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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하인의 헛소문 유포에도 불구하고, 높은 사람이 엮였기에 모두 조심하여 별다른 문제로 불거지지는 않았다.
다만 제갈영영이 자주 찾는 의원이라는 명성 덕에 무림맹 무사들이 백유성을 지목하여 진료받는 일이 잦아졌다.
많은 사람들은 무림인들은 병에도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내공 심법을 수련하고 몸을 움직여 무술을 수련하는 무림인들은 일반인들에 비해 면역력이 뛰어나 더 건강할 뿐 질병에 걸릴 수 있다.
증상도 덜하고 회복도 빠르기에 착각하는 것일 뿐, 제갈영영의 두통만 봐도 한계를 넘어서는 혹사에는 몸이 이상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다.
무림맹 무사들은 크고 작은 질병으로 낙양 의방을 찾는 일이 많았는데, 양의원에 이어 실력도 좋고 적당히 기분 좋게 치켜세워 주는 방법을 아는 조의원이 가장 인기가 많았다.
분명 그랬는데, 최근에 상황이 변했다.
"어서 오십시오. 백호단주님이 아니십니까?"
백호단주는 하얀 무복을 입고 얼굴이 붉은 50대 남성이었다. 그가 유성을 찾아온 것이다.
"반갑소. 부하들이 백의원이 실력이 좋다고 추천하기에 찾아오게 되었소."
"그러시군요. 안 그래도 최근에 백호단원들이 몇 분 다녀가셨지요.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음식을 먹어도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잘되지 않소. 치료를 받아도 그때 뿐이라 속는 셈 치고 와본 것이오. 부담갖지 말고 살펴보시오."
유성은 백호단주의 정보를 떠올렸다.
'술과 고기를 좋아하고 오랜 기간 소화불량을 호소했다. 이는 위 또는 췌장이나 간, 담낭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진맥 결과 간과 담낭쪽 문제로 판단되었다.
간과 담낭은 나이가 들수록 해독과 대사 기능이 떨어지기에 식습관에 따라 이런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간과 담낭의 문제군요."
"역시 조의원과 같은 소리를 하는군. 혹시 약을 지어 주려는 것이오?"
백호단주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다른 원인을 찾아낼까 기대했으나 같은 진단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약은 꾸준히 먹고 있지만 약간의 효과는 있어도 그의 병을 완치시켜 주지 못했다.
부하들의 추천에 백유성을 찾아왔지만 그는 너무 젊은 얼굴을 보고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후회하고 있었다.
가벼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억지로 이번 진료만 받고 다음부터 조의원에게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닙니다. 시침만 할 겁니다."
대뜸 시침만 한다는 게 아닌가?
침이 장기를 보하는 효과가 있어 그도 여러 차례 맞았으나 약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말에 백호단주는 고민에 빠졌다.
유성은 이런 환자들을 많이 보았기에 장담했다.
"믿고 맞아보시지요. 여러 백호단원분들도 크게 만족하셨습니다."
"음..."
여전히 고민하는 그를 보고 유성은 필살기를 시전했다. 당사자가 먼저 그래도 좋다고 허락해주었다.
"총군사님께서도 제 침술이 뛰어나다고 칭찬이 자자하셨습니다. 믿어보시지요."
백호단주는 솔깃했다.
머리가 아파 자주 이마를 찌푸리던 제갈영영이 최근 들어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자신만만한 유성의 태도도 어느 정도 신뢰감을 주었다.
'낙양 의방의 시험이 무척 어렵다고 들었다. 최소한 돌팔이는 아니겠지.'
백호단주가 결정을 내린 후에는 일사천리였다.
미리 설명을 들었음에도 기다란 침이 깊숙이 찔러 들어올 때는 긴장되어 칼자루를 찾았으나, 곧 백호단주는 더부룩한 속이 사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찔끔 새어 나온 피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루면 아물 것이다.
그는 신기한 듯 가슴과 배를 쓸어보았다.
'마치 이십 대로 돌아간 것만 같구나. 보아하니 하루 이틀 사이에 다시 악화할 것 같지도 않다.'
백호단주가 감탄해 입을 열었다.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인지 모르겠소. 어차피 해결할 수 없다 여겼기에 치료받는 중에도 술과 고기를 줄이지 않았소. 그런데 이런 가벼운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줄여볼 용의가 있소. 술과 고기를 얼마까지 줄여야 하겠소?"
편안하지만, 어딘가 심각해 보이는 백호단주.
일반적인 의원이라면 모르겠지만, 유성의 목적은 신성력을 열심히 쌓는 것.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억지로 참아 마음의 병이 쌓이면 더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제가 있으니 적당히 즐기셔도 좋습니다. 속이 안 좋아진다면 저를 다시 찾아오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말끔하게 치료해드리겠습니다."
백호단주는 유성의 뒤로 서광이 어리는 듯했다. 그는 크게 감격했다.
무재가 있어 상당한 경지를 이루었고, 무림맹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여 높은 급여를 받는 그는 술과 고기를 먹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었다.
다른 의원들은 항상 식습관을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했건만, 유일하게 백유성은 그에게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말해 준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중히 포권지례를 올렸다.
"내가 명의를 몰라뵀소.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시면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겠소."
유성은 상당한 양의 신성력이 늘어나는 것을 느끼며 즐거워했다.
백호단주가 얼마나 오랜 기간 소화불량으로 고생해 왔으며, 유성에게 감사함을 느끼는지 알 수 있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평소 무림맹의 영웅분들이 무림의 안녕을 위하여 얼마나 고생하고 계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단주님 주위에 지병으로 고생하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저에게 소개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하하! 내가 두루두루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여 발이 넓으니 나만 믿으시오!"
그날 저녁, 백호단주는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 왔던 지병의 완치 기념으로 그의 인맥들을 초대해 성대한 술판을 벌였다.
불러 모은 지인들의 숫자는 거의 50여명에 달했다.
술에 잔뜩 취해 유성의 대단함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어 댄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조의원이 그의 담당 하인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요?"
"방금 창호단주도 백의원에게 다녀갔다지?"
"그렇기는 합니다만 아직 조의원님을 찾는 무림맹 분들도 많지 않습니까요?"
하인도 조의원이 왜 심기가 불편한지 알고 있었다.
조의원은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꽉 잡고 있다고 생각했던 무림맹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명씩 백유성 쪽으로 옮겨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둑에 균열이 생기면 처음에는 물이 조금씩 새어 나가다가 조금만 지나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갈 것이다.
'내 실수다. 총군사님 한 명으로 끝나지 않을 거로 생각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저쪽으로 옮겨갈 줄은 몰랐구나.'
사실 제갈영영을 통한 유출 효과는 크지 않았다. 얼마 전 다녀간 백호단주가 매일 같이 술자리를 가지며 유성을 찬양한 효과였으나 조의원이 그 사실까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는 벌써 다음달 수입이 걱정되었다.
새로 들인 애첩이 꽤 사치스러웠음에도 아무 걱정 말라고 큰 소리를 쳐 놨는데 이제 와서 지원을 줄이겠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놈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긴 한 모양이야. 몇몇 사람들은 그놈이 양의원보다 더 뛰어날 거라고 떠들기도 하는 것을 보니.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해.'
머리를 쥐어 싸매고 고민하고 있을 무렵, 그를 찾는 환자가 있었다.
"아이고! 척마대주님, 도대체 이게 얼마만이십니까? 어서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진료실로 들어서는 진중한 눈빛의 사내를 보고 조의원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백유성 그놈은 진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단 한 번의 실패도 겪어보지 못했다. 흠결 없는 지금의 성과가 그놈을 더 대단해 보이도록 하고 있지. 하지만 실패를 겪어본다면 뭔가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다.'
음흉한 속내와는 다르게 조의원은 척마대주를 깍듯하게 모셨다.
***
무림맹에 가장 강한 무력부대를 꼽는다면 사람들은 주저 없이 무림맹주 직속인 척마대를 꼽는다.
오직 마를 척결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대외 활동도 삼가하고 자기 무위를 높이는데 열중하는 대원들.
척마대는 개개인이 절정 고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들의 대주 정립은 초절정의 고수였다.
초절정 고수라고 모두가 같은 경지에 이르러 있는 것은 아니다.
오 년 전, 이미 초절정의 끝자락에 이르러 이 넓은 무림에서도 몇 없는 화경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 여겨지는 사내가 바로 정립이었다.
"오랜만에 찾아주셨군요, 대주님. 폐관을 끝내신 것입니까?"
정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오늘 막 끝냈소. 조의원도 정정하시군."
조의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심스럽습니다만, 진료의 일부이니 묻지 않을 수 없군요. 폐관 수련의 성취는 있으셨습니까?"
정립음 침음성을 흘렸다.
"아니오. 깨달음을 얻지 못했소."
"이런... 안타까운 일입니다. 무림의 영웅께서..."
"됐소. 다 내가 부족한 탓이지. 더 버티기 힘들어 온 것이니 전에 말해주신 강력한 진통제를 부탁드리겠소."
온몸의 장기에 악성 종양이 퍼져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정립은 끝없이 화경의 경지에 도전해 왔다.
깨달음을 얻어 화경에 이르면 환골탈태를 이룰 수 있고 온몸이 회복됨은 물론 수명까지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끝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약간의 통증과 함께 모든 장기 기능이 서서히 저하되기 시작하더니 최근에 이르러 극심한 통증이 찾아와 그의 수련까지 방해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조급한 상황에서 끝내 찾아오지 않는구나. 바른 몸과 정신으로 끝없이 정진해도 얻을까 말까 한 것을 이런 악조건에서 얻을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지.'
정립은 몇 년 전, 낙양의방을 찾아와 악성 종양이 온몸의 장기에 퍼졌다는 진단을 받고 마지막 도전으로 폐관 수련에 들었다.
그러나 결국 보기 좋게 실패하고 통증을 완화시키는 강력한 진통제를 얻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강력한 진통제를 먹으면 통증을 완화시킬 수 있으나 감각이 교란되어 깨달음을 얻는데는 오히려 방해된다. 그러나 나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적절한 후임 척마대주를 선임하고 뒤를 부탁하는 것이 내 마지막 소임이다.'
조의원은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그에게 영웅의 기세를 보았으나, 결국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데리고 있어도 도움받을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백유성에게 보내서 진통제를 처방하든 다른 치료를 시도하게 하든 해야겠다. 자기가 맡은 환자가 죽으면 뭔가 약점을 노출할지도 모르지.'
계산을 끝낸 조의원이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수십 년 동안 의원의 길을 걸어온 자로서 직접 대주님을 치료할 수 없어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그러나 미약한 희망이 있어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희망... 말이오?"
"그렇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 얼마 전 들어온 의원 한 명이 심장이 멈춘 사람을 살려낸 일이 있었습니다."
"...!"
"신의라 불러 마땅한 솜씨였지요. 나이는 어려도 그자는 저보다 실력이 훨씬 뛰어나니 뭔가 다른 방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도대체 누구요?"
"백유성이라는 의원으로 이 의방의 제 십 일 진료실에 있습니다. 다만 실력이 부족해 제 환자를 다른 의원에게 권해야 하는 심정이 참담하니 제 이야기는 백의원에게 하지 말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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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원님, 방금 백의원이 보던 환자가 죽었답니다요. 산에서 실족한 약초꾼인데 몇 번 백의원에게 치료받았던 자입니다요."
진료실로 슬쩍 들어와 털어놓은 하인의 말에 조의원은 신경질적으로 손짓했다.
"그게 대체 어쨌다는 말인가?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나가게."
"아니, 저는 그냥 전에 알려달라고 하셔서... 그럼 일 보십시오."
조의원의 신경질적인 태도에 머쓱한 하인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전에는 그런 거 있으면 꼭 좀 알려달라더니. 괴팍한 노인네 같으니라고.'
하인이 속으로 무슨 욕을 하든 조의원은 낮은 탁자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죽을 거면 그때 척마대주가 죽었어야 했는데 그깟 약초꾼 하나 죽은 걸로 뭐가 바뀌겠나.'
조의원은 몰락했다.
아니, 몰락하는 중이라고 해야 하나.
이대로 아무 변화 없이 시간이 더 흐른다면 확실하게 몰락할 것이다.
조의원과 척마대주의 일이 낙양 의방을 넘어 인근 도시에 널리 퍼진 후다.
'평생을 걸쳐 쌓아온 내 명성이 이렇게 무너지다니... 이게 다 백유성 그놈 때문이다. 그놈이 의방에 들어온 후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어.'
아무리 초절정 고수의 기세 때문이라지만, 그곳에 있는 많은 사람이 조의원의 추한 모습을 목격했다.
의술 실력이 어디 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의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실력만 보고 온 것이 아니지 않은가.
당장 실력으로 따지면 양의원이 더 낫고 이제는 백유성에게 밀렸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절대다수였다.
그를 찾는 환자의 수는 확연히 줄었다.
아직 찾아오는 옛 단골들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존경심을 내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하루하루가 죽을 맛이다.
그는 진료시간이 끝나자마자 자기 집으로 향했다.
새로 들였던 애첩은 약삭빠르게 이별을 통보한 지 오래였다.
그를 맞아주는 사람은 오랜 조강지처 뿐이었다.
조의원의 처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돌아오는 그의 모습을 보고 대화를 청했다.
"당신, 차라리 휴무마다 빈민가로 가서 의료 봉사라도 하는 게 어때요?"
"의료 봉사?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가난해서 의방을 찾지 못하는 환자들이 빈민가에 많다고 해요. 그들에게 의술을 베풀면서 다시 명성을 회복해 나가는 게 어떠신가 해서요. 당신 실력 있잖아요."
"의료봉사라... 가끔 그러는 게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가만,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소?"
"..."
말을 잇지 못하는 처를 보며 조의원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결국 추궁 끝에 요즘 백유성이 그런 일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조의원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아니, 나보고 그놈을 따라 하란 말이오?!"
"좋은 의도로 말씀드린 거니 고깝게 듣지 말아 주세요. 낙양 사람들 사이에 그 일이 널리 퍼져서 백의원을 아주 좋게 보는 사람들이 많대요."
"듣기 싫소! 그놈을 따라 해서 명성을 회복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소!"
처는 조의원이 다시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으로 말을 꺼낸 것이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게 백유성 탓이라 여기고 있는 조의원은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았다.
'이 방법은 쓰지 않으려 했건만. 그놈만 없으면 난 다시 일어설 수 있다!'
***
낙양 외곽에 허름한 객잔이 하나 있다.
대도시 낙양으로 오가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기에 장사는 제법 잘 된다고 할 수 있었다.
그곳의 주인 오자성은 사십 대 남자로, 주위 사람들은 그가 낭인 생활을 청산하고 모은 돈으로 자성객잔을 차린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오자성의 진정한 정체를 아는 한 노인이 자성객잔을 방문했다.
오자성이 얼른 달려가 노인을 맞이했다.
"조의원님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조용한 곳에서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네."
굳은 조의원의 표정을 보고, 덩달아 오자성의 표정도 굳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오자성은 조의원을 밀실로 안내했다.
창도 없고 문도 단단히 닫혀 있어 누가 엿들을 만한 여지가 전혀 없는 장소였다.
조의원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먼저 하나 묻고 싶네. 약속은 아직도 유효한가?"
"...물론입니다."
"다행이네.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겠네. 자네도 요즘 나에 대한 소문을 들었겠지?"
"..."
요즘 조의원에 대해 도는 소문은 좋지 못하다.
같은 낙양 의방 내 의원을 시기하여 수작을 부리다가 척마대주에게 큰 봉변을 당했다는 소문을 그가 듣지 못했을 리 없다.
오자성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조의원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한 사람을 죽여주게."
오자성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과거 조의원에게 큰 빚을 진 적이 있다.
살문의 살수였던 시절, 정파 무인 한 명을 암습하고 도망가던 중 추격자들에게 큰 상처를 입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한 민가로 숨어들었다.
쉽게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그는 어쩔 수 없이 숨어든 그곳이 자기 무덤이 될 거로 생각했다.
마침 그 집은 조의원이 머물던 곳이었다.
무슨 생각인지 오자성과 차분히 대화를 나눈 조의원은 그를 치료해주었고, 회복 중인 그를 찾아다니던 정파 무인들에게 둘러대고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오자성이 조의원의 집에 숨어 치료받았던 기간은 약 세달로, 그 기간 동안 정파의 추격 뿐 아니라 살문과의 연까지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있었다.
정파에서 기어이 살문의 본거지를 찾아내 멸문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마침 상위 암살자로 승진하여 통제용 독을 복용하지 않았던 것도 운이 따랐다.
얼떨결에 오자성은 자유의 몸이 되었고, 조의원은 그를 구해 준 대가로 한 가지를 요청했다.
마침 오자성이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딱 한 명, 죽이고 싶은 자가 있을 때 말씀해주시기로 하셨지요. 제가 죽여드리겠습니다. 누굽니까? 척마대주입니까 아니면 백유성입니까? 미리 말씀드리면 척마대주는 제가 목숨을 걸어도 성공 확률은 채 일할도 되지 못할 겁니다."
"그럼 백유성이 목표라면?"
"구할입니다."
조의원이 의아한 듯 물었다.
"절정 고수도 암살에 성공했었던 자네가 구할? 십할이 아니라?"
"저는 백유성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습니다.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는 법이지요. 조사가 필요합니다."
"그건 알아서 하게. 한 달 안에 가능하겠나?"
"...한 달 후에 저와 백유성 둘 중 하나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조의원은 만족하며 자성객잔을 떠났다.
'양의원에게 쓰려고 충동적으로 갈았던 칼을 이제야 써먹게 되는구나.'
10년 전에도 조의원은 자기보다 어린 양의원에게 밀려나고 지독한 열등감에 휩싸인 적이 있다.
그때는 머지않아 이성을 되찾았고 다른 활로를 모색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모든 게 끝날 판이었다.
이미 분노에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된 조의원이다.
조의원이 다녀간 후.
오자성은 곧 병을 핑계로 객잔 운영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두었다.
그는 며칠간 변장하고 낙양 의방에 가 백유성에게 진료를 받으며 무위를 가늠해 보기도 했고, 우연을 가장해 유성의 뒤를 쫓기도 했다.
그러나 섣불리 손을 쓰지는 않았다.
이런 활동은 변수를 최대한 차단하여 성공률을 십할에 가깝게 올리기 위함이었다.
살문의 살수 시절, 일류 무사임에도 절정 고수를 암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철저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자성은 이번에도 신중하게 접근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개방도들이 계속 주위에 포진해 있구나.'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개방도들이 유성 주위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유성을 죽이더라도 자신은 오래 살고 싶은 오자성은 더 신중하게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
유성은 약방 내의 약재 담당자에게 묻기도 하고 낙양에서 가장 큰 약재상에 찾아가 화령초에 대해 조사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초산이 캔 화령초는 40년이 조금 넘는 정도구나. 이를 어쩐다. 이거라도 전해 줘야 할까?'
소림사에서 대대적으로 수배를 내린 덕분에 50년 산 화령초가 필수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유성은 신성력을 가늠해 보았다.
진은선의 활약으로 상승폭을 조금 더 키웠기 때문에 매일 증가하는 양보다 넉넉히 가산하여 계산해보았다.
역시 무리다.
소림사가 말한 시일까지 촉진 스킬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안타깝지만 마음을 전하는 것으로 마무리 할 수밖에 없겠구나.'
결국 유성은 휴무일에 빈민가 진료를 쉬고 소림사로 향했다.
가슴에는 초산이 남겨 준 화령초를 품은 채였다.
소림사로 향하는 일반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이에 끼어 소실봉으로 향하던 유성은 옆에 바짝 다가온 남자의 기척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계속 걸어가시면서 이야기하시지요. 저는 개방에서 나왔습니다."
유성이 힐끗 보니 그는 얼굴도 깨끗하고 좋은 비단옷을 입어 도저히 개방도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말끔한 모습이 부잣집 자제로 보일 지경이었다.
"정말 개방도 맞습니까?"
"사정이 있어 변장을 좀 했습니다. 알려드릴 내용이 있거든요."
슬쩍 상의를 들춘 남자의 허리춤에 3개의 새끼줄 매듭이 보였다.
일단 개방도의 표식은 맞다.
유성은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섞여 걸어가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려주실 내용이 뭡니까?"
"요 며칠간 계속 복장을 바꿔가며 의원님 주위를 맴도는 놈이 하나 있는데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는 항상 유성의 사각에서 관찰하는 오자성의 기술 때문이었으나 기감도 사용할 수 없고 뒤통수에 눈도 달리지 않은 유성이 알 도리가 없었다.
"몰랐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저희도 파악 중에 있습니다. 무위도 상당하고 워낙 신출귀몰해서요. 그런데 좋은 의도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최악의 경우 살수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가 의원님의 동선을 파악하는 느낌이니 항상 조심하십시오."
"정보는 감사합니다만 왜 저에게 이런 걸 알려주는 겁니까?"
유성의 물음에 개방도는 생각했다.
'왔다!'
그는 철저히 교육받은 대로 대사를 내뱉었다.
중요한 내용을 하나도 빼먹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목숨을 바쳐 의원님을 철저히 보호하라는 철권개 분타주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분타주님은 소운님을 따르고 있죠."
개방도의 정성이 통하여 유성은 상황 파악을 끝냈다.
'소운이 개방에서 잘 자리 잡았나 보구나. 다행이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운에게 제가 따로 고맙다고 말해야겠군요. 철권개 분타주님이 도와주신 점도 꼭 언급하겠습니다."
개방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서렸다.
"철권개 분타주님이 무공을 익힌 개방의 제자들을 주위에 배치해 두었으니 너무 큰 걱정은 마십시오."
"요즘 제 주위에 개방도들이 많이 보이더니 그런 이유였군요."
유성은 곧 그와 헤어졌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백가장에서 내게 살수를 보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가문에서 나온 것으로 끝인 인연. 그렇다면 조의원 아니면 팽지산과 진영호일까?'
무공을 잃은 몸으로 원한을 사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무림인과 원한을 쌓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했다.
만약 주루에서 있었던 일로 팽지산이나 진영호가 사주한 것이라면 속이 얼마나 꼬인 놈들인가 싶다.
'일단 그들은 확률이 낮다고 봐야겠지. 사실상 내가 그들을 직접 자극한 적은 없으니. 가능성이 큰 건 조의원 쪽일까?'
복잡한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유성은 소림사에 도착했다.
문지기 승려가 용건을 물었다.
"저는 낙양 의방의 의원 백유성이라고 합니다. 방장님께 약초꾼 초산의 유품을 전해드리러 왔다고 말씀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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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은 태상문주 자리로 물러나 요양하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유성 덕분에 치매를 치료했으나, 과거에 그녀는 치매를 노망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특히 무림인들은 기를 쓰고 피했는데, 유성을 비롯한 일부 일반인들만 가끔 일 때문에 만나고는 했다.
부끄러웠으니까.
정연은 노망 증상이 나타났을 때부터 소옥과 방혁을 두고 후계 문제로 계속 지켜보았다.
방혁의 추측과 달리 소옥이 제자가 된 후에도 그에게는 기회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소옥이 하오문을 더 밝은 곳으로 이끌어 주겠구나.
정연은 그녀와 더 닮은 소옥에게 점차 마음이 기울었다.
단순히 아들과 꼭 닮았다는 이유 하나로, 능력 없는 방혁이 문주가 되면, 하오문은 지금처럼 정사지간으로도 남지 못할 것 같았다.
돈만 많이 주면 강호의 안위 따위는 상관없이 아무에게나 정보를 팔아먹는 사파로 전락할 것 같았다.
내심 소옥에게 문파를 물려주겠다고 마음을 굳힌 후에도 정연은 쉽게 방혁을 내치지 못했다.
‘방혁이 내 아들의 외모와 꼭 닮아 너무 미련을 가졌구나. 나도 이제 늙었다.
그 잘못된 판단이 하오문에 큰 위기를 초래할 뻔했다.
장로들 몇 명도 수상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유성의 도움이 없었다면 필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태상문주로 물러나기 전 마지막으로 처리할 일은 방혁과 결탁한 자들을 모두 밝혀내는 거다. 하오문을 깨끗한 상태로 소옥에게 물려줘야겠다.
처음에 말을 꺼냈을 때 소옥이 그럴 수 없다고 펄쩍 뛰었으나.
“병은 치료되었는데 몇몇 중요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이런 상태로는 힘들단다. 내가 도와줄 테니 한번 잘 이끌어보거라.”
그렇게 최연소 하오문주가 탄생했다.
물론 하오문주의 역사상 최연소로, 소옥은 유성보다는 열 두 살이 많았다.
띠동갑녀가 온화하게 웃었다.
“오늘 저희를 도와주신다고 아까운 휴무일을 그대로 날리셔서 어떡해요? 마침 이제 낙양 의방의 주인도 제가 되었으니 며칠 푹 쉴 수 있도록 휴무를 드릴게요. 어떠세요?”
휴무일에는 빈민가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다.
빈민가 사람들은 많은 신성력을 올려 준다.
많은 신성력은….
꼬리를 이어지던 생각은 한 얼굴이 떠오르며 중단되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굳이 그러시지 않으셔도 돼요. 보수는 그대로 지급할게요.”
“아닙니다.”
많은 일이 있었고 이미 밤이 되었다.
제갈영영에게 아무 말도 없이 휴무를 가진다면….
‘난리 날지도.
의방 휴무처럼 편의를 봐주는 것뿐만 아니라 소옥은 계속 사례를 하고 싶어 했다.
유성은 마침 그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떠올랐다.
“그럼 천운석을 구하는데 도움받을 수 있을까요?”
“천운석이요? 그런 것도 모으시나요?”
“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 개인이 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요.”
“맡겨 주세요. 저희도 보유한 천운석은 없지만 전국에 수배 해볼게요.”
“아, 혹시 천운석을 제련할 만한 솜씨 좋은 대장장이도 알고 계시면 부탁드립니다.”
***
하오문에서 일을 모두 마친 후.
유성은 정립과 함께 달밤 아래를 걸었다.
“잠은 어디서 주무십니까?”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객잔에서 자고 날이 밝으면 무림맹으로 가 짐을 챙기려고 합니다.”
유성은 정립의 의리에 감사하면서도 미안했다.
생각해 보니 그를 도와준다고 무림맹을 그만두며 검 하나만 달랑 들고 나왔지 않은가.
척마대주 정도면 무림맹에서도 좋은 거처에 머물 텐데 그런 곳을 놔두고 무소속으로 객잔에 머물러야 한다니.
심심하지 않도록 술친구라도 해 줘야겠다.
“한 잔 하자고 하신 거, 오늘 하시겠습니까?”
“전 좋습니다만 날이 너무 늦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내일 예정대로 진료도 이어 하신다면서요.”
“이 정도는 끄덕 없습니다.”
정립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교롭게도 유성이 아는 주루는 객잔과 주루를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다.
“공자님, 또 와주셨군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어느새 유성의 얼굴을 외운 점소이가 자연스럽게 3층으로 이끌었다.
“자주 오시나 봅니다.”
“아닙니다. 이제 세 번째인데 점소이가 기억력이 좋네요.”
“백의원님이 워낙 인물이 훤하셔서 그런가 보군요.”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오늘 정립의 색다른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유성은 자리를 잡고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립님은 그럼 무림맹에 복귀하시기 전까지 뭘 하실지 생각해 두신 게 있으십니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하오문의 일이 해결 되었으나 무림맹은 여전히 고리타분 한 곳.
눈 가리기 식으로 정립이 그만두는 척, 하오문의 일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할 수 없을 거다.
그는 몇 달간 무림맹에 복귀하지 않을 생각이다.
“혹시 그동안 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아니요, 무림맹 의각으로 들어갈 테니 딱히 도움 요청드릴 건 없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하고 싶은 걸 하시지요. 휴가 가보신 적도 없으시다면서요.”
“그럼 생각해 둔 게 있기는 합니다.”
“그게 뭡니까?”
유성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긴 정립이 하고 싶은 게 뭘까 궁금했다.
‘정말 낭인 생활을 할 건 아닐 테고.
정립이 밝힌 계획은 역시 그 다웠다.
“비무행을 떠날까 합니다. 정파의 고수들을 찾아다니면서 말입니다.”
정파의 고수란 화경의 고수들을 뜻한다.
그동안 무림맹주에게 무공 지도를 받은 것 외에 정립은 화경의 고수와 겨뤄본 적이 없다.
마침 무림맹에 묶여 있을 이유도 없으니, 경지를 더 높이기 위해 화경의 고수들을 찾아다닐 좋은 기회였다.
“강호인들이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만 정립님은 무공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시군요.”
그는 술을 한잔 들이켰다.
“…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 보시겠습니까?”
유성은 타인의 과거사를 캐묻는 편은 아니다.
먼저 털어놓지 않으면 묻지 않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상대가 원해서 들려준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화경의 고수는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을까?
그만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을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던 유성은.
“…그렇게 마교인들에게 가족을 모두 잃었습니다.”
“….”
“낭인이 되어서도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어떻게든 실력을 키워서 복수하자. 척마대에 지원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정립이 마교에 대해 큰 원한을 가진 이유.
그리고 화경이라는, 모든 강호인들이 꿈꾸는 경지에 도달하고도 끝없이 발전하려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응원하겠습니다.”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빌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가 가라앉았군요. 백의원님은 요즘 어떻습니까. 만나시는 여자분은 있습니까?”
이야기가 끝난 후 그는 화제를 돌렸다.
‘갑자기 만나는 여자는 왜?
갑작스럽게 이야기를 돌리기에 적절한 화제는 아닌 것 같지만.
“딱히 만나는 분은 없습니다.”
정립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
뭘 이해했다는지 모르겠으나 유성은 새벽까지 정립과 술을 마시고 귀가했다.
내공으로 주독을 배출하지 않은 정립마저 꽤 취할 정도로 많이 마셨지만, 유성은 전혀 취하지 않았다.
***
무림맹 의각이 곧 정식으로 운영될 때가 다가온다.
유성의 낙양 의방 생활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소리다.
앞으로 그에게 진료 받지 못하게 된다는 소리에 사람들의 줄은 그 어느 때보다 길었다.
“이제 그만두신다니 너무 아쉽습니다. 백의원님 덕분에 그동안 아무 걱정 없었는데요.”
누군가는 유성이 떠나는 것을 아쉬워 했고.
“좋은 곳으로 가신다니 너무 잘됐습니다. 의원님의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빌겠습니다.”
누군가는 유성의 앞날을 축복해주었다.
그리고.
“아이고, 우리 백의원. 이제 마지막 날인데 한잔 해야지? 물론 내가 사겠네. 혹시 기루도 좋아하나? 저기 매화루에 아주 미색이 뛰어난 예기가 새로 왔다는데.”
누군가는 여전히 유성에게 줄을 대기 바빴다.
손을 싹싹 비비는 사람은 물론 차의원이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양의원님께 초대를 받아서요.”
“양의원님이? 혹시 나도 가도 되겠나?”
“그건 좀 힘들겠습니다.”
“아, 왜? 전에는 우리 셋이 오붓하게 마셨지 않은가? 아니면 내가 양의원님께 한번 말씀드려보겠네. 아마 거절하지 않으실걸세.”
“…그러십시오.”
유성은 진지한 표정으로 오늘 꼭 시간을 내주길 바라던 양의원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하기를 원치 않는 기색이었다.
확실하지 않아 차의원의 일은 양의원에게 맡겼다.
잠시 후, 양의원에게 다녀온다던 차의원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대신 손에 쟁반을 하나 든 채였다.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안 된다는군. 그럼 이거라도 한잔 하게.”
유성은 약재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탕약을 받아들였다.
“이게 뭡니까?”
“해주탕이네. 전에 나 혼자 먼저 취해서 자네를 못 챙긴 게 마음에 걸려서 준비했네. 오늘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마셔도 될걸세.”
“이런 것까지 준비하셨습니까?”
“당연히 내가 챙겨야지. 아 참, 내 급여에서 부담하는 거니 참고하게.”
차의원이 생색을 내며 숙취 해소용 탕약을 챙겨 주었다.
취하지 않는 유성은 딱히 필요는 없으나 마음만은 고마워 감사히 받았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게. 무림맹에 갔다고 날 잊으면 절대 안 되네. 자주 보세나.”
유성은 그렇게 낙양 의방에서 생활을 마무리했다.
미리 대부분의 짐을 옮겨두었기에 챙겨 갈 짐은 침통과 작은 보따리 하나뿐이었다.
밖으로 나가자 양의원이 이미 나와서 유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유성은 양의원과 함께 커다란 객잔의 별채에서 노인 한 명과 젊은 여자 한 명을 만나게 되었다.
노인은 눈빛이 맑았으나 얼굴이 꽤 수척했다.
최근에 잠을 잘 자지 못한 듯했다.
젊은 여자는 특이하게 붉은 천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제외한 부분만 봐도 대단한 미녀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반갑소. 내가 지헌이의 스승 되는 사람이오. 여기는 내 손녀라오.”
의선이 유성 앞에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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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양의원이 그런 말을 했다.
종종 의선과 편지를 주고받을 때 유성에 대한 내용을 쓴다고.
이번에는 영술에 관해서도 쓰겠다는 말을 했는데.
그 이유 때문일까?
직접 의선이 찾아온 것이다.
눈을 가린 손녀와 함께.
“반갑습니다. 명성이 자자하신 의선님을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초대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초대는 무슨, 내가 백의원을 찾아온 것이라오. 지헌이가 미리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오. 내가 사람들의 이목을 최대한 피하고자 그러라고 한 것이니 너그럽게 용서하시오.”
양의원을 힐끗 보자 그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는 내내 무슨 일인지 말해주지 않더니 스승의 명이었나보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말씀 편하게 해주셔도 됩니다. 제가 한참 어린데요.”
“그럼 편히 말 하겠네. 연화야. 너도 인사드려야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백유성 의원이다.”
안대를 쓴 의선의 손녀가 입을 열었다.
작은 입술에서 모기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 소녀 임연화라 하옵니다. 사정이 있어 안대를 쓰고 있으니 이해해주세요.”
“반갑습니다.”
임연화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허허, 연화가 사람을 거의 만나 보지 못해 쑥스러워 그렇다네.”
얼핏 보니 임연화의 양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고작 한마디 인사만 나누었을 뿐인데 말이다.
“아, 괜찮습니다.”
“그럼 일 끝나고 시장할 텐데 식사라도 하며 이야기하지.”
곧 객잔의 하인들이 별채로 음식을 가져왔다.
온갖 산해진미가 커다란 탁자 위를 가득 채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네 명이 먹기에는 과해 보이지만 얻어먹는 처지에서 이것저것 따질 필요는 없다.
“들게.”
식사가 시작되었다.
유성은 음식을 먹으며 의선이 왜 자기를 찾아왔을까 추리해 보았다.
‘임연화라. 남궁유린의 오빠와 비슷하게 눈을 다친 건가? 그렇다면 내가 눈을 치료해 주길 바랄지도 모르지. 의선이 은거했다는 이유가 손녀가 다쳐서일지도 모르고.
영술이라는 신비한 힘으로 치료한다는 유성의 말을 듣고, 양의원이 큰 관심을 가졌다.
그 일로 의선이 유성을 만나기 위해 제자가 머무는 낙양까지 찾아왔다고 하면 어느 정도 이해된다.
그런데.
‘앞을 보지도 못할 텐데 어떻게 저렇게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지?
임연화가 마치 앞이 보이는 사람처럼 젓가락을 들어 자연스럽게 음식을 집어먹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한 번에 목표물을 집어 입으로 가져간다.
우물우물.
우물우물.
양 볼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복스럽게 잘도 먹었다.
그 모습이 신기해 유성이 자꾸 힐끗거렸다.
“연화는 선천적으로 기감이 아주 뛰어나다네. 다른 사람들도 신기해하곤 했지.”
의선이 유성의 궁금증을 일부 해소해주었다.
“그렇군요.”
그래도 신기한 것은 신기한 것이다.
무인이 눈을 가리고 기감으로 음식의 형체라도 파악하려면 최소 절정 고수다.
고작 스물이나 되어 보이는 여자가 그런 경지 일 확률은 극히 낮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임연화는 무공을 익힌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평범한 일반인 처럼 보이는 모습.
그녀가 타고난 기감이 얼마나 예민해야 가능할지 유성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삐끗—
“아….”
임연화의 젓가락질이 빗나갔다.
“허허, 사람들이 쳐다보면 부끄럼 타는 건 여전하구나.”
그렇게 말한 의선은 유성에게도 말했다.
“백의원이 이해하게. 남들이 쳐다보는 걸 알면 항상 이렇게 부끄러워한다네.”
의선의 말을 듣고 유성이 그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실수한 듯했다.
“이해라고 할 게 있겠습니까? 잘 드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연화는 나와 단둘이 산속에서 오래 살았네. 이런 맛있는 음식을 거의 먹어보지 못했다네.”
어쩐지 네 명이 먹는 것치고는 과하게 많은 음식을 시켰나 싶었더니, 손녀를 위해서 그런 듯하다.
우물우물.
우물.
….
신경 쓰이는지 연화가 음식을 씹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유성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밥 먹을 때는 건드리는 거 아니라던데.
“그나저나 영술을 이용한 의술이라니, 칠십 평생 처음 들어 본 방법이네. 백의원 자네가 혼자 알아낸 방법이라지? 정말 대단하네.”
의선이 시기적절하게 손녀에게 향하는 관심을 끊어 주었다.
유성도 임연화가 맛있게 식사를 즐기도록 의선과 대화하는데 집중했다.
“타고나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저는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의선님이야말로 의술 하나로 온 강호인들의 존경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스승님이 나를 거둬주시고 의선문에서 수대에 걸쳐 전해 내려오는 의술을 전수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이런 과분한 명성을 얻지 못했을걸세. 나야말로 운이 좋았지. 자네는 기존에 없던 한 분야를 개척해 낸 것이니 가히 대종사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서로 얼굴에 금칠을 하는 사이, 양의원은 스승을 방해하지 않기 위함인지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고,
우물우물.
우물우물.
임연화는 시선이 쏠리지 않는 사이 다시 속도를 높여 식사를 즐겼다.
드디어 식사가 모두 끝났다.
유성은 의선이 무슨 말을 할지 조용히 기다렸다.
손녀에 관해서든, 아니든 분명 용건이 있어 찾아왔을 테니까.
“백의원, 예상하겠지만 나는 한 가지 부탁하러 찾아왔네. 다만 그 전에, 괜찮다면 내가 자네를 살펴봐도 되겠나? 지헌이에게 듣기로 단전을 다쳤다면서?”
그가 먼저 호의를 베풀기로 한 모양이다.
“아, 제가 부탁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낙양 의방에 들어오고 유성은 양의원에게 단전의 치료 가능성을 물어본 적 있다.
그때 양의원은 그 누구도 유성의 단전을 치료하지 못할 거라 말했다. 하지만 의선이 봐준다는데 사양하고 싶지 않았다.
신성력을 열심히 모으고 있으나 단전 치료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곧바로 치료할 방법이 있다면 더 좋은 일이다.
최상급 요상단이라는 대환단도 하나 얻어둔 것이 있으니.
하인들이 음식을 모두 치운 후, 안채에 간식거리만 조금 준비해주었다.
임연화를 위한 배려다.
안채에 자리를 잡고 의선은 유성의 맥을 짚었다.
머지 않아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가 유성의 손목을 내려놓고 머뭇거렸다.
“저는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해주십시오. 어느 정도 들어서 각오하는 부분입니다.”
“음…, 지헌이가 말한 대로일세. 나로서는 이미 손 쓸 방법이 없겠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었는데요. 살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쉽지만 의선도 단전을 치료하는 건 무리라고 한다.
이제 믿을 건 정말 신성력을 쌓는 방법 뿐이다.
아마 신성력이 없었다면 절망스러웠겠지만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늦지 않게 치료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
“자네가 무림맹 의각에서 일하게 되었다지?”
의선이 갑자기 그렇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낙양 의방을 그만두었으니 며칠 후면 무림맹에서 일하게 됩니다.”
“….”
왜 그런 걸 물었을까?
의아해하는 유성에게 의선이 말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자네 단전의 상태를 보니 의심스러운 부분이 하나 있네. 그러나 말해주자니 괜히 잘못된 정보를 전하게 될까 두렵고, 말해주지 않자니 자네가 중요한 정보를 모르고 넘어가게 될까 두렵네.”
의선의 말에 양의원이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은 그제야 양의원도 예전부터 자기 단전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양의원도 의선과 같은 생각으로 비밀에 붙였나보구나.
유성은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결정했다.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 들어 보고 잘못된 정보인지 알아보는 편이 수고스럽더라도 훨씬 낫다.
“그렇다면 듣겠습니다. 다 제가 감당할 테니 말씀해주십시오.”
단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지, 유성은 백가장 시절이 떠올랐다.
유성은 절정으로 향하는 실마리를 잡고 폐관 수련 중, 손쉽게 절정의 벽을 넘었다.
누군가는 평생을 벽에 닿지도 못하고, 누군가는 평생을 벽에 가로막혀 절망한다.
소수는 벽을 뛰어넘어 초절정의 벽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유성과 같은 타고난 천재에게는 절정의 벽은 큰 장애물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
물론 큰 장애물은 아니더라도 무공을 본격적으로 익힌지 2년 만에 절정에 도달한 것은 대단한 성과.
유성이 기쁨에 가득 차 절정 고수가 할 수 있는 여러 기예를 시험하던 중, 그 일이 발생했다.
별다른 전조도 없이 단전이 깨져 버린 것이다.
‘분명 무리한 내공 운용도 없는데 말이지.
많지는 않았으나 열심히 모았던 내공이 샅샅이 흩어지던 경험은 끔찍했다.
사기 특성에 힘입어 순조롭게 힘을 키워가던 중 발생한 사고.
그 당시도, 그리고 지금도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다.
결국.
절정 고수가 되어 나오겠다 호언장담을 했으나.
무공을 잃고 초라하게 폐관을 마친 유성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잔뜩 기대하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무공 말고는 그들의 관심과 사랑을 차지할 방법이 없던 사생아는 180도 바뀐 그들의 태도, 그리고 형의 잔인한 눈빛에 가문을 스스로 나왔다.
‘어차피 진짜 부모도 아니라 큰 정을 느낀 적은 없지만 잘 대해주는 모습에 평생 백가장의 아들로 살아갈 줄 알았는데.
그런 유성에게, 의선이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한다.
의선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림맹 소속이 되었으니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 되겠지. 그럼 이야기해주겠네.
나는 십 년 전쯤, 한 가문에서 당하는 사람도 모르게 단전을 산산이 깨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네. 꼭 자네 단전처럼 말이야.”
“….”
유성의 눈빛이 강렬하게 타올랐다.
그렇다면 누군가 수작을 부려 고의로 자기 단전을 깨트렸을 가능성도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절대 그들을 가만 둘 생각이 없었다.
의선이 말을 이었다.
“사천당문의 파단독. 그 독에 당한 상대는 단전이 산산조각 나 회복할 수 없게 된다더군.”
유성은 의선과 양의원이 이 사실을 말해주는데 고민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은혜와 원한은 절대 잊지 않는다는, 오대 세가중 가장 악독한 손속을 지닌 사천당가가 관련된 이야기였다.
‘하지만 난 만독불침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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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만독불침].
백독불침, 천독불침의 최상위 특성.
백독불침은 일 백가지 독에 면역.
천독불침은 일 천가지 독에 면역.
그렇다면 만독불침은?
‘일 만가지 독이 아니야. 처음 특성을 선택할 때 간단한 설명이 적혀 있었지.
답은 ‘모든 독에 면역’이다.
독의 종류가 일만가지가 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그냥 으레 쓰여 온 용어라 그대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름은 만독불침이라고 붙여놓았지만 유성은 이론상 모든 독에 면역이라는 거다.
즉.
‘나는 독에 당하지 않는 몸. 파단독은 아니야. 의선이 잘못 짚었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의선은 유성이 만독불침이라는 사실을 모르니 사천당가를 의심한 듯하지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 가능성도 열어두겠습니다.”
“아니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
유성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무인이었던 사람이 단전을 치료할 수 없을 거라는 말.
그리고 오대 세가중 하나가 엮여 있을지 모른다는 말에 자연히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모두 유성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심지어 임연화마저도 입안에 든 간식을 씹지 못했다.
“분위기가 약간 이상해졌군요. 저는 정말 괜찮으니 이제 의선님이 부탁하려 하신 것이 무엇인지 들어 보고 싶습니다.”
크게 얻은 건 없지만 상대가 호의를 베풀었으니 유성도 갚아주어야 한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고맙네. 그럼 염치 불구하고 부탁하겠네. 혹시 연화를 살펴줄 수 있겠나? 병명을 알려줄 수는 없지만 자네가 살펴보고 치료할 수 있는지 알려주면 좋겠네.”
올 것이 왔구나.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혹시 눈 쪽 문제라면 안대를 벗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살펴보겠습니다.”
듣기로 안구가 칼에 베인 남궁유현과 달리 임연화의 눈은 치유 스킬로 해결될 수준일 수도 있다.
직접 봐야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연화의 눈은 아프지 않네. 다른 사정이 있어 가리고 있을 뿐이네.”
“아,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다른 사정이 뭔지 내심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단순히 유성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한 것이면 다른 방법도 있을 텐데.
유성은 임연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간식거리를 살며시 내려놓고,
꿀꺽.
입에 든 것을 삼킨 채 무릎을 꿇고 다소곳하게 앉았다.
“임 소저, 그럼 제가 좀 살펴보겠습니다.”
“…네.”
조심스럽게 내민 손목을 잡았다.
산속에서 의선과 살았다더니, 피부는 햇빛을 많이 받지 못한 듯 하얗다.
맥을 짚어 보았으나 특이사항은 없다.
정상인과 다를 바 없다.
‘진맥으로는 특별한 이상은 확인되지 않아. 신성력을 흘려 봐야겠다.
조심스럽게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의선이 원한 것도 영술이라고 둘러댄 신성력으로 임연화를 치료할 수 있는지 여부다.
그렇지 않다면 의선이 굳이 부탁할 필요 없을 테니.
“….”
유성은 임연화의 몸 곳곳을 신중하게 살폈다.
분명 무슨 문제가 있어서 부탁한 것일 텐데 그녀의 몸은 큰 이상이 확인되지 않는다.
남들 다 조금씩 가지고 있는 잔병 뿐이다.
이제 남은 곳은 머리.
신성력을 올려보냈다.
의선이 말한 대로 눈쪽은 아무 이상 없다.
조금 더 위로.
‘이건….
뇌가 은은한 붉은 기운에 잠겨 있다.
언젠가 유성이 느껴본 적 있는 이 느낌은….
‘정신 오염?
버츄얼 판타지 세계에서도 뇌가 붉은 기운에 잠긴, 정신이 오염된 개체들이 있었다.
인외의 존재에게 지배당해 특이한 행동을 하는 개체들.
그런 개체들에게 느껴지는 정신 오염 기운이 임연화의 뇌에서도 감지되다니.
유성이 표정이 심각해졌다.
정신이 오염된 자들은 십중 팔구는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 몰라 치유 스킬을 발동시켜 보았으나.
'역시 꿈쩍도 하지 않는구나.'
지금은 해결할 수 없다.
손을 거둬들였다.
“후….”
진맥을 끝낸 유성에게 의선이 긴장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무슨 병인지 알겠나?”
버츄얼 판타지였다면 설명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모르겠습니다.”
“…그렇구만.”
의선이 크게 실망한 모습이다.
정말 유성의 의술에 기대를 걸었나보다.
임연화 역시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무릎 꿇고 있던 그녀가 상심하자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유성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정신에 작용하는 문제로 보입니다. 맞습니까?”
“마, 맞네! 그런 것도 알 수 있나? 치료는 가능하겠나?”
의선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다급해 보인다.
유성은 물론 정신 오염을 해결해 본 경험이 있다.
미래에 얻게 될 스킬이 그 답이다.
“네, 지금은 힘들지만 제 실력이 더 좋아지면 치료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의선도, 임연화도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만큼 놀랐다는 의미다.
“네, 그러니 조금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물론일세. 정말 고맙네! 고마워!”
의선이 거듭 감사를 표했다.
사정상 주변에 사람도 쓰지 못하고 몸이 축날 정도로 손녀를 돌보고 있었지만, 그는 미래가 없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치료할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말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른다.
‘지헌이의 말을 들어 보아도 백의원이 허튼소리를 할 사람은 절대 아니다.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도 알아차렸고 분명 무언가 가능성을 본 거다. 정말 이런 인재가 나타나 천만다행이다.
강호인들을 상대로 의술을 베푸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다.
은원이 마치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강호인들의 관계.
그들 중 누군가를 치료해 은혜를 입히는 일은 다른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매사 신중했던 의선과 달리 의선의 아들 부부는 강호의 은원을 너무 쉽게 생각했고 누군가를 치료해준 일로 목숨을 잃었다.
손녀 임연화만 세상에 남기고.
그런 불쌍한 손녀가 천형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데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그리고.
“가, 감사해요, 백의원님….”
당사자인 임연화가 느끼는 감사함은 더 컸다.
자신이 가진 천형 때문에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왔다.
의선문의 제자들도 모두 세상으로 내보내 간신히 문파의 명맥만 끊기지 않게 유지했다.
연화는 남들의 시선을 피해야 했고, 매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치료를 받아도 완치가 되지 않고 잠시 증세를 늦출 뿐.
언젠가는 예정된 파멸이 다가오는 삶은 그녀를 견디기 힘들게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가능성이 있다는 말만으로도 그녀는 버틸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몰라 할아버지와 나도 점점 지쳐갔는데…. 이제 나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세상으로 나가 사람들과도 어울리고 싶었고,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러나 현실은 인적 드문 산속에서 날로 수척해져 가는 할아버지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할아버지와 백의원이 이야기를 나눈다.
“길어도 일 년. 그 안에 도와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일 년, 꼭 기억하겠네. 내가 사정이 있어 다시 거처로 돌아가야 하니 연락은 지헌이를 통하면 되겠나?”
“네, 그게 나을 것 같습니다.”
임연화는 안대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유성이 의선과 이야기 나누는 틈을 타 안대를 아주 살짝 내렸다.
이야기중인 백유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분이 백의원님이구나. 나를 치료해주실 분…!
그녀는 백유성의 얼굴을 꼭 담아두었다.
‘만약 몸이 치료된다면….
임연화는 하고 싶은 일이 하나 더 생겼다.
***
양의원과 함께 돌아가는 길.
단촐했던 유성의 작은 보따리가 크게 부풀어 오르고 묵직해졌다.
의선이 전해준 의서들 때문이다.
-영술을 사용하는 자네에게 필요한 물건은 아닐 수 있지만 의술도 열심히 익혔다고 들었네.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처방들을 모아둔 것이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
-제가 이 귀한 것들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아직 손녀분을 치료해드리지도 못했는데요.
-모든 것을 전한 것도 아니니 괜찮네. 그리고 어차피 난 더 이상 사람들을 치료할 여력이 없으니 자네가 좋은 곳에 써 주게.
당연히 유성에게 큰 도움이 된다.
낙양 의방에서도 신성력이 필요한 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에 대한 처방이 달랐다.
신성력이 부족하기에 꼭 필요한 환자들이 아니면 평범한 의술에 의존했다.
그런 상황에서, 의선문의 비법들은 유성도 알차게 써먹을 수 있을 거다.
의선문의 정식 제자 양의원이 질투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그는 역시 대인배였다.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한다.
“정말 고맙네, 백의원.”
“아직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는데요.”
“아닐세. 나는 스승님이 저렇게 기뻐하시는 건 처음 본다네. 그것만으로도 자네에게 참 고마워. 게다가 자네가 헛소리를 할 사람도 아니니 분명 스승님의 문제를 도와줄 수 있을 거라 믿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스승님께 연락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내게 말하게.”
“알겠습니다. 참, 혹시 의각에 의원들을 추가로 뽑는다고 하면 양의원님도 생각있으시지요?”
양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전에 자네에게 진 후로 세상을 떠돌며 더 공부할까 고민했었네. 그런데 이제는 자네 옆에 붙어 있는 게 스승님께 도움이 될 것 같네.”
기꺼이 스승과 유성의 연락책이 될 생각인가 보다.
그가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이 정말 커 보인다.
유성은 모든 정신 오염을 치료할 수 있는 스킬 ‘정화’를 떠올렸다.
‘지금 추세면 1년 안에 얻을 수 있을 거다. 의선도 그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했고. 물론 더 시간이 단축되면 좋겠지만.
낙양 의방 생활보다 훨씬 많은 신성력을 얻을 수 있는, 무림맹 의각 생활이 기대된다.
그날 해시 무렵.
유성은 다음 스킬을 각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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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와 치유의 여신 가이아.
그녀를 모시는 신전의 주 수입원은 몇 가지가 있다.
신실한 신자들에게 헌금을 받거나.
여신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치료 또는 축복을 내려주거나.
모험가들에게 신성력이 깃든 물품을 판매한다.
판매하는 대표적인 물품으로는 성수가 있다.
성수는 마법사들이 트롤의 피를 이용해 제조하는 포션보다 효과가 뛰어나다.
상처 치유시 고통 등 부작용도 없어 인기가 많다.
유성은 한때 신전의 공헌도를 올리기 위해 성수 제작에 몰두한 적이 있다.
수 없이 만들어 봤기에 질릴 만도 하지만 지금은 이 스킬이 너무 반갑다.
[성수 제작]
비록 하급 성수지만 앞으로 유성의 행보에 도움이 될 만한 물품이다.
“신성력이 남을 때마다 성수를 만들어 놔야 해.”
신성력은 서서히 회복된다.
의방에서 근무하는 동안 다 소모하지 못하면 괜히 손해 본 기분이었는데 적절한 신성력 소모처가 생겼다.
조금씩 성수를 만들어 비축한다면 신성력이 다 떨어졌을 때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무림맹을 비웠을 때도 도움이 되고.
“일단 만들어 보자.”
먼저 물을 준비했다.
순수하고 깨끗한 물이면 가장 효과가 좋겠지만 여기서 그 정도를 바라는 건 무리다.
길러둔 물에 해독 스킬을 사용하고 몇차례 걸러낸 후, 소주잔만 한 작은 용기에 담았다.
물 위로 손을 가져다 댄 후.
[성수 제작]
신성력이 주욱 빠져나간다.
투명한 물이 서서히 노랗게 물들더니 마침내 은은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됐다.”
평범하게 치유 스킬을 발동시키는 것보다 효율이 훨씬 나쁘다.
치유 스킬을 열 번 이상 사용할 수 있는 양으로 만들어 낸 것이 고작 이렇게 적은 양의 성수니까.
그런데도 신전에서는 성수 제작에 열을 올렸다.
모험가들이 항상 사제들을 대동하고 다닐 수 없으니 비싸게 팔린다.
여벌 목숨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법이다.
***
유성은 거처를 완전히 무림맹으로 옮겼다.
새 거처에는 작은 마당도 딸려 있어 유성이 아침에 수련하는데 지장도 없는 곳이다.
무림맹 부지가 매우 넓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기존 거처는 하오문의 도움을 받아 처리하기로 했고.
“어서 오십시오, 백의원님. 하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안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전에 시험을 치른 적 있는 의각.
건물만 올라가 있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그럴듯하게 꾸며져 있었다.
환자들이 대기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고, 내부에 약재 보관 장소도 있다.
환자를 입원시키기 위한 공간도 있고, 지금은 한 곳만 열려 있으나 추후에 의원들이 추가되었을 때를 대비한 진료실도 여러 개 마련되어 있다.
의각 운영 담당자가 새로 뽑은 하인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들과 하나 하나 눈을 마주치던 중.
“응…?”
아는 얼굴들을 발견했다.
“또 뵙습니다, 백의원님. 저 예진실에 있던 종학진입니다.”
“저도 다시 백의원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장칠입니다.”
낙양 의방의 예진실에서 일하던 종학진, 그리고 제 십일 진료실 담당 하인 장칠이다.
“두 분도 의각에 지원하신 줄 몰랐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경쟁자가 많았는데 낙양 의방에서 일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앞으로도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예진실에서 오래 일한 종학진은 환자 분류에 탁월한 능력이 있다.
믿을 만하다.
장칠도 그동안 함께 손을 맞췄기에 유성도 업무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딱 한 가지, 입이 좀 싸다는 단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 외에도 여러 하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의각의 시설들에 대해 익힌 후.
“오늘부터 바로 시작해도 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저희야 하루라도 빨리 의각이 활성화되면 좋지요. 말씀해주시면 맹 내에 널리 알리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무림맹 총군사실.
“총군사님, 오늘부터 의각이 운영된다고 합니다.”
순조롭게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제갈영영이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벌써요? 원래 내일부터잖아요?”
“새로 오신 의각주님이 일 욕심이 많으신가봅니다. 오늘부터 진료 보시겠답니다.”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부하가 나간 후.
그녀는 다시 보고서로 시선을 돌렸다.
천문진법총해는 항상 가슴에 품고 다니지만 일부러 오늘은 공부하지 않았다.
두통도 없어서 굳이 의각에 찾아갈 이유는 없지만.
탁.
책상을 짚고 일어났다.
‘그래도 첫날인데 예의는 차려야겠지?
한쪽 장 안에서 고급스러운 보자기를 하나 꺼냈다.
서역 먼 곳에서 온 상인에게 미리 구해 둔 차다.
두 상자 사서 마셔봤는데 향이 좋아 의각 업무를 시작하면 전해주려고 준비해 두었다.
“설마 안 아픈데 찾아왔다고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그러면 서운 할 것 같지만.
그녀는 의각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가볍다.
잠시 후.
의각 앞에 도착한 제갈영영은 이미 길게 늘어선 줄에 당황했다.
의각 내부에도 대기 공간이 있고 외부에도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외부 공간까지 사람들이 서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의각을 만들기를 잘했다는 생각 약간, 그리고 다른 생각이 든다.
‘괜히 찾아왔나? 아프지도 않은데…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나?
왠지 아쉬운 마음에 쉽게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있을 때.
하인 하나가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새로 줄을 선 무사들에게 무언가를 물어보고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저 사람은...?'
하인의 얼굴이 무척 낯익다.
“무사님은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나는 그냥…”
질문을 받은 무사가 우물쭈물했다.
종학진은 벌써 이런 사람을 수십 명이나 상대해 봤기에 능숙하게 대처했다.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으나 한번 진료를 받아보고 싶으신 겁니까?”
“큼, 그렇지. 용하시다는 소문을 들어서… 혹시 나도 모르는 뭔가 발견될 수도 있고.”
“그럼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환자분들 상태에 따라 경중이 있어서 순위가 조금은 뒤로 밀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이네.”
종학진은 그 무사의 경중을 표기하는 곳에 ‘무’라고 표기한 후 뒤로 시선을 돌렸다.
“어?”
종학진과 제갈영영의 눈이 마주쳤다.
“총군사님도 오셨군요. 항상 같은 이유 맞으십니까?”
“아… 네, 네. 맞아요.”
그녀는 얼떨결에 그렇다고 대답하며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아침마다 낙양 의방을 찾을 때 지끈거리는 두통 때문에 살짝 인상을 쓰는 편이다.
“이런, 힘드시겠군요. 앞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중하신 분들이 거의 없어서요.”
“그래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이게 제 일인걸요. 따라오십시오.”
얼떨결에 제갈영영은 거짓말로 여러 무사들을 새치기 해 버렸다.
‘죄송합니다…’
거의 스무명을 제끼고 앞에 세 명 정도를 남겨두게 되었을 때 종학진은 그녀를 그곳에 세웠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주변 무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어색하게 인상 쓰는 상태를 유지했다.
바로 뒤에 기다리는 무사가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리고 있어 양심의 가책이 더 커졌다.
‘정말 죄송해요. 오늘만 실례할게요… 여기까지 왔으니 이것만 전해주고 갈게요…’
그녀의 앞에 서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는 입원실로 향했고 누군가는 후련한 표정으로 나섰다.
곧 자기 차례가 다가온다.
억지로 인상을 쓰는 것도 편한 일이 아니라 서서히 이마를 피려는 순간.
또 아는 얼굴을 마주했다.
하인 하나가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다.
‘낙양 의방 때 백의원님 진료실 하인이네. 여기도 따라오셨구나.
문득 유성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의방 내에 소문이 빨리 퍼지더군요. 입 싼 사람들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그중 가장 유력한 사람, 장칠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제갈영영의 이마가 더 찌푸려졌다.
***
낙양 의방 시절, 유성은 의원들 중 막내였다.
나이도 제일 어리고 경력도 짧다.
할당받은 진료실마저 마지막인 제 십일 진료실.
시간이 지나며 실력을 인정 받았음에도 약간씩 손해를 보는 구석이 있었다.
유성의 환자를 입원시킬 때 입원실에 자리가 없어 다른 빈방을 알아봐야 한다거나.
거래하는 상인의 사정으로 비품 공급이 늦어지면 유성이 조금 더 적게 분배받거나.
그러나 무림맹 의각에서는 자신이 서열 일 위다.
유일한 의원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임시’라는 단어를 떼고 의각주가 될 확률도 가장 높다.
현재 모든 하인들이 자신만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만족스럽다.
그리고.
신성력.
‘확실히 낙양 의방보다 효율이 좋다.
제일 먼저 다녀간 사람이 간단한 잔병을 치료하고 갔음에도 그렇다.
중상 환자는 말할 것도 없다.
신이 나 치료에 열중하고 있을 때, 제갈영영이 찾아왔다.
매일 아침 보는 익숙한 표정이다.
“총군사님? 오늘은 공부 안하신다고 하셨으면서… 두통이 있으십니까?”
“그게… 사실 공부 안 했어요. 이걸 전해드리고 싶어서 왔는데 얼떨결에 아프다고 해 버렸어요. 죄송해요.”
준비해 온 고급 차 상자를 전해주었다.
"이게 뭡니까?"
"서역에서 구한 차예요. 향이 좋아요."
바쁜 와중에 거짓으로 찾아왔다고 하면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으나, 제갈영영은 차마 유성에게 까지 거짓말하지 못했다.
‘날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괜히 왔나?
잠깐 그런 후회를 했으나.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리고 마침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이걸 실, 아니, 드리고 싶었는데.”
유성이 작은 호리병 하나를 내밀었다.
“공부하면 두통이 발생한다고 하셨는데, 그때 이걸 사용해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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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이 건넨 작은 호리병 안에는 이번에 만든 성수가 담겨 있다.
언젠가 사천당가로 향할 생각을 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이 제갈영영이다.
성수가 그녀의 두통에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 확실하게 알아둔다면 장기 계획을 세울 때 도움이 된다.
제갈영영이 호리병을 받았다.
살짝 흔들어 보니 액체가 찰랑거린다.
“이게 뭔가요? 혹시 술은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약입니다.”
“약이요? 두통약이라는 말인가요?”
다른 의원들이 지어 준 약은 약재를 탕약으로 달여 먹는 거였는데.
“두통 뿐 아니라 다양한 질병에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양이 적지만 많은 양을 뿌리면 상처도 아뭅니다.”
“금창약처럼요?”
“금창약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피식.
웃음을 흘린 제갈영영이 호리병을 흔들었다.
“에이, 이게 무슨 만병통치약이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그녀는 유성이 또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만병을 치료해주지는 못하겠지만 대부분의 병을 호전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농담…이 아니군요?”
진지한 유성의 표정을 보고 제갈영영은 심각하게 호리병을 바라보았다.
‘이 안에 도대체 뭐가 들었기에 백의원님이 저렇게 자신하는 거지?
그를 겪어 보았기에 가끔 장난은 쳐도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매우 귀한 물건이다.
저잣거리에 사기꾼 약팔이들이 만병통치약이랍시고 엉터리 약을 비싸게 팔아먹는 일이 있다고 들었으나,
이건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효과를 가진 듯하다.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천고의 명약이다.
만약 중병에 걸려 오늘 내일하는 사람이 있다면 천금을 주고라도 구하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 누군가는 힘으로 빼앗으려 할지도 모른다.
자연스럽게 조심스러워지며 주둥이를 함부로 잡고 있던 호리병을 신주단지 모시듯 받들었다.
“이런 귀한 약을… 왜 저에게…?”
유성은 ‘당연히 가장 좋은 실험체이기 때문입니다’ 라는 말을 꾹 삼켰다.
백회혈에 침을 놓아 치유 스킬을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 제갈영영이었고.
어느 정도의 성수를 먹어야 두통에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제갈영영이 제일 적당하다.
항상 비슷한 수준의 두통을 호소해 온 그녀다.
유성은 어느 정도로 치유 스킬을 사용해야 제갈영영의 두통이 낫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제격이지.
이 성수는 순수하고 깨끗한 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미 성수로 변했으니 비 위생적이지 않지만 약간 질이 떨어질 수 있다.
그 수준을 가늠해 보기에 가장 좋은 실험체는 제갈영영밖에 없다.
해가 될 부분은 없지만, 그대로 말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적당히 상대가 기분 좋을 말을 들려주면 된다.
“총군사님은 제가 아는 가장 믿을 만한 분이니까요.”
화악—
제갈영영은 표정 관리하기 힘들었다.
아마 귀도 빨개진 듯하다.
잘생긴 남자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
자기도 모르게 호감을 가진 상대에게는 더 그렇다.
“그, 그런데 머리 아프면 침을 맞으면 되는데 굳이 이 귀한 약을 먹어야 할까요? 양도 얼마 안 되는 거 같은데…”
“아, 귀한 약인건 맞는데 그것밖에 없는 건 아닙니다. 제가 만들었거든요.”
“네?!”
***
제갈영영이 돌아갔다.
오늘 일 끝나고 바로 확인해준다고 했으니 저녁에 잠시만나기로 약속했고.
아마 그녀는 유성이 시키는 대로, 모종의 공부하다가 두통이 생기면 성수를 조금씩 마시며 두통이 가시는 지점을 알려줄 거다.
유성은 이제 조금 전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이걸 팔면 엄청난 부자가 될 것 같다라…’
부자가 되어 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것.
그게 효율적이었다면 유성도 그걸 고려했을 거다.
그러나 가이아는 황금의 신이 아니라 대지와 치유의 여신이다.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신성력은 매우 적다.
유성을 향한 진심 어린 기도를 받을 수 있다면 모를까, 돈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사는데 한계가 있으니까.
그렇다면 성수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은 어떨까?
이것 역시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다.
‘성수를 내가 직접 전해주지 않으면 효과가 크게 줄어드는 게 아닐까?
직접 만나 전해주는 것은 치유 스킬을 사용하면 되기에 아무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귀한 약을 만든 사람보다 그 약을 구해다 준 사람에게 더 고마운 마음을 가진다면 줄줄 새는 신성력이 아깝다.
성수를 타인에게 제공하려면 온전히 유성의 공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꼭 필요하는 사람들을 선별해서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제공해주면 되겠지. 물론 이걸 전해주는 사람은 나라는 걸 명확히 해야 해.
다행히 유성의 인맥중 도움받을 만한 곳이 있다.
하오문.
유성은 소옥이 완전히 하오문을 장악하고 나면 이 일을 논의해 보기로 결심했다.
***
무림맹 군사실.
학사복을 입은 여러 사람들이 전국에서 올라오는 문서들을 정리하고 분류하고 있었다.
한때 업무 과다로 조용히 퇴사를 고민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총군사 제갈영영의 지시로 과감히 업무 방식을 개선.
정시 퇴근이 가능한 수준까지 업무 부담이 줄었다.
올라오는 보고들에 따르면 강호 정세가 심상치 않지만 다행히 큰 사고는 터지지 않고 있다.
모두 오늘도 무사히 정시퇴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들떠 있을 무렵.
그중 내심 긴장을 감추지 못 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군사부 서열 오위, 태정헌이 그 주인공이다.
태정헌의 눈길이 조심스럽게 부군사의 책상으로 향했다.
쓱쓱.
부군사는 총군사 제갈영영에게 작성할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다.
군사부 인원들이 제출한 보고서들을 그가 최종적으로 취합하여 총군사에게 전달할 거다.
그런데.
‘저번에 부군사님이 보고서를 바꿔치기 한 것 같단 말이야.
태정헌은 우연히 그 사실을 목격하고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다.
부군사는 지금은 은퇴한 전 총군사 사마병을 모시던 사람이다.
제갈영영이 사마병의 아들 사마천과 겨뤄 총군사가 되었을 때 사마병을 따르던 사람들이 대거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의 총애를 받던 부군사는 여전히 제갈영영을 따르고 있다.
처음에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의심하던 사람들은 부군사가 충실히 제갈영영을 따르는 모습에 점차 의심을 풀었다.
지금은 그를 의심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그게 신뢰를 얻기 위함이었다면? 이번에 흑도 무리가 몇 군데 세력을 형성하려는 기색을 보이고 있다. 하나도 누락되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정보인데…’
자신이 직접 취합한 정보라 더 신경 쓰였다.
곧바로 제갈영영에게 달려가 부군사의 행동이 수상했다고 보고하는 건?
부군사는 태정헌의 직속 상관이다.
함부로 보고 체계를 무시하고 의심했다가 만약 자신이 오해한 것이라면 앞날만 단단히 꼬이게 된다.
‘그래도 모른 척하자니 마음이 불편해.
바름을 법도로 삼으라고 부모님이 지어 주신 정헌이라는 이름이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진다.
‘안 되겠다. 꼭 확인해야겠다.
태정헌은 때를 기다렸다.
부군사가 취합된 보고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총군사님께 다녀오지.”
부군사가 군사실 밖으로 나가자 태정헌은 배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좀 안 좋구만.”
“요즘 일찍 끝난다고 너무 달린 거 아닌가? 오늘은 백호단주님이 꼬셔도 가지 말게.”
“그래야겠어.”
동료의 말에 대충 대꾸하고 태정헌은 조용히 문을 나섰다.
은밀히 부군사의 뒤를 밟았다.
총군사실까지 거리는 멀지 않다.
전에 목격한 모습에 따르면 가는 도중 바꿔치기가 일어날 수 있다.
군사부의 잡일을 돕는 하인은 여러 일 처리로 바빠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
이 시간대면 항상 하는 일과가 있는 듯하니 부군사의 수상함을 밝혀낼 사람은 자신 뿐이다.
태정헌이 눈을 부릅떴다.
조금이나마 가전무공을 익힌 것이 은밀한 발걸음에 도움이 되고 있다.
부군사가 총군사실까지 절반쯤 갔을 때.
뒷모습이지만 보고서를 들고 있던 부군사의 어깨가 움찔하며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다.
‘방금 분명 품속을 뒤진 것 같은데? 아닌가? 내가 잘못 봤나?
고개를 갸웃 한순간, 부군사가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 정헌이군. 잠깐 나 좀 도와주게.”
“네, 무슨 일입니까?”
뒤를 따르는 걸 들킬 수도 있다는 생각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태정헌이 얼른 부군사에게 다가 갔다.
부군사가 복도의 창문을 활짝 열고는 밖을 바라보았다.
‘뭘 보는 거지?
궁금증에 고개를 내민 사이.
‘헉!
태정헌이 살기를 감지하고 몸을 비틀었으나.
촤악—!
목이 화끈거리는 느낌과 함께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쓰러지는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여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무서운 눈빛을 한 부군사였다.
그는 절반으로 뚝 잘린 듯한 붓을 들고 있었는데, 붓 뒤쪽에 무척 날카로운 칼날이 붙어 있었다.
‘부군사가 간자였나!
같은 수준의 이류 무사 사이에 방심이 큰 화를 가져왔다.
소리치고 싶었으나 목이 어떻게 베인 것인지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부군사가 다시 한번 칼날로 쓰러진 자신을 내리찍으려는 순간.
“무슨 일인가요!”
부군사의 뒤쪽에서 총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헌! 정헌! 괜찮은가!”
얼른 붓 끝에 덮개를 씌워 다시 온전한 붓 모양으로 바꾼 부군사가 정헌을 마구 흔들었다.
목에서 피가 마구 솟구친다.
‘개자식! 날 이렇게 죽이려는 속셈이구나!
그러나 몸의 통제권을 상실한 태정헌은 반항하지 못했다.
영락없이 이대로 죽을 판이다.
***
잠깐 바람이라도 쐴 겸 잠시 총군사실 밖으로 나오던 제갈영영은 쿵—, 수상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누군가 피를 흩뿌리며 쓰러져 있고, 다른 사람이 쪼그려 앉아 있는 뒷모습을 보고 소리쳤다.
“무슨 일인가요!”
얼른 달려간 곳에는 부군사가 눈물을 흘리며 목이 절반이나 베인 채 피흘리는 태정헌을 부르고 있다.
태정헌의 몸이 마구 흔들렸다.
곧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들어온 무사들에게 부군사가 소리쳤다.
“자객이 숨어 있었습니다! 저기로 뛰쳐나갔습니다!”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으면서도 몹시 억울해 보이는 태정헌의 눈빛이 서서히 감기고 있다.
가까스로 즉사를 면했으나 의각까지 데려갈 틈이 없다.
위급한 순간일수록 침착하게.
그녀는 얼른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지금 믿을 건 이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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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헌.
부모님이 지어 준 이름 그대로, 그는 늘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그런 이를 시험하기 마련.
오늘 다시 한번 시험이 닥쳤다.
몸이 바닥에 눕혀져 있다.
겨울도 아닌데 바닥은 얼음처럼 차갑다.
거칠게 숨을 쉴 때마다 목에서 뜨거운 피 냄새가 역하게 올라온다.
부군사가 남몰래 무릎으로 양팔을 짓누르고 있었고, 그 힘은 환자가 이겨 내기 힘들었다.
태정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총군사를 향해 애처로운 눈빛을 던지고,
부군사를 향해 분노를 담아 노려보는 것.
부군사는 눈가를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새끼… 여태 우리를 속이다니…’
저런 연기 실력이 있었기에 여태 걸리지 않았던 거다.
태정헌은 속으로 고래고래 소리쳤으나 ‘그르륵’하는 소리만 나왔다.
‘난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이놈의 본 모습이라도 알려야 하는데!
누군가 수상함을 알아채주길 바래보았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사실 고통으로 일그러진 태정헌의 눈빛을 보고 애처로움과 분노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부군사는 이미 모든 걸 계산해 두었다.
미리 열어둔 창문으로 몇몇 무사들이 있지도 않은 자객을 잡으러 뛰쳐나갔다.
있지도 않은 자객은 무림맹 한복판에서 무림맹 사람을 암살하고 흔적도 없이 빠져나갔다는 명성을 얻게 될 거다.
그때, 총군사가 작은 호리병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 내 눈빛이나 읽어 주라고!!
태정헌은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총군사는 호리병의 마개를 따더니 자신 쪽으로 기울였다.
‘하, 내가 술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마지막으로 목이라도 축이라는 건가. 그래, 술맛이나 보자.
호리병을 술병이라고 생각한 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혀끝에서 느껴질 술맛을 기다렸다.
그런데.
주르륵—
총군사의 선택은 호리병의 내용물을 자기 목에 붓는 거였다.
시야를 내리 깐 곳에 얼핏 보인 것은 금가루라도 섞였는지, 황금빛을 머금은 액체였다.
‘반짝이는 금색? 색깔이 왜 저래?
그 황금빛이 목의 상처에 닿는 순간.
‘으음?
통증이 서서히 가시는 느낌이 든다.
“됐어요! 여기 지혈 좀 해주세요!”
총군사가 무사 하나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무사가 황급히 목에 천 같은 것을 가져다 대고 압박한다.
정신이 없어 상황 파악이 느렸으나, 태정헌은 부군사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 떠지는 것을 목격했다.
“천벌 받을 새, 어어어?!”
자기 목에서 나온 소리에 태정헌의 온몸이 움찔했다.
기적처럼 목소리가 나왔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부군사가 간자다! 날 암습했, 끄륵!”
됐다!
크게 소리 지르자 다시 목이 화끈거렸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이제 정말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
태정헌은 심력을 쏟아붓고 그대로 기절했다.
제갈영영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재빨리 움직였다.
손이 번개처럼 부군사를 제압했다.
“총군사님, 정헌이 정신이 없어 헛소리를 한겁니다. 자객이 저를 암습하려다가 애꿎은 정헌을 습격하고 창밖으로 몸을 날렸습니다. 그놈부터 잡아야합니다.”
부군사는 침착했다.
신비한 약에 의해 태정헌의 위중한 상처가 아물어 갈 때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지만.
‘이 정도로 흔들릴 거였으면 진작 들켰을 거다. 나는 아직 이 위기를 벗어날 가능성이 크다.
보고서를 바꿔치기 하다가 태정헌에게 들켰다는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그가 한 생각은 단 하나였다.
태정헌을 죽여 입을 막아야 한다!
운 나쁘게 제갈영영이 총군사실에서 나와 완벽하게 마무리 짓지 못했지만,
약을 바르고 죽기 직전의 상태만 넘겼을 뿐, 태정헌은 여전히 위중하다.
그가 결국 죽어 주기만 하면 자신은 무혐의로 풀려날 수 있다.
지닌 두 개의 보고서 중 하나는 잘못 작성된 파기본이라 둘러대면 되는 거고.
‘황금빛 액체. 신기하긴 했지만 방금 다 써버렸다. 상태가 약간 호전되긴 했으나 여전히 태정헌은 살 수 없을 거다. 의각주가 아무리 뛰어난 의원이라지만 피도 너무 많이 흘렸고, 쩌억 갈라진 목을 어떻게 붙여놓는단 말이냐?
부군사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조사는 필요하겠군요. 협조하겠으니 정헌이를 꼭 살려주십시오.”
침착하면서도 부하를 아끼는 모습.
그 모습에 제갈영영은 정말 태정헌이 사경을 헤매다 헛소리를 한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냐, 어딘가 미심쩍어. 아까 애타게 정헌님을 부르던 모습과 상반돼. 하지만 일단 정헌님을 살리고 보는 게 먼저야.
주변 무사들에게 부군사를 조사하라고 명령한 후 태정헌을 챙겼다.
“당장 의각으로 가야 해요.”
무사 몇 명의 도움을 받아 태정헌을 데리고 의각으로 향했다.
태정헌을 업고 쏜살같이 달리는 무사.
그리고 같은 속도로 달리며 목을 단단히 압박하는 무사.
그들 중 하나가 머뭇거리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제갈영영에게 물었다.
“아까 그건 도대체 뭐였습니까?”
명확한 물음이 아니었으나 제갈영영은 당연히 무엇에 대해 묻는지 알아들었다.
그녀 역시 너무 궁금했으니까.
“우연히 구한 약이에요. 일단 빨리 가요.”
제갈영영은 대답을 아꼈다.
방금 본 일은 그녀조차 믿기 어려웠고, 유성과 상의 없이 공개하지 않는 편이 좋아 보였다.
방금 전.
호리병 속의 황금빛 액체가 베인 목의 상처에 닿자 갈라진 살결이 저절로 봉합되며, 가장 출혈이 큰 곳의 피도 스르륵 멎었다.
유성이 준 약이 많지 않았기에 완전한 치료는 불가능했다.
지금은 겨우 응급조치만 된 상태.
그러나 죽음 직전까지 갔던 자를 이 정도로 숨을 붙여 놓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웠다.
‘금창약보다 효과가 좋다기에 조금 더 뛰어나나 했더니, 이건 도대체 뭐야.
이런 놀라운 약을 만들어 낸 유성이라면 틀림없이 태정헌을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
종학진은 바람같이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하고 긴장했다.
예진실에서 근무한 경험이 없더라도 저런 경우는 아주 위급한 상황임에 틀림없다.
헛수고 하는 것이 환자를 놓치는 것보다 낫다.
“장칠! 위중한 환자가 오는 것 같다고 의원님께 전해다오!”
장칠이 후다닥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는 다른 무사들에게 부탁해 길을 텄다.
첫날이라 그런지 호기심에 와 본 자들이 대다수라 급한 자들이 없어 다행이다.
그리고.
유성은 늦지 않게 태정헌을 맞이할 수 있었다.
무사가 지혈중이던 천을 조심스럽게 벗겨내 보았다.
창백한 안색에 목이 베여 피가 꿀렁꿀렁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늦었다고 여기겠지만.
“살릴 수 있겠죠?”
그렇게 묻는 제갈영영의 눈에는 신뢰가 한가득이다.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살리겠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다친 겁니까?”
“칼에 베였어요. 자세한 건 아직 조사 중이에요. 그런데 처음에는 상처가 더 컸어요. 마침 뛰어난 약을 가지고 있어서 이만큼이라도 아문 거예요.”
성수를 사용했다는 소리다.
무사들이 함께 있어 말을 조심하는 모습이다.
제갈영영에게 준 성수는 많은 양은 아니었다.
중요한 급소 부분만 일부 치료된 듯한데 그렇다면 처음의 상처는 훨씬 심각했던 모양이다.
“이 사람은 운이 좋았군요. 아무튼 제가 치료해볼 테니 나머지는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꼭 좀 부탁할게요.”
제갈영영과 무사들이 나간 후, 유성은 태정헌의 목덜미에 손을 대고 그대로 치유스킬을 발동시켰다.
환부가 넓어 침보다는 손바닥으로 스킬을 발동시키는 게 효과적이다.
‘오늘 심각한 환자들이 많지 않아 다행이다. 신성력이 넉넉히 남아 있었어.
완벽히 치료하지는 않았다.
영술 핑계를 대긴 했지만 너무 상식을 벗어난 힘을 드러내는 건 좋지 못하다.
겉의 상처는 꽤 남겨두었다.
남은 과정은 겉상처 봉합.
‘이제 며칠 입원시켜서 돌보면 잘 아물 거다. 목에 흉터는 뭐, 남자인데 상관없지.
하인들을 불러 그를 입원실로 이동시켰다.
***
부군사에 대한 조사는 강압적이지 않았다.
태정헌이 그가 간자라고 외쳤으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군사부에서 경력 많고 존경받는 그를 죄인 취급 할 수 없다.
물론 태정헌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큰 신빙성이 실렸겠지만 말이다.
조사실 옆의 탁자에는 전낭 하나, 붓 하나, 보고서 두장이 놓여 있다.
소지품을 모두 꺼내 놓은 거다.
부군사는 일부러 붓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약간 묵직하긴 하지만 일부러 두꺼운 나무의 속을 파냈기 때문에, 누구도 붓 안에 작은 칼날이 숨겨져 있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파기해야 할 보고서를 제때 파기하지 못한 건 제 실수입니다만 저는 결백합니다. 무공실력도 변변치 않은 제가 무슨 수로 정헌을 그렇게 만들었겠습니까?”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정헌의 옆에 있었기에 얼굴에 튄 핏자국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헌은 살아날 수 없다. 이 고비만 잘 넘기면 된다.
조사관도 아무 증거가 발견되지 않은 그를 적당히 상대했다.
“아무래도 자객이 잡혀야겠군요.”
“물론입니다. 정헌을 그렇게 만든 자객이 잡힌다면 제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일단 쉬고 계십시오.”
부군사는 곧 풀려날 거라고 기대하며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눈치 빠른 녀석 하나 때문에 당분간 몸을 사리긴 해야겠군. 귀찮게 됐어.
이튿날 아침.
총군사가 온종일 조사실에 갇혀 있던 그를 찾아와 다독였다.
“죄송해요. 필요한 절차라서요.”
“물론입니다. 윗 사람이 모범을 보여야 하는 법이죠. 혐의가 벗겨질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나저나 정헌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부군사가 정헌의 안부를 물으려는 순간.
조사실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와 소식을 전했다.
“총군사님! 태정헌 군사님이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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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태로 제갈영영은 무림맹의 내부가 생각보다 허술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림맹, 그것도 군사부에서 군사 하나가 칼을 맞아 쓰러지다니.
충격적인 사건인 것이다.
태정헌의 말처럼 부군사가 간자일 확률이 있고,
정말 자객이 군사부까지 침투했을 확률도 있다.
억울해하던 태정헌의 눈빛을 떠올리면 부군사가 의심스러웠으나, 함부로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법.
대신.
부군사의 품에서 발견된 보고서 두장을 보고 제갈영영은 군사부에 지시를 내렸다.
지금까지 부군사가 올린 보고서와 평군사들이 정리한 보고서를 대조해 보라고.
하루에도 수많은 보고서가 오가기에 군사부의 업무가 한동안 마비될 것도 각오했다.
하루가 지나도 자객이 발견되지 않아 부군사를 떠보러 방문했을 때, 일부러 태정헌이 깨어났다는 거짓 소식을 흘려보았다.
제갈영영은 부군사를 힐끗 살폈다.
‘저렇게 기뻐하다니, 정말 아닌가?
그러나 장단을 맞추기 위해 밖으로 나온 제갈영영에게 부하가 재차 말했다.
“저, 말씀 하신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깨어나셨답니다.”
“네? 진짜였다구요?”
'백의원님이 당장 보유한 약은 더 없다고 하셨는데... 위중한 상처라 시간이 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역시 대단해.'
그날, 부군사는 조사실에서 심문실로 이동되었다.
태정헌의 증언으로 붓으로 위장한 칼이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엿새 전 바꿔치기 한 보고서까지 들통이 난 것이다.
“아이고, 왜 그런 짓을…”
선임 고문 기술자 부량이 싱글벙글 웃으며 부군사를 맞이했다.
부군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고문에 버티는 훈련 따위는 받아본 적이 없다.
심지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의각주님 솜씨가 아주 좋으시지. 걸레짝을 만들어 놔도 그분만 다녀가시면 쌩쌩하게 살아난다니까? 이제 정식으로 무림맹 식구가 되셨으니 업무 협조 받기도 쉽고.”
태정헌을 살린 실력을 보면 정말 그럴 것 같다.
눈 앞이 깜깜해졌다.
‘지금이라도 다 털어놔야 하나? 그럼 내 가족들은 어쩌지?
***
태정헌은 퇴원하면서 유성이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허리를 넙죽넙죽 숙였다.
“의각주님, 전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부모보다 먼저 가는 불효를 저지를 뻔했다.
목이 베인 순간에는 그 누구가 와도 자신을 살리지 못할 거로 생각했는데 새로 온 의각주가 해낸 것이다.
‘처음 총군사님이 의각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을 때 바쁜데 괜히 일거리만 늘어나겠다고 불평했던 내 자신이 원망스럽구나.
만약 그때 의각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의각주가 그날부터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너무 그러실 것 없습니다. 이게 제 일인데요.”
“아닙니다. 원래 업무도 다음날부터 였지 않습니까? 의각주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백호단주님이 항상 백의원님을 칭송하는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제가 비록 높은 자리에 있지는 않지만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전력으로 돕겠습니다!”
죽음까지 생각했던 환자를 치료해 주고 얻는 신성력은 짜릿했다.
유성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며칠 후.
태정헌은 사마세가에서 심은 간자의 수상함을 눈치챈 공을 인정받아 여러 선임들을 모두 제치고 공석이 된 부군사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업무를 배정 받자마자 곧바로 의각으로 달려갔다.
“의각주님. 제가 앞으로 의각의 지원을 맡게 되었으니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이 태정헌을 불러 주십시오!”
“부군사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그건 원래 다른 분이 도와주시던 업무였지 않습니까?”
“그랬지요. 그런데 제가 직접 하겠다고 지원했습니다. 어떻게든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
안 그래도 신경 쓴다고 썼으나 의각은 처음 세워진 곳이다.
첫날 진료를 하며 낙양 의방의 체계에 비해 미진한 부분이 조금씩 눈에 띄고 있었는데 잘 됐다.
든든한 인맥이 생겼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전 부군사는 왜 그런 짓을 했던 겁니까?
“크흑!”
태정헌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심장이라도 아픈 듯이.
“어디 불편하십니까?”
“그게 아니라, 기밀이라 그건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
별생각 없이 물었던 유성은 당황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사마세가가 증발했다는 소문과 함께 부군사를 사주한 자들의 정체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
사마세가는 한때 황실에서 높은 관직까지 지낸 명문 가문이다.
그러나 약 백여 년 전, 모종의 일로 관직에서 쫓겨나 무림세가로 변신을 꾀했다.
그 변신은 성공적이었다.
사마세가에서 제갈세가를 밀어내고 무림맹의 총군사 자리까지 차지한 것이다.
약 백 년이 흐르고, 역사가 짧아 전통적인 무림세가인 오대세가에는 끼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사마세가를 여섯 번째로 두었다.
머지 않아 오대세가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아마 사마천이 아버지 사마병의 뒤를 이어 무림맹 총군사가 되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거다.
그러나 모두가 아는 대로 제갈영영이 그를 저지하는데 성공했고.
사마세가는 제갈영영을 끌어내리기 위해 무리해서 수작을 부렸다…
“라고 청운 장로님이 의견을 내주셨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모용림 장로님은?”
“...”
모용림이 말없이 제갈영영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사돈인 사마세가에서 무림맹에 수작을 부리다가 걸렸으니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사마천, 그놈도 사라졌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사위가 아내와 자식도 팽개치고 사라졌다.
사마세가도 증발하듯 사라졌으니 이제 사돈과의 인연도 끝나버렸다.
제갈영영은 꼴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 자리에서 그를 더 몰아세우지는 않았다.
아직 논의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네요. 사마세가의 식솔만 해도 수백명인데, 그들이 모두 사라지기 까지 아무도 몰랐다니요.”
부군사가 사마병이 시킨 일이라고 자백한 후, 은퇴한 그를 데리러 무림맹 무사들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무사들이 하남의 북쪽에 있는 사마세가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텅 빈 장원과 당장 현금화가 불가능한 재산만 남아 있었을 뿐이다.
개방과 하오문에서도 아무 낌새를 채지 못했기에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천하에 누가 있어 그 정도 되는 인원을 아무 흔적없이 증발 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한참을 논의 해 봐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 안건은 개방과 하오문의 도움을 받아 더 알아보는 것으로 넘기고.
“다음은 무림맹에 더 있을지 모르는 간자에 대한 대책이에요.”
부군사는 며칠간은 고문에 버텼으나,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사마세가에서 그의 가족을 데리고 있으며 무림맹 군사부에 혼선을 주라고 지시한 점을 밝힌 것은 물론.
추가로 정체는 모르지만 무림맹에 간자들이 더 숨어 있다는 정보를 털어놓은 것이다.
“아무래도 경계를 더 강화해야겠어요. 그리고 이번에 의각의 중요성도 확인되었죠. 예상보다 훨씬 이르지만 의각의 규모를 키웠으면 해요. 혹시 다른 의견 있으신가요?”
“...”
반대를 일삼던 모용림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고.
“의각주의 신묘한 의술이 아니었더라면 이번에 안타까운 희생자가 발생했을 거요. 의각을 만들자고 했던 총군사의 혜안이 맞았소. 나는 의각의 규모를 늘리는 일도 찬성이오. 미리 늘려놓아야 제때 도움받을 수 있지 않겠소?”
제갈영영은 청운 장로에게 고마운 눈길을 보냈다.
다른 장로들도 저마다 의견을 냈다.
한때 모용림의 편을 들었던 장로들도 이번에는 제갈영영의 손을 들어 주었다.
‘사마세가의 일로 당분간은 조용하겠네.
모용림 장로는 이번 혐의를 벗어났으나 한때 사마세가를 열심히 밀었던 죄로 회의 내내 침묵만 지켰다.
***
“하하핫! 반갑네, 백의원. 이제 의각주라 불러드려야겠지?”
“백호단주님이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백호단주가 유성을 찾아왔다.
그와도 꽤 가까워져 말을 편하게 하는 사이가 되었다.
“인사나 하러 들렀네. 이번에 무림맹의 경계를 강화하면서 의각에 내 부하들도 배치할 예정이지. 다들 괜찮은 애들이지만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귀띔해주게.”
의각 뿐 아니라 다른 곳들에도 무림맹 무사들이 추가로 배치될 예정이다.
“듣긴 했지만 안 그래도 외부 임무가 많을 텐데 경계까지 늘릴 인원이 됩니까?”
유성은 의각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이런저런 정보를 물어다 주는 장칠 덕분에 무림맹 돌아가는 사정을 좀 알게 되었다.
주요 문파나 세가의 정예들은 만만치 않은 세를 보유한 흑도 무리로부터 본거지를 지키는데 큰 힘을 쏟고 있다.
그래서 무림맹 경계 인원들을 늘리는 것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고 알고 있는데.
그 부분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나 봤더니.
“그 부분은 신분이 확실한 무림학관 후기지수들의 지원을 받아 해결할 생각일세. 나중에 무림맹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후기지수들 일부를 임무에 투입시키는 식이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무림학관은 후기지수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만든 곳이 아닙니까?”
