를 위해서는 과거의 몸을 잊고 새로운 몸이 입었음을 기억하거라.]
정신이 무너지며 고통에 취약해진 것인지 팔이 잘려 나간 통증에 발작을 일으키려던 브렌트.
하지만 녀석은 흑마법사의 말 몇 마디에 금세 고통을 잊더니, 다시금 이쪽을 노려온다.
“쯧.”
중간중간에 흑마법으로 서포트 하면서, 브렌트를 수동 컨트롤 하는 건가.
흑마법으로 힘을 부풀리고, 흑마법사 본인이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부작용을 상쇄한다라.
아마 녀석의 강함 자체는 오크 워로드와 비교해도 비슷하거나 조금 더 강한 정도겠지.
흑마법의 특징을 생각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오크 워로드보다 더 강할 테고.
하지만 나와는 상성이 좋지 않다. 이전처럼 던전 내부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백업은 없지만……그래도 차근차근 깎아내면 얼마든 쓰러뜨릴 수 있을 터.
“유리아! 뒤로 물러나라!”
“응!”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공략해 볼 생각으로 거리를 벌렸다.
지금쯤 회수했을 무광의 칠흑검을 경계하며 브렌트의 오른쪽 촉수 다발에 시선을 돌렸으나.
“허?”
분명 쥐여있어야 했을 검이 보이질 않았다.
내가 이상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잘려 나간 촉수 다발 사이를 헤집고, 산성 체액 범벅이 된 검이 화살처럼 쏘아지고 있었다.
……내가 아닌 유리아를 향해서.
-자하브!! 죽인다!! 자하브!
[분명 대적자를 노렸을 터인데……아니, 예상치 못한 비극도 나쁘지 않구나. 이대로 한 사람의 종막을 보여다오.]
의아해하는 흑마법사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유리아를 향해 땅을 박찼다.
파앙!
빠르게 가까워지는 거리. 하지만 조금 늦었다.
유리아는 대검을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신체에 투자하는 오러를 의도적으로 제한했다.
하물며 방금 막 휘두른 대검을 회수하며 몸을 빼는 도중 아닌가.
자력으로는 막아내는 것도, 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내가 대신 받아내는 수밖에.
불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믿을 뿐이다. 꾸역꾸역 살아남은 증거로 손에 넣은 저항력을, 지금껏 오러 수련에 들인 노력을.
툭.
코앞까지 날아든 검 끝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유리아를 밀어냈다.
“어……?”
멍청한 목소리로 눈을 뜬 유리아에게 씨익 웃어주고는 주먹에 오러를 담아, 그대로 검을 쳐내려 했으나.
스륵.
어찌 된 영문인지 내 주먹을 그대로 통과하여 심장에 틀어박히는 검.
그 충격에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흐하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우리의 숙적이 숨을 거두는구나! 두려움을 먹는 자를 두려움에 떨게 하던 존재여! 너 또한 한낱 필멸자임을 자각하라!]
“아, 안 돼! 오라방! 어째서 나를……차라리 약한 내가 맞았어야 했는데……!”
흑마법사의 광소, 그리고 죄책감에 비명을 지르는 유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검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 아픈데?
완전 멀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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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하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우리의 숙적이 숨을 거두는구나! 두려움을 먹는 자를 두려움에 떨게 하던 존재여! 너 또한 한낱 필멸자임을 자각하라!]
“아, 안 돼! 오라방! 어째서 나를……차라리 약한 내가 맞았어야 했는데……!”
미친 듯이 웃어대는 흑마법사. 브렌트의 뒤틀린 육체 속에 숨어들어, 마법으로 소리를 내기 때문일까.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유리아의 목구멍까지 절망이 차올랐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쓰러진 에녹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는 유리아.
혹시나 하는 기대에 몸을 의존해 에녹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아무런 빛도 반사하지 않고 죄다 흡수하는, 마치 세상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을 발하는 검이 에녹의 심장을 꿰뚫고 있는 것을.
“아…….”
피는 한 방울조차 흐르지 않지만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에녹의 가슴에 박힌 검에서 풍겨오는 불길함은 유리아의 직감을 맹렬하게 자극하는 중이었으니까.
이 세상 모든 악의와 저주, 그리고 죽음을 억지로 검의 형태로 묶어두면 이러할까.
유리아의 발달된 직감은 가까이서 보는 순간 알아차렸다. 저 검은 누군가를 베어 죽이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는 것을.
날카로운 형상은 체내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한 것. 진실로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외상이 아닌 내부를……그 근본을 부정하는 부정 그 자체였다.
“뽀, 뽑아야……아직 늦지 않았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멍한 표정으로 쓰러진 에녹(진짜 모름).
하지만 아직 숨은 붙어있다는 듯이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보며 유리아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큿!”
검 자루를 움켜쥐려는 순간.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며 그대로 팔이 굳는다. 마치 몸이 검에 닿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움직여! 움직이라고……!”
자신의 팔뚝을 퍽퍽 때려가며 이를 악무는 유리아. 하지만, 무거운 대검조차 제 몸처럼 휘두르던 팔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가장 큰 무기는 근력이나 의지가 아닌 직감이고, 직감은 결국 생존본능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것.
오로지 자하브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검을 자하브의 직계인 유리아가 쥐는 순간……그녀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되리라.
머리로는 몰라도 본능적으로 이해한 미래에 몸이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연극이라도 보는 기분인 걸까. 마법으로 브렌트를 제약해서라도 이 모든 광경을 느긋하게 감상하는 흑마법사.
녀석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결계 안에 울려 퍼진다. 흘러넘치는 희열을 숨기지 못하는 것처럼.
[무용하다. 백의 죽음과, 천의 저주. 그리고 만의 비극을 담아 빚어낸 것이다. 아무리 우리의 대적자라 한들, 일찍이 남부를 밝게 비추었던 자하브의 후예라 한들 찾아올 필멸을 피할 수는 없을 터.]
“…….”
[자하브의 여식이여. 이제 곧 네 차례구나. 급하게 구한 것이라고는 하나 검집이 제 역할을 다했으니, 계약자로서 성의는 보여야 하니. 그래서? 어찌하겠는가?]
“…….”
[애원하겠는가? 혹은 무정타 원망하겠는가? 스스로에게 닥친 비극에 짓눌려 흔하디흔한 배우처럼 눈물을 흘리겠는가.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결국 이 안에서 일어난 모든 눈물은 나의 피가 될 터이니 말이다! 흐하하하!]
“…….”
흑마법사의 광소를 들으며,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유리아.
그녀가 바닥 깊숙이 박아둔 대검을 지팡이 삼아 균형을 잡는가 싶더니, 그대로 뽑아 들어 어깨에 걸친다.
자세를 한껏 낮추고, 대검은 어깨와 한 손으로 들어 올리며, 다른 한 손은 축 늘어뜨린 기이한 자세.
하지만 이것이 유리아가 전력을 내기 위한 자세다.
전신의 힘을 탈력시키고, 남은 모든 힘을 대검에 집중한다. 사람이 대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대검의 궤적을 그리기 위해 사람이 보조하는 주객전도의 검술.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다. 연보랏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난다.
“……죽여버리겠어.”
[살의인가. 얼마나 화려하게 피어나느냐가 관건이겠으나 나쁘지 않군. 좋다. 어디 한번 이 목을 벨 수 있으면 베어 보아라. 그런다고 이미 어두운 골짜기를 헤매는 대적자가 돌아오는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일찍이 유리아는 에녹의 옆에 있어야 한다는 직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이는 단순히 에녹이 주변 사람에게 무르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간파하여, 그에게 가까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충동 정도였으나…….
에녹이 자신 대신 날아오는 검을 맞고 쓰러진 지금. 유리아는 알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직감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측했을 뿐이라는 걸(그런 적 없다).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질색하면서도 자신의 기행을 받아주는 사람. 그리고 이제는 날아오는 검을 대신 맞기까지 한 사람.
유리아는 그런 이를 모른 척할 만큼 영악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남은 모든 오러를 쥐어짠 유리아의 대검이 밝게 빛났다.
“상관없어. 내가 죽어도 너는 반드시 데리고 갈 테니까.”
유리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을 각오한 전투에 임한다.
***
내가 칼에 맞아 쓰러진 이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할 겸, 분명 내 가슴에 틀어박혔는데 하나도 안 아픈 검에 대해 알아볼 겸. 일단 가만히 누워있어 봤는데…….
‘아니, 그래서 뭔데 이게.
여전히 이게 내 몸에 무슨 영향을 끼치는지 전혀 모르겠다.
백의 죽음이니 천의 저주니 하는 말을 늘어놓는 것을 보아, 제대로 이를 갈고 준비한 비장의 무기인 것 같긴 하다.
심지어 유리아마저 엄청 충격받은 것처럼 굴고, 검 자루를 제대로 쥐지도 못하는 것을 보아하니 내가 모르는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지. 일단 사람 심장에 칼이 박혔으니 충격받는 건 당연한 일인가.
하지만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 완전 멀쩡한 상태다.
고통은 물론이요, 상처조차 남지 않았다. 그저 내 주먹을 통과했듯이 검날은 내 심장을 관통했을 뿐.
애초에 충격으로 뒤로 넘어간 것도 검날이 박힌 충격이 아니라, 검날이 스르륵 통과하고 남은 검 자루가 부딪친 충격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심각한 부상을 입은 척, 시간을 끌며 정보를 캐내고 몸 상태를 확인해 보아도 달라지는 건 없다.
‘아무튼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함, 아무튼 멀쩡함.
그냥 이 둘로 귀결되었다. 아니,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 죽음(아님)에 분노한 유리아가 눈이 반쯤 뒤집혀 무리해서라도 흑마법사와 브렌트를 상대하려 했기에.
유리아가 제법 강하긴 한데……그건 어디까지나 학생 수준의 이야기.
제대로 맞붙는다면 잠깐은 분발할지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흑마법사에게 당하고 말겠지.
아무리 봐도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표정이긴 한데…….
어쩔 수 없나. 슬슬 일어나는 수밖에. 조금 머쓱한 게 목숨이 위험한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아니, 그래도 날 위해서 목숨까지 걸어보겠다고 나선 건데 너무 무안하게 만드는 것도 좀 그런가.
조금 정도는 맞춰줘도 괜찮겠지.
우웅-
끌어올린 오러를 팔다리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심장 안에서 빠르게 순환시켰다.
어찌보면 무의미한 공회전. 하지만 원래 일부러 일으키는 공회전은 멋있으라고 하는 거다.
검이 박힌 곳을 중심 삼아, 가슴팍 위에 그려지는 문양.
예전에는 정제되지 않은 체내 마력이. 지금은 오러가 흐르는 길이다.
하지만 내 미숙한 오러 조작 능력으로는 이렇게 막대한 양의 오러가, 이렇게 빠르게 순환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화르륵.
검이 꽂힌 틈새를 통해 불길이 치솟는다.
“……에?”
멍청한 소리를 내며 눈을 끔뻑이는 유리아. 흑마법사 녀석은 그래도 짬을 헛으로 먹은 게 아닌지 기겁하면서도 흑마법을 시전한다.
허공에서 엉겨 붙는 어둠이 물리적 실체를 갖고 산성 용액을 뚝뚝 흘리는 송곳니가 된다.
무엇인지 모를 괴물의 이빨이 그대로 내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으나.
“두 번은……안 당해!”
유리아의 순간 공중에 떠오르더니, 세찬 회전과 함께 휘둘러진 대검이 이를 쳐낸다.
……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내가 막을 수 있었는데.
어중간하게 들어 올린 팔이 잠시 허공을 방황하다가, 그대로 가슴팍에 꽂힌 검자루를 잡는다.
그리고 단숨에 이를 뽑아낸다.
화아악!
검상(아님)을 통해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는 불길.
마법과 오러를 흩어내는 내 힘에 직격으로 노출된 탓인지, 뽑아낸 검의 날 부분이 힘 없이 녹아내린다.
절그럭.
자루만 남은 손잡이를 땅에 떨구고는, 일부러 공회전시키던 오러를 천천히 회수해 정상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심장에서 흘러나오던 불길이 전신을 휘어감으며 내 몸을 불사른다.
정확히는 불길의 형태로 낭비되던 오러를 회수한 것이지만, 겉보기에는 화염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보일 터.
겉멋만 든 흑마법사 놈들이랑 투닥이다 보니 이런 잔재주가 늘었단 말이지.
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눈을 땡그랗게 뜬 유리아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파르르 떠는 브렌트와 흑마법사가 있었다.
저 정도로 기겁하니 살짝 뿌듯해질 정도. 이만한 기대를 배신하는 건 오히려 멋없는 짓이겠지.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흑마법사들이 좋아할 법한 지루하고 현학적인 말을 해주었다.
“태양이 저물어도 내일이 되면 다시 떠오르는 법. 이런 간단한 이치도 몰랐나.”
[부, 부활……! 어떻게…….]
황망한 목소리로 뒷걸음질 치는 흑마법사. 그런 녀석에게 다음으로 해줄 말은 정해져 있었다.
“몰랐다고?”
그럼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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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저물어도 내일이 되면 다시 떠오르는 법. 이런 간단한 이치도 몰랐나.”
[부, 부활……! 어떻게…….]
“몰랐다고?”
그럼 죽어야지.
그리 말하며 뒷걸음질 치는 흑마법사를 향해 에녹이 땅을 박찬다.
타닷!
바닥을 박살 내던 지금까지의 소란스러운 돌진과는 다른, 정숙하기 그지없는 움직임.
암살자 길드에게 시달리던 에녹이 역으로 암살자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그들의 움직임을 모방해 만든 보법이다.
하지만 전력으로 자신을 주장하는 것 같은 오러의 불꽃에 휩싸인 탓일까.
조용한 장소에서 집중이 잘 되듯, 오히려 에녹에게 유리아의 모든 신경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마치 이 세상의 주인공이 에녹이 된 것만 같은 감각.
그리고 에녹의 몸을 휘감고 있던 불꽃이 양팔에 집중되더니, 돌연 폭발한다.
콰아앙!
방금까지의 정적과 비견되는 굉음. 결계 안을 가득 채우는 열과 빛이 망막을 지지는 것 같은 감각.
“읏!”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뜬 유리아는 보았다.
브렌트의 변이된 육신. 단단한 근육과 구역질 나는 종양으로 가득 찬 복부에 큼직한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너무 강렬한 빛에 똑바로 바라보지는 못했으나……유리아 또한 나름 경지에 오른 오러 사용자인 만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러를 폭발시켰어? 아니, 분출?
오러를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에녹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그의 오러 조작 능력은 미묘한 수준이다.
오러로 형태를 잡는 것은 물론이요, 단순히 낭비 없이 이동하는 것조차 애를 먹는 게 보였으니까.
하여 에녹은 정교한 조작을 포기했다. 그저 넘쳐나는 오러를 단숨에 터뜨린 것.
죽음에서 돌아오며 심장에서 불길을 토해냈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유리아를 진정으로 압도한 것은 전혀 다른 부분이었으니.
‘웃고 있어……?
에녹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이 올라가 있다는 점이었다.
날아드는 촉수를 맨손으로 잡아 뜯고, 타들어 가는 복부의 구멍에 팔을 깊게 쑤셔 넣어 헤집고, 버둥대는 다리를 곤죽이 될 때까지 짓밟으며, 주문을 담는 입을 찢어 그 아래턱을 내던진다.
경계하던 검이 사라진, 그리하여 거리낄 것이 없어진 에녹이 발하는 원초적인 폭력.
사람이라면……아니, 지성 있는 생물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할 법한 광경이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영광스러운 승리도, 자하브에서 배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살육도 아니다.
해체.
어린아이가 잠자리의 날개를 뜯으며 즐거워하는 것처럼 에녹은 한때 인간이었던 브렌트의 전신을 해체하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브렌트를 조종하는 흑마법사 또한 순순히 당해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성벽의 자재조차 녹여버리는 강산성의 체액이 피 대신 뿜어져 나왔고, 듣기만 해도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은 저주의 진언,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이차원의 괴물 등등.
온갖 방식을 동원하여 저항했다. 하나하나가 책에서나 보던 고위 흑마법. 만약 결계 바깥에서 쏟아졌다면 어지간한 군대와 기사들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갔을 수준이나.
에녹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특수처리 된 성벽 자재조차 녹여버리는 강산성 체액을 뒤집어쓰며, 피부가 녹아내리고 근육과 뼈의 일부가 엿보이지만.
동시에 불길이 치솟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재생해 버린다.
안 그래도 인체실험을 통해 인간을 벗어난 에녹의 재생력이 오러를 익히며 한층 더 강해진 것.
세상을 저주하는 진득한 악의는 에녹의 몸을 뚫지 못해 반절이 부스러지고, 간신히 스며든 반절이 에녹의 정신을 어지럽혔으나.
퍼억!
스스로 머리를 한번 후려쳐, 오러로 불사지르더니 금세 제정신을 되찾아 버린다.
에녹이 발하는 빛에서 생겨난 그림자. 이를 통로 삼아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괴이한 존재가 현계한다.
수십 개의 눈을 지닌 상어의 머리와, 도마뱀의 몸을 합쳐둔 것 같은 혐오스런 외형.
하지만 녀석이 입을 크게 벌리며 달려들었으나……에녹을 삼키기 직전. 망치처럼 내리친 주먹의 아랫부분에 맞고 입이 다물린다.
입을 강제로 다물린 채, 관성만 날아드는 이차원의 괴물. 한 손으로는 이미 입을 다물게 하는 데 썼고, 다른 손은 브렌트와 흑마법사를 제압하느라 묶여있다.
하여, 에녹은 허리를 크게 꺾으며 입을 크게 벌렸다.
촤아악!
스쳐 지나가듯, 괴생물의 목덜미를 크게 씹고 뜯어내는 에녹.
먹물을 닮은 피가 허공에 녹아들듯 사라지더니, 지면에 처박힌 녀석이 두어 번 꿈틀거린 끝에 이차원으로 역소환된다.
멍하니 이 모든 것을 바라보던 유리아는 생각했다.
‘사람의 방식이 아냐…….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우악스럽다.
힘과 본능, 그리고 끝없는 투기를 연료 삼아 움직이는 태양을 품은 짐승.
……하지만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자하브스럽다.
평상시의 에녹이 그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크게 의식하지 않았을 뿐. 그는 감히 시조와 비견될 만한 자하브(아님)였으니까.
에녹이 들었다면 억울함에 공중제비를 돌았을 법한 생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생각은 내뱉어지지 않았기에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다.
본래의 형상을 찾아볼 수도 없는, 재생이나 재조립조차 불가능하도록 잔해마저 잔불로 태워낸 끝에 브렌트의 육편 속에서 끄집어내진 흑마법사.
기이하게도 머리와 상체만 남아, 브렌트였던 것과 내장을 이어놓은 흑마법사를 향해 에녹이 낄낄 소리내어 웃었다.
“찾았다.”
“…….”
유리아는 다짐했다. 언젠가 자신이 됐건 제벨라가 됐건 에녹의 아이를 낳는다면, 숨바꼭질은 못 하게 해야겠다고.
***
“찾았다.”
머리와 상체만 남아 내장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의 흑마법사를 보며 뿌듯함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힘들었다.
폼 잡는답시고 오러를 너무 공회전시킨 탓일까. 적당히 폼 잡았다 싶어 회수하려 했는데 생각처럼 굴러가질 않더라.
원심력이라도 붙은 건지, 계속해서 바깥으로 터져나가려는 오러. 그 흐름에 밀려 자꾸만 분출했던 오러의 회수가 늦어지는 것이다.
하여, 발상의 전환이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브레이크가 안 밟히면 가드레일에 비벼서라도 멈춰야 하는 법.
자꾸만 흘러넘치려는 오러를 억지로 체내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눈앞의 상대에게 전부 쏟아내기로 했다.
빠르게 회전하는 오러에 슬그머니 방향성만 제시해 주자, 그대로 브렌트였던 것에 들이박고는 얌전해졌다.
오러가 제어를 벗어나 폭주할 것 같으며, 일단 적에게 때려 박아라……메모메모.
이후에는 뭐어.
흑마법사 놈이 내게만 정신을 집중하기도 했고, 경계하던 비장의 한 수가 헛발질이었다는 것도 알았으니, 평소처럼 싸웠다. 그리고 지금에 다다른 것이다.
마력을 전부 소모한 건지, 체념한 것인지 담담히 이쪽을 올려다보는 흑마법사. 마치 조금이라도 더 내 모습을 눈에 담으려는 것 같아 살짝 소름끼쳤지만……원래 소름 끼치는 놈들이니 그러려니 한다.
애벌레 같은 모습이 된 녀석의 목을 쥐고 들어 올렸다.
“일단 묻겠는데, 난데없이 자하브에 쳐들어온 이유는 뭐지? 혹시 던전 역류를 일으키던 것과 관련이 있나?”
[던전 역류? 그런가……모르는 건가…….]
“아오. 이 새끼 또 이러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흑마법사 놈들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아마 그만큼 돌아버린 놈들이라 그런 거겠지.
아무튼 그렇다 보니 심문이 거의 불가능하고, 가끔은 내 질문을 통해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추측해내 지금처럼 비웃기도 한다.
물론, 나는 나대로 얻어가는 것이 있으니 한 번씩 떠보는 것이지만.
“과연. 던전 역류를 이용하려 한 건 맞지만, 일으킨 건 너희들이 아닌가 보네.”
[…….]
“그럼 자하브에 쳐들어온 이유는……뭐, 이건 안 물어봐도 알겠구만.”
녀석이 준비해 온 것. 그리고 나를 죽였다고 착각하며 내뱉은 말들을 종합해 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나를 그렇게 죽이고 싶었어? 이거 우연이네. 나도 흑마법사만 보면 죄다 죽여버리고 싶어지는데.”
[대적자여. 너는 언제나 예상외의 존재였다. 제물이 될 운명을 거슬러, 우리를 제물 삼았으며. 이제는 우리에게 받은 힘으로 피의 근원을 일깨워 법도마저 희롱하는구나. 머지않아 그 대가를 치르리라.]
“저런. 그랬구나. 근데 그거 아냐? ……나는 네놈들이 만든 괴물이라는 걸.”
[…….]
침묵하는 녀석. 목을 잡고 있는 손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뿌드득.
뼈가 조금씩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흑마법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놈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가 곧 네놈들의 대가다.”
콰직!
완전히 목이 부러진 녀석의 몸이 축 늘어진다.
그러고 브렌트에 이어 흑마법사까지 쓰러뜨리자, 조건을 만족한 것인지 흑마력으로 만든 결계가 흘러내리듯이 소멸하기 시작했다.
“후우.”
깊은 한숨과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을 이완시켰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오러를 공회전시키고 그걸 또 바깥으로 방출시키는 등.
아직 오러에 미숙한 내겐 다소 버거운 활용 때문인지 정신적으로 피로했기 때문.
불발 나긴 했지만, 이번 습격은 흑마법사들 입장에서도 상당한 준비를 거친 것 같으니 한동안은 별일 없겠지.
긴장이 풀려서일까. 평소라면 그냥 머릿속으로만 하던 말이 자연스레 새어 나왔다.
“아……빨리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카렌 볼따구 가지고 놀고 싶다…….”
그리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완전히 소멸한 결계. 그 너머에는 완전 무장을 마친 기사단과 이를 이끄는 제벨라.
……그리고 자신의 양 볼을 가리며, 힐다의 뒤에 샤샥 숨는 카렌이 보였다.
“뭣.”
방금 걸 들었다고? 아니, 설마 내가 안쪽에서 싸우는 모습까지 다 지켜본 건가? 이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멍하니 눈만 끔뻑이는 사이.
슬금슬금 다가온 유리아가 내게 볼을 내밀었다.
“불쌍한 오라방. 열심히 싸워놓고 차였네. ……내 거라도 만질래?”
“아니. 넌 만지는 맛이 없어.”
“너무하지 않아?!”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유리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묘하게 빵떡한데다가, 잡아당기면 쭉쭉 늘어나는 카렌을 어케 이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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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저점매수
자잘한 것들이 아닌, 고위 흑마법사를 쓰러뜨린 건 좋다.
놈들이 던전 역류를 직접 일으킬 능력은 없다는 걸 안 것도 좋다.
하지만 순수하게 티배깅과, 내 죽음(아님)에 분노해 목숨을 걸어준 유리아를 위해 일종의 쇼맨십이 생중계되고 있었던 건 문제다.
“카렌아……나는 나약하고 병든 사람이다.”
“요즘 나약하고 병든 사람은 몬스터 수준으로 변이된 사람을 맨손으로 찢나 봅니다.”
“들어보렴. 육체적인 힘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밤마다 나는 복수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껍데기뿐인 목표에 시선을 빼앗기고, 돌아가지 못하는 과거를 향해 끝없이 발을 옮기는 망령에 불과하단다.”
“농담도 잘하시네요. 어제도 자하브의 식량 창고를 거덜 낼 기세로 고기만 골라 드시고는, 배를 까놓고 시끄럽게 코 골면서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배불리 먹고, 푹 잔다. 저는 이만큼 속 편한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뭐야. 나 코 골아? 아니 애초에 내가 코 골며 자는 건 어떻게 알았니? 설마…….”
“주인의 건강을 염려하는 것은 집사의 덕목이라 그런 것일 뿐이니, 오해하지 말아 주시길.”
“…….”
대체 무슨 착각을 하는 거냐는 듯, 별꼴 다 보겠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이며 이쪽을 훑어보는 카렌.
이 와중에 무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참 꼴받았다.
“……조용히 하고 마저 들어. 어디 보자. 어디까지 말했더라?”
“으븝. 읍읍.”
“자기 손으로 입 막지 말고 그냥 말해도 돼.”
“예. 돌아가지 못하는 과거를 향해 방황하는 망령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가주님.”
“맞아 그랬었지. ……그런데 이다음이 뭐였지?”
“그걸 저한테 물으셔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는 카렌.
사실 조금 전의 말은 전생의 내가 지구에서 뒹굴거리며 읽었던 인터넷의 뻘글의 일부다.
대충 엄청 수려한 문장으로 헛소리하는 내용이었는데…….
아쉽게도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그사이에 까먹은 모양이다.
잠시 떠올리려 고민했으나, 여전한 막막함에 그냥 결론만을 말했다.
“카렌카렌아.”
“네.”
“오직 네 볼따구만이 정신적으로 지친 나를,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단다.”
“또 그 소리십니까…….”
한숨을 푸욱 내쉰 카렌이 무언가 작성하던 수첩을 잠시 덮고는 말을 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 제 볼을 주무르려고 하시는 건가요.”
“원래 사람은 말랑말랑한 걸 만지면 기분 좋아져.”
“예를 들면 여자의 가슴 같은 것 말인가요?”
“어? 어……그렇지?”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았던 터라 순간 버벅이는 목소리. 하지만 정작 스트레이트를 날린 카렌은 태연한 어조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으음. 그랬군요. 가주님의 취향은 가슴이 말랑한 여성…….”
“그런 건 또 뭐 하러 기억하는 거냐?”
“그야 슬슬 가주님의 반려분을 물색해 보아야 할 시기니 말입니다.”
“제벨라 누님은 어쩌고?”
“두 번째 반려를 말하는 겁니다.”
“두 번째라니…….”
그럴 생각은 없고, 상황이 찾아오기 전에 어떻게든 몸을 뺄 생각이지만 아무튼 일단 나는 제벨라와 약혼 상태다.
그런데 벌써부터 다음 아내를 찾는다고? 이게 맞아?
어이가 없어 카렌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가 눈을 끔뻑이며 똑같이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서로 눈동자를 바라보며 끔뻑이기를 반복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입을 벌리는 카렌.
“아. 최근 가주님께 혼담이 많이 들어와서 일차적으로 거를 필요가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 당장 들이자는 의미가 아니라요.”
“역시 그렇지? ……잠깐. 혼담? 갑자기? 왜?”
“그야 일전에 가주님께서 보여주신 위업은 이미 제국 전역에서 유명하니 당연한 일 아닙니까. 당연히 혼담이 쏟아질 만하죠. 순수하고 강력한 피를 원하는 귀족은 얼마든 있으니 말입니다.”
“진짜 왜?!”
백 보 양보해서 자하브령에서, 혹은 남부에서 유명해진 건 이해하겠다.
하지만 제국 전체에서? 대체 어떻게? 무슨 수로 알고?
어이없어하는 내 모습에 카렌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전투의 피로로 눈치채지 못하셨던 건가요. 그 자리에는 자하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의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이게 뭔.”
그러니까 내가 아무도 안 볼거라 생각하고 폼 잡으며 했던 모든 언행을 자하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제국 각지에서 뽑힌 유수의 인재들도 봤다는 거지?
그걸 또 쪼르르 달려가 본가에 알렸고, 그 탓에 제국의 이름있는 귀족들 대부분이 내가 흑마법사 상대로 반쯤 정신줄을 놓고 싸우는 모습이나, 부활(아님)을 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소리잖아.
음음. 무슨 상황인지 완벽히 이해했어.
“카렌.”
“네?”
“명령이야. 볼따구 이리 대.”
“……읏!”
명령이라는 말에 움찔한 카렌. 이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느릿하게 이쪽으로 향해 얼굴을 들이민다.
눈을 질끈 감은 것이 표정 변화가 드문 카렌에게서는 보기 힘든 얼굴이다.
그대로 카렌의 양쪽 볼을 잡고 천천히 잡아당긴다. 저항 없이 쭉쭉 늘어나는 뺨.
이 맛이지. 드디어 좀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네.
카렌을 번쩍 들어, 마주 보는 자세로 무릎 위에 앉혀놓고는 마구 볼따구를 주무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죽었다 살아났다고 착각할 만큼 강한 혈계능력을 보유한 나를 향해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악수의 요청.
뭐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모르고 있었지만, 내게는 귀족의 피가. 그것도 상상 이상으로 진하게 흐르고 있던 모양이니까.
하지만 그게 자하브의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내가 지닌 대부분의 힘은 인체실험을 통해 강제로 얻거나, 따로 죽어라 단련해 손에 넣은 것.
혈계능력을 타고난 것으로 보이는 건 분명 형님이었다.
사실 나도 또 다른 자하브의 혈족이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였다던가.
좀 정신 나간 생각인 것 같지만, 형님이 갑자기 혈통의 어두운 비밀에 눈을 떠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나를 낳았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야 나는 흑마법사 조직에 팔려 갈 때까지 지구에서의 기억을 제외하면 평범한 아이였으니까.
근친으로 만들어진 농후한 자하브의 핏줄을 타고났다고 하기에도 문제가 많은 것이.
일단 나이만 어렸지, 머리는 그대로인 내게 어머니와 형님은 그냥 평범한 모자 관계로 모였다는 것.
무엇보다 나와 형님의 나이 차이가 고작 1살밖에 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내가 귀족 혈통일지는 몰라도 자하브가 아니라는 건 확정이라는 뜻.
그런 상황에서 내게 전국적인 관심이 쏠리는 것은 영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다.
언젠가 실각당해 내려와야 한다면 더더욱 그러하고.
하지만 핀치는 찬스. 위기란 곧 기회의 다른 이름인 법 아니겠는가.
자하브의 남자가 전부 죽었다는 소식에 유리아의 아카데미 생활이 꼬였듯.
‘남자가 없어 어떻게든 찾아서 가주로 내세운 사생아가 너무 강함’이라는 소식은 다른 이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겠는가.
분명 저점 매수의 기회처럼 보이겠지.
자하브는 제국의 4대 대공 가문이라 불릴 정도의 명문. 하지만, 최근의 연속된 던전 역류를 막느라 재정적, 군사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제 막 가주직에 오른 신임 자하브 대공은 사생아 출신이라 배운 것이 없고, 내부에서의 균열도 적잖이 있겠지만…….
대신 지닌 힘은 무시할 수 없으니, 자하브의 권세가 약해진 지금 연을 맺어두면 나중에 더 큰 이득이 되어 돌아올 거라 여기는 것이다.
그래. 내게 혼담을 보내오는 귀족들은 지금 당장의 이득이 아니라, 언젠가 찾아올 미래의 떡상을 믿고 내게 투자하려는 것이다! 전생의 내가 처음 주식할 때처럼……!
그리고 전생의 나처럼 무릎에서 산 게 아니라, 사실 어깨에서 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으흐흐.”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마구 만지작대던 카렌의 볼따구를 놓아주었다.
“카렌카렌아.”
“……네.”
“혼담 그거 다 취소해.”
“네?”
“대신 자하브와 연을 맺고 싶다면 친구비를 내라 그래. 당연한 말이지만 많이 내는 만큼 우정이 깊어질 거라는 말도 덧붙이고.”
“친구……말씀이십니까?”
“어. 친구비만 내면 다 친구지 뭘.”
가볍게 대답했건만, 어째서인지 카렌이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제벨라 아가씨께, 아카데미의 학생들에게, 그리고 서신을 보내오신 모든 귀족가에 그리 전하겠습니다.”
“응? 어, 응.”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는 총총걸음으로 멀어지는 카렌의 뒷모습에 씨익 웃어 보였다.
좋아. 이제 남은 건 돈은 받아먹었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만 남았다.
나도 바보는 아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내가 뭔가 의도적으로 조지려 하면 오히려 역효과로 좋은 결과만 나온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돈은 받았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레 불만이 쏟아질 테고, 이는 고스란히 나의 평판 문제로 이어질 터.
그렇게 내 주가는 알아서 떡락한 끝에, 최종적으로는 상장폐지에 이를 것이다……!
***
에녹의 계획 자체는 합리적이었으나, 문제는 그가 생각치 못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는 점이다.
우선 아무도 자하브에게 품위라던가, 신의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친구비? 심심하면 근처 영지 삥 뜯는 건 자하브의 오랜 전통이었다. 빌린 돈을 갚으라고 했더니 협박이 날아오는 건 연례행사고.
그럼에도 자하브와 연을 맺으려던 가문이 항상 존재해 온 이유는 간단하다.
귀족 사회에서는 대공 같은 최고위 귀족의 이름을 빌린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기 때문.
헌데, 에녹은 친구비를 받으면 자하브와의 친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금액에 따라 줄까지 세워주겠노라 한 것 아닌가.
돈을 받은 뒤에는 침묵할 뿐, 너네 돈 좀 많아 보인다? 같은 소리를 하며 더 내놓으라고 깽판을 부리지도 않았고.
애초에 고위 귀족과의 연을 트기 위해서는 막대한 뇌물이 필요하단 것은 이 세계의 상식.
그런 의미에서 에녹은 암암리에 이루어지던 것을 양지로 끌어 올려 공정한(?) 경쟁을 시킨 것뿐이다.
무엇보다 이전 세대의 자하브였다면 여식도 받아 가고, 지참금 명목으로 돈도 뜯어갔을 터.
에녹은 다 필요 없고 순수하게 돈만 내놓으라고 하는 셈 아닌가.
당연히 상대적으로 에녹의 평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시조를 넘어선 자,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품은 사내, 흑마법사들이 두려워하는 대적자……그런 사람이 돈만 주면 친구가 되어준다고요?”
제국에는 돈이라면 썩어 넘치도록 쌓은 집단. 마탑이라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
“당장 스승님께 연락해야 해요!”
그리고 마탑에는 해결하지 못한 오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어쩌면 새로운 친구가 이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은가.
공문을 읽던 아카데미 소속의 유망한 마법사 소녀가 한참의 고민 끝에 명상 중이던 자신의 룸 메이트에게 물었다.
“유리아. 자하브 대공 각하……그러니까 너네 오빠는 어떤 사람이야?”
“내 남편임.”
“?”
“아, 형부기도 하고.”
“???”
뭐, 그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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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저점매수(2)
“에녹! 내 동생! 여기 있었구나. 누이가 사랑한다고 말했었니?!”
“제벨라 누님……?”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 오러 수련만 좀 하고 개백수마냥 정원을 산책하던 도중.
살짝 스커트를 들어 올린 제벨라가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것 같은 스텝을 밟으며 내 쪽을 향해 달려왔다.
평소에는 집무실이 됐건, 본인 방이 됐건 항상 실내에만 틀어박혀 있던 제벨라가 별일 없는데도 외출한 것도 놀랐지만.
언제나 품위 있게 사뿐사뿐 걸어 다니며, 부드러운 미소 정도만 짓던 제벨라 아닌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통통 튀어오는 모습에는 아무리 나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가요 제벨라 누님.”
“후후. 에녹도 참. 전부 네 덕분이란다.”
“네?”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제벨라의 뒤를 반보 뒤에서 따라오던 아론 집사장이 고개를 꾸벅이며 입을 열었다.
“제벨라 아가씨께서는 가주님께서 과감한 결단으로 자하브의 재정난을 해결해 주신 것에 기뻐하시는 겁니다.”
“……허?”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여전히 헤실거리는 제벨라가 말을 덧붙였다.
“이번에 에녹 네가 받기로 한 친구비? 라는 게 있잖니. 정말 많은 상단과 귀족들이 우애의 증거를 보내왔단다.”
“아.”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동시에 의아함도 차올랐다.
지금이 친구비를 받기로 발표한 직후라면 모를까, 슬슬 아무것도 안 하는 내게 실망해서 한소리 나올 쯤일텐데?
“설마 아직도 친구비를 보내오는 곳이 있는 겁니까?”
“있다마다! 약간 규모가 부족한 이들은 줄까지 서가며 서신과 금화 주머니를 보내올 정도란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어머?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니니?”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제벨라. 길게 늘어뜨린 백발이 바람결에 살랑인다.
“그거야 에녹 네가 자하브의 황금기를 다시 가져다줄 사람이기 때문이잖니.”
“……제가요?”
“그래.”
“……황금기를요?”
“그렇단다.”
“……왜요?”
“왜기는. 요즘 나도는 소문을 한번도 못 들어 봤니?”
어깨를 으쓱인 제벨라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뭔가 심상치 않은 수식어를 나열하기 시작한다.
“선조회귀, 금빛 태양, 흑마법 학살자, 고귀한 짐승, 그리고…….”
“거, 거기까지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누님.”
하나하나가 낯부끄러운 중2병 감성의 별명에 손발이 절로 뒤틀렸다.
물론, 제벨라가 나를 의도적으로 놀리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원래 이런 건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중세 판타지 세상에서 중2병스러운 타이틀? 이건 그냥 순수한 칭송의 증거일 뿐이다.
즉, 정말로 세간 사람들은 나를 아직도 엄청나게 올려 치고 있다는 소리.
“대체 왜 그런 별명이 붙은 거죠?! 저 요즘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으응?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해봐야 겨우 한 달 남짓 아니니. 이제 막 소문에 불이 붙을 시기란다.”
“……!”
그렇다. 마법은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수의 특권층에게 허락된 편의.
대부분은 입에서 입으로, 가끔은 서신으로 소문이 퍼지는 것이 이 시대의 상식.
처음에야 내가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본 아카데미 학생들과 그들의 집안에만 퍼졌던 정보가.
슬슬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상인들의 입을 통해 평민들에게도 전해지고, 자연스레 그 지역의 귀족들의 귀에도 들어가기 시작한 것.
그 결과 일차적으로 친구비를 보내왔던 이들이 잠잠해질 무렵, 소문을 접하고 뒤늦게나마 친구비를 보내는 이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게 뭔……? 잠깐, 그래도 처음 친구비를 보낸 곳은 불만이 많겠죠? 제가 아무런 대응도 뭣도 없이 가만히 있으니까요.”
“그럴리가. 오히려 자신들이 먼저 자하브와 연을 텄다는 것을 사교계에 자랑하고 있단다.”
“……혹시 사교계에서 제 소문이 퍼지고 있다던가?”
“물론이지. 다른 곳은 몰라도 중앙 사교회에서는 에녹 네가 참 뜨거운 감자라는구나. 협력 관계를 맺은 코넬리아 황녀님께서 직접 서신에 담은 내용이니 확실하단다.”
“…….”
이제 알았다. 그냥 제국이 내 적이고, 세상이 나를 억까하는 거였구나.
아니, 억빠인가?
머릿속으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던 것도 잠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어 싸매는 내 귓가에 제벨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이렇게 잘 되고 있지만……한가지 고민이 있어 이렇게 에녹 널 찾아왔단다.”
“네? 고민이요?”
“그래. 에녹. 내 동생아. 네가 이 누이를 믿고 대소사를 맡겨준 건 고맙지만, 아무래도 이건 내 선에서 처리하기에 너무 큰 일 같아서 말이야.”
그리 말하며 제벨라가 품에서 고급스러운 서신 하나를 꺼냈다.
뭔지 모르겠지만, 묘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걸 보아 평범한 종이가 아니라 모종의 마법이 걸려있는 마법일 터.
다만, 제벨라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꺼내고 내 직감도 잠잠한 걸 보아 별로 위험한 마법은 아닌 모양.
“이 누이가 읽어줄게. 잠시만 기다리렴?”
“아뇨. 이 정도는 이제 스스로 읽을 줄 알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문맹은 탈출했다는 생각에 약간 으스대며 제벨라에게서 서신을 뺏어 들듯 가져왔다.
“어머나…….”
살짝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면서도, 이내 흡족한 미소를 짓는 제벨라.
괜히 간지러운 기분에 그 시선을 피하고 서신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대충 요약하면 친구비를 많이 줄 테니, 자기들 영지의 오랜 골칫덩이를 치워달라는 내용.
“아니, 저 일단 대공 아닌가요. 용병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단 끝까지 읽어보렴. 그럼 이해하게 될 거란다.”
“예, 뭐.”
본론을 지나 형식적인 인사말. 그리고 구체적인 금액 부분을 읽었다.
“……100만 골드요? 이게 얼마나 큰 금액인가요 제벨라 누님.”
칼립소가 일종의 수용소긴 하지만, 브로커를 통해 외부와의 은밀한 교류 정도는 있었다.
당연히 반쯤 고립된 곳이라도 금화는 제대로 화폐로서 성립했다는 소리인데…….
온갖 범죄가 판치는 암흑가의 물가에 익숙해진 내게도 100만 골드는 영 감이 안 잡히는 금액이다.
일단 내가 한창 암살자 길드에게 쫓기고 있던 당시, 내 목에 걸린 의뢰금이 10만 골드였던 건 기억하지만.
내 질문에 제벨라가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조심스레 입을 연다.”
“그러네……100만 골드라면 자하브 성을 하나 더 지을 수도 있단다.”
“???”
자하브 성은 주기적으로 터지는 던전 역류를 막아 세우기 위해, 특수 자재로 만들어진 성이다.
자재 그 자체도 비싸고, 쌓아 올린 성벽에 인챈트 하는 마법은 더 비싼. 장담컨데 같은 무게의 금과 좋은 승부가 될 법한 수준이다.
……순금으로 된 동전을 몇십만, 몇백만 단위로 거래할 만큼 이 세계는 지구에 비해 금이 흔하다지만, 이를 감안해도 말도 안 되는 금액인 건 사실이다.
“아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금액을 겨우 친구비로 줄 수 있는 곳이……이그나투스?”
이그나투스라는 이름은 잘 알고 있다. 자하브에 들어온 뒤, 최소한의 제국 역사를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그게 아니더라도 칼립소에서도 이름이 들릴 만큼 유명한 곳이기 때문.
그도 그럴 것이…….
“서부의 대공이 직접 이런 서신을 보냈다고요?”
“그런 것 같구나. 이그나투스 대공이라면 100만 골드도 허언이 아니니,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기 힘들어 에녹 너를 찾고 있었단다.
이그나투스 대공.
지금은 멸문한 칼립소 대공이나, 어쩌다 보니 내가 달고 있는 자하브 대공의 자리처럼 제국의 4대 대공 중 하나이자, 서부를 다스리는 자.
그리고 제국의 유일한 마탑의 주인이며, 비극의 신에게서 살아남은 최후의 드래곤.
말이 대공 가문이지, 살아있는 다른 드래곤이 없기에 이그나투스 본인의 대에서 끝나는 일대작위나 다름없지만…….
애초에 이그나투스는 제국보다도 오래 살아온 존재. 그리고 별일 없다면 앞으로도 천년은 우습게 살아갈 장생종이다.
당연히 쌓아놓은 재산은 차고도 넘친다.
마음만 먹으면 제국의 경제를 박살 낼 수도 있지만, 황제가 매번 사정사정하는 바람에 참아주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그런 이그나투스 대공이라면 100만 골드는 어렵지 않게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일 터.
……그중 딱 1만 골드만 슬쩍해도 평생 놀고먹을 돈으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자하브 대공 자리에서 내려왔을 때를 대비한 비자금.
그리 생각하자 갑자기 의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 정도 금액이라면 이야기 정도는 들어보는 게 좋겠죠. 무엇보다 이젠 같은 대공이잖아요? 인사도 한번 해둬야겠고요.”
“에녹 네 뜻이 그렇다면, 조만간 찾아가는 것으로 답장을 넣어두마. 그 사이에 이그나투스 대공의 대리인과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떻겠니? 자세한 사정은 대리인을 통해 전달하겠다고 하니 말이야.”
“설마 대리인이 여기 와있나요? 벌써요?”
남부와 서부의 거리, 그리고 소문의 확산 속도를 생각하면 너무 빠른 시기다.
설마 아직 대답도 못 받았는데, 대리인부터 보낼 줄이야……마탑주이자 드래곤이니까 텔레포트라도 쓴 건가.
내 질문에 제벨라가 고개를 저었다.
“후후. 그런 게 아니란다. 놀랍게도 이그나투스 대공의 322번째 제자가 아카데미의 졸업반이었지 뭐니. 심지어 유리아의 룸메이트기도 하단다.”
“……제자가 많네요?”
“아무래도 오래 사신 분이라 그런 거 아니겠니.”
하긴. 제국의 역사 속에서 322명의 제자밖에 안 들였다면, 오히려 적게 들이는 편이라고 해야겠지.
“아무튼 알겠어요. 한번 만나서 이야기는 나눠보죠.”
“잘 생각했단다.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이 누이에게 말해주렴.”
그리 말하는 제벨라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유리아의 방을 찾아가기로 했다.
자하브 성에 있는 방이 아니라, 바깥에 마련해 둔 아카데미 학생들을 위한 숙소의 방 말이다.
룸메이트라고 하니, 같이 있겠지.
***
자하브 대공의 지위를 이용해 여자 기숙사를 당당하게 정문을 통해 들어갔다. 솔직히 좀 두근거리더라.
……그 뒤에 찾는 것이 여동생의 방이라는 게 영 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도착한 유리아의 방문을 여는 순간.
끼이익.
“있잖아 메이킨. 드래곤은 도마뱀처럼 총배설강이야?”
“……절대. 절대 스승님 앞에서 그런 이야기 하지 마! 그리고 제자인 내 앞에서 하는 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시비 거는 셈이거든?!”
“에이. 메이킨 너도 우리 오라방 길이가 몇 센티인지 궁금해했으면서.”
“키 이야기거든?!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갈색 머리의 소심해보이는 인상의 소녀, 메이킨과 눈이 마주쳤다. 총배설강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그녀가 이그나투스의 제자이리라.
“크흠. 일단 내 키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따로 재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
“네가 메이킨이지? 이그나투스 대공의 서신을 받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왔어.”
“…….”
“으음……아무래도 걸즈 토크 중이었던 것 같은데 조금 나중에 다시 오는 게 좋았으려나?”
내 나름의 배려가 담긴 말이었으나, 아쉽게도 이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끼.”
“응?”
“끼야아아악!!”
메이킨이 비명을 지르며 전신으로 마나를 방출했다.
작게 소용돌이치는 마나의 폭풍. 그리고 메이킨이 있던 자리에는 주인을 잃은 옷가지와, 그사이에 숨어 몸을 둥글게 만 햄스터만이 남아있었다.
“오.”
변신 마법도 쓸 줄 아나 보네.
참고로 옷가지 사이로 슬쩍 보인 속옷은 회색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며 햄스터가 줄줄 흘리는 눈물에 젖어 살짝 색이 진해진 회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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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 숨어있던 흑마법사들을 쓰러뜨린 뒤.
자하브 성으로 돌아온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급하게 준비한 것치고는 성대한 개선식이었다.
“와아아! 영주님이 돌아오셨다!”
“던전의 흑마법사를 해치우시고 돌아오셨다!”
“제 아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님이라면 한번 대드릴 수도 있어요!”
“이런 미친! 자네는 남자잖나!”
“하지만 영주님은 자하브신데?”
“일리가 있군.”
사방에서 들려오는 나에 대한 찬양. 중간중간에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에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이게 다 뭔지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
머리를 부여잡으며, 어쩐지 가장 우쭐해하고 있는 힐다에게 물었다.
원래라면 카렌에게 물었겠으나……지금은 살짝 토라진 모양이니까.
“힐다 경. 표정 좋아 보인다?”
“흐흐. 수업 첫날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출세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제가 줄을 잘 서긴 한 모양입니다. 벌써 이렇게 명예로운 자리에 설 줄은 몰랐습니다.”
“어이, 칼튼 경. 당신 딸래미 좀 봐. 이거 맞아?”
“어흐흑! 드디어 자하브에……그래! 피가 어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 이제야 정상화가 됐을 뿐! 앞으로 더욱 잘 보필해야…….”
“…….”
슬쩍 돌아본 칼튼은 어찌나 감동한 것인지 대성통곡 수준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래서야 내 말이 들릴지도 않겠네.
중년 아저씨가 눈물 콧물 질질 짜는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결국 한숨을 푸욱 내쉬며, 주변의 찬양을 한껏 즐기고 있는 힐다의 귓가에 속삭였다.
“알았어. 이제 즐기는 건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좀 설명해 줘 봐. 우리 분명 제대로 된 발표도 뭣도 없이 다짜고짜 계승식 도중에 박차고 나와 던전에 들어간 거잖아.”
“아, 그게 신경 쓰였던 거군요. 줄곧 같이 움직였으니, 저라고 주군이 모르는 걸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한가지 짐작 가는 것이 있긴 합니다.”
“뭔데.”
“제벨라 아가씨입니다.”
“음?”
“주군께서도 제벨라 아가씨와 만나보셨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대충이나마 알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떠셨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보다 더 가주직에 어울리는 사람이지.”
“아니, 그건 아니죠. 자하브의 주인은 모든 분쟁의 선봉장이어야 합니다.”
“…….”
은근슬쩍 말을 꺼내봤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진짜 장난 없구나 남부의 강자 숭배 풍습.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사이. 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어. 그만큼 주군께서 제벨라 아가씨의 격무에 느끼는 바가 컸다는 뜻이겠죠.”
“어. 뭐, 그런 거지. 응.”
“제벨라 아가씨는 무척이나 유능하신 분입니다. 계승식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는 결론을 내리셨을 겁니다. 주군께서 이쯤이면 승리하고 돌아오시리라고.”
“……그런 게 가능하다고?”
“그만큼 주군의 힘과 성정을 믿고 계신다면 얼마든 가능하겠죠.”
말하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환호하는 영지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때로는 귓속말하느라 붙어있는 나를 과시하는 등.
자연스레 주변에 자신을 각인시키던 힐다가 말을 이었다.
“제벨라 아가씨께서는 결코 자하브의 가주가 되실 수 없으시지만, 자하브의 안주인으로서는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긴 하지.”
근친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제벨라만큼이나 좋은 여자도 없긴 하다.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나 근친이고 나한테는 족외혼이긴 한데…….
근친명가라는 멸칭이 괜히 붙은 게 아닌 걸까. 어딜 가도 족내혼단으로 가득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잠시. 개선식에 잔뜩 들떠있던 힐다의 목소리가 돌연 진지해졌다.
“그러니 주군. 절대 제벨라 아가씨를 슬프게 해선 안 됩니다. 이제 정식으로 대공의 지위에 오르셨으니 자하브령에서……아니, 남부 전체에서 주군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겠죠. 그럼에도 제벨라 아가씨를 홀대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럴 생각은 하나도 없었지만, 일단 묻자. 그 정도야?”
“예. 그 정도입니다. 장담컨데 제벨라 아가씨가 파업하는 것만으로도 자하브의 재산은 반토막 날 겁니다.”
“……그 정도 맞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제벨라가 가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말이지.
하여간 던전 때문에 이게 다 무슨 고생인지.
가볍게 혀를 차는 것도 잠시. 여전히 열렬한 환호를 가만히 방치하는 것도 좀 아니다 싶어 손을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주었다.
-와아아아아!!!
영지민들의 함성이 더욱 거세졌다.
겨우 흑마법사 좀 잡은 걸로 이렇게 칭송받는 건 쪽팔리긴 하지만……솔직히 말해서 약간은 기분 좋기도 했다.
과연. 힐다가 이래서 출세하고 싶어 했던 건가.
전생은 물론이요, 현생에서도 지금껏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출세의 맛은 꽤나 달콤했다.
“아, 근데 힐다 경. 왜 아까부터 나를 주군이라 부르는 거야?”
“어차피 잡은 줄. 이제와서 다른 줄로 갈아탈 수 없다면, 남들에게 자랑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내 기사라는 이미지를 알차게 써먹겠다는 뜻이었구나?
일전에 나를 다시 보니마니 했던 날 이후로 힐다가 너무 솔직해진 것 같다.
***
에녹이 한창 흑마법사들을 때려잡는 사이.
코넬리아는 코넬리아대로 제벨라와 함께 협상에 참여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눈앞의 상대는 에녹과는 다른 의미로 괴물이라는 것을.
협상이란 결국 서로 취할 것은 취하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며 완성되는 것.
하지만 제벨라는 아무리 도중에 변경된 것이라지만, 코넬리아가 준비해 온 모든 조건을 부드럽게 흘려내고 자신의 조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것이 서로에게 훨씬 이득이라는 사실을 코넬리아는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당초에 예상했던 이권은 하나도 챙기지 못했지만……이 정도면 오히려 당장은 더 도움이 될 거예요.
우아한 자세로 찻잔을 들어 한잔 들이켜는 제벨라를 흘깃 바라보는 코넬리아.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어주는 제벨라의 모습에 코넬리아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순수한 얼굴을 하고,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이 자신의 계획을 쳐부쉈는지 잘 알았기에.
장기적으로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 하나 내어주지 않았으나, 코넬리아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정보와 자금을 순순히 내어준다.
함정에 빠졌다고는 하나, 연속된 사업 실패와 몬스터 토벌 실패로 입지가 줄어든 코넬리아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 대가로 제벨라가 받아 간 것은 아카데미의 학생들.
정확히는 실습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아카데미 학생들을 남부의 던전으로 보낸다는 조건이었다.
아카데미는 제국의 가장 재능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곳에서 실습을 보낼 정도의 이들이라면 모험가들보다 훨씬 고급 인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이들이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알아서 몬스터를 정리해 준다는데 얼마나 좋은 일인가. 딸깍은 언제나 옳다.
결과적으로 자하브는 아직 혼란스러운 집안을 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코넬리아는 자신의 적이 누군지 알고 대항할 힘을 얻은 셈.
‘한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든 맹수, 다른 한 사람은 양의 탈을 쓴 늑대. 확실히 대공가는 달라도 다르긴 하네요.
하지만 제벨라를 향한 기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감탄으로 바뀌었다.
대공의 혈통이 이 정도로 괴물들이라면, 계승권은 좀 떨어져도 아무튼 황실의 적통인 자신은 더 대단한 사람이었기에……!
여러모로 혈통주의자다운 결론.
그렇게 한차례 무너졌던 멘탈을 빠르게 수복한 코넬리아가 눈치를 보며 마시던 찻잔을 자신만만하게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유리아는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었던가요. 그럼 이번 실습 때 오랜만에 얼굴을 보실 수 있겠네요.”
“어머? 황녀님께서 유리아를 아시나요?”
“녜헤? 아, 으흠. 네. 물론이죠. 유리아가 유급하는 바람에 제가 먼저 졸업하긴 했지만 아카데미 동기였는걸요.”
“그러셨군요. 아, 차 한잔 더 어떠신가요? 최근에 좋은 찻잎을 하나 구해서 말이죠.”
“어어……주시면 감사히 마실게요.”
“후후. 대신 유리아가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좀 알려주셔야 합니다?”
“뭐, 그 정도야…….”
“어디 보자. 다과도 차에 어울리는 것이 있으니 새로 내오겠습니다.”
“???”
유리아 자하브. 아카데미에 가 있는 동생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돌연 태도가 돌변한 제벨라.
마치 동생 친구라도 대하는 것 같은 스스럼 없는 태도.
‘믿을 수 없어요! 믿을 수 없어요! 그 음험한 여자가 어떻게 이런……!
이제는 콧노래까지 부르는 제벨라의 뒷모습에 간신히 멘탈을 진정시켰던 코넬리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뭐죠? 진짜 뭐죠?! 설마 차에 독이라도 타려는 건가요??
물론 차에 독을 타는 것은 제벨라의 전문이었으나, 이번에는 예외였다.
제벨라 자하브. 스스로의 손으로 아버지는 물론이요, 에녹이 오기 전의 모든 형제자매를……심지어 사생아들까지 꼼꼼하게 몰살시킨 희대의 악녀.
하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아끼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대숙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
자하브에서 제벨라를 위해 울어주고 분노해 주던 단 한 명뿐인 동생.
유리아 자하브였다.
아, 물론 이제는 에녹이 추가되어 단 둘뿐인 동생이라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코넬리아의 떨림이 심해지건 말건 제벨라의 입가에는 한층 더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예상대로 에녹이 승리와 함께 돌아오며 계승식을 끝마쳤고, 이제 곧 유리아 또한 자하브 성을 찾아올 터.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가족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뜬 탓일까.
실수로 너무 많이 따라 찻잔에서 차가 흘러넘쳤다.
“이런.”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은 제벨라가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웃어 보였다.
“부끄럽네요. 이건 저희끼리의 비밀로 할까요?”
“……그, 그러죠.”
코넬리아는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
개선식을 가로질러 도착한 자하브 성.
언제나 그러하듯, 제벨라가 자애로운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어서오렴 에녹. 금방이었구나.”
“그야 누님이랑 약속했으니까요.”
어떻게 그런 과거를 겪고도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걸까. 분명 천성이 선하기 때문이겠지.
어째서인지 급하게 인사를 하고 떠난 코넬리아 황녀의 뒷모습에 키득이던 제벨라가 입을 열었다.
“후후. 기대하렴 에녹. 이제 곧 유리아가. 아카데미에 다니던 네 동생이 돌아올 거란다.”
“오?”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번뜩임.
제벨라는 아무래도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가주직을 너무도 간단히 넘겨주었지만…….
어쩌면 동생인 유리아는 다를지도 모르잖은가.
만약 유리아가 가주직을 원한다면……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다!
들떠있는 제벨라를 향해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거 기대되네요.”
“그러니?”
“네. 저는 항상 여동생을 가지고 싶었거든요.”
뭐어. 이 부분은 진심이다.
전생에는 외동이었고, 현생에는 기간제 형이랑 새 누나밖에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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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저점매수(3)
찍! 찌익-!
회색 팬티를 뒤집어쓴 햄스터가 잉잉 울었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말 그대로 햄스터 눈물만 한 물기에 젖은 회색 속옷의 중앙부가 짙게 물들 정도.
“……유리아야. 이거 어떻게 하냐. 괜찮은 거 맞지?”
“괜찮아 괜찮아. 메이킨은 패닉에 빠지면 햄스터로 변하는 습관이 있어. 이번 던전 실습 중에도 한 번 있었고.”
“그거 위험한 거 아니냐…….”
“그렇지만도 않아 오라방. 애초에 반사적으로 변신 마법을 펼칠 정도로 놀랐다는 건, 인간형의 모습일 때도 별다른 도움이 안 되는 상태라는 뜻이거든. 실제로 던전에서도 전투 도중에 햄스터가 된 적은 없었어. ……대신 식물형 몬스터인 알라우네에게 당해 산 채로 소화 당하기 직전에는 햄스터로 변해버렸지만.”
즉, 정말로 정신 나갈 것 같은 상황이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햄스터로 변하는 일은 없다는 소리.
“잠깐. 그럼 나를 무슨 알라우네 소화액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는 건가?”
“뭐어……오라방에게 잘못 걸리나, 알라우네 위장에 갇히나 인생 끝나는 건 똑같긴 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뭣.”
대체 이 터무니없는 음해는 어디서 시작된 것인가 싶어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리아는 설명 대신 으스대기 시작했다.
“엣헴. 메이킨이 오라버니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길래 조금 알려줬지.”
“일단 묻겠는데 뭐라고 말한 거냐?”
“그야 있는 그대로를 말했지. 오라방이 아카데미 학생 전체가 달려들어도 어찌하지 못하는 괴물이라던가, 나름 명예를 중요시해서 명분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지만 반대로 명분만 주어지면 마음껏 날뛸 준비를 마친 짐승이라던가……대충 이 정도?”
“???”
대체 유리아의 눈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 걸까.
그리고 대체 무슨 결론에 다다랐길래 메이킨은 햄스터로 변한 것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속옷을 뒤져 햄스터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찌이익-!!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손바닥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마는 갈색 햄스터.
그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콕콕 찌르며 입을 열었다.
“메이킨. 진정해라. 나는 그저 이그나투스 대공의 조건을 자세히 알고 싶을 뿐이니까.”
찌익……?
“음음. 이해는 해. 친구끼리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놀랄 법도 하지. 심지어 그게 이 땅의 주인이라면 더더욱 말이야.”
“어……그거 아닐 걸 오라방?”
“이게 아니라고?”
학교를 어떻게 땡땡이치냐는 이야기를 하다가 선생님이 들이닥쳤다는 느낌 아니었어?
눈을 끔뻑이는 나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유리아.
“오라방 길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오라방이 들이닥친 거잖아. 갑자기 오라방이 ‘으흐흐. 내 길이가 궁금하다면 직접 알려주는 수밖에. 으럇으럇! 이럴 거라고 생각해서 겁먹은 게 분명해.”
“…….”
진짜? 아니, 대체 어떻게 그런 결론에 다다르는 거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유리아의 말이 맞다는 가정하에 메이킨을 살살 꼬드겼다.
“걱정 마. 오늘은 그냥 딱 말만 하고 갈 테니까. 그러니 일단 변신 모습부터 풀어.
찌익……?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메이킨. 내용물이 사람이라는 건 알아도, 겉보기가 햄스터다보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지금처럼 햄스터로 남아있으면 실수로 밟을지도 모르잖니.”
찌익?!
“와……오라방 그건 좀.”
기겁하는 메이킨과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는 유리아.
이번 건 나름 진솔한 걱정을 해준 것인데 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걸까.
이 나이대 여자들은 이해할 수 없단 말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햄스터가 짧은 팔을 다급히 휘저으며 외쳤다.
찍! 찌익! 찍……!
동시에 작은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마나.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순간. 살색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몰캉.
“힉?!”
“아차.”
방금까지 햄스터를 올려놓고 있던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 그리고 부드러운 살을 파고드는 손가락의 감촉.
그렇다. 알몸의 메이킨이 내 손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웅크려 있었다.
……뭐, 옷가지는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져 있으니 당연한 일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메이킨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주었다.
“일단 옷부터 입어라.”
그리고는 문을 닫고 잠시 나가자,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자.
끼익. 쿵!
문밖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었던 여학생들이 호다닥 숨었다.
그제서야 내가 어떻게 보였을지 깨달았다.
권력을 앞세우고, 공무를 들먹이며 여자 숙소에 들어와 당당히 여동생의 룸메이트를 희롱한 사람.
“잠깐.”
이게 그 정도로 기겁할 정도의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다 깨달았다.
“아.”
자하브 안에서는 당연했던 일이, 자하브 바깥에서는 그렇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설마 내 망나니짓이 항상 실패했던 이유가 오직 자하브 평균 하나 때문이었나?
여러모로 생각이 깊어지는 시간이었다.
***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더운 남부의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요를 돌돌 말았으며, 유리아조차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거리를 멀찍이 벌렸지만…….
아무튼 진정한 메이킨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스승님……그러니까 이그나투스 대공께서 자하브 대공께 원하시는 바는 간단해요.”
“뭔데. 아무리 생각해도 100만 골드 어치의 일은 없을 것 같단 말이지.”
“용아병의 제작을 도와달라는 거예요.”
“……용아병?”
처음 듣는 단어에 눈을 끔뻑이자, 메이킨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 용아병이라는 건 주기적으로 빠지는 스승님의 비늘이나 이빨 같은 걸 이용해 만드는 최상급 골렘이에요. 마법사들은 많지만, 마법사를 지킬 기사가 부족한 서부가 전선을 유지하는 핵심 기술이죠.”
“하긴. 이그나투스 대공은 영주이자, 마탑주긴 하지만……누군가의 충성을 받진 않는다고 들었으니 당연한 일인가.”
대공이라는 지위가 있는 만큼 필요하다면 자하브처럼 성을 짓고, 주변 영지로부터 충성을 받으며, 명예를 미끼로 기사를 양성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그나투스는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드래곤이라는 자신의 종족의 장점을 극대화 시킬 수 있도록 마탑을 짓고, 자신의 비전을 인간도 이해할 수 있게 개정하여 마법사를 키워낸 것.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비극의 신 트라고데아의 토벌 후. 차마 신을 완전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없어 4조각의 재앙으로 쪼개, 4대 대공으로 하여금 이를 감당케 했으니.
