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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 요즘 돈 좀 만진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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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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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쥔 카드를 한 장씩 바닥에 내려놓으며, 랭킨은 심드렁하게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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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재수 없는 검은 머리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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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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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킨은 희미한 기억 속에서 김율의 모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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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불길함의 상징이었던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그리고 사내새끼답지 못하게 조금 위축된 모습. 재수 없이 잘생긴 얼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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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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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소설인가 뭔가를 써서 큰돈 만졌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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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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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두목. 그 심드렁한 반응은? 당연히 털어야지. 그리고 상납도 받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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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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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랭킨은 그 제안이 내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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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에 대한 편견 때문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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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이면 항상 좋지 못한 꼴을 당한다고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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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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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씹, 삥을 뜯고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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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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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킨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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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주춤주춤, 몸을 빼려고 했었던 김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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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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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나뒹굴던 각목 하나를 주워 든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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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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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동작 자체는 어색한 면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깔끔하고 예술적으로 휘둘러지는 각목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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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빠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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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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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 놈 한 명의 머리가 또 호쾌한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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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쓰러진 놈만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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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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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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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기를 다루는 실력은 랭킨이 전장에 있을 때 보았던 기사와 견주어봐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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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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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김율의 체력은 한계에 치닫고 있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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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쪽은 아직 세 명이나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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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킨! 슬슬 제대로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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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의 외침에, 랭킨은 결단을 내릴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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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 판을 벌여놨으니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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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거품 물고 쓰러진 놈들 입에 맥주라도 한잔 물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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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킨은 품 안에 숨겨두었던 단도를 뽑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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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바라본 김율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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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씹, 덤벼라! 빠따는,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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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며 전의를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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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킨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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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각목을 네가 얼마나 더 들고 있을까? 나는 30초 안에 놓친다에 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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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처럼, 김율의 손은 이미 피에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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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듬어지지도 않은 각목을 붙잡고 전력으로 휘둘러댔으니, 손아귀가 터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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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가볍게 용돈만 뜯어갈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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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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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검을 한 번 공중에 던졌다가, 유연하게 착 잡아들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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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거 다 내놓던가,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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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까,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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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안에 고인 피를 바닥에 퉤 뱉어내면서, 김율이 욕설을 뇌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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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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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허억, 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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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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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줄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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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의 봉술을 익히자마자 전투 이벤트라니, 무슨 튜토리얼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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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검이 내 목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는 진짜 오줌을 지려버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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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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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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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으아, 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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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더 헤라클레스 율의 활약상이 골목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걸 보고 있자니, 하늘에 날린 아드레날린이 핑 돌아서 대뇌를 오롯이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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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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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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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한 근육통이 뒤늦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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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육신으로 여포의 힘을 발휘한 후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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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운동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내 손아귀에 거의 달라붙다시피 한 몽둥이를 짚고 바닥에서 일어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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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호쾌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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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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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익은 목소리가 골목의 입구 쪽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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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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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광명의 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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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슴을 드러내듯 재단된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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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프로 단정하게 덮어낸 백은빛 머릿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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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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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 이름으로 불러주시는 거예요?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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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펼쳐진 유혈 사태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호들갑을 떠는 성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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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들은, 친구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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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랑 보통 이렇게까지 싸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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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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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여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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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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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경한 생각을 하자마자, 로젤린의 손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와 나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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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신성모독으로 죽어버리는 건가, 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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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사랑하고 아낌없이 베풀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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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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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무언갈 중얼거린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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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통해 빠져나갔던 피가 다시 충만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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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졌던 손아귀에 새살이 돋아나며 엉겨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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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진하게 감돌았던 탈력감도 씻은 듯이 사라지고, 실핏줄이 터져 흐릿했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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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여신의 힘이랍니다? 