“이것도 일종의 교육이네. 어차피 그들도 무인이고, 미리 경험 쌓는다고 봐야지. 어디까지나 지원자만 받아서 간단한 임무부터 대동하여 서서히 경험을 쌓게 하겠다는 총군사님의 의견이라더군. 나는 개인적으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네.”
백호단주가 요즘 애들은 너무 귀하게 자랐다느니, 어쩌고 꼰대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유성은 제갈영영이 의견 냈다는 무림학관 후기지수 지원자 이야기를 듣고 인턴쉽 제도를 떠올렸다.
“그리고 의각주가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이번에 정헌도 살려주었다면서. 전에는 내가 말해도 귓등으로도 안듣던 친구가 어제 술자리에서 자네 이야기만 해대는 통에 서운할 지경이었네.”
백호단주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빼앗겼다며 장난스레 웃었다.
“그래도 제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 크게 다치면 소용없으니 항상 몸조심 하십시오.”
“물론이지. 그 정도는 우리가 알아서 해야지. 아, 자네 남궁유린과 개인적인 친분이라도 있나?"
“네?”
"무림맹에 들어올 생각은 없어 보였는데, 이번에 의각 경계 임무에 혼자 지원했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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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진가장은 작은 무가다.
강호에서 변방으로 취급되는 호남. 그곳에서 거대 문파도 아닌 진가장의 장주는 작은 뱀의 머리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무림맹에서 작은 무력 단체라도 이끄는 자는 용의 몸통 정도는 된다.
비록 몸통의 위치가 꼬리쪽에 가깝더라도.
진영호는 뱀의 머리가 예정된 진가장의 적자다.
그는 용의 몸통과 뱀의 머리 중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할 필요 없다.
둘 다 하면 되니까.
그의 목표는 일단 무림맹의 무사가 되어 높은 자리를 노리다가, 아버지가 늙으면 진가장을 물려받는 거다.
그러면 무림맹 무사, 그것도 꽤 괜찮은 자리에 있었다는 명성으로 호남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무림학관 후기지수들 중 별로 특출나지 않은 그가 무림맹에서 괜찮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방법은 역시 한 가지뿐이다.
“팽형, 백유성 그놈이 이번에 태정헌 부군사님을 살렸다는 소문 말이오, 내가 진실을 알아왔소.”
“진실 말이오?”
팽지산이 흥미를 보이자 진영호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가 찾은 해법은 역시, 미래에 높은 자리에 오를 사람에게 달라붙는 것.
다른 후기지수들에 비해 자신이 특히 잘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부분이다.
그러면 팽지산이 자신을 이끌어 줄 거다.
“처음에 태정헌 부군사님 목이 절반쯤 베여 죽어 가던 중, 총군사님이 지니고 있던 신비한 약으로 이미 위기를 넘긴 상태였다지 뭐요? 백유성은 뒤늦게 상처 조금 꿰매고 그런 명성을 얻은 거요.”
“흥, 그럼 그렇지. 무슨 약인지 몰라도 그것 덕분이었군. 그런데 왜 그놈이 다 고쳤다고 소문이 난 거요?”
“그야 그놈이 평판 관리를 잘했으니 사람들이 알아서 오해해준 것이 아니겠소?”
유성은 제갈영영과 이야기 후, 너무 뛰어난 약효에 잠시 그 정체를 숨기기로 결정했다.
치유 스킬의 존재를 모르는 제갈영영이 보기에, 유성의 의술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약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했다.
유성도 동의했다.
그는 어차피 명성이 필요한 게 아니라 신성력을 얻을 수단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꼭 필요한 상황에 사용하기 위해 성수는 잘 모아두기로 결정.
그런 이유로.
처음 태정헌의 곁에 있던 무사들은 성수에 대해 정확히 모르기에 두리뭉실하게 소문이 난 것을 진영호가 주워 온 것이다.
“그놈의 평판. 앞으로 내 명성이 훨씬 높아질 테니 두고 보시오!”
“물론이오, 팽형. 지금은 흑도들이 활개 치고 있는 난세. 영웅이 나타나기 딱 좋은 시기 아니겠소?
팽지산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하긴, 맹주님도 평범한 무가 출신이고 전 척마대주님은 백정 출신이지. 게다가 그분들보다 훨씬 빨리 절정 고수가 되었으니 내가 모자랄 게 없지. 그렇지 않소?”
진영호는 흠칫 주위를 둘러보았다.
맹주님은 그렇다 치고 전 척마대주님의 출신까지 거론하다니.
누군가 듣고 있었으면 어쩌려고 그런단 말인가?
나중에 무림맹에 들어가겠다는 자가 척마대의 눈 밖에 나서 좋을 일이 없는데 말이다.
아무리 하북팽가의 위세를 업고 있다지만 정말 생각 없는 녀석이다.
그리고.
‘자기는 온갖 영약 처먹고 상승 무공을 익혔으면서. 변변한 영약 하나 못 먹고 화경의 고수가 된 맹주님과, 본격적으로 무공을 배운 것도 한참 늦었던 척마대주님을 단순 비교하는 건 좀…’
물론 진영호는 속마음을 모두 겉으로 꺼내지 않을 정도의 지혜는 있었다.
“물론이요, 팽형이 절대 모자랄 것 없소.”
팽지산은 망상을 키워나갔다.
망상은 어느새 천마의 목을 베고 천하제일인이 된 자신과, 그 옆에 달라붙어 있는 다섯 명 정도의 여자들까지 진행되었다.
한 여자의 얼굴은 그의 짝사랑이다.
‘지난 일로 사이가 좀 소원해졌지만 그쯤 되면 유린이 오히려 내게 달라붙을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팽지산은 남궁유린을 찾아갔다.
지대한 관심으로 그녀가 어디에 있을지 잘 알고 있다.
‘분명 숲 안쪽 공터에 있겠지? 종종 거기서 혼자 시간을 보내곤 하니까 말이야.
언젠가는 함께 시간을 보낼 상상을 하며 팽지산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정체불명의 소리가 들려온다.
곧 팽지산은 그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남궁유린은 평평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풀잎을 불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을 떠난 풀잎 소리는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눌린 듯 허공에 사그라졌으나, 음악에 조예가 없는 팽지산이 보기에도 꽤 그럴듯했다.
짝짝짝.
박수를 치자 남궁유린이 흠칫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연주다, 유린.”
“여기까지 무슨 일이시죠?”
“나는 천하제일인이 될 거다. 머지 않아 초절정 고수가 된다면 내가 달리 보이겠지. 하하!”
“...”
미친 사람인가 봐.
갑자기 혼자 있는 곳으로 찾아와 맥락 없이 잔뜩 헛소리를 늘어놓는 팽지산에 대한 소감이다.
남궁유린의 속도 모르고 팽지산은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그럼 초절정 고수가 되기 위해 수련해야 하니 이만 가 보겠다.”
조금 전 남궁유린이 풀잎으로 낸 소리를 어설프게 콧소리로 흥얼거리며.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해꾼의 등장으로 중단되었던 연주를 이어 나갔다.
‘무공은 나와 맞지 않아. 이렇게 여유롭게 살고 싶은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오라버니 남궁유현이 방 안에 틀여박혀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고 있기에.
가문 어른들은 오대세가의 수좌 자리를 뺏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남궁유린에게 과도한 짐을 지우려한다.
기댈 곳이 있긴 하다.
백유성이 다 죽어 가던 사람을 살려냈다는 소식을 들은 것.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오라버니를 치료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백의원님 뿐이야. 그런데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하루하루가 버겁다.
전해 듣기로, 가문의 어른들은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배우는 제왕검형을 자신에게 전수하는 일로 논의중이라고 들었다.
자신은 무공에 흥미도 없는데 말이다.
당연히 무림맹에 입맹을 희망하지도 않는다.
***
무림학관 후기지수들에게 공문이 내려왔다.
-지원자들에 한해서 무림맹 임무에 투입될 수 있다!
앞으로 무림맹에 입맹하기를 희망하는 자들에게 실적으로 반영될 수 있단다.
여러 후기지수들이 눈을 반짝였다.
남궁유린과 달리 그들은 입맹에 관심이 많기 때문.
동시에 후기지수들 사이에 은밀한 소문이 하나 돌았다.
-의각주 백유성과 팽지산의 사이가 좋지 않더라. 굳이 팽지산과 척 지고 싶지 않으면 의각 경계 임무에는 지원하지 않는 게 좋겠다!
무림에서는 무공이 뛰어나거나 뒷배경이 뛰어난 자가 최고다.
오대세가중 하나인 하북팽가의 자제이자 당대 최고의 후기지수, 팽지산과 '굳이' 불편한 관계가 되고 싶은 자들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다음은 의각이다. 경계 임무에 지원하는 자는 손을 들어 보거라.”
무림학관 교관은 종이에 기록할 준비를 하며 그렇게 외쳤다.
입맹하여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후기지수들은 약간 위험성이 있는 임무라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훨씬 안전한 경계 임무 역시 인기가 많았다.
당연히 의각 경계 임무도 마찬가지라고 여겼는데.
“아무도 없나?”
의각만 지원자가 없다.
교관이 한 번 더 묻는 사이, 진영호는 팽지산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팽지산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영호, 쓸모가 있구나. 별거 아니지만 백유성이 약간이라도 자존심 상해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때.
가녀린 손 하나가 위로 살며시 올라왔다.
‘누가 감히 내 말을 어기고?
고개를 휙 돌려본 곳에는 그의 짝사랑이 손을 들고 있었다.
‘유린, 어째서…! 분명 내가 천하제일인이 되어 청혼하겠다고 말했는데 내가 싫어하는 일을!
절대 그렇게 말 한 적은 없으나 팽지산은 축약하여 그런 의미로 말 했기에 꽤 서운했다.
“그래, 남궁유린 한 명. 그럼 의각은 남궁유린만 지원하는 거로—”
“저, 저도 의각에 지원하겠습니다!”
팽지산이 다급히 교관의 말을 끊었다.
“쟤가 왜 의각에 지원해? 의각주님이랑 사이 안 좋다던 거 아니었어?”
주변 후기지수들이 속닥였으나 그는 꿋꿋했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 이 정도 철면피는 아무렇지도 않다.
어차피 소문도 진영호가 냈고.
그러나.
“불가하다. 처음 말했듯이 무림맹의 임무는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을 수 있는 게 아니니 신중히 결정하라 하지 않았더냐? 팽지산 넌 이미 외부 임무를 맡았으니 변경할 수 없다.”
“그럼 외부 임무가 끝나면 그때는 다시 임무 배정이 됩니까?”
“물론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남궁유린은 의각 경계 임무의 유일한 지원자가 되었다.
***
“남궁소저, 오랜만입니다.”
유성은 내심 그녀가 반가웠다.
오라버니를 치료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나중에 얼마나 많은 신성력 상승으로 돌아올지 기대되는 점도 좋았고,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운 미녀가 의각 내부 경계조에 속했기에, 칙칙한 남자들만 있던 근무 환경이 화사해진 점도 좋았다.
남궁세가의 유력한 후계자이고 검왕의 손녀이니 간자일 리도 없고.
“아, 네. 서점에서 뵙고 처음이네요. 소식은 전해 들었어요. 이번에 놀라운 솜씨로 태정헌 부군사님을 살리는 공을 세우셨다고요.”
여전히 목소리가 작았지만 의술에 대한 칭찬이 의미 심장하다.
유성은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말을 들려주었다.
“그게 제 일인걸요. 그리고 언젠가는 약속도 지킬 겁니다.”
실력을 키워 남궁유현의 눈을 치료해주겠다는 약속을 언급했다.
희망 고문이 아니다.
결국 남궁유현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줘 틈틈이 감사한 마음을 얻어내기 위함.
일종의 신성력 파밍이랄까.
“네, 기다리고 있어요.”
유성이 약속을 잊지 않아 한결 마음이 편해진 남궁유린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이야기 중이세요? 제가 알아도 되는 이야기일까요?”
남궁유린은 뒤를 돌아보았고, 답했다.
“아, 총군사님이시군요. 죄송해요, 비밀 이야기라서요.”
유성은 오랜만에 제갈영영의 서늘한 시선을 받고 가볍게 몸을 떨었다.
‘다른 건 다 멀쩡한데 한서불침 특성은 불량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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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영영이 의각에 나타난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잠깐 남궁유린과 인사 나누는 사이 진료 시간이 되어 있었으니까.
“다 끝났으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유성은 제갈영영을 진료실 안으로 데려갔다.
성수 관련해 함께 논의할 일이 있다.
남궁유린은 안으로 사라지는 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혹시 총군사님이 나를 싫어하시는 건 아니겠지?
눈초리가 왠지 따가워 그런 생각마저 했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원래 총군사의 눈매는 날카로운 편이다.
딱히 개인적인 일을 비밀로 했다고 싫어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애초에 둘은 딱 두 번 만났을 뿐이니까.
남궁유린은 얌전히 경계 위치에 섰다.
종일도 아니고, 하루에 잠깐 경계 임무 서는 건 크게 부담되지 않지만,
원래 그녀는 입맹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에 아무것도 지원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다른 임무에는 모두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의각 경계 임무에는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후기지수들을 보고 그녀는 짧은 순간 큰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의각 경계 임무에는 아무도, 심지어 나도 지원하지 않았다는 걸 알면 의각주님이 서운해할지도 몰라. 난 의각주님께 오라버니의 치료까지 부탁한 사람이니까.
아무 사이도 아닌 자신에게 의각주가 먼저 호의를 베풀었는데 안면몰수 할 수 없다.
그게 남궁유린이 의각 경계 임무에 지원한 이유다.
그녀는 혹시 모를 자객의 습격으로부터 유성을 지키는 일 역시 오라버니를 치료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고 애써 자위했다.
***
제갈영영은 진료실로 들어와 살짝 목소리를 낮추었다.
지금 하는 이야기는 굳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서 좋을 게 없다.
“말씀하신 성수요. 영술로 만든 거면 영수라는 이름이 낫지 않아요?”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이야기를 꺼내오자 김이 조금 샜지만, 유성이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영수는 좀… 성수라고 불러 주십시오.”
원래 이름도 성수고, 어감도 좋은데 굳이 다른 이름으로 바꾸고 싶지 않다.
“흠, 아쉽네요.”
“어쨌든, 사용해 보셨습니까?”
제갈영영이 소매에서 작은 호리병을 하나 꺼냈다.
그녀가 바빠서 며칠 의각에 들리지 못했다가, 어제 성수를 다시 받아갔었다.
오늘 새벽, 천문진법총해 공부를 재개하고 성수를 사용해 본 거다.
유성이 성수를 받아들고 살짝 흔들어 보았다.
처음 준 것에서 삼분의 이 가량 남아 있는 듯하다.
“삼할 정도 마시니까 두통이 완전히 가라앉았어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되는 거 맞나요?”
“맞습니다. 이제 대략적인 효과를 가늠할 수 있겠군요.”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유성.
제갈영영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효과 가늠이라… 이거 혹시 저한테 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머릿결이 부드러워 보이네요.”
“허엄, 네?”
혹시 자신에게 실험한 것이냐 물으려던 제갈영영은 당황했다.
평소 외모 칭찬 따위는 거의 하지 않던 유성이 기습적으로 머릿결을 칭찬하다니.
‘아무도 못 알아보던데 어제 서역에서 들여온 물건으로 머리를 감은 걸 어떻게 알았지? 날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나 봐. 이런 것도 다 알아보고.
아침부터 남궁유린과 유성이 비밀 이야기라는 것을 쑥덕여 약간 기분이 상했던 것이 사르르 풀렸다.
제갈영영은 괜히 머리 끄트머리를 잡고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혹시 잘못 본 거라면 죄송합니다.”
“치, 제대로 봤어요. 티 많이 나나요?”
“...조금요.”
유성이 여자의 머릿결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던졌는데 얻어 걸렸을 뿐이다.
어쨌든 진료실 안의 분위기가 봄이라도 온 듯 부드러워졌다.
제갈영영은 한결 부드러워진 눈매로 이야기를 꺼냈다.
목소리도 마찬가지로 부드럽다.
“아무튼, 성수는 하루에 얼마 못 만든다면서요? 그럼 아껴두세요. 전 어차피 매일 와서 치료받으면 되니까요.”
유성과 생각이 통했다.
성수의 편리함을 보고 매일 제공해 달라고 했으면 오히려 난감했을 텐데.
“알겠습니다.”
“참, 부군사님께 의각 의원을 늘릴 거라는 이야기는 전해 들으셨죠?”
“네, 다만 그 방식은 아직 논의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번처럼 시험을 치르게 되겠죠?”
“방식이 결정 났어요. 오늘 성수 건으로 온 김에 말씀드릴게요. 이번에 의원 두 명 더 뽑을 거예요. 그 정도면 충분할까요?”
“물론입니다. 저까지 세 명이면 충분하지요.”
“다행이네요. 그래서 말인데, 두 사람을 뽑는 건 전적으로 백의원님께 권한을 드리기로 했어요. 혹시 생각해 두신 분 있나요?”
“제가 뽑으라고요? 의각 의원을요?”
“네, 정식 의각주가 되실 분이 뽑게 하는 게 좋겠다고 결론이 났어요. 아무래도 마음 맞는 분과 일 하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무림맹에서 일할 의원 두 사람을 뽑는 권한을 준다는 것도 인상 깊었으나 정식 의각주는 또 무슨 이야기일까.
처음 논의된 것과 다르다.
모용림 장로의 의견으로, 임시 의각주로 시작한 후 한 단계를 더 거치기로 했는데 말이다.
“정식 의각주는 의원들이 늘어난 후 한 번 더 심사를 보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저는 처음부터 의각주가 필요한 의원들을 뽑았으면 좋겠다는 쪽이었어요. 이번에 다시 정정 의견을 냈죠. 뭐, 이유는 아시겠지만 이번엔 반대 의견이 없었어요. 그러니 곧 정식 의각주가 되실 거예요. 미리 축하해요.”
짧은 기간이지만 서열 일위의 달콤함을 맛 봤던 유성으로서 나쁠 게 없는 이야기.
의각 담당자도 그의 편이고 총군사도 도와주니, 의각을 입맛대로 운영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믿을 만한 사람들로 뽑아두면 몇 달간 의각을 떠날 수 있는 체계를 만들 수 있겠는데?
유성이 제갈영영의 가슴에 대못 박을 발칙한 계획을 세우는 줄도 모르고 그녀가 신을 내며 말을 이었다.
“뽑고 싶은 의원 두 사람이 누군지 말해주시면 문제가 없는지 철저히 조사하려고 해요. 아직 안 정해졌으면 천천히 말해주셔도 되구요.”
유성은 제갈영영의 말을 듣고, 자신 역시 뒷조사를 당했으리라 예상했다.
만약 처음에 하지 않았더라도 부군사 사건이 생겼으니 이번에는 출신 성분 정도는 했을 테고.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조금 궁금했다.
‘아마 절정의 벽에 도전하다가 무공을 잃고 가문에서 쫓겨난 머저리?
유성이 밝히지 않았기에 그가 절정 고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멍청하다 생각할 수도 있고 측은하다 여길 수도 있는 과거인데.
다행히 제갈영영은 호의 가득한 눈빛을 보내오는 중이다.
‘고맙네. 다행이기도하고.
이제 의각에 뽑을 의원 두 사람을 결정해야 한다.
천천히 생각해봐도 되겠지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유성의 머릿속을 스치는 첫 번째 사람은 당연히,
‘차의원님.
…?
‘아니, 잠깐!
유성이 세차게 고개를 휘저었다.
제갈영영이 이상하게 쳐다보았으나 유성은 양의원이 아니라 차의원부터 떠올리는 자기 모습에 당황했다.
무의식적으로 그가 사용하던 벼루로 시선이 갔다.
멋들어진 용이 양각된 고급 벼루의 상단에는 멋진 필체로 적힌 문구가 있다.
[일침신의]
이제 많은 사람이 부르고 있는 신의라는 거창한 별호.
유성은 내심 마음에 들어 요긴하게 쓰고 있다.
그리고 그건.
‘얼마 전에 따로 만났을 때 차의원님이 준 선물이지.
유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그의 집요함에 말려들었음을.
‘내가 졌다.
대답을 기다리는 제갈영영에게 그의 결정을 들려주었다.
“낙양 의방의 양의원님과 차의원님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겠어요. 차의원님도 실력이 좋으신가 봐요?”
“낙양 의방 출신이시니… 대신 차의원님은 제가 개인적으로 시험을 보고 최종 결정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지요?”
“그럼요. 의각 운영은 백의원님 의견을 최우선으로 반영할 테니까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두통을 치료하고 진법과 수학에 대한 책자만 교환하던 것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이제 다른 환자를 위해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한다.
제갈영영이 진료실 밖으로 나선 순간.
진료실 앞을 지키고 있던 여자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남궁유린.
나이는 자신보다 네 살이나 어리고 배경도 절대 꿀리지 않는다.
가문만 놓고 봤을 때 오대세가의 상석인 남궁세가 대 세 번째인 제갈세가.
게다가 무림맹 총군사 자리는 영원하지 않은데 반해 남궁유린은 나중에 가주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제갈세가는 제갈영영의 오라버니가 가문을 물려받게 될 테니 배경 점수의 우위도 거의 없다.
외모는 또 어떤가.
남궁유린은 눈이 큰 미녀다.
‘남자들은 어리고 청순한 여자를 좋아한다던데…’
날카로운 자기 눈을 떠올리자 왠지 모를 패배감이 든다.
***
무림학관 후기지수들이 임무에 투입되면서, 일부 무림맹 지역에 그들이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지역은 유성이 차의원과 만나러 이동하는 경로에 있었다.
이동하던 유성은 정면에서 꼴 보기 싫은 사람을 마주쳤다.
아마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팽지산이 스쳐 지나갔다.
***
이튿날, 도왕 팽헌무가 심각한 표정으로 의각에 찾아왔다.
환자의 신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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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천하인들은 수많은 무림세가들 중 상위 다섯곳을 골라 오대세가라고 이름 붙였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항상 첫 번째에 손꼽히는 곳은 검의 명가 남궁세가였다.
대대로 검왕을 배출해 온 그들은 안휘성을 꽉 잡고 있으며 주변 중소문파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첫 번째가 있으면 두 번째도 있는 법.
그 비운의 무림세가가 바로 하북 팽가다.
일부 사람들은 만년 이인자라고 폄하하여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타고난 신력을 바탕으로 패도적인 도법을 구사하는 하북팽가의 당대 가주가 바로 도왕 팽헌무다.
명예에 죽고 사는 정파 무림인의 특성상,
당연히 도왕의 목표는 검왕을 뛰어넘고 팽가가 남궁세가를 뛰어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어렵다.
뛰어난 무재로 화경의 경지에 도달했으나, 지금도 검왕에게 밀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상대의 무공을 잘 알고 있는 도왕은 검왕의 기세만 읽어도 대략적인 무위를 가늠하는 게 가능했다.
도왕은 인정해야 했다.
여전히 하북팽가는 남궁세가의 아래라는 걸.
다만.
‘미래는 그렇지 않지.
남궁세가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인다.
도왕의 세 자식들은 모두 절정 고수가 되었으니까.
가문은 첫째가 물려받겠지만 무재만큼은 막내 팽지산이 가장 뛰어나다.
비록 팽지산이 검왕의 유일한 손자 남궁유현보다 한 살 늦게 절정 고수가 되었을지라도, 세 가지 이유로 팽가의 미래가 더 밝다고 할 수 있겠다.
첫째, 도왕 자신이 검왕보다 어리다.
검왕이 은퇴할 때까지 버티면 팽가의 위상을 더 높일 수 있다.
둘째, 스물 둘에 절정 고수가 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던 남궁유현이 은퇴해야 하는 사고를 당했다.
새로 후계자로 거론되는 남궁유린은 성격이 유약하다. 무공을 익히기 싫어한다는 이상한 소문도 있다.
다른 방계도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원래 오대세가는 직계위주로 돌아가는 곳.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남궁유린이 후계가 될 거다.
셋째, 스물셋에 절정 고수가 된 막내아들 팽지산의 존재다.
스물셋에 절정 고수가 되었다는 의미는 간단하지 않다.
단순 계산으로 스물 넷에 절정 고수가 된 사람에 비해, 초절정의 벽을 뛰어넘을 시기가 한 살 어려지는 게 아니다.
확률의 문제다.
일찍 절정 고수가 될수록 상위 경지에 도달할 확률이 크게 높아진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왔다.
가끔 전 척마대주 정립과 같은 특수한 자들도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어쨌든, 도왕은 팽지산이 절정의 벽을 넘었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
팽가에 경사가 났다.
친히 그를 다독이고 수련을 독려하기 위해 도왕이 무림학관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만큼 좋은 소식이다.
아마 첫마디는 이렇게 시작할 거다.
‘지산아, 네가 자랑스럽다. 네가 지금처럼 노력하면 도왕이라는 별호는 네 것이 될 것이다. 한눈팔지 말고 정진하거라.
가주 자리는 첫째에게 돌아가겠지만, 무공이 가장 뛰어난 자가 가주가 되는 게 아니니 막내도 이해할 거다.
오히려 무림맹에 속하는 것이 많은 실전경험을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무림맹에서 요직을 차지하는 건 팽가에도 큰 도움이 되는 일.
형제들이 안팎으로 도우면 팽가는 더 빠르게 세를 키울 수 있다.
‘무림학관에 보낸 것이 정말 잘한 일이었구나. 역시 단체생활하면 사람이 성숙해지는 법이지.
팽지산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뛰어난 무재에도 불구하고 사리 분별 못하고 경솔한 언행으로, 팽가 내에서 사고를 많이 쳤다.
특히 한 가지에 꽂히면 앞뒤 가리지 않아, 그나마 팽가 내에서 정상에 가까운 도왕의 큰 우려를 사던 팽지산.
사람 좀 되라고 보낸 무림학관에 잘 적응하여, 큰 사고 쳤다는 소리도 없이 성과를 냈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좋은 일만 가득할 것 같았던 강호행이다.
그런데.
도왕은 호위를 몇 명 데리고 무림학관으로 오다가 정체불명의 무리에게 습격을 받았다.
강호 정세가 불안정하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놀랍게도 상대 무리에는 마공을 사용하는 화경의 고수가 끼어 있었다.
가까스로 그에게 중상을 입히고 물리쳤으나 도왕의 몸 상태도 썩 좋지 못했다.
화경의 고수가 치사하게 독까지 사용했기 때문.
역시 악독한 마인다웠다.
강력한 내공으로 독기를 억제하고 있으나 빠르게 해독하지 못하면 독은 점차 그의 몸을 좀 먹을 것이다.
죽지는 않겠지만 오랜 기간 요양해야 할 수도 있다.
도왕은 급하게 개방의 도움을 받았다.
독을 해독할 수 있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의원을 물색했고,
제일 먼저 무림학관이 아니라 무림맹 의각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것이, 백유성이 갑작스럽게 도왕을 맞이하게 된 배경이다.
진료실 안에 앉아 있는 도왕은 팽지산과 비슷하게 커다란 덩치에, 턱이 각진 중년인이었다.
늙은 팽지산이란 말이 딱 어울렸다.
팽지산에게 좋은 인상이 없는 유성이 보기에는 외관상으로 밉상이라 할 수 있겠다.
“어떤가? 해독할 수 있겠나?”
초조함이 묻어나오는 도왕의 물음에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해독 후 팔도 봐드리겠습니다. 상처가 커 보이는군요.”
도왕의 오른팔에 길게 갈라진 상처가 남아 있었다.
혈을 짚어 지혈했는지, 피는 멎어 있으나 저절로 아물만한 상처가 아니다.
도왕의 큼지막한 도가 왼쪽 허리춤에 달린 모습을 보면 오른손잡이.
꽤 불편했을 거다.
빨리 치료하지 못하면 역시 장기 요양이 필요할 수 있다.
“흥, 이까짓 상처 쯤이야. 상대도 화경의 고수였지. 놀라운 위력의 마공을 사용했으니 아마 마교의 인물이겠지. 놈이 비겁하게 독까지 썼음에도 중상을 입혔으니 내 승리네.”
“...”
도왕은 오른팔을 다친 것을 지적한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어떻게든 상대보다 더 우위에 섰다고 주장하는 모습.
‘팽가 사람들과는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구나.
유성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그럼 치료해드리겠습니다.”
“일침신의의 솜씨가 좋다는 말을 들었지. 그럼 부탁하네.”
해독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평소였다면 말이다.
유성은 시험해 볼일이 하나 있다.
장침으로 심장쪽을 찌르는 대신, 도왕의 맥을 잡았다.
‘최근에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무림인들의 혈도 중 미세하게 더 넓은 곳들이 있었지.
유성은 그게 뭔지 알아냈다.
‘내공심법의 운기 경로!
매일 축기하기 위해 기를 운용하는 통로라 더 확장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건 무공을 익힌 기간이 오래될수록 더 감지하기 쉽다.
그 말인 즉.
‘도왕의 독문 내공심법을 살펴볼 좋은 기회!
무림인들은 타인에게 쉽게 맥문을 내주지 않는다.
실력 차이가 크지 않다면 그것만으로 상대에게 제압당할 수 있기 때문.
의원인 것이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오랜 기간 발전시켜 온 하북팽가의 내공심법 운기 경로를 대략라도 파악할 수 있다면.
‘언젠가 도움이 되겠지. 상승무공은 구하기 어려우니까.
독을 해독하기 전, 신성력으로 도왕의 혈도 구석구석을 살펴 미세하게 더 넓은 경로들을 모두 기억해 두었다.
언젠가 자기 내공심법을 보완할 재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그럼 해독 시작하겠습니다.”
유성은 한곳에 잘 모여 있는 독기를 신성력으로 감싸고, 해독 스킬을 발현시켰다.
도왕은 즉시 이변을 감지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끊임없이 그의 통각을 자극하던 정체불명의 독.
내공으로 억제해 두고 있던 부분에서 순식간에 독기가 사그라드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쉽게?”
수많은 강호 경험.
독에 중독당해 본 경험도 여러 차례지만 해독이 이 정도로 간단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화경의 고수마저 꼼짝없이 중독시키는 강력한 독이 순식간에 해독되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한 것도 잠시.
“이번엔 팔을 치료해드리겠습니다.”
쓱쓱 붕대를 풀어낸 유성이 환부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
도왕의 눈이 커졌다.
잘못 느낀게 아니라면 길게 찢어진 팔의 상처에서 통증이 점차 감소하는 게 아닌가?
상처도 아까보다 더 아물어 있는 듯했다.
유성은 곧 바늘과 실을 가져와 익숙하게 도왕의 팔을 꿰맸다.
봉합 솜씨가 어찌나 정교한지, 살갗을 파고드는 바늘의 간격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하다.
“다 됐습니다. 다만 며칠 정도는 이곳에 머무르며 실밥까지 제거하고 가시는 게 좋습니다.”
팔을 몇 번 움직여 본 도왕은 흡족하게 웃었다.
“역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의술이군. 실력이 정말 대단해. 큰 신세를 졌네. 여기로 찾아오길 잘했군.”
“과찬이십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세. 알다시피 내가 다칠 일이 조금 많거든.”
도왕의 상체에는 온갖 흉터들이 남아 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수련하고 실전 경험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역시 정상인이라면 무인이 훌륭한 실력을 가진 의원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도움된다는 걸 잘 아는 법이다.
유성 역시 도왕 정도 되는 고수와 친분을 다지는 게 나쁠 일이 없다.
더 친해지면 팽지산의 무례함에 대해 넌지시 흘릴 수 있고.
“아, 무림학관에 내 아들놈도 다니고 있는데 혹시 들은 적 있나?”
“...네.”
“서로 비슷한 또래로 보이니 앞으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군.”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도 아드님의 만행을 꼰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있는데요.
더 친해지면 모를까, 지금 도왕 앞에서 아들을 깎아내릴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다.
유성은 말을 아꼈다.
"그럼 가보겠네. 맹에 머물다가 며칠 후 다시 들르지."
치료가 끝난 도왕이 일어나자 하인 장칠이 말을 전했다.
“도왕 어르신, 다치셨다는 소리를 듣고 밖에 팽지산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 마침 잘됐구나. 백의원, 잠깐 시간 되나? 잠깐 아들놈을 소개시켜 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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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사의 방장 정해 대사는 최근 들어 이마에 주름이 더 깊어진 느낌이었다.
여러 일로 번뇌를 일으키는 일이 많은 와중, 찾아온 연단각주를 보자 그동안의 수양도 무색하게 가슴까지 답답해졌다.
연단각주의 표정이 극히 어두웠던 탓이다.
"방장님,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려했던 일이라...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오?"
"올 해 초, 유난히 기후 변덕이 심해 어쩌면 연단의 마지막 단계를 더 빠르게 진행해야 할지 모른다는 말을 기억하십니까?"
대환단 연단기간은 평균 30년. 그러나 기후 조건에 따라 더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전국의 약초꾼들이 50년 이상의 화령초를 찾기 위해 온 산들을 샅샅이 뒤지고 있지만 아직 소식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연단을 더 급하게 진행해야 한다면 정말 30년간 공들인 일이 실패로 돌아갈지 모른다.
"기억나는구려. 시간이 얼마나 남았소?"
"원래 한 달은 더 여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요 며칠 사이 급속도로 상태가 나빠지더니 오늘 아침에는 변질이 일어나고 있더군요.
아무래도 사흘 안에는 시작해야 온전한 약효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늦어도 보름 안에는 마지막 단계를 진행해야 일할의 효과라도 건질 수 있습니다."
"사흘 말이오? 그건... 쉽지 않아 보이는군. 보름... 그것도... 끙."
"그리고 그 이상이 넘어간다면..."
연단각주가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느새 정해 대사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대환단 제조는 실패로 끝나고, 거기에 투입된 시간과 자금은 모두 허공으로 날리는 셈이 되겠지.'
아무리 수많은 속가제자들을 거느리고 있고 천하인들이 들러 시주를 하는 소림사라 해도, 대환단을 연단하는 일은 엄청난 자금을 소모하는 일이다.
한 번의 연단으로 7~8개 정도의 대환단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효과 하나만큼은 천하 제일이라 할 만하지만 단점도 여럿 있다.
30년의 연단 기간, 한 번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극히 적은 수량. 그런 어려운 연단 과정 후에도 영구히 보존할 수는 없다는 점 등.
그래서 대환단은 당대의 소림사 방장, 그리고 소림사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사대금강에게 하나씩 돌아간다.
나머지 두어개를 가지고 소림사에 큰 은혜를 베푼 자들에게 내주기를 수백 년이다.
'그동안 다른 진귀한 영약들을 다 모아 아무 문제없이 연단해 오고 있었건만 상대적으로 흔한 화령초를 구하지 못해 실패할 위기라니, 부처님의 뜻은 내가 헤아리기 어렵구나.'
자기 대에 처음으로 연단에 실패하게 되는 상황을 정해 대사는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아미타불..."
나지막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바깥에서 그를 찾았다.
"연단각주는 일단 돌아가 있으시오."
"...예, 방장님."
정해 대사가 나가자 승려 하나가 말을 전했다.
"방장님, 낙양 의방의 의원 백유성이라는 자가 찾아와 말하기를, 약초꾼 초산의 유품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
약초꾼 초산.
정해 대사가 아직 소림사의 방장이 아니던 시절 알게 된 인연이다.
그는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해 한적한 장소를 찾다가 필사적으로 절벽 끄트머리를 붙잡고 버티고 있던 어린 약초꾼 초산을 만났다.
거의 힘이 빠져 떨어질 뻔한 초산을 구해주었고, 그는 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미끄러져서 정말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지 뭡니까? 다시는 절벽 근처는 쳐다도 보지 않으렵니다."
초산은 그 일이 있은 후에도 소림사를 종종 찾아와 시주도 하고 정해 대사와 편하게 잡담을 나누다 돌아가고는 했다.
그런데 꼭 화령초를 구해다 주겠다고 큰소리 치던 오랜 벗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그분을 접객당으로 안내해주게."
"네, 방장님."
***
깊게 들은바가 없기에, 유성은 초산과 정해 대사의 관계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문지기 승려에게 말을 전할 때만 해도 과연 소림사 방장과 만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있었는데.
"아미타불. 내가 바로 정해요. 시주께서 내 오랜 벗의 유품을 가져오셨구려."
눈빛에 정광이 흘러 넘치면서도 인자한 인상의 정해 대사가 직접 유성을 만나러 온 것이다.
"두 분이 벗이셨습니까?"
정해 대사가 과거를 회상하는 듯 아련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소림사에 박혀 무공만 익히던 내가 소림사 바깥에서 처음으로 사귄 벗이오."
그런 친화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
유성도 몇 번 안 되는 짧은 만남에도 초산에게 친근함을 느끼지 않았나?
정해 대사 역시 마찬가지였던 듯싶다.
잠깐 이야기를 나눈 유성이 품에서 목함을 꺼냈다.
"초산이 방장님께 전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정해 대사가 조심스럽게 목함을 열었다.
"이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해 대사가 50년이 되지 못한 화령초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초산은 과거 목숨을 구해 준 방장님께 50년 이상 된 화령초를 구해주고 싶어 했습니다. 이걸 캐다가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았지요."
"절벽... 다시는 쳐다도 보지 않겠다더니..."
어딘가 슬퍼 보이는 정해 대사가 말을 이었다.
"설마 초산이 이 화령초가 50년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소?"
"아닙니다. 그때는 이미 앞을 볼 수 없어서요. 단지 느낌이 좋다고 했습니다."
"그나마 편히 눈을 감았겠군."
"그렇습니다."
"아미타불. 부처님의 보살핌이오."
유성은 정해 대사의 표정을 살폈다.
안도하고 있다. 진심이 엿보인다.
벗이 마음 편히 극락왕생 하기를 빌어 준 듯하다.
이제 정해 대사가 초산을 기릴 수 있는 시간을 줘야 할 것 같았다.
유성은 모든 할 일을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는..."
갑자기 가슴이 꿈틀거렸다.
충만한 느낌이 차오른다.
정해 대사가 유품을 전해준 그에게 감사함을 전해 늘어나는 느낌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충만한 신성력 상승.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신성의 씨앗을 싹 틔웠을 때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유성은 깨달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한 번에 엄청난 신성력이 차오르며 [촉진]과 [해독]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이제 가시려는가?"
정해 대사는 초산의 마지막을 전해준 유성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졌으나 그와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낙양 의방을 찾지 않는 한 더 이어질 리 없는 인연.
그러나.
"실례지만 혹시 지금 구해진 화령초 중 가장 많이 자란 것이 몇 년 정도 되었습니까?"
정해 대사의 시선이 목함으로 향했다.
"초산이 남겨 준 것이 가장 많이 자란 것이라오."
유성은 화령초를 잠시 내어달라 부탁하려고 했다.
처음 키워 보는 약초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매일 진료시 신성력을 남겨 화령초를 키워나가면 기한 내에 충분히 50년 산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해 대사의 말이 더 빨랐다.
"시주께서는 신경 쓰지 마시구려. 어차피 이번 대환단은 실패라고 보는 게 맞소. 다른 변수가 생겨 사흘 후에는 시작해야 온전한 대환단을 얻을 수 있다오."
상황이 생각보다 급박하지 않은가?
유성은 다급해졌다.
초산과는 작은 인연으로 시작했으나 한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하는 유성은 대환단 제조를 성공 시키고 싶었다.
촉진 스킬이 생기지 않았다면 포기했겠지만 지금은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속물적이지만 대환단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면 소림사에서 그에게 얼마나 큰 감사한 마음을 가질 것인가.
무려 30년간 공들인 일이라는데.
"죄송하지만 제가 여기에 사흘간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그 화령초도 잠시만 내주십시오."
사흘간 촉진 스킬로 화령초를 얼마나 키울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드라고라를 포함한 여러 약초들을 키워 본 경험으로 비추어보면, 화령초를 10년 정도 키우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시간이 촉박하니 소림사를 오가는 시간도 아껴 촉진 스킬을 사용해 볼 셈이었다.
"사흘이라... 초산의 넋이라도 기리려는 것이오? 그렇게 하시오. 백 시주도 초산이 뒤를 부탁한 분이시니."
초산의 유품을 가지고 나름대로 삼일장이라도 치른다고 생각한 것인지 정해 대사가 흔쾌히 허락했다.
유성은 목함을 받아들고 다른 승려의 안내로 거처로 이동하면서 물었다.
"혹시 약초를 심을 만한 좋은 땅이 있습니까?"
"아직 준비 중인 약초밭이 있습니다만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
"방장님께 말씀드렸습니다만 사흘간 동료의 넋을 기리려 합니다."
"약초밭에서 말입니까?"
"사정이 있어서요."
"어차피 아직 사용하지 않고 있는 곳이라 깨끗이만 써 주십시오."
다행히 승려는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약초밭을 내주었다.
아무도 없는 너른 공터였으나 문외한인 유성이 봐도 흙 상태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이번 화령초 사건으로 인해 직접 필요한 약초들을 재배할 계획이라도 세워둔 것일까?
그는 제일 먼저 화령초를 약초밭에 심었다.
초산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흙뿌리 채 캐온 것인지 화령초의 뿌리 상태가 아주 좋았다.
다시 심으면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촉진은 넓은 약초밭에 광범위하게 사용할 수도 있고 한 개체에 집중하여 사용할 수도 있다.
단 하나의 화령초에 집중하여 촉진 스킬을 발동시켰다.
스르르-
신의 힘은 역시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화령초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됐다!'
화령초의 특징인 잎에 붉은 기운을 그대로 유지한 채 길이만 살짝 길어졌다.
'사흘이면 충분히 가능성 있다.'
유성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이제 하루에 몇 번씩 일정 간격으로 스킬을 사용해주면 되는 것이다.
"참, 의방에 소식을 전해야지."
유성은 다른 사람들을 찾았다.
오늘은 휴무지만 이틀은 휴가를 사용해야 한다.
눈에 불을 켜고 신성력을 쌓아 온 유성은 낙양 의방 생활을 하며 휴가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몰아서 사용하면 된다.
"아니, 백의원님! 휴무 날 소림사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빈민가에 가셔서 좋은 일 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마침 그를 알아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사정이 있어서요. 죄송하지만 혹시 낙양 의방에 말씀 좀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물론이지요. 뭐라고 전해드릴까요?"
"제가 중요한 일로 내일과 모레 이틀간 휴가를 사용해야 한다구요."
"물론입니다. 돌아가는 길에 전하겠습니다."
낙양 의방건은 확실하게 해결되었다.
헛걸음 하는 환자도 있겠지만 그 부분까지는 어쩔 수 없다.
지금 중요한 일은 이쪽이니까.
유성은 마음 편히 약초 재배에 집중했다.
***
이튿날 오전.
낙양 의방으로 향하는 제갈영영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새벽에 드디어 천문진법총해의 첫 번째 진법을 완벽히 깨우친 것이다.
'최고의 날이야. 막바지라서 평소보다 진도를 더 뺐더니 머리가 상당히 아프지만, 어차피 백의원님께 침 맞으면 낫는 거고. 의방에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참으면 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도착한 곳에서 그녀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아이고 어쩌죠, 총군사님? 백 의원님은 휴가 사용하셨습니다만..."
"뭐, 뭐라구요? 그, 그럼 내일은, 내일은 나오시는 거 맞죠?"
"그게... 내일도..."
그녀는 충격으로 살짝 비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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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지산이 도왕의 상태를 전해 들은 것은 소식에 밝은 진영호로부터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는 팽지산보다 사교성이 좋아 여러 경로로 정보를 접한다.
‘어차피 진영호가 날 따르니 상관없겠지.
이미 부하 취급이다.
그가 전한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도왕이 습격을 당해 상태가 좋지 못하다! 무림맹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몸을 치료하러 의각으로 향했다더라!
천하에 누가 감히 도왕을 습격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상태가 좋지 못하다니?
팽지산은 마침 외부 임무가 없었다.
교육을 받던 중, 교관에게 양해를 구하고 의각으로 달려갔다.
의각주 백유성과 사이가 좋지 않지만 더 중요한 건 아버지의 안위다.
그가 든든히 버티고 있기에 무림학관의 후기지수들도 자기 눈치를 봤지 않나?
지금은 자신도 절정 고수가 되었으나 도왕이라는 이름값에는 한참 모자란 것이 사실이다.
물론, 아버지를 걱정하는 마음도 크다.
의각에 도착한 그를 하인이 제지했다.
안으로 쳐들어가 직접 아버지의 상태를 살피고 싶었으나, 안에 경계 임무 수행 중인 남궁유린도 있는 걸 보고 점잖게 이야기만 전했다.
잠시 후.
아버지가 치료받고 편안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왔다.
팽지산은 안도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실력은 좋나보군.
처음 전해 들은 것보다 아버지의 상태가 좋아 보인다.
약간의 허풍이 섞여 있더라도 유성의 의술이 못 봐줄 정도는 아닌 듯하다.
“아버지! 몸은 괜찮으십니까?”
“호들갑 떨거 없다. 치료는 잘되었으니 며칠 쉬면 잘 회복될 거다. 그나저나…”
도왕은 팽지산을 살폈다.
전에 봤을 때보다 기세가 날카로워졌고 자세가 바로잡혀 있다.
“과연 절정의 벽을 넘었구나. 훌륭하다.”
“소자 죽을힘을 다 했을 뿐입니다.”
팽지산은 흡족한 표정으로 절정 고수가 된 그를 치하하는 아버지 뒤로, 한 인영을 발견했다.
못마땅한 표정을 한 백유성이 멀뚱히 서 있다.
자신의 연적! (오해다.)
남궁유린을 두고 삼각관계에 있는 그를 보자 기분이 나빠졌다.
애써 시선을 돌렸다.
어린 시절, 한번 무언가에 꽂히면 분노를 참기 힘든 적이 많았으나 자기 나이도 이제 스물셋.
스스로 느끼기에 참을성도 늘었고 성숙해졌다.
지금은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자신했다.
아버지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지산아, 여기는 나를 치료해준 백유성 의원이다. 앞으로 알아두면 큰 도움이 될 테니 인사하거라. 마침 서로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으니 친우처럼 지내면 좋겠구나.”
불쑥 반항심이 솟아오른 팽지산과 달리,
유성은 오늘 처음 본 도왕에게 팽지산과의 갈등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 앞에서 아들을 욕하는 건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여기서 팽지산과 데면데면하게라도 인사만 나누면 무난히 넘어갈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못합니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팽지산이 기어이 초를 쳤다.
“뭐라?”
심기 불편한 도왕의 목소리.
평소 팽지산이라면 몸이 기억하는 공포에 움츠러들었겠지만,
남궁유린이 의각 안쪽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
그녀를 두고 다투는 녀석에게 숙이고 싶은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그녀가 남자답지 못하다고 흉볼게 아닌가?
“저 자식이 유린을 울렸단 말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아무튼 전 못합니다!”
백유성 때문에 유린이 자신을 봐주지 않는 것 같다, 라는 말은 쉽게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으니까.
그 행동이야말로 남자답지 못하다.
그냥 이대로 자신이 빠르게 초절정 고수가 되면 해결될 문제다.
그럼 남궁유린도 자기를 다른 눈으로 봐줄 거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조금 꾸지람 들을지라도 숙이지 않을 거다, 라고 팽지산은 생각했다.
다만.
팽지산이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녀가 눈물 흘린 일이 사람들 앞에서 폭로되자 속으로 팽지산을 욕하며 한숨을 내쉰 남궁유린의 마음을 고려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고.
도왕의 체면도 고려하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들이 도왕의 말을 거역한 것이다.
좋은 마음으로 유성에게 아들을 소개해 주려던 도왕은 오랜만에 주먹이 울었다.
허구한 날 사고 치던 아들놈에 대해 수년간 별다른 소식이 들리지 않기에, 조금 성숙해진 줄 알았더니 아직도 철부지였다.
아무리 무력 부서에 비하면 손색이 큰 지원 부서라지만, 무림맹 입맹을 희망한다는 아들이 무림맹 각주중 하나와 공개적으로 대립각을 세울줄이야.
‘몇 년 전, 진주언가의 차녀와 혼인시키려 했을 때 면전에 대고 추녀라서 싫다고 떼쓰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심각한 일이 아닌가?
진주언가의 차녀도 하북에서 꽤 예쁘다고 소문 난 여자였다.
절대 추녀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과거 용봉지회에서 남궁유린을 보고 온 팽지산은 그때부터 눈이 한껏 높아졌다.
도왕이 만약 천하에 이름 높은 화경의 고수가 아니었고, 그 자리에서 팽지산을 따끔하게 혼내지 않았다면.
하북에 함께 연고를 두고 있는 팽가와 언가의 오랜 관계가 금 갔을지도 모른다.
진주언가의 차녀와 팽지산의 혼인 건은 금 간 수준이 아니라 산산조각 나긴 했으나 가문 사이의 유대가 깨지지는 않았다.
잠깐 남궁유린이라는 아이에게 흥미가 생겼지만, 일단 아들을 의각주에게 사과 시켜야 한다.
진료를 보기 위해 줄 서 있던 무사들이 많은 곳에서 사고를 쳤으니 수습이 필요하다.
“이놈! 잔말 말고 의각주에게 사과하거라. 한낱 무림학관 생도 신분으로 어딜 무림맹 의각주에게 함부로 말하느냐?!”
대부분은 이렇게 호통 치면 아들은 정신을 차린다.
그러나 팽지산은 유독 남궁유린 앞에서는 이성적인 판단하지 못하는 편이다.
“어찌 사내 대장부가 되어 연적에게 숙이라는 말입니까? 저는 절대 못합니다!”
연적이라니!
‘내가 모르는 게 있나?
도왕의 시선이 백유성을 훑었다.
헛웃음 치고 있다.
이번에는 남궁유린에게 시선이 향했다.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오직 팽지산 혼자 씩씩대고 있다.
‘이 녀석이 혼자 오해한 게 아닌가?
아들의 성취를 칭찬하고 독려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사람을 만드는 게 우선인 듯하다.
오랜만에 매라도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무슨 일입니까, 도왕.”
등 뒤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도왕이 돌아본 곳에는 강렬한 안광이 인상적인, 호리호리한 체구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백리단우.
백리세가라는 작은 무가에서 태어나 무림맹주의 자리까지 오른 화경의 고수다.
하지만 그 한미한 출신 때문에, 척마대에 대한 명령권 외에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물론 여러 이해관계 때문에, 출신이 대단했다면 맹주로 선출될 일은 없었을 테지만.
그리고 실권이 없다는 것이지, 권위가 없다는 게 절대 아니다.
최소한 무림맹 내에서는 도왕보다 맹주의 끗발이 훨씬 센 법이다.
도왕은 얼른 포권했다.
“맹주, 오랜만입니다.”
“다쳐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와 보았는데 괜찮아 보입니다. 그런데 소란이 있군요.”
도왕은 얼른 손사래 쳤다.
“아닙니다. 소란이라니요. 오랜만에 아들놈을 교육시키는 중입니다. 안 그래도 맹주님께 인사드리러 가려 했는데 여기까지 찾아오셨군요.”
맹주의 시선이 팽지산을 한번 훑었다.
백유성을 노려보며 이를 갈고 있다.
“그랬군요. 도왕을 습격했다는 무리에 대해 묻고 싶은 것도 있어 겸사겸사 찾아왔습니다만, 아드님이 의각주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건…”
뭔가 곤란한 사정이 있는 모양.
맹주는 정립이 비공식 휴가를 떠나기 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유성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무림맹 내에서 자신에게 강력한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정립의 부탁.
알지 못했다면 모를까, 유성이 엮인 일이니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맹주가 은근히 압박하자 도왕의 얼굴이 붉어졌다.
팽지산은 여전히 유성에게 사과할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들놈 때문에 대신 사과해야 하는 상황이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자식을 잘못 키운 죄로 어쩔 수 없다.
“아들놈이 의각주에게 뭔가 오해를 한 모양입니다.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백의원도 미안하네. 내가 대신 사과할 테니 너그럽게 용서해주게.”
팽지산은 언제나처럼 쥐어 패면 된다.
이제 백유성만 사과받아주면 잘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유성은 팽지산이 자신에게 혼자 오해하고 적대하는 꼴을 더 이상 봐주고 싶지 않았다.
바뀔 기회는 계속 있었으나 그는 한결같았다.
마침 판을 깔기 좋은 환경이다.
“도왕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지요. 팽 소협과 제가 서로 합의하에 풀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오, 그래 주겠나? 둘이 원만하게 풀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일이지. 그럼 난 빠져 있겠네.”
유성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도왕이 밝게 웃으며 물러섰다.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을 테고.
유성은 팽지산을 똑바로 응시했다.
“팽소협, 저번에 서점에서 제안하신 거, 아직 유효합니까?”
서점에서 제안한 것.
유성이 언급한 것이 뭔지 알아차린 팽지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공 없이 맨몸으로 겨뤄 지는 쪽이 유린을 깨끗이 포기하자는 거 말입니까?”
맹주 앞이라고 말투가 바뀌어있다.
“...제 기억으로는 남궁소저에게 사과하라는 조건이었습니다만. 뭐, 어차피 서로 조건을 하나씩 걸어야 하니 그걸 원하시면 따르겠습니다. 사과하라고 하면 팽 소협이 시키는대로 사과도 하지요.
대신 제가 이기면 팽 소협이 제게 지금까지 한 무례들을 사과하고 팽가로 돌아가십시오. 그게 제 조건입니다. 응하시겠습니까?”
어차피 무림맹의 일부 사람들이 자기 출신과 과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거라는 추측이 이런 결정을 내리도록 도왔다.
적을 만들고 싶지 않은 유성이지만, 이미 적이 된 자는 제거하거나 멀리 치워 버려야 한다.
도왕을 겪어본 바, 생긴 것과 다르게 사리 분별 할 줄 아는 사람이니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다.
공평한, 아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유성이 말도 안 되게 불리한 대결이니까.
유성은 이제 지켜줄 사람도 많고.
“뭐라고요? 사과? 팽가로 돌아가?”
팽지산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콧김이 뿜어져 나온다.
유성은 한쪽 입꼬리만 살짝 끌어올렸다.
“왜, 자신 없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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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잘 해결될 거라 기대하고 뒤로 빠져 있던 도왕은 유성의 말이 거듭될수록 당황했다.
둘이 쌓인 게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다.
그리고.
아무리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겨룬다지만 절정 고수인 아들과 의원인 백유성이 어떻게 상대가 된단 말인가?
당장 말려야 한다!
그러나 도왕은 나설 수 없다.
이미 유성에게 맡기고 빠지기로 선언한 이상 다시 개입하면 꼴이 우스워진다.
도왕의 시선이 맹주에게 향했다.
-의각주가 갑자기 왜 저런답니까? 좀 말려주십시오.
전음을 보냈으니 맹주가 잘 말려줄 거다. 그도 원하는 결과가 아닐 테니.
그러나.
-당사자들끼리 푸는 게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맹주마저 헛소리를 해댔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대로 의각주가 망신 당하는 꼴을 지켜보자는 말입니까? 아들놈은 제가 나중에 잘 교육시키겠으니 어서 말려주십시오.
다급한 도왕의 전음을 뒤덮는 소리가 있었다.
“자신 없냐고요? 그럴 리가! 나중에 딴소리나 하지 마십시오!”
“물론입니다.”
팽지산이 덥썩, 유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원래대로라면 의각에서 진료를 봤어야 할, 대기 중인 무사들이 웅성거렸다.
갑자기 팽가의 후기지수와 의각주가 대련을 한다니, 놀라운 흥미거리가 아니겠나.
얼핏 듣기로 여자 문제도 엮여 있는 듯하다.
무사들의 가슴이 흥분으로 불타올랐다.
어느새 둘의 대련이 기정 사실처럼 되어 버리자 도왕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유성이 큰 망신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팽가에 있을 때는 진주언가와 문제를 일으키고, 무림학관에 와서는 무림맹 의각주와 또 문제를 일으키다니.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라더니, 괜히 무림학관에 보냈나보구나. 차라리 가문에 잡아 두고 무공 수련만 시켜야 그나마 써먹을 구석이라도 있겠구나!
탄식만 나왔다.
맹주도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고, 도왕은 이 일이 큰 여파없이 마무리되기를 빌었다.
그리고 대련이 끝나자마자 팽지산을 끌고 팽가로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더 이상 사고 치게 놔둘 수는 없다.
반면, 맹주는 나름대로 계산을 마쳤다.
‘팽지산이 돌발행동을 자주 하고 통제가 어렵다지?
원래 하북팽가에서도 망나니로 유명했다.
무림학관에 입관하고 처음에는 괜찮은 듯하더니, 절정 고수가 되면서 통제가 어려워진다는 보고를 여러 차례 받았다.
아직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으나, 교관들도 슬슬 버거워한다.
굳이 무림맹에서 품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이 일이 발생한 거다.
그리고 맹주는 도왕과 다른 정보를 하나 알고 있다.
‘의각주가 열여섯의 나이에 이미 절정의 벽에 도달했다지? 열일곱에 주화입마에 빠져 무공을 잃었다면 아마 그는 절정의 경지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안정적인 정파의 내공심법은 절정 고수가 아니라면 주화입마에 빠질 확률이 극히 적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내공 없이 권각술로 붙는다 해도 백유성이 팽지산에게 보이는 자신감이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내공도 없는 몸으로 팽가의 타고난 신력을 어떻게 극복하려는 것인가, 의각주.
백유성의 몸은 현역 무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탄탄하다.
그러나 팽지산의 덩치에 비할 바는 아니다.
병장기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니 체급차이 역시 분명히 고려되어야 하는 변수다.
무재 하나로 무림맹주의 자리까지 오른 백리단우는 맹주가 되기 전 무공에 미친 자였고, 이 신기한 대결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조건을 정확히 하겠습니다! 제가 이기면 의각주는 유린을 깨끗이 포기하고 제 가랑, 흠, 무릎 꿇고 제게 잘못했다고 사과하십시오!”
“남궁소저와 저는 아무 사이 아닙니다만 그 조건으로 괜찮겠습니까?”
“제가 똑똑히 봤는데! 딴소리 하지 말고 받아들일지만 결정하십시오!”
“받아들이겠습니다. 제 조건은 같습니다. 제가 이기면 팽 소협은 제게 저지른 무례들을 사과하고 팽가로 돌아가십시오.”
“좋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여기서 붙읍시다!”
남궁유린 앞에서 유성을 망신 주겠다는 속셈이다.
유성 역시 거절하지 않았고, 무사들이 빙 둘러 자리를 마련했다.
맹주가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마침 이 자리에 있으니 내가 공증을 서겠소. 오늘 대련으로 서로의 조건을 이행하고, 그 외 다른 원한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될 것이오.”
“알겠습니다.”
유성과 팽지산이 동의했다.
맹주는 팽지산과 유성을 차례로 불렀다.
“그럼 내공을 금제하겠소.”
점혈하여 팽지산의 내공을 금제한 맹주의 손길이 유성에게 닿았다.
맹주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활짝 열린 의각의 정문 사이로, 여러 경계 무사들이 팽지산과 백유성의 대립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함께 경계를 서며 안면을 튼 무사 하나가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는 남궁유린에게 물었다.
“유린, 팽 소협이 쫓아 다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의각주와는 언제…?”
“절대 아니에요! 팽 소협이 일방적으로 내건 조건이잖아요.”
“흠,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팽소협은 왜 그런 조건을 걸었지?”
“저도 모른단 말이에요…”
남궁유린은 수치심에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경계 임무 수행 중이라 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단지.
‘의각주님은 왜 저런 말도 안 되는 내기를 받아들이신 거야?
하북팽가는 도법으로 천하에 이름 떨치고 있다.
그러나 팽가 정도 되는 전통 깊은 무가에는 도법 외에도 다양한 호신공이 존재하는 법이다.
타고난 신력을 바탕으로 펼치는 권법 역시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다.
내공 없이 싸운다 해도 의원의 몸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절대 아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맹주를 제외한 이 자리의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떠올리고 있는 것과 같았다.
***
종학진은 빠르게 움직였다.
유성이 그를 좋아하는 것도 종학진이 알아서 상황에 맞게 판단하기 때문.
제일 먼저, 도왕 다음 진료 차례였던 무사들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촌각을 다투는 급한 환자는 없다.
“사정은 알고 계실 겁니다. 혹시 진료를 조금 미뤄도 되겠습니까? 어쩌면 오늘 진료가 힘들 수도 있습니다만.”
“물론이네. 이런 구경거리를 놓칠 순 없지.”
“나도 마찬가지네.”
그들도 역시 무인들.
팽지산과 의각주가 내공 없이 대련을 벌이겠다는 흥미거리에 밖으로 뛰쳐나왔다.
배울 점은 없을지라도 원래 이런 싸움이 가장 재밌는 법이다.
생사결이 아닌 규칙이 존재하는 대련이다.
여러 준비가 이루어지는 사이.
다른 무사들의 의사도 모두 확인한 종학진은 습관적으로 코 옆에 박힌 커다란 점을 긁적거렸다.
종학진이 생각하기에도 유성이 팽지산에게 사과하게 될 거다.
그러나 그에게 지는 것은 절대 흠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 팽지산이 무리한 대결을 벌였다고 욕먹을지도 모르는 일.
쉽게 생각했다.
종학진의 고민은 다른 부분이다.
‘할까? 말까?
그의 주력 부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무림맹과 의각의 규정집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처음 규정집을 받았을 때부터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폈기에 확신할 수 있다.
아무 문제없다.
어찌 보면 빈틈일 수도 있고, 전례가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이번에 해 보고 안 된다면 관두지 뭐. 분명 규정에는 없으니까.
유성이 일 잘하는 그를 꽤 믿는다는 점도 용감한 시도하게 만들었다.
‘경고 한번 먹더라도 잘리지만 않으면 되지.
얼른 의각 안으로 달려가 개인 짐 보따리에서 나무판 하나와 종이를 꺼내와 두 개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백유성, 팽지산.
종학진은 먼저, 경계 임무를 서고 있는 무사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사님들, 혹시 내기에 참여하시겠습니까? 누가 승리할지를 두고 작은 판이 벌어졌지 뭡니까?”
“내기? 난 근무 중인데?”
“특수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딱히 자리 벗어나지만 않으면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흠, 그렇기는 하지.”
무사는 내기라는 말에 흥미를 보였다가 금방 식었다.
“그런데 이건 너무 일방적이 아닌가? 누가 의각주에게 건단 말인가?”
“끙…”
종학진은 조심스럽게 적은 금액을 꺼내 유성에게 걸었다.
어딘가 역배를 노리는 무사들도 있겠으나, 일단 판이 시작 되어야 수수료라도 챙길 수 있다.
일종의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 의각 시험에서 유성 덕에 번 돈도 많고.
“일단 저부터.”
그제야 무사가 관심을 보였다.
“그럼 조금 걸어볼까. 난 팽 소협에게.”
“나도 팽 소협에게 걸지.”
“나도.”
어느새 내기판은 남궁유린의 앞까지 향했다.
“...”
잘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팽지산에게 확연히 쏠려 있는 배당.
남궁유린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유성의 이름 옆은 초라했다.
그러나 어울려 줄 수는 없다.
어처구니없지만 내기 조건중 하나에 그녀가 연관되어 있으니 더 그렇다.
“전 생각 없어요.”
“그러지 말고 조금만 걸지 그래?”
“그래, 별거 아니지만 돈이 많이 걸린 쪽이 승리한다는 말도 있다고 들었는데.”
“오, 나도 들어 본 적 있지. 응원 하는 셈치고 조금 거는 것도 좋아. 그럼 그 사람이 얼마나 힘이 나겠어?”
여러 무사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남궁유린은 고민에 빠졌다.
그들의 말을 모두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응원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제발 팽지산 좀 그만 보고 싶다.
백유성이 이기면 팽지산은 무림학관을 관두고 떠나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내 응원이 의각주님께 도움이 될까?
고민에 빠진 그녀를 두고 무사들끼리 의미심장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순진한 구석이 있다고.
남궁유린은 전낭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걸자. 그냥 응원하는 건데 뭘.
유성이 이기기만 한다면 최고의 결과다.
타인의 시선을 잠시 접어두고 오직 팽지산의 퇴관에만 집중했다.
남궁유린의 비단 전낭이 유성의 이름 위에 올랐다.
“통째로 거시는 겁니까?”
종학진이 전낭을 열어 보았다.
남궁유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항상 넉넉히 돈을 지니고 다닌다.
그녀는 오대세가의 수좌이자 안휘성의 패자, 그리고 온갖 상인들이 줄을 대기 위해 방문하는 남궁세가의 직계.
넉넉함의 기준이 타인과는 꽤 다르다.
전낭을 열어본 종학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금빛!
금편이 들어 있다.
일방적인 상황이라, 이번 판은 작게 열리리라 예상했던 종학진이 완전히 틀렸다.
팽지산의 승리에 돈을 건 사람들의 배당률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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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학진이 자기 장기를 살려 무림맹 한복판에서 내기판을 벌이는 사이.
또 다른 낙양 의방 출신 하인 하나도 그의 장기를 살리고 싶어 안달이 났다.
떠벌이라는 별명을 가진 장칠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의각주와 팽지산이 대련을 한다니!
이 사실을 모르는 누군가를 붙잡고 소문을 내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마침 종종걸음으로 의각을 가로질러 가는 군사부 소속 하인을 발견했다.
부군사 태정헌이 의각에 올 때 자주 대동하고 다니던 하인으로, 이미 장칠과 안면이 있다.
장칠은 재빨리 그에게 달려갔다.
“이보게, 많이 바쁜가?”
군사부 하인은 군사부로 부지런히 발을 놀리며 대꾸했다.
“바쁘지. 빨리 전해야 하는 물건이 있으니 할 말 있으면 같이 가면서 하세.”
아쉽지만 진득하게 이야기할 틈은 없었다.
장칠도 대련을 구경하러 돌아가야 하니까.
입맛을 다신 그는 빠르게 핵심 상황만 전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조미료를 치는 것도 잊지 않았고.
“지금 의각주님과 팽지산 소협이 글쎄…”
“뭐?! 그래서 다들 저렇게 모여 있단 말인가?”
“물론이지. 이 내기에 뭐가 걸렸냐면…”
신이 나 떠드는 장칠의 말을 흥미롭게 들은 군사부 하인이 군사부로 복귀했다.
그는 복귀하자마자 총군사실로 향하는 부군사를 발견했다.
그의 손에는 보고서가 들려 있다.
부군사 태정헌은 백유성에게 생기는 모든 일을 직접 챙기기 원하는 사람이었다.
목숨을 구함 받은 뒤로 군사부 일을 제외하면 항상 의각을 예의주시 했고,
하인에게 듣는 소식이 있으면 말해 달라 당부해 왔다.
“부군사님.”
“아, 무슨 일인가?”
“지금 의각에서 일이 하나 벌어졌답니다.”
“의각에서? 자세히 말해 보게.”
군사부 하인은 방금 장칠에게 들은 소식들을 전했다.
하인이 말을 전하자 마자 부군사가 크게 소리쳤다.
“아니! 의각주님이 팽지산과 대련이라니! 어쩌다가!”
총군사실 인근 복도에서 난 소음.
긴급한 보고서들을 처리하고 차라도 한잔 할까, 하던 제갈영영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그게 무슨…’
팽지산이라면 요즘 말 많고 탈 많은 절정 고수가 아닌가?
그와 유성의 대련이 어떻게 성사된 건지 의문이다.
그리고 걱정도 됐다.
싸움이 아니라 대련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걸 보니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다칠 수 있지 않겠나?
유성이 절정 고수였을 수도 있다는 추측은 그녀도 했지만, 무공에 손 놓은 지 오래 아닌가.
다쳐도 금세 치료할 만큼 신비한 의술을 펼치는 사람이지만 그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마음이 아플 것 같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물어봐야겠어.
제갈영영이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총군사실을 나서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았다.
“뭐? 진 사람이 남궁유린을 포기하기로 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그녀는 더 이상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했다.
벌컥—
총군사실 문이 열리며, 매서운 눈빛의 제갈영영이 신법을 펼치며 뛰쳐나갔다.
의각 방향으로.
부군사와 하인이 놀라 그쪽 방향을 바라만 보았다.
소문을 낼 때 자기 엉뚱한 추측을 더하기로 낙양 의방에서 악명 높았던 장칠은 이번에도 애꿎은 피해자를 만들어냈다.
***
종학진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무사들과 쑥덕거리는 모습은 당연히 맹주의 시야에 들어왔다.
뛰어난 시력과 청력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차렸으나 맹주는 눈감아 주었다.
두 사람의 대결을 자신마저 흥미롭게 여기고 있다.
저들 역시 마찬가지리라.
맹주는 남들에게만 엄격한 사람이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아쉽군.
명문세가 출신도 아닌 무림맹주는 체통을 지키느라 가만히 있을 뿐 다른 남자들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속으로 유성을 열렬히 응원하고 있다.
어쨌든, 대련 준비가 모두 끝났다.
아까보다 열배는 더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 무사들이 둥글게 원을 만들어 놓은 공터 한가운데.
팽지산과 유성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팽지산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정말 궁금하군요. 제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대련 제안을 하십니까?”
“제가 당연히 질 거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의서나 뒤적이더니 정신이, 큼, 정상적인 판단이 안 되나 봅니다?”
“그럼 서점에서는 본인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으면서 공평한 척 그런 대련을 제안하신 겁니까?”
지금 유성이 제안한, 내공 없는 맨몸 대련은 전에 팽지산이 먼저 꺼낸 조건이었다.
“...시작이나 합시다.”
반박할 말이 없는 모양.
팽지산이 자신 있게 하북팽가 호신 권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절정 고수답게 그럴듯한 자세가 잡힌 모습에, 무림맹 무사들 사이에서 작은 감탄성과 함께 커다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팽 소협 힘내시오!”
딱히 그가 호감이라 응원하는 건 아니다.
무사들이 평소 지니고 다니던 돈은 많지 않았고, 모두 합쳐도 남궁유린이 내놓은 돈보다 적었다.
즉, 팽지산이 이기면 그들은 한몫 단단히 잡게 된다는 소리다.
아직 의각주에게 큰 도움을 받은 적 없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그런 내막까지는 잘 모르는 팽지산의 어깨가 으쓱했다.
“모두 절 응원하는 모양—”
척.
유성이 육합권의 기수식을 취하자, 잘난 체 하려던 팽지산의 말이 뚝 끊겼다.
항상 일반인처럼 흐트러진 유성의 자세만 보아왔던 그는, 갑자기 상당한 수준으로 자세가 잡힌 유성을 보고 당황했다.
‘과거에 무공을 익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 수준이었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저 녀석이 절정 고수일 리 없지 않은가?
이제 스무 살이라고 들었는데!
진영호로부터 유성이 열일곱에 주화입마에 걸렸었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다.
그때 팽지산은 유성이 마공이라도 익힌게 아니냐고 몰아세웠으나, 정말 절정 고수여서 주화입마에 걸렸던 것이라면?
‘열일곱에 절정 고수라니, 절대 그럴 리 없다!
팽지산은 현실을 부정했다.
그리고 혹시 그렇더라도 자신이 육합권 따위에게 질 리 없을 테고.
***
대련 당사자는 현실을 부정했으나, 유성의 정보를 토대로, 절정 고수였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점치고 있던 맹주는 기수식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저런 천고의 무재가 어쩌다가 주화입마에 빠졌단 말인가…’
정파 무림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금 전 내공 금제를 핑계로 단전 부근을 살폈을 때, 산산조각 난 단전 조각들을 직접 확인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의각주는 모든 의원이 포기했던 정립을 치료할 정도로 신비한 의술을 사용하는 자니.
만약 유성이 주화입마를 치료할 방법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정립과 유성의 친분이 깊으니 자신이 도와주면 충분히 포섭할 수 있을 거다.
비록 지금은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지만 맹주도 백리세가를 키우고 싶은 야망이 있었다.
도왕도 유성의 자세를 보자마자 맹주쪽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의각주가 무공을 익히고 있었구나. 게다가 스물에 저 정도 수준… 대단하구나. 맹주는 이미 알고 있었어. 어쩐지 전혀 말리지 않더라니… 의각주에게서 승산을 본 거구나. 서로 내공을 금제했으니 의각주가 권의 고수라면 지산과 해볼 만하다.
유성이 지금 보여주는 자세에 비해, 내공 수준이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으나.
강호에는 내공 수준이 드러나지 않는 특수한 심법도 존재한다.
물론 도왕은 유성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에 착각한 것이지만.
도왕은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유성이 아들놈을 이겨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앞으로 훨씬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보다, 지금 한번 꺾여 정신을 차리는 것이 낫다는 판단.
무공만으로 가주가 결정되지 않는 팽가에서, 만장일치로 도왕이 가주로 결정된 이유가 있었다.
***
팽지산은 원래 선공을 양보하려 했다.
남궁유린 앞에서 선공을 양보하고 유성을 통쾌하게 꺾는다면 더 멋질 테니까.
그러나 유성이 상당한 수준인 걸 알게 된 이상, 그럴 여유가 없었다.
더 멋지게 보이는 것보다 일단은 이기는 게 중요했다.
어차피 서로 기수식을 취하는 상황.
팽지산은 기습적으로 보법을 밟으며 유성의 가슴을 향해 일권을 내질렀다.
“흐앗!”
타고난 신력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공격 초식.
상대가 방어하면 통째로 날려 버릴 수 있다.
허겁지겁 피하면 다음 초식으로 이어가려 했으나, 유성이 전혀 반응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인다.
‘자세만 그럴듯 하지 별거 없구나!
여차하면 변초도 준비하던 그가 일권에 온 힘을 집중시켰다.
곧 유성이 형편없이 뒤로 나뒹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
예상이 빗나갔다.
타고난 신력도 닿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 없는 법.
유성이 사선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하며 간발의 차이로 그의 주먹을 피하고 반격을 시도했다.
팽지산은 이겼다고 방심해 온 힘을 실었기에 자세가 살짝 흐트러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복부!
그는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으며 방어초식을 펼쳤다.
이번에야말로 유성의 공격이 자기 팔에 가로 막힐 거라 의심하지 않아으나.
스르륵.
정직하게 뻗을 것 같던 주먹이 마치 뱀과 같은 움직임을 보이며 팽지산의 팔을 타고 올랐다.
팽지산은 황급히 몸을 뒤로 날렸다.
‘피했다!
그러나.
유성의 주먹이 간발의 차이로 팽지산의 코를 스쳤다.
살짝 스친 코에서 코피가 뿜어져 나왔다.
쌍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팽지산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으아아!!”
악지르며 돌진하는 모습이 화가 단단히 난 황소 같았다.
‘그래, 코피만으로는 부족하지.
숨이 끊어질 때까지 몸통에 창을 하나씩 꽂아 넣어 줄 거다.
유성은 기꺼이 투우사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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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망토를 흔들어 도발할 필요는 없다.
눈앞의 황소는 이미 머리끝까지 분노로 가득 차 있어, 망토 없이도 투우사를 향해 저돌적으로 돌진했으니까.
유성은 그의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냈다.
무공에 대해서 만큼은 멍청하지 않은지, 이번에는 팽지산의 주먹이 횡으로 변화를 일으키며 쫓아온다.
이미 예상했다.
소림 보법의 묘리가 가미된 유성의 독문 보법이 펼쳐지자 변초마저 무위로 돌아간다.
‘맞으면 위험하겠지만 혜강 스님과 비교하면 어린아이 수준이야.
절정 후기의 고수와 절정 초입의 차이도 있고,
권각법을 주력으로 삼는 소림의 절예에 비하면 팽지산이 펼치는 권법은 깊이도 얕았고, 숙련도도 한참 부족했다.
새로운 무공을 배울 수 있을까 기대했던 유성은 김이 살짝 샜다.
‘기대했는데 그냥 타고난 힘으로 찍어 누르는 권법일 뿐이구나.
아마 지금까지는 그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어차피 도가 주력이고, 권법은 도법을 펼칠 수 없을 때 버티는 용도일 테니까.
상대에게 초식을 적중시킬 수 있다면 무섭겠지만, 유성에게는 움직임이 뻔히 보였다.
팽지산이 계속 초식을 펼쳤으나 유성은 간발의 차이로 피해냈다.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는다.
익히고 있던 모든 초식을 쏟아부어도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팽지산의 움직임이 점점 커졌다.
반면 유성의 주먹은 그의 몸 이곳저곳에 틀어박혔다.
“큭!”
방금 옆구리에 또 주먹을 허용한 팽지산의 눈에 초조함이 깃든다.
가슴, 복부, 어깨, 팔, 옆구리.
옷 안이라 보이지 않을 뿐, 그의 몸에는 이미 여러 개의 멍 자국이 새겨져 있다.
이곳저곳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올라온다.
‘무슨 주먹이!
팽지산이 인상을 썼다.
남들이 보기에 가볍게 스치듯 맞은 것으로 보여도, 당사자인 그는 한번 유성에게 맞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덩치도 자기보다 크지 않은데 어떻게 저런 힘이 숨겨져 있었는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
주먹보다 더 자신 없지만 변수를 만들기 위해 각법도 꺼내 들었다.
마침 서로의 거리가 가깝다.
기습적으로 유성의 허벅지를 터트릴 기세로 허리를 비틀며 휘둘러진 발차기!
스르륵.
그러나 이번에도 간발의 차이로 발끝이 유성의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간다.
‘무슨 저딴 보법이 다 있어?
내공도 쓰지 못하는 몸.
자신의 보법으로는 따라잡을 방법이 없었다. 수준 차이가 심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두 다리로 굳건히 설 때와 비교해 형편없을 정도로 자세가 흐트러졌기 때문.
아니나 다를까, 간신히 자세를 잡은 팽지산의 눈앞으로 주먹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퍼억—!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정신없는 와중, 그는 팔을 마구 휘저었다.
지금 추가 공격이 들어오면 패배다!
팽지산은 황급히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그러나 한참 거리를 벌리고 나서, 유성이 그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혼자 팔을 휘저으며 미친 듯 물러선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분노가 머리끝까지 잠식했다.
“날 농락해!”
“보기 좋군요.”
“뭐?”
유성은 시퍼렇게 멍들어가는 팽지산의 왼쪽 눈을 보며 슬쩍 웃었다.
이미 몇 개의 창을 꽂아 넣었음에도 지치지 않는 황소는 잡을 맛이 난다.
이제 유성이 먼저 달려들었다.
팽지산의 눈에 결연함이 떠오르더니 유성의 공격을 무시하고 마주 주먹을 뻗어왔다.
하수가 고수를 상대할 때나 펼칠만한 수법이지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으니 맷집을 믿고 동귀어진의 초식을 펼친거다.
하지만.
퍼억—!
팽지산의 회심의 일권은 유성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고 유성의 주먹은 그의 오른쪽 눈에 꽂혔다.
유성은 양쪽 눈에 시퍼런 멍을 새겨 넣은 후 그 모습을 감상했다.
지혈도 하지 못한 코에서는 쌍코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양쪽 눈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다.
팽지산은 그런 꼴을 하고도 항복할 생각이 없는지 다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포기하지 않아 주니 오히려 고맙다.
몸을 뒤로 슬쩍 빼며 미친 소처럼 달려드는 그의 다리를 걷어차자 팽지산이 자세가 일순 무너졌다.
포기하지 않길래 몇 차례 더 걷어차주자 이제 한쪽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린다.
유성은 슬쩍 주위를 살폈다.
가장 우려했던 도왕의 표정은 뜻밖에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더 즐기고 싶지만 사람들이 슬슬 불편해하는 표정이네.
주변 무사들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
팽지산이 너무 심하게 당한다고 여기는 걸지도 모른다.
유성은 평판 관리를 위해서라도 이쯤 하기로 했다.
‘하긴, 내가 봐도 몰골이 말이 아니네. 그래도 딱 한 방만 더 먹이고.
미친 황소의 숨통은 끊어 주어야 하니까.
진각을 밟으며 팽지산의 품으로 파고든 유성은, 팽지산이 마지막 발악으로 휘두른 공격마저 피해냈다.
그의 경악에 가득 찬 안면이 훤히 드러났다.
‘이번엔 훨씬 아플 거다.
팽지산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콰앙—!!
가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팽지산이 눈이 풀린 채 허물어졌다.
***
“이럴 수가… 의각주님이 저렇게 고수였다고?”
“내 돈!”
“이게 이렇게 된다고?”
호구 하나 물어 든든하게 한몫 챙길 수 있다는 생각에 지니고 있던 돈을 탈탈 털었던 무사들은 망연자실했다.
곳곳에 머리를 쥐어 짜는 자들도 있다.
팽지산의 상태를 걱정한 자들은 하나도 없지만 돈은 중대 문제다.
졸지에 상당한 돈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중에는 대부분의 돈을 몸에 지니고 다니던 무사도 있었다.
종학진은 신이 났다.
뜻밖에 판이 커져 수수료도 상당했고 유성에게 돈을 걸었던 것도 따게 된 것.
내기의 승리는 언제든지 짜릿하다.
‘의각주님, 충성!
그리고 대련을 지켜보며 손에 땀을 쥐고 유성을 응원했던 남궁유린은.
그가 간발의 차이로 피할 때는 비명을 지를 뻔하다가, 팽지산에게 공격을 성공 시킬 때는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대련을 보며 진심을 담아 누군가를 응원해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마침내 팽지산이 쓰러지자, 그녀는 방방 뛰며 환호했다.
‘이제 지긋지긋한 팽지산을 그만 볼 수 있어!
오라버니가 다쳐 억지로 무공을 수련하게 된 이후로, 그녀는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가문의 어른들이 주는 압박감.
친구처럼 지냈던 시녀에 대한 미안함.
억지로 수련해야 하는 무공에 대한 회의감.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것이 떠오르지 않았고, 순수하게 즐거웠다.
유성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했다.
***
제갈영영은 의각으로 달리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유성이 어느새 팽지산과 남궁유린을 두고 다툴 정도로 그녀와 사이가 진척된 건지.
처음에는 질투심이 치솟아 앞뒤 가리지 못했으나 점차 이성이 돌아왔다.
‘이야기가 전달 과정에서 잘못되었을 수도 있지.
유성의 주변을 매일 예의주시 했으나 그런 낌새를 눈치챈 적이 없다.
장칠이라는 입 싼 하인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고.
이 부분은 확인해 보면 된다.
그래도 제갈영영은 다급하게 움직였다.
혹시 유성이 다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러나.
제갈영영이 도착했을 때는 유성의 마지막 공격이 팽지산의 안면에 틀어박힌 순간이었다.
털썩 쓰러진 팽지산이 피떡이 되어 있었음에도 유성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는다.
제일 먼저 든 감정은 안도였다.
‘다행이다. 별로 다친 곳은 없는 거 같아.
마음이 풀린 제갈영영의 귓가로, 주변 무사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럼 이제 팽지산은 팽가로 돌아가는 건가?”
“그전에 사과부터 해야지.”
“참, 그렇지. 그런데 남궁유린이랑 의각주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나?”
“그건 팽지산 혼자 그렇게 주장한 거 아닌가?”
“그럼 남궁유린은 왜 저렇게 좋아해?”
“돈 땄잖아.”
“돈?”
“참, 넌 내기 참여 못했지? 남궁유린이 의각주님이 이기는데 걸었거든. 돈 좀 만졌을 걸?”
“아…”
과연 의각 안의 남궁유린을 보니, 환호하고 있다.
평소 조용하면서도 당돌한 구석이 있다고 여겼으나 저렇게 즐거워할 줄도 알고.
색다른 모습이다.
“총군사도 왔소?”
마침 맹주와 눈이 마주쳐 제갈영영이 그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
도왕이 유성에게 다가 갔다.
“의각주가 무공도 익힌 줄 몰랐군.”
도왕은 유성의 과거를 모르기에 그가 절정 고수라고 생각했다.
내공 수준을 알아챌 수 없으나 강호에는 내공 수준을 숨길 수 있는 심법도 존재한다.
유성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단전이 깨진 것만 주화입마로 변형 시켜서.
납득할 수 없는 이유보다는 주화입마라는 핑계가 편리하다.
“그런 일이 있었는 줄 몰랐네. 안타까운 일이야.”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죄송합니다.”
유성의 시선이 개구리처럼 뻗어 있는 팽지산에게 머물렀다.
“아닐세. 상대를 제대로 만난 셈이지. 저놈은 저럴 필요가 있었네. 내가 교육 한다고 시켰는데도 저 모양이라 우려가 커. 깨어나면 내가 책임지고 사과 시킨 후 팽가로 데려가겠네.”
“죄송합니다. 평소 저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 듯하여 그런 조건을 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괜찮네. 어차피 이 대련의 결과가 어떻든 팽가로 데려갈 생각이었네. 저놈은 그게 맞는 것 같네.”
유성은 도왕에 대한 생각을 조금 수정했다.
외관은 여전히 밉상이고 호전적인 성격이지만, 사리 분별 할 줄 아는 진짜 어른이었다.
“그나저나 미안한 말이지만 대련이 끝났으니 내 아들놈을 치료해 줄 수 있겠나? 꼴이 좀…”
쌍코피가 코와 인중에 그대로 굳어 있고 양 눈이 시퍼런 모습은 시각적으로 보기 안 좋았다.
이미 충분히 재미를 봤으니 그 정도는 해주기로 했다.
도왕도 이렇게 부탁하는데.
“알겠습니다.”
코피를 멎게 하고 눈 부분의 멍기를 조금 빼주었다.
이번에는 팽지산의 머리를 짚었다.
뇌에 정밀하게 치유 스킬을 사용하면 기절 상태를 해제할 수 있다.
유성이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그런데.
팽지산의 뇌에 회색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예전에 자주 겪어본 적 있는 증상.
‘이 새끼, 정신병을 앓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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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의 개념이 정확히 잡힌 것은 꽤 현대로 알고 있다.
미쳤다는 개념 정도는 있었으나 질환으로 취급된 것은 한참 후라는 이야기다.
정신병은 선천적 요인도 있고 후천적 요인도 있는데, 유성이 경험한 것들은 주로 후천적 요인이었다.
버츄얼 판타지는 절대 평화로운 세상이 아니었고 다양한 전쟁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환자들이 많았다.
그 외에도 여러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신성력으로 뇌에 회색 아지랑이가 감지되는 것이 정신병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돌이겨 보면, 팽지산은 남궁유린과 관계되었을 때, 유성에게 강한 공격성을 보였다.
만약 정신질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면 팽지산의 증상을 대략 정의할 수 있었겠지만,
유성은 그저 평범하게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조울증, 조현병, 망상 장애, 분노 조절 장애 등.
뉴스에서 가끔 접한 적 있는 질병들만 대략 아는 수준으로는 명확히 진단 내릴 수 없다.
다만 팽지산의 종잡을 수 없는 행보가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만 약간 이해했을 뿐.
그렇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밉상이다.
유성은 일단 도왕에게도 이 사실을 숨겼다.
정신질환을 설명하는 것도 복잡하다.
-내 아들이 미친놈이라는 소리인가?
이런 반응이 돌아올지도 모르고.
‘어차피 지금은 치료할 방법도 없지.
정신 질환은 의선의 손녀 임연화 만큼의 정신 오염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정신에 작용하는 문제.
정화 스킬을 얻어야 치료할 수 있다.
결국 의선의 손녀를 치료해 준 후 고민해볼 문제다.
[치유]
기절한 팽지산이 눈을 뜨며 상체를 일으켰다.
“...”
잠깐 어리둥절 두리번거리던 그가 유성을 발견했다.
그의 허망한 시선과 유성의 눈이 마주쳤다.
다시 얼굴이 일그러진다.
“유, 유린을 차지하기 위해 여태 실력을 숨겨 왔다니, 너같이 음험한 녀석에게 절대—”
퍼억!
도왕이 팽지산의 뒤통수를 때렸다.
“이놈! 네가 노래 부르던 대로 사내 대장부라면 결과에 승복하거라. 어서 의각주님께 사과하거라!”
“아, 아버지. 하지만!”
“어허!”
팽지산은 도왕과 얼마간 투닥거렸으나 그도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체념했다.
“크흑! 미안하다. 내가—”
퍼억!
“공손하게!”
때리는 도왕도, 맞는 팽지산도 꽤 익숙해 보인다.
팽지산은 남궁유린쪽을 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누가 보면 그녀와 사귀다가 실연이라도 당한줄 알겠다.
“의, 의각주님, 죄송합니다. 그동안 무례했던 언행들 모두 사, 사과드리고 약속대로 팽가로, 크흑… 돌아가겠습니다.”
팽지산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날 이후, 무림맹 내에 유성의 과거 경지가 널리 퍼졌다.
팽지산을 철저하게 깨부순 후 더 이상 유성이 절정 고수였다는 것을 의심하는 자들은 없다.
얼마간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을 받긴 했으나, 그 시선도 곧 사그라졌다.
유성이 계속 절정 고수였다면 모를까, 동정 어린 시선조차 그에게 상처가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며칠 후, 무림학관을 그만둔 팽지산을 숙소에 처박아 둔 채 도왕이 팔의 치료를 마무리 짓기 위해 유성을 찾아왔다.
그는 이번 습격 관련해서 무림맹 회의에 참여해 꽤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들었다.
“아들놈은 내가 철저히 교육시킬 테니 나를 봐서라도 용서해주게.”
“노력해 보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봤을 때는 팽 소협이 더 성숙해져 있으면 좋겠군요.”
“저놈도 점차 나아지겠지.”
팽지산이 앓고 있는 이름 모를 정신병.
그걸 치료하지 못하면 여전할 것 같지만 도왕의 통제 하에 있으면 유성을 더 이상 귀찮게 하지는 못할 거다.
그리고 남궁유린에게도.
***
팽지산을 꺾은 후, 남궁유린이 유성을 따로 찾아왔었다.
-의각주님, 팽 소협을 이겨 주셔서 감사해요. 그동안 얼마나 절 괴롭혔는지 몰라요.
-역시 그랬군요. 저도 쌓인 게 많았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녀는 큰 눈을 반짝이며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이렇게 말이 많은 모습은 처음이다.
항상 조용하고 뒤에 빠져 있는 모습만 봐 왔는데.
-대련을 지켜보는 게 괴롭지 않은 건 처음이었어요.
남궁유린은 그 말을 뱉고 나서 아차 싶은 표정으로 황급히 인사하고 가 버렸다.
무가인 남궁세가의 자제가 대련을 지켜보는 게 괴롭다는 건 무슨 이유일까?
유성이 의문을 가졌으나 그녀의 속이라도 들여다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이야기다.
***
유성의 휴무일.
침통만 챙겨든 유성이 무림맹 정문으로 나서자, 커다란 마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 안에 익숙한 얼굴도 보인다.
“오랜만에 뵈어요, 의각주님. 그동안 내부 정리가 끝나지 않아 저번 휴무일에는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어요.”
“괜찮습니다, 소옥님. 이제 문주님이라고 불러드려야겠지요?”
띠동갑녀가 민망한 웃음을 짓는다.
“그냥 편하게 불러 주세요. 취임식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어색하네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바쁘실 텐데 오늘은 왜 직접 나오셨습니까?”
“처음이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매 주 나오고 싶은데, 이제 그 정도 여유는 없어서 아쉽네요.”
소옥은 얼마 전 정식으로 하오문주가 되었다.
정연이 요양을 핑계로 태상문주로 물러났으며, 그 사이 여러 장로들이 교체되는 등 하오문이 꽤 시끌벅적 했다고 전해 들었다.
마차에 타고 이동을 시작하자 소옥이 작은 비단 주머니를 전해주었다.
손으로 만져 보았다.
작고 네모난 돌멩이 같은 게 들어 있는 듯하다.
“이게 뭡니까?”
“천운석이에요.”
“...!”
놀라 열어 보니 정말 천운석이 들어 있다.
다만 그 크기가 너무 작았다.
기존에 구한 천운석보다 더 작았으니까.
“더 많은 양을 구하는 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유성은 약간 실망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도움받는 처지에 성과가 미미하다고 화를 낼 수는 없다.
“아닙니다. 계속 신경 써 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사실 더 많이 구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천운석을 가진 자들에게 충분한 돈만 지급하면 되살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유성이 하오문에 기대한 부분도 그런 쪽이다.
운 좋게 운석이 떨어져 천운석을 새로 발굴해 내지 못하는 한, 중원 전역에 퍼져 있는 천운석을 사모으는 게 최선일 테니까.
그리고 그건 중원 전역에 인적 네트워크를 가진 하오문이나 개방이 최고겠지만, 개방은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무슨 문제가 있나 보군요.”