남부의 자하브 가문이 던전은 관리하며, 한때 트라고데아의 군대 대부분을 차지하던 몬스터 틀어막는 의무를 짊어졌다면.
서부의 이그나투스는 죽음이 두려워 동족을 배신하고, 트라고데아의 편에 섰던 사룡(死龍) 모르테우스와 그 휘하의 언데드들을 억누를 의무를 짊어졌다.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겠지만, 균형 잡힌 병력을 키우는 것보다 수준 높은 마법사를 늘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니 마탑을 세운 거겠지.
어쩌면 조금 전에 메이킨이 말한 것처럼 용아병이 됐건, 다른 무언가가 됐건, 어지간한 기사 수준이라면 모종의 방법으로 대체하는게 더 효율적이라 생각한 걸 수도 있고.
아무튼 이유는 알았다. 자하브 가문이 후계자 다툼으로 약화되어, 이전처럼 수월하게 던전을 관리할 수 없을 것 같자 코넬리우스를 통해 황실의 도움을 받은 것처럼.
이그나투스 또한, 무슨 문제가 생겨 이전처럼 언데드 무리를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아 내 도움을 청한 것이리라.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이쪽의 눈치를 보는 메이킨. 그런 그녀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좋아. 이쪽도 대공가인 만큼 그 걱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니 얼마든 도와줄 수 있지. 그런데 구체적으로는 뭘 어떻게 하면 되지? 난 마법에 문외한이라 말이야. 마법사를 죽이는 법은 알아도, 용아병을 만드는 법 같은 건 모르거든.”
“흐익! 저, 저도 볼일이 다하면……!”
“……방금 건 농담이었어. 내가 죽이는 건, 나를 죽이려는 마법사랑 흑마법사뿐이니까.”
“그런가요오……?”
분명 인간의 형태임에도 조심스레 담요 바깥으로 목을 빼고는 주변을 경계하듯, 두리번거리는 메이킨.
한참 동안 그러고 있던 메이킨이 살짝 풀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으……용아병을 만드는 건 어차피 스승님이랑 다른 사형들이 하실 거예요. 서부에 필요한 건 용아병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더 강력한 용아병을 만들 재료.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으읏. 저, 저도 그러고 싶은데요오…….”
우물쭈물 거리며 말도 제대로 못하는 모습이 답답해 살짝 인상을 찌푸린 순간.
이런건 또 귀신같이 알아챈 메이킨이 발작하듯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자, 자하브 대공 각하의 아기씨가 필요해욧! 부디 태양의 마나로 가득한 대공 각하의 아기씨를 베풀어 주세요!”
“……허?”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눈만 끔뻑이는 사이.
벌떡 일어선 유리아가 메이킨의 담요를 잡고 짤짤짤 흔들었다.
“믿었는데! 믿었는데……! 거짓말쟁이 메이킨! 오라방의 아기씨는 100만 골드를 줘도 안 팔아!”
“헤에엑!”
배신감 가득한 유리아의 절규와 메이킨의 비명소리가 겹쳐졌다.
***
다음 날 아침.
아카데미 학생들 사이에는 실로 망측한 소문이 하나 나돌기 시작했다.
자하브의 새로운 대공, 에녹.
그가 백주 대낮부터 여자 숙소에 쳐들어와, 불쌍한 마법사 하나를 억지로 희롱하였으며.
3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완전히 타락 조교에 성공하여 스스로 아기씨를 조르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말이다.
서부로 향하기 위한 준비를 하던 에녹이 소문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까?”
아무튼 처음으로 망나니 평판을 쌓았으니 좋았쓰!
……조금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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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저점매수(4)
내 아기씨……그러니까 정액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조금 기겁하긴 했으나, 결국 이그나투스 대공의 요청에 응하기로 했다.
당초의 목적이었던 100만 골드 중 일부를 비자금으로 만들겠다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그나투스 대공이라면, 제국의 탄생 이전부터 살아온 드래곤이라면 나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게 있을 거라는 기대가 가장 큰 이유다.
어쩌다 보니 자하브의 혈계능력과 비슷한 힘을 각성한 것? 이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애초에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만약 변이를 감당하지 못했다면 이렇게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점은 그 외의 부분.
대공가의 시조에 버금갈 정도로 진한 피를 타고났다는데, 정작 내 혈계능력이 무엇인지는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대체 어떤 이유로 몬스터도 아니건만, 던전 내부에서 더 강해지는 것인지.
이그나투스라면 이 둘에 대해 답을 모르더라도 실마리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그 과정에서 당연히 이그나투스에게 내가 자하브의 혈족이 아님을 들킬 가능성이 높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 생각해둔 것이 있다.
하여, 이그나투스 대공령으로 향하기로 정하고 나름의 짐을 싸는 도중이었다.
“좋아. 이걸로 다 챙겼나.”
“으음. 하나 빠뜨리지 않았니?”
내가 짐을 싸는 것을 도와주던 제벨라가 고개를 갸웃거리길래, 다시 한번 가방을 뒤적여 보았다.
“흠……다 챙긴 것 같은데요? 애초에 자잘한 건 카렌이 준비했을 테니, 저는 그냥 몸만 가도 충분할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보렴. 정말 없니?”
“???”
뭔가 싶어 계속해서 가방을 뒤적이고, 침대와 책상도 살펴보았으나 별다른 이상은 찾을 수 없었다.
하여,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자니 제벨라가 장난스레 미소 지으며 양팔을 벌렸다.
“이 누이에게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잖니.”
“……예?”
“이리 오렴. 어서.”
이게 맞나 싶어 쭈뼛쭈뼛 다가가자, 냉큼 이쪽을 끌어안는 제벨라. 남부 특유의 얇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살결. 꽃을 닮은 체향이 번져오며 따스한 체온이 몸을 달군다.
“어찌됐든 에녹 네가 자하브에 온 뒤에 처음으로 성을 멀리 떠나는 일이잖니.”
“아.”
그랬다. 내가 자하브에 머무른 지 벌써 두어 달은 지난 것 같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성안에서 보냈으니까.
가끔 외출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던전에 드나드는 정도.
제벨라가 나를 안고 있는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꾸욱.
가슴팍에 짓눌리는 부드러운 감촉. 하지만 왜일까. 지금은 제벨라가 등을 토닥이는 감각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별로 위험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몸조심해서 다녀오렴.”
“……네.”
어색한 움직임으로 나 또한 제벨라의 등을 토닥이는 사이.
제벨라의 작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그런데 요즘 도는 소문은 어떻게 된 거니?”
“……네?”
“있잖니. 유리아의 룸메이트이자, 이그나투스 대공의 가장 어린 제자를 마구 범해서 부끄러운 말을 큰 소리로 외칠 만큼 타락시켰다는 소문 말이란다.”
“…….”
아니, 그 소문이 왜 벌써 제벨라의 귀에 들어간 건데.
평소에는 내가 뭘 하건,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좋게만 해석하던 사람이지만……아무리 그래도 이런 소문까지 좋은 방향으로 해석할 것 같진 않아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내 동생들……에녹과 유리아의 말을 믿는단다. 실제로 이그나투스 대공의 조건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약간 문제가 생긴 것일 수도 있지. 메이킨이라는 아이는 아직 어린 나이고, 부끄러움이 심한 아이 같으니 말이야.”
정작 돌아온 것은 괜찮다고, 이해한다는 식의 내용.
하긴, 제벨라라면 오히려 이런 소문에 시달리는 나를 위로해 주려던 것이리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그것이 너무 빠른 판단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소문이 진짜라면. 그러니까 에녹 너도 자하브고 남자니까 어느 날 갑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를 3일 밤낮으로 조교 해서 머릿속에 아기씨 조르는 것밖에 없는 상태로 만들고 싶은 기분이 들 수도 있잖니.”
“……?”
대체 그런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적어도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라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피임은 꼭 하렴. 일단은 에녹 네가 가주고, 이 누이가 첫째 부인이 될 예정이잖니. 만약 사생아가 먼저 태어난다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테니까.”
“그쪽이 문제에요?!”
나는 일종의 질투나 독점욕 같은 건 줄 알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가문의 위신이 어쩌구 하면서 줄을 세우려는 내용이라던가.
하지만 그냥 사생아가 정실 혈통보다 먼저 태어나면 복잡해지니 조심하라는 걸로 끝이라니.
심지어 다른 여자랑 뒹굴지 말라는 것도 아니라 피임만 제대로 하라는 소리였다.
이게……맞나?
언젠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가주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지만, 그전까지는 내가 자하브의 핏줄이 아니라는 걸 들켜서는 안 된다.
하여, 아직 자하브의 다른 형제들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어땠는지 따로 알아보았으나.
대부분이 검열되거나, 기록 삭제되어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저 생긴 것처럼 금태양 집안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어쩌면……내 생각보다 훨씬 미친 집안이었을지도 모르겠네.
……아, 그래서 아카데미에 그렇게 소문이 빨리 퍼진 건가.
작은 깨달음과 함께 제벨라를 부드럽게 밀어내며 말했다.
“걱정마세요. 절대로 그럴 일은 없으니까.”
“어머나…….”
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힌 제벨라. 그녀가 잠시 스스로의 뺨을 문지르더니, 이내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흐흠. 아무튼 이걸로 깜빡한 마지막까지 제대로 챙겼구나. 마음 같아서는 성문 앞까지 마중 나가고 싶지만…….”
“일이 바쁜 거죠? 이해해요.”
아직까지도 쏟아지는 친구비의 향연. 제벨라는 이를 최대한 유용하게 써먹기 위해, 매일 같이 밤을 새며 일한다고 들었다.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마탑에는 특이한 아티팩트가 많다고 들었어요. 제벨라 누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하나 구해올게요.”
“정말이니? 고맙단다 에녹. 이 누이를 그렇게나 생각해 줄 줄이야. 정말 착한 아이구나. ……그래. 정말 착한 아이인데.”
흐뭇한 표정으로 내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던 제벨라였으나, 어째서인지 그 손길이 내 심장 어림을 스치는 순간.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워낙 순식간에 지나간 변화라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는 사이. 포옹을 하며 잠시 흐트러졌던 옷을 바로 잡아준 제벨라가 반보 뒤로 물러섰다.
“응. 이거면 충분하겠구나. 어서 가보렴. 이그나투스 대공이라도 텔레포트 게이트를 오래 유지하는 것은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일 테니 말이야.”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누님.”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방을 나서, 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내가 미처 챙기지 못했을 것들을 챙긴 카렌과, 여전히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메이킨.
그리고 나를 배웅하기 위한 가신들과 기사단이 도열해 있었다.
아쉽게도 힐다도 나와 동행하는 대신, 저 사이에 끼어있다.
던전 실습으로 온 아카데미 학생들을 관리 감독하고, 연속된 던전 역류 때문에 완전히 박살 난 방어선을 재건하느라 기사단의 인원을 줄이기 힘들었기 때문.
뭐, 카렌만 있어도 충분하겠지. 내가 내 한 몸 지킬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쿠웅!
내가 지나갈 때마다 양옆으로 물러서 경례를 하는 가신들. 자연스레 사람으로 이루어진 길이 열리는 모습은 몇 번 본 적 있음에도 장관이었다.
나만 그리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시선을 피할 뿐이던 메이킨이 고개를 푹 숙이기 시작했다.
좀 위압감이 느껴지는 광경이긴 해.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메이킨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고개 들어.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잖아?”
“네? 아, 네엡!”
고개를 연신 꾸벅인 메이킨이 품에서 작은 수정구 하나를 꺼내 마나를 불어넣고. 무어라 중얼거린다.
모종의 보안 장치라도 있는 것인지 수정구의 안쪽이 보이지도,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메이킨의 통신 상대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마 이그나투스 대공이겠지.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눈 끝에 메이킨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준비는 끝났어요오……다들 조금만 물러서 주세요. 휘말리면 위험하거든요.”
“…….”
“…….”
“…….”
“지, 진짜 위험한데…….”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둘러싼 자하브의 가신들을 바라보는 메이킨. 그런 그녀 대신 내 쪽에서 나섰다.
“들었지? 다들 세 걸음씩 물러나.”
“““예!!”””
우렁찬 대답과 함께 그제야 거리를 벌리는 가신들.
이에 메이킨이 감탄과 억울함이 섞인 표정이 되었으나, 할 일은 하려는 건지 공터에 방금까지 쥐고 있던 수정구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구를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마나의 격류.
메이킨 수준으로 어찌할 수 있는 양의 마나가 아니다. 당연히 마도구 따위가 버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쩌적.
돌연 금이 가는 수정구. 그 사이로 훨씬 더 많은 마나가 쏟아져나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패턴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웅-
공명음과 함께 완성된 것은 거대한 타원형의 거울을 닮은 무언가.
하지만 진짜 거울은 아닌지, 너머에서 일렁이는 풍경이 자하브령과 완전히 달랐다.
“저기가 서부인가.”
처음 보는 고위 마법에 내심 감탄하며, 메이킨을 따라 카렌과 함께 텔레포트 게이트로 몸을 던졌다.
약간의 부유감. 그리고 살짝 선선해진 기온. 텔레포트는 성공적이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자.
“잘 왔구나. 본인이야말로 이그나투스 대공. 태양의 후예여, 그대를 초청한 최후의 용이니라.”
“……음?”
그곳에는 위엄 넘치는 레드 드래곤 대신. 바닥을 뒹굴거리는 붉은 머리의 꼬맹이가 있었다.
높게 솟은 뿔과 오동통한 꼬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이그나투스 대공?”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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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서부
텔레포트 게이트를 건넌 뒤.
약간의 이질감 끝에 감았던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잘 왔구나. 본인이야말로 이그나투스 대공. 태양의 후예여, 그대를 초정한 자이니라.”
“……음?”
그리고 발견했다. 위엄 넘치는 레드 드래곤이 아닌, 바닥을 뒹굴거리는 붉은 머리 꼬맹이를.
“이그나투스 대공?”
이게?
눈을 끔뻑이며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생물체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타오르는 불꽃을 닮은 선명한 적발. 뭐로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비싸 보이는 옷.
머리의 양옆으로 길게 솟은 뿔. 이를 중심으로 작은 뿔들이 엮여있는 모습은 왕관을 연상케 하며.
엉덩이 부근에서 살랑이는 꼬리는 붉은 비늘이 촘촘하게 덮인 것이 꽤나 위협적이지만……전체적으로 오동통하고, 실루엣이 뾰족하다기보다 둥글어서 귀엽기 그지없다.
알기 쉬운 드래곤의 특징들. 하지만 이그나투스 대공은 못 해도 제국의 역사만큼 나이를 먹은 존재 아닌가.
그런 사람……아니, 용이 이런 꼬맹이의 모습으로 바닥을 굴러다니며 손님을 맞는다고?
순간 어이가 없었으나, 마탑의 사람들에게는 대수로울 것 없는 평소의 모습이었던 걸까.
메이킨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바닥과 물아일체가 되어있는 이그나투스를 번쩍 들어 올렸다.
“스승님. 아무리 피곤하셔도 손님을 누워서 맞이하시면 안 되죠.”
“으으……하지만 의자에 올라가는 것도 슬슬 귀찮단 말이니라.”
“그럼 다른 사형들을 시켜서라도 하셨어야죠.”
“그, 그래도 다른 사람을 전부 물리고 이렇게 혼자 게이트를 열었으니 괜찮지 않느냐.”
“그건 잘하셨지만, 아무튼 다음에는 꼭 의자에라도 앉아주세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변의 의자에 이그나투스를 앉혀놓는 메이킨.
의자에 앉은 상태로도 추욱 늘어진 모습에 카렌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카렌카렌아. 혹시 서부에는 최대한 편한 자세로 손님을 맞이하는 관습이 있니?”
“아뇨. 그런 건 없습니다. 애초에 메이킨 양도 깜짝 놀라 이그나투스 대공 각하를 의자에 올려두시지 않았습니까.”
“그럼 그냥 귀찮음이 많다거나?”
“그렇지 않을까요? 어쩌면 다른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요. 적어도 저희를 무시하거나 그런 느낌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만…….”
그렇게 소곤거리고 있자니, 거의 드러눕다시피 의자에 걸터앉은 이그나투스가 입을 열었다.
“이거 손님들 앞에서 미안하게 됐구나. 허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라.”
“으음. 다 들렸나 보네.”
“이래 보여도 귀는 좋은 편이라 말이지.”
그리 말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이그나투스. 덕분에 누워있을 때는 몰랐던 그녀의 전신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평범한 의자에 앉았을 뿐인데, 발이 닿지 않을 정도의 단신. 하지만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으며.
메이킨이 빠르게 정돈해 주는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이목구비는 조각상처럼……아니, 이 세상 존재가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소녀와 여인. 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어중간한 매력이 아닌 양쪽의 매력을 전부 품고 있는 얼굴.
하지만 그보다도 더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머리카락만 해도 선명한 붉음을 품고 있다고 여겼거늘, 이그나투스의 눈동자는 그 이상이었다.
루비, 불꽃, 리얼 레드 등등.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채도 높은 붉은색을 나타내는 단어를 떠올렸으나.
그 중 무엇 하나 이그나투스의 눈동자를 온전히 표현하지는 못하리라.
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리고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휘어진다.
“당대의 자하브가 선조 회귀에 가까운 수준으로 혈계능력을 각성했다더니……그 말이 사실인가 보구나.”
“그게 눈으로 보여?”
“혈계능력 자체가 보이는 것은 아니니라. 그저 체내에 품고 있는 마나의 성질과 순도를 느낄 뿐이니라.”
“과연. 다른 자하브들과 비교하면 어떤데?”
“다른 자하브들과 비교해서 말이느냐?”
그리 말한 이그나투스가 당장이라도 꾸벅거리며 졸 것 같은 나른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적어도 최근 500년간 보아온 자하브들과는 비교가 안 되겠군. 그전과 비교하면……순도만 따지면 샤메스. 아, 자하브의 시조이니라. 샤메스와 비슷한 것 같다만, 마나량은 다른 후예들에 비해 조금 부족하구나.”
“마나량이……부족하다고?”
미친 연금술사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먹었던 영약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고, 이후에도 여러 인체실험의 부작용을 잠재우기 위해 여러 영약을 마구잡이로 퍼먹었다.
칼립소의 흑마법사 지부를 박살 내고, 암살자 길드를 조지며 나온 영약 중 나와 극상성인 것들과 동료들에게 줄 분량을 제외하면 전부 퍼먹었고.
정보상이나 브로커, 때로는 용병들에게 돈을 주고 영약을 구하기도 했다.
실제로 마나 다루는 법은 잘 모르는데, 마나량이 너무 많아서 종종 마나가 꼬이며 내상을 입었던 적도 있으니 말 다 했지.
그런 내가 마나량이 적다니.
순간 무한한 마나를 생성한다는 드래곤 하트를 가진 입장에서 작아 보인다는 소리인가 싶었으나, 분명 다른 자하브들과 비교했을 때 적다고 했다.
어이가 없어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이그나투스가 픽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너무 자존심 상해하지 말거라. 보아하니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나이가 어리면 당연히 쌓은 마나도 적을 수밖에 없지.”
“그……런가.”
즉, 초대부터 500년 전까지의 자하브는 순 괴물 딱지였다는 소리인가.
솔직히 별로 체감이 안 되긴 했지만, 제벨라에게 들었던 이야기처럼 자하브의 혈통이 열화된 것 자체는 사실인 모양이다.
……그리고 이그나투스가 나와 자하브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뭐어. 태양과 불꽃의 차이를 말하라고 하면 나도 잘 모르겠지만.
기껏해야 규모와 온도밖에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지.
약간의 실망감이 차올랐을 무렵. 이그나투스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으음. 이렇게 자세히 보니 다른 자하브들과 조금 느낌이 다른 것도 한데…….”
“……!”
“하기야. 이 정도로 시간이 흘렀으면 아무리 후손이라도 조금 변하기도 하겠구나.”
슬쩍 눈으로 보는 정도로는 정말 구분 못 하는 모양이다.
마나에는 누구보다도 민감할 터인 드래곤이 이렇게 반응한다는 건, 사실상 평범한 방식으로는 구별할 수 없다는 소리.
보다 전문적인 방식으로 깊게 파고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애초에 그 정도로 의심받는 상황이 되면 어차피 뭘 하건 들킬 수밖에 없겠지.
이걸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던 도중이었다.
“하아암…….”
돌연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는 이그나투스. 사람의 것이 아닌 뾰족뾰족한 이빨이 엿보이며, 작은 불꽃이 뿅하고 튀어나왔다가 사라진다.
메이킨 덕분에 슬슬 자다 깬 꼬맹이에서, 꽃단장한 꼬맹이 수준까지 올라온 이그나투스가 머쓱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부터 손님맞이가 형편없어 미안하구나. 부끄러운 말이지만 몸 상태가 조금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느니라.”
“뭐어. 별로 신경 쓰진 않아. 생각해 보면 나도 아까부터 처음 보는 사이인데 반말로 대하는 중이었고.”
“뭣? 자하브가 초면인 사람에게 반말은 무례한 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게냐……?”
“……?”
자하브는 대체 뭘까.
요즘 들어 몇 번이고 곱씹게 되는 주제였기에 슬슬 감이 잡혀가고 있다. 하여, 내가 생각한 자하브스러움을 조금 발휘해 보기로 했다.
“드래곤은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지 않나?”
“가, 가주님?!”
나와 이그나투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있던 카렌이 기겁을 하며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메이킨 또한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지만……정작 이그나투스 본인은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자하브는 시간이 지나도 자하브로구나.”
“…….”
진짜 자하브는 대체 뭘까…….
헛웃음을 짓는 사이. 이그나투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해해 주어 고맙구나. 허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 계약 내용부터 확실히 하자꾸나.”
“좋지.”
내 대답을 듣자마자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허공을 긋는 이그나투스. 그 간단한 움직임에 어마어마한 마나가 요동치더니, 이내 손가락의 궤적을 따라 허공에 세로로 금이 간다.
쩌적-
갈라진 공간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궤짝. 이그나투스의 손짓에 뚜껑이 열린 궤짝 너머로 반짝이는 황금이 보였다.
“약속한 100만 골드이니라. 필요하다면 직접 세어도 괜찮으니라.”
“아니. 저걸 어느 세월에 다 세고 있겠어. 여기서는 명예로운 이그나투스 대공의 말을 믿어야지.”
“……당대의 자하브는 제법 달콤한 말을 할 줄 아는구나. 혹시 그대도 이 몸을 노리는 것이더냐? 아쉽지만 포기하거라. 이 몸은 자하브와 달리 무의미한 번식 활동에 흥미가 없으니.”
“혹시 예전에는 좀 더 어른스러운 몸이었나?”
“으음? 예나 지금이나 이 몸은 그대로다만. 아, 뿔과 꼬리가 좀 더 굵어지긴 했느니라.”
“아오, 자평 진짜…….”
카렌과 좋은 승부가 될 법한 키. 그리고 카렌보다도 안쓰러운 가슴팍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무튼 100만 골드를 지불할 능력이 있다는 건 확인했으니 됐어. 필요한 건 강력한 용아병을 만들기 위한 내 아기씨……정액이지? 양은 얼마면 되나?”
“이 병에 가득 채울 정도면 되겠구나.”
마찬가지로 허공을 열어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는 이그나투스.
이걸 가득 채워야 하는 건가……좀 많긴 하지만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리라.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조건이 있느니라.”
“뭔데.”
“미안하지만 이 근방에는 창녀가 없느니라. 서부는 전장이며, 마탑은 전초기지. 여기에 거주하는 이는 전부 이 몸이 가르치고, 이 몸을 따르는 이들이니,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지만 자하브의 손에 망가지게 두겠느냐.”
“……아니,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는데.”
그냥 혼자 해결하려 했다는 말을 하려던 순간. 이그나투스의 오동통한 꼬리가 꿈틀거리더니, 그 끝에 무언가를 휘어감아 내밀었다.
“대신 이걸 사용하거라. 이 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착정 마도구이니라.”
반투명한 재질. 원통형의 생김새에서는 부들부들해 보이면서도 묘한 단단함이 느껴지며, 한쪽 끝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있었다.
……이거 완전 오나홀이잖나.
살랑이는 꼬리로 저걸 쥐고 있으니 엄한 상상이 마구마구 피어오른다.
설마 판타지 세상에서 이런 걸 볼 줄은 몰랐는데.
헛웃음만 짓고 있자니, 이그나투스의 자랑이 이어졌다.
“걱정 말거라. 온도 유지 마법, 69가지의 진동 패턴, 그리고 약간의 환상 마법까지 걸어 두었으니 아직 시험해 본 적은 없지만 제법 쓸만할 것이니라.”
“그, 그러냐…….”
아무튼 손으로 해결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런 생각으로 이그나투스의 특제 마도구를 받아들려던 순간.
—————!!
바깥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존재감. 실내에 있음에도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에 반사적으로 전투태세를 취하며 감각을 일깨웠다.
그리고 이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닌지, 시종일관 늘어져 있던 이그나투스 또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필이면 손님을 맞이하는 도중이라니.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한숨을 푸욱 내쉬며, 처음 보는 곧은 걸음으로 창문 쪽으로 향하더니.
덜컥.
그대로 창문을 열어 몸을 던진다.
“엉?”
갑작스런 투신에 다급히 창문 쪽으로 달려갔지만.
화아악!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더니, 창문 너머의 풍경을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가득 채웠다.
“오.”
내가 기대했던 위엄 넘치는 모습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말랑.
이그나투스가 만들어 준 오나홀이 꾸욱 짓눌렸다.
……기운이 쏙 빠지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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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서부(2)
바깥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울음소리. 이를 듣자마자 이그나투스가 지금껏 보여준 나른함을 내다 버리고, 곧장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화아악!
밝은 빛이 터져 나온 뒤에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거대한 레드 드래곤.
“오.”
내가 기대했던 위엄 넘치는 모습. ……방금까지 내게 착정 마도구라며 판타지판 오나홀을 건넨 사람과 동일 인물인가.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말랑한 감촉에 살짝 기운이 빠지긴 했으나, 이런 내 감상과는 별개로 상황은 꽤나 심각했다.
이그나투스가 멀리 날아가자, 그녀의 거체에 가려져 있던 저 멀리의 풍경이 보였는데.
“세상에. 카렌카렌아 저게 다 뭐냐.”
“……혹시 서부에도 던전 역류가 일어나는 겁니까?”
까치발을 서서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본 카렌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카렌도 놀란 모양.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지평선 너머로 무수히 많은 언데드들이 기어 올라오고, 그 중앙에는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드래곤이 눈두덩이에서 귀화를 불태우고 있었으니까.
남부에서 나고 자란 카렌이 보기엔 던전 역류처럼 보이겠지.
뭐어. 서부에서 자란 메이킨의 눈에는 반대로 보이겠지만.
“와일드 헌트네요. 요즘 들어 주기가 짧아졌단 말이죠.”
“와일드 헌트?”
“네. 남부의 던전에서 몬스터가 흘러넘치는 것처럼, 서부에서는 과거의 망령들이 죽음의 구덩이에서 다시 일어서 못다 한 전쟁을 이어가거든요.”
“……비극의 밤.”
“맞아요. 비극의 신 트라고데아에게 맞선 이들이었죠.”
비극의 신은 단 한 명뿐인 신도의 바람을 위해 세상을 비극으로 물들이고자 했다.
그렇게 강신하여 오랜 시간 암약하며 준비를 마친 뒤. 이 모든 것을 일제히 터뜨려 대륙을 상대로 전쟁을 선언했으니.
비극으로 뒤덮인 세상은 어두운 밤과 같았기에, 당시의 전쟁에 비극의 밤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다행히 어찌어찌 막아내긴 했지만, 수많은 신들이 힘을 잃고 몰락했으며, 그 이상으로 많은 영웅들과 이름없는 병사들이 죽어 나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그리고 서부의 재앙은 한때 비극의 신에게 맞서 일어선 이들을 언데드 삼아 군세를 일으켰으니.
한때는 가장 신에 가까운 종족이었으며, 그렇기에 비극의 밤에 멸종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드래곤.
그중 유일하게 종족을 배신하고 비극의 신에게 붙은 자.
사룡 모르테우스.
아마 저 멀리서 언데드를 이끄는 본 드래곤이 모르테우스일 것이다.
카렌과 힐다를 통해 기본적인 대륙의 역사를 배웠기에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직접 본 모르테우스와 그의 군세가 일으킨 와일드 헌트는…….
“던전 역류보다 빡센 것 같은데? 마탑 개쩌네. 이걸 막고 있을 줄이야.”
“아핫……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자하브 대공 각하. 하지만, 마탑의 일원인 제가 보기엔 던전 역류 쪽이 더 무섭더라구요.”
“그래? 물량은 비슷해도 전반적인 수준이 달라 보이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장벽을 두드리는 언데드들을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음산한 죽음의 기운. 그리고 이것이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라는 듯, 맹렬히 몰아치는 불길한 눈보라.
사기(死氣)가 가득 담긴 눈보라와, 그 속에서 귀화를 번뜩이는 언데드들이 마탑의 방벽에 막히고, 고위 마법에 펑펑 터져나가는 모습은 솔직히 감탄스럽다.
내가 경험해 본 오크들의 웨이브와 비교하면……평균 무력은 비슷하지만, 언데드와 달리 오크들은 전략을 구사하니 직접 전투력은 오크들이 위.
하지만, 저 사기로 가득한 눈보라가 문제다.
흑마법사 놈들과 싸워봐서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저런 음침한 기운은 미리 대비하거나, 면역이 없는 이상 굉장히 까다롭다는 것을.
그렇기에 아마 실제 위협은 언데드 쪽이 더 강할 것이다. 무엇보다 저놈들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니까.
거기에 가장 큰 차이는 따로 있었다.
우두머리.
오크 워로드는 분명 강력했다. 익스퍼트급 강자가 여럿 있어야 간신히 쓰러뜨릴 수 있다는 시점에서 일인 군단이나 다름없는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모르테우스는 오크 워로드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괴물이었다.
————!
여기까지 들려오는 공허한 울음소리. 동시에 한층 거세진 죽음의 눈보라가 마탑이 시전한 방벽 마법을 깨부순다.
짓쳐들어오는 차가운 죽음을 향해 주홍빛의 장막이 펼쳐진다.
마탑 차원에서 펼친 마법이 아닌, 마법사 개개인이 펼친 마법.
하지만 효과는 충분했는지, 죽음의 눈보라에서 느껴지던 불길함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물론, 방벽을 두드리던 언데드들이 방벽이 무너진 틈을 타, 달려드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쩌저적.
놈들은 땅에서 솟아오른 용아병들이 막아내며, 마법사들을 호위했다.
이그나투스의 비늘과 이빨로 만들어 낸 이들이기 때문일까. 언데드와 비슷한 구조지만, 훨씬 날카롭고 공격적인 인상이다.
실제로 어지간한 언데드들보다 튼튼하고 힘도 좋았기에 잘 싸우고 있었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모르테우스가 굵직한 팔을 휘둘러 용아병들을 쓸어버렸다.
콰직!
일반 언데드 상대로는 잘만 싸우던 용아병들이 순식간에 과자 부스러지듯, 간단하게 박살나 버린다.
이를 만족스레 바라보던 모르테우스가 돌연 뼈만 남은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몸을 웅크려 크게 도약한다.
하얀 본 드래곤의 몸뚱이가 마탑에 정면으로 들이받기 직전.
콰아아아아!
때맞춰 도착한 이그나투스의 브레스가 모르테우스를 하늘에서부터 찍어 누른다.
거대한 뼈를 버둥거리며 저항하는 모르테우스였으나, 결국 뿜어내던 눈보라는 레드 드래곤의 열기에 녹아내리고 날아오르려던 몸뚱이는 바닥에 처박혀 밀려난다.
쿠웅!
여기까지 전해지는 진동. 하지만 이그나투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브레스를 쏘아내며 날개를 펼치더니, 그 위로 무수히 많은 마법진이 그려지며 듣도 보도 못한 화려한 마법이 공간 전체를 뒤덮었다.
결국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방금 막 기어 올라온 골짜기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모르테우스.
모르테우스가 사라지자, 여유가 생긴 마탑의 마법사들이 남은 용아병의 보호를 받으며 다음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일반 언데드들과 달리, 머리를 가루 내도 다시 살아나는 녀석들이기에 굳이 위력이 강한 마법을 사용하진 않았다.
장막이 아닌, 주홍빛 가루의 형태로 흩뿌려지는 마법.
이에 닿은 언데드들이 눈에 띄게 둔해지더니, 그 틈을 타 용아병들이 서로 달라붙어 하나의 장벽을 만든다.
뒤이어 완성된 마법이 물과 바람을 만들어 용아병 장벽 채로 언데드들을 밀어내기 시작하니.
결국 언데드들은 모르테우스의 뒤를 따라 골짜기 너머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량의 용아병을 소모하긴 했으나, 최소한의 사상자로 와일드 헌트를 막아낸 것이다.
그러나 마탑의 마법사들은 이러한 일이 일상인지, 크게 기뻐하는 기색 없이 담담히 움직여 부상자를 수습하고 깨진 방호 마법을 복구하기 시작했으며.
이그나투스는 당당한 자태로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살펴보더니, 그대로 하늘을 날아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분명 세상의 멸망……까지는 아니어도 나라 한둘쯤은 무너질 것 같은 풍경이었으나.
이를 너무도 간단하게 정리하고 돌아오는 이그나투스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사이. 메이킨이 쓴웃음을 지었다.
“보시다시피 마탑의 모든 시스템은 언데드를 상대하는 데 특화되어 있거든요. 모르테우스와 그가 이끄는 와일드 헌트가 던전의 몬스터보다 더 강할지 모르지만……약점은 확실하고, 마법은 그러한 약점을 찌르기 참 좋은 학문이죠.”
“아.”
그제야 깨달았다. 어째서 이그나투스가 굳이 기사들을 양성하지 않고, 용아병으로 대체하는지.
언데드 상대로 끝나지 않는 소모전을 효율적으로 행하기엔 막 쓰고 버릴 수 있는 방패가 필요하다.
용아병보다 더 강하다고는 하나, 살아있는 기사를 갈아 넣을 수는 없잖은가. 그러다 죽으면 언데드의 군세에 추가될 텐데.
무엇보다 메이킨의 말대로 마탑의 모든 시스템과, 마법은 언데드를 상대하기에 특화되어 있다.
미리 준비할수록 위력이 배가 되는 마법의 특징을 이용하여, 최대한의 효율로 와일드 헌트를 막아내는 것이다.
반면, 남부의 던전 역류는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랜덤 박스 같은 것.
생명체에게 치명적인 극독을 준비했더니, 갑자기 골렘류 몬스터가 진격해 올지도 모르고.
무식한 물리력으로 밀어버리고자 전쟁 병기를 대량으로 준비해도, 난데없이 물리 공격의 대부분을 무효화 시키는 슬라임 계열이나 정신체로만 이루어진 몬스터가 튀어나올 수도 있잖은가.
그렇기에 남부에 필요한 건 어떤 상황에서도 대응할 수 있는 절대적인 강자.
이러한 상황이 마법사들 눈에는 끔찍한 도박처럼 보이는 거겠지.
“이해했어. 각자의 상성과 고충이 있다는 거구만.”
“괜히 초대 황제께서 남부는 자하브 대공께, 서부는 스승님께 맡기신 게 아니죠.”
나와 카렌이 새로운 지식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창문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방금 막 와일드 헌트를 몰아내고 온 이그나투스가 레드 드래곤의 형태에서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창틀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에엑.”
“이런.”
아무런 저항도 없이 철푸덕 넘어지며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잡아들긴 했지만, 내 팔에 안긴 이그나투스는 건어물마냥 축 늘어져 미동조차 없었다.
흔들.
팔을 살짝 흔들자, 힘없이 따라 움직이는 오동통 꼬리.
방금까지 압도적인 위용으로 모르테우스를 브레스로 밀어버리던 그 레드 드래곤이라고는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조금이나마 회복한 걸까.
내 팔뚝에 침을 질질 흘리고 있던 이그나투스가 입을 열었다.
“우, 우선 이 몸을 좀 눕혀주겠느냐? 이 무례는 그 뒤에 설명해 주마.”
“어렵지 않지.”
그대로 이그나투스를 번쩍 들고는 메이킨이 꺼내 놓았던 의자에 앉았다.
이어서 늘어진 이그나투스를 내 무릎에 엉덩이를 대고, 가로로 눕는 자세로 만들어 주었다.
이그나투스의 인간 폼이 워낙 키가 작았기에 가능한 일.
그래도 딱딱한 의자 모서리에 닿으면 아플 테니, 머리 뒤편과 무릎 안쪽은 팔로 안아서 받쳐주었다.
전체적으로 공주님 안기를 한 채로, 조금 전까지 이그나투스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은 모양새.
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찢어진 동공에 경계의 빛이 맴돌았다.
“당대의 자하브야. 이게 맞느냐?”
“엉? 뭐, 문제 있어?”
“이젠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게냐.”
“뭐래. 아, 팔이 부족하니 이건 네가 들고 있어.”
이그나투스의 말랑한 배 위에 오나홀을 올려주었다. 그러자 이를 반사적으로 붙잡은 그녀가 체념 섞인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천 년이 지나도 자하브는 자하브로구나.”
“글쎄. 지금은 헛소리 그만하고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별거 아니니라. 처음 말한 것처럼, 요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힘을 쓰고 나니 순간적으로 탈진했을 뿐…….
“아니잖아.”
이그나투스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제국의 4대 대공이자, 마탑주, 최후의 드래곤을 향한 말투라기엔 꽤나 무례한 일이었지만.
애초에 나도 지금은 자하브 대공(아님)이잖나. 격은 얼추 맞는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이그나투스. 마탑이 싸우는 모습을 봤어. 용아병을 소모품처럼 쓰더만.”
“혹시 같은 전사로서 연민이라도 느낀 게냐? 걱정말거라, 무술을 학습시키긴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이 몸의 비늘과 이빨로 만든 인형이니.”
“그래 보이더라. ……그런데 용아병을 소모품처럼 쓸 거면, 왜 더 강한 용아병이 필요한 거지? 어차피 몇번 쓰고 버릴 텐데.”
“그만. 거기까지만 하거라.”
“100만 골드나 들이고, 같은 4대 대공 중 하나인 내 힘까지 이용해 지금보다 훨씬 강한 용아병을 만들 이유가 뭘까. 천년에 걸쳐 최적화된 와일드 헌트 상대법을 뜯어고칠 이유가 대체 뭘까. 그런 고민을 계속했거든?”
채도 높은 붉은 눈동자가 이쪽을 빤히 바라본다. 마치 그 이상은 말하지 말아 달라는 것처럼.
하지만, 내가 그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없다.
세로로 찢어진 위압적인 눈동자. 하지만 묘한 위태로움을 품고 있는 이그나투스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너. 죽어가고 있구나.”
“…….”
“네가 죽은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강력한 용아병을 만들려는 걸 테고.”
“…….”
이그나투스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에녹이라고 했느냐. 짐승같이 예리하구나. 아주 비슷하게 짚었느니라.”
“비슷하게?”
의아해하는 나를 향해 이그나투스가 쓴웃음으로 답했다.
“이 몸은 지금 졸립다.”
“엉?”
“아주아주 졸립다.”
“장난치는 거냐?”
“아니. 장난이 아니니라.”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고 말을 잇는 이그나투스.
“드래곤은 본래 잠이 많은 종족이니라. 그리고 이 몸은 모르테우스를……배신한 아버지를 막아내기 위해, 헤츨링이던 시절부터 천 년간 잠에 들지 못했지.”
“……어?”
“지금 잠들면 그야말로 죽은듯이 잠들 터.”
“…….”
“후우. 솔직히 말하마. 이 몸 없이 서부가 어떻게 와일드 헌트를 막을지가 걱정이었느니라. 그 대책 중 하나가 강화 용아병이었고. 이제 되었느냐?”
아하.
잠꾸러기 응애용이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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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서부(3)
수상쩍기 그지없는 이그나투스의 행적. 이를 추궁하여 숨겨진 진실을 알아내고 말았다.
“헤츨링 때부터 천 년……? 헤츨링이면 새끼 드래곤 말하는 거 아냐?”
“보고도 모르겠느냐. 나름 제국과 역사를 함께한 이 몸이 왜 이리 작은 거라고 생각한 게냐.”
“그런 취향인 줄 알았지.”
황제, 여신, 천하제일인, 드래곤 등등.
이런 최강자 라인의 존재하는 이들의 외견은 어린 여자아이인 것이 상식 아닌가.
……아닌가? 이건 너무 전생의 편견일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이그나투스가 숨기고 있었던 진실. 그것은 그녀가 잠꾸러기 응애 용이라는 것이었다.
여전히 내 무릎에 누운 자세로 기가 차다는 듯이 콧김을 뿜는 이그나투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일단 묻겠는데. 보통 드래곤은 얼마나 자야 하지?”
“평상시라면 그리 잠에 들 필요가 없느니라. 하지만, 대신 몰아서 잔다는 느낌이구나. 예를 들자면……그래. 겨울잠을 자는 곰과 비슷하니라.”
“허…….”
“마음만 먹으면 백 년도 넘게 깨어있을 수 있느니라. 물론, 항상 눈을 뜨고 있는 것은 아니고 여느 종족들이 그러하듯 중간중간에 휴식을 취해야 한다만. 대신 수면기가 찾아오면 최소 20년은 잠들어 있어야 하겠구나.”
“100년 깨어있는 대신 20년 잠드는 건 너무 비효율적인 것 같은데.”
“무얼. 인간도 하루의 3분의 1을 수면으로 소모하지 않느냐. 비율만 보면 이 몸이 훨씬 효율적이니라. 무엇보다 드래곤의 수면은 휴식과 재충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니라.”
“자는 게 자는 거지 뭐가 더 있어?”
“물론이니라. 드래곤의 수면은 성장한 심장의 마나만큼 육신을 성장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느니라. 즉, 잠만 자도 강해진다는 소리이니라!”
축 늘어진 채로 으스대는 이그나투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가느다란 몸에서 힘이 쪽 빠졌다.
“……이 몸은 천 년간 잠들지 못했지만 말이야.”
“천년이라. 애초에 그렇게 오래 잠을 참을 수 있다는 게 대단한데. 아니, 참으면 안 되는 걸 억지로 참아서 지금 상태가 영 안 좋은 건가.”
“옳다. 처음 300년 정도는 의지로 버텼느니라. 허나, 이 몸의 의지는 완벽하지 않았고, 결국 여러 마법과 약의 도움을 받아 지금껏 버텨왔건만……슬슬 한계로구나.”
“……지금 잠들면 몇 년 뒤에 깨어날 것 같아?”
“모르겠느니라. 이 몸이 최후의 드래곤이라 물어볼 이도 없고, 천 년간 잠을 참은 드래곤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기에.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이그나투스. 어쩐지 이 짧은 사이에 한층 나른함이 더해진 기분이다.
“몇십 년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니라.”
“100년 깨어있으면 20년 잠들어 있어야 하니, 단순 계산해서 10배라 쳐도 200년은 잠들어 있어야 하는 건가.”
와일드 헌트를 보았기에 장담할 수 있다. 마탑은 강하고, 준비는 철저하지만, 이그나투스 없이 100년 넘게 서부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물론 이 몸도 준비를 게을리하지는 않았느니라. 결국 중요한 것은 사룡 모르테우스 아니겠느냐.”
“잠깐. 그나저나 아까 모르테우스가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어?”
“……오래전의 일이니라. 동족을 배신하고, 그런 주제에 미친 언데드가 되어버린 작자를 상대함에 주저라는 선택지는 없느니라.”
“그러냐.”
딱 잘라 말하는 이그나투스의 태도에 더는 무어라 물어보지 못했다.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만. 조금 전에 보니까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이며 절벽 너머로 떨어뜨리더만.
“아무튼 다시 본론을 돌아가자면, 이 몸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몸의 부재를 준비해 왔느니라. 구체적으로는 끝없이 되살아나는 언데드 군세, 혹은 사룡 모르테우스. 둘 중 하나는 완전히 봉인하는 식으로 말이니라.”
“완전한 봉인이라…….”
“으음. 던전의 관리자로서는 조금 듣기 불편한 말이었겠구나. 이 몸이 깨어날 때까지 버텨줄 봉인이라고 정정하마.”
던전이 악신의 하반신을 봉인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무수한 몬스터를 틀어막는 장치라는 걸 떠올린 걸까. 머쓱한 어조로 말을 덧붙이는 이그나투스.
“됐어. 대충 사정은 알겠으니까. 나를……자하브의 힘을 이용해 강화시킨 용아병도 그중 하나인 셈이겠네. 이그나투스 네가 잠들면 용아병을 지금처럼 생산하지 못할 테니, 소모품처럼 써먹는 전략에 금방 한계가 올 테니까.”
“……당대의 자하브는 영특하구나. 아니, 전투와 관련된 일에는 언제나 그러했지. 정답이니라. 한번 쓰고 버릴 수 없다면, 오래 쓸 수 있는 용아병을 만드는 것이 최선일 터.”
거기까지 말한 이그나투스가 내게서 잠시 건네받았던 오나홀을 다시 내밀었다. 힘이 없어서인지 한 손이 아닌 양손으로 조심스레 잡아서.
“그러니 부탁이니라. 강렬한 태양의 마나와, 이 몸의 불길을 품은 이빨과 비늘이 만나 만들어진 용아병이라면 분명 언데드들을 틀어막을 수 있을 것이니라.”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텐데.”
“물론, 용아병들이 언데드들을 상대하는 사이에 이 몸이 준비한 다른 안배로 모르테우스를 상대할 예정이니 걱정 말거라.”
“아니. 내 말은 다른 준비는 없냐는 질문이 아냐. 그 모든 것들로 충분하냐는 소리지.”
“…….”
입을 꾸욱 다문 이그나투스. 그런 그녀를 향해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위화감을 설명해 주었다.
“만약 오래 못 버틴다는 것을 알고, 이전부터 준비해 온 것이 있다면, 그런 걸 굳이 숨길 이유가 어디 있겠어. 이곳의 언데드들은 이성을 거의 잃었다면서. 당장 와일드 헌트가 시작될 때마다 시험해 봐야지.”
그래야 자신의 준비가 적절했는지, 부족한 점은 어디인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와일드 헌트를 상대하기 수월해짐에 따라 이그나투스 본인에게 가해지는 부담도 덜 해질 테니까.
하지만 이그나투스는 그러지 않았다. 언제나 그러하듯, 직접 날아가 브레스와 마법을 쓰고, 마탑 사람들에게 힘을 과시하며 와일드 헌트를 밀어냈으니까.
“지금껏 준비한 안배라는 것들에 큰 결함이 있는 거겠지? 이번 일도 뭐라도 하나 얻어 걸려라 하는 발버둥일 테고.”
“…….”
양손으로 오나홀을 쥔 채, 이쪽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이그나투스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린다.
“……정말. 자하브는 성가시구나. 천 년 전에도 지금도 이런 쪽으로는 감이 좋으니 말이야.”
난 자하브 아닌데.
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는 사이. 이그나투스가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 후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에녹. 그대의 말이 옳다. 이 몸은 정말 여러 준비를 했느니라. 드래곤 하트의 조각을 넣어 마도구를 만들기도 했고, 마나만 불어넣으면 되는 설치형 대마법을 100개 이상 중첩시켜보기도 했으며, 아예 이 몸을 대신할 존재를 길러내기 위해 제자를 들여보기도 했느니라.”
그리 말하며 메이킨 쪽을 바라보는 이그나투스.
스승의 이러한 사정까지는 몰랐는지 얼떨떨해하는 표정을 짓는 메이킨이었으나, 정작 이그나투스는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다.
“허나, 전부 실패했느니라. 드래곤 하트는 떨어져서도 본체와 연결되는 성질이 있더구나. 하여, 이 몸이 직접 인정한 자가 아니면 기껏 만든 마도구를 사용할 수 없으나…….”
“문제는 네가 몇십 년이 아니라 몇백 년 단위로 잠들어야 한다는 거겠지.”
“그러하니라. 이 몸이 인정한 이가 변절할지도 모를뿐더러, 설령 마지막까지 세상을 위해 헌신한다 해도 수명이 다하면 그 이후는 어찌할 방도가 없더구나.”
이외에도 너무 많은 마법을 중첩시키면 주변을 침식하여 이차원의 존재를 끌어당기기도 하고.
마탑까지 세워 비전을 전수했건만, 정작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제자는 너무나 적고 그나마도 단신으로 모르테우스를 몰아붙일 정도는 되지 않았다.
“……사실 이 몸도 크게 기대를 한 것은 아니니라.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발버둥 친 것에 불과하지.”
“모르테우스가 그렇게 강해?”
“아암. 언데드가 되며, 이지를 잃고 자연스레 마법 또한 다룰 수 없게 되었다고 하나……마지막 드래곤 로드이니라. 육신과, 변질된 죽음의 마력만으로도 이곳의 아이들 정도는 한입에 씹어 삼키겠지.”
“그런가.”
결국 서부의 몰락은 피할 수 없고, 풀려난 와일드 헌트가 제국을 종횡무진 헤집고 다니는 것 또한 확정된 미래라는 뜻.
세상에 이게 무슨 소리람.
그냥 소소하게 몸을 팔아서(?) 비자금을 마련하려던 생각이었건만……안락한 추방 라이프 같은 건 사실 없었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지.
“이그나투스. 내가 강화 용아병 제작을 돕는다 해도 확실하게 와일드 헌트를 막아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지?”
“그 정도가 아니라 강화 용아병으로도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니라. 물론, 자하브의 혈계능력과 이 몸의 속성은 궁합이 좋으니 어쩌면 예상외의 결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하지만 나는 자하브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지닌 것은 태양의 마나가 아니라 정순한 화속성 마나.
즉, 레드 드래곤인 이그나투스와 동일한 계열이다.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미친 연금술사가 만든 영약이 드래곤 하트에 비할 바는 아닐 테니 하위호환이라고 해야 할 터.
이그나투스가 기대한 혹시나의 가능성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나.
이 방법은 정말 쓰고 싶지 않았지만, 나의 추방 라이프와 제국의 수많은 생명이 걸려있지 않은가.
좋고 싫고를 가릴 때가 아니다.
각오를 다진 뒤. 진지한 목소리로 이그나투스에게 물었다.
“이그나투스. 드래곤은 마법의 조종이지?”
“과장 조금 보태자면, 이 몸은 현시대 모든 마법사들의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겠구나.”
“그럼 처음 보는 마법이나, 원리는 모르고 눈으로 외운 마법도 금방 펼칠 수 있겠네?”
“무슨 마법이냐에 따라 다르겠으나, 어지간한 것은 될 것 같다만……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그러는 것이느냐?”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그나투스. 그런 그녀를 향해 쓸개를 토해내 씹어뱉는 듯한 거부감을 억지로 억누르며 말했다.
“혹시. 타나토스의 침상이라는 흑마법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나를 처음으로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흑마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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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서부(4)
“혹시. 타나토스의 침상이라는 흑마법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미친 연금술사를 죽이고, 실험실에서 탈출한 이후. 살아남다 보니 어마어마한 수준의 흑마법 저항력을 지닌 나였으나.
그런 나조차 흑마법사 놈들을 상대하며 죽기 직전까지 몰린 적은 여럿 있었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함정에 빠지거나, 흑마법사 놈들이 다른 강자를 통해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지.
순수하게 흑마법에 당해 죽을 뻔한적은 없다.
단 한 번. 타나토스의 침상이라는 마법에 당했을 때를 제외하면.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마법 이름에 이그나투스가 움찔한다.
“……들어본 적은 있는 마법이니라. 허나, 들어보기만 했을 뿐. 이 몸조차 실제로 본 적은 없는 마법이거늘. 에녹. 그대는 방금 말한 것이 어떤 마법인지 알고 있느냐?”
“어. 직접 당해보기까지 했으니 잘 알 수밖에.”
“죽음의 신이 조금 특수한 신이라고는 하나, 어찌됐건 신의 이름이 들어간 마법 아니느냐. 권능의 일부를 담았거나, 적어도 권능을 닮은 마법일 터. 그걸 맞고도 이리 살아있단 말이느냐?”
“조금 사정이 있었거든.”
“대체 무슨 사정이 있었길래 비극의 밤에도 보기 힘든 마법에 당했단 말이느냐.”
“알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내가 칼립소 영지 출신이거든?”
“아, 들어본 적은 있느니라. 꽤나 최근까지 본인이 어떤 피를 타고났는지 모르고 있다고 하더구나.”
사실 아직도 내 혈통이 어디서 기인된 것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칼립소는 온갖 쓰레기들이 넘쳐나는 곳이라 말이지. 조금 폭력적인 유년기를 보냈다고 해야 하려나…….”
“으음?”
“칼립소의 흑마법사 지부랑 살짝 원수진 게 있어서 죄다 박살 냈거든. 그러다 마지막 발버둥인지 지부장 같은 녀석이 자신을 제물 겸 미끼 삼아 발동한 마법이 타나토스의 침상이었어. 이야. 그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당시의 일을 이렇게 써먹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
세로로 찢어진 눈을 멍하니 끔뻑이는 이그나투스.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손에 들고 있는 오나홀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물컹물컹한 것이 묘한 기분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당대의 자하브여. 칼립소의 흑마법 지부라고 했느냐?”
“엉. 문제라도 있어?”
“나름 마탑을 운영하는 입장인 만큼, 흑마법사 놈들의 행태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약간 더 알고 있느니라.”
“오.”
“이를테면 칼립소에는 흑마법사 지부가 없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니라.”
“……오?”
그럼 내가 상대했던 건 대체 뭐였다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칼립소에서의 모든 일이 내 망상일 리는 없잖은가.
가만히 이그나투스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녀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칼립소에 있는 것은 지부가 아니라 본부이니라.”
“본, 부?”
“옳다. 대륙에 퍼진 모든 흑마법사들의 고향. 모든 금지된 비의가 집중되는 곳. 신위를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들이 고인 응달……그것이 칼립소의 흑마법사들을 부르는 말이니라.”
“…….”
이건 진짜 몰랐는데.
애초에 흑마법사 놈들은 말이 통하는 대상이 아니라 심문이 별 의미 없었다지만.
그래도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충격인데.
동시에 조금 이해되는 것들도 있었다.
던전에서 만난 흑마법사나, 일전에 나를 노리고 자하브 성까지 찾아온 놈들.
녀석들은 나를 보고 고향의 파괴자라는 식으로 불렀었지. 당시에는 그냥 칼립소 출신 흑마법사 생존자인가 싶었는데……말 그대로 내가 놈들의 본부를 박살 냈다는 의미였나.
어안이 벙벙해져 눈만 끔뻑이는 것도 잠시. 나보다도 더 어이없어하는 이그나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흑마법사 놈들의 본단이라면, 신의 이름이 담긴 마법이 있을 수 있지. 놈들의 수장이 스스로를 제물 삼았다면 시전하는 것도 불가능을 아닐 것이야.”
“허어…….”
“다만, 거기서 살아 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만……아무래도 정말 모르고 있었던 눈치구나.”
“그야 흑마법사 놈들과는 대화가 성립하질 않으니까. 수준 낮은 녀석이라면 모를까.”
“이런. 확실히 그것도 그렇구나. ……뭐어.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기로 하자꾸나. 아무래도 에녹 그대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이 많은 모양이니.”
“……그러게. 일단 이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기로 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어차피 이그나투스를 통해 나중에라도 다시 들을 수 있는 내용 아닌가. 우선은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기로 했다. 당장 급한 건 이쪽 같으니까.
“우선은 종이가 필요한데.”
“메이킨. 가져와 주겠느냐?”
“네? 네…….”
자연스레 주변에서 어버버거리는 제자, 메이킨을 부려 먹는 이그나투스.
메이킨이 종이를 찾아 잠깐 나간 사이에 말했다.
“타나토스의 침상이 어떤 마법인지는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직접 당해본 입장에서 한번 설명해 줄게.”
“그게 더 좋겠구나.”
쉽게 말하자면 타나토스의 침상을 일종의 즉사 마법이다.
다만,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껙! 하고 죽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제대로 걸리면 저항의 여지조차 없이 그냥 죽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즉사 마법인 것이지.
“마법이 시전된 순간 항거할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와. 나는 흑마력에 저항할 수 있는 체질이라 버틸 수 있었지만……대부분은 못 버틸 거야.”
나와 함께 갇힌 몇몇 흑마법사 놈들의 최후를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놈들이 눈을 감고, 잠에 든 순간. 육신이 빠르게 나이를 먹더니, 순식간에 쭈글쭈글한 노인이 되어 숨을 거두었다.
잠자듯이 조용히 죽는 것을 호상이라고 하던가. 타나토스의 침상은 이를 위한 마법이었다.
아무런 고통도, 고민도, 두려움도 없다. 그저 잠에 들고 천수를 다하여 생을 마감할 뿐.
“근데 이건 수명이 100년 남짓한 인간이니까 몇 분만에 죽음에 이른 거잖아. 수명이 훨씬 긴 드래곤이라면 중간에 마법을 끊어 빠르게 필요한 수면을 보충할 수 있는 거 아냐?”
“……가능성은 있겠구나. 듣자하니 타나토스의 권능을 담은 것이 아니라, 이를 흉내 낸 닮은 마법이니 개량할 여지는 있을 터.”
그렇다. 타나토스의 침상은 즉사 마법이라면 즉사 마법이지만, 그 원리는 결국 시간의 가속에 있다.
우리는 흔히들 살아간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는 동시에 죽어간다는 말이기도 하니.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죽어가는 것들이라고도 부를 수 있으리라.
아마 타나토스의 침상을 처음 개발한 마법사는 이러한 부분에 착안하여 이름을 붙인 거겠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메이킨이 적당한 크기의 종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여, 여기 종이 가져왔어요 스승님!”
“잘했느니라. 어서 여기 있는 에녹에게 건네주거라.”
“네!”
메이킨에게 종이와 펜을 받아 들자마자, 기억 속의 풍경을 최대한 똑같이 따라 그렸다.
죽기 직전까지 몰렸던 경험이라 그런지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는 기억.
두터운 밀실과, 그 안에 그려진 복잡한 마법진을 옮겨 되는대로 전부 옮겨 그리고는 이그나투스에게 넘겼다.
조용히 빽빽하게 채워진 종이를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거 아느냐. 죽음의 신 타나토스는 신들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신이라는 것을.”
“뭐, 악신이라도 되는 건가?”
“그럴 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수는 있으나, 이는 물리쳐야 할 사악이 아니니라. 오히려 세상을 순환시키는 중요한 축이거늘. ……타나토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는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탐탁지 않아 했느니라.”
“엉?”
“이해하느니라. 어이가 없겠지. 하지만 사실이니라. 타나토스는 죽음은 완벽한 시스템이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 이를 위해서는 죽음을 지배하고, 마음대로 뒤집을 수 있는 자신의 존재는 불필요하다고 여겼느니라.”
“미친놈이잖아?”
“비극의 밤 이후로, 살아남은 신들은 북부의 만신전에 틀어박혔기에 신언을 들을 일이 없어서 모를 뿐. 사실 필멸자들의 눈에 비친 신들은 항상 미친 것들이었느니라.”
피식 웃은 이그나투스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타나토스는 자신의 존재를 불필요한 것이라 여겨 곧장, 스스로에게 죽음을 내렸느니라.”
“자살했다는 소리네.”
“허나, 죽음의 신이라 금방 부활해 버리고 말았다더구나. 아마 잠깐 잠들었다 깬 감각이 아닐까 싶으니라.”
“……설마?”
“그러하니라. 에녹 그대가 그린 마법진을 보아하니, 타나토스의 침상은 타나토스의 죽음과 부활을 마법적으로 해석한 것 같구나.”
기억나는 대로 그린 마법진. 이를 내게서 받아 든 이그나투스.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라면 이 몸이 어떻게든 뜯어 고쳐볼 수 있을 것 같으니라. 같은 마법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비슷한 효과는 나올 터.”
“그럼?”
“……놀랍게도 지난 몇백 년간 고민한 모든 방법들 중 가장 가능성 높은 방법이구나.”
멍하니 중얼거리는 이그나투스. 그런 그녀를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고마우면 보수는 2배로 줘. 일부는 금화 말고 보석으로 주고.”
“얼마든 그리 하마.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으니. ……다만, 아무리 나라도 100만 골드 어치의 금화와 보석을 추가로 구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느니라.”
“괜찮아. 여기서 기다리면 되지. 내가 알려준 마법이 잘 작동하는지도 확인해 봐야 하고.”
나중에 문제 생겼다고 뒷말 나오면 곤란하니, 이런 건 확실히 해야지.
“……아, 그리고 기존 계약은 파기해도 이건 좀 받아 갈 수 있을까?”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받아들며, 내게 다시 돌려준 오나홀을 흔들며 물었다.
판타지판 오나홀? 이걸 어떻게 참아. 한번 사용해 봐야지.
그런 가벼운 생각이었건만, 어째 이그나투스의 반응이 영 미묘했다.
“애초에 주려고 만든 것이니 괜찮다만……시료를 따로 채취할 것이 아님에도 그런 마도구가 필요한 게냐?”
“응?”
“에녹. 그대에게는 미색이 뛰어난 종자가 하나 있지 않느냐?”
“???”
의아해하는 내게 보란 듯이 턱을 까딱여 카렌을 가리키는 이그나투스.
그 말뜻을 눈치채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카렌은 오나홀이 아니야…….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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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서부(5)
이그나투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인 뒤. 그녀는 즉시 잠들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잠시 마탑에 머무르며 이를 옆에서 지켜보았고.
별다른 이유는 아니다. 이그나투스가 말했던 것처럼, 100만 골드에 달하는 골드와 현물을 재차 마련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고.
무엇보다 내 기억에 의존해 재현한 마법에 이그나투스가 자신의 미래를 걸고 있으나, 나 몰라라 하면서 돌아가기도 좀 그렇더라고.
하여, 푹신한 의자에 눕듯이 기댄 자세로 열심히 일하는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이그나투스의 본체가 들어갈 정도로 거대한 건물. 그 내벽을 꼼꼼히 감싸는 복잡한 수식들.
“어째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복잡해 보이는데?”
“어쩔 수 없느니라. 이 몸이 사용하기 위해서는 손봐야 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으니 말이니라.”
마찬가지로 내 옆에서 반쯤 누운 자세로 태연히 대답하는 이그나투스.
누가 보면 휴양지에 놀러 오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니, 나야 마법은 문외한이니 그렇다 쳐도 넌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뭘 모르는구나. 아카데미에서도 교수는 감독만 하지 실무는 수제자들이 하느니라. 하물며 마탑은 어떻겠느냐.”
“……마탑주인 너는 누워서 어디 잘못된 부분 없나 확인만 하고, 실제로 마법진 그리는 건 네 제자들이 한다는 소리인가?”
“바로 그러하니라. 아쉽게도 당대의 제자 중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아이는 없지만, 다들 고위 마법사이니 마법진 정도는 잘 그릴 것이니라.”
“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앞에서 열심히 작업 중인 마법사들을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외모. 경지에 오른 기사나 마법사는 노화가 느려지는 것을 감안했을때, 실제 나이는 훨씬 많으리라.
그런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외모의 마법사들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벽과 바닥에 마법진을 새기고 있었다.
심지어 가끔 실수하면 사형으로 보이는 이가 혼내기까지 했다.
“이게 맞나…….”
“마법사들의 유구한 전통이니라.”
이그나투스는 어깨를 으쓱였지만, 내 눈에는 악덕 교수와 대학원생 정도로만 보였다.
심지어 다 늙을 때까지 논문 통과도 안 시켜주는 악덕 교수 말이다.
실로 끔찍하기 그지 없는 풍경이었으나, 이그나투스의 모든 제자들이 마법진 작성에 동원된 것은 아니다.
일부는 마탑 운영을 위해 열외되었고, 일부는 순수하게 경지가 부족하여 작업에서 제외되었으니.
호다닥 뛰어다니며, 사형들의 심부름을 하는 메이킨이 그러했다.
“메이킨. 이 몸이 마실 음료도 같이 내오거라.”
“네? 아, 알겠어요 스승님!”
“항상 마시던 것으로 부탁하느니라.”
“항상 마시던……거요?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몇 년 됐다고 벌써 잊어버린 게냐?”
막내 제자를 향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을 보낸 이그나투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신성력으로 키운 박하 잎을 우려낸 차에 설탕 대신 시럽을 다섯 스푼 추가하고, 토핑으로는 크림과 초코칩을 3:1 비율로 올린 뒤, 가장 위에는 비스킷을 올려오면 되느니라.”
“……네!”
대체 평소에 뭘 먹는 걸까.
박하잎으로 우린 차에 시럽을 듬뿍 섞고, 크림에 초코, 비스킷까지 올리다니.
“아.”
이거 그건가. 뒤지게 달달한데다가 심지어 따뜻하기까지 한 민트초코에 바삭한 비스킷 올려놓은 거?
드래곤의 괴상한 식성에 몸이 절로 떨려왔다.
다만, 나 또한 목이 말랐던 것은 사실이기에 손을 까딱여 카렌을 불렀다.
“카렌카렌아.”