제우스 같은 호색한 잡신과는 차원이 다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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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끝 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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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게 바로 의느님…… 아니 성녀님의 위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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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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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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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악으로 깡으로 이기긴 했을 것 같으나, 자칫 몸에 구멍이라도 뚫렸으면 그대로 내 인생이 끝날 수도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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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이게 다 여신의 뜻이자 인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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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의 관대한 말씀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성스러운 십자가를 잠시 눈에 담고 있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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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젤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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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성기사로 추정되는 여기사 두 명이 골목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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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갱생시키도록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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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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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젤린의 냉정한 목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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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완력인진 모르겠지만, 밧줄로 일곱 명을 줄줄이 꿴 후 질질 끌고 가는 여기사의 위엄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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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머지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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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이 조금 험악하게 생긴 여기사 한 명이 내게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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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온 분자는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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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 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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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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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피해자예요. 엘레인을 도와서 복귀하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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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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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느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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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불온 분자는 보통 이단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랍니다. 김율 님께서는 저번에 소명하셨지만, 으음, 또 비슷한 문제가 생기면…… 조금 위험해지실 수도 있어요? 요시찰 대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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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젤린은 싱긋 미소 지으며 내게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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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이 순간 성경에 나오는 천사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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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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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직 감시 대상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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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서 염두에 두었던 소재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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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 게이트 오브 바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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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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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오딘, 트리무르티, 그리고 지저스 크라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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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간들 잊으리오 두터운 우리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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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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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하게 바래다준다는 명목으로 쫄래쫄래 따라오는 로젤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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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야기…… 하하. 네, 차기작은 사랑이 주제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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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진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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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젤린 님님께서는 방방 뛰시면서 내 어깨를 마구 흔드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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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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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이 조금…… 그렇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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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리고, 아마 그 소설을 출판할 때쯤 저는 이 도시에 없을 수도 있겠네요…… 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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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로젤린이 우뚝 멈춰선 바람에 그대로 팔이 빠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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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완력이냐,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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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가 여기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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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 없으시다고요? 무슨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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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마저 비치는 듯한 정색한 로젤린의 표정에, 나는 신문사에 스카웃 받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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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음, 그, 그러면 좋죠! 으으…… 겨우 전입했는데, 또 옮겨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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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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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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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뒷말이 조금 수상했지만, 되물어 볼 용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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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옮겨가는 곳까지 따라오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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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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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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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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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율의 선언에, 편집자는 올게 왔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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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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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의 문학부장이 찾아왔을 때, 김율의 소재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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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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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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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김율의 작품은 완벽하다고는 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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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이 너무 많다거나, 성애적 묘사가 마치 한 번도 섹스를 해본 적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거나, 주인공에게 시련을 주는 것을 지나치게 좋아한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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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찝자면,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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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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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전쟁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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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의 연애담, 그리고 헤라클레스 영웅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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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편집자였지만, 동시에 독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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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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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율의 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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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그 어떤 팬이,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가 더 큰 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아세울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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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세 3차 정산은 곧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계좌를 알려주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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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율이 책상 위에 종이봉투를 하나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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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는 살짝 떨리는 손길로 그 봉투를 열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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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시리즈니만큼, 그래도 하고 싶은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고 가야 할 것 같아…… 신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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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율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편집자는 실례를 무릅쓰고 원고를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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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는 마지막 장을 덮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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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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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리품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거대한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은 트로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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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자마자 목마 안에서 쏟아져나오는 그리스 장병들. 선두에서 앞장서서 달리는 오디세우스와 네오프톨레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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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네를 두고 벌어진 최후의 결투, 데이포보스가 일견 우세를 점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헬레네가 그의 등에 단검을 꽂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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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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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시대에 이어, 트로이에서 영웅의 시대가 끝났다. 이제는 온전한 인간의 시대, 철의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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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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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율의 담담한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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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는 지금 당장이라도 출판사의 지하실에 김율을 감금하고 싶다는 충동을 꾹 눌러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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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아쉽군요. 분명히 중간에 다뤄질 것 같은 이야기가 많았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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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올림포스 이야기를 하고 싶어질 때가 오면, 다시 원고를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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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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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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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서 이번 작품의 제목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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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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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율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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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생각했던 제목은 트로이 전쟁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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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괜찮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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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일리아스. 일리아스로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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