소옥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어떤 문제입니까? 혹시 돈이 부족하면 제가 보태겠습니다.”
빈민들을 치료할 때 필요한 약재나 환경을 모두 하오문에서 제공해주니 유성이 돈 쓸 일이 확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천운석을 수집한 이력이 있던 부호들을 수소문해봤는데, 대부분이 그걸 도둑 맞았더라구요.”
“천운석을 도둑맞아요?”
“네, 아직 널리 퍼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천운석을 훔쳐 간 자리에는 검은 나비 표식이 새겨져 있었어요.”
“검은 나비요? 저는 견문이 짧아 잘 모르겠습니다.”
“검은 나비는 전설적인 도둑 무영신투가 사용하던 표식이에요. 오십 년 전 마지막으로 발견된 후 여태 흔적이 없었으나, 최근 몇 년 전부터 다시 나타났어요. 물건을 훔치고 그 자리에 표식을 남겨두는 거죠.”
일이 귀찮게 됐다.
하필 천운석을 훔쳐 가는 도둑이 활동한지 수년째란다.
아무리 중원이 넓다지만 도둑의 손길이 어디까지 퍼졌을지 모른다.
“그래도 아직 훔치지 못한 천운석들이 많이 있겠죠?”
“맞아요. 그 혼자 모든 걸 훔칠 수는 없겠죠. 대신 천운석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자들은 거의 도둑맞은 게 문제예요.”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문도들이 열심히 알아보고 있으니 분명 더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너무 상심한 표정을 지었나보다.
소옥이 조심스럽게 위로했다.
“물론입니다. 안 된다면 그 도둑의 정체라도 밝혀주십시오.”
“그럼요. 그 부분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어쩌면 한 번에 의각주님이 원하시는 만큼의 천운석을 얻게 될지도 몰라요.”
맞다.
그 도둑만 잡으면 오히려 그가 여태 모아 놓은 천운석을 한 번에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화제를 돌려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차는 곧 하오문에서 준비한 장소에 도착했다.
안에는 저마다 꾸민 기녀들 십여명이 기다리고 있었고, 빈민가에서 온 듯 허름한 복장을 한 사람들도 스무명 정도 모여 있었다.
“하루 동안 얼마나 환자를 보실지 몰라 가장 상태가 안 좋은 자들로 준비해봤어요. 만약 원하시면 환자를 늘릴 수도, 줄일수도 있으니 제 마부에게 말해주세요.”
소옥은 이전에 본 적 있는 마부를 소개해 주고 잠시 일을 보러 떠났다.
유성은 진료실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빈민들 중 제일 중해 보이는 자들을 치료해 준 후, 유성은 기녀 한 명을 들였다.
“어머, 이렇게 잘생기셨는 줄 몰랐네요?”
기녀가 들어서며 유성에게 눈웃음 쳤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교태가 몸에 배어 있다.
‘꽤 예쁘긴 하지만 화장도 진하고… 요즘 내 눈이 너무 높아졌나?
제갈영영과 남궁유린이 떠오른다.
보름달과 반딫불 정도로, 기녀와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의 차이.
예쁘장한 기녀를 봐도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는다.
“괴질을 앓고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이거 때문에 일도 못하고 죽겠다니까요?”
툴툴거린 기녀가 예고도 없이 치마를 활짝 들어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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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녀는 짓궂은 구석이 있었다.
겉 치마 안에는 또 다른 치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다.
“...그럼 증상을 정확히 말씀해주십시오.”
정연과 처음 만났을 때, 지금은 태상문주가 된 정연이 기녀들의 상태를 대략 설명해 주었다.
남자를 상대하는 기녀들이 걸리는 괴질.
그걸 듣자마자 유성은 당연히 성병을 의심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았다.
치료할 때 환부를 전혀 안 볼 수는 없기에,
기녀의 짓궂은 행동을 무시한 채 최대한 담담하게 행동했다.
환부에서 고름이 나오고 안 좋은 냄새가 났다.
가려움과 통증도 있다니, 불편함이 심했을 거다.
손님도 받기 힘들었겠지.
유성의 성병에 대한 짧은 지식으로는 매독인지 임질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병명을 모른다고 치료까지 못 하는 건 아니다.
조용히 침을 꺼내 들었다.
“침 놓으시게요? 안아프게 놔주세요~”
“좀 아플 겁니다.”
“아이 참, 안아프게— 앗!”
기녀에게 신경 써서 가장 아프게 침을 놔주고, 치유 스킬을 발동시켰다.
역시 치유 스킬은 질병에 최고의 효과를 발휘한다.
기녀도 처음에만 따끔하지, 가려움증과 통증이 가시는지 신기해했다.
이어서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다른 기녀들도 모두 치료해주었다.
한참 후, 소옥이 돌아왔다.
“벌써 치료 다 마치셨다면서요? 아무도 치료하지 못한 괴질인데… 무슨 병이던가요?”
소옥과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기는 조금 민망해 유성은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해 주었고.
“낙양에 이런 기녀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꽤 많아요. 급속도로 퍼지고 있거든요.”
성병은 신체 접촉으로 퍼진다.
피임기구도 없으니 예방도 잘 안 될 테고.
환부가 좀 그렇지만, 사용할 수 있는 신성력의 양만 늘어난다면 한 번에 치료할 수 있는 기녀들을 더 늘릴 수 있다.
주기적으로 신성력을 파밍 할 수 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천운석으로 침을 만들 수 있으면 좋다.
“혹시 천운석을 가공할 수 있는 장인은 알아 보셨습니까?”
“마침 관련된 소식을 듣고 오는 길이에요.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자들 중에서는 사천당문이 유일해요.”
“역시 거기 뿐입니까?”
버츄얼 판타지에서 드워프들이 오리하르콘을 다루었으니, 여기서도 많지 않으리라 예상은 했다.
그러나 실제로 사천당가로 확인 되자 아쉬운 마음이 든다.
“원래 철가장이라는 곳도 있었어요. 유서 깊은 대장장이 가문인데 일할 때 도움이 되려고 비전 무공까지 익힌 자들이에요. 보유한 실력 좋은 대장장이만 해도 수십 명에 가까웠다고 하죠.”
“...”
“그들 중 일부 장인들은 천운석을 다룰만한 실력이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이십 년 전, 철가장이 망해 버렸어요.”
“그렇게 실력 좋은 장인들이 왜 망했습니까?”
“소문으로는 중요한 납품건에서 심각한 품질 문제가 있었다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긴 해요.”
석연치 않아도 이십 년 전 있었던 일이라면 이제 와서 어떻게 밝힐 방법도 없다.
“그런데 혹시 철가장이 망했어도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소옥이 고개를 저었다.
“의각주님의 부탁을 받고 그들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가 방금 나온 거예요. 철가장의 후인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실종되었어요.”
이상한 일이지만 이제 와서 그들을 찾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사천당가 뿐이라고 하신 거군요.”
“맞아요.”
유성이 사천에 다녀오려면 이동 시간만 해도 최소한 두, 세달은 걸릴 거다.
무림맹에 매여 있는 몸으로 아무 명분없이 몸을 뺄 수 있을 리 없다.
혼자 가면 위험하기도 하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
유성이 의각에서 일 한지도 한 달이 훌쩍 넘었다.
그사이 의각이 꽤 바빠졌다.
매일 환자들이 줄을 선 것은 똑같았으나 호기심에 찾던 어중이떠중이들은 찾아와도 진료받지 못할 만큼 환자가 몰렸다.
그중에는 꽤 심각한 부상을 당한 자들도 있었다.
듣기로, 여러 일들이 터져 무림맹 무사들의 외부 임무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거의 머릿수 채우기 용으로 따라다닌 무림학관 생도들도 조금씩 다쳐 돌아오는 상황에, 더 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무사들의 몸이 성할 리 없다.
“단주님까지 다치실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습니까?”
종학진이 경증을 파악한 순서에 따라 이번에는 백호단주가 진료실로 들어왔다.
전에 백호단원들도 여럿 다쳐와서 그의 상태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살펴보니 외상은 없으나 가슴에 내상을 입은 채였다.
시퍼런 손자국. 장법의 흔적이다.
“사파놈들이 뭉쳐 다니면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더군. 방심해서 한대 얻어맞았을 뿐이네. 그런데 치료할 수 있겠나?”
“당연하지요. 말끔하게 치료해드리겠습니다.”
“후, 다행이군. 복귀하는 날 친구들과 한잔하기로 했거든. 의각주도 생각 있으면 함께 하겠나? 내 친구들도 정식으로 소개해주지.”
“...”
이런 술에 미친 사람을 봤나.
처음으로 유성은 백호단주가 술을 끊게 만들었어야 하나 후회했다.
다친채로 돌아오면서도 내내 술과 고기를 뜯을 생각만 했을게 아닌가?
그러나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어 싱글벙글 웃는 모습을 보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런 사람이 술 끊으라는 말을 순순히 들을 리가 없지.
백호단주를 치료해준 후에도 진료줄은 끊이지 않았다.
신성력이 늘어나는 점은 반갑지만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시간적 여유도 필요하고 신성력을 아낄 필요도 있다.
며칠 후.
반가운 얼굴들이 도착했다.
“이야~ 드디어 여기서 일하게 되는군. 이게 다 의각주 덕이야!”
한 명은 의각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유성의 손을 붙잡고 연신 흔들었고.
“혼자 고생 많았네. 바쁘다고 들었는데 내일부터 최선을 다해 돕겠네.”
다른 한 명은 믿음직하게 유성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의원과 양의원이다.
차의원은 유성이 개인적으로 평가한 시험에서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을 받았다.
양의원에게 듣기로, 유성이 차의원에게 시험을 볼 거라고 통보한 후,
그는 귀찮을 정도로 양의원을 찾아와 함께 의술을 공부하자고 했단다.
올 때마다 손에 뭔가를 바리바리 싸왔다던가.
나름대로 의각에 들어오기 위해 그만의 방식으로 노력한 모양이다.
낙양 의방에서 두 명을 쏙 빼왔기에 소옥에게 조금 미안 했는데,
그녀는 유성의 말을 듣고 웃었다.
-낙양 의방은 걱정하지 마세요. 무림맹 의각 의원 세 명을 모두 여기서 배출했다는 말에 천하에 이름난 의원들이 지원하고 있어요. 환자들도 더 신뢰하는 분위기예요.
-그렇군요. 괜히 사람 빼와서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 걱정했습니다.
-물론 의각주님을 대체할 사람은 없겠지만요. 양의원님도요.
소옥은 차의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의 합류는 유성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튿날부터 의각이 조금 더 체계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성은 중상 환자부터 받아 쉽게 완치가 가능한 자는 치료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상태를 완화시켜 양의원과 차의원에게 넘긴다.
양의원은 굳이 유성의 도움이 필요 없는 환자들을 받다가 유성에게서 넘어온 환자들을 맡고.
차의원은 주로 경상 환자를 보다가 가끔 중상 환자들을 보는데 손을 보탠다.
그리고 밤마다 한 명씩 돌아서 의각에서 잠을 자며, 혹시 밤에 찾아올 수 있는 환자를 바로 돌볼 수 있도록 대처했다.
의각은 잘 굴러가고 있다.
그런데 유성의 눈에, 얼마 전부터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 남궁유린이 들어왔다.
팽지산이 무림학관을 그만둔 후 표정이 밝아져 의각 내 총각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던 그녀가 말이다.
남궁유린은 의각 경계 임무에 지원한 유일한 무림학관 생도.
유성과 친분도 있다.
의각의 대소사를 챙길 의무가 있는 유성은 근무가 끝나고 남궁유린에게 다가 갔다.
“요즘 무슨 일 있으십니까? 표정이 안 좋으신데요.”
몸이 아픈 게 아니라면 유성이라고 해도 남궁유린을 도와줄 방법이 없다.
사실 안부 인사에 가까웠다.
남궁유린은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혹시 제가 여기에 있는 게 도움이 되었을까요?”
앞뒤 다 자르고 그렇게 물어 오는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
“물론이지요. 남궁소저가 있어 의각 분위기도 더 밝았고 여러모로 도움이 됐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요.”
표정이 한결 나아 보인다.
유성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런 입바른 말 하나로 약간의 근심거리가 가신다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며칠 후, 그녀의 의각 경계 임무 지원 기간이 끝났고, 이번에는 남궁유린 대신 다른 생도들이 의각에 배치되었다.
같은 임무의 지원은 한 차례 건너 가능하단다.
***
떠벌이 장칠은 퇴근하여 집에 가기 전 푸줏간에 들렀다.
“부드러운 소고기로 넉넉히 주시오!”
백정을 향해 호기롭게 외쳤다.
‘역시 의각주님을 따라오길 잘했지.
이번에 받은 월급이 들어 있는 전낭이 두둑하다.
소고기를 사 들고 집으로 향하여 장칠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어머니의 안부를 살피는 거다.
그는 혼인도 하지 않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오늘은 월급 받아서 소고기 사 왔어요.”
어머니는 약 5년 전부터 눈이 흐려져 별다른 일도 못하고 집에만 계신다.
전에 양의원에게 진료 받았는데, 노안이라 어쩔 수 없단다.
다행히 흐릿하게나마 사물을 구별하니 더듬으며 집안일 정도는 할 수 있다.
장칠은 함께 고깃국을 끓여먹고 오늘 무림맹에서 있었던 여러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 글쎄 의각주님이 여 무사 한 명이랑 눈빛을 교환하는데 불꽃이 튄다니까요? 그 여자가 어찌나 예쁜지 종학진 형님도 한때 짝사랑 했다고…”
그도 사리 분별은 한다.
기밀 이야기는 전할 수 없지만 이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면 아직 소녀 같은 마음을 지닌 어머니는 신이나 이것저것 질문하고는 한다.
장칠은 이야기에 계속 조미료를 쳤다.
어느새 남궁유린과 백유성은 무가의 여식과 무공을 잃은 의원으로, 가문의 반대에 부딪혀 서로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애절한 연인 관계로 변해 있었다.
조미료를 치다 못해 세상에 없는 요리를 만들어낸 거다.
곧 어머니가 잠들면 하루 일과가 끝난다.
그런데.
“쿨럭!”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이야기 듣던 어머니가 갑자기 선홍빛 피를 토했다.
“어머니!”
하얀 이불이 붉게 물드는걸 보며, 장칠이 떠올린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당장 의각주님을 모셔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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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양의원이 의각 당직을 서는 날.
차의원은 요즘 인맥을 다지겠다며 백호단주 무리의 술자리에 기웃거린다.
태정헌 부군사의 초대로 한번 참여했다가 거기 사람들과 친분을 다질 필요가 있어 보이는지 자주 참석하는 모양이다.
술도 약하면서 부지런한 사람이다.
유성은 저녁에 무림학관으로 향했다.
몇 차례 고민했지만, 역시 직접 살펴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남궁유린을 찾아가는 중이다.
이미 의각 경계 임무 기간이 끝났기에 직접 찾아가지 않으면 그녀를 만나기 힘들다.
“의각주님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중간에 유성을 알아본 무림학관 생도가 아는체를 해 왔다.
요즘 무림학관 생도들이 종종 다쳐 의각에 찾아오기에 친분이 생긴 자다.
점차 영향력이 넓어지고 있다.
“아, 남궁유린 소저를 찾고 있습니다. 혹시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남궁유린이라면 아까 저 안쪽 정자에 앉아 있는 걸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성은 생도가 알려 준 곳에서, 용이 수놓아진 푸른 무복을 입은 남궁유린을 발견했다.
그녀는 홀로 정자 한쪽에 걸터앉아 보름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운 자태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돌아보았다.
눈에 놀라움이 깃든다.
“의각주님?”
“아, 남궁 소저. 말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남궁유린이 엉덩이를 움직여 옆자리를 내주었다.
정자에 앉혀두고 본론만 꺼내기도 애매해 사양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았다.
“...”
엉덩이 부분이 그녀가 남겨둔 체온으로 따뜻하다.
얼마 전 기녀들의 성병을 치료하고 와서 그런지,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려고 한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괜히 시선 둘 곳이 없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남궁유린도 자리를 권하기는 했지만 어색하기는 마찬가지.
막상 유성이 옆에 앉자 괜히 민망하여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나란히 앉아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을 보고 있는 남녀라니.
이상하게 보일 게 아닌가?
그런데 신기하게, 어색할지언정 지금 이 순간이 싫게 느껴지지 않는다.
약간 간질간질 한 것 같기도 하고…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만약 팽지산이었다면…
‘정신 차려, 의각주님을 누구한테 비교하는 거야!
엉뚱한 생각하던 중.
“좋네요.”
“네, 넷? 뭐, 뭐가요?”
유성이 부드러운 목소리와 그 내용에 순간 남궁유린의 사고가 마비되어 멍청하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보름달이요. 왜 저걸 보고 계셨는지 이해되네요.”
“아, 그렇죠? 저도 그래서 자주 봐요. 달빛 아래 있으면 세상 모든 게 잠시 멈춘 것 같아요. 시간의 흐름도 잊고 괴로움도 잊을 수 있죠.”
그녀는 꽤 감수성이 풍부한 소녀 같았다.
어쨌든 유성이 남궁유린을 찾아온 이유가 방금도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괴로움.
그녀는 무언가에 대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전에 대련을 지켜보는 게 괴롭다는 말도 했고.
유성이 오늘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다.
“오늘 제가 찾아온 이유는…”
꿀꺽.
옆에서 남궁유린이 침 삼키는 소리가 유성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풀벌레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조용한 정자라서 그런지 유독 크게 느껴진다.
“남궁 소저를—”
“의각주님!!”
유성의 말은 멀리서 그를 부르는 한 사람의 소리에 끊기고 말았다.
돌아 보니 이미 퇴근했던 장칠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오고 있다.
장칠은 처음 의각으로 뛰어갔다가, 유성이 무림학관 쪽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수소문 끝에 찾아온 것이다.
양의원은 당직을 서는 중이기도 하고, 유성에 비해 실력이 떨어져 이런 상황에서 유성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다.
그가 남궁유린과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지만 평소와 달리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유성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저희 어머니가 위독하십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유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각 식구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데 한가하게 급하지도 않은 남궁유린의 진료를 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장칠의 행실과 관계없이 환자부터 치료해야 한다.
“어떤 상황입니까?”
“어머니가 누워계시다가 갑자기 피를 토하셨습니다!”
몇 가지 병이 의심되지만 직접 보지 않고는 확신할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좋지 못한 징조라는 거다.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저희 집에 계십니다! 바로 의각으로 가서 호위무사를 모셔오겠습니다!”
“그럴 틈이 없으니 빨리 출발합시다.”
유성이 호위도 없이 장칠을 따라 달려갈 기세로 보이자 남궁유린이 벌떡 일어났다.
“제가 호위 해드릴게요.”
검을 드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드는 건 훨씬 낫다.
여기는 무림맹 인근.
삼류 수준의 흑도 정도만 가끔 돌아다니는 이곳에서 유성도 자신을 지킬 힘이 있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빨리 갑시다.”
장칠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 곳은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그가 방문을 열고 뛰어들어갔다.
“어머니!”
마침 주위에 도움받을 사람이 없었는지 집 안에는 장칠의 어머니만 홀로 쓰러져 있었다.
피비린내가 풍겨 왔다.
“제가 보겠습니다!”
유성은 얼른 장칠의 어머니를 살폈다.
안색이 창백하지만 피를 한번 토한 후로 추가적인 토혈은 없는지 조금만 흘러나오고 있다.
진맥해 보았다.
‘맥이 약하지만 다행히 아직 버틸 수 있어.
입으로 피를 토했다는 건 몇 가지를 의심해볼 수 있다.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피를 토했다고 한다.
의심되는 곳이 있다.
유성은 침통을 꺼냈다.
“의각주님! 저희 어머니 사, 살 수 있습니까?”
장칠은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아무리 유성이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장칠이 보기에 어머니의 안색이 너무 창백하고 지금도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이러다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 게 아닌지 두려웠다.
유성은 장침을 꺼내 장칠 어머니의 가슴에 찔러넣으며 대꾸했다.
“확인중이니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눈을 감고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오면서 장칠에게 들은 바로,
기침하며 토한 게 아니고, 평소 그의 어머니는 쉽게 피로해하고 소화불량도 호소했다고 한다.
이는 간쪽의 문제를 의심해볼 수 있다.
제일 먼저 간을 살폈다.
‘역시.
부드럽고 탄력 있는 원래의 간과 달리 울퉁불퉁하고 단단해 보이는 간.
간경화 증상이다.
간이 굳어 피가 그쪽을 통과하지 못하니, 식도쪽으로 몰려 혈관이 터져 버린 거다.
평범한 의원은 외과적인 시술을 하기 어려우니 이대로 환자를 놓쳤겠지만, 유성에게는 치유 스킬이 있다.
‘일단 급한 혈관부터.
식도쪽을 타고 주욱 살펴보자 한 가닥 혈관이 터져 있다.
다행히 터진 정도가 심하지 않았다.
물론 이대로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방치하면 사망하고 말겠지만,
장칠이 유성을 불러오는 동안 그의 어머니가 버틸 수 있었던 건 혈관이 작게 터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교하게 신성력을 컨트롤했다.
[치유]
혈관이 곧바로 아물며 새어 나오던 피가 멎는다.
“어? 의각주님! 어머님 입에서 피가 조금 덜 나는 거 같은데요? 제가 잘못 본겁니까?!”
장칠이 놀라 소리쳤다.
그가 눈치챌 만큼 효과는 즉각적이다.
더 이상 피가 새어 나오지 않게 되었지만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다시 터질 수 있다.
유성은 대꾸하지 않고 이번에는 굳어 있는 간을 향해 치유 스킬을 사용했다.
질병과 상처에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는 치유 스킬이 간에 퍼지자, 굳어 있던 간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게임으로 접할 때는 자세히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아마 치유 스킬이 작용하는 건 세포나 그런 것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닌가 싶다.
병에 걸려 상태가 악화된 부위를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주는 효과.
신기하게 노화에는 효과가 없었지만, 병에 걸린 부위의 정상화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게 아닐까, 유성은 생각했다.
머지않아 다시 말랑말랑하고 탄력 있는 간의 모습이 돌아왔다.
약초꾼 초산의 일로, 항상 신성력을 어느 정도 남겨두고 있어 다행이다.
유성은 그 후로도 정밀하게 몸 이곳저곳 살펴 안 좋은 장기를 치료 후, 장침을 뽑았다.
“어, 어떻습니까? 치료할 수 있을까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칠에게 씨익 웃어 주었다.
“치료 끝났습니다.”
“네에?”
“으음…”
마침 장칠의 어머니가 신음성을 흘리며 깨어났다.
“어머니!!”
장칠이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와 부둥켜 안는다.
오늘도 사람을 살렸다.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옆에서 소매로 눈가를 찍는 남궁유린이 보인다.
고개를 돌려보자 그녀가 민망한지 얼굴을 붉혔다.
“감동적이어서요.”
“...”
역시 남궁유린은 감수성이 풍부하다.
공감 능력이 좋거나.
잠시 후, 진정된 장칠이 넙죽 큰절을 올렸다.
“의각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평생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사과하는 이유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신성력이 차오르며 그의 진심이 전해진다.
“같은 식구끼리 도와야지요. 그런데 혹시 어머님 눈이…”
장칠 어머니는 눈에 제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았고, 잘 안 보이는지 옆을 더듬기도 했다.
고맙다며 무언가를 찾아 유성에게 건네주려는데 목표물을 한 번에 찾지 못했다.
자세히 보니 눈동자 색도 탁하고, 아무래도 눈이 불편해 보인다.
“아, 몇 년 전에 양의원님이 봐주셨는데 노안이라서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의선이나 양의원이라고 해도 현대에 알려진 질병까지 알 수는 없다.
이 시대에는 노인에게 나타나면 늙어서 그렇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정연의 치매도 그런 경우였고.
이번에는 장칠의 어머니에게 직접 물었다.
“어머님, 혹시 앞이 전혀 안 보이시는 겁니까?”
“아이고, 전혀는 아니예요. 안개 낀 것처럼 흐릿하긴 한데 앞에 뭐가 있다 정도는 대충 알 수 있어요.”
몇가지 질문 끝에, 그녀는 희미한 시력에 의지해 간신히 사물의 존재를 인지하는 수준이었다.
노안으로 시력이 나빠질 수는 있어도 앞이 거의 안 보이는 정도까지 가던가?
유성이 알기로 그렇지는 않다.
‘혹시 백내장 같은 거 아닐까?
백내장은 노화로 인한 노안과 달리 질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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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이 어머니의 눈에 대해 물은 후 고민에 빠지자 장칠은 불안했다.
“의각주님, 혹시 무슨 문제 있습니까? 호, 혹시 머지 않아 어머님이…”
차마 입으로 내뱉지 못한 말.
‘눈이 완전히 멀어 버리게 되시는 건가요?
어머니의 시력이 완전히 멀어 버리면 장칠은 의각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모셔야 할지도 모른다.
모시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언젠가 그렇게 될 거라고 각오도 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안 된다.
종학진이 내기판을 제안 해도 장칠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온갖 유혹을 이겨 내고 열심히 돈을 모았지만.
‘아직 모자라. 몇 년밖에 못 버텨.
하지만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온 세상이 어둠에 물들어 혼자 방 밖도 나가기 힘든 홀어머니는 도대체 누가 모신단 말인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동안 함부로 입을 놀려 하늘의 노여움을 산 걸까?
선뜻 달려와 어머니의 목숨까지 구해주신 의각주님에 대해 함부로 헛소문을 퍼뜨렸던 과거가 미치도록 후회되었다.
그가 혼자 북치고 장구치며 속이 시꺼멓게 죽어갈 무렵.
드디어 생각을 끝낸 유성의 입이 열렸다.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가능성을 봐서 그렇습니다.”
“가능성이요?”
유성은 불안한지 장칠의 팔을 붙들고 있는 그의 어머니에게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님, 제가 눈을 조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제 눈을요?”
장칠은 불안한지 유성의 침통을 힐끗 바라보았다.
시침 한 번으로 거의 모든 병을 치료한다고 일침신의라는 명성까지 얻은 유성이다.
그런데 시침도 시침 나름이지, 괜히 상태를 살핀다고 눈을 찔러 악화시켜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의각주님, 혹시 어머니 눈에도 침을 놓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침 놓으려는 건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그렇다면야…”
“그럼 좀 보겠습니다.”
장칠이 물러서고, 유성은 그의 어머니의 눈에 조용히 손을 덮었다.
‘갑자기 눈은 왜 살펴보신다는 걸까?
장칠의 어머니는 평소 아들로부터 의각주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모시는 분이 얼마나 대단한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어왔음에도 그녀는 유성이 눈 치료를 시도 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의선의 제자라는 양의원에게 어렵사리 진료 받았을 때,
늙은 사람들 중 종종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들었고, 여태 그렇게 알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편히 계시면 됩니다.”
유성의 손에 덮여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작은 등불이 새어 들어왔다.
새어 들어온 빛이 번져 마치 안개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
흐릿한 안개가 점차 걷히기 시작한다.
유성의 손과 눈 사이의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선명해진다.
‘착각은 아닐까?
눈이 손에 뒤덮여 있어 착각한 걸 거다.
어떻게 멀어 버린 눈을 고친단 말인가?
“...”
그러나 유성이 조심스럽게 손을 떼어내고, 어둠에 잠식된 시야가 서서히 돌아왔을 때.
“아아…!”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몇 년 사이 이마에 주름이 늘어난 아들의 얼굴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던 탓이다.
아들은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서서히 사라져가는 시력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 써 왔고,
만약 완전히 눈이 멀어 버리게 된다면 아들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기 위한 결심까지 서 있었는데…
“어머니?”
멀쩡해진 눈으로 다시 한번 아들의 얼굴을 생생히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장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 때문에 정말 고생 많았다…”
그리고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유성을 향해 몇 번이고 고개 숙였다.
“아이고, 의각주님! 이 노인네의 눈을 고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무슨 일인지 잘 파악 되지 않던 장칠은 그제야 눈치챘다.
비록 눈물을 흘리고 계시지만, 어머니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맑고 또렷하게 초점이 잡혀 있다는 걸.
“의, 의각주님, 저, 정말 저희 어머니의 눈이 고쳐진겁니까?”
“이놈아! 아주 잘 보인다, 잘 보여! 아이고, 의각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빙그레 웃는 유성을 향해 장칠은 다시 큰절을 올렸다.
수차례나.
장칠의 어머니 역시 늙은 몸으로 아들과 같이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유성과 남궁유린이 황급히 그만하시라고 말려야 할 정도로 두 모자는 계속 감사함을 표했다.
***
한바탕 큰절 세례가 끝난 후.
장칠과 어머니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원래 얼굴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
그리고 남궁유린 역시 커다란 눈에 한가득 물기를 머금은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얼마나 찍어 댔는지, 파란 소매 한쪽이 흥건히 젖어 있다.
“...”
괜히 혼자 냉혈한이 된 것 같아 머쓱한 유성의 오른손을 장칠의 어머니가 끌어 잡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 고마운가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다른 손으로 남궁유린의 왼손도 끌어 잡았다.
“대단한 가문의 무사님이시라고요?”
“남궁유린이에요, 어머님.”
“이름도 참 예뻐요. 듣던 대로 얼굴도 정말 곱고.”
“감사해요.”
예쁘다는 칭찬은 어떤 여자라도 기분 좋을 거다.
남궁유린이 슬쩍 웃었다.
이제 장칠 어머니의 시선이 유성에게 향했다.
“의각주님도 이렇게 미남이신지 몰랐어요.”
“큼.”
민망해 헛기침 하면서도 유성은 슬쩍 장칠을 째려보았다.
남궁유린의 미모는 칭찬했으면서 유성에 대해서는 별말 안한 모양이다.
나름 열심히 깎은 얼굴인데 서운하게.
그런데 장칠의 표정이 이상하다.
왠지 안절부절못 하는 것 같다.
“어, 어머니—”
“두 분, 굴하지 말고 예쁜 사랑 하세요. 의각주님 실력이 이렇게 출중하신데, 무사님이 열심히 가문 설득하시면 두 분 꼭 혼인 할 수 있을 거예요.”
유성과 남궁유린의 손을 겹쳐주며, 어머니가 한 말에 장칠이 양 팔을 휘적이며 괴성을 내질렀다.
“으아아! 죄송합니다아아아!!”
장칠이 어머니에게 뭔가 또 헛소리를 해 놓은 모양이다.
유성이 어처구니없어 남궁유린에게 고개 돌렸다.
그녀도 마찬가지 일 테니까.
그런데.
남궁유린과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그건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설마 장칠, 너…?”
당황한 장칠의 어머니가 손을 놓길래 유성도 남궁유린과 강제로 포개져 있는 손을 빼냈다.
유성의 손을 놓친 남궁유린이 무의식에 허공을 움켜쥐다가 슬며시 손을 거둬들였다.
***
막 회복하여 쉬어야 하는 장칠의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유성과 남궁유린은 밖으로 나섰다.
장칠이 쪼르르 따라와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의각주님! 남궁유린님!”
미안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연신 사과하는 그를 보며 유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그러지 마십시오. 남궁 소저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어머님이 적적해 하셔서 이것저것 이야기해드린다는 게 그만… 저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겁니다.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맹세까지야… 아무튼 믿어보겠습니다.”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어머니 치료해주신 것도요. 아 참, 그리고 이거…”
장칠이 품에서 전낭을 하나 꺼냈다.
“이걸 왜…?”
“치료비 받으셔야지요.”
억지로 장칠이 쥐어 준 주머니가 살짝 열려 있었는데, 안에는 은자들이 꽤 많았다.
비록 유성이 해준 일에 비하면 많지 않을지라도 장칠에게는 분명 큰돈일 텐데.
“너무 많습니다. 같은 식구 어머님인데요.”
“아닙니다. 일 그만두고 어머니 모셔야 하면 쓰려고 모아둔 돈입니다. 다 드려도 아깝지 않지만 생활비만 제했습니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습니다.”
실랑이 끝에 유성은 약간만 챙기고 장칠에게 모두 돌려주었다.
가볍게만 봤던 장칠이 건실한 사람이어서 의외였을 뿐.
무림맹으로 복귀하는데, 남궁유린의 표정이 밝아 보인다.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이 생기가 돌아 보는 사람마저 기분 좋아진다.
‘지금 진료 이야기 꺼내기는 적합하지 않겠네. 진짜 그쪽이면 당장 치료해주지도 못 하는데.
다시 기회를 보기로 한 유성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원래 눈물이 많으십니까?”
“아… 조금요. 그리고 아까 제 오라버니 생각도 나서요.”
“...”
남궁유현도 눈을 다쳤다.
장난 좀 치려다 괜히 남궁유린의 기분만 망쳐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는데.
“그래서, 지금 기분 좋아요. 의각주님이 오라버니 눈 치료해주실 거라 믿으니까요.”
보는 사람조차 기분 좋아지는 밝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
이튿날.
장칠은 여러 군것질거리를 바리바리 싸와서 유성에게 건넸다.
“저희 어머니가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하고, 죄송했습니다!”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잘 먹겠다고 전해드리십시오.”
“네, 의각주님!”
장칠은 뒷걸음질 쳐서 공손하게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친한 하인 하나가 손짓해 그를 불렀다.
“장칠, 잠깐 이리 와봐.”
“왜?”
구석진 곳에서 하인이 장칠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어제 누가 너 무림학관에서 봤다던데 의각주님이랑 남궁유린이랑 같이 있었다며? 둘이 분위기 어떻든? 진짜 막 분홍빛이었어?”
친한 하인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장칠이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맛깔나게 들려주리라.
“뭔 개소리야? 그런 거 하나도 없었으니까 헛소리 할 거면 가서 약재나 들여놔!”
“아니, 갑자기 왜… 어제까지만 해도 너도—”
“쓰읍! 한 번만 그딴소리 하면 너라도 가만 안둔다?”
장칠이 정색하며 가 버리자 하인은 벙쪘다.
‘이런 이야기는 지가 제일 신나 했으면서 왜 저래? 뭘 잘못 처먹었나?
장칠은 새롭게 태어났다.
그는 의각의 소식은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단속하고, 외부 소식들을 유성에게 가감 없이 전하는 충실한 하인이 되었다.
***
어느 날, 장칠이 유성에게 소식을 하나 전했다.
"의각주님, 검왕이 남궁유린님을 찾아와 가문으로 데려가려고 한답니다."
"그래요?"
"네, 왠지 알려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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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휘성의 패자이자 오대세가 중 첫 손가락에 꼽히는 무림세가.
수많은 상인들과 중소 문파들이 줄을 대기 위해 찾아오는 곳.
겉으로 보기에, 안휘성에서 만큼은 황제 부럽지 않은 위세를 떨치는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환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을 맞이했다.
가주는 어른에게 혼나는 어린아이처럼 얌전히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앞에 앉은 노인은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로운 기도를 가진 자였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유린이 복귀하지 않겠다고 했다지?”
“그렇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아버지.”
노인은 바로 가주의 아버지이자 당대의 검왕 남궁진이다.
무표정한 검왕이 차를 들이켰다.
가주는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무림학관에 가 있는 남궁유린이 복귀하라는 말에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가주는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 숙였다.
대대로 검왕을 배출해 온 남궁세가.
가주는 벌모세수부터 시작해 온갖 지원을 받았음에도 아버지처럼 대단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항상 죄송한 마음을 품어 왔던 가주는 아들 남궁유현이 태어나 한시름 놓았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무재를 보인 아들이 순조롭게 성장하며, 검왕이 많이 유해졌던 탓이다.
남궁유현은 바짝 쫓아오는 하북팽가를 뿌리치고 남궁세가가 여전히 최고의 무가로 남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였다.
오대세가 중 다섯 번째만 필사적인 게 아니다.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
그런데.
아들 남궁유현마저 그런 꼴이 되어 집 안에 틀어박혔다.
이제 믿을 구석이라고는 딸 남궁유린 뿐인 상황에서, 딸이 갑자기 말을 안듣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사람을 보내 데려오겠습니다.”
가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자,
검왕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됐다. 내가 직접 무림학관에 들려 데려오겠다.”
가주는 입을 다물었다.
검왕이 한번 선언하면 그의 말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
남궁유현을 최고로 키워내기 위해 가주 자리를 넘겨 주고 태상가주의 위치로 물러났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남궁세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
검왕은 호위를 꾸리겠다는 가주의 말을 물리치고 홀로 남궁세가를 떠났다.
얼마 전 도왕이 정체불명의 무리에게 습격 당했다고 전해 들었으나, 검왕은 그런 도왕을 비웃었다.
그는 자기 무위에 큰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낙양으로 향하며, 여러 소문을 들었다.
최근 큰 명성을 얻은 신의가 눈이 먼 사람을 치료해냈다던가, 하는 소문.
손자 남궁유현이 떠오르며 귀가 솔깃했지만, 내막을 전해 들은 그는 관심을 접었다.
이미 눈에 상처를 입은 봉사 하나가 신의를 찾아간 적이 있단다.
그리고 그자는 여전히 봉사다.
‘단순히 시력이 좀 나빠진 자를 고쳤을 뿐, 유현이처럼 눈에 검상을 입은 사람까지 치료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검왕은 자기 판단을 굳게 믿었다.
그리고.
손녀 남궁유린 역시 그의 지도 아래 있을 때 가장 큰 성취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무림학관 생도들이 술렁거렸다.
화경의 고수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검왕을 실제로 보게 되었으니, 무림인인 그들은 동경의 눈빛을 보냈다.
남궁유린과 검왕의 만남 역시 주목을 받았다.
‘과연 검왕이 왜 남궁유린을 찾아온 걸까?
검왕은 남들이 지켜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남궁유린과 대화를 나누었다.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에 뵈어요, 할아버지.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널 데리러 왔다.”
“...”
검왕이 탐색하듯 남궁유린을 살폈다.
여전한 기도와 자세.
그렇다고 손에 굳은살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편지에 쓴 것과 달리 전혀 성취가 없는 것 같은데 어찌 된 일이냐?”
“그건...”
남궁유린은 무림학관을 그만두고 남궁세가로 복귀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오라버니가 건재할 때는 가기 싫다고 해도 무림학관에 가라더니, 이제 와서 오라버니가 다치자 그녀에게 복귀를 종용했다.
가문으로 돌아가면 후계 수업을 받으며 검왕에게 직접 무공을 배우게 될 거다.
남궁유린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고민하다가 남궁세가로 전서구를 띄웠다.
-여기서 수련에 성취가 있어서 아직은 돌아갈 수 없어요. 때가 되면 돌아갈 테니 기다려주세요.
원치 않아 오게 된 무림학관이었다.
하지만 이곳으로 와서 좋은 점도 있었다.
그건 바로, 어릴 적 친하게 지내던 시녀를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항상 옆에 두고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들어왔었는데, 막상 떨어져 보자 약간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가문으로 돌아가면 다시 그녀를 마주해야 한다.
아직 남궁유린은 스스로 극복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더 지켜보고 싶은 사람도 있어.
생각을 끝내고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가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엄한 할아버지의 말을 거역해 본 적 없지만, 남궁유린은 문득 유성이 떠올랐다.
단전을 잃은 몸으로 도왕 앞에서 그의 핏줄 팽지산을 두들겨 패던 패기!
하물며 남궁유린 자신이 핏줄 앞에서 못할 소리가 뭐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불쑥 용기가 솟아올랐다.
감히 아버지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검왕과 빤히 시선을 맞췄다.
“그건 죄송해요. 하지만 전 아직 돌아가지 않겠어요.”
“...”
검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림학관 생도들이 이쪽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다.
절대 거절당할 리 없을 거로 생각해 당당하게 이야기 꺼냈지만,
소극적일지언정 자신을 거역해 본 적 없는 손녀가 처음으로 거역한 거다.
단번에 이야기가 끝날 것 같지 않다.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꾸나.”
장소를 옮기면서, 검왕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손녀에게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 유약해 걱정했더니, 어느새 내 앞에서 자기주장도 할 줄 알게 되었구나. 긍정적인 변화다.
가문의 중심으로, 일부러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아들도, 손자도 자기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남궁유린도 마찬가지였는데, 무공 실력은 정체되어 있으나 내면의 성장이 있었던 듯하다.
언젠가 가주가 되어야 함에도 유약한 성정이 아쉬웠는데, 그 부분이 채워지고 있는 모습이 기껍다.
접객당 한 곳에 자리 잡고 검왕이 물었다.
“돌아가지 않겠다는 건 그 시녀 때문에 그러느냐?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셈이냐?”
“물론 그 이유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에요. 지금은 밝힐 수 없지만 절 믿어 주세요.”
의각주님이 오라버니의 눈을 고쳐주신다고 했어요.
물론 이건 유성과 비밀로 한 약속이라 공개하지 않았다.
검왕은 억지로 끌고갈 수 있었지만, 처음으로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밝힌 남궁유린을 존중하기로 했다.
어차피 목적도 무공을 전수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좋다. 정 그렇다면 당분간 여기 머물면서 제왕검형을 가르쳐 줄 테니 이건 열심히 수련하겠다고 약속해라. 그럼 당분간 복귀하라고 하지 않겠다.”
남궁세가의 후계자에게만 전수되는 제왕검형.
남궁유현이 익혔던 절기가 이번에는 남궁유린에게 차례가 돌아왔다.
***
유성은 환자들을 보면서 자꾸 남궁유린이 떠올랐다.
‘검왕이 와서 데려가려고 한다라…’
사정도 모르는 남궁세가 내부의 일이다.
장칠의 짐작과 달리 둘은 남녀 간의 사이가 아니기에, 유성이 끼어들 여지는 단 하나도 없다.
단지, 유성은 떠나기 전 그녀를 한번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진료도 못 봤으니까.
그런 핑계를 대며, 진료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오늘따라 환자가 많군.
의각의 의원이 세 명으로 늘어나 조금 일찍 끝나는 날도 많았으나 오늘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아직 환자가 많이 남았습니까?”
진료실로 들어온 장칠에게 물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장칠은 유성에게 양해를 구하고 종학진을 찾아갔다.
아직 환자들이 열 명 이상 남아 있다.
“형님, 위중한 환자 있습니까?”
위중한 환자는 유성에게 가야 하는 수준의 환자를 뜻한다.
종학진이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아니? 왜?”
“그럼 양의원님이랑 차의원님한테 좀 몰아주실 수 있어요?”
“아, 의각주님 일 있으시대?”
“의각주님이 그런 말씀 하신적은 없고요. 그냥 제가 보기에 좀 피곤해 보이셔서요.”
“아이쿠, 그럼 안 되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의각주님 환자는 더 없다고 전해드려.”
“고맙습니다.”
오늘은 차의원이 당직.
장칠의 말을 듣고 짐을 챙겨 진료실을 나선 유성은 아직 환자가 꽤 남아 있는 걸 보고 그의 배려를 눈치챘다.
일반 환자들을 치료해 신성력을 쌓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오랫동안 남궁유린을 더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유성을 무림학관 쪽으로 이끌었다.
“의각주님, 남궁유린님은 지금 무림학관 네 번째 접객당에 있답니다.”
슬쩍 장칠이 전해준 말을 듣고서.
잠시 후.
유성이 네 번째 접객당 앞에 도착했을 때는 접객당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검왕과 함께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안에는 남궁유린 혼자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그녀의 초점 없는 눈이, 유성을 발견하고 초점을 되찾았다.
“의각주님?”
벌떡 일어난 그녀가 다가왔다.
“아직 계셨군요. 전에 못한 말을 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지, 지금요? 이, 일단 들어오세요.”
남궁유린이 왠지 허둥대며 유성을 접객당으로 이끌었다.
누가 주시하고 있지 않은지 주위도 살피고 문도 꼭 닫았다.
“여기 앉으세요.”
유성이 그녀가 권한 자리에 앉자, 남궁유린이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옆자리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손이 가지런하다.
꿀꺽.
남궁유린이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전에도 그러더니, 인후 쪽에 무슨 문제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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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객당은 손님을 맞이하는 곳.
원래 남궁유린이 할아버지인 검왕을 맞이한 장소인데, 그가 보이지 않아 행방을 먼저 물었다.
진료중에 들어오면 괜히 번거로울 테니까.
“여기서 당분간 머무르시기로 하셔서 무림맹에 인사하러 가셨어요.”
다행이다.
“그럼 당장 가문으로 돌아가시지는 않는 겁니까?”
남궁유린은 기뻐보이는 유성을 보자 슬쩍 웃음이 나왔다.
그녀도 기뻤으니까.
시녀를 피할 수 있어서인지, 다른 이유인지는 그녀도 확신하지 못했지만.
“네. 당분간 돌아가지 않아도 돼요. 대신 할아버지께 무공을 배우기로 했지만요.”
“검왕께서 직접 무공을 가르쳐 주신다구요?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검왕에게 직접 무공을 배우는 건 무림인에게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었나?
축하를 건넸음에도 왠지 석연치 않아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유성은 얼른 본론으로 넘어갔다.
“아, 제가 찾아온 이유는—”
“자, 잠시만요!”
흡- 후.
흡- 후.
남궁유린은 심호흡했다.
전에 보름달 아래 정자에 나란히 앉아, 유성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마저 잇지 못한 게 떠오른다.
‘분위기도 그렇고, 분명 고백하려고 하셨을 거야.
장칠이 달려오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이 돌아가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성이 급하게 달려온 듯하다.
‘지금 안 돌아간다고 말씀 드렸는데 의각주님은 왜 이렇게 급하실까?
아직 어떤 답변을 돌려줘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분명 유성에게 호감이 있지만 고백을 받아드릴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모르겠어. 그냥 마음이 이끄는 대로 답하자.
결심한 남궁유린이 입을 열었다.
“이제 말씀해주셔도 돼요. 준비됐어요.”
꿀꺽.
다시 한번 마른침이 넘어간다.
“아, 네. 제가 소저의 몸을 좀 살펴보고 싶습니다.”
“뭐, 뭐라구요? 버, 벌써요?”
“벌써라뇨? 처음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처음이죠! 의각주님, 그렇게 안봤는데 무례하시네요!”
남궁유린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
듣자 하니 못 하는 소리가 없다.
아무리 얼굴 좀 잘생겼기로서 어떻게 처녀에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동안 조금씩 쌓아 가던 호감도가 수직 하락했다.
오라버니의 눈 치료에 관한 것만 아니면 이 음란한 사람과는 아무 말도 섞지 않을 테다, 라고 다짐한 순간.
“진료 받는 걸 그렇게 싫어하실 줄 몰랐습니다. 함부로 요청해서 죄송합니다.”
“...네?”
“네?”
유성이 ‘몸을 살펴보겠다’라고 하는 건 환자에게 으레 사용하는 말이다.
의원이 환자에게 사용하기에 전혀 이상하지 않은 말.
본래 머리만 살펴볼 생각이었으나, 인후 또는 다른 쪽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몸 전체를 신성력으로 살펴볼 생각이었던 것.
뭔가 병이 있다면 조기에 발견하는 게 좋으니까.
그런데.
남궁유린의 얼굴이 급속도로 붉게 물들었다.
홍당무?
그 정도가 아니다.
톡 건드리면 터져 버릴 듯 새빨갛게 익은 홍시 같았다.
분노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뭘 했다고… 트라우마 같은 게 아니라 설마 팽지산처럼 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유성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대화를 나눠봤자 분노만 더 유발할 뿐이다.
“그…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접객당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슥.
유성의 소매가 붙잡혔다.
이어, 모기만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진료… 해주셔도 돼요…”
사람의 태도가 이렇게 순식간에 뒤바뀌어도 되는 걸까?
‘팽지산은 일관적이기라도 했지.
심각한 오해가 생길 뻔했지만, 다행히 그녀의 다음 말에 풀렸다.
“아까는 제가 잘못 들어서 착각했어요. 소리 질러서 죄송해요…”
“아, 그랬군요. 그럼 진료 해 보겠습니다. 몇 가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거든요.”
그녀가 무슨 착각을 했는지는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고, 유성은 다시 자리에 앉아 남궁유린의 손목을 잡았다.
신성력을 흘려 넣어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역시 남궁세가의 직계라는 건가?'
팽지산의 근골까지 제대로 살펴본 적은 없으나, 남궁유린은 다른 무림학관 생도들보다 월등한 근골을 가지고 있었다.
‘하긴, 그러니까 검왕이 직접 무공을 전수하겠지.
납득한 유성은 그녀의 몸에 특별한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 신성력을 뇌쪽으로 올려보냈다.
그녀를 진료하고 싶었던 진짜 이유.
대련을 지켜보는 게 괴롭다는 말.
어떤 트라우마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마침내 신성력이 뇌까지 도달했을 때,
‘역시…’
유성은 옅은 회색 아지랑이를 발견했다.
팽지산과 같은 계열의 정신병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 하지만,
회색 아지랑이가 옅은 걸 보면 트라우마로 인한 현상일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걸 수도 있고.
다만, 지금은 치료할 방법이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남궁유린이 유성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음...”
어떻게 말해야 할까.
당장 치료할 수 있다면 흔쾌히 공개하겠지만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게 그녀에게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어 망설였다.
그리고 그건 진료받는 당사자의 처지에서는 꽤 공포스러운 일이다.
다 죽어 가는 사람도 살려내던 유성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문제라니!
최악의 가정마저 하게 만들었다.
“호, 혹시 저 죽나요?”
“그럴 리가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심각한 문제라도 있나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이 정도로 물어보는데 더 이상 숨기기는 힘들다.
“...사실 발견한 게 있습니다만, 제가 지금은 별로 도움이 못 될 거 같아 망설여지네요. 제 이야기를 들으면 괴로울 수 있으니 소저가 이야기 들을지 결정해주셔야겠습니다.”
평소였다면 남궁유린은 듣지 않는 걸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자기 몸에 관한 이야기지만 유성이 들려주기를 꺼려하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문제가 커질까 회피하기 바빴던 성격 탓이다.
그런데 조금 전 있었던 경험.
검왕에게 당당하게 의사를 전달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진 일은 자신도 믿기 힘든 성과였다.
제왕검형을 배우는 게 썩 달갑지는 않지만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부딪혀 보기로.
“들을게요. 말씀해주셔도 돼요.”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쩌면 소저가 이미 잘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만...”
“...”
“제가 추측하기로, 소저는 심상을 앓고 계신 것 같습니다.”
심상.
마음의 상처.
그리고 유성이 전달하고자 하는 심상의 의미는 정신질환, 그중에서도 트라우마다.
“역시 그런가요?”
남궁유린의 표정이 어둡다.
“알고 계셨군요.”
“네. 혹시 어떤 것 때문인지도 짐작 하시나요?”
“지난번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대련과 관계된 게 아닐까 합니다만.”
남궁유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기억하고 계시네요. 음… 제가 자세히 이야기해드리는 게 도움이 되나요?”
마음의 병을 얻게 된 계기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치료에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좋아요. 그때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끔찍하긴 하지만... 말씀 드릴게요.”
‘이번에도 한 발 나아가 보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가 열 살 무렵.
오라버니 남궁유현이 가문의 일류 무사와 펼치는 진검 대련을 지켜보았다.
평소에도 자주 대련을 지켜보고는 했지만, 그날은 유독 남궁유린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일류 무사는 오라버니의 좋은 대련 상대였다.
오라버니는 대연검법을 거쳐, 직계에게 전수되는 창궁무애검법을 펼치고 있었다.
끝없는 푸른 하늘을 거리낌 없이 누비는 한 자루의 검.
세상의 제약을 넘어 자유롭게 펼쳐지는 검로를 보며 남궁유린이 느끼는 것은 경외였다.
검로가 뇌리에 각인되는 것 같았다.
‘오라버니는 정말 대단해. 나도 오라버니처럼 멋진 고수가 되어야지. 언젠가 창궁무애검법도 배울 거야.
그 무렵의 남궁유린은 무공을 수련하는 것이 즐거웠다.
수련도 자발적으로 열심히 했다.
그녀는 오라버니의 모습을 눈에 담다가 전담 시녀 겸 호위무사인 주연과 함께 다른 연무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언니, 우리도 대련하자!”
남궁유린보다 열 살 많은 시녀는 이류 무사였다.
본격적으로 무공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남궁유린을 상대하기에 충분한 실력자다.
남궁유린은 그날따라 오라버니를 따라 진검을 들고 싶어졌다.
“언니, 진검으로 대련 해도 돼?”
“아가씨,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어요.”
“언니는 고수잖아. 여태 한 번도 못 이겼는데 뭘.”
시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허락했다.
아직 수준 차이가 많이 나서, 자신만 조심하면 다칠 일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요. 대신 제대로 못 다룰 거 같으면 목검을 드셔야 해요.”
“응, 좋아!”
남궁유린은 어릴 적 오라버니가 쓰던 진검을 들었다.
목검보다 묵직했지만, 특수 제작되어 휘두를 정도는 됐다.
태어나 처음으로 진검을 들어 보았다.
‘목검보다 훨씬 느낌이 좋아.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아.
대련이 시작되었다.
평소처럼 대연검법으로 공격을 시작한 남궁유린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검이 답답해하는 거 같은데.
주연과 몇 차례 초식을 주고받았으나 답답함은 가시지 않고 더 커지기만 했다
‘아무래도 이게 아닌 것 같아.
그동안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던 대연검법의 검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궁유린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다음 공격 때 대연검법 초식의 틀을 깨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검을 휘둘러보았다.
무의식중에 펼친 초식은 남궁유현이 펼쳤던 창궁무애검법의 그것과 꼭 닮아 있었고,
주연이 다급하게 펼친 방어 초식을 뚫어내고 그녀의 얼굴을 깊게 베어 버렸다.
촤악—!!
피가 뿜어져 나왔다.
세상이 멈춘 듯했다.
좋아하는 남자와 곧 혼인할 거라고 들떠 있던 주연이 쓰러지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남궁유린의 손이 덜덜 떨렸다.
***
유성은 크게 당황했다.
'아니, 이 정도 이야기일 줄은 몰랐는데!'
눈앞에서 남궁유린이 또 울음을 터뜨렸다.
벌써 몇 번째 보는 눈물인지.
이번에는 자신이 울린 것 같아 큰 죄책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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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우면서도 지적인 눈빛, 단정한 학사복.
젊은 나이에 무림맹 최고위 요직을 차지하는 능력녀.
그리고 눈이 즐거운 미녀.
무림맹 총군사 제갈영영이 다녀간 후.
낙양 의방 예진실의 종학진은 동료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까 총군사님이 조금 비틀거리시지 않았나?"
"엇, 자네도? 난 내가 잘못 본줄 알았는데 정말 그랬나보군. 백 의원님이 휴가 가셨다는 말이 그렇게 충격이었나?"
번뜩 종학진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시일이 흘러 흐지부지 되었으나, 한때 하인들 사이에서 황당한 소문이 돈 적이 있었다.
"음... 혹시 장칠이 했던 말이 사실이 아닐까?"
"장칠이 누구더라?"
"자네는 사람 이름좀 외우게. 아무리 업무가 다르다지만 백의원님 하인 이름을 아직도 모르나?"
"아, 떠벌이! 그놈은 별명밖에 몰랐네. 그런데 무슨 말 말인가?"
종학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 왜. 총군사님이 백 의원님을 짝사랑 하는 것 같다고..."
"설마!"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 상심하신단 말인가?"
헛소문이 다시 몸집을 키우려던 순간 새로운 사람이 예진실로 들어섰다.
종학진과 동료는 얼른 대화를 멈추었다.
'미녀다! 게다가 총군사님보다 몇 살은 어려 보이는 것이 몹시 싱그럽구나!'
수상한 여자 취향을 가진 종학진이 과도하게 친절을 발휘했다.
"어서 오십시오. 혹시 낙양 의방은 처음 방문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제가 각 의원님들에 대해 한분 한분 설명을..."
옥구슬이 굴러가는 소리가 쓸데없이 길어지는 말을 끊었다.
"감사합니다만 찾는 분이 있어서요. 아, 저는 남궁유린이라고 해요. 백유성 의원님께 진료받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공과 사의 경계를 허물던 종학진의 표정이 재빨리 바뀌었다.
완벽히 공적인 표정으로.
남궁세가라는 대단한 배경.
그리고 검왕의 손녀라는 무시무시한 가족관계를 가진 그녀에게 절대 헛수작을 부려서는 안 되니까.
"검왕님의 손녀셨군요. 백의원님은 오늘 휴가신데 혹시 차의원님은 어떻습니까? 그분도 훌륭하신 의술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 죄송해요. 그럼 다음에 다시 올게요."
"앗, 저기...!"
남궁유린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리자 종학진은 아쉬워했다.
'부수입은 실패로구나!'
차의원이 환자를 밀어주는 대가로 찔러 주는 부수입은 다른 환자에게 기대해 봐야 할듯하다.
***
제갈영영은 두통이 너무 심해 처음으로 휴가를 써야 하나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무림맹주가 직접 전체 회의를 소집해서 그런 마음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지. 내일은 오늘보다 통증이 덜할 거야. 오늘만 잘 버텨보자.'
무림맹 대회의실.
습관적으로 맹주의 표정을 살핀 제갈영영은 그의 표정이 무척 밝은 것을 보고 안심했다.
나쁜 안건으로 모인 것은 아닌 모양이다.
곧 장로들이 하나, 둘 들어섰는데, 그녀는 그중 한 노인과 눈이 마주치자 기분이 상했다.
그는 백발이 성성하고 뱀처럼 찢어진 눈에 입가에는 기분 나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여전히 기분 나쁜 눈빛이야, 모용림 장로.'
모용림은 모용세가 사람으로, 제갈영영에게 사사건건 딴지를 거는 장로다.
사적으로는 제갈영영과 무림맹 총군사 자리를 두고 경쟁했던 사마세가의 사마천, 그의 장인이 되는 자다.
'하... 제발 공과 사는 구분 해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자가 내게 실력으로 밀린 걸 어쩌란 말이야.'
자신이 무림맹 총군사라는 높은 자리에 있지만 경력으로 보면 길지 않다.
모용림은 무림맹 장로로 헌신해 온 기간이 길어 기 싸움이 성립되지 않았다.
백유성에게 치료받기 전에 그녀의 두통을 악화시키던 사람 중 하나를, 두통이 심각할 때 다시 마주하자 더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다.
그녀의 상태가 어떻든, 무림맹주의 주관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본 맹주가 회의를 소집한 이유를 말씀드리겠소. 몇 가지 안건이 있지만 제일 중요한 소식부터 전하겠소. 먼저, 어제 맹에 큰 경사가 있었소."
"그게 무엇입니까, 맹주님?"
"직접 보는 게 좋을 거요. 척마대주, 들어오시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척마대주님은 전에 다시 폐관에 들어 회의에 안 나온 지 한참 되지 않았나? 설마...?"
척마대주가 깨달음을 얻기 위한 폐관 수련에 실패했고, 마지막을 준비하는 듯하다가 낙양 의방에서 소란을 피웠다.
그런데 돌연 실마리를 얻었다고 다시 폐관에 들었다.
여기까지가 그들이 아는 바였는데, 척마대주가 다시 나왔다는 말은...
저벅- 저벅-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정립을 보고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있는 자들이 감탄성을 내뱉었다.
'기도가 변했구나!'
초절정의 끝자락에 위치해 원래 자신들보다 높았던 무위였으나 지금은 척마대주를 볼 때 마치 무림맹주와 마주할 때 느껴지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는 명백히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킨다.
무림맹주가 양팔을 활짝 벌렸다.
"보시는 바와 같이, 맹에 새로운 화경의 고수가 탄생했소."
"오오! 정파 무림의 홍복이오! 축하드리오, 척마대주님!"
"실로 놀라운 성과요! 이 좋은 소식을 왜 오늘에서야 밝히신거요? 어제라도 알려주셨다면 밤늦게라도 달려왔을 것을!"
"대공을 축하드리오!"
척마대주 정립은 앞다투어 달려와 친근한 태도를 취하는 자들에게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만 내뱉었다.
"고맙소."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열렬한 축하 인사에 대한 반응으로는.
"큼. 역시 척마대주님은 한결같으시오, 하하..."
"역시 사람이 진중하오. 그러니 그런 대단한 성취를 이루신 것이 아니겠소?"
정립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그들의 반응에 냉소했다.
'지금 내게 친한 척하는 자들 중에는 죽어 가던 시절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한 자들도 있구나. 이것도 정치의 일종인 것인가? 어렵구나.'
얼마 전 얻은 실마리를 끊임없이 붙잡고 참오한 끝에, 정립은 어제 꿈에 그리던 환골탈태를 이루었다.
신체가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그에게 마지막을 준비하게 만들기도 했던 병이 씻은 듯이 치료된 것은 당연하다.
화경의 경지에 이르러 무의 경지가 한 단계 올랐고 수명도 늘었다.
정립은 백유성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모두가 포기한 자기 생명을 구해주고 무인이라면 꿈에 그리던 경지를 개척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백유성.
그에게 이루 표현하기 어려운 고마운 마음을 품었으나 실제로 만나 전하지 못했다.
물론, 정립의 마음이 신성력으로 변하여 유성에게 전해졌으나 아직 아무도 그 상황을 알 수는 없었다.
유성은 소림사에서 열심히 촉진 스킬을 사용하며 화령초를 키우는 중이었으니.
어쨌든, 정립이 하루 정도 환골탈태한 몸에 적응을 마친 후 직속상관 무림맹주에게 보고하자마자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정립은 언제나 그랬듯이 다른 안건들로 넘어간 회의에 관심을 거두고 자리만 지켰다.
무슨 대소사를 논하든, 그의 관심을 끌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다들 평온한 모습인데 반해 한 사람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보여 그의 시선을 잠시 끌었다.
'총군사의 몸이 많이 좋지 않은가보군. 백 의원님께 치료라도 받아보시면 좋을 텐데.'
정립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일은 없었다.
그가 그런 생각을 떠올릴 만큼 제갈영영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았다.
무림맹주가 회의 중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길 청했을 정도였다.
제갈영영은 곧바로 거절했다.
'잠깐 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차라리 회의가 끝나면 좀 나을 거야.'
갑자기 잡힌 회의였으나 한 번 모인 이상 쌓인 안건들을 처리해야 한다.
자기 개인 사정으로 안건들을 뒤로 미룬다면 어떤 꼬투리를 잡힐지 모른다.
물론, 꼬투리를 잡을 인간은 지금도 매 안건마다 꼬투리를 잡는 중이었지만.
한 안건에 대해 제갈영영이 의견을 내자 모용림 장로가 곧바로 딴지를 걸었다.
"허허, 총군사의 말도 일리가 있으나 만약 이런 경우라면 어떻겠소? 정파 무인들의 목숨이 우리 손에 달렸으니 항상 여러 가능성을 따져 보아야 할 것이오."
그 딴지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교묘해서 쉽게 무시할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억지로 아픈 머리를 쥐어 짜내 논쟁하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고, 또 논쟁하고. 그렇게 반복하기를 얼마 후.
제갈영영은 애써 표정 관리에 힘 썼으나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두통에 괴로워했다.
그럴수록 새로운 안건을 올려야 한다는 의지가 활활 타올랐다.
'안 되겠어. 이 안건을 반드시 통과시켜야 해.'
이 안건은 그녀에게, 그리고 정파 무림을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다.
드디어 마지막 안건까지 논의가 끝난 후.
제갈영영이 말했다.
"이 자리에서 새로운 안건을 하나 올리겠어요."
"그것이 무엇이오, 총군사?"
"본 맹에 실력 좋은 의원분을 모셔야 해요. 낙양 의방이 있지만 아무래도 직속 기관이 아니라 한계가 있어요. 맹에서 실력 좋은 의원분을 직접 모시고 있다면 무사들에게 질 좋은 치료를 제공할 수 있을 거예요. 무사들도 더 용감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지요."
물론 쉽게 통과될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모용림 장로가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건 낭비가 아니오? 어차피 낙양 의방 시험을 통과한 의원들의 실력은 다 최고인데 그런 자들이 열 명이 넘게 모여 있는 낙양 의방을 활용하는 편이 낫지 않겠소?"
"낙양 의방의 의원이라고 다 실력이 같지는 않아요. 분명 그들 사이에서도 실력 차이가 있고 특히 일부는 꼭 맹에서 영입해야 하는 놀라운 실력을 갖추고 있답니다."
모용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의선의 제자이신 양지헌 의원님 같은 분도 있지. 총 군사도 그분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다면 생각해 볼 만 하겠소."
처음에는 습관적으로 딴지를 걸었던 모양인지 모용림 장로의 목소리가 살짝 누그러졌다.
제갈영영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하나.
'모용림 장로가 강호행 때 의선에게 목숨을 구함받은 적이 있다지?'
양의원에게 호의적이라면 일이 쉬워지겠다 싶었다.
"그 분도 실력이 좋지요. 저는 양지헌 의원님과 백유성 의원님 두 분을 고려하고 있었어요. 두 분의 실력이 정말 뛰어나거든요."
항상 옆에 두고 두통을 치료하고 싶은 욕심에 백유성을 떠올리며 만든 안건이었다.
그가 빠져서는 절대 안 된다.
모용림의 태도를 보아 양의원을 같이 끼워 넣는다면 이 안건이 순조롭게 통과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이는 모용림이 얼마나 치졸한 밑바닥을 가진 자인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제갈영영의 오산이었다.
모용림은 사위 사마천과 경쟁하여 총군사 자리를 뺏어간 제갈영영이 몹시 미웠다.
사마천이 전대 총군사 사마병의 자리를 잇는 모양새이니 쉽게 총군사가 될 것이고, 모용세가에 여러 이득을 챙겨 주리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하게 물을 먹은 모용림은 제갈영영의 흠을 잡기 위해 여러 조사를 했고, 쥐고 있던 한 가지 무기를 지금 사용하기로 했다.
"백유성 의원이라... 그 어리고 잘생긴 신입 의원 말이군. 총군사가 매일 찾아갈 정도로 그자에게 마음이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설마 그게 사실이었단 말이오?"
제갈영영은 처음 듣는 소리에 냉정함을 유지하지 못했다. 아무리 뛰어나도 아직 경험이 부족했다.
"그게 무슨...! 헛소문이에요!"
유성이 잘생기기는 했으나 절대 다른 감정을 품은 적은 없다,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허! 언제 무림맹이 실력도 없는 자가 입맹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단 말이오! 그자를 총군사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입맹시킨다면 무림맹은 모든 강호인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거요!"
모용림의 헛소리에 분노가 치솟는 와중에도 제갈영영이 머릿속으로 차분히 반박 논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입을 열려는 순간.
모두의 귓가로 쏙쏙 박히는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모용림 장로, 백유성 의원님의 실력은 내가 아는 의원들 중 최고요. 내 이름도 걸 수 있소. 그분을 모욕한 것을 당장 사과하시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나와 생사결을 벌여야 할 거요."
회의 중에 절대 끼어들지 않기로 유명했던 화경의 고수가, 백유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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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유린은 가늘게 어깨를 떨며 하염없이 눈물 흘렸다.
유성은 품속에 가지고 다니던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흑, 가, 감사해요.”
코 훌쩍이는 소리가 조금 귀엽게 느껴진다.
남궁유린이 고개를 돌리고 손수건으로 연신 눈가를 찍어댔다.
‘내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과거사인데…’
유성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기에 그녀가 진정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포기했다.
말 한마디로 위로하기란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이다.
몇 번 겪어보지 못했지만, 감수성 풍부하고 공감능력이 뛰어난 그녀가 아닌가?
그녀의 손으로 친한 시녀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건 커다란 상처였을 거다.
지금처럼 성인도 아니고 어린아이였다면 더 그렇고.
잠시 후, 유성의 손수건이 흠뻑 젖었을 무렵, 그녀가 간신히 울음을 멈추었다.
눈이 빨갛다.
“이거 깨끗이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굳이 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힘드셨겠군요. 고인의 일은 안타깝습니다.”
“언니 안 죽었거든요?”
남궁유린이 째려보았다.
“앗, 죄송합니다.”
얼굴이 깊숙이 베였다길래 죽은 줄.
살아 있는 사람을 고인 취급했으니 남궁유린의 눈빛이 고울리 없다.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천만다행입니다. 그럼 혹시 어떤 상태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녀가 끔찍한 기억을 떠올린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굴이 길게 베이긴 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대신 상처를 좀… 많이 꿰매야 했어요. 흉이 심하게 남았죠. 결국 언니는 파혼당했어요. 다 저 때문이예요.”
서로 얼굴 안 보고 혼인하는 게 아니면,
이 시대라고 여자의 미모가 중요하지 않을 리 없다.
조금 안예쁜 건 괜찮아도 흉측한 흉이 남아 있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단순히 상대를 다치게 했다는 수준이 아니라, 혼인을 앞두고 벌어진 사고로 한 여자의 인생을 망쳤다고 자책하는 듯하다.
남궁유현의 대련을 지켜본 게 계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대련 중 일어난 사고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그런 점들이 대련에 대한 괴로운 기억을 가지게 만들었을 테고.
“그래서 대련을 지켜보는 것조차 괴로우신 거군요.”
“네…”
마음이 여린 남궁유린이 큰 충격을 받았을 만 하다.
유성이 트라우마의 치료를 목적으로 과거사를 들었지만, 지금은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하는데 까지는 해보자.
“시녀분은 남궁 소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유성이 생각하기에 그건 사고다.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용서해준다면 남궁유린의 마음의 짐이 훨씬 가벼워지지 않을까?
그러나.
남궁유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는 그날의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더라구요.”
‘첩첩산중이네.
큰 충격을 받으면 단기 기억이 날아가는 경우도 있다.
하필 그런 경우에 걸린 모양이다.
그날의 기억이 없다면 진심으로 용서 받지도 못하게 되었을 테고.
결국,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가는 동안 남궁유린의 트라우마가 깊어진 모양이다.
“안타깝네요. 그런데 시녀분은 가문 내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까?”
대우받고 있다면 훨씬 나을 텐데, 남궁유린은 이번에도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정반대예요. 언니는 따가운 눈총 받으며 지내요.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주연 언니가 방심해서 저에게 당한 거라고 생각하시거든요. 오히려 언니의 방심 때문에 제가 이렇게 됐다고 여기시죠.”
“어떻게 그런 생각하실수가 있습니까?”
“제 말을 믿어 주시지 않으신거죠. 의각주님도 물론 믿기 힘드시겠지만 전 거짓말 한 게 하나도 없거든요.”
짐작 가는 건 하나.
“배우지도 않은 창궁무애검법을 펼쳤다는 걸 안 믿어 준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검왕조차 믿어 주지 않았다니, 타인이 무공 펼치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는 건 그도 할 수 없나보다.
시녀 처지에서는 한참 아래 실력이던 남궁유린이 갑자기 배우지도 않은 상승무공을 펼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럼 그때 창궁무애검법을 다시 펼쳤으면 믿어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러고 싶었어요. 그런데 다시 시도해 봤는데, 놀라서 그런지 도저히 펼쳐지지 않았어요. 얼마 후에는 정식으로 창궁무애검법을 가르쳐 주셔서… 결국 해명하지 못했어요.”
“많이 답답하셨겠군요.”
“네. 그런데… 혹시 제 말을 믿어 주시는 건가요?”
남궁유린은 의구심을 가득 담아 유성을 바라보았다.
잠깐 대련을 지켜보고 배운 적도 없는 창궁무애검법을 펼쳤다는 그녀의 이야기.
혈육도 믿어 주지 않았는데, 유성은 마치 믿는 눈치이지 않은가?
그녀를 배려해 믿는 척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연히 믿습니다. 초식을 따라 했다는 것도, 무공을 펼칠 때 답답함을 느꼈다는 것도요.”
“...정말요?”
“물론입니다.”
남궁유린은 유성의 눈빛을 살폈다.
빨려 들어갈 것처럼 깊은 눈동자에 강한 신뢰가 서려 있는 듯하다.
‘진심 같은데…?
혈육도 믿어 주지 않는 말을 선뜻 믿어 준 거다.
‘나, 그동안 많이 힘들었구나.
응어리진 마음 한구석이 약간 풀리는 느낌이다.
할아버지는 정에 이끌려 그런 거짓말로 시녀를 감싸줄 필요는 없다고,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말만 했는데…
물론 유성은 진심으로 믿었다.
그 역시 직접 경험했지 않은가.
유성도 백가장의 무공을 펼칠 때 답답함을 느꼈다.
‘왜 이렇게 뻗어야 하지? 약간만 틀어도 위력이 훨씬 나아질텐데.
그런 답답함은 유성이 끊임없이 무공을 발전시켜 나가려는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내공 운용은 곧바로 따라 하기 힘들지만, 유성도 한번 본 무공 초식을 따라 할 수 있다.
같은 뿌리를 둔 남궁세가의 심법을 익혔으니 남궁유린은 창궁무애검법을 흉내 낼 수 있었을 거다.
단, 한 가지 조건만 충족 된다면.
‘남궁유린이 검왕과 남궁유현을 훌쩍 뛰어넘는 천재라면 말이 돼.
한 가닥 할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정말 그녀의 무재가 심상치 않은 듯하다.
이 정도 천재가 트라우마로 무공을 익히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니, 큰 손해가 아닐 수 없다.
빨리 정화 스킬을 열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추가되었다.
그 후로도 여러 대화를 나누어 본 결과.
“아쉽지만 마음의 상처가 당장 해결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꼭 치료해드리겠습니다. 시녀분 얼굴의 흉터도요.”
이미 아물어 흉진 상처는 지금 치유 스킬로는 무리지만, 치유 스킬의 다음 단계가 있으니까.
남궁유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요? 저도, 언니의 흉터도 치료할 수 있어요?”
“물론입니다. 저 믿으시죠?”
환자에게 신뢰를 심어 주는 건 중요하다.
그래야 상처가 더 악화되지 않을 테니까.
남궁유린은 조금 전에 펑펑 울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촉촉한 눈으로 눈웃음 지었다.
“당연히 믿어요.”
유성이 오늘 본 표정 중에 제일 밝고 예뻤다.
***
유성이 의각으로 찾아간 이튿날.
장칠은 한 가지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는 백유성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지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문에는 여전히 귀를 귀울였다.
“어제 남궁유린이 검왕 앞에서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대.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넌 뭐 좀 들은 거 있어?”
“나도 모르는데.”
“그래? 아, 무림학관에 연무장 하나를 검왕이 요청했다던데 여기 좀 머무르실건가 봐.”
여러 정보를 전해주는 친구에게 적당히 맞장구 쳐주었다.
그에게 모르겠다고 했지만 장칠은 왠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제는 남궁유린이 가문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소리에 유성이 그녀를 찾아간 날이다.
‘전에 정자에서 두 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라니… 역시 남궁유린님은 의각주님 때문에 돌아가지 않으셨을 거야.
장칠이 전에 본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선남 선녀가 나란히 운치 있는 정자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언가를 속삭이던 모습.
‘확실해. 남궁유린님은 의각주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야. 두 분도 너무 잘 어울리고.
이번에 깨달은 바가 있어 절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을 거지만, 생각은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법이다.
남궁유린은 무림학관 생도 중 유일하게 의각에 지원하기도 했고, 종종 눈빛 교환 하는 모습도 목격했지 않나?
유성이 궁금해할까 봐, 장칠은 그에게 남궁유린의 근황에 대해 알게 되는대로 전했다.
“남궁유린님이 검왕께 무공을 배우신답니다.”
“그렇군요.”
평범한 일과도 전하고.
“요즘 표정이 많이 밝아지셨답니다.”
“그래요? 잘됐네요.”
남궁유린의 기분도 전하고.
“조금 전에는 속상한 일이 있으신지 울적해 보이신다고… 전에 두 분이 계시던 정자쪽으로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네? 아, 네. 그렇군요.”
꼭 알아야 할 것 같은 상황, 그리고 장소까지 전했다.
유성이 어리둥절해했지만, 장칠은 그의 태도가 남궁유린과의 관계를 비밀로 하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교대 준비 중이던 장칠에게 총군사 제갈영영이 말을 걸었다.
“의각주님 안에 계신가요?”
의각을 찾아올 때는 항상 미간을 찌푸리던 그녀의 얼굴이 멀쩡하다.
‘아침에도 다녀가셨으면서, 또 어디가 아프신가?
의문이 들었지만 충실히 답했다.
“의각주님은 퇴근하셨습니다.”
“어? 오늘 당직 아니세요?”
“아… 원래 그랬는데 일이 있으셔서 차의원님과 당직일을 바꾸셨습니다. 혹시 어디가 아파서 오셨는지요?”
“아픈 건 아니구요. 그럼 의각주님은 어디 외출하셨나요?”
“숙소에 계실 겁니다. 집에서 할 일이 있으시다고 가셨거든요.”
“그래요? 고마워요.”
자연스럽게 유성의 숙소로 향하는 제갈영영.
‘안 아픈데 왜…? 한때 그런 의심 한 적도 있지만 아닌줄 알았는데… 설마 의각주님이랑 총군사님도?
장칠은 혼란스러웠다.
***
제갈영영이 유성에게 찾아온 건 일 때문이었다.
“밤늦게 죄송해요. 오늘까지 처리해야 할 안 건 때문에 급하게 찾아왔어요.”
“그게 뭡니까?”
“무림학관에 호남 백가장의 백진성도 지원했어요.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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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유성이 전작을 플레이할 때, 고아의 신분으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비슷할 거로 생각했지만, 뜻밖에 가족까지 있는 신분이라 신기하게 여겼다.
알고 보니 사생아였지만.
물론 사생아의 신분이라는 사실은 게임 속으로 빙의되었다는 걸 깨닫고 나자 사소한 일이 되었다.
현대인이 게임 속에 갇혀 버렸는데, 진짜 부모도 아닌 자들과의 관계가 어떻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며칠간 방황했으나 유성은 곧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만이 답임을 깨닫고 무공 수련에 열중하게 되었다.
어쨌든, 호남 백가장은 유성이 게임을 시작하게 된 곳이고 백진성은 그곳의 적자다.
유성과는 이복 형제.
백진성은 유성을 귀찮게 굴었다.
당연히 가문을 물려받을 거로 생각했던 그의 처지에서는 갑자기 두각을 나타낸 유성이 눈엣가시 였을 거다.
유성이 무공을 잃고 쫓겨나듯 가문을 떠나던 날 비웃던 녀석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백가장이 그렇게 큰 곳은 아닌데 무림학관에 들어올 수 있나 보군요.”
제갈영영이 차분히 설명했다.
“맞아요. 원래 백가장 까지는 순서가 돌아가지 않았지만 이번에 무림학관 생도 중 일부가 정식으로 무림맹 소속이 될 거예요. 빈자리를 보충하려는데 마침 백가장도 적합한 대상이었어요.”
그 말을 하면서 제갈영영은 유성의 눈치를 살폈다.
‘날 배려한 거구나. 지난번 일로 백가장에서 쫓겨난 일이 널리 퍼졌으니.
고마웠다.
원칙상으로 백진성은 무림학관에 입관할 기준에 부합한다.
그런데 제갈영영은 유성을 위해 원칙을 깰 각오로 찾아온 거다.
유성이 원치 않으면 무림학관에 탈락시키려고.
‘별로 보고 싶은 얼굴은 아니긴 하지.
유성은 백진성이 무림학관에 들어오면 자신에게 어떤 해가 될지 생각해 보았다.
무림맹과 무림학관은 연관이 있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같은 소속은 아니다.
그리고 유성은 예전부터 백진성이 무림맹 입맹을 희망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작은 정도 문파가 세를 키우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무림맹 소속이 되는 거다.
흑도 문파와 시비가 걸려도 무림맹이 토벌 올 수 있다는 압박감을 줄 수 있을 테니까.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해 보면, 유성이 백진성을 만나 해가 될 점은….
‘…없는데?
오히려 백진성이 유성의 눈치를 봐야 하지 않을까.
이제 유성의 위상이 그 정도는 된다.
무림맹 무사들이나 무림학관 생도 중 의각의 도움을 받은 자들도 많았고, 특히 친한 자들은 대부분 무림맹 고위직이다.
아무 위협도 되지 않는 백진성 때문에 굳이 무림맹 총군사가 원칙을 어기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저는 괜찮으니 그냥 받으셔도 됩니다. 총군사님이 저 때문에 무리하시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무리한다구요? 저 그 정도 힘은 있어요.”
제갈영영이 턱을 치켜세우며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유성은 그녀가 두통으로 무너진 모습이 떠오르며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전에 책 잡힐 일은 하면 안 된다고 하신 거 같은데….”
둘이 한잔 하며 그런 이야기도 나눈적 있다.
“그건 모용림 장로가 기세등등 했을 때 이야기죠. 의각주님도 아시잖아요. 요즘 모용림 장로 어떤지.”
한때 무림맹 내에서 큰 권력을 휘두르던 그는 사마세가를 열심히 밀었던 죄로 그냥 평범한 무림맹 장로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사마세가가 무림맹에 못된 짓을 하다 걸렸으니 그들과 엮이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고 있다고.
그래도 유성은 제갈영영의 배려를 사양했다.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 다른 정적이 나타나 꼬투리 잡으면 그녀가 곤란하지 않겠나?
그리고.
오히려 자신이 과거에 백진성에게 당했던 것들을 되갚아 줄 수도 있을 테고.
“알겠어요. 의각주님이 괜찮다니 뭐….”
“그럼 용건은 끝났나보군요. 살펴 가십시오.”
번뜩!
날카로운 제갈영영의 눈초리에 유성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그러나 착각이었다는 듯, 어느새 그녀의 눈매는 다시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차 한잔 주세요. 목이 타네요.”
“아, 그렇지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손님이 왔는데 차 한잔 대접하지 않고 보낼 뻔했다.
유성은 그녀가 주기적으로 선물해주는 차를 타서 내놓았다.
“마실동안 잠깐 이야기나 해요. 그 정도는 괜찮죠?”
“물론입니다.”
제갈영영과 별거 아닌 잡담을 나누었다.
오늘까지 해결해야 할 안건이 있다더니, 생각보다 바쁘지 않은가보다.
“요즘은 공부 잘되십니까?”
매일 아침마다 찾아와 치료받게 만드는 원인.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매일 두통을 호소할 정도니, 보통 수준의 공부는 아닐 테고.
“덕분이에요. 조금 있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거 같아요.”
가슴을 주욱 펴고 뿌듯해하는 모습이 귀엽다.
여기서는 두 살 연상이긴 하지만 현실 세계의 유성에 비하면 훨씬 어리다.
제갈영영이 돌아간 후, 유성은 다시 집에 딸린 작은 마당으로 나갔다.
오늘 차의원과 당직을 바꾸면서 해 보고 싶었던 일을 이어서 해야 한다.
새로 얻은 스킬 시험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에 얻은 스킬은 버프 계열.
버프 스킬은 자신 또는 타인에게 걸어 줄 수 있다.
당장은 활용도가 높은 스킬은 아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미리 성능을 확인해 두어야 한다.
[신속]
유성의 몸이 순간 금빛으로 번뜩이며 신형이 미끄러졌다.
***
무림학관의 한 연무장.
연무장은 넓지 않지만, 높은 담벼락이 주변의 이목을 차단해 주고 있다.
검왕이 손녀에게 가문의 비기 제왕검형을 전수하기에 적합하다.
엄숙한 표정의 검왕이 의욕 없어 보이는 손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약속이니 최선을 다해 배워야 할 거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가문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
손녀의 얼굴에 약간의 의지가 서린다.
지금 당장 돌아가는 건 무척 싫은 모양.
‘언젠가 극복하리라 믿지만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가문을 이끄는 사람은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서는 안 된다.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고 검왕은 제왕검형 전수를 시작했다.
“제왕검형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있다. 전반부는 신묘한 무리들을 품고 있어, 전반부를 대성하면 이 할애비처럼 화경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제왕검형은 남궁세가의 자부심이다.
남궁세가가 오대세가의 수좌 자리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핏줄과 제왕검형을 통해 대대로 검왕을 배출해 냈기 때문.
신묘한 무리를 품고 있는 제왕검형의 전반부를 이해하면, 다른 무공을 익히는 것에 비해 손쉽게 경지를 올릴 수 있다.
다만, 품고 있는 무리가 어려운 만큼 제왕검형을 익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최소한 검왕의 상식으로는 그랬다.
“…!”
구결을 불러 주고 초식 시범을 한번 보여 준 검왕은, 약간 부족하지만 손녀가 자신이 펼쳐 보인 제왕검형의 전반부를 그럭 저럭 따라 하자 놀라고 말았다.
아직 미진한 부분이 있지만 단 한 번 보고 따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완성도가 높았던 것이다.
‘유현이보다 배우는 속도가 더 빠른 것 같구나.
창궁무애검법을 전수할 무렵 남궁유린은 무공에 대한 의욕이 전혀 없었다.
시녀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남궁유린은 유성 덕분에 마음의 응어리가 조금 풀렸고, 가문으로 끌려갈 수 없다는 목표도 가지고 있다.
마음 가짐이 다르니 익히는 속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비록 창궁무애검법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아 똑같이 따라 하기는 어려웠으나,
제왕검형 역시 남궁세가의 무공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검왕의 기준으로, 남궁유린은 솜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제왕검형을 익혀나갔다.
의무감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점차 손녀를 가르치는데 푹 빠져들었다.
며칠에 걸쳐 전반부를 봐 준 후.
그는 더 이상 전반부를 봐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여태 손자가 최고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진짜 뛰어난 검재를 가진 아이는 손녀였다니,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검왕은 계획을 변경했다.
“배우는 속도가 대단히 빠르구나. 나머지는 스스로 참오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대신 후반부도 미리 전수해 주마.”
“후반부도요? 어차피 지금 익혀봤자 써먹지 못 하는 거 아닌가요?”
제왕검형의 후반부는 화경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사용할 수 없다.
이전에 그렇게 설명 들었기에 남궁유린은 의문을 가졌으나, 검왕이 고개를 저었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의 너도 후반부 초식들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화경의 경지에 올라 환골탈태를 이루지 못하면 신체가 버티지 못해 무너지고 만단다. 그렇기에 펼치지 말라고 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네게 미리 전수하는 건 네 배움의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니, 틈 날 때마다 후반부 초식들이 지닌 무리들을 참오하여 화경의 경지에 도달하면 더 빠르게 나아가길 원한 것이다.”
“…네.”
검왕은 전반부 초식들을 펼칠 때처럼 손녀와 거리를 두고 섰다.
“잘 봐라. 이게 네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진정한 제왕검형은 후반부 부터라고 할 수 있다.”
검왕은 검을 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단전에서 진기가 일어나 승천하는 용과 같은 강맹한 흐름을 만들어 낸다.
환골탈태한 몸이 아니었다면 혈맥과 근육이 찢어졌을지도 모르는 파괴적인 기운과 함께, 검왕의 온몸에 푸른 기가 넘실거렸다.
이어.
퍼엉—!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제왕검형의 후반부 초식들이 펼쳐진다.
“…!”
남궁유린이 홀린 듯 검왕이 수놓는 검로를 쫓았다.
검에서 푸른 뇌전이 넘실거린다.
그녀는 몰랐지만, 마치 어렸을 때 창궁무애검법을 처음 보고 느꼈던 충격이 뇌리를 강타했다.
‘저게 진정한 제왕검형!
남궁유린의 몸 안에 내재된 검재가 꿈틀거렸다.
그 순간만큼은 시녀의 일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언젠가 할아버지처럼 저렇게 자유자재로 제왕검형의 후반부를 펼칠 수 있을까?
까마득한 일처럼 느껴졌다.
환골탈태를 이루지 못하면 신체가 버티지 못한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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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 이남은 무림맹의 입김이 세지 않은 곳이다.
흑도 무리가 제대로 터전을 꾸린 광동, 광서에 비하면 훨씬 낫지만, 다른 지방도 흑도 문파들이 많아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다만 호남은 좀 덜한 편이다.
형산파라는 나름대로 규모가 큰 정파가 있기 때문이다.
구심점 형산파에 기대어 여러 중소문파들이 힘을 모으면 흑도 무리가 함부로 활개치지 못한다.
그런 호남 지역의 작은 무가 백가장에 경사가 났다.
가문의 무사들과 하인들이 모두 지켜보는 중에 백가장의 가주는 아들을 크게 치하했다.
“장하다, 진성아! 네가 무림학관에 입관하게 되다니!”
“고생 많았다, 내 아들!”
아버지, 어머니의 말에 백진성은 당당하게 말했다.
“이게 다 아버지, 어머니 덕분입니다. 제가 꼭 무림맹에 입맹하여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겠습니다.”
“그래. 듣자 하니 무림학관 생도 중 무림맹에 입맹하는 비율이 크게 늘었다고 하더구나. 지금처럼 정진하면 너도 꼭 할 수 있을 거다.”
“물론입니다. 거기 가서도 열심히 해서 백가장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꼭 입맹하여 보이겠습니다.”
아버지에게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무림맹에 입맹하여 활동하다가 복귀하기만 해도 호남 지방에서는 어깨에 힘 깨나 줄 수 있게 된다.
“그나저나 정말 이 어미가 같이 가지 않아도 되겠니?”
“어머니, 걱정 하지 마십시오. 무림학관에 제 친우도 있으니 도움받으면 됩니다.”
“아, 진가장의 진영호 말이냐? 그래, 요즘도 연락 자주 하고?”
“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백진성은 부모님께 진영호로부터 연락이 끊긴 지 오래라는 사실을 굳이 털어놓지 않았다.
진영호가 무림학관으로 떠나는 날, 거기 가서 성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거라는 이야기를 나눈 적 있기에, 바쁘게 지내고 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아버지가 말했다.
“아 참, 무림맹에 일침신의라는 분이 계시다는 소문은 너도 들었겠지?”
“물론입니다. 나이도 젊은데 침 하나로 못 고치는 병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저기 오가는 상인들은 여러 이야기를 전하고는 한다.
누가 초절정 고수가 되었다더라, 어느 지역에 마두가 나타났다더라, 요즘은 어떤 의원이 잘 나간다더라.
얼마 전까지는 사람들은 의원들 중에는 의선을 최고로 쳐 주었다.
그러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선으로 불리는 그는 요즘 활동을 중단한 상태다.
그 사이, 역시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침신의라는 의원이 떠오르고 있다.
“그래, 그분께 드릴 귀한 선물도 싸드릴 테니 한번 찾아뵙고 친분을 다져 놓거라. 너도 그 녀석의 일을 잘 알고 있지 않으냐. 그런 대단한 의원과 친분을 다져두어 절대 손해 볼일은 없을 거다.”
백진성은 아버지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백유성.
무재 하나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배다른 형제가 주화입마를 입어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져 버릴 줄은 몰랐다.
자기 처지에서는 천운이었다.
가문의 적자로 태어났음에도 사생아에게 밀려날 뻔했으니까.
하지만.
-참고 기다리면 꼭 기회가 올 테니 절대 포기하지 말거라.
어머니의 말씀대로 그 녀석은 혼자 추락해 버렸다.
백진성은 절대 그런 멍청한 녀석처럼 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조심스럽게 수련을 해 나갔고 얼마 전 일류 무인이 되었다.
덕분에 무림학관에도 입관할 수 있게 되었다.
‘낙양의방 출신이라지? 젊은 나이에 무림맹 의각주가 될 정도면 정말 대단한 의술을 지니고 있나 보군. 아버지의 말이 아니더라도 꼭 친분을 다져두어야 할 자다. 최근 무림학관 생도들도 다치는 일이 많다니 친해지면 큰 도움이 될 거다.
무림학관에 입관 통보만 받았을 뿐, 정식으로 입관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백가장과 백진성은 무림학관에 가서 성공하기 위해 여러 준비를 시작했다.
가산의 일부를 정리하여 인맥을 다지기 위한 선물들을 준비하는 일도 그중 하나다.
실력만으로 경쟁하기에는 다른 후기지수들이 너무 쟁쟁하니까.
***
검왕은 무림학관에 머물며 손녀와 대련하면 할수록 아쉬움을 느꼈다.
무공 수련을 잘 따라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대련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혼자 수련할 땐 공격 초식도 잘 펼치면서 왜 대련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거냐?”
뛰어난 무공 실력을 가졌어도 공격하지 못하면, 대단히 큰 실력 차이가 나지 않는 한 상대를 제압하기 힘들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실전에서는 큰 화가 닥칠 수 있는 것이다.
“...”
남궁유린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도 시녀와 있었던 일을 다시 한번 털어놓았다.
그런데도 믿지 않는 할아버지에게 진실을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닌데…’
공격 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그날의 사고가 떠오르며 몸이 굳어 버린다.
도저히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상태로 상대를 공격할 수 있을 리 없다.