“네, 가주님.”
“난 우유로 가져와.”
“우유……말씀이십니까?”
“어.”
“……알겠습니다.”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카렌. 동시에 주변이 갑자기 웅성이기 시작했다.
“우유라면……역시 그건 뜻이겠지?”
“자하브잖나. 당연히 그런 뜻이겠지.”
“아이고……저 작은 곳에서 나올 게 뭐가 있다고.”
“그러게 말이야.저 정도면 마탑주님과 비슷한 수준이거늘.”
어쩐지 터무니없는 오해를 산 것 같아 황급히 덧붙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우유라는 건 소의 젖을 말하는 거다?”
“네?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만.”
“뭐야. 그럼 왜 그렇게 긴장한 표정을 지은 거야?”
“가주님이 질 수 없다는 듯이 복잡한 음료를 주문하실 줄 알고, 한 번에 외우려 집중하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에요.”
“……내 입맛이 그렇게 특이하진 않을 텐데.”
“예? 아뇨, 입맛의 문제가 아니라 복잡한 풍미의 음료는 귀족 사회에서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니……아, 혹시 모르셨습니까?”
“몰랐고, 알았어도 그냥 우유나 가져오라고 했을 거야. 내가 먹고 싶은 거 먹어야지, 남들 시선 신경 써서 뭐 해.”
어깨를 으쓱이자,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이고는 멀어지는 카렌.
그 모습에 이그나투스가 의외라는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사람 젖이 아니었다니…….”
“남의 집에 와서 그런 걸 찾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전전대의 자하브는 그랬다만?”
“…….”
“아, 참고로 전전전대의 자하브는 코카트리스의 피를 마시고 싶다고 했느니라.”
“선택지가 극단적인 걸…….”
“무얼. 젖 또한 본래는 피였으니, 사실 일관된 취향이니라. 그대는 아무래도 평범한 소의 젖을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지만. ……혹시나 해서 묻겠다만 젖소 수인 여성의 젖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
그건 솔직히 좀 궁금했기에 대답 대신에 질문을 돌리기로 했다.
“그나저나 손봐야 한다는 건 어떤 부분이야?”
“별거 아니니라. 본래 타나토스의 침상은 안락하지만, 절대적인 죽음을 선사하기 위한 마법. 그러나 이 몸은 중간에 깨어나야 하니, 마법이 정상 작동하는 선에서 의도적으로 틈을 만드는 것뿐이니라.”
“아하. 근데 원래는 흑마력으로 작동하는 마법인데, 이 부분은 괜찮은 건가?”
“음? 아, 마법에는 문외한이라고 했었구나. 사실 흑마법은 그 자체로 사악한 마법이 아니니라. 당연히 흑마력 또한 마찬가지고.”
“……그건 좀 믿기 어려운 말인데.”
누군가 사람을 죽인다면, 죽인 사람의 잘못이지 도구인 검에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껏 흑마법사와 싸우며 수많은 흑마법을 보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확언할 수 있다. 흑마력은 사람의 어두운 면을 자극하고, 흑마법은 잔혹한 방식으로 수련하는 마법이라는 것을.
실제로 흑마법의 대부분은 저주, 네크로맨시, 이차원 간섭 같은 흉흉한 것들뿐이고.
하지만 이그나투스는 내 말을 듣고도 희미한 미소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흑마법이 다른 마법과 다를 것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그저 선악의 구분 이전에 존재하던 것이라는 의미였지.”
“선악의 이전……?”
“애초에 선과 악의 경계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하는 것 아니더냐. 지금이야 대부분의 나라가 네크로맨시를 금지하지만, 비극의 밤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죽음을 다루는 마법이 금기가 아니었느니라.”
“뭐? 그럼 그때는 아무나 언데드를 부렸다고?”
“노예를 부리는 것보다 언데드를 부리는 쪽이 훨씬 효율적인데, 무턱대고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무엇보다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고대로부터 이어진 필멸자들의 숙원. 기본적인 선은 있었으나, 신들도 네크로맨시 그 자체를 문제 삼진 않았느니라.”
파이어 볼을 익히는 것이 불법은 아니다. 당연히 사용하는 것도 문제는 없고.
하지만 허가 없이 사람을 향해, 누군가의 재산을 향해 파이어 볼을 날리는 건 불법이다.
대충 그런 느낌으로 네크로맨시가 허용된 시기가 있었다고 말하는 이그나투스.
“이 몸이 어린 시절의 일이니라. 만약 그보다 훨씬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더 많은 것들이 허용되었을 터.”
“……무슨 말인지 알겠네. 세대를 거듭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많은 규칙이 생겼겠지.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금지된 마법이 처음부터 금지된 마법은 아니었던 것처럼.”
“옳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고, 또 올라가다 보면 맞닥뜨리는 것을 마법사들은 원류라고 하느니라.”
세세한 학파로 분화되기 이전. 고대 마법을 넘어, 원시 마법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들.
“저주는 공격 마법의 시초였느니라. 남을 해하고자 하는 마음 그 자체가 저주이고, 모든 공격 마법은 여기서 출발하는 거이니.”
“네크로맨시는…….”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죽음을 극복하려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니라.”
그 외에도 연금술, 시공간 계통 마법, 계약 마법 등등. 온갖 자질구레한 마법들은 그에 상응하는 흑마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이그나투스.
“아무 색이나 되는대로 섞다 보면 결국 물감이 검게 물드는 법. 흑마력 또한 마찬가지이니라.”
“그럼 흑마력에서 느껴지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성질은……마법이 원래 그런 거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필멸자의 눈으로 보면 아무리 친근한 신이라도 광기에 절은 존재라고. 그리고 마법은……필멸자의 몸으로 신위에 닿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니라.”
그래서 신의 이름을 집어넣은 마법이 하나같이 대마법 취급 받으며, 가장 고난이도에 속한다고 덧붙이는 이그나투스.
궁금했던 내용이긴 한데, 정작 이를 듣고 나니 한번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나씩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자니, 이그나투스가 고개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그대는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는구나. 내 장담하마. 역대 자하브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지성이니라.”
“아니, 갑자기 뭔…….”
난데없는 자하브 디스에 어이가 없었으나, 이어진 이그나투스의 정리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하게 생각하거라. 흑마법은 사악한 것이 아니라 야만적인 것이니라. 그리고 문명이 자리 잡고, 그만큼 제약으로 둘러싸인 지금 시대에 무절제한 야만은 불필요한 것이지.”
“이제 좀 알겠네. 즉, 흑마법은 지난 시대의 패배자고 흑마법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분탕종자라는 거지?”
“……꽤나 파격적인 비유지만, 얼추 그러하니라.”
어느새 메이킨이 대령한 입에 담기도 두려운 음료를 한 모금 홀짝인 이그나투스가 말을 이었다.
“뭐어. 비극의 밤 이후. 트라고데아의 축복을 받은 탓에 지금의 흑마법사들은 많이 변질되었지만 말이야.”
“예전에는 달랐다는 건가.”
“법을 어기고, 멋대로 사람을 납치해 인체 실험 재료로 삼으며, 새 마법을 시험해 보겠다며 마을 하나를 몰살시키는 건 예전부터 그러했느니라.”
“……달라진 부분이 있긴 해?”
“과거에는 필요에 의해 저지른 일들이라면 비극의 밤 이후에는 불필요함에도 그것이 더 비극적이라는 이유로 저지르는 경우가 많아졌더구나.”
“아.”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흑마법사들의 과장된 태도.
경지가 높아질수록, 그러니까 자신의 마력에 트라고데아의 신력을 많이 섞을수록 흑마법사의 정신은 변이된다.
말투는 연극투처럼 변하고, 효율이 아닌 흥미를 쫓기 시작하며, 스스로의 죽음마저 유희의 일종처럼 여기는 것.
“에녹, 그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난 시대의 꿈을 잊지 못한 분탕종자들이 이제는 자신의 의지로 분탕을 치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완벽히 이해했어. 갱생의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보이는 족족 죽이면 된다는 거지?”
“……그래. 다만,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그대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니라.”
“경고라고?”
“흑마법사들은 신위에 매료되어 스스로를 광기에 빠뜨린 자들. 그런 이들이 트라고데아의 신성에 휘둘려 한층 본질에서 멀어졌느니라.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소리겠지.”
“옳다. 그리고 에녹 그대는 흑마법사들의 본부를 무너뜨리고, 수장을 쓰러뜨렸느니라. 이루어질 수 없기에 더욱 집착하는 비원을, 천 년간의 성취를 박살 낸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느냐?”
“당연히 알고 있지.”
어깨를 으쓱이고는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흑마법사 놈들이 나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소리잖아.”
“……놈들의 집착이 상상 이상으로 지독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만, 그럴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구나.”
이그나투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광오하구나. 허나, 그것이 사람의 몸으로 태양을 담은 자하브라는 거겠지.”
“…….”
자하브 아닌데.
***
이후로도 시간은 훌쩍 흘렀다.
와일드 헌트를 한차례 밀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위험한 낌새도 없었고.
고위 마법사들이 이그나투스의 감독하에 뺑뺑이 치다 보니 타나토스의 침상을 개량하고 준비하는 과정 또한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렇게 내가 마탑에 도착한 지 열흘째 되던 날.
이그나투스는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와, 마법진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에녹. 이 몸이 잠에 들면 정확히 20시간 뒤에 깨어날 것이니라.
“생각보다 금방이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이 20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거든 대신 처리해 줄 수 있겠느냐?
“추가금만 제대로 지급한다면야.”
-후후. 다른 어디도 아닌 드래곤이자, 마탑주인 이 몸 아니더냐. 세월에 묻힌 다른 동족의 레어를 털어서라도 지불할 테니 걱정 말거라.”
“……아니, 그렇게까지는 좀.”
거대한 드래곤이 한참을 키득이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럼 내일 보자꾸나.
“잘 자라.”
짧은 농담과, 그보다도 더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건물을 나섰다.
내가 나오는 것과 동시에 문이 닫히며 완전한 암실이자, 밀실이 되는 건물.
나조차 흠칫할 정도로 막대한 마나가 집중되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두터운 벽 너머로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밖에서도 숨소리가 들리는 모양.
그나저나 자고 일어나면 덩치가 더 커지는 건가…….
이를 감안하고 건물을 준비했다고 들었지만, 잘 상상이 안 간단 말이지.
픽 웃으며 내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갔다. 20시간이면 나도 한 숨자고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
.
.
.
.
그리고 한밤중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괴성에 잠에서 깼다.
—————!!
사룡, 모르테우스의 울음소리였다.
“조졌네.”
와일드 헌트가 시작되었다.
지난 와일드 헌트로부터 고작 열흘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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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와일드 헌트
이그나투스가 천년만의 잠에 들고 한나절쯤 지났을 무렵.
—————!!
한밤중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괴성에 잠에서 깼다.
깊은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오는 듯한, 끝 모를 울림. 사람의 본능적인 공포와 거부감을 자극하는 마성.
딱 한 번 들어본 것이지만, 잊을 수 없는 소리기도 하다.
“조졌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의 울음소리는 사룡 모르테우스의 비명이었으니까.
일어나자마자 습관적으로 몸 상태를 확인했다. 딱히 이상은 없다. 짧게나마 방금까지 잠을 자고 있었던 덕분인지 오히려 컨디션은 만전.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문을 열고 바깥을 살펴보았지만.
“진짜 조졌네.”
저 멀리서 일렁이는 마력의 방벽이 보였다. 마탑에 설치된 대 언데드용 방호 마법이다.
혀를 차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거칠게 열리는 문.
콰앙!
“도련님!”
“일어났냐 카렌. 하긴. 방금 전의 소란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없긴 하지.”
“농담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뭐?”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만, 본래 한참 뒤에 일어나야 할 와일드 헌트가 열흘 만에 재개됐습니다! 분명 이상현상이라고요!”
“그렇겠지. 남부의 던전 역류가 1년 만에 다시 일어난 것처럼 말이야.”
“태평하게 대답하실 때가 아닙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아니, 될 수 있는 만큼은 싸워볼 생각인데. 이그나투스가 아침 먹고 잠들었으니 해 뜰 때쯤이면 깨어나겠지. 그때까지만 버티면 될 거야.”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오러를 순환했다. 약간 남아있던 잠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고, 정신이 또렷해진다.
덕분에 지금 상황 또한 선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렌은 조금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리고 가주님께서는 이 땅의 주인이 아니십니다. 이곳에서 굳이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는…….”
“카렌카렌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카렌을 불렀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말랑한 볼살과,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 이제야 좀 조용해진 카렌을 향해 말을 이었다.
“도망친다면 어디로?”
“……으븝?”
“우린 여기까지 텔레포트로 한 번에 왔어. 돌아가는 길 따위는 몰라.”
“읍! 으븝!”
“그래그래. 남아있는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에게 자하브로 향하는 텔레포트를 시전해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브읍?”
눈을 끔뻑이는 카렌. 이제 좀 침착해진 그녀의 모습에 낄낄 웃으며 손을 놔주었다.
“간단한 이야기야. 마탑은 절대 혼자의 힘만으로 와일드 헌트를 이겨낼 수 없어. 어쩌면 동이 틀 때까지 버티는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버티지 못할 수도 있겠지.”
“……안타까운 일이지만 자하브와는 관련 없는 일입니다.”
“생각이 짧구나 카렌아. 하긴. 거의 평생을 자하브에서만 살았다고 했지. 이참에 잘 기억해 둬. 남부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보자.
겨우 열흘 전에 와일드 헌트를 막아내느라 비축해 둔 자원 대부분을 소모한 탓이건, 이그나투스 없이는 힘이 부족하건, 그냥 운이 없건.
아무튼 마탑이 지금의 와일드 헌트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저 장벽은 부서지고, 모르테우스와 막대한 언데드들이 구덩이를 기어나와 대륙으로 쏟아지겠지.
당연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이그나투스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테고…….
죽은 이그나투스 또한 새로운 본 드래곤이 되어 와일드 헌트에 합류하리라.
한 마리로도 버거웠던 본 드래곤이 두 마리로 늘어난 와일드 헌트를 과연 제국이 막아낼 수 있을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 혈통 그 자체에 힘이 흐르는 이 세계의 특성상 황실의 무력은 막강할 테니까.
하지만 많은 피해가 있을 것은 확실하다. 약해진 자하브는 덩달아 휘청일 테고.
만약 황실마저도 와일드 헌트를 제때 막아내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 최악 중에서도 최악으로 손꼽히는 가능성이리라.
와일드 헌트는 막대한 죽음의 기운을 몰고 다니며, 그 탓에 희생자들을 언데드로 삼아 합류시키는 특성이 있다.
굳이 기사를 쓰지 않고 무생물인 용아병을 쓰는 것도, 사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여차하면 이그나투스 본인이 직접 나선 것도 그래서고.
즉, 막을 타이밍을 놓친 와일드 헌트는 대륙의 재앙이 된다.
본 드래곤이 앞장서고, 과거의 영웅들이 못다 한 전투를 이어가며, 마탑의 마법사들은 물론, 이를 막아 세우기 위한 현시대의 용맹한 자들까지 집어삼킨 죽음의 군단.
“대륙은 죽은 자들의 것이 되겠지. 산 사람들은 오히려 숨어 살아야 할 테고. ……자하브는 그런 상황을 버텨낼 수 없어.”
던전을 막으며 언데드 군세까지 막아낸다? 상성의 문제를 제쳐두고서라도 단순히 역량이 부족해 불가능하다.
“그리고 결국 4대 대공들이 틀어막던 재앙은 전부 풀려나겠지. ……그 뒤에는 죽지 못해 봉인 당했던 트라고데아가 깨어날 테고.”
천 년 전과 달리, 다시금 트라고데아가 강림한 대륙에는 그를 막아설 능력이 없다.
결국 이 세상은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터.
당연히 기껏 판타지 세상에 환생했으니, 여기저기 둘러보고, 비자금으로 챙긴 돈을 펑펑 써대는 추방 라이프를 보내겠다는 나의 꿈도 더는 이룰 수 없게 되겠지.
“……그건 너무 비약적인 상상이에요 가주님.”
“그렇지만도 않아. 아직 글을 읽을 줄 몰라, 카렌 네가 직접 읽어준 대륙의 역사. 그걸 들으며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아니?”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위태롭다. 그 생각밖에 안 들더라.”
전생. 지구에서의 삶에서 위기란 기껏해야 미친 강도를 만난다거나, 재수 없이 일어난 사고로 목숨이 위험한 정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최대한의 끔찍한 방향으로 상상해 보아도,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하는 정도?
다만, 핵무기에는 의지가 없고 이를 날려 보낼 수 있는 이들은 그 위험성을 잘 인지하고 있다.
반면, 이 세상은 어떠한가.
천 년 전에 망했어야 할 세상을 여러 영웅들과 신들이 힘을 합쳐 꾸역꾸역 살려놓은 것이다.
하나만 풀어져도 대륙을 망가뜨릴 수 있는 재앙이 4개나 있으며, 심지어 그중 동부에 봉인된 재앙은 풀려난지 오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행방이 묘연하지만…….
“그거 알아? 최근의 역사를 큰 흐름으로 살펴보면 칼립소 대공가가 멸문하고, 동부의 재앙이 풀려난 이후. 던전의 역류 간격이 짧아졌고, 와일드 헌트의 발생 빈도가 불규칙적으로 변했어.”
“……예?”
“물론, 이건 그냥 선후 관계일 뿐, 인과 관계는 아닐 수도 있겠지. 다만 아까도 말했듯이 최악을 염두에 둬보자는 거야.”
재수 없으면 대륙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재앙 중 하나가 풀려났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풀려난다?
“대륙 전체는 몰라도 일단 제국은 못 버틸걸.”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된 변화라 그런 걸까. 아니면 너무 오랜 시간 봉인된 재앙을 가까이에 두고 살아 무뎌진 걸까.
카렌은. 아니, 내가 지금껏 만난 이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멸망 위에 기적적으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하는 것 같단 말이지.
뭐어. 나라고 진지하게 모든 멸망을 막겠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일 없었으면 한다. 그거면 충분하다.
“…….”
내 말에 무언가 생각하는 바가 있는지 입을 꾹 다문 카렌.
그 덕에 평소보다 뽈롱한 카렌의 볼을 양옆으로 쭈욱 잡아 늘리며 히죽였다.
“그리고 카렌 네가 말했잖아?”
“……머를 말인가여?”
“귀족의 의무는 외적들로부터 사람을 지키는 것이라고.”
“아.”
눈이 땡그래진 카렌을 향해 평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세상에 정말로 복잡한 일은 얼마 없어. 복잡해 보일 뿐이지 사실은 간단한 문제거든.”
강대한 적이 쳐들어왔고, 새로 사귄 친구는 푹 잠들어 있다.
그리고 다행히도 다음 날 아침까지만 버티면 모든 게 해결된다.
짱짱쎈 투명 드래곤……은 아니지만, 푹 자고 개운해진 응애 드래곤이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하지만 괜히 겁을 집어먹고 등을 돌렸다가는 모든 게 무너질 수 있다.
“당연히 여기서는 어떻게든 버텨봐야 하지 않겠어?”
“…….”
카렌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렇게 평소와 같은 단정한 차림과 무표정으로 돌아와 고개를 꾸벅인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주인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는 하나, 확실히 시야가 짧았네요.”
“그래 그래. 알면 됐어.”
“허면 이제부터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마탑의 시스템은 가주님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만…….”
“일단 나가보고 생각해야지.”
용아병을 소모하는 것을 전제로 짜올린 메뉴얼과 직접 몸으로 싸워야 하는 나는 상성이 좋지 않지만.
이곳이 어디인가. 대륙의 유일한 마탑이다.
즉,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똑똑한 이들이 모여있다는 소리.
“마법사들이 뭔가 방법을 찾아주지 않을까.”
어깨를 으쓱이고는 방을 나서자, 자연스레 반보 떨어진 거리에서 뒤따라오는 카렌.
방을 나와 정문 쪽으로 향하자 점점 커지는 전투의 소음.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모르테우스의 울음소리와 누군가의 비명이 뒤섞인다.
분주하게 달리는 마법사들과 이를 서포트하는 아직 어린 제자들을 지나, 정문에 도착한 순간.
볼 수 있었다.
■■■■■■——!!
이그나투스의 마력이 느껴지는 이글거리는 사슬에 묶여 발버둥 치는 모르테우스와, 말 그대로 뼈가 부서져라 장벽을 두드리는 언데드를 마법으로 폭격하는 마법사들을.
뭐야. 생각보다 할만해 보이는데?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조금 위쪽. 타나토스의 침상 마법진을 설치할 때 봤던 늙은 마법사.
이그나투스가 없는 지금, 마탑의 결정권자나 다름없는 최고참 제자가 피를 토했다.
“쿨럭!”
그리고 모르테우스를 구속하던 사슬이 흐트러졌다.
대충 알겠네. 저 사슬은 이그나투스가 말했던 자신이 없을 때를 대비한 마도구이리라.
여러모로 조건이 까다로워 사실상 실패작 취급 받았다는 대 모르테우스용 마도구.
그리고 지금. 실패작이 왜 실패작인지 몸소 증명하고 있는 중이리라.
“쯧.”
혀를 차며 마탑의 외벽을 밟고 미끄러지듯이, 위쪽의 테라스 비슷한 곳으로 향했다.
“커흑! 누, 누구…….”
이그나투스의 대제자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평정을 되찾았다.
“……자하브 대공이셨습니까. 이곳은 위험합니다.”
“어딜 가든 위험할 것 같아서 말이야.”
어깨를 으쓱이고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보이는 전장. 아마 이곳이 사령탑이자, 마탑의 모든 마법을 조율하는 곳이겠지.
슬쩍 뒤를 돌아보자 실제로 복잡한 마도구들과, 대제자를 돕기 위해 분주하게 마력을 토해내는 다른 장로들이 보였으니까.
“시간이 없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저거. 얼마나 버틸 수 있어?”
“이 늙은이가 최선을 다한다면 1시간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혹시 그 마도구는 너 혼자만 쓸 수 있는 건가?”
그의 손가락에서 강렬한 열기와 마나를 내뿜는 반지를 가리키자 고개를 젓는 녀석.
“아닙니다. 스승님의 제자들 중 실력을 인정받은 이들은 모두 쓸 수 있습니다. ……다들 오래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말입니다.”
“과연. 짧게나마 모르테우스는 제압할 정도는 되지만, 부담이 너무 커서 사람이 못 버티는 건가.”
워낙 강렬한 마나의 흐름이다 보니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나도 알 수 있었다.
저 반지는 단순한 가늠좌, 내지는 열쇠 역할.
사슬을 만들어 내는 마도구는 이 마탑 그 자체라는 것을.
“그럼 다른 장로들이 번갈아 가며 마도구를 사용하는 건?”
“그리한다면 스승님이 깨어날 때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만……저희가 상대하는 것은 와일드 헌트이지 모르테우스가 아닙니다.”
“즉, 전력을 다하면 모르테우스를 동틀 때까지 붙잡을 수는 있지만, 다른 언데드들을 상대하지 못한다는 소리구만.”
“맞습니다.”
“다행이네.”
“……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는 그를 향해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장벽 열어. 전부는 아니고, 사람 한 명 드나들 정도로만.”
“그게 무슨…….”
“모르테우스를 제외한 남은 언데드들. 내가 막으면 되는 거잖아.”
“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자하브 대공이시라지만, 저만한 수의 언데드를 어찌 홀로…….”
“그거 알아? 양학은 자하브의 소양이라더라.”
……뭐, 나는 자하브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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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와일드 헌트(2)
장벽을 열라는 말에 기겁한 표정을 짓는 이그나투스의 대제자.
“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자하브 대공이시라지만, 저만한 수의 언데드를 어찌 홀로…….”
“그거 알아? 양학은 자하브의 소양이라더라.”
……뭐, 나는 자하브가 아니지만.
아무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꺼낸 말이긴 하다.
“솔직히 말해서 모르테우스는 좀 자신이 없어. 이그나투스에게 들어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마법은 사용하지 못하지만, 드래곤 하트는 여전합니다. 그 막대한 마력 전부를 사기(死氣)를 방출하거나, 거대한 육신을 강화하고 움직이는 데 사용할 뿐이죠.”
“역시 그렇지? 단순한 강함에는 나도 자신 있는데, 아무래도 체급 차이라는 걸 무시할 수는 없겠더라고.”
아무리 내가 나름 열심히 살아남았고, 오러를 익히며 한층 강해졌다지만 저 거대한 괴물과 드잡이질하는 건 좀 저어된다.
뼈만 남았다고는 하나, 한때는 드래곤 로드라 불린 고룡 아닌가.
하지만 다른 언데드들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생전에 대단한 영웅들이었다는 건 알지만……어찌됐든 인간 사이즈고 순수 신체 스펙은 나보다 못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이도 저도 못 하고 맨몸으로 와일드 헌트를 상대하게 될 거야. 그러니 뭐라도 해봐야지.”
“……알겠습니다. 자하브 대공 각하의 계획에 저희 마탑도 동참해 보죠. 저를 포함한 고위 마법사들은 모르테우스를 구속하는 데 집중하겠지만, 그 이하의 마법사들 전부가 대공 각하를 서포트할 것입니다.”
“그거 반가운 소리네.”
피식 웃으며 난간에 한쪽 발을 걸쳤다. 이대로 내려가려던 순간.
“그리고.”
“음?”
“자하브 대공 각하의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신의 역량을 넘어선 마도구의 힘에 괴로워하면서도 고개를 깊숙이 숙이는 대제자.
괜히 기분이 간질간질해져서 퉁명스레 내뱉었다.
“……귀족은 의무를 지는 자. 당연한 일이야.”
“……!”
대제자의 반응을 일부러 보지 않고 곧장 난간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간단한 낙법으로 무사히 착지하고는 장벽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밑에서 기다리던 카렌이 여전히 내 곁을 따르는 모습에 손을 휘휘 저었다.
“카렌카렌아. 네가 약한 건 아닌데 이번 일에는 부족해.”
“하지만…….”
“손 놓고 구경하라는 소리가 아니야. 카렌 너는 발이 빠른 편이잖아? 마법사들한테 포션이라도 받아서 나한테 던져. 그거면 충분해.”
“포션을 던지라니……대체 무슨 짓을 하시려는 겁니까 가주님.”
“보면 알아.”
어깨를 으쓱이고는 장벽의 앞으로 향했다. 사령부에서 확인한 마탑의 어디에서건 가장 잘 보이는 위치다.
퉁. 투웅!
쉴 새없이 장벽을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반투명한 마나 너머로 뼈만 남은 팔다리와 녹슬고 부러진 무기가 날아오다가 막힌다.
이제부터 저 모든 것이 내 목을 노리겠지.
“까짓거 한 번 해보지 뭐.”
일부러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전의를 다졌다. 그리고는 손을 적당히 흔들어 대제자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카렌이 그러했듯, 의아해하던 주변 마법사들의 시선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쩌저적.
차갑게 얼어붙은 비닐이 뜯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장벽의 일부가 스스로 갈라진다.
동시에 작은 틈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차가운 기운.
남부에서는 느낄 수 없던 추위. 그것도 사기를 머금은 인위적인 냉기에 시선을 앞쪽에 고정하며 입만 열었다.
“카렌아. 이번 전투에서의 첫 번째 명령이다.”
“……말씀하시죠.”
“이거 생각보다 춥네. 마법사들한테 보온 마법 좀 걸어달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그제야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챈 카렌이 굳은 표정으로 땅을 박찼다.
장로급이 아닌 그 밑. 메이킨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강한 이들이 모인 곳이었다.
카렌이 떠나는 것과 동시에 손가락 만하던 작은 균열이 순식간에 크게 갈라진다.
쩌엉!
요란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 생겨난 명백한 균열. 요구했던 대로 정확히 사람 한 명 지나갈 법한.
……달리 말하면, 사람 한 명이 틀어막고 있으면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의 사이즈였다.
“역시 실력은 좋구만.”
낄낄 웃으며 가장 먼저 균열을 통해 넘어오는 스켈레톤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오러를 순환시키되, 주먹에 집중시키지는 않은 상태. 힘을 아끼며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는데.
콰앙!
스켈레톤이 들고 있던 도끼의 옆면으로 내 주먹을 막아냈다.
도끼는 부서졌으나, 뼈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멀쩡했다. 살이 없기 때문인지 흩날리는 파편에 피해를 입지도 않았고.
다만, 내가 놀란 부분은 다 녹슨 주제에 의외로 튼튼한 무기도, 날카로운 파편 세례에도 멀쩡한 스켈레톤의 특성이 아니었다.
“막아?”
아무리 힘을 뺐다지만, 겉보기엔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스켈레톤이 내 주먹을 막은 것. 그 자체에 놀란 것이다.
“과연. 영웅들의 시체라는 건 이런 의미였나.”
부러진 도끼 자루를 내던지고 자신의 한쪽 팔을 뽑아 달려드는 스켈레톤.
분명 뭉툭한 뼈임에도 도끼의 형상이 엿보이는 것 같다. 그만큼 완벽한 자세라는 뜻.
녀석이 내리찍는 팔을 집중해서 바라보며……오러를 끌어 올렸다.
우웅-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문양이 팔을 휘어감고, 때마침 마탑에서 온갖 버프 마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죽음을 머금어 차가웠던 공기가 더는 아리게 느껴지지 않았으며, 시야에 비치는 모든 풍경이 조금 더 느려졌고, 근육에서는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힘이 꿈틀거렸다.
“흐읍……!”
짧은 기합과 자세를 낮춰, 스켈레톤의 안쪽으로 파고든다. 휘둘러진 팔이 어깨를 두드리는 감각이 들었으나, 타점이 어긋나 별다른 타격은 없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녀석의 두개골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우득.
약간 버티는가 싶더니, 간단하게 부서지는 머리.
머리를 잃은 몸은 여느 언데드가 그러하듯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이걸로 끝은 아닐 터. 아무리 머리가 부서졌어도, 와일드 헌트의 충만한 사기가 있다면 금세 되살아난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저 차갑기만 한 줄 알았던 죽음의 기운이 의지라도 가진 것처럼, 무너진 언데드의 잔해를 회수해 안쪽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빈 자리를 통해 다음 언데드가 머리를 비집고 달려든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네.”
애초에 주변의 이 사기는 모르테우스에게서 비롯된 것. 그의 의지가 깃들어 있는 것이리라.
피식 웃으며 다음 스켈레톤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콰앙!
두터운 대검의 옆면을 쳐내고, 비틀거리는 틈을 타, 허리춤을 걷어차려 했으나.
“큭!”
이런 것쯤은 흔한 일이라는 듯, 노련하게 자신 또한 몸을 꺾어 박투술로 대항하는 스켈레톤.
분명 내가 걷어차려 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녀석의 주먹에 얻어맞게 생긴 상황이었으나.
“그렇게는 안 되지……!”
억지로 허리를 꺾어, 날아드는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뒤.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 팔을 이빨로 강하게 물었다.
으득!
팔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신호 삼아 꺾였던 몸을 틀자, 내 이빨에 붙들린 녀석의 몸이 둥근 반원을 그리며 땅에 처박힌다.
-……!
텅 빈 눈두덩이 사이로 푸른 귀화가 일렁이며 당혹을 토해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콰직!
널브러진 녀석의 머리를 강하게 짓밟아 부수고는, 주인을 잃은 대검을 크게 휘둘러 균열을 넘어오는 다음 상대를 향해 휘둘렀다.
모든 스켈레톤이 방금까지 상대한 녀석들처럼 노련한 것은 아닌지, 이번에는 별다른 저항 없이 박살 난 녀석.
덕분에 균열 너머로 일렁이는 무수히 많은 귀화를 볼 수 있었다.
맹목적인 적의. 그 틈에 녹아들어 있는 약간의 사명감.
“그런가.”
저들은 분명 대의를 위해 싸웠고, 내일을 부르짖으며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도 다를 것이 없다.
모르테우스에 의해 눈이 흐려진 저들에게 보이는 것은, 분명 목숨을 걸어서라도 쓰러뜨려야 할 거악일 터.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죽어서도 이용만 당하는 신세지만.
그럼에도 분명 이 자리에 선 것은 영웅이라 부르기에 아깝지 않은 자들뿐이니.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와라.”
못다 한 전쟁. 그 상대가 되어주마.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언데드의 본능에 휩쓸린 건지.
여러 쌍의 귀화가 거칠게 타오르며 음산한 귀곡성 토해낸다.
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 스켈레톤들을 가로막으며, 쉴 새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부딪히는 기예. 첨예하게 대립하는 적의. 그리고 명백하게 갈리는 승패.
한 사람 겨우 통과할 법한 좁디좁은 공간이었으나……이곳은 분명 전장이었다.
***
“미, 미쳤어요…….”
재능이 있어 이그나투스의 제자가 되었으나, 아직 수련이 부족해 중위 마법이 한계인 메이킨.
그녀는 다른 전투 마법사들 사이에 껴서 방벽을 두드리는 언데드들을 향해, 모든 마력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마법을 시전하고, 또 시전하고, 그러다 마나가 부족해지면 이미 마나 포션을 억지로 마시며 다시 마법을 쥐어짜고…….
하나같이 힘겨웠지만, 그녀를 가장 힘겹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와일드 헌트를 상대하는 건 처음이 아니지만, 그녀의 스승 없이 상대하는 것은 처음이라는 점.
승리에 대한 불안이 메이킨의 정신을 몰아붙이는 도중. 그녀는 보았다.
마탑의 어디에서나 시야에 닿는 정중앙. 그 앞에 서서, 홀로 언데드를 유인하고, 수많은 언데드를 적수공권으로 때려 부수는 에녹의 모습을.
“무모해요……아무리 자하브라도 스승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버티는 건 불가능해요……애초에 자신의 일이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에녹의 뒷모습을. 그 어떤 마법보다도 굳건히 버티고 선 등을 보는 순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
에녹은 자하브의 가주다.
그리고 자하브는 이그나투스와 같은 대공 가문.
제국 최후의 보루이며, 메이킨과 같은 범인을 아득히 넘어선 힘을 지닌 이들.
……그리고 그 힘으로 기꺼이 스스로를 희생하여 의무를 다하는 고결한 존재였으니.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부족하지만 이그나투스의 제자라는 이유로 위계는 높은 메이킨이 무언가에 홀린 듯 외쳤다.
“다, 다들 멈추세요! 저희는 이제부터 언데드가 아닌 자하브 대공께 집중할 거예요!”
에녹의 존재야말로 그 어떤 방벽보다도 중요한 것이기에.
그리고 마탑 여기저기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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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와일드 헌트(3)
주먹이 휘둘러지고 뼈가 부서진다. 피는 튀지 않았으나, 녹슬고 부서진 무기의 파편이 그 대신이라는 듯이 바닥을 붉게 물들인다.
콰앙!
사람의 주먹에서 난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굉음. 실제로 어지간한 폭발계 마법과 맞먹는 위력에 스켈레톤이 들어 올린 방패를 중심으로 충격파가 퍼져나간다.
가장 먼저 몸으로 느껴지는 떨림. 뒤이어 바람과 함께 흙먼지가 흩날린다.
“이런!”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마법사들중 하나가 황급히 바람을 일으켜 흙먼지를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에녹의 전투를 지켜보며, 에녹에게 필요한 것들을 서포트해야 하는 마법사 입장에서 시야 가려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에.
그렇게 흙먼지가 옅어지며 드러난 것은…….
화륵!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언데드 특유의 부른 귀화가 아니다. 붉고 뜨겁게 타오르는……이그나투스의 브레스, 혹은 저 하늘 위의 태양을 연상시키는 화염.
전신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문양 위로 불길을 토해내는 에녹.
그가 방금까지 성문을 닮은 거대한 쌍 방패를 부수고, 드워프로 보이는 작지만 두터운 스켈레톤의 머리를 잡고 들어올린 중이었다. 그리고.
콰직.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는 것으로 부스러지는 두개골.
어두운 밤이기에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푸른 귀화가 에녹의 붉은 불길에 짓눌려 흩어지는 모습이.
-와아아아!
마탑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환호성.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에녹의 건재함은 기뻐해 마땅한 것이었으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에녹을 향해 온갖 종류의 마법이 쏟아져 내린다.
피로를 잊고 활력을 북돋는 마법. 전투 중에 생긴 자잘한 상처를 회복하는 마법. 죽음의 기운을 막아내기 위한 정화 마법. 장기간 사기에 노출되면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완화하는 마법.
그 외에도 직접적으로 에녹을 강화하는 마법이 차례로 갱신된다.
에녹의 피부가 돌처럼 단단해지며, 그 위로 투명한 실드가 둘러진다. 안 그래도 날카로웠던 반사신경과 동체시력은 한 단계 끌어 올려졌으며, 근육과 뼈에는 오러와 반발하지 않도록 정제해 낸 특수한 마나가 들어차며 육신을 보다 강건하게 만든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녹의 움직임은 처음보다 명백히 둔해져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에녹의 전투는 벌써 몇 시간째 계속되고 있으니까.
그래. 몇 시간이다.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그저 기계적으로 주먹을 휘두르고 상대를 정면으로 깨부순다.
바스라진 뼛가루는 흩날리는 사기에 휩쓸려 안쪽으로 돌아간다지만, 부서진 무기는 그러지 못했으니.
에녹의 뒤에는 어느새, 방해된다는 이유로 대충 던져둔 무기가 빼곡히 널브러져 있었다.
검, 활, 창, 도끼, 대검, 방패 등등. 온갖 종류의 무기가 에녹의 등 뒤에 늘어선 모습은 공동묘지의 묘비를 연상케 했다.
수백은 진작에 넘었다. 이미 천을 넘어선 부서진 무기는 그 이상의 스켈레톤이 에녹의 손에 부스러졌다는 증거이니.
말 그대로 일기당천이요.
아무리 일대일 상황으로 몰아갔다지만, 홀로 군대를 틀어막고 있으니.
만부부당이라 부르기 부족함이 없었다.
끝없는 결투이자, 홀로 치르는 전쟁. 놀랍게도 그 승기를 거머쥔 것은 에녹 자하브였다.
“대공……제국의 수호자…….”
그제야 마탑의 마법사들은 깨달았다. 자하브가 어째서 대공 가문인지.
사람의 몸으로 어리다지만, 드래곤인 이그나투스와 맞먹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이다.
하지만 감탄과는 별개로 에녹의 움직임이 둔해진 것은, 끊임없는 전투로 지친 것은 사실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걸까. 집사복을 입은 은발의 소녀. 카렌이 발 빠르게 움직이며, 마법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에녹을 서포트하는 중이었다.
작은 상처가 나면 포션을 뿌리고,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게 대충 던진 무기를 뒤편으로 이동시키며, 가끔 에녹이 요구하는 바를 다른 마법사들에게 전달하는 등.
에녹이 싸우는 동안, 카렌 또한 쉬지 않고 그를 도왔다.
덕분에 이제껏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만…….
환호하며, 보조 마법을 걸어주는 사이에도 냉철한 마법사들의 머리는 희미한 불안을 떠올리고 만다.
“……이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모르지. 다만, 우리보다는 훨씬 오래 버티실 수 있을 걸세.”
고위 마법사들은 전부 모르테우스를 제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중하위 마법사들만으로 방벽을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그런 상황에서 홀로 언데드의 군세를 감당하는 에녹의 무력은 분명 경이로운 것이었으나, 동시에 위태로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마나를 아끼고, 쥐어짜 에녹을 보조하는 것 말고는 말이다.
그렇게 슬슬 마나도 떨어져 가고, 회복 수단도 부족해진 마법사들 사이에서 불안이 퍼져나가는 사이.
에녹은 묵묵히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직 그것만이 자신의 의무라는 듯이.
어느새 균열 너머로 비집고 나오는 또 다른 스켈레톤. 날카로운 세검 한 자루를 들고 우아한 움직임으로 팔을 뻗는다.
순간적인 가속이 어찌나 빠른지 에녹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정도.
순식간에 잔 상처 여럿을 입은 에녹. 이대로 시간을 끌면 균열 너머로 또 다른 망자가 기어 나올 수도 있을 터.
에녹은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가만히 팔을 벌렸다.
무방비한 모습에 의아해하면서도 망설임 없이 목덜미를 향해 세검을 꽂아 넣는 스켈레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예리함을 잃지 않은 날붙이가 목젖에 닿는 순간.
짐승 같은 금안을 번뜩이며, 에녹이 몸을 틀었다.
목표를 잃은 세검은 목이 아닌 구릿빛 어깨에 박히고, 그나마도 단단한 근육에 막혀 나아가질 못한다.
칼에 찔렸다기보다는 몸으로 칼을 붙잡은 것 같은 모양새.
에녹의 입꼬리가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가 떠올랐다.
“잡았다.”
그 말과 함께 세검을 맨손으로 잡아채는 에녹.
뚜둑.
강인한 악력에 그대로 얇은 검신이 부러지며, 당황한 스켈레톤을 향해 머리를 박는다.
히죽이는 에녹의 이마가 스켈레톤의 잿빛 머리를 단번에 산산조각 낸다.
무너진 잔해가 순식간에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며 깨끗해진 전장. 그 너머로 새로운 스켈레톤이 모습을 드러낸다.
……에녹이 어깨에 박힌 세검의 반절을 뽑아낼 시간도 주지 않고.
사실 에녹의 육신에 박혀있는 무기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허벅지에는 단검이, 팔뚝에는 부러진 단창이,옆구리에는 깃이 삭아 없어진 화살이 박혀있었으니까.
등에 박힌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단 한 번도 뒤를 돌지 않았다는 증명이기도 했으나.
애초에 사람 몸이라는 건 무기를 주렁주렁 박아 넣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다행히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다. 마법사들의 보조 마법. 그리고 강철처럼 단단한 육신에 막혔으며.
그나마도 특유의 재생력과 회복마법의 영향으로 출혈까지 멈췄으니까.
고통은 있어도 생명이나 움직임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소리다.
허나, 문제는 상처가 남아있다는 것 그 자체.
마법사들이 계속해서 정화하고 몰아내는 중이라지만, 그 틈을 타 죽음의 기운이 침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차가운 냉기는 자하브의 불길을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약화시킬 터.
무엇보다 큰 문제는 와일드 헌트의 스켈레톤들이 평범한 언데드가 아니었으니.
지성을 잃긴 했으나, 그 육신에 쌓아 올린 기예는 어지간한 기사를 상회하는 것.
마탑의 마법사들이라고 용아병을 대신할 골렘을 만들어 보지 않았겠는가.
신참이라면 누구나 시도는 해본다. 그리고 상상 이상으로 뛰어난 스켈레톤들의 무위에 처참히 박살 나고는 깨닫는 것이다.
근접 전투에는 문외한인 마법사들의 눈에도 알 수 있을 만큼 세련된 무술.
이를 펼치는 신대의 전사가 얼마나 강인한지를 말이다.
척 봐도 실력자로 보이는 스켈레톤의 움직임과 달리, 에녹에게서는 이러한 체계적인 동작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본능과 힘. 그리고 약간의 운에 몸을 맡기고, 실낱같은 가능성을 향해 머리를 들이미는 짐승과도 같은 전투.
지금까지는 잘 버텼을지 몰라도, 에녹은 분명 언젠가 쓰러진다.
이러한 합리적 사고가 마법사들로 하여금 불안을 부추기는 것이었으나…….
불안 속에서만 차오르는 열기 또한 분명 존재했다.
인간의 형태를 한 짐승. 하지만 그 짐승은 이미 신대의 영웅들을 무수히 도살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근거가 없는 확신이자, 이성을 추종하는 마법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아.”
어느 한 마법사가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희망.”
밤은 어둡고, 동이 트려면 아직 한참은 남았다. 허나, 지상은 밝게 빛나고 있었으니.
화르륵!
에녹 자하브가 피워올린 열기. 그 희망에 마법사들이 홀린 것처럼 진작에 바닥난 마력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마탑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태양은 떠올랐다.
저 하늘이 아닌, 지상에.
***
움켜쥔 주먹이 무겁다.
숨을 토해내는 목구멍에서는 피 맛이 느껴지며, 거칠게 뛰는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다.
그럼에도 눈앞의 상대를 향해 휘둘러야 한다.
“아아아아아……!”
악에 가까운 기합 소리와 함께 뻗은 주먹이 쌍검을 든 스켈레톤을 향해 내질러진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육신은 제대로 된 속도를 내어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뼈만 남은 저들보다는 빨랐으니.
대응할 틈도 없이 머리를 부술 수 있었다. ……그랬어야 했다.
카앙!
기묘하게 휘어진 쌍검이 내 팔목을 양쪽에서 베어내려 든다.
마법사들이 걸어준 방어 마법. 그리고 다급히 손목을 꺾어, 검신을 쳐낸 덕에 살짝 시큰하고 말았지만.
중요한 것은 단번에 끝장내지 못했다는 것.
몸에 둘러진 실드와, 단단하게 긴장시킨 근육을 믿고 성큼 다가간다.
카직!
어느새 쌍월을 그리며 휘둘러진 검이 내 양어깨를 향해 노렸으나.
실드를 부수며 느려진 검 끝이 살갗에 닿는 순간. 빠르게 몸을 꺾어 베이는 각도를 흩트린다.
그렇게 근육을 갈라놓아야 했을 쌍검이 붉은 실선만을 남긴 순간.
쿠웅!
강하게 구른 발이 녀석의 발을 박살 낸다. 좁은 공간에서 거리를 좁혔기에 발을 놀릴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
발을 잃고 넘어지는 스켈레톤의 머리를 무릎으로 으스러뜨린 뒤.
다음으로 넘어올 스켈레톤을 대비했으나.
“……허?”
어째서인지 푸른 귀화만 균열 너머로 일렁일 뿐, 다음 스켈레톤은 나오지 않았다.
의아함에 잠시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어째서 다음 스켈레톤이 방벽의 균열을 통과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니미.”
고개를 한껏 꺾어야 담을 수 있는 거대한 머리. 주둥이는 길쭉하고, 머리에는 왕관을 닮은 뿔이 자라 있었으며.
눈이 존재해야 할 자리에는 내 몸뚱이보다도 거대한 귀화가 일렁이고 있었다.
“모르테우스.”
장로급 마법사들은 제 역할을 다하는 중인지 녀석의 몸은 타오르는 사슬로 빈틈없이 결박되어 있었다.
더 이상 공허한 울음소리를 내지도, 육중한 거체로 발버둥 치지도 않을 뿐.
……그것이 더 큰 문제였다.
생자의 것과는 너무나 다른, 하지만 분명 그 안에 지성이 깃든 것을 알 수 있는 시선.
완전히 미친 줄 알았던 사룡이, 수많은 언데드 군세를 막아낸 장벽을 손짓 한 번으로 부술 수 있는 괴물이.
서부의 재앙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요즘 들어 망나니 연기를 하며 생긴 습관이 튀어나왔다.
“뭘 봐. 눈 깔아라. 뒤지기 싫으면.”
-……?
뼈만 남은 모르테우스가 귀화를 끔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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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가 약속했던대로 가주가 되긴 했지만, 하는 일은 정말로 얼마 없었다.
하여, 힐다의 수업이 시작되기 전. 아침에 눈을 뜬 이후로 한 발짝도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뒹굴거리며 카렌에게 귀찮게 구는 도중이었다.
문득 곧 자하브로 돌아올 거라는 새 여동생. 유리아에 대해 생각난 것은.
그렇다. 사실 나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다.
정확히는 여동생이 하나 생겼다고 해야겠지.
내가 자하브에 들어오며, 제벨라라는 새 누나가 생긴 것처럼 유리아라는 여동생도 함께 생긴 것이다.
“카렌카렌아. 유리아는 어떤 애야?”
“유리아 아가씨 말인가요?”
“엉. 처음 만나는 거니까 조금 궁금해서 말이야. 역시 제벨라 누님 같은 분위기려나?”
“으음. 아무래도 유리아 아가씨는 제벨라 아가씨와 많이 다르시죠. 정확히는 제벨라 아가씨가 다른 자하브의 여식분들과 비교해도 좀 특이한 분이지만요.”
“아……제벨라 누님에게 그 부분에 관해서는 얼추 들어봤어.”
자하브의 혈계능력은 오직 남자에게서만 발현된다. 하지만 여자라고 하여, 완전한 일반인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적어도 자하브의 흔적 정도는 남아있으니까.
제벨라는 시간이 흐르며 피가 연해지자, 격세유전으로 자하브의 흔적마저 지워버리며 다른 가문의 피가 발현된 것.
그렇기에 자하브 안에서도 무척이나 특이한 경우였고, 그렇기에 전대 가주인 카인에게 학대당했던 것이다.
즉, 유리아가 제벨라와 크게 닮지 않았다는 소리는…….
“혹시 금발이니?”
“예.”
“막 피부도 갈색이고?”
“아, 그건 아닙니다. 피부색은 제벨라 아가씨를 닮으셨거든요.”
“제벨라 누님이랑? 혹시 둘의…….”
“예. 두분 모두 1부인과 전대 가주님의 사이에서 나온 분들이십니다.”
“아하.”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카렌이 창문을 열어 간단하게 환기를 하며 말을 이었다.
“유리아 아가씨는 무재를 타고나셨습니다. 혈계능력은 발현시키지 못하셨기에 신체 능력은 다소 떨어지셨지만……그래도 자하브의 무재를 고스란히 물려받으셨죠.”
“혈계능력은 없어도 재능은 유전되기도 하는구만.”
“정확히는 혈계능력 또한 물려받았지만, 발현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제벨라 아가씨와 가주님의 혼인이 약속되어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다른 가문의 혈계능력을 각성하셨지만, 몇번이고 시행된 검사를 통해 자하브의 직계임은 확실하셨으니 말이죠.”
“……아.”
그러고 보니, 제벨라와의 결혼 건도 있었네. 이것도 진짜 결혼식을 치르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번 생의 아버지마냥 자식만 싸지르고 사라지는 건 좀 그렇잖은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대충 알겠네. 무재가 있으니, 그걸 키워주기 위해 아카데미에 보낸 거구나?”
“예. 일단 명목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제 추측이지만, 조금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죠.”
“갑자기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네. 이리 와서 좀 자세히 말해봐.”
침대의 이불을 들어, 옆구리 쪽을 툭툭 두드렸다.
나와 침대를 가만히 번갈아 바라보던 카렌이었으나, 결국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 옆구리 옆에 카렌의 작은 엉덩이가 쏙 들어오는 모양새.
누우라는 뜻이었는데……이건 이것대로 괜찮네.
최소한의 망나니 연기도 계속하다 보면 는다는 걸까. 이젠 이것도 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너무 과하지 않은 선에서 카렌을 희롱할 수 있는 위치. 꼬리뼈와 허리의 중간쯤 되는 부분을 콕콕 찌르며 물었다.
“그래서? 카렌 네가 생각한 다른 이유는 뭔데?”
“아마 전대 가주님께서는 후계자 경쟁이 심화될 걸 예상하셨겠죠. 그래서 능력은 있지만 막내라 너무 어린 유리아 아가씨를 아카데미로 일종의 피신을 보낸 거고요.”
“흐음……피신이라.”
무슨 말인지는 알겠고,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만……설령 그렇다 해도 카인이 유리아를 피신 보냈을 것 같지는 않다.
카렌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지만, 카인은 제벨라의 혈통을 의심하고 가문의 악재로 여기며 상당한 학대를 감행했잖은가.
그런 사람이 자하브의 흔적이 보인다고는 하나, 제벨라의 친동생인 유리아를 아껴서 멀리 도망 보냈다는 건 조금 신빙성이 떨어진다.
내 생각은 카렌과는 조금 다르다. 아마……제벨라가 내보낸 게 아닐까.
지금껏 제벨라가 일하는 모습을 몇번 지켜봐서 잘 안다. 그녀가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유능한 사람인지.
아무리 반쯤 감금된 상태고, 한계치까지 몰려있다해도 불온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한사람 내보내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카렌의 언행에서 추측컨데 유리아는 여자임에도 자하브 가문 안에서 그럭저럭 인정받았던 것 같으니 더욱 쉬웠겠지.
……물론,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실제로 어땠는지는 제벨라나 유리아에게 물어봐야겠지.
“아무튼 대충 어떤 사람인지는 알겠네. 그럼 성격은 어때?”
“성격이요?”
한참을 고민하던 카렌이 무표정한 얼굴 위로 흐릿한 미소를 띄워 올렸다.
“아랫사람을 잘 챙겨주시는 분이었죠. 연민을 알고, 책임을 아는 분이기도 하셨고요. 다만, 약간 다혈질적인 면모가 있긴 합니다만…….”
“그 정도는 자하브 가문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다는 거지?”
“……제가 한 말은 아닙니다만, 대충 그런 느낌이긴 합니다.”
자하브를 모시는 케세프 가문의 일원으로서 자하브의 핏줄에 안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린 걸까.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게 속삭이는 카렌.
요는 기본적으로는 괜찮은 녀석이지만, 성격은 급하다는 건가.
그렇다면 제벨라 상대로는 실패했던 가주직 떠넘기기가 먹힐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건 내 망나니짓을 고깝게 볼 것이며, 성격이 급하다는 건 살짝 긁었을 때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적어도 별다른 욕심 없이 나를 가주직에 앉힌 제벨라와 달리 변수가 되어줄 것은 확실했으니.
……그래도 전생 현생을 다 합쳐 처음으로 생기는 여동생이란 말이지.
마구 애호하고 싶은 마음과, 마구 괴롭혀 들고 일어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머릿속에서 첨예하게 대립한다.
안 그래도 내가 정말로 귀족의 피가 섞였는지, 어째서 던전에 들어가면 컨디션이 좋아지는지로 생각할 게 많았던 상황이라 슬슬 머리가 아파온다.
하여 몸을 둥글게 말아, 눈앞에 보이는 카렌의 허벅지에 머리를 묻어보았다.
“흐앗! 갑자기 무슨……!”
“카렌카렌아.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구나…….”
“……아, 하긴 그럴 때가 되긴 했죠. 가주님도 자하브시니.”
음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인 카렌이 나쁜 계획이라도 꾸미는 사람처럼 작게 속삭였다.
“그럼 오늘 수업은 땡땡이치시겠습니까?”
“…….”
순간 확 마음이 동했지만, 한참의 망설임 끝에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어. 힐다 기다리겠다. 빨리 가자. 당장 급했던 계승식도 끝나고, 쉬운 내용이라면 혼자 책도 읽을 수 있게 됐으니, 오러 수련의 비중을 높인다고 했거든.”
“오.”
눈은 그대로면서 입만 벌리며 놀란 티를 낸 카렌이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이걸로 저를 사람들 보는 앞에서 번쩍 들어 올렸을 때의 앙금은 씻어내도록 하죠.”
“그거참 고맙네. 근데 카렌아. 원래 이런 거 신경 쓰는 사람이었니?”
“제가 케세프 가문 출신이고, 가주님의 전속 시종이긴 합니다만 어엿한 한창때의 레이디입니다.”
“레이디?”
카렌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편안함이라는 말은 분명 이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리라.
“……벗으면 굉장합니다.”
“그럼 벗어보던가.”
“큿! 가주님의 충실한 집사에게 수치를 주실 생각이십니까!”
“벗지도 못할 거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데…….”
너무 티 나는 거짓말이었다.
***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지만, 슬슬 사람들이 보내오는 존경의 눈빛에 익숙해질 무렵.
하지만, 아직 내가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는 감도 못 잡고있는 도중.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이 찾아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자하브 대공 각하. 아카데미의 교관 역을 맡고 있는 델빈이라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실습을 허락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 정도야 뭘. 듣자하니 아카데미 재학생 중에 내 동생도 있다면서?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렇다. 아카데미에서 교관들과 함께 학생들을 보내온 것.
대부분의 일은 제벨라 선에서 해결되었지만, 아카데미는 제국의 미래. 그런 곳에서 수십의 학생을 믿고 실습 보냈는데 얼굴조차 안 비칠 수는 없잖은가.
오랜만에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비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좀 삐뚜름하게 앉긴 했지만.
약간 떨어진 곳에서 힐다가 이쯤 되면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의 시선을 보내왔지만, 애써 무시하며 눈앞의 학생들을 살펴보았다.
나이는 대부분 10대 중후반. 하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꽤나 훌륭하다.
마법사 쪽은 정확히 알아보기 어렵지만……기사 지망생들은 대부분 평기사 수준은 넘었다.
물론 검에 인생 몰빵한 힐다에 비할 바는 아니지.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자하브를 보필하기 위해 온갖 지원을 받으며 비밀병기 비스무리한 것으로 육성 받은 카렌과 비슷한 수준은 몇몇 보인다.
이 정도면 경험이 부족하고, 단장 노릇을 할 특출난 존재가 부재할 뿐이지 어지간한 정예 기사단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전생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아무리 싸우는 방법을 가르치는 아카데미라지만, 학생을 던전에 밀어넣는다는 것에 약간 거부감이 있긴 했는데…….
얕은 곳이라면 던전에 들여보내도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조금 더 자세히 늘어선 학생들을 살펴보았다. 기세를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살펴볼 요량으로.
당연한 말이지만, 전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한 명. 단 한 명만큼은 초면이면서 묘한 친숙함이 느껴졌다.
홀로 빛나는 것처럼 밝은 금발. 피부는 창백하다시피 하얗지만 그것이 유약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니.
짝다리를 짚고 선 다리, 반항적인 것을 넘어 위압적인 눈빛, 그리고 전신으로 뿜어내는 사나운 기세까지.
마치 인간의 법도를 모르는 짐승을 아름다운 여인의 형태에 가둬둔 것 같은 존재.
하지만 제벨라를 닮은 연보랏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저게 바로 유리아, 제벨라의 동생이자 내 새 여동생(아님)이라는 것을.
첫 만남인데 무어라 말부터 꺼내는 게 좋으려나. 그런 내 고민을 덜어주겠다는 듯이 유리아 쪽에서 먼저 나섰다.
절그럭. 쿵!
여리여리한 자신의 몸보다도 큼직한 대검이 알현실의 바닥에 박힌다.
동시에 유리아로부터 오러가 들끓으며, 목소리에 실린다.
“야.”
“……야?”
“한판 뜨자.”
“???”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끔뻑이는 사이.
기겁한 교관 중 한 명이 유리아에게 달려가 그녀를 말리려 했다.
“유리아 학생. 아무리 이곳이 본가라도 공적인 자리고, 제국에서 인정한 대공 각하 앞에서 그러한 언동은…….”
퍼억!
“크흑!”
“시끄러워! 그냥 닥치고 지켜보기나 해! 내가 다른 연놈들한테 시달릴 때처럼 말이야!”
그리고 놀랍게도 유리아가 휘두른 주먹에 얻어맞고 멀리 튕겨 나갔다.
힘이 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오러의 사용법이 너무나도 정교하다. 이제 막 오러를 익히기 시작한 나로서는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들 정도.
물론, 방금 튕겨 나간 교관은 신참인지 아니면 다른 전형이 있는 건지 다른 교관에 비해 좀 약해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교관 아닌가. 조금 다르지만 선생 비슷한 사람이란 말이다.
그런 사람을 망설임 없이 줘패고는 내게 삿대질을 할 줄이야.
기겁하는 사이. 쓸데없이 쩌렁쩌렁한 유리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판 떠서 내가 이기면 언니는 놔주고 나랑 결혼해.”
“누가 들으면 내가 제벨라 누님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줄 알겠네.”
“흥! 시치미 떼기는. 제벨라 언니 같은 사람을 너같이 발정 난 짐승이 가만 놔둘 리 없잖아?”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겠는데 일단 아무 일도 없었거든? 그나저나 유리아야. 내가 이기면 어쩌려고 그런 조건을 내거는 거냐.”
“그거야 간단하지.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줄게. 너한테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
이건 진짜 다른 사람이 들으면 내가 무슨 근친에 미친 사람인 줄 알겠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물론이요 교관들, 심지어는 형식적으로 세워둔 자하브의 기사들마저 웅성이고 있었다.
하긴. 당연한 일인가.
돌연 교관에게 손찌검을 하고, 너무도 가볍게 근친 야스를 하니마니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내 어설픈 망나니질은 갑질의 연장선상이건만, 유리아의 난장은 진짜 앞뒤 가리지 않고 들이받는 것에 가까웠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칼립소에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사라진 줄 알았던 내 안의 유교 드래곤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든다.
일단 넌 궁디팡팡 확정이다.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비스듬하게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냐. 이 오라비랑 한번 놀아보자꾸나.”
“바라던 바야.”
실력의 차이는 확연하다. 어디까지 힘 조절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주먹을 말아쥔 순간.
문득 깨달았다.
유리아가 나보다 약하고, 내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강해진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격차를 가늠하긴 힘들지만……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닐 터.
심지어 유리아의 조건 대로라면 이기건 지건, 유리아 본인은 무조건 나랑 순수한(아님) 자하브 만들기 풀코스를 조져야 한다는 사실을.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리아의 눈매와 입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카렌을 관찰하며 다져진 눈썰미가 잡아내 버렸다.
마치 웃음기라도 참는 것처럼 어색하게 틀어진 입가를. 기대된다는 듯이 묘한 열망으로 반짝이는 동공을 말이다.
“이런 씹.”
내 여동생이 이렇게 미친년일 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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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흑마법사들을 때려잡은 이후. 필립은 챙겨온 비상 물품들로 부대원을 치료하고, 힐다와 칼튼은 연구실을 뒤적이는 사이.
나는 흑마법사들의 시체를 한데 모아두고 있자니, 카렌이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한 명쯤은 살려두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요 도련……가주님?”
“카렌카렌아. 그냥 편하게 불러. 나는 도련님 소리도 듣기 좋더라.”
“안 됩니다. 이미 가주님께서는 자하브 가문의 주인이시고, 제국에 셋 뿐인 대공이시잖아요. 호칭은 똑바로 해야 해요.”
“쓰읍. 난 좀 서먹해진 것 같아서 아쉽단 말이지.”
“……명령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아니, 이런 걸로 명령할 것까지야. 카렌 네 말이 맞겠지. 난 이런 쪽은 아무래도 잘 모르니 말이야.”
정식으로 계승식을 마치고 가주가 되었기 때문일까. 묘하게 고분고분하단 말이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카렌이 대충 뭉쳐놓은 흑마법사 시체를 발끝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조금 아쉽네요. 만약 한 놈 정도 살려두셨다면 뭐라도 정보를 캐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세상에. 카렌아. 그런 말랑한 얼굴로 고문 같은 것도 할 줄 아니?”
카렌의 볼따구를 양옆으로 주욱 잡아 늘리자, 얌전히 내게 불을 내어준 카렌이 무감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하는 게 아니라 할아버님이 하는 거예요.”
“아하. 뭐어, 너무 아까워하지 마. 설령 세 놈 모두를 살려서 심문한다 해도 제대로 된 정보는 얻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가요? 할아버님의 실력은 꽤 대단하십니다만…….”
“칭찬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아론이 누구 하나 고문하는 일은 잘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지.”
“가주님의 명으로 인한 것이라면 케세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 될 거예요.”
“어……그건 그것대로 재밌어 보이는 이야기지만, 애초에 흑마법사 상대로는 애초부터 전제가 잘못됐어.”
“예? 그게 무슨…….”
“잘 모르는 거 보니, 카렌 너는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보네.”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나마 머리가 멀쩡한 대장격 흑마법사의 시체를 가리켰다.
“너도 마지막에 봤지? 갑자기 말투가 연극체로 변한 거. 이게 보통 대장격 흑마법사들이 그렇게 말투가 오락가락하더라고.”
“맞습니다. 비극의 신의 신력을 받아들인 부작용이라고 들었습니다.”
“응? 그게 그런 이유였어……?”
지금껏 흑마법사는 여럿 잡았지만, 왜 그런지는 별로 궁금해한 적 없었기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일단 머릿속에 넣어둔 뒤. 하던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게 비극의 신 때문인지 그냥 미친놈이라 그런 건지 몰라도, 확실한 건 말투와 함께 머리도 오락가락한다는 거거든.”
“그럼…….”
“어. 정보를 빼내려 해도 헛소리만 하거나, 어찌어찌 정보를 알아내도 거짓이거나 함정인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경우에 따라서는 정보를 실토하는 척 이쪽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던 놈도 있었고.”
그러니 흑마법사와는 말을 섞을 이유가 없다. 말을 섞더라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일단 죽이고, 시체나 연구실 같은 곳에서 정보를 알아내는 게 훨씬 나아. 그래서 이렇게 바로 빠져나가는 대신 여기저기 뒤져보는 거잖아.”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겁니다만.”
“응?”
한데 모은 흑마법사들의 시체를 뒤적이며 대충 답해주던 도중. 카렌이 조심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혹시 흑마법사를 상대해 보신적인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 건가요. 너무 능숙하기도 하시고, 어쩐지 놈들이 가주님을 알아보는 것 같기도 해서 말입니다.”
“아……말 안 했었나.”
머리를 긁적이며 아무것도 없는 시체 하나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사실 칼립소에도 흑마법사 지부가 하나 있었거든.”
“예, 뭐. 칼립소라면 하나 있을 법도 하죠.”
“근데 좀 뭐랄까. 거슬려서? 자꾸 충돌해서? 응. 아무튼 그래서 쳐부쉈어.”
“???”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는 카렌.
하기야. 내가 좀 헷갈리게 말하긴 했지. 알고는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결국 내가 어린 시절에 흑마법사 조직에 실험체로 팔려나갔다는 이야기까지 해야 하지 않는가.
내가 사실 자하브의 사생아가 아닌 짭이라는 사실이 알려질 수도 있고……그게 아니더라도 당시의 기억은 내 가장 깊은 상처다.
지금도 흑마법사만 보면 발작을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어린 시절의 일을 말하는 건 아무래도 거부감이 든단 말이지.
스스로 약점을 밝히는 건 칼립소에서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으니까.
내가 다른 흑마법사의 시체 하나를 더 수색하는 내내 눈만 깜빡이던 카렌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으……그러고 보니 가주님께서는 칼립소에서도 자신만의 조직을 꾸리셨었죠. 가장 낮은 곳의 주인이라는 게 설마…….”
“응? 조직이라고 할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지만, 같이 사는 친구들이 좀 있긴 했지.”
일종의 고아팸이라고 해야 하려나.
쉴 새 없이 대륙의 거물급 범죄자가 유입되고, 그 이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칼립소에서 고아는 취약계층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존재하는 이들.
그렇기에 생존을 위해 자기들끼리 뭉치는 경우가 많았고, 막 흑마법사 조직에서 빠져나온 시기의 나 또한 자연스레 고아팸에 합류한 것이다.
고아팸의 가입 조건은 부모가 없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을 것이니까.
그러다 시간이 지나며 다들 머리가 굵어지며 아이라 부르기 힘들어졌을 무렵.
누군가는 범죄 조직에 들어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용병의 일원이 되기도 하고……누군가는 마음이 맞는 몇몇과 함께 새로운 모임을 만드니.
내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같이 영차영차 힘내며 집도 사고 그랬는데…….
정작 집이 생기고 나자, 어렸을 때부터 사이좋았던 놈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더라.
어떻게든 중재시키려 해도 내가 얼굴을 비추는 순간 입을 싹 다물어 버리니 중재도 힘들었고.
나 혼자 남자라 내게는 말 못 할 갈등이 있겠거니 넘어갔지만…….
그러다 너무 크게 다투는 바람에 다 같이 살던 집이 박살 난 이후.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어째서 여초 직장에 남자 혼자 다니는 게 헬이라는 건지! 누나들 사이에서 자란 막내아들이 여자만 보면 진저리를 치는지……!
결국 각자 따로 살기로 하고, 마침 찾아온 아론과 카렌을 따라 칼립소로 오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적당히 생략할 건 생략하고, 숨길 건 숨기며 말한 내 이야기를 들은 카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런 걸 조직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적어도 다른 흑마법사들은 그렇게 여겼겠죠. 과연. 이해됐습니다. 새로 생긴 조직을 견제하려다가 가주님께 역으로 당한 거군요.”
“아니? 그냥 방해라서 내 쪽에서 보이는 족족 죽인 건데?”
“…….”
입을 꾸욱 다문 카렌.
사실이기도 하지만……솔직히 말하자면 포악한 전투광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 있었다.
나름 효과가 있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카렌. 무표정은 여전하지만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속으로 자축하는 사이. 간신히 진정한 카렌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럼……소리 없는 자들의 종말이라는 건 또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도 별거 아냐. 흑마법사 놈들이 쫄리니까 암살자 길드를 동원해서 날 죽이려고 하더라고.”
“설마……?”
“응. 그래서 암살자 길드도 같이 쳐부쉈어.”
“…….”
“아잇. 여기도 아무것도 없네.”
괜히 투덜대며 마지막 시체를 내던졌다. 이쪽은 허탕인가.
어째서인지 카렌이 멍하니 굳어있길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다.
흠. 기회인가.
볼따구는 이미 많이 만져봤으니 패스한다. 그 대신 카렌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대로 번쩍 들어 올리며 어린아이와 놀아주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높다 높아~”
“…….”
아무리 그래도 이건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무감각한 카렌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가주님. 내려주세요. 제 키가 작을지언정 나이는 그리 어리지 않습니다!”
“싫은데?”
“이익……!”
마구 발버둥 치는 카렌. 하지만 이미 완전히 몸이 들어 올려진 상태에서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한참을 저항하다가 결국 축 늘어지는 카렌.
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표정. 하지만 묘하게 원망이 서린 눈빛에 낄낄 웃던 도중이었다.
연구실을 뒤져보다 무언가 발견한 걸까. 뒤에서 힐다가 살짝 신난 어조로 외쳤다.
“여기 보세요 가주님! 해석이 필요할 것 같지만 뭔가 중요해 보이는 서류를 발견……가주님? 그리고 카렌 양?”
도중부터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는 힐다.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비비적거리길래 그제야 카렌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발이 땅에 닿았음에도 가만히 멈춰선 채……아니, 정확히는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카렌.
수치스러움에 바들바들 떠는 그녀를 지나쳐 어벙하게 입술만 뻐끔대는 힐다가 쥐고 있는 종이 뭉치를 받아들었다.
아무래도 칼립소가 아니라 다른 지역이라 그런지 내가 모르는 암호체계를 사용하고 있었었다.
달리 말하면 암호화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라는 소리.
“잘했어 힐다. 챙길 것도 챙겼고, 구할 사람도 구했으니 이제 돌아가자고.”
“네? 아, 네. 그으……카렌 양은…….”
“금방 회복하겠지 뭐.”
어깨를 으쓱이고는 왔던 길을 역으로 거슬러 나가기 시작했다.
다들 눈치를 보면서 카렌을 피해 따라서 움직이던 도중.
뒤에서 카렌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계승식 준비로 쌓여있는 업무가 많았었죠.”
“뭣. 아니, 그런 건 제벨라 누님이 대신 하기로 했잖아!”
“흥! 저는 원칙대로 일할 뿐입니다.”
카렌이 치사해졌다.
……뭐, 나 때문이지만.
***
햇살이 내리쬐는 밝은 창가. 하지만 바깥의 풍경은 볼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일하던 뚱뚱한 중년의 사내가 흠칫 몸을 떨었다.
“상단주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허허.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잠깐 좀 쉬고 싶으니 나가 주겠나?”
“예? 아, 알겠습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나가는 비서. 그 모습을 확인한 중년인의 푸근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던전 진입조가 전멸했나.”
그리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뒤의 어둠에서 펼쳐지는 것은 동지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금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청년. 에녹이 사납게 웃으며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겼다.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발동되는 기억의 전이.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던 상단주……아니, 상단주로 위장한 흑마법사가 한탄했다.
“결국 칼립소의 바깥으로 빠져나왔는가. 그나저나 저 복장은……자하브? 허어. 그런가.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고개를 끄덕인 흑마법사가 떨리는 손으로 차를 홀짝였다.
“하기야. 우리의 고향을 부순 이가 보통 인물은 아니겠지. 아무리 업보가 목을 졸라와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니. 이제야 이해되었다. 최근에 자하브의 사생아가 가주가 되었다고 하던가.”
에녹이 실험체 출신이라는 걸 알고 있던 흑마법사들마저 너무도 자하브스러운 에녹의 모습에 착각하고 말았다.
그냥 고아가 아니라 자하브의 사생아를 데려와 실험체로 삼았던 거라고.
실험 과정에서 잠들어 있던 피가 각성한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착각이지만 이를 바로잡아 줄 연금술사는 진작에 에녹의 손에 죽었다.
“허나 태양이라 한들 약점 없는 존재는 없는 법. 그 어떤 불길도 영원히 타오를 수는 없고, 그 어떤 빛도 언젠가는 어둠에 수렴하니.”
과거의 트라우마를 애써 억누른 흑마법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원수여. 네 정체를 알았으니, 이것으로 네 심장을 찌를 비수를 만들 수 있게 되었음이라.”
제국 전역에 흩어진 흑마법사들이 같은 기억을 공유받고, 은밀한 협력을 시작했다.
오직 자하브를 죽이기 위한 무기를 주조하기 위하여.
……그래. 자하브가 아닌 이에게는 별다른 효과가 없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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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 숨어있던 흑마법사들을 쓰러뜨린 뒤.
자하브 성으로 돌아온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급하게 준비한 것치고는 성대한 개선식이었다.
“와아아! 영주님이 돌아오셨다!”
“던전의 흑마법사를 해치우시고 돌아오셨다!”
“제 아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님이라면 한번 대드릴 수도 있어요!”
“이런 미친! 자네는 남자잖나!”
“하지만 영주님은 자하브신데?”
“일리가 있군.”
사방에서 들려오는 나에 대한 찬양. 중간중간에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에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이게 다 뭔지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
머리를 부여잡으며, 어쩐지 가장 우쭐해하고 있는 힐다에게 물었다.
원래라면 카렌에게 물었겠으나……지금은 살짝 토라진 모양이니까.
“힐다 경. 표정 좋아 보인다?”
“흐흐. 수업 첫날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출세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제가 줄을 잘 서긴 한 모양입니다. 벌써 이렇게 명예로운 자리에 설 줄은 몰랐습니다.”
“어이, 칼튼 경. 당신 딸래미 좀 봐. 이거 맞아?”
“어흐흑! 드디어 자하브에……그래! 피가 어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 이제야 정상화가 됐을 뿐! 앞으로 더욱 잘 보필해야…….”
“…….”
슬쩍 돌아본 칼튼은 어찌나 감동한 것인지 대성통곡 수준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래서야 내 말이 들릴지도 않겠네.
중년 아저씨가 눈물 콧물 질질 짜는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결국 한숨을 푸욱 내쉬며, 주변의 찬양을 한껏 즐기고 있는 힐다의 귓가에 속삭였다.
“알았어. 이제 즐기는 건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좀 설명해 줘 봐. 우리 분명 제대로 된 발표도 뭣도 없이 다짜고짜 계승식 도중에 박차고 나와 던전에 들어간 거잖아.”
“아, 그게 신경 쓰였던 거군요. 줄곧 같이 움직였으니, 저라고 주군이 모르는 걸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한가지 짐작 가는 것이 있긴 합니다.”
“뭔데.”
“제벨라 아가씨입니다.”
“음?”
“주군께서도 제벨라 아가씨와 만나보셨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대충이나마 알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떠셨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보다 더 가주직에 어울리는 사람이지.”
“아니, 그건 아니죠. 자하브의 주인은 모든 분쟁의 선봉장이어야 합니다.”
“…….”
은근슬쩍 말을 꺼내봤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진짜 장난 없구나 남부의 강자 숭배 풍습.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사이. 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어. 그만큼 주군께서 제벨라 아가씨의 격무에 느끼는 바가 컸다는 뜻이겠죠.”
“어. 뭐, 그런 거지. 응.”
“제벨라 아가씨는 무척이나 유능하신 분입니다. 계승식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는 결론을 내리셨을 겁니다. 주군께서 이쯤이면 승리하고 돌아오시리라고.”
“……그런 게 가능하다고?”
“그만큼 주군의 힘과 성정을 믿고 계신다면 얼마든 가능하겠죠.”
말하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환호하는 영지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때로는 귓속말하느라 붙어있는 나를 과시하는 등.
자연스레 주변에 자신을 각인시키던 힐다가 말을 이었다.
“제벨라 아가씨께서는 결코 자하브의 가주가 되실 수 없으시지만, 자하브의 안주인으로서는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긴 하지.”
근친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제벨라만큼이나 좋은 여자도 없긴 하다.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나 근친이고 나한테는 족외혼이긴 한데…….
근친명가라는 멸칭이 괜히 붙은 게 아닌 걸까. 어딜 가도 족내혼단으로 가득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잠시. 개선식에 잔뜩 들떠있던 힐다의 목소리가 돌연 진지해졌다.
“그러니 주군. 절대 제벨라 아가씨를 슬프게 해선 안 됩니다. 이제 정식으로 대공의 지위에 오르셨으니 자하브령에서……아니, 남부 전체에서 주군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겠죠. 그럼에도 제벨라 아가씨를 홀대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럴 생각은 하나도 없었지만, 일단 묻자. 그 정도야?”
“예. 그 정도입니다. 장담컨데 제벨라 아가씨가 파업하는 것만으로도 자하브의 재산은 반토막 날 겁니다.”
“……그 정도 맞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제벨라가 가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말이지.
하여간 던전 때문에 이게 다 무슨 고생인지.
가볍게 혀를 차는 것도 잠시. 여전히 열렬한 환호를 가만히 방치하는 것도 좀 아니다 싶어 손을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주었다.
-와아아아아!!!
영지민들의 함성이 더욱 거세졌다.
겨우 흑마법사 좀 잡은 걸로 이렇게 칭송받는 건 쪽팔리긴 하지만……솔직히 말해서 약간은 기분 좋기도 했다.
과연. 힐다가 이래서 출세하고 싶어 했던 건가.
전생은 물론이요, 현생에서도 지금껏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출세의 맛은 꽤나 달콤했다.
“아, 근데 힐다 경. 왜 아까부터 나를 주군이라 부르는 거야?”
“어차피 잡은 줄. 이제와서 다른 줄로 갈아탈 수 없다면, 남들에게 자랑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내 기사라는 이미지를 알차게 써먹겠다는 뜻이었구나?
일전에 나를 다시 보니마니 했던 날 이후로 힐다가 너무 솔직해진 것 같다.
***
에녹이 한창 흑마법사들을 때려잡는 사이.
코넬리아는 코넬리아대로 제벨라와 함께 협상에 참여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눈앞의 상대는 에녹과는 다른 의미로 괴물이라는 것을.
협상이란 결국 서로 취할 것은 취하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며 완성되는 것.
하지만 제벨라는 아무리 도중에 변경된 것이라지만, 코넬리아가 준비해 온 모든 조건을 부드럽게 흘려내고 자신의 조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것이 서로에게 훨씬 이득이라는 사실을 코넬리아는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당초에 예상했던 이권은 하나도 챙기지 못했지만……이 정도면 오히려 당장은 더 도움이 될 거예요.
우아한 자세로 찻잔을 들어 한잔 들이켜는 제벨라를 흘깃 바라보는 코넬리아.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어주는 제벨라의 모습에 코넬리아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순수한 얼굴을 하고,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이 자신의 계획을 쳐부쉈는지 잘 알았기에.
장기적으로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 하나 내어주지 않았으나, 코넬리아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정보와 자금을 순순히 내어준다.
함정에 빠졌다고는 하나, 연속된 사업 실패와 몬스터 토벌 실패로 입지가 줄어든 코넬리아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 대가로 제벨라가 받아 간 것은 아카데미의 학생들.
정확히는 실습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아카데미 학생들을 남부의 던전으로 보낸다는 조건이었다.
아카데미는 제국의 가장 재능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곳에서 실습을 보낼 정도의 이들이라면 모험가들보다 훨씬 고급 인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이들이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알아서 몬스터를 정리해 준다는데 얼마나 좋은 일인가. 딸깍은 언제나 옳다.
결과적으로 자하브는 아직 혼란스러운 집안을 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코넬리아는 자신의 적이 누군지 알고 대항할 힘을 얻은 셈.
‘한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든 맹수, 다른 한 사람은 양의 탈을 쓴 늑대. 확실히 대공가는 달라도 다르긴 하네요.
하지만 제벨라를 향한 기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감탄으로 바뀌었다.
대공의 혈통이 이 정도로 괴물들이라면, 계승권은 좀 떨어져도 아무튼 황실의 적통인 자신은 더 대단한 사람이었기에……!
여러모로 혈통주의자다운 결론.
그렇게 한차례 무너졌던 멘탈을 빠르게 수복한 코넬리아가 눈치를 보며 마시던 찻잔을 자신만만하게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유리아는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었던가요. 그럼 이번 실습 때 오랜만에 얼굴을 보실 수 있겠네요.”
“어머? 황녀님께서 유리아를 아시나요?”
“녜헤? 아, 으흠. 네. 물론이죠. 유리아가 유급하는 바람에 제가 먼저 졸업하긴 했지만 아카데미 동기였는걸요.”
“그러셨군요. 아, 차 한잔 더 어떠신가요? 최근에 좋은 찻잎을 하나 구해서 말이죠.”
“어어……주시면 감사히 마실게요.”
“후후. 대신 유리아가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좀 알려주셔야 합니다?”
“뭐, 그 정도야…….”
“어디 보자. 다과도 차에 어울리는 것이 있으니 새로 내오겠습니다.”
“???”
유리아 자하브. 아카데미에 가 있는 동생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돌연 태도가 돌변한 제벨라.
마치 동생 친구라도 대하는 것 같은 스스럼 없는 태도.
‘믿을 수 없어요! 믿을 수 없어요! 그 음험한 여자가 어떻게 이런……!
이제는 콧노래까지 부르는 제벨라의 뒷모습에 간신히 멘탈을 진정시켰던 코넬리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뭐죠? 진짜 뭐죠?! 설마 차에 독이라도 타려는 건가요??
물론 차에 독을 타는 것은 제벨라의 전문이었으나, 이번에는 예외였다.
제벨라 자하브. 스스로의 손으로 아버지는 물론이요, 에녹이 오기 전의 모든 형제자매를……심지어 사생아들까지 꼼꼼하게 몰살시킨 희대의 악녀.
하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아끼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대숙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
자하브에서 제벨라를 위해 울어주고 분노해 주던 단 한 명뿐인 동생.
유리아 자하브였다.
아, 물론 이제는 에녹이 추가되어 단 둘뿐인 동생이라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코넬리아의 떨림이 심해지건 말건 제벨라의 입가에는 한층 더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예상대로 에녹이 승리와 함께 돌아오며 계승식을 끝마쳤고, 이제 곧 유리아 또한 자하브 성을 찾아올 터.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가족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뜬 탓일까.
실수로 너무 많이 따라 찻잔에서 차가 흘러넘쳤다.
“이런.”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은 제벨라가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웃어 보였다.
“부끄럽네요. 이건 저희끼리의 비밀로 할까요?”
“……그, 그러죠.”
코넬리아는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
개선식을 가로질러 도착한 자하브 성.
언제나 그러하듯, 제벨라가 자애로운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어서오렴 에녹. 금방이었구나.”
“그야 누님이랑 약속했으니까요.”
어떻게 그런 과거를 겪고도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걸까. 분명 천성이 선하기 때문이겠지.
어째서인지 급하게 인사를 하고 떠난 코넬리아 황녀의 뒷모습에 키득이던 제벨라가 입을 열었다.
“후후. 기대하렴 에녹. 이제 곧 유리아가. 아카데미에 다니던 네 동생이 돌아올 거란다.”
“오?”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번뜩임.
제벨라는 아무래도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가주직을 너무도 간단히 넘겨주었지만…….
어쩌면 동생인 유리아는 다를지도 모르잖은가.
만약 유리아가 가주직을 원한다면……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다!
들떠있는 제벨라를 향해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거 기대되네요.”
“그러니?”
“네. 저는 항상 여동생을 가지고 싶었거든요.”
뭐어. 이 부분은 진심이다.
전생에는 외동이었고, 현생에는 기간제 형이랑 새 누나밖에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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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벨라가 약속했던대로 가주가 되긴 했지만, 하는 일은 정말로 얼마 없었다.
하여, 힐다의 수업이 시작되기 전. 아침에 눈을 뜬 이후로 한 발짝도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뒹굴거리며 카렌에게 귀찮게 구는 도중이었다.
문득 곧 자하브로 돌아올 거라는 새 여동생. 유리아에 대해 생각난 것은.
그렇다. 사실 나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다.
정확히는 여동생이 하나 생겼다고 해야겠지.
내가 자하브에 들어오며, 제벨라라는 새 누나가 생긴 것처럼 유리아라는 여동생도 함께 생긴 것이다.
“카렌카렌아. 유리아는 어떤 애야?”
“유리아 아가씨 말인가요?”
“엉. 처음 만나는 거니까 조금 궁금해서 말이야. 역시 제벨라 누님 같은 분위기려나?”
“으음. 아무래도 유리아 아가씨는 제벨라 아가씨와 많이 다르시죠. 정확히는 제벨라 아가씨가 다른 자하브의 여식분들과 비교해도 좀 특이한 분이지만요.”
“아……제벨라 누님에게 그 부분에 관해서는 얼추 들어봤어.”
자하브의 혈계능력은 오직 남자에게서만 발현된다. 하지만 여자라고 하여, 완전한 일반인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적어도 자하브의 흔적 정도는 남아있으니까.
제벨라는 시간이 흐르며 피가 연해지자, 격세유전으로 자하브의 흔적마저 지워버리며 다른 가문의 피가 발현된 것.
그렇기에 자하브 안에서도 무척이나 특이한 경우였고, 그렇기에 전대 가주인 카인에게 학대당했던 것이다.
즉, 유리아가 제벨라와 크게 닮지 않았다는 소리는…….
“혹시 금발이니?”
“예.”
“막 피부도 갈색이고?”
“아, 그건 아닙니다. 피부색은 제벨라 아가씨를 닮으셨거든요.”
“제벨라 누님이랑? 혹시 둘의…….”
“예. 두분 모두 1부인과 전대 가주님의 사이에서 나온 분들이십니다.”
“아하.”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카렌이 창문을 열어 간단하게 환기를 하며 말을 이었다.
“유리아 아가씨는 무재를 타고나셨습니다. 혈계능력은 발현시키지 못하셨기에 신체 능력은 다소 떨어지셨지만……그래도 자하브의 무재를 고스란히 물려받으셨죠.”
“혈계능력은 없어도 재능은 유전되기도 하는구만.”
“정확히는 혈계능력 또한 물려받았지만, 발현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제벨라 아가씨와 가주님의 혼인이 약속되어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다른 가문의 혈계능력을 각성하셨지만, 몇번이고 시행된 검사를 통해 자하브의 직계임은 확실하셨으니 말이죠.”
“……아.”
그러고 보니, 제벨라와의 결혼 건도 있었네. 이것도 진짜 결혼식을 치르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번 생의 아버지마냥 자식만 싸지르고 사라지는 건 좀 그렇잖은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대충 알겠네. 무재가 있으니, 그걸 키워주기 위해 아카데미에 보낸 거구나?”
“예. 일단 명목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제 추측이지만, 조금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죠.”
“갑자기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네. 이리 와서 좀 자세히 말해봐.”
침대의 이불을 들어, 옆구리 쪽을 툭툭 두드렸다.
나와 침대를 가만히 번갈아 바라보던 카렌이었으나, 결국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 옆구리 옆에 카렌의 작은 엉덩이가 쏙 들어오는 모양새.
누우라는 뜻이었는데……이건 이것대로 괜찮네.
최소한의 망나니 연기도 계속하다 보면 는다는 걸까. 이젠 이것도 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너무 과하지 않은 선에서 카렌을 희롱할 수 있는 위치. 꼬리뼈와 허리의 중간쯤 되는 부분을 콕콕 찌르며 물었다.
“그래서? 카렌 네가 생각한 다른 이유는 뭔데?”
“아마 전대 가주님께서는 후계자 경쟁이 심화될 걸 예상하셨겠죠. 그래서 능력은 있지만 막내라 너무 어린 유리아 아가씨를 아카데미로 일종의 피신을 보낸 거고요.”
“흐음……피신이라.”
무슨 말인지는 알겠고, 어느 정도는 동의하지만……설령 그렇다 해도 카인이 유리아를 피신 보냈을 것 같지는 않다.
카렌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지만, 카인은 제벨라의 혈통을 의심하고 가문의 악재로 여기며 상당한 학대를 감행했잖은가.
그런 사람이 자하브의 흔적이 보인다고는 하나, 제벨라의 친동생인 유리아를 아껴서 멀리 도망 보냈다는 건 조금 신빙성이 떨어진다.
내 생각은 카렌과는 조금 다르다. 아마……제벨라가 내보낸 게 아닐까.
지금껏 제벨라가 일하는 모습을 몇번 지켜봐서 잘 안다. 그녀가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유능한 사람인지.
아무리 반쯤 감금된 상태고, 한계치까지 몰려있다해도 불온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한사람 내보내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카렌의 언행에서 추측컨데 유리아는 여자임에도 자하브 가문 안에서 그럭저럭 인정받았던 것 같으니 더욱 쉬웠겠지.
……물론,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실제로 어땠는지는 제벨라나 유리아에게 물어봐야겠지.
“아무튼 대충 어떤 사람인지는 알겠네. 그럼 성격은 어때?”
“성격이요?”
한참을 고민하던 카렌이 무표정한 얼굴 위로 흐릿한 미소를 띄워 올렸다.
“아랫사람을 잘 챙겨주시는 분이었죠. 연민을 알고, 책임을 아는 분이기도 하셨고요. 다만, 약간 다혈질적인 면모가 있긴 합니다만…….”
“그 정도는 자하브 가문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다는 거지?”
“……제가 한 말은 아닙니다만, 대충 그런 느낌이긴 합니다.”
자하브를 모시는 케세프 가문의 일원으로서 자하브의 핏줄에 안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린 걸까.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게 속삭이는 카렌.
요는 기본적으로는 괜찮은 녀석이지만, 성격은 급하다는 건가.
그렇다면 제벨라 상대로는 실패했던 가주직 떠넘기기가 먹힐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라는 건 내 망나니짓을 고깝게 볼 것이며, 성격이 급하다는 건 살짝 긁었을 때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적어도 별다른 욕심 없이 나를 가주직에 앉힌 제벨라와 달리 변수가 되어줄 것은 확실했으니.
……그래도 전생 현생을 다 합쳐 처음으로 생기는 여동생이란 말이지.
마구 애호하고 싶은 마음과, 마구 괴롭혀 들고 일어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머릿속에서 첨예하게 대립한다.
안 그래도 내가 정말로 귀족의 피가 섞였는지, 어째서 던전에 들어가면 컨디션이 좋아지는지로 생각할 게 많았던 상황이라 슬슬 머리가 아파온다.
하여 몸을 둥글게 말아, 눈앞에 보이는 카렌의 허벅지에 머리를 묻어보았다.
“흐앗! 갑자기 무슨……!”
“카렌카렌아.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구나…….”
“……아, 하긴 그럴 때가 되긴 했죠. 가주님도 자하브시니.”
음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인 카렌이 나쁜 계획이라도 꾸미는 사람처럼 작게 속삭였다.
“그럼 오늘 수업은 땡땡이치시겠습니까?”
“…….”
순간 확 마음이 동했지만, 한참의 망설임 끝에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어. 힐다 기다리겠다. 빨리 가자. 당장 급했던 계승식도 끝나고, 쉬운 내용이라면 혼자 책도 읽을 수 있게 됐으니, 오러 수련의 비중을 높인다고 했거든.”
“오.”
눈은 그대로면서 입만 벌리며 놀란 티를 낸 카렌이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이걸로 저를 사람들 보는 앞에서 번쩍 들어 올렸을 때의 앙금은 씻어내도록 하죠.”
“그거참 고맙네. 근데 카렌아. 원래 이런 거 신경 쓰는 사람이었니?”
“제가 케세프 가문 출신이고, 가주님의 전속 시종이긴 합니다만 어엿한 한창때의 레이디입니다.”
“레이디?”
카렌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편안함이라는 말은 분명 이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리라.
“……벗으면 굉장합니다.”
“그럼 벗어보던가.”
“큿! 가주님의 충실한 집사에게 수치를 주실 생각이십니까!”
“벗지도 못할 거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데…….”
너무 티 나는 거짓말이었다.
***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지만, 슬슬 사람들이 보내오는 존경의 눈빛에 익숙해질 무렵.
하지만, 아직 내가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는 감도 못 잡고있는 도중.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이 찾아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자하브 대공 각하. 아카데미의 교관 역을 맡고 있는 델빈이라고 합니다. 학생들에게 실습을 허락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 정도야 뭘. 듣자하니 아카데미 재학생 중에 내 동생도 있다면서?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렇다. 아카데미에서 교관들과 함께 학생들을 보내온 것.
대부분의 일은 제벨라 선에서 해결되었지만, 아카데미는 제국의 미래. 그런 곳에서 수십의 학생을 믿고 실습 보냈는데 얼굴조차 안 비칠 수는 없잖은가.
오랜만에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비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좀 삐뚜름하게 앉긴 했지만.
약간 떨어진 곳에서 힐다가 이쯤 되면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의 시선을 보내왔지만, 애써 무시하며 눈앞의 학생들을 살펴보았다.
나이는 대부분 10대 중후반. 하지만, 느껴지는 기세는 꽤나 훌륭하다.
마법사 쪽은 정확히 알아보기 어렵지만……기사 지망생들은 대부분 평기사 수준은 넘었다.
물론 검에 인생 몰빵한 힐다에 비할 바는 아니지.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자하브를 보필하기 위해 온갖 지원을 받으며 비밀병기 비스무리한 것으로 육성 받은 카렌과 비슷한 수준은 몇몇 보인다.
이 정도면 경험이 부족하고, 단장 노릇을 할 특출난 존재가 부재할 뿐이지 어지간한 정예 기사단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전생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아무리 싸우는 방법을 가르치는 아카데미라지만, 학생을 던전에 밀어넣는다는 것에 약간 거부감이 있긴 했는데…….
얕은 곳이라면 던전에 들여보내도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조금 더 자세히 늘어선 학생들을 살펴보았다. 기세를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살펴볼 요량으로.
당연한 말이지만, 전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한 명. 단 한 명만큼은 초면이면서 묘한 친숙함이 느껴졌다.
홀로 빛나는 것처럼 밝은 금발. 피부는 창백하다시피 하얗지만 그것이 유약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니.
짝다리를 짚고 선 다리, 반항적인 것을 넘어 위압적인 눈빛, 그리고 전신으로 뿜어내는 사나운 기세까지.
마치 인간의 법도를 모르는 짐승을 아름다운 여인의 형태에 가둬둔 것 같은 존재.
하지만 제벨라를 닮은 연보랏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저게 바로 유리아, 제벨라의 동생이자 내 새 여동생(아님)이라는 것을.
첫 만남인데 무어라 말부터 꺼내는 게 좋으려나. 그런 내 고민을 덜어주겠다는 듯이 유리아 쪽에서 먼저 나섰다.
절그럭. 쿵!
여리여리한 자신의 몸보다도 큼직한 대검이 알현실의 바닥에 박힌다.
동시에 유리아로부터 오러가 들끓으며, 목소리에 실린다.
“야.”
“……야?”
“한판 뜨자.”
“???”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끔뻑이는 사이.
기겁한 교관 중 한 명이 유리아에게 달려가 그녀를 말리려 했다.
“유리아 학생. 아무리 이곳이 본가라도 공적인 자리고, 제국에서 인정한 대공 각하 앞에서 그러한 언동은…….”
퍼억!
“크흑!”
“시끄러워! 그냥 닥치고 지켜보기나 해! 내가 다른 연놈들한테 시달릴 때처럼 말이야!”
그리고 놀랍게도 유리아가 휘두른 주먹에 얻어맞고 멀리 튕겨 나갔다.
힘이 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오러의 사용법이 너무나도 정교하다. 이제 막 오러를 익히기 시작한 나로서는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들 정도.
물론, 방금 튕겨 나간 교관은 신참인지 아니면 다른 전형이 있는 건지 다른 교관에 비해 좀 약해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교관 아닌가. 조금 다르지만 선생 비슷한 사람이란 말이다.
그런 사람을 망설임 없이 줘패고는 내게 삿대질을 할 줄이야.
기겁하는 사이. 쓸데없이 쩌렁쩌렁한 유리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판 떠서 내가 이기면 언니는 놔주고 나랑 결혼해.”
“누가 들으면 내가 제벨라 누님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줄 알겠네.”
“흥! 시치미 떼기는. 제벨라 언니 같은 사람을 너같이 발정 난 짐승이 가만 놔둘 리 없잖아?”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겠는데 일단 아무 일도 없었거든? 그나저나 유리아야. 내가 이기면 어쩌려고 그런 조건을 내거는 거냐.”
“그거야 간단하지.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해줄게. 너한테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
이건 진짜 다른 사람이 들으면 내가 무슨 근친에 미친 사람인 줄 알겠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물론이요 교관들, 심지어는 형식적으로 세워둔 자하브의 기사들마저 웅성이고 있었다.
하긴. 당연한 일인가.
돌연 교관에게 손찌검을 하고, 너무도 가볍게 근친 야스를 하니마니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내 어설픈 망나니질은 갑질의 연장선상이건만, 유리아의 난장은 진짜 앞뒤 가리지 않고 들이받는 것에 가까웠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칼립소에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사라진 줄 알았던 내 안의 유교 드래곤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든다.
일단 넌 궁디팡팡 확정이다.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비스듬하게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냐. 이 오라비랑 한번 놀아보자꾸나.”
“바라던 바야.”
실력의 차이는 확연하다. 어디까지 힘 조절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주먹을 말아쥔 순간.
문득 깨달았다.
유리아가 나보다 약하고, 내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강해진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격차를 가늠하긴 힘들지만……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닐 터.
심지어 유리아의 조건 대로라면 이기건 지건, 유리아 본인은 무조건 나랑 순수한(아님) 자하브 만들기 풀코스를 조져야 한다는 사실을.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리아의 눈매와 입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카렌을 관찰하며 다져진 눈썰미가 잡아내 버렸다.
마치 웃음기라도 참는 것처럼 어색하게 틀어진 입가를. 기대된다는 듯이 묘한 열망으로 반짝이는 동공을 말이다.
“이런 씹.”
내 여동생이 이렇게 미친년일 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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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새 여동생의 성벽이 뒤틀려 있다는 의심이 들었을 때의 올바른 대처법을 고르시오.
1)패배 야스가 좋은 거니? 아니면 근친 야스가 좋은 거니?
2)아하? 패배 근친 야스가 좋은 거구나?
……어느 쪽을 골라도 정답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카렌은 유리아가 약간 성격이 급할 뿐, 기본적으로는 좋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웃음기라도 참는 것처럼 어색하게 틀어진 입가, 기대와 열망으로 반짝이는 동공, 그리고 아까부터 단 한 순간도 내게서 떨어뜨리지 않는 시선까지.
“이런 씹.”
카렌카렌아. 나를 속인 거니??
괜히 카렌을 노려보았지만, 내 시선을 무어라 해석한 걸까.
태연스레 나선 카렌이 지금 이순간에도 유리아를 말리고 싶지만, 내 눈치를 보며 차마 나서지 못하는 아카데미 학생들과 교관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조금 떨어져 주십시오. 가주님과 유리아 아가씨와의 대련의 여파가 미칠지도 모릅니다.”
“그으……안 말려도 되는 겁니까?”
델빈이라고 했던가. 아카데미에서 온 교관 중 대표 격으로 보이는 이가 조심스런 어조로 되물었으나, 카렌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자하브이고, 가주님께선 뜻을 정하셨습니다.”
누가 들으면 거창한 결정인 줄 알겠잖아. 그냥 적당히 궁디팡팡이나 하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아, 혹시 책임소재가 걱정이라면 안심하시길. 가주님께서 나선 이상 이는 가주님의 일입니다.”
“그, 그렇습니까?”
“예. 오히려 행운이군요. 다른 누구도 아닌 4대 대공가의 일원인 가주님께서 직접 대련을 보여주시는 것이니.”
“어……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뒤로 물리는 교관들.
그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카렌 또한 자하브의 가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하브는 근친 명가라는 멸칭이 붙을 정도로 미친 집안이라는 것을……!
카렌 입장에서는 내가 제벨라와 결혼하건, 유리아와 결혼하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
어찌됐든 다음 세대의 자하브는 피가 다시 짙어질 테니까……!
이게 그 상식 개변 세상인가 뭔가인가.
머리는 어질어질 했으나, 판은 깔려있고 해야 할 일 또한 명확했다.
일단 유리아를 쓰러뜨린다. 그리고 바로 학부모 면담……아, 둘다 없어서 굳이 말하자면 내가 보호자인가.
아무튼 1대1 면담 시간을 좀 가져야겠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공개 구혼 대련을 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으니까.
알현실의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단차 위에 올려진 의자에서 일어나, 짧은 계단을 내려가 바닥 위에 선다.
키 차이는 있어도 딛고 있는 바닥은 같아진 나와 유리아.
제벨라를 닮은 연보랏빛 눈동자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 오라비가 삼초식을 양보하마 유리아.”
“삼초식이 뭐야?”
“아”
괜히 폼 잡고 싶어서 전생의 무협지에서 봤던 대사를 따라 해 보았으나, 이곳은 판타지 대륙이라 그런지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
“……3번까지 공격을 받아주기만 하겠다고. 그러니까 전력으로 와봐. 하늘 같은 오라비와의 격차라는 걸 알게 해줄 테니.”
“흥! 하늘은 무슨. 애초에 밖에서 굴러들어 온 주제에.”
누가 들으면 아무리 가주라도 사생아 출신을 무시하는 콧대 높은 귀족으로 여기겠으나…….
나는 보았다. 어째서인지 군침을 츄릅 삼키는 모습을.
……진짜 정신 나갈 것 같네.
내가 한숨을 푹푹 내쉬건 말건 땅에 박아 넣은 대검을 뽑아 올리는 유리아.
자세를 한껏 낮추고, 자신의 몸뚱이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을 어깨에 비스듬히 걸친다.
동시에 변화하는 기세.
분명 조금 전까지만해도 은연중에 흘러나오던 건들거림이나, 열망 비스무리한 것이 사라지고 순수한 투지만이 남는다.
흉포한 짐승을 작은 인간의 형태로 구겨 넣은 듯한 사나움. 노골적으로 급소를 훑어보는 시선에는 은은한 위압이 담겨있었다.
자하브의 혈계능력을 발현시키지 못했음에도 이 정도인가.
확실히 자하브라는 혈통이 대공가에 어울리는 사기 혈통이긴 한가 보다.
……그런 자하브의 혈통으로 착각 받는 내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지만.
들키면 안 되는 입장이니 고맙긴 한데, 왜 아무도 의심 안 하냐고.
잠시 다른 생각을 한 순간. 이를 귀신같이 눈치챈 유리아가 달려들었다.
퉁.
큼직한 대검을 들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몸놀림. 두어 번의 발놀림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유리아의 몸이 빙글 회전한다.
자신의 몸 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기 위해 팔 뿐만 아니라 전신을 사용하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일렁이는 오러를 머금은 대검이 내 상체를 짓이길 듯이 쏘아졌지만.
“흠.”
오러를 살짝 끌어 올리며 한쪽 손에 집중한다.
회로를 연상시키는 기이한 문양이 심장에서부터 팔까지 뻗어나가더니,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텁.
날아들던 대검이 내 손에 잡혀 그대로 정지한다.
“……에.”
어벙한 소리를 내는 유리아.
그녀의 대검 위에서 일렁이던 오러는 내 손에 잡히며 사그라들었고, 걸리는 건 뭐든 찢어발길 듯한 기세로 휘둘러진 대검은 미동조차 않는다.
검을 빼내기 위해 끙끙대는 유리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확실히 재능은 있네. 하지만 순수한 힘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
“이거 놔……!”
“그래.”
대검을 놔주자, 힘을 주던 반동 탓에 스스로 뒤로 튕겨진 유리아.
하지만 묘한 스텝을 밟더니, 이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처음보다 더욱 강렬하게 대검을 휘둘러온다.
물론, 내겐 이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일격이었다.
텁.
방금과 똑같은 자세로 재차 대검을 잡힌 유리아. 당황하는 대신 몸을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입꼬리는 히죽이고 있었지만.
이를 애써 무시하며 유리아의 검을 평가했다.
“대충 알겠네. 어차피 신체 능력이 아니라 오러를 이용해 더 큰 힘을 내는 것이니, 차라리 하나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별다른 방어구 없이 대검 하나만 든 건가.”
“겨우 두 번 만에 알아차린 거야?”
“워낙 특이한 방식이니까.”
“그럼 이것도 한번 막아보던가!”
다시금 거리를 벌린 유리아가 이번에는 대놓고 동작이 큰 자세를 취했다.
자신의 몸이 아닌, 대검에 무게 중심을 두는 기이한 자세. 비틀거리듯이 달려든 유리아가 한보 반 거리 앞에서 땅을 박차고 공중에 뜬다.
전신과 대검의 표면에만 머물던 오러가 돌연, 유리아의 몸을 휘감기 시작한다.
허공에서 흩날리는 밝은 금발. 지금 이순간. 유리아의 대검은 무기가 아닌 하나의 송곳니였다.
“하아앗!”
내 정수리를 정확히 노리고 떨어져내리는 투박한 대검.
회전하는 오러에 감싸인 탓인지 이전과는 비교조차 안 될 광채를 뿜어낸다.
방어도, 회피도, 심지어는 탈진마저도 고려하지 않은 묵직한 한방.
이쯤 되면 아무리 나라도 약간 진심을 내야 할 터.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오른쪽 주먹을 한계치까지 뒤로 당긴다.
마치 투창이라도 하는 듯한, 혹은 화살이라도 쏘아낼 법한 자세.
본래라면 취하지 않았을 자세다. 실전에서는 너무도 비효율적이니까. 차라리 지금의 유리아처럼 전신을 비틀어 모든 힘을 주먹에 집중시키는 편이 훨씬 나을 터.
하지만 굳이 이런 자세를 취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단순히 효율적인 자세를 찾고, 육신을 단련하고, 그렇게 조금 더 강하게 힘을 주는 것이 전부였던 이전과 달리.
조금이나마 오러를……체내의 마나를 의도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 지금은 약간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됐으니까.
“흐읍!”
흑마법사와의 실전을 통해 익숙해진 오러의 감각이 심장을 떠나 팔 전체를 뒤덮는다.
붉게 물든 문양에서 느껴지던 열감이 단숨에 그 기세를 부풀린다.
화르륵.
문양 위로 피어오르는 불길. 정확히는 집중된 오러가 문양을 타고 흐르다가 밖으로 삐져나온 것이다.
물론, 이는 엄밀히 말해서 기사들이 사용하는 유형화된 오러로 육신을 코팅하는 기술이 아니다.
그저 과할 정도의 오러를 집중시켜, 넘쳐 흘렀을 뿐인 현상이니까.
하지만 나는 항상 이렇게 싸워왔다.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마력을, 개조당해 얻은 것이라 제대로 세밀한 조정이 불가능한 근력을.
그저 있는 힘껏 때려 박아 눈앞의 상대를 분쇄하는 식으로 말이다.
투박하고, 단순할지 몰라도 내겐 가장 익숙한 방법.
오러의 제대로 된 사용법 같은 건 나중에 배우면 그만이지.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움켜쥔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넘쳐흐르는 오러가 격발 되며 폭발에 가까운 굉음을 낸다.
그리고 불길을 휘감은 주먹이 그대로 유리아의 대검 옆면을 후려쳤다.
콰직!
“꺄아아악!”
“아.”
흥이 올라 너무 힘을 줬던 탓일까. 부서진 대검과 함께 무방비한 자세로 옆으로 날아가는 유리아.
이대로라면 벽을 부수고 처박힐 것이다. 그리고 모든 오러를 대검에 집중한 유리아는 이만한 충격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을 터.
이대로면 중상이라는 생각에 혀를 차며, 잽싸게 땅을 박찼다.
파앙!
바닥에 얕은 거미줄 모양 금을 내며 쏘아지는 몸뚱이. 공중에서 허우적대는 유리아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등쪽으로 벽에 충돌하며 충격을 대신 흡수해 주었다.
콰앙!
등짝을 내달리는 찌릿한 감각. 좀 아프긴 한데 이 정도면 참을만한 수준이다.
“어, 어째서……?”
내 품에 안겨 눈을 휘둥그레 뜨는 유리아를 향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야 이 오라비가 준비한 사랑의 매는 따로 있거든.”
“사랑?!”
“그쪽에 집중하지 말라고…….”
유리아를 빙글 뒤집어, 내 무릎 위에 엎드린 자세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팡! 팡! 팡!
“아팟! 진짜 아파! 설마 이런 취향이야?! 언니는 몸이 약해서 안 되는데!”
“제벨라 누님을 내가 왜 때려……? 너처럼 맞을 짓한 녀석이나 맞는 거지.”
“흐읏?!”
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히는 유리아. 그런 그녀의 엉덩이를 다시 한번 때렸다.
파앙!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탄력 있는 감각과 온기.
이후. 메챠쿠챠 설교했다.
……여기에 자하브의 기사들은 물론, 아카데미 사람들도 있다는 걸 깜빡 잊고서.
***
엉덩이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고통에 유리아는 생각했다.
‘와! 공개 수치플!
아카데미에서 엄한 것만 배워온 유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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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에녹을 본 유리아의 첫인상은 납득이었다.
‘이래서 제벨라 언니가…….
그제야 거의 매주마다 날아오던 제벨라의 편지가 요즘 들어 에녹에 대한 칭찬으로 도배된 이유를 이해했으니까.
유리아는 자하브의 혈계능력을 발현시키지 못했으나, 단 한 가지 물려받은 것이 있었으니.
직감이 바로 그러했다.
직감적으로 오러의 사용법을 깨우치고, 직감적으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이가 누구인지 알고, 직감적으로 승리로 이어지는 길을 찾는다.
제벨라의 조언에 따라 단순한 무재 정도로 포장해서 드러내긴 했으나, 그녀의 직감은 혈계능력을 발현시킨 자하브의 혈족들보다도 뛰어났다.
대공가쯤 되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배우자를 통해 대를 거듭하며 자연스레 품종개량 비스무리한 것이 이루어지니.
혈계능력을 제외하고도 여러 재능을 타고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가능한 일.
그리고 이러한 직감에 근거하여 본 에녹은 배부른 맹수였다.
의자에는 반쯤 눕다시피 걸터앉았고, 막 침대에서 일어난 것처럼 눈에는 나른함이 가득하며, 실제로 하품까지 해대고 있었지만.
늘어져 보이는 몸은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눈매는 나른할지언정 동공을 쉴 새 없이 주변을 탐색하고 있으며, 하품은……그냥 하품이었다.
진짜로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나온 것이라는 사실까지는 몰랐으나 유리아에게는 그것이 일종의 자신감으로 보였다.
‘어디 한번 와볼 테면 와보라는 거지?
하지만 실제로 겉모습만 보고 어설프게 덤벼들었다가는 저 송곳니에 목덜미를 물어뜯기고 말 것이다.
……에녹 입장에서는 칼립소에서 살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 버릇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유리아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날카로운 직감이 에녹을 보는 순간 계속해서 경종을 울렸다. 저건 위험한 존재라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경고. 당장 도망치거나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신호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한테 위험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리고 머리를 들이밀지만 않으면 먼저 공격해 오는 사람이 아니니까.
제벨라로부터 이미 에녹이 자하브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성정의 사람인지 전해 들은 유리아다.
‘제벨라 언니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지. 응.
아카데미에 가기 전. 아직 자하브 성에 살던 시절의 유리아는 보았다. 자하브의 혈족이 얼마나 잔학해질 수 있는지, 그들이 반쯤 가둬둔 제벨라에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제벨라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말이다.
직감에 의존한 판단이기에 제벨라가 자신의 형제들을 전부 죽였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유리아였으나.
유약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제벨라가 강인한 사람이라는 정도는 안다. 그리고 잠겨있는 문 너머로 펑펑 울었던 날 이후로 자신을 아끼고 있다는 것 또한.
그런 제벨라가 한 말이니 분명 허튼소리는 아닐 터.
자신의 직감으로도, 제벨라의 안목으로도 에녹이 다른 자하브의 혈족과 달리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든 유리아의 가슴에 기대가 차올랐다.
처음 보는 사이지만, 제벨라 이외에도 제대로된 가족이 생길 거라는 기대.
하지만 단상 밑을 훑어보던 에녹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짐승의 그것처럼 샛노란 동공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그녀의 직감이 시끄럽게 울어대더니.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살면서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 유리아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으나, 날 때부터 예리한 감각을 타고난 그녀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직감과 본능에 몸을 맡기고 되는대로 행동하는 것.
‘이게 첫눈에 반한다는 거겠지?
사실 아니다.
유리아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으나, 그녀의 직감은 기본적으로 생존본능을 기반으로 하는 것.
그저 생존을 위해서는 에녹의 옆자리가 가장 효율적이며, 이를 위해서는 그의 암컷이 될 필요가 있다고 여겼을 뿐이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이 문제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카데미의 기숙사는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가 나뉘어져있고.
몇 가지 사고를 치는 바람에 1년을 유급하기까지 한 유리아는 꽤나 오랜 시간을 여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동성끼리만 모여있으면, 그것도 한창때의 나이라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야한 이야기에 관심이 쏠리는 법.
하물며 아카데미는 평민과 상위 귀족들에겐 배움의 장이지만, 하위 귀족들에게는 일생일대를 건 상향혼의 무대였으니.
그런 이들에게 여러 자극적인 경험담을 듣거나, 비밀스러운 책을 돌려보던 유리아는……안타깝게도 약간 성벽이 뒤틀리고 말았다.
자하브 가문의 잘못된 조기교육, 직감에 과하게 의존하는 습관, 극찬 범벅인 제벨라의 편지를 읽고 쌓인 호감,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접한 금단의 지식(?)까지.
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 결과. 그녀는 패배 근친 야스 조아 조아를 외치는 광인이 되어버렸고.
이는 대련에서 패배하여 엉덩이를 맞는 도중에도 변하지 않았다.
‘와! 공개 수치플!
가정교육이 이렇게 중요하다.
***
“후우.”
유리아의 엉덩이를 정확히 10대 때리고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손바닥에 눌어붙은 것 같은 말랑 쫀득한 감각을 애써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유리아야. 이제 정신 좀 차렸니?”
“흐으……나, 나는 언제나 제정신이었는데?”
“대체 어떤 사람이 제정신으로 자기 오라비랑 결혼하겠다는 말을 하니. 어린애도 아니라 다 큰 녀석이 말이야.”
“어차피 언니랑은 할 거면서 뭘 그리 빼.”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맞나?”
근친명가라 불리는 자하브에서 나고 자란 녀석이다. 나를 제외한 그 어떤 가신도, 심지어 제벨라마저 나와의 혼인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니.
유리아 또한 필요에 따른 근친을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이는 거겠지.
실제로 자하브 가문이 비상 상황인 것도 맞는 말이고.
하지만, 패배 근친 야스 조아 조아 발언을 제쳐두고서라도 할 말은 남아있었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유교 드래곤의 속삭임에 따라, 짐짓 엄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하지만, 교관을 함부로 치는 건 잘못된 행동이야. 다른 어디도 아닌 자하브 본성에서 그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너. 모르는 거야?”
“뭐를.”
“제벨라 언니랑 나를 제외한 다른 자하브의 남자들이 전부 죽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후계자 다툼이 격해져 서로 죽고 죽였다고 들었다만.”
“으응. 어떻게 죽었는지가 아니라 죽음 이후의 일을 말이야.”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내 무릎에 엎드려 있던 유리아가 꿈틀거리며 몸을 뒤집었다.
그렇게 내 무릎에 누워 이쪽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말을 잇는 유리아.
“자하브의 힘은 결국 홀로 던전을 관리할 수 있는 압도적인 힘에서 나와. 그리고 이 힘은 혈계능력을 통해 유전되는 거구. 하지만 자하브의 모든 남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진 거야.”
“……자하브가 곧 망할, 아니 이미 망한 가문이라는 소문이 돌았겠군.”
“맞아. 아무리 덩치가 커도 죽은 짐승을 두려워하는 이는 없잖아? 많은 사람들이 자하브에 남은 것들을 뜯어먹기 위해 접근했어. 재력, 땅, 이권, 작위……그리고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능력까지 있는 나.”
“마지막은 과장이 좀 심한 것 같은데.”
“알았어 알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최고급 모판이 싸게 풀린 셈이지. 모두가 탐내지 않겠어?”
“……그건 너무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 같으니 금지. 차라리 과장해서 말하고 다니도록. 이거 가주 명령이야.”
자기 입으로 모판 같은 소리를 하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자, 표정이 묘해지는 유리아.
그녀가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아무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나를 노리더라고. 약간의 협박을 곁들여서 말이야.”
“그래서 문제가 터진 건가.”
“맞아. 홧김에 팔다리를 두어 개씩 잘라버렸거든.”
“……아, 그쪽에 문제가 생긴 거였구나.”
아무래도 뒷배를 잃은 유리아를 노리던 녀석들은 너굴맨……아니, 유리아에게 역으로 당했던 모양.
“아카데미니까 팔다리 정도야 금방 붙일 수 있긴 한데…….”
“그쪽 가문이 나섰겠지. 협박이 섞이긴 했지만, 말로 했는데 검이 날아왔으니 명분도 있을 테고.”
“뭐야. 알고 있었어?”
“아니. 하지만 뻔한 일이니까. 아무튼 이해했어. 그때의 일이 문제가 되어서 유급한 거구만. 그리고 교관들은……매수당해서 협박에 시달리는 너를 모른 체 했을 테고?”
“응. 이것도 제벨라 언니랑 코넬리아. 그리고 다른 친구 몇이 도와줘서 유급 선에서 끝난 거지 처음에는 퇴학당하는 줄 알았다니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는 유리아.
음음. 그래. 완벽히 이해했다.
“혹시 방금 전의 교관 말고 또 매수된 교관이 있었나?”
“있긴 한데……실습에 따라온 교관은 저거 하나뿐이야. 왜? 막막 여동생이 괴롭힘당했다니까 화가 나고 그래?”
“어.”
“……어?”
유리아가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부서진 벽에서 떨어진 조각 하나를 주워 손가락으로 튕겼다.
쐐애액……퍼억!
“아아아악!!”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유리아를 말리려다가 얻어맞은 교관의 팔에 돌조각이 틀어박힌 탓이었다.
“델빈 교관.”
“예, 예 대공 각하.”
“보아하니, 부상이 심해 보이는군. 아쉽게도 자하브에 상주하는 사제들은 지난 던전 역류의 부상자를 치료하느라 바쁘고, 포션도 다 떨어져서 말이야. 아카데미로 돌려보내는 게 좋아 보이는데……어떻게 생각하지?”
“대공 각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당장 아카데미로 올려보내겠습니다.”
내 눈치를 보던 델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바닥을 나뒹굴던 녀석이 악을 썼다.
“대, 대공 각하! 억울합니다! 무슨 오해가……!”
“아론.”
하여, 녀석의 말을 끊고 집사장을 불렀다.
“손님이 많이 아파서 제 발로 못 간다고 하네. 대신 배웅 좀 나가줘. ……정중히 말이야.”
“명에 따르겠습니다.”
어째서이지 창백해진 표정의 교관을 끌고 나가는 아론.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자니, 무릎 위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여왔다.
“그래서? 나는 방금 뭐 때문에 엉덩이를 맞은 거야?”
“…….”
잠깐의 고민 끝에 유리아의 이마에 딱밤을 놔주었다.
빠악!
“흐약!”
“호칭.”
“뭐, 뭐가?”
“앞으로는 건방지게 야라고 부르지 말고 제대로 오빠라 부르도록.”
“어…….”
붉어진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싸고 있던 유리아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오라방.”
죽어도 부르라는 대로 안 부르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잠시.
“근데 오라방. 나 엉덩이가 너무 아픈데 좀 쓰다듬어 주면 안 돼?”
“……안 된다 이 미친년아.”
유리아를 무릎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그럼에도 일생일대의 투자에 성공한 사람처럼 헤실대는 것이 묘하게 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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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소란이 있긴 했지만, 어찌어찌 무난하게 일정을 끝마치고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제 글공부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간단한 책이라면 혼자서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오러 수련의 비중을 늘리기로 했기 때문.
아카데미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조금 늦었으니, 힐다가 기다릴까 발걸음을 서둘렀으나.
“오라방.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아오, 깜짝이야.”
돌연 옆구리 쪽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유리아의 말에 흠칫했다.
분명 피는 이어지지 않았건만, 이상할 정도로 나와 닮은 금발이 사르르 흘러내리며 햇빛에 반짝인다.
“뭐야 뭐야. 내 머리카락이 신경 쓰여? 그으. 살짝이라면 잡아당겨도 괜찮은데.”
내 시선을 눈치챈 걸까. 유리아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으더니, 이쪽으로 내밀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니 유리아야…….”
“아, 미안. 손잡이로 쓸 때는 이렇게 하는 거였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 하나로 묶었던 머리를 쪼개, 두 갈래로 만들어 양옆에서 잡았다.
그냥 손으로 쥐어 고정시켰을 뿐이지만, 흔히들 말하는 트윈테일 스타일. ……그리고 조금 천박하게 말하자면 핸들을 만들어 내 앞에서 살랑였다.
“어때? 오라방은 이런 거 좋아해?”
“…….”
정신 나갈 것 같네.
분명 자하브의 혈계능력은 발현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유리아는 대체 뭘까.
아니지. 그런 식으로 따지면 제벨라도 골 때리는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나한테 잘해주고, 일 잘하는 누나잖아.
아카데미가 문제라고 하기에는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은 제정신으로 보였는데…….
“아.”
이해했다.
그냥 이런 사람이구나.
카렌이 워낙 자하브의 문제아들에게 익숙해져서 이 정도 언행은 귀여운 수준으로 보인 것일 테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며 나름 유리아를 이해한 순간.
불가해한 무언가를 접할 때 느껴지던 거부감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약간의 위기감이었다.
자하브에서 요구하는 망나니 인재상에는 못 미칠지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망나니 연기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리고 계승식까지 끝난 마당이지만 혹시라도 혈통의 진위를 의심당할지도 모르니까.
즉, 내게는 유리아보다 더 미친 사람처럼 굴 필요가 있다는 소리다.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어떻게든 해보는 수밖에.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유리아가 내민 양 갈래머리를 잡아들었다.
“핸들도 좋긴 하지만 내 취향은 좀 다르네.”
“으응? 오라방은 그럼 뭐 좋아하는데?”
“목줄.”
짧게 답하며 유리아의 머리카락을 그녀의 목에 휘감았다.
하얀 목덜미 위를 교차하는 금발. 그렇게 단단히 고정시킨 뒤에는 두 갈래로 나뉜 머리를 다시 합쳐 한 손으로 쥐었다.
마치 유리아 본인의 머리카락을 목걸이이자 목줄처럼 만든 모양새.
유리아의 머리카락이 꽤나 길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순식간에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목을 졸리듯이 붙잡힌 유리아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오라방 천재야?! 이런 건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럼 그럼. 이 오라비는 언제나 개쩔었단다.”
“철제나 싸구려 가죽이랑 다르게 심하게 쓸리지도 않고,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목을 조를 수도 있고, 무엇보다 다른 무엇도 아닌 내 머리카락에 내가 매인다는 사실이 너무 굴욕적이야!”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네.”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유리아의 모습에 자연스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일단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자하브는 자식 교육 망했다.
그나마 멀쩡한 제벨라는 학대했지, 유리아는 그냥 제정신이 아니지…….
아!
그래서 서로 후계자 다툼하다가 공멸한 거구나?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냥 운이 없어서, 혹은 누군지 상상도 안 가는 흑막이 있어서 죄다 죽고 망한 게 아니라 그냥 죽을만해서 죽었고 망할만해서 망한 것이리라.
복잡해졌던 머리가 맑아졌다. 그래. 유리아가 아무리 골 때리는 녀석이라도, 어차피 자하브를 떠날 내게 무슨 상관인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내게 목을 내어준 채, 뒷짐을 진 유리아가 고양잇과 동물처럼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따라오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라방 지금 어딜 가는 거야?”
“수업받으러 가는 중이다.”
“수업? 내가 없는 사이에 자하브에도 아카데미 같은 게 생겼나…….”
“아니, 그냥 내 개인 교습. 힐다 경이라고 은사자 기사단 부단장이 나한테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있거든.”
“흠흠. 힐다 경은 오라방의 애첩……기억해 둘게.”
“……그런 게 아니라 글이랑 예법, 오러 수련을 배우는 거야.”
“오라방 글도 읽을 줄 알아?!”
“내가 그렇게 무식하게 보였어……?”
약간 상처받았다.
너 글 읽을 줄 알아? 문맹 아니었어?
이런 소리는 전생을 포함해도 들어본 적 없는 폭력적인 질문이었으니까.
뭐어. 얼마 전까지의 나는 정말로 문맹이 맞긴 했지만.
나도 모르게 서운함이 겉으로 드러난 걸까. 유리아가 황급히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 아냐! 무식해 보이는 게 아니라 싸움과 여자 말고는 흥미가 없어 보일 뿐이니까! 오해하지 마 오라방!”
“……?”
이게 위로가 맞는 건가?
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애초에 광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 해선 안 된다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지금은 고분고분해진 만큼 크게 도드라지지는 않지만……유리아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사람보다 짐승에 가까웠다.
유리아가 멍청하다거나, 인간 언저리라는 나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성보다 본능이, 지능보다 감각이 발달한 사람 특유의 기세를 풍기고 있다는 소리였지.
칼립소에서 오래 살아남은 이들 중에는 비슷한 부류가 몇몇 있어 잘 안다.
물론, 그중에서도 유리아가 유독 도드라진 케이스 같지만.
“헤에. 오라방 생각보다 열심히 사는구나?”
“하! 가문의 일을 대부분 제벨라 누님께 떠넘기고 놀러 다닐 뿐이야.”
“응? 원래 어려운 일은 제벨라 언니가 하는 거 아냐?”
“…….”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애가 바로 여기 있었다.
“그나저나 오라방 오러 수련을 부기사단장한테 배워? 오라방이 더 강하잖아.”
“강한 것과 기술에 능하냐는 별개니까. 오러는 자하브에 들어와서 처음 익힌 거야. 그러니 기초부터 제대로 다져야지.”
“헤에. 강하다고 바로 오러를 마음대로 쓰고 그런 건 아니구나.”
“당연한 소리를……유리아 너도 어렸을 때는 따로 오러를 배웠을 텐데?”
“으음. 나는 천재라서 오러는 그냥 혼자 깨우쳤어.”
“…….”
맞다. 유리아에게 혈계능력은 없어도 무재는 있었다고 했던가.
내가 무의식적으로 힘을 주어 마나를 집중시키고, 오러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처럼.
유리아는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본능적으로 오러를 다루는 법이라도 터득한 거겠지.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유리아는 뭔지 모를 혈통인 나와 달리, 찐 자하브니까.
이 세계의 귀족은 대체로 하나쯤 탈인간급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된다.
혈계능력은 그중 하나일 뿐, 다른 부분에서 이게 같은 사람인가 싶었던 적이 한둘이 아니니까.
지금은 각자 제 갈 길 가고 있지만……한때 같은 고아팸이었던 녀석 중에 몰락귀족 출신이 있어 잘 안다.
혈계능력도 혈계능력이지만, 이를 떼어놓고 봐도 수완이 뛰어난 녀석이었지.
……대신, 대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파멸적이었지만.
괜히 옛날 생각에 추억에 젖는 것도 잠시. 어느새 연무장 앞에 도착했길래 유리아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쉿쉿. 도착했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이제 가봐. 여기가 집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아카데미의 재학생으로서 실습 온 거잖아?”
“가고 싶어도 오라방이 보내줘야 갈 수 있는데?”
자신의 목에 감긴 머리카락을, 이를 이용해 만들어 낸 목줄을 가리키는 유리아.
그제야 내가 유리아에게 목줄을 채우고, 성안을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놔줄 테니까 이제 가 봐. 아카데미에 가기 싫으면 제벨라 누님한테라도 가보고.”
“응.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어. 제벨라 언니도 오랜만에 보고 싶었거든.”
고개를 끄덕인 유리아가 순순히 떨어진다. 그리고는 어째서인지 목에 여전히 머리카락을 휘감은 채, 손을 흔들었다.
“그럼 오라방! 다음에 봐!”
“오냐.”
“그때는 제벨라 언니랑 같은 침대 위에서 보는 거지?”
“그럴 일은 없을걸.”
슬슬 익숙해진 유리아의 발언에 대충 답해주고는 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문밖에서 들린 대화를 전부 들은 힐다가 있었다.
힐다가 처음으로 내게서 시선을 스윽 돌렸다.
“아냐.”
“……저는 기사로서 자하브에 영광이 재림하길 바랄 뿐입니다.”
“아니라고.”
이런 오해는 좀 풀려도 좋지 않을까.
***
유리아에게 얻어맞고, 에녹이 던진 돌에 한 번 더 얻어맞은 아카데미의 교관.
아니, 전직 교관 브렌트는 입술을 짓씹었다.
“큭……빌어먹을 자하브. 숨겨진 사생아가 있을 줄 내가 알았겠냐고.”
그는 이제 막 골절이 나아, 살짝 저릿함이 남아있는 팔을 부여잡은 자세로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섬뜩한 분위기의 집사장, 아론은 두 번 다시 눈에 띄는 순간 팔이 아니라 목이 부러질 것이라 경고했고.
멍하니 닫힌 성문을 올려다보던 브렌트. 그런 그의 짐을 가져다준 아카데미의 책임자인 델빈은 해고 통지서를 함께 건넸다.
유리아의 건이 아니더라도 사소한 부패를 여러 번 저질러 이미 수차례 경고받은 상태. 그렇기에 별다른 절차 없이 최후통첩이 날아온 것이다.
마지막 정이라며 중급 포션을 건네주던 델빈의 싸늘한 표정이 떠올라, 브렌트가 무의식적으로 방금 막 나은 팔을 움켜쥐었다.