‘의각주님이 보고 싶어…’
유일하게 자기 말을 믿어 준 사람이 떠올랐다.
돌이켜 보면 그는 항상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처음 만나 오라버니의 치료를 부탁했을 때도 흔쾌히 치료를 약속했고, 귀찮게 하는 팽지산과 엮였을 때는 그를 퇴치해 주었고, 자기 일과 시녀의 일을 털어놓자 역시 치료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유성을 생각하자 대련 중인 것도 잊고 자꾸 다른 생각이 났다.
‘손수건 돌려드리러 언제 가지? 이걸 돌려드리면 다음 임무까지 만나러 갈 핑계도 없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한눈팔지 말거라!”
손녀가 딴생각 하는 걸 눈치챈 검왕은 다시 검을 들어 공격했다.
챙- 채앵-!
배운 대로 방어 초식을 펼치며 차분히 검왕의 공격을 막아가는 남궁유린.
직접 검왕에게 지도받으며 크게 실력이 늘어났지만 방어만 해서는 반쪽짜리일 뿐이다.
검왕은 결국 검을 거두었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그 시녀와 결판을 내야겠구나. 며칠 후에 할애비와 가문으로 돌아 가자꾸나.”
남궁세가의 미래를 위해서다.
이런 검재를 가진 손녀가 더 이상 반쪽짜리 무인으로 지내게 둘 수 없었다.
정신을 단단히 차리면 극복하지 못할 일은 없다.
‘나 역시 이 경지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위기를 넘겼다. 유린이도 할 수 있을 거다.
검왕은 자기 경험에 빗대어 그렇게 판단했고, 이번에도 그의 판단을 신뢰했다.
손녀에게 약속한 게 마음에 걸리지만 할 이야기는 있다.
“그건…! 약속이 틀리잖아요!”
돌아가지 않기 위해 열심히 무공 수련 중인데 무슨 날벼락 같은 말인가?
펄쩍 뛰는 남궁유린에게 검왕은 엄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를 공격하지 못하는데 그게 어떻게 최선을 다하는 거냐?”
“...”
“네가 빨리 극복하면 다시 무림학관으로 돌려보내줄 테니 긴말하지 말거라.”
“싫어요. 저는 아직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이번에는 소용없다. 이미 나는 결정 했으니 내 말대로 해라.”
이번에는 강력히 주장해도 아무 소용 없었다.
그녀가 알던 엄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거다.
그러나 그날 밤.
검왕은 한 가지 소식을 듣고 남궁유린에게 통보했다.
“잠깐 일이 있어 다녀오마. 곧 돌아올 테니 미리 돌아갈 준비해 두거라.”
“무슨 일이신데요?”
“다녀와서 말해 주마.”
검왕은 배웅 나온 남궁유린을 돌아보았다.
남궁유린이 불만스럽게 그를 바라보고 있다.
“할애비를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다녀오면 할애비가 도와줄 테니 빨리 극복하고 다시 돌아오자.”
“...”
***
검왕이 떠난 이튿날 저녁.
유성이 의각의 당직을 서는 날이다.
깨끗이 빨아 놓은 유성의 손수건을 들고, 남궁유린은 의각으로 향했다.
의각 하인들이 입구를 막고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입구를 통과해야 한다.
남궁유린은 그들에게 인기척을 냈다.
하인 무리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리다가 흠칫 놀랐다.
장칠이다.
“아, 남궁유린님! 의각주님 찾아오셨습니까? 방금 무림맹 회의에 참석하셨는데요.”
유성이 무림맹 회의에 참석할 일이 있던가?
“무슨 일이신데요?”
“청성파에서 의각주님을 찾아왔거든요. 저희도 거기까지만 들어서 그 이상은 모릅니다.”
“그렇군요. 그럼 언제 돌아오시는지는 모르나요?”
“네, 그것까진 못 들었습니다. 혹시 의각주님 돌아오시면 왔다 가셨다고 말씀드릴까요?”
“아니에요. 내일 다시 올게요.”
***
이튿날.
무림학관 교관이 임무 수행 중이지 않은 생도들을 불러 모았다.
“무림맹에서 할당된 새 임무들을 배정하겠다.”
여러 임무들이 나열되었다.
생도들이 저마다 원하는 임무에 지원했다.
“다음은 의각 경계 임무!”
여러 생도들이 손을 들었다.
그들 중에는 유성과 친해지기 원하는 후기지수들도 있다.
‘나도 지원하고 싶은데…’
남궁유린은 지원하지 못했다.
곧 할아버지와 함께 가문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하지만.
“다음은 장기 임무다. 혹시…”
교관이 말을 흐리는 동안 남궁유린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장기 임무? 섬서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도 장기 임무라고 하신 적 없는데?
“오늘 오후에 사천으로 향하는 무림맹 인원들 호위 임무가 하나 있다. 혹시 지원할 생도 있나?”
생도들이 술렁거렸다.
“사천이면 너무 먼데? 넌 지원 할 거냐?”
“미쳤냐? 그동안 여기서 여러 임무 수행하며 높은 분들과 두루두로 안면 익혀두는 게 훨씬 낫겠다.”
“그렇지? 시간도 촉박해. 오늘 당장 출발인데 누가 갑자기 사천까지 가고 싶겠어?”
사천까지는 왕복 이동 시간만 해도 최소 두 달이 걸린다.
특별한 임무라도 수행하고 오면 세, 네달은 훌쩍 지나버릴 게 분명했다.
누구를 호위 하는지도 모르는데 거기까지 가고 싶은 생도가 얼마나 있겠나?
교관도 임무가 할당되었기에 생도들의 의견을 물어봤을 뿐 누군가 지원할 거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을 번쩍 든 생도가 한 명 있었다.
“응? 남궁유린, 정말 지원할 생각이냐?”
“네, 교관님. 제가 가겠습니다.”
남궁유린은 충동적으로 손을 들었지만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할아버지를 따라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 절반,
어쩌면 유성이 일행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절반이다.
***
시간을 거슬러 남궁유린이 유성을 찾아왔다가 허탕 친 날 저녁.
유성은 청성파에서 찾아왔다는 소식과 함께 무림맹 회의에 불려 갔다.
청성파에서 파견된 장로가 말했다.
“의각주, 청성파를 도우러 와줄 수 있겠소? 의각주의 의견만 남았소.”
이미 무림맹 사람들과는 이야기가 된 눈치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전에 의각주가 도왕의 독을 해독해 준 일이 있었지 않소? 우리 청성파의 장문인께서도 습격 당해 정체불명의 독에 중독되었는데, 그 증상이 도왕과 비슷하다고 하오.”
“장문인께서… 중독 정도는 어떻습니까?”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오. 그래서 여기까지 모셔오지 못했소.”
청성파는 무림맹의 우방이고, 청성파의 장문인 유천진인은 화경의 고수다.
그것만으로 도우러 가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만.
청성파의 장로가 말을 이었다.
“사천당가에서도 사람이 다녀갔으나 해독하지 못했소. 이제 믿을 사람은 의각주 뿐이오. 제발 부탁하오.”
사천에는 당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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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가는 천운석 가공 때문에라도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곳이다.
지금도 한 번씩 필요한 경우에는 천운석을 움켜쥐고 신성력을 증폭시켜 사용하기는 하지만,
침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에 비해 효율이 크게 떨어졌다.
침의 형태면 환부에 깊숙이 접근 할 수 있어 신성력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으니까.
최소한 치료에 있어서는 침의 모양인 것이 최선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 사천으로 가는 게 최선이다. 사천으로 나갈 일이 또 언제 있을지 모르니까. 그런데 사천당가에 들를 시간을 낼 수 있을까?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무림맹의 공적인 일로 가는 건데.
청성파의 일은 하나도 걱정되지 않는다.
해독 스킬은 치유 스킬과 달리 단계별로 효과가 나뉘어 있지 않다.
정말 유천진인이 독에 중독된 거라면 해독 스킬로 도왕처럼 쉽게 치료할 수 있다.
문제는 두 가지다.
청성파의 일을 마무리 짓고 어떻게 사천당가에 들리느냐,
그리고 사천당가에 가서 천운석으로 침을 만들 수 있느냐.
‘그들의 암기를 만드는데도 바쁘다고 들었는데 내 의뢰를 받아 줄까? 천운석 가공 난이도가 결코 쉽지 않을 텐데…’
이건 미리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가서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가서 기회를 만들어 보자. 이번이 아니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까.
마음을 굳히고 청성파의 장로에게 말했다.
“당연히 도와야지요. 청성파는 무림맹의 오랜 우방이 아닙니까?”
장로는 크게 기뻐했다.
“정말 고맙소, 의각주!”
“그런데 가는데만 해도 시일이 꽤 걸릴 텐데 그때까지 유천진인께서 버티실 수 있을까요?”
“거동은 힘들지만 운기하며 버티고 있으시니 가는 동안은 괜찮으실거요. 하지만 최대한 빨리 출발할 수 있으면 좋겠소.”
“알겠습니다. 준비되는대로 출발하지요.”
“정말 고맙소!”
청성파 장로와 대화가 마무리되자,
무림맹 총군사 제갈영영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어려운 결정 내려주셔서 감사해요, 의각주님. 번거로우시겠지만 한 가지 일을 더 부탁드리고 싶어요. 청성파의 일을 도운 후, 사천당가에 들러 주실 수 있을까요?”
“사천당가 말입니까?”
“네, 강호 정세가 심상치 않으니 그들의 지원을 얻고 싶어요. 설득은 다른 분이 할 거예요. 다만 복귀하는 일정이 조금 지체될 수 있다는 점 양해 부탁드릴게요.”
최근 보여주던 부드러운 눈빛과는 달리 무림맹 회의실에서 의견을 내는 그녀의 눈빛은 날카롭다.
이게 평소 일할 때 모습이라는 거겠지.
그리고.
유성은 제갈영영이 나서서 사천당가 이야기를 꺼낸 것이 자신을 위한 거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녀는 유성이 천운석을 가공하기 위해 사천당가에 가고 싶어 했던 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오, 미리 논의된 일은 아니지만 좋은 생각이오. 당가가 힘을 보태준다면 큰 도움이 될 거요.”
“마침 청성파로 가야 할 일이 있어 떠올렸을 뿐이예요.”
다른 장로들과 사전에 논의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올 때 선물이라도 사다 드려야겠네.
***
이튿날, 유성은 사천으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청성파 장로가 최대한 빨리 떠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니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친분 있는 자들에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연락을 돌린 후, 의각의 일을 처리했다.
“양의원님, 차의원님. 제가 사천에 다녀와야 하니 의각을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이네. 내가 양의원님 잘 모시고 있을 테니 잘 해결하고 오게.”
유성은 이번에 따로 양의원과 독대하며 작은 항아리 몇 개를 건네주었다.
“이게 뭔가?”
그가 항아리를 슬쩍 열어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감정 변화를 크게 보이지 않는 그인지라 색다른 광경이다.
“설마?”
“제가 만든 약입니다. 성수라고 이름 붙였지요.”
안에는 유성이 틈틈이 만들어 둔 성수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신비한 약… 설마 전에 군사부에서 간자 사건이 있었을 때 총군사님이 사용했다는 약이 혹시 이건가?”
“맞습니다.”
“정말 놀랍군.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꼭 한번 그 약의 존재를 보고 싶었는데 이걸 의각주가 만든 것인 줄 전혀 몰랐네. 가능하다면 나도 영술이라는 걸 배우고 싶을 정도야.”
당시, 제갈영영은 성수를 우연히 구한 약이라고 사람들에게 밝혔다.
성수의 정체가 공개되면 혼란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비밀로 해왔던 것인데,
이번처럼 장기간 의각을 비워야 할 때 유성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방법으로 성수만한 게 없다.
그걸 의각에서 제일 믿을 만한 양의원에게 맡겼다.
그의 인품은 믿을 만하다.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사용하셔야 합니다. 가능하면 비밀을 지킬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겠네. 스승님께도 비밀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
성수의 효능과 사용 방법 등을 양의원에게 상세히 설명해 준 후.
유성은 오늘의 처음이자 마지막 환자를 맞이했다.
바로 평소보다 훨씬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제갈영영이다.
“으으… 빠, 빨리 좀…”
그녀는 머리를 붙잡고 유성에게 달려와 침을 놔줄 것을 종용했다.
파르르 떨리는 손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짐작이 되었다.
유성은 재빨리 제갈영영의 머리를 더듬었다.
매일 그녀의 머리카락을 헤집다 보니 눈으로 보지 않고 두피만 만져 봐도 백회혈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이제 굳이 백회혈에 시침할 필요는 없지만 신성력 소모도 줄일 수 있고, 뜻밖에 손맛도 즐기게 되어 평소처럼 백회혈에 시침을 마쳤다.
“하아… 살았다. 고마워요. 통증이 싹 가셨어요. 오늘 무리했더니…”
“평소보다 훨씬 안 좋아 보이시기는 했습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제갈영영은 몸을 부르르 떨며 새벽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천문진법총해 두 번째 진법이 거의 마무리 단계야. 몇 달간 의각주님이 안 계시니 오늘 마무리 짓자.
3일 정도 공부해야 할 분량을 하루 만에 마무리 짓기 위해 잠도 줄이고 새벽같이 일어났다.
첫 번째 진법보다 더 난해했지만, 꾸준히 공부하다 보니 결국 두 번째 진법도 모두 익힐 수 있었다.
뿌듯함을 느낀 것도 잠시, 그녀는 참기 힘든 두통에 유성에게 달려온 것이다.
이제 유성이 없으니 당분간 세 번째 진법 공부는 멈춰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보내고 싶지 않지만, 화경의 고수를 잃어서는 절대 안 돼. 게다가 의각주님도 사천당가에 볼일이 있으시니…’
대의를 위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아쉽지 않을 리 없다.
자연스럽게 한숨이 나왔다.
“당분간 의각주님이 안계시니까 무리해서 공부했거든요.”
“아, 그거라면 제가 따로 준비한 게 있습니다.”
유성이 그의 진료실 안쪽에서 무언가 꺼내 왔다.
작은 항아리다.
“성수입니다. 몇 달간 쓸 양은 되지 않지만 공부하시다가 참기 힘든 두통이 찾아오면 조금씩 드십시오. 훨씬 나으실 겁니다.”
“이렇게 많이요?”
“응급 상황에서 다른 환자들에게 쓸 양은 따로 있으니 부담가지지 마십시오.”
제갈영영은 성수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유성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성수를 실제로 사용해 본 사람이 그녀였다.
그로 인해 부군사 태정헌이 죽음에서 생환하지 않았던가.
누군가의 목숨마저 구할 수 있는 귀한 성수를 단순히 공부하며 머리 아플까 봐 만들어 준 유성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고마워요. 아껴 쓸게요.”
“참, 그런데 어제 사천당가에 들러달라는 이야기는… 제가 생각한 거 맞습니까?”
유성 때문에 일부러 사천당가 행을 끼워 넣은 게 아니냐는 이야기.
“알면서 뭘 물어요? 사람 민망하게…”
제갈영영이 살짝 눈을 흘겼다.
“저도 고마워서요.”
“뭐, 마침 사천당가의 지원을 얻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아시다시피 그들의 독공은 집단전에서 큰 도움이 되거든요.”
“그렇긴 하지요. 당가의 지원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천운석 가공도 꼭 성공하세요. 그걸로 침 만들고 싶어 하셨잖아요.”
“그래야지요.”
그녀는 의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마디 남겼다.
“마음 같아선 안전한 곳에 계시길 바랐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네요. 부디 몸조심하세요.”
***
의각의 일까지 마무리 지은 유성은 짐을 챙겼다.
주요 물품으로는 역시 침통과 여러 의료 도구들.
그리고.
천운석 두 조각.
‘꼭 성공하자.
집을 나서 함께 청성파로 떠나는 일행과 만났다.
그중 무리를 이끄는 책임자와 먼저 인사 나누었다.
“의각주. 어서 오게, 이번에 내가 일행을 이끌게 되었네.”
“잘 부탁드립니다, 청운 장로님.”
청운 장로는 곤륜파 출신이다.
전에 의각 시험을 볼 때, 유성이 영술을 익히지 않았냐고 지레 짐작하여 사람들에게 대신 설명해 준 사람이다.
덕분에 스킬을 영술로 포장하여 지금처럼 자유롭게 신성력을 쓸 수 있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요즘 나도 나이가 먹었는지 예전 같지 않네. 가면서 몸도 좀 살펴주게.”
어깨를 과장되게 두들기며 씨익 웃는 모습이 엄살로 보이지만, 유성은 차의원 덕에 사회생활에 대해 배운 점이 많다.
“물론입니다. 사천까지 가는 동안 일행들의 건강은 제가 책임 지겠습니다.”
유성의 호언 장담에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일부 무사들은 이미 의각에도 여러 번 찾아와 안면이 익기도 했다.
그리고.
유성은 일행의 후미에서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남궁 소저도 지원하셨습니까?”
“네, 의각주님. 저도 같이 가게 됐어요. 잘 부탁드려요.”
남궁유린이 멋쩍게 웃었다.
“사천까지 가는 일인데 너무 멀지 않겠습니까?”
“그건 괜찮아요. 그런데 저희 언제 출발하나요?”
그녀는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왠지 조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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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평소와 조금 달라 보이시는데.”
남궁유린은 유성의 물음에 잠깐 고민했지만, 솔직히 털어놓았다.
더 한 이야기도 털어놓았는데 이 정도쯤이야.
유성에게 들릴 정도로만 속삭였다.
“그게… 할아버지가 가문으로 돌아가자고 하셔서 몰래 떠나는 거라서요. 지금 며칠 자리 비우셨는데 만약 일찍 돌아오시면 절 데려가려고 하실 거예요.”
“그래도 괜찮습니까? 가뜩이나 오래 걸리는 임무인데요.”
유성은 검왕이 평소 엄하다고 들었다.
이렇게 몰래 떠났다가 뒤늦게 검왕이 알게 되면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지금은 돌아갈 자신이 없어서요. 몇 달 후에는... 뭐, 어떻게든 되겠죠.”
생각보다 대책 없는 타입이네.
“자, 그럼 서로 인사 나눴으면 모두 모이시오. 이번 임무에 대해 설명해 주겠소.”
청운 장로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곤륜에 몸담은 청운 장로는 천하를 돌아다닌 경험이 풍부했고, 장거리 여정을 이끌기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무공 수준도 초절정 고수로 뛰어나다.
다른 무림맹 고수들과 함께 하면 웬만한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는 자다.
“아시다시피 이번 임무는 의각주를 성도의 청성파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는 임무요.”
무림맹 무사들은 모두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으나, 남궁유린은 몰랐던 눈치다.
눈이 동그래졌다.
유성에게 보내는 눈빛이 마치 이렇게 묻는 듯하다.
-이게 다 의각주님 호위 임무였어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청운 장로가 이제 이동 경로를 설명했다.
“우리는 장안을 거쳐 관중평야를 따라 진령산맥 북쪽 길로 이동할 것이오.”
청성파 장로, 정우 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문관을 지나시려는 거군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이 정도 규모의 인원이 이동하기에 가장 적합하겠습니다.”
“그렇소. 가는 길에 무림맹 분타들에서 쉬어갈 수 있소. 상황에 따라 객잔을 잡거나 며칠은 야영해야 할 수도 있지만 가장 빠른 길이오.”
일행의 우두머리가 경로를 정했으니, 이제 부지런히 움직이는 일만 남았다.
마차 여러 대를 나눠 타고 일행은 무림맹을 떠났다.
유성은 청운 장로와 함께 마차를 타게 되었다.
그가 제일 고수였고 이 무리에서 꼭 지켜야 할 사람이 유성이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정우 도인과 남궁유린을 포함하여 총 8명의 인원이 대형 마차에 타게 되었다.
청운 장로가 남궁유린에게 물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묻지 못했으나 검왕께서는 가문으로 돌아가셨나?”
유성과 남궁유린이 검왕에 대해 나눈 이야기는 알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조금 전에 다른 일행을 챙기기 바빠 보였으니.
“아니요, 다른 일이 있으시다고 하셨어요.”
“그럼 남궁 소저가 이 임무에 따라 가는 건 알고 계신가?”
“갑자기 맡게 된 임무라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그럼 검왕께서 일 보시고 무림학관에 들리시면 당황하시겠군.”
“네, 하지만 제가 없는 거 알면 가문으로 돌아가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청운 장로는 유성에게도 의각 소식 잘 듣고 있다며 여러 말들을 건넸다.
마차 안의 분위기는 그가 주도했다.
첫 만남 때부터 느꼈지만 아는 바를 뽐내기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나는 사천에 세 차례 가 보았네. 사천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으로는—”
그는 세상을 돌아다녔던 여러 이야기해주었다.
정우 도인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나 청운 장로 덕분에 마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별로 지루하지 않았다.
***
제갈영영은 보고서를 처리한 후, 차를 한잔 타 들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멀리 전각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쪽을 바라보며 차 한잔 마시는 건 생긴 지 얼마 안 된 습관이다.
그러면 왠지 모르게 편안한 기분이 들어 바쁜 와중에도 하루에 몇 번 정도는 꼭 차 마실 시간을 내곤 했다.
“...”
분명 그랬는데.
‘오늘은 그런 기분이 안 드네.
제갈영영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전각은 의각.
그곳의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
앞으로 몇 달 동안은 돌아오지 않는다.
“휴…”
한숨을 쉬고 창문을 닫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 좀 미루고 청성파로 가는 행렬이라도 한번 보고 올걸.
아침에 두통 치료 받고 인사하긴 했지만,
바쁜 일이 있어 따로 배웅하지 못한 게 내심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차를 재빨리 마셔버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때.
부군사 태정헌이 찾아왔다.
“총군사님, 무림학관 생도 임무 현황 보고드리겠습니다.”
“무림학관이요? 특별한 사항 있나요?”
크고 작은 보고들이 몰려오는 군사부의 특성상, 별 볼일 없는 건은 총군사인 제갈영영 선까지 올라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부군사가 무림학관 생도 임무 현황을 보고하러 온 것은 특별한 사항이 발생했다는 뜻.
“네, 한 건 있습니다. 이번에 사천까지 의각주님을 호위하는 장기 임무에 따라간 생도가 한 명 있습니다.”
“신기하네요. 장기 임무인데다 급하게 잡혔는데 지원자가 있었나보군요. 잠깐, 근데 누구죠? 그 생도는?”
제갈영영은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분명 의각 경계 임무도 홀로 지원한 생도가 있었는데...
“남궁유린 생도입니다.”
꾸깃—!
“...!”
태정헌은 총군사가 보고서를 와락 움켜쥐자 깜짝 놀랐다.
“아, 죄송해요. 딴생각하다가 그만. 그 건은 알겠어요. 다른 사항은요?”
순식간에 평온한 모습을 되찾은 제갈영영이 구겨진 보고서를 다시 피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나.
태정헌은 다른 사항들을 보고할 동안 제갈영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러져 있는 걸 똑똑히 목격했다.
‘요즘 신경이 날카로우신가 보군. 조심해야겠다.
의도치 않게 군사부에 긴장감을 심어 준 제갈영영은 퇴근 후 옷을 갈아입고 침상에 드러누웠다.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매일 떠오르던 잘생긴 남자 얼굴이 아니다.
순진 한 척, 커다란 눈을 깜빡이던 여자가 떠오른다.
상상 속 그녀가 갑자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유성님과 저, 둘만의 비밀 이야기예요.
제갈영영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 여우 같은…”
***
이튿날.
제갈영영은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온갖 불길한 상상으로 늦게 잠을 이루었음에도 습관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그녀는 탁자에 앉아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천문진법총해]
두 가지를 익혀냈지만 아직 여덟가지가 더 남아 있다.
전해지는 바로, 천문진법총해를 창안한 조상님은 다른 부분에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당시 여러 진법 가문들이 있었으나 조상님의 활약으로 제갈세가가 천하제일 진법 가문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진법에 관련된 의뢰들을 받아 제갈세가는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였다고.
‘황실에서 의뢰를 맡겼다는 말도 있고.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녀도 이 책을 다 익히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최고의 진법가가 되고 싶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유성이 없으니 적극적으로 공부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려니까 어색하네. 삼단계가 어떤 건지 조금만 살펴볼까?
그런 충동이 들었다.
유성이 주고 간 성수도 있으니 조금만 마셔도 두통을 해소할 수 있다.
‘일단계보다 이단계가 어려웠어. 삼단계는 당연히 더 어렵겠지. 그냥 어느 정도인지 가늠만 해보자.
결정을 내린 제갈영영은 책을 펼쳤다.
책에서 푸른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제갈영영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채 삼단계 진법에 대해 파악하기 바빴다.
‘역시 더 복잡하지만 못 풀 정도는 아냐. 그런데 점점 어려워지면 십단계는 얼마나 어렵다는 걸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제갈영영이 책을 덮었다.
자기도 모르게 홀린 듯 하루치 진도를 나가고 말았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경험상 이틀째는 참기 힘들 정도로 괴로워진다.
시험 삼아 꾹 참고 확인해 본 결과, 삼일째부터는 두통이 서서히 줄어들다가 오일 째는 완전히 해소된다.
유성에게 치료받지 못할 경우, 하루치 진도를 나가면 오일은 쉬어야 하는 것이다.
‘극악한 난이도야. 이러니 조상님들도 이 책을 제대로 못 익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성수를 조금 마셨다.
두통이 해소되며 머리가 다시 상쾌해졌다.
‘귀한 거니까 아껴 마셔야지. 당분간 공부하지 말자.
그러나 이튿날.
은은한 두통이 발생했다.
그녀는 곧 두통의 원인을 알아냈다.
‘삼단계부터는 꾸준히 공부하지 않으면 은은한 두통이 지속해서 발생한다고?
물론, 원인을 안다고 다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공부할 때처럼 심각한 두통은 아니지만 은은한 두통이 사라지지 않고 그녀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부작용이 있었다.
성수의 양은 매일 마실 만큼 넉넉하지 않다.
“망했다…”
그날 이후.
제갈영영의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졌고, 군사들은 더 긴장해야 했다.
부군사가 군사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다들 알다시피 요즘 심상치 않은 일들이 많아 총군사님이 좀 예민하신 것 같다. 며칠만 조심하자.”
정확한 원인을 모르는 그는 제갈영영의 날카로운 기분이 며칠이 아니라 몇 달이 될 거라는 사실은 알 수 없었다.
***
낙양에서 장안으로 향하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다.
유성 일행은 중간중간 마차를 끌다 지친 말들만 교체하며 장안으로 달렸다.
개울이 나오면 물을 마시게 하고, 식사하며 말들도 풀을 뜯게 했다.
“길이 잘 정비되어 있으니 마차가 잘 달리는군요.”
“지금은 그렇지만 진령산맥 쪽으로 가면 속도가 현저히 느려질 걸세.”
사천을 여러 번 가 봤다는 청운 장로가 그렇다니, 맞을 거다.
어쨌든 순조롭다고 생각하던 중.
히이잉—!
쿵—!
말들이 크게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소음이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청운 장로의 물음에 밖의 무사가 답했다.
“선두의 마차를 끌던 말들이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다친 사람은 없나?”
“사람은 괜찮은 것 같지만 말들이 다리가 부러진 것 같습니다.”
“이런, 몇 마리나?”
“세 마리가 다쳤습니다.”
한 마차를 끄는 말들은 네 마리.
그중 세 마리가 다쳤다면 다른 마차를 끄는 것도 큰 지장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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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이 어머니의 눈에 대해 물은 후 고민에 빠지자 장칠은 불안했다.
“의각주님, 혹시 무슨 문제 있습니까? 호, 혹시 머지 않아 어머님이…”
차마 입으로 내뱉지 못한 말.
‘눈이 완전히 멀어 버리게 되시는 건가요?
어머니의 시력이 완전히 멀어 버리면 장칠은 의각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모셔야 할지도 모른다.
모시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언젠가 그렇게 될 거라고 각오도 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안 된다.
종학진이 내기판을 제안 해도 장칠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온갖 유혹을 이겨 내고 열심히 돈을 모았지만.
‘아직 모자라. 몇 년밖에 못 버텨.
하지만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온 세상이 어둠에 물들어 혼자 방 밖도 나가기 힘든 홀어머니는 도대체 누가 모신단 말인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동안 함부로 입을 놀려 하늘의 노여움을 산 걸까?
선뜻 달려와 어머니의 목숨까지 구해주신 의각주님에 대해 함부로 헛소문을 퍼뜨렸던 과거가 미치도록 후회되었다.
그가 혼자 북치고 장구치며 속이 시꺼멓게 죽어갈 무렵.
드디어 생각을 끝낸 유성의 입이 열렸다.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가능성을 봐서 그렇습니다.”
“가능성이요?”
유성은 불안한지 장칠의 팔을 붙들고 있는 그의 어머니에게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님, 제가 눈을 조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제 눈을요?”
장칠은 불안한지 유성의 침통을 힐끗 바라보았다.
시침 한 번으로 거의 모든 병을 치료한다고 일침신의라는 명성까지 얻은 유성이다.
그런데 시침도 시침 나름이지, 괜히 상태를 살핀다고 눈을 찔러 악화시켜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의각주님, 혹시 어머니 눈에도 침을 놓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침 놓으려는 건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그렇다면야…”
“그럼 좀 보겠습니다.”
장칠이 물러서고, 유성은 그의 어머니의 눈에 조용히 손을 덮었다.
‘갑자기 눈은 왜 살펴보신다는 걸까?
장칠의 어머니는 평소 아들로부터 의각주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모시는 분이 얼마나 대단한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어왔음에도 그녀는 유성이 눈 치료를 시도 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의선의 제자라는 양의원에게 어렵사리 진료 받았을 때,
늙은 사람들 중 종종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들었고, 여태 그렇게 알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편히 계시면 됩니다.”
유성의 손에 덮여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작은 등불이 새어 들어왔다.
새어 들어온 빛이 번져 마치 안개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
흐릿한 안개가 점차 걷히기 시작한다.
유성의 손과 눈 사이의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선명해진다.
‘착각은 아닐까?
눈이 손에 뒤덮여 있어 착각한 걸 거다.
어떻게 멀어 버린 눈을 고친단 말인가?
“...”
그러나 유성이 조심스럽게 손을 떼어내고, 어둠에 잠식된 시야가 서서히 돌아왔을 때.
“아아…!”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몇 년 사이 이마에 주름이 늘어난 아들의 얼굴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던 탓이다.
아들은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서서히 사라져가는 시력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 써 왔고,
만약 완전히 눈이 멀어 버리게 된다면 아들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기 위한 결심까지 서 있었는데…
“어머니?”
멀쩡해진 눈으로 다시 한번 아들의 얼굴을 생생히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장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 때문에 정말 고생 많았다…”
그리고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유성을 향해 몇 번이고 고개 숙였다.
“아이고, 의각주님! 이 노인네의 눈을 고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무슨 일인지 잘 파악 되지 않던 장칠은 그제야 눈치챘다.
비록 눈물을 흘리고 계시지만, 어머니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맑고 또렷하게 초점이 잡혀 있다는 걸.
“의, 의각주님, 저, 정말 저희 어머니의 눈이 고쳐진겁니까?”
“이놈아! 아주 잘 보인다, 잘 보여! 아이고, 의각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빙그레 웃는 유성을 향해 장칠은 다시 큰절을 올렸다.
수차례나.
장칠의 어머니 역시 늙은 몸으로 아들과 같이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유성과 남궁유린이 황급히 그만하시라고 말려야 할 정도로 두 모자는 계속 감사함을 표했다.
***
한바탕 큰절 세례가 끝난 후.
장칠과 어머니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원래 얼굴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
그리고 남궁유린 역시 커다란 눈에 한가득 물기를 머금은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얼마나 찍어 댔는지, 파란 소매 한쪽이 흥건히 젖어 있다.
“...”
괜히 혼자 냉혈한이 된 것 같아 머쓱한 유성의 오른손을 장칠의 어머니가 끌어 잡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 고마운가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다른 손으로 남궁유린의 왼손도 끌어 잡았다.
“대단한 가문의 무사님이시라고요?”
“남궁유린이에요, 어머님.”
“이름도 참 예뻐요. 듣던 대로 얼굴도 정말 곱고.”
“감사해요.”
예쁘다는 칭찬은 어떤 여자라도 기분 좋을 거다.
남궁유린이 슬쩍 웃었다.
이제 장칠 어머니의 시선이 유성에게 향했다.
“의각주님도 이렇게 미남이신지 몰랐어요.”
“큼.”
민망해 헛기침 하면서도 유성은 슬쩍 장칠을 째려보았다.
남궁유린의 미모는 칭찬했으면서 유성에 대해서는 별말 안한 모양이다.
나름 열심히 깎은 얼굴인데 서운하게.
그런데 장칠의 표정이 이상하다.
왠지 안절부절못 하는 것 같다.
“어, 어머니—”
“두 분, 굴하지 말고 예쁜 사랑 하세요. 의각주님 실력이 이렇게 출중하신데, 무사님이 열심히 가문 설득하시면 두 분 꼭 혼인 할 수 있을 거예요.”
유성과 남궁유린의 손을 겹쳐주며, 어머니가 한 말에 장칠이 양 팔을 휘적이며 괴성을 내질렀다.
“으아아! 죄송합니다아아아!!”
장칠이 어머니에게 뭔가 또 헛소리를 해 놓은 모양이다.
유성이 어처구니없어 남궁유린에게 고개 돌렸다.
그녀도 마찬가지 일 테니까.
그런데.
남궁유린과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그건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설마 장칠, 너…?”
당황한 장칠의 어머니가 손을 놓길래 유성도 남궁유린과 강제로 포개져 있는 손을 빼냈다.
유성의 손을 놓친 남궁유린이 무의식에 허공을 움켜쥐다가 슬며시 손을 거둬들였다.
***
막 회복하여 쉬어야 하는 장칠의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유성과 남궁유린은 밖으로 나섰다.
장칠이 쪼르르 따라와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의각주님! 남궁유린님!”
미안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연신 사과하는 그를 보며 유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그러지 마십시오. 남궁 소저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어머님이 적적해 하셔서 이것저것 이야기해드린다는 게 그만… 저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겁니다.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맹세까지야… 아무튼 믿어보겠습니다.”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어머니 치료해주신 것도요. 아 참, 그리고 이거…”
장칠이 품에서 전낭을 하나 꺼냈다.
“이걸 왜…?”
“치료비 받으셔야지요.”
억지로 장칠이 쥐어 준 주머니가 살짝 열려 있었는데, 안에는 은자들이 꽤 많았다.
비록 유성이 해준 일에 비하면 많지 않을지라도 장칠에게는 분명 큰돈일 텐데.
“너무 많습니다. 같은 식구 어머님인데요.”
“아닙니다. 일 그만두고 어머니 모셔야 하면 쓰려고 모아둔 돈입니다. 다 드려도 아깝지 않지만 생활비만 제했습니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습니다.”
실랑이 끝에 유성은 약간만 챙기고 장칠에게 모두 돌려주었다.
가볍게만 봤던 장칠이 건실한 사람이어서 의외였을 뿐.
무림맹으로 복귀하는데, 남궁유린의 표정이 밝아 보인다.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이 생기가 돌아 보는 사람마저 기분 좋아진다.
‘지금 진료 이야기 꺼내기는 적합하지 않겠네. 진짜 그쪽이면 당장 치료해주지도 못 하는데.
다시 기회를 보기로 한 유성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원래 눈물이 많으십니까?”
“아… 조금요. 그리고 아까 제 오라버니 생각도 나서요.”
“...”
남궁유현도 눈을 다쳤다.
장난 좀 치려다 괜히 남궁유린의 기분만 망쳐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는데.
“그래서, 지금 기분 좋아요. 의각주님이 오라버니 눈 치료해주실 거라 믿으니까요.”
보는 사람조차 기분 좋아지는 밝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
이튿날.
장칠은 여러 군것질거리를 바리바리 싸와서 유성에게 건넸다.
“저희 어머니가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하고, 죄송했습니다!”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잘 먹겠다고 전해드리십시오.”
“네, 의각주님!”
장칠은 뒷걸음질 쳐서 공손하게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친한 하인 하나가 손짓해 그를 불렀다.
“장칠, 잠깐 이리 와봐.”
“왜?”
구석진 곳에서 하인이 장칠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어제 누가 너 무림학관에서 봤다던데 의각주님이랑 남궁유린이랑 같이 있었다며? 둘이 분위기 어떻든? 진짜 막 분홍빛이었어?”
친한 하인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장칠이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맛깔나게 들려주리라.
“뭔 개소리야? 그런 거 하나도 없었으니까 헛소리 할 거면 가서 약재나 들여놔!”
“아니, 갑자기 왜… 어제까지만 해도 너도—”
“쓰읍! 한 번만 그딴소리 하면 너라도 가만 안둔다?”
장칠이 정색하며 가 버리자 하인은 벙쪘다.
‘이런 이야기는 지가 제일 신나 했으면서 왜 저래? 뭘 잘못 처먹었나?
장칠은 새롭게 태어났다.
그는 의각의 소식은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단속하고, 외부 소식들을 유성에게 가감 없이 전하는 충실한 하인이 되었다.
***
어느 날, 장칠이 유성에게 소식을 하나 전했다.
"의각주님, 검왕이 남궁유린님을 찾아와 가문으로 데려가려고 한답니다."
"그래요?"
"네, 왠지 알려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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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휘성의 패자이자 오대세가 중 첫 손가락에 꼽히는 무림세가.
수많은 상인들과 중소 문파들이 줄을 대기 위해 찾아오는 곳.
겉으로 보기에, 안휘성에서 만큼은 황제 부럽지 않은 위세를 떨치는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환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을 맞이했다.
가주는 어른에게 혼나는 어린아이처럼 얌전히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앞에 앉은 노인은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로운 기도를 가진 자였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유린이 복귀하지 않겠다고 했다지?”
“그렇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아버지.”
노인은 바로 가주의 아버지이자 당대의 검왕 남궁진이다.
무표정한 검왕이 차를 들이켰다.
가주는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무림학관에 가 있는 남궁유린이 복귀하라는 말에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가주는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 숙였다.
대대로 검왕을 배출해 온 남궁세가.
가주는 벌모세수부터 시작해 온갖 지원을 받았음에도 아버지처럼 대단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항상 죄송한 마음을 품어 왔던 가주는 아들 남궁유현이 태어나 한시름 놓았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무재를 보인 아들이 순조롭게 성장하며, 검왕이 많이 유해졌던 탓이다.
남궁유현은 바짝 쫓아오는 하북팽가를 뿌리치고 남궁세가가 여전히 최고의 무가로 남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였다.
오대세가 중 다섯 번째만 필사적인 게 아니다.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
그런데.
아들 남궁유현마저 그런 꼴이 되어 집 안에 틀어박혔다.
이제 믿을 구석이라고는 딸 남궁유린 뿐인 상황에서, 딸이 갑자기 말을 안듣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사람을 보내 데려오겠습니다.”
가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자,
검왕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됐다. 내가 직접 무림학관에 들려 데려오겠다.”
가주는 입을 다물었다.
검왕이 한번 선언하면 그의 말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
남궁유현을 최고로 키워내기 위해 가주 자리를 넘겨 주고 태상가주의 위치로 물러났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남궁세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
검왕은 호위를 꾸리겠다는 가주의 말을 물리치고 홀로 남궁세가를 떠났다.
얼마 전 도왕이 정체불명의 무리에게 습격 당했다고 전해 들었으나, 검왕은 그런 도왕을 비웃었다.
그는 자기 무위에 큰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낙양으로 향하며, 여러 소문을 들었다.
최근 큰 명성을 얻은 신의가 눈이 먼 사람을 치료해냈다던가, 하는 소문.
손자 남궁유현이 떠오르며 귀가 솔깃했지만, 내막을 전해 들은 그는 관심을 접었다.
이미 눈에 상처를 입은 봉사 하나가 신의를 찾아간 적이 있단다.
그리고 그자는 여전히 봉사다.
‘단순히 시력이 좀 나빠진 자를 고쳤을 뿐, 유현이처럼 눈에 검상을 입은 사람까지 치료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검왕은 자기 판단을 굳게 믿었다.
그리고.
손녀 남궁유린 역시 그의 지도 아래 있을 때 가장 큰 성취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무림학관 생도들이 술렁거렸다.
화경의 고수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검왕을 실제로 보게 되었으니, 무림인인 그들은 동경의 눈빛을 보냈다.
남궁유린과 검왕의 만남 역시 주목을 받았다.
‘과연 검왕이 왜 남궁유린을 찾아온 걸까?
검왕은 남들이 지켜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남궁유린과 대화를 나누었다.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에 뵈어요, 할아버지.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널 데리러 왔다.”
“...”
검왕이 탐색하듯 남궁유린을 살폈다.
여전한 기도와 자세.
그렇다고 손에 굳은살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편지에 쓴 것과 달리 전혀 성취가 없는 것 같은데 어찌 된 일이냐?”
“그건...”
남궁유린은 무림학관을 그만두고 남궁세가로 복귀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오라버니가 건재할 때는 가기 싫다고 해도 무림학관에 가라더니, 이제 와서 오라버니가 다치자 그녀에게 복귀를 종용했다.
가문으로 돌아가면 후계 수업을 받으며 검왕에게 직접 무공을 배우게 될 거다.
남궁유린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고민하다가 남궁세가로 전서구를 띄웠다.
-여기서 수련에 성취가 있어서 아직은 돌아갈 수 없어요. 때가 되면 돌아갈 테니 기다려주세요.
원치 않아 오게 된 무림학관이었다.
하지만 이곳으로 와서 좋은 점도 있었다.
그건 바로, 어릴 적 친하게 지내던 시녀를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항상 옆에 두고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들어왔었는데, 막상 떨어져 보자 약간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가문으로 돌아가면 다시 그녀를 마주해야 한다.
아직 남궁유린은 스스로 극복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더 지켜보고 싶은 사람도 있어.
생각을 끝내고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가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엄한 할아버지의 말을 거역해 본 적 없지만, 남궁유린은 문득 유성이 떠올랐다.
단전을 잃은 몸으로 도왕 앞에서 그의 핏줄 팽지산을 두들겨 패던 패기!
하물며 남궁유린 자신이 핏줄 앞에서 못할 소리가 뭐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불쑥 용기가 솟아올랐다.
감히 아버지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검왕과 빤히 시선을 맞췄다.
“그건 죄송해요. 하지만 전 아직 돌아가지 않겠어요.”
“...”
검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림학관 생도들이 이쪽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다.
절대 거절당할 리 없을 거로 생각해 당당하게 이야기 꺼냈지만,
소극적일지언정 자신을 거역해 본 적 없는 손녀가 처음으로 거역한 거다.
단번에 이야기가 끝날 것 같지 않다.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꾸나.”
장소를 옮기면서, 검왕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손녀에게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 유약해 걱정했더니, 어느새 내 앞에서 자기주장도 할 줄 알게 되었구나. 긍정적인 변화다.
가문의 중심으로, 일부러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아들도, 손자도 자기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남궁유린도 마찬가지였는데, 무공 실력은 정체되어 있으나 내면의 성장이 있었던 듯하다.
언젠가 가주가 되어야 함에도 유약한 성정이 아쉬웠는데, 그 부분이 채워지고 있는 모습이 기껍다.
접객당 한 곳에 자리 잡고 검왕이 물었다.
“돌아가지 않겠다는 건 그 시녀 때문에 그러느냐?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셈이냐?”
“물론 그 이유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에요. 지금은 밝힐 수 없지만 절 믿어 주세요.”
의각주님이 오라버니의 눈을 고쳐주신다고 했어요.
물론 이건 유성과 비밀로 한 약속이라 공개하지 않았다.
검왕은 억지로 끌고갈 수 있었지만, 처음으로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밝힌 남궁유린을 존중하기로 했다.
어차피 목적도 무공을 전수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좋다. 정 그렇다면 당분간 여기 머물면서 제왕검형을 가르쳐 줄 테니 이건 열심히 수련하겠다고 약속해라. 그럼 당분간 복귀하라고 하지 않겠다.”
남궁세가의 후계자에게만 전수되는 제왕검형.
남궁유현이 익혔던 절기가 이번에는 남궁유린에게 차례가 돌아왔다.
***
유성은 환자들을 보면서 자꾸 남궁유린이 떠올랐다.
‘검왕이 와서 데려가려고 한다라…’
사정도 모르는 남궁세가 내부의 일이다.
장칠의 짐작과 달리 둘은 남녀 간의 사이가 아니기에, 유성이 끼어들 여지는 단 하나도 없다.
단지, 유성은 떠나기 전 그녀를 한번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진료도 못 봤으니까.
그런 핑계를 대며, 진료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오늘따라 환자가 많군.
의각의 의원이 세 명으로 늘어나 조금 일찍 끝나는 날도 많았으나 오늘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아직 환자가 많이 남았습니까?”
진료실로 들어온 장칠에게 물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장칠은 유성에게 양해를 구하고 종학진을 찾아갔다.
아직 환자들이 열 명 이상 남아 있다.
“형님, 위중한 환자 있습니까?”
위중한 환자는 유성에게 가야 하는 수준의 환자를 뜻한다.
종학진이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아니? 왜?”
“그럼 양의원님이랑 차의원님한테 좀 몰아주실 수 있어요?”
“아, 의각주님 일 있으시대?”
“의각주님이 그런 말씀 하신적은 없고요. 그냥 제가 보기에 좀 피곤해 보이셔서요.”
“아이쿠, 그럼 안 되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의각주님 환자는 더 없다고 전해드려.”
“고맙습니다.”
오늘은 차의원이 당직.
장칠의 말을 듣고 짐을 챙겨 진료실을 나선 유성은 아직 환자가 꽤 남아 있는 걸 보고 그의 배려를 눈치챘다.
일반 환자들을 치료해 신성력을 쌓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오랫동안 남궁유린을 더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유성을 무림학관 쪽으로 이끌었다.
“의각주님, 남궁유린님은 지금 무림학관 네 번째 접객당에 있답니다.”
슬쩍 장칠이 전해준 말을 듣고서.
잠시 후.
유성이 네 번째 접객당 앞에 도착했을 때는 접객당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검왕과 함께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안에는 남궁유린 혼자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그녀의 초점 없는 눈이, 유성을 발견하고 초점을 되찾았다.
“의각주님?”
벌떡 일어난 그녀가 다가왔다.
“아직 계셨군요. 전에 못한 말을 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지, 지금요? 이, 일단 들어오세요.”
남궁유린이 왠지 허둥대며 유성을 접객당으로 이끌었다.
누가 주시하고 있지 않은지 주위도 살피고 문도 꼭 닫았다.
“여기 앉으세요.”
유성이 그녀가 권한 자리에 앉자, 남궁유린이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옆자리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손이 가지런하다.
꿀꺽.
남궁유린이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전에도 그러더니, 인후 쪽에 무슨 문제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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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객당은 손님을 맞이하는 곳.
원래 남궁유린이 할아버지인 검왕을 맞이한 장소인데, 그가 보이지 않아 행방을 먼저 물었다.
진료중에 들어오면 괜히 번거로울 테니까.
“여기서 당분간 머무르시기로 하셔서 무림맹에 인사하러 가셨어요.”
다행이다.
“그럼 당장 가문으로 돌아가시지는 않는 겁니까?”
남궁유린은 기뻐보이는 유성을 보자 슬쩍 웃음이 나왔다.
그녀도 기뻤으니까.
시녀를 피할 수 있어서인지, 다른 이유인지는 그녀도 확신하지 못했지만.
“네. 당분간 돌아가지 않아도 돼요. 대신 할아버지께 무공을 배우기로 했지만요.”
“검왕께서 직접 무공을 가르쳐 주신다구요?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검왕에게 직접 무공을 배우는 건 무림인에게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었나?
축하를 건넸음에도 왠지 석연치 않아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유성은 얼른 본론으로 넘어갔다.
“아, 제가 찾아온 이유는—”
“자, 잠시만요!”
흡- 후.
흡- 후.
남궁유린은 심호흡했다.
전에 보름달 아래 정자에 나란히 앉아, 유성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마저 잇지 못한 게 떠오른다.
‘분위기도 그렇고, 분명 고백하려고 하셨을 거야.
장칠이 달려오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이 돌아가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성이 급하게 달려온 듯하다.
‘지금 안 돌아간다고 말씀 드렸는데 의각주님은 왜 이렇게 급하실까?
아직 어떤 답변을 돌려줘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분명 유성에게 호감이 있지만 고백을 받아드릴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모르겠어. 그냥 마음이 이끄는 대로 답하자.
결심한 남궁유린이 입을 열었다.
“이제 말씀해주셔도 돼요. 준비됐어요.”
꿀꺽.
다시 한번 마른침이 넘어간다.
“아, 네. 제가 소저의 몸을 좀 살펴보고 싶습니다.”
“뭐, 뭐라구요? 버, 벌써요?”
“벌써라뇨? 처음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처음이죠! 의각주님, 그렇게 안봤는데 무례하시네요!”
남궁유린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
듣자 하니 못 하는 소리가 없다.
아무리 얼굴 좀 잘생겼기로서 어떻게 처녀에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동안 조금씩 쌓아 가던 호감도가 수직 하락했다.
오라버니의 눈 치료에 관한 것만 아니면 이 음란한 사람과는 아무 말도 섞지 않을 테다, 라고 다짐한 순간.
“진료 받는 걸 그렇게 싫어하실 줄 몰랐습니다. 함부로 요청해서 죄송합니다.”
“...네?”
“네?”
유성이 ‘몸을 살펴보겠다’라고 하는 건 환자에게 으레 사용하는 말이다.
의원이 환자에게 사용하기에 전혀 이상하지 않은 말.
본래 머리만 살펴볼 생각이었으나, 인후 또는 다른 쪽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몸 전체를 신성력으로 살펴볼 생각이었던 것.
뭔가 병이 있다면 조기에 발견하는 게 좋으니까.
그런데.
남궁유린의 얼굴이 급속도로 붉게 물들었다.
홍당무?
그 정도가 아니다.
톡 건드리면 터져 버릴 듯 새빨갛게 익은 홍시 같았다.
분노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뭘 했다고… 트라우마 같은 게 아니라 설마 팽지산처럼 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유성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대화를 나눠봤자 분노만 더 유발할 뿐이다.
“그…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접객당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슥.
유성의 소매가 붙잡혔다.
이어, 모기만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진료… 해주셔도 돼요…”
사람의 태도가 이렇게 순식간에 뒤바뀌어도 되는 걸까?
‘팽지산은 일관적이기라도 했지.
심각한 오해가 생길 뻔했지만, 다행히 그녀의 다음 말에 풀렸다.
“아까는 제가 잘못 들어서 착각했어요. 소리 질러서 죄송해요…”
“아, 그랬군요. 그럼 진료 해 보겠습니다. 몇 가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거든요.”
그녀가 무슨 착각을 했는지는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고, 유성은 다시 자리에 앉아 남궁유린의 손목을 잡았다.
신성력을 흘려 넣어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역시 남궁세가의 직계라는 건가?'
팽지산의 근골까지 제대로 살펴본 적은 없으나, 남궁유린은 다른 무림학관 생도들보다 월등한 근골을 가지고 있었다.
‘하긴, 그러니까 검왕이 직접 무공을 전수하겠지.
납득한 유성은 그녀의 몸에 특별한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 신성력을 뇌쪽으로 올려보냈다.
그녀를 진료하고 싶었던 진짜 이유.
대련을 지켜보는 게 괴롭다는 말.
어떤 트라우마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마침내 신성력이 뇌까지 도달했을 때,
‘역시…’
유성은 옅은 회색 아지랑이를 발견했다.
팽지산과 같은 계열의 정신병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 하지만,
회색 아지랑이가 옅은 걸 보면 트라우마로 인한 현상일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걸 수도 있고.
다만, 지금은 치료할 방법이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남궁유린이 유성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음...”
어떻게 말해야 할까.
당장 치료할 수 있다면 흔쾌히 공개하겠지만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게 그녀에게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어 망설였다.
그리고 그건 진료받는 당사자의 처지에서는 꽤 공포스러운 일이다.
다 죽어 가는 사람도 살려내던 유성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문제라니!
최악의 가정마저 하게 만들었다.
“호, 혹시 저 죽나요?”
“그럴 리가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심각한 문제라도 있나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이 정도로 물어보는데 더 이상 숨기기는 힘들다.
“...사실 발견한 게 있습니다만, 제가 지금은 별로 도움이 못 될 거 같아 망설여지네요. 제 이야기를 들으면 괴로울 수 있으니 소저가 이야기 들을지 결정해주셔야겠습니다.”
평소였다면 남궁유린은 듣지 않는 걸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자기 몸에 관한 이야기지만 유성이 들려주기를 꺼려하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문제가 커질까 회피하기 바빴던 성격 탓이다.
그런데 조금 전 있었던 경험.
검왕에게 당당하게 의사를 전달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진 일은 자신도 믿기 힘든 성과였다.
제왕검형을 배우는 게 썩 달갑지는 않지만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부딪혀 보기로.
“들을게요. 말씀해주셔도 돼요.”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쩌면 소저가 이미 잘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만...”
“...”
“제가 추측하기로, 소저는 심상을 앓고 계신 것 같습니다.”
심상.
마음의 상처.
그리고 유성이 전달하고자 하는 심상의 의미는 정신질환, 그중에서도 트라우마다.
“역시 그런가요?”
남궁유린의 표정이 어둡다.
“알고 계셨군요.”
“네. 혹시 어떤 것 때문인지도 짐작 하시나요?”
“지난번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대련과 관계된 게 아닐까 합니다만.”
남궁유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기억하고 계시네요. 음… 제가 자세히 이야기해드리는 게 도움이 되나요?”
마음의 병을 얻게 된 계기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치료에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좋아요. 그때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끔찍하긴 하지만... 말씀 드릴게요.”
‘이번에도 한 발 나아가 보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가 열 살 무렵.
오라버니 남궁유현이 가문의 일류 무사와 펼치는 진검 대련을 지켜보았다.
평소에도 자주 대련을 지켜보고는 했지만, 그날은 유독 남궁유린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일류 무사는 오라버니의 좋은 대련 상대였다.
오라버니는 대연검법을 거쳐, 직계에게 전수되는 창궁무애검법을 펼치고 있었다.
끝없는 푸른 하늘을 거리낌 없이 누비는 한 자루의 검.
세상의 제약을 넘어 자유롭게 펼쳐지는 검로를 보며 남궁유린이 느끼는 것은 경외였다.
검로가 뇌리에 각인되는 것 같았다.
‘오라버니는 정말 대단해. 나도 오라버니처럼 멋진 고수가 되어야지. 언젠가 창궁무애검법도 배울 거야.
그 무렵의 남궁유린은 무공을 수련하는 것이 즐거웠다.
수련도 자발적으로 열심히 했다.
그녀는 오라버니의 모습을 눈에 담다가 전담 시녀 겸 호위무사인 주연과 함께 다른 연무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언니, 우리도 대련하자!”
남궁유린보다 열 살 많은 시녀는 이류 무사였다.
본격적으로 무공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남궁유린을 상대하기에 충분한 실력자다.
남궁유린은 그날따라 오라버니를 따라 진검을 들고 싶어졌다.
“언니, 진검으로 대련 해도 돼?”
“아가씨,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어요.”
“언니는 고수잖아. 여태 한 번도 못 이겼는데 뭘.”
시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허락했다.
아직 수준 차이가 많이 나서, 자신만 조심하면 다칠 일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요. 대신 제대로 못 다룰 거 같으면 목검을 드셔야 해요.”
“응, 좋아!”
남궁유린은 어릴 적 오라버니가 쓰던 진검을 들었다.
목검보다 묵직했지만, 특수 제작되어 휘두를 정도는 됐다.
태어나 처음으로 진검을 들어 보았다.
‘목검보다 훨씬 느낌이 좋아.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아.
대련이 시작되었다.
평소처럼 대연검법으로 공격을 시작한 남궁유린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검이 답답해하는 거 같은데.
주연과 몇 차례 초식을 주고받았으나 답답함은 가시지 않고 더 커지기만 했다
‘아무래도 이게 아닌 것 같아.
그동안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던 대연검법의 검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궁유린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다음 공격 때 대연검법 초식의 틀을 깨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검을 휘둘러보았다.
무의식중에 펼친 초식은 남궁유현이 펼쳤던 창궁무애검법의 그것과 꼭 닮아 있었고,
주연이 다급하게 펼친 방어 초식을 뚫어내고 그녀의 얼굴을 깊게 베어 버렸다.
촤악—!!
피가 뿜어져 나왔다.
세상이 멈춘 듯했다.
좋아하는 남자와 곧 혼인할 거라고 들떠 있던 주연이 쓰러지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남궁유린의 손이 덜덜 떨렸다.
***
유성은 크게 당황했다.
'아니, 이 정도 이야기일 줄은 몰랐는데!'
눈앞에서 남궁유린이 또 울음을 터뜨렸다.
벌써 몇 번째 보는 눈물인지.
이번에는 자신이 울린 것 같아 큰 죄책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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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유린은 가늘게 어깨를 떨며 하염없이 눈물 흘렸다.
유성은 품속에 가지고 다니던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흑, 가, 감사해요.”
코 훌쩍이는 소리가 조금 귀엽게 느껴진다.
남궁유린이 고개를 돌리고 손수건으로 연신 눈가를 찍어댔다.
‘내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과거사인데…’
유성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기에 그녀가 진정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포기했다.
말 한마디로 위로하기란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이다.
몇 번 겪어보지 못했지만, 감수성 풍부하고 공감능력이 뛰어난 그녀가 아닌가?
그녀의 손으로 친한 시녀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건 커다란 상처였을 거다.
지금처럼 성인도 아니고 어린아이였다면 더 그렇고.
잠시 후, 유성의 손수건이 흠뻑 젖었을 무렵, 그녀가 간신히 울음을 멈추었다.
눈이 빨갛다.
“이거 깨끗이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굳이 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힘드셨겠군요. 고인의 일은 안타깝습니다.”
“언니 안 죽었거든요?”
남궁유린이 째려보았다.
“앗, 죄송합니다.”
얼굴이 깊숙이 베였다길래 죽은 줄.
살아 있는 사람을 고인 취급했으니 남궁유린의 눈빛이 고울리 없다.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천만다행입니다. 그럼 혹시 어떤 상태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녀가 끔찍한 기억을 떠올린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굴이 길게 베이긴 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대신 상처를 좀… 많이 꿰매야 했어요. 흉이 심하게 남았죠. 결국 언니는 파혼당했어요. 다 저 때문이예요.”
서로 얼굴 안 보고 혼인하는 게 아니면,
이 시대라고 여자의 미모가 중요하지 않을 리 없다.
조금 안예쁜 건 괜찮아도 흉측한 흉이 남아 있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단순히 상대를 다치게 했다는 수준이 아니라, 혼인을 앞두고 벌어진 사고로 한 여자의 인생을 망쳤다고 자책하는 듯하다.
남궁유현의 대련을 지켜본 게 계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대련 중 일어난 사고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그런 점들이 대련에 대한 괴로운 기억을 가지게 만들었을 테고.
“그래서 대련을 지켜보는 것조차 괴로우신 거군요.”
“네…”
마음이 여린 남궁유린이 큰 충격을 받았을 만 하다.
유성이 트라우마의 치료를 목적으로 과거사를 들었지만, 지금은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하는데 까지는 해보자.
“시녀분은 남궁 소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유성이 생각하기에 그건 사고다.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용서해준다면 남궁유린의 마음의 짐이 훨씬 가벼워지지 않을까?
그러나.
남궁유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는 그날의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더라구요.”
‘첩첩산중이네.
큰 충격을 받으면 단기 기억이 날아가는 경우도 있다.
하필 그런 경우에 걸린 모양이다.
그날의 기억이 없다면 진심으로 용서 받지도 못하게 되었을 테고.
결국,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가는 동안 남궁유린의 트라우마가 깊어진 모양이다.
“안타깝네요. 그런데 시녀분은 가문 내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까?”
대우받고 있다면 훨씬 나을 텐데, 남궁유린은 이번에도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정반대예요. 언니는 따가운 눈총 받으며 지내요.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주연 언니가 방심해서 저에게 당한 거라고 생각하시거든요. 오히려 언니의 방심 때문에 제가 이렇게 됐다고 여기시죠.”
“어떻게 그런 생각하실수가 있습니까?”
“제 말을 믿어 주시지 않으신거죠. 의각주님도 물론 믿기 힘드시겠지만 전 거짓말 한 게 하나도 없거든요.”
짐작 가는 건 하나.
“배우지도 않은 창궁무애검법을 펼쳤다는 걸 안 믿어 준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검왕조차 믿어 주지 않았다니, 타인이 무공 펼치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는 건 그도 할 수 없나보다.
시녀 처지에서는 한참 아래 실력이던 남궁유린이 갑자기 배우지도 않은 상승무공을 펼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럼 그때 창궁무애검법을 다시 펼쳤으면 믿어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러고 싶었어요. 그런데 다시 시도해 봤는데, 놀라서 그런지 도저히 펼쳐지지 않았어요. 얼마 후에는 정식으로 창궁무애검법을 가르쳐 주셔서… 결국 해명하지 못했어요.”
“많이 답답하셨겠군요.”
“네. 그런데… 혹시 제 말을 믿어 주시는 건가요?”
남궁유린은 의구심을 가득 담아 유성을 바라보았다.
잠깐 대련을 지켜보고 배운 적도 없는 창궁무애검법을 펼쳤다는 그녀의 이야기.
혈육도 믿어 주지 않았는데, 유성은 마치 믿는 눈치이지 않은가?
그녀를 배려해 믿는 척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연히 믿습니다. 초식을 따라 했다는 것도, 무공을 펼칠 때 답답함을 느꼈다는 것도요.”
“...정말요?”
“물론입니다.”
남궁유린은 유성의 눈빛을 살폈다.
빨려 들어갈 것처럼 깊은 눈동자에 강한 신뢰가 서려 있는 듯하다.
‘진심 같은데…?
혈육도 믿어 주지 않는 말을 선뜻 믿어 준 거다.
‘나, 그동안 많이 힘들었구나.
응어리진 마음 한구석이 약간 풀리는 느낌이다.
할아버지는 정에 이끌려 그런 거짓말로 시녀를 감싸줄 필요는 없다고,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말만 했는데…
물론 유성은 진심으로 믿었다.
그 역시 직접 경험했지 않은가.
유성도 백가장의 무공을 펼칠 때 답답함을 느꼈다.
‘왜 이렇게 뻗어야 하지? 약간만 틀어도 위력이 훨씬 나아질텐데.
그런 답답함은 유성이 끊임없이 무공을 발전시켜 나가려는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내공 운용은 곧바로 따라 하기 힘들지만, 유성도 한번 본 무공 초식을 따라 할 수 있다.
같은 뿌리를 둔 남궁세가의 심법을 익혔으니 남궁유린은 창궁무애검법을 흉내 낼 수 있었을 거다.
단, 한 가지 조건만 충족 된다면.
‘남궁유린이 검왕과 남궁유현을 훌쩍 뛰어넘는 천재라면 말이 돼.
한 가닥 할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정말 그녀의 무재가 심상치 않은 듯하다.
이 정도 천재가 트라우마로 무공을 익히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니, 큰 손해가 아닐 수 없다.
빨리 정화 스킬을 열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추가되었다.
그 후로도 여러 대화를 나누어 본 결과.
“아쉽지만 마음의 상처가 당장 해결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꼭 치료해드리겠습니다. 시녀분 얼굴의 흉터도요.”
이미 아물어 흉진 상처는 지금 치유 스킬로는 무리지만, 치유 스킬의 다음 단계가 있으니까.
남궁유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요? 저도, 언니의 흉터도 치료할 수 있어요?”
“물론입니다. 저 믿으시죠?”
환자에게 신뢰를 심어 주는 건 중요하다.
그래야 상처가 더 악화되지 않을 테니까.
남궁유린은 조금 전에 펑펑 울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촉촉한 눈으로 눈웃음 지었다.
“당연히 믿어요.”
유성이 오늘 본 표정 중에 제일 밝고 예뻤다.
***
유성이 의각으로 찾아간 이튿날.
장칠은 한 가지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는 백유성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지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문에는 여전히 귀를 귀울였다.
“어제 남궁유린이 검왕 앞에서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대.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넌 뭐 좀 들은 거 있어?”
“나도 모르는데.”
“그래? 아, 무림학관에 연무장 하나를 검왕이 요청했다던데 여기 좀 머무르실건가 봐.”
여러 정보를 전해주는 친구에게 적당히 맞장구 쳐주었다.
그에게 모르겠다고 했지만 장칠은 왠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제는 남궁유린이 가문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소리에 유성이 그녀를 찾아간 날이다.
‘전에 정자에서 두 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라니… 역시 남궁유린님은 의각주님 때문에 돌아가지 않으셨을 거야.
장칠이 전에 본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선남 선녀가 나란히 운치 있는 정자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언가를 속삭이던 모습.
‘확실해. 남궁유린님은 의각주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야. 두 분도 너무 잘 어울리고.
이번에 깨달은 바가 있어 절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을 거지만, 생각은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법이다.
남궁유린은 무림학관 생도 중 유일하게 의각에 지원하기도 했고, 종종 눈빛 교환 하는 모습도 목격했지 않나?
유성이 궁금해할까 봐, 장칠은 그에게 남궁유린의 근황에 대해 알게 되는대로 전했다.
“남궁유린님이 검왕께 무공을 배우신답니다.”
“그렇군요.”
평범한 일과도 전하고.
“요즘 표정이 많이 밝아지셨답니다.”
“그래요? 잘됐네요.”
남궁유린의 기분도 전하고.
“조금 전에는 속상한 일이 있으신지 울적해 보이신다고… 전에 두 분이 계시던 정자쪽으로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네? 아, 네. 그렇군요.”
꼭 알아야 할 것 같은 상황, 그리고 장소까지 전했다.
유성이 어리둥절해했지만, 장칠은 그의 태도가 남궁유린과의 관계를 비밀로 하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교대 준비 중이던 장칠에게 총군사 제갈영영이 말을 걸었다.
“의각주님 안에 계신가요?”
의각을 찾아올 때는 항상 미간을 찌푸리던 그녀의 얼굴이 멀쩡하다.
‘아침에도 다녀가셨으면서, 또 어디가 아프신가?
의문이 들었지만 충실히 답했다.
“의각주님은 퇴근하셨습니다.”
“어? 오늘 당직 아니세요?”
“아… 원래 그랬는데 일이 있으셔서 차의원님과 당직일을 바꾸셨습니다. 혹시 어디가 아파서 오셨는지요?”
“아픈 건 아니구요. 그럼 의각주님은 어디 외출하셨나요?”
“숙소에 계실 겁니다. 집에서 할 일이 있으시다고 가셨거든요.”
“그래요? 고마워요.”
자연스럽게 유성의 숙소로 향하는 제갈영영.
‘안 아픈데 왜…? 한때 그런 의심 한 적도 있지만 아닌줄 알았는데… 설마 의각주님이랑 총군사님도?
장칠은 혼란스러웠다.
***
제갈영영이 유성에게 찾아온 건 일 때문이었다.
“밤늦게 죄송해요. 오늘까지 처리해야 할 안 건 때문에 급하게 찾아왔어요.”
“그게 뭡니까?”
“무림학관에 호남 백가장의 백진성도 지원했어요.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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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유성이 전작을 플레이할 때, 고아의 신분으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비슷할 거로 생각했지만, 뜻밖에 가족까지 있는 신분이라 신기하게 여겼다.
알고 보니 사생아였지만.
물론 사생아의 신분이라는 사실은 게임 속으로 빙의되었다는 걸 깨닫고 나자 사소한 일이 되었다.
현대인이 게임 속에 갇혀 버렸는데, 진짜 부모도 아닌 자들과의 관계가 어떻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며칠간 방황했으나 유성은 곧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만이 답임을 깨닫고 무공 수련에 열중하게 되었다.
어쨌든, 호남 백가장은 유성이 게임을 시작하게 된 곳이고 백진성은 그곳의 적자다.
유성과는 이복 형제.
백진성은 유성을 귀찮게 굴었다.
당연히 가문을 물려받을 거로 생각했던 그의 처지에서는 갑자기 두각을 나타낸 유성이 눈엣가시 였을 거다.
유성이 무공을 잃고 쫓겨나듯 가문을 떠나던 날 비웃던 녀석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백가장이 그렇게 큰 곳은 아닌데 무림학관에 들어올 수 있나 보군요.”
제갈영영이 차분히 설명했다.
“맞아요. 원래 백가장 까지는 순서가 돌아가지 않았지만 이번에 무림학관 생도 중 일부가 정식으로 무림맹 소속이 될 거예요. 빈자리를 보충하려는데 마침 백가장도 적합한 대상이었어요.”
그 말을 하면서 제갈영영은 유성의 눈치를 살폈다.
‘날 배려한 거구나. 지난번 일로 백가장에서 쫓겨난 일이 널리 퍼졌으니.
고마웠다.
원칙상으로 백진성은 무림학관에 입관할 기준에 부합한다.
그런데 제갈영영은 유성을 위해 원칙을 깰 각오로 찾아온 거다.
유성이 원치 않으면 무림학관에 탈락시키려고.
‘별로 보고 싶은 얼굴은 아니긴 하지.
유성은 백진성이 무림학관에 들어오면 자신에게 어떤 해가 될지 생각해 보았다.
무림맹과 무림학관은 연관이 있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같은 소속은 아니다.
그리고 유성은 예전부터 백진성이 무림맹 입맹을 희망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작은 정도 문파가 세를 키우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무림맹 소속이 되는 거다.
흑도 문파와 시비가 걸려도 무림맹이 토벌 올 수 있다는 압박감을 줄 수 있을 테니까.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해 보면, 유성이 백진성을 만나 해가 될 점은….
‘…없는데?
오히려 백진성이 유성의 눈치를 봐야 하지 않을까.
이제 유성의 위상이 그 정도는 된다.
무림맹 무사들이나 무림학관 생도 중 의각의 도움을 받은 자들도 많았고, 특히 친한 자들은 대부분 무림맹 고위직이다.
아무 위협도 되지 않는 백진성 때문에 굳이 무림맹 총군사가 원칙을 어기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저는 괜찮으니 그냥 받으셔도 됩니다. 총군사님이 저 때문에 무리하시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무리한다구요? 저 그 정도 힘은 있어요.”
제갈영영이 턱을 치켜세우며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유성은 그녀가 두통으로 무너진 모습이 떠오르며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전에 책 잡힐 일은 하면 안 된다고 하신 거 같은데….”
둘이 한잔 하며 그런 이야기도 나눈적 있다.
“그건 모용림 장로가 기세등등 했을 때 이야기죠. 의각주님도 아시잖아요. 요즘 모용림 장로 어떤지.”
한때 무림맹 내에서 큰 권력을 휘두르던 그는 사마세가를 열심히 밀었던 죄로 그냥 평범한 무림맹 장로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사마세가가 무림맹에 못된 짓을 하다 걸렸으니 그들과 엮이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고 있다고.
그래도 유성은 제갈영영의 배려를 사양했다.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 다른 정적이 나타나 꼬투리 잡으면 그녀가 곤란하지 않겠나?
그리고.
오히려 자신이 과거에 백진성에게 당했던 것들을 되갚아 줄 수도 있을 테고.
“알겠어요. 의각주님이 괜찮다니 뭐….”
“그럼 용건은 끝났나보군요. 살펴 가십시오.”
번뜩!
날카로운 제갈영영의 눈초리에 유성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그러나 착각이었다는 듯, 어느새 그녀의 눈매는 다시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차 한잔 주세요. 목이 타네요.”
“아, 그렇지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손님이 왔는데 차 한잔 대접하지 않고 보낼 뻔했다.
유성은 그녀가 주기적으로 선물해주는 차를 타서 내놓았다.
“마실동안 잠깐 이야기나 해요. 그 정도는 괜찮죠?”
“물론입니다.”
제갈영영과 별거 아닌 잡담을 나누었다.
오늘까지 해결해야 할 안건이 있다더니, 생각보다 바쁘지 않은가보다.
“요즘은 공부 잘되십니까?”
매일 아침마다 찾아와 치료받게 만드는 원인.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매일 두통을 호소할 정도니, 보통 수준의 공부는 아닐 테고.
“덕분이에요. 조금 있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거 같아요.”
가슴을 주욱 펴고 뿌듯해하는 모습이 귀엽다.
여기서는 두 살 연상이긴 하지만 현실 세계의 유성에 비하면 훨씬 어리다.
제갈영영이 돌아간 후, 유성은 다시 집에 딸린 작은 마당으로 나갔다.
오늘 차의원과 당직을 바꾸면서 해 보고 싶었던 일을 이어서 해야 한다.
새로 얻은 스킬 시험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에 얻은 스킬은 버프 계열.
버프 스킬은 자신 또는 타인에게 걸어 줄 수 있다.
당장은 활용도가 높은 스킬은 아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미리 성능을 확인해 두어야 한다.
[신속]
유성의 몸이 순간 금빛으로 번뜩이며 신형이 미끄러졌다.
***
무림학관의 한 연무장.
연무장은 넓지 않지만, 높은 담벼락이 주변의 이목을 차단해 주고 있다.
검왕이 손녀에게 가문의 비기 제왕검형을 전수하기에 적합하다.
엄숙한 표정의 검왕이 의욕 없어 보이는 손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약속이니 최선을 다해 배워야 할 거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가문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
손녀의 얼굴에 약간의 의지가 서린다.
지금 당장 돌아가는 건 무척 싫은 모양.
‘언젠가 극복하리라 믿지만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가문을 이끄는 사람은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서는 안 된다.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고 검왕은 제왕검형 전수를 시작했다.
“제왕검형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있다. 전반부는 신묘한 무리들을 품고 있어, 전반부를 대성하면 이 할애비처럼 화경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제왕검형은 남궁세가의 자부심이다.
남궁세가가 오대세가의 수좌 자리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핏줄과 제왕검형을 통해 대대로 검왕을 배출해 냈기 때문.
신묘한 무리를 품고 있는 제왕검형의 전반부를 이해하면, 다른 무공을 익히는 것에 비해 손쉽게 경지를 올릴 수 있다.
다만, 품고 있는 무리가 어려운 만큼 제왕검형을 익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최소한 검왕의 상식으로는 그랬다.
“…!”
구결을 불러 주고 초식 시범을 한번 보여 준 검왕은, 약간 부족하지만 손녀가 자신이 펼쳐 보인 제왕검형의 전반부를 그럭 저럭 따라 하자 놀라고 말았다.
아직 미진한 부분이 있지만 단 한 번 보고 따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완성도가 높았던 것이다.
‘유현이보다 배우는 속도가 더 빠른 것 같구나.
창궁무애검법을 전수할 무렵 남궁유린은 무공에 대한 의욕이 전혀 없었다.
시녀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남궁유린은 유성 덕분에 마음의 응어리가 조금 풀렸고, 가문으로 끌려갈 수 없다는 목표도 가지고 있다.
마음 가짐이 다르니 익히는 속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비록 창궁무애검법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아 똑같이 따라 하기는 어려웠으나,
제왕검형 역시 남궁세가의 무공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검왕의 기준으로, 남궁유린은 솜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제왕검형을 익혀나갔다.
의무감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점차 손녀를 가르치는데 푹 빠져들었다.
며칠에 걸쳐 전반부를 봐 준 후.
그는 더 이상 전반부를 봐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여태 손자가 최고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진짜 뛰어난 검재를 가진 아이는 손녀였다니,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검왕은 계획을 변경했다.
“배우는 속도가 대단히 빠르구나. 나머지는 스스로 참오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대신 후반부도 미리 전수해 주마.”
“후반부도요? 어차피 지금 익혀봤자 써먹지 못 하는 거 아닌가요?”
제왕검형의 후반부는 화경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사용할 수 없다.
이전에 그렇게 설명 들었기에 남궁유린은 의문을 가졌으나, 검왕이 고개를 저었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의 너도 후반부 초식들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화경의 경지에 올라 환골탈태를 이루지 못하면 신체가 버티지 못해 무너지고 만단다. 그렇기에 펼치지 말라고 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네게 미리 전수하는 건 네 배움의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니, 틈 날 때마다 후반부 초식들이 지닌 무리들을 참오하여 화경의 경지에 도달하면 더 빠르게 나아가길 원한 것이다.”
“…네.”
검왕은 전반부 초식들을 펼칠 때처럼 손녀와 거리를 두고 섰다.
“잘 봐라. 이게 네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진정한 제왕검형은 후반부 부터라고 할 수 있다.”
검왕은 검을 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단전에서 진기가 일어나 승천하는 용과 같은 강맹한 흐름을 만들어 낸다.
환골탈태한 몸이 아니었다면 혈맥과 근육이 찢어졌을지도 모르는 파괴적인 기운과 함께, 검왕의 온몸에 푸른 기가 넘실거렸다.
이어.
퍼엉—!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제왕검형의 후반부 초식들이 펼쳐진다.
“…!”
남궁유린이 홀린 듯 검왕이 수놓는 검로를 쫓았다.
검에서 푸른 뇌전이 넘실거린다.
그녀는 몰랐지만, 마치 어렸을 때 창궁무애검법을 처음 보고 느꼈던 충격이 뇌리를 강타했다.
‘저게 진정한 제왕검형!
남궁유린의 몸 안에 내재된 검재가 꿈틀거렸다.
그 순간만큼은 시녀의 일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언젠가 할아버지처럼 저렇게 자유자재로 제왕검형의 후반부를 펼칠 수 있을까?
까마득한 일처럼 느껴졌다.
환골탈태를 이루지 못하면 신체가 버티지 못한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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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림의 무위 수준은 초절정 고수.
그러나 그가 가장 자신 있는 것은 무공이 아니라 정치질이다.
사릴 때는 사리고 상대의 약점을 발견하면 사정 없이 물어뜯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자였다.
하지만.
아무런 세력도 만들지 않고 오로지 무공에만 전념해 온 화경의 고수가 쏟아 내는 적의에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가, 갑자기 나를 이렇게 핍박하시는 이유가 뭐, 뭡니까?"
"모두가 내 병은 못 고친다고 했소. 하지만 백의원님만이 죽어 가던 나를 치료해주셨소. 이래도 그분의 실력이 없다고 생각하시오?"
주위가 숙연해졌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그다.
모두 척마대주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헤아려보았고, 그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최소한 그의 앞에서 백유성을 깎아내려서는 안됐던 것이다.
"미, 미안하오 척마대주. 내가 실언을 했소. 절대 백유성 의원을 모욕할 의도는 없었소."
모용림이 결국 사과하자 척마대주의 시선이 이번에는 제갈영영에게 향했다.
"총군사, 모용 장로가 말한 소문이 모두 사실이오?"
"절대 아니에요. 헛소문이에요. 제가 주기적으로 백의원님을 찾아가는 것은 치료 목적이었어요."
"그럼 됐소. 모용림 장로, 더 이상 헛소문을 입에 올리지 마시오. 이건 마지막 경고요."
"아, 알겠소."
원래 조용 하다가 꼭 필요할 때 한번 힘을 폭발시키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모용림은 순식간에 제갈영영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했던 무기 하나를 잃어 버렸다.
꼬리 내린 모용림을 보고 제갈영영은 머리가 아픈 와중에도 생각했다.
'꼴 좋다. 어쩌면 오늘 푹 잘 수 있을지도?'
***
같은 시각.
소림사의 예비 약초밭 옆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던 유성은 귀를 후비며 구시렁거렸다.
"귀가 가렵구나. 누가 내 욕을 하나... 아무리 봐도 조의원이 유력해. 너무한 거 아닌가? 다 자업자득인 것을 내 탓으로 돌리고 해코지하려고 하다니."
무공을 회복하고 말겠다는 사심이 섞였으나 유성은 억울했다.
치료할 수 있는 환자가 있어 치료했고, 먼저 자기 환자라고 억지를 부린 조의원에게 좀 들이댔다고 앙심을 품다니.
물론 사람을 고용해 뒤를 캐고 있는 자가 조의원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그도 썩 맘에 들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머무는 동안은 괜찮지만 밖에 나가면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겠구나. 만약 그자가 살수라면 마음 편히 화장실도 못 가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거야. 아니, 차라리 기회를 보아 함정을 파야 한다.'
선빵필승이라는 만고 불변의 진리도 있지 않은가.
속으로 무슨 생각하고 있더라도, 유성은 일정 시간이 흐를 때마다 기계적으로 화령초에 촉진 스킬을 사용했다.
하급 사제 시절, 신전의 수입을 충당하기 위해 수없이 반복했던 노가다였기에 익숙했다.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유성의 손이 황금빛으로 빛난 후.
스르르-
또다시 화령초가 자라났다.
추세로 보아 기한을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
연단각주의 요청으로 소림사 방장과 장로들이 모인 회의가 소집되었다.
"무슨 일이오, 연단각주?"
정해 대사의 물음에 연단각주가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장님, 지금 연단중인 대환단의 약효 일부를 건질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아니, 그게 정말이오?"
보고는 정해 대사를 향했으나 옆의 장로가 놀라 질문한 것이 빨랐다.
소림사의 장로들은 모두 사형제 관계였고, 정해 대사가 권위적이지 않은 자였기에 가능한 회의 문화였다.
"대환단을 만들고 남은 미량의 재료로 실험을 끝마쳤으니 틀림없소."
"그럼 약효 일부라면 얼마나 되는 거요?"
"놀라지 마시오. 무려 삼할이오!"
연단각주가 자랑스럽게 손가락 세 개를 펴자 장로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삼할!"
"허! 어찌 그런 놀라운 성과가!"
"그럼 이십 년의 내공이라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오?"
당장 내일이면 화령초가 투입되어야 하건만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몇 달간 찾지 못했던 화령초가 갑자기 땅에서 솟아오를 확률은 극히 낮은 것이다.
이즈음 장로들은 모두 직감하고 있었다.
이번 대환단 연단은 실패로 끝나리라는 사실을.
그런 와중, 실패한 대환단을 폐기할 필요 없이 약효의 일부나마 건질 수 있다는 말에 모든 장로들이 흥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30년간 들인 공을 무로 되돌리지 않아도 된다!
연단각주가 가슴을 주욱 폈다.
"그동안 대환단 제조가 실패한 역사가 없었기에 아무도 떠올리지 못한 방법을 소승이 찾아냈을 뿐 별거 아니오."
거드름을 피우는 듯 아닌 듯한 화법에도 장로들은 연단각주의 성과를 칭찬했다.
정해 대사가 입을 열었다.
"실로 뛰어난 성과요. 연단각주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오. 그런데 일부의 약효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오?"
"그것을 말씀드리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 오늘 안에 대환단의 연단을 중단하고 제가 찾은 방법을 적용해야 합니다. 허락해주십시오, 방장님."
이번에도 장로들이 앞다투어 끼어들었다.
"그럼 당장 중단해야지요. 당연한 것 아니겠소? 화령초를 구하는 건 늦었소. 요즘 다른 약초들도 씨가 말라 화령초를 구할 가능성이 극히 낮다하지 않소."
"맞소. 소승의 수양이 부족한지 한번 밑바닥에 내동댕이 당해 보니 삼할도 정말 감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소. 이 또한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내려주시기 위한 시련이 아니었겠소?"
이제 모두의 시선이 정해 대사에게 향했다.
소림사는 다수결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다.
정해 대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정말 그게 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나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아미타불...'
그가 고뇌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과거 정해 대사는 자만했다.
이번 대환단 연단도 무조건 성공할 것이라고.
사실 항상 같은 방식으로 대환단을 제조해 왔기에 소림사 모두가 자만한 것이지만 자신은 당대의 방장이 아닌가?
책임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실패에 낙담만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실패를 통해 배운다.
당대가 아니면 어떤가? 후대를 위한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어제 새로 조성중인 약초밭을 직접 점검하러 갔다.
화령초를 비롯한 대환단 연단에 필요한 약초들을 직접 재배하기 위한 장소로 아직은 흙만 잘 준비해 둔 상태.
험준한 산에서 자연히 피어난 약초들에 비해 약효는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제때 약초가 구해지지 않는다면 대체품 정도로는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해 대사는 그곳에서 무언가 하는 유성을 발견했다.
'저자는 백 시주가 아닌가? 뭘 하고 있단 말인가?'
먼발치였으나 초절정 고수에게는 지근거리나 다름없었고, 정해 대사는 약초밭 한가운데 홀로 심겨 있는 화령초를 발견했다.
'받아 간 화령초를 밭에 심어두고 초산의 넋을 기리기 위함인가? 독특한 사람이군.'
나름 초산과 친분이 있어 보였으니 그만의 추모 방법이 있겠다 싶었다.
딱히 나쁜 짓도 저지르지 않은 듯하여 몸을 돌리려는 순간.
유성의 손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이 아닌가?
정해 대사는 깜짝 놀랐다.
'아무런 낌새도 없었거늘 백 시주가 내 눈을 속일 정도의 무공을 익혔었단 말인가? 게다가 저건 수기!'
절정 고수는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검기.
그리고 그것을 검 없이 맨손으로 펼쳐 내는 수기.
백유성의 젊은 나이를 고려해 볼 때 놀라운 수준이다.
하지만.
정해 대사는 곧 백유성의 손에서 펼쳐지는 황금빛에서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공은 아닌 듯한데 신기한 일이구나. 혹시 백 의원이 그곳 출신인가?'
순식간에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힌 정해 대사는 다음에 벌어진 현상 때문에 이번에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아마 초절정 고수가 아니었더라면 균형을 잃고 쓰러졌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놀라운 광경이었다.
화령초가 갑자기 자라나다니!
'설마 저것 때문에 화령초를 달라고 한 것인가?'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할 겸, 유성을 방해하지 않기로 한 정해 대사는 자리를 떠났고 이튿날 연단각주의 요청으로 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의 고민은 두 개였다.
유성이 정말 대환단 연단을 위해, 화령초를 키울 생각으로 사흘간 내어달라 요청한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유성이 신비한 방법으로 키운 화령초가 대환단을 만드는데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인지.
'혼자 고민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구나.'
눈을 뜨자 모든 장로들이 자기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소승에게 시간을 주시오. 오후에 다시 회의를 열겠소."
***
유성은 신성을 깨우친 후, 계속 치유 스킬을 사용해 왔다.
그와 동시에, 아직 스스로 몸을 지킬 힘이 부족한 유성은 최대한 신성력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 했다.
기적과 같은 치료 효과로 신성력을 쌓아 나가면서 정체는 감추어야 하는 딜레마.
다행히 의술에 무지한 자들을 속여 넘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굳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고 싶은 자들도 없었고.
외상 환자에게 내부는 다 치유 스킬로 치료하고 겉 상처만 남기는 것, 실시간으로 치유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리고 치유 스킬을 사용하는 것.
모두 이런 고민 끝에 얻게 된 잡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유성은 지금 상황이 몹시 당혹스러웠다.
"백 시주, 중요한 일이니 솔직히 말해주시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화령초를 자라나게 한 것이오? 손에서 황금빛이 나오던데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오? 그리고 그걸로 키운 화령초가 약효도 멀쩡한지 궁금하다오."
유성의 시선이 약초밭 한가운데 심겨 있는 화령초로 향했다.
정해 대사에게 받아왔을 때보다 눈에 띄게 자라 있는 모습.
목함을 열어 보았던 정해 대사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문제는 목표만큼 다 키우기도 전에 그걸 들켜 버린 것이고.
다 키운 후에 둘러대려고 했던 여러 핑계들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곤란한데. 중간에 걸려 버리다니.'
그의 표정을 본 정해 대사가 황급히 사과했다.
"아, 미안하오. 사실 어제 약초밭을 찾아왔다가 우연히 백 시주의 모습을 보고 말았소.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자리를 떴으나 사정이 생겨 묻지 않을 수 없었소."
정해 대사는 연단각주에게 들은 방법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상대의 자발적인 협조를 구하려면 솔직해야 한다.
내막을 다 들은 유성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역시 무공을 잃으니 여러 가지로 불편하구나. 그렇게 주위를 경계했으나 경지에 오른 무림인이 지켜보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니.'
다행인 점은 정해 대사가 무척 호의적이라는 점이다.
만약 나쁜 마음을 품은 자에게 들켰다면 이런 반응이 아니었을 것이다.
신성력을 사용할 때 조금 더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한 유성이 말했다.
"키우는 방법은 저만의 비법으로, 공개하기 어려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물론 이해하오. 그럼 몇 가지만 묻겠소. 혹시 시주는 신비문파인 모산파와 어떤 연관이 있으시오?"
정해 대사는 아마 황금빛이 나오며 화령초가 자라는 광경을 보고 모산파의 영술로 추측한 듯했다.
거짓말하지 않고도 둘러대기가 편해졌다.
"저는 모산파와 인연이 있습니다."
"역시!"
그의 얼굴에 서린 흡족한 표정을 보아하니 스스로 속아넘어간 듯하다.
이제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들려주면 된다.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내일까지 화령초를 키우기 위해 이곳에 남은 것입니다. 약효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마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버츄얼 판타지 리얼모드의 경험이 다른 결과를 가져온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신성력으로 키운 약초를 사용해 단약을 만들어 본 적은 처음이지만 어쩌면 더 좋은 성과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정해 대사가 유성의 손을 잡았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신성력이 차올랐다.
벌써 이럴진대 정말 화령초를 키워내는 데 성공하여 대환단 연단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면 얼마나 더 많은 신성력이 들어올까?
'기대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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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 이남은 무림맹의 입김이 세지 않은 곳이다.
흑도 무리가 제대로 터전을 꾸린 광동, 광서에 비하면 훨씬 낫지만, 다른 지방도 흑도 문파들이 많아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다만 호남은 좀 덜한 편이다.
형산파라는 나름대로 규모가 큰 정파가 있기 때문이다.
구심점 형산파에 기대어 여러 중소문파들이 힘을 모으면 흑도 무리가 함부로 활개치지 못한다.
그런 호남 지역의 작은 무가 백가장에 경사가 났다.
가문의 무사들과 하인들이 모두 지켜보는 중에 백가장의 가주는 아들을 크게 치하했다.
“장하다, 진성아! 네가 무림학관에 입관하게 되다니!”
“고생 많았다, 내 아들!”
아버지, 어머니의 말에 백진성은 당당하게 말했다.
“이게 다 아버지, 어머니 덕분입니다. 제가 꼭 무림맹에 입맹하여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겠습니다.”
“그래. 듣자 하니 무림학관 생도 중 무림맹에 입맹하는 비율이 크게 늘었다고 하더구나. 지금처럼 정진하면 너도 꼭 할 수 있을 거다.”
“물론입니다. 거기 가서도 열심히 해서 백가장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꼭 입맹하여 보이겠습니다.”
아버지에게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무림맹에 입맹하여 활동하다가 복귀하기만 해도 호남 지방에서는 어깨에 힘 깨나 줄 수 있게 된다.
“그나저나 정말 이 어미가 같이 가지 않아도 되겠니?”
“어머니, 걱정 하지 마십시오. 무림학관에 제 친우도 있으니 도움받으면 됩니다.”
“아, 진가장의 진영호 말이냐? 그래, 요즘도 연락 자주 하고?”
“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백진성은 부모님께 진영호로부터 연락이 끊긴 지 오래라는 사실을 굳이 털어놓지 않았다.
진영호가 무림학관으로 떠나는 날, 거기 가서 성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거라는 이야기를 나눈 적 있기에, 바쁘게 지내고 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아버지가 말했다.
“아 참, 무림맹에 일침신의라는 분이 계시다는 소문은 너도 들었겠지?”
“물론입니다. 나이도 젊은데 침 하나로 못 고치는 병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저기 오가는 상인들은 여러 이야기를 전하고는 한다.
누가 초절정 고수가 되었다더라, 어느 지역에 마두가 나타났다더라, 요즘은 어떤 의원이 잘 나간다더라.
얼마 전까지는 사람들은 의원들 중에는 의선을 최고로 쳐 주었다.
그러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선으로 불리는 그는 요즘 활동을 중단한 상태다.
그 사이, 역시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침신의라는 의원이 떠오르고 있다.
“그래, 그분께 드릴 귀한 선물도 싸드릴 테니 한번 찾아뵙고 친분을 다져 놓거라. 너도 그 녀석의 일을 잘 알고 있지 않으냐. 그런 대단한 의원과 친분을 다져두어 절대 손해 볼일은 없을 거다.”
백진성은 아버지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백유성.
무재 하나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배다른 형제가 주화입마를 입어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져 버릴 줄은 몰랐다.