뚜둑.
자하브 같은 괴물 딱지에 비하면 손색이 있을 뿐이지, 브렌트 역시 아카데미에 취직할 만큼 나름 실력있는 기사였기에 한 번 부러지며 취약해진 팔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미 정신적으로 몰린 그는 팔이 보내는 고통의 신호를 알아차릴 여유조차 없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이제 더는 돈을 빌릴 구석도 없는데……!”
브렌트가 소소한 뇌물을 받아먹은 이유는 간단하다.
빛나는 진짜 재능들과, 벽에 부딪힌 현실 사이에서 어느새 검을 놓아버린 그가 도박이라는 새로운 취미를 붙였기 때문.
아카데미의 교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고, 때로는 뇌물도 받아먹었으나…….
이젠 일자리도 뭣도 없으니 갚을 길이 없어졌잖은가.
이대로 수도에 돌아갔다가는, 그리하여 돈을 빌린 도박장의 사채업자들에게 해고 소식을 들킨다면.
분명 좋지 않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터.
초조해하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브렌트. 그런 그의 앞에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나타났다.
“브렌트 디에고. 아카데미의 전직 교관이자, 엘리스 패밀리에게 2만 골드의 빚을 진 도박쟁이. 맞나?”
“누, 누구냐!”
기겁하며 검을 뽑는 브렌트. 그제야 치료가 덜 된 팔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를 가로막은 사내는 태연했다.
“진정해라. 내 적은 어디까지나 에녹 자하브이니. 만일 네가 나의 일을 도와준다면, 빛을 대신 갚아주고 새로운 신분 또한 준비해 주마.”
“……내가 네놈을 어떻게 믿지?”
“믿지 않으면 네놈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일 텐데?”
그 말에 브렌트는 깨달았다. 어느 쪽이건 자신에게 미래는 없다는걸.
도망치다가 엘리스 패밀리에게 추적당해 죽느냐, 괜히 나대다가 아론이라는 집사장에게 살해당하느냐.
어차피 둘 중 하나라면 차라리 뭐라도 발버둥 쳐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브렌트는 에녹과 유리아의 얼굴을, 그 벌레를 쳐다보듯 경멸과 무관심으로 가득한 표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하브의 그 애송이들을 엿 먹일 수 있고, 내 미래까지 세탁해 준다는데 뭐든 해줘야지.”
“잘 생각했다. 우선 이걸 받아라. 그리고 내가 일러준 곳으로 향해라. 아직 수리 중인 성벽이 있을 거다.”
그리 말하며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는 사내.
이를 받아 든 브렌트는 순간 흠칫했다. 상자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아카데미에서 철저히 배척하라 가르치는 흑마력이었기 때문.
하지만 이미 갈 곳도, 떨어질 곳도 없는 브렌트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흑마법사의 무서움을 아는 만큼 더욱 든든해졌다.
“이거라면…….”
도박쟁이가 인생을 망치는 이유는 보통 자기 스스로 팔자를 꼬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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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유리아 때문에 돌겠습니다 누님.”
“어머. 그러니?”
2~3일에 한 번씩 있는 정기 티타임. 정확히는 제벨라가 그간 처리한 여러 일이나,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간략하게 요약해 알려주고.
잡담도 하고, 맛있는 것도 좀 먹고, 호시탐탐 내 이미지를 망칠 기회를 노리고, 가능하면 제벨라 대신 유리아에게 가주직을 떠넘길 각을 재보는 자리였으나.
오늘만큼은 이러한 평소의 목적과 전혀 상관없는 푸념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유리아 자하브 때문.
“예. 들어 보십쇼. 오늘 유리아가 실습이 끝나자마자 제 방에 들이닥치지 뭡니까.”
“노크 정도는 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아하. 제 말뿐만 아니라 제벨라 누님 말도 잘 안 듣는 거였군요. 아무튼 갑자기 쳐들어온 유리아가 무슨 짓을 했는지 혹시 짐작 가십니까?”
“어디 보자……한번 생각해 봐야겠구나. 에녹 네가 이리도 불평할 정도면 분명 중요한 무언가를 방해한 것일 터. 수련장이나 아니라 방 안이라…….”
달그락.
거기까지 제벨라가 자신의 찻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내려놓았다.
오러를 수련하며 예민해진 감각이 숨결에 섞인 은은한 꽃향기를 잡아낸다.
다만 이것이 차의 향기인지, 제벨라의 체향인지는 모르겠다. 언제나 붓꽃을 닮은 향기를 풍기니까.
차에 젖은 입술을 혀로 슬쩍 닦아낸 제벨라가 빙긋 웃었다.
“역시 카렌과 좋은 시간을 보내다가 도중에 방해를 받은 거니?”
“비, 비슷하죠? 오늘 실습 때 잡은 가장 강한 몬스터라면서 포이즌 웜의 머리를 가져왔으니까요.”
사실 카렌과 유니콘은 순결한 여성을 좋아한다는데, 정작 유니콘 본인은 대체 어떻게 번식하는 것인지에 대한 토론을 하는 중이었지만.
아무튼 즐거웠으니 좋은 시간은 좋은 시간 맞겠지. 제벨라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지만…….
뭐어. 포이즌 웜의 머리를 가져온 건 아무런 과장도 없는 사실이었지만.
녹색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면. 퇴화해 회색으로 변한 눈, 터널처럼 동그란 입과 그 안쪽에 빼곡히 돋아난 이빨들.
벌레를 특별히 혐오하는 편이 아님에도 보는 순간 절로 소름이 오소소 돋더라.
“그래요. 백번 양보해서 실내에 피 흘리는 몬스터 머리를 가져온 것도, 냅다 제 방문으로 열고 들어온 것도 이해할 수 있어요.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나 보죠.”
“어머? 백번이나? 누이는 에녹의 이해심이 깊은 것 같아 감동이란다.”
“……하지만, 잘라 온 머리를 툭 던지고 혼자 쪼르르 나가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군요. 하아. 그거 치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심지어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 며칠 전부터 매일 일어나는 입니다 매일.”
“에이. 그래도 귀엽지 않니. 고양이가 잡은 사냥감을 주인에게 가져다주는 것 같아서 말이야.”
“…….”
이렇게 보면 제벨라는 그냥 팔불출이 아닐까 싶다. 나한테 잘해주는 것도 그렇고, 유리아에게 무른 것도 그렇고.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자니, 어느새 턱을 괴고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던 제벨라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누님.”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이 사이좋아 보여서 다행이란다. 아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려나? 유리아가 다른 건 몰라도 감은 참 좋은 아이니. 좋은 사람을 알아본 거겠지.”
“감……인가요.”
“그래 감. 사실 재능이라는 게 다 그런 거잖니. 알기 쉽게 눈에 띄는 것도 아니고,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특출남.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감각을 우리는 감이라고 부르니 말이야.”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제벨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 말을 들으니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 의미에서 첫눈에 반한다는 것도 감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단다.”
“푸흡!”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아니, 차라리 여기에서는 뿜는 게 더 품위 없어 보였으려나. 그보다 제벨라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낸다는 건 유리아가 앵겨붙는 걸 알고 있다는 건가.
아니지. 내가 이걸 왜 숨겨야 하는가.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당당하게 굴어야…….
생각이 점점 복잡해지는 사이. 제벨라가 쿡쿡 웃으며 손을 뻗어 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약간의 과자부스러기, 그리고 두어 방울 새어 나온 찻물을 검지로 훑어내고는 묘한 웃음과 혀를 내밀어 낼름 삼키는 제벨라.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야한 걸까.
칼립소에서 조금만 깊은 곳으로 가면, 보이던 헐벗은 매춘부보다 꽁꽁 싸매고 있는 제벨라가 더 매력적이란 말이지.
역시 얼굴의 차이인가. 아니면 미드 차이?
제법 진지한 고민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제벨라는 내 입가를 닦아준 것으로 만족했다는 듯이 평소와 같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이걸 깜빡했구나. 저번에 오크 워로드가 쳐들어오며 무너진 성벽을 기억하니?”
“네? 그거야 당연히 기억하죠.”
“이번에 자재가 도착해서 슬슬 수리를 시작하려 하는데, 에녹 네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구나.”
“제 도움이요? 아니, 애초에 꽤 시간이 지난 걸로 아는데 이제야 수리에 들어간다는 건 또 무슨 소립니까.”
“으음. 실은 에녹 네겐 비밀로 했지만, 자하브의 예산이 그리 넉넉치 않단다.”
“……예?”
“아, 물론 재정 구조나 세금에 문제 있는 건 아니란다. 어디까지나 던전 역류가 연달아 터지며 큰 지출이 겹쳤을 뿐이니.”
하지만 당장 쓸 돈이 부족한 건 사실. 그리고 몬스터를 막아내야 하는 만큼 성벽을 싸구려 재질로 지을 수도 없었다.
그탓에 자금 조달이 늦어 이제야 수리가 시작된다는 뜻.
“다행히 에녹 네가 영지민들에게 인기가 좋잖니. 아무래도 제대로 된 인부를 고용하기 힘드니 관리자만 뽑고 노역을 좀 시켜야 할 것 같은데…….”
“과연. 완벽히 이해했어요.”
노역. 정확히는 영주의 권한으로 영지민들을 소집해 일 시키는 강제노역을 말하는 거겠지.
노역은 현대에도 형벌로서 남아있을 만큼 예로부터 악명높은 시스템이다.
생업을 그만두고 끌려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을 대신하는데, 심지어 빡세고 부상의 위험도 크다. 이를 좋게 생각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물론, 피라미드 건설 같은 예외도 있긴 하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급여도 넉넉하게 줬고, 다치면 치료도 해주고, 아프거나 개인 사정이 있으면 휴가도 줬다고 하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니자 예외적인 경우. 기본적으로 노역이란 최소한의 의식주만 제공해 주고 뼛속까지 부려 먹는 일.
그리고 이러한 노역은 자하브에도 있던 모양이다. 하긴. 중세 봉건 사회니 당연한 일인가.
아마 제벨라로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빠르게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노역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불만이 클 영지민들을 달래기 위해 여러 오해로 한창 평판이 좋은 나를 내세우고 싶은 것일 테고.
합리적인 판단이다. ……일이 잘 굴러가기만 하면 말이다.
“흐.”
오랜만이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큰 기회 아닌가. 나를 가주라는 자리에 묶어두고 있는 가장 큰 문제중 하나인 영지민들의 지지를 무너뜨릴 기회.
지금껏 일이 요상하게 꼬여 오히려 좋은(?) 결과를 냈지만……이번 건 결국 노역이다.
아무리 일이 꼬여도 밥 먹고 일만 하라는 명령에 기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그런 말을 하는 대상이 뻔뻔하고 오만하며 재수 없기까지 하다면?
이건 뭐, 말 다 했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말고 제게 맡겨주십쇼 제벨라 누님.”
“그래도 되겠니?”
“제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이런 건 영주가 나서야죠. 예에. 그렇고 말고요.”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탐욕스런 영주의 래퍼런스.
이거라면……!
“재정이 부족하다고 하셨죠? 저만 믿고 맡겨주십쇼 누님. 반드시 최소한의 식사와 최소한의 의료지원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뽑아낼 테니 말이죠.”
“으응? 원래 이런 건 무급 노역인데…….”
“네? 뭐라고 하셨나요?”
“……아무것도 아니란다. 최소한의 식사와 최소한의 의료지원이라고 했니? 그래. 에녹 네가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렴. 이 누이는 언제나 에녹 너를 응원하고 있단다.”
어째서인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제벨라.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해결된 모양이다.
***
건장한 영지의 건장한 청년들을 불러 모아, 무너진 성벽 앞에서 노역 이야기를 꺼내려 했으나.
평소와 다르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리아와 마주쳤다.
“여기서 뭐 하나 유리아야.”
“아, 오라방? 그냥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산책하던 중이었지.”
“됐으니까 좀 나중에 해. 제벨라 누님이 시켜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어? 그렇다면야…….”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성벽에서 멀어져 내 옆에 서는 유리아.
그럼에도 아직 진정되지 않는지 대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말았다 하기도 하고, 냄새를 맡듯이 코를 킁킁거리기도 하지만.
뭐,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 원래도 기행을 벌이는 녀석이니까.
유리아를 적당히 무시하고, 벌써부터 침울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영지민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잘 모였다!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 같지만, 너희를 이리 불러 모은 것은 성벽을 수리하기 위해 노역을…….”
쿠웅!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터져 나온 굉음. 지축이 흔들리며, 안 그래도 무너져 있던 성벽 일부가 그 충격으로 더욱 큰 균열을 일으키며 폭삭 무너진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그 너머로 섬뜩한 안광이 번뜩이더니.
-아아아아아!
뒤이어 지옥의 밑바닥을 긁어대는 것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찌나 막대한 성량인지, 방금 막 피어오른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질 정도.
그렇게 완전히 무너진 성벽과 흙먼지 너머에서 드러난 것은 뒤틀리고 부풀어 오른 채, 불길한 흑마력에 휩싸인 인간 비스무리한 무언가.
많이 변했지만 어째 익숙한 외모에 기억을 되짚는 사이.
“브렌트 교관?!”
옆에서 들려오는 유리아의 기겁에 눈치챘다. 일전에 뇌물을 받고 유리아를 알게 모르게 차별한, 그리고 내가 던진 돌에 얻어맞고 쫓겨난 아카데미의 교관이었다는 사실을.
그렇다. 교관이 아니라 교관이었던 것.
브렌트였을지 몰라도 이젠 브렌트라고 부를 수 없는 뒤틀린 존재가 검붉은 피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자하브!!! 죽인다! 죽어! 죽어라!!!
섬뜩한 기운이 담긴 저주를 내뱉는 녀석. 촉수처럼 변이된 그의 손에는 모든 빛을 흡수하는 듯한 칠흑의 검이 들려있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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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들 도망쳐! 괴물이다!”
“그런가……! 이래서 영주님께서 노역을 시켜서라도 성벽을 고치시려 한 건가!”
“뭣!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아냐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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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들 도망쳐! 괴물이다!”
“그런가……! 이래서 영주님께서 노역을 시켜서라도 성벽을 고치시려 한 건가!”
“뭣!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아냐 씨발.
실시간으로 오해가 퍼지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이를 바로잡을 여유는 없었다.
뒤틀리고 부풀어 올라 본래의 얼굴을 제외하면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브렌트였던 것.
녀석이 지독한 흑마력을 풍기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으니까.
콰앙!
팔을 여러 갈래로 찢어 놓은 것 같은 촉수가 바닥을 두드린다. 기껏 평탄화 시켜놓은 바닥이 패이고, 쌓여있던 건축 자재가 박살 난다.
제벨라가 처음으로 아쉬운 소리를 했을 정도로 비싼 고오급 재료들이 순식간에 부서지고 있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저 자리에 사람이 있었다면 사람도 함께 터져나갔겠지.
노역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내 앞쪽에 불러모은 것이 불행 중의 다행이었다.
……아니, 그래도 나름 제벨라 앞에서 큰 소리 떵떵 치고 왔는데 죄다 박살 났다는 이야기는 어케 꺼내냐고.
“하여간 흑마법사 놈들은 도움이 안 된다니까.”
흑마력을 풀풀 풍기지만, 제정신이 아니고 몸도 뒤틀린 것을 보아하니 브렌트가 사실 흑마법사였다는 건 아니겠지.
아마 모종의 방법으로 속아 넘어갔건, 멍청하게 제 발로 스스로를 팔았건 아무튼 이용당하는 것에 가까우리라.
물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나 또한 실험체 출신이라 잘 안다. 실패한 실험체는……죽음으로만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뼛속까지 틀어박힌 흑마법사 혐오를 삼키며 입을 열었다.
“유리아. 영지민들을 피신시켜, 그리고 오는 길에 기사들이랑, 상주하는 사제들도 데려오고.”
“아, 알았어!”
브렌트였던 것은 진작에 이성을 잃었는지, 자하브에 대한 저주를 늘어놓으면서 정작 내가 아니라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덕분에 영지민들이 무사히 빠져나가고, 마지막으로 유리아 또한 이 장소를 벗어나려는 순간.
[퇴장을 금한다. 모든 배우는 막이 내리기 전까지 무대에서 내려갈 수 없음이라.]
브렌트가 풍기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아니, 내가 지금껏 상대해 온 흑마법사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강대한 흑마력이 지면에서부터 치솟았다.
우웅!
마력이 전개될 때 특유의 강렬한 진동과 함께 주변 일대를 직사각형 형태로 둘러싸는 결계.
막 빠져나가려던 유리아의 몸이 안쪽으로 튕겨진다.
“악! 이,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멍청한 흑마법사가 제 손으로 자신이 묻힐 곳을 파고 있다는 증거지.”
칼립소에서 흑마법사 놈들의 함정에 빠졌을 때 본 적 있는 결계다.
몇 가지 제약을 거는 것으로 결계를 대폭 강화시키는 종류의 마법.
순수 흑마법이 아닌지, 아니면 내게 직접 적용되는 종류가 아니라 그런 것인지 흑마법에 내성이 있는 나조차 힘으로 부술 수는 없다.
……아니, 오러를 익힌 지금의 나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세월 걸릴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걱정 마. 굳이 부술 필요 없는 거니까.”
“그건 또 무슨 대책 없는 소리야 오라방.”
“우리 중 어느 한쪽이 전부 죽으면 알아서 열리는 구조일 테니까.”
[옳다. 우리의 대적자여, 요람을 불사른 무도한 자여. 순례자들이 갈고 닦은 복수의 검이 그대의 심장을 꿰뚫으리라.]
“저,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오라방? 흑마법사들이 이상한 말투를 쓴다는 건 아카데미에서 배워서 알고 있는데 해석하는 법까지는 배운 적 없는데…….”
“대충 나한테 처맞은 게 억울해서 복수하러 왔다는 소리……잠깐. 유리아 너 왜 그래?”
“어?”
언제든 뽑을 수 있도록 대검을 움켜쥐긴 했으나, 유리아의 전신은 아까부터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공포에 잠식된 것처럼.
……짐작 가는 것은 있다.
나야 익숙해졌다지만, 기본적으로 흑마력은 인간 본연의 공포를 자극하는 성질을 지녔으니.
처음 겪는 실전이 고위 흑마법사와, 놈이 다루는 장난감이라면 충분히 이해되는 반응이다.
“못 움직이겠으면 거기서 잠깐 쉬고 있어. 금방 끝내고 올 테니.”
오러가 본격적으로 순환하기 시작하자, 심장에서 시작된 열기가 전신을 휘감는다.
활력이 차오르는 것과 동시에 지금껏 의식적으로 억누르고 있던 분노가 들끓는다.
그래. 아직 던전에서 찾아낸 서류를 해석하지도 못했는데, 제 발로 찾아온 것 아닌가.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다. 칼립소에서도 보기 힘든 거물이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니.
나라고 이 귀중한 시간을 헛되이 날려 먹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자하브를 저주하며 정작 이쪽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아직도 주변을 때려 부수는 브렌트.
그런 녀석의 소란에 숨어, 목소리와 존재감을 발하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는 흑마법사.
놈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고, 나름의 답을 얻을 수 있었으니……흑마법사는 비대해진 브렌트의 안쪽에 있다.
우선 브렌트를 갈기갈기 찢어내고, 안쪽에 숨어있던 흑마법사까지 때려죽인다.
완벽한 계획에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땅을 박차려는 순간.
이 짧은 사이에 두려움을 추스른 유리아가 흔들림 없는 움직임으로 대검을 꺼내 어깨에 얹는다.
“……이제 괜찮아. 나도 싸울 수 있으니까 보조할게 오라방. 다만.”
“다만?”
“저 검. 저것만큼은 조심해야 해.”
사냥에 나선 짐승처럼 섬뜩하게 빛나는 연보랏빛 눈동자가 빛을 흡수하는 묵색 검에 고정된다.
과연. 이게 나 같은 짭이 아니라 진짜 자하브인가.
순식간에 감정을 다스리고, 위험 요소를 파악하여, 우선순위에 따라 행동을 개시한다.
이는 분명 더할 나위 없는 전투의 재능이었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흑마법 덩어리 같은 녀석이 별다른 특징도 없는 검을 저렇게 소중히 들고 다닌다?
하물며 내가 누군지 아는 녀석이 이렇게 누구 하나 죽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무대까지 준비했다고?
분명 뭔가 비장의 무기라도 준비한 거겠지.
빛을 반사하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것 또한 감각을 속이기 위한 장치일 터.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유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하긴. 이렇게 대놓고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데 모를 수가 없긴 하지.”
“?”
눈앞의 상대에 집중하느라 제대로 못 들었지만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겠지.
그저 말아쥔 주먹에 정신을 집중하며 땅을 박찼다.
콰앙!
전력으로 걷어찬 힘을 견뎌내지 못하고 부서지는 지면. 유리아가 반박자 늦게 내 뒤를 따라온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브렌트의 변이된 거체. 종양과 촉수로 뒤덮인 몸뚱이가 스스로의 분을 못 이기고 날뛰다 말고 이쪽을 바라본다.
그나마 멀쩡한 얼굴은 검붉은 피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으며, 피눈물에 모든 색을 쏟아냈다는 듯이 동공은 빛이 바래 잿빛을 띠고 있었다.
-자하브……거기 있었구나!!!
“하! 왜 이쪽을 놔두고 혼자 난동 부리는 건가 싶었더니, 눈이 안 좋았던 거냐.”
[검집이 검만큼 우수할 필요는 없으나, 너무 부족한 것도 곤란한 법. 다행히 감정은 맹목적일수록 강렬하게 타오르는구나.]
“미친놈. 맹목적이라는 게 진짜 눈이 안 보인다는 뜻은 아닐텐데.”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브렌트. 녀석이 우악스레 휘두른 검을 멀찍이 피하고는 옆구리를 파고들어 주먹을 내지르려 했으나.
우드득.
지면에서 솟아오른 뼈로 된 손들이 서로 깍지를 끼고, 단단히 엮이며 발치를 막아 세운다.
물론 유의미한 수준은 아니다. 약간 걸리적거릴 뿐이니까.
콰앙!
강하게 걷어차자, 산산조각나며 부서진 뼛조각들.
사방으로 흩어진 날카로운 파편이 일종의 산탄총처럼 브렌트의 하반신을 파고든다.
몸집이 비대해지며 다리 또한 두꺼워진 탓에 큰 피해는 없었으나……고통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크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몸을 기괴하게 뒤트는 브렌트. 어깨에 관절이 하나 더 돋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억지로 뒤틀리는 녀석의 팔.
검을 든 쪽은 아니다. 아직 녀석의 검은 땅에 박혀있으니까.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사람의 팔을 세로로 갈라놓은 것 같은 촉수가 채찍처럼 날아든다.
손뼈로 이루어진 바리케이드를 걷어차며 잠깐 움직임이 지체된 탓일까. 피하기엔 늦었다.
그렇다면 막아야지.
“흐읍……!”
한쪽 팔에 오러를 집중시킨다. 피부 위로 기이한 문양이 그려지며 피어오르는 열기. 이를 믿고 촉수 다발을 향해 팔을 휘두른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내 팔을 휘어감으며 후려치는 촉수 다발. 진득한 저주를 휘어감고, 표면에서는 강산성의 점액질을 뿜어내지만.
“이 정도쯤이야.”
저주는 흑마법 저항력을 뚫지 못해 튕겨 나가고, 산성 점액은 대부분 오러를 뚫지 못해 피부를 살짝 태우는 선에서 그쳤다.
치이익.
약간의 연기를 자아냈을 뿐, 내 재생력조차 넘어서지 못한 탓에 팔은 멀쩡하다.
오히려 팔을 휘어감은 촉수다발을 강하게 휘어잡으며 외쳤다.
“지금!”
“하아앗!”
유리아의 대검이 촉수다발을 중앙에서부터 베어낸다.
촤아악!
-크아아아! 내 팔! 또 팔이……!
[어리석은 것. 우화를 위해서는 과거의 몸을 잊고 새로운 몸이 입었음을 기억하거라.]
정신이 무너지며 고통에 취약해진 것인지 팔이 잘려 나간 통증에 발작을 일으키려던 브렌트.
하지만 녀석은 흑마법사의 말 몇 마디에 금세 고통을 잊더니, 다시금 이쪽을 노려온다.
“쯧.”
중간중간에 흑마법으로 서포트 하면서, 브렌트를 수동 컨트롤 하는 건가.
흑마법으로 힘을 부풀리고, 흑마법사 본인이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부작용을 상쇄한다라.
아마 녀석의 강함 자체는 오크 워로드와 비교해도 비슷하거나 조금 더 강한 정도겠지.
흑마법의 특징을 생각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오크 워로드보다 더 강할 테고.
하지만 나와는 상성이 좋지 않다. 이전처럼 던전 내부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백업은 없지만……그래도 차근차근 깎아내면 얼마든 쓰러뜨릴 수 있을 터.
“유리아! 뒤로 물러나라!”
“응!”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공략해 볼 생각으로 거리를 벌렸다.
지금쯤 회수했을 무광의 칠흑검을 경계하며 브렌트의 오른쪽 촉수 다발에 시선을 돌렸으나.
“허?”
분명 쥐여있어야 했을 검이 보이질 않았다.
내가 이상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잘려 나간 촉수 다발 사이를 헤집고, 산성 체액 범벅이 된 검이 화살처럼 쏘아지고 있었다.
……내가 아닌 유리아를 향해서.
-자하브!! 죽인다!! 자하브!
[분명 대적자를 노렸을 터인데……아니, 예상치 못한 비극도 나쁘지 않구나. 이대로 한 사람의 종막을 보여다오.]
의아해하는 흑마법사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유리아를 향해 땅을 박찼다.
파앙!
빠르게 가까워지는 거리. 하지만 조금 늦었다.
유리아는 대검을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신체에 투자하는 오러를 의도적으로 제한했다.
하물며 방금 막 휘두른 대검을 회수하며 몸을 빼는 도중 아닌가.
자력으로는 막아내는 것도, 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내가 대신 받아내는 수밖에.
불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믿을 뿐이다. 꾸역꾸역 살아남은 증거로 손에 넣은 저항력을, 지금껏 오러 수련에 들인 노력을.
툭.
코앞까지 날아든 검 끝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유리아를 밀어냈다.
“어……?”
멍청한 목소리로 눈을 뜬 유리아에게 씨익 웃어주고는 주먹에 오러를 담아, 그대로 검을 쳐내려 했으나.
스륵.
어찌 된 영문인지 내 주먹을 그대로 통과하여 심장에 틀어박히는 검.
그 충격에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흐하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우리의 숙적이 숨을 거두는구나! 두려움을 먹는 자를 두려움에 떨게 하던 존재여! 너 또한 한낱 필멸자임을 자각하라!]
“아, 안 돼! 오라방! 어째서 나를……차라리 약한 내가 맞았어야 했는데……!”
흑마법사의 광소, 그리고 죄책감에 비명을 지르는 유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검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 아픈데?
완전 멀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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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하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우리의 숙적이 숨을 거두는구나! 두려움을 먹는 자를 두려움에 떨게 하던 존재여! 너 또한 한낱 필멸자임을 자각하라!]
“아, 안 돼! 오라방! 어째서 나를……차라리 약한 내가 맞았어야 했는데……!”
미친 듯이 웃어대는 흑마법사. 브렌트의 뒤틀린 육체 속에 숨어들어, 마법으로 소리를 내기 때문일까.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유리아의 목구멍까지 절망이 차올랐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쓰러진 에녹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는 유리아.
혹시나 하는 기대에 몸을 의존해 에녹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보았다.
아무런 빛도 반사하지 않고 죄다 흡수하는, 마치 세상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을 발하는 검이 에녹의 심장을 꿰뚫고 있는 것을.
“아…….”
피는 한 방울조차 흐르지 않지만 상관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에녹의 가슴에 박힌 검에서 풍겨오는 불길함은 유리아의 직감을 맹렬하게 자극하는 중이었으니까.
이 세상 모든 악의와 저주, 그리고 죽음을 억지로 검의 형태로 묶어두면 이러할까.
유리아의 발달된 직감은 가까이서 보는 순간 알아차렸다. 저 검은 누군가를 베어 죽이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는 것을.
날카로운 형상은 체내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한 것. 진실로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외상이 아닌 내부를……그 근본을 부정하는 부정 그 자체였다.
“뽀, 뽑아야……아직 늦지 않았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멍한 표정으로 쓰러진 에녹(진짜 모름).
하지만 아직 숨은 붙어있다는 듯이 오르내리는 가슴팍을 보며 유리아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큿!”
검 자루를 움켜쥐려는 순간.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며 그대로 팔이 굳는다. 마치 몸이 검에 닿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움직여! 움직이라고……!”
자신의 팔뚝을 퍽퍽 때려가며 이를 악무는 유리아. 하지만, 무거운 대검조차 제 몸처럼 휘두르던 팔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가장 큰 무기는 근력이나 의지가 아닌 직감이고, 직감은 결국 생존본능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것.
오로지 자하브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검을 자하브의 직계인 유리아가 쥐는 순간……그녀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되리라.
머리로는 몰라도 본능적으로 이해한 미래에 몸이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연극이라도 보는 기분인 걸까. 마법으로 브렌트를 제약해서라도 이 모든 광경을 느긋하게 감상하는 흑마법사.
녀석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결계 안에 울려 퍼진다. 흘러넘치는 희열을 숨기지 못하는 것처럼.
[무용하다. 백의 죽음과, 천의 저주. 그리고 만의 비극을 담아 빚어낸 것이다. 아무리 우리의 대적자라 한들, 일찍이 남부를 밝게 비추었던 자하브의 후예라 한들 찾아올 필멸을 피할 수는 없을 터.]
“…….”
[자하브의 여식이여. 이제 곧 네 차례구나. 급하게 구한 것이라고는 하나 검집이 제 역할을 다했으니, 계약자로서 성의는 보여야 하니. 그래서? 어찌하겠는가?]
“…….”
[애원하겠는가? 혹은 무정타 원망하겠는가? 스스로에게 닥친 비극에 짓눌려 흔하디흔한 배우처럼 눈물을 흘리겠는가.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결국 이 안에서 일어난 모든 눈물은 나의 피가 될 터이니 말이다! 흐하하하!]
“…….”
흑마법사의 광소를 들으며,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유리아.
그녀가 바닥 깊숙이 박아둔 대검을 지팡이 삼아 균형을 잡는가 싶더니, 그대로 뽑아 들어 어깨에 걸친다.
자세를 한껏 낮추고, 대검은 어깨와 한 손으로 들어 올리며, 다른 한 손은 축 늘어뜨린 기이한 자세.
하지만 이것이 유리아가 전력을 내기 위한 자세다.
전신의 힘을 탈력시키고, 남은 모든 힘을 대검에 집중한다. 사람이 대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대검의 궤적을 그리기 위해 사람이 보조하는 주객전도의 검술.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린다. 연보랏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난다.
“……죽여버리겠어.”
[살의인가. 얼마나 화려하게 피어나느냐가 관건이겠으나 나쁘지 않군. 좋다. 어디 한번 이 목을 벨 수 있으면 베어 보아라. 그런다고 이미 어두운 골짜기를 헤매는 대적자가 돌아오는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일찍이 유리아는 에녹의 옆에 있어야 한다는 직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이는 단순히 에녹이 주변 사람에게 무르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간파하여, 그에게 가까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충동 정도였으나…….
에녹이 자신 대신 날아오는 검을 맞고 쓰러진 지금. 유리아는 알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직감은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측했을 뿐이라는 걸(그런 적 없다).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질색하면서도 자신의 기행을 받아주는 사람. 그리고 이제는 날아오는 검을 대신 맞기까지 한 사람.
유리아는 그런 이를 모른 척할 만큼 영악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남은 모든 오러를 쥐어짠 유리아의 대검이 밝게 빛났다.
“상관없어. 내가 죽어도 너는 반드시 데리고 갈 테니까.”
유리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을 각오한 전투에 임한다.
***
내가 칼에 맞아 쓰러진 이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할 겸, 분명 내 가슴에 틀어박혔는데 하나도 안 아픈 검에 대해 알아볼 겸. 일단 가만히 누워있어 봤는데…….
‘아니, 그래서 뭔데 이게.
여전히 이게 내 몸에 무슨 영향을 끼치는지 전혀 모르겠다.
백의 죽음이니 천의 저주니 하는 말을 늘어놓는 것을 보아, 제대로 이를 갈고 준비한 비장의 무기인 것 같긴 하다.
심지어 유리아마저 엄청 충격받은 것처럼 굴고, 검 자루를 제대로 쥐지도 못하는 것을 보아하니 내가 모르는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지. 일단 사람 심장에 칼이 박혔으니 충격받는 건 당연한 일인가.
하지만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 완전 멀쩡한 상태다.
고통은 물론이요, 상처조차 남지 않았다. 그저 내 주먹을 통과했듯이 검날은 내 심장을 관통했을 뿐.
애초에 충격으로 뒤로 넘어간 것도 검날이 박힌 충격이 아니라, 검날이 스르륵 통과하고 남은 검 자루가 부딪친 충격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심각한 부상을 입은 척, 시간을 끌며 정보를 캐내고 몸 상태를 확인해 보아도 달라지는 건 없다.
‘아무튼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함, 아무튼 멀쩡함.
그냥 이 둘로 귀결되었다. 아니,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 죽음(아님)에 분노한 유리아가 눈이 반쯤 뒤집혀 무리해서라도 흑마법사와 브렌트를 상대하려 했기에.
유리아가 제법 강하긴 한데……그건 어디까지나 학생 수준의 이야기.
제대로 맞붙는다면 잠깐은 분발할지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흑마법사에게 당하고 말겠지.
아무리 봐도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표정이긴 한데…….
어쩔 수 없나. 슬슬 일어나는 수밖에. 조금 머쓱한 게 목숨이 위험한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아니, 그래도 날 위해서 목숨까지 걸어보겠다고 나선 건데 너무 무안하게 만드는 것도 좀 그런가.
조금 정도는 맞춰줘도 괜찮겠지.
우웅-
끌어올린 오러를 팔다리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심장 안에서 빠르게 순환시켰다.
어찌보면 무의미한 공회전. 하지만 원래 일부러 일으키는 공회전은 멋있으라고 하는 거다.
검이 박힌 곳을 중심 삼아, 가슴팍 위에 그려지는 문양.
예전에는 정제되지 않은 체내 마력이. 지금은 오러가 흐르는 길이다.
하지만 내 미숙한 오러 조작 능력으로는 이렇게 막대한 양의 오러가, 이렇게 빠르게 순환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화르륵.
검이 꽂힌 틈새를 통해 불길이 치솟는다.
“……에?”
멍청한 소리를 내며 눈을 끔뻑이는 유리아. 흑마법사 녀석은 그래도 짬을 헛으로 먹은 게 아닌지 기겁하면서도 흑마법을 시전한다.
허공에서 엉겨 붙는 어둠이 물리적 실체를 갖고 산성 용액을 뚝뚝 흘리는 송곳니가 된다.
무엇인지 모를 괴물의 이빨이 그대로 내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으나.
“두 번은……안 당해!”
유리아의 순간 공중에 떠오르더니, 세찬 회전과 함께 휘둘러진 대검이 이를 쳐낸다.
……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내가 막을 수 있었는데.
어중간하게 들어 올린 팔이 잠시 허공을 방황하다가, 그대로 가슴팍에 꽂힌 검자루를 잡는다.
그리고 단숨에 이를 뽑아낸다.
화아악!
검상(아님)을 통해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는 불길.
마법과 오러를 흩어내는 내 힘에 직격으로 노출된 탓인지, 뽑아낸 검의 날 부분이 힘 없이 녹아내린다.
절그럭.
자루만 남은 손잡이를 땅에 떨구고는, 일부러 공회전시키던 오러를 천천히 회수해 정상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심장에서 흘러나오던 불길이 전신을 휘어감으며 내 몸을 불사른다.
정확히는 불길의 형태로 낭비되던 오러를 회수한 것이지만, 겉보기에는 화염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보일 터.
겉멋만 든 흑마법사 놈들이랑 투닥이다 보니 이런 잔재주가 늘었단 말이지.
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눈을 땡그랗게 뜬 유리아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파르르 떠는 브렌트와 흑마법사가 있었다.
저 정도로 기겁하니 살짝 뿌듯해질 정도. 이만한 기대를 배신하는 건 오히려 멋없는 짓이겠지.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흑마법사들이 좋아할 법한 지루하고 현학적인 말을 해주었다.
“태양이 저물어도 내일이 되면 다시 떠오르는 법. 이런 간단한 이치도 몰랐나.”
[부, 부활……! 어떻게…….]
황망한 목소리로 뒷걸음질 치는 흑마법사. 그런 녀석에게 다음으로 해줄 말은 정해져 있었다.
“몰랐다고?”
그럼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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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저물어도 내일이 되면 다시 떠오르는 법. 이런 간단한 이치도 몰랐나.”
[부, 부활……! 어떻게…….]
“몰랐다고?”
그럼 죽어야지.
그리 말하며 뒷걸음질 치는 흑마법사를 향해 에녹이 땅을 박찬다.
타닷!
바닥을 박살 내던 지금까지의 소란스러운 돌진과는 다른, 정숙하기 그지없는 움직임.
암살자 길드에게 시달리던 에녹이 역으로 암살자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그들의 움직임을 모방해 만든 보법이다.
하지만 전력으로 자신을 주장하는 것 같은 오러의 불꽃에 휩싸인 탓일까.
조용한 장소에서 집중이 잘 되듯, 오히려 에녹에게 유리아의 모든 신경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마치 이 세상의 주인공이 에녹이 된 것만 같은 감각.
그리고 에녹의 몸을 휘감고 있던 불꽃이 양팔에 집중되더니, 돌연 폭발한다.
콰아앙!
방금까지의 정적과 비견되는 굉음. 결계 안을 가득 채우는 열과 빛이 망막을 지지는 것 같은 감각.
“읏!”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뜬 유리아는 보았다.
브렌트의 변이된 육신. 단단한 근육과 구역질 나는 종양으로 가득 찬 복부에 큼직한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너무 강렬한 빛에 똑바로 바라보지는 못했으나……유리아 또한 나름 경지에 오른 오러 사용자인 만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러를 폭발시켰어? 아니, 분출?
오러를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에녹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그의 오러 조작 능력은 미묘한 수준이다.
오러로 형태를 잡는 것은 물론이요, 단순히 낭비 없이 이동하는 것조차 애를 먹는 게 보였으니까.
하여 에녹은 정교한 조작을 포기했다. 그저 넘쳐나는 오러를 단숨에 터뜨린 것.
죽음에서 돌아오며 심장에서 불길을 토해냈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유리아를 진정으로 압도한 것은 전혀 다른 부분이었으니.
‘웃고 있어……?
에녹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이 올라가 있다는 점이었다.
날아드는 촉수를 맨손으로 잡아 뜯고, 타들어 가는 복부의 구멍에 팔을 깊게 쑤셔 넣어 헤집고, 버둥대는 다리를 곤죽이 될 때까지 짓밟으며, 주문을 담는 입을 찢어 그 아래턱을 내던진다.
경계하던 검이 사라진, 그리하여 거리낄 것이 없어진 에녹이 발하는 원초적인 폭력.
사람이라면……아니, 지성 있는 생물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할 법한 광경이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영광스러운 승리도, 자하브에서 배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살육도 아니다.
해체.
어린아이가 잠자리의 날개를 뜯으며 즐거워하는 것처럼 에녹은 한때 인간이었던 브렌트의 전신을 해체하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브렌트를 조종하는 흑마법사 또한 순순히 당해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성벽의 자재조차 녹여버리는 강산성의 체액이 피 대신 뿜어져 나왔고, 듣기만 해도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은 저주의 진언,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이차원의 괴물 등등.
온갖 방식을 동원하여 저항했다. 하나하나가 책에서나 보던 고위 흑마법. 만약 결계 바깥에서 쏟아졌다면 어지간한 군대와 기사들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갔을 수준이나.
에녹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특수처리 된 성벽 자재조차 녹여버리는 강산성 체액을 뒤집어쓰며, 피부가 녹아내리고 근육과 뼈의 일부가 엿보이지만.
동시에 불길이 치솟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재생해 버린다.
안 그래도 인체실험을 통해 인간을 벗어난 에녹의 재생력이 오러를 익히며 한층 더 강해진 것.
세상을 저주하는 진득한 악의는 에녹의 몸을 뚫지 못해 반절이 부스러지고, 간신히 스며든 반절이 에녹의 정신을 어지럽혔으나.
퍼억!
스스로 머리를 한번 후려쳐, 오러로 불사지르더니 금세 제정신을 되찾아 버린다.
에녹이 발하는 빛에서 생겨난 그림자. 이를 통로 삼아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괴이한 존재가 현계한다.
수십 개의 눈을 지닌 상어의 머리와, 도마뱀의 몸을 합쳐둔 것 같은 혐오스런 외형.
하지만 녀석이 입을 크게 벌리며 달려들었으나……에녹을 삼키기 직전. 망치처럼 내리친 주먹의 아랫부분에 맞고 입이 다물린다.
입을 강제로 다물린 채, 관성만 날아드는 이차원의 괴물. 한 손으로는 이미 입을 다물게 하는 데 썼고, 다른 손은 브렌트와 흑마법사를 제압하느라 묶여있다.
하여, 에녹은 허리를 크게 꺾으며 입을 크게 벌렸다.
촤아악!
스쳐 지나가듯, 괴생물의 목덜미를 크게 씹고 뜯어내는 에녹.
먹물을 닮은 피가 허공에 녹아들듯 사라지더니, 지면에 처박힌 녀석이 두어 번 꿈틀거린 끝에 이차원으로 역소환된다.
멍하니 이 모든 것을 바라보던 유리아는 생각했다.
‘사람의 방식이 아냐…….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우악스럽다.
힘과 본능, 그리고 끝없는 투기를 연료 삼아 움직이는 태양을 품은 짐승.
……하지만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자하브스럽다.
평상시의 에녹이 그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크게 의식하지 않았을 뿐. 그는 감히 시조와 비견될 만한 자하브(아님)였으니까.
에녹이 들었다면 억울함에 공중제비를 돌았을 법한 생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생각은 내뱉어지지 않았기에 생각으로 끝나는 것이다.
본래의 형상을 찾아볼 수도 없는, 재생이나 재조립조차 불가능하도록 잔해마저 잔불로 태워낸 끝에 브렌트의 육편 속에서 끄집어내진 흑마법사.
기이하게도 머리와 상체만 남아, 브렌트였던 것과 내장을 이어놓은 흑마법사를 향해 에녹이 낄낄 소리내어 웃었다.
“찾았다.”
“…….”
유리아는 다짐했다. 언젠가 자신이 됐건 제벨라가 됐건 에녹의 아이를 낳는다면, 숨바꼭질은 못 하게 해야겠다고.
***
“찾았다.”
머리와 상체만 남아 내장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의 흑마법사를 보며 뿌듯함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힘들었다.
폼 잡는답시고 오러를 너무 공회전시킨 탓일까. 적당히 폼 잡았다 싶어 회수하려 했는데 생각처럼 굴러가질 않더라.
원심력이라도 붙은 건지, 계속해서 바깥으로 터져나가려는 오러. 그 흐름에 밀려 자꾸만 분출했던 오러의 회수가 늦어지는 것이다.
하여, 발상의 전환이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브레이크가 안 밟히면 가드레일에 비벼서라도 멈춰야 하는 법.
자꾸만 흘러넘치려는 오러를 억지로 체내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눈앞의 상대에게 전부 쏟아내기로 했다.
빠르게 회전하는 오러에 슬그머니 방향성만 제시해 주자, 그대로 브렌트였던 것에 들이박고는 얌전해졌다.
오러가 제어를 벗어나 폭주할 것 같으며, 일단 적에게 때려 박아라……메모메모.
이후에는 뭐어.
흑마법사 놈이 내게만 정신을 집중하기도 했고, 경계하던 비장의 한 수가 헛발질이었다는 것도 알았으니, 평소처럼 싸웠다. 그리고 지금에 다다른 것이다.
마력을 전부 소모한 건지, 체념한 것인지 담담히 이쪽을 올려다보는 흑마법사. 마치 조금이라도 더 내 모습을 눈에 담으려는 것 같아 살짝 소름끼쳤지만……원래 소름 끼치는 놈들이니 그러려니 한다.
애벌레 같은 모습이 된 녀석의 목을 쥐고 들어 올렸다.
“일단 묻겠는데, 난데없이 자하브에 쳐들어온 이유는 뭐지? 혹시 던전 역류를 일으키던 것과 관련이 있나?”
[던전 역류? 그런가……모르는 건가…….]
“아오. 이 새끼 또 이러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흑마법사 놈들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아마 그만큼 돌아버린 놈들이라 그런 거겠지.
아무튼 그렇다 보니 심문이 거의 불가능하고, 가끔은 내 질문을 통해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추측해내 지금처럼 비웃기도 한다.
물론, 나는 나대로 얻어가는 것이 있으니 한 번씩 떠보는 것이지만.
“과연. 던전 역류를 이용하려 한 건 맞지만, 일으킨 건 너희들이 아닌가 보네.”
[…….]
“그럼 자하브에 쳐들어온 이유는……뭐, 이건 안 물어봐도 알겠구만.”
녀석이 준비해 온 것. 그리고 나를 죽였다고 착각하며 내뱉은 말들을 종합해 보면 답은 금방 나온다.
“나를 그렇게 죽이고 싶었어? 이거 우연이네. 나도 흑마법사만 보면 죄다 죽여버리고 싶어지는데.”
[대적자여. 너는 언제나 예상외의 존재였다. 제물이 될 운명을 거슬러, 우리를 제물 삼았으며. 이제는 우리에게 받은 힘으로 피의 근원을 일깨워 법도마저 희롱하는구나. 머지않아 그 대가를 치르리라.]
“저런. 그랬구나. 근데 그거 아냐? ……나는 네놈들이 만든 괴물이라는 걸.”
[…….]
침묵하는 녀석. 목을 잡고 있는 손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뿌드득.
뼈가 조금씩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흑마법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놈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내가 곧 네놈들의 대가다.”
콰직!
완전히 목이 부러진 녀석의 몸이 축 늘어진다.
그러고 브렌트에 이어 흑마법사까지 쓰러뜨리자, 조건을 만족한 것인지 흑마력으로 만든 결계가 흘러내리듯이 소멸하기 시작했다.
“후우.”
깊은 한숨과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을 이완시켰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오러를 공회전시키고 그걸 또 바깥으로 방출시키는 등.
아직 오러에 미숙한 내겐 다소 버거운 활용 때문인지 정신적으로 피로했기 때문.
불발 나긴 했지만, 이번 습격은 흑마법사들 입장에서도 상당한 준비를 거친 것 같으니 한동안은 별일 없겠지.
긴장이 풀려서일까. 평소라면 그냥 머릿속으로만 하던 말이 자연스레 새어 나왔다.
“아……빨리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카렌 볼따구 가지고 놀고 싶다…….”
그리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완전히 소멸한 결계. 그 너머에는 완전 무장을 마친 기사단과 이를 이끄는 제벨라.
……그리고 자신의 양 볼을 가리며, 힐다의 뒤에 샤샥 숨는 카렌이 보였다.
“뭣.”
방금 걸 들었다고? 아니, 설마 내가 안쪽에서 싸우는 모습까지 다 지켜본 건가? 이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멍하니 눈만 끔뻑이는 사이.
슬금슬금 다가온 유리아가 내게 볼을 내밀었다.
“불쌍한 오라방. 열심히 싸워놓고 차였네. ……내 거라도 만질래?”
“아니. 넌 만지는 맛이 없어.”
“너무하지 않아?!”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유리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묘하게 빵떡한데다가, 잡아당기면 쭉쭉 늘어나는 카렌을 어케 이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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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새 여동생의 성벽이 뒤틀려 있다는 의심이 들었을 때의 올바른 대처법을 고르시오.
1)패배 야스가 좋은 거니? 아니면 근친 야스가 좋은 거니?
2)아하? 패배 근친 야스가 좋은 거구나?
……어느 쪽을 골라도 정답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카렌은 유리아가 약간 성격이 급할 뿐, 기본적으로는 좋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웃음기라도 참는 것처럼 어색하게 틀어진 입가, 기대와 열망으로 반짝이는 동공, 그리고 아까부터 단 한 순간도 내게서 떨어뜨리지 않는 시선까지.
“이런 씹.”
카렌카렌아. 나를 속인 거니??
괜히 카렌을 노려보았지만, 내 시선을 무어라 해석한 걸까.
태연스레 나선 카렌이 지금 이순간에도 유리아를 말리고 싶지만, 내 눈치를 보며 차마 나서지 못하는 아카데미 학생들과 교관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조금 떨어져 주십시오. 가주님과 유리아 아가씨와의 대련의 여파가 미칠지도 모릅니다.”
“그으……안 말려도 되는 겁니까?”
델빈이라고 했던가. 아카데미에서 온 교관 중 대표 격으로 보이는 이가 조심스런 어조로 되물었으나, 카렌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곳은 자하브이고, 가주님께선 뜻을 정하셨습니다.”
누가 들으면 거창한 결정인 줄 알겠잖아. 그냥 적당히 궁디팡팡이나 하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아, 혹시 책임소재가 걱정이라면 안심하시길. 가주님께서 나선 이상 이는 가주님의 일입니다.”
“그, 그렇습니까?”
“예. 오히려 행운이군요. 다른 누구도 아닌 4대 대공가의 일원인 가주님께서 직접 대련을 보여주시는 것이니.”
“어……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학생들을 뒤로 물리는 교관들.
그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카렌 또한 자하브의 가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하브는 근친 명가라는 멸칭이 붙을 정도로 미친 집안이라는 것을……!
카렌 입장에서는 내가 제벨라와 결혼하건, 유리아와 결혼하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
어찌됐든 다음 세대의 자하브는 피가 다시 짙어질 테니까……!
이게 그 상식 개변 세상인가 뭔가인가.
머리는 어질어질 했으나, 판은 깔려있고 해야 할 일 또한 명확했다.
일단 유리아를 쓰러뜨린다. 그리고 바로 학부모 면담……아, 둘다 없어서 굳이 말하자면 내가 보호자인가.
아무튼 1대1 면담 시간을 좀 가져야겠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공개 구혼 대련을 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으니까.
알현실의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단차 위에 올려진 의자에서 일어나, 짧은 계단을 내려가 바닥 위에 선다.
키 차이는 있어도 딛고 있는 바닥은 같아진 나와 유리아.
제벨라를 닮은 연보랏빛 눈동자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 오라비가 삼초식을 양보하마 유리아.”
“삼초식이 뭐야?”
“아”
괜히 폼 잡고 싶어서 전생의 무협지에서 봤던 대사를 따라 해 보았으나, 이곳은 판타지 대륙이라 그런지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
“……3번까지 공격을 받아주기만 하겠다고. 그러니까 전력으로 와봐. 하늘 같은 오라비와의 격차라는 걸 알게 해줄 테니.”
“흥! 하늘은 무슨. 애초에 밖에서 굴러들어 온 주제에.”
누가 들으면 아무리 가주라도 사생아 출신을 무시하는 콧대 높은 귀족으로 여기겠으나…….
나는 보았다. 어째서인지 군침을 츄릅 삼키는 모습을.
……진짜 정신 나갈 것 같네.
내가 한숨을 푹푹 내쉬건 말건 땅에 박아 넣은 대검을 뽑아 올리는 유리아.
자세를 한껏 낮추고, 자신의 몸뚱이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을 어깨에 비스듬히 걸친다.
동시에 변화하는 기세.
분명 조금 전까지만해도 은연중에 흘러나오던 건들거림이나, 열망 비스무리한 것이 사라지고 순수한 투지만이 남는다.
흉포한 짐승을 작은 인간의 형태로 구겨 넣은 듯한 사나움. 노골적으로 급소를 훑어보는 시선에는 은은한 위압이 담겨있었다.
자하브의 혈계능력을 발현시키지 못했음에도 이 정도인가.
확실히 자하브라는 혈통이 대공가에 어울리는 사기 혈통이긴 한가 보다.
……그런 자하브의 혈통으로 착각 받는 내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지만.
들키면 안 되는 입장이니 고맙긴 한데, 왜 아무도 의심 안 하냐고.
잠시 다른 생각을 한 순간. 이를 귀신같이 눈치챈 유리아가 달려들었다.
퉁.
큼직한 대검을 들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몸놀림. 두어 번의 발놀림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유리아의 몸이 빙글 회전한다.
자신의 몸 만큼이나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기 위해 팔 뿐만 아니라 전신을 사용하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일렁이는 오러를 머금은 대검이 내 상체를 짓이길 듯이 쏘아졌지만.
“흠.”
오러를 살짝 끌어 올리며 한쪽 손에 집중한다.
회로를 연상시키는 기이한 문양이 심장에서부터 팔까지 뻗어나가더니,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텁.
날아들던 대검이 내 손에 잡혀 그대로 정지한다.
“……에.”
어벙한 소리를 내는 유리아.
그녀의 대검 위에서 일렁이던 오러는 내 손에 잡히며 사그라들었고, 걸리는 건 뭐든 찢어발길 듯한 기세로 휘둘러진 대검은 미동조차 않는다.
검을 빼내기 위해 끙끙대는 유리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확실히 재능은 있네. 하지만 순수한 힘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
“이거 놔……!”
“그래.”
대검을 놔주자, 힘을 주던 반동 탓에 스스로 뒤로 튕겨진 유리아.
하지만 묘한 스텝을 밟더니, 이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처음보다 더욱 강렬하게 대검을 휘둘러온다.
물론, 내겐 이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일격이었다.
텁.
방금과 똑같은 자세로 재차 대검을 잡힌 유리아. 당황하는 대신 몸을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입꼬리는 히죽이고 있었지만.
이를 애써 무시하며 유리아의 검을 평가했다.
“대충 알겠네. 어차피 신체 능력이 아니라 오러를 이용해 더 큰 힘을 내는 것이니, 차라리 하나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별다른 방어구 없이 대검 하나만 든 건가.”
“겨우 두 번 만에 알아차린 거야?”
“워낙 특이한 방식이니까.”
“그럼 이것도 한번 막아보던가!”
다시금 거리를 벌린 유리아가 이번에는 대놓고 동작이 큰 자세를 취했다.
자신의 몸이 아닌, 대검에 무게 중심을 두는 기이한 자세. 비틀거리듯이 달려든 유리아가 한보 반 거리 앞에서 땅을 박차고 공중에 뜬다.
전신과 대검의 표면에만 머물던 오러가 돌연, 유리아의 몸을 휘감기 시작한다.
허공에서 흩날리는 밝은 금발. 지금 이순간. 유리아의 대검은 무기가 아닌 하나의 송곳니였다.
“하아앗!”
내 정수리를 정확히 노리고 떨어져내리는 투박한 대검.
회전하는 오러에 감싸인 탓인지 이전과는 비교조차 안 될 광채를 뿜어낸다.
방어도, 회피도, 심지어는 탈진마저도 고려하지 않은 묵직한 한방.
이쯤 되면 아무리 나라도 약간 진심을 내야 할 터.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오른쪽 주먹을 한계치까지 뒤로 당긴다.
마치 투창이라도 하는 듯한, 혹은 화살이라도 쏘아낼 법한 자세.
본래라면 취하지 않았을 자세다. 실전에서는 너무도 비효율적이니까. 차라리 지금의 유리아처럼 전신을 비틀어 모든 힘을 주먹에 집중시키는 편이 훨씬 나을 터.
하지만 굳이 이런 자세를 취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단순히 효율적인 자세를 찾고, 육신을 단련하고, 그렇게 조금 더 강하게 힘을 주는 것이 전부였던 이전과 달리.
조금이나마 오러를……체내의 마나를 의도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 지금은 약간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됐으니까.
“흐읍!”
흑마법사와의 실전을 통해 익숙해진 오러의 감각이 심장을 떠나 팔 전체를 뒤덮는다.
붉게 물든 문양에서 느껴지던 열감이 단숨에 그 기세를 부풀린다.
화르륵.
문양 위로 피어오르는 불길. 정확히는 집중된 오러가 문양을 타고 흐르다가 밖으로 삐져나온 것이다.
물론, 이는 엄밀히 말해서 기사들이 사용하는 유형화된 오러로 육신을 코팅하는 기술이 아니다.
그저 과할 정도의 오러를 집중시켜, 넘쳐 흘렀을 뿐인 현상이니까.
하지만 나는 항상 이렇게 싸워왔다.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마력을, 개조당해 얻은 것이라 제대로 세밀한 조정이 불가능한 근력을.
그저 있는 힘껏 때려 박아 눈앞의 상대를 분쇄하는 식으로 말이다.
투박하고, 단순할지 몰라도 내겐 가장 익숙한 방법.
오러의 제대로 된 사용법 같은 건 나중에 배우면 그만이지.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움켜쥔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넘쳐흐르는 오러가 격발 되며 폭발에 가까운 굉음을 낸다.
그리고 불길을 휘감은 주먹이 그대로 유리아의 대검 옆면을 후려쳤다.
콰직!
“꺄아아악!”
“아.”
흥이 올라 너무 힘을 줬던 탓일까. 부서진 대검과 함께 무방비한 자세로 옆으로 날아가는 유리아.
이대로라면 벽을 부수고 처박힐 것이다. 그리고 모든 오러를 대검에 집중한 유리아는 이만한 충격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을 터.
이대로면 중상이라는 생각에 혀를 차며, 잽싸게 땅을 박찼다.
파앙!
바닥에 얕은 거미줄 모양 금을 내며 쏘아지는 몸뚱이. 공중에서 허우적대는 유리아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등쪽으로 벽에 충돌하며 충격을 대신 흡수해 주었다.
콰앙!
등짝을 내달리는 찌릿한 감각. 좀 아프긴 한데 이 정도면 참을만한 수준이다.
“어, 어째서……?”
내 품에 안겨 눈을 휘둥그레 뜨는 유리아를 향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야 이 오라비가 준비한 사랑의 매는 따로 있거든.”
“사랑?!”
“그쪽에 집중하지 말라고…….”
유리아를 빙글 뒤집어, 내 무릎 위에 엎드린 자세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팡! 팡! 팡!
“아팟! 진짜 아파! 설마 이런 취향이야?! 언니는 몸이 약해서 안 되는데!”
“제벨라 누님을 내가 왜 때려……? 너처럼 맞을 짓한 녀석이나 맞는 거지.”
“흐읏?!”
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히는 유리아. 그런 그녀의 엉덩이를 다시 한번 때렸다.
파앙!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탄력 있는 감각과 온기.
이후. 메챠쿠챠 설교했다.
……여기에 자하브의 기사들은 물론, 아카데미 사람들도 있다는 걸 깜빡 잊고서.
***
엉덩이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고통에 유리아는 생각했다.
‘와! 공개 수치플!
아카데미에서 엄한 것만 배워온 유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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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저점매수
자잘한 것들이 아닌, 고위 흑마법사를 쓰러뜨린 건 좋다.
놈들이 던전 역류를 직접 일으킬 능력은 없다는 걸 안 것도 좋다.
하지만 순수하게 티배깅과, 내 죽음(아님)에 분노해 목숨을 걸어준 유리아를 위해 일종의 쇼맨십이 생중계되고 있었던 건 문제다.
“카렌아……나는 나약하고 병든 사람이다.”
“요즘 나약하고 병든 사람은 몬스터 수준으로 변이된 사람을 맨손으로 찢나 봅니다.”
“들어보렴. 육체적인 힘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밤마다 나는 복수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껍데기뿐인 목표에 시선을 빼앗기고, 돌아가지 못하는 과거를 향해 끝없이 발을 옮기는 망령에 불과하단다.”
“농담도 잘하시네요. 어제도 자하브의 식량 창고를 거덜 낼 기세로 고기만 골라 드시고는, 배를 까놓고 시끄럽게 코 골면서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배불리 먹고, 푹 잔다. 저는 이만큼 속 편한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뭐야. 나 코 골아? 아니 애초에 내가 코 골며 자는 건 어떻게 알았니? 설마…….”
“주인의 건강을 염려하는 것은 집사의 덕목이라 그런 것일 뿐이니, 오해하지 말아 주시길.”
“…….”
대체 무슨 착각을 하는 거냐는 듯, 별꼴 다 보겠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이며 이쪽을 훑어보는 카렌.
이 와중에 무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참 꼴받았다.
“……조용히 하고 마저 들어. 어디 보자. 어디까지 말했더라?”
“으븝. 읍읍.”
“자기 손으로 입 막지 말고 그냥 말해도 돼.”
“예. 돌아가지 못하는 과거를 향해 방황하는 망령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가주님.”
“맞아 그랬었지. ……그런데 이다음이 뭐였지?”
“그걸 저한테 물으셔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는 카렌.
사실 조금 전의 말은 전생의 내가 지구에서 뒹굴거리며 읽었던 인터넷의 뻘글의 일부다.
대충 엄청 수려한 문장으로 헛소리하는 내용이었는데…….
아쉽게도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그사이에 까먹은 모양이다.
잠시 떠올리려 고민했으나, 여전한 막막함에 그냥 결론만을 말했다.
“카렌카렌아.”
“네.”
“오직 네 볼따구만이 정신적으로 지친 나를,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단다.”
“또 그 소리십니까…….”
한숨을 푸욱 내쉰 카렌이 무언가 작성하던 수첩을 잠시 덮고는 말을 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 제 볼을 주무르려고 하시는 건가요.”
“원래 사람은 말랑말랑한 걸 만지면 기분 좋아져.”
“예를 들면 여자의 가슴 같은 것 말인가요?”
“어? 어……그렇지?”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았던 터라 순간 버벅이는 목소리. 하지만 정작 스트레이트를 날린 카렌은 태연한 어조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으음. 그랬군요. 가주님의 취향은 가슴이 말랑한 여성…….”
“그런 건 또 뭐 하러 기억하는 거냐?”
“그야 슬슬 가주님의 반려분을 물색해 보아야 할 시기니 말입니다.”
“제벨라 누님은 어쩌고?”
“두 번째 반려를 말하는 겁니다.”
“두 번째라니…….”
그럴 생각은 없고, 상황이 찾아오기 전에 어떻게든 몸을 뺄 생각이지만 아무튼 일단 나는 제벨라와 약혼 상태다.
그런데 벌써부터 다음 아내를 찾는다고? 이게 맞아?
어이가 없어 카렌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가 눈을 끔뻑이며 똑같이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서로 눈동자를 바라보며 끔뻑이기를 반복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입을 벌리는 카렌.
“아. 최근 가주님께 혼담이 많이 들어와서 일차적으로 거를 필요가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 당장 들이자는 의미가 아니라요.”
“역시 그렇지? ……잠깐. 혼담? 갑자기? 왜?”
“그야 일전에 가주님께서 보여주신 위업은 이미 제국 전역에서 유명하니 당연한 일 아닙니까. 당연히 혼담이 쏟아질 만하죠. 순수하고 강력한 피를 원하는 귀족은 얼마든 있으니 말입니다.”
“진짜 왜?!”
백 보 양보해서 자하브령에서, 혹은 남부에서 유명해진 건 이해하겠다.
하지만 제국 전체에서? 대체 어떻게? 무슨 수로 알고?
어이없어하는 내 모습에 카렌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전투의 피로로 눈치채지 못하셨던 건가요. 그 자리에는 자하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의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이게 뭔.”
그러니까 내가 아무도 안 볼거라 생각하고 폼 잡으며 했던 모든 언행을 자하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제국 각지에서 뽑힌 유수의 인재들도 봤다는 거지?
그걸 또 쪼르르 달려가 본가에 알렸고, 그 탓에 제국의 이름있는 귀족들 대부분이 내가 흑마법사 상대로 반쯤 정신줄을 놓고 싸우는 모습이나, 부활(아님)을 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소리잖아.
음음. 무슨 상황인지 완벽히 이해했어.
“카렌.”
“네?”
“명령이야. 볼따구 이리 대.”
“……읏!”
명령이라는 말에 움찔한 카렌. 이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느릿하게 이쪽으로 향해 얼굴을 들이민다.
눈을 질끈 감은 것이 표정 변화가 드문 카렌에게서는 보기 힘든 얼굴이다.
그대로 카렌의 양쪽 볼을 잡고 천천히 잡아당긴다. 저항 없이 쭉쭉 늘어나는 뺨.
이 맛이지. 드디어 좀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네.
카렌을 번쩍 들어, 마주 보는 자세로 무릎 위에 앉혀놓고는 마구 볼따구를 주무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죽었다 살아났다고 착각할 만큼 강한 혈계능력을 보유한 나를 향해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악수의 요청.
뭐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모르고 있었지만, 내게는 귀족의 피가. 그것도 상상 이상으로 진하게 흐르고 있던 모양이니까.
하지만 그게 자하브의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내가 지닌 대부분의 힘은 인체실험을 통해 강제로 얻거나, 따로 죽어라 단련해 손에 넣은 것.
혈계능력을 타고난 것으로 보이는 건 분명 형님이었다.
사실 나도 또 다른 자하브의 혈족이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였다던가.