자기 처지에서는 천운이었다.
가문의 적자로 태어났음에도 사생아에게 밀려날 뻔했으니까.
하지만.
-참고 기다리면 꼭 기회가 올 테니 절대 포기하지 말거라.
어머니의 말씀대로 그 녀석은 혼자 추락해 버렸다.
백진성은 절대 그런 멍청한 녀석처럼 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조심스럽게 수련을 해 나갔고 얼마 전 일류 무인이 되었다.
덕분에 무림학관에도 입관할 수 있게 되었다.
‘낙양의방 출신이라지? 젊은 나이에 무림맹 의각주가 될 정도면 정말 대단한 의술을 지니고 있나 보군. 아버지의 말이 아니더라도 꼭 친분을 다져두어야 할 자다. 최근 무림학관 생도들도 다치는 일이 많다니 친해지면 큰 도움이 될 거다.
무림학관에 입관 통보만 받았을 뿐, 정식으로 입관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백가장과 백진성은 무림학관에 가서 성공하기 위해 여러 준비를 시작했다.
가산의 일부를 정리하여 인맥을 다지기 위한 선물들을 준비하는 일도 그중 하나다.
실력만으로 경쟁하기에는 다른 후기지수들이 너무 쟁쟁하니까.
***
검왕은 무림학관에 머물며 손녀와 대련하면 할수록 아쉬움을 느꼈다.
무공 수련을 잘 따라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대련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혼자 수련할 땐 공격 초식도 잘 펼치면서 왜 대련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거냐?”
뛰어난 무공 실력을 가졌어도 공격하지 못하면, 대단히 큰 실력 차이가 나지 않는 한 상대를 제압하기 힘들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실전에서는 큰 화가 닥칠 수 있는 것이다.
“...”
남궁유린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도 시녀와 있었던 일을 다시 한번 털어놓았다.
그런데도 믿지 않는 할아버지에게 진실을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닌데…’
공격 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그날의 사고가 떠오르며 몸이 굳어 버린다.
도저히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상태로 상대를 공격할 수 있을 리 없다.
‘의각주님이 보고 싶어…’
유일하게 자기 말을 믿어 준 사람이 떠올랐다.
돌이켜 보면 그는 항상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처음 만나 오라버니의 치료를 부탁했을 때도 흔쾌히 치료를 약속했고, 귀찮게 하는 팽지산과 엮였을 때는 그를 퇴치해 주었고, 자기 일과 시녀의 일을 털어놓자 역시 치료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유성을 생각하자 대련 중인 것도 잊고 자꾸 다른 생각이 났다.
‘손수건 돌려드리러 언제 가지? 이걸 돌려드리면 다음 임무까지 만나러 갈 핑계도 없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한눈팔지 말거라!”
손녀가 딴생각 하는 걸 눈치챈 검왕은 다시 검을 들어 공격했다.
챙- 채앵-!
배운 대로 방어 초식을 펼치며 차분히 검왕의 공격을 막아가는 남궁유린.
직접 검왕에게 지도받으며 크게 실력이 늘어났지만 방어만 해서는 반쪽짜리일 뿐이다.
검왕은 결국 검을 거두었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그 시녀와 결판을 내야겠구나. 며칠 후에 할애비와 가문으로 돌아 가자꾸나.”
남궁세가의 미래를 위해서다.
이런 검재를 가진 손녀가 더 이상 반쪽짜리 무인으로 지내게 둘 수 없었다.
정신을 단단히 차리면 극복하지 못할 일은 없다.
‘나 역시 이 경지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위기를 넘겼다. 유린이도 할 수 있을 거다.
검왕은 자기 경험에 빗대어 그렇게 판단했고, 이번에도 그의 판단을 신뢰했다.
손녀에게 약속한 게 마음에 걸리지만 할 이야기는 있다.
“그건…! 약속이 틀리잖아요!”
돌아가지 않기 위해 열심히 무공 수련 중인데 무슨 날벼락 같은 말인가?
펄쩍 뛰는 남궁유린에게 검왕은 엄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를 공격하지 못하는데 그게 어떻게 최선을 다하는 거냐?”
“...”
“네가 빨리 극복하면 다시 무림학관으로 돌려보내줄 테니 긴말하지 말거라.”
“싫어요. 저는 아직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이번에는 소용없다. 이미 나는 결정 했으니 내 말대로 해라.”
이번에는 강력히 주장해도 아무 소용 없었다.
그녀가 알던 엄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거다.
그러나 그날 밤.
검왕은 한 가지 소식을 듣고 남궁유린에게 통보했다.
“잠깐 일이 있어 다녀오마. 곧 돌아올 테니 미리 돌아갈 준비해 두거라.”
“무슨 일이신데요?”
“다녀와서 말해 주마.”
검왕은 배웅 나온 남궁유린을 돌아보았다.
남궁유린이 불만스럽게 그를 바라보고 있다.
“할애비를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다녀오면 할애비가 도와줄 테니 빨리 극복하고 다시 돌아오자.”
“...”
***
검왕이 떠난 이튿날 저녁.
유성이 의각의 당직을 서는 날이다.
깨끗이 빨아 놓은 유성의 손수건을 들고, 남궁유린은 의각으로 향했다.
의각 하인들이 입구를 막고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입구를 통과해야 한다.
남궁유린은 그들에게 인기척을 냈다.
하인 무리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리다가 흠칫 놀랐다.
장칠이다.
“아, 남궁유린님! 의각주님 찾아오셨습니까? 방금 무림맹 회의에 참석하셨는데요.”
유성이 무림맹 회의에 참석할 일이 있던가?
“무슨 일이신데요?”
“청성파에서 의각주님을 찾아왔거든요. 저희도 거기까지만 들어서 그 이상은 모릅니다.”
“그렇군요. 그럼 언제 돌아오시는지는 모르나요?”
“네, 그것까진 못 들었습니다. 혹시 의각주님 돌아오시면 왔다 가셨다고 말씀드릴까요?”
“아니에요. 내일 다시 올게요.”
***
이튿날.
무림학관 교관이 임무 수행 중이지 않은 생도들을 불러 모았다.
“무림맹에서 할당된 새 임무들을 배정하겠다.”
여러 임무들이 나열되었다.
생도들이 저마다 원하는 임무에 지원했다.
“다음은 의각 경계 임무!”
여러 생도들이 손을 들었다.
그들 중에는 유성과 친해지기 원하는 후기지수들도 있다.
‘나도 지원하고 싶은데…’
남궁유린은 지원하지 못했다.
곧 할아버지와 함께 가문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하지만.
“다음은 장기 임무다. 혹시…”
교관이 말을 흐리는 동안 남궁유린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장기 임무? 섬서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도 장기 임무라고 하신 적 없는데?
“오늘 오후에 사천으로 향하는 무림맹 인원들 호위 임무가 하나 있다. 혹시 지원할 생도 있나?”
생도들이 술렁거렸다.
“사천이면 너무 먼데? 넌 지원 할 거냐?”
“미쳤냐? 그동안 여기서 여러 임무 수행하며 높은 분들과 두루두로 안면 익혀두는 게 훨씬 낫겠다.”
“그렇지? 시간도 촉박해. 오늘 당장 출발인데 누가 갑자기 사천까지 가고 싶겠어?”
사천까지는 왕복 이동 시간만 해도 최소 두 달이 걸린다.
특별한 임무라도 수행하고 오면 세, 네달은 훌쩍 지나버릴 게 분명했다.
누구를 호위 하는지도 모르는데 거기까지 가고 싶은 생도가 얼마나 있겠나?
교관도 임무가 할당되었기에 생도들의 의견을 물어봤을 뿐 누군가 지원할 거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을 번쩍 든 생도가 한 명 있었다.
“응? 남궁유린, 정말 지원할 생각이냐?”
“네, 교관님. 제가 가겠습니다.”
남궁유린은 충동적으로 손을 들었지만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할아버지를 따라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 절반,
어쩌면 유성이 일행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절반이다.
***
시간을 거슬러 남궁유린이 유성을 찾아왔다가 허탕 친 날 저녁.
유성은 청성파에서 찾아왔다는 소식과 함께 무림맹 회의에 불려 갔다.
청성파에서 파견된 장로가 말했다.
“의각주, 청성파를 도우러 와줄 수 있겠소? 의각주의 의견만 남았소.”
이미 무림맹 사람들과는 이야기가 된 눈치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전에 의각주가 도왕의 독을 해독해 준 일이 있었지 않소? 우리 청성파의 장문인께서도 습격 당해 정체불명의 독에 중독되었는데, 그 증상이 도왕과 비슷하다고 하오.”
“장문인께서… 중독 정도는 어떻습니까?”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오. 그래서 여기까지 모셔오지 못했소.”
청성파는 무림맹의 우방이고, 청성파의 장문인 유천진인은 화경의 고수다.
그것만으로 도우러 가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만.
청성파의 장로가 말을 이었다.
“사천당가에서도 사람이 다녀갔으나 해독하지 못했소. 이제 믿을 사람은 의각주 뿐이오. 제발 부탁하오.”
사천에는 당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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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가는 천운석 가공 때문에라도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곳이다.
지금도 한 번씩 필요한 경우에는 천운석을 움켜쥐고 신성력을 증폭시켜 사용하기는 하지만,
침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에 비해 효율이 크게 떨어졌다.
침의 형태면 환부에 깊숙이 접근 할 수 있어 신성력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으니까.
최소한 치료에 있어서는 침의 모양인 것이 최선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 사천으로 가는 게 최선이다. 사천으로 나갈 일이 또 언제 있을지 모르니까. 그런데 사천당가에 들를 시간을 낼 수 있을까?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무림맹의 공적인 일로 가는 건데.
청성파의 일은 하나도 걱정되지 않는다.
해독 스킬은 치유 스킬과 달리 단계별로 효과가 나뉘어 있지 않다.
정말 유천진인이 독에 중독된 거라면 해독 스킬로 도왕처럼 쉽게 치료할 수 있다.
문제는 두 가지다.
청성파의 일을 마무리 짓고 어떻게 사천당가에 들리느냐,
그리고 사천당가에 가서 천운석으로 침을 만들 수 있느냐.
‘그들의 암기를 만드는데도 바쁘다고 들었는데 내 의뢰를 받아 줄까? 천운석 가공 난이도가 결코 쉽지 않을 텐데…’
이건 미리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가서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가서 기회를 만들어 보자. 이번이 아니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까.
마음을 굳히고 청성파의 장로에게 말했다.
“당연히 도와야지요. 청성파는 무림맹의 오랜 우방이 아닙니까?”
장로는 크게 기뻐했다.
“정말 고맙소, 의각주!”
“그런데 가는데만 해도 시일이 꽤 걸릴 텐데 그때까지 유천진인께서 버티실 수 있을까요?”
“거동은 힘들지만 운기하며 버티고 있으시니 가는 동안은 괜찮으실거요. 하지만 최대한 빨리 출발할 수 있으면 좋겠소.”
“알겠습니다. 준비되는대로 출발하지요.”
“정말 고맙소!”
청성파 장로와 대화가 마무리되자,
무림맹 총군사 제갈영영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어려운 결정 내려주셔서 감사해요, 의각주님. 번거로우시겠지만 한 가지 일을 더 부탁드리고 싶어요. 청성파의 일을 도운 후, 사천당가에 들러 주실 수 있을까요?”
“사천당가 말입니까?”
“네, 강호 정세가 심상치 않으니 그들의 지원을 얻고 싶어요. 설득은 다른 분이 할 거예요. 다만 복귀하는 일정이 조금 지체될 수 있다는 점 양해 부탁드릴게요.”
최근 보여주던 부드러운 눈빛과는 달리 무림맹 회의실에서 의견을 내는 그녀의 눈빛은 날카롭다.
이게 평소 일할 때 모습이라는 거겠지.
그리고.
유성은 제갈영영이 나서서 사천당가 이야기를 꺼낸 것이 자신을 위한 거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녀는 유성이 천운석을 가공하기 위해 사천당가에 가고 싶어 했던 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오, 미리 논의된 일은 아니지만 좋은 생각이오. 당가가 힘을 보태준다면 큰 도움이 될 거요.”
“마침 청성파로 가야 할 일이 있어 떠올렸을 뿐이예요.”
다른 장로들과 사전에 논의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올 때 선물이라도 사다 드려야겠네.
***
이튿날, 유성은 사천으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청성파 장로가 최대한 빨리 떠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니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친분 있는 자들에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연락을 돌린 후, 의각의 일을 처리했다.
“양의원님, 차의원님. 제가 사천에 다녀와야 하니 의각을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이네. 내가 양의원님 잘 모시고 있을 테니 잘 해결하고 오게.”
유성은 이번에 따로 양의원과 독대하며 작은 항아리 몇 개를 건네주었다.
“이게 뭔가?”
그가 항아리를 슬쩍 열어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감정 변화를 크게 보이지 않는 그인지라 색다른 광경이다.
“설마?”
“제가 만든 약입니다. 성수라고 이름 붙였지요.”
안에는 유성이 틈틈이 만들어 둔 성수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신비한 약… 설마 전에 군사부에서 간자 사건이 있었을 때 총군사님이 사용했다는 약이 혹시 이건가?”
“맞습니다.”
“정말 놀랍군.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꼭 한번 그 약의 존재를 보고 싶었는데 이걸 의각주가 만든 것인 줄 전혀 몰랐네. 가능하다면 나도 영술이라는 걸 배우고 싶을 정도야.”
당시, 제갈영영은 성수를 우연히 구한 약이라고 사람들에게 밝혔다.
성수의 정체가 공개되면 혼란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비밀로 해왔던 것인데,
이번처럼 장기간 의각을 비워야 할 때 유성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방법으로 성수만한 게 없다.
그걸 의각에서 제일 믿을 만한 양의원에게 맡겼다.
그의 인품은 믿을 만하다.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사용하셔야 합니다. 가능하면 비밀을 지킬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겠네. 스승님께도 비밀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
성수의 효능과 사용 방법 등을 양의원에게 상세히 설명해 준 후.
유성은 오늘의 처음이자 마지막 환자를 맞이했다.
바로 평소보다 훨씬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제갈영영이다.
“으으… 빠, 빨리 좀…”
그녀는 머리를 붙잡고 유성에게 달려와 침을 놔줄 것을 종용했다.
파르르 떨리는 손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짐작이 되었다.
유성은 재빨리 제갈영영의 머리를 더듬었다.
매일 그녀의 머리카락을 헤집다 보니 눈으로 보지 않고 두피만 만져 봐도 백회혈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이제 굳이 백회혈에 시침할 필요는 없지만 신성력 소모도 줄일 수 있고, 뜻밖에 손맛도 즐기게 되어 평소처럼 백회혈에 시침을 마쳤다.
“하아… 살았다. 고마워요. 통증이 싹 가셨어요. 오늘 무리했더니…”
“평소보다 훨씬 안 좋아 보이시기는 했습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제갈영영은 몸을 부르르 떨며 새벽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천문진법총해 두 번째 진법이 거의 마무리 단계야. 몇 달간 의각주님이 안 계시니 오늘 마무리 짓자.
3일 정도 공부해야 할 분량을 하루 만에 마무리 짓기 위해 잠도 줄이고 새벽같이 일어났다.
첫 번째 진법보다 더 난해했지만, 꾸준히 공부하다 보니 결국 두 번째 진법도 모두 익힐 수 있었다.
뿌듯함을 느낀 것도 잠시, 그녀는 참기 힘든 두통에 유성에게 달려온 것이다.
이제 유성이 없으니 당분간 세 번째 진법 공부는 멈춰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보내고 싶지 않지만, 화경의 고수를 잃어서는 절대 안 돼. 게다가 의각주님도 사천당가에 볼일이 있으시니…’
대의를 위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아쉽지 않을 리 없다.
자연스럽게 한숨이 나왔다.
“당분간 의각주님이 안계시니까 무리해서 공부했거든요.”
“아, 그거라면 제가 따로 준비한 게 있습니다.”
유성이 그의 진료실 안쪽에서 무언가 꺼내 왔다.
작은 항아리다.
“성수입니다. 몇 달간 쓸 양은 되지 않지만 공부하시다가 참기 힘든 두통이 찾아오면 조금씩 드십시오. 훨씬 나으실 겁니다.”
“이렇게 많이요?”
“응급 상황에서 다른 환자들에게 쓸 양은 따로 있으니 부담가지지 마십시오.”
제갈영영은 성수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유성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성수를 실제로 사용해 본 사람이 그녀였다.
그로 인해 부군사 태정헌이 죽음에서 생환하지 않았던가.
누군가의 목숨마저 구할 수 있는 귀한 성수를 단순히 공부하며 머리 아플까 봐 만들어 준 유성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고마워요. 아껴 쓸게요.”
“참, 그런데 어제 사천당가에 들러달라는 이야기는… 제가 생각한 거 맞습니까?”
유성 때문에 일부러 사천당가 행을 끼워 넣은 게 아니냐는 이야기.
“알면서 뭘 물어요? 사람 민망하게…”
제갈영영이 살짝 눈을 흘겼다.
“저도 고마워서요.”
“뭐, 마침 사천당가의 지원을 얻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아시다시피 그들의 독공은 집단전에서 큰 도움이 되거든요.”
“그렇긴 하지요. 당가의 지원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천운석 가공도 꼭 성공하세요. 그걸로 침 만들고 싶어 하셨잖아요.”
“그래야지요.”
그녀는 의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마디 남겼다.
“마음 같아선 안전한 곳에 계시길 바랐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네요. 부디 몸조심하세요.”
***
의각의 일까지 마무리 지은 유성은 짐을 챙겼다.
주요 물품으로는 역시 침통과 여러 의료 도구들.
그리고.
천운석 두 조각.
‘꼭 성공하자.
집을 나서 함께 청성파로 떠나는 일행과 만났다.
그중 무리를 이끄는 책임자와 먼저 인사 나누었다.
“의각주. 어서 오게, 이번에 내가 일행을 이끌게 되었네.”
“잘 부탁드립니다, 청운 장로님.”
청운 장로는 곤륜파 출신이다.
전에 의각 시험을 볼 때, 유성이 영술을 익히지 않았냐고 지레 짐작하여 사람들에게 대신 설명해 준 사람이다.
덕분에 스킬을 영술로 포장하여 지금처럼 자유롭게 신성력을 쓸 수 있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요즘 나도 나이가 먹었는지 예전 같지 않네. 가면서 몸도 좀 살펴주게.”
어깨를 과장되게 두들기며 씨익 웃는 모습이 엄살로 보이지만, 유성은 차의원 덕에 사회생활에 대해 배운 점이 많다.
“물론입니다. 사천까지 가는 동안 일행들의 건강은 제가 책임 지겠습니다.”
유성의 호언 장담에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일부 무사들은 이미 의각에도 여러 번 찾아와 안면이 익기도 했다.
그리고.
유성은 일행의 후미에서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남궁 소저도 지원하셨습니까?”
“네, 의각주님. 저도 같이 가게 됐어요. 잘 부탁드려요.”
남궁유린이 멋쩍게 웃었다.
“사천까지 가는 일인데 너무 멀지 않겠습니까?”
“그건 괜찮아요. 그런데 저희 언제 출발하나요?”
그녀는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왠지 조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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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평소와 조금 달라 보이시는데.”
남궁유린은 유성의 물음에 잠깐 고민했지만, 솔직히 털어놓았다.
더 한 이야기도 털어놓았는데 이 정도쯤이야.
유성에게 들릴 정도로만 속삭였다.
“그게… 할아버지가 가문으로 돌아가자고 하셔서 몰래 떠나는 거라서요. 지금 며칠 자리 비우셨는데 만약 일찍 돌아오시면 절 데려가려고 하실 거예요.”
“그래도 괜찮습니까? 가뜩이나 오래 걸리는 임무인데요.”
유성은 검왕이 평소 엄하다고 들었다.
이렇게 몰래 떠났다가 뒤늦게 검왕이 알게 되면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지금은 돌아갈 자신이 없어서요. 몇 달 후에는... 뭐, 어떻게든 되겠죠.”
생각보다 대책 없는 타입이네.
“자, 그럼 서로 인사 나눴으면 모두 모이시오. 이번 임무에 대해 설명해 주겠소.”
청운 장로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곤륜에 몸담은 청운 장로는 천하를 돌아다닌 경험이 풍부했고, 장거리 여정을 이끌기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무공 수준도 초절정 고수로 뛰어나다.
다른 무림맹 고수들과 함께 하면 웬만한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는 자다.
“아시다시피 이번 임무는 의각주를 성도의 청성파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는 임무요.”
무림맹 무사들은 모두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으나, 남궁유린은 몰랐던 눈치다.
눈이 동그래졌다.
유성에게 보내는 눈빛이 마치 이렇게 묻는 듯하다.
-이게 다 의각주님 호위 임무였어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청운 장로가 이제 이동 경로를 설명했다.
“우리는 장안을 거쳐 관중평야를 따라 진령산맥 북쪽 길로 이동할 것이오.”
청성파 장로, 정우 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문관을 지나시려는 거군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이 정도 규모의 인원이 이동하기에 가장 적합하겠습니다.”
“그렇소. 가는 길에 무림맹 분타들에서 쉬어갈 수 있소. 상황에 따라 객잔을 잡거나 며칠은 야영해야 할 수도 있지만 가장 빠른 길이오.”
일행의 우두머리가 경로를 정했으니, 이제 부지런히 움직이는 일만 남았다.
마차 여러 대를 나눠 타고 일행은 무림맹을 떠났다.
유성은 청운 장로와 함께 마차를 타게 되었다.
그가 제일 고수였고 이 무리에서 꼭 지켜야 할 사람이 유성이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정우 도인과 남궁유린을 포함하여 총 8명의 인원이 대형 마차에 타게 되었다.
청운 장로가 남궁유린에게 물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묻지 못했으나 검왕께서는 가문으로 돌아가셨나?”
유성과 남궁유린이 검왕에 대해 나눈 이야기는 알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조금 전에 다른 일행을 챙기기 바빠 보였으니.
“아니요, 다른 일이 있으시다고 하셨어요.”
“그럼 남궁 소저가 이 임무에 따라 가는 건 알고 계신가?”
“갑자기 맡게 된 임무라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그럼 검왕께서 일 보시고 무림학관에 들리시면 당황하시겠군.”
“네, 하지만 제가 없는 거 알면 가문으로 돌아가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청운 장로는 유성에게도 의각 소식 잘 듣고 있다며 여러 말들을 건넸다.
마차 안의 분위기는 그가 주도했다.
첫 만남 때부터 느꼈지만 아는 바를 뽐내기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나는 사천에 세 차례 가 보았네. 사천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으로는—”
그는 세상을 돌아다녔던 여러 이야기해주었다.
정우 도인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나 청운 장로 덕분에 마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별로 지루하지 않았다.
***
제갈영영은 보고서를 처리한 후, 차를 한잔 타 들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멀리 전각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쪽을 바라보며 차 한잔 마시는 건 생긴 지 얼마 안 된 습관이다.
그러면 왠지 모르게 편안한 기분이 들어 바쁜 와중에도 하루에 몇 번 정도는 꼭 차 마실 시간을 내곤 했다.
“...”
분명 그랬는데.
‘오늘은 그런 기분이 안 드네.
제갈영영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전각은 의각.
그곳의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
앞으로 몇 달 동안은 돌아오지 않는다.
“휴…”
한숨을 쉬고 창문을 닫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 좀 미루고 청성파로 가는 행렬이라도 한번 보고 올걸.
아침에 두통 치료 받고 인사하긴 했지만,
바쁜 일이 있어 따로 배웅하지 못한 게 내심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차를 재빨리 마셔버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때.
부군사 태정헌이 찾아왔다.
“총군사님, 무림학관 생도 임무 현황 보고드리겠습니다.”
“무림학관이요? 특별한 사항 있나요?”
크고 작은 보고들이 몰려오는 군사부의 특성상, 별 볼일 없는 건은 총군사인 제갈영영 선까지 올라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부군사가 무림학관 생도 임무 현황을 보고하러 온 것은 특별한 사항이 발생했다는 뜻.
“네, 한 건 있습니다. 이번에 사천까지 의각주님을 호위하는 장기 임무에 따라간 생도가 한 명 있습니다.”
“신기하네요. 장기 임무인데다 급하게 잡혔는데 지원자가 있었나보군요. 잠깐, 근데 누구죠? 그 생도는?”
제갈영영은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분명 의각 경계 임무도 홀로 지원한 생도가 있었는데...
“남궁유린 생도입니다.”
꾸깃—!
“...!”
태정헌은 총군사가 보고서를 와락 움켜쥐자 깜짝 놀랐다.
“아, 죄송해요. 딴생각하다가 그만. 그 건은 알겠어요. 다른 사항은요?”
순식간에 평온한 모습을 되찾은 제갈영영이 구겨진 보고서를 다시 피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나.
태정헌은 다른 사항들을 보고할 동안 제갈영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러져 있는 걸 똑똑히 목격했다.
‘요즘 신경이 날카로우신가 보군. 조심해야겠다.
의도치 않게 군사부에 긴장감을 심어 준 제갈영영은 퇴근 후 옷을 갈아입고 침상에 드러누웠다.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매일 떠오르던 잘생긴 남자 얼굴이 아니다.
순진 한 척, 커다란 눈을 깜빡이던 여자가 떠오른다.
상상 속 그녀가 갑자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유성님과 저, 둘만의 비밀 이야기예요.
제갈영영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 여우 같은…”
***
이튿날.
제갈영영은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온갖 불길한 상상으로 늦게 잠을 이루었음에도 습관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그녀는 탁자에 앉아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천문진법총해]
두 가지를 익혀냈지만 아직 여덟가지가 더 남아 있다.
전해지는 바로, 천문진법총해를 창안한 조상님은 다른 부분에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당시 여러 진법 가문들이 있었으나 조상님의 활약으로 제갈세가가 천하제일 진법 가문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진법에 관련된 의뢰들을 받아 제갈세가는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였다고.
‘황실에서 의뢰를 맡겼다는 말도 있고.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녀도 이 책을 다 익히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최고의 진법가가 되고 싶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유성이 없으니 적극적으로 공부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려니까 어색하네. 삼단계가 어떤 건지 조금만 살펴볼까?
그런 충동이 들었다.
유성이 주고 간 성수도 있으니 조금만 마셔도 두통을 해소할 수 있다.
‘일단계보다 이단계가 어려웠어. 삼단계는 당연히 더 어렵겠지. 그냥 어느 정도인지 가늠만 해보자.
결정을 내린 제갈영영은 책을 펼쳤다.
책에서 푸른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제갈영영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채 삼단계 진법에 대해 파악하기 바빴다.
‘역시 더 복잡하지만 못 풀 정도는 아냐. 그런데 점점 어려워지면 십단계는 얼마나 어렵다는 걸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제갈영영이 책을 덮었다.
자기도 모르게 홀린 듯 하루치 진도를 나가고 말았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경험상 이틀째는 참기 힘들 정도로 괴로워진다.
시험 삼아 꾹 참고 확인해 본 결과, 삼일째부터는 두통이 서서히 줄어들다가 오일 째는 완전히 해소된다.
유성에게 치료받지 못할 경우, 하루치 진도를 나가면 오일은 쉬어야 하는 것이다.
‘극악한 난이도야. 이러니 조상님들도 이 책을 제대로 못 익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성수를 조금 마셨다.
두통이 해소되며 머리가 다시 상쾌해졌다.
‘귀한 거니까 아껴 마셔야지. 당분간 공부하지 말자.
그러나 이튿날.
은은한 두통이 발생했다.
그녀는 곧 두통의 원인을 알아냈다.
‘삼단계부터는 꾸준히 공부하지 않으면 은은한 두통이 지속해서 발생한다고?
물론, 원인을 안다고 다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공부할 때처럼 심각한 두통은 아니지만 은은한 두통이 사라지지 않고 그녀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부작용이 있었다.
성수의 양은 매일 마실 만큼 넉넉하지 않다.
“망했다…”
그날 이후.
제갈영영의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졌고, 군사들은 더 긴장해야 했다.
부군사가 군사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다들 알다시피 요즘 심상치 않은 일들이 많아 총군사님이 좀 예민하신 것 같다. 며칠만 조심하자.”
정확한 원인을 모르는 그는 제갈영영의 날카로운 기분이 며칠이 아니라 몇 달이 될 거라는 사실은 알 수 없었다.
***
낙양에서 장안으로 향하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다.
유성 일행은 중간중간 마차를 끌다 지친 말들만 교체하며 장안으로 달렸다.
개울이 나오면 물을 마시게 하고, 식사하며 말들도 풀을 뜯게 했다.
“길이 잘 정비되어 있으니 마차가 잘 달리는군요.”
“지금은 그렇지만 진령산맥 쪽으로 가면 속도가 현저히 느려질 걸세.”
사천을 여러 번 가 봤다는 청운 장로가 그렇다니, 맞을 거다.
어쨌든 순조롭다고 생각하던 중.
히이잉—!
쿵—!
말들이 크게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소음이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청운 장로의 물음에 밖의 무사가 답했다.
“선두의 마차를 끌던 말들이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다친 사람은 없나?”
“사람은 괜찮은 것 같지만 말들이 다리가 부러진 것 같습니다.”
“이런, 몇 마리나?”
“세 마리가 다쳤습니다.”
한 마차를 끄는 말들은 네 마리.
그중 세 마리가 다쳤다면 다른 마차를 끄는 것도 큰 지장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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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 무공의 뿌리는 어디일까.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달마 대사를 꼽는다.
달마 대사가 역근경과 세수경이라는 무공을 창안 했고, 그것이 중원 무공의 뿌리가 되었다는 설이다.
'천하공부 출소림'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만큼 소림사가 무림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했다.
그렇다면 당대에 소림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누굴까?
당연히 소림사 방장 정해 대사다.
그다음이 대외 활동하는 몇몇 장로급 승려들이고 사대금강도 꽤 명성을 날리고 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소림사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하는 승려들도 있기 마련이다.
연단각주가 그런 직위였다.
그의 스승은 어린 연단각주를 제자로 들이면서 말했다.
"너는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은 것이니 항상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대환단과 소환단을 만들고 관리하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누군가는 연단각주의 직위를 맡아 자기 소임을 다 하는 것으로 크게 만족할지 모른다.
그러나 큰 업적을 세워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연단각주의 자리를 반기지 않을 것이다.
잘하면 본전, 못 하면 큰 오점이 남는 일이니까.
지금의 연단각주가 그랬다.
그는 각주가 되어 배운 대로 대환단과 소환단을 연단해 나갔으나 자기 일에 전혀 자부심을 가지지 못했다.
'나도 이름을 남기고 싶다.'
무재가 없어 쉽게 이룰 수 없는 꿈인 줄은 알고 있었다.
애초에 연단각으로 배정받은 것도 소림사에서 임의로 배정해준 것뿐이고.
그렇게 소림사의 이름 없는 승려로 평범한 생을 마감할 줄 알았는데.
"아니, 화령초를 구할 수가 없다니요?"
대환단 연단의 마지막 과정에서 큰 변수가 발생했다.
이름을 남기기는커녕 처음으로 대환단 연단에 실패한 머저리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위기가 아닌가.
그는 필사적으로 화령초를 대체할 방법을 찾아다녔다.
소림사에서 보유중인 연단 서적 및 약초 서적을 뒤적거리며 연구하고.
거기서도 찾을 수 없자 외부에서 관련 서적을 구해와 다시 연구하고.
결국 화령초를 대체할 약초는 찾지 못했다.
그러나.
부처님의 도움으로 연단에 실패한 대환단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천하에 쓸 만한 약초가 줄어들고 있는 현상이 지속된 지 오래다. 만약 다음에도 지금과 같은 일이 있다면 내가 찾아낸 실패한 대환단 활용법과 내 이름은 영원히 기억되지 않겠는가?'
이 정도면 만족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참석한 오후 회의.
연단각주는 정해 대사가 내린 결정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재고해 주십시오, 방장님.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 하던 대로 연단에 힘쓰라니요? 오늘 안으로 제가 찾아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대환단 재료들의 약효가 순식간에 감소하여 보름 후에는 다 날리는 꼴이 되는 겁니다. 아니면 화령초를 구하기라도 하셨단 말입니까?"
"아직 아니오. 단지 소승은 부처님의 뜻에 따르기로 한 것이오."
"..."
정해 대사가 부처님의 뜻을 언급하자 연단각주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자리에서 어떻게 부처님의 뜻을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장로들도 모두 수군거렸으나 그들은 결국 정해 대사의 뜻에 따르기로 한 모양이었다.
축 늘어진 어깨로 회의실을 나서는 연단각주의 머리가 햇볓을 받아 뜨거워졌다.
***
소림사의 미래, 사대금강 중 일인 혜강은 연무장에서 홀로 권법을 수련중이었다.
한시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고는 초조함을 감추기 힘들었던 탓이다.
자연히 태산이라도 꿰뚫을 듯 뻗어야 하는 권로에 약간의 어긋남이 발생했다.
심란하던 그때.
"혜강, 소식 들었나?"
동료가 다가와 앞뒤 없이 그렇게 물었다.
"무슨 소식 말인가?"
"연단각주님 제안이 거절됐다더군."
"뭐?"
연단각주는 자신이 개발해 낸 방법에 크게 심취한 나머지 오전에 친분이 깊은 사대금강을 찾아와 신이 나 떠들었다.
"아무 걱정 말거라. 너희는 우리 소림의 미래다. 비록 대환단 연단에는 실패했으나 내가 삼할의 약효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했으니 20년 공력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오전 회의에서 말씀 드렸으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소림사 승려들 모두 간절하겠지만, 사대금강과 방장만큼 대환단의 성공이 간절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직접 복용하는 대상자가 될 자들이니.
혜강은 사대금강으로 선출되는 시험에서 최후의 4인으로 뽑히고 뛸듯이 기뻐했다.
'나도 대환단을 수여받을 수 있겠구나!'
어릴 적 친하게 지낸 소림사 속가제자로부터 대환단의 대단함에 대해 귀에 딱지가 일 정도로 들어왔기 때문일까?
정식으로 승려가 된 혜강은 온통 대환단 생각뿐이었다.
그것은 집착에 가까웠다.
대환단만 받을 수 있다면, 몇 년간 정체된 벽을 뚫고 초절정의 경지에 발을 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환단은 벽을 뚫으려는 무인들의 성공률을 올려주기에 누구나 탐내는 영약이므로.
그러나 최근 들어 그는 무공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환단 연단이 실패할 것이라는 말이 돌았기 때문이다.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연단의 진척 과정을 가장 잘 파악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두웠던 것이다.
덩달아 혜강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그런 상황에서, 연단각주가 삼할의 효과라도 건질 수 있다는 말은 큰 위안이 되었다.
혜강은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모든 것을 날릴 뻔했는데 삼 할 만 해도 대단하지 않은가? 어쩌면 20년 공력만 얻어도 벽을 뚫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 새로운 희망이 솟아 난 것이 조금 전이건만.
"방장님이 모든 것을 부처님의 뜻에 따르자고 했다더군."
부처님의 뜻?
혜강은 비록 소림사에 소속되어 있으나 스스로 불심이 깊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근본인 소림사를 저버리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그는 무림의 태산북두 소림사에서 굳건한 기둥이 되고 싶을 뿐이다.
소림 칠십이종 절예들을 대성한 무림의 영웅!
그 꿈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삼 할이 아니라 아무것도 건지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대금강은 장로 이상이 참석하는 회의에 낄 권한이 없다.
그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 없이 부처님의 뜻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마음이 복잡해진 혜강은 수련을 중단하고 바람을 쐬러 자리를 떠났다.
기분을 환기하기 위해 그의 발길은 평소 잘 다니지 않던 곳으로 향했다.
***
햇볕이 따사롭다.
소림사는 몹시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점심에는 맛있는 나물 밥도 얻어먹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가만히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으니 꼭 한량이 된 기분이다.
최근 바쁘게 살아온 유성은 낮 시간에 이 정도의 여유를 가져 본 기억이 없었다.
잠이 솔솔 몰려왔다.
어차피 다음 촉진을 사용하기 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 조금 눈이라도 붙이려던 찰나였다.
저벅- 저벅-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에 잠이 달아났다.
"시주는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이곳은 새 약초밭으로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만."
유성이 돌아본 곳에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턱이 각진 승려 하나가 서 있었다.
무승인지 신체가 잘 단련되어 있었다.
"아, 저는 백유성이라고 합니다. 정해 대사님의 허락을 받고 머무르고 있습니다."
"방장님이 시주께 말씀이시오?"
눈빛에 의아함이 떠오르기도 잠시, 승려의 고개가 화령초로 향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약초밭에 무언가 피어 있으니 절로 시선을 잡아 끈 것이다.
화령초는 참 특이한 약초다.
모양만 보면 흔한 풀과 다를 바 없는데, 흔한 풀과 구별되는 확실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특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들이라면 한눈에 화령초를 구분해낼 수 있다.
"푸른 잎사귀에 저 붉은 기운은... 저것은 화령초가 아니오? 설마...!"
승려가 황급히 약초밭으로 다가가 무릎 꿇고 앉아 화령초를 자세히 살폈다.
"맞습니다. 화령초지요. 저는 정해 대사님의 부탁으로 저것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방장님이 지키고 있으라고 했다는 말이오? 설마 이것이 50년 이상 된 화령초란 말인가?"
유성은 정해 대사에게 신성력을 사용하는 과정을 들켰으나 더 이상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정해 대사도 흔쾌히 비밀로 하겠다고 약속했으니, 이 자리에서는 대충 둘러대는 게 나아 보였다.
그러나.
"이상하군, 분명히 이것보다 좀 더 커야 하는데, 조금 모자라 보이는군."
"..."
"설마 방장님은 이게 하룻밤사이에 저절로 자라나기를 기대라도 하고 계시단 말인가?"
어찌 된 일인지 화령초가 50년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게다가 승려의 상태가 이상했다.
"이것만 없으면 방장님도 미련을 버리실 게 아닌가? 이대로는 어차피 써먹지도 못 하는 것. 이것만 없으면... 어쩌면 연단각주님의 방법을 채택하실지도 모르지. 아니, 틀림없이 그럴 테지."
그는 유성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도 잊었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손을 서서히 화령초 쪽으로 향했다.
기색을 보아하니 화령초를 꺾기라도 할 듯했다.
'이자가 무슨 짓을!'
유성은 깜짝 놀랐다.
초산이 남긴 화령초와 자신이 그동안 쏟아부은 신성력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갈 상황.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스님! 멈추십시오!"
유성의 큰 소리에 승려, 혜강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무슨 짓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 내가 어찌 방장님의 뜻을 거스른단 말이냐? 잠시 심마에 들었나보구나.'
대환단에 대한 집착으로 한순간 심마에 들어 잘못된 선택할 뻔했다.
작은 심마는 언제나 찾아올 수 있다.
그리고 작은 심마는 큰 심마로 바뀔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마침 시기 적절하게 들려온 외침에 혜강은 심마 초기에서 곧바로 벗어날 수 있었다.
혼자 있었다면 큰일 날 뻔한 것이다.
'그래. 대환단에 의지하지 말고 차곡차곡 쌓아가자. 대환단을 먹지 못한다고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내가 벌써 몇 개나 먹은 소환단조차 구경하지 못하는 무림인들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작은 깨달음도 얻었다.
그때.
안도의 한숨을 내쉰 혜강의 뒤로 서슬 퍼런 유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스님이라도 화령초를 건드린다면 참지 않겠습니다!"
"..."
돌아본 곳에는, 권법의 기수식은 훌륭하지만 내공이 느껴지지 않는 시주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도 손을 뻗고 있으니 여전히 자신이 화령초를 꺾으려 한다고 오해한 듯했다.
"시주, 오해요. 비록 소승이 심마에 빠져 화령초에 손을 대려 한 것은 맞으나 지금은 괜찮소. 시주가 적절하게 외쳐 말려 준 덕분에 심마에서 벗어난 상태라오."
"...그것이 정말입니까?"
"물론이오."
유성이 미심쩍은 눈으로 눈앞의 승려를 살폈다.
그는 아예 화령초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졌는데, 눈빛에 맑은 것이 헛소리는 아닌 듯했다.
"좋습니다. 믿겠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승려가 꾸물대면서 자리를 뜨지 않았다.
"혹시 제게 볼일이 남으셨습니까?"
"시주,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시주의 경지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는데 물어도 되겠소?"
"...말씀하십시오."
"아까 기수식을 취할 때 보니 시주는 언뜻 보면 절정의 경지에 이른 듯싶지만, 한편으로는 내공이 느껴지지 않소. 어찌 된 연유인지 신기하여 물을 수밖에 없었소."
유성이 씁쓸하게 웃었다.
평소에는 무공을 익혔던 흔적을 들키기 싫어 자세나 걸음걸이를 일부러 흩트렸으나, 기수식을 취한 모습 때문에 경지를 들킨 것이다.
"저는 단전을 다쳐 내공을 잃었습니다."
"...소승이 괜한 것을 물었소. 용서하시오. 아미타불."
"이미 지난 일이니 별수 없지요. 그런데 스님은 누구십니까?"
"이런, 내 소개도 하지 않았구려. 소승은 혜강이라 하오."
유성은 곧바로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사대금강의 혜강 스님이셨군요."
그는 바로 절정의 후기에 도달했다고 알려진 사대금강의 수좌였다.
"그렇소. 다시 한번 소승을 도와주셔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싶소. 혹시 소승의 힘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시오."
유성은 최근 그를 노리는 자에게 생각이 미쳤다.
'최악의 경우 밖에서 살수가 나를 노리고 있을 수도 있다. 만약 개방도들이 없을 때 살수가 나를 노린다면 현재 내 몸 상태로 감당할 수 있을까?'
유성은 현재 자기 수준을 정확히 점검할 필요를 느꼈다.
정확히 점검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상대가 필요한 법이다.
"정 고마우시면 저와 대련 한번 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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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승과 대련 말이오?"
"그렇습니다. 물론 제 몸 상태로는 상대가 안 되겠지요.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가능하시겠습니까?"
혜강이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좋소. 그 정도는 어렵지 않소. 그나저나 대련이라니, 예상치 못한 요청이었소. 아직 무공에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이오?"
"물론입니다. 제가 비록 단전을 다쳤지만 언젠가는 치료하고 말 것입니다."
"다행히 회복이 가능한 상태인가 보구려. 정말 다행이오."
혜강의 예상과 달리 유성의 단전은 이곳의 상식으로는 치료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러나 신성을 깨운 유성은 지금처럼 해 나가면 언젠가는 단전을 치료할 수 있다.
요즘 신성력을 쌓는 데 주력하고 있으나 최종 보스와 겨뤄야 할 날이 올 테니 무공을 손에서 놓아서는 안 된다.
혜강과 대련을 한다면 현재 수준도 파악하고 실력도 더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너른 공터로 갑시다."
"감사합니다."
둘은 화령초와 멀리 떨어진 공터로 자리를 옮겼다.
권법의 기수식을 취한 혜강이 유성을 배려했다.
"소승이 선수를 양보하겠소."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백가장의 가전 무공에 권각법은 없었다.
유성이 평소 수련 하던 것은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육합권에, 그동안 경험한 다른 무공들의 묘리를 섞은 것이다.
반면, 소림사의 칠십이종 절예들의 상당수는 권각법이다.
사대금강인 혜강은 당연히 그것들을 익혔을 것이고.
도달한 경지마저 차이나니 유성에게 매우 불리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내 한계를 시험해 보는 거다. 비록 단전을 잃었을지라도 내 무재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에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최고의 무재를 타고난 사람들에게 '천무지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성도 캐릭터를 만들 때 특성 목록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천무지체를 고르지 않았다.
최상위 특성인 '무극지체'가 있는데 천무지체를 고를 이유가 없었다.
즉, 설정상 유성의 무재는 고금 제일이라 할 수 있다.
"갑니다!"
유성이 혜강의 가슴을 노리고 일권을 찌르며 비무가 시작되었다.
가볍게 공격을 흘린 혜강은 흥이 났다.
"훌륭하오!"
내공이 실리지 않았지만 공격 초식이 날카롭다.
혜강이 익히 알고 있던 정직한 육합권의 투로와 달리 날카로운 변초까지 가미되어 있었다.
원래 서로 다른 무공을 섞는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조잡해질 수 있으나, 유성의 변형 육합권은 조화로웠다.
'비록 소림의 절예들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 시주가 얼마나 열심히 수련했는지 알겠구나.'
유성의 연속된 공격은 혜강에게 큰 위협을 주지는 못했다.
한 발자국.
주먹이 닿기 전 펼쳐지는 한 발자국의 보법이 만들어 내는 효과였다.
내공을 쓰지 않아도 근육이 꿈틀대며 소림의 최상위 보법인 불영선하보가 유성의 공격을 무위로 돌렸다.
상당한 실력 차이에 기가 죽을 법 하지만 유성의 눈빛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본 혜강은 슬슬 공격을 시작했다.
"그럼 소승도 공격하겠소!"
소림의 기본 권법 나한권이 펼쳐지며 유성의 변형 육합권과 합을 이뤘다.
찌르고, 피하고, 맞받아치고.
어지러히 양 주먹이 얽혔다.
'호오, 언뜻 보기에 허술한 듯 보이나 실제로 손속을 나눠보니 나한권으로는 뚫기가 만만치 않구나. 다음은 오형권으로 가 봐야겠구나.'
용, 호랑이, 학, 뱀, 사마귀의 움직임을 흉내낸 오형권은 기본 권법인 나한권보다 훨씬 변화무쌍하다.
각 동물을 흉내낸 오형권의 초식이 펼쳐지자 유성은 수세에 몰렸다. 그는 약간 부족한 보법을 밟아가며 연신 몸을 비틀었다.
"허허! 정말 잘 피하시는구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주먹이 유성의 안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대단하다. 한 가지 무공이 이렇게 변화무쌍 할 수 있다니. 숙련도도 대단해서 까딱 잘못하면 순식간에 당하겠다. 이게 사대금강!'
유성은 최근 이렇게 집중해 본 적이 없었다.
대련을 시작하기 전에는 한 수 배우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다 보니 호승심이 일어났다.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니 무라도 썰어야 하지 않겠는가?
유성은 두 눈을 부릅 뜨고 혜강의 주먹에 실린 변화를 읽었다.
왼쪽? 오른쪽? 왼쪽이다!
휙-
변화 예측에 성공했다.
다음은 가슴!
휙-
머리를 노리는 듯하더니 가슴을 공격하는 허초를 간파했다.
이번에는 다시 왼쪽!
휙-
투로가 훤히 읽혔다. 가볍게 피했다.
대단한 집중력으로 오형권의 변화를 간파한 유성이 서서히 기세를 회복했다.
처음에는 간신히 피하던 유성이 어느새 여유를 찾아가는 모습에 혜강은 내색하지 않았으나 깜짝 놀랐다.
'이 시주는 대단하구나. 내가 아무리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움직임을 읽히다니!'
혜강도 자존심이 있다.
아무리 대련이라지만 하수에게 꼴 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는 확실히 우세를 점할 생각으로 각법까지 꺼내 들었다.
무상각에 이어 항마연환선퇴로 이어진 각법들에 유성 역시 기초 각법인 칠성각의 변형으로 맞섰다.
'기초 각법으로 내 절예들에 맞서다니, 응용력이 정말 대단하구나.'
각법까지 사용한 초식 교환에서도 유성은 처음에만 몇 번 곤경에 처했을 뿐 점차 혜강과 손속을 겨룰 수 있었다.
혜강은 더 오래 끌면 안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어중간하게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잘못하면 크게 망신당할 판이니 전력을 다해야겠구나.'
혜강이 오행권을 거두고 기습적으로 대력금강수를 펼쳤다.
파앙-
내공이 실리지 않았음에도 의념이 일어 주위의 공기가 변화했다. 강맹한 일권이 유성에게 쏟아졌다.
"큭...!"
그럭저럭 잘 방어해 나가던 유성이 점하고 있던 공간을 내주고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그만큼 권에 실린 힘이 강맹하여 그대로 맞서기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혜강이 불영선하보를 펼쳐 바짝 거리를 좁혔다.
고수들 간의 결투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발놀림이라고 할 수 있다. 둘의 보법은 수준 차이가 극심했다.
유성은 곧 일권을 내주고 패배할 위기에 처했다.
'칫, 할 수 없나. 꼭 이기고 싶은데. 처음 해보는 시도인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니, 할 수 있을 거다.
유성은 그의 무재를 믿었다.
깊이 없는 백가장의 보법으로 연신 뒷걸음질 치던 유성의 다리가 돌연 기이한 움직임을 보였다.
보폭이 크지 않게 줄어들며 옆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한 것이다.
"...!"
혜강의 눈이 더할 나위없이 커지며 발이 살짝 꼬였다.
그와 동시에 혜강의 텅 빈 옆구리가 훤히 드러나고 말았다.
'빈틈!'
쉬이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유성의 육합권이 대련을 끝내기 위해 혜강의 옆구리로 쏜살같이 뻗어 나갔다.
혜강이 황급히 팔을 내려 투로를 차단했다.
유성의 주먹이 마치 뱀과 같은 움직임을 보이며 그의 팔을 타고 거슬러 올라갔다.
그새 오행권에서 뱀의 움직임을 본 딴 사권의 묘리를 훔쳐 적용한 것이다.
'이겼다! 도망갈 곳은 없다!'
막 혜강의 얼굴에 틀어박힐 듯하던 주먹이 순간 목표를 잃고 허공을 갈랐다.
"...!"
얼른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잡은 유성의 눈에, 합장을 한 채로 일장이나 떨어져 있는 혜강이 들어왔다.
유성은 그 놀라운 신법의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다.
"금강부동신법...!"
그리고 혜강은 유성보다 훨씬 더 놀랐다.
"조금 전 시주의 보법이 불영선하보를 닮은 것 같은데 소승이 착각한 것이오?"
무림인들은 자기 무공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을 무척 꺼려한다.
이는 무공이 파훼당하거나 누군가 훔쳐 배울 것을 우려한 것이다.
무공 수련하는 모습을 한 번 본다고 훔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민감하게 구는데, 눈앞에서 절세의 보법 불영선하보의 특징을 선보인 유성.
혜강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좋은 뜻으로 대련을 하다가 무공을 도둑맞을 판이 아닌가?
"패배할 위기에 저도 모르게 얼떨결에 다리가 움직인 것일 뿐, 저는 이것이 불영선하보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스스로 불영선하보를 펼치고도 몰랐단 말이오?"
"정말입니다.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하더니 어떻게 하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다가 발 가는 대로 움직였을 뿐입니다. 이렇게..."
유성이 다시 보법을 펼쳐보았다.
땅 위에서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특징이 비슷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물 흐르듯 미끄러지는 불영선하보의 신묘한 움직임에 비하면 유성이 보여주는 보법은 훨씬 조잡하고 덜컥거린다.
혜강이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면 충분히 파훼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런, 내 착각이었구나. 족적의 위치도 전혀 달라. 언뜻 보기에 비슷해 보여 당황하고 말았구나.'
혜강은 다른 무공도 아니고 최상승 무공인 불영선하보를 몇 번 보고 따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혹시 누군가 똑같은 순서로 족적을 밟을수 있더라도 언제 어느 부위에 얼마간 힘을 주는지에 따라 움직임은 천차만별이 되는 것이다.
"미안하오, 시주. 내가 오해했구려."
"아닙니다. 움직임이 비슷하니 오해할 만했지요."
"소승의 패배요."
합장 한 채로 일장의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하는 금강부동신법은 내공 없이 펼칠 수 없는 공부다.
그가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자 유성의 다리가 풀렸다.
"휴..."
매일 아침 수련했다지만 상대를 두고 대련을 벌여 본 것은 오랜만이다.
대련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체력이 부족해 패배할 뻔했다.
무공을 훔쳐 배운 것도 걸리지 않고 잘 넘어갔으니 천만다행이고.
'일부러 불영선하보의 일부만 조잡하게 펼친 것이 효과가 있었구나. 딱 한 번, 허를 제대로 찌르겠다는 계획이 성공했다.'
그런 속도 모르고, 혜강이 물었다.
"백유성 시주의 정체가 정말 궁금하구려. 비록 초절정에 이르지 못했으나 소승도 같은 경지에서는 쉽게 지지 않으리라 생각했거늘."
그런데 유성이 이겨 버렸으니 혜강의 심정이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지금 낙양 의방의 의원입니다."
"그게 무슨..."
방금 그를 패배시킨 사람의 정체가 의원이라는 말이 혜강을 설득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열일곱살에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으나 단전을 다쳤고, 그를 치료할 방법을 찾기 위해 의원이 되었지요."
"...!"
***
혜강이 사대금강의 전용 연무장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연단각주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사대금강 다른 동료들에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어린 동자승이었을 때부터 아이들을 좋아하던 연단각주는 사대금강을 업어키우다시피 했다.
거의 부자지간이나 다름없었다.
"면목이 없구나. 방장님 고집이 저리 세실 줄은 몰랐다. 정말 부처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다니... 그래도 열흘 정도까지는 여유가 있을 것이다. 열흘이 넘어가면 약효가 내가 찾은 방법을 쓰는 것만 못할 테니..."
"이제는 정말 거기에 걸어보는 수밖에요. 각주님은 최선을 다하셨으니 너무 침울해하지 마십시오."
"고맙구나. 아, 혜강, 너도 왔구나."
마침 혜강을 발견한 연단각주와 동료들이 다가왔으나 그는 양해를 구하고 연무장 한쪽으로 향했다.
조금 전 깨달은 바가 많아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단전을 다치고 내공이 흩어지면 십중 팔구는 절망에 빠져 무공에서 손을 놓고 말 것이다. 그런데 백 시주는 열일곱에 절정 고수가 된 무재도 무재지만, 단전을 치료할 방법을 찾지 못하자 스스로 의원이 되었을 정도로 강한 정신력을 갖추고 있다.
반면 나는 고작 대환단 하나 못 먹게 되었다고 한탄했다니, 너무 부끄럽구나. 나는 단전도 온전한 상태고 다른 영약들도 부족함 없이 섭취했다. 꾸준히 정진한다면 결국 초절정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조급해하지 말고 나를 믿자.'
대환단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자신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된 혜강의 머릿속으로 여러 기억들이 떠올랐다.
땀을 뻘뻘 흘리며 칠십이종 절예들을 수련 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떠오르더니 사라졌다.
끊임없이 '넌 할 수 있다'고 말해주던 동료들과 연단각주의 모습이 떠오르더니 사라졌다.
그 외 여러 기억들.
그리고.
조잡한 무공만으로 자신과 맞서 싸워 결국 승리까지 일궈낸 유성의 모습이 머릿속에 아른거리더니 사라졌다.
그는 어느 순간 의식적으로는 아무런 생각도 떠올리지 못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무아지경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사대금강의 다른 동료들은 명상 중 갑자기 놀라운 기운을 줄기차게 뿜어내는 혜강의 주위로 가서 조용히 호법을 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벽을 뛰어넘는구나. 장하다, 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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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각의 승려들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이미 연단중인 대환단의 변질이 시작된 상태.
변질을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한 약초들을 갈아 넣고, 만에 하나 화령초가 구해지면 곧바로 투입할 수 있도록 혼합용 약초들을 준비해 두고.
그러던 중 연단각주가 연단각으로 들어섰다.
"..."
지난 몇 달.
연단각주는 매일 괴로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여러 서책들을 뒤적였다.
화령초를 대체할 방법을 찾기 위함이었다.
마침내 그가 행복한 환호성을 내지르고 나서 연단각의 분위기는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괴로움에 빠졌다.
연단각의 승려들은 자연스럽게 고개 숙이고 맡은 일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연단각주의 노고를 잘 아는 한 승려는 생각했다.
'방장님도 너무하시지. 각주님이 그렇게 고생하셨는데 각주님 말 좀 들어 주시지. 이제 와서 화령초를 어찌 구한단 말이야.'
묵묵히 약초를 갈던 그가 잠시 찌뿌둥한 고개를 들었을 때, 뜻밖에 연단각주는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응?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궁금증을 참지 못한 승려가 물었다.
"흐흐, 혜강 그놈이 글쎄 벽을 넘고 있더구나."
"헉, 혜강 스님이요? 드디어 초절정 고수가 되시는 거군요!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각주님. 한시름 놓으셨겠습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춘 승려들이 달려와 축하를 건넸다.
그들도 혜강을 비롯한 사대금강과 연단각주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사정을 몰랐다면 연단각주에게 네 아들이 있는 줄 알았을 것이다.
"다들 고맙다. 미안하지만 다시 연단에 집중해다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보자꾸나. 나도 돕겠다."
몇 년간 벽에 가로막혀 힘들어하던 혜강이 특별한 전조 없이 벽을 뛰어넘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연단각주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이니 연단에 실패하더라도 아쉬워하지 말자. 어차피 내가 찾아낸 방법을 후대에 전해주면 그뿐이 아닌가. 그것으로 만족하자.'
***
본의 아니게 여럿에게 깨달음을 준 유성은 그 이후로 별다른 방해 없이 화령초 재배에만 집중 할 수 있었다.
이튿날.
"백 시주... 정말 성공하셨구려..."
정해 대사가 그의 직위에 맞지 않게 약초밭에 무릎 꿇고 앉았다.
그리고 50년산이 넘어 보이는 화령초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초산이 캔 화령초가 아니라 이것보다 덜 자란 것이었다면 시간을 맞추기 힘들었을 겁니다."
"초산 그 친구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구려. 이 화령초와 시주를 소승에게, 우리 소림사에 보내주지 않았소?"
유성은 감격에 겨워 거듭 큰 감사를 전하는 정해 대사를 말려야 했다.
"일단 다음에 이야기하시지요. 아직 할 일이 남았지 않습니까?"
"아직 시간이 있다오. 정말 고맙소, 백 시주. 그대를 우리 소림사의 은인으로 여길 것이오."
소림사의 은인!
유성은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겸손하게.
"마음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저도 이제 내려갈까 합니다."
"낙양 의방으로 돌아가시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조만간 의방으로 찾아가겠소."
마지막까지 감사 인사를 전한 정해 대사가 화령초를 가지고 사라졌다.
'의방으로 찾아온다니, 기대되는걸. 게다가 스킬을 얻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신성력이 이만큼이나 차오르다니.'
상당한 신성력을 쌓아 만족한 유성은 짐을 챙겼다.
'완성된 대환단도 구경하고 싶지만 의방을 너무 오래비웠어. 빨리 환자를 보고 싶구나.'
그는 어느새 환자를 치료하고 얻는 보람을 즐기게 되었다.
환자를 치료하고 나면 실시간으로 신성력이 늘어나는 보상을 얻을 수 있어서 더 그랬다.
이번에 소림사에서 얻은 것이 많다.
유성은 주먹을 쥐어 보았다.
'백가장 시절, 호남의 여러 중소문파 무인들과 겨뤘을 때 타인의 무공을 훔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무공들의 수준이 낮아 가능하다고 여겼는데, 내가 소림의 절예들까지 훔쳐낼 수 있을 줄이야.'
혜강과 벌인 대련이 하나부터 열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억 난다.
제일 중요한 내공 운용법은 아직 모르지만 이미 초식들을 외워두었다.
단전을 치료하면 최선의 내공 운용법까지 찾아낼 수 있을 거다.
혜강이 펼쳤던 소림의 절예들은 유성에 의해 낱낱이 분해되어 그의 무공에 녹아들 것이다.
무극지체와 선천오성 특성의 힘이다.
오랜만에 긴장감 넘치는 대련을 가졌기 때문일까?
유성은 무공에 대한 깊은 갈증을 느꼈다.
'더 많은 상승 무공들을 견식하고 싶다. 나만의 무공을 만들어내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완벽히 펼쳐 내고 싶다.'
***
연단각주가 최근에 제자들에게만 맡겨 두었던 작업에 손을 보태고 있을 때.
"저, 저, 저...!"
누군가 경박한 소리를 냈다.
"무슨 소란인가?"
"화, 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제자를 한심하게 쳐다본 연단각주가 돌아본 곳에는.
성인 손바닥보다 더 긴 화령초를 소중하게 들고 있는 정해 대사가 서 있었다.
"화령초!"
꿈에서 수백 번, 수천 번은 봤던 그 자태 그대로였다.
연단각주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화령초는 무조건 50년 이상 된 것이라고.
"연단각주, 부처님의 뜻을 전하러 왔소."
"아아...! 아미타불...!"
연단각주가 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불호를 외우면서 엎드리는 광경이 괴상했으나 연단각의 다른 승려들도 마찬가지로 너도 나도 바닥에 엎드렸다.
정해 대사가 빙그레 웃었다.
"늦지 않았다면 어서 연단의 마지막 과정을 시작해주시오."
"물론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화령초를 도대체 누가 구해왔단 말입니까?"
"내 오랜 벗과 소림의 은인이라오."
***
소림사를 찾아왔던 여러 사람들이 행렬을 지어 숭산을 내려갔다.
유성도 그 사이에 끼어들어 주위를 살폈다.
'개방도들이 변장하고 있구나.'
의식하고 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여럿 보인다.
개방이 비록 거지들로 구성된 방파지만 고수들까지 구걸을 시키지는 않는다.
만약 그래야 했다면 개방은 제대로 굴러가지 못했을 것이다.
정보를 팔아 번 돈으로 나름의 자금력도 갖추고 있었고, 그 자금의 일부가 이번에는 개방도들을 변장시키는데 사용된 듯했다.
다양한 직업군으로 변장한 개방도들의 은밀한 호위를 받으며, 유성은 빨리 정체불명의 남자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너무 많은 사람을 고생시키고 있지 않은가.
유성이 숭산의 중턱 쯤 내려왔을 때, 하늘이 노을로 물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퇴근할 시간이다.
유성도 항상 이 무렵 퇴근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가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는 해가 완전히 저문 후였다.
'만약 나를 노리는 자가 살수라면... 응? 저자는 누구지? 설마...'
펑퍼짐한 검은 장포로 온몸을 감싸고 챙이 큰 죽립을 쓴 사람 하나가 유성의 집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마침 살수에 관한 생각하고 있었기에 몹시 수상해 보였다.
유성이 은밀히 그의 근처에 있는 개방도 하나에게 속삭였다.
"혹시 저자가 저를 감시한다는 자가 아닙니까?"
개방도는 그쪽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저분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아, 그렇습니까? 이러다가 모든 사람을 살수로 의심하게 될까 봐 걱정이군요."
"저희가 최선을 다해 정체를 밝히려고 노력중이니 불편해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저분이라고 하시던데 정체를 아시는 겁니까?"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조금 그렇군요. 철권개 분타주님 아래 개방도들은 철저한 교육으로 입이 천근처럼 무겁습니다. 이 주변은 저희가 철저히 감시할 테니 편히 쉬십시오."
"그게 무슨..."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희미한 미소를 지은 개방도가 슬그머니 멀어져갔다.
영문 모를 소리에 유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집 문 쪽으로 향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죽립 괴인이 마침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번뜩!
내려쓴 죽립으로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지만 유성은 마치 그자의 눈에서 무언가 쏘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죽립 괴인이 신법이라도 펼친 듯 놀라운 속도로 유성에게 접근했다.
'뭐야, 아무리 봐도 수상한데?'
유성이 여차하면 불영선하보라도 펼치려던 찰나.
죽립 괴인으로부터 가늘고 간절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꼼짝없이 키가 조금 작은 남자라고 생각했던 유성은 깜짝 놀랐다.
"백 의원님, 대체 왜 이제 오셨어요...!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정말 저 죽는 꼴 보고 싶으세요?"
"...!"
유성은 여러 일들 때문에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 아침 그에게 두통 치료받았던 제갈영영을 이틀간 고스란히 방치했다는 사실을.
"미안합니다. 총군사님이셨군요. 설마 두통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오신 겁니까?"
"아이 참, 빨리 들어가요. 주인 없는 집이라 들어가지도 못했다구요."
"어어?"
유성은 제갈영영이 내공까지 써서 그를 잡아끌자 할 수 없이 함께 집 안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자가 이상한 오해를 한 것은 아니겠지?'
문이 닫히기 직전, 유성은 문틈 사이로 저 멀리서 이쪽을 보고 진한 미소를 짓는 개방도와 눈이 마주쳤다.
탁-
문이 완전히 닫혔다.
오해가 깊어질 것 같다.
***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리시면 어떡합니까? 제가 언제 올 줄 알고요."
유성이 짐을 풀고 침통을 꺼내며 물었다.
"일단 이 두통 좀 고쳐주세요.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어제도 아팠지만 오늘은 훨씬 심해져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일도 거의 못했단 말이에요."
제갈영영은 심각하겠지만 투정 부리듯 쏟아 내는 말을 들은 유성은 그녀가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연상녀에게 이런 매력을 느끼다니.
이게 다 현실에서 연애를 해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죽립을 던져 버리고 펑퍼짐한 검은 장포까지 훌렁 벗어 버린 제갈영영이 아무곳이나 찾아 드러누웠다.
항상 단정하게 입고 있던 하얀 학사복이 상당히 흐트러져 있는 것이 그녀가 얼마나 다급한 상황이었는지 간접적으로 말해주었다.
"빨리 찔러 주세욧!"
썩 꺼져라, 이 음란 마귀놈아.
뭉게뭉게 피어나는 망상을 흩어 버리고 유성도 서둘러 침을 꺼내 들었다.
"찌르겠습니다."
"어서요!"
망설이지 않고 침을 백회혈에 찔러넣고 재빨리 치유 스킬을 발동시켰다.
"으으으... 흐아아... 이 느낌이야아아아...."
제갈영영의 입에서 마치 녹아 흘러내리는 듯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팔을 느릿하게 허우적대는 그녀는 눈까지 풀려 있었다.
"좀 어떻습니까?"
당연히 두통이 나았냐는 질문이다.
치유 스킬을 받았으니 당연히 나았겠지만 의원으로서 예의상.
그런데.
"황홀해요... 최고예요, 백의원님... 하아아... 좋아..."
"..."
유성은 이 방 안에 단둘만 있음에 감사했다.
만약 이 소리까지 개방도가 들었다면 커다란 오해를 샀음에 틀림없었다.
그 정도로 제갈영영의 목소리와 내용이 야릇하게 들렸다.
"앗!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풀린 눈으로 이상한 감상을 늘어놓던 제갈영영이 깜짝 놀라 소리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 다 죽어 가던 주제에 지금은 펄떡펄떡 날뛰는 활어같았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알이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유성은 장난기가 돌았다.
"황홀할 정도로 좋으셨군요. 저도 좋습니다."
"네, 넷?!"
"총군사님께서 제 침술이 최고라고 칭찬해주시니 정말 좋군요."
그제야 유성이 놀리고 있음을 깨달은 제갈영영이 곱게 눈을 흘겼다.
"아무튼 죄송해요. 너무 추태를 부린 것 같네요. 두통이 정말이지... 아까는 참기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네?"
"다음에도 말없이 며칠간 사라지시면 저 진짜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꼭 말이라도 해주고 가세요. 아셨죠?"
"..."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대는 모습을 보자 유성은 조금 음험한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이틀, 아니, 사흘에 한 번씩만 침을 놔주는 것도 괜찮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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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은 현실 세계와 이곳을 통틀어 집에 외간 여자를 들인 적이 없다.
그래서 자신도 이 상황이 무척 신기했다.
너무 편안하지 않은가.
아마 제갈영영의 망가진 모습을 봐서 친근함이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뒤늦게 옷이 많이 흐트러진 것을 알아차린 제갈영영이 뒤로 돌아 옷매무새를 고친 후.
유성은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왜 그런 수상한 복장으로 찾아오신 겁니까? 저는 처음에 살수라도 찾아온 줄 알았습니다."
"하... 말도 마세요. 누가 저한테 이상한 소리를 해서 정말..."
"어떤 이상한 소리 말씀이신지요?"
제갈영영의 입이 꾹 담겼다.
'내 입으로 모용림 장로가 한 말을 당사자에게 전하라고? 절대 못해!'
그녀가 유성에게 마음을 품고 매일 치료를 핑계로 만나러 가더라, 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한동안 눈싸움이 이어졌으나 유성은 그녀의 입이 절대 열리지 않을 기세라 물러섰다.
"그렇군요. 어쨌든 이상한 소리를 들어서 그런 옷차림을 했단 말씀이시군요."
"말 못 하는 이유가 있으니 이해해 주세요. 아무튼 더 오해 사면 곤란해서 정체를 숨기려고 그런 거예요. 만약 누군가 제가 여기 찾아왔다는 걸 알아채기라도 했다면 정말 끔찍했을 거예요."
"..."
철권개 분타주가 부리는 개방도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거지는 어디에나 있다.
낙양이 대도시라고 해도 거지의 숫자가 더 적은 것은 아니다.
비율은 적을지라도 인구가 많으니 숫자는 오히려 더 많을 수도 있다.
과연 이 비밀이 끝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큰 의문이 들었으나 유성은 굳이 제갈영영에게 개방도들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지금 말한다 해도 바뀌는 건 없을 테니까.
"잠깐, 그런데 조금 서운하네요."
"뭐가 말씀이십니까?"
"살수라도 찾아온 줄 알았다는 말이요. 아무리 그래도 제가 그렇게 수상하게 보였나요? 조금 펑퍼짐하게 입고 얼굴만 감춘 것뿐인데요."
사실대로 말한 것이지만 서운한 기색을 드러내는 그녀를 보고 유성은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조력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지. 게다가 어디서 그자가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는 바깥보다는 여기가 사정을 털어놓기 제격이야.'
마음을 굳힌 유성이 진지한 눈빛으로 제갈영영을 응시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사실 제가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감시당하고 있거든요. 살수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뭐, 뭐라구요? 살수? 도대체 누가 우리 백의원님을 해치려고 한다는 말이죠? 절대 안 돼요!"
펄쩍 뛰는 그녀의 태도가 유성을 흡족하게 했다.
우리 백의원님이라니, 마치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지 않은가.
그 생각은 착각이 아니었다.
"의원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는... 나는... 아, 안 돼...!"
마치 무슨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제갈영영이 얼굴을 감싸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꼭 살수라는 게 아니고 단순 감시일 수도 있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개방에서 저를 도와주고 있으니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해도 그녀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무슨 생각하는지 시시각각 심각해지기만 했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혹시 진법 한번 배워 보시지 않을래요? 저희 가문의 것은 가르쳐드리지 못하지만 기본 진법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진법이요? 갑자기 그게 무슨... 총군사님이 저에게 왜 진법을 알려주신단 말입니까?"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네?"
제갈영영이 잠시 뜸을 들였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치료비죠, 치료비. 오늘 휴가신데 저를 치료해주셨으니 치료비를 넉넉히 드려야 마땅해요. 저는 마침 돈을 안 가져 왔으니 의원님이 몸을 지킬 수 있는 진법을 가르쳐드리는 것으로 치료비를 대신하고 싶군요."
치료비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지 몹시 수상쩍었다.
그리고.
유성은 조금 전 제갈영영이 장포를 훌러덩 벗어 던지고 옷이 흐트러져 있을 때 그녀의 허리춤에 달린 전낭을 목격했다.
물론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진법을 가르쳐 준다는 말에 혹했으니 괜히 민망하게 만들 필요 없다.
내공을 익히지 못하는 몸으로 진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몸을 지킬 무기가 하나 늘어나는 셈이다.
이건 좋은 기회였다.
"제가 훨씬 과한 대가를 받는 것 같기는 하지만 거절할 수 없군요. 그런데 제가 진법에는 문외한인데 내공이 없어도 진법을 쓸 수 있습니까?"
"익히기 훨씬 어렵지만 내공이 없어도 쓸 수 있기는 해요. 추천드리지는 않지만요. 내공 심법은 이제부터 익히면 돼요. 기본 심법들은 쉽게 구할 수 있으니까요. 적은 내공만 있어도 진법을 펼치기 훨씬 쉬워요."
제갈영영은 내공이 없으면 훨씬 복잡한 계산을 필요로 해서 진법 설치 난이도가 어렵다는 설명을 늘어놓았다.
유성이 쓰게 웃었다.
"저는 지금 단전이 다쳐 내공을 익히지 못합니다."
"앗... 죄송해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괜찮습니다."
제갈세가가 아무리 두뇌로 널리 알려진 가문이지만 기본적으로 무가다.
제갈영영이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다 해도 내공을 잃은 무인의 심정을 빙산의 일각이나마 깨닫지 못할 리가 없다.
그가 괜찮다고 말했지만 씁쓸한 표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도 보았다.
'정말 안 됐잖아? 설마 의술이 이렇게 뛰어난 것도 스스로 단전을 고치기 위해 정진해왔기 때문일까?'
유성이 무사해야 지속해서 두통을 치료받을 수 있다.
그의 안전을 위해 내공을 익히게 하고 몇 가지 간단한 진법을 가르쳐 주려던 그녀는 너무 미안한 마음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괜찮으시다면 어려울 수 있지만 내공 없이 진법을 펼칠 수 있도록 제가 직접 진법 공부를 시켜드릴까요?"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지만... 많이 어렵습니까?"
"내공을 이용하면 변수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어 설치 난이도가 급감해요. 그렇지 않으면 모든 변수를 고려하고 다 계산해야 해서 설치 난이도가 확 올라가죠.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부지런히 익히면 간단한 진법은 한, 둘 정도는 배울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군요."
"여기까지 온김에 오늘부터 시작해요. 이번에는 기초만 조금 봐 드릴 거예요. 그리고 제가 매일 치료받으러 의방에 들를 때 혼자 공부하실 수 있을 만큼의 내용을 적어드릴게요."
"좋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뭐든지 배워두면 다 피가되고 살이 되는 법이다.
진법책이 귀하기는 하지만 어찌어찌 구해 익힐 수도 있다.
하지만.
무려 무림맹 총군사, 게다가 진법으로 유명한 제갈세가 사람이 직접 가르쳐 주는 기회를 마다할 필요는 없다.
"그럼 먼저 진법의 개념에 대해 설명해 줄게요. 진법은 자연물 또는 인공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배치하여 특수한 효과를 발생 시키는 거예요.
진법에 들어선 사람이 길을 잃고 헤매게 만들 수도 있고 그 안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죠.
집이나 특정 장소에 미리 설치해 놓으면 유사시 큰 도움이 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집에 침입했는데 진법에 걸려 길을 잃고 제자리를 빙글빙글 돈다거나, 또는 감당하기 힘든 고수가 쳐들어 왔을 때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연물이나 인공물을 특정한 방식으로 배치한다고 했죠? 이 부분이 문제가 돼요.
내공이 없다면 기를 불어넣어야 하는 인공물은 사용할 수 없어요. 자연물을 이용해야 하는데 자연물을 배치하는 건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수많은 변수들을 계산해야 하거든요."
"변수 계산이 어렵나 보군요."
"변수는 한, 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모든 변수들의 교집합을 찾아야 하니 정말 까다로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군요."
"자, 그럼 제가 변수를 계산하는 방법들을 설명해드릴게요. 한 번에 잘 안 될 테니 지금은 이런 게 있다 정도로만 듣고 잊어버리세요. 하나씩 차근차근 익혀나가면 돼요."
제갈영영이 단단히 겁을 주었다.
유성은 변수 계산이라는 것이 꽤 어렵겠다는 각오를 다졌으나.
"아,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정말요?"
"물론입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셔도 돼요. 지금 기초를 확실하게 다져두지 않으면 다음에 공부할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거든요."
"정말 다 이해했습니다만."
"..."
제갈영영이 가르쳐 준 기초를 공부하는데 그녀의 반응이 이상하다.
반응을 보면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여기는 듯한데, 한번 설명을 듣자 쉽게 이해가 됐다.
선천오성의 힘도 있지만 현대 수학도 큰 도움이 되었다.
어찌 되었건 고등 과정까지 마친 유성이다.
변수 계산에 필요한 여러 계산 방법들을 듣자 그것들에 현대 수학을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로 공간을 파악하는 계산이 주를 이루었고 그건 현대 수학에서 공식화가 잘되어 있었다.
머리가 팽팽 굴러가며 몇 가지 공식을 적용하자 변수 계산이 전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제갈영영이 믿기 힘들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시험이라도 해 보시겠습니까...?"
진도 빼기도 바쁜 와중에 아는 내용으로 괜히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
제갈영영은 유성의 말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정확히는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 역시 유사시를 대비해 자연물과 인공물을 이용하는 방법을 모두 공부한 것일 뿐, 진법은 인공물을 이용해서만 펼친다.
가장 간단한 진법을 설치하는 것만 해도 자연물이 최소 열 개 이상 필요한데 모든 변수를 계산하는 것은 너무 많은 수고가 드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탁-
유성이 열 번째 돌멩이를 내려놓자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방금 알려 준 은둔진이 유성의 손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펼쳐진 것이다.
처음 설명해 준 것 외에 그녀의 도움 하나 없이.
"...말도 안 돼."
마치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았다.
유성이 은둔진에 대해 배우고 나서 실제 설치까지 걸린 시각은 촌각.
솔직히 그녀도 자연물을 이용해서는 이렇게 빠른 속도로 은둔진을 펼칠 자신이 없었다.
제갈영영이 어릴 적, 그녀의 아버지이자 제갈세가의 가주는 이런 말을 해준적이 있다.
"영영아, 세상은 정말 넓단다. 천하인들이 인정하는 두뇌로는 우리 제갈세가와 사마세가가 있으나 우리보다 뛰어난 사람이 어딘가는 존재할지 모른다. 항상 겸손하고 정진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넌 우리 가문의 역사에서도 대단히 뛰어난 아이니 중원 최고가 될 수 있을 거다."
그녀는 아버지의 말씀을 잘 따랐고 집안에서 기대한 것처럼 훌륭하게 자라났다.
마침내 무림맹 총군사 자리까지 꿰찼다.
20대 초반인 그녀가 지혜가 물이 오른 40대의 사마천을 꺾어냈을 때, 사마천의 승리를 예상한 무림맹 사람들이 얼마나 뒤집어졌던지.
그 장면은 제갈영영에게 있어 가장 통쾌한 기억으로 꼽혀왔다.
중원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은 아마 자신이지 않을까 생각한적도 있다.
그런데.
"제 말이 맞죠? 정말 제대로 이해한 거 맞다니까요. 그나저나 진법이란 정말 신기하군요. 혹시 다른 진법도 배울 수 있습니까? 재밌네요. 당장에라도 써먹을 수 있겠습니다."
신기한 듯 자연물을 다 흩어 버리고 다른 위치에 다시 한번 은둔진을 설치하는 유성.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은둔진이 펼쳐졌다.
다시 한번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라도 되는 듯 신이 나 진법을 해체하고 설치하는 유성을 보며 낯선 감정을 느꼈다.
'사실 나는 똥멍청이인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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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세가의 여식이, 그것도 무림맹 총군사가 멍청하다는 말을 하는 자는 천하인에게 욕을 먹을 것이다.
당연히 그녀는 뛰어났다.
유성의 특성이 사기적이었을 뿐.
혼란에 빠졌던 그녀도 곧 정신을 차렸다.
'아니야. 그래도 내가 멍청이는 아니야. 백 의원님이 천재인 거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돌을 요리조리 옮기고 있는 유성에게 물었다.
"백의원님, 변수 계산을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하실 수 있죠? 제가 알려드린 방법으로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해서 계산이 이렇게 빠를 리 없어요. 혹시 특별한 방법을 가지고 계신 건가요?"
유성이 미소 지었다.
"수학입니다."
"수학이라면..."
"산학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상위 개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걸 적극 활용했습니다."
"그렇군요. 아까 변수 계산에 저도 산학을 활용했어요. 산학 지식 없이는 변수 계산은 불가능하니까요. 제가 아는 지식중에 없는 건데 수학은 어디서 배우신 건가요?"
"여기서 닿기 힘든 저 멀리 떨어진 다른 나라의 수학을 배웠습니다."
"그런 곳의 지식을 어떻게... 아무튼 수학이 중원의 산학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말씀이신가요?"
중원의 산학에 대해 따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그것들을 다 포함하여 후대로 전해진 것이 현대 수학이 아니겠는가?
"그렇습니다. 아마 수학에 한해서는 제가 총군사님보다 좀 더 많은 지식이 있는 것 같군요. 마침 잘 됐습니다. 두통 치료 한 번으로 진법을 배우게 되어 너무 과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수학을 좀 가르쳐 드릴까요?"
제갈영영도 어릴 때는 당연히 가문 내에서 공부 스승님을 모셨다.
그러나 배움의 속도가 너무 빨랐고, 머지 않아 스승은 두 손을 들었다.
주위를 놀라게 했던 그녀는 일정 수준이 지나서는 누군가에게 공부를 배운 적이 없었는데.
'이 남자 도대체 뭐야...?'
***
서로의 지식을 교환하는 유익한 시간이 지났다.
유성은 기본 진법을, 제갈영영은 현대 수학을 배웠다.
"오늘 찾아오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특히 숫자를 세는 방식은 정말 획기적이예요. 맹의 군사부에서도 적용하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아라비아 숫자가 정말 편리하죠. 마음대로 쓰셔도 좋습니다."
"감사해요. 그리고 오늘 가르쳐 주신 수학은 인공물을 사용한 진법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하겠어요. 제가 요즘 공부중인 진법책이 있는데 거기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거든요."
"저도 진법이 이렇게 유익한 것인 줄 몰랐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매일 치료하러 의방에 오실 때 공부할 분량을 교환하는 것으로 하지요."
"좋아요."
그전까지 둘은 오직 환자와 의원의 관계였으나 지금은 서로에게 가르침을 주는 관계가 추가되었다.
"의원님도 쉬셔야 할 텐데 이만 가 봐야겠어요. 저도 어제 제대로 잠을 못 자 지금 꽤 피곤하거든요."
"오늘은 푹 주무실 수 있을 겁니다."
모용림이 척마대주에게 꼬리를 말았던 날도 푹 잘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은 제갈영영에게 최악의 날 중 하나로 기억되고 말았다.
잠을 청하자 머리가 쥐어 짤 듯 아팠던 것이다.
천문진법총해를 공부한 당일보다 이튿날의 통증이 더 심하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대체 가문의 다른 어르신들은 주위에 백유성과 같은 의원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두 번째 진법까지 익힌 것인지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느낌이 좋다.
"그러게요. 이번에는 정말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갈영영은 다시 장포를 두르고 죽립을 썼다.
유성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거추장스럽기만 하고 별로 도움 안 되는 거 같은데...'
개방도들은 이미 제갈영영의 일거수 일투족을 파악하고 있는 듯했으니까.
"그럼 내일은 꼭 의방에서 봬요."
밤이 늦은 시각, 그녀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돌아갔다.
잠시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유성은 주위 곳곳의 개방도들과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현했다.
거지들이 아무곳에나 자리를 깔고 눕는다지만 지금 주위에 있는 거지들은 모두 무공 깨나 익힌 자들이다.
그런 고수들이 밤 늦은 시각까지 집 근처에 포진해 있는 것이다.
오직 유성을 보호하기 위해.
'머지 않아 해결을 봐야겠다. 다행히 진법이라는 무기도 생겼으니 계획을 세워 보자.'
***
휴무에 이어 이틀의 휴가를 사용한 유성은 오랜만에 낙양 의방으로 출근했다.
그리고 곧바로 기분 나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한동안 있는 듯 없는 듯하다가 최근 들어 다시 적극적으로 진료를 보기 시작한 조의원이었다.
그가 유성을 발견하고 빠르게 위아래를 훑었다.
'아무리 봐도 이 늙은이가 가장 수상하단 말이지. 정말 감시자를 이자가 보낸 게 아닐까?'
그러나 무언가 떠 볼 틈도 없이 조의원이 홱 몸을 돌려 그의 진료실로 사라져 버렸다.
"..."
소리 없는 적의를 마주하자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못했다.
그러나.
"의원님, 총군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인의 안내로 제갈영영이 들어온 순간 유성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제갈영영의 입가에 걸린 부드러운 미소를 마주하자 꼬장꼬장한 늙은이에 대한 생각은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어서 오십시오, 총군사님."
"이게 얼마만인가요."
어제의 일은 둘만의 비밀로 남기기로 했다.
최소한 개방도의 정체를 모르는 그녀는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유성도 제갈영영의 미소를 마주하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서로를 마주 보고 같은 미소를 짓던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쿡."
듣는 귀가 있을 수 있기에 서로 조심하고 있으나 둘은 모두 어제의 일을 떠올린 것이다.
딱 하루 유성의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을 뿐인데 부쩍 가까워진 기분이다.
싱그러운 아침이다.
그녀의 두통 치료가 끝난 후, 둘은 얇은 책자를 교환했다.
각자 진법과 수학 지식이 담긴 책으로 아침마다 교환하기로 한 것이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참, 그리고 머지 않아 무림맹에서 직접 실력 좋은 의원님을 모시는 시험을 칠 거예요."
"무림맹에서 직접이요?"
"네. 아무래도 낙양 의방의 경우 무림맹 직속이 아니니까요. 누가 며칠 휴가라도 써버리면 맹의 무사들이 의방에 방문했다가 헛걸음질 할 수도 있잖아요. 며칠 전 회의에서 통과되었고 지금은 실무진들이 논의중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슬쩍 웃었다.
아무래도 그의 손길을 가장 필요하는 제갈영영이 통과시킨 안건인 것 같다.
"그런데 그런 걸 저에게 말씀해주셔도 됩니까? 아직 무림맹 내부 사정일 텐데."
"글쎄요. 아마 백의원님도 적당한 시기에 전달 받으시는 셈일걸요? 그럼, 믿을게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가 버렸다.
'뭘 믿는다는 걸까?'
유성은 머지않아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잠시 휴식 시간이 되자마자 차의원이 쪼르르 달려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백의원! 내가 좋은 소식을 가져 왔네. 아니, 글쎄 무림맹에서 직접 의원을 뽑을 계획을 가지고 있다지 뭔가. 급여도 아주 좋아. 다른 의원들도 각자 가진 인맥을 통해 알게 된 것 같네. 다들 모여서 그 이야기야."
"그렇군요. 차의원님도 지원하실 겁니까?"
"음... 아마 난 안 하지 싶네. 그런데 양의원님이 아주 큰 관심을 가지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네."
"양의원님이요?"
"그분이 좀 그런 게 있네. 스승님의 명예를 드높여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있으시거든. 무림맹 직속이면 아주 명예로운 자리라고 생각하실걸세."
"뭐 어떻습니까? 한, 두 명만 뽑지도 않을 테고."
차의원이 표정을 굳혔다.
"일단 한 명만 뽑는다더군."
"...그렇게 적게요?"
"시범적으로 한 명을 뽑아 운영해 보고 괜찮으면 인원을 늘릴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해. 사실 그래서 내가 포기한걸세. 괜히 지원했다가 양의원님이나 자네에게 밀려났다는 소리나 들을 거 아닌가?"
한 명만 뽑는 자리.
믿는다는 제갈영영의 마지막 말.
'이거, 꼭 합격하라는 소리였네.'
잘 됐다.
안 그래도 유성은 낙양 의방을 벗어나 무림인들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리를 바래 왔다.
무림맹 직속 의원이 되는 것은 최상의 시나리오다.
각오를 다지는데 차의원이 슬쩍 말했다.
"난 자네가 양의원님보다 잘할 거라고 믿네. 그리고... 혹시 무림맹 내 의원을 늘려야 한다면 나를 제일 먼저 고려해주게. 큼."
역시 차의원이 굳이 찾아와서 소식을 전해 준 이유가 있었다.
"아직 된 것은 아니지만, 만약 합격한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고맙네!"
차의원은 유성에게 인사하고 이번에는 몰래 양의원을 만나러 갔다.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 진료를 개시한 유성은 괜히 양의원이 신경 쓰였다.
하인에게 슬쩍 진료실마다 대기인원 상황을 물었다.
"양의원님의 대기 줄이 백의원님보다 약간 긴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낙양 의방을 찾는 자들은 대부분 부유했다. 심각한 질병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양의원 역시 의선에게 직접 배운 여러 치료법을 가지고 있으니 뛰어난 솜씨로 환자들을 보고 있다.
유성의 명성이 높아지고 있으나 기존에 양의원만 찾던 자들은 쉽게 담당 의원을 바꾸지 않았다.
'시험이 어떤 방식으로 치러질지 모르겠지만 꼭 합격해야 한다.'
효과적으로 신성력을 늘리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무의식 속에는 제갈영영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약간 있었다.
***
낙양 의방 의원들의 위상은 두 가지에 따라 좌우된다.
얼마나 많은 환자들이 찾는가, 그리고 얼마나 대단한 환자들이 찾는가.
지금까지는 그 두 가지를 양의원과 조의원이 적절히 나눠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조의원이 맡고 있던 환자들 중 많은 수가 양의원과 백유성에게 옮겨 갔다.
양의원이냐, 백의원이냐.
누가 더 뛰어난 의원인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오늘, 예진실의 종학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가진 사람을 맞이했다.
"소승은 정해라고 하오."
"소, 소림사의 방장님이 아니십니까?"
"그렇소. 백유성 의원님과 할 이야기가 있어 찾아왔소만..."
"백유성 의원님은 제 십일 진료실에 계십니다. 마침 마지막 환자분이 진료 받는 중이니 지금 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고맙소."
소림사 방장을 처음 만나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종학진은 옆의 동료에게 물었다.
"백의원님이 정말 대단하시긴 하군. 총군사님, 척마대주님에 이어 소림사 방장님까지 찾아오시는 분이 되다니. 시험에 합격해 처음 여기 들어오셨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 전혀 몰랐네."
"그러게 말일세. 그나저나 소림사 방장님이 찾아오셔서 나눌 이야기라는 게 도대체 뭘까?"
***
정해 대사가 유성을 찾아온 용건은 간단했다.
"백 시주 덕분에 결국 대환단 연단에 성공할 수 있었소.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축하드립니다. 초산과 제 노력이 헛되지 않았군요."
"그렇소."
정해 대사는 여러 이야기해주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대환단의 약효가 기존보다 무려 이할이나 더 뛰어나다는 점.
아마 신성력으로 키운 화령초의 효과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혜강이 대환단 없이도 초절정 고수가 되었다는 말에는 유성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혜강이 말하길 벽을 넘을 수 있던 것은 모두 백 시주 덕분이라고 했소. 혜강도 직접 오고 싶어 했으나 거추장스러울 것 같아 혼자 오게 되었소."
"저는 특별히 한 게 없습니다만 어쨌든 축하드릴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정해 대사가 꺼낸 것은 귀한 목재로 만들어진 작은 목함이었다.
"..."
유성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목함을 열어 보았다.
표면에 붉은 기운을 머금은 단약이 은은한 약재 향을 품은 채로 그 안에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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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 대사가 빙그레 웃었다.
"짐작하겠지만 이번에 완성된 대환단이라오. 이걸 백 시주에게 드리고 싶소."
대환단은 무림인 누구나 섭취하기를 원하는 영약이다.
이할 개선된 효과가 아니더라도 무려 일갑자의 내공을 늘려주는 최고의 영약이며 심각한 내상에도 상당한 회복 효과를 발휘하는 요상단이기도 하다.
만약 강호에 한 알 풀리기라도 하면 피바람이 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귀한걸 제가 받아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을 지키기는 했으나 백 시주가 아니었다면 이번 대환단 연단은 결국 실패로 끝났을 것이오. 혜강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주어 장로들을 설득할 수 있었소."
"혜강 스님이요?"
"고약한 것이 소승에게도 정확히 말하지 않아서 내막을 모르겠으나 대환단이 가장 뛰어난 요상단임을 꼭 강조해 달라 부탁하였소."
"..."
정해 대사도 눈치채지 못했으나 유성의 원래 경지를 알고 있는 혜강이다.
게다가 대환단 없이도 벽을 넘을 수 있는 깨달음을 준 유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혜강이 나선 것이다.
유성은 그 사실까지는 몰랐지만.
'다친 단전을 치료할 때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나보구나. 마음이 고맙다.'
산산조각이 난 단전을 대환단으로 치료할 수는 없다. 하지만 먼 훗날 신성력으로 단전을 고치게 되면 순식간에 일갑자 이상의 내공을 쌓을 수 있기에 아주 요긴할 것이다.
물론 지금, 이걸 받아서는 안 된다.
지킬 힘이 없는 보물은 화가 될 뿐이다.
"혹시 이 대환단을 잠시 소림사에 맡겨두어도 되겠습니까? 곧바로 섭취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물론이오. 지금 섭취하지 않을 거라면 소림에 맡겨두는 편이 안전할 것이오. 언제든지 소림사를 찾아오시면 대환단을 내어드릴 테니 백 시주는 아무 걱정하지 마시오. 대신 10년 안에는 방문해 주셔야하오. 대환단의 보존 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오."
10년.
그때까지 갈 생각은 없다.
기필코 그 전에 단전을 복구할 것이다.
***
살문의 살수 시절에는 덜 했으나 과거를 청산하고 십년간 자유인의 삶을 살아온 오자성은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해졌다.
미래를 약속한 여인도 생겼다.
세달간 그를 보살펴 주었던 조의원에게 한 약속이 아니었다면, 다시 살행을 나설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처음 조의원에게 유성의 암살을 위해 한 달의 시간을 약속했을 때 구할의 가능성을 매겼다.
'나머지 일할은 철저한 조사를 통해 채운다. 성공 확률이 십할에 가까울 때 살행에 나서는 거다.'
암살 뿐 아니라 무사히 도망치기까지 포함된 성공률이다.
살문 소속일 때는 목표물 조사가 수월한 편이었다.
개방이나 하오문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살문 역시 쓸 만한 정보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하는 지금, 오자성은 한 달이라는 시간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벌써 별다른 소득 없이 상당한 시일이 흘러버렸다.
백유성에 대한 조사가 닷새 정도면 충분하리라 여겼으나 구파일방 중 하나인 개방이 개입해 버렸으니까.
'고작 의원 하나를 위해 개방이 왜 저렇게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다는 말인가.'
살문이 건재했다면 소운과 유성의 관계를 알아차렸을 수 있으나 오자성 혼자서는 거기까지 여력이 닿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미 개방이 자기 존재를 알아차리고 정체를 밝히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래서 더 신경 써서 변장하고, 감시 장소를 수차례 변경하고,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재빨리 자리를 피하는 방식으로 유성의 주위를 맴돌았다.
'빈틈은 반드시 생긴다.'
마침내 그 기회가 찾아왔다.
유성이 제갈영영에게 진법을 배우고 이레가 흘렀을 때였다.
"개방도들은 모두 모여라! 지원이 필요하다!"
개방의 고위층으로 보이는 자가 들이닥쳐 주변의 개방도들을 싸그리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은 쑥덕이더니 황급히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 버렸다.
"..."
오자성은 신중하게 자리를 지켰다.
며칠간 끈질기게 지켜본 바로, 현재 유성의 집 안에는 목표밖에 없다.
그런데 한 명도 빠짐없이 개방도들이 자리를 비운 것은 함정일 가능성도 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복면을 잘 쓰고 있는지 점검한 후, 슬쩍 은신을 풀었다.
무너진 담벼락의 그림자가 스르륵 움직이더니 사람의 형체로 변했다.
주위의 반응이 없다.
오자성은 칼을 빼 들고 백유성의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이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니, 정말 철수했다는 말인가?'
다른 기척이 느껴지면 언제든지 몸을 빼낼 준비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개방도가 모두 철수했다고 확신한 그는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다행히 조의원에게 십년 전 진 빚을 갚을 수 있겠구나.'
이미 유성이 잠들어 있을 만한 시간이다.
퇴로로 생각해 둔 경로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마당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간 오자성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군. 밖에서 볼 때는 집이 작아 보였는데 왜 이렇게 방이 크게 느껴지는 거지?'
가구 하나 없는 커다란 방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쨌든 방이 한 개 더 있다.
옆방의 문을 열자 아까와 똑같은 방이 하나 나왔다.
유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분명 방이 더 있을 만한 크기가 아님에도 똑같은 위치에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오자성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가 방문을 연 곳에는 같은 방이 한 개 더 나왔다. 여전히 문도 달려 있다.
"..."
실제로 겪어본 적은 없으나 분명 과거에 교육받았던 현상이었다.
'내가 지금 진법에 갇혀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누가 진법을 설치해 두었단 말인가?'
처음 들어왔던 출입문은 사라진 후였다.
교육받은 바에 의하면 진법을 설치하는 것은 파훼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고 특수한 기관으로 설치한 것이 아니라면 사나흘 이상은 지속되지도 않는다.
그럼 도대체 누가 진법을 설치했고 자신을 가둔 것인지 오자성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감시 결과 며칠간 유성의 집을 드나든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목표를 제외하고는.
그때였다.
돌연 허공이 찢어지며 그곳에서 칼날이 하나 불쑥 튀어나왔다.
'헉!'
오자성은 가까스로 몸을 틀어 피해냈다.
칼날은 다시 허공을 격하고 사라져 버렸다.
방 안에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고요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칼날이 또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상당한 수준의 진법이다. 진법 안에 가둬놓고 일방적으로 공격을 휘두를 수 있다니, 필시 대단한 진법의 고수가 붙은 모양이다. 설마 제갈세가인가? 도대체 언제부터 이 집 안에 숨어서 나를 기다렸단 말인가?'
개방에게 꼬리를 잡힌 것이 문제가 된 모양. 그를 잡기 위한 함정에 보기 좋게 빠지고 말았다.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떻게든 진법을 파훼하고 빠져나가겠지만 그를 노리는 칼날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
그는 오랜 습관으로 살행에 나서면서 어금니에 매어둔 자결용 독단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것을 깨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삶의 의지가 강한 오자성이지만 독단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진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로잡히게 되면 어차피 죽은 목숨.
고문을 당하고 죽느냐 곧바로 죽느냐.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이다.
바짝 긴장한 복면 살수를 보며 유성은 진법의 효과에 흡족했다.
'열심히 배워둔 보람이 있었어.'
미리 설치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진법은 정말 유용한 기술이었다.
새삼 제갈영영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어디에서 칼이 날아올지 몰라 바짝 긴장한 살수의 근처를 맴돌며 기회를 노리다가 다시 칼을 휘둘렀다.
은둔진에 숨어 있다가 미로진 안으로 공격을 찔러 넣고, 다시 은둔진으로 몸을 숨겼다.
"컥!"
이번에는 공격이 유효타로 들어갔다. 살수의 팔에 깊은 검상이 남았다.
살수는 진법에 대한 기본 지식은 있는지 생문 쪽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유성의 공격에 피해가 누적되고 생문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그동안 이 살수 때문에 얼마나 귀찮았는지. 이제 발 뻗고 잘 수 있겠구나.'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개방도를 한 명도 빠짐없이 물리지 않았다면 유성은 오늘도 살수를 마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방도가 펄쩍 뛰었으나 진법을 한번 체험시켜 주자 살수의 뒤를 잡을 테니 진법에 숨어 절대 나오지 말라는 말과 함께 작전에 협조해주었다.
어쨌거나 살수는 일류 무인급의 경지에도 유성의 칼날에 점차 피해가 누적되어 제압당하고 말았다.
일방적인 공격이 이렇게 무섭다.
살수의 회피에 맞춰 점차 발전시켜 나간 검법도 도움이 되었고.
마침내 팔다리에 깊은 검상을 입고 쓰러진 살수에게 유성이 몸을 드러냈다.
살수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숨을 헐떡이며 유성을 노려보았다.
"그동안 주위를 맴돌아서 귀찮아 죽는 줄 알았다. 누가 보낸 거냐? 내가 죽을 만큼 원한을 산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대답은 없었다.
대신 살수의 입에서 은빛이 번쩍였다.
스르륵-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던 유성의 몸이 물 흐르듯 미끄러지며 옆으로 이동했다.
가슴을 노리고 쏘아진 은침을 가볍게 피해냈다.
"..."
말은 없었으나 살수의 눈빛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아 마지막 노림수였던 듯하다.
"발악은 거기까지다. 순순히 네 정체와 배후를 밝혀라."
오자성은 앞으로 자신이 자성객잔의 주인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로잡혀 고문받게 되면 결국에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죽거나, 버티다가 죽을 테니까.
어쩌면 살문의 잔당이라는 사실까지 드러날지도 모른다.
'결국 이렇게 삶을 마무리하는가.'
마지막 살행 실패로 그는 결국 지금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실행했다.
으적-
독단을 깨무는 것.
살수가 퇴로를 확보할 수 없을 때 스스로 삶을 마무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독단에서 흘러나온 독액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과거 장복했던 독과 반응하므로 오자성이 먹는다면 치명적인 극독으로 변한다.
당장 해독제를 먹지 않는다면 살아날 가능성은 없다.
'이제 끝이다. 내가 자성객잔의 주인이라는 정체는 밝혀지겠지만 의심 받을지언정 조의원이 배후로 지목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벌써 독이 피로 스며들었는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가슴 통증이 심해지며 시야가 흐려진다.
'이제 안녕이다.'
세상과, 그리고 미래를 약속했던 연인에게 작별을 고한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촤아악-
'뭐, 뭐야?'
잘 자다가 갑자기 얼굴에 물벼락을 맞은 오자성이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팔다리가 단단하게 결박되어 있다.
그가 고개만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두컴컴한 밀실.
잔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
날카로운 칼, 송곳, 집게, 망치 등 벽에 걸린 여러 고문 도구들.
처음 와보는 장소임에도 오자성은 이곳이 어딘지 유추할 수 있었다.
'심문실!'
독단을 깨물면서까지 피하고 싶었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난 분명 독을 먹었는데 왜 살아 있는 거지?'
마지막에 느껴졌던 가슴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저기 난 검상을 제외하면 그는 독에 전혀 중독되지 않은 멀쩡한 몸 상태인 것이다.
"자, 깼으면 이제 시작해볼까? 가볍게 이거부터 가 보자고."
벽에 걸린 도구를 집어 드는 남자를 보는 오자성의 눈빛이 사정없이 떨렸다.
***
"대단하십니다, 백의원님. 정말 혼자 살수를 잡으실 줄이야. 진법으로 시간만 끌어 주시면 저희가 해결해 드릴 수 있었는데요."
"여태 호위까지 해주셨는데 거기까지 수고를 끼칠 수는 없지요. 개방에서 그동안 저를 지켜 주신 덕분에 살수를 잡을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분타주님께 감사하다고 꼭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제 그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무림맹에 의뢰 했으니 아마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조리 토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겁니다. 무림맹 심문실의 악명은 대단하거든요."
"부디 배후를 밝혀주십시오."
"걱정 하지 마십시오. 악독한 마두들도 심문실에 들어가면 버티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배후를 잡지 못하면 다른 살수가 찾아올 수 있다. 이번에 기필코 배후를 밝혀내야 한다.
'그런 게 있다고는 들었는데 정말 독단을 깨물 줄은 몰랐다. 마침 해독 스킬을 배운 상태라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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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립은 흔들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내려 놓았거늘, 다시 한번 헛된 희망이 피어나려 한다.
'심장이 멈춘 사람을 살려냈다라... 그게 정말이라면 한번 걸어볼 만 하겠지. 어차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정립은 그 길로 하인 하나를 불러 백의원의 진료실로 안내를 부탁했다.
하인은 그를 백유성의 진료실 앞으로 안내했다.
"안에 무림맹 무사분이 진료중이시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겠네."
정립을 안내해 준 하인이 돌아가려는 것을 백의원의 담당 하인 장칠이 붙잡았다.
장칠은 새로 생긴 화제거리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속삭였다.
"저분은 조금 전에 오셨다는 척마대주님이 아니신가? 혹시 저분이 직접 여기로 오고 싶다고 하셨나?"
"물론이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찌 조의원님 환자를 백의원님께 모셔왔겠나. 조의원님이 백의원님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걸 뻔히 아는데. 척마대주님께서 조의원님 진료실을 나오셔서 내게 여기로 안내해 달라 부탁하시지 뭔가."
"아, 거기서 나오셨나? 난 또 다른 분들처럼 알아보고 오신 줄 알고 설렜지 뭔가."
"설레다니?"
"그랬다면 조의원님이 길길이 날뛸 게 뻔하지 않은가. '백유성 이놈이 또 내 환자를 가로채! 가만두지 않을 테다!' 이렇게 외치면서 말일세."
"큭큭, 이 사람도."
남이 들을까 조심하며 먼 거리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훔쳐들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초인이라 불리는 사람이나 훔쳐듣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나 마침 이 자리에는 화경을 목전에 두고 있는 초절정 고수가 있었다. 초절정의 경지는 능히 초인이라 불릴 만 하다.
'그렇게 된 일이었군. 천하의 척마대주가 의원들의 정치질에 이용당하는 신세가 될 줄이야.'
조의원의 깍듯한 태도에도 왠지 모를 찜찜함이 느껴지더라니 그가 무언가 목적을 이룰 속셈으로 자신을 백의원이라는 자에게 보낸 것이다.
정립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조의원에게 죄를 물을 생각은 없었다. 다른 의원을 추천하는 권유 자체는 문제가 없으니 일을 키워 봤자 마지막에 추한 모습만 남길 뿐이다.
회의감을 느낀 정립은 발걸음을 돌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기다렸다.
강력한 진통제만 처방 받고 미련 없이 돌아갈 생각이었다.
진료실 너머로 살짝 보이는 백유성의 얼굴이 무척 젊어 그런 생각은 더 커졌다.
'심장이 멈춘 사람을 살려냈다니, 그것도 거짓일 가능성이 높겠구나. 역시 나는 정치와 맞지 않는다. 아무 생각할 필요 없이 마를 멸하는 척마대주의 자리가 제일 어울리는 자리였지.'
자기 삶을 돌아보던 정립은 곧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대기 중인 환자들이 대화하는 소리였다.
"자네가 귀에 피딱지가 생길 정도로 칭찬해서 왔는데 정말 믿어도 되는 거겠지?"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내가 직접 그 자리에 있었단 말이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도저히 믿을 수가 있어야지. 어찌 사람이 죽은 사람을 살려낸단 말인가?"
남자 중 하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는 백의원님께 치료 받고 나서 날 형님으로 모실 준비나 하게."
혼자 온 환자들도 있지만 지인과 함께인 환자들은 저마다 백유성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짓이 아니었단 말인가?'
정립의 가슴에 파문이 일 무렵, 안에서 치료받던 환자가 나왔다.
그는 가슴 어림을 어루만지며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정립이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뺨에 긴 검상이 남아 있는 상대가 먼저 깜짝 놀라 인사했다.
"엇! 대주님, 이게 얼마만이십니까!"
제일 먼저 진통제를 확보하기 위해 의방으로 먼저 왔기에 척마대 부하도 그가 폐관을 끝낸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대련중 내상을 입어 방문했습니다. 한 달은 족히 걸릴 내상이 거의 다 나았습니다. 사나흘만 다스리면 완치될 것 같습니다."
정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정도의 내상이 벌써?"
내상은 요상단이 없다면 아무리 가벼워도 족히 일주일은 정양해야 한다. 그러나 외상에 효과적인 금창약이 구하기 쉬운 것과 달리 좋은 요상단은 극히 드문 편이다.
"백호단주가 이 의원이 용하다고 다치면 꼭 가보라고 신신당부 하던 통에 한번 와봤는데 정말 신기합니다. 안 그래도 한번 대주님께도 진료를 권해볼까 하던 중이었는데, 벌써 백의원님의 소문을 들으신 모양입니다."
자신이 믿는 부하 역시 극찬을 하니 백유성에 대한 정립의 신뢰도가 조금 올라갔다.
'어쩌면 완치는 힘들더라도 얼마간 생명 연장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만약 1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시 전력으로 화경의 벽에 부딪혀 볼 만 하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일단락 되자 앞에서 대기하던 하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들어가실 수 있겠습니까?"
"아, 내가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군. 미안하네."
유성은 방금 치료를 마치고 나간 환자가 진료실 앞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또 무림맹 무사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진료실로 들어서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비록 내공을 잃어 기세를 읽어낼 수는 없으나, 남자의 자세나 몸을 단련한 흔적들이 대단한 무인임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가 빙의하고 나서 본 사람들 중 제일가는 고수로 추정되었다.
'여러 절정 고수들을 봤지만 저자는 그보다 윗줄의 고수로 보인다. 분명히 이름 높은 자일 거다.'
"정립이오."
대단한 무인이라는 정보에 정립이라는 이름을 듣자 유성은 그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척마대주님이셨군요."
"그렇소. 잡설은 치우고 본론만 말하겠소."
성격이 급한 사람이거나 아주 바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시지요."
"나는 몇 년 전에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악성종양이 온몸에 퍼져 있다는 진단을 받았소. 다른 의원들은 모두 나를 치료할 수 없다고 했소. 지금도 극심한 통증이 내 몸을 갉아 먹고 있소."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성을 보며 잠시 뜸을 들인 정립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대가 심장이 멎은 사람도 살려낼 정도의 명의라고 들었소만, 내 병도 치료할 수 있겠소?"
유성의 머릿속은 이미 팽팽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몸 안에 생긴 악성종양은 현대의 병명으로는 '암'이다. 이미 온몸의 장기로 전이가 된 상태로 수년이 지났다면 척마대주는 아마 한계에 달해 있을 것이다.
최근 많은 환자들을 받는 유성도 암을 치료해 본 경험은 없었으나 자신은 있었다.
신의 힘으로 행해지는 치유는 질병에 한해서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온몸에 전이 되었다면 신성력의 양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지. 지금도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완치보다는 자연 치유가 가능한 수준으로 아껴쓰고 있는 상황이니.'
차분한 듯 보이나 일말의 초조함이 깃든 정립을 보며 유성은 그를 기필코 치료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대체로 무림인들을 고쳐주었을 때 신성력이 크게 상승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대단한 고수라면 치료에 성공하면 큰 폭의 신성력 상승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
치료 방법까지 구상해 본 유성이 생각을 마치고 말했다.
"진맥을 하고 자세히 살펴봐야겠지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진심이시오?"
"먼저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순순히 손목을 내준 정립의 맥을 짚은 유성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희미하고 난잡한 맥 상태에 심각해졌다.
'마치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하구나. 아마 이자는 지금도 강력한 내공과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버티고 있음에 틀림없다. 치료에 필요한 신성력 소모도 대단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소모값은 더 커지겠지.'
정립은 유성의 표정이 굳자 희미하게 타올랐던 희망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역시 무리군.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았소. 강력한 진통제를 처방해주시오. 며칠만 버티면 되니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소."
이것으로 되었다. 소중한 시간을 얼마간 허비한 셈이 되었지만 진통제를 받을 수 있다면 마지막 소임을 마무리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유성은 진통제를 처방해주지 않았다.
"척마대주님, 살고 싶으시면 제 말에 철저히 따라주셔야겠습니다. 시침을 할 터이니 저쪽에 누워주십시오."
"...!"
"어서 누우십시오. 한시가 급합니다."
초절정 고수가 되어 척마대주가 된 후로 자신을 향해 이 정도로 강력한 명령조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직속 상관인 무림맹주 또한 부탁조로 명령을 하달하거늘.
하지만 정립은 유성의 눈빛에서 확신을 엿보았다. 무엇에 대한 확신인지는 곧 알게 되리라.
유성은 정립이 한동안 자신을 빤히 바라보다가 자리에 눕는 것을 보고 안도했으나 고비는 아직 남아 있었다.
유성이 몸 내부까지 찔러 넣을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된 젓가락만한 장침을 집어 들었다.
"설마 그것으로 침을 놓는 것이오? 침은 혈자리에 놓는 것이 아니오?"
"악성종양은 너무 많이 퍼져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치료하기 어렵습니다. 저만의 비법이니 믿어 주시지요."
"...알겠소."
모든 것을 내맡긴 정립의 눈이 감기는 것을 보고 유성은 젓가락만한 장침을 가슴 한가운데에 찔러넣었다.
피부, 피하조직, 근막, 늑간근, 흉막 순으로 뚫고 들어간 침을 통해 유성이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신성력을 통제하자 내부 장기의 형태가 마치 CT라도 찍은 듯 머릿속에 그려졌다.
다른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찔렀을 때와 비교해 보면 척마대주의 장기 상태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단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이 암 조직이 전이 되어 있었다.
'역시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구나. 급한 불부터 꺼야겠다.'
치유 스킬이 발현되었다.
***
"아니, 그게 정말인가?"
"차의원님, 이미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분명 치료를 시작했다고요."
차의원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납득이 안 되어 그러네. 정말 척마대주님의 병을 고칠 수 있단 말인가? 자네는 모르겠지만 몇 년 전에 척마대주님이 다녀가신 후 낙양 의방의 의원들이 모두 모여 척마대주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 논의했었네. 양의원님은 의선께 서신까지 보냈었지. 그러나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척마대주님이 대성을 이루길 응원해주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었네."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연거푸 유성에게 척마대주의 치료 가능성에 대해 물은 차의원은 슬그머니 본심을 꺼냈다.
"그럼 혹시... 어떤 방식으로 치료하는지 들을 수 있겠나? 자네는 이미 심장 압박 비법에 대해서도 모든 사람에게 알려 준 적이 있지 않은가?"
유성은 양심 없는 차의원에게 눈을 흘겼다.
심폐소생술에 대해 알려 준 적이 있지만 이번 치료법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 외에 아무도 따라 하지 못할 거로 생각했고.
그러나 나중에, 그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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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맹의 심문실은 악명이 자자하다.
흉악한 마두도 그 안에 들어갔다가 며칠만 지나면 제발 살려달라고 빌면서 아는 바를 모조리 털어놓는다.
동료 고문 기술자가 먼저 살수를 심문하러 들어간 후, 다른 고문 기술자 부령은 나중에 동료와 교대를 해야 하니 의자에 기대어 푹 쉬고 있었다.
기술자끼리 교대하며 대상을 한숨도 재우지 않고 고문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사람은 잠을 자지 못하면 미칠 듯 괴롭기 때문이다.
안에 있는 자는 살수로 의심되는 바, 고문에 대비한 훈련도 받았을 수 있다.
꽤 장기전이 될 수 있어 휴식을 취하던 중.
누군가 다급하게 그를 찾아왔다.
'또 누군가 잡혀 왔나?'
문을 열어 준 부량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평소와 달리 옷이 살짝 흐트러진 미녀가 질문을 쏟아 낸 것이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난밤에 백유성 의원님 댁을 침입한 살수가 안에 있다고요?!"
아침에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온 제갈영영이었다.
"엇, 총군사님이 여기까지 어떻게... 네, 개방에서 넘겨준 자입니다. 지금 심문중에 있습니다."
"백의원님은, 무사하신가요?!"
제갈영영이 초조함이 깃든 표정으로 물어오자 부량은 아는 대로 이야기했다.
"살행에 실패한 놈이라고 넘겨받았으니 암살 대상의 목숨에는 지장 없는 모양입니다."
"다친 곳은요?!"
"그것까지는 저도 잘... 뭐 조금 놀라셨을 수 있지만 며칠 푹 쉬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아, 안 돼...!"
제갈영영은 오늘 유성의 휴무로 그의 무사함을 확인하지 못했다.
'정말 살수였다니! 내가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설마 많이 다치신 건 아니겠지?'
오자성이 살행을 위해 담을 넘은 시각은 새벽.
미리 살행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평범한 사이로는 옆에 있기 힘든 시간이었다.
다시 경신법을 펼쳐 뒤돌아 달려가는 그녀를 부량이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을 때.
심문실을 찾아온 다음 사람이 있었다.
그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중년인이었다.
"헉,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과거 살문이 멸문하며 살수들이 대거 잡혀 왔을 때조차 얼굴 한번 비추지 않은 자였다.
너무 많은 일거리에 그의 부대에서 심문을 좀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전혀 관심조차 가지지 않던, 이제는 화경의 경지에 오른 척마대주가 직접 찾아온 것이다.
'이 살수놈이 도대체 누구 목숨을 노린 거란 말인가!'
부량은 바짝 긴장했다.
마두가 척마대로 끌려가면 심문실보다 더 심하게 훼손된 형체로 죽어 나온다고 들었다.
흠 잡힐 수는 없었다.
"수고가 많네. 살행에 실패한 살수를 심문중이라지? 배후는 알아냈나?"
"아, 아직 입니다. 조금 전에 인도 받아 막 시작한 참입니다."
"그렇군. 배후가 나오면 꼭 내게 알려주게. 그리고 살수놈은 가급적 숨을 붙여 척마대로 넘겨주면 좋겠군."
척마대주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살기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에도 부량은 오금이 저려왔다.
"반드시 숨을 붙여 놓겠습니다!"
정립이 돌아간 후 부량이 잠시 숨을 돌렸다.
'척마대주님이 살수에게 원한이 깊으신가 보군. 심문하여 정보만 캐낸 후 목숨을 붙여 인도해야겠다.'
쿵쾅대는 소리에 부량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또 누가 찾아온단 말인가? 심문실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아온 적이 거의 드물거늘...'
다음으로 찾아온 자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나타난 중년인이었다.
"이런 찢어 죽일 놈이 있나!"
그는 몹시 흥분한 모양이었는데 막 심문실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단주님도 오셨군요."
"내 이놈을 그냥!"
칼을 뽑아 들고 심문실의 문을 잡아당기려는 그를 부량이 필사적으로 막았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백호단주님! 지금 배후를 밝히는 중입니다!"
다행히 부량의 만류에 그는 이성을 되찾았다.
"요즘 의원님 덕에 좀 살 만해졌더니 어디서 이런 살수 나부랭이가 나타나서는!"
씩씩거리던 백호단주가 흥분을 살짝 가라앉히고 말했다.
"배후가 밝혀지면 내게 꼭 말하게. 혹시 맹에서 나서지 않는다면 내 친구들이라도 불러 가만두지 않을 테니.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일단은 돌아가시지요, 단주님."
"에잇, 오늘은 기분도 별론데 술이나 한잔 해야겠군."
참고로 백호단주는 어제도 술친구들과 거나하게 술판을 벌였다.
그 후로도 부량은 숨 돌릴 틈 없이 찾아오는 여러 무림맹 인사들의 방문을 받아야 했다.
모두 유성에게 신세를 진 적 있는 자들이었다.
'그 의원 인맥이 보통이 아니구나!'
***
같은 시각, 유성은 휴무일을 맞이하여 낙양에서 제일 큰 서점으로 향했다.
천하의 대도시 중 하나인 낙양은 기본적인 서책부터 진귀한 서책들이 거쳐 가는 곳이다.
많은 사람이 서점에 와서 원하는 책을 사가고는 했다.
유성도 같은 의도였다.
빈민가에 가서 환자들을 치료해주기 전, 새로운 의서가 나왔는지 보고 구입할 생각이다.
며칠 전, 무림맹에서 '의각'의 의원을 한 명 뽑겠다고 공표했다.
직위는 임시 각주.
상황을 봐서 아래에 의원들을 더 뽑으면 정식 각주가 될 수도 있다.
명성을 얻고 싶거나 큰돈을 벌고 싶은 의원들이 앞다투어 관심을 보이는 자리다.
대단한 명성을 얻은 의선이 굳이 찾아오지는 않겠으나 다른 의원들은 얼마든지 명성을 노리고 그 자리를 노릴 수 있다.
당장 낙양 의방만 해도 양의원이 의각 시험을 본다고 선언한 상태.
유성도 시험에 대비해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모든 시험이 실기로만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낙양 의방에 들어올 때도 그랬고 필기와 실기 점수를 함께 매긴다.
유성은 이론만큼은 양의원에게 절대 앞선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기본 의서들을 통해 의술을 익혔기에 의가에 내려오는 더 좋은 처방들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 새로운 의서 없으려나...'
가지런히 꽂힌 책도 있고 누군가 보고 대충 쌓아둔 책도 있었다.
그곳들을 샅샅이 뒤진 끝에 유성은 마침 본 적 없는 제목의 의서를 발견했다.
기쁜 마음으로 훑어보았으나 돌아온 것은 실망감 뿐이었다.
'이건 다른 의서들에 나온 처방들을 짜깁기 해서 책의 이름만 바꾼 거네. 얌체같네.'
대부분의 의서들이 그랬다.
간혹 몇 가지 새로운 처방을 발견하기도 했으나 큰 소득은 없었다.
마침 점원이 돌아다니길래 유성이 물었다.
"혹시 의서들은 이쪽에 있는 것이 다입니까?"
"그렇습니다. 찾으시는 게 없다면 나중에 다시 방문해주십시오. 하루에도 몇 번씩 책들이 오가기에 그때는 찾으시는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볼일을 마친 유성이 슬슬 빈민가로 떠나려는 찰나.
"백유성 의원님 맞으시죠? 꼭 뵙고 싶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되네요."
옥구슬이 굴러가듯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성이 돌아보았다.
'전에 본 여자인데...?'
차의원과 머리를 식히러 간 주루에서 무림학관 후기지수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 무리에 끼어 있던 여자가 유성을 보고 반가워하고 있었다.
열여덟 정도 되었을까?
팽지산과 진영호의 말해 일희일비 하던 다른 후기지수들과 다르게 줄곧 유성에게 눈을 반짝거리고 있어 인상 깊었던 여자다.
지적이고 얼핏 차가운 듯 보이는 제갈영영의 눈빛과 달리, 초롱초롱한 큰 눈이 인상적인 미녀로 푸른 무복이 잘 어울렸다.
"전에 주루에서 본 적이 있는 분이시군요. 무림학관 후기지수 분들과 함께 계셨던 것 같은데..."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저는 남궁유린이라고 해요."
여자의 이름을 듣자 유성은 문득 이곳이 게임 속 세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게임에서는 특별한 의도가 있지 않고서야 주요 등장인물은 미녀인 것이 국룰이다.
'예쁜 여자들은 대부분 이름있는 사람들일 거라는 가설이 맞았다. 그런데 검왕의 손녀였을 줄은 몰랐는데.'
배경도 남궁세가다.
생각보다 더 거물이다.
"남궁 소저시군요. 혹시 저에게 볼일이 있으십니까?"
그녀가 살짝 미소 지었다.
호감을 사기 위한 미소로 보였다.
"사실 전에 몇 번 낙양 의방을 찾아간 적이 있으나 그때마다 시간이 맞지 않아 뵙지 못했지요. 여쭤볼 것이 있어서 조만간 다시 찾아갈 생각이었답니다."
"그러셨군요. 혹시 어떤 것입니까?"
남궁유린이 물어볼 것으로는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긴 하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혹시 백 의원님은 제 오라버니에 대한 소문을 들으신 적 있나요?"
백유성의 스타트 포인트이자 고향 호남은 변방으로 취급받는 곳이다.
중앙 무림에서는 별로 대단치 않게 여기기 일쑤였고 누가 무척 뛰어나다더라, 하는 소문 정도는 헛소문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호남에서 아무리 뛰어나다고 소문 나 봤자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명성이 중앙까지 뻗어나가기 힘들었다.
반면 중앙 무림의 소문은 상행을 하는 상인들을 통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왔다.
그중 백 년 기재라는 남궁유현에 대한 소문도 당연히 있었다.
대단한 무재를 가지고 있어 검왕의 뒤를 이을 것이 확실시 되는 남궁세가의 미래!
그러나 유성이 낙양에서 생활하는 동안 추가로 들은 소문은 달랐다.
추가된 소문은 썩 유쾌하지 못했다.
"혹시... 크게 다치신 일을 말하는 겁니까?"
다른 소문을 말하는 거라면 실례를 범하는 꼴이 된다.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남궁유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오라버니는 살수의 암습으로 시력을 잃었어요. 제가 여쭤보고 싶은 말은, 혹시 백의원님이 오라버니를 치료해주실 수 있는지예요."
"..."
남궁유현은 절정 고수임에도 어릴 적부터 믿어왔던 하인이 살수로 돌변하자 암습을 피하지 못했다.
손에 무기도 없고 방심한 틈을 제대로 찔렸다고 들었다.
다친 와중에도 남궁유현이 살수를 해치우는 데 성공했으나 그 암습에서 눈에 검상을 입었고.
절대 단련할 수 없는,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눈에 검상을 입었으니 어떻게 되었을까?
'한순간의 방심으로 시력을 잃고 몰락한 천재 검사.'
그것이 남궁유현에 관한 가장 최근의 소문이다.
눈의 상태에 대해 전해 듣기만 해도 지금의 유성으로서는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기본 치유 스킬 수준으로는 곧바로 치료하지 않는 한 장애가 남은 상처를 치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자기 단전처럼.
유성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제 실력으로는 무리입니다, 소저."
"아... 그런가요..."
설마 유성이 남궁유현을 치료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걸까?
완전히 기대를 배신당한 것처럼 남궁유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시, 실례했어요."
고개를 숙인 채 인사하는 남궁유린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숙였음에도 얼핏 보이는 눈가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미녀의 눈물에 괜히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게다가.
'이 빌어먹을 게임이 버츄얼 판타지와 같다면 이 남궁유린이라는 여자도 뭔가 한 가닥 할 가능성이 높단 말이지.'
제갈영영과 비슷하게, 머리든, 무공이든, 금전적으로든 그녀는 원작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확률이 높은 것이다.
도움을 줘서 나쁠 것은 없었다. 여지라도 남겨두기로 했다.
상세한 방법만 비밀로 하면 된다.
이곳 사람들은 의술에 대한 지식이 뜻밖에 얕았고 영술과 같은 신비한 힘도 존재하는 곳이다.
"물론 지금의 제 실력을 기준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홱!
스쳐 지나가려던 남궁유린이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역시 눈가가 촉촉했다. 그녀는 유성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내왔다.
"혹시... 나중에는 치료가 가능하다는 말씀이신가요?"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분명 가능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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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유린은 검왕의 손녀로 많은 사람의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검왕의 핏줄은 하나같이 무재가 뛰어나니 분명 손녀도 대단한 무재를 가지고 있을 거야."
아버지와 오라버니 남궁유현 역시 뛰어난 무재를 자랑했으니 당연히 그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버지도 초절정 고수였으나 남궁유현은 정말 대단했다.
어릴 때부터 그에게 퍼부어진 지원에 힘입어 스물 둘의 나이에 절정 고수가 되었다.
당대 최고의 후기지수로 인정받은 것이다.
반면.
남궁유린은 훌륭한 무인이 되기에는 성격이 너무 유약했다.
"아무리 대련이라지만 수비하는데 급급해서 어찌 승리하기를 바라겠느냐? 우리 남궁의 검은 패검이다. 공세를 취하는 것이 최선임을 어찌 모르느냐?"
"..."
"유린아. 네 의지가 전혀 담기지 않으니 확신할 수는 없으나 너 역시 상당한 무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 이렇게 유약해서야 어찌 대성을 이룰 수 있겠느냐?"
할아버지인 검왕이 어르고 달래도 남궁유린의 성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을 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직계로서 무공을 배워야 하기에 배웠을 뿐이다.
무림학관도 으레 이름난 무가와 문파의 후기지수들이 거쳐 가는 곳이라 들어간 것이다.
빨리 학관 생활을 마치고 가문으로 돌아가 남궁유현의 뒤에 묻어가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다.
그러나.
남궁유현이 살수의 암습에 당해 폐인이 된 후.
그녀는 원치 않았으나 가문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유현이의 일은 안타깝지만 네 무재가 평범하지 않으니 천만다행이구나. 지금이라도 무공에 정진하도록 하여라."
존경하는 오라버니를 이제 쓸모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도, 무공에 뜻이 없는 자신에게 과한 기대를 하는 것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녀는 속으로만 끙끙 앓아왔다.
그때, 그녀는 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일침신의!
아직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만 장난스레 불리는 별호였으나 침 하나로 모든 병을 고친다는 신의의 등장이었다.
누군가는 말도 안 된다고 일축했다.
"의선이 지금의 별호를 얻게 된 것도 쉰살이 넘으신 후네. 듣기로 스무 살이라던데 그런 자에게 신의라는 별호가 가당키나 한 소린가?"
"하지만 그동안 굵직한 환자들을 치료해왔지 않은가? 듣기로 척마대주님도 잘 치료받고 있다고 하고."
아직 척마대주가 화경에 도달하기 전의 이야기다.
"흥,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지. 척마대주님이 속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만약 정말 그분이 화경에 올라 환골탈태를 이루신다고 해도 어차피 병이 자연 치유될 테니 치료가 효과가 있었는지 진실은 모르는 거고."
이제 약관의 청년을 쉽게 신의라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항상 천재들의 뒤에서 지냈던 남궁유린은 세상에는 상식을 뛰어넘는 천재가 있다고 믿었다.
'장난으로라도 신의라는 별호는 아무에게나 붙일 수 있는 게 아니야. 분명 백유성 의원님은 대단한 실력일 거야. 오라버니를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것이 남궁유린이 백유성을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이유다.
그리고.
"아직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고 기다려주십시오, 소저. 제가 더 실력을 키워 소저의 오라버니를 한번 치료해 보겠습니다."
백유성은 남궁유린이 꼭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흑..."
모두가, 심지어 의선조차 고칠 수 없다고 단언했던 오라버니의 눈이다.
유일하게 가능성을 언급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동안 남몰래 쌓아왔던 부담감과 마음고생이 터져 나오며, 간신히 참아왔던 남궁유린의 울음보가 터져 버렸다.
"..."
다른 상점에 비해 훨씬 조용한 편인 서점에서 다 큰 처녀가 울음을 터트리니 주위의 이목이 쏠렸다.
서러운 듯 흐느끼고 있는 십 대 후반의 미녀, 그리고 그 앞에 선 잘생긴 남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저, 저 쓰레기 같은-"
"하여간 얼굴 값-"
"아마 남자가 바람을 핀 것이 분명-"
거기까지만 듣고 유성은 재빨리 판단했다.
여기서 도망치는 것은 하수다. 유성의 얼굴을 아는 자들도 분명히 있을 테니 괜한 오해만 키우게 된다.
남궁유린을 달래서 사람들에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해명을 시켜야 한다.
"저, 소저-"
"이놈! 유린을 울리다니!"
커다란 외침에 돌아본 곳에는 서점의 문밖에서 팽지산이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성큼성큼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남자답게 생긴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어 꼭 성난 멧돼지 같았다.
"팽 소협이시군요. 오해입니다. 일단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오해는 무슨,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날 백호단주님만 아니었다면-"
"그만두세요, 팽 소협!"
시기 적절하게 남궁유린이 울음을 멈추고 끼어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또 마공이니 뭐니 헛소리를 하며 유성을 곤란하게 했을지 모른다.
"유린! 괜찮으냐? 우연히 지나가다가 내가 널 발견하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느냐."
팽지산은 그의 추종자들을 통해 남궁유린이 낙양 상점가에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고 열심히 찾아다니던 중이다.
우연한 만남. 좋지 않은가?
서로 마음이 있는(오해다) 두 남녀 사이를 더 가깝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서점 문 사이로 남궁유린을 발견하고 반가워 하던 것도 잠시, 그녀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열불이 났다.
상대는 공교롭게도 그에게 약간의 체면을 상하게 한 의원 나부랭이였다.
팽지산은 가문 어른들로부터 거침없는 성격이 참 하북팽가의 남자답다는 칭찬을 받고 자랐기에 그는 자기 행동에 항상 당당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유린을 울렸으니 저놈은 나쁜 놈이다. 저놈을 혼내준다면 유린도 내게 더 반하겠지.'
하북팽가의 남자들은 무식하고 경솔하다는 것이 정확한 세간의 인식이었으나 팽가의 남자들은 그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저는 백 의원님께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살짝 났을 뿐이에요. 괜히 죄 없는 백 의원님을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
살짝 눈물이 났다는 주장 치고는 남궁유린의 몰골이 말이 아니긴 했다.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이 가냘픈 턱에 맺혀 지금도 눈물방울로 변해 뚝뚝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발치에 후두둑 떨어져 있는 눈물들이 그 증거다.
"아니다. 애써 이 자를 변호할 필요 없다. 분명 널 기만하여 울린 것이 분명하다."
"정말 아니라니까요?"
"유린, 가만있어라. 내가 다 해결해 주마."
남궁유린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자기만의 주장을 펼치던 팽지산이 유성을 향해 주먹을 쥐며 호기롭게 외쳤다.
"내가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상대해 줄 테니 너도 남자라면 나와 대련을 하자! 이기는 사람이 유린을- 흠흠, 내가 이기면 넌 유린에게 엎드려 사과해야 할 것이다!"
정당한 대련이라면 아무리 백호단주라도 별다른 질책하지 못하리라는 나름의 계산이었다.
"..."
하북팽가의 권이라.
절정 초입의 도객이 주먹을 말아쥐며 호기롭게 외쳤으나 유성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는 조건에서 소림의 사대금강 혜강마저 이겨 낸 것이 그였다.
유성은 그때보다 더 발전했다.
소림 절예들의 묘리를 흡수했고, 절정 고수마저 내공 없이는 할 만하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유성은 이 대련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도 주루에서 쌓인 앙금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대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팽 소협은 왜 제 말을 안 들으시는 거죠? 제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씀 드렸나요?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났다고 분명 말씀드렸잖아요!"
어쩔 줄 몰라 하던 남궁유린이 소리를 빼액 질렀다.
"유, 유린. 난-"
"그동안 팽 소협이 아무렇게나 말해도 선을 넘지 않아 참아왔는데 저는 팽 소협의 이런 모습이 정말 싫어요! 사과는 팽 소협이 백 의원님께 하셔야해요!"
"이익...!"
없는 말로 남을 비난하는 데는 거침이 없어도 스스로 비난받는 것은 참지 못하는 사람인 듯하다.
남궁유린이 소리 지르자 팽지산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게졌다.
"..."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잘근잘끈 씹더니 유성을 노려보다가 뒤돌아섰다.
-유, 유린이 한번 편들어줬다고 기, 기고만장하지 마라. 원래 마, 마음이 여려 도, 동정한 것뿐이다. 그리고 다, 다시 내 눈에 띄면 주, 죽여 버릴 테니 처신 자, 잘해라.
한줄기 전음이 유성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기에 음성을 담아 상대의 귓가로 전달하는, 절정 고수만이 펼칠 수 있는 기예.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 절정 고수가 된 지 얼마 안 된 팽지산은 전음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여 음성이 뚝뚝 끊겼다.
'좀 모자란 녀석이었네.'
혼자 오해하고 혼자 상처 입고.
팽지산은 그렇게 추하게 떠나버렸다.
"죄송해요, 의원님. 많이 놀라셨죠? 팽 소협이 제가 우는 모습을 보고 큰 오해를 했나 봐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언제 팽지산에게 쏘아 붙였냐는 듯 그녀가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과했다.
"아닙니다. 남궁 소저가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아무튼 이야기는 끝난 것 같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일이 있어서요."
"아, 제가 바쁘신 분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요. 꼭 그날만을 기다릴게요."
"알겠습니다."
백 년 기재로 소문난 남궁유현.
남궁세가가 최종 보스가 아닌 한 그는 분명 도움이 될 사람이다.
유성도 꼭 치료하고 싶었다.
그렇게 남궁유린과 함께 서점을 나서는 유성 앞에 경신법을 펼쳐 달려온 한 여자가 멈춰 섰다.
즐겨입는 하얀 학사복이 흙먼지로 약간 더러워진 그녀는.
"총군사님?"
유성의 무사함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수소문하고 다니던 제갈영영이었다.
제갈영영의 시선은 제일 먼저 유성의 온몸을 훑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간밤에 큰일이 있으셨다고 들었는데요."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총군사님께 배운 진법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휴, 다행이에요. 혹시 큰 충격을 받아 푹 쉬셔야 하거나 그런 상태신가요?"
"전혀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건재한 유성을 보고 마음의 여유를 찾은 제갈영영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분은..."
얼굴은 모르지만 명가 출신으로 보이는 미녀.
그리고 사연있어 보이는 눈물 자국.
"총군사님, 처음 인사드려요. 저는 남궁유린이라고 해요."
약간 앳되어 보이는 얼굴처럼 목소리마저 곱고 부드럽다.
무림맹 총군사가 되어 두통에 시달리던 그녀는 목소리가 약간 날카롭게 변했다는 평을 들어 본 적이 있다.
그동안 별로 신경 쓰지 않았으나 왠지 모르게 오늘은 날카로운 목소리가 거슬렸다.
그녀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부드러움을 담아보았다.
"그렇군요. 두 분은 함께 무슨 일이신가요?"
제갈영영의 시선이 남궁유린에게 향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약간 시선이 따갑다고 느낀 남궁유린은 남궁유현을 치료하기 전까지 남들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는 유성의 당부를 기억했다.
"비밀 이야기라 총군사님께 말씀드릴 수 없는 점을 용서하세요."
"..."
제갈영영의 시선이 이번에는 유성에게 향했다.
'한서불침 특성이 고장 났나? 왜 오한이 드는 것 같지?'
유성이 가볍게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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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의 무사함을 확인한 제갈영영이 다시 급한 일을 처리하러 무림맹으로 복귀했다.
유성도 남궁유린과 헤어져 별 탈 없이 빈민가 봉사를 마쳤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소운과 만나 회포를 풀었다.
소운은 짧은 기간임에도 자세가 그럴듯해졌다. 열심히 무공 수련중임을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간다고 생각한 것도 며칠.
개방도가 유성을 찾아왔다.
"백의원님, 죄송합니다만 저번에 잡은 살수가 절대 배후를 털어놓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자성객잔의 주인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답니다."
"무림맹 심문실의 악명이 자자하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의지가 굳은 자였습니까?"
"사실 심문실에서 실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고문하여 정보를 얻어낼 때, 충분한 보상을 약속하는 편이 좋다.
물론, 살수 오자성의 처지에서는 편안한 죽음이 그 보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문실에는 과거 살문의 살수들에게 가족을 잃은 고문 기술자가 포함되어 있었고, 그가 오자성에게 해서는 안 될 말들을 흘려 버린 것이다.
"난 너 같은 살수놈들을 아주 증오해. 네가 여기서 모든 것을 털어놓던지 그렇지 않던지 내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난 네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는 것이 목표거든. 만약 네가 혹시 살문의 살수로 밝혀지면 네 연인도 죗값을 치르게 해주지."
광기에 가득 찬 고문 기술자가 털어놓은 말에 오자성은 꾹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고통스럽게 죽게 될 운명.
조의원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사랑하는 연인에게 혹시 해가 갈까 봐 모든 것을 혼자 떠안기로 한 것이다.
살수 시절 고문에 대비한 훈련도 받았기에, 그는 필사적인 의지력을 발휘했다.
뒤늦게 고문 기술자의 단독 행동이 밝혀져 그는 임무에서 배제되었으나, 오자성은 10년 전의 약속마저 지킬 정도로 심지가 굳은 살수였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고문에도 꾹 입을 다문 끝에 죽음의 순간이 찾아왔다.
모진 고문은 평생 지속 할 수 없다.
언젠가는 몸이 한계를 호소하게 되고 그 한계에 도달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
'견디기 힘들어 모든 것을 털어놓을 뻔한 위기의 순간도 있었으나 결국 난 이겨 냈다. 아마 길어야 하루 이틀안에 죽음을 맞이할 것 같구나.'
오자성은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 새끼, 웃어?"
고문 기술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그의 신체를 짓이겨도 그의 수고를 비웃어 줄 수 있는 여유마저 생겼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심문실의 문을 두드리자 고문 기술자가 바깥으로 나갔다.
'벌써 교대 시간이라도 된 건가? 이 고문 기술자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제 시간의 흐름마저 모르겠구나.'
곧 누군가 심문실로 들어왔다.
"...!"
오자성은 흐릿한 시야로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이곳으로 끌려오기 전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서 있는 형태만 보아도 알아챌 수 있었다.
자신이 이 꼴이 된 것도 결국 그를 죽이려다 실패한 것이었다.
"이 꼴이 되고도 아무것도 털어놓지 않았다지? 대단하네."
내 최후를 조롱하러 오셨소?
입을 열었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듣기로 네 연인도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도 받았다며? 그것 때문에 털어놓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
"..."
"뭐, 좋아.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그런데 난 네 자백이 필요해."
'많기는... 하루 이틀이면 난 죽을 텐데. 내 자백을 들으려면 지옥으로 찾아와야 할 거요.'
"네가 어떤 생각인지 짐작은 가. 조금만 버티면 될 거 같지? 아니야. 틀렸어. 내 조사를 해서 잘 알겠지만 난 의원이거든. 그런데 조금 특별해."
'어차피 내 몸 상태는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 없소.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알지.'
"감각이 많이 둔해졌겠지만, 그래도 좀 따끔 할지도 몰라."
오자성은 심문실 등불에 반사되어 빛나는 것을 보고 백유성이 꺼낸 것이 기다란 침이라는 사실을 유추해냈다.
'고작 침 하나로 뭘 어쩌겠다고.'
그러나 잠시 후.
기다란 침이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을 때, 오자성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
피가 들어찼는지 숨 쉬기 불편했던 것이 몹시 편안해졌고, 원인 모를 삐걱거림으로 머지 않아 죽게 될 거라 여겼던 몸에 활력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유성은 가슴 외에도 복부, 팔, 다리, 심지어 머리에도 침을 꽂았다.
"대체 무, 무슨 짓을...!"
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번에 또 내 얼굴을 보고 싶으면 계속 버텨. 어쩌면 평생 보게 될 얼굴일지도 모르니까 다음에는 반갑게 인사라도 하자고."
탁-
유성이 심문실을 빠져나간 후, 심문실 안에서는 괴성이 터져 나왔다.
"안 돼!!!!!"
유성은 먼저 나서서 적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명백한 적에게는 가차 없는 사람이었다.
고문 기술자들은 겉보기엔는 여전히 처참했으나 어느새 팔팔해진 오자성을 보고 의문을 가졌으나,
당분간 쉽게 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절치부심했다.
큰 위기를 넘겨 깨달음을 얻은 고문 기술자들의 기술이 더 발전했다.
깨달음 제조기 백유성은 오늘도 한 건 했다.
***
그로부터 채 사흘이 지나지 않아, 유성은 다시 개방도의 방문을 받았다.
그의 표정이 미묘했다.
전에 오자성이 배후를 밝히지 않았을 때는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오늘은 뭔가 주저하고 있었다.
"백의원님, 배후가 밝혀졌습니다."
"...!"
오자성이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이다.
버티면 죽을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진 그는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조의원이었습니다. 그가 살수에게 백의원님을 죽여달라고 사주했습니다."
무림맹의 여러 사람들이 알게 되었기에 백유성을 노린 살수가 있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진 상태다.
최근 들어 조의원의 표정이 시커멓게 죽어 있어 안 그래도 그를 의심하는 중이었다.
이제 그가 배후임이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확실한 거겠지요?"
"물론입니다. 심문실에서 여러 방법으로 심문하여 모든 정황이 일치함을 확인했습니다."
"...조의원을 감시하고 있다고 하셨으니 잘 아시겠지요. 그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어쩌면 오랜만에 살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금 전에 척마대가 나서서 조의원을 잡아갔습니다."
"네? 척마대가 왜요? 거긴 마두와 관련 있을 때만 나서던 곳이 아닙니까?"
"척마대주님이 조의원이 그동안 마교와 내통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고 했습니다. 철저히 조사하겠다며 잡아갔습니다."
"..."
"아 참, 살수도 척마대에서 데려갔습니다."
"..."
그 이후로 유성은 척마대에 몇 번 참고인 조사 목적으로 불려갔다.
그곳에서 유성은 처참한 몰골의 조의원을 만날 수 있었다.
조의원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유성을 보고 삶의 의지를 불태웠다.
제대로 걷지도 못 하는 몸으로 기어서 유성의 앞까지 기어 온 것이다.
"배, 백의원. 내가, 내가 미안했네! 제, 제발 나 좀 살려주게. 자네가 저, 저분들에게 한마디만 해주게. 자네 말이라면 척마대주님이 나를 살려주실 게 아닌가? 제발 부탁하네...!"
온 몸의 피부가 얇게 저며져 피칠갑한 그를 보고 유성은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가만 있는다고 만만하게 봤나보지? 우리 조의원님, 몸이 많이 상했네. 다음에 또 올 테니까 몸 관리 잘 하고 있으라고."
[치유]
겉은 놔두고 목숨에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로 내부만 신경 써서 치료해 주었다.
"다음에 또 오시겠습니까?"
"네, 당분간은 자주 오겠습니다."
척마대주의 물음에 그렇게 답한 유성이 떠났다.
그 이후로, 척마대와 유성을 제외하고 조의원과 오자성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한동안 낙양 의방이 시끌시끌 했다.
조 의원이 백유성을 죽이기 위해 살수를 불렀다는 소식을 들은 모두가 대경실색했다.
"조의원, 아니 그자가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같은 의방의 의원을 시기하여 살수에게 의뢰까지 하다니..."
"그놈은 환자 욕심이 너무 과했어. 전에도 내가 실수로 자기 환자 한번 끌여 들였다고 나에게 삿대질까지 하지 뭔가? 하마터면 멱살 잡고 싸울뻔한 적도 있네."
"자네는 운이 좋았군."
"운이 좋다니?"
"진짜 멱살이라도 잡았어봐. 조의원이 살수에게 자네 목이라도 따달라고 했을지 누가 알겠나?"
한 의원이 새파랗게 질려 자기 목을 매만졌다.
"듣고 보니 자네 말이 맞네. 역시 똥은 더러워서라도 피해야 하는 법이지."
"백의원은 인맥이 정말 대단하군. 조의원도 무림맹 내에 인맥으로는 한 가닥 하는 자인데, 듣자 하니 개방과 총군사님, 척마대주님까지 백의원을 도왔다더군."
"백의원의 실력이 워낙 뛰어나지 않은가. 난 그 나이때 뭐 하고 있었나 모르겠군."
"나도 마찬가지네. 그나저나 무림맹 의각의 의원은 누가 되려나? 양의원님과 백의원 둘 다 신청했다더군."
"양의원님이 그렇게 의욕을 불태우는 모습은 처음 봤네. 시험이 아주 어려울 거라는 이야기가 있어. 난 양의원님이 이길 것 같네."
***
한편, 유성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그녀는 상당한 기품을 갖춘 중년 여인이었다.
"저는 청강문의 문주 서완정이라고 합니다. 무림맹에 문의하여 들은바로, 살문의 마지막 살수를 잡아주신 분이 백유성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저 혼자 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10년 전, 제 지아비를 죽인 살수가 바로 이번에 백유성님이 잡아주신 자입니다."
"...!"
무림맹 심문실에서 오자성의 과거를 낱낱이 밝혀냈다.
오자성이 과거 한 절정 고수를 죽이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조의원이 그를 치료해주었다는 사실까지도.
서완정은 그녀가 그때 죽은 절정 고수의 아내이자 청강문의 현 문주임을 밝혔다.
"그랬군요. 부군의 일은 유감입니다."
"아닙니다. 진짜 흉수는 찾지 못했으나 그 살수라도 꼭 잡고 싶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백의원님 덕분에 원한의 일부나마 갚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찾아온 것은 약속한 현상금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현상금이요?"
"네, 저는 10년 전, 그 살수의 몸에 큰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이번에 백유성님이 그 살수를 잡아주지 않았다면 저는 부군의 원한 일부도 갚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을 겁니다."
서완정은 그녀가 곧 청강문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려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지아비를 잃고 문파 사정이 많이 어려워 져서 그때 약속드린 현상금을 현금으로 지급할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제 남편이 모아 놓은 골동품이 많으니 한번 청강문에 들러 주시기를 청하려고 합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아닙니다. 부군이 모아 놓은 유품인지라 손대지 않아 저도 다 파악하지 못했으나, 귀한 골동품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골동품 쪽으로 조예가 있으신 분을 모셔오셔도 되니 오셔서 적절한 보상을 얻어가시면 제 마음이 편안 할 것 같습니다."
유성도 돈을 좋아한다.
상당한 급여를 받고 있으나 그는 휴무일마다 무료로 빈민가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
신성력을 아끼기 위해 돈을 나눠 주고 약재를 사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므로 그다지 넉넉한 형편은 아닌 것이다.
마침 고생해서 오자성을 잡은 일도 있으니 현상금 명목으로 골동품 몇 점 챙기는 것은 괜찮은 기회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시간 내어 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성은 서완정이 돌아간 후 그의 인맥을 따져 보았다.
골동품에 조예가 있으려면 적당히 나이가 있는 편이 좋아 보였다.
차의원, 백호단주, 그 외 몇 명의 인맥들.
"그런 쪽은 전혀 모르겠소. 차라리 전문 감정사를 찾아가는 게 어떻겠소?"
조언을 받아 그래야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의외의 사람이 자신감을 드러냈다.
"골동품이요? 제 할아버지가 골동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으셔서 제가 좀 볼 줄 알아요. 같이 가드려요?"
"아닙니다. 무림맹 일로 여러모로 바쁘실 텐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날은 하나도 안 바빠요. 같이 갈 수 있어요."
유성은 아직 정확한 날짜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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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은 이와 유사한 상황을 현실 세계의 인터넷으로 접한 적이 있다.
'영화 보러 가자는 남자에게 언젠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그날 약속있다고 철벽치는 여자!'
그런데 반대의 경우를 당하게 되니 묘한 기분이다.
언젠지도 모르면서 시간이 많다고 하는 무림맹 총군사라니.
그녀가 꼭 같이 가고 싶어 하는 눈치라 유성은 그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골동품 이야기를 안 꺼냈으면 모를까 안 데려가면 가만 안 둘 기세인데 어떻게 거절해.'
며칠 후.
미리 약속을 잡고 유성은 제갈영영과 함께 청강문으로 향했다.
유성은 청강문이라는 문파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없었다.
이 세계에 빙의한 것도 5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과거에 이름 좀 날렸던 곳이 아니라 중소문파라면 애써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갈영영은 달랐다.
"원래 중소문파가 무림 문파로 먹고 살수 있는지 없는지는 절정 고수의 유무에 따라 갈려요. 절정 고수가 있다면 흥하고 절정 고수를 배출하지 못하면 힘을 쓰기 힘들죠."
호남에서는 절정 고수도 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생아임에도 절정 고수가 될 가능성이 높은 유성을 보고 그의 아버지가 끼고 돌았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
무림맹이 있는 대도시 낙양에서도 절정 고수의 위상이 상당한 듯했다.
"청강문은 원래 작은 표국도 운영하고 있었어요. 청강표국이 청강문의 기반이었던 거죠. 아마 전대 청강문주는 표국 사업을 하며 전국의 골동품을 모았나 봐요."
"청강표국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만."
호남에서 낙양으로 오면서 여러 표국의 신세를 졌던 유성은 표사들이나 쟁자수들의 대화에서 청강표국의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럴 거예요. 전대 청강문주가 죽은 후 낙양에서 서로 경쟁 관계에 있던 천영표국이 청강표국을 다 흡수했거든요. 아마 청강문이 어려워 진 것은 표국이 거기로 넘어가서 생긴 일일 거예요."
유성은 살짝 무서운 생각을 떠올렸다.
전대 청강문주가 살수에게 죽었다.
보통 그럴 때 용의자는 가장 큰 이득을 취하는 자가 되지 않던가?
들어 보니 천영표국이 제일 큰 이득을 본 듯했다.
천영표국은 그 후로도 꾸준히 몸집을 키워 중원에서 가장 큰 표국이 되었다고 한다.
제갈영영이 유성의 표정을 읽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 천영표국이 의심을 받기도 했는데,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어요. 무림맹에서 살문의 본거지를 찾아내 덮쳤을 때도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해요."
"그렇군요."
"미심쩍은 구석은 남아 있는데 이건 넘어가요. 이제 다 왔어요."
청강문의 외벽은 허름했다.
꾸준히 보수공사를 하는 대문파들과 다르게 오랫동안 보수하지 못한 흔적이다.
듣던 대로 형편이 어려운 듯했다.
문주 서완정이 마중을 나왔다.
무림 문파 치고는 무사들도 거의 보이지 않아, 슬슬 문파를 정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유성과 제갈영영에게 통성명 한 후 의아해했다.
"그런데 무림맹 총군사님은 무슨 일이신지요?"
"아, 오늘은 무림맹 일로 온 게 아니에요. 백 의원님이 저에게 꼭 골동품 감정을 부탁한다고 하셔서 감정사로 따라온 거랍니다."
"그러셨군요. 총명하시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골동품에도 조예가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보통 나이가 조금 있으신 분들이 좋아하는 취미시잖아요."
"저희 할아버지도 골동품을 모으는 고상한 취미가 있으셨어요."
둘은 골동품에 관해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성은 어리둥절했다.
그는 절대 제갈영영을 콕 집어 부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골동품에 대해 좀 아는지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고 그녀가 꼭 따라오고 싶어 데려온 것뿐이다.
'언제 인지도 모르면서 그날은 하나도 안바쁘다고 하면서 말이지.'
살수가 찾아온 이튿날, 제갈영영은 사색이 되어 서점까지 유성을 찾아온 적이 있다.
유성이 휴가를 쓰고 소림사에 다녀오는 동안 애타게 그를 기다린 제갈영영을 보면 자신이 무사한지 꼭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번 골동품 감정을 위한 청강문 방문도 그런 의미로 봐야 한다.
아마 그녀는 또 있을지 모르는 암살 시도에 대비하여 유성이 외부 활동할 때 딱 달라붙기로 결정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제갈영영과 서완정은 곧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서완정이 유성과 제갈영영을 골동품이 모여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어두운 밤이라서 등불로 방 안을 훤히 밝혀놓았다.
방 하나에 목재로 만든 진열대가 여러 개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도자기나 철로 만든 여러 물건들, 기타 자질구레한 골동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것들이 부군이 생전 모은 골동품들입니다."
"양이 상당 하군요. 방 하나를 꽉 채우시다니."
"오랫동안 표국을 운영하며 하나, 둘 모은 것들이라 많기는 합니다. 유성님이 필요하신 것들을 챙기시면 나머지는 천천히 처분할 생각입니다.
아시다시피 이런 것들은 곧바로 주인을 찾기 어려워 현금화에 시일이 오래 걸리지요."
서완정은 골동품들이 부군의 유품이라 손대지 않았으나, 살수도 잡아 일부나마 한을 풀었기에 이제 그만 놓아주고 청강문이 진 빚을 갚는데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무사를 키운다는 것은 돈이 참 많이드는 일이다.
"그럼 편히 둘러보십시오. 오늘 고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음에 다시 오셔도 된답니다."
서완정이 돌아간 후, 유성은 눈을 빛내며 주위를 둘러보는 제갈영영에게 말했다.
"저는 골동품에 대해 잘 모릅니다. 괜찮은 게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현금화가 쉬우면 더 좋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벌써 괜찮아 보이는 것들이 눈에 띄네요. 백의원님도 심심하실 테니 둘러보세요."
정말 골동품에 조예가 있는지 다양한 방법으로 골동품들을 살펴보는 그녀를 두고, 유성도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진열대 사이를 돌아다녔다.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하긴, 지금, 이것들을 현실 세계로 가지고 나간다면 대단한 골동품이기는 하겠네.'
그런 쓸데없고 이뤄질 수 없는 망상을 하던 중.
유성의 시선을 잡아끄는 물체가 하나 있었다.
손가락 한 개 정도의 길쭉한 크기였는데 짙은 청록빛을 띤 금속 같았다.
'잠깐, 내가 잘못 봤나?'
유성은 놀라서 진열대에서 그것을 들어 보았다.
청록빛의 금속이 틀림없다.
무게도 같은 크기의 철보다 가벼웠다.
등불에 비추어 보자 청록빛을 띈 금속은 각도에 따라 황금빛이나 자줏빛으로 보이기도 했다.
표면에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물결무늬가 흐르고 있었다.
유성은 한 가지 금속에 생각이 미쳤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뭘 보고 계세요?"
유성의 혼잣말에 제갈영영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코앞에서 그녀가 솟아나자 은은햔 향내가 풍겼다.
내성이 없는 유성이 살짝 거리를 벌린 후 손에 든 것에 대해 물었다.
"혹시 총군사님은 이게 뭔지 아십니까?"
"천운석이군요."
물어보자마자 답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이것이 그만큼 흔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 이거 아시는 겁니까?"
제갈영영이 익히 아는 것처럼 평이한 어조로 말하자 유성은 김이 팍 식었다.
'그 금속인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없지. 그냥 좀 닮은 금속인가 보네.'
그녀가 유성에게 천운석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저도 할아버지에게 듣기만 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정말 예쁘게 생겼네요. 아주 보기 힘든 거라는데."
"흔한 게 아닙니까?"
"절대요. 천운석,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이라는 뜻이죠. 말 그대로 운석 사이에서 가끔 발견된다고 해요. 그런데 수집욕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실제 가격은 크게 비싸지 않을 거예요.
쓸모가 없거든요. 예쁜 돌멩이와 비슷한 취급을 받아서요. 그럼 전 다른 걸 둘러볼게요."
유성은 제갈영영이 다시 돌려준 천운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이상해. 확인해 보는 건 간단하니까.'
제갈영영이 등 돌리고 있는 사이, 신성력을 살짝 불어넣어보았다.
화악-!
금속이 마치 솜이 물을 먹듯이 유성의 신성력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금속에서 느껴지는 신성력의 양은 유성이 주입한 양의 열배에 달했다.
'역시 맞았어!'
신성력이 증폭되었다.
유성이 아는 금속중에 그런 성질을 가지는 것이 딱 하나 있다.
'신의 금속 오리하르콘! 이곳의 천운석이 바로 오리하르콘이었어! 이 세상에 왜 오리하르콘이 있는 거지?'
유성은 애써 희열을 감추었다.
혼자 있는 곳이었다면 비명이라도 지르며 기뻐했겠으나 옆에 제갈영영이 있다.
'일단 챙기자.'
조사는 나중에 해도 괜찮다.
얻을 수 있을 때 확실하게 챙겨두기로 했다.
"이것도 같이 챙길 테니 셈에 포함시켜 주세요."
흥분을 가라앉히고 무심한 듯 제갈영영에게 말했다.
천운석을 힐끗 본 그녀가 물었다.
"예쁜 거 좋아하시나 봐요?"
"아뇨, 제가 예쁜 걸 좋아하는 건 아니구요."
멈칫.
제갈영영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천운석은 가볍고 예쁜 거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금속인데 예쁜 걸 좋아하는 게 아니면 왜 챙기려고 할까?'
그녀는 사실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예쁜걸 좋아하지 않으면, 예쁜 걸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려는 게 아닐까?
'설마 얼마 전에 본 남궁유린은 아니겠지...?'
유성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갈영영은 골동품들을 감정하느라 흘러내려온 긴 흑발을 귀 뒤로 살짝 넘겼다.
입가에 미소를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런데 저도 천운석이 탐나는데 혹시 오늘 수고비로 저 주시면 안 돼요?"
유성은 화들짝 놀랐다.
최대한 관심을 끌지 않으려 했으나 제갈영영이 오리하르콘을 탐내는 것이다.
신성력을 증폭시킬 수 있고, 다른 이능도 있는 신의 금속 오리하르콘을 발견했는데 이걸 넘겨줄 수는 없었다.
유성이 해 줄 말은 하나뿐이다.
"절대 안 됩니다!"
"아."
제갈영영의 눈이 짜게 식었다. 입가에 미소도 지워졌다. 속눈썹도 파르르 떨렸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표정.
"한번 해 본 말인데 너무 단호하시네요."
이내 그녀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무슨 생각하는지 눈빛도 조금 매서워졌다.
'이런, 내가 너무하긴 했구나. 웃으면서 한 말에 너무 정색했어.'
유성이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그렇게 정색할 건 아니었는데 이걸 제가 꼭 쓸 곳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제갈영영의 입술이 달싹였다.
무언가 묻고 싶은 게 있는 듯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그 천운석 어디다 쓰실건가요? 혹시 다른 사람 주려고 챙기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오리하르콘은 이 세상에서 유성이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금속이다.
그 누가 달라고 해도 내줄 생각이 없다.
"절대 아닙니다. 제가 쓸 겁니다."
그 순간 제갈영영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언제 매섭게 쳐다봤냐는 듯이 눈매도 다시 부드러워졌다.
"그래요. 꼭 백의원님이 사용하시도록 해요."
유성은 의아했다.
'화 난 듯 보였는데 별거 아니었나?'
어쨌든 잘 풀려서 다행이다.
꽤 친해졌고, 이렇게 다양한 도움도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인맥과 틀어지면 몹시 곤란한 일이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그럼 계속 감정해볼게요."
다시 골동품 감정에 집중하는 그녀는 꽤 홀가분해 보였다.
유성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오리하르콘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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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츄얼 판타지에서 유성은 정식 사제의 길을 걸었다.
성기사로 활약하지는 않았으나 성기사들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마나 연공법을 익히지 않았기에 기사에 비해 신체 능력이 부족했고 오러도 다루지 못했다.
그런데도 성기사는 대부분의 기사들에게 절대 밀리지 않았고, 스스로 치유까지 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 하면 더 우위로 치기도 했다.
더 높은 경지로 향하는 길은 기사에게 열려 있으나 저점 방어가 더 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나 연공법 없이 어떻게 그 차이를 메웠느냐.
바로 버프와 아이템이다.
성기사는 온몸에 버프를 둘러 기사들과 비슷한 신체 능력을 보여 줄 수 있었다.
문제는 기사들의 전유물인 오러인데, 일반 검에 신성력을 불어 넣어도 오러와 비슷한 효과를 보여 줄 수 없었다.
특별한 아이템이 필요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오리하르콘이다.
성기사들의 검신은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졌고, 그곳에 신성력을 응축시키면 마치 기사의 오러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강력한 절삭력!
그 말인 즉, 내공이 없어도 유성은 성기사가 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물론, 그러기에는 신성력의 절대량이 부족했고 이번에 얻은 오리하르콘의 양도 너무 소량이었다.
'앞으로 오리하르콘을 더 구할 수 있을까?'
제갈영영이 한 번에 천운석을 알아본 것을 보면 어딘가에 또 천운석이 존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잘 찾아 모은다면 검 한 자루 쯤 만들 양은 충분할 것이다.
버츄얼 판타지에서도 귀한 편이긴 했으나 신전에서 보유한 오리하르콘은 적지 않았다.
당시에는 출처 따위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때도 운석에서 나오는 것들을 긁어 모은 게 아닌가 싶고, 그렇다면 이곳도 마찬가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먼 미래 계획은 그렇고, 이제 당장 이걸 어떻게 활용하냐인데.'
짧은 단검을 만들기에도 너무 양이 적다.
다른 금속과 섞이지도 않으니 만년한철처럼 다른 철과 섞어 사용할 수도 없다.
떠오르는 방법이 하나 있었으나 더 좋은 방법이 없는지 찾기 위해 진열대 사이를 거닐었다.
덜커덕-
허리춤에 매어둔 침통이 연신 덜커덕 거리는 느낌에, 유성은 결심을 굳혔다.
'그래. 지금은 침을 만드는 게 최선이다. 신성력의 절대량에는 차이가 없어도 침을 통해 신성력 증폭 효과를 사용할 수 있다면 더 많은 환자, 그리고 더 위중한 환자를 치료할 수 있을 거다. 지금은 열심히 신성력을 쌓아 나가는 게 최선이다.'
한 가지 고민이 해결되자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그런데 이거, 여기서는 누가 침으로 만들어 주지? 여기엔 드워프도 없는데...?'
오리하르콘은 가공이 무척 어렵다.
아마 제갈영영이 예쁘기만 하고 쓸모없는 금속이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
몇 가지 골동품들을 챙겨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갈림길에서 제갈영영이 유성의 집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혹시 저희 집까지 가시는 겁니까?"
"네, 집 앞까지 같이 가요. 데려다줄게요."
"전에는 남들이 보면 곤란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집 안까지 들어갔으니까 그렇죠. 이 정도는 괜찮아요. 정식으로 대가를 받고 골동품 감정에 도움을 드린 거니까요."
제갈영영이 손에 쥔 작은 노리개를 흔들어 보였다.
"별거 아닌데요, 그건."
골동품들 사이에 여자들이 쓸 법한, 상태 좋은 노란색 노리개가 하나 있었다.
잘못 섞여 있었나, 신기해서 보여주었더니 자기에게 보수로 달라길래 그러라고 했을 뿐이다.
"아, 참. 항상 집에는 진법 펼쳐두고 있는 거 맞죠?"
"물론입니다. 며칠에 한 번씩 미로진과 은둔진을 재설치 하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걱정이 안 될 수 있나요. 항상 몸조심하세요."
"그럼요. 홀 몸도 아닌데요."
"뭐, 뭐라고요?! 호, 홀몸 아니셨어요?"
사이가 부쩍 가까워진 후, 유성은 제갈영영의 반응이 재미있어 종종 놀리고는 했다.
이번에도 그녀는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팔딱팔딱 날뛰는 활어같은 반응을 보여 주었다.
"제 손길을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들이 있는데 당연히 홀몸이 아니지요."
찌릿-
눈초리가 날카롭다.
"농담입니다."
"앞으로 그런 농담 금지예요."
"..."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유성은 궁금한 점을 물었다.
"혹시 이 천운석으로 침을 만들 수 있을 만한 장인을 알고 계십니까?"
"침이요? 천운석으로 침을 만든다구요?"
"보시다시피 양이 너무 적어서요. 제 직업상 가장 많이 쓰는 게 침이거든요."
"그건 그러네요. 생각해 보니 괜찮아 보이기는 해요. 천운석은 내구성이 아주 좋다고 들었거든요. 대신 그만큼 가공이 어려울 거예요."
맞다.
버츄얼 판타지에서는 신이 내린 대장장이 드워프들이 있어서 별생각 없었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 중에서도 천운석을 가공할 수 있을 만한 자가 있을지 의문이다.
이곳의 평범한 대장장이들에게 물어봐야겠지만 실력 좋은 자들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한다.
"당장 떠오르는 건 사천당가예요. 더 뛰어난 대장장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가는 암기를 직접 조달하는 만큼 수준 높은 대장장이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들었거든요."
"아, 사천당가! 좋네요. 그런데 좀 멀긴 하군요."
"설마 거기까지 가시려고 했어요?"
직접 가지 않으면 이곳에서 의뢰라도 넣을 수 있다는 말일까?
유성은 잠시 고민해 보았다.
천운석을 남의 손에 맡겨 사천당가로 보내 가공을 부탁하는 것.
'무림맹을 통해 보낼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는데. 분실 위험은 내가 가져가는 것보다 더 적을지도 모르니까.'
"혹시 사천당가에서 무림맹 의뢰도 맡아줍니까?"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그들은 자존심이 세거든요. 몇 번 물건 제작을 부탁한 적이 있지만 다 거절당했다고 들었어요."
"그럼 직접 가면 만들어 주나요?"
"음,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다면요. 사천당가는 은원이 확실한 곳이잖아요."
"은원이라..."
사천당가는 폐쇄적이다. 기술 유출을 막기위해 직계는 딸들도 출가시키지 않고 데릴사위를 들이는 자들이니까.
무림맹과 무림학관에도 사천당가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과 엮일 일이 얼마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유성은 다른 대장장이들이 천운석을 다루지 못한다면 사천당가로 찾아갈 마음을 굳혔다.
"..."
옆에서 제갈영영이 유성의 결연한 표정을 보고 안절부절하는 것도 모르고.
***
낙양 무림맹 인근은 전국 곳곳에서 몰려온 의원들로 북적거렸다.
모두 인생 역전을 노리고 무림맹 의각 시험을 치르러 온 자들이다.
"허의원, 또 보는구만. 주름이 너무 늘어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
"마의원, 여전히 입이 거칠구만. 그런데 자네가 도전하기에는 상대가 너무 쟁쟁하지 않겠나?"
"지는?"
"뭐?!"
"의선의 제자도 참가하고 요즘 유명세를 떨치는 백유성이라는 자도 지원했다는데 자네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자네보다는 내가 훨씬 낫지. 그리고 굳이 여기가 아니라도 낙양 의방 시험이라도 볼 생각이니 걱정하지 마시게!"
"흥."
앙숙 관계인 둘은 무림맹 의각 시험을 치르러 오기는 했지만 큰 기대는 하고 있지 않았다.
또 어떤 은거 기인이 나타날지 모르겠지만, 이미 낙양 의방에서 양대산맥으로 꼽히는 자들이 참가했기에 의각 시험 합격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들은 며칠 후 있을 낙양 의방 시험에서 다시 만나리라 직감했다.
그때 그들에게 슬그머니 다가온 사람이 하나 있었다.
코 옆에 큰 점이 박힌 자였는데, 그가 비밀스럽게 나무판 위에 종이를 얹어 내밀었다.
"어르신들, 혹시 내기에 참여하시겠습니까? 누가 의각에 합격할지를 두고 작은 판이 벌어졌지 뭡니까? 물론 어르신들의 이름을 적어도 됩니다."
"..."
그들이 본 곳에는 여러 의원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고 각자 돈이 걸려 있었다.
전에도 몇 번 이런 내기에 참여해 본 그들은 요주의 인물 양지헌과 백유성의 배당률을 훑었다.
자기 이름을 적어 넣겠다는 만용을 부리지는 않았다.
"음, 배당률이 별로 좋지는 않군."
"아, 양의원님과 백의원님을 보고 계신가 보군요. 그래도 두분 중 마음이 가시는 분께 거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난 양의원님께 걸겠네."
허의원이 선수를 치자 마의원이라고 불린 자가 슬그머니 고민하다가 백유성 쪽에 적은 돈을 걸었다.
따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 싸움이었다.
허의원이 마의원을 비웃었다.
"흥, 여전히 안목이 형편없군. 그래서 자네가 안 된다는 걸세. 의선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한 양의원님은 이런 시험에서는 적수가 없다는 말일세."
***
"자, 백의원, 이거 저기 앞에서 산 떡이네. 이걸 먹으면 시험에 합격할 확률이 높아진다더군. 그럼 자네만 믿네."
유성은 차의원이 쥐어 준 작은 꾸러미를 받아들였다.
찹쌀로 만든 떡이 몇알 들어 있었다.
미신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정성이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꾸러미는 뭡니까?"
차의원의 소맷자락 안으로 자신이 받은 것와 비슷한 색의 꾸러미가 살짝 보였다.
"아, 이, 이거? 맛있어 보여서 나도 하나 샀네. 아무튼, 나는 바빠서 이만 가 보겠네!"
오늘은 무림맹 의각 시험이 있어서 낙양 의방 의원들 절반이 쉬는 날이다.
차의원도 쉬는 절반의 인원에 속해 있다.
그런데도 그는 뭐가 바쁘다는 건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유성은 무림맹으로 들어가 시험장으로 향했다.
'의각'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전각 앞 넓은 공터로, 만약 이 시험에 합격한다면 유성이 일하게 될 곳이다.
이미 의각에 지원한 수많은 의원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유성도 부여받은 번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차의원이 건네준 떡을 하나 빼먹었다.
쫄깃하고 맛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필기는 불리하다. 최대한 비슷한 점수를 맞추고 실기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
몇 가지 활동을 한 것 외에는 꾸준히 서점에 가서 새로운 의서도 찾아보았으나 큰 성과가 없었다.
절대평가면 모를까 단 한 명만 뽑는 상대평가에서는 결국 상대가 중요했고, 의선의 제자 양지헌은 충분히 위협적인 상대다.
유성은 의선에 대해서도 조금 알아봤다.
그는 예전부터 존재해 온 의선문의 현 문주로, 그동안 쌓인 수많은 치료 비법들을 전수받아 활약하여 강호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자다.
요즘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거의 은거하다시피 한 상태지만 과거 인연이 있던 자들과는 편지를 주고받는단다.
그가 거둔 여러 제자가 있는데, 그중 양의원이 가장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자다.
즉, 의선의 진전을 이은 양의원은 절대 방심할 수 없는 상대라는 소리다.
잠시 후.
비어 있던 유성의 옆자리에 누군가 조용히 앉았다.
그가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 있던 유성에게 말을 걸었다.
"백의원, 내 옆자리였군."
돌아본 곳에는 양의원이 앉아 슬쩍 웃고 있었다.
자신감이 넘쳐보인다.
"그렇군요. 임의로 주어진 자리라 양의원님 옆자리일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표정이 좋아 보이십니다."
"간밤에 꿈에서 스승님을 뵈었지. 좋은 징조가 아니겠나?"
"그러시군요. 좋은 승부 부탁드립니다."
"나도 언젠가 자네와 한번 제대로 실력을 겨뤄보고 싶었네. 아침 식사는 했나?"
"간단히 먹었습니다."
양의원이 소매에서 작은 꾸러미를 하나 꺼냈다.
유성이 아주 잘 아는 모양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꾸러미 안에서는 찹쌀떡이 몇알 나왔다.
"차의원이 챙겨 준 걸세. 나이도 나보다 몇 살 어린 친구가 이런 걸 참 잘한다네. 자네도 하나 들지."
"...감사합니다. 쫄깃해 보이는군요."
하는 행동이 박쥐 같기는 한데 나름대로 생존 전략이라고 생각하니 밉살스럽기는 하나 이해는 됐다.
"그럼 시험을 시작하겠소!!"
잠시 후, 시험관의 외침과 함께 무림맹 의각 시험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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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험은 무림맹에서 처음으로 치러지는 회차로, 기출 문제가 없다.
낙양 의방 시험에서는 흐름이라도 유추해 볼 수 있던 것에 반해 완전 백지상태.
유성은 시험지를 받아들고 빠르게 흝어보았다.
먼저 훑어보면서 난이도를 파악해 적절히 시간을 분배하는 기술은 나름 유효한 전략이다.
'문제의 대부분이 무림인들의 내, 외상의 치료에 치중되어 있어.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아. 그런데 평생 한, 두 번 보기 힘든 희귀병들에 대해 묻는 문제들도 섞여 있다. 이게 변별력 확보용 문제인가? 전혀 실용적이지 않아 보이는데 도대체 누가 이런 식으로 낸 거지?'
유성은 그 문항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는 질병도 있었으나 치료법을 전혀 모르는 질병이 몇 개 섞여 있다.
문제로 출제된 것을 보면 당연히 중원 의술에 존재하는 것들일 텐데, 아마 역사 깊은 의가들에 문의하여 얻은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럼 당연히 양의원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겠는데?'
유성은 눈만 살짝 옆으로 돌려 양의원의 기색을 살폈다.
칸막이가 잘 쳐져 있기에 어차피 옆 사람의 시험지를 훔쳐볼 수 없는 구조.
유성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한숨을 내쉬며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 많았다.
양의원이 자신만만하게 문제를 풀고 있으리라 생각한 유성은.
"..."
괴상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머리를 쥐어뜯는 양의원을 발견했다.
'이상하네. 왜 괴로워하는 거지? 어려운 문제가 많나?'
비슷한 조건이라면 해볼 만 하다.
유성은 시험지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문제들을 확실하게 풀어둔 후 모르는 질병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한다.
명칭은 다르지만 현실 세계에 있는 질병과 유사한 것도 있으니 치료법을 유추해낼 수 있기를 바라며.
필기와 실기의 비중이 반반씩 매겨져 있어서 문제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유성은 곧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
흔히 양의원으로 불리는 양지헌은 스승님인 의선을 존경했다.
의선은 어릴 적 마을에 돈 전염병으로 고아가 된 그를 거둬주었고 약간의 무공과 함께 의술도 전수해 주었다.
그의 목표는 스승님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명성을 얻는 것.
감히 하늘 같은 스승님을 뛰어넘겠다는 포부는 없었다.
나중에 스승님이 일선에서 물러나시면 의선문의 문주가 되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그런 목표를 가지고, 스승님의 품을 떠나 낙양 의방에서 생활할 때도 가급적 다른 곳에 관심 가지지 않고 의술에만 정진했다.
그런데.
의방에 들어온 젊은 의원 백유성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진료 첫날부터 놀라운 활약을 하더니 그는 무서운 기세로 단골 환자들을 늘려 나갔다.
양의원도 치료할 수 없는 환자 몇을 훌륭하게 치료해내기도 했다.
의술이란 워낙 방대하고 유성만의 비법이 있을 수 있기에 애써 수긍하고 넘어갔는데.
조의원과 얽힌 일이 끝났을 때, 유성은 어느새 자기 명성까지 위협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주변의 평가가 심상치 않아 양의원도 내심 백유성의 실력이 궁금하던 차였다.
마침 무림맹 의각 의원을 뽑는 시험이 열렸다.
가장 뛰어난 의원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
양의원이 원하던 명예로운 자리였고 백유성도 시험에 참가했다.
'의술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쉽지 않다지만 이렇게 시험의 형식으로라도 누가 더 뛰어난 의원인지 가려볼 수 있겠다.'
이제 정정당당히 실력만 겨루면 된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양의원도 시험지를 받자마자 끝까지 한번 훑어보았다.
유성과 같은 전략이다.
그리고 난이도 높은 희귀병에 관한 문제들을 발견했다.
'이것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며칠 전, 한 환자가 우연히 구했다고 양의원에게 건네준 책자가 있었다.
스승님도 병명만 알고 있거나 병명도 모르는 질병들에 대한 치료법이 적혀 있으니 귀한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여러 의가에서 가진 비법들을 모아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수준 높은 치료법들.
의술의 길을 걷는 자로서 새로운 의학 지식을 알게 되었으니 당연히 기뻤다.
그는 책자를 보고 열심히 연구했고 나름의 성과도 얻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 문제들이 토씨만 조금씩 바꿔 무림맹 의각 의원을 뽑는 시험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
이대로 시험을 치렀다가는 부정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꼴이다.
반면 그 문제들을 애써 무시한다면 스승님의 명예를 드높이겠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
'최근 평판에 의하면 백의원에 비해 내가 더 강점을 가지는 부분은 필기 뿐이다. 저 문제들을 제외하면 전체적인 문제 난이도는 낙양 의방 시험과 비슷한 수준이라 백의원도 충분히 맞출 수 있을 거다.'
그 말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초대 무림맹 의각주의 자리가 결정될지 모른다는 의미.
양의원은 깊은 번뇌에 빠졌다.
***
제갈영영은 익숙하게 보고서들을 처리하면서 창밖 멀리 시선을 던졌다.
지금 한참 의각 의원을 뽑는 시험이 치러지는 장소로.
뛰어난 시력으로도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게 보여 분위기를 전혀 짐작할 수 없다.
'백 의원님은 잘하고 계시겠지?'
그녀는 내심 유성이 걱정되었다.
그의 실력을 믿으면서도 불안 요소가 있었다.
무림맹 의각 시험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모용림 장로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무림맹의 무사들을 위한 의원을 뽑는 자리요. 최고의 의원을 선발해야 마땅하니 최대한 어려운 난이도로 출제 해야 하오."
이치에 맞는 말이다.
"실기도 물론 중요하지만 지금 뽑히는 의원은 나중에 의각의 각주가 될지도 모르는 자요. 밑에 여러 의원들을 거느리게 될 텐데 실기도 중요하지만 의술에 넓고 깊은 지식이 필요한 자리기도 하오. 필기 비중도 절대 무시할 수 없으니 필기와 실기 비율을 반반으로 합시다."
역시 이치에 어긋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제갈영영 역시 수긍할 수밖에 없는 논리.
그런데.
'하필 그 의견을 낸 사람이 모용림 장로라는 게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공교롭게도 문제 출제를 맡게 된 자도 평소 모용림 장로와 친분이 깊다.
사실, 선출직인 무림맹주를 제외하면 모용림은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모용림 장로가 치졸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걱정 안 할 텐데, 괜히 사람 의심하게 만들고 있어.'
툴툴거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무림맹 내를 거닐면서 심난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발걸음이 여러 전각을 지나 암각쪽으로 향했을 때였다.
"서둘러!"
암각에서 갑자기 세 무사가 뛰쳐나왔다.
한 명은 등에 축 늘어진 사람을 업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길을 열 생각인지 앞장서서 달려가는 중이다.
업힌 사람의 팔다리가 축 늘어져 있고 얼굴이 시커먼 것이 언뜻 보기에도 심상치 않았다.
제갈영영이 얼른 경공을 펼쳐 세 사람을 따라잡았다.
"무슨 일인가요?"
"총군사님! 제 동료가 중독됐습니다! 낙양 의방으로 데려가야 합니다!"
암각은 여러 첩보 활동을 펼치는 곳으로, 첩자들의 정체가 발각되면 죽거나 다치는 일이 많았다.
이번에도 무언가 일이 생긴 듯한데, 제갈영영이 생각하기에 낙양 의방으로 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지금 그곳은 거리도 조금 떨어져 있고 대단한 실력자도 없다.
"그쪽은 가도 소용없어요! 의각쪽으로 가야 해요. 따라오세요!"
제갈영영이 아는 한 낙양 의방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의원과 두 번째로 실력이 좋은 의원은 의각에서 시험을 치르고 있다.
"자, 잠시-"
무언가 말하려던 암각의 무사들이 제갈영영을 따라 방향을 틀었다.
그들이 의각에 도달했을 때는 마침 필기에 이어 실기 시험까지 끝난 후였다.
"자 모두 수고하셨소. 채점이 마무리되면 곧바로 결과를 발표할 테니 잠시만 대기해주시오!"
실기 시험이 모두 끝난 후.
유성은 낭패감을 감추지 못했다.
유성이 기대한 실기 시험은 환자를 데려다가 실제로 치료하는 것.
그가 제일 자신 있는 분야다.
그러나 실제로 진행된 실기 시험 방식은 전혀 달랐다.
'모의로 환자의 질병을 설정하고 문진을 통해 진단하고 치료과정을 설명하는 시험이라니?'
그런 상황에서 치유 스킬로 후유증 없이 환자를 치료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아쉽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진단법과 치료법을 적용할 수밖에.
'이거 보통이 아닌데.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누가 나를 저격이라도 한 것 같다. 내 강점을 하나도 발휘할 수 없는 구조였어. 다행히 실기에서 틀린 건 없지만 필기에서 승부가 나겠다.'
양의원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밝았기에 유성은 더 불안했다.
다음 시험을 노린다는 차선책도 있지만 제갈영영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실망했어요'라고 하면...
'마음 아플 거 같은데.'
***
암각의 무사는 제갈영영이 이쪽으로 오자고 한 이유를 깨달았다.
동료의 상태가 심각해 모든 상황을 살피지 못했다.
평소처럼 의방 쪽으로 동료를 데려갔다면 그의 목표인 양의원을 만나지 못할 뻔했다.
"양의원님! 여기 계셨군요! 제 동료를 좀 봐주십시오! 독에 중독되어 의식이 없습니다!"
등에 업힌 사람을 포함해 총 네 사람이 등장하자 가만히 앉아서 시험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의원들이 모두 웅성거렸다.
호명된 양의원이 얼른 뛰어나갔다.
"그대들은! 일단 봅시다!"
양의원은 평소 자신을 자주 찾아왔던 무사의 등에 업힌 사람을 바닥에 눕혔다.
얼굴이 시커멓고 굵은 핏줄이 여기저기 징그럽게 튀어나온 모습이 영락없이 독에 중독된 모습이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들은 게 있소?"
"모릅니다. 이 친구가 맹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을 잃어 아무것도 듣지 못한 상태입니다. 얼른 데려와 가지고 있던 범용 해독제를 먹였으나 효과가 없었습니다. 꼭 좀 살려주십시오!"
"일단 좀 보겠소."
양의원이 항상 들고 다니던 보따리를 풀어 무언가 주섬주섬 꺼냈다.
"나도 좀 봅시다! 독은 내 전문 분야요!"
수많은 의원이 모인 곳.
독에 자신 있는 사람들이 우르르 나서서 환자를 둘러쌌다.
그러나 그들도 중독된 무사의 상태를 보고 뚜렷한 해결책을 내지 못했다.
원래 독이라는 것이 중독시키기는 쉬워도 어떤 종류의 독에 중독되었는지 알지 못하면 해독하는 것은 훨씬 어렵다.
혹시 해독법을 알아 내도 그에 맞는 약재가 없다면 손 쓸 방법도 없고.
"난 짐을 다 두고 와서... 내 비장의 해독약만 있었어도 이까짓 독 쯤은..."
"자네는 그 허세 좀 고치게."
유성도 가까이 다가가서 살피려 했으나 둥글게 둘러싼 인파에 가로막혔다.
"무슨 일인가?!"
무림맹 장로들이 달려왔다.
제갈영영과 암각의 무사들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무림맹 내부를 휘젓고 달려왔기에 높은 사람들에게도 보고가 올라갔다.
암각의 무사 하나가 얼른 달려가서 보고했다.
"제 동료가 독에 당했습니다. 마침 이곳에 의원님들이 많아 도움을 부탁드리던 중입니다."
"아니, 무림맹 무사가 맹 인근에서 독에 당했단 말인가? 대체 어떤 놈들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소? 어떤가, 해독할 수 있겠나?"
암각의 무사가 장로들과 이야기하는 사이.
제갈영영은 혼란한 상황에서도 그녀가 생각하기에 가장 실력이 뛰어난 의원을 찾았다.
"백의원님, 도와주세요."
"네, 저도 좀 보겠습니다."