좀 정신 나간 생각인 것 같지만, 형님이 갑자기 혈통의 어두운 비밀에 눈을 떠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나를 낳았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야 나는 흑마법사 조직에 팔려 갈 때까지 지구에서의 기억을 제외하면 평범한 아이였으니까.
근친으로 만들어진 농후한 자하브의 핏줄을 타고났다고 하기에도 문제가 많은 것이.
일단 나이만 어렸지, 머리는 그대로인 내게 어머니와 형님은 그냥 평범한 모자 관계로 모였다는 것.
무엇보다 나와 형님의 나이 차이가 고작 1살밖에 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내가 귀족 혈통일지는 몰라도 자하브가 아니라는 건 확정이라는 뜻.
그런 상황에서 내게 전국적인 관심이 쏠리는 것은 영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다.
언젠가 실각당해 내려와야 한다면 더더욱 그러하고.
하지만 핀치는 찬스. 위기란 곧 기회의 다른 이름인 법 아니겠는가.
자하브의 남자가 전부 죽었다는 소식에 유리아의 아카데미 생활이 꼬였듯.
‘남자가 없어 어떻게든 찾아서 가주로 내세운 사생아가 너무 강함’이라는 소식은 다른 이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겠는가.
분명 저점 매수의 기회처럼 보이겠지.
자하브는 제국의 4대 대공 가문이라 불릴 정도의 명문. 하지만, 최근의 연속된 던전 역류를 막느라 재정적, 군사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제 막 가주직에 오른 신임 자하브 대공은 사생아 출신이라 배운 것이 없고, 내부에서의 균열도 적잖이 있겠지만…….
대신 지닌 힘은 무시할 수 없으니, 자하브의 권세가 약해진 지금 연을 맺어두면 나중에 더 큰 이득이 되어 돌아올 거라 여기는 것이다.
그래. 내게 혼담을 보내오는 귀족들은 지금 당장의 이득이 아니라, 언젠가 찾아올 미래의 떡상을 믿고 내게 투자하려는 것이다! 전생의 내가 처음 주식할 때처럼……!
그리고 전생의 나처럼 무릎에서 산 게 아니라, 사실 어깨에서 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으흐흐.”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마구 만지작대던 카렌의 볼따구를 놓아주었다.
“카렌카렌아.”
“……네.”
“혼담 그거 다 취소해.”
“네?”
“대신 자하브와 연을 맺고 싶다면 친구비를 내라 그래. 당연한 말이지만 많이 내는 만큼 우정이 깊어질 거라는 말도 덧붙이고.”
“친구……말씀이십니까?”
“어. 친구비만 내면 다 친구지 뭘.”
가볍게 대답했건만, 어째서인지 카렌이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제벨라 아가씨께, 아카데미의 학생들에게, 그리고 서신을 보내오신 모든 귀족가에 그리 전하겠습니다.”
“응? 어, 응.”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는 총총걸음으로 멀어지는 카렌의 뒷모습에 씨익 웃어 보였다.
좋아. 이제 남은 건 돈은 받아먹었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만 남았다.
나도 바보는 아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내가 뭔가 의도적으로 조지려 하면 오히려 역효과로 좋은 결과만 나온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돈은 받았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레 불만이 쏟아질 테고, 이는 고스란히 나의 평판 문제로 이어질 터.
그렇게 내 주가는 알아서 떡락한 끝에, 최종적으로는 상장폐지에 이를 것이다……!
***
에녹의 계획 자체는 합리적이었으나, 문제는 그가 생각치 못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는 점이다.
우선 아무도 자하브에게 품위라던가, 신의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친구비? 심심하면 근처 영지 삥 뜯는 건 자하브의 오랜 전통이었다. 빌린 돈을 갚으라고 했더니 협박이 날아오는 건 연례행사고.
그럼에도 자하브와 연을 맺으려던 가문이 항상 존재해 온 이유는 간단하다.
귀족 사회에서는 대공 같은 최고위 귀족의 이름을 빌린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기 때문.
헌데, 에녹은 친구비를 받으면 자하브와의 친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금액에 따라 줄까지 세워주겠노라 한 것 아닌가.
돈을 받은 뒤에는 침묵할 뿐, 너네 돈 좀 많아 보인다? 같은 소리를 하며 더 내놓으라고 깽판을 부리지도 않았고.
애초에 고위 귀족과의 연을 트기 위해서는 막대한 뇌물이 필요하단 것은 이 세계의 상식.
그런 의미에서 에녹은 암암리에 이루어지던 것을 양지로 끌어 올려 공정한(?) 경쟁을 시킨 것뿐이다.
무엇보다 이전 세대의 자하브였다면 여식도 받아 가고, 지참금 명목으로 돈도 뜯어갔을 터.
에녹은 다 필요 없고 순수하게 돈만 내놓으라고 하는 셈 아닌가.
당연히 상대적으로 에녹의 평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시조를 넘어선 자,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품은 사내, 흑마법사들이 두려워하는 대적자……그런 사람이 돈만 주면 친구가 되어준다고요?”
제국에는 돈이라면 썩어 넘치도록 쌓은 집단. 마탑이라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
“당장 스승님께 연락해야 해요!”
그리고 마탑에는 해결하지 못한 오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어쩌면 새로운 친구가 이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잖은가.
공문을 읽던 아카데미 소속의 유망한 마법사 소녀가 한참의 고민 끝에 명상 중이던 자신의 룸 메이트에게 물었다.
“유리아. 자하브 대공 각하……그러니까 너네 오빠는 어떤 사람이야?”
“내 남편임.”
“?”
“아, 형부기도 하고.”
“???”
뭐, 그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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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저점매수(2)
“에녹! 내 동생! 여기 있었구나. 누이가 사랑한다고 말했었니?!”
“제벨라 누님……?”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 오러 수련만 좀 하고 개백수마냥 정원을 산책하던 도중.
살짝 스커트를 들어 올린 제벨라가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것 같은 스텝을 밟으며 내 쪽을 향해 달려왔다.
평소에는 집무실이 됐건, 본인 방이 됐건 항상 실내에만 틀어박혀 있던 제벨라가 별일 없는데도 외출한 것도 놀랐지만.
언제나 품위 있게 사뿐사뿐 걸어 다니며, 부드러운 미소 정도만 짓던 제벨라 아닌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통통 튀어오는 모습에는 아무리 나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가요 제벨라 누님.”
“후후. 에녹도 참. 전부 네 덕분이란다.”
“네?”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제벨라의 뒤를 반보 뒤에서 따라오던 아론 집사장이 고개를 꾸벅이며 입을 열었다.
“제벨라 아가씨께서는 가주님께서 과감한 결단으로 자하브의 재정난을 해결해 주신 것에 기뻐하시는 겁니다.”
“……허?”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여전히 헤실거리는 제벨라가 말을 덧붙였다.
“이번에 에녹 네가 받기로 한 친구비? 라는 게 있잖니. 정말 많은 상단과 귀족들이 우애의 증거를 보내왔단다.”
“아.”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동시에 의아함도 차올랐다.
지금이 친구비를 받기로 발표한 직후라면 모를까, 슬슬 아무것도 안 하는 내게 실망해서 한소리 나올 쯤일텐데?
“설마 아직도 친구비를 보내오는 곳이 있는 겁니까?”
“있다마다! 약간 규모가 부족한 이들은 줄까지 서가며 서신과 금화 주머니를 보내올 정도란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어머?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니니?”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제벨라. 길게 늘어뜨린 백발이 바람결에 살랑인다.
“그거야 에녹 네가 자하브의 황금기를 다시 가져다줄 사람이기 때문이잖니.”
“……제가요?”
“그래.”
“……황금기를요?”
“그렇단다.”
“……왜요?”
“왜기는. 요즘 나도는 소문을 한번도 못 들어 봤니?”
어깨를 으쓱인 제벨라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뭔가 심상치 않은 수식어를 나열하기 시작한다.
“선조회귀, 금빛 태양, 흑마법 학살자, 고귀한 짐승, 그리고…….”
“거, 거기까지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누님.”
하나하나가 낯부끄러운 중2병 감성의 별명에 손발이 절로 뒤틀렸다.
물론, 제벨라가 나를 의도적으로 놀리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원래 이런 건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중세 판타지 세상에서 중2병스러운 타이틀? 이건 그냥 순수한 칭송의 증거일 뿐이다.
즉, 정말로 세간 사람들은 나를 아직도 엄청나게 올려 치고 있다는 소리.
“대체 왜 그런 별명이 붙은 거죠?! 저 요즘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으응?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해봐야 겨우 한 달 남짓 아니니. 이제 막 소문에 불이 붙을 시기란다.”
“……!”
그렇다. 마법은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수의 특권층에게 허락된 편의.
대부분은 입에서 입으로, 가끔은 서신으로 소문이 퍼지는 것이 이 시대의 상식.
처음에야 내가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본 아카데미 학생들과 그들의 집안에만 퍼졌던 정보가.
슬슬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상인들의 입을 통해 평민들에게도 전해지고, 자연스레 그 지역의 귀족들의 귀에도 들어가기 시작한 것.
그 결과 일차적으로 친구비를 보내왔던 이들이 잠잠해질 무렵, 소문을 접하고 뒤늦게나마 친구비를 보내는 이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게 뭔……? 잠깐, 그래도 처음 친구비를 보낸 곳은 불만이 많겠죠? 제가 아무런 대응도 뭣도 없이 가만히 있으니까요.”
“그럴리가. 오히려 자신들이 먼저 자하브와 연을 텄다는 것을 사교계에 자랑하고 있단다.”
“……혹시 사교계에서 제 소문이 퍼지고 있다던가?”
“물론이지. 다른 곳은 몰라도 중앙 사교회에서는 에녹 네가 참 뜨거운 감자라는구나. 협력 관계를 맺은 코넬리아 황녀님께서 직접 서신에 담은 내용이니 확실하단다.”
“…….”
이제 알았다. 그냥 제국이 내 적이고, 세상이 나를 억까하는 거였구나.
아니, 억빠인가?
머릿속으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던 것도 잠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어 싸매는 내 귓가에 제벨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우. 이렇게 잘 되고 있지만……한가지 고민이 있어 이렇게 에녹 널 찾아왔단다.”
“네? 고민이요?”
“그래. 에녹. 내 동생아. 네가 이 누이를 믿고 대소사를 맡겨준 건 고맙지만, 아무래도 이건 내 선에서 처리하기에 너무 큰 일 같아서 말이야.”
그리 말하며 제벨라가 품에서 고급스러운 서신 하나를 꺼냈다.
뭔지 모르겠지만, 묘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걸 보아 평범한 종이가 아니라 모종의 마법이 걸려있는 마법일 터.
다만, 제벨라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꺼내고 내 직감도 잠잠한 걸 보아 별로 위험한 마법은 아닌 모양.
“이 누이가 읽어줄게. 잠시만 기다리렴?”
“아뇨. 이 정도는 이제 스스로 읽을 줄 알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문맹은 탈출했다는 생각에 약간 으스대며 제벨라에게서 서신을 뺏어 들듯 가져왔다.
“어머나…….”
살짝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면서도, 이내 흡족한 미소를 짓는 제벨라.
괜히 간지러운 기분에 그 시선을 피하고 서신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대충 요약하면 친구비를 많이 줄 테니, 자기들 영지의 오랜 골칫덩이를 치워달라는 내용.
“아니, 저 일단 대공 아닌가요. 용병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단 끝까지 읽어보렴. 그럼 이해하게 될 거란다.”
“예, 뭐.”
본론을 지나 형식적인 인사말. 그리고 구체적인 금액 부분을 읽었다.
“……100만 골드요? 이게 얼마나 큰 금액인가요 제벨라 누님.”
칼립소가 일종의 수용소긴 하지만, 브로커를 통해 외부와의 은밀한 교류 정도는 있었다.
당연히 반쯤 고립된 곳이라도 금화는 제대로 화폐로서 성립했다는 소리인데…….
온갖 범죄가 판치는 암흑가의 물가에 익숙해진 내게도 100만 골드는 영 감이 안 잡히는 금액이다.
일단 내가 한창 암살자 길드에게 쫓기고 있던 당시, 내 목에 걸린 의뢰금이 10만 골드였던 건 기억하지만.
내 질문에 제벨라가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조심스레 입을 연다.”
“그러네……100만 골드라면 자하브 성을 하나 더 지을 수도 있단다.”
“???”
자하브 성은 주기적으로 터지는 던전 역류를 막아 세우기 위해, 특수 자재로 만들어진 성이다.
자재 그 자체도 비싸고, 쌓아 올린 성벽에 인챈트 하는 마법은 더 비싼. 장담컨데 같은 무게의 금과 좋은 승부가 될 법한 수준이다.
……순금으로 된 동전을 몇십만, 몇백만 단위로 거래할 만큼 이 세계는 지구에 비해 금이 흔하다지만, 이를 감안해도 말도 안 되는 금액인 건 사실이다.
“아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금액을 겨우 친구비로 줄 수 있는 곳이……이그나투스?”
이그나투스라는 이름은 잘 알고 있다. 자하브에 들어온 뒤, 최소한의 제국 역사를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그게 아니더라도 칼립소에서도 이름이 들릴 만큼 유명한 곳이기 때문.
그도 그럴 것이…….
“서부의 대공이 직접 이런 서신을 보냈다고요?”
“그런 것 같구나. 이그나투스 대공이라면 100만 골드도 허언이 아니니,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기 힘들어 에녹 너를 찾고 있었단다.
이그나투스 대공.
지금은 멸문한 칼립소 대공이나, 어쩌다 보니 내가 달고 있는 자하브 대공의 자리처럼 제국의 4대 대공 중 하나이자, 서부를 다스리는 자.
그리고 제국의 유일한 마탑의 주인이며, 비극의 신에게서 살아남은 최후의 드래곤.
말이 대공 가문이지, 살아있는 다른 드래곤이 없기에 이그나투스 본인의 대에서 끝나는 일대작위나 다름없지만…….
애초에 이그나투스는 제국보다도 오래 살아온 존재. 그리고 별일 없다면 앞으로도 천년은 우습게 살아갈 장생종이다.
당연히 쌓아놓은 재산은 차고도 넘친다.
마음만 먹으면 제국의 경제를 박살 낼 수도 있지만, 황제가 매번 사정사정하는 바람에 참아주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그런 이그나투스 대공이라면 100만 골드는 어렵지 않게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일 터.
……그중 딱 1만 골드만 슬쩍해도 평생 놀고먹을 돈으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자하브 대공 자리에서 내려왔을 때를 대비한 비자금.
그리 생각하자 갑자기 의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 정도 금액이라면 이야기 정도는 들어보는 게 좋겠죠. 무엇보다 이젠 같은 대공이잖아요? 인사도 한번 해둬야겠고요.”
“에녹 네 뜻이 그렇다면, 조만간 찾아가는 것으로 답장을 넣어두마. 그 사이에 이그나투스 대공의 대리인과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떻겠니? 자세한 사정은 대리인을 통해 전달하겠다고 하니 말이야.”
“설마 대리인이 여기 와있나요? 벌써요?”
남부와 서부의 거리, 그리고 소문의 확산 속도를 생각하면 너무 빠른 시기다.
설마 아직 대답도 못 받았는데, 대리인부터 보낼 줄이야……마탑주이자 드래곤이니까 텔레포트라도 쓴 건가.
내 질문에 제벨라가 고개를 저었다.
“후후. 그런 게 아니란다. 놀랍게도 이그나투스 대공의 322번째 제자가 아카데미의 졸업반이었지 뭐니. 심지어 유리아의 룸메이트기도 하단다.”
“……제자가 많네요?”
“아무래도 오래 사신 분이라 그런 거 아니겠니.”
하긴. 제국의 역사 속에서 322명의 제자밖에 안 들였다면, 오히려 적게 들이는 편이라고 해야겠지.
“아무튼 알겠어요. 한번 만나서 이야기는 나눠보죠.”
“잘 생각했단다.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이 누이에게 말해주렴.”
그리 말하는 제벨라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유리아의 방을 찾아가기로 했다.
자하브 성에 있는 방이 아니라, 바깥에 마련해 둔 아카데미 학생들을 위한 숙소의 방 말이다.
룸메이트라고 하니, 같이 있겠지.
***
자하브 대공의 지위를 이용해 여자 기숙사를 당당하게 정문을 통해 들어갔다. 솔직히 좀 두근거리더라.
……그 뒤에 찾는 것이 여동생의 방이라는 게 영 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게 도착한 유리아의 방문을 여는 순간.
끼이익.
“있잖아 메이킨. 드래곤은 도마뱀처럼 총배설강이야?”
“……절대. 절대 스승님 앞에서 그런 이야기 하지 마! 그리고 제자인 내 앞에서 하는 것도 엄밀히 말하자면 시비 거는 셈이거든?!”
“에이. 메이킨 너도 우리 오라방 길이가 몇 센티인지 궁금해했으면서.”
“키 이야기거든?!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갈색 머리의 소심해보이는 인상의 소녀, 메이킨과 눈이 마주쳤다. 총배설강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그녀가 이그나투스의 제자이리라.
“크흠. 일단 내 키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따로 재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
“네가 메이킨이지? 이그나투스 대공의 서신을 받고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왔어.”
“…….”
“으음……아무래도 걸즈 토크 중이었던 것 같은데 조금 나중에 다시 오는 게 좋았으려나?”
내 나름의 배려가 담긴 말이었으나, 아쉽게도 이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끼.”
“응?”
“끼야아아악!!”
메이킨이 비명을 지르며 전신으로 마나를 방출했다.
작게 소용돌이치는 마나의 폭풍. 그리고 메이킨이 있던 자리에는 주인을 잃은 옷가지와, 그사이에 숨어 몸을 둥글게 만 햄스터만이 남아있었다.
“오.”
변신 마법도 쓸 줄 아나 보네.
참고로 옷가지 사이로 슬쩍 보인 속옷은 회색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며 햄스터가 줄줄 흘리는 눈물에 젖어 살짝 색이 진해진 회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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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저점매수(3)
찍! 찌익-!
회색 팬티를 뒤집어쓴 햄스터가 잉잉 울었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말 그대로 햄스터 눈물만 한 물기에 젖은 회색 속옷의 중앙부가 짙게 물들 정도.
“……유리아야. 이거 어떻게 하냐. 괜찮은 거 맞지?”
“괜찮아 괜찮아. 메이킨은 패닉에 빠지면 햄스터로 변하는 습관이 있어. 이번 던전 실습 중에도 한 번 있었고.”
“그거 위험한 거 아니냐…….”
“그렇지만도 않아 오라방. 애초에 반사적으로 변신 마법을 펼칠 정도로 놀랐다는 건, 인간형의 모습일 때도 별다른 도움이 안 되는 상태라는 뜻이거든. 실제로 던전에서도 전투 도중에 햄스터가 된 적은 없었어. ……대신 식물형 몬스터인 알라우네에게 당해 산 채로 소화 당하기 직전에는 햄스터로 변해버렸지만.”
즉, 정말로 정신 나갈 것 같은 상황이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햄스터로 변하는 일은 없다는 소리.
“잠깐. 그럼 나를 무슨 알라우네 소화액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는 건가?”
“뭐어……오라방에게 잘못 걸리나, 알라우네 위장에 갇히나 인생 끝나는 건 똑같긴 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뭣.”
대체 이 터무니없는 음해는 어디서 시작된 것인가 싶어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리아는 설명 대신 으스대기 시작했다.
“엣헴. 메이킨이 오라버니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길래 조금 알려줬지.”
“일단 묻겠는데 뭐라고 말한 거냐?”
“그야 있는 그대로를 말했지. 오라방이 아카데미 학생 전체가 달려들어도 어찌하지 못하는 괴물이라던가, 나름 명예를 중요시해서 명분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지만 반대로 명분만 주어지면 마음껏 날뛸 준비를 마친 짐승이라던가……대충 이 정도?”
“???”
대체 유리아의 눈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 걸까.
그리고 대체 무슨 결론에 다다랐길래 메이킨은 햄스터로 변한 것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속옷을 뒤져 햄스터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찌이익-!!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손바닥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마는 갈색 햄스터.
그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콕콕 찌르며 입을 열었다.
“메이킨. 진정해라. 나는 그저 이그나투스 대공의 조건을 자세히 알고 싶을 뿐이니까.”
찌익……?
“음음. 이해는 해. 친구끼리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놀랄 법도 하지. 심지어 그게 이 땅의 주인이라면 더더욱 말이야.”
“어……그거 아닐 걸 오라방?”
“이게 아니라고?”
학교를 어떻게 땡땡이치냐는 이야기를 하다가 선생님이 들이닥쳤다는 느낌 아니었어?
눈을 끔뻑이는 나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유리아.
“오라방 길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오라방이 들이닥친 거잖아. 갑자기 오라방이 ‘으흐흐. 내 길이가 궁금하다면 직접 알려주는 수밖에. 으럇으럇! 이럴 거라고 생각해서 겁먹은 게 분명해.”
“…….”
진짜? 아니, 대체 어떻게 그런 결론에 다다르는 거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유리아의 말이 맞다는 가정하에 메이킨을 살살 꼬드겼다.
“걱정 마. 오늘은 그냥 딱 말만 하고 갈 테니까. 그러니 일단 변신 모습부터 풀어.
찌익……?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메이킨. 내용물이 사람이라는 건 알아도, 겉보기가 햄스터다보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지금처럼 햄스터로 남아있으면 실수로 밟을지도 모르잖니.”
찌익?!
“와……오라방 그건 좀.”
기겁하는 메이킨과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는 유리아.
이번 건 나름 진솔한 걱정을 해준 것인데 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걸까.
이 나이대 여자들은 이해할 수 없단 말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햄스터가 짧은 팔을 다급히 휘저으며 외쳤다.
찍! 찌익! 찍……!
동시에 작은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마나.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순간. 살색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몰캉.
“힉?!”
“아차.”
방금까지 햄스터를 올려놓고 있던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 그리고 부드러운 살을 파고드는 손가락의 감촉.
그렇다. 알몸의 메이킨이 내 손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웅크려 있었다.
……뭐, 옷가지는 여전히 바닥에 널브러져 있으니 당연한 일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메이킨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주었다.
“일단 옷부터 입어라.”
그리고는 문을 닫고 잠시 나가자,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자.
끼익. 쿵!
문밖으로 고개만 빼꼼 내밀었던 여학생들이 호다닥 숨었다.
그제서야 내가 어떻게 보였을지 깨달았다.
권력을 앞세우고, 공무를 들먹이며 여자 숙소에 들어와 당당히 여동생의 룸메이트를 희롱한 사람.
“잠깐.”
이게 그 정도로 기겁할 정도의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다 깨달았다.
“아.”
자하브 안에서는 당연했던 일이, 자하브 바깥에서는 그렇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설마 내 망나니짓이 항상 실패했던 이유가 오직 자하브 평균 하나 때문이었나?
여러모로 생각이 깊어지는 시간이었다.
***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더운 남부의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요를 돌돌 말았으며, 유리아조차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거리를 멀찍이 벌렸지만…….
아무튼 진정한 메이킨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스승님……그러니까 이그나투스 대공께서 자하브 대공께 원하시는 바는 간단해요.”
“뭔데. 아무리 생각해도 100만 골드 어치의 일은 없을 것 같단 말이지.”
“용아병의 제작을 도와달라는 거예요.”
“……용아병?”
처음 듣는 단어에 눈을 끔뻑이자, 메이킨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 용아병이라는 건 주기적으로 빠지는 스승님의 비늘이나 이빨 같은 걸 이용해 만드는 최상급 골렘이에요. 마법사들은 많지만, 마법사를 지킬 기사가 부족한 서부가 전선을 유지하는 핵심 기술이죠.”
“하긴. 이그나투스 대공은 영주이자, 마탑주긴 하지만……누군가의 충성을 받진 않는다고 들었으니 당연한 일인가.”
대공이라는 지위가 있는 만큼 필요하다면 자하브처럼 성을 짓고, 주변 영지로부터 충성을 받으며, 명예를 미끼로 기사를 양성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그나투스는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드래곤이라는 자신의 종족의 장점을 극대화 시킬 수 있도록 마탑을 짓고, 자신의 비전을 인간도 이해할 수 있게 개정하여 마법사를 키워낸 것.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비극의 신 트라고데아의 토벌 후. 차마 신을 완전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없어 4조각의 재앙으로 쪼개, 4대 대공으로 하여금 이를 감당케 했으니.
남부의 자하브 가문이 던전은 관리하며, 한때 트라고데아의 군대 대부분을 차지하던 몬스터 틀어막는 의무를 짊어졌다면.
서부의 이그나투스는 죽음이 두려워 동족을 배신하고, 트라고데아의 편에 섰던 사룡(死龍) 모르테우스와 그 휘하의 언데드들을 억누를 의무를 짊어졌다.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겠지만, 균형 잡힌 병력을 키우는 것보다 수준 높은 마법사를 늘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니 마탑을 세운 거겠지.
어쩌면 조금 전에 메이킨이 말한 것처럼 용아병이 됐건, 다른 무언가가 됐건, 어지간한 기사 수준이라면 모종의 방법으로 대체하는게 더 효율적이라 생각한 걸 수도 있고.
아무튼 이유는 알았다. 자하브 가문이 후계자 다툼으로 약화되어, 이전처럼 수월하게 던전을 관리할 수 없을 것 같자 코넬리우스를 통해 황실의 도움을 받은 것처럼.
이그나투스 또한, 무슨 문제가 생겨 이전처럼 언데드 무리를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아 내 도움을 청한 것이리라.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이쪽의 눈치를 보는 메이킨. 그런 그녀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좋아. 이쪽도 대공가인 만큼 그 걱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니 얼마든 도와줄 수 있지. 그런데 구체적으로는 뭘 어떻게 하면 되지? 난 마법에 문외한이라 말이야. 마법사를 죽이는 법은 알아도, 용아병을 만드는 법 같은 건 모르거든.”
“흐익! 저, 저도 볼일이 다하면……!”
“……방금 건 농담이었어. 내가 죽이는 건, 나를 죽이려는 마법사랑 흑마법사뿐이니까.”
“그런가요오……?”
분명 인간의 형태임에도 조심스레 담요 바깥으로 목을 빼고는 주변을 경계하듯, 두리번거리는 메이킨.
한참 동안 그러고 있던 메이킨이 살짝 풀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으……용아병을 만드는 건 어차피 스승님이랑 다른 사형들이 하실 거예요. 서부에 필요한 건 용아병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더 강력한 용아병을 만들 재료.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으읏. 저, 저도 그러고 싶은데요오…….”
우물쭈물 거리며 말도 제대로 못하는 모습이 답답해 살짝 인상을 찌푸린 순간.
이런건 또 귀신같이 알아챈 메이킨이 발작하듯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자, 자하브 대공 각하의 아기씨가 필요해욧! 부디 태양의 마나로 가득한 대공 각하의 아기씨를 베풀어 주세요!”
“……허?”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눈만 끔뻑이는 사이.
벌떡 일어선 유리아가 메이킨의 담요를 잡고 짤짤짤 흔들었다.
“믿었는데! 믿었는데……! 거짓말쟁이 메이킨! 오라방의 아기씨는 100만 골드를 줘도 안 팔아!”
“헤에엑!”
배신감 가득한 유리아의 절규와 메이킨의 비명소리가 겹쳐졌다.
***
다음 날 아침.
아카데미 학생들 사이에는 실로 망측한 소문이 하나 나돌기 시작했다.
자하브의 새로운 대공, 에녹.
그가 백주 대낮부터 여자 숙소에 쳐들어와, 불쌍한 마법사 하나를 억지로 희롱하였으며.
3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완전히 타락 조교에 성공하여 스스로 아기씨를 조르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말이다.
서부로 향하기 위한 준비를 하던 에녹이 소문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까?”
아무튼 처음으로 망나니 평판을 쌓았으니 좋았쓰!
……조금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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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저점매수(4)
내 아기씨……그러니까 정액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조금 기겁하긴 했으나, 결국 이그나투스 대공의 요청에 응하기로 했다.
당초의 목적이었던 100만 골드 중 일부를 비자금으로 만들겠다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그나투스 대공이라면, 제국의 탄생 이전부터 살아온 드래곤이라면 나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게 있을 거라는 기대가 가장 큰 이유다.
어쩌다 보니 자하브의 혈계능력과 비슷한 힘을 각성한 것? 이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애초에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만약 변이를 감당하지 못했다면 이렇게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점은 그 외의 부분.
대공가의 시조에 버금갈 정도로 진한 피를 타고났다는데, 정작 내 혈계능력이 무엇인지는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대체 어떤 이유로 몬스터도 아니건만, 던전 내부에서 더 강해지는 것인지.
이그나투스라면 이 둘에 대해 답을 모르더라도 실마리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그 과정에서 당연히 이그나투스에게 내가 자하브의 혈족이 아님을 들킬 가능성이 높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 생각해둔 것이 있다.
하여, 이그나투스 대공령으로 향하기로 정하고 나름의 짐을 싸는 도중이었다.
“좋아. 이걸로 다 챙겼나.”
“으음. 하나 빠뜨리지 않았니?”
내가 짐을 싸는 것을 도와주던 제벨라가 고개를 갸웃거리길래, 다시 한번 가방을 뒤적여 보았다.
“흠……다 챙긴 것 같은데요? 애초에 자잘한 건 카렌이 준비했을 테니, 저는 그냥 몸만 가도 충분할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보렴. 정말 없니?”
“???”
뭔가 싶어 계속해서 가방을 뒤적이고, 침대와 책상도 살펴보았으나 별다른 이상은 찾을 수 없었다.
하여,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자니 제벨라가 장난스레 미소 지으며 양팔을 벌렸다.
“이 누이에게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잖니.”
“……예?”
“이리 오렴. 어서.”
이게 맞나 싶어 쭈뼛쭈뼛 다가가자, 냉큼 이쪽을 끌어안는 제벨라. 남부 특유의 얇은 옷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살결. 꽃을 닮은 체향이 번져오며 따스한 체온이 몸을 달군다.
“어찌됐든 에녹 네가 자하브에 온 뒤에 처음으로 성을 멀리 떠나는 일이잖니.”
“아.”
그랬다. 내가 자하브에 머무른 지 벌써 두어 달은 지난 것 같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성안에서 보냈으니까.
가끔 외출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던전에 드나드는 정도.
제벨라가 나를 안고 있는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꾸욱.
가슴팍에 짓눌리는 부드러운 감촉. 하지만 왜일까. 지금은 제벨라가 등을 토닥이는 감각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별로 위험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몸조심해서 다녀오렴.”
“……네.”
어색한 움직임으로 나 또한 제벨라의 등을 토닥이는 사이.
제벨라의 작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그런데 요즘 도는 소문은 어떻게 된 거니?”
“……네?”
“있잖니. 유리아의 룸메이트이자, 이그나투스 대공의 가장 어린 제자를 마구 범해서 부끄러운 말을 큰 소리로 외칠 만큼 타락시켰다는 소문 말이란다.”
“…….”
아니, 그 소문이 왜 벌써 제벨라의 귀에 들어간 건데.
평소에는 내가 뭘 하건,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좋게만 해석하던 사람이지만……아무리 그래도 이런 소문까지 좋은 방향으로 해석할 것 같진 않아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내 동생들……에녹과 유리아의 말을 믿는단다. 실제로 이그나투스 대공의 조건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약간 문제가 생긴 것일 수도 있지. 메이킨이라는 아이는 아직 어린 나이고, 부끄러움이 심한 아이 같으니 말이야.”
정작 돌아온 것은 괜찮다고, 이해한다는 식의 내용.
하긴, 제벨라라면 오히려 이런 소문에 시달리는 나를 위로해 주려던 것이리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그것이 너무 빠른 판단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소문이 진짜라면. 그러니까 에녹 너도 자하브고 남자니까 어느 날 갑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를 3일 밤낮으로 조교 해서 머릿속에 아기씨 조르는 것밖에 없는 상태로 만들고 싶은 기분이 들 수도 있잖니.”
“……?”
대체 그런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적어도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라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피임은 꼭 하렴. 일단은 에녹 네가 가주고, 이 누이가 첫째 부인이 될 예정이잖니. 만약 사생아가 먼저 태어난다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테니까.”
“그쪽이 문제에요?!”
나는 일종의 질투나 독점욕 같은 건 줄 알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가문의 위신이 어쩌구 하면서 줄을 세우려는 내용이라던가.
하지만 그냥 사생아가 정실 혈통보다 먼저 태어나면 복잡해지니 조심하라는 걸로 끝이라니.
심지어 다른 여자랑 뒹굴지 말라는 것도 아니라 피임만 제대로 하라는 소리였다.
이게……맞나?
언젠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가주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지만, 그전까지는 내가 자하브의 핏줄이 아니라는 걸 들켜서는 안 된다.
하여, 아직 자하브의 다른 형제들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어땠는지 따로 알아보았으나.
대부분이 검열되거나, 기록 삭제되어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저 생긴 것처럼 금태양 집안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어쩌면……내 생각보다 훨씬 미친 집안이었을지도 모르겠네.
……아, 그래서 아카데미에 그렇게 소문이 빨리 퍼진 건가.
작은 깨달음과 함께 제벨라를 부드럽게 밀어내며 말했다.
“걱정마세요. 절대로 그럴 일은 없으니까.”
“어머나…….”
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힌 제벨라. 그녀가 잠시 스스로의 뺨을 문지르더니, 이내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흐흠. 아무튼 이걸로 깜빡한 마지막까지 제대로 챙겼구나. 마음 같아서는 성문 앞까지 마중 나가고 싶지만…….”
“일이 바쁜 거죠? 이해해요.”
아직까지도 쏟아지는 친구비의 향연. 제벨라는 이를 최대한 유용하게 써먹기 위해, 매일 같이 밤을 새며 일한다고 들었다.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마탑에는 특이한 아티팩트가 많다고 들었어요. 제벨라 누님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하나 구해올게요.”
“정말이니? 고맙단다 에녹. 이 누이를 그렇게나 생각해 줄 줄이야. 정말 착한 아이구나. ……그래. 정말 착한 아이인데.”
흐뭇한 표정으로 내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던 제벨라였으나, 어째서인지 그 손길이 내 심장 어림을 스치는 순간.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워낙 순식간에 지나간 변화라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는 사이. 포옹을 하며 잠시 흐트러졌던 옷을 바로 잡아준 제벨라가 반보 뒤로 물러섰다.
“응. 이거면 충분하겠구나. 어서 가보렴. 이그나투스 대공이라도 텔레포트 게이트를 오래 유지하는 것은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일 테니 말이야.”
“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누님.”
가볍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방을 나서, 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내가 미처 챙기지 못했을 것들을 챙긴 카렌과, 여전히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메이킨.
그리고 나를 배웅하기 위한 가신들과 기사단이 도열해 있었다.
아쉽게도 힐다도 나와 동행하는 대신, 저 사이에 끼어있다.
던전 실습으로 온 아카데미 학생들을 관리 감독하고, 연속된 던전 역류 때문에 완전히 박살 난 방어선을 재건하느라 기사단의 인원을 줄이기 힘들었기 때문.
뭐, 카렌만 있어도 충분하겠지. 내가 내 한 몸 지킬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쿠웅!
내가 지나갈 때마다 양옆으로 물러서 경례를 하는 가신들. 자연스레 사람으로 이루어진 길이 열리는 모습은 몇 번 본 적 있음에도 장관이었다.
나만 그리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시선을 피할 뿐이던 메이킨이 고개를 푹 숙이기 시작했다.
좀 위압감이 느껴지는 광경이긴 해.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메이킨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고개 들어.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잖아?”
“네? 아, 네엡!”
고개를 연신 꾸벅인 메이킨이 품에서 작은 수정구 하나를 꺼내 마나를 불어넣고. 무어라 중얼거린다.
모종의 보안 장치라도 있는 것인지 수정구의 안쪽이 보이지도,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메이킨의 통신 상대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마 이그나투스 대공이겠지.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눈 끝에 메이킨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준비는 끝났어요오……다들 조금만 물러서 주세요. 휘말리면 위험하거든요.”
“…….”
“…….”
“…….”
“지, 진짜 위험한데…….”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둘러싼 자하브의 가신들을 바라보는 메이킨. 그런 그녀 대신 내 쪽에서 나섰다.
“들었지? 다들 세 걸음씩 물러나.”
“““예!!”””
우렁찬 대답과 함께 그제야 거리를 벌리는 가신들.
이에 메이킨이 감탄과 억울함이 섞인 표정이 되었으나, 할 일은 하려는 건지 공터에 방금까지 쥐고 있던 수정구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구를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마나의 격류.
메이킨 수준으로 어찌할 수 있는 양의 마나가 아니다. 당연히 마도구 따위가 버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쩌적.
돌연 금이 가는 수정구. 그 사이로 훨씬 더 많은 마나가 쏟아져나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패턴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웅-
공명음과 함께 완성된 것은 거대한 타원형의 거울을 닮은 무언가.
하지만 진짜 거울은 아닌지, 너머에서 일렁이는 풍경이 자하브령과 완전히 달랐다.
“저기가 서부인가.”
처음 보는 고위 마법에 내심 감탄하며, 메이킨을 따라 카렌과 함께 텔레포트 게이트로 몸을 던졌다.
약간의 부유감. 그리고 살짝 선선해진 기온. 텔레포트는 성공적이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자.
“잘 왔구나. 본인이야말로 이그나투스 대공. 태양의 후예여, 그대를 초청한 최후의 용이니라.”
“……음?”
그곳에는 위엄 넘치는 레드 드래곤 대신. 바닥을 뒹굴거리는 붉은 머리의 꼬맹이가 있었다.
높게 솟은 뿔과 오동통한 꼬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이그나투스 대공?”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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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서부
텔레포트 게이트를 건넌 뒤.
약간의 이질감 끝에 감았던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잘 왔구나. 본인이야말로 이그나투스 대공. 태양의 후예여, 그대를 초정한 자이니라.”
“……음?”
그리고 발견했다. 위엄 넘치는 레드 드래곤이 아닌, 바닥을 뒹굴거리는 붉은 머리 꼬맹이를.
“이그나투스 대공?”
이게?
눈을 끔뻑이며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생물체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타오르는 불꽃을 닮은 선명한 적발. 뭐로 만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비싸 보이는 옷.
머리의 양옆으로 길게 솟은 뿔. 이를 중심으로 작은 뿔들이 엮여있는 모습은 왕관을 연상케 하며.
엉덩이 부근에서 살랑이는 꼬리는 붉은 비늘이 촘촘하게 덮인 것이 꽤나 위협적이지만……전체적으로 오동통하고, 실루엣이 뾰족하다기보다 둥글어서 귀엽기 그지없다.
알기 쉬운 드래곤의 특징들. 하지만 이그나투스 대공은 못 해도 제국의 역사만큼 나이를 먹은 존재 아닌가.
그런 사람……아니, 용이 이런 꼬맹이의 모습으로 바닥을 굴러다니며 손님을 맞는다고?
순간 어이가 없었으나, 마탑의 사람들에게는 대수로울 것 없는 평소의 모습이었던 걸까.
메이킨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바닥과 물아일체가 되어있는 이그나투스를 번쩍 들어 올렸다.
“스승님. 아무리 피곤하셔도 손님을 누워서 맞이하시면 안 되죠.”
“으으……하지만 의자에 올라가는 것도 슬슬 귀찮단 말이니라.”
“그럼 다른 사형들을 시켜서라도 하셨어야죠.”
“그, 그래도 다른 사람을 전부 물리고 이렇게 혼자 게이트를 열었으니 괜찮지 않느냐.”
“그건 잘하셨지만, 아무튼 다음에는 꼭 의자에라도 앉아주세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변의 의자에 이그나투스를 앉혀놓는 메이킨.
의자에 앉은 상태로도 추욱 늘어진 모습에 카렌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카렌카렌아. 혹시 서부에는 최대한 편한 자세로 손님을 맞이하는 관습이 있니?”
“아뇨. 그런 건 없습니다. 애초에 메이킨 양도 깜짝 놀라 이그나투스 대공 각하를 의자에 올려두시지 않았습니까.”
“그럼 그냥 귀찮음이 많다거나?”
“그렇지 않을까요? 어쩌면 다른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요. 적어도 저희를 무시하거나 그런 느낌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만…….”
그렇게 소곤거리고 있자니, 거의 드러눕다시피 의자에 걸터앉은 이그나투스가 입을 열었다.
“이거 손님들 앞에서 미안하게 됐구나. 허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라.”
“으음. 다 들렸나 보네.”
“이래 보여도 귀는 좋은 편이라 말이지.”
그리 말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는 이그나투스. 덕분에 누워있을 때는 몰랐던 그녀의 전신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평범한 의자에 앉았을 뿐인데, 발이 닿지 않을 정도의 단신. 하지만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으며.
메이킨이 빠르게 정돈해 주는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이목구비는 조각상처럼……아니, 이 세상 존재가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소녀와 여인. 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어중간한 매력이 아닌 양쪽의 매력을 전부 품고 있는 얼굴.
하지만 그보다도 더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머리카락만 해도 선명한 붉음을 품고 있다고 여겼거늘, 이그나투스의 눈동자는 그 이상이었다.
루비, 불꽃, 리얼 레드 등등.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채도 높은 붉은색을 나타내는 단어를 떠올렸으나.
그 중 무엇 하나 이그나투스의 눈동자를 온전히 표현하지는 못하리라.
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리고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휘어진다.
“당대의 자하브가 선조 회귀에 가까운 수준으로 혈계능력을 각성했다더니……그 말이 사실인가 보구나.”
“그게 눈으로 보여?”
“혈계능력 자체가 보이는 것은 아니니라. 그저 체내에 품고 있는 마나의 성질과 순도를 느낄 뿐이니라.”
“과연. 다른 자하브들과 비교하면 어떤데?”
“다른 자하브들과 비교해서 말이느냐?”
그리 말한 이그나투스가 당장이라도 꾸벅거리며 졸 것 같은 나른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적어도 최근 500년간 보아온 자하브들과는 비교가 안 되겠군. 그전과 비교하면……순도만 따지면 샤메스. 아, 자하브의 시조이니라. 샤메스와 비슷한 것 같다만, 마나량은 다른 후예들에 비해 조금 부족하구나.”
“마나량이……부족하다고?”
미친 연금술사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먹었던 영약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고, 이후에도 여러 인체실험의 부작용을 잠재우기 위해 여러 영약을 마구잡이로 퍼먹었다.
칼립소의 흑마법사 지부를 박살 내고, 암살자 길드를 조지며 나온 영약 중 나와 극상성인 것들과 동료들에게 줄 분량을 제외하면 전부 퍼먹었고.
정보상이나 브로커, 때로는 용병들에게 돈을 주고 영약을 구하기도 했다.
실제로 마나 다루는 법은 잘 모르는데, 마나량이 너무 많아서 종종 마나가 꼬이며 내상을 입었던 적도 있으니 말 다 했지.
그런 내가 마나량이 적다니.
순간 무한한 마나를 생성한다는 드래곤 하트를 가진 입장에서 작아 보인다는 소리인가 싶었으나, 분명 다른 자하브들과 비교했을 때 적다고 했다.
어이가 없어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이그나투스가 픽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너무 자존심 상해하지 말거라. 보아하니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나이가 어리면 당연히 쌓은 마나도 적을 수밖에 없지.”
“그……런가.”
즉, 초대부터 500년 전까지의 자하브는 순 괴물 딱지였다는 소리인가.
솔직히 별로 체감이 안 되긴 했지만, 제벨라에게 들었던 이야기처럼 자하브의 혈통이 열화된 것 자체는 사실인 모양이다.
……그리고 이그나투스가 나와 자하브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뭐어. 태양과 불꽃의 차이를 말하라고 하면 나도 잘 모르겠지만.
기껏해야 규모와 온도밖에 생각나지 않는단 말이지.
약간의 실망감이 차올랐을 무렵. 이그나투스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으음. 이렇게 자세히 보니 다른 자하브들과 조금 느낌이 다른 것도 한데…….”
“……!”
“하기야. 이 정도로 시간이 흘렀으면 아무리 후손이라도 조금 변하기도 하겠구나.”
슬쩍 눈으로 보는 정도로는 정말 구분 못 하는 모양이다.
마나에는 누구보다도 민감할 터인 드래곤이 이렇게 반응한다는 건, 사실상 평범한 방식으로는 구별할 수 없다는 소리.
보다 전문적인 방식으로 깊게 파고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애초에 그 정도로 의심받는 상황이 되면 어차피 뭘 하건 들킬 수밖에 없겠지.
이걸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던 도중이었다.
“하아암…….”
돌연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는 이그나투스. 사람의 것이 아닌 뾰족뾰족한 이빨이 엿보이며, 작은 불꽃이 뿅하고 튀어나왔다가 사라진다.
메이킨 덕분에 슬슬 자다 깬 꼬맹이에서, 꽃단장한 꼬맹이 수준까지 올라온 이그나투스가 머쓱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부터 손님맞이가 형편없어 미안하구나. 부끄러운 말이지만 몸 상태가 조금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느니라.”
“뭐어. 별로 신경 쓰진 않아. 생각해 보면 나도 아까부터 처음 보는 사이인데 반말로 대하는 중이었고.”
“뭣? 자하브가 초면인 사람에게 반말은 무례한 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게냐……?”
“……?”
자하브는 대체 뭘까.
요즘 들어 몇 번이고 곱씹게 되는 주제였기에 슬슬 감이 잡혀가고 있다. 하여, 내가 생각한 자하브스러움을 조금 발휘해 보기로 했다.
“드래곤은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지 않나?”
“가, 가주님?!”
나와 이그나투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기 위해 조용히 있던 카렌이 기겁을 하며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메이킨 또한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지만……정작 이그나투스 본인은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자하브는 시간이 지나도 자하브로구나.”
“…….”
진짜 자하브는 대체 뭘까…….
헛웃음을 짓는 사이. 이그나투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해해 주어 고맙구나. 허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 계약 내용부터 확실히 하자꾸나.”
“좋지.”
내 대답을 듣자마자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허공을 긋는 이그나투스. 그 간단한 움직임에 어마어마한 마나가 요동치더니, 이내 손가락의 궤적을 따라 허공에 세로로 금이 간다.
쩌적-
갈라진 공간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궤짝. 이그나투스의 손짓에 뚜껑이 열린 궤짝 너머로 반짝이는 황금이 보였다.
“약속한 100만 골드이니라. 필요하다면 직접 세어도 괜찮으니라.”
“아니. 저걸 어느 세월에 다 세고 있겠어. 여기서는 명예로운 이그나투스 대공의 말을 믿어야지.”
“……당대의 자하브는 제법 달콤한 말을 할 줄 아는구나. 혹시 그대도 이 몸을 노리는 것이더냐? 아쉽지만 포기하거라. 이 몸은 자하브와 달리 무의미한 번식 활동에 흥미가 없으니.”
“혹시 예전에는 좀 더 어른스러운 몸이었나?”
“으음? 예나 지금이나 이 몸은 그대로다만. 아, 뿔과 꼬리가 좀 더 굵어지긴 했느니라.”
“아오, 자평 진짜…….”
카렌과 좋은 승부가 될 법한 키. 그리고 카렌보다도 안쓰러운 가슴팍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무튼 100만 골드를 지불할 능력이 있다는 건 확인했으니 됐어. 필요한 건 강력한 용아병을 만들기 위한 내 아기씨……정액이지? 양은 얼마면 되나?”
“이 병에 가득 채울 정도면 되겠구나.”
마찬가지로 허공을 열어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는 이그나투스.
이걸 가득 채워야 하는 건가……좀 많긴 하지만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리라.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조건이 있느니라.”
“뭔데.”
“미안하지만 이 근방에는 창녀가 없느니라. 서부는 전장이며, 마탑은 전초기지. 여기에 거주하는 이는 전부 이 몸이 가르치고, 이 몸을 따르는 이들이니,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지만 자하브의 손에 망가지게 두겠느냐.”
“……아니,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는데.”
그냥 혼자 해결하려 했다는 말을 하려던 순간. 이그나투스의 오동통한 꼬리가 꿈틀거리더니, 그 끝에 무언가를 휘어감아 내밀었다.
“대신 이걸 사용하거라. 이 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착정 마도구이니라.”
반투명한 재질. 원통형의 생김새에서는 부들부들해 보이면서도 묘한 단단함이 느껴지며, 한쪽 끝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있었다.
……이거 완전 오나홀이잖나.
살랑이는 꼬리로 저걸 쥐고 있으니 엄한 상상이 마구마구 피어오른다.
설마 판타지 세상에서 이런 걸 볼 줄은 몰랐는데.
헛웃음만 짓고 있자니, 이그나투스의 자랑이 이어졌다.
“걱정 말거라. 온도 유지 마법, 69가지의 진동 패턴, 그리고 약간의 환상 마법까지 걸어 두었으니 아직 시험해 본 적은 없지만 제법 쓸만할 것이니라.”
“그, 그러냐…….”
아무튼 손으로 해결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런 생각으로 이그나투스의 특제 마도구를 받아들려던 순간.
—————!!
바깥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존재감. 실내에 있음에도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에 반사적으로 전투태세를 취하며 감각을 일깨웠다.
그리고 이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닌지, 시종일관 늘어져 있던 이그나투스 또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필이면 손님을 맞이하는 도중이라니.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한숨을 푸욱 내쉬며, 처음 보는 곧은 걸음으로 창문 쪽으로 향하더니.
덜컥.
그대로 창문을 열어 몸을 던진다.
“엉?”
갑작스런 투신에 다급히 창문 쪽으로 달려갔지만.
화아악!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더니, 창문 너머의 풍경을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가득 채웠다.
“오.”
내가 기대했던 위엄 넘치는 모습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말랑.
이그나투스가 만들어 준 오나홀이 꾸욱 짓눌렸다.
……기운이 쏙 빠지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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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서부(2)
바깥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울음소리. 이를 듣자마자 이그나투스가 지금껏 보여준 나른함을 내다 버리고, 곧장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화아악!
밝은 빛이 터져 나온 뒤에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거대한 레드 드래곤.
“오.”
내가 기대했던 위엄 넘치는 모습. ……방금까지 내게 착정 마도구라며 판타지판 오나홀을 건넨 사람과 동일 인물인가.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말랑한 감촉에 살짝 기운이 빠지긴 했으나, 이런 내 감상과는 별개로 상황은 꽤나 심각했다.
이그나투스가 멀리 날아가자, 그녀의 거체에 가려져 있던 저 멀리의 풍경이 보였는데.
“세상에. 카렌카렌아 저게 다 뭐냐.”
“……혹시 서부에도 던전 역류가 일어나는 겁니까?”
까치발을 서서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본 카렌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카렌도 놀란 모양. 하기야. 당연한 일이다.
지평선 너머로 무수히 많은 언데드들이 기어 올라오고, 그 중앙에는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드래곤이 눈두덩이에서 귀화를 불태우고 있었으니까.
남부에서 나고 자란 카렌이 보기엔 던전 역류처럼 보이겠지.
뭐어. 서부에서 자란 메이킨의 눈에는 반대로 보이겠지만.
“와일드 헌트네요. 요즘 들어 주기가 짧아졌단 말이죠.”
“와일드 헌트?”
“네. 남부의 던전에서 몬스터가 흘러넘치는 것처럼, 서부에서는 과거의 망령들이 죽음의 구덩이에서 다시 일어서 못다 한 전쟁을 이어가거든요.”
“……비극의 밤.”
“맞아요. 비극의 신 트라고데아에게 맞선 이들이었죠.”
비극의 신은 단 한 명뿐인 신도의 바람을 위해 세상을 비극으로 물들이고자 했다.
그렇게 강신하여 오랜 시간 암약하며 준비를 마친 뒤. 이 모든 것을 일제히 터뜨려 대륙을 상대로 전쟁을 선언했으니.
비극으로 뒤덮인 세상은 어두운 밤과 같았기에, 당시의 전쟁에 비극의 밤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다행히 어찌어찌 막아내긴 했지만, 수많은 신들이 힘을 잃고 몰락했으며, 그 이상으로 많은 영웅들과 이름없는 병사들이 죽어 나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그리고 서부의 재앙은 한때 비극의 신에게 맞서 일어선 이들을 언데드 삼아 군세를 일으켰으니.
한때는 가장 신에 가까운 종족이었으며, 그렇기에 비극의 밤에 멸종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드래곤.
그중 유일하게 종족을 배신하고 비극의 신에게 붙은 자.
사룡 모르테우스.
아마 저 멀리서 언데드를 이끄는 본 드래곤이 모르테우스일 것이다.
카렌과 힐다를 통해 기본적인 대륙의 역사를 배웠기에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직접 본 모르테우스와 그의 군세가 일으킨 와일드 헌트는…….
“던전 역류보다 빡센 것 같은데? 마탑 개쩌네. 이걸 막고 있을 줄이야.”
“아핫……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자하브 대공 각하. 하지만, 마탑의 일원인 제가 보기엔 던전 역류 쪽이 더 무섭더라구요.”
“그래? 물량은 비슷해도 전반적인 수준이 달라 보이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장벽을 두드리는 언데드들을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음산한 죽음의 기운. 그리고 이것이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라는 듯, 맹렬히 몰아치는 불길한 눈보라.
사기(死氣)가 가득 담긴 눈보라와, 그 속에서 귀화를 번뜩이는 언데드들이 마탑의 방벽에 막히고, 고위 마법에 펑펑 터져나가는 모습은 솔직히 감탄스럽다.
내가 경험해 본 오크들의 웨이브와 비교하면……평균 무력은 비슷하지만, 언데드와 달리 오크들은 전략을 구사하니 직접 전투력은 오크들이 위.
하지만, 저 사기로 가득한 눈보라가 문제다.
흑마법사 놈들과 싸워봐서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저런 음침한 기운은 미리 대비하거나, 면역이 없는 이상 굉장히 까다롭다는 것을.
그렇기에 아마 실제 위협은 언데드 쪽이 더 강할 것이다. 무엇보다 저놈들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니까.
거기에 가장 큰 차이는 따로 있었다.
우두머리.
오크 워로드는 분명 강력했다. 익스퍼트급 강자가 여럿 있어야 간신히 쓰러뜨릴 수 있다는 시점에서 일인 군단이나 다름없는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모르테우스는 오크 워로드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괴물이었다.
————!
여기까지 들려오는 공허한 울음소리. 동시에 한층 거세진 죽음의 눈보라가 마탑이 시전한 방벽 마법을 깨부순다.
짓쳐들어오는 차가운 죽음을 향해 주홍빛의 장막이 펼쳐진다.
마탑 차원에서 펼친 마법이 아닌, 마법사 개개인이 펼친 마법.
하지만 효과는 충분했는지, 죽음의 눈보라에서 느껴지던 불길함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물론, 방벽을 두드리던 언데드들이 방벽이 무너진 틈을 타, 달려드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지만.
쩌저적.
놈들은 땅에서 솟아오른 용아병들이 막아내며, 마법사들을 호위했다.
이그나투스의 비늘과 이빨로 만들어 낸 이들이기 때문일까. 언데드와 비슷한 구조지만, 훨씬 날카롭고 공격적인 인상이다.
실제로 어지간한 언데드들보다 튼튼하고 힘도 좋았기에 잘 싸우고 있었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모르테우스가 굵직한 팔을 휘둘러 용아병들을 쓸어버렸다.
콰직!
일반 언데드 상대로는 잘만 싸우던 용아병들이 순식간에 과자 부스러지듯, 간단하게 박살나 버린다.
이를 만족스레 바라보던 모르테우스가 돌연 뼈만 남은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몸을 웅크려 크게 도약한다.
하얀 본 드래곤의 몸뚱이가 마탑에 정면으로 들이받기 직전.
콰아아아아!
때맞춰 도착한 이그나투스의 브레스가 모르테우스를 하늘에서부터 찍어 누른다.
거대한 뼈를 버둥거리며 저항하는 모르테우스였으나, 결국 뿜어내던 눈보라는 레드 드래곤의 열기에 녹아내리고 날아오르려던 몸뚱이는 바닥에 처박혀 밀려난다.
쿠웅!
여기까지 전해지는 진동. 하지만 이그나투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브레스를 쏘아내며 날개를 펼치더니, 그 위로 무수히 많은 마법진이 그려지며 듣도 보도 못한 화려한 마법이 공간 전체를 뒤덮었다.
결국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방금 막 기어 올라온 골짜기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모르테우스.
모르테우스가 사라지자, 여유가 생긴 마탑의 마법사들이 남은 용아병의 보호를 받으며 다음 마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일반 언데드들과 달리, 머리를 가루 내도 다시 살아나는 녀석들이기에 굳이 위력이 강한 마법을 사용하진 않았다.
장막이 아닌, 주홍빛 가루의 형태로 흩뿌려지는 마법.
이에 닿은 언데드들이 눈에 띄게 둔해지더니, 그 틈을 타 용아병들이 서로 달라붙어 하나의 장벽을 만든다.
뒤이어 완성된 마법이 물과 바람을 만들어 용아병 장벽 채로 언데드들을 밀어내기 시작하니.
결국 언데드들은 모르테우스의 뒤를 따라 골짜기 너머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량의 용아병을 소모하긴 했으나, 최소한의 사상자로 와일드 헌트를 막아낸 것이다.
그러나 마탑의 마법사들은 이러한 일이 일상인지, 크게 기뻐하는 기색 없이 담담히 움직여 부상자를 수습하고 깨진 방호 마법을 복구하기 시작했으며.
이그나투스는 당당한 자태로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살펴보더니, 그대로 하늘을 날아 이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분명 세상의 멸망……까지는 아니어도 나라 한둘쯤은 무너질 것 같은 풍경이었으나.
이를 너무도 간단하게 정리하고 돌아오는 이그나투스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 사이. 메이킨이 쓴웃음을 지었다.
“보시다시피 마탑의 모든 시스템은 언데드를 상대하는 데 특화되어 있거든요. 모르테우스와 그가 이끄는 와일드 헌트가 던전의 몬스터보다 더 강할지 모르지만……약점은 확실하고, 마법은 그러한 약점을 찌르기 참 좋은 학문이죠.”
“아.”
그제야 깨달았다. 어째서 이그나투스가 굳이 기사들을 양성하지 않고, 용아병으로 대체하는지.
언데드 상대로 끝나지 않는 소모전을 효율적으로 행하기엔 막 쓰고 버릴 수 있는 방패가 필요하다.
용아병보다 더 강하다고는 하나, 살아있는 기사를 갈아 넣을 수는 없잖은가. 그러다 죽으면 언데드의 군세에 추가될 텐데.
무엇보다 메이킨의 말대로 마탑의 모든 시스템과, 마법은 언데드를 상대하기에 특화되어 있다.
미리 준비할수록 위력이 배가 되는 마법의 특징을 이용하여, 최대한의 효율로 와일드 헌트를 막아내는 것이다.
반면, 남부의 던전 역류는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랜덤 박스 같은 것.
생명체에게 치명적인 극독을 준비했더니, 갑자기 골렘류 몬스터가 진격해 올지도 모르고.
무식한 물리력으로 밀어버리고자 전쟁 병기를 대량으로 준비해도, 난데없이 물리 공격의 대부분을 무효화 시키는 슬라임 계열이나 정신체로만 이루어진 몬스터가 튀어나올 수도 있잖은가.
그렇기에 남부에 필요한 건 어떤 상황에서도 대응할 수 있는 절대적인 강자.
이러한 상황이 마법사들 눈에는 끔찍한 도박처럼 보이는 거겠지.
“이해했어. 각자의 상성과 고충이 있다는 거구만.”
“괜히 초대 황제께서 남부는 자하브 대공께, 서부는 스승님께 맡기신 게 아니죠.”
나와 카렌이 새로운 지식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창문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방금 막 와일드 헌트를 몰아내고 온 이그나투스가 레드 드래곤의 형태에서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창틀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에엑.”
“이런.”
아무런 저항도 없이 철푸덕 넘어지며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잡아들긴 했지만, 내 팔에 안긴 이그나투스는 건어물마냥 축 늘어져 미동조차 없었다.
흔들.
팔을 살짝 흔들자, 힘없이 따라 움직이는 오동통 꼬리.
방금까지 압도적인 위용으로 모르테우스를 브레스로 밀어버리던 그 레드 드래곤이라고는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조금이나마 회복한 걸까.
내 팔뚝에 침을 질질 흘리고 있던 이그나투스가 입을 열었다.
“우, 우선 이 몸을 좀 눕혀주겠느냐? 이 무례는 그 뒤에 설명해 주마.”
“어렵지 않지.”
그대로 이그나투스를 번쩍 들고는 메이킨이 꺼내 놓았던 의자에 앉았다.
이어서 늘어진 이그나투스를 내 무릎에 엉덩이를 대고, 가로로 눕는 자세로 만들어 주었다.
이그나투스의 인간 폼이 워낙 키가 작았기에 가능한 일.
그래도 딱딱한 의자 모서리에 닿으면 아플 테니, 머리 뒤편과 무릎 안쪽은 팔로 안아서 받쳐주었다.
전체적으로 공주님 안기를 한 채로, 조금 전까지 이그나투스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은 모양새.
파충류의 그것처럼 세로로 찢어진 동공에 경계의 빛이 맴돌았다.
“당대의 자하브야. 이게 맞느냐?”
“엉? 뭐, 문제 있어?”
“이젠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게냐.”
“뭐래. 아, 팔이 부족하니 이건 네가 들고 있어.”
이그나투스의 말랑한 배 위에 오나홀을 올려주었다. 그러자 이를 반사적으로 붙잡은 그녀가 체념 섞인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천 년이 지나도 자하브는 자하브로구나.”
“글쎄. 지금은 헛소리 그만하고 상황을 설명해 주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별거 아니니라. 처음 말한 것처럼, 요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힘을 쓰고 나니 순간적으로 탈진했을 뿐…….
“아니잖아.”
이그나투스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제국의 4대 대공이자, 마탑주, 최후의 드래곤을 향한 말투라기엔 꽤나 무례한 일이었지만.
애초에 나도 지금은 자하브 대공(아님)이잖나. 격은 얼추 맞는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이그나투스. 마탑이 싸우는 모습을 봤어. 용아병을 소모품처럼 쓰더만.”
“혹시 같은 전사로서 연민이라도 느낀 게냐? 걱정말거라, 무술을 학습시키긴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이 몸의 비늘과 이빨로 만든 인형이니.”
“그래 보이더라. ……그런데 용아병을 소모품처럼 쓸 거면, 왜 더 강한 용아병이 필요한 거지? 어차피 몇번 쓰고 버릴 텐데.”
“그만. 거기까지만 하거라.”
“100만 골드나 들이고, 같은 4대 대공 중 하나인 내 힘까지 이용해 지금보다 훨씬 강한 용아병을 만들 이유가 뭘까. 천년에 걸쳐 최적화된 와일드 헌트 상대법을 뜯어고칠 이유가 대체 뭘까. 그런 고민을 계속했거든?”
채도 높은 붉은 눈동자가 이쪽을 빤히 바라본다. 마치 그 이상은 말하지 말아 달라는 것처럼.
하지만, 내가 그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없다.
세로로 찢어진 위압적인 눈동자. 하지만 묘한 위태로움을 품고 있는 이그나투스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너. 죽어가고 있구나.”
“…….”
“네가 죽은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강력한 용아병을 만들려는 걸 테고.”
“…….”
이그나투스가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에녹이라고 했느냐. 짐승같이 예리하구나. 아주 비슷하게 짚었느니라.”
“비슷하게?”
의아해하는 나를 향해 이그나투스가 쓴웃음으로 답했다.
“이 몸은 지금 졸립다.”
“엉?”
“아주아주 졸립다.”
“장난치는 거냐?”
“아니. 장난이 아니니라.”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고 말을 잇는 이그나투스.
“드래곤은 본래 잠이 많은 종족이니라. 그리고 이 몸은 모르테우스를……배신한 아버지를 막아내기 위해, 헤츨링이던 시절부터 천 년간 잠에 들지 못했지.”
“……어?”
“지금 잠들면 그야말로 죽은듯이 잠들 터.”
“…….”
“후우. 솔직히 말하마. 이 몸 없이 서부가 어떻게 와일드 헌트를 막을지가 걱정이었느니라. 그 대책 중 하나가 강화 용아병이었고. 이제 되었느냐?”
아하.
잠꾸러기 응애용이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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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서부(3)
수상쩍기 그지없는 이그나투스의 행적. 이를 추궁하여 숨겨진 진실을 알아내고 말았다.
“헤츨링 때부터 천 년……? 헤츨링이면 새끼 드래곤 말하는 거 아냐?”
“보고도 모르겠느냐. 나름 제국과 역사를 함께한 이 몸이 왜 이리 작은 거라고 생각한 게냐.”
“그런 취향인 줄 알았지.”
황제, 여신, 천하제일인, 드래곤 등등.
이런 최강자 라인의 존재하는 이들의 외견은 어린 여자아이인 것이 상식 아닌가.
……아닌가? 이건 너무 전생의 편견일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이그나투스가 숨기고 있었던 진실. 그것은 그녀가 잠꾸러기 응애 용이라는 것이었다.
여전히 내 무릎에 누운 자세로 기가 차다는 듯이 콧김을 뿜는 이그나투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일단 묻겠는데. 보통 드래곤은 얼마나 자야 하지?”