"모두 비켜 주세요! 백의원님 지나가실게요!"
앞장서서 길을 뚫어 주었다.
"백의원이라면..."
"요즘 제일 유명한 의원이 아닌가? 자신 없으면 얼른 비키게!"
인파가 갈라지고 백유성이 그 사이로 걸어갔다.
양의원이 이 약물, 저 약물을 무사에게 먹여 보고 있었으나 특별한 차도가 없다.
'전에 살수가 독단을 깨물었을 때보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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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독에 중독되어 오랜 시간 해독하지 못한다면 죽거나 폐인이 되는 것이 상식.
그러나 신의 힘을 사용하는 유성에게는 평범한 상식이 적용되지 않는다.
단계별로 강력해지는 치유 스킬과 다르게 해독 스킬에는 상위 등급이 없다.
해독 스킬이 먹히지 않으면 독이 아닌 것이고 만약 정말 독에 중독된 것이라면 해독 한 방이면 해결된다.
의식이 없는 무사가 독에 중독된 것이 분명하기에 유성은 그를 해독할 자신이 있었으나.
'지켜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 조금 곤란한데.'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여기 모인 자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들도 아니고.
모두 각 지역에서 한 가닥 하는 의원들이다.
'난 지금 가진 약도 없고 침만 가지고 있는데 이걸로 단숨에 해독 시키는 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여기서 못하겠다고 하는 선택지는 내키지 않는다.
힐끔 바라본 곳에는 제갈영영이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오고 있다.
'백 의원님이라면 치료할 수 있으시죠...?'
유성을 매개체로 척마대주와도 상당히 친분을 쌓은 제갈영영은 유성의 실력에 대단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
무사의 목숨도 그렇고, 자존심 상 못하겠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방법이 하나 있다. 해독을 사용해 본 경험은 저번에 살수에게 쓴 게 처음이지만, 치유처럼 그 효과를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다면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거다. 한번 도전해보자.'
유성은 장침을 꺼내 들고 시험 삼아 신성력을 불어 넣어보았다.
어느 정도 수준으로 해독 스킬을 사용해야 하는지 감을 잡기 위함.
"후..."
심호흡하고.
"양의원님, 제가 잠시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내 실력으로는 무리군. 부탁하네."
부탁한다는 그의 표정이 약간 쓸쓸해 보였으나 이것저것 따질 상황은 아니라 유성은 얼른 자리 잡았다.
"일단 독을 억제한 후 조용한 장소로 데려가 시간을 두고 완전히 해독하겠습니다."
한 의원들이 말했다.
"그런 방법도 가능하단 말인가? 확실히 독을 억제할 수 있다면 해독제를 찾을 시간을 벌 수 있겠지."
"해 봐야지요."
유성은 신중하게 침을 심장 인근으로 찔러넣었다. 심장을 찌르지 않도록 조심해서.
피를 밀어내는 장기라 독을 해독하기 가장 효과적이다.
'여기서는 일부만 해독해야 해. 순식간에 완전 해독되어 버리면 곤란해. 난 할 수 있다.'
침을 통해 신성력을 흘려 넣고.
[해독]
아주 조심스럽게 스킬을 발현했다.
절정 고수가 되어 기를 다뤘을 때보다 신성력을 미세하게 조절하는 능력이 더 늘어났다.
스스스-
무사의 들끓던 핏줄이 가라앉고 시커먼 얼굴 색도 점차 옅어진다.
이미 독을 억제하는 과정이라 설명했으니 다들 그렇게 이해해 줄 거다.
'휴, 다행히 한 번에 성공했다. 완전 해독하지 않고 조금만 남겨두었으니 이제 굳이 내 손을 필요로 하지는 않겠지.'
유심히 무사의 얼굴을 관찰하던 의원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오오오! 정말 피부색이 돌아오는군! 독이 억제되고 있나 보군!"
"어떻게 침 한 방으로 그런 조화를! 그 혈자리를 확실하게 기억해 놔야겠군. 깊이는, 어느 정도 깊이로 침을 놓으면 되겠소, 백의원?"
통성명도 한 적 없는 의원들이 유성의 방법에 지대한 관심을 표현했다.
급하게 필기구를 준비하는 자도 있었다.
'이거 댁들이 함부로 따라 하다가 해독 할 수 있는 사람도 죽일 수 있습니다만...'
잘못된 지식의 전파를 막아야 한다.
그때.
짝-!
경쾌한 박수 소리.
"역시 영술이었군!"
무언가 깨달은 자의 외침.
"...?"
유성이 돌아본 곳에는 도사 복장을 한 중년인이 손뼉치고 있었다.
"영술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청운 장로."
옆 사람의 물음에 청운 장로라고 불린 자가 신난 어조로 설명했다.
"빈도가 곤륜파에 몸담기 전 약간의 의술을 배운 적이 있소. 은밀히 도는 소문으로, 백의원이라는 의원이 아무리 위중한 환자의 병이라도 침 하나로 다스릴 수 있다더군. 내 지식으로는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의아했던 참인데 그 비밀이 영술이었구려."
"영술이 도대체 뭐길래 그러시오?"
"큰 영력을 타고난 자들이 부리는 신비한 술법이오. 빈도는 쓸 만한 영력을 타고나지 못했으나 영력을 느끼는 데는 약간의 소질이 있어 백의원이 영력을 사용했음을 알아볼 수 있었소."
유성은 전에 모산파 진영주 장로로부터 신성력도 영력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적 있다.
그때와 비교해서 신성력이 큰 폭으로 늘어났다.
영력을 느낄 수 있다는 청운 장로가 착각할 만했다.
사람들 중 누군가가 말했다.
"혹시 모산파?"
"그렇소, 모산파에는 영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하오. 혹시 백 의원도 모산파 출신이시오?"
청운 장로의 물음에 유성은 고민했다.
'청운 장로처럼 누군가는 내가 환자를 치료하는 방식에 의문을 가지고 있겠지. 마침 좋은 핑계가 생겼다.'
곤륜파 출신의 무림맹 장로.
게다가 소싯적에 의술도 약간 익혔으며 영술에 대한 지식도 있다.
그의 공언이 더해진다면 묻어갈 수 있다.
모산파에도 할 말이 있고.
마음을 굳힌 유성은 사람들의 진한 호기심과 마주했다.
"제가 개인적으로 모산파와 친분이 있으나 그곳에서 배운 재주는 아닙니다. 시중에서 배운 의술과 혼자 깨달은 영술을 함께 사용하고 있으니 제 방식은 다른 의원분들이 따라 할 수 없습니다."
"아... 그랬군. 그럼 방금 독을 억제한 것도?"
"네, 영술을 사용하지 못하면 위험한 방식이니 따라 하지 마십시오."
아쉬워하던 의원이 이번에는 영술에 관심을 가졌다.
"그럼 그 영술이라는 걸 나도 배울 수 있겠소?"
"큼, 영술은 큰 영력을 타고난 자가 아니면 절대 익힐 수 없으니 미련을 버리시오. 그렇지 않소, 백 의원?"
"정확하십니다."
청운 도사가 신이 나 유성을 대신해 영력과 영술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모르겠지만 유성에게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제약이 조금 더 사라졌다. 이전보다 과감하게 신성력을 사용해도 의심하는 사람은 없겠어. 대신 신변 보호에 더 힘써야겠는데.'
유성만 사용할 수 있는 재주라는 게 널리 알려진다면 날파리가 꼬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림맹의 보호를 받는 게 가장 안전하겠지. 무림맹 의각 시험에 합격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으니 어쩌면 가산점을 받아 시험 결과와 상관없이 의각 의원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갈영영의 눈빛에 감탄이 떠올라 있어 더 뿌듯하다.
미녀에게 인정받는 것은 역시 즐거운 일.
그녀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어 보이지만 주위에 사람들이 많아 꾹 참는 느낌이다.
'나중에 잔뜩 치켜세워주면 좋겠다.'
남들 몰래 슬쩍 눈을 마주치고 있는데 양의원이 말을 걸었다.
"그런 비밀이 있었군. 나는 자네가 이자의 독을 쉽게 억제하는 걸 보고 실력 격차에 약간 실망했었네. 그런데 영술이라는 재주가 있는지는 전혀 몰랐네."
"남들에게 말해도 쉽게 믿기 힘든지라 굳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순수 의술만으로 어찌 평생 의술에 정진해온 양의원님과 의선의 지식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너무 겸양떨지 않아도 괜찮네. 자네의 특별한 영술도 스스로 깨달은 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 역시 자네의 성과네.
그리고 정말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자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걸세. 이자는 평소 나를 자주 찾는 환자라네.
혹시 괜찮다면 뒷 일은 내가 맡아도 되겠나? 마무리 치료라도 내가 해주고 싶네."
"물론입니다. 아까처럼 독이 날뛰지 않을 테니 여유가 있을 겁니다."
훈훈한 대화였다.
어쩌면 시험 결과에도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오늘의 진정한 승자는 백의원이 아니겠소?"
"맞소. 시험 결과를 확인할 필요도 없겠군. 백의원이 없었다면 이 자는 무사할 수 없었을 거요."
"역시 일침신의! 헛소문이 아님을 알게 되었소!"
"축하하오, 백의원. 나는 섬서의 허지경이라고 하오."
"허허, 나는 마구상이라고 부르면 된다오. 나도 허가놈처럼 섬서에서 왔소. 그리고 고맙소!"
마지막 사람은 뭐가 고맙다는지 모르겠으나 일단 승리할 확률이 오른 듯하다.
장로들 사이에서 날카롭게 찢어진 눈을 가진 노인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모두 정숙하시오. 상황이 마무리되었으니 시험 결과를 확인해야 하지 않겠소?"
"..."
유성은 여론에 힘입어 양의원을 이길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서 내심 즐기고 있었다.
여론을 주도한다는 오명을 피하고 싶어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으나.
갑자기 나선 그를 보고 속으로 악담을 퍼부었다.
'찢어진 눈이면 우리 총군사님을 괴롭힌다는 그자일까? 꼬장꼬장해 보이는군.'
제갈영영이 그자의 정체를 밝혀주었다.
"모용림 장로님. 의원분들의 말도 일리가 있지 않을까요? 이 시험을 치른 것도 가장 실력 좋은 의원을 뽑기 위함이었으니 백 의원님의 활약도 고려해야 마땅할 거예요."
역시나 말로만 듣던 모용림 장로.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악담의 강도가 거세졌다.
"총군사. 우리는 항상 공정해야 하는 정파의 기둥 무림맹이오. 시험을 치르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미 시험을 치렀는데 변수에 의해 승자를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는다면 누가 무림맹을 신뢰할 수 있겠소?"
제갈영영이 이를 갈았다.
유성을 위해 무리해 나선 감이 있기에 정론으로 치고 들어오면 반박하기 쉽지 않다.
한 가지 희망에 걸어보았다.
"물론 그렇죠.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아직 채점이 다 끝나지 않았고 결과 발표 전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시험관의 재량에 따라 방금의 상황을 고려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답니다."
시험관이 모용림 장로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공과 사가 확실한 사람일 수도 있다.
제갈영영은 그를 끌어들였다.
"하긴, 우리끼리 이야기 해서 뭐하겠소? 시험관이 결정할 문제지."
모용림도 물러서자 눈치를 보던 시험관이 앞으로 나섰다.
"본 시험관의-"
무언가 말하려던 시험관이 말을 끊고 눈에 초점이 살짝 흐려졌다.
소매를 들어 입가를 가리고 있는 모용림 장로.
'설마 입술을 가리고 전음을 보내는 거야?'
제갈영영이 이의를 제기하기도 전에 모용림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소매를 내렸다.
순식간에 증거가 사라져 버렸다.
시험관이 모용림 장로를 힐끗 보더니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
"큼, 본 시험관의 재량으로 처리하겠소. 이미 실기 시험의 채점은 마무리 되었으므로 방금의 상황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필기시험의 결과만 나온다면 합격자를 발표하도록 하겠소."
"..."
뒤에서 시험 보조인들이 열심히 필기시험지들을 채점하고 있다.
실기는 그때그때 평가하기에 이미 채점이 마무리되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
유성은 제갈영영이 보내는 미안한 눈빛을 읽었으나 그녀가 애썼다는 사실을 알기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건 결국, 내 실력 뿐인가.'
머지않아 필기 결과가 취합되었는지 시험관이 결과지를 받아들고 확인하는 모습이 보인다.
표정이 미묘하다.
시험관이 슬쩍 모용림에게 손짓 하자 그가 시험관에게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유성은 제갈영영 역시 시험관에게 달려가는걸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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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영영은 조의원에게 두통 치료를 받기 전, 당연히 양의원에게도 찾아가 보았다.
그는 만날 수 있는 사람 중 제일 실력이 좋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건 별다른 수가 없소. 그저 업무를 줄이고 잠을 푹 자는 수밖에. 정 견디기 힘들면 지어드린 약을 드시오."
원론적인 이야기만 들었다.
별수 없다는 건 잘 안다.
다른 의원들에게도 몇 번 찾아가 보았고, 모두 처방은 대동소이했으니까.
그나마 조의원이 친절하여 그를 자주 찾았을 뿐.
어느 날, 우연히 새로 왔다는 의원 백유성이 거의 죽었다고 생각한 소녀를 살려내는 것을 목격했다.
'비법을 거침없이 푸는구나. 대단한 사람이야. 이야기라도 나눠볼까?'
호기심에 한번 찾아가 보았는데.
'하나도 안아파?'
몇 시진 정도 두통을 잊게 해주는 진통 효과도 아니다.
완벽한 치료!
제갈영영은 책을 좋아했기에 어렸을 때도 머리가 무거운 감이 있었다.
유성에게 치료받은 후 느껴지는 상쾌함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수준이었다.
머리도 다시 잘 돌아가서 업무 과부하도 줄었고, 무림맹의 일로 바빠 제대로 시작도 못한 천문진법총해 공부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제 유성 없었던 생활로는 돌아갈 수 없다.
더불어 유성 덕분에 무림맹 내의 생활이 약간 편해진 점도 있다.
바로 척마대주 정립 덕분이다.
무림맹 사람들이 말하길.
"척마대주님과는 친해지기 힘들지. 딱 자기 할 일만 하는 분이시라. 화경의 고수와 친분을 다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몰려갔는데 다 퇴짜를 맞았다더군."
그런 정립이 먼저 제갈영영을 찾아왔다.
그는 자신을 치료해준 유성을 잔뜩 찬양한 후.
"내 힘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시오, 총군사."
믿음직하게 힘을 실어 주고 돌아갔다.
어리둥절했으나 그 일이 있고 나서 그녀는 무림맹 생활이 한결 편해진 걸 느꼈다.
소림사에 다녀온 유성의 집에 제갈영영이 찾아갔다 온 후 벌어진 일이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그날 정립이 유성의 집을 찾아갔다.
화경의 경지에 도달해 폐관을 푼 날로, 유성에게 감사함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인기척으로 유성의 집 안에 이미 선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립은 유성에 관해서 만큼은 평소와 같은 모습이 사라지고는 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내공을 집중했고.
"황홀해요... 최고예요, 백의원님... 하아아... 좋아..."
큰 오해가 생겼다.
'이런,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누군지나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내 실수다.'
정립은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시더니... 비밀은 지켜드리겠소, 총군사.'
개방도들도 모르는, 오직 정립만 아는 이야기다.
어쨌든, 제갈영영에게 있어 유성은 현존하는 최고의 의원이다.
'더러운 수작이 없는 한 당연히 백 의원님은 의각 시험에 합격해야 해!'
굳건한 신뢰.
그것이 모용림 장로를 예의 주시하다가 시험관에게 달려간 이유다.
"곤란해 보이시는데 무슨 일인가요?"
"저, 총군사님은 갑자기 왜 오셨는지..."
"곤란한 점이 있으면 도와드리러 왔어요. 저와 모용림 장로님도 오셨으니 편하게 이야기해 보세요."
"그것이..."
시험관이 결과표가 적힌 종이를 꽉 움켜쥐며 모용림 장로에게 시선을 던졌다.
모용림이 힐끗 주위를 살폈다.
다른 무림맹 장로들과 의원들이 서서히 의구심을 가지는 듯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그는 시험관에게 한마디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큼, 결과가 나왔으면 나온 대로 발표하지 않고 뭐 하나?"
"아, 그렇지요. 그럼 발표하겠습니다."
시험관은 은밀히 술자리를 가졌던 모용림도 저렇게 말해주자 편안 마음으로 결과를 발표했다.
"그럼 발표하겠소. 합격자는... 합격자는 백유성 의원이오. 축하하오!!"
결과가 발표되자 유성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해냈다!'
꼭 무림맹에 들어오고 싶었다.
낙양 의방을 한 다리 걸치지 않아도 무림맹 무사들과 직접 인연을 맺을 수 있다.
게다가 지금처럼 여러 의원에게 분산되는 것이 아닌, 무림맹 무사들 대부분을 독점할 수 있다.
의각에 백유성이 있는데 굳이 그를 피해 낙양 의방으로 갈 만한 사람은 얼마 없을 테니까.
병역도 여전히 피할 수 있고.
직속이니 오히려 더 굳건하다고 볼 수 있다.
주먹을 불끈 쥐는 유성에게 조금 전 일로 통성명 한 여러 의원들이 앞다투어 축하를 건넸다.
"정말 고맙소! 덕분에 허가놈의 코를 납작하게-"
마구상이라는 의원이 침을 튀기며 알 수 없는 말을 쏟아 냈고.
그중에는 양의원도 있었다.
패배했음에도 처음보다 표정이 밝고 후련해 보인다.
"축하하네, 백의원."
"아닙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필기시험이 정말 어려웠거든요."
"역시. 실기는 나도 실수가 없었으니 필기에서 판가름 난 것 같네. 몇 문제나 모르겠던가?"
"총 네 문제를 몰랐습니다. 두 문제는 손도 제대로 못 댔고 두 문제는 제 생각대로 답안을 적어 봤습니다."
"그랬나... 그럼 모르는 문제마저 두 개 맞춘 셈이군. 나는 세 문제를 몰랐다네."
크게 고개를 끄덕이는 양의원.
승부에서 이긴 후라 양의원이 꿍해 있다면 쉽게 말 붙이기 어려웠겠지만 그가 편하게 대해주었다.
유성도 하고 싶은 말을 마음 놓고 할 수 있었다.
"문제로 나왔다면 정답이 있다는 소린데 궁금하긴 하군요. 의각에서 정식으로 일하게 되면 그 질병들의 치료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양의원님도 관심 있으십니까?"
양의원이 고개를 저었다.
의원이 새로운 치료법에 관심이 없다니.
뜻밖에 의선에게 배운 것만 고집하는 타입인가?
의아하던 찰나 양의원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저녁에 별일없으면 함께 술이라도 한잔 하겠나? 의각에서 정식으로 일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오늘 자네가 궁금해한 치료법도 알려주겠네."
"네...? 그게 무슨..."
유성의 얼굴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정답이 공개되지 않은 문제의 치료법을 양의원이 어떻게 알려 준다는 말인지 의문이다.
"그럼 조금 있다가 보세. 난 아까 중독된 환자를 보고 가겠네."
무림맹 앞으로 약속 장소를 정하고 양의원은 중독당한 무사를 살피겠다고 가 버렸다.
***
한편, 시험 결과가 발표되자 모용림은 사람들의 이목이 백유성에게 쏠린 틈을 타 시험관에게 다가 갔다.
"잠깐 이야기 좀 하지."
"네, 장로님."
"어떻게 된 건가? 채점에 실수는 없었나? 어떻게 백유성 점수가 더 높을 수 있지?"
"저도 아직 시험지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으나 백 의원이 일 점 더 높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한번 시험지를 보세. 혹시 잘못되었다면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지."
모용림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일부러 양의원에게 사람을 보내 책자까지 전달했다.
토씨 몇 개 다르게 보냈다고 양의원이 답을 틀렸을 리도 없지 않은가?
모용림과 시험관은 시험 보조인들에게 다가가 양의원과 백유성의 시험지를 받아 함께 확인했다.
"음..."
모용림이 침음성을 흘렸다.
희소병에 대한 문제는 총 다섯 문제.
유성은 모든 문제에 도전했으나 양의원은 그렇지 않았다.
세 문제에는 단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래서야 점수를 줄 수가 없었겠군. 제 복을 발로 차버리다니.'
백유성을 미는 총군사를 물 먹이고, 은혜를 입은 의선의 제자를 챙겨 주기 위함이었는데 그게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다 보셨으면 이제 시험지를 보존해도 되겠습니까, 장로님?"
"그렇게 하게."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는 양의원이 잘 이해되지 않았으나 괘씸한 얼굴들은 따로있다.
모든 장로들 앞에서 자신이 사과해야만 하게 만든.
"총군사, 그리고 백유성 이 자식—"
자기도 모르게 억눌린 말을 내뱉던 모용림이 갑자기 흠칫 놀랐다.
그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없겠지...? 그래도 조심해야겠군.'
그는 목을 잔뜩 움츠렸다.
혹시 누군가 있는지 연신 살피면서.
화경의 고수와 생사결을 벌이는 건 너무 두려운 일이다.
***
유성이 의각 담당자로부터 의각 운용 방식과 출근 일정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들었다.
"거처도 준단 말입니까?"
"출퇴근을 해도 되지만 무사들의 편의를 위해 세워진 곳이니만큼 의각에 머물러 주는 게 더 좋겠지요. 혹시 출퇴근하실 생각이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청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의각을 보조할 하인들도 뽑을 계획이니 참고하십시오. 혹시 봐 둔 사람이 있으십니까?"
차의원이나 양의원 말고는 의방에서 특별히 인연을 맺은 자가 없었다. 둘은 하인이 아니니 제외.
"없습니다. 대신 관련 경험이 있는 자들이면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유성에게 제갈영영이 다가왔다.
아까는 의원들이 많아서인지 접근하지 않았다.
"아쉽네요. 같이 식사하며 축하하는 자리라도 가져야 하는데 긴급 회의가 소집되어서요. 오늘은 밤늦게 끝나겠어요."
추측하기로 중독된 무사가 깨어나 무언가 중요한 말을 전해 준 듯하다.
"이제 의각에서 근무하게 되면 자주 볼 텐데요. 어차피 오늘 저녁은 술 한잔하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 힘들었을 겁니다."
"술이요?"
"네."
잠깐 정적이 흐르다가 제갈영영이 한마디 툭 내뱉었다.
"여자?"
"네? 갑자기 여자는 무슨... 양의원님과 마실 겁니다만."
"아."
다시 한번 정적이 흐른다.
"그래요, 이제 곧 따로 근무하시게 될 텐데 두 분 인사 나누셔야죠. 그럼 전 이만 회의가 있어서요. 아, 늦겠다."
선선한 날씨임에도 제갈영영이 얼굴에 부채질하며 뒤돌아섰다.
손으로 이마를 탁-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경공을 펼쳐 사라져 버린 제갈영영.
정말 빠르다.
제갈영영이 오늘 일부러 진법 공부를 하지 않은 사실도 모른 채, 유성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시험 때문에 침을 못 놔드렸네. 상태가 안 좋으실만 해.'
어쩌면 내일 침을 놔줄 때 또 즐거운 광경을 보게 될지도.
망가진 모습의 그녀를 상상하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은 유성은 무림맹을 나섰다.
양의원과 만나기 위함이다.
'의각에서 근무하면 오늘처럼 위중한 환자를 많이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 신성력을 더 많이 쌓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거처도 무림맹 내에 마련해 줄 수 있다니 최고야.'
가까운 미래 계획을 세우는 사이.
유성의 시야에 조금 앞쪽에 걸어가는 양의원이 들어왔다.
위험한 순간을 넘겼으니 중독된 환자 치료가 쉽게 마무리된 듯했다.
"양—"
그를 부르려는 순간.
"아이고, 표정이 무척 밝으십니다, 양의원님. 제가 뭐라했습니까. 제가 사드린 맛있는 합격 떡 드시고, 한 번에 탁! 합격 축하드립니다! 이제 꽃길만 걸으십시오!"
어디선가 쏜살같이 나타난 차의원이 꽃다발과 커다란 보따리를 양의원에게 쥐어 주며 외쳤다.
거리가 약간 있음에도 유성에게 아주 잘 들렸다.
"..."
양의원과 차의원이 대화를 나눈다.
차의원이 양의원의 손에서 꽃다발과 커다란 보따리를 뺏다시피 건네받고는 고개를 세 번쯤 조아린다.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린다.
유성과 눈이 마주친다.
"아이고, 우리 백의원님! 제가 뭐라 했습니까! 제가 사드린 떡— 이제 꽃길만—"
활짝 웃으며 달려오는 차의원을 본 유성은.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어, 진짜."
그의 뻔뻔함에 감탄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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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이전에 유성이 한 번 가 본 적 있는 주루로 향했다.
무림학관 후기지수들을 처음 만났던 곳.
중간에 유쾌하지 못한 시간도 있었지만 마지막에 백호단주와 합석하여 즐긴 식사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음식도 맛있었고 골칫거리가 사라진 후 3층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꽤 멋지게 느껴졌다.
차의원이 왜 그곳으로 가자고 했는지도 알았고.
그런데 일행이 세 사람인 이유는.
"아이고, 백의원님. 제가 선물을 너무 큰 걸 준비해서 어쩝니까? 제가 보관할 테니 저는 없는 셈 치고 두 분 편히 이야기 나누십시오!"
차의원이 유성에게 준 선물 보따리를 챙겨 들고 열심히 따라붙었기 때문.
"제가 들어도 됩니다. 오늘은 양의원님과 한잔하기로 해서요.
양의원이 따로 할 말이 있어서 청한 자리일 테니 차의원을 달고 가면 곤란해할 수 있다.
"나는 상관없네. 같이 가지."
"아, 그러시다면 같이 드시지요."
"아이고, 양의원님. 감사합니다! 오늘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백의원님도 감사합니다!"
의각 시험에 합격한 사실을 알고 차의원이 존대를 써 유성을 불편하게 했다.
의원과 하인의 관계에서 하인이 존대하기는 했으나 차의원은 같은 낙양 의방 의원 사이다.
"그리고 존대는 하지 마시고 이전처럼 대해주십시오."
"어찌 제가 미래의 상관님께..."
"상관이라뇨,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그리고 제가 불편해서 그렇습니다."
"불편하시면 안 되지. 큼, 그럼 평소처럼 하겠네. 백의원, 다시 한번 축하하네! 그리고 모르는 일이라는 건 조금 섭섭—"
"올라가시죠."
유성이 말을 끊었다.
차의원은 3층으로 안내받아 점소이에게 호기롭게 외쳤다.
"오늘은 내가 살 테니 이 집에서 가장 맛있는 안주와 술을 내오게!"
그도 돈을 잘 버니 한 끼 얻어먹는 건 문제 되지 않는다.
본인이 그렇게 사고 싶다는데.
양의원이 웃으며 물었다.
"백의원의 합격주인가, 아니면 내 위로주인가?"
"예? 그게..."
"농담일세. 잘 먹겠네."
평소 큰 표정 변화 없는 양의원이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지 스스럼없이 농담도 던졌다.
술이 몇 잔 돈 후, 유성이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아까 치료법을 알려주신다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양의원은 차의원을 바라보았다.
"차의원, 오늘 내가 하는 이야기는 웬만하면 다른 데 이야기하지 말아 주게. 자네를 위해서 그게 좋을 걸세."
"그럼요, 오늘 들은 이야기 모두 비밀로 하겠습니다."
차의원의 시원스런 대답 후 양의원이 밝힌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사실 나는 오늘 출제된 시험의 답을 모두 알고 있었네."
유성이 깜짝 놀랐고.
"그게 무슨...! 그렇다면 양의원님이 합격자가 되었어야 하지 않습니까?"
차의원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뭐야, 이야기가 왜 이렇게 되는 거지? 그럼 이의 제기하면 초대 의각주가 양의원님이 될 수 있다는 소린가? 내가 성급하게 줄을 잘못 선 건가? 아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상황을 보아 양의원님께 다시 충성을 다하면...'
양의원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며칠 전 있었던 일이네."
처음 보는 환자에게 귀한 책자를 받은 일.
모르는 희소병이 많아 크게 기뻐한 일.
시험에서 거의 같은 문제가 출제되어 당황한 일.
그것이 고의로 자신을 밀어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고 번뇌에 빠진 일.
이야기를 듣는 내내 심각한 유성과 차의원에 비해 털어놓는 양의원의 표정은 너무 편안해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 책자를 받기 전 알고 있던 지식으로만 시험을 친거네. 그걸 받아들여 이긴다 한들 스승님의 이름에 오히려 먹칠만 하는 꼴이라고 생각했네. 어쩌면 스승님이 꿈에 나온 것도 그런 이유일 수 있지."
"그러셨군요. 유혹을 이기기 힘드셨을 텐데 대단하십니다."
"물론 져 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네. 출제된 다섯 개의 희소병 중, 스승님께 배웠던 것도 두 개 포함되어 있었지.
전에 백의원 자네가 시중에서 구한 의서로 의술을 익혔다고 했기에 계산을 한걸세.
이런 희소병은 시중에 도는 의서로는 접하기 어려울 테니 내가 아는 대로만 적어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하지만 자네는 스스로 세 문제를 풀어냈으니 내 완벽한 패배일세."
유성은 감탄했다.
무림맹 의각에 꼭 합격하고 싶었던 상황.
그가 양의원과 같은 시험대에 올랐다면 어떤 선택했을지, 그 상황이 되어 보지 못해 알 수 없다.
"아이고, 양의원님은 정말 양심적이시고 대단하십니다. 의선께서도 이 사실을 알면 칭찬하실 겁니다. 자, 한잔 받으십시오."
차의원이 적절히 정적을 깼다.
이어서.
"그리고 더 대단하신 우리 백의원도 한잔 받게나.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치료법을 맞췄다는 소리가 아닌가? 자네는 정말 의술을 위해 태어난 사람일세. 초대 의각주는 당연히 자네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다시 술이 몇 차례 돌며 양의원이 문제로 출제되었던 치료법들을 공개했다.
"크, 오늘 제가 술을 산 보람이 있습니다. 귀한 처방을 몇 개 배웠습니다."
차의원의 너스레를 뒤로하고 유성이 양의원의 생각을 물었다.
"혹시 누가 그런 책자를 보냈을지 짐작해 보셨습니까?"
"나도 시험지를 받고 한참을 생각해 봤네. 그런데 나한테 그런 책자를 보낼 사람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더군. 분명 무림맹 내부 사람이 보냈을 게 아닌가? 시험 출제자와 관련이 있을 테니."
"틀림없겠지요."
"그래서 내 결론은 이거네. 아무래도 무림맹에 백의원 자네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네. 오늘 시험장에서 기색을 보아하니 의심스러운 사람도 분명 있었고."
유성도 동의했다.
모용림 장로.
오늘 그가 보여 준 모습들이 제일 수상했다.
의원들의 여론이 돌아설 무렵 적절히 흐름을 끊은 것도, 시험관과 주고받던 손짓, 그리고 남들은 잘 보지 못했지만 합격자 발표가 난 후 시험관과 슬그머니 이야기 나누던 모습 등.
양의원도 언급하지 않았으나 같은 생각인 듯했고.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천벌을 받을 놈이로군. 누군지 알게 되면 나한테도 꼭 알려주게. 혹시 날 찾아오면 몇 달간 고생할 만한 위치에 침을 놓아줄 테니."
그 자리에 없었던 차의원은 누군지도 모르면서 적의를 불태웠다.
잠시 후.
쿠울—
술이 약한 차의원이 금세 뻗어 버렸다.
백호단주와 함께 술을 마셨을 때도 위태위태 할 정도로 술이 약했다.
오늘은 축하주랍시고 한잔, 위로주랍시고 한 잔씩 권하더니 더 빨리 취한 듯했다.
커다란 보따리를 대신 들어 준다더니 보따리보다 더 큰 짐 덩어리가 생겨 버렸다.
"자네는 술이 정말 세군."
"아, 잘 취하지 않는 편입니다. 양의원님도 멀쩡하시군요."
"난 일부러 천천히 마셨네. 차의원이 술 약한 건 잘 알고 있었고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하나 더 있었거든."
어떤 이야기일지 궁금하다.
유성이 귀 기울였다.
"내가 스승님과 자주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이야기는 들었나?"
"네. 들었습니다."
"그동안 자네 이야기를 몇 번 적었네. 자네가 알려 준 심장 압박에 대해서도 말씀 드렸고, 척마대주를 치료한 일도 알려드렸지."
"그러셨군요."
"그리고 이번엔 자네의 그 신기한 영술을 사용한 의술에 대해 적을까 하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이야기들을 꺼내는지 의아해하는 유성에게.
"어쩌면 스승님이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하실지도 모르네. 난 도움이 되지 못했으나 자네라면 스승님을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르거든."
"혹시 의선께서 은거하신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네."
제자도 모르는 일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의선의 상황도 복잡한 듯했다.
"저도 기회가 되면 의선을 만나뵙고 싶군요."
술자리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이제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았다.
탁자 위에 엎드려 뻗어 있는 커다란 짐.
'이제 저 짐 덩어리는 어쩐다?'
아무리 그가 밥을 산다고 호언장담 했지만 술 먹고 뻗어 버린 사람 전낭으로 계산하기도 그렇고.
***
의각 시험에 합격했다고 곧바로 그곳에서 근무하지는 못한다.
의각의 개조도 끝나지 않았고 하인을 구하고 약초를 납품 받들 약초상도 결정해야 하는 등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유성은 곧 낙양 의방을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전했고, 진료를 시작하자마자 의외의 요청을 받았다.
"오늘 저녁에 낙양 의방의 주인께서 저를 보고 싶다고 하셨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눈앞에는 화려하게 치장한 삼십 대 초반의 여인이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본판도 미인인데 그 누구보다 잘 꾸며 화사하다.
소옥이라는 이 여인은 처음 유성이 낙양 의방 시험을 합격하고 들어왔을 때 얼굴을 본 적 있다.
'낙양 의방 주인의 대리인.'
처음에는 얼굴도 보이지 않고 대리인을 보냈던 의방 주인이 유성을 보자는 연락한 거다.
'그만둔다고 말을 전달하자 마자 보자니, 설마 날 회유할 속셈은 아니겠지?'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다.
다른 의원들에게 듣기로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어도 유성이 이 의방에 들어온 후로 매출이 이할은 더 늘었다고 한다.
유명한 의원이 곧 의방의 수입으로 직결되니 의방의 주인이 나서서 무림맹에 가지 말라고 말리려는 게 아닌가 우려되었다.
"혹시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붙잡으려는 의도는 아니니 안심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의방의 주인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간단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 물었다.
"상인이세요."
용무를 마친 소옥이 돌아간 후, 두 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무림맹 소속이라는 특권으로 거의 첫 번째를 놓치지 않는 그녀는.
"어제 양의원님과 자리는 즐거우셨어요?"
두통을 치료하기 위해 방문한 제갈영영이다.
"어서 오십시오. 덕분에 즐겁게 마셨습니다. 아, 두통은 좀 어떻습니까? 어제 치료를 못 해드린 것 같아 좀 신경이 쓰였습니다."
제갈영영이 머리를 만졌다.
유성의 시선이 그녀의 정수리 부근으로 향했다.
빨리 찌르고 싶다.
다시 한번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런 욕망이 스르륵 올라왔으나.
"어머, 걱정해주신 거예요? 어제는 일부러 공부를 쉬어서 괜찮아요. 오늘은 아프긴 하지만 저번 만큼 최악은 아니에요."
"아, 뭔가 공부한 날만 머리가 아픈 겁니까?"
"네. 이제 백의원님이 무림맹 소속이 되실 테니 진료 일정만 정확히 알려주시면 저번과 같이 추한 모습은 보여드릴 일 없을 거예요."
추하지 않았습니다.
가능하면 영상으로 찍어놓고 평생 소장하고 싶었어요.
애써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두통을 치료해주자 제갈영영이 물었다.
"오늘 저녁에는 뭐 하세요? 별일 없으시면 저녁 식사 하면서 축하 자리라도 가져요."
"어쩌죠? 오늘도 약속이 있어서요. 내일 드시죠."
"그래요? 항상 바쁘시네요. 오늘은 또 누구랑요?"
유성은 솔직하게 오늘 낙양 의방의 주인에게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알렸다.
"상인이라고 하시더군요. 솔직히 의외였습니다. 상인이 의방을 운영하고 있을 줄이야."
"그렇게 소개하셨군요. 틀린 말은 아니네요."
"총군사님은 주인분이 누군지 아시나보군요. 저는 이 전까지 대리인만 봐서 전혀 모릅니다."
제갈영영이 미묘한 말을 남겼다.
"알긴 하지만 초대받으셨다니 직접 만나 보시는 편이 낫겠어요. 한동안 누굴 만나신 적 없는 것 같은데 신기하네요."
아무래도 평범한 상인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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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의 모든 사람이 알게 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의방을 찾는 환자들은 무림맹 의각 시험의 결과를 알고 있다.
모름지기 환자의 관심사는 얼마나 더 뛰어난 의원에게 진료를 받을 수 있지는지가 아니겠는가?
그를 위해 부유한 사람들은 기꺼이 더 비싼 진료비를 치르고 낙양 의방을 찾는 것이다.
지금 주욱 늘어선 줄이 현재 유성이 차지하는 위상을 말해주었다.
도저히 오늘 안에 처리가 불가능한 수준의 대기줄에, 유성은 그의 담당 하인 장칠의 도움을 받아 환자들 일부를 옆으로 보냈다.
"차의원님도 실력이 뛰어나신 분입니다. 다행히 가벼운 질병이니 차의원님이 치료해주실 겁니다."
"저는 백의원님께 받고 싶은데요."
간혹 고집을 부리는 환자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유성의 말을 따라주었다.
"아이고, 백의원. 항상 고맙네! 자네가 여길 떠나면 나 혼자 어찌 이곳을 헤쳐 나갈지 눈앞이 깜깜하네."
진료가 끝난 후 차의원이 달려와 어제 술값이라고 돈을 내밀며 한 말이다.
"돈은 됐습니다. 제가 합격해서 산 것으로 하시죠. 그래도 양의원님이 있지 않습니까?"
"에잉, 양의원님은 일 진료실이라 너무 멀어. 그리고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이제 난 자네 뿐이니 절대 그 사실을 잊지 말게."
의각 인원을 충원할 때 꼭 자기를 제일 먼저 떠올려 달라는 차의원.
솔직히 유성은 실력 면은 모르겠지만 이제 차의원의 얼굴이 제일 떠오를 것 같기는 하다.
워낙 질척거려서 말이다.
"저는 실력 없는 사람을 뽑을 생각은 없으니 그동안 의술에 더 정진하시면 좋겠습니다."
"물론일세! 새로 들어올 의원들을 포함해 이곳에서 제일 뛰어난 실력을 갖추도록 노력하겠네! 아, 물론 양의원님은 빼고."
제 이 진료실을 차지하던 조의원이 사라지고 유성도 곧 그만둘 예정으로, 낙양 의방의 시험이 다시 열릴 예정이다.
아마 무림맹 의각 시험을 치른 의원들의 상당수가 이곳에 도전할 것으로 보인다.
유성은 마무리 정리하고 의방을 나섰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타시지요."
소옥이 의방 앞에 화려한 마차를 세워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약속된 일정이라 유성이 마차에 올라탔다.
"하인을 보내시지 않고 직접오셨습니까?"
낙양 의방 주인의 대리인이라면 이 여자도 꽤 대단한 위치일 거다.
"그 분이 모신 손님이니 당연히 제가 와야지요."
마차는 꽤 번화가라 할 수 있는 낙양 의방에서 큰길을 지나 고급스러운 저택들이 늘어선 곳으로 진입했다.
마차는 그중에서도 크고 화려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어서 오십시오."
문지기, 마당을 쓰는 하인들, 분주히 돌아다니는 하녀들.
'다들 자세가 꽤 잡혔어.'
소옥이 무공을 익힌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 저택 안에 조금이라도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과연 평범한 상인 집단은 아닌 듯했다.
소옥이 한 하인을 손짓해 불렀다.
"어르신은 어떠신가?"
"오늘 무척 좋으십니다."
휴우.
소옥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성은 꼭 그게 안도의 한숨처럼 들렸다.
"들어가시지요."
소옥의 안내받아 저택 깊숙한 곳으로 향한 곳에는, 약 육십 대 정도로 보이는 노파가 맑은 눈을 빛내며 앉아 있었다.
그녀가 실질적인 낙양 의방의 주인이다.
"어서 오세요. 내가 낙양 의방의 주인 정연이에요. 백의원님을 실제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네요."
인사를 나눈 후 유성은 그녀가 그를 청한 이유를 들을수 있었다.
"사실 내가 백의원님의 실력이 좋다는 소리를 듣고 부탁할 일이 하나 있었어요. 그런데 무림맹으로 적을 옮기신다고 하니, 이렇게 따로 자리를 마련해 부탁할 수밖에요."
"몇 달 일하지도 않고 떠나게 되어 저도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탁하실 일이라는 게 어떤겁니까?"
유성은 내심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무림맹과 낙양 의방이 아무 관계가 없다면 모를까, 엄연히 계약을 맺고 있는 곳이다.
실질적으로 낙양 의방에서 일한 시간이 짧았고 사전에 상의 없이 무림맹으로 자리를 옮기는 셈이 되어 약간 마음의 빚이 있었다.
간단한 부탁이라면 들어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기루를 몇 개 운영하고 있어요. 데리고 있는 기녀들이 많은데, 원래 백의원님께 그 아이들의 병을 봐달라고 부탁하려고 했었답니다."
"기녀들이요?"
상인이 웬 기녀란 말인가?
설마 여자 장사를 한다는 소리일까?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일 하는 사람보고 제갈영영이 존중을 보이지 않았을 것 같다.
게다가 기녀들이라고 의원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낙양 의방은 무리더라도 다른 의원들에게 진료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유성의 의아한 표정을 읽었는지 정연이 부연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왜 낙양 의방을 세웠는지 아세요?"
"모릅니다. 특별한 사정이 있었습니까?"
"사실 낙양 의방을 세웠을 때 이렇게 잘 될 줄 몰랐어요. 난 그저 뛰어난 의원들을 모아 내 아이들이 마음 놓고 치료받을 수 있는 곳을 세우려 했을 뿐인데 내 생각보다 낙양 의방이 더 유명해졌어요.
부유한 자들 뿐만 아니라 높은 관리들까지 찾는 곳이 되어 버렸죠."
유성도 그런 환자들을 몇 명 받아보았다.
천민들과 말도 섞고 싶어 하지 않는 고위 관리들.
그들의 거만함은 가끔 유성조차 피해가지 못했다.
유성은 어렴풋이 정연이라는 노파가 이런 부탁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들은 천한 기녀들이 낙양 의방에서 진료 받는 걸 원치 않아요. 난 내가 세운 의방에 내 아이들을 보낼 수 없게 되었지요. 낙양 의방을 포기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커졌거든요."
"그랬군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저는 무림맹 소속이라 일반 환자를 마음 놓고 받지는 못합니다. 그들이 무림맹에 출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구요. 물론 무림맹에 들어가기 전에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정연이 빙그레 웃었다.
눈가에 주름이 많았으나 사람이 선해 보인다.
"지금도 휴무일마다 빈민가의 사람들을 치료하는 좋은 일을 하신다지요?"
이미 소문이 많이 퍼져 있는 일이다.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백의원님은 무림맹에 들어가셔도 그 일을 계속하실 거예요. 맞나요?"
"그렇습니다."
무림맹에 긴급 환자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무림맹에도 분명 휴무일이 있고, 유성은 집에서 쉬면서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때도 신성력을 꽤 늘려주는 빈민가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보낼 생각이었는데, 정연이 그 일을 짚은 것이다.
"그 일을 도와 드릴게요. 멀리 가실 것도 없이 무림맹 인근에 치료 장소를 마련해주고 빈민가 사람들을 모아줄게요. 약재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제공해주고. 그때 제 아이들도 함께 봐주시면 어떨까요? 제 아이들에 대한 치료비는 따로 지급할게요."
"그건..."
"다른 의원들은 제 아이들이 앓고 있는 괴질을 치료하지 못하더라구요. 꼭 부탁할게요."
"괴질이요?"
"부끄럽지만 남자를 상대하는 기녀들이 걸리는 병인데, 다른 의원들은 증상 완화를 시켜 줄 수 있으나 완치시켜 주지는 못했어요. 이번 휴무일부터 곧바로 가능해요."
잠깐 생각해봤지만 유성에게 전혀 손해되지 않는 일이다.
빈민가에는 흑도 무리들도 돌아다니기에 유성도 긴장해야 했다.
치료가 필요한 빈민들을 알아서 모아준다니, 정연의 제안은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리고 기녀들이 앓는 괴질이라면 몇 가지 짚이는 것도 있다.
이 당시 불치병으로 분류되고는 했으니.
"거절할 수 없겠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유성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대로 순조롭게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줄 알았다.
"넌 누구지? 내 아들은 어딨어!"
정연이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르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조금 전의 맑은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눈에 노기를 띠고 유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약간 탁해 보이기도 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유성이 물었으나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소옥이 얼른 소리쳤다.
"어르신이 발작하신다! 다들 들어오게!"
하인들과 하녀들이 우루르 들어와 정연을 감쌌고, 소옥이 유성을 잡아끌었다.
"잠깐 어르신의 상태가 안 좋으시니 이만 가시지요. 조금 전 말씀하신 것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거예요."
유성은 망연한 표정의 소옥을 따라 나가면서 의심이 들었다.
소옥이 처음에 하인에게 정연의 상태를 물은 것도 지금 보면 이상했고, 갑자기 돌변한 정연의 모습에서 의심 가는 점이 있었다.
"어르신은 언제부터 저러셨습니까?"
"...이미 보셨으니 할 수 없지요. 백의원님을 믿고 말씀드릴 테니 다른 곳에 가서 말하지 말아 주세요. 사회적 지위가 있으셔서 수치스러워하실 거예요."
제갈영영이 말한, 한동안 활동이 없었다는 것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러겠습니다."
"어르신이 노망이 난 건 2년 전쯤이에요."
"노망이요?"
"네. 원래 이 나잇대쯤 되면 가끔 나타나잖아요."
소옥은 노망이라고 표현했으나 유성은 다른 질병을 의심했다.
유성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정연의 상태에 대해 잘 알 수 있었다.
증상이 나타나면 자꾸 깜빡하는 것은 예사로, 잠시 전 나눈 대화도 금세 잊어버린다.
모두가 잠든 밤에 집안을 돌아다니다가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하인이 제지했다고 하고.
가끔은 가장 아끼는 소옥도 몰라보고 예전에 죽은 아들만 찾는다고 한다.
방금 유성의 앞에서 보인 모습처럼 말이다.
'이거 치매 증상이잖아? 하긴, 이 시대에서 밝혀진 병은 아니지.'
노망, 노환의 일종으로 분류되다가 치매가 질병으로 정립된 것은 현대의 일이다.
유성이 이것저것 캐묻자 소옥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꼭 진단을 하시는 것처럼 그러시네요. 혹시 병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다른 의원분들도 여럿 다녀가셨지만 그냥 노망이라고 하셨는데요."
모르는 것을 보고 병이라고 선뜻 단정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들은 아마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대로 노망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정연의 나이도 적지 않고.
사실, 다른 의원들은 알아도 고칠 방법도 없는 게 사실이다. 현대에서도 해결하지 못한 병이니까.
하지만 유성에게는 아니다.
"저는 정연 어르신이 병을 앓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제가 한번 살펴봐도 될까요?"
"그게 정말인가요? 노환이나 노망이 아니라요?"
"노망이 아니라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병일 가능성이 큽니다. 치료 될 가능성이 있다면 시도해 봐야지 않겠습니까?"
소옥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가 소속된 집단의 장이 아니더라도 정연은 소옥에게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다.
아들을 잃고 소옥을 거의 양녀처럼 대해준 고마운 분이 노망으로 이곳에 틀어박혔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극히 줄어들었다.
노망이 난 것을 들켜 사회적 지위가 손상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다만 노망 증상이 나타나는 주기가 있어서 오늘 아무 일이 없을 거라 여겨 잠시 유성과 만남을 가진 것인데.
'백의원을 신의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그의 실력은 믿을 만하다. 차라리 오늘 들킨 일이 잘 됐다.'
소옥은 유성을 향해 크게 허리 숙였다.
"만약 정말 어르신을 치료해주신다면 저는, 아니, 저희는 백의원님께 커다란 은혜를 입게 됩니다. 부디 어르신을 살펴주세요."
하인 전원이 조금씩이라도 무공을 익힌 상인 집단.
그들에게 은혜를 입힐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유성은 치유 스킬이 과연 치매에 효과를 발휘할지 알 수 없지만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꼭 지금은 안 되더라도 언젠가는 치료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다시 어르신께 안내해주십시오."
그러나 소옥이 다시 유성을 정연에게 안내할 때, 십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온 남자가 막아섰다.
"사매, 지금 무슨 짓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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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산파의 장로 진영주는 바깥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가는 길에 상단 한곳을 방문했다.
그곳은 진영주의 친척이 운영하는 곳으로, 문파 밖으로 나왔을 때마다 한 번씩 들리고는 해서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한 소녀를 만난 일은 특별한 일이 되었다.
'이렇게 충만한 영력이라니, 몇 달 전에 봤을 때는 이렇지 않았거늘 언제 영력이 이렇게 충만해졌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속성이 섞여 있긴 하지만 원래 영력의 속성은 다양한 법이니 문제 될 것도 없고.'
진영주는 소녀, 진은선에게 캐물을 수밖에 없었다.
"은선아, 혹시 몇 달 사이에 무슨 큰일이 있었느냐?"
"네? 고모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보니 네 몸에 영력이 넘치는구나. 분명 큰일이 있었을 것이다. 정말 기억나는 일이 없느냐?"
진은선은 곧 그녀가 죽다 살아난 일과 신비한 존재를 만난 일에 대해 대충 털어놓았으나 진영주가 큰 관심을 보였기에 상세히 고할 수밖에 없었다.
"넌 정말 큰 고비를 넘겼구나. 네가 만난 영적인 존재는 살아 있는 일반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마 죽다 살아난 일이 네게 대단한 기연이 된 모양이구나."
"그게 좋은 건가요?"
"당연하다. 너는 그 일로 무림인들이 꿈에도 이루길 원한다는 상단전을 개방한 것이다. 네 충만한 영력이 상단전 개방의 증거다. 아마 조금만 늦었으면 죽을 뻔했던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음이 틀림없다."
"의원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마 조금만 늦었다면 죽거나 죽는 것만 못한 상황이 되었을 거라구요."
"그렇구나. 은선아, 그럼 혹시 너는 날 따라 모산파로 갈 생각이 있느냐? 네 재능이라면 너는 몇 년만 지나도 대단한 영술사가 될 수 있을 거다."
"그럼 제가 무공을 배우는 건가요?"
"무공과는 조금 다르다. 내공을 쌓아 무술을 수련하는 것과는 달리 영술사는 영력을 키워 술법을 익히고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몸담은 모산파가 바로 천하의 영술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란다."
그리고 영술사는 흔한 무림인과 달리 아무나 될 수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영력을 수련으로 쌓는 속도는 매우 느리기 때문에 타고나지 않으면 불가능 했으니까.
진영주는 진은선이 곧 그러겠다고 할 줄 알았다.
어렸을 때부터 신기한 술법들을 보여주면 진은선은 진영주를 대단하다고 치켜세우며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 고모님을 따라가는 건 어렵겠어요."
"무슨 이유가 있느냐?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하다니. 네 아버지도 흔쾌히 그러라고 할 것인데."
진영주는 진은선의 재능이 아까워 거듭 권유했다.
"그럼 백의원님께 물어보고 결정해도 될까요? 며칠 후에 진료 예약이 되어 있으니 그때 가서 물어볼게요."
"...백의원이 누구길래?"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그분께서 제게 무공을 익히는 게 좋을 거라고 하셨거든요."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도 그렇지 영술을 배울지 무공을 배울지도 그의 허락을 맡아야 한단 말이냐?"
"죄송하지만 제게는 그분의 말씀이 제일 중요해요."
"할 수 없구나."
진영주는 진은선이 고집을 부리자 함께 백유성을 만나러 가기로 하고 며칠간 진은선의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매일 진은선의 영력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수련으로 늘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진영주가 알기로 영술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선천적으로 타고나야 한다. 모산파에서 다루는 것은 주로 타고난 영력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으로, 후천적으로 영력을 늘리는 것은 너무 효율이 나빴다.
'지금도 은선이의 영력은 대단한 수준이지만 매일 이 정도로 영력이 늘어난다면 전대미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드시 은선이를 모산파로 데려가야 한다.'
***
유성이 매일 만나는 무림맹 사람은 이제 두 명이 되었다.
아침마다 모종의 일로 생긴 두통을 치료하고 가는 제갈영영, 그리고 암을 치료 중인 척마대주였다.
모든 신성력을 쏟아 부으면 보름 안에 척마대주의 암을 치료할 수 있었으나 굳이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비록 척마대주의 치료를 성공하면 신성력이 확 늘어날 것이지만 그동안 다른 환자들을 보는데 지장이 생기게 된다.
게다가 완치가 아니더라도 척마대주는 조금씩 호전되는 몸 상태를 느끼고 유성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오늘도 척마대주를 치료한 후, 다음으로 들어 온 환자는 바로 진은선이었다. 그녀는 평소 보호자로 함께 오던 아버지 대신 모르는 중년 여인과 함께였다.
"이분은 제 목숨을 구해주신 백유성 의원님이시고 여기는 제 고모님이세요. 모산파의 장로직을 맡고 계세요."
"반갑습니다. 진영주라고 합니다."
유성은 인사를 나눈 후, 왜 진영주를 자신에게 소개하는지 어리둥절했으나 먼저 할 일 했다.
"은선아, 진맥 결과 별다른 이상이 없구나. 이제 그만 지켜봐도 될 것 같구나."
"감사합니다, 은공. 그런데 무공을 배우는 일로 고모님께서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세요."
진영주가 나섰다.
"듣기로 은선이에게 건강을 위해 무공을 배우라고 했다던데 꼭 무공일 필요가 있습니까?"
"무조건 무공을 배우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한번 사고가 있었으니 건강을 위해 무공을 배우면 좋겠다고 권했을 뿐입니다."
진영주가 진은선을 한번 흘겨보았다.
들어 보니 유성이 강력하게 권한 것 도 아니었건만 진은선이 고집을 부린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주 시집도 백의원님이 정해주는 상대에게 갈 기세로구나."
"시, 시집이요?"
'백의원님이 시집오라고 하시면 난 어쩌지?'
진은선이 망상에 젖어 고개를 푹 숙였고 유성은 진영주와 대화를 나눴다.
"다만 무공이 아니라면 무엇을 익히게 할 생각이십니까?"
"모산파의 영술입니다. 이 또한 몸을 건강하게 해주니 은선이게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영술이요? 제가 견문이 짧아 모산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혹시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진영주는 신비문파인 모산파의 영술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와 동시에 진은선이 갑자기 영력이 생긴 점, 그리고 혹시 몰라 영력이 크게 늘어나는 부분에 대해서도 유성의 생각을 물었다.
진은선이 크게 믿고 있는 의원인데다 직접 비법이라는 것을 통해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무언가 알고 있는 바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성은 영력이 크게 늘어난다는 설명을 듣고 진은선이 매일 그에게 축원을 올린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은선이는 축원을 올린 후 충만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혹시 그건 신성력이 몸에 쌓이는 현상이 아닐까? 나 역시 처음 가이아 여신에게 기도를 드린 후 신성력이 쌓일 때 충만감을 느낀 적이 있으니까.'
유성은 다시 진은선을 진맥해 보았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맥박을 파악한 것이 아니라 신성력을 흘려보냈다는 것이다.
맥문을 통해 거슬러 올라간 유성의 신성력은 마침내 진은선의 가슴부근에 도착했다. 진영주가 상단전이라고 칭하는 그 위치였다.
게임 속 설정인지, 이 세계의 상단전은 가슴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정말 신성력이 있구나! 영력의 존재는 모르겠지만 분명 신성력이 느껴진다!'
놀라운 발견이다.
유성은 신성을 얻었으나 이를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정도로 받아들였지 자신이 신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진은선은 그에게 기도를 올린 후 약간의 신성력을 되돌려 받고 있었다.
'단순히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고 신성력이 쌓이는 건 아닌 듯하다. 매일 신성력으로 척마대주의 가슴 부근을 살폈지만 그에게서 신성력이 발견된 적이 없다.'
사제는 신과 소통하는 자다.
그렇다면 상단전이 열릴 정도로 영력이 큰 자들이 바로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혹시 저에게도 영력이 느껴집니까?"
"왜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영력을 타고납니다. 백의원님도 남들보다 많은 영력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영술사가 되기에는 부족하군요."
타고난 영력이 미미했던 유성은 신성력을 쌓고 있음에도 아직 진영주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그렇군요. 은선이와 독대하고 싶으니 잠시만 시간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럼 대기실에 있을 테니 의원님과 이야기 나누고 오거라."
"네, 고모님."
진영주가 멀리 사라진 후, 유성은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진은선을 불렀다.
"은선아, 고모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영력이 크게 늘어나는 부분이 네가 나에게 축원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정말요?"
"그래서 말인데, 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구나."
진은선의 눈이 반짝였다.
"뭐든지 맡겨 주세요."
유성은 진은선에게 몇 가지를 알려 준 후 돌려보냈다.
'은선이가 잘해주겠지. 어쩌면 신성력을 쌓는 속도가 비약적으로 늘어날지도 모른다. 대신 확실해 지기 전에는 은선이의 고모에게 비밀로 해야겠다.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
유성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
백유성이 자리에 없을 때, 여러 의원들이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조의원은 매일 척마대주가 유성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코웃음 쳤다.
"양의원님은 말이 된다 생각하시오?"
"척마대주를 치료하는 일 말이오?"
"그렇소, 의선께서도 가슴과 배를 갈라 온몸의 악성종양이 전이 된 장기를 절제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백의원이 아무리 난다긴다 해도 절대 치료하지 못할 것이오. 듣기로 이번에도 침이나 놓는다고 하오."
양의원도 조의원의 말에 동의하는 바다. 이번에는 방법을 알면 따라 할 수 있는 심장 압박과는 그 결이 달랐다.
다만 척마대주가 이미 유성을 선택했으니 왈가왈부하지 않을 뿐이다.
"어차피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그쯤 하는 게 좋겠소. 백의원도 다 생각이 있지 않겠소?"
"흥, 생각은 무슨. 요즘 사람들이 좀 칭찬해주니 거만해져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하는 것이지요."
요즘 유성에게 친한 척 달라붙어 있는 차의원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로는 치료가 순조롭게 되고 있다고 했습니다만..."
조의원의 눈이 번뜩였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백의원이 그러더군요. 척마대주님을 치료하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자네도 그런 헛소리에 속는단 말인가? 가만... 혹시 이거 백의원이 척마대주를 속여 기만하는 것이 아니오?"
"..."
"아니, 그렇지 않소? 생각들 해 보시오. 저 남쪽 지방에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용해 먹는 종교가 창궐한 적이 있다지 않소? 척마대주님이 아무리 무공 고수라도 죽음 앞에선 판단력이 흐려질 수밖에 없을 거요."
양의원은 유성이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럴 리 있겠소? 백의원이 무엇을 얻기 위해 그런 위험한 짓을 하겠소."
"그야 모르지요. 척마대주님은 초절정 고수니 뭔가 이용해 먹을 곳이 있다고 생각했다던지. 얼마 남지도 않은 귀한 시간을 여기서 허비하고 계시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소."
조의원은 선동을 거듭했으나 생각보다 다른 의원들의 호응이 없었다.
전에는 양의원 다음가는 자기 말에 대부분 귀를 귀울였을 텐데 요즘에 그의 위상이 크게 떨어진 것이다.
심지어 척마대주는 유성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조의원 자신을 무서운 눈빛으로 바라볼 뿐 대화에도 응하지 않았다.
'흥, 이번에는 그놈이 악수를 둔 것이다. 척마대주가 죽기만 해 봐라. 무림맹에 조사를 의뢰해서라도 기필코 낙양 의방에서 쫓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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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소옥보다 몇 살 더 많아 보였는데 꽤 곱상한 외모였다.
소옥이 나서서 유성을 소개했다.
"사형, 이분은 이번에 무림맹 의각에 합격하신—"
"누가 그걸 몰라서 묻느냐? 문주님이 저 상태일 때 아무도 들이면 안 된다는 걸 모르느냐?"
"증상이 없으시다가 이야기중에 발작 하셨어요. 이제 와서 막아도 무의미해요. 그리고 백의원님께 제가 치료를 부탁드렸으니 비켜 주세요."
소옥이 길을 터주기를 요청했으나 사형이라 불린 사람은 길을 비키지 않았다.
"연세가 드셔서 노망이 난 걸 무슨 수로 치료한단 말이냐?"
"가능성이 보여서 시도해볼 생각이었습니다."
"아무리 백의원이라도 병이 아닌데 어떻게 치료한단 말입니까? 헛수고 말고 돌아가십시오."
상대가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병일 수도—"
소옥이 유성을 말렸다.
"일단 오늘은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백의원님. 머지 않아 발작이 사라지실 테니 그때 다시 부탁할게요."
"알겠습니다."
소옥이 다시 마차로 유성을 태워주었다.
"혹시 여기는 하오문입니까?"
"...굳이 숨길 일은 아니죠. 맞아요, 우리는 하오문이에요. 문주님이 일반인을 만나실때는 하오문인 걸 티 내지 않으셔서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녀, 상인, 문파.
세 가지를 조합해 보니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했다.
상인은 정보 상인을 뜻하는 것 같다.
하오문은 기녀, 점소이, 마부, 소매치기, 도박꾼 등 밑바닥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
하오문의 설립 목적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함으로, 그들이 가져오는 정보를 가공해 팔아먹는 정사지간의 문파다.
소옥은 하오문주의 제자인 모양이다.
"사형이라는 분과 사이가 안 좋아보이십니다. 당장 문주님을 치료하는 건 좀 힘들겠군요."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문주님이 곧 정신을 차리실 테니 다시 연락 드릴게요. 그때는 사형도 막지 못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마침 이틀 후 휴무일이니 그때부터 빈민가 사람들을 모아주시는 것 맞습니까?"
"네, 그건 제가 책임지고 진행할게요."
***
이튿날, 드디어 유성은 제갈영영과 식사할 수 있었다.
"저는 백의원님이 당연히 합격하실 거라 생각했어요.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양의원님과 근소한 차이였습니다. 양의원님도 대단하신 분입니다."
"몰라요. 저한테는 백의원님이 의선보다 더 뛰어나신 의원이에요."
맹목적인 신뢰를 받는다는 건 꽤 즐거운 일이다.
유성이 흡족하게 웃었다.
"앞으로는 두통 때문에 고생하시지 않도록 더 열심히 치료해드리겠습니다."
"그 말 꼭 기억할게요. 그리고 제 두통치료도 영술이라는 걸로 해주신 거 맞죠?"
"그렇습니다."
제갈영영은 가문에서 전해지는 천문진법총해 역시 무언가 신비로운 힘이 작용하는 거라고 여겼기 때문에 영술의 존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유성이 더 대단해 보였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오직 유성만 자신을 치료해 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절대 안 놔줘야지. 두 번째 진법을 익히는 건 첫 번째 진법보다 훨씬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어. 아마 백의원님이 없으면 나도 고작 두 번째 진법을 익히는 게 끝일 거야.'
유성의 의각 시험 합격, 그리고 영술을 활용한 치료법에 대한 이야기 후에, 화제는 어제 일로 넘어갔다.
"낙양 의방의 주인은 만나 보셨나요?"
"네, 어제 만나고 왔습니다. 총군사님은 그분이 하오문주라는 걸 알고 계셨지요?"
"맞아요. 무림맹에 큰 도움이 되는 분이시죠. 아시다시피 하오문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개방과 또 다르거든요.
전에 몇 번 뵌 적이 있는데 몇 년 전부터 대외활동을 중단하셔서 소식이 궁금했어요."
제갈영영은 하오문주의 상태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눈치다.
하오문에서 바깥으로 새어 나가는걸 막고 있으니 그녀로서는 알 수 없을 거다.
당연히 유성도 비밀을 지켰다.
"좋은 분이시더군요. 문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기녀들의 치료를 부탁하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유성을 직접 만났을 정도.
유성은 자기 사람을 잘 챙기는 정연같은 사람이 좋았다.
"맞아요. 좋은 분이시죠. 이전에 하오문은 돈이 된다면 정사지간을 가리지 않고 정보를 팔았는데 정연 문주님은 정파에 훨씬 호의적이세요."
"정연 문주님이 오랫동안 하오문주의 자리에 계시는 게 좋겠군요."
"그렇죠. 그쪽 후계 문제가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어요."
"후계… 그런 걸 저에게 말씀해주셔도 됩니까? 기밀 아닙니까?"
제갈영영이 살짝 웃었다.
"백의원님이 무림쪽 일에 관심을 안 가지셔서 그래요. 낙양의 무림인들이라면 대부분 아는 이야기예요. 어쩌면 여기 다른 층에서 사람들도 그 이야기 중일 수도 있죠."
"그렇군요."
유성의 주위에서 그런 이야기를 전해 줄 사람은 제갈영영 아니면 차의원 정도였다.
차의원은 무림쪽 일은 크게 떠들지 않으니 굳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유성이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았어요? 맛있네요."
"차의원이랑 몇 번 와봤습니다."
유성이 아는 주루는 한 곳 뿐이라 자연스럽게 제갈영영을 여기로 안내했다.
유성은 소옥과 그녀의 사형이라는 사람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사형이라는 사람은 좀 별로였지.'
이곳 상식으로 치매가 질병이 아니라 늙어서 생긴 것으로 여겨져도, 유성이 한번 치료를 시도해 보겠다는데 그걸 막아섰다.
제자라는 사람이 되어 할 짓은 아니다.
'어쩌면 다른 꿍꿍이가 있을 수도. 후계 다툼이라, 소옥에게 별일 없겠지?'
잠깐 생각에 잠긴 유성의 귓가로 제갈영영의 음성이 들려온다.
"지금 저한테 집중 안 하고 누구 생각해요?"
"아무도요. 음식 맛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상한데..."
제갈영영이 탐색하듯 살폈으나 유성은 모르는 척 젓가락을 들어 여러 음식을 맛보았다.
***
며칠 후, 유성의 휴무일이 되었다.
전날 소옥이 사람을 보내 데리러 온다는 소식을 전했기에 유성은 약속 장소로 나가 기다렸다.
이제 굳이 치안 나쁜 빈민가까지 가지 않아도 하오문에서 마련해 준 장소에서 진료만 보면 된다.
빈민가 사람들을 모아 치료 받을 수 있도록 옮겨 주기로 했으니까.
마차로 그를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며, 유성은 사람들을 구경했다.
상점가를 오가는 평범한 사람들과 여러 무림인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다.
그런데.
"좀 늦는데. 무슨 일 있나?"
한참을 기다려도 소옥이 오지 않았다.
그녀가 직접 오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라도 보낼 텐데 유성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쉽게 약속을 어길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한 일이네. 오늘은 직접 빈민가로 가야 하나?'
포기하고 그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한 사람이 상점가 골목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유성님."
돌아보자 항상 소옥을 태우고 왔던 마부였다.
마차도 없이 맨몸이었으나 그의 얼굴이 확실하게 기억났다.
"아, 조금 늦으셨군요. 소옥님은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마부의 표정이 좋지 못했으나 유성은 그가 늦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유성님, 저희 소옥님을 좀 도와주십시오. 지금 방혁님 때문에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방혁님이라면..."
"아, 소옥님의 사형입니다."
하오문의 후계 문제가 복잡하다더니 사건이 터진 것 같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
소옥은 유성이 다녀간 후, 하오문주 정연이 머지 않아 정신을 차릴 줄 알았다.
어쩌면 정연이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생겼다.
대단한 의술 실력을 가진 유성이 노망이 아닐 수 있다지 않은가?
경쟁관계에 있는 사형이 꼬투리를 잡기 위함인지 소옥을 방해했으나, 정연이 제정신을 차리면 이제 유성을 다시 초청해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보통 정연이 발작 증세를 보이면 머지 않아 제정신을 차리고는 했다.
그 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중에 전해 듣고 나서 한탄하고는 하셨는데.
정연은 이번에 발작 후 기절하여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셨나?"
"예, 여전히 잠들어계십니다."
"이렇게 오래 깨어나지 못하신 적이 없는데 이상하구나. 깨어나시면 곧바로 알려다오."
하녀들에게 정연을 잘 보살펴달라 부탁한 소옥은 유성과 약속한 일을 처리해나갔다.
치료가 필요한 빈민가 사람들을 파악해 마차를 배정하고.
괴질을 앓고 있는 기녀들의 일정을 조절하여 유성의 휴무일에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고.
약재 수급도 신경 쓰고.
직접 여러 일들을 처리하던 중, 소옥은 하오문 장로들의 호출을 받게 되었다.
"소옥, 외지인을 들여 문주님이 노망난 모습을 들켰다지?"
"문주님께서 백의원님을 청해 만나다가 생긴 일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백의원님이 문주님이 노망이 아니라 병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장로들 사이에 끼어 있던 사형이 끼어들었다.
“사매의 말은 믿을 수 없다. 네 방문 이후 문주님이 기절하셔서 여태 깨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으냐? 여태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때 네가 무슨 수작을 부리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일이 생긴단 말이냐?”
소옥은 뭔가 잘못된 걸 느꼈다.
그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냥 유성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평소처럼 정연이 발작한 것이 다인데.
‘함정이야. 사형이 뭔가 손을 쓴 거야. 설마 사부님께 수작을 부릴 줄이야.
상황을 알아챘지만 너무 늦었다.
그녀는 사형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철저히 조사 해볼 테니 얌전히 기다려라. 만약 문주님이 잘못되신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당대의 하오문주는 정연이고 그녀는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정파와 친하게 지내자는 쪽이다.
그러나 장로들은 두 패로 나뉘어 있다.
정연, 소옥과 같은 뜻을 가진 장로들.
반면 하오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돈이 된다면 정사지간 가리지 말고 정보를 팔아먹자는 장로들도 있다.
사형 방혁은 후자의 편이었다.
하오문주가 직접 미는 후계자는 소옥이지만 사형 역시 절반의 장로들에게 만만치 않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정연이 노망이 난 틈을 타 사형이 무언가 일을 벌인 듯했다.
과반의 장로들이 소옥을 의심하여 그녀가 조사받기를 원했다.
결국 소옥은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하고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큰일이야. 사형은 없는 죄도 만들어 낼 거야.
항상 근처에서 소옥을 모시던 마부가 그 모습을 보고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다.
***
소옥의 심복으로 그녀를 직접 모신다는 마부가 해준 이야기.
유성이 물었다.
"소옥님을 구출하는 일이면 무림맹에 무사들을 요청해야 하지 않습니까? 의원인 제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게… 무림맹은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다른 문파의 내부 갈등에는 끼어들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오문에서 직접 요청하지 않는 한 무림맹이 끼어들 명분이 없단다.
마부가 말을 이었다.
"의원님께는 문주님의 치료를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소옥님께서 직접 문주님의 치료를 부탁하셨으니까요. 만약 문주님이 깨어나실 수 있다면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겁니다.”
맞는 말이다.
유성이 정연을 치료할 수 있다면 소옥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지 모른다.
‘무림맹이 나서지 못한다면 지금 상황에서 그들을 도와줄 사람은 나 뿐이다.'
게다가 마부의 마지막 말도 유성의 흥미를 끌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문주님은 수많은 하오문도들의 존경을 받는 분입니다. 도와주신다면 저희는 백의원님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하오문도들의 수는 얼마나 될까?
진한 신성력의 향기가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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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은 이미 소림의 일로 문파를 도와주는 것이 큰 이점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새로운 스킬이 열릴 정도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30년간 공을 들인 대환단 연단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대환단 한알을 얻고, 소림의 은인이 되어 상당한 신성력 상승도 경험했다.
‘정연 문주와 딱 한 번 대화해봤지만 하오문도들이 그녀를 좋아할 만 해.
또 한 가지.
방혁은 소옥을 몰아붙이기 위해 유성의 명성에도 흠을 냈다.
유성과 소옥이 함께 하오문주를 만났는데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소옥을 몰아세운 것이다.
만약 이 일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고 지나간다면 나중에 세상 사람들이 이 일을 알게 되었을 때 유성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가질 거다.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다.
유성은 마부가 전해준 정보들로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아. 문주가 쓰러져 있고 방혁의 경쟁자라 할 수 있는 소옥이 감금당해 있다면 며칠 안에 상황은 정리될 확률이 높아.
상황 정리란 방혁이 하오문을 장악하고 정연과 소옥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게 되는 걸 의미한다.
유성이 절대 바라지 않는 일이다.
혼자 하오문으로 가서 하오문주를 치료하게 해 달라는 건 자살행위.
무림맹 소속이 될 유성이기에 해코지를 하지 않더라도 방혁이 쉽게 만나게 해 줄 리 없다.
아직 모든 장로들이 방혁 측에 붙지는 않았을 거다.
몸을 보호할 무력을 갖추고 방문하면 나머지 장로들의 도움으로 정연을 치료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도움을 받아야 해.”
유성은 그의 인맥을 떠올렸다.
무림맹 무인들, 철권개 아래의 개방도들, 그가 치료해 준 몇몇 낭인들.
친분이 생긴 낭인들은 실력이 부족하다.
개방은 무림맹과 발을 맞춘다.
무림맹 무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다른 문파의 내부 갈등에 끼어들지 않을 거다.
잠시 고민해 본 유성은 일단 제갈영영에게 조언을 구하러 무림맹으로 향했다.
지금껏 쌓아온 유대가 그 정도 사이는 된다.
***
척마대주 정립의 하루 일과는 무미건조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운기조식을 하고 연무장에서 몸을 움직이며 무공을 수련한다.
점심 후 다시 무공수련.
저녁에는 운기조식과 명상으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한다.
그의 부하들이 묻고는 했다.
“대주님은 그렇게 수련만 하고 사시면 삶이 심심하지 않으십니까?”
그럴 때면 정립은 자기 과거를 돌아보고는 했다.
백정의 아들로 태어난 일.
어린 시절 마교인들에게 가족을 잃은 일.
낭인 생활을 하다가 기연을 얻은 일.
무림맹에 입맹해 척마대에 지원한 일.
마침내 척마대주가 되어 화경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정립은 척마대주로서 훗날 마교와 싸울 때를 대비해 무위를 높이는데 최선을 다해 왔다.
삶이 심심하다고 느낀 적은 없다.
언젠가 무림맹의 검이 되어 마교와의 전쟁에 선봉에 설 날만을 보고 살아왔는데.
“백의원님께서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정립은 연무장으로 이동중 무림맹 입구에서 문지기들과 이야기중인 유성을 발견했다.
“아, 대주님. 총군사님께 조언을 구할 일이 있어 찾아왔는데 마침 회의에 들어가셨다고 해서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유성은 살짝 고민했다.
제갈영영이 지금 막 회의에 들아갔으니 백호단주라도 찾아볼까 하던 참이다.
그는 치료를 받으러 올 때마다 언제든지 자기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거듭 강조했다.
잦은 술자리로 인맥도 넓으니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정립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비밀로 하실 일이 아니면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유성은 그냥 솔직히 털어놓았다.
정립은 인맥이 넓어보이지는 않지만 선입견일 수 있다.
그 정도 되는 고수는 또 다른 고수를 알고 있을지 모른다.
“사실 무림맹 소속이 아닌 고수의 도움이 필요하기는 합니다. 환자 하나를 치료하고 싶은데 호위가 필요해서요.”
“중요한 일입니까?”
유성은 일단 정연의 노망 증상만 빼고 상황을 설명했다.
꼭 도와주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립이 안으로 들어갔다.
유성은 정립이 괜찮은 고수라도 소개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데.
“됐습니다. 가시면서 이야기드리겠습니다.”
꽤 시간이 흐른 후 정립이 나와 한 소리다.
유성은 정립이 앞장서자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
“혹시 다른 고수분께 안내해주시는 겁니까? 소개장만 주시면 제가 찾아가도 됩니다. 근무 중이실 텐데.”
“제가 직접 갈 생각입니다. 백의원님의 신변은 확실하게 지켜드리겠습니다.”
“...”
이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아무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유성은 다시 한번 설명했다.
“대주님은 안 됩니다. 무림맹 소속이 아닌 분이 필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무림맹에서 명분 없이 다른 문파를 힘으로 핍박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정립이 고개를 저었다.
“걱정 하지 마십시오. 방금 무림맹을 그만두고 나오는 길입니다.”
“그렇군요… 네?!”
깜짝 놀라는 유성에게 정립이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개인적인 일로 맹주님께 그만둔다고 말씀드렸으니 저는 이제 무소속입니다. 저를 낭인으로 고용해주시면 명분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간단하게 말했지만 정립이 퇴맹하게 된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는 않았다.
그는 심각한 논의중의던 회의장에 들이닥쳐 다짜고짜 퇴맹 의사를 밝혔고,
무림맹주를 포함한 회의실 안의 모든 사람이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기세로 말렸다.
화경의 고수가 그만두겠다는데 순순히 그러라고 할 사람은 없다.
유성도 그 부분에서 크게 놀랐다.
“아니, 그래도 척마대주 자리에 계신 분이 그렇게 쉽게 그만두시면 어떡합니까? 아깝지도 않으십니까?”
정립은 무림맹 척마대주의 자리를 명예롭게 여겼으나 마교도를 척살하는데 꼭 무림맹에 소속될 필요는 없다.
“생명의 은인을 돕는 일인데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맹주님께서 제 말을 들으시고 임시로 퇴맹하라고 하셨으니까요.
일을 보고 시간이 좀 지나면 다시 복귀하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휴가 갖는 셈 치면 됩니다.”
유성은 그제야 안도했다.
정립의 돌발행동에 당황했으나 그는 유성의 인맥중 무력으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이 정도로 막무가내로 행동할 줄은 정말 몰랐다.
호위가 필요한 사정을 설명하기는 했으나 척마대주가 무림맹을 그만두고 낭인 신분으로 호위하겠다고 나선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못할 거다.
“화경의 고수시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맹주님이 안 받아주셨으면 어쩔뻔하셨습니까?”
“그럼 그냥 낭인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저 원래 낭인출신입니다. 아마 저 정도면 사람들이 고용하고 싶어서 돈을 싸 들고 달려들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 정립.
평소 보여 주지 않던 미소다.
“설마 지금 농담하신 겁니까?”
“안 웃겼습니까?”
정립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
유성은 농담에는 별로 소질이 없는 낭인을 한 명 고용했다.
그는 유성이 아는 낭인들 중 최고의 고수다.
***
방혁은 어린 시절에 비해 인생이 매우 잘풀린 편이다.
미래 없는 소매치기로 생활하던 중, 우연히 하오문주 정연의 눈에 들어 제자가 되었다.
당시에는 왜 자기 같은 놈을 제자로 삼았는지 영문을 몰랐으나 나중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죽은 아들을 많이 닮았다지? 하지만 난 사부의 아들이 아니야. 잘 됐다. 이대로 사부 비위나 맞춰주고 하오문을 물려받자. 소매치기 출신이 하오문주가 된다면 성공한 인생이지.
그는 천성이 선한 사람이 아니었다.
적당히 맞춰주고 하오문을 꿀꺽하고 싶은 욕심을 가졌으나.
산전수전 다 겪은 정연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방혁의 성정이 그리 선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점차 애정을 줄였다.
“인사해라. 앞으로 네 사매가 될 아이다.”
어느새 방혁은 하오문주의 유일한 제자에서 두 제자 중 하나의 신분으로 격하되었다.
정연은 놀랍도록 그녀의 성정을 닮은 소옥에게 점차 힘을 실어 주었다.
“...”
이대로는 아무 실권 없는 하오문주의 사형으로 남게 될 판이다.
뒤늦게 말 잘 듣는 척을 해도 이미 소옥에게 마음이 기울어 버린 정연의 눈에 들 수 없었다.
다행인 점은 그동안 방혁에게 정을 주었던 정연이 여전히 제자의 신분으로 그를 놔두었다는 것.
방혁은 기회를 노렸다.
어린 시절, 목표가 방심하기를 기다려 소매치기를 성공 시켰던 것처럼.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노망입니다.”
사부가 나이를 먹더니 노망 증상을 보인 것이다.
나이가 든다고 모두 같은 증상을 보이지는 않지만 사부는 헛소리를 해대고 기억력도 나빠졌다.
그때부터 방혁은 사부와 다른 주장을 펼치던 장로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사부가 소옥과 함께 있을 때 노망 증상을 보이자 미리 심어둔 하인을 통해 함정을 발동시켰다.
‘됐다. 이제 며칠 후면 사부와 소옥을 제거할 수 있다. 그럼 자연스럽게 하오문은 내 것이다. 내 손을 들어 준 장로들을 챙겨줘야겠지만 그런 건 사소하다.
다음으로 방혁이 제일 신경을 쓴 사람은 백유성이다.
인근에서 가장 명성 높은 의원인 그는 유일하게 사부를 치료할 가능성이 있는 자.
마침 소옥을 함정에 빠뜨린 날 함께 있던 자가 백유성이다.
그 역시 소옥과 공범일 가능성을 제기하면 피 흘리지 않고도 막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확실히 처리하는 게 좋다.
“소옥의 심복이 백유성과 만났다고? 무조건 막아라. 며칠간 먼 곳에 떨어뜨려놔도 좋다. 대신 무림맹과 척을 져서는 안 되니 다치지 않도록 주의해라.”
방혁은 그의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어차피 그의 인맥이라고 해봤자 뻔하다. 대부분 무림맹 인맥이고 나머지는 별 볼일 없다. 무림맹은 나서지 않을 테니 무력이라도 써서 막으면 된다. 절정 고수 한둘로는 절대 사부에게 도달할 수 없을 거다.
백유성에 대한 신경을 끈 방혁은 나머지 장로들을 포섭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그날 저녁.
“방혁님, 백유성이 찾아왔습니다. 장로님들과 만남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
“...내가 보낸 자들은 그동안 뭘 하고 있었지? 분명 절대 여기로 오지 못하게 막으라고 했을 텐데?”
“죽립을 써 누군지 알 수 없으나 백유성이 대단한 고수를 데려왔습니다. 모두 백유성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가 제압당했습니다. 조력자의 정체를 파악하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야 이 새끼야! 백유성이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정체를 파악해? 장로들은 뭐라더냐?”
“한번 이야기를 들어 보겠다고 합니다.”
***
유성은 하오문으로 향하는 길에 정립의 신위를 직관하고 경외심을 품었다.
‘대단하다. 이게 화경이구나. 절정 고수는 상대가 안 돼. 나 역시 몸 상태가 멀쩡했어도 당시 경지로는 아무 반항조차 하지 못했을 거야.
하오문도들로 추정되는 절정 고수들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마혈이 제압되어 쓰러졌다.
그 움직임이 얼마나 신묘한지 죽립을 깊게 눌러 쓴 정립의 정체를 알아차린 자조차 없다.
유성은 덕분에 안전하게 하오문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제가 분에 넘치게 정립님을 낭인으로 고용하는 날이 오는군요.”
“그런 소리 마십시오. 다음에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한번 그만둬보니 두 번, 세 번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정립이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이번 농담은 듣기만 해도 즐거웠다.
잠시 후.
장로들과 방혁이 백유성을 만나기 위해 모인 자리.
유성은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저와 소옥님이 문주님을 만난 후, 문주님이 쓰러지셨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치료해볼 테니 문주님과 만나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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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을 치료하겠다는 유성을 순순히 두고 볼 방혁이 아니다.
“안 됩니다. 백의원님은 소옥과 함께 계셨지 않습니까? 그때 이후로 문주님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성은 이 자리에 모인 장로들의 기색을 살폈다.
그들 중 일부는 방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고 일부는 망설이는 눈치다.
장로들을 끌어들여야 평화롭게 정연을 만날 수 있다.
“혹시 저를 의심하고 계십니까?”
“소옥과 함께 계셨으니 당연히 백의원님도 일말의 의심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무림맹과 관계를 생각해 억류하지는 않겠습니다. 문주님은 저희 쪽에서 치료해볼 테니 백의원님은 이만 돌아가십시오. 추후에 조사가 필요하면 무림맹을 통해 정식으로 요청하겠습니다.”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우며 단호하게 막아서는 모습.
“저는 제 이름을 걸고 그날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결백을 증명하기 위함이니 제가 치료하게 해주십시오.”
장로들 몇 명이 유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의원의 명성은 들었지. 방혁, 정말 백의원이 이름까지 건다는데 한번 치료를 맡겨봐도 될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일부 장로들이 유성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방혁이 이를 갈았다.
정연이 쓰러지고 아직 모든 장로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에 지금이 가장 정치적으로 취약한 시기였다.
‘이런 줏대없는 자들. 내가 말할 때는 다 백유성을 직접 만나게 하는 건 위험하다는데 동의 했으면서….
며칠만 기다리면 아무 의심 사지 않고 정연을 자연스럽게 처리할 수 있다.
그때까지 무조건 시간을 끌어야 하는 방혁은 오늘 유성을 돌려보낼 생각으로 강하게 나갔다.
“비록 약간의 명성을 얻고 있기는 하나 그대의 이름값이 문주님의 목숨을 걸고 도박할 정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문주님이 잘못될 수 있으니 다른 의원분들께 맡겨본 후 그때도 안 되면 백의원께 부탁하겠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십시오.”
“….”
소옥의 심복으로부터 내부 사정을 어느 정도 들은 유성은 방혁의 수작을 짐작하고 있지만 정연쪽 장로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그들이 방혁에게 설득당하면 곤란하다.
다시 한번 유성이 입을 열려는 순간.
“그럼 내 이름값은 어떻소?”
내공까지 실린 묵직한 음성이 접객실을 가득 채웠다.
장로중 하나가 의문을 표했다.
“그대는 누구기에 그런 말을—”
이야기가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정립이 죽립을 벗었다.
‘어차피 끝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다. 그저 대화에 방해되지 않도록 이목이 끌리는 걸 피했을 뿐.
사람들의 시선이 죽립을 벗은 그에게 쏠렸다.
“척마대주!”
“아니, 그대가 여기까지에 무슨 일이오? 그 모습은 뭐고?”
장로들이 놀라 몸을 일으켰고, 방혁도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당황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으나 내 부하들을 제압했다는 자가 척마대주 정립이었다고? 무림맹이 개입한 건가? 도대체 왜?
정신을 차린 그는 얼른 앞으로 나섰다.
정립의 등장은 변수지만 명분을 따져 물으면 무림맹은 나서지 못할 거라는 계산이 섰다.
무림맹은 명분에 집착하는 꽤 고리타분한 집단이 아닌가.
정사지간이며 요즘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하오문을 적대할 이유가 없다.
“척마대주님.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드린 적이 없는데 설마 본문의 일에 무림맹이 개입할 생각이십니까? 이는 원칙에 어긋난 행동이 아닙니까?”
정립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것은 유성도 마찬가지. 하지만 오해를 사게 둘 수는 없다.
“정립님은 오늘 탈맹하여 낭인 신분입니다. 이제 무림맹과 연관이 없습니다. 제가 고용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이오. 그러니 내 고용주인 백의원님과 이야기하시오. 백의원님의 말은 내가 보증하겠소.”
척마대주라는 신분이 없어도 정립은 그 자체로 화경의 고수다.
강호에서도 절대 흔하지 않은 경지.
그가 자기 이름을 건다는데 거기다 대고 이름값이 충분하지 않다는 소리를 할 수 없다.
무림맹이라는 제약을 벗어 던졌으니 조금 험하게 나올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방혁은 끈질겼다.
“설마 무림맹에서 하오문에 개입하기 위해 수를 쓴 것은 아니겠지요? 임시로 탈맹하는 시늉만 했다거나….”
어떻게든 그를 떼어내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 부분은 맹주님께 확인하시오. 나는 분명히 탈맹했다고 밝혔소. 설마 내 말을 의심하는 것이오?”
이제 정립에게서 날카로운 기세까지 뻗어 나왔다.
그 기세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방혁의 다리가 달달 떨리는 것을 보며 유성은 생각했다.
‘조의원과 모용림에게 들이 박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꽤 터프하신 분이네. 하지만 내 편이라 든든하다.
“그, 그래도….”
이야기가 이렇게 되었는데도 망설이는 방혁은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다.
“방혁. 척마대주, 아니, 정립님도 보증하는데 백의원의 말을 믿어야 하지 않겠나? 맹주님까지 거론되었으니.”
“맞다. 이제 무림맹 소속도 아니라지 않나? 그의 이름값이라면 믿을 수 있다. 자꾸 막아서는 다른 이유가 있느냐?”
의심의 눈초리와 함께 반대파 장로들이 압박하자 방혁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편을 들어 주기로 했던 장로들도 몸을 사리는 판에 혼자 모두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장로님들 말씀이 맞습니다. 정립님의 이름값이라면 믿을 수 있지요.”
억지로 정연과 백유성의 만남을 막으려다가는 큰 의심을 사게 생겼다.
이제 그가 기댈 곳은 하나뿐.
암시장에서 정말 우연히,
언젠가 써먹을 날이 올 거로 생각해 큰돈을 주고 구한 독.
출처가 불분명했으나 효과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서서히 중독시켜 놓으면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기절시킬 수 있고, 며칠 안에 사망에 이르게 하는 독이다.
‘은밀히 여러 의원들에게 의뢰해 봤으나 아무도 그 독의 해독법은커녕 정체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아무리 백유성이라고 해도 알아낼 수 없을 거다.
차라리 잘 됐다. 그가 고칠 수 없다고 선언하면 소옥에게 모든 걸 뒤집어 씌우면 된다. 그럼 하오문은 내 차지다.
계산을 끝낸 방혁은 유성에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그저 사부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만전을 기하기 위함이었으니 용서하십시오. 꼭 문주님을 치료해주십시오.”
유성이 그의 표정을 살폈다.
꼭 치료해 달라는 말과 달리 눈동자에는 약간의 차가움이 느껴진다.
“제가 기필코 치료해낼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방혁님도 만족하실 겁니다.”
“….”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힌다.
장로들과 방혁이 유성과 정립을 정연이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하인 하나가 그곳을 지키고 있다가 문을 열어 주었다.
‘은밀한 곳으로 옮겨 놨군. 무작정 들이닥쳤으면 하오문주를 찾아다니는 사이 빼돌렸을지도 모르겠네. 정식으로 요청하기를 잘했다.
방 안에는 은은한 약초향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정연은 침상 한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얼굴이 창백하고 경직되어 있다.
“문주님은 소옥과 만난 후 노망 증상이 나타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살펴 보시죠.”
유성은 정연의 안색을 살피고 진맥을 시작했다.
방혁이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미 몇 명의 의원들이 다녀갔다. 하지만 그들 중 독에 조예가 깊은 한 명만 독이 쓰인 것 같다고 의심했을 뿐, 확신하지 못했다. 비록 백유성이 운이 좋아 무림맹 무사를 해독한 적이 있어도 이 독을 밝혀내지는 못할—’
“독이군요. 문주님은 지금 중독되셔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이라니요. 겉으로 아무 낌새가 나타나지 않습니다만. 다른 의원들도 다녀갔지만 독이라고 단언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건 독이 맞습니다.”
진맥중 은밀하게 해독스킬을 사용해 본 유성이 단번에 독이라고 단언하자 방혁은 당황했다.
게다가 자신만만한 표정까지.
방혁은 꽤 불안해졌다.
‘영술이라고 했지? 그걸 이용한 해독 능력의 한계가 어떻게 되는 거지? 그저 간단한 독만 해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그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유성은 무림맹 의각 시험 당시 암각 무사를 치료할 때 독을 억제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약간의 독성만 남겨두고 해독을 마친 상태였다.
양의원이 독이 억제된 무사를 손쉽게 해독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방혁은 유성의 영술이 강력한 독을 해독할 능력은 되지 않는다고 오판한 것이다.
유성이 기다란 침을 하나 꺼냈다.
“그럼 해독부터 하겠습니다.”
“일침신의….”
장로중 하나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유성이 정연의 심장 부근에 침을 찌르고 스킬을 발동시켰다.
[해독]
이번에는 힘 조절하지 않았다.