“평상시라면 그리 잠에 들 필요가 없느니라. 하지만, 대신 몰아서 잔다는 느낌이구나. 예를 들자면……그래. 겨울잠을 자는 곰과 비슷하니라.”
“허…….”
“마음만 먹으면 백 년도 넘게 깨어있을 수 있느니라. 물론, 항상 눈을 뜨고 있는 것은 아니고 여느 종족들이 그러하듯 중간중간에 휴식을 취해야 한다만. 대신 수면기가 찾아오면 최소 20년은 잠들어 있어야 하겠구나.”
“100년 깨어있는 대신 20년 잠드는 건 너무 비효율적인 것 같은데.”
“무얼. 인간도 하루의 3분의 1을 수면으로 소모하지 않느냐. 비율만 보면 이 몸이 훨씬 효율적이니라. 무엇보다 드래곤의 수면은 휴식과 재충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니라.”
“자는 게 자는 거지 뭐가 더 있어?”
“물론이니라. 드래곤의 수면은 성장한 심장의 마나만큼 육신을 성장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느니라. 즉, 잠만 자도 강해진다는 소리이니라!”
축 늘어진 채로 으스대는 이그나투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가느다란 몸에서 힘이 쪽 빠졌다.
“……이 몸은 천 년간 잠들지 못했지만 말이야.”
“천년이라. 애초에 그렇게 오래 잠을 참을 수 있다는 게 대단한데. 아니, 참으면 안 되는 걸 억지로 참아서 지금 상태가 영 안 좋은 건가.”
“옳다. 처음 300년 정도는 의지로 버텼느니라. 허나, 이 몸의 의지는 완벽하지 않았고, 결국 여러 마법과 약의 도움을 받아 지금껏 버텨왔건만……슬슬 한계로구나.”
“……지금 잠들면 몇 년 뒤에 깨어날 것 같아?”
“모르겠느니라. 이 몸이 최후의 드래곤이라 물어볼 이도 없고, 천 년간 잠을 참은 드래곤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기에.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깊은 한숨을 내쉬는 이그나투스. 어쩐지 이 짧은 사이에 한층 나른함이 더해진 기분이다.
“몇십 년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니라.”
“100년 깨어있으면 20년 잠들어 있어야 하니, 단순 계산해서 10배라 쳐도 200년은 잠들어 있어야 하는 건가.”
와일드 헌트를 보았기에 장담할 수 있다. 마탑은 강하고, 준비는 철저하지만, 이그나투스 없이 100년 넘게 서부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물론 이 몸도 준비를 게을리하지는 않았느니라. 결국 중요한 것은 사룡 모르테우스 아니겠느냐.”
“잠깐. 그나저나 아까 모르테우스가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어?”
“……오래전의 일이니라. 동족을 배신하고, 그런 주제에 미친 언데드가 되어버린 작자를 상대함에 주저라는 선택지는 없느니라.”
“그러냐.”
딱 잘라 말하는 이그나투스의 태도에 더는 무어라 물어보지 못했다.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만. 조금 전에 보니까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이며 절벽 너머로 떨어뜨리더만.
“아무튼 다시 본론을 돌아가자면, 이 몸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몸의 부재를 준비해 왔느니라. 구체적으로는 끝없이 되살아나는 언데드 군세, 혹은 사룡 모르테우스. 둘 중 하나는 완전히 봉인하는 식으로 말이니라.”
“완전한 봉인이라…….”
“으음. 던전의 관리자로서는 조금 듣기 불편한 말이었겠구나. 이 몸이 깨어날 때까지 버텨줄 봉인이라고 정정하마.”
던전이 악신의 하반신을 봉인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무수한 몬스터를 틀어막는 장치라는 걸 떠올린 걸까. 머쓱한 어조로 말을 덧붙이는 이그나투스.
“됐어. 대충 사정은 알겠으니까. 나를……자하브의 힘을 이용해 강화시킨 용아병도 그중 하나인 셈이겠네. 이그나투스 네가 잠들면 용아병을 지금처럼 생산하지 못할 테니, 소모품처럼 써먹는 전략에 금방 한계가 올 테니까.”
“……당대의 자하브는 영특하구나. 아니, 전투와 관련된 일에는 언제나 그러했지. 정답이니라. 한번 쓰고 버릴 수 없다면, 오래 쓸 수 있는 용아병을 만드는 것이 최선일 터.”
거기까지 말한 이그나투스가 내게서 잠시 건네받았던 오나홀을 다시 내밀었다. 힘이 없어서인지 한 손이 아닌 양손으로 조심스레 잡아서.
“그러니 부탁이니라. 강렬한 태양의 마나와, 이 몸의 불길을 품은 이빨과 비늘이 만나 만들어진 용아병이라면 분명 언데드들을 틀어막을 수 있을 것이니라.”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텐데.”
“물론, 용아병들이 언데드들을 상대하는 사이에 이 몸이 준비한 다른 안배로 모르테우스를 상대할 예정이니 걱정 말거라.”
“아니. 내 말은 다른 준비는 없냐는 질문이 아냐. 그 모든 것들로 충분하냐는 소리지.”
“…….”
입을 꾸욱 다문 이그나투스. 그런 그녀를 향해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위화감을 설명해 주었다.
“만약 오래 못 버틴다는 것을 알고, 이전부터 준비해 온 것이 있다면, 그런 걸 굳이 숨길 이유가 어디 있겠어. 이곳의 언데드들은 이성을 거의 잃었다면서. 당장 와일드 헌트가 시작될 때마다 시험해 봐야지.”
그래야 자신의 준비가 적절했는지, 부족한 점은 어디인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와일드 헌트를 상대하기 수월해짐에 따라 이그나투스 본인에게 가해지는 부담도 덜 해질 테니까.
하지만 이그나투스는 그러지 않았다. 언제나 그러하듯, 직접 날아가 브레스와 마법을 쓰고, 마탑 사람들에게 힘을 과시하며 와일드 헌트를 밀어냈으니까.
“지금껏 준비한 안배라는 것들에 큰 결함이 있는 거겠지? 이번 일도 뭐라도 하나 얻어 걸려라 하는 발버둥일 테고.”
“…….”
양손으로 오나홀을 쥔 채, 이쪽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이그나투스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린다.
“……정말. 자하브는 성가시구나. 천 년 전에도 지금도 이런 쪽으로는 감이 좋으니 말이야.”
난 자하브 아닌데.
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는 사이. 이그나투스가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 후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에녹. 그대의 말이 옳다. 이 몸은 정말 여러 준비를 했느니라. 드래곤 하트의 조각을 넣어 마도구를 만들기도 했고, 마나만 불어넣으면 되는 설치형 대마법을 100개 이상 중첩시켜보기도 했으며, 아예 이 몸을 대신할 존재를 길러내기 위해 제자를 들여보기도 했느니라.”
그리 말하며 메이킨 쪽을 바라보는 이그나투스.
스승의 이러한 사정까지는 몰랐는지 얼떨떨해하는 표정을 짓는 메이킨이었으나, 정작 이그나투스는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까딱일 뿐이었다.
“허나, 전부 실패했느니라. 드래곤 하트는 떨어져서도 본체와 연결되는 성질이 있더구나. 하여, 이 몸이 직접 인정한 자가 아니면 기껏 만든 마도구를 사용할 수 없으나…….”
“문제는 네가 몇십 년이 아니라 몇백 년 단위로 잠들어야 한다는 거겠지.”
“그러하니라. 이 몸이 인정한 이가 변절할지도 모를뿐더러, 설령 마지막까지 세상을 위해 헌신한다 해도 수명이 다하면 그 이후는 어찌할 방도가 없더구나.”
이외에도 너무 많은 마법을 중첩시키면 주변을 침식하여 이차원의 존재를 끌어당기기도 하고.
마탑까지 세워 비전을 전수했건만, 정작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제자는 너무나 적고 그나마도 단신으로 모르테우스를 몰아붙일 정도는 되지 않았다.
“……사실 이 몸도 크게 기대를 한 것은 아니니라.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발버둥 친 것에 불과하지.”
“모르테우스가 그렇게 강해?”
“아암. 언데드가 되며, 이지를 잃고 자연스레 마법 또한 다룰 수 없게 되었다고 하나……마지막 드래곤 로드이니라. 육신과, 변질된 죽음의 마력만으로도 이곳의 아이들 정도는 한입에 씹어 삼키겠지.”
“그런가.”
결국 서부의 몰락은 피할 수 없고, 풀려난 와일드 헌트가 제국을 종횡무진 헤집고 다니는 것 또한 확정된 미래라는 뜻.
세상에 이게 무슨 소리람.
그냥 소소하게 몸을 팔아서(?) 비자금을 마련하려던 생각이었건만……안락한 추방 라이프 같은 건 사실 없었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지.
“이그나투스. 내가 강화 용아병 제작을 돕는다 해도 확실하게 와일드 헌트를 막아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지?”
“그 정도가 아니라 강화 용아병으로도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니라. 물론, 자하브의 혈계능력과 이 몸의 속성은 궁합이 좋으니 어쩌면 예상외의 결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하지만 나는 자하브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지닌 것은 태양의 마나가 아니라 정순한 화속성 마나.
즉, 레드 드래곤인 이그나투스와 동일한 계열이다.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미친 연금술사가 만든 영약이 드래곤 하트에 비할 바는 아닐 테니 하위호환이라고 해야 할 터.
이그나투스가 기대한 혹시나의 가능성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나.
이 방법은 정말 쓰고 싶지 않았지만, 나의 추방 라이프와 제국의 수많은 생명이 걸려있지 않은가.
좋고 싫고를 가릴 때가 아니다.
각오를 다진 뒤. 진지한 목소리로 이그나투스에게 물었다.
“이그나투스. 드래곤은 마법의 조종이지?”
“과장 조금 보태자면, 이 몸은 현시대 모든 마법사들의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겠구나.”
“그럼 처음 보는 마법이나, 원리는 모르고 눈으로 외운 마법도 금방 펼칠 수 있겠네?”
“무슨 마법이냐에 따라 다르겠으나, 어지간한 것은 될 것 같다만……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고 그러는 것이느냐?”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그나투스. 그런 그녀를 향해 쓸개를 토해내 씹어뱉는 듯한 거부감을 억지로 억누르며 말했다.
“혹시. 타나토스의 침상이라는 흑마법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나를 처음으로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흑마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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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서부(4)
“혹시. 타나토스의 침상이라는 흑마법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미친 연금술사를 죽이고, 실험실에서 탈출한 이후. 살아남다 보니 어마어마한 수준의 흑마법 저항력을 지닌 나였으나.
그런 나조차 흑마법사 놈들을 상대하며 죽기 직전까지 몰린 적은 여럿 있었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함정에 빠지거나, 흑마법사 놈들이 다른 강자를 통해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지.
순수하게 흑마법에 당해 죽을 뻔한적은 없다.
단 한 번. 타나토스의 침상이라는 마법에 당했을 때를 제외하면.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마법 이름에 이그나투스가 움찔한다.
“……들어본 적은 있는 마법이니라. 허나, 들어보기만 했을 뿐. 이 몸조차 실제로 본 적은 없는 마법이거늘. 에녹. 그대는 방금 말한 것이 어떤 마법인지 알고 있느냐?”
“어. 직접 당해보기까지 했으니 잘 알 수밖에.”
“죽음의 신이 조금 특수한 신이라고는 하나, 어찌됐건 신의 이름이 들어간 마법 아니느냐. 권능의 일부를 담았거나, 적어도 권능을 닮은 마법일 터. 그걸 맞고도 이리 살아있단 말이느냐?”
“조금 사정이 있었거든.”
“대체 무슨 사정이 있었길래 비극의 밤에도 보기 힘든 마법에 당했단 말이느냐.”
“알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내가 칼립소 영지 출신이거든?”
“아, 들어본 적은 있느니라. 꽤나 최근까지 본인이 어떤 피를 타고났는지 모르고 있다고 하더구나.”
사실 아직도 내 혈통이 어디서 기인된 것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리고 칼립소는 온갖 쓰레기들이 넘쳐나는 곳이라 말이지. 조금 폭력적인 유년기를 보냈다고 해야 하려나…….”
“으음?”
“칼립소의 흑마법사 지부랑 살짝 원수진 게 있어서 죄다 박살 냈거든. 그러다 마지막 발버둥인지 지부장 같은 녀석이 자신을 제물 겸 미끼 삼아 발동한 마법이 타나토스의 침상이었어. 이야. 그때는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당시의 일을 이렇게 써먹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
세로로 찢어진 눈을 멍하니 끔뻑이는 이그나투스.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손에 들고 있는 오나홀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물컹물컹한 것이 묘한 기분이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당대의 자하브여. 칼립소의 흑마법 지부라고 했느냐?”
“엉. 문제라도 있어?”
“나름 마탑을 운영하는 입장인 만큼, 흑마법사 놈들의 행태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약간 더 알고 있느니라.”
“오.”
“이를테면 칼립소에는 흑마법사 지부가 없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니라.”
“……오?”
그럼 내가 상대했던 건 대체 뭐였다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칼립소에서의 모든 일이 내 망상일 리는 없잖은가.
가만히 이그나투스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녀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칼립소에 있는 것은 지부가 아니라 본부이니라.”
“본, 부?”
“옳다. 대륙에 퍼진 모든 흑마법사들의 고향. 모든 금지된 비의가 집중되는 곳. 신위를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들이 고인 응달……그것이 칼립소의 흑마법사들을 부르는 말이니라.”
“…….”
이건 진짜 몰랐는데.
애초에 흑마법사 놈들은 말이 통하는 대상이 아니라 심문이 별 의미 없었다지만.
그래도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충격인데.
동시에 조금 이해되는 것들도 있었다.
던전에서 만난 흑마법사나, 일전에 나를 노리고 자하브 성까지 찾아온 놈들.
녀석들은 나를 보고 고향의 파괴자라는 식으로 불렀었지. 당시에는 그냥 칼립소 출신 흑마법사 생존자인가 싶었는데……말 그대로 내가 놈들의 본부를 박살 냈다는 의미였나.
어안이 벙벙해져 눈만 끔뻑이는 것도 잠시. 나보다도 더 어이없어하는 이그나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흑마법사 놈들의 본단이라면, 신의 이름이 담긴 마법이 있을 수 있지. 놈들의 수장이 스스로를 제물 삼았다면 시전하는 것도 불가능을 아닐 것이야.”
“허어…….”
“다만, 거기서 살아 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만……아무래도 정말 모르고 있었던 눈치구나.”
“그야 흑마법사 놈들과는 대화가 성립하질 않으니까. 수준 낮은 녀석이라면 모를까.”
“이런. 확실히 그것도 그렇구나. ……뭐어.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기로 하자꾸나. 아무래도 에녹 그대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이 많은 모양이니.”
“……그러게. 일단 이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기로 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어차피 이그나투스를 통해 나중에라도 다시 들을 수 있는 내용 아닌가. 우선은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기로 했다. 당장 급한 건 이쪽 같으니까.
“우선은 종이가 필요한데.”
“메이킨. 가져와 주겠느냐?”
“네? 네…….”
자연스레 주변에서 어버버거리는 제자, 메이킨을 부려 먹는 이그나투스.
메이킨이 종이를 찾아 잠깐 나간 사이에 말했다.
“타나토스의 침상이 어떤 마법인지는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직접 당해본 입장에서 한번 설명해 줄게.”
“그게 더 좋겠구나.”
쉽게 말하자면 타나토스의 침상을 일종의 즉사 마법이다.
다만,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껙! 하고 죽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제대로 걸리면 저항의 여지조차 없이 그냥 죽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즉사 마법인 것이지.
“마법이 시전된 순간 항거할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와. 나는 흑마력에 저항할 수 있는 체질이라 버틸 수 있었지만……대부분은 못 버틸 거야.”
나와 함께 갇힌 몇몇 흑마법사 놈들의 최후를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놈들이 눈을 감고, 잠에 든 순간. 육신이 빠르게 나이를 먹더니, 순식간에 쭈글쭈글한 노인이 되어 숨을 거두었다.
잠자듯이 조용히 죽는 것을 호상이라고 하던가. 타나토스의 침상은 이를 위한 마법이었다.
아무런 고통도, 고민도, 두려움도 없다. 그저 잠에 들고 천수를 다하여 생을 마감할 뿐.
“근데 이건 수명이 100년 남짓한 인간이니까 몇 분만에 죽음에 이른 거잖아. 수명이 훨씬 긴 드래곤이라면 중간에 마법을 끊어 빠르게 필요한 수면을 보충할 수 있는 거 아냐?”
“……가능성은 있겠구나. 듣자하니 타나토스의 권능을 담은 것이 아니라, 이를 흉내 낸 닮은 마법이니 개량할 여지는 있을 터.”
그렇다. 타나토스의 침상은 즉사 마법이라면 즉사 마법이지만, 그 원리는 결국 시간의 가속에 있다.
우리는 흔히들 살아간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이는 동시에 죽어간다는 말이기도 하니.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죽어가는 것들이라고도 부를 수 있으리라.
아마 타나토스의 침상을 처음 개발한 마법사는 이러한 부분에 착안하여 이름을 붙인 거겠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메이킨이 적당한 크기의 종이를 가지고 돌아왔다.
“여, 여기 종이 가져왔어요 스승님!”
“잘했느니라. 어서 여기 있는 에녹에게 건네주거라.”
“네!”
메이킨에게 종이와 펜을 받아 들자마자, 기억 속의 풍경을 최대한 똑같이 따라 그렸다.
죽기 직전까지 몰렸던 경험이라 그런지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는 기억.
두터운 밀실과, 그 안에 그려진 복잡한 마법진을 옮겨 되는대로 전부 옮겨 그리고는 이그나투스에게 넘겼다.
조용히 빽빽하게 채워진 종이를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거 아느냐. 죽음의 신 타나토스는 신들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신이라는 것을.”
“뭐, 악신이라도 되는 건가?”
“그럴 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수는 있으나, 이는 물리쳐야 할 사악이 아니니라. 오히려 세상을 순환시키는 중요한 축이거늘. ……타나토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는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탐탁지 않아 했느니라.”
“엉?”
“이해하느니라. 어이가 없겠지. 하지만 사실이니라. 타나토스는 죽음은 완벽한 시스템이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 이를 위해서는 죽음을 지배하고, 마음대로 뒤집을 수 있는 자신의 존재는 불필요하다고 여겼느니라.”
“미친놈이잖아?”
“비극의 밤 이후로, 살아남은 신들은 북부의 만신전에 틀어박혔기에 신언을 들을 일이 없어서 모를 뿐. 사실 필멸자들의 눈에 비친 신들은 항상 미친 것들이었느니라.”
피식 웃은 이그나투스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타나토스는 자신의 존재를 불필요한 것이라 여겨 곧장, 스스로에게 죽음을 내렸느니라.”
“자살했다는 소리네.”
“허나, 죽음의 신이라 금방 부활해 버리고 말았다더구나. 아마 잠깐 잠들었다 깬 감각이 아닐까 싶으니라.”
“……설마?”
“그러하니라. 에녹 그대가 그린 마법진을 보아하니, 타나토스의 침상은 타나토스의 죽음과 부활을 마법적으로 해석한 것 같구나.”
기억나는 대로 그린 마법진. 이를 내게서 받아 든 이그나투스.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라면 이 몸이 어떻게든 뜯어 고쳐볼 수 있을 것 같으니라. 같은 마법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비슷한 효과는 나올 터.”
“그럼?”
“……놀랍게도 지난 몇백 년간 고민한 모든 방법들 중 가장 가능성 높은 방법이구나.”
멍하니 중얼거리는 이그나투스. 그런 그녀를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고마우면 보수는 2배로 줘. 일부는 금화 말고 보석으로 주고.”
“얼마든 그리 하마.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으니. ……다만, 아무리 나라도 100만 골드 어치의 금화와 보석을 추가로 구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느니라.”
“괜찮아. 여기서 기다리면 되지. 내가 알려준 마법이 잘 작동하는지도 확인해 봐야 하고.”
나중에 문제 생겼다고 뒷말 나오면 곤란하니, 이런 건 확실히 해야지.
“……아, 그리고 기존 계약은 파기해도 이건 좀 받아 갈 수 있을까?”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받아들며, 내게 다시 돌려준 오나홀을 흔들며 물었다.
판타지판 오나홀? 이걸 어떻게 참아. 한번 사용해 봐야지.
그런 가벼운 생각이었건만, 어째 이그나투스의 반응이 영 미묘했다.
“애초에 주려고 만든 것이니 괜찮다만……시료를 따로 채취할 것이 아님에도 그런 마도구가 필요한 게냐?”
“응?”
“에녹. 그대에게는 미색이 뛰어난 종자가 하나 있지 않느냐?”
“???”
의아해하는 내게 보란 듯이 턱을 까딱여 카렌을 가리키는 이그나투스.
그 말뜻을 눈치채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카렌은 오나홀이 아니야…….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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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서부(5)
이그나투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인 뒤. 그녀는 즉시 잠들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잠시 마탑에 머무르며 이를 옆에서 지켜보았고.
별다른 이유는 아니다. 이그나투스가 말했던 것처럼, 100만 골드에 달하는 골드와 현물을 재차 마련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고.
무엇보다 내 기억에 의존해 재현한 마법에 이그나투스가 자신의 미래를 걸고 있으나, 나 몰라라 하면서 돌아가기도 좀 그렇더라고.
하여, 푹신한 의자에 눕듯이 기댄 자세로 열심히 일하는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이그나투스의 본체가 들어갈 정도로 거대한 건물. 그 내벽을 꼼꼼히 감싸는 복잡한 수식들.
“어째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복잡해 보이는데?”
“어쩔 수 없느니라. 이 몸이 사용하기 위해서는 손봐야 할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으니 말이니라.”
마찬가지로 내 옆에서 반쯤 누운 자세로 태연히 대답하는 이그나투스.
누가 보면 휴양지에 놀러 오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니, 나야 마법은 문외한이니 그렇다 쳐도 넌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뭘 모르는구나. 아카데미에서도 교수는 감독만 하지 실무는 수제자들이 하느니라. 하물며 마탑은 어떻겠느냐.”
“……마탑주인 너는 누워서 어디 잘못된 부분 없나 확인만 하고, 실제로 마법진 그리는 건 네 제자들이 한다는 소리인가?”
“바로 그러하니라. 아쉽게도 당대의 제자 중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아이는 없지만, 다들 고위 마법사이니 마법진 정도는 잘 그릴 것이니라.”
“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앞에서 열심히 작업 중인 마법사들을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외모. 경지에 오른 기사나 마법사는 노화가 느려지는 것을 감안했을때, 실제 나이는 훨씬 많으리라.
그런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외모의 마법사들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벽과 바닥에 마법진을 새기고 있었다.
심지어 가끔 실수하면 사형으로 보이는 이가 혼내기까지 했다.
“이게 맞나…….”
“마법사들의 유구한 전통이니라.”
이그나투스는 어깨를 으쓱였지만, 내 눈에는 악덕 교수와 대학원생 정도로만 보였다.
심지어 다 늙을 때까지 논문 통과도 안 시켜주는 악덕 교수 말이다.
실로 끔찍하기 그지 없는 풍경이었으나, 이그나투스의 모든 제자들이 마법진 작성에 동원된 것은 아니다.
일부는 마탑 운영을 위해 열외되었고, 일부는 순수하게 경지가 부족하여 작업에서 제외되었으니.
호다닥 뛰어다니며, 사형들의 심부름을 하는 메이킨이 그러했다.
“메이킨. 이 몸이 마실 음료도 같이 내오거라.”
“네? 아, 알겠어요 스승님!”
“항상 마시던 것으로 부탁하느니라.”
“항상 마시던……거요?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몇 년 됐다고 벌써 잊어버린 게냐?”
막내 제자를 향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을 보낸 이그나투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신성력으로 키운 박하 잎을 우려낸 차에 설탕 대신 시럽을 다섯 스푼 추가하고, 토핑으로는 크림과 초코칩을 3:1 비율로 올린 뒤, 가장 위에는 비스킷을 올려오면 되느니라.”
“……네!”
대체 평소에 뭘 먹는 걸까.
박하잎으로 우린 차에 시럽을 듬뿍 섞고, 크림에 초코, 비스킷까지 올리다니.
“아.”
이거 그건가. 뒤지게 달달한데다가 심지어 따뜻하기까지 한 민트초코에 바삭한 비스킷 올려놓은 거?
드래곤의 괴상한 식성에 몸이 절로 떨려왔다.
다만, 나 또한 목이 말랐던 것은 사실이기에 손을 까딱여 카렌을 불렀다.
“카렌카렌아.”
“네, 가주님.”
“난 우유로 가져와.”
“우유……말씀이십니까?”
“어.”
“……알겠습니다.”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카렌. 동시에 주변이 갑자기 웅성이기 시작했다.
“우유라면……역시 그건 뜻이겠지?”
“자하브잖나. 당연히 그런 뜻이겠지.”
“아이고……저 작은 곳에서 나올 게 뭐가 있다고.”
“그러게 말이야.저 정도면 마탑주님과 비슷한 수준이거늘.”
어쩐지 터무니없는 오해를 산 것 같아 황급히 덧붙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우유라는 건 소의 젖을 말하는 거다?”
“네?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만.”
“뭐야. 그럼 왜 그렇게 긴장한 표정을 지은 거야?”
“가주님이 질 수 없다는 듯이 복잡한 음료를 주문하실 줄 알고, 한 번에 외우려 집중하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에요.”
“……내 입맛이 그렇게 특이하진 않을 텐데.”
“예? 아뇨, 입맛의 문제가 아니라 복잡한 풍미의 음료는 귀족 사회에서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니……아, 혹시 모르셨습니까?”
“몰랐고, 알았어도 그냥 우유나 가져오라고 했을 거야. 내가 먹고 싶은 거 먹어야지, 남들 시선 신경 써서 뭐 해.”
어깨를 으쓱이자,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꾸벅이고는 멀어지는 카렌.
그 모습에 이그나투스가 의외라는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사람 젖이 아니었다니…….”
“남의 집에 와서 그런 걸 찾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전전대의 자하브는 그랬다만?”
“…….”
“아, 참고로 전전전대의 자하브는 코카트리스의 피를 마시고 싶다고 했느니라.”
“선택지가 극단적인 걸…….”
“무얼. 젖 또한 본래는 피였으니, 사실 일관된 취향이니라. 그대는 아무래도 평범한 소의 젖을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지만. ……혹시나 해서 묻겠다만 젖소 수인 여성의 젖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
그건 솔직히 좀 궁금했기에 대답 대신에 질문을 돌리기로 했다.
“그나저나 손봐야 한다는 건 어떤 부분이야?”
“별거 아니니라. 본래 타나토스의 침상은 안락하지만, 절대적인 죽음을 선사하기 위한 마법. 그러나 이 몸은 중간에 깨어나야 하니, 마법이 정상 작동하는 선에서 의도적으로 틈을 만드는 것뿐이니라.”
“아하. 근데 원래는 흑마력으로 작동하는 마법인데, 이 부분은 괜찮은 건가?”
“음? 아, 마법에는 문외한이라고 했었구나. 사실 흑마법은 그 자체로 사악한 마법이 아니니라. 당연히 흑마력 또한 마찬가지고.”
“……그건 좀 믿기 어려운 말인데.”
누군가 사람을 죽인다면, 죽인 사람의 잘못이지 도구인 검에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껏 흑마법사와 싸우며 수많은 흑마법을 보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확언할 수 있다. 흑마력은 사람의 어두운 면을 자극하고, 흑마법은 잔혹한 방식으로 수련하는 마법이라는 것을.
실제로 흑마법의 대부분은 저주, 네크로맨시, 이차원 간섭 같은 흉흉한 것들뿐이고.
하지만 이그나투스는 내 말을 듣고도 희미한 미소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흑마법이 다른 마법과 다를 것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그저 선악의 구분 이전에 존재하던 것이라는 의미였지.”
“선악의 이전……?”
“애초에 선과 악의 경계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하는 것 아니더냐. 지금이야 대부분의 나라가 네크로맨시를 금지하지만, 비극의 밤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죽음을 다루는 마법이 금기가 아니었느니라.”
“뭐? 그럼 그때는 아무나 언데드를 부렸다고?”
“노예를 부리는 것보다 언데드를 부리는 쪽이 훨씬 효율적인데, 무턱대고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무엇보다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고대로부터 이어진 필멸자들의 숙원. 기본적인 선은 있었으나, 신들도 네크로맨시 그 자체를 문제 삼진 않았느니라.”
파이어 볼을 익히는 것이 불법은 아니다. 당연히 사용하는 것도 문제는 없고.
하지만 허가 없이 사람을 향해, 누군가의 재산을 향해 파이어 볼을 날리는 건 불법이다.
대충 그런 느낌으로 네크로맨시가 허용된 시기가 있었다고 말하는 이그나투스.
“이 몸이 어린 시절의 일이니라. 만약 그보다 훨씬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더 많은 것들이 허용되었을 터.”
“……무슨 말인지 알겠네. 세대를 거듭하고, 시행착오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많은 규칙이 생겼겠지.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금지된 마법이 처음부터 금지된 마법은 아니었던 것처럼.”
“옳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고, 또 올라가다 보면 맞닥뜨리는 것을 마법사들은 원류라고 하느니라.”
세세한 학파로 분화되기 이전. 고대 마법을 넘어, 원시 마법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들.
“저주는 공격 마법의 시초였느니라. 남을 해하고자 하는 마음 그 자체가 저주이고, 모든 공격 마법은 여기서 출발하는 거이니.”
“네크로맨시는…….”
“한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죽음을 극복하려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니라.”
그 외에도 연금술, 시공간 계통 마법, 계약 마법 등등. 온갖 자질구레한 마법들은 그에 상응하는 흑마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이그나투스.
“아무 색이나 되는대로 섞다 보면 결국 물감이 검게 물드는 법. 흑마력 또한 마찬가지이니라.”
“그럼 흑마력에서 느껴지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성질은……마법이 원래 그런 거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필멸자의 눈으로 보면 아무리 친근한 신이라도 광기에 절은 존재라고. 그리고 마법은……필멸자의 몸으로 신위에 닿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니라.”
그래서 신의 이름을 집어넣은 마법이 하나같이 대마법 취급 받으며, 가장 고난이도에 속한다고 덧붙이는 이그나투스.
궁금했던 내용이긴 한데, 정작 이를 듣고 나니 한번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나씩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자니, 이그나투스가 고개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그대는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는구나. 내 장담하마. 역대 자하브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지성이니라.”
“아니, 갑자기 뭔…….”
난데없는 자하브 디스에 어이가 없었으나, 이어진 이그나투스의 정리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하게 생각하거라. 흑마법은 사악한 것이 아니라 야만적인 것이니라. 그리고 문명이 자리 잡고, 그만큼 제약으로 둘러싸인 지금 시대에 무절제한 야만은 불필요한 것이지.”
“이제 좀 알겠네. 즉, 흑마법은 지난 시대의 패배자고 흑마법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분탕종자라는 거지?”
“……꽤나 파격적인 비유지만, 얼추 그러하니라.”
어느새 메이킨이 대령한 입에 담기도 두려운 음료를 한 모금 홀짝인 이그나투스가 말을 이었다.
“뭐어. 비극의 밤 이후. 트라고데아의 축복을 받은 탓에 지금의 흑마법사들은 많이 변질되었지만 말이야.”
“예전에는 달랐다는 건가.”
“법을 어기고, 멋대로 사람을 납치해 인체 실험 재료로 삼으며, 새 마법을 시험해 보겠다며 마을 하나를 몰살시키는 건 예전부터 그러했느니라.”
“……달라진 부분이 있긴 해?”
“과거에는 필요에 의해 저지른 일들이라면 비극의 밤 이후에는 불필요함에도 그것이 더 비극적이라는 이유로 저지르는 경우가 많아졌더구나.”
“아.”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흑마법사들의 과장된 태도.
경지가 높아질수록, 그러니까 자신의 마력에 트라고데아의 신력을 많이 섞을수록 흑마법사의 정신은 변이된다.
말투는 연극투처럼 변하고, 효율이 아닌 흥미를 쫓기 시작하며, 스스로의 죽음마저 유희의 일종처럼 여기는 것.
“에녹, 그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난 시대의 꿈을 잊지 못한 분탕종자들이 이제는 자신의 의지로 분탕을 치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완벽히 이해했어. 갱생의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보이는 족족 죽이면 된다는 거지?”
“……그래. 다만,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그대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니라.”
“경고라고?”
“흑마법사들은 신위에 매료되어 스스로를 광기에 빠뜨린 자들. 그런 이들이 트라고데아의 신성에 휘둘려 한층 본질에서 멀어졌느니라.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소리겠지.”
“옳다. 그리고 에녹 그대는 흑마법사들의 본부를 무너뜨리고, 수장을 쓰러뜨렸느니라. 이루어질 수 없기에 더욱 집착하는 비원을, 천 년간의 성취를 박살 낸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느냐?”
“당연히 알고 있지.”
어깨를 으쓱이고는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흑마법사 놈들이 나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소리잖아.”
“……놈들의 집착이 상상 이상으로 지독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만, 그럴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구나.”
이그나투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광오하구나. 허나, 그것이 사람의 몸으로 태양을 담은 자하브라는 거겠지.”
“…….”
자하브 아닌데.
***
이후로도 시간은 훌쩍 흘렀다.
와일드 헌트를 한차례 밀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인지, 위험한 낌새도 없었고.
고위 마법사들이 이그나투스의 감독하에 뺑뺑이 치다 보니 타나토스의 침상을 개량하고 준비하는 과정 또한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렇게 내가 마탑에 도착한 지 열흘째 되던 날.
이그나투스는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와, 마법진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았다.
-에녹. 이 몸이 잠에 들면 정확히 20시간 뒤에 깨어날 것이니라.
“생각보다 금방이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이 20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거든 대신 처리해 줄 수 있겠느냐?
“추가금만 제대로 지급한다면야.”
-후후. 다른 어디도 아닌 드래곤이자, 마탑주인 이 몸 아니더냐. 세월에 묻힌 다른 동족의 레어를 털어서라도 지불할 테니 걱정 말거라.”
“……아니, 그렇게까지는 좀.”
거대한 드래곤이 한참을 키득이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럼 내일 보자꾸나.
“잘 자라.”
짧은 농담과, 그보다도 더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건물을 나섰다.
내가 나오는 것과 동시에 문이 닫히며 완전한 암실이자, 밀실이 되는 건물.
나조차 흠칫할 정도로 막대한 마나가 집중되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두터운 벽 너머로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덩치가 워낙 크다 보니, 밖에서도 숨소리가 들리는 모양.
그나저나 자고 일어나면 덩치가 더 커지는 건가…….
이를 감안하고 건물을 준비했다고 들었지만, 잘 상상이 안 간단 말이지.
픽 웃으며 내게 배정된 방으로 돌아갔다. 20시간이면 나도 한 숨자고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
.
.
.
.
그리고 한밤중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괴성에 잠에서 깼다.
—————!!
사룡, 모르테우스의 울음소리였다.
“조졌네.”
와일드 헌트가 시작되었다.
지난 와일드 헌트로부터 고작 열흘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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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와일드 헌트
이그나투스가 천년만의 잠에 들고 한나절쯤 지났을 무렵.
—————!!
한밤중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괴성에 잠에서 깼다.
깊은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오는 듯한, 끝 모를 울림. 사람의 본능적인 공포와 거부감을 자극하는 마성.
딱 한 번 들어본 것이지만, 잊을 수 없는 소리기도 하다.
“조졌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의 울음소리는 사룡 모르테우스의 비명이었으니까.
일어나자마자 습관적으로 몸 상태를 확인했다. 딱히 이상은 없다. 짧게나마 방금까지 잠을 자고 있었던 덕분인지 오히려 컨디션은 만전.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문을 열고 바깥을 살펴보았지만.
“진짜 조졌네.”
저 멀리서 일렁이는 마력의 방벽이 보였다. 마탑에 설치된 대 언데드용 방호 마법이다.
혀를 차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거칠게 열리는 문.
콰앙!
“도련님!”
“일어났냐 카렌. 하긴. 방금 전의 소란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없긴 하지.”
“농담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당장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뭐?”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만, 본래 한참 뒤에 일어나야 할 와일드 헌트가 열흘 만에 재개됐습니다! 분명 이상현상이라고요!”
“그렇겠지. 남부의 던전 역류가 1년 만에 다시 일어난 것처럼 말이야.”
“태평하게 대답하실 때가 아닙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아니, 될 수 있는 만큼은 싸워볼 생각인데. 이그나투스가 아침 먹고 잠들었으니 해 뜰 때쯤이면 깨어나겠지. 그때까지만 버티면 될 거야.”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오러를 순환했다. 약간 남아있던 잠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고, 정신이 또렷해진다.
덕분에 지금 상황 또한 선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렌은 조금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그리고 가주님께서는 이 땅의 주인이 아니십니다. 이곳에서 굳이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는…….”
“카렌카렌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카렌을 불렀다. 그리고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말랑한 볼살과,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 이제야 좀 조용해진 카렌을 향해 말을 이었다.
“도망친다면 어디로?”
“……으븝?”
“우린 여기까지 텔레포트로 한 번에 왔어. 돌아가는 길 따위는 몰라.”
“읍! 으븝!”
“그래그래. 남아있는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에게 자하브로 향하는 텔레포트를 시전해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브읍?”
눈을 끔뻑이는 카렌. 이제 좀 침착해진 그녀의 모습에 낄낄 웃으며 손을 놔주었다.
“간단한 이야기야. 마탑은 절대 혼자의 힘만으로 와일드 헌트를 이겨낼 수 없어. 어쩌면 동이 틀 때까지 버티는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버티지 못할 수도 있겠지.”
“……안타까운 일이지만 자하브와는 관련 없는 일입니다.”
“생각이 짧구나 카렌아. 하긴. 거의 평생을 자하브에서만 살았다고 했지. 이참에 잘 기억해 둬. 남부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보자.
겨우 열흘 전에 와일드 헌트를 막아내느라 비축해 둔 자원 대부분을 소모한 탓이건, 이그나투스 없이는 힘이 부족하건, 그냥 운이 없건.
아무튼 마탑이 지금의 와일드 헌트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저 장벽은 부서지고, 모르테우스와 막대한 언데드들이 구덩이를 기어나와 대륙으로 쏟아지겠지.
당연히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이그나투스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테고…….
죽은 이그나투스 또한 새로운 본 드래곤이 되어 와일드 헌트에 합류하리라.
한 마리로도 버거웠던 본 드래곤이 두 마리로 늘어난 와일드 헌트를 과연 제국이 막아낼 수 있을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 혈통 그 자체에 힘이 흐르는 이 세계의 특성상 황실의 무력은 막강할 테니까.
하지만 많은 피해가 있을 것은 확실하다. 약해진 자하브는 덩달아 휘청일 테고.
만약 황실마저도 와일드 헌트를 제때 막아내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 최악 중에서도 최악으로 손꼽히는 가능성이리라.
와일드 헌트는 막대한 죽음의 기운을 몰고 다니며, 그 탓에 희생자들을 언데드로 삼아 합류시키는 특성이 있다.
굳이 기사를 쓰지 않고 무생물인 용아병을 쓰는 것도, 사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여차하면 이그나투스 본인이 직접 나선 것도 그래서고.
즉, 막을 타이밍을 놓친 와일드 헌트는 대륙의 재앙이 된다.
본 드래곤이 앞장서고, 과거의 영웅들이 못다 한 전투를 이어가며, 마탑의 마법사들은 물론, 이를 막아 세우기 위한 현시대의 용맹한 자들까지 집어삼킨 죽음의 군단.
“대륙은 죽은 자들의 것이 되겠지. 산 사람들은 오히려 숨어 살아야 할 테고. ……자하브는 그런 상황을 버텨낼 수 없어.”
던전을 막으며 언데드 군세까지 막아낸다? 상성의 문제를 제쳐두고서라도 단순히 역량이 부족해 불가능하다.
“그리고 결국 4대 대공들이 틀어막던 재앙은 전부 풀려나겠지. ……그 뒤에는 죽지 못해 봉인 당했던 트라고데아가 깨어날 테고.”
천 년 전과 달리, 다시금 트라고데아가 강림한 대륙에는 그를 막아설 능력이 없다.
결국 이 세상은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터.
당연히 기껏 판타지 세상에 환생했으니, 여기저기 둘러보고, 비자금으로 챙긴 돈을 펑펑 써대는 추방 라이프를 보내겠다는 나의 꿈도 더는 이룰 수 없게 되겠지.
“……그건 너무 비약적인 상상이에요 가주님.”
“그렇지만도 않아. 아직 글을 읽을 줄 몰라, 카렌 네가 직접 읽어준 대륙의 역사. 그걸 들으며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 줄 아니?”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위태롭다. 그 생각밖에 안 들더라.”
전생. 지구에서의 삶에서 위기란 기껏해야 미친 강도를 만난다거나, 재수 없이 일어난 사고로 목숨이 위험한 정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최대한의 끔찍한 방향으로 상상해 보아도,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하는 정도?
다만, 핵무기에는 의지가 없고 이를 날려 보낼 수 있는 이들은 그 위험성을 잘 인지하고 있다.
반면, 이 세상은 어떠한가.
천 년 전에 망했어야 할 세상을 여러 영웅들과 신들이 힘을 합쳐 꾸역꾸역 살려놓은 것이다.
하나만 풀어져도 대륙을 망가뜨릴 수 있는 재앙이 4개나 있으며, 심지어 그중 동부에 봉인된 재앙은 풀려난지 오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행방이 묘연하지만…….
“그거 알아? 최근의 역사를 큰 흐름으로 살펴보면 칼립소 대공가가 멸문하고, 동부의 재앙이 풀려난 이후. 던전의 역류 간격이 짧아졌고, 와일드 헌트의 발생 빈도가 불규칙적으로 변했어.”
“……예?”
“물론, 이건 그냥 선후 관계일 뿐, 인과 관계는 아닐 수도 있겠지. 다만 아까도 말했듯이 최악을 염두에 둬보자는 거야.”
재수 없으면 대륙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재앙 중 하나가 풀려났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더 풀려난다?
“대륙 전체는 몰라도 일단 제국은 못 버틸걸.”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된 변화라 그런 걸까. 아니면 너무 오랜 시간 봉인된 재앙을 가까이에 두고 살아 무뎌진 걸까.
카렌은. 아니, 내가 지금껏 만난 이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멸망 위에 기적적으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하는 것 같단 말이지.
뭐어. 나라고 진지하게 모든 멸망을 막겠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일 없었으면 한다. 그거면 충분하다.
“…….”
내 말에 무언가 생각하는 바가 있는지 입을 꾹 다문 카렌.
그 덕에 평소보다 뽈롱한 카렌의 볼을 양옆으로 쭈욱 잡아 늘리며 히죽였다.
“그리고 카렌 네가 말했잖아?”
“……머를 말인가여?”
“귀족의 의무는 외적들로부터 사람을 지키는 것이라고.”
“아.”
눈이 땡그래진 카렌을 향해 평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세상에 정말로 복잡한 일은 얼마 없어. 복잡해 보일 뿐이지 사실은 간단한 문제거든.”
강대한 적이 쳐들어왔고, 새로 사귄 친구는 푹 잠들어 있다.
그리고 다행히도 다음 날 아침까지만 버티면 모든 게 해결된다.
짱짱쎈 투명 드래곤……은 아니지만, 푹 자고 개운해진 응애 드래곤이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하지만 괜히 겁을 집어먹고 등을 돌렸다가는 모든 게 무너질 수 있다.
“당연히 여기서는 어떻게든 버텨봐야 하지 않겠어?”
“…….”
카렌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렇게 평소와 같은 단정한 차림과 무표정으로 돌아와 고개를 꾸벅인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주인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는 하나, 확실히 시야가 짧았네요.”
“그래 그래. 알면 됐어.”
“허면 이제부터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마탑의 시스템은 가주님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만…….”
“일단 나가보고 생각해야지.”
용아병을 소모하는 것을 전제로 짜올린 메뉴얼과 직접 몸으로 싸워야 하는 나는 상성이 좋지 않지만.
이곳이 어디인가. 대륙의 유일한 마탑이다.
즉,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똑똑한 이들이 모여있다는 소리.
“마법사들이 뭔가 방법을 찾아주지 않을까.”
어깨를 으쓱이고는 방을 나서자, 자연스레 반보 떨어진 거리에서 뒤따라오는 카렌.
방을 나와 정문 쪽으로 향하자 점점 커지는 전투의 소음.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모르테우스의 울음소리와 누군가의 비명이 뒤섞인다.
분주하게 달리는 마법사들과 이를 서포트하는 아직 어린 제자들을 지나, 정문에 도착한 순간.
볼 수 있었다.
■■■■■■——!!
이그나투스의 마력이 느껴지는 이글거리는 사슬에 묶여 발버둥 치는 모르테우스와, 말 그대로 뼈가 부서져라 장벽을 두드리는 언데드를 마법으로 폭격하는 마법사들을.
뭐야. 생각보다 할만해 보이는데?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조금 위쪽. 타나토스의 침상 마법진을 설치할 때 봤던 늙은 마법사.
이그나투스가 없는 지금, 마탑의 결정권자나 다름없는 최고참 제자가 피를 토했다.
“쿨럭!”
그리고 모르테우스를 구속하던 사슬이 흐트러졌다.
대충 알겠네. 저 사슬은 이그나투스가 말했던 자신이 없을 때를 대비한 마도구이리라.
여러모로 조건이 까다로워 사실상 실패작 취급 받았다는 대 모르테우스용 마도구.
그리고 지금. 실패작이 왜 실패작인지 몸소 증명하고 있는 중이리라.
“쯧.”
혀를 차며 마탑의 외벽을 밟고 미끄러지듯이, 위쪽의 테라스 비슷한 곳으로 향했다.
“커흑! 누, 누구…….”
이그나투스의 대제자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평정을 되찾았다.
“……자하브 대공이셨습니까. 이곳은 위험합니다.”
“어딜 가든 위험할 것 같아서 말이야.”
어깨를 으쓱이고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보이는 전장. 아마 이곳이 사령탑이자, 마탑의 모든 마법을 조율하는 곳이겠지.
슬쩍 뒤를 돌아보자 실제로 복잡한 마도구들과, 대제자를 돕기 위해 분주하게 마력을 토해내는 다른 장로들이 보였으니까.
“시간이 없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저거. 얼마나 버틸 수 있어?”
“이 늙은이가 최선을 다한다면 1시간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혹시 그 마도구는 너 혼자만 쓸 수 있는 건가?”
그의 손가락에서 강렬한 열기와 마나를 내뿜는 반지를 가리키자 고개를 젓는 녀석.
“아닙니다. 스승님의 제자들 중 실력을 인정받은 이들은 모두 쓸 수 있습니다. ……다들 오래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말입니다.”
“과연. 짧게나마 모르테우스는 제압할 정도는 되지만, 부담이 너무 커서 사람이 못 버티는 건가.”
워낙 강렬한 마나의 흐름이다 보니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나도 알 수 있었다.
저 반지는 단순한 가늠좌, 내지는 열쇠 역할.
사슬을 만들어 내는 마도구는 이 마탑 그 자체라는 것을.
“그럼 다른 장로들이 번갈아 가며 마도구를 사용하는 건?”
“그리한다면 스승님이 깨어날 때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만……저희가 상대하는 것은 와일드 헌트이지 모르테우스가 아닙니다.”
“즉, 전력을 다하면 모르테우스를 동틀 때까지 붙잡을 수는 있지만, 다른 언데드들을 상대하지 못한다는 소리구만.”
“맞습니다.”
“다행이네.”
“……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는 그를 향해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장벽 열어. 전부는 아니고, 사람 한 명 드나들 정도로만.”
“그게 무슨…….”
“모르테우스를 제외한 남은 언데드들. 내가 막으면 되는 거잖아.”
“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자하브 대공이시라지만, 저만한 수의 언데드를 어찌 홀로…….”
“그거 알아? 양학은 자하브의 소양이라더라.”
……뭐, 나는 자하브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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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에녹을 본 유리아의 첫인상은 납득이었다.
‘이래서 제벨라 언니가…….
그제야 거의 매주마다 날아오던 제벨라의 편지가 요즘 들어 에녹에 대한 칭찬으로 도배된 이유를 이해했으니까.
유리아는 자하브의 혈계능력을 발현시키지 못했으나, 단 한 가지 물려받은 것이 있었으니.
직감이 바로 그러했다.
직감적으로 오러의 사용법을 깨우치고, 직감적으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이가 누구인지 알고, 직감적으로 승리로 이어지는 길을 찾는다.
제벨라의 조언에 따라 단순한 무재 정도로 포장해서 드러내긴 했으나, 그녀의 직감은 혈계능력을 발현시킨 자하브의 혈족들보다도 뛰어났다.
대공가쯤 되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배우자를 통해 대를 거듭하며 자연스레 품종개량 비스무리한 것이 이루어지니.
혈계능력을 제외하고도 여러 재능을 타고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가능한 일.
그리고 이러한 직감에 근거하여 본 에녹은 배부른 맹수였다.
의자에는 반쯤 눕다시피 걸터앉았고, 막 침대에서 일어난 것처럼 눈에는 나른함이 가득하며, 실제로 하품까지 해대고 있었지만.
늘어져 보이는 몸은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눈매는 나른할지언정 동공을 쉴 새 없이 주변을 탐색하고 있으며, 하품은……그냥 하품이었다.
진짜로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나온 것이라는 사실까지는 몰랐으나 유리아에게는 그것이 일종의 자신감으로 보였다.
‘어디 한번 와볼 테면 와보라는 거지?
하지만 실제로 겉모습만 보고 어설프게 덤벼들었다가는 저 송곳니에 목덜미를 물어뜯기고 말 것이다.
……에녹 입장에서는 칼립소에서 살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 버릇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유리아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날카로운 직감이 에녹을 보는 순간 계속해서 경종을 울렸다. 저건 위험한 존재라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경고. 당장 도망치거나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신호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한테 위험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리고 머리를 들이밀지만 않으면 먼저 공격해 오는 사람이 아니니까.
제벨라로부터 이미 에녹이 자하브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성정의 사람인지 전해 들은 유리아다.
‘제벨라 언니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지. 응.
아카데미에 가기 전. 아직 자하브 성에 살던 시절의 유리아는 보았다. 자하브의 혈족이 얼마나 잔학해질 수 있는지, 그들이 반쯤 가둬둔 제벨라에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제벨라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말이다.
직감에 의존한 판단이기에 제벨라가 자신의 형제들을 전부 죽였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유리아였으나.
유약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제벨라가 강인한 사람이라는 정도는 안다. 그리고 잠겨있는 문 너머로 펑펑 울었던 날 이후로 자신을 아끼고 있다는 것 또한.
그런 제벨라가 한 말이니 분명 허튼소리는 아닐 터.
자신의 직감으로도, 제벨라의 안목으로도 에녹이 다른 자하브의 혈족과 달리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든 유리아의 가슴에 기대가 차올랐다.
처음 보는 사이지만, 제벨라 이외에도 제대로된 가족이 생길 거라는 기대.
하지만 단상 밑을 훑어보던 에녹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짐승의 그것처럼 샛노란 동공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그녀의 직감이 시끄럽게 울어대더니.
아랫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살면서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 유리아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으나, 날 때부터 예리한 감각을 타고난 그녀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직감과 본능에 몸을 맡기고 되는대로 행동하는 것.
‘이게 첫눈에 반한다는 거겠지?
사실 아니다.
유리아 본인은 자각하지 못했으나, 그녀의 직감은 기본적으로 생존본능을 기반으로 하는 것.
그저 생존을 위해서는 에녹의 옆자리가 가장 효율적이며, 이를 위해서는 그의 암컷이 될 필요가 있다고 여겼을 뿐이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이 문제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카데미의 기숙사는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가 나뉘어져있고.
몇 가지 사고를 치는 바람에 1년을 유급하기까지 한 유리아는 꽤나 오랜 시간을 여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동성끼리만 모여있으면, 그것도 한창때의 나이라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야한 이야기에 관심이 쏠리는 법.
하물며 아카데미는 평민과 상위 귀족들에겐 배움의 장이지만, 하위 귀족들에게는 일생일대를 건 상향혼의 무대였으니.
그런 이들에게 여러 자극적인 경험담을 듣거나, 비밀스러운 책을 돌려보던 유리아는……안타깝게도 약간 성벽이 뒤틀리고 말았다.
자하브 가문의 잘못된 조기교육, 직감에 과하게 의존하는 습관, 극찬 범벅인 제벨라의 편지를 읽고 쌓인 호감,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접한 금단의 지식(?)까지.
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 결과. 그녀는 패배 근친 야스 조아 조아를 외치는 광인이 되어버렸고.
이는 대련에서 패배하여 엉덩이를 맞는 도중에도 변하지 않았다.
‘와! 공개 수치플!
가정교육이 이렇게 중요하다.
***
“후우.”
유리아의 엉덩이를 정확히 10대 때리고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손바닥에 눌어붙은 것 같은 말랑 쫀득한 감각을 애써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유리아야. 이제 정신 좀 차렸니?”
“흐으……나, 나는 언제나 제정신이었는데?”
“대체 어떤 사람이 제정신으로 자기 오라비랑 결혼하겠다는 말을 하니. 어린애도 아니라 다 큰 녀석이 말이야.”
“어차피 언니랑은 할 거면서 뭘 그리 빼.”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맞나?”
근친명가라 불리는 자하브에서 나고 자란 녀석이다. 나를 제외한 그 어떤 가신도, 심지어 제벨라마저 나와의 혼인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니.
유리아 또한 필요에 따른 근친을 당연한 것이라 받아들이는 거겠지.
실제로 자하브 가문이 비상 상황인 것도 맞는 말이고.
하지만, 패배 근친 야스 조아 조아 발언을 제쳐두고서라도 할 말은 남아있었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유교 드래곤의 속삭임에 따라, 짐짓 엄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하지만, 교관을 함부로 치는 건 잘못된 행동이야. 다른 어디도 아닌 자하브 본성에서 그런 무례를 저지르다니.”
“……너. 모르는 거야?”
“뭐를.”
“제벨라 언니랑 나를 제외한 다른 자하브의 남자들이 전부 죽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후계자 다툼이 격해져 서로 죽고 죽였다고 들었다만.”
“으응. 어떻게 죽었는지가 아니라 죽음 이후의 일을 말이야.”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내 무릎에 엎드려 있던 유리아가 꿈틀거리며 몸을 뒤집었다.
그렇게 내 무릎에 누워 이쪽을 올려다보는 자세로 말을 잇는 유리아.
“자하브의 힘은 결국 홀로 던전을 관리할 수 있는 압도적인 힘에서 나와. 그리고 이 힘은 혈계능력을 통해 유전되는 거구. 하지만 자하브의 모든 남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진 거야.”
“……자하브가 곧 망할, 아니 이미 망한 가문이라는 소문이 돌았겠군.”
“맞아. 아무리 덩치가 커도 죽은 짐승을 두려워하는 이는 없잖아? 많은 사람들이 자하브에 남은 것들을 뜯어먹기 위해 접근했어. 재력, 땅, 이권, 작위……그리고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능력까지 있는 나.”
“마지막은 과장이 좀 심한 것 같은데.”
“알았어 알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최고급 모판이 싸게 풀린 셈이지. 모두가 탐내지 않겠어?”
“……그건 너무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 같으니 금지. 차라리 과장해서 말하고 다니도록. 이거 가주 명령이야.”
자기 입으로 모판 같은 소리를 하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자, 표정이 묘해지는 유리아.
그녀가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아무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나를 노리더라고. 약간의 협박을 곁들여서 말이야.”
“그래서 문제가 터진 건가.”
“맞아. 홧김에 팔다리를 두어 개씩 잘라버렸거든.”
“……아, 그쪽에 문제가 생긴 거였구나.”
아무래도 뒷배를 잃은 유리아를 노리던 녀석들은 너굴맨……아니, 유리아에게 역으로 당했던 모양.
“아카데미니까 팔다리 정도야 금방 붙일 수 있긴 한데…….”
“그쪽 가문이 나섰겠지. 협박이 섞이긴 했지만, 말로 했는데 검이 날아왔으니 명분도 있을 테고.”
“뭐야. 알고 있었어?”
“아니. 하지만 뻔한 일이니까. 아무튼 이해했어. 그때의 일이 문제가 되어서 유급한 거구만. 그리고 교관들은……매수당해서 협박에 시달리는 너를 모른 체 했을 테고?”
“응. 이것도 제벨라 언니랑 코넬리아. 그리고 다른 친구 몇이 도와줘서 유급 선에서 끝난 거지 처음에는 퇴학당하는 줄 알았다니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는 유리아.
음음. 그래. 완벽히 이해했다.
“혹시 방금 전의 교관 말고 또 매수된 교관이 있었나?”
“있긴 한데……실습에 따라온 교관은 저거 하나뿐이야. 왜? 막막 여동생이 괴롭힘당했다니까 화가 나고 그래?”
“어.”
“……어?”
유리아가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부서진 벽에서 떨어진 조각 하나를 주워 손가락으로 튕겼다.
쐐애액……퍼억!
“아아아악!!”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유리아를 말리려다가 얻어맞은 교관의 팔에 돌조각이 틀어박힌 탓이었다.
“델빈 교관.”
“예, 예 대공 각하.”
“보아하니, 부상이 심해 보이는군. 아쉽게도 자하브에 상주하는 사제들은 지난 던전 역류의 부상자를 치료하느라 바쁘고, 포션도 다 떨어져서 말이야. 아카데미로 돌려보내는 게 좋아 보이는데……어떻게 생각하지?”
“대공 각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당장 아카데미로 올려보내겠습니다.”
내 눈치를 보던 델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바닥을 나뒹굴던 녀석이 악을 썼다.
“대, 대공 각하! 억울합니다! 무슨 오해가……!”
“아론.”
하여, 녀석의 말을 끊고 집사장을 불렀다.
“손님이 많이 아파서 제 발로 못 간다고 하네. 대신 배웅 좀 나가줘. ……정중히 말이야.”
“명에 따르겠습니다.”
어째서이지 창백해진 표정의 교관을 끌고 나가는 아론.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자니, 무릎 위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여왔다.
“그래서? 나는 방금 뭐 때문에 엉덩이를 맞은 거야?”
“…….”
잠깐의 고민 끝에 유리아의 이마에 딱밤을 놔주었다.
빠악!
“흐약!”
“호칭.”
“뭐, 뭐가?”
“앞으로는 건방지게 야라고 부르지 말고 제대로 오빠라 부르도록.”
“어…….”
붉어진 이마를 한 손으로 감싸고 있던 유리아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오라방.”
죽어도 부르라는 대로 안 부르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잠시.
“근데 오라방. 나 엉덩이가 너무 아픈데 좀 쓰다듬어 주면 안 돼?”
“……안 된다 이 미친년아.”
유리아를 무릎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그럼에도 일생일대의 투자에 성공한 사람처럼 헤실대는 것이 묘하게 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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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와일드 헌트(2)
장벽을 열라는 말에 기겁한 표정을 짓는 이그나투스의 대제자.
“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자하브 대공이시라지만, 저만한 수의 언데드를 어찌 홀로…….”
“그거 알아? 양학은 자하브의 소양이라더라.”
……뭐, 나는 자하브가 아니지만.
아무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꺼낸 말이긴 하다.
“솔직히 말해서 모르테우스는 좀 자신이 없어. 이그나투스에게 들어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마법은 사용하지 못하지만, 드래곤 하트는 여전합니다. 그 막대한 마력 전부를 사기(死氣)를 방출하거나, 거대한 육신을 강화하고 움직이는 데 사용할 뿐이죠.”
“역시 그렇지? 단순한 강함에는 나도 자신 있는데, 아무래도 체급 차이라는 걸 무시할 수는 없겠더라고.”
아무리 내가 나름 열심히 살아남았고, 오러를 익히며 한층 강해졌다지만 저 거대한 괴물과 드잡이질하는 건 좀 저어된다.
뼈만 남았다고는 하나, 한때는 드래곤 로드라 불린 고룡 아닌가.
하지만 다른 언데드들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생전에 대단한 영웅들이었다는 건 알지만……어찌됐든 인간 사이즈고 순수 신체 스펙은 나보다 못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이도 저도 못 하고 맨몸으로 와일드 헌트를 상대하게 될 거야. 그러니 뭐라도 해봐야지.”
“……알겠습니다. 자하브 대공 각하의 계획에 저희 마탑도 동참해 보죠. 저를 포함한 고위 마법사들은 모르테우스를 구속하는 데 집중하겠지만, 그 이하의 마법사들 전부가 대공 각하를 서포트할 것입니다.”
“그거 반가운 소리네.”
피식 웃으며 난간에 한쪽 발을 걸쳤다. 이대로 내려가려던 순간.
“그리고.”
“음?”
“자하브 대공 각하의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신의 역량을 넘어선 마도구의 힘에 괴로워하면서도 고개를 깊숙이 숙이는 대제자.
괜히 기분이 간질간질해져서 퉁명스레 내뱉었다.
“……귀족은 의무를 지는 자. 당연한 일이야.”
“……!”
대제자의 반응을 일부러 보지 않고 곧장 난간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간단한 낙법으로 무사히 착지하고는 장벽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밑에서 기다리던 카렌이 여전히 내 곁을 따르는 모습에 손을 휘휘 저었다.
“카렌카렌아. 네가 약한 건 아닌데 이번 일에는 부족해.”
“하지만…….”
“손 놓고 구경하라는 소리가 아니야. 카렌 너는 발이 빠른 편이잖아? 마법사들한테 포션이라도 받아서 나한테 던져. 그거면 충분해.”
“포션을 던지라니……대체 무슨 짓을 하시려는 겁니까 가주님.”
“보면 알아.”
어깨를 으쓱이고는 장벽의 앞으로 향했다. 사령부에서 확인한 마탑의 어디에서건 가장 잘 보이는 위치다.
퉁. 투웅!
쉴 새없이 장벽을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반투명한 마나 너머로 뼈만 남은 팔다리와 녹슬고 부러진 무기가 날아오다가 막힌다.
이제부터 저 모든 것이 내 목을 노리겠지.
“까짓거 한 번 해보지 뭐.”
일부러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전의를 다졌다. 그리고는 손을 적당히 흔들어 대제자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카렌이 그러했듯, 의아해하던 주변 마법사들의 시선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쩌저적.
차갑게 얼어붙은 비닐이 뜯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장벽의 일부가 스스로 갈라진다.
동시에 작은 틈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차가운 기운.
남부에서는 느낄 수 없던 추위. 그것도 사기를 머금은 인위적인 냉기에 시선을 앞쪽에 고정하며 입만 열었다.
“카렌아. 이번 전투에서의 첫 번째 명령이다.”
“……말씀하시죠.”
“이거 생각보다 춥네. 마법사들한테 보온 마법 좀 걸어달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그제야 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챈 카렌이 굳은 표정으로 땅을 박찼다.
장로급이 아닌 그 밑. 메이킨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강한 이들이 모인 곳이었다.
카렌이 떠나는 것과 동시에 손가락 만하던 작은 균열이 순식간에 크게 갈라진다.
쩌엉!
요란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 생겨난 명백한 균열. 요구했던 대로 정확히 사람 한 명 지나갈 법한.
……달리 말하면, 사람 한 명이 틀어막고 있으면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의 사이즈였다.
“역시 실력은 좋구만.”
낄낄 웃으며 가장 먼저 균열을 통해 넘어오는 스켈레톤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오러를 순환시키되, 주먹에 집중시키지는 않은 상태. 힘을 아끼며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는데.
콰앙!
스켈레톤이 들고 있던 도끼의 옆면으로 내 주먹을 막아냈다.
도끼는 부서졌으나, 뼈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멀쩡했다. 살이 없기 때문인지 흩날리는 파편에 피해를 입지도 않았고.
다만, 내가 놀란 부분은 다 녹슨 주제에 의외로 튼튼한 무기도, 날카로운 파편 세례에도 멀쩡한 스켈레톤의 특성이 아니었다.
“막아?”
아무리 힘을 뺐다지만, 겉보기엔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스켈레톤이 내 주먹을 막은 것. 그 자체에 놀란 것이다.
“과연. 영웅들의 시체라는 건 이런 의미였나.”
부러진 도끼 자루를 내던지고 자신의 한쪽 팔을 뽑아 달려드는 스켈레톤.
분명 뭉툭한 뼈임에도 도끼의 형상이 엿보이는 것 같다. 그만큼 완벽한 자세라는 뜻.
녀석이 내리찍는 팔을 집중해서 바라보며……오러를 끌어 올렸다.
우웅-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문양이 팔을 휘어감고, 때마침 마탑에서 온갖 버프 마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죽음을 머금어 차가웠던 공기가 더는 아리게 느껴지지 않았으며, 시야에 비치는 모든 풍경이 조금 더 느려졌고, 근육에서는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힘이 꿈틀거렸다.
“흐읍……!”
짧은 기합과 자세를 낮춰, 스켈레톤의 안쪽으로 파고든다. 휘둘러진 팔이 어깨를 두드리는 감각이 들었으나, 타점이 어긋나 별다른 타격은 없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녀석의 두개골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우득.
약간 버티는가 싶더니, 간단하게 부서지는 머리.
머리를 잃은 몸은 여느 언데드가 그러하듯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이걸로 끝은 아닐 터. 아무리 머리가 부서졌어도, 와일드 헌트의 충만한 사기가 있다면 금세 되살아난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저 차갑기만 한 줄 알았던 죽음의 기운이 의지라도 가진 것처럼, 무너진 언데드의 잔해를 회수해 안쪽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빈 자리를 통해 다음 언데드가 머리를 비집고 달려든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네.”
애초에 주변의 이 사기는 모르테우스에게서 비롯된 것. 그의 의지가 깃들어 있는 것이리라.
피식 웃으며 다음 스켈레톤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콰앙!
두터운 대검의 옆면을 쳐내고, 비틀거리는 틈을 타, 허리춤을 걷어차려 했으나.
“큭!”
이런 것쯤은 흔한 일이라는 듯, 노련하게 자신 또한 몸을 꺾어 박투술로 대항하는 스켈레톤.
분명 내가 걷어차려 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녀석의 주먹에 얻어맞게 생긴 상황이었으나.
“그렇게는 안 되지……!”
억지로 허리를 꺾어, 날아드는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뒤.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 팔을 이빨로 강하게 물었다.
으득!
팔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신호 삼아 꺾였던 몸을 틀자, 내 이빨에 붙들린 녀석의 몸이 둥근 반원을 그리며 땅에 처박힌다.
-……!
텅 빈 눈두덩이 사이로 푸른 귀화가 일렁이며 당혹을 토해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콰직!
널브러진 녀석의 머리를 강하게 짓밟아 부수고는, 주인을 잃은 대검을 크게 휘둘러 균열을 넘어오는 다음 상대를 향해 휘둘렀다.
모든 스켈레톤이 방금까지 상대한 녀석들처럼 노련한 것은 아닌지, 이번에는 별다른 저항 없이 박살 난 녀석.
덕분에 균열 너머로 일렁이는 무수히 많은 귀화를 볼 수 있었다.
맹목적인 적의. 그 틈에 녹아들어 있는 약간의 사명감.
“그런가.”
저들은 분명 대의를 위해 싸웠고, 내일을 부르짖으며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도 다를 것이 없다.
모르테우스에 의해 눈이 흐려진 저들에게 보이는 것은, 분명 목숨을 걸어서라도 쓰러뜨려야 할 거악일 터.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죽어서도 이용만 당하는 신세지만.
그럼에도 분명 이 자리에 선 것은 영웅이라 부르기에 아깝지 않은 자들뿐이니.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와라.”
못다 한 전쟁. 그 상대가 되어주마.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언데드의 본능에 휩쓸린 건지.
여러 쌍의 귀화가 거칠게 타오르며 음산한 귀곡성 토해낸다.
쉴 새 없이 튀어나오는 스켈레톤들을 가로막으며, 쉴 새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부딪히는 기예. 첨예하게 대립하는 적의. 그리고 명백하게 갈리는 승패.
한 사람 겨우 통과할 법한 좁디좁은 공간이었으나……이곳은 분명 전장이었다.
***
“미, 미쳤어요…….”
재능이 있어 이그나투스의 제자가 되었으나, 아직 수련이 부족해 중위 마법이 한계인 메이킨.
그녀는 다른 전투 마법사들 사이에 껴서 방벽을 두드리는 언데드들을 향해, 모든 마력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마법을 시전하고, 또 시전하고, 그러다 마나가 부족해지면 이미 마나 포션을 억지로 마시며 다시 마법을 쥐어짜고…….
하나같이 힘겨웠지만, 그녀를 가장 힘겹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와일드 헌트를 상대하는 건 처음이 아니지만, 그녀의 스승 없이 상대하는 것은 처음이라는 점.
승리에 대한 불안이 메이킨의 정신을 몰아붙이는 도중. 그녀는 보았다.
마탑의 어디에서나 시야에 닿는 정중앙. 그 앞에 서서, 홀로 언데드를 유인하고, 수많은 언데드를 적수공권으로 때려 부수는 에녹의 모습을.
“무모해요……아무리 자하브라도 스승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버티는 건 불가능해요……애초에 자신의 일이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에녹의 뒷모습을. 그 어떤 마법보다도 굳건히 버티고 선 등을 보는 순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
에녹은 자하브의 가주다.
그리고 자하브는 이그나투스와 같은 대공 가문.
제국 최후의 보루이며, 메이킨과 같은 범인을 아득히 넘어선 힘을 지닌 이들.
……그리고 그 힘으로 기꺼이 스스로를 희생하여 의무를 다하는 고결한 존재였으니.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부족하지만 이그나투스의 제자라는 이유로 위계는 높은 메이킨이 무언가에 홀린 듯 외쳤다.
“다, 다들 멈추세요! 저희는 이제부터 언데드가 아닌 자하브 대공께 집중할 거예요!”
에녹의 존재야말로 그 어떤 방벽보다도 중요한 것이기에.
그리고 마탑 여기저기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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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와일드 헌트(3)
주먹이 휘둘러지고 뼈가 부서진다. 피는 튀지 않았으나, 녹슬고 부서진 무기의 파편이 그 대신이라는 듯이 바닥을 붉게 물들인다.
콰앙!
사람의 주먹에서 난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굉음. 실제로 어지간한 폭발계 마법과 맞먹는 위력에 스켈레톤이 들어 올린 방패를 중심으로 충격파가 퍼져나간다.
가장 먼저 몸으로 느껴지는 떨림. 뒤이어 바람과 함께 흙먼지가 흩날린다.
“이런!”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마법사들중 하나가 황급히 바람을 일으켜 흙먼지를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에녹의 전투를 지켜보며, 에녹에게 필요한 것들을 서포트해야 하는 마법사 입장에서 시야 가려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에.
그렇게 흙먼지가 옅어지며 드러난 것은…….
화륵!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언데드 특유의 부른 귀화가 아니다. 붉고 뜨겁게 타오르는……이그나투스의 브레스, 혹은 저 하늘 위의 태양을 연상시키는 화염.
전신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문양 위로 불길을 토해내는 에녹.
그가 방금까지 성문을 닮은 거대한 쌍 방패를 부수고, 드워프로 보이는 작지만 두터운 스켈레톤의 머리를 잡고 들어올린 중이었다. 그리고.
콰직.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는 것으로 부스러지는 두개골.
어두운 밤이기에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푸른 귀화가 에녹의 붉은 불길에 짓눌려 흩어지는 모습이.
-와아아아!
마탑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환호성.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에녹의 건재함은 기뻐해 마땅한 것이었으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에녹을 향해 온갖 종류의 마법이 쏟아져 내린다.
피로를 잊고 활력을 북돋는 마법. 전투 중에 생긴 자잘한 상처를 회복하는 마법. 죽음의 기운을 막아내기 위한 정화 마법. 장기간 사기에 노출되면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완화하는 마법.
그 외에도 직접적으로 에녹을 강화하는 마법이 차례로 갱신된다.
에녹의 피부가 돌처럼 단단해지며, 그 위로 투명한 실드가 둘러진다. 안 그래도 날카로웠던 반사신경과 동체시력은 한 단계 끌어 올려졌으며, 근육과 뼈에는 오러와 반발하지 않도록 정제해 낸 특수한 마나가 들어차며 육신을 보다 강건하게 만든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녹의 움직임은 처음보다 명백히 둔해져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에녹의 전투는 벌써 몇 시간째 계속되고 있으니까.
그래. 몇 시간이다.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그저 기계적으로 주먹을 휘두르고 상대를 정면으로 깨부순다.
바스라진 뼛가루는 흩날리는 사기에 휩쓸려 안쪽으로 돌아간다지만, 부서진 무기는 그러지 못했으니.
에녹의 뒤에는 어느새, 방해된다는 이유로 대충 던져둔 무기가 빼곡히 널브러져 있었다.
검, 활, 창, 도끼, 대검, 방패 등등. 온갖 종류의 무기가 에녹의 등 뒤에 늘어선 모습은 공동묘지의 묘비를 연상케 했다.
수백은 진작에 넘었다. 이미 천을 넘어선 부서진 무기는 그 이상의 스켈레톤이 에녹의 손에 부스러졌다는 증거이니.
말 그대로 일기당천이요.
아무리 일대일 상황으로 몰아갔다지만, 홀로 군대를 틀어막고 있으니.
만부부당이라 부르기 부족함이 없었다.
끝없는 결투이자, 홀로 치르는 전쟁. 놀랍게도 그 승기를 거머쥔 것은 에녹 자하브였다.
“대공……제국의 수호자…….”
그제야 마탑의 마법사들은 깨달았다. 자하브가 어째서 대공 가문인지.
사람의 몸으로 어리다지만, 드래곤인 이그나투스와 맞먹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이다.
하지만 감탄과는 별개로 에녹의 움직임이 둔해진 것은, 끊임없는 전투로 지친 것은 사실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걸까. 집사복을 입은 은발의 소녀. 카렌이 발 빠르게 움직이며, 마법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에녹을 서포트하는 중이었다.
작은 상처가 나면 포션을 뿌리고,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게 대충 던진 무기를 뒤편으로 이동시키며, 가끔 에녹이 요구하는 바를 다른 마법사들에게 전달하는 등.
에녹이 싸우는 동안, 카렌 또한 쉬지 않고 그를 도왔다.
덕분에 이제껏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만…….
환호하며, 보조 마법을 걸어주는 사이에도 냉철한 마법사들의 머리는 희미한 불안을 떠올리고 만다.
“……이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모르지. 다만, 우리보다는 훨씬 오래 버티실 수 있을 걸세.”
고위 마법사들은 전부 모르테우스를 제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중하위 마법사들만으로 방벽을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그런 상황에서 홀로 언데드의 군세를 감당하는 에녹의 무력은 분명 경이로운 것이었으나, 동시에 위태로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마나를 아끼고, 쥐어짜 에녹을 보조하는 것 말고는 말이다.
그렇게 슬슬 마나도 떨어져 가고, 회복 수단도 부족해진 마법사들 사이에서 불안이 퍼져나가는 사이.
에녹은 묵묵히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직 그것만이 자신의 의무라는 듯이.
어느새 균열 너머로 비집고 나오는 또 다른 스켈레톤. 날카로운 세검 한 자루를 들고 우아한 움직임으로 팔을 뻗는다.
순간적인 가속이 어찌나 빠른지 에녹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정도.
순식간에 잔 상처 여럿을 입은 에녹. 이대로 시간을 끌면 균열 너머로 또 다른 망자가 기어 나올 수도 있을 터.
에녹은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가만히 팔을 벌렸다.
무방비한 모습에 의아해하면서도 망설임 없이 목덜미를 향해 세검을 꽂아 넣는 스켈레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예리함을 잃지 않은 날붙이가 목젖에 닿는 순간.
짐승 같은 금안을 번뜩이며, 에녹이 몸을 틀었다.
목표를 잃은 세검은 목이 아닌 구릿빛 어깨에 박히고, 그나마도 단단한 근육에 막혀 나아가질 못한다.
칼에 찔렸다기보다는 몸으로 칼을 붙잡은 것 같은 모양새.
에녹의 입꼬리가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가 떠올랐다.
“잡았다.”
그 말과 함께 세검을 맨손으로 잡아채는 에녹.
뚜둑.
강인한 악력에 그대로 얇은 검신이 부러지며, 당황한 스켈레톤을 향해 머리를 박는다.
히죽이는 에녹의 이마가 스켈레톤의 잿빛 머리를 단번에 산산조각 낸다.
무너진 잔해가 순식간에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며 깨끗해진 전장. 그 너머로 새로운 스켈레톤이 모습을 드러낸다.
……에녹이 어깨에 박힌 세검의 반절을 뽑아낼 시간도 주지 않고.
사실 에녹의 육신에 박혀있는 무기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허벅지에는 단검이, 팔뚝에는 부러진 단창이,옆구리에는 깃이 삭아 없어진 화살이 박혀있었으니까.
등에 박힌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단 한 번도 뒤를 돌지 않았다는 증명이기도 했으나.
애초에 사람 몸이라는 건 무기를 주렁주렁 박아 넣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다행히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다. 마법사들의 보조 마법. 그리고 강철처럼 단단한 육신에 막혔으며.
그나마도 특유의 재생력과 회복마법의 영향으로 출혈까지 멈췄으니까.
고통은 있어도 생명이나 움직임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는 소리다.
허나, 문제는 상처가 남아있다는 것 그 자체.
마법사들이 계속해서 정화하고 몰아내는 중이라지만, 그 틈을 타 죽음의 기운이 침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차가운 냉기는 자하브의 불길을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약화시킬 터.
무엇보다 큰 문제는 와일드 헌트의 스켈레톤들이 평범한 언데드가 아니었으니.
지성을 잃긴 했으나, 그 육신에 쌓아 올린 기예는 어지간한 기사를 상회하는 것.
마탑의 마법사들이라고 용아병을 대신할 골렘을 만들어 보지 않았겠는가.
신참이라면 누구나 시도는 해본다. 그리고 상상 이상으로 뛰어난 스켈레톤들의 무위에 처참히 박살 나고는 깨닫는 것이다.
근접 전투에는 문외한인 마법사들의 눈에도 알 수 있을 만큼 세련된 무술.
이를 펼치는 신대의 전사가 얼마나 강인한지를 말이다.
척 봐도 실력자로 보이는 스켈레톤의 움직임과 달리, 에녹에게서는 이러한 체계적인 동작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본능과 힘. 그리고 약간의 운에 몸을 맡기고, 실낱같은 가능성을 향해 머리를 들이미는 짐승과도 같은 전투.
지금까지는 잘 버텼을지 몰라도, 에녹은 분명 언젠가 쓰러진다.
이러한 합리적 사고가 마법사들로 하여금 불안을 부추기는 것이었으나…….
불안 속에서만 차오르는 열기 또한 분명 존재했다.
인간의 형태를 한 짐승. 하지만 그 짐승은 이미 신대의 영웅들을 무수히 도살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근거가 없는 확신이자, 이성을 추종하는 마법사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아.”
어느 한 마법사가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희망.”
밤은 어둡고, 동이 트려면 아직 한참은 남았다. 허나, 지상은 밝게 빛나고 있었으니.
화르륵!
에녹 자하브가 피워올린 열기. 그 희망에 마법사들이 홀린 것처럼 진작에 바닥난 마력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마탑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태양은 떠올랐다.
저 하늘이 아닌, 지상에.
***
움켜쥔 주먹이 무겁다.
숨을 토해내는 목구멍에서는 피 맛이 느껴지며, 거칠게 뛰는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다.
그럼에도 눈앞의 상대를 향해 휘둘러야 한다.
“아아아아아……!”
악에 가까운 기합 소리와 함께 뻗은 주먹이 쌍검을 든 스켈레톤을 향해 내질러진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육신은 제대로 된 속도를 내어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뼈만 남은 저들보다는 빨랐으니.
대응할 틈도 없이 머리를 부술 수 있었다. ……그랬어야 했다.
카앙!
기묘하게 휘어진 쌍검이 내 팔목을 양쪽에서 베어내려 든다.
마법사들이 걸어준 방어 마법. 그리고 다급히 손목을 꺾어, 검신을 쳐낸 덕에 살짝 시큰하고 말았지만.
중요한 것은 단번에 끝장내지 못했다는 것.
몸에 둘러진 실드와, 단단하게 긴장시킨 근육을 믿고 성큼 다가간다.
카직!
어느새 쌍월을 그리며 휘둘러진 검이 내 양어깨를 향해 노렸으나.
실드를 부수며 느려진 검 끝이 살갗에 닿는 순간. 빠르게 몸을 꺾어 베이는 각도를 흩트린다.
그렇게 근육을 갈라놓아야 했을 쌍검이 붉은 실선만을 남긴 순간.
쿠웅!
강하게 구른 발이 녀석의 발을 박살 낸다. 좁은 공간에서 거리를 좁혔기에 발을 놀릴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
발을 잃고 넘어지는 스켈레톤의 머리를 무릎으로 으스러뜨린 뒤.
다음으로 넘어올 스켈레톤을 대비했으나.
“……허?”
어째서인지 푸른 귀화만 균열 너머로 일렁일 뿐, 다음 스켈레톤은 나오지 않았다.
의아함에 잠시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어째서 다음 스켈레톤이 방벽의 균열을 통과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니미.”
고개를 한껏 꺾어야 담을 수 있는 거대한 머리. 주둥이는 길쭉하고, 머리에는 왕관을 닮은 뿔이 자라 있었으며.
눈이 존재해야 할 자리에는 내 몸뚱이보다도 거대한 귀화가 일렁이고 있었다.
“모르테우스.”
장로급 마법사들은 제 역할을 다하는 중인지 녀석의 몸은 타오르는 사슬로 빈틈없이 결박되어 있었다.
더 이상 공허한 울음소리를 내지도, 육중한 거체로 발버둥 치지도 않을 뿐.
……그것이 더 큰 문제였다.
생자의 것과는 너무나 다른, 하지만 분명 그 안에 지성이 깃든 것을 알 수 있는 시선.
완전히 미친 줄 알았던 사룡이, 수많은 언데드 군세를 막아낸 장벽을 손짓 한 번으로 부술 수 있는 괴물이.
서부의 재앙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요즘 들어 망나니 연기를 하며 생긴 습관이 튀어나왔다.
“뭘 봐. 눈 깔아라. 뒤지기 싫으면.”
-……?
뼈만 남은 모르테우스가 귀화를 끔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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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소란이 있긴 했지만, 어찌어찌 무난하게 일정을 끝마치고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제 글공부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간단한 책이라면 혼자서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오러 수련의 비중을 늘리기로 했기 때문.
아카데미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조금 늦었으니, 힐다가 기다릴까 발걸음을 서둘렀으나.
“오라방.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아오, 깜짝이야.”
돌연 옆구리 쪽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유리아의 말에 흠칫했다.
분명 피는 이어지지 않았건만, 이상할 정도로 나와 닮은 금발이 사르르 흘러내리며 햇빛에 반짝인다.
“뭐야 뭐야. 내 머리카락이 신경 쓰여? 그으. 살짝이라면 잡아당겨도 괜찮은데.”
내 시선을 눈치챈 걸까. 유리아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으더니, 이쪽으로 내밀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니 유리아야…….”
“아, 미안. 손잡이로 쓸 때는 이렇게 하는 거였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 하나로 묶었던 머리를 쪼개, 두 갈래로 만들어 양옆에서 잡았다.
그냥 손으로 쥐어 고정시켰을 뿐이지만, 흔히들 말하는 트윈테일 스타일. ……그리고 조금 천박하게 말하자면 핸들을 만들어 내 앞에서 살랑였다.
“어때? 오라방은 이런 거 좋아해?”
“…….”
정신 나갈 것 같네.
분명 자하브의 혈계능력은 발현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유리아는 대체 뭘까.
아니지. 그런 식으로 따지면 제벨라도 골 때리는 구석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나한테 잘해주고, 일 잘하는 누나잖아.
아카데미가 문제라고 하기에는 다른 아카데미 학생들은 제정신으로 보였는데…….
“아.”
이해했다.
그냥 이런 사람이구나.
카렌이 워낙 자하브의 문제아들에게 익숙해져서 이 정도 언행은 귀여운 수준으로 보인 것일 테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며 나름 유리아를 이해한 순간.
불가해한 무언가를 접할 때 느껴지던 거부감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약간의 위기감이었다.
자하브에서 요구하는 망나니 인재상에는 못 미칠지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망나니 연기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리고 계승식까지 끝난 마당이지만 혹시라도 혈통의 진위를 의심당할지도 모르니까.
즉, 내게는 유리아보다 더 미친 사람처럼 굴 필요가 있다는 소리다.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어떻게든 해보는 수밖에.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유리아가 내민 양 갈래머리를 잡아들었다.
“핸들도 좋긴 하지만 내 취향은 좀 다르네.”
“으응? 오라방은 그럼 뭐 좋아하는데?”
“목줄.”
짧게 답하며 유리아의 머리카락을 그녀의 목에 휘감았다.
하얀 목덜미 위를 교차하는 금발. 그렇게 단단히 고정시킨 뒤에는 두 갈래로 나뉜 머리를 다시 합쳐 한 손으로 쥐었다.
마치 유리아 본인의 머리카락을 목걸이이자 목줄처럼 만든 모양새.
유리아의 머리카락이 꽤나 길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순식간에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목을 졸리듯이 붙잡힌 유리아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오라방 천재야?! 이런 건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럼 그럼. 이 오라비는 언제나 개쩔었단다.”
“철제나 싸구려 가죽이랑 다르게 심하게 쓸리지도 않고, 잡아당기는 것과 동시에 목을 조를 수도 있고, 무엇보다 다른 무엇도 아닌 내 머리카락에 내가 매인다는 사실이 너무 굴욕적이야!”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네.”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유리아의 모습에 자연스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일단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자하브는 자식 교육 망했다.
그나마 멀쩡한 제벨라는 학대했지, 유리아는 그냥 제정신이 아니지…….
아!
그래서 서로 후계자 다툼하다가 공멸한 거구나?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냥 운이 없어서, 혹은 누군지 상상도 안 가는 흑막이 있어서 죄다 죽고 망한 게 아니라 그냥 죽을만해서 죽었고 망할만해서 망한 것이리라.
복잡해졌던 머리가 맑아졌다. 그래. 유리아가 아무리 골 때리는 녀석이라도, 어차피 자하브를 떠날 내게 무슨 상관인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내게 목을 내어준 채, 뒷짐을 진 유리아가 고양잇과 동물처럼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따라오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오라방 지금 어딜 가는 거야?”
“수업받으러 가는 중이다.”
“수업? 내가 없는 사이에 자하브에도 아카데미 같은 게 생겼나…….”
“아니, 그냥 내 개인 교습. 힐다 경이라고 은사자 기사단 부단장이 나한테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있거든.”
“흠흠. 힐다 경은 오라방의 애첩……기억해 둘게.”
“……그런 게 아니라 글이랑 예법, 오러 수련을 배우는 거야.”
“오라방 글도 읽을 줄 알아?!”
“내가 그렇게 무식하게 보였어……?”
약간 상처받았다.
너 글 읽을 줄 알아? 문맹 아니었어?
이런 소리는 전생을 포함해도 들어본 적 없는 폭력적인 질문이었으니까.
뭐어. 얼마 전까지의 나는 정말로 문맹이 맞긴 했지만.
나도 모르게 서운함이 겉으로 드러난 걸까. 유리아가 황급히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 아냐! 무식해 보이는 게 아니라 싸움과 여자 말고는 흥미가 없어 보일 뿐이니까! 오해하지 마 오라방!”
“……?”
이게 위로가 맞는 건가?
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애초에 광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 해선 안 된다는 걸 뒤늦게 떠올렸다.
지금은 고분고분해진 만큼 크게 도드라지지는 않지만……유리아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사람보다 짐승에 가까웠다.
유리아가 멍청하다거나, 인간 언저리라는 나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성보다 본능이, 지능보다 감각이 발달한 사람 특유의 기세를 풍기고 있다는 소리였지.
칼립소에서 오래 살아남은 이들 중에는 비슷한 부류가 몇몇 있어 잘 안다.
물론, 그중에서도 유리아가 유독 도드라진 케이스 같지만.
“헤에. 오라방 생각보다 열심히 사는구나?”
“하! 가문의 일을 대부분 제벨라 누님께 떠넘기고 놀러 다닐 뿐이야.”
“응? 원래 어려운 일은 제벨라 언니가 하는 거 아냐?”
“…….”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애가 바로 여기 있었다.
“그나저나 오라방 오러 수련을 부기사단장한테 배워? 오라방이 더 강하잖아.”
“강한 것과 기술에 능하냐는 별개니까. 오러는 자하브에 들어와서 처음 익힌 거야. 그러니 기초부터 제대로 다져야지.”
“헤에. 강하다고 바로 오러를 마음대로 쓰고 그런 건 아니구나.”
“당연한 소리를……유리아 너도 어렸을 때는 따로 오러를 배웠을 텐데?”
“으음. 나는 천재라서 오러는 그냥 혼자 깨우쳤어.”
“…….”
맞다. 유리아에게 혈계능력은 없어도 무재는 있었다고 했던가.
내가 무의식적으로 힘을 주어 마나를 집중시키고, 오러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처럼.
유리아는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본능적으로 오러를 다루는 법이라도 터득한 거겠지.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유리아는 뭔지 모를 혈통인 나와 달리, 찐 자하브니까.
이 세계의 귀족은 대체로 하나쯤 탈인간급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된다.
혈계능력은 그중 하나일 뿐, 다른 부분에서 이게 같은 사람인가 싶었던 적이 한둘이 아니니까.
지금은 각자 제 갈 길 가고 있지만……한때 같은 고아팸이었던 녀석 중에 몰락귀족 출신이 있어 잘 안다.
혈계능력도 혈계능력이지만, 이를 떼어놓고 봐도 수완이 뛰어난 녀석이었지.
……대신, 대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파멸적이었지만.
괜히 옛날 생각에 추억에 젖는 것도 잠시. 어느새 연무장 앞에 도착했길래 유리아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쉿쉿. 도착했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이제 가봐. 여기가 집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은 아카데미의 재학생으로서 실습 온 거잖아?”
“가고 싶어도 오라방이 보내줘야 갈 수 있는데?”
자신의 목에 감긴 머리카락을, 이를 이용해 만들어 낸 목줄을 가리키는 유리아.
그제야 내가 유리아에게 목줄을 채우고, 성안을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놔줄 테니까 이제 가 봐. 아카데미에 가기 싫으면 제벨라 누님한테라도 가보고.”
“응.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어. 제벨라 언니도 오랜만에 보고 싶었거든.”
고개를 끄덕인 유리아가 순순히 떨어진다. 그리고는 어째서인지 목에 여전히 머리카락을 휘감은 채, 손을 흔들었다.
“그럼 오라방! 다음에 봐!”
“오냐.”
“그때는 제벨라 언니랑 같은 침대 위에서 보는 거지?”
“그럴 일은 없을걸.”
슬슬 익숙해진 유리아의 발언에 대충 답해주고는 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문밖에서 들린 대화를 전부 들은 힐다가 있었다.
힐다가 처음으로 내게서 시선을 스윽 돌렸다.
“아냐.”
“……저는 기사로서 자하브에 영광이 재림하길 바랄 뿐입니다.”
“아니라고.”
이런 오해는 좀 풀려도 좋지 않을까.
***
유리아에게 얻어맞고, 에녹이 던진 돌에 한 번 더 얻어맞은 아카데미의 교관.
아니, 전직 교관 브렌트는 입술을 짓씹었다.
“큭……빌어먹을 자하브. 숨겨진 사생아가 있을 줄 내가 알았겠냐고.”
그는 이제 막 골절이 나아, 살짝 저릿함이 남아있는 팔을 부여잡은 자세로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섬뜩한 분위기의 집사장, 아론은 두 번 다시 눈에 띄는 순간 팔이 아니라 목이 부러질 것이라 경고했고.
멍하니 닫힌 성문을 올려다보던 브렌트. 그런 그의 짐을 가져다준 아카데미의 책임자인 델빈은 해고 통지서를 함께 건넸다.
유리아의 건이 아니더라도 사소한 부패를 여러 번 저질러 이미 수차례 경고받은 상태. 그렇기에 별다른 절차 없이 최후통첩이 날아온 것이다.
마지막 정이라며 중급 포션을 건네주던 델빈의 싸늘한 표정이 떠올라, 브렌트가 무의식적으로 방금 막 나은 팔을 움켜쥐었다.
뚜둑.
자하브 같은 괴물 딱지에 비하면 손색이 있을 뿐이지, 브렌트 역시 아카데미에 취직할 만큼 나름 실력있는 기사였기에 한 번 부러지며 취약해진 팔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미 정신적으로 몰린 그는 팔이 보내는 고통의 신호를 알아차릴 여유조차 없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이제 더는 돈을 빌릴 구석도 없는데……!”
브렌트가 소소한 뇌물을 받아먹은 이유는 간단하다.
빛나는 진짜 재능들과, 벽에 부딪힌 현실 사이에서 어느새 검을 놓아버린 그가 도박이라는 새로운 취미를 붙였기 때문.
아카데미의 교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고, 때로는 뇌물도 받아먹었으나…….
이젠 일자리도 뭣도 없으니 갚을 길이 없어졌잖은가.
이대로 수도에 돌아갔다가는, 그리하여 돈을 빌린 도박장의 사채업자들에게 해고 소식을 들킨다면.
분명 좋지 않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터.
초조해하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브렌트. 그런 그의 앞에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나타났다.
“브렌트 디에고. 아카데미의 전직 교관이자, 엘리스 패밀리에게 2만 골드의 빚을 진 도박쟁이. 맞나?”
“누, 누구냐!”
기겁하며 검을 뽑는 브렌트. 그제야 치료가 덜 된 팔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를 가로막은 사내는 태연했다.
“진정해라. 내 적은 어디까지나 에녹 자하브이니. 만일 네가 나의 일을 도와준다면, 빛을 대신 갚아주고 새로운 신분 또한 준비해 주마.”
“……내가 네놈을 어떻게 믿지?”
“믿지 않으면 네놈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일 텐데?”
그 말에 브렌트는 깨달았다. 어느 쪽이건 자신에게 미래는 없다는걸.
도망치다가 엘리스 패밀리에게 추적당해 죽느냐, 괜히 나대다가 아론이라는 집사장에게 살해당하느냐.
어차피 둘 중 하나라면 차라리 뭐라도 발버둥 쳐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브렌트는 에녹과 유리아의 얼굴을, 그 벌레를 쳐다보듯 경멸과 무관심으로 가득한 표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하브의 그 애송이들을 엿 먹일 수 있고, 내 미래까지 세탁해 준다는데 뭐든 해줘야지.”
“잘 생각했다. 우선 이걸 받아라. 그리고 내가 일러준 곳으로 향해라. 아직 수리 중인 성벽이 있을 거다.”
그리 말하며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는 사내.
이를 받아 든 브렌트는 순간 흠칫했다. 상자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아카데미에서 철저히 배척하라 가르치는 흑마력이었기 때문.
하지만 이미 갈 곳도, 떨어질 곳도 없는 브렌트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흑마법사의 무서움을 아는 만큼 더욱 든든해졌다.
“이거라면…….”
도박쟁이가 인생을 망치는 이유는 보통 자기 스스로 팔자를 꼬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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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유리아 때문에 돌겠습니다 누님.”
“어머. 그러니?”
2~3일에 한 번씩 있는 정기 티타임. 정확히는 제벨라가 그간 처리한 여러 일이나,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간략하게 요약해 알려주고.
잡담도 하고, 맛있는 것도 좀 먹고, 호시탐탐 내 이미지를 망칠 기회를 노리고, 가능하면 제벨라 대신 유리아에게 가주직을 떠넘길 각을 재보는 자리였으나.
오늘만큼은 이러한 평소의 목적과 전혀 상관없는 푸념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유리아 자하브 때문.
“예. 들어 보십쇼. 오늘 유리아가 실습이 끝나자마자 제 방에 들이닥치지 뭡니까.”
“노크 정도는 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아하. 제 말뿐만 아니라 제벨라 누님 말도 잘 안 듣는 거였군요. 아무튼 갑자기 쳐들어온 유리아가 무슨 짓을 했는지 혹시 짐작 가십니까?”
“어디 보자……한번 생각해 봐야겠구나. 에녹 네가 이리도 불평할 정도면 분명 중요한 무언가를 방해한 것일 터. 수련장이나 아니라 방 안이라…….”
달그락.
거기까지 제벨라가 자신의 찻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 들이마시고는 내려놓았다.
오러를 수련하며 예민해진 감각이 숨결에 섞인 은은한 꽃향기를 잡아낸다.
다만 이것이 차의 향기인지, 제벨라의 체향인지는 모르겠다. 언제나 붓꽃을 닮은 향기를 풍기니까.
차에 젖은 입술을 혀로 슬쩍 닦아낸 제벨라가 빙긋 웃었다.
“역시 카렌과 좋은 시간을 보내다가 도중에 방해를 받은 거니?”
“비, 비슷하죠? 오늘 실습 때 잡은 가장 강한 몬스터라면서 포이즌 웜의 머리를 가져왔으니까요.”
사실 카렌과 유니콘은 순결한 여성을 좋아한다는데, 정작 유니콘 본인은 대체 어떻게 번식하는 것인지에 대한 토론을 하는 중이었지만.
아무튼 즐거웠으니 좋은 시간은 좋은 시간 맞겠지. 제벨라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지만…….
뭐어. 포이즌 웜의 머리를 가져온 건 아무런 과장도 없는 사실이었지만.
녹색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면. 퇴화해 회색으로 변한 눈, 터널처럼 동그란 입과 그 안쪽에 빼곡히 돋아난 이빨들.
벌레를 특별히 혐오하는 편이 아님에도 보는 순간 절로 소름이 오소소 돋더라.
“그래요. 백번 양보해서 실내에 피 흘리는 몬스터 머리를 가져온 것도, 냅다 제 방문으로 열고 들어온 것도 이해할 수 있어요.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나 보죠.”
“어머? 백번이나? 누이는 에녹의 이해심이 깊은 것 같아 감동이란다.”
“……하지만, 잘라 온 머리를 툭 던지고 혼자 쪼르르 나가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더군요. 하아. 그거 치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심지어 오늘이 처음이 아니라 며칠 전부터 매일 일어나는 입니다 매일.”
“에이. 그래도 귀엽지 않니. 고양이가 잡은 사냥감을 주인에게 가져다주는 것 같아서 말이야.”
“…….”
이렇게 보면 제벨라는 그냥 팔불출이 아닐까 싶다. 나한테 잘해주는 것도 그렇고, 유리아에게 무른 것도 그렇고.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자니, 어느새 턱을 괴고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던 제벨라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누님.”
“이러니저러니 해도 둘이 사이좋아 보여서 다행이란다. 아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려나? 유리아가 다른 건 몰라도 감은 참 좋은 아이니. 좋은 사람을 알아본 거겠지.”
“감……인가요.”
“그래 감. 사실 재능이라는 게 다 그런 거잖니. 알기 쉽게 눈에 띄는 것도 아니고,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특출남. 그리고 설명하기 힘든 감각을 우리는 감이라고 부르니 말이야.”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제벨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 말을 들으니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 의미에서 첫눈에 반한다는 것도 감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단다.”
“푸흡!”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아니, 차라리 여기에서는 뿜는 게 더 품위 없어 보였으려나. 그보다 제벨라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낸다는 건 유리아가 앵겨붙는 걸 알고 있다는 건가.
아니지. 내가 이걸 왜 숨겨야 하는가.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당당하게 굴어야…….
생각이 점점 복잡해지는 사이. 제벨라가 쿡쿡 웃으며 손을 뻗어 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약간의 과자부스러기, 그리고 두어 방울 새어 나온 찻물을 검지로 훑어내고는 묘한 웃음과 혀를 내밀어 낼름 삼키는 제벨라.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야한 걸까.
칼립소에서 조금만 깊은 곳으로 가면, 보이던 헐벗은 매춘부보다 꽁꽁 싸매고 있는 제벨라가 더 매력적이란 말이지.
역시 얼굴의 차이인가. 아니면 미드 차이?
제법 진지한 고민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제벨라는 내 입가를 닦아준 것으로 만족했다는 듯이 평소와 같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이걸 깜빡했구나. 저번에 오크 워로드가 쳐들어오며 무너진 성벽을 기억하니?”
“네? 그거야 당연히 기억하죠.”
“이번에 자재가 도착해서 슬슬 수리를 시작하려 하는데, 에녹 네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구나.”
“제 도움이요? 아니, 애초에 꽤 시간이 지난 걸로 아는데 이제야 수리에 들어간다는 건 또 무슨 소립니까.”
“으음. 실은 에녹 네겐 비밀로 했지만, 자하브의 예산이 그리 넉넉치 않단다.”
“……예?”
“아, 물론 재정 구조나 세금에 문제 있는 건 아니란다. 어디까지나 던전 역류가 연달아 터지며 큰 지출이 겹쳤을 뿐이니.”
하지만 당장 쓸 돈이 부족한 건 사실. 그리고 몬스터를 막아내야 하는 만큼 성벽을 싸구려 재질로 지을 수도 없었다.
그탓에 자금 조달이 늦어 이제야 수리가 시작된다는 뜻.
“다행히 에녹 네가 영지민들에게 인기가 좋잖니. 아무래도 제대로 된 인부를 고용하기 힘드니 관리자만 뽑고 노역을 좀 시켜야 할 것 같은데…….”
“과연. 완벽히 이해했어요.”
노역. 정확히는 영주의 권한으로 영지민들을 소집해 일 시키는 강제노역을 말하는 거겠지.
노역은 현대에도 형벌로서 남아있을 만큼 예로부터 악명높은 시스템이다.
생업을 그만두고 끌려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을 대신하는데, 심지어 빡세고 부상의 위험도 크다. 이를 좋게 생각하는 이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물론, 피라미드 건설 같은 예외도 있긴 하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급여도 넉넉하게 줬고, 다치면 치료도 해주고, 아프거나 개인 사정이 있으면 휴가도 줬다고 하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니자 예외적인 경우. 기본적으로 노역이란 최소한의 의식주만 제공해 주고 뼛속까지 부려 먹는 일.
그리고 이러한 노역은 자하브에도 있던 모양이다. 하긴. 중세 봉건 사회니 당연한 일인가.
아마 제벨라로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빠르게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노역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불만이 클 영지민들을 달래기 위해 여러 오해로 한창 평판이 좋은 나를 내세우고 싶은 것일 테고.
합리적인 판단이다. ……일이 잘 굴러가기만 하면 말이다.
“흐.”
오랜만이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큰 기회 아닌가. 나를 가주라는 자리에 묶어두고 있는 가장 큰 문제중 하나인 영지민들의 지지를 무너뜨릴 기회.
지금껏 일이 요상하게 꼬여 오히려 좋은(?) 결과를 냈지만……이번 건 결국 노역이다.
아무리 일이 꼬여도 밥 먹고 일만 하라는 명령에 기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물며 그런 말을 하는 대상이 뻔뻔하고 오만하며 재수 없기까지 하다면?
이건 뭐, 말 다 했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말고 제게 맡겨주십쇼 제벨라 누님.”
“그래도 되겠니?”
“제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이런 건 영주가 나서야죠. 예에. 그렇고 말고요.”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탐욕스런 영주의 래퍼런스.
이거라면……!
“재정이 부족하다고 하셨죠? 저만 믿고 맡겨주십쇼 누님. 반드시 최소한의 식사와 최소한의 의료지원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뽑아낼 테니 말이죠.”
“으응? 원래 이런 건 무급 노역인데…….”
“네? 뭐라고 하셨나요?”
“……아무것도 아니란다. 최소한의 식사와 최소한의 의료지원이라고 했니? 그래. 에녹 네가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렴. 이 누이는 언제나 에녹 너를 응원하고 있단다.”
어째서인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제벨라.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해결된 모양이다.
***
건장한 영지의 건장한 청년들을 불러 모아, 무너진 성벽 앞에서 노역 이야기를 꺼내려 했으나.
평소와 다르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리아와 마주쳤다.
“여기서 뭐 하나 유리아야.”
“아, 오라방? 그냥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산책하던 중이었지.”
“됐으니까 좀 나중에 해. 제벨라 누님이 시켜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어? 그렇다면야…….”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성벽에서 멀어져 내 옆에 서는 유리아.
그럼에도 아직 진정되지 않는지 대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말았다 하기도 하고, 냄새를 맡듯이 코를 킁킁거리기도 하지만.
뭐,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 원래도 기행을 벌이는 녀석이니까.
유리아를 적당히 무시하고, 벌써부터 침울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영지민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잘 모였다!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 같지만, 너희를 이리 불러 모은 것은 성벽을 수리하기 위해 노역을…….”
쿠웅!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터져 나온 굉음. 지축이 흔들리며, 안 그래도 무너져 있던 성벽 일부가 그 충격으로 더욱 큰 균열을 일으키며 폭삭 무너진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그 너머로 섬뜩한 안광이 번뜩이더니.
-아아아아아!
뒤이어 지옥의 밑바닥을 긁어대는 것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찌나 막대한 성량인지, 방금 막 피어오른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질 정도.
그렇게 완전히 무너진 성벽과 흙먼지 너머에서 드러난 것은 뒤틀리고 부풀어 오른 채, 불길한 흑마력에 휩싸인 인간 비스무리한 무언가.
많이 변했지만 어째 익숙한 외모에 기억을 되짚는 사이.
“브렌트 교관?!”
옆에서 들려오는 유리아의 기겁에 눈치챘다. 일전에 뇌물을 받고 유리아를 알게 모르게 차별한, 그리고 내가 던진 돌에 얻어맞고 쫓겨난 아카데미의 교관이었다는 사실을.
그렇다. 교관이 아니라 교관이었던 것.
브렌트였을지 몰라도 이젠 브렌트라고 부를 수 없는 뒤틀린 존재가 검붉은 피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자하브!!! 죽인다! 죽어! 죽어라!!!
섬뜩한 기운이 담긴 저주를 내뱉는 녀석. 촉수처럼 변이된 그의 손에는 모든 빛을 흡수하는 듯한 칠흑의 검이 들려있었다.
.
.
.
.
.
“다, 다들 도망쳐! 괴물이다!”
“그런가……! 이래서 영주님께서 노역을 시켜서라도 성벽을 고치시려 한 건가!”
“뭣!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아냐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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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흑마법사들을 때려잡은 이후. 필립은 챙겨온 비상 물품들로 부대원을 치료하고, 힐다와 칼튼은 연구실을 뒤적이는 사이.
나는 흑마법사들의 시체를 한데 모아두고 있자니, 카렌이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한 명쯤은 살려두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요 도련……가주님?”
“카렌카렌아. 그냥 편하게 불러. 나는 도련님 소리도 듣기 좋더라.”
“안 됩니다. 이미 가주님께서는 자하브 가문의 주인이시고, 제국에 셋 뿐인 대공이시잖아요. 호칭은 똑바로 해야 해요.”
“쓰읍. 난 좀 서먹해진 것 같아서 아쉽단 말이지.”
“……명령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아니, 이런 걸로 명령할 것까지야. 카렌 네 말이 맞겠지. 난 이런 쪽은 아무래도 잘 모르니 말이야.”
정식으로 계승식을 마치고 가주가 되었기 때문일까. 묘하게 고분고분하단 말이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카렌이 대충 뭉쳐놓은 흑마법사 시체를 발끝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그나저나, 조금 아쉽네요. 만약 한 놈 정도 살려두셨다면 뭐라도 정보를 캐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세상에. 카렌아. 그런 말랑한 얼굴로 고문 같은 것도 할 줄 아니?”
카렌의 볼따구를 양옆으로 주욱 잡아 늘리자, 얌전히 내게 불을 내어준 카렌이 무감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하는 게 아니라 할아버님이 하는 거예요.”
“아하. 뭐어, 너무 아까워하지 마. 설령 세 놈 모두를 살려서 심문한다 해도 제대로 된 정보는 얻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가요? 할아버님의 실력은 꽤 대단하십니다만…….”
“칭찬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아론이 누구 하나 고문하는 일은 잘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지.”
“가주님의 명으로 인한 것이라면 케세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 될 거예요.”
“어……그건 그것대로 재밌어 보이는 이야기지만, 애초에 흑마법사 상대로는 애초부터 전제가 잘못됐어.”
“예? 그게 무슨…….”
“잘 모르는 거 보니, 카렌 너는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보네.”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나마 머리가 멀쩡한 대장격 흑마법사의 시체를 가리켰다.
“너도 마지막에 봤지? 갑자기 말투가 연극체로 변한 거. 이게 보통 대장격 흑마법사들이 그렇게 말투가 오락가락하더라고.”
“맞습니다. 비극의 신의 신력을 받아들인 부작용이라고 들었습니다.”
“응? 그게 그런 이유였어……?”
지금껏 흑마법사는 여럿 잡았지만, 왜 그런지는 별로 궁금해한 적 없었기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일단 머릿속에 넣어둔 뒤. 하던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게 비극의 신 때문인지 그냥 미친놈이라 그런 건지 몰라도, 확실한 건 말투와 함께 머리도 오락가락한다는 거거든.”
“그럼…….”
“어. 정보를 빼내려 해도 헛소리만 하거나, 어찌어찌 정보를 알아내도 거짓이거나 함정인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경우에 따라서는 정보를 실토하는 척 이쪽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던 놈도 있었고.”
그러니 흑마법사와는 말을 섞을 이유가 없다. 말을 섞더라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일단 죽이고, 시체나 연구실 같은 곳에서 정보를 알아내는 게 훨씬 나아. 그래서 이렇게 바로 빠져나가는 대신 여기저기 뒤져보는 거잖아.”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겁니다만.”
“응?”
한데 모은 흑마법사들의 시체를 뒤적이며 대충 답해주던 도중. 카렌이 조심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혹시 흑마법사를 상대해 보신적인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던 건가요. 너무 능숙하기도 하시고, 어쩐지 놈들이 가주님을 알아보는 것 같기도 해서 말입니다.”
“아……말 안 했었나.”
머리를 긁적이며 아무것도 없는 시체 하나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사실 칼립소에도 흑마법사 지부가 하나 있었거든.”
“예, 뭐. 칼립소라면 하나 있을 법도 하죠.”
“근데 좀 뭐랄까. 거슬려서? 자꾸 충돌해서? 응. 아무튼 그래서 쳐부쉈어.”
“???”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는 카렌.
하기야. 내가 좀 헷갈리게 말하긴 했지. 알고는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결국 내가 어린 시절에 흑마법사 조직에 실험체로 팔려나갔다는 이야기까지 해야 하지 않는가.
내가 사실 자하브의 사생아가 아닌 짭이라는 사실이 알려질 수도 있고……그게 아니더라도 당시의 기억은 내 가장 깊은 상처다.
지금도 흑마법사만 보면 발작을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어린 시절의 일을 말하는 건 아무래도 거부감이 든단 말이지.
스스로 약점을 밝히는 건 칼립소에서는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으니까.
내가 다른 흑마법사의 시체 하나를 더 수색하는 내내 눈만 깜빡이던 카렌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으……그러고 보니 가주님께서는 칼립소에서도 자신만의 조직을 꾸리셨었죠. 가장 낮은 곳의 주인이라는 게 설마…….”
“응? 조직이라고 할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지만, 같이 사는 친구들이 좀 있긴 했지.”
일종의 고아팸이라고 해야 하려나.
쉴 새 없이 대륙의 거물급 범죄자가 유입되고, 그 이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칼립소에서 고아는 취약계층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 존재하는 이들.
그렇기에 생존을 위해 자기들끼리 뭉치는 경우가 많았고, 막 흑마법사 조직에서 빠져나온 시기의 나 또한 자연스레 고아팸에 합류한 것이다.
고아팸의 가입 조건은 부모가 없거나, 부모에게 버림받을 것이니까.
그러다 시간이 지나며 다들 머리가 굵어지며 아이라 부르기 힘들어졌을 무렵.
누군가는 범죄 조직에 들어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용병의 일원이 되기도 하고……누군가는 마음이 맞는 몇몇과 함께 새로운 모임을 만드니.
내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같이 영차영차 힘내며 집도 사고 그랬는데…….
정작 집이 생기고 나자, 어렸을 때부터 사이좋았던 놈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더라.
어떻게든 중재시키려 해도 내가 얼굴을 비추는 순간 입을 싹 다물어 버리니 중재도 힘들었고.
나 혼자 남자라 내게는 말 못 할 갈등이 있겠거니 넘어갔지만…….
그러다 너무 크게 다투는 바람에 다 같이 살던 집이 박살 난 이후.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어째서 여초 직장에 남자 혼자 다니는 게 헬이라는 건지! 누나들 사이에서 자란 막내아들이 여자만 보면 진저리를 치는지……!
결국 각자 따로 살기로 하고, 마침 찾아온 아론과 카렌을 따라 칼립소로 오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적당히 생략할 건 생략하고, 숨길 건 숨기며 말한 내 이야기를 들은 카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런 걸 조직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적어도 다른 흑마법사들은 그렇게 여겼겠죠. 과연. 이해됐습니다. 새로 생긴 조직을 견제하려다가 가주님께 역으로 당한 거군요.”
“아니? 그냥 방해라서 내 쪽에서 보이는 족족 죽인 건데?”
“…….”
입을 꾸욱 다문 카렌.
사실이기도 하지만……솔직히 말하자면 포악한 전투광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 있었다.
나름 효과가 있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카렌. 무표정은 여전하지만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속으로 자축하는 사이. 간신히 진정한 카렌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럼……소리 없는 자들의 종말이라는 건 또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도 별거 아냐. 흑마법사 놈들이 쫄리니까 암살자 길드를 동원해서 날 죽이려고 하더라고.”
“설마……?”
“응. 그래서 암살자 길드도 같이 쳐부쉈어.”
“…….”
“아잇. 여기도 아무것도 없네.”
괜히 투덜대며 마지막 시체를 내던졌다. 이쪽은 허탕인가.
어째서인지 카렌이 멍하니 굳어있길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다.
흠. 기회인가.
볼따구는 이미 많이 만져봤으니 패스한다. 그 대신 카렌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대로 번쩍 들어 올리며 어린아이와 놀아주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높다 높아~”
“…….”
아무리 그래도 이건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무감각한 카렌의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가주님. 내려주세요. 제 키가 작을지언정 나이는 그리 어리지 않습니다!”
“싫은데?”
“이익……!”
마구 발버둥 치는 카렌. 하지만 이미 완전히 몸이 들어 올려진 상태에서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한참을 저항하다가 결국 축 늘어지는 카렌.
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표정. 하지만 묘하게 원망이 서린 눈빛에 낄낄 웃던 도중이었다.
연구실을 뒤져보다 무언가 발견한 걸까. 뒤에서 힐다가 살짝 신난 어조로 외쳤다.
“여기 보세요 가주님! 해석이 필요할 것 같지만 뭔가 중요해 보이는 서류를 발견……가주님? 그리고 카렌 양?”
도중부터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는 힐다. 자신이 무엇을 본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비비적거리길래 그제야 카렌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발이 땅에 닿았음에도 가만히 멈춰선 채……아니, 정확히는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카렌.
수치스러움에 바들바들 떠는 그녀를 지나쳐 어벙하게 입술만 뻐끔대는 힐다가 쥐고 있는 종이 뭉치를 받아들었다.
아무래도 칼립소가 아니라 다른 지역이라 그런지 내가 모르는 암호체계를 사용하고 있었었다.
달리 말하면 암호화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라는 소리.
“잘했어 힐다. 챙길 것도 챙겼고, 구할 사람도 구했으니 이제 돌아가자고.”
“네? 아, 네. 그으……카렌 양은…….”
“금방 회복하겠지 뭐.”
어깨를 으쓱이고는 왔던 길을 역으로 거슬러 나가기 시작했다.
다들 눈치를 보면서 카렌을 피해 따라서 움직이던 도중.
뒤에서 카렌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계승식 준비로 쌓여있는 업무가 많았었죠.”
“뭣. 아니, 그런 건 제벨라 누님이 대신 하기로 했잖아!”
“흥! 저는 원칙대로 일할 뿐입니다.”
카렌이 치사해졌다.
……뭐, 나 때문이지만.
***
햇살이 내리쬐는 밝은 창가. 하지만 바깥의 풍경은 볼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일하던 뚱뚱한 중년의 사내가 흠칫 몸을 떨었다.
“상단주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허허.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잠깐 좀 쉬고 싶으니 나가 주겠나?”
“예? 아, 알겠습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나가는 비서. 그 모습을 확인한 중년인의 푸근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던전 진입조가 전멸했나.”
그리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뒤의 어둠에서 펼쳐지는 것은 동지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금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청년. 에녹이 사납게 웃으며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겼다.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발동되는 기억의 전이.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던 상단주……아니, 상단주로 위장한 흑마법사가 한탄했다.
“결국 칼립소의 바깥으로 빠져나왔는가. 그나저나 저 복장은……자하브? 허어. 그런가.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고개를 끄덕인 흑마법사가 떨리는 손으로 차를 홀짝였다.
“하기야. 우리의 고향을 부순 이가 보통 인물은 아니겠지. 아무리 업보가 목을 졸라와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니. 이제야 이해되었다. 최근에 자하브의 사생아가 가주가 되었다고 하던가.”
에녹이 실험체 출신이라는 걸 알고 있던 흑마법사들마저 너무도 자하브스러운 에녹의 모습에 착각하고 말았다.
그냥 고아가 아니라 자하브의 사생아를 데려와 실험체로 삼았던 거라고.
실험 과정에서 잠들어 있던 피가 각성한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착각이지만 이를 바로잡아 줄 연금술사는 진작에 에녹의 손에 죽었다.
“허나 태양이라 한들 약점 없는 존재는 없는 법. 그 어떤 불길도 영원히 타오를 수는 없고, 그 어떤 빛도 언젠가는 어둠에 수렴하니.”
과거의 트라우마를 애써 억누른 흑마법사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원수여. 네 정체를 알았으니, 이것으로 네 심장을 찌를 비수를 만들 수 있게 되었음이라.”
제국 전역에 흩어진 흑마법사들이 같은 기억을 공유받고, 은밀한 협력을 시작했다.
오직 자하브를 죽이기 위한 무기를 주조하기 위하여.
……그래. 자하브가 아닌 이에게는 별다른 효과가 없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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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 숨어있던 흑마법사들을 쓰러뜨린 뒤.
자하브 성으로 돌아온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급하게 준비한 것치고는 성대한 개선식이었다.
“와아아! 영주님이 돌아오셨다!”
“던전의 흑마법사를 해치우시고 돌아오셨다!”
“제 아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님이라면 한번 대드릴 수도 있어요!”
“이런 미친! 자네는 남자잖나!”
“하지만 영주님은 자하브신데?”
“일리가 있군.”
사방에서 들려오는 나에 대한 찬양. 중간중간에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에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이게 다 뭔지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
머리를 부여잡으며, 어쩐지 가장 우쭐해하고 있는 힐다에게 물었다.
원래라면 카렌에게 물었겠으나……지금은 살짝 토라진 모양이니까.
“힐다 경. 표정 좋아 보인다?”
“흐흐. 수업 첫날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출세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제가 줄을 잘 서긴 한 모양입니다. 벌써 이렇게 명예로운 자리에 설 줄은 몰랐습니다.”
“어이, 칼튼 경. 당신 딸래미 좀 봐. 이거 맞아?”
“어흐흑! 드디어 자하브에……그래! 피가 어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 이제야 정상화가 됐을 뿐! 앞으로 더욱 잘 보필해야…….”
“…….”
슬쩍 돌아본 칼튼은 어찌나 감동한 것인지 대성통곡 수준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래서야 내 말이 들릴지도 않겠네.
중년 아저씨가 눈물 콧물 질질 짜는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결국 한숨을 푸욱 내쉬며, 주변의 찬양을 한껏 즐기고 있는 힐다의 귓가에 속삭였다.
“알았어. 이제 즐기는 건 뭐라고 안 할 테니까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좀 설명해 줘 봐. 우리 분명 제대로 된 발표도 뭣도 없이 다짜고짜 계승식 도중에 박차고 나와 던전에 들어간 거잖아.”
“아, 그게 신경 쓰였던 거군요. 줄곧 같이 움직였으니, 저라고 주군이 모르는 걸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한가지 짐작 가는 것이 있긴 합니다.”
“뭔데.”
“제벨라 아가씨입니다.”
“음?”
“주군께서도 제벨라 아가씨와 만나보셨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대충이나마 알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떠셨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보다 더 가주직에 어울리는 사람이지.”
“아니, 그건 아니죠. 자하브의 주인은 모든 분쟁의 선봉장이어야 합니다.”
“…….”
은근슬쩍 말을 꺼내봤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진짜 장난 없구나 남부의 강자 숭배 풍습.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사이. 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어. 그만큼 주군께서 제벨라 아가씨의 격무에 느끼는 바가 컸다는 뜻이겠죠.”
“어. 뭐, 그런 거지. 응.”
“제벨라 아가씨는 무척이나 유능하신 분입니다. 계승식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는 결론을 내리셨을 겁니다. 주군께서 이쯤이면 승리하고 돌아오시리라고.”
“……그런 게 가능하다고?”
“그만큼 주군의 힘과 성정을 믿고 계신다면 얼마든 가능하겠죠.”
말하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환호하는 영지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때로는 귓속말하느라 붙어있는 나를 과시하는 등.
자연스레 주변에 자신을 각인시키던 힐다가 말을 이었다.
“제벨라 아가씨께서는 결코 자하브의 가주가 되실 수 없으시지만, 자하브의 안주인으로서는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긴 하지.”
근친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제벨라만큼이나 좋은 여자도 없긴 하다.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나 근친이고 나한테는 족외혼이긴 한데…….
근친명가라는 멸칭이 괜히 붙은 게 아닌 걸까. 어딜 가도 족내혼단으로 가득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잠시. 개선식에 잔뜩 들떠있던 힐다의 목소리가 돌연 진지해졌다.
“그러니 주군. 절대 제벨라 아가씨를 슬프게 해선 안 됩니다. 이제 정식으로 대공의 지위에 오르셨으니 자하브령에서……아니, 남부 전체에서 주군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겠죠. 그럼에도 제벨라 아가씨를 홀대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럴 생각은 하나도 없었지만, 일단 묻자. 그 정도야?”
“예. 그 정도입니다. 장담컨데 제벨라 아가씨가 파업하는 것만으로도 자하브의 재산은 반토막 날 겁니다.”
“……그 정도 맞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제벨라가 가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말이지.
하여간 던전 때문에 이게 다 무슨 고생인지.
가볍게 혀를 차는 것도 잠시. 여전히 열렬한 환호를 가만히 방치하는 것도 좀 아니다 싶어 손을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려주었다.
-와아아아아!!!
영지민들의 함성이 더욱 거세졌다.
겨우 흑마법사 좀 잡은 걸로 이렇게 칭송받는 건 쪽팔리긴 하지만……솔직히 말해서 약간은 기분 좋기도 했다.
과연. 힐다가 이래서 출세하고 싶어 했던 건가.
전생은 물론이요, 현생에서도 지금껏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출세의 맛은 꽤나 달콤했다.
“아, 근데 힐다 경. 왜 아까부터 나를 주군이라 부르는 거야?”
“어차피 잡은 줄. 이제와서 다른 줄로 갈아탈 수 없다면, 남들에게 자랑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내 기사라는 이미지를 알차게 써먹겠다는 뜻이었구나?
일전에 나를 다시 보니마니 했던 날 이후로 힐다가 너무 솔직해진 것 같다.
***
에녹이 한창 흑마법사들을 때려잡는 사이.
코넬리아는 코넬리아대로 제벨라와 함께 협상에 참여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눈앞의 상대는 에녹과는 다른 의미로 괴물이라는 것을.
협상이란 결국 서로 취할 것은 취하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며 완성되는 것.
하지만 제벨라는 아무리 도중에 변경된 것이라지만, 코넬리아가 준비해 온 모든 조건을 부드럽게 흘려내고 자신의 조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것이 서로에게 훨씬 이득이라는 사실을 코넬리아는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당초에 예상했던 이권은 하나도 챙기지 못했지만……이 정도면 오히려 당장은 더 도움이 될 거예요.
우아한 자세로 찻잔을 들어 한잔 들이켜는 제벨라를 흘깃 바라보는 코넬리아.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어주는 제벨라의 모습에 코넬리아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순수한 얼굴을 하고,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이 자신의 계획을 쳐부쉈는지 잘 알았기에.
장기적으로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 하나 내어주지 않았으나, 코넬리아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정보와 자금을 순순히 내어준다.
함정에 빠졌다고는 하나, 연속된 사업 실패와 몬스터 토벌 실패로 입지가 줄어든 코넬리아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 대가로 제벨라가 받아 간 것은 아카데미의 학생들.
정확히는 실습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아카데미 학생들을 남부의 던전으로 보낸다는 조건이었다.
아카데미는 제국의 가장 재능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곳에서 실습을 보낼 정도의 이들이라면 모험가들보다 훨씬 고급 인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이들이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알아서 몬스터를 정리해 준다는데 얼마나 좋은 일인가. 딸깍은 언제나 옳다.
결과적으로 자하브는 아직 혼란스러운 집안을 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코넬리아는 자신의 적이 누군지 알고 대항할 힘을 얻은 셈.
‘한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든 맹수, 다른 한 사람은 양의 탈을 쓴 늑대. 확실히 대공가는 달라도 다르긴 하네요.
하지만 제벨라를 향한 기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감탄으로 바뀌었다.
대공의 혈통이 이 정도로 괴물들이라면, 계승권은 좀 떨어져도 아무튼 황실의 적통인 자신은 더 대단한 사람이었기에……!
여러모로 혈통주의자다운 결론.
그렇게 한차례 무너졌던 멘탈을 빠르게 수복한 코넬리아가 눈치를 보며 마시던 찻잔을 자신만만하게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유리아는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었던가요. 그럼 이번 실습 때 오랜만에 얼굴을 보실 수 있겠네요.”
“어머? 황녀님께서 유리아를 아시나요?”
“녜헤? 아, 으흠. 네. 물론이죠. 유리아가 유급하는 바람에 제가 먼저 졸업하긴 했지만 아카데미 동기였는걸요.”
“그러셨군요. 아, 차 한잔 더 어떠신가요? 최근에 좋은 찻잎을 하나 구해서 말이죠.”
“어어……주시면 감사히 마실게요.”
“후후. 대신 유리아가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좀 알려주셔야 합니다?”
“뭐, 그 정도야…….”
“어디 보자. 다과도 차에 어울리는 것이 있으니 새로 내오겠습니다.”
“???”
유리아 자하브. 아카데미에 가 있는 동생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돌연 태도가 돌변한 제벨라.
마치 동생 친구라도 대하는 것 같은 스스럼 없는 태도.
‘믿을 수 없어요! 믿을 수 없어요! 그 음험한 여자가 어떻게 이런……!
이제는 콧노래까지 부르는 제벨라의 뒷모습에 간신히 멘탈을 진정시켰던 코넬리아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뭐죠? 진짜 뭐죠?! 설마 차에 독이라도 타려는 건가요??
물론 차에 독을 타는 것은 제벨라의 전문이었으나, 이번에는 예외였다.
제벨라 자하브. 스스로의 손으로 아버지는 물론이요, 에녹이 오기 전의 모든 형제자매를……심지어 사생아들까지 꼼꼼하게 몰살시킨 희대의 악녀.
하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아끼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대숙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
자하브에서 제벨라를 위해 울어주고 분노해 주던 단 한 명뿐인 동생.
유리아 자하브였다.
아, 물론 이제는 에녹이 추가되어 단 둘뿐인 동생이라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코넬리아의 떨림이 심해지건 말건 제벨라의 입가에는 한층 더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예상대로 에녹이 승리와 함께 돌아오며 계승식을 끝마쳤고, 이제 곧 유리아 또한 자하브 성을 찾아올 터.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가족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뜬 탓일까.
실수로 너무 많이 따라 찻잔에서 차가 흘러넘쳤다.
“이런.”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은 제벨라가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웃어 보였다.
“부끄럽네요. 이건 저희끼리의 비밀로 할까요?”
“……그, 그러죠.”
코넬리아는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
개선식을 가로질러 도착한 자하브 성.
언제나 그러하듯, 제벨라가 자애로운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어서오렴 에녹. 금방이었구나.”
“그야 누님이랑 약속했으니까요.”
어떻게 그런 과거를 겪고도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걸까. 분명 천성이 선하기 때문이겠지.
어째서인지 급하게 인사를 하고 떠난 코넬리아 황녀의 뒷모습에 키득이던 제벨라가 입을 열었다.
“후후. 기대하렴 에녹. 이제 곧 유리아가. 아카데미에 다니던 네 동생이 돌아올 거란다.”
“오?”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번뜩임.
제벨라는 아무래도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가주직을 너무도 간단히 넘겨주었지만…….
어쩌면 동생인 유리아는 다를지도 모르잖은가.
만약 유리아가 가주직을 원한다면……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다!
들떠있는 제벨라를 향해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거 기대되네요.”
“그러니?”
“네. 저는 항상 여동생을 가지고 싶었거든요.”
뭐어. 이 부분은 진심이다.
전생에는 외동이었고, 현생에는 기간제 형이랑 새 누나밖에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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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뜸 사생아로 착각받았다 - 다운로드 진행 상황
## 작품 정보
- **Novel ID**: 383597
- **작품 URL**: https://novelpia.com/novel/383597
- **총 회차**: 회차
- **작가**: 오리너구리
## 다운로드 현황
| 항목 | 값 |
|------|-----|
| 마지막 다운로드 | EP.3 (3.md) |
| Episode ID | 5063026 |
| Viewer URL | https://novelpia.com/viewer/5063026/ |
| 다운로드 일시 | 2025-12-03 21:09 |
| 다운로드 수 | 0화 |
| 건너뜀 | 3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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