완전 회복시켜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
은밀한 독에 잠식당해 서서히 죽어 가고 있던 정연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장로 하나가 그걸 보고 안색이 밝아졌다.
“오! 백의원, 문주님 표정이 편안해지셨군. 잘되고 있는 건가?”
“잠시만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유성은 해독을 마친 침을 뽑아내고 곧바로 짧은 침을 들었다.
정연이 깨어나 또 헛소리 하면 곤란하기에 내친김에 치매까지 치료하기 위함이다.
해독과 달리 유성이 완치를 장담하기 힘든 부분이다.
‘내가 치매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별로 없다. 하지만 분명 효과는 있을 거야. 모든 기억이 복구되면 좋겠지만 제정신만 차려도 충분하다.
짧은 침이 정연의 백회혈로 향했다.
“어허, 그 위험한 곳에 어찌…!”
백회혈에 침을 놓는 모습을 처음 본 장로가 살짝 당황했으나 유성은 신경 쓰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정립이 지켜 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제발 잘못돼라!
방혁이 속으로 간절히 소리쳤으나, 제갈영영을 통해 숙달된 유성이 백회혈 시침에 실수할 리 없다.
[치유]
유성만 느낄 수 있는 신성력이 백회혈을 타고 머리로 스며들어 정연의 뇌를 감싸 안았다.
그런데.
‘이런, 치유스킬의 한계인가? 이미 소실된 부분이 있다.
신성력이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쏟아부어도 더 이상 좋아지지 않았다.
유성은 문제가 크지 않기를 바라며 치료를 마무리했다.
백회혈에서 침을 회수하자.
“으으음….”
정연이 침음성을 흘리며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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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리에서 곧바로 정연이 깨어나 주지 않았다면 조금 귀찮게 될 뻔했다.
며칠 후에 깨어난다면 방혁이 그 사이 어떤 수작을 부렸을지.
다행히 치료 직후 정연이 깨어나 주었다.
정체불명의 독과 치매 증상이 무언가 작용을 하고 있었나보다.
‘하오문주가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을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치매로 인해 많은 부분이 손상된 건 아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지켜보자. 몸 상태부터 살피고.
정연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사부님!!”
방혁이 쏜살같이 정연에게 달려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저는 사부님이 잘못되시는 줄 알고…!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백의원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손을 붙잡고 눈물까지 흘리는 모습.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방혁은 사부를 극진히 모시는 제자라고 생각할 거다.
“….”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유성이 할 말을 잃었다.
그의 간사한 행동이 꼭 누군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차의원님이 저 정도는 아니야.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사람이니까.
차의원에게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사부를 독살하려는 사람과 그저 작은 성공을 위해 남들보다 조금 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을 비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느새 정연은 장로들과 방혁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정연은 장로들과 방혁이 던지는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유성은 장로들 사이를 지나 정연에게 다가 갔다.
“잠시 문주님을 살펴야하니 비켜 주십시오.”
“어, 어, 그렇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백의원님!”
끝까지 연기를 지속하는 방혁을 차갑게 내려다본 후 정연을 진맥했다.
마비되어 있을 때와 달리 맥이 활발하게 뛰고 있다.
해독 스킬을 발동시켜도 아무 변화가 없다.
‘독도 다 해결되었고 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다.
그때.
맥을 짚고 있는 유성의 손을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이 있었다.
정연이다.
그녀의 눈빛에 고마움이 한가득 담겨 있다.
“혹시 말을 하기 힘드신 상황이십니까?”
부드럽게 가로저어지는 고개.
“아니요.”
“아, 다행이네요. 말씀을 안하셔서 걱정했습니다. 다른 불편하신 점은 없으시고요?”
“전혀요. 머릿속에 안개가 걷힌 기분이에요. 중독되기 전보다 더 좋은 것 같아요. 역시 백의원님의 명성은 듣던 대로네요. 제가 참 복이 많아요.”
유성은 대화 중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중독?
그녀가 몸 상태를 어떻게 알았을까?
“혹시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신을 잃으시기 전에 누가 독을 썼는지 보신 겁니까?”
정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방안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
정립의 얼굴을 발견하고 잠시 놀라는 듯했으나 이내 장로들과 방혁, 그리고 방문 앞에 서 있는 하인에게도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방혁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제가 중독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어제였어요.”
“네? 어제라면….”
유성이 알기로 정연은 며칠 전 그가 방문했을 때 쓰러진 이후로 정신을 차린 적이 없다.
그 의미는.
몇몇 사람들의 의아하다는 시선과 무언가를 눈치챈 사람들의 시선을 받은 정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지만 듣는 건 가능했어요. 어제 진실을 알고 얼마나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는지 몰라요.”
유성은 옆에 주저앉아 있던 방혁의 수상함을 눈치챘다.
그가 전력으로 뒤로 몸을 날린 것이다.
하지만.
유성이 눈치챈 움직임을 정립이 놓칠 리 없다.
척—
정립이 가볍게 손을 뻗자 방혁은 몸을 날리던 그대로 뒤로 나뒹굴었다.
방문을 지키던 하인도 문밖으로 도망을 시도했으나 다른 장로에게 제압되어 끌려왔다.
정연이 깨어나 기쁨에 가득 차 있던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이제 모두 알아차렸다.
방혁이 바로 이 일을 꾸몄다는 사실을.
정연이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한때 널 아들처럼 예뻐했는데 네가 나에게 악독한 수까지 쓸 줄은 몰랐구나.”
방혁은 이 독을 얻고 이미 몇 명의 사람들에게 시험해 보았다. 그들은 모두 깨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이 몸이 마비된 채로 다 듣고 있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는 의미다.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더니 그냥 죽기 전까지 정신은 차리고 있는 독이라고?
어제 이 방에 몰래 들러 하인과 독 이야기한 것이 떠올랐다.
정연은 그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었다.
‘어제 내가 정확히 뭐라고 했더라…?
필사적으로 하인과 나눈 대화를 떠올린 방혁은 도망칠 수 없게 되자 정연에게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다만 그 와중에서도 살기 위해 거짓을 섞었다.
“사부님! 저는…, 용서해주십시오! 별로 위험한 독이 아니었습니다! 며칠 푹 주무시게 만들고 그 사이 문주가 되고 싶은 욕심에 그만…!”
“그래? 네 하인은 다른 소리를 하던데?”
방혁의 고개가 제압되어 있던 하인에게 휙— 돌아갔다.
하인의 눈이 더할 나위없이 커진 것을 본 그의 선택은 꼬리 자르기였다.
“아닙니다! 저놈이 무슨 헛소리를 지껄였는지 모르겠지만 제 말을 믿어 주십시오!”
“저, 저는 그냥 방혁님이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하인 역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조사해 보면 알겠지.”
정연이 장로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방혁과 하인을 심문실로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
방혁은 하오문에 대해 거의 모든 부분을 알았고, 심문실이 어떤 곳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무림맹의 악명만큼은 아니지만 심문실에 끌려간 자들의 대부분은 멀쩡하게 걸어나오지 못한다.
“사부님!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저를 아들처럼 여기셨다면서요!”
정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딴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어찌 계속 진짜 아들처럼 여길 수 있겠느냐. 다만 내가 모질지 못해 하마터면 소옥까지 잘못될 뻔했구나. 내 잘못이다.”
정에 호소하는 것도 먹히지 않자, 방혁은 사람들에게 끌려가며 유성을 노려보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아니었다면 억울한 피해자들이 생겼겠지. 넌 억울한 사람이 아니니 다행이다.”
“뭐?”
“잘 가라.”
끌려가는 방혁의 뒷모습을 정연이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명령을 거두지는 않았다.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그녀 역시 정사지간 문파인 하오문을 이끄는 수장인 것이다.
이미 이를 드러낸 상대를 용서하지 않았다.
‘앞으로 다시 볼일 없겠네.
그리 생각하는 유성을 정연이 부드럽게 불렀다.
“백의원님,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드릴게요. 덕분에 저와 소옥이 무사할 수 있었어요.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어요.”
“아닙니다. 기녀들을 생각하시는 문주님의 마음씨 덕분입니다. 그 일로 인연이 생기지 않았다면 저는 정연님을 알지도 못했을 겁니다.”
“기녀들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 부탁한 건 사실 소옥이 낸 의견이었어요. 저는 얼굴만 빌려 주었지요.”
“아, 그랬군요. 참, 그리고 소옥님의 마부가 찾아와 알려주지 않았다면 문주님과 소옥님께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을 겁니다. 그분에게도 상을 주셔야 할 겁니다.”
“물론이에요. 잠시 처리할 중요한 일이 있으니 기다려주시겠어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유성과 정립은 하오문도의 안내받아 다른 곳에서 정연을 기다렸다.
“고생하셨습니다.”
“정립님이 없었다면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낭인은 맡은 의뢰에 최선을 다하는 법입니다.”
“아 참, 고용비를 드려야지요. 제가 모아 놓은 돈이 꽤 있습니다만 화경의 고수를 고용할 만큼 넉넉하진 않으니 조금 깎아주시지요.”
“필요 없습니다. 그냥 저랑 한잔 하시지요. 그거면 족합니다.”
한 잔 하자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하지만 유성도 기꺼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유성이 살수 오자성의 현상금을 받았어도 화경의 고수 몸값을 감당하기 힘들다.
파산을 피하려면 할 수 없는 법.
잠시 후.
두 사람이 나타났다.
“백의원님!”
정연이 활짝 웃는 소옥을 대동한 채였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다행히 별일 없었어요. 다 백의원님 덕분이에요. 그런데 며칠 안 봤다고 너무 반갑네요.”
진심이다.
소옥은 조금 전까지 절망에 물들어 있었다.
사형의 경쟁자인 자신은 물론 어머니와 같은 정연의 목숨마저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
마혈이 짚혀 제압당했으니 누군가 구해주기 전에는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안 좋은 생각만 자꾸 들었다.
머지 않아 사부를 죽인 죄로 심문실로 끌려갈지 모른다는 최악의 경우마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런데 극적으로 상황이 반전되었다.
‘백의원님이 우리를 구해주러 오셨다고? 의원분이 어떻게?
소옥도 당연히 무림맹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믿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정연을 만나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듣고 유성의 능력에 감탄하고 말았다.
‘척마대주님을 탈맹시키고 호위로 고용해 정당하게 치료 기회를 요구하시다니, 그 인맥과 판단력이 정말 대단해. 그리고 사부님의 독을 알아보고 해독하지 못했다면 아무 소용 없었을 텐데 의술마저 뛰어나시구나.
유성과 대화하다가 소옥은 한 번 더 놀랐다.
“그 사이에 치매라는 병까지 치료하셨단 말입니까?”
“안타깝게도 문주님의 일부 기억이 소실 되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제 실력이 더 늘어나면 나머지 부분도 치료해 보겠습니다.”
“백의원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정말…,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하오문을 찾아주세요.”
소옥이 정중하게 고개 숙였다.
신성력이 차오른다.
그리고 소옥의 심복이 한 말에 의하면 하오문도들이 전하는 마음도 남아 있을 테니 끝이 아니다.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유성이 흐뭇하게 웃는데, 정연이 소옥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백의원님, 소옥의 말은 빈말이 아니에요. 일문의 문주가 빈말을 뱉어서야 되겠습니까?”
“일문의 문주라니요?”
하오문이 하위 문파라도 세웠단 말인가?
정연의 말에 곧 의문이 풀렸다.
“저는 진작 방혁의 성정을 눈치챘음에도 정 때문에 그 녀석을 방치하다가 위험을 자초했어요. 판단력이 많이 흐트러졌어요. 안 그래도 소옥에게 문파를 물려주려 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문주 자리에서 물려나신단 말입니까?"
"사실 아까 자리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몇 가지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요. 백의원님께도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아무래도 요양을 해야겠어요."
“그럼….”
“이제 취임식만 치르면 소옥이 하오문의 문주랍니다.”
중요하게 처리할 일이라는 게 문주 자리를 넘겨주는 거였어?
이제 하오문의 새로운 문주가 될 소옥이 언제든지 찾아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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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은 태상문주 자리로 물러나 요양하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유성 덕분에 치매를 치료했으나, 과거에 그녀는 치매를 노망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특히 무림인들은 기를 쓰고 피했는데, 유성을 비롯한 일부 일반인들만 가끔 일 때문에 만나고는 했다.
부끄러웠으니까.
정연은 노망 증상이 나타났을 때부터 소옥과 방혁을 두고 후계 문제로 계속 지켜보았다.
방혁의 추측과 달리 소옥이 제자가 된 후에도 그에게는 기회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소옥이 하오문을 더 밝은 곳으로 이끌어 주겠구나.
정연은 그녀와 더 닮은 소옥에게 점차 마음이 기울었다.
단순히 아들과 꼭 닮았다는 이유 하나로, 능력 없는 방혁이 문주가 되면, 하오문은 지금처럼 정사지간으로도 남지 못할 것 같았다.
돈만 많이 주면 강호의 안위 따위는 상관없이 아무에게나 정보를 팔아먹는 사파로 전락할 것 같았다.
내심 소옥에게 문파를 물려주겠다고 마음을 굳힌 후에도 정연은 쉽게 방혁을 내치지 못했다.
‘방혁이 내 아들의 외모와 꼭 닮아 너무 미련을 가졌구나. 나도 이제 늙었다.
그 잘못된 판단이 하오문에 큰 위기를 초래할 뻔했다.
장로들 몇 명도 수상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유성의 도움이 없었다면 필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태상문주로 물러나기 전 마지막으로 처리할 일은 방혁과 결탁한 자들을 모두 밝혀내는 거다. 하오문을 깨끗한 상태로 소옥에게 물려줘야겠다.
처음에 말을 꺼냈을 때 소옥이 그럴 수 없다고 펄쩍 뛰었으나.
“병은 치료되었는데 몇몇 중요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이런 상태로는 힘들단다. 내가 도와줄 테니 한번 잘 이끌어보거라.”
그렇게 최연소 하오문주가 탄생했다.
물론 하오문주의 역사상 최연소로, 소옥은 유성보다는 열 두 살이 많았다.
띠동갑녀가 온화하게 웃었다.
“오늘 저희를 도와주신다고 아까운 휴무일을 그대로 날리셔서 어떡해요? 마침 이제 낙양 의방의 주인도 제가 되었으니 며칠 푹 쉴 수 있도록 휴무를 드릴게요. 어떠세요?”
휴무일에는 빈민가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다.
빈민가 사람들은 많은 신성력을 올려 준다.
많은 신성력은….
꼬리를 이어지던 생각은 한 얼굴이 떠오르며 중단되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굳이 그러시지 않으셔도 돼요. 보수는 그대로 지급할게요.”
“아닙니다.”
많은 일이 있었고 이미 밤이 되었다.
제갈영영에게 아무 말도 없이 휴무를 가진다면….
‘난리 날지도.
의방 휴무처럼 편의를 봐주는 것뿐만 아니라 소옥은 계속 사례를 하고 싶어 했다.
유성은 마침 그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떠올랐다.
“그럼 천운석을 구하는데 도움받을 수 있을까요?”
“천운석이요? 그런 것도 모으시나요?”
“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 개인이 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요.”
“맡겨 주세요. 저희도 보유한 천운석은 없지만 전국에 수배 해볼게요.”
“아, 혹시 천운석을 제련할 만한 솜씨 좋은 대장장이도 알고 계시면 부탁드립니다.”
***
하오문에서 일을 모두 마친 후.
유성은 정립과 함께 달밤 아래를 걸었다.
“잠은 어디서 주무십니까?”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객잔에서 자고 날이 밝으면 무림맹으로 가 짐을 챙기려고 합니다.”
유성은 정립의 의리에 감사하면서도 미안했다.
생각해 보니 그를 도와준다고 무림맹을 그만두며 검 하나만 달랑 들고 나왔지 않은가.
척마대주 정도면 무림맹에서도 좋은 거처에 머물 텐데 그런 곳을 놔두고 무소속으로 객잔에 머물러야 한다니.
심심하지 않도록 술친구라도 해 줘야겠다.
“한 잔 하자고 하신 거, 오늘 하시겠습니까?”
“전 좋습니다만 날이 너무 늦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내일 예정대로 진료도 이어 하신다면서요.”
“이 정도는 끄덕 없습니다.”
정립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교롭게도 유성이 아는 주루는 객잔과 주루를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다.
“공자님, 또 와주셨군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어느새 유성의 얼굴을 외운 점소이가 자연스럽게 3층으로 이끌었다.
“자주 오시나 봅니다.”
“아닙니다. 이제 세 번째인데 점소이가 기억력이 좋네요.”
“백의원님이 워낙 인물이 훤하셔서 그런가 보군요.”
이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오늘 정립의 색다른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유성은 자리를 잡고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립님은 그럼 무림맹에 복귀하시기 전까지 뭘 하실지 생각해 두신 게 있으십니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하오문의 일이 해결 되었으나 무림맹은 여전히 고리타분 한 곳.
눈 가리기 식으로 정립이 그만두는 척, 하오문의 일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할 수 없을 거다.
그는 몇 달간 무림맹에 복귀하지 않을 생각이다.
“혹시 그동안 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아니요, 무림맹 의각으로 들어갈 테니 딱히 도움 요청드릴 건 없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하고 싶은 걸 하시지요. 휴가 가보신 적도 없으시다면서요.”
“그럼 생각해 둔 게 있기는 합니다.”
“그게 뭡니까?”
유성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긴 정립이 하고 싶은 게 뭘까 궁금했다.
‘정말 낭인 생활을 할 건 아닐 테고.
정립이 밝힌 계획은 역시 그 다웠다.
“비무행을 떠날까 합니다. 정파의 고수들을 찾아다니면서 말입니다.”
정파의 고수란 화경의 고수들을 뜻한다.
그동안 무림맹주에게 무공 지도를 받은 것 외에 정립은 화경의 고수와 겨뤄본 적이 없다.
마침 무림맹에 묶여 있을 이유도 없으니, 경지를 더 높이기 위해 화경의 고수들을 찾아다닐 좋은 기회였다.
“강호인들이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만 정립님은 무공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시군요.”
그는 술을 한잔 들이켰다.
“…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 보시겠습니까?”
유성은 타인의 과거사를 캐묻는 편은 아니다.
먼저 털어놓지 않으면 묻지 않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상대가 원해서 들려준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화경의 고수는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을까?
그만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을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던 유성은.
“…그렇게 마교인들에게 가족을 모두 잃었습니다.”
“….”
“낭인이 되어서도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어떻게든 실력을 키워서 복수하자. 척마대에 지원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정립이 마교에 대해 큰 원한을 가진 이유.
그리고 화경이라는, 모든 강호인들이 꿈꾸는 경지에 도달하고도 끝없이 발전하려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응원하겠습니다.”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빌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가 가라앉았군요. 백의원님은 요즘 어떻습니까. 만나시는 여자분은 있습니까?”
이야기가 끝난 후 그는 화제를 돌렸다.
‘갑자기 만나는 여자는 왜?
갑작스럽게 이야기를 돌리기에 적절한 화제는 아닌 것 같지만.
“딱히 만나는 분은 없습니다.”
정립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
뭘 이해했다는지 모르겠으나 유성은 새벽까지 정립과 술을 마시고 귀가했다.
내공으로 주독을 배출하지 않은 정립마저 꽤 취할 정도로 많이 마셨지만, 유성은 전혀 취하지 않았다.
***
무림맹 의각이 곧 정식으로 운영될 때가 다가온다.
유성의 낙양 의방 생활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소리다.
앞으로 그에게 진료 받지 못하게 된다는 소리에 사람들의 줄은 그 어느 때보다 길었다.
“이제 그만두신다니 너무 아쉽습니다. 백의원님 덕분에 그동안 아무 걱정 없었는데요.”
누군가는 유성이 떠나는 것을 아쉬워 했고.
“좋은 곳으로 가신다니 너무 잘됐습니다. 의원님의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빌겠습니다.”
누군가는 유성의 앞날을 축복해주었다.
그리고.
“아이고, 우리 백의원. 이제 마지막 날인데 한잔 해야지? 물론 내가 사겠네. 혹시 기루도 좋아하나? 저기 매화루에 아주 미색이 뛰어난 예기가 새로 왔다는데.”
누군가는 여전히 유성에게 줄을 대기 바빴다.
손을 싹싹 비비는 사람은 물론 차의원이다.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양의원님께 초대를 받아서요.”
“양의원님이? 혹시 나도 가도 되겠나?”
“그건 좀 힘들겠습니다.”
“아, 왜? 전에는 우리 셋이 오붓하게 마셨지 않은가? 아니면 내가 양의원님께 한번 말씀드려보겠네. 아마 거절하지 않으실걸세.”
“…그러십시오.”
유성은 진지한 표정으로 오늘 꼭 시간을 내주길 바라던 양의원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하기를 원치 않는 기색이었다.
확실하지 않아 차의원의 일은 양의원에게 맡겼다.
잠시 후, 양의원에게 다녀온다던 차의원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대신 손에 쟁반을 하나 든 채였다.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안 된다는군. 그럼 이거라도 한잔 하게.”
유성은 약재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탕약을 받아들였다.
“이게 뭡니까?”
“해주탕이네. 전에 나 혼자 먼저 취해서 자네를 못 챙긴 게 마음에 걸려서 준비했네. 오늘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마셔도 될걸세.”
“이런 것까지 준비하셨습니까?”
“당연히 내가 챙겨야지. 아 참, 내 급여에서 부담하는 거니 참고하게.”
차의원이 생색을 내며 숙취 해소용 탕약을 챙겨 주었다.
취하지 않는 유성은 딱히 필요는 없으나 마음만은 고마워 감사히 받았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게. 무림맹에 갔다고 날 잊으면 절대 안 되네. 자주 보세나.”
유성은 그렇게 낙양 의방에서 생활을 마무리했다.
미리 대부분의 짐을 옮겨두었기에 챙겨 갈 짐은 침통과 작은 보따리 하나뿐이었다.
밖으로 나가자 양의원이 이미 나와서 유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유성은 양의원과 함께 커다란 객잔의 별채에서 노인 한 명과 젊은 여자 한 명을 만나게 되었다.
노인은 눈빛이 맑았으나 얼굴이 꽤 수척했다.
최근에 잠을 잘 자지 못한 듯했다.
젊은 여자는 특이하게 붉은 천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제외한 부분만 봐도 대단한 미녀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반갑소. 내가 지헌이의 스승 되는 사람이오. 여기는 내 손녀라오.”
의선이 유성 앞에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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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양의원이 그런 말을 했다.
종종 의선과 편지를 주고받을 때 유성에 대한 내용을 쓴다고.
이번에는 영술에 관해서도 쓰겠다는 말을 했는데.
그 이유 때문일까?
직접 의선이 찾아온 것이다.
눈을 가린 손녀와 함께.
“반갑습니다. 명성이 자자하신 의선님을 꼭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초대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초대는 무슨, 내가 백의원을 찾아온 것이라오. 지헌이가 미리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오. 내가 사람들의 이목을 최대한 피하고자 그러라고 한 것이니 너그럽게 용서하시오.”
양의원을 힐끗 보자 그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는 내내 무슨 일인지 말해주지 않더니 스승의 명이었나보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말씀 편하게 해주셔도 됩니다. 제가 한참 어린데요.”
“그럼 편히 말 하겠네. 연화야. 너도 인사드려야지.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백유성 의원이다.”
안대를 쓴 의선의 손녀가 입을 열었다.
작은 입술에서 모기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 소녀 임연화라 하옵니다. 사정이 있어 안대를 쓰고 있으니 이해해주세요.”
“반갑습니다.”
임연화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허허, 연화가 사람을 거의 만나 보지 못해 쑥스러워 그렇다네.”
얼핏 보니 임연화의 양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고작 한마디 인사만 나누었을 뿐인데 말이다.
“아, 괜찮습니다.”
“그럼 일 끝나고 시장할 텐데 식사라도 하며 이야기하지.”
곧 객잔의 하인들이 별채로 음식을 가져왔다.
온갖 산해진미가 커다란 탁자 위를 가득 채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네 명이 먹기에는 과해 보이지만 얻어먹는 처지에서 이것저것 따질 필요는 없다.
“들게.”
식사가 시작되었다.
유성은 음식을 먹으며 의선이 왜 자기를 찾아왔을까 추리해 보았다.
‘임연화라. 남궁유린의 오빠와 비슷하게 눈을 다친 건가? 그렇다면 내가 눈을 치료해 주길 바랄지도 모르지. 의선이 은거했다는 이유가 손녀가 다쳐서일지도 모르고.
영술이라는 신비한 힘으로 치료한다는 유성의 말을 듣고, 양의원이 큰 관심을 가졌다.
그 일로 의선이 유성을 만나기 위해 제자가 머무는 낙양까지 찾아왔다고 하면 어느 정도 이해된다.
그런데.
‘앞을 보지도 못할 텐데 어떻게 저렇게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지?
임연화가 마치 앞이 보이는 사람처럼 젓가락을 들어 자연스럽게 음식을 집어먹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한 번에 목표물을 집어 입으로 가져간다.
우물우물.
우물우물.
양 볼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복스럽게 잘도 먹었다.
그 모습이 신기해 유성이 자꾸 힐끗거렸다.
“연화는 선천적으로 기감이 아주 뛰어나다네. 다른 사람들도 신기해하곤 했지.”
의선이 유성의 궁금증을 일부 해소해주었다.
“그렇군요.”
그래도 신기한 것은 신기한 것이다.
무인이 눈을 가리고 기감으로 음식의 형체라도 파악하려면 최소 절정 고수다.
고작 스물이나 되어 보이는 여자가 그런 경지 일 확률은 극히 낮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임연화는 무공을 익힌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평범한 일반인 처럼 보이는 모습.
그녀가 타고난 기감이 얼마나 예민해야 가능할지 유성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삐끗—
“아….”
임연화의 젓가락질이 빗나갔다.
“허허, 사람들이 쳐다보면 부끄럼 타는 건 여전하구나.”
그렇게 말한 의선은 유성에게도 말했다.
“백의원이 이해하게. 남들이 쳐다보는 걸 알면 항상 이렇게 부끄러워한다네.”
의선의 말을 듣고 유성이 그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실수한 듯했다.
“이해라고 할 게 있겠습니까? 잘 드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연화는 나와 단둘이 산속에서 오래 살았네. 이런 맛있는 음식을 거의 먹어보지 못했다네.”
어쩐지 네 명이 먹는 것치고는 과하게 많은 음식을 시켰나 싶었더니, 손녀를 위해서 그런 듯하다.
우물우물.
우물.
….
신경 쓰이는지 연화가 음식을 씹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유성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밥 먹을 때는 건드리는 거 아니라던데.
“그나저나 영술을 이용한 의술이라니, 칠십 평생 처음 들어 본 방법이네. 백의원 자네가 혼자 알아낸 방법이라지? 정말 대단하네.”
의선이 시기적절하게 손녀에게 향하는 관심을 끊어 주었다.
유성도 임연화가 맛있게 식사를 즐기도록 의선과 대화하는데 집중했다.
“타고나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저는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의선님이야말로 의술 하나로 온 강호인들의 존경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스승님이 나를 거둬주시고 의선문에서 수대에 걸쳐 전해 내려오는 의술을 전수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이런 과분한 명성을 얻지 못했을걸세. 나야말로 운이 좋았지. 자네는 기존에 없던 한 분야를 개척해 낸 것이니 가히 대종사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서로 얼굴에 금칠을 하는 사이, 양의원은 스승을 방해하지 않기 위함인지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고,
우물우물.
우물우물.
임연화는 시선이 쏠리지 않는 사이 다시 속도를 높여 식사를 즐겼다.
드디어 식사가 모두 끝났다.
유성은 의선이 무슨 말을 할지 조용히 기다렸다.
손녀에 관해서든, 아니든 분명 용건이 있어 찾아왔을 테니까.
“백의원, 예상하겠지만 나는 한 가지 부탁하러 찾아왔네. 다만 그 전에, 괜찮다면 내가 자네를 살펴봐도 되겠나? 지헌이에게 듣기로 단전을 다쳤다면서?”
그가 먼저 호의를 베풀기로 한 모양이다.
“아, 제가 부탁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낙양 의방에 들어오고 유성은 양의원에게 단전의 치료 가능성을 물어본 적 있다.
그때 양의원은 그 누구도 유성의 단전을 치료하지 못할 거라 말했다. 하지만 의선이 봐준다는데 사양하고 싶지 않았다.
신성력을 열심히 모으고 있으나 단전 치료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곧바로 치료할 방법이 있다면 더 좋은 일이다.
최상급 요상단이라는 대환단도 하나 얻어둔 것이 있으니.
하인들이 음식을 모두 치운 후, 안채에 간식거리만 조금 준비해주었다.
임연화를 위한 배려다.
안채에 자리를 잡고 의선은 유성의 맥을 짚었다.
머지 않아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가 유성의 손목을 내려놓고 머뭇거렸다.
“저는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해주십시오. 어느 정도 들어서 각오하는 부분입니다.”
“음…, 지헌이가 말한 대로일세. 나로서는 이미 손 쓸 방법이 없겠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었는데요. 살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쉽지만 의선도 단전을 치료하는 건 무리라고 한다.
이제 믿을 건 정말 신성력을 쌓는 방법 뿐이다.
아마 신성력이 없었다면 절망스러웠겠지만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늦지 않게 치료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
“자네가 무림맹 의각에서 일하게 되었다지?”
의선이 갑자기 그렇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낙양 의방을 그만두었으니 며칠 후면 무림맹에서 일하게 됩니다.”
“….”
왜 그런 걸 물었을까?
의아해하는 유성에게 의선이 말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자네 단전의 상태를 보니 의심스러운 부분이 하나 있네. 그러나 말해주자니 괜히 잘못된 정보를 전하게 될까 두렵고, 말해주지 않자니 자네가 중요한 정보를 모르고 넘어가게 될까 두렵네.”
의선의 말에 양의원이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은 그제야 양의원도 예전부터 자기 단전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양의원도 의선과 같은 생각으로 비밀에 붙였나보구나.
유성은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결정했다.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 들어 보고 잘못된 정보인지 알아보는 편이 수고스럽더라도 훨씬 낫다.
“그렇다면 듣겠습니다. 다 제가 감당할 테니 말씀해주십시오.”
단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지, 유성은 백가장 시절이 떠올랐다.
유성은 절정으로 향하는 실마리를 잡고 폐관 수련 중, 손쉽게 절정의 벽을 넘었다.
누군가는 평생을 벽에 닿지도 못하고, 누군가는 평생을 벽에 가로막혀 절망한다.
소수는 벽을 뛰어넘어 초절정의 벽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유성과 같은 타고난 천재에게는 절정의 벽은 큰 장애물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
물론 큰 장애물은 아니더라도 무공을 본격적으로 익힌지 2년 만에 절정에 도달한 것은 대단한 성과.
유성이 기쁨에 가득 차 절정 고수가 할 수 있는 여러 기예를 시험하던 중, 그 일이 발생했다.
별다른 전조도 없이 단전이 깨져 버린 것이다.
‘분명 무리한 내공 운용도 없는데 말이지.
많지는 않았으나 열심히 모았던 내공이 샅샅이 흩어지던 경험은 끔찍했다.
사기 특성에 힘입어 순조롭게 힘을 키워가던 중 발생한 사고.
그 당시도, 그리고 지금도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다.
결국.
절정 고수가 되어 나오겠다 호언장담을 했으나.
무공을 잃고 초라하게 폐관을 마친 유성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잔뜩 기대하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무공 말고는 그들의 관심과 사랑을 차지할 방법이 없던 사생아는 180도 바뀐 그들의 태도, 그리고 형의 잔인한 눈빛에 가문을 스스로 나왔다.
‘어차피 진짜 부모도 아니라 큰 정을 느낀 적은 없지만 잘 대해주는 모습에 평생 백가장의 아들로 살아갈 줄 알았는데.
그런 유성에게, 의선이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한다.
의선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림맹 소속이 되었으니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 되겠지. 그럼 이야기해주겠네.
나는 십 년 전쯤, 한 가문에서 당하는 사람도 모르게 단전을 산산이 깨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네. 꼭 자네 단전처럼 말이야.”
“….”
유성의 눈빛이 강렬하게 타올랐다.
그렇다면 누군가 수작을 부려 고의로 자기 단전을 깨트렸을 가능성도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절대 그들을 가만 둘 생각이 없었다.
의선이 말을 이었다.
“사천당문의 파단독. 그 독에 당한 상대는 단전이 산산조각 나 회복할 수 없게 된다더군.”
유성은 의선과 양의원이 이 사실을 말해주는데 고민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은혜와 원한은 절대 잊지 않는다는, 오대 세가중 가장 악독한 손속을 지닌 사천당가가 관련된 이야기였다.
‘하지만 난 만독불침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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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만독불침].
백독불침, 천독불침의 최상위 특성.
백독불침은 일 백가지 독에 면역.
천독불침은 일 천가지 독에 면역.
그렇다면 만독불침은?
‘일 만가지 독이 아니야. 처음 특성을 선택할 때 간단한 설명이 적혀 있었지.
답은 ‘모든 독에 면역’이다.
독의 종류가 일만가지가 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그냥 으레 쓰여 온 용어라 그대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름은 만독불침이라고 붙여놓았지만 유성은 이론상 모든 독에 면역이라는 거다.
즉.
‘나는 독에 당하지 않는 몸. 파단독은 아니야. 의선이 잘못 짚었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의선은 유성이 만독불침이라는 사실을 모르니 사천당가를 의심한 듯하지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 가능성도 열어두겠습니다.”
“아니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
유성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무인이었던 사람이 단전을 치료할 수 없을 거라는 말.
그리고 오대 세가중 하나가 엮여 있을지 모른다는 말에 자연히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모두 유성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심지어 임연화마저도 입안에 든 간식을 씹지 못했다.
“분위기가 약간 이상해졌군요. 저는 정말 괜찮으니 이제 의선님이 부탁하려 하신 것이 무엇인지 들어 보고 싶습니다.”
크게 얻은 건 없지만 상대가 호의를 베풀었으니 유성도 갚아주어야 한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고맙네. 그럼 염치 불구하고 부탁하겠네. 혹시 연화를 살펴줄 수 있겠나? 병명을 알려줄 수는 없지만 자네가 살펴보고 치료할 수 있는지 알려주면 좋겠네.”
올 것이 왔구나.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혹시 눈 쪽 문제라면 안대를 벗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살펴보겠습니다.”
듣기로 안구가 칼에 베인 남궁유현과 달리 임연화의 눈은 치유 스킬로 해결될 수준일 수도 있다.
직접 봐야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연화의 눈은 아프지 않네. 다른 사정이 있어 가리고 있을 뿐이네.”
“아,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다른 사정이 뭔지 내심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단순히 유성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한 것이면 다른 방법도 있을 텐데.
유성은 임연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간식거리를 살며시 내려놓고,
꿀꺽.
입에 든 것을 삼킨 채 무릎을 꿇고 다소곳하게 앉았다.
“임 소저, 그럼 제가 좀 살펴보겠습니다.”
“…네.”
조심스럽게 내민 손목을 잡았다.
산속에서 의선과 살았다더니, 피부는 햇빛을 많이 받지 못한 듯 하얗다.
맥을 짚어 보았으나 특이사항은 없다.
정상인과 다를 바 없다.
‘진맥으로는 특별한 이상은 확인되지 않아. 신성력을 흘려 봐야겠다.
조심스럽게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의선이 원한 것도 영술이라고 둘러댄 신성력으로 임연화를 치료할 수 있는지 여부다.
그렇지 않다면 의선이 굳이 부탁할 필요 없을 테니.
“….”
유성은 임연화의 몸 곳곳을 신중하게 살폈다.
분명 무슨 문제가 있어서 부탁한 것일 텐데 그녀의 몸은 큰 이상이 확인되지 않는다.
남들 다 조금씩 가지고 있는 잔병 뿐이다.
이제 남은 곳은 머리.
신성력을 올려보냈다.
의선이 말한 대로 눈쪽은 아무 이상 없다.
조금 더 위로.
‘이건….
뇌가 은은한 붉은 기운에 잠겨 있다.
언젠가 유성이 느껴본 적 있는 이 느낌은….
‘정신 오염?
버츄얼 판타지 세계에서도 뇌가 붉은 기운에 잠긴, 정신이 오염된 개체들이 있었다.
인외의 존재에게 지배당해 특이한 행동을 하는 개체들.
그런 개체들에게 느껴지는 정신 오염 기운이 임연화의 뇌에서도 감지되다니.
유성이 표정이 심각해졌다.
정신이 오염된 자들은 십중 팔구는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 몰라 치유 스킬을 발동시켜 보았으나.
'역시 꿈쩍도 하지 않는구나.'
지금은 해결할 수 없다.
손을 거둬들였다.
“후….”
진맥을 끝낸 유성에게 의선이 긴장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무슨 병인지 알겠나?”
버츄얼 판타지였다면 설명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모르겠습니다.”
“…그렇구만.”
의선이 크게 실망한 모습이다.
정말 유성의 의술에 기대를 걸었나보다.
임연화 역시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무릎 꿇고 있던 그녀가 상심하자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유성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정신에 작용하는 문제로 보입니다. 맞습니까?”
“마, 맞네! 그런 것도 알 수 있나? 치료는 가능하겠나?”
의선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다급해 보인다.
유성은 물론 정신 오염을 해결해 본 경험이 있다.
미래에 얻게 될 스킬이 그 답이다.
“네, 지금은 힘들지만 제 실력이 더 좋아지면 치료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의선도, 임연화도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만큼 놀랐다는 의미다.
“네, 그러니 조금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물론일세. 정말 고맙네! 고마워!”
의선이 거듭 감사를 표했다.
사정상 주변에 사람도 쓰지 못하고 몸이 축날 정도로 손녀를 돌보고 있었지만, 그는 미래가 없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치료할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말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른다.
‘지헌이의 말을 들어 보아도 백의원이 허튼소리를 할 사람은 절대 아니다.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도 알아차렸고 분명 무언가 가능성을 본 거다. 정말 이런 인재가 나타나 천만다행이다.
강호인들을 상대로 의술을 베푸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다.
은원이 마치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강호인들의 관계.
그들 중 누군가를 치료해 은혜를 입히는 일은 다른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매사 신중했던 의선과 달리 의선의 아들 부부는 강호의 은원을 너무 쉽게 생각했고 누군가를 치료해준 일로 목숨을 잃었다.
손녀 임연화만 세상에 남기고.
그런 불쌍한 손녀가 천형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데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그리고.
“가, 감사해요, 백의원님….”
당사자인 임연화가 느끼는 감사함은 더 컸다.
자신이 가진 천형 때문에 할아버지는 어느 순간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왔다.
의선문의 제자들도 모두 세상으로 내보내 간신히 문파의 명맥만 끊기지 않게 유지했다.
연화는 남들의 시선을 피해야 했고, 매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치료를 받아도 완치가 되지 않고 잠시 증세를 늦출 뿐.
언젠가는 예정된 파멸이 다가오는 삶은 그녀를 견디기 힘들게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가능성이 있다는 말만으로도 그녀는 버틸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몰라 할아버지와 나도 점점 지쳐갔는데…. 이제 나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세상으로 나가 사람들과도 어울리고 싶었고,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러나 현실은 인적 드문 산속에서 날로 수척해져 가는 할아버지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할아버지와 백의원이 이야기를 나눈다.
“길어도 일 년. 그 안에 도와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일 년, 꼭 기억하겠네. 내가 사정이 있어 다시 거처로 돌아가야 하니 연락은 지헌이를 통하면 되겠나?”
“네, 그게 나을 것 같습니다.”
임연화는 안대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유성이 의선과 이야기 나누는 틈을 타 안대를 아주 살짝 내렸다.
이야기중인 백유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분이 백의원님이구나. 나를 치료해주실 분…!
그녀는 백유성의 얼굴을 꼭 담아두었다.
‘만약 몸이 치료된다면….
임연화는 하고 싶은 일이 하나 더 생겼다.
***
양의원과 함께 돌아가는 길.
단촐했던 유성의 작은 보따리가 크게 부풀어 오르고 묵직해졌다.
의선이 전해준 의서들 때문이다.
-영술을 사용하는 자네에게 필요한 물건은 아닐 수 있지만 의술도 열심히 익혔다고 들었네.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처방들을 모아둔 것이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
-제가 이 귀한 것들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아직 손녀분을 치료해드리지도 못했는데요.
-모든 것을 전한 것도 아니니 괜찮네. 그리고 어차피 난 더 이상 사람들을 치료할 여력이 없으니 자네가 좋은 곳에 써 주게.
당연히 유성에게 큰 도움이 된다.
낙양 의방에서도 신성력이 필요한 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에 대한 처방이 달랐다.
신성력이 부족하기에 꼭 필요한 환자들이 아니면 평범한 의술에 의존했다.
그런 상황에서, 의선문의 비법들은 유성도 알차게 써먹을 수 있을 거다.
의선문의 정식 제자 양의원이 질투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그는 역시 대인배였다.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한다.
“정말 고맙네, 백의원.”
“아직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는데요.”
“아닐세. 나는 스승님이 저렇게 기뻐하시는 건 처음 본다네. 그것만으로도 자네에게 참 고마워. 게다가 자네가 헛소리를 할 사람도 아니니 분명 스승님의 문제를 도와줄 수 있을 거라 믿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스승님께 연락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내게 말하게.”
“알겠습니다. 참, 혹시 의각에 의원들을 추가로 뽑는다고 하면 양의원님도 생각있으시지요?”
양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전에 자네에게 진 후로 세상을 떠돌며 더 공부할까 고민했었네. 그런데 이제는 자네 옆에 붙어 있는 게 스승님께 도움이 될 것 같네.”
기꺼이 스승과 유성의 연락책이 될 생각인가 보다.
그가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이 정말 커 보인다.
유성은 모든 정신 오염을 치료할 수 있는 스킬 ‘정화’를 떠올렸다.
‘지금 추세면 1년 안에 얻을 수 있을 거다. 의선도 그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했고. 물론 더 시간이 단축되면 좋겠지만.
낙양 의방 생활보다 훨씬 많은 신성력을 얻을 수 있는, 무림맹 의각 생활이 기대된다.
그날 해시 무렵.
유성은 다음 스킬을 각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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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와 치유의 여신 가이아.
그녀를 모시는 신전의 주 수입원은 몇 가지가 있다.
신실한 신자들에게 헌금을 받거나.
여신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치료 또는 축복을 내려주거나.
모험가들에게 신성력이 깃든 물품을 판매한다.
판매하는 대표적인 물품으로는 성수가 있다.
성수는 마법사들이 트롤의 피를 이용해 제조하는 포션보다 효과가 뛰어나다.
상처 치유시 고통 등 부작용도 없어 인기가 많다.
유성은 한때 신전의 공헌도를 올리기 위해 성수 제작에 몰두한 적이 있다.
수 없이 만들어 봤기에 질릴 만도 하지만 지금은 이 스킬이 너무 반갑다.
[성수 제작]
비록 하급 성수지만 앞으로 유성의 행보에 도움이 될 만한 물품이다.
“신성력이 남을 때마다 성수를 만들어 놔야 해.”
신성력은 서서히 회복된다.
의방에서 근무하는 동안 다 소모하지 못하면 괜히 손해 본 기분이었는데 적절한 신성력 소모처가 생겼다.
조금씩 성수를 만들어 비축한다면 신성력이 다 떨어졌을 때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무림맹을 비웠을 때도 도움이 되고.
“일단 만들어 보자.”
먼저 물을 준비했다.
순수하고 깨끗한 물이면 가장 효과가 좋겠지만 여기서 그 정도를 바라는 건 무리다.
길러둔 물에 해독 스킬을 사용하고 몇차례 걸러낸 후, 소주잔만 한 작은 용기에 담았다.
물 위로 손을 가져다 댄 후.
[성수 제작]
신성력이 주욱 빠져나간다.
투명한 물이 서서히 노랗게 물들더니 마침내 은은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됐다.”
평범하게 치유 스킬을 발동시키는 것보다 효율이 훨씬 나쁘다.
치유 스킬을 열 번 이상 사용할 수 있는 양으로 만들어 낸 것이 고작 이렇게 적은 양의 성수니까.
그런데도 신전에서는 성수 제작에 열을 올렸다.
모험가들이 항상 사제들을 대동하고 다닐 수 없으니 비싸게 팔린다.
여벌 목숨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법이다.
***
유성은 거처를 완전히 무림맹으로 옮겼다.
새 거처에는 작은 마당도 딸려 있어 유성이 아침에 수련하는데 지장도 없는 곳이다.
무림맹 부지가 매우 넓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기존 거처는 하오문의 도움을 받아 처리하기로 했고.
“어서 오십시오, 백의원님. 하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안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전에 시험을 치른 적 있는 의각.
건물만 올라가 있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그럴듯하게 꾸며져 있었다.
환자들이 대기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고, 내부에 약재 보관 장소도 있다.
환자를 입원시키기 위한 공간도 있고, 지금은 한 곳만 열려 있으나 추후에 의원들이 추가되었을 때를 대비한 진료실도 여러 개 마련되어 있다.
의각 운영 담당자가 새로 뽑은 하인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들과 하나 하나 눈을 마주치던 중.
“응…?”
아는 얼굴들을 발견했다.
“또 뵙습니다, 백의원님. 저 예진실에 있던 종학진입니다.”
“저도 다시 백의원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장칠입니다.”
낙양 의방의 예진실에서 일하던 종학진, 그리고 제 십일 진료실 담당 하인 장칠이다.
“두 분도 의각에 지원하신 줄 몰랐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경쟁자가 많았는데 낙양 의방에서 일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앞으로도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예진실에서 오래 일한 종학진은 환자 분류에 탁월한 능력이 있다.
믿을 만하다.
장칠도 그동안 함께 손을 맞췄기에 유성도 업무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딱 한 가지, 입이 좀 싸다는 단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 외에도 여러 하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의각의 시설들에 대해 익힌 후.
“오늘부터 바로 시작해도 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저희야 하루라도 빨리 의각이 활성화되면 좋지요. 말씀해주시면 맹 내에 널리 알리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무림맹 총군사실.
“총군사님, 오늘부터 의각이 운영된다고 합니다.”
순조롭게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제갈영영이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벌써요? 원래 내일부터잖아요?”
“새로 오신 의각주님이 일 욕심이 많으신가봅니다. 오늘부터 진료 보시겠답니다.”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부하가 나간 후.
그녀는 다시 보고서로 시선을 돌렸다.
천문진법총해는 항상 가슴에 품고 다니지만 일부러 오늘은 공부하지 않았다.
두통도 없어서 굳이 의각에 찾아갈 이유는 없지만.
탁.
책상을 짚고 일어났다.
‘그래도 첫날인데 예의는 차려야겠지?
한쪽 장 안에서 고급스러운 보자기를 하나 꺼냈다.
서역 먼 곳에서 온 상인에게 미리 구해 둔 차다.
두 상자 사서 마셔봤는데 향이 좋아 의각 업무를 시작하면 전해주려고 준비해 두었다.
“설마 안 아픈데 찾아왔다고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그러면 서운 할 것 같지만.
그녀는 의각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가볍다.
잠시 후.
의각 앞에 도착한 제갈영영은 이미 길게 늘어선 줄에 당황했다.
의각 내부에도 대기 공간이 있고 외부에도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외부 공간까지 사람들이 서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의각을 만들기를 잘했다는 생각 약간, 그리고 다른 생각이 든다.
‘괜히 찾아왔나? 아프지도 않은데…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나?
왠지 아쉬운 마음에 쉽게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있을 때.
하인 하나가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새로 줄을 선 무사들에게 무언가를 물어보고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저 사람은...?'
하인의 얼굴이 무척 낯익다.
“무사님은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나는 그냥…”
질문을 받은 무사가 우물쭈물했다.
종학진은 벌써 이런 사람을 수십 명이나 상대해 봤기에 능숙하게 대처했다.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으나 한번 진료를 받아보고 싶으신 겁니까?”
“큼, 그렇지. 용하시다는 소문을 들어서… 혹시 나도 모르는 뭔가 발견될 수도 있고.”
“그럼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환자분들 상태에 따라 경중이 있어서 순위가 조금은 뒤로 밀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이네.”
종학진은 그 무사의 경중을 표기하는 곳에 ‘무’라고 표기한 후 뒤로 시선을 돌렸다.
“어?”
종학진과 제갈영영의 눈이 마주쳤다.
“총군사님도 오셨군요. 항상 같은 이유 맞으십니까?”
“아… 네, 네. 맞아요.”
그녀는 얼떨결에 그렇다고 대답하며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아침마다 낙양 의방을 찾을 때 지끈거리는 두통 때문에 살짝 인상을 쓰는 편이다.
“이런, 힘드시겠군요. 앞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중하신 분들이 거의 없어서요.”
“그래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이게 제 일인걸요. 따라오십시오.”
얼떨결에 제갈영영은 거짓말로 여러 무사들을 새치기 해 버렸다.
‘죄송합니다…’
거의 스무명을 제끼고 앞에 세 명 정도를 남겨두게 되었을 때 종학진은 그녀를 그곳에 세웠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주변 무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어색하게 인상 쓰는 상태를 유지했다.
바로 뒤에 기다리는 무사가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리고 있어 양심의 가책이 더 커졌다.
‘정말 죄송해요. 오늘만 실례할게요… 여기까지 왔으니 이것만 전해주고 갈게요…’
그녀의 앞에 서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는 입원실로 향했고 누군가는 후련한 표정으로 나섰다.
곧 자기 차례가 다가온다.
억지로 인상을 쓰는 것도 편한 일이 아니라 서서히 이마를 피려는 순간.
또 아는 얼굴을 마주했다.
하인 하나가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다.
‘낙양 의방 때 백의원님 진료실 하인이네. 여기도 따라오셨구나.
문득 유성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의방 내에 소문이 빨리 퍼지더군요. 입 싼 사람들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그중 가장 유력한 사람, 장칠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제갈영영의 이마가 더 찌푸려졌다.
***
낙양 의방 시절, 유성은 의원들 중 막내였다.
나이도 제일 어리고 경력도 짧다.
할당받은 진료실마저 마지막인 제 십일 진료실.
시간이 지나며 실력을 인정 받았음에도 약간씩 손해를 보는 구석이 있었다.
유성의 환자를 입원시킬 때 입원실에 자리가 없어 다른 빈방을 알아봐야 한다거나.
거래하는 상인의 사정으로 비품 공급이 늦어지면 유성이 조금 더 적게 분배받거나.
그러나 무림맹 의각에서는 자신이 서열 일 위다.
유일한 의원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임시’라는 단어를 떼고 의각주가 될 확률도 가장 높다.
현재 모든 하인들이 자신만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만족스럽다.
그리고.
신성력.
‘확실히 낙양 의방보다 효율이 좋다.
제일 먼저 다녀간 사람이 간단한 잔병을 치료하고 갔음에도 그렇다.
중상 환자는 말할 것도 없다.
신이 나 치료에 열중하고 있을 때, 제갈영영이 찾아왔다.
매일 아침 보는 익숙한 표정이다.
“총군사님? 오늘은 공부 안하신다고 하셨으면서… 두통이 있으십니까?”
“그게… 사실 공부 안 했어요. 이걸 전해드리고 싶어서 왔는데 얼떨결에 아프다고 해 버렸어요. 죄송해요.”
준비해 온 고급 차 상자를 전해주었다.
"이게 뭡니까?"
"서역에서 구한 차예요. 향이 좋아요."
바쁜 와중에 거짓으로 찾아왔다고 하면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으나, 제갈영영은 차마 유성에게 까지 거짓말하지 못했다.
‘날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괜히 왔나?
잠깐 그런 후회를 했으나.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리고 마침 잘 오셨습니다. 안 그래도 이걸 실, 아니, 드리고 싶었는데.”
유성이 작은 호리병 하나를 내밀었다.
“공부하면 두통이 발생한다고 하셨는데, 그때 이걸 사용해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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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이 건넨 작은 호리병 안에는 이번에 만든 성수가 담겨 있다.
언젠가 사천당가로 향할 생각을 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이 제갈영영이다.
성수가 그녀의 두통에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 확실하게 알아둔다면 장기 계획을 세울 때 도움이 된다.
제갈영영이 호리병을 받았다.
살짝 흔들어 보니 액체가 찰랑거린다.
“이게 뭔가요? 혹시 술은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약입니다.”
“약이요? 두통약이라는 말인가요?”
다른 의원들이 지어 준 약은 약재를 탕약으로 달여 먹는 거였는데.
“두통 뿐 아니라 다양한 질병에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양이 적지만 많은 양을 뿌리면 상처도 아뭅니다.”
“금창약처럼요?”
“금창약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피식.
웃음을 흘린 제갈영영이 호리병을 흔들었다.
“에이, 이게 무슨 만병통치약이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그녀는 유성이 또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만병을 치료해주지는 못하겠지만 대부분의 병을 호전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농담…이 아니군요?”
진지한 유성의 표정을 보고 제갈영영은 심각하게 호리병을 바라보았다.
‘이 안에 도대체 뭐가 들었기에 백의원님이 저렇게 자신하는 거지?
그를 겪어 보았기에 가끔 장난은 쳐도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매우 귀한 물건이다.
저잣거리에 사기꾼 약팔이들이 만병통치약이랍시고 엉터리 약을 비싸게 팔아먹는 일이 있다고 들었으나,
이건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효과를 가진 듯하다.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천고의 명약이다.
만약 중병에 걸려 오늘 내일하는 사람이 있다면 천금을 주고라도 구하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 누군가는 힘으로 빼앗으려 할지도 모른다.
자연스럽게 조심스러워지며 주둥이를 함부로 잡고 있던 호리병을 신주단지 모시듯 받들었다.
“이런 귀한 약을… 왜 저에게…?”
유성은 ‘당연히 가장 좋은 실험체이기 때문입니다’ 라는 말을 꾹 삼켰다.
백회혈에 침을 놓아 치유 스킬을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 제갈영영이었고.
어느 정도의 성수를 먹어야 두통에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제갈영영이 제일 적당하다.
항상 비슷한 수준의 두통을 호소해 온 그녀다.
유성은 어느 정도로 치유 스킬을 사용해야 제갈영영의 두통이 낫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제격이지.
이 성수는 순수하고 깨끗한 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미 성수로 변했으니 비 위생적이지 않지만 약간 질이 떨어질 수 있다.
그 수준을 가늠해 보기에 가장 좋은 실험체는 제갈영영밖에 없다.
해가 될 부분은 없지만, 그대로 말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적당히 상대가 기분 좋을 말을 들려주면 된다.
“총군사님은 제가 아는 가장 믿을 만한 분이니까요.”
화악—
제갈영영은 표정 관리하기 힘들었다.
아마 귀도 빨개진 듯하다.
잘생긴 남자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
자기도 모르게 호감을 가진 상대에게는 더 그렇다.
“그, 그런데 머리 아프면 침을 맞으면 되는데 굳이 이 귀한 약을 먹어야 할까요? 양도 얼마 안 되는 거 같은데…”
“아, 귀한 약인건 맞는데 그것밖에 없는 건 아닙니다. 제가 만들었거든요.”
“네?!”
***
제갈영영이 돌아갔다.
오늘 일 끝나고 바로 확인해준다고 했으니 저녁에 잠시만나기로 약속했고.
아마 그녀는 유성이 시키는 대로, 모종의 공부하다가 두통이 생기면 성수를 조금씩 마시며 두통이 가시는 지점을 알려줄 거다.
유성은 이제 조금 전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이걸 팔면 엄청난 부자가 될 것 같다라…’
부자가 되어 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것.
그게 효율적이었다면 유성도 그걸 고려했을 거다.
그러나 가이아는 황금의 신이 아니라 대지와 치유의 여신이다.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신성력은 매우 적다.
유성을 향한 진심 어린 기도를 받을 수 있다면 모를까, 돈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사는데 한계가 있으니까.
그렇다면 성수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은 어떨까?
이것 역시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다.
‘성수를 내가 직접 전해주지 않으면 효과가 크게 줄어드는 게 아닐까?
직접 만나 전해주는 것은 치유 스킬을 사용하면 되기에 아무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귀한 약을 만든 사람보다 그 약을 구해다 준 사람에게 더 고마운 마음을 가진다면 줄줄 새는 신성력이 아깝다.
성수를 타인에게 제공하려면 온전히 유성의 공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
‘꼭 필요하는 사람들을 선별해서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제공해주면 되겠지. 물론 이걸 전해주는 사람은 나라는 걸 명확히 해야 해.
다행히 유성의 인맥중 도움받을 만한 곳이 있다.
하오문.
유성은 소옥이 완전히 하오문을 장악하고 나면 이 일을 논의해 보기로 결심했다.
***
무림맹 군사실.
학사복을 입은 여러 사람들이 전국에서 올라오는 문서들을 정리하고 분류하고 있었다.
한때 업무 과다로 조용히 퇴사를 고민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총군사 제갈영영의 지시로 과감히 업무 방식을 개선.
정시 퇴근이 가능한 수준까지 업무 부담이 줄었다.
올라오는 보고들에 따르면 강호 정세가 심상치 않지만 다행히 큰 사고는 터지지 않고 있다.
모두 오늘도 무사히 정시퇴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들떠 있을 무렵.
그중 내심 긴장을 감추지 못 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군사부 서열 오위, 태정헌이 그 주인공이다.
태정헌의 눈길이 조심스럽게 부군사의 책상으로 향했다.
쓱쓱.
부군사는 총군사 제갈영영에게 작성할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다.
군사부 인원들이 제출한 보고서들을 그가 최종적으로 취합하여 총군사에게 전달할 거다.
그런데.
‘저번에 부군사님이 보고서를 바꿔치기 한 것 같단 말이야.
태정헌은 우연히 그 사실을 목격하고 며칠 동안 잠을 설쳤다.
부군사는 지금은 은퇴한 전 총군사 사마병을 모시던 사람이다.
제갈영영이 사마병의 아들 사마천과 겨뤄 총군사가 되었을 때 사마병을 따르던 사람들이 대거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의 총애를 받던 부군사는 여전히 제갈영영을 따르고 있다.
처음에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의심하던 사람들은 부군사가 충실히 제갈영영을 따르는 모습에 점차 의심을 풀었다.
지금은 그를 의심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그게 신뢰를 얻기 위함이었다면? 이번에 흑도 무리가 몇 군데 세력을 형성하려는 기색을 보이고 있다. 하나도 누락되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정보인데…’
자신이 직접 취합한 정보라 더 신경 쓰였다.
곧바로 제갈영영에게 달려가 부군사의 행동이 수상했다고 보고하는 건?
부군사는 태정헌의 직속 상관이다.
함부로 보고 체계를 무시하고 의심했다가 만약 자신이 오해한 것이라면 앞날만 단단히 꼬이게 된다.
‘그래도 모른 척하자니 마음이 불편해.
바름을 법도로 삼으라고 부모님이 지어 주신 정헌이라는 이름이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진다.
‘안 되겠다. 꼭 확인해야겠다.
태정헌은 때를 기다렸다.
부군사가 취합된 보고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총군사님께 다녀오지.”
부군사가 군사실 밖으로 나가자 태정헌은 배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좀 안 좋구만.”
“요즘 일찍 끝난다고 너무 달린 거 아닌가? 오늘은 백호단주님이 꼬셔도 가지 말게.”
“그래야겠어.”
동료의 말에 대충 대꾸하고 태정헌은 조용히 문을 나섰다.
은밀히 부군사의 뒤를 밟았다.
총군사실까지 거리는 멀지 않다.
전에 목격한 모습에 따르면 가는 도중 바꿔치기가 일어날 수 있다.
군사부의 잡일을 돕는 하인은 여러 일 처리로 바빠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
이 시간대면 항상 하는 일과가 있는 듯하니 부군사의 수상함을 밝혀낼 사람은 자신 뿐이다.
태정헌이 눈을 부릅떴다.
조금이나마 가전무공을 익힌 것이 은밀한 발걸음에 도움이 되고 있다.
부군사가 총군사실까지 절반쯤 갔을 때.
뒷모습이지만 보고서를 들고 있던 부군사의 어깨가 움찔하며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다.
‘방금 분명 품속을 뒤진 것 같은데? 아닌가? 내가 잘못 봤나?
고개를 갸웃 한순간, 부군사가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 정헌이군. 잠깐 나 좀 도와주게.”
“네, 무슨 일입니까?”
뒤를 따르는 걸 들킬 수도 있다는 생각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태정헌이 얼른 부군사에게 다가 갔다.
부군사가 복도의 창문을 활짝 열고는 밖을 바라보았다.
‘뭘 보는 거지?
궁금증에 고개를 내민 사이.
‘헉!
태정헌이 살기를 감지하고 몸을 비틀었으나.
촤악—!
목이 화끈거리는 느낌과 함께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쓰러지는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여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무서운 눈빛을 한 부군사였다.
그는 절반으로 뚝 잘린 듯한 붓을 들고 있었는데, 붓 뒤쪽에 무척 날카로운 칼날이 붙어 있었다.
‘부군사가 간자였나!
같은 수준의 이류 무사 사이에 방심이 큰 화를 가져왔다.
소리치고 싶었으나 목이 어떻게 베인 것인지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부군사가 다시 한번 칼날로 쓰러진 자신을 내리찍으려는 순간.
“무슨 일인가요!”
부군사의 뒤쪽에서 총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헌! 정헌! 괜찮은가!”
얼른 붓 끝에 덮개를 씌워 다시 온전한 붓 모양으로 바꾼 부군사가 정헌을 마구 흔들었다.
목에서 피가 마구 솟구친다.
‘개자식! 날 이렇게 죽이려는 속셈이구나!
그러나 몸의 통제권을 상실한 태정헌은 반항하지 못했다.
영락없이 이대로 죽을 판이다.
***
잠깐 바람이라도 쐴 겸 잠시 총군사실 밖으로 나오던 제갈영영은 쿵—, 수상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누군가 피를 흩뿌리며 쓰러져 있고, 다른 사람이 쪼그려 앉아 있는 뒷모습을 보고 소리쳤다.
“무슨 일인가요!”
얼른 달려간 곳에는 부군사가 눈물을 흘리며 목이 절반이나 베인 채 피흘리는 태정헌을 부르고 있다.
태정헌의 몸이 마구 흔들렸다.
곧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들어온 무사들에게 부군사가 소리쳤다.
“자객이 숨어 있었습니다! 저기로 뛰쳐나갔습니다!”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으면서도 몹시 억울해 보이는 태정헌의 눈빛이 서서히 감기고 있다.
가까스로 즉사를 면했으나 의각까지 데려갈 틈이 없다.
위급한 순간일수록 침착하게.
그녀는 얼른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지금 믿을 건 이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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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헌.
부모님이 지어 준 이름 그대로, 그는 늘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그런 이를 시험하기 마련.
오늘 다시 한번 시험이 닥쳤다.
몸이 바닥에 눕혀져 있다.
겨울도 아닌데 바닥은 얼음처럼 차갑다.
거칠게 숨을 쉴 때마다 목에서 뜨거운 피 냄새가 역하게 올라온다.
부군사가 남몰래 무릎으로 양팔을 짓누르고 있었고, 그 힘은 환자가 이겨 내기 힘들었다.
태정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총군사를 향해 애처로운 눈빛을 던지고,
부군사를 향해 분노를 담아 노려보는 것.
부군사는 눈가를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새끼… 여태 우리를 속이다니…’
저런 연기 실력이 있었기에 여태 걸리지 않았던 거다.
태정헌은 속으로 고래고래 소리쳤으나 ‘그르륵’하는 소리만 나왔다.
‘난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이놈의 본 모습이라도 알려야 하는데!
누군가 수상함을 알아채주길 바래보았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사실 고통으로 일그러진 태정헌의 눈빛을 보고 애처로움과 분노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부군사는 이미 모든 걸 계산해 두었다.
미리 열어둔 창문으로 몇몇 무사들이 있지도 않은 자객을 잡으러 뛰쳐나갔다.
있지도 않은 자객은 무림맹 한복판에서 무림맹 사람을 암살하고 흔적도 없이 빠져나갔다는 명성을 얻게 될 거다.
그때, 총군사가 작은 호리병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 내 눈빛이나 읽어 주라고!!
태정헌은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총군사는 호리병의 마개를 따더니 자신 쪽으로 기울였다.
‘하, 내가 술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마지막으로 목이라도 축이라는 건가. 그래, 술맛이나 보자.
호리병을 술병이라고 생각한 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혀끝에서 느껴질 술맛을 기다렸다.
그런데.
주르륵—
총군사의 선택은 호리병의 내용물을 자기 목에 붓는 거였다.
시야를 내리 깐 곳에 얼핏 보인 것은 금가루라도 섞였는지, 황금빛을 머금은 액체였다.
‘반짝이는 금색? 색깔이 왜 저래?
그 황금빛이 목의 상처에 닿는 순간.
‘으음?
통증이 서서히 가시는 느낌이 든다.
“됐어요! 여기 지혈 좀 해주세요!”
총군사가 무사 하나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무사가 황급히 목에 천 같은 것을 가져다 대고 압박한다.
정신이 없어 상황 파악이 느렸으나, 태정헌은 부군사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 떠지는 것을 목격했다.
“천벌 받을 새, 어어어?!”
자기 목에서 나온 소리에 태정헌의 온몸이 움찔했다.
기적처럼 목소리가 나왔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부군사가 간자다! 날 암습했, 끄륵!”
됐다!
크게 소리 지르자 다시 목이 화끈거렸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이제 정말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
태정헌은 심력을 쏟아붓고 그대로 기절했다.
제갈영영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재빨리 움직였다.
손이 번개처럼 부군사를 제압했다.
“총군사님, 정헌이 정신이 없어 헛소리를 한겁니다. 자객이 저를 암습하려다가 애꿎은 정헌을 습격하고 창밖으로 몸을 날렸습니다. 그놈부터 잡아야합니다.”
부군사는 침착했다.
신비한 약에 의해 태정헌의 위중한 상처가 아물어 갈 때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지만.
‘이 정도로 흔들릴 거였으면 진작 들켰을 거다. 나는 아직 이 위기를 벗어날 가능성이 크다.
보고서를 바꿔치기 하다가 태정헌에게 들켰다는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그가 한 생각은 단 하나였다.
태정헌을 죽여 입을 막아야 한다!
운 나쁘게 제갈영영이 총군사실에서 나와 완벽하게 마무리 짓지 못했지만,
약을 바르고 죽기 직전의 상태만 넘겼을 뿐, 태정헌은 여전히 위중하다.
그가 결국 죽어 주기만 하면 자신은 무혐의로 풀려날 수 있다.
지닌 두 개의 보고서 중 하나는 잘못 작성된 파기본이라 둘러대면 되는 거고.
‘황금빛 액체. 신기하긴 했지만 방금 다 써버렸다. 상태가 약간 호전되긴 했으나 여전히 태정헌은 살 수 없을 거다. 의각주가 아무리 뛰어난 의원이라지만 피도 너무 많이 흘렸고, 쩌억 갈라진 목을 어떻게 붙여놓는단 말이냐?
부군사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조사는 필요하겠군요. 협조하겠으니 정헌이를 꼭 살려주십시오.”
침착하면서도 부하를 아끼는 모습.
그 모습에 제갈영영은 정말 태정헌이 사경을 헤매다 헛소리를 한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냐, 어딘가 미심쩍어. 아까 애타게 정헌님을 부르던 모습과 상반돼. 하지만 일단 정헌님을 살리고 보는 게 먼저야.
주변 무사들에게 부군사를 조사하라고 명령한 후 태정헌을 챙겼다.
“당장 의각으로 가야 해요.”
무사 몇 명의 도움을 받아 태정헌을 데리고 의각으로 향했다.
태정헌을 업고 쏜살같이 달리는 무사.
그리고 같은 속도로 달리며 목을 단단히 압박하는 무사.
그들 중 하나가 머뭇거리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제갈영영에게 물었다.
“아까 그건 도대체 뭐였습니까?”
명확한 물음이 아니었으나 제갈영영은 당연히 무엇에 대해 묻는지 알아들었다.
그녀 역시 너무 궁금했으니까.
“우연히 구한 약이에요. 일단 빨리 가요.”
제갈영영은 대답을 아꼈다.
방금 본 일은 그녀조차 믿기 어려웠고, 유성과 상의 없이 공개하지 않는 편이 좋아 보였다.
방금 전.
호리병 속의 황금빛 액체가 베인 목의 상처에 닿자 갈라진 살결이 저절로 봉합되며, 가장 출혈이 큰 곳의 피도 스르륵 멎었다.
유성이 준 약이 많지 않았기에 완전한 치료는 불가능했다.
지금은 겨우 응급조치만 된 상태.
그러나 죽음 직전까지 갔던 자를 이 정도로 숨을 붙여 놓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웠다.
‘금창약보다 효과가 좋다기에 조금 더 뛰어나나 했더니, 이건 도대체 뭐야.
이런 놀라운 약을 만들어 낸 유성이라면 틀림없이 태정헌을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
종학진은 바람같이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하고 긴장했다.
예진실에서 근무한 경험이 없더라도 저런 경우는 아주 위급한 상황임에 틀림없다.
헛수고 하는 것이 환자를 놓치는 것보다 낫다.
“장칠! 위중한 환자가 오는 것 같다고 의원님께 전해다오!”
장칠이 후다닥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는 다른 무사들에게 부탁해 길을 텄다.
첫날이라 그런지 호기심에 와 본 자들이 대다수라 급한 자들이 없어 다행이다.
그리고.
유성은 늦지 않게 태정헌을 맞이할 수 있었다.
무사가 지혈중이던 천을 조심스럽게 벗겨내 보았다.
창백한 안색에 목이 베여 피가 꿀렁꿀렁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늦었다고 여기겠지만.
“살릴 수 있겠죠?”
그렇게 묻는 제갈영영의 눈에는 신뢰가 한가득이다.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 살리겠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다친 겁니까?”
“칼에 베였어요. 자세한 건 아직 조사 중이에요. 그런데 처음에는 상처가 더 컸어요. 마침 뛰어난 약을 가지고 있어서 이만큼이라도 아문 거예요.”
성수를 사용했다는 소리다.
무사들이 함께 있어 말을 조심하는 모습이다.
제갈영영에게 준 성수는 많은 양은 아니었다.
중요한 급소 부분만 일부 치료된 듯한데 그렇다면 처음의 상처는 훨씬 심각했던 모양이다.
“이 사람은 운이 좋았군요. 아무튼 제가 치료해볼 테니 나머지는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꼭 좀 부탁할게요.”
제갈영영과 무사들이 나간 후, 유성은 태정헌의 목덜미에 손을 대고 그대로 치유스킬을 발동시켰다.
환부가 넓어 침보다는 손바닥으로 스킬을 발동시키는 게 효과적이다.
‘오늘 심각한 환자들이 많지 않아 다행이다. 신성력이 넉넉히 남아 있었어.
완벽히 치료하지는 않았다.
영술 핑계를 대긴 했지만 너무 상식을 벗어난 힘을 드러내는 건 좋지 못하다.
겉의 상처는 꽤 남겨두었다.
남은 과정은 겉상처 봉합.
‘이제 며칠 입원시켜서 돌보면 잘 아물 거다. 목에 흉터는 뭐, 남자인데 상관없지.
하인들을 불러 그를 입원실로 이동시켰다.
***
부군사에 대한 조사는 강압적이지 않았다.
태정헌이 그가 간자라고 외쳤으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군사부에서 경력 많고 존경받는 그를 죄인 취급 할 수 없다.
물론 태정헌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큰 신빙성이 실렸겠지만 말이다.
조사실 옆의 탁자에는 전낭 하나, 붓 하나, 보고서 두장이 놓여 있다.
소지품을 모두 꺼내 놓은 거다.
부군사는 일부러 붓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약간 묵직하긴 하지만 일부러 두꺼운 나무의 속을 파냈기 때문에, 누구도 붓 안에 작은 칼날이 숨겨져 있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파기해야 할 보고서를 제때 파기하지 못한 건 제 실수입니다만 저는 결백합니다. 무공실력도 변변치 않은 제가 무슨 수로 정헌을 그렇게 만들었겠습니까?”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
정헌의 옆에 있었기에 얼굴에 튄 핏자국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헌은 살아날 수 없다. 이 고비만 잘 넘기면 된다.
조사관도 아무 증거가 발견되지 않은 그를 적당히 상대했다.
“아무래도 자객이 잡혀야겠군요.”
“물론입니다. 정헌을 그렇게 만든 자객이 잡힌다면 제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일단 쉬고 계십시오.”
부군사는 곧 풀려날 거라고 기대하며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눈치 빠른 녀석 하나 때문에 당분간 몸을 사리긴 해야겠군. 귀찮게 됐어.
이튿날 아침.
총군사가 온종일 조사실에 갇혀 있던 그를 찾아와 다독였다.
“죄송해요. 필요한 절차라서요.”
“물론입니다. 윗 사람이 모범을 보여야 하는 법이죠. 혐의가 벗겨질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나저나 정헌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부군사가 정헌의 안부를 물으려는 순간.
조사실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와 소식을 전했다.
“총군사님! 태정헌 군사님이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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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마대주 정립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의 몸 상태가 완전히 낫기 전에는 아무에게나 몸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오직 그의 직속 상관 무림맹주에게만 말했을 뿐이었다. 그는 크게 기뻐하며 치료에 전념하라 당부했다.
'몸 상태가 나날이 좋아지고 있고 백의원님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머지 않아 치료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목숨을 빚지게 된다. 그 은혜는 평생을 두고 갚아야 할 것이다. 아니, 지금도 이미 상당한 수명을 회복했으니 커다란 은혜를 입은 것이다.'
그러던 와중, 치료를 위해 유성을 찾아간 날 정립은 유성의 진료실 안에 선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얌전히 기다리려고 했다.
우연히 예민한 청력으로 듣게 된 대화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솔직히 말해주게. 척마대주님의 치료가 잘되고 있는 게 맞는가? 물론 나는 자네를 믿지만 아까 조의원님이 다른 의원들에게 자네가 대주님을 치료할 수 있다고 속여 뭔가를 얻어내려는 속셈이라고 했단 말이네."
"치료는 잘되고 있습니다. 두 달 안에 완치 가능합니다. 그리고 조의원님의 말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저와 척마대주님의 일인데요."
"어허, 자네는 걸핏하면 자네 흉을 보고 다니는 조의원이 밉지도 않은가? 하인들도 자네와 조의원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다 알 정도인데."
"저도 사람인지라 답답합니다만 저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무림맹 사람들과 친분이 깊은 조의원님과 드잡이질을 할 것도 아니고 별다른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러네만..."
정립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용히 발걸음을 되돌렸다.
"어, 어디 가십니까?"
하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향한 곳은 조의원의 진료실 앞이었다.
그는 원래 신중한 성격으로 남들의 말만 듣고 판단하는 것을 조심히 여겨 왔으나 유성이 직접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지 않은가?
그것으로 충분 했다.
조의원이 그의 은인 백유성을 음해한다는 소리를 듣고 참지 않을 이유로는.
'백의원님은 이 의방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당연히 오래전 여기서 일해온 조의원과 맞서기 쉽지 않겠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충분한 힘이 있다.'
조의원의 진료실 앞에서 잠시 기다리자 하인이 기별을 했고, 놀란 조의원이 뛰어나왔다.
"아니, 척마대주님이 웬일이십니까?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안까지 들어갈 필요 없소. 나는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오."
"그럼요. 편히 말씀하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무슨 기대를 하는지 조의원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아마 백유성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다시 그에게 돌아왔으리라 기대라도 한 것일까?
안 그래도 엄중한 경고를 하려 했던 정립은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유성에게 자신을 보낸 조의원의 가증스러움이 떠올랐다.
물론 그 덕분에 유성을 알게 되어 몸이 치료되고 있지만, 의도 자체가 불순했기에 조의원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
"조의원, 그대는 내가 그렇게 우습던가!"
초절정 고수가 서릿발 같은 기세를 흘려보내자 무공이 부실한 조의원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그, 그게 무슨 마, 말씀이십니까?"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들도 소란에 놀라 그들을 보고 웅성거렸다.
평소의 정립이었다면 체면이 상할까 싶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은인의 근심거리를 해소해주고 싶었다.
"그대의 정치질에 날 이용해 먹은 것을 그냥 넘어가 주었더니 이제는 백유성 의원님을 음해하고 다닌다지? 내가 그분께 속아 몸을 치료할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을 품고 다닌다고?"
"그, 그것이... 아, 아닙니다. 저는 절대로..."
조의원이 초절정 고수가 쏘아붙이는 기세에 큰 공포를 느끼면서도 필사적으로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당황한 상태로는 평생 흑도 무리들의 간교함을 상대해 온 정립에게 거짓을 숨길 수 없었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거짓된 몸짓이 말해주고 있었다.
정말로 조의원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자 일말의 거리낌도 사라졌다.
"또 그 간사한 혀로 거짓말을 늘어놓는구나. 날 치료할 실력이 없어 차도 살인을 하기 위해 백유성 의원님께 날 보내놓고 다른 의원들에게 내가 그분께 속아 멍청하게 치료될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을 품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흐억...!"
그 정도로 과격한 언사를 한 적은 없으나 비슷한 내용이었다.
정립이 기세를 더 끌어올리자 조의원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옅은 회색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정립은 뒤를 돌아보았다.
일련의 상황으로 사람들은 척마대주와 조의원을 보고 수군거렸다.
조의원이 그럴 줄 몰랐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일부는 정립이 너무하다는 반응이었다.
은인을 위해 일반인과 드잡이질을 하는 것으로 약간의 체면이 깎였겠지만 그는 한 치의 후회도 없었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나는 이런 별것도 아닌 상황을 여태 피해왔구나. 그깟 체면이 뭐라고 그리 중시했던지.'
저지르고 보니 은인의 곤란에 비할 바 없는 하찮은 일이었지 않은가?
그 순간 단전 어림이 꿈틀거렸다.
무언가 변화가 생기려 하는 것이다.
'이럴 수가... 그렇게 노력해도 얻지 못했던 실마리가...!'
무인의 깨달음은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생사결에서 얻을 수도 있고 사소한 것에서 얻을 수도 있다.
천한 출신이었던 정립은 기연을 얻어 높은 성취를 얻은 후 척마대주라는 높은 자리까지 올랐다.
사람들이 그의 천한 출신을 흉볼까 우려되어 고수가 된 후로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체면을 중시해왔던 태도가 그의 깨달음을 방해하고 있었다.
은인의 답답함을 대신 해결해 줄 생각으로 나선 것이 애타게 찾아왔던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다니 인생은 알 수 없다.
그는 곧 폐관에 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깨달음의 실마리가 선명할 때 잡아야 한다.
지금 시기를 놓치면 흐릿해져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번에는 경고로 넘어가지만 한 번만 더 그 간사한 혓바닥을 함부로 놀리면 다음에는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니 그리 아시게!"
"죄,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연신 죄송하다 사과하는 조의원을 싸늘하게 내려다본 후 정립은 황급히 유성을 찾아갔다.
그리고 치료 중단을 선언했다.
아직 조의원의 진료실 앞에서 일어난 일을 전달받지 못한 유성이 당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치료가 잘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지금 중단하면 서서히 다시 악화할 것입니다."
"제가 너무 본론만 말했군요. 그런 뜻이 아니라 실마리를 얻은 듯 하여 폐관에 들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실마리라면... 깨달음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이런 이유로 폐관에 들고자 합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성은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조금 전에 엄청난 신성력 상승이 있어 어리둥절했는데 이런 경사가 있나. 만약 그가 화경의 고수가 된다면...!'
"물론 그러셔야지요. 혹시라도 시간이 늦어진다면 다시 치료해 드릴 테니 얼마든지 도전하십시오!"
정립은 눈가가 촉촉해으나 내공을 통제해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는 감추지 못했다.
"그대는 이미 내 은인입니다. 대성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주저 없이 의방을 떠난 정립은 다시 무림맹주에게 보고하고 폐관에 들었다.
***
유성은 뒤늦게 조의원과 척마대주의 일을 전해 들었다.
'척마대주님이 나를 위해 나서 주었구나. 당분간 조의원은 자중하겠지. 그 일로 환자들이 많이 이탈했다고 하고 사람들 앞에서 오줌을 지리는 추태까지 보였다고 하니.'
사실 고소했다.
자신이 대단한 성인군자도 아니고 사사건건 성과를 시기하고 견제하던 조의원이 큰 망신을 당했는데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다만 손뼉이라도 치고 싶은 것을 꾹 참은 것은 이럴 때일수록 자중해야 더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성의 생각은 이제 척마대주의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무엇이 그를 깨달음으로 이끌었는지 모르겠으나 부럽다. 난 언제쯤 단전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그의 신성력이 버츄얼 판타지의 사제 시절보다 더 빠르게 늘어나고 있으나 아직 단전을 회복할 수 있는 스킬까지는 멀었다.
게다가 무공을 익히는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 정론.
아무리 그가 무극지체라는 전설 속 신체를 타고났다 해도 너무 늦게 단전을 회복하면 근골이 다 굳어 고생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고생은 최종 보스를 잡을 때 할지 모르는 고생이다.
'내가 만든 캐릭터로 살아가고 있으니 게임 속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분명 최종 보스도 있을 테고 그를 물리쳐야 하겠지. 현실로 돌아가든, 아니면 이곳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든 모든 것은 최종 보스를 이겨 내야 얻어낼 수 있으니까.'
당장은 뾰족한 방법이 없다. 하루하루 신성력을 쌓아 나가는 수밖에.
"내일도 많은 사람이 모였으면 좋겠네."
***
낙양의방의 의원들은 돌아가면서 휴무일을 가진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루어지는 진료는 꽤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고, 적절한 휴식을 취해주지 않으면 오래 버틸 수 없다.
체력을 타고났고 의료 행위가 곧 신성력으로 이어지는 유성은 쉬는 날마저 아까웠고, 휴무일도 쉬지 않았다.
유성의 휴무일. 그는 낙양의 빈민가로 향했다.
빈민가 사람들은 돈이 없다.
진료는커녕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일반인들 중에서는 많은 신성력을 올려주는 자들이다.
'열악한 처지에 놓인 환자들을 위해 의료봉사를 다니는 의사들이 더 큰 존경과 감사함을 받는 법이지.'
처음에는 계산적인 이유로 시작했으나 요즘 유성은 그에게 치료받은 환자들이 전하는 감사함에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백의원님, 이번에도 와주셨군요! 의방일 하시고 쉬시지도 못하고 매번 죄송해서 어떡한답니까?"
허름한 옷차림이지만 덩치가 좋은 사내가 백유성을 발견하고 얼른 다가와 옆에 섰다.
나름대로 호위 역할을 하려는 것이다.
아무리 무공을 잃었어도 이류 무사 몇 명쯤은 가뿐한 유성이지만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사람들은 많이 모였습니까?"
"아이고, 물론이지요, 의원님이 곧 오실거라고 다들 기대하고 있습니다."
"얼른 갑시다."
사내의 안내받아 도착한 공터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유성을 발견하고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벌써 몇 차례 치료받은 환자도 있고 빈민가에 알음알음 퍼지는 소문을 듣고 처음 온 사람들도 있었다.
유성이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치료하던 중, 뒤에서 소란이 일더니 사람들이 한쪽으로 갈라섰다.
한 소년을 안은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백 의원님! 여기 사람 좀 살려주십시오!"
유성이 보니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열 예닐곱 정도로 보이는 소년의 가슴에는 부러진 검이 박혀 있었고 옷은 피범벅이었다.
볼 것도 없이 심각한 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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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태로 제갈영영은 무림맹의 내부가 생각보다 허술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림맹, 그것도 군사부에서 군사 하나가 칼을 맞아 쓰러지다니.
충격적인 사건인 것이다.
태정헌의 말처럼 부군사가 간자일 확률이 있고,
정말 자객이 군사부까지 침투했을 확률도 있다.
억울해하던 태정헌의 눈빛을 떠올리면 부군사가 의심스러웠으나, 함부로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법.
대신.
부군사의 품에서 발견된 보고서 두장을 보고 제갈영영은 군사부에 지시를 내렸다.
지금까지 부군사가 올린 보고서와 평군사들이 정리한 보고서를 대조해 보라고.
하루에도 수많은 보고서가 오가기에 군사부의 업무가 한동안 마비될 것도 각오했다.
하루가 지나도 자객이 발견되지 않아 부군사를 떠보러 방문했을 때, 일부러 태정헌이 깨어났다는 거짓 소식을 흘려보았다.
제갈영영은 부군사를 힐끗 살폈다.
‘저렇게 기뻐하다니, 정말 아닌가?
그러나 장단을 맞추기 위해 밖으로 나온 제갈영영에게 부하가 재차 말했다.
“저, 말씀 하신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깨어나셨답니다.”
“네? 진짜였다구요?”
'백의원님이 당장 보유한 약은 더 없다고 하셨는데... 위중한 상처라 시간이 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역시 대단해.'
그날, 부군사는 조사실에서 심문실로 이동되었다.
태정헌의 증언으로 붓으로 위장한 칼이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엿새 전 바꿔치기 한 보고서까지 들통이 난 것이다.
“아이고, 왜 그런 짓을…”
선임 고문 기술자 부량이 싱글벙글 웃으며 부군사를 맞이했다.
부군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고문에 버티는 훈련 따위는 받아본 적이 없다.
심지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의각주님 솜씨가 아주 좋으시지. 걸레짝을 만들어 놔도 그분만 다녀가시면 쌩쌩하게 살아난다니까? 이제 정식으로 무림맹 식구가 되셨으니 업무 협조 받기도 쉽고.”
태정헌을 살린 실력을 보면 정말 그럴 것 같다.
눈 앞이 깜깜해졌다.
‘지금이라도 다 털어놔야 하나? 그럼 내 가족들은 어쩌지?
***
태정헌은 퇴원하면서 유성이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허리를 넙죽넙죽 숙였다.
“의각주님, 전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부모보다 먼저 가는 불효를 저지를 뻔했다.
목이 베인 순간에는 그 누구가 와도 자신을 살리지 못할 거로 생각했는데 새로 온 의각주가 해낸 것이다.
‘처음 총군사님이 의각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을 때 바쁜데 괜히 일거리만 늘어나겠다고 불평했던 내 자신이 원망스럽구나.
만약 그때 의각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의각주가 그날부터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너무 그러실 것 없습니다. 이게 제 일인데요.”
“아닙니다. 원래 업무도 다음날부터 였지 않습니까? 의각주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백호단주님이 항상 백의원님을 칭송하는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제가 비록 높은 자리에 있지는 않지만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전력으로 돕겠습니다!”
죽음까지 생각했던 환자를 치료해 주고 얻는 신성력은 짜릿했다.
유성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며칠 후.
태정헌은 사마세가에서 심은 간자의 수상함을 눈치챈 공을 인정받아 여러 선임들을 모두 제치고 공석이 된 부군사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업무를 배정 받자마자 곧바로 의각으로 달려갔다.
“의각주님. 제가 앞으로 의각의 지원을 맡게 되었으니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이 태정헌을 불러 주십시오!”
“부군사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그건 원래 다른 분이 도와주시던 업무였지 않습니까?”
“그랬지요. 그런데 제가 직접 하겠다고 지원했습니다. 어떻게든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
안 그래도 신경 쓴다고 썼으나 의각은 처음 세워진 곳이다.
첫날 진료를 하며 낙양 의방의 체계에 비해 미진한 부분이 조금씩 눈에 띄고 있었는데 잘 됐다.
든든한 인맥이 생겼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전 부군사는 왜 그런 짓을 했던 겁니까?
“크흑!”
태정헌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심장이라도 아픈 듯이.
“어디 불편하십니까?”
“그게 아니라, 기밀이라 그건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
별생각 없이 물었던 유성은 당황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사마세가가 증발했다는 소문과 함께 부군사를 사주한 자들의 정체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
사마세가는 한때 황실에서 높은 관직까지 지낸 명문 가문이다.
그러나 약 백여 년 전, 모종의 일로 관직에서 쫓겨나 무림세가로 변신을 꾀했다.
그 변신은 성공적이었다.
사마세가에서 제갈세가를 밀어내고 무림맹의 총군사 자리까지 차지한 것이다.
약 백 년이 흐르고, 역사가 짧아 전통적인 무림세가인 오대세가에는 끼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사마세가를 여섯 번째로 두었다.
머지 않아 오대세가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아마 사마천이 아버지 사마병의 뒤를 이어 무림맹 총군사가 되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거다.
그러나 모두가 아는 대로 제갈영영이 그를 저지하는데 성공했고.
사마세가는 제갈영영을 끌어내리기 위해 무리해서 수작을 부렸다…
“라고 청운 장로님이 의견을 내주셨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모용림 장로님은?”
“...”
모용림이 말없이 제갈영영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사돈인 사마세가에서 무림맹에 수작을 부리다가 걸렸으니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사마천, 그놈도 사라졌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사위가 아내와 자식도 팽개치고 사라졌다.
사마세가도 증발하듯 사라졌으니 이제 사돈과의 인연도 끝나버렸다.
제갈영영은 꼴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 자리에서 그를 더 몰아세우지는 않았다.
아직 논의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네요. 사마세가의 식솔만 해도 수백명인데, 그들이 모두 사라지기 까지 아무도 몰랐다니요.”
부군사가 사마병이 시킨 일이라고 자백한 후, 은퇴한 그를 데리러 무림맹 무사들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무사들이 하남의 북쪽에 있는 사마세가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텅 빈 장원과 당장 현금화가 불가능한 재산만 남아 있었을 뿐이다.
개방과 하오문에서도 아무 낌새를 채지 못했기에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천하에 누가 있어 그 정도 되는 인원을 아무 흔적없이 증발 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한참을 논의 해 봐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 안건은 개방과 하오문의 도움을 받아 더 알아보는 것으로 넘기고.
“다음은 무림맹에 더 있을지 모르는 간자에 대한 대책이에요.”
부군사는 며칠간은 고문에 버텼으나,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사마세가에서 그의 가족을 데리고 있으며 무림맹 군사부에 혼선을 주라고 지시한 점을 밝힌 것은 물론.
추가로 정체는 모르지만 무림맹에 간자들이 더 숨어 있다는 정보를 털어놓은 것이다.
“아무래도 경계를 더 강화해야겠어요. 그리고 이번에 의각의 중요성도 확인되었죠. 예상보다 훨씬 이르지만 의각의 규모를 키웠으면 해요. 혹시 다른 의견 있으신가요?”
“...”
반대를 일삼던 모용림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고.
“의각주의 신묘한 의술이 아니었더라면 이번에 안타까운 희생자가 발생했을 거요. 의각을 만들자고 했던 총군사의 혜안이 맞았소. 나는 의각의 규모를 늘리는 일도 찬성이오. 미리 늘려놓아야 제때 도움받을 수 있지 않겠소?”
제갈영영은 청운 장로에게 고마운 눈길을 보냈다.
다른 장로들도 저마다 의견을 냈다.
한때 모용림의 편을 들었던 장로들도 이번에는 제갈영영의 손을 들어 주었다.
‘사마세가의 일로 당분간은 조용하겠네.
모용림 장로는 이번 혐의를 벗어났으나 한때 사마세가를 열심히 밀었던 죄로 회의 내내 침묵만 지켰다.
***
“하하핫! 반갑네, 백의원. 이제 의각주라 불러드려야겠지?”
“백호단주님이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백호단주가 유성을 찾아왔다.
그와도 꽤 가까워져 말을 편하게 하는 사이가 되었다.
“인사나 하러 들렀네. 이번에 무림맹의 경계를 강화하면서 의각에 내 부하들도 배치할 예정이지. 다들 괜찮은 애들이지만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귀띔해주게.”
의각 뿐 아니라 다른 곳들에도 무림맹 무사들이 추가로 배치될 예정이다.
“듣긴 했지만 안 그래도 외부 임무가 많을 텐데 경계까지 늘릴 인원이 됩니까?”
유성은 의각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이런저런 정보를 물어다 주는 장칠 덕분에 무림맹 돌아가는 사정을 좀 알게 되었다.
주요 문파나 세가의 정예들은 만만치 않은 세를 보유한 흑도 무리로부터 본거지를 지키는데 큰 힘을 쏟고 있다.
그래서 무림맹 경계 인원들을 늘리는 것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고 알고 있는데.
그 부분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나 봤더니.
“그 부분은 신분이 확실한 무림학관 후기지수들의 지원을 받아 해결할 생각일세. 나중에 무림맹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후기지수들 일부를 임무에 투입시키는 식이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무림학관은 후기지수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만든 곳이 아닙니까?”
“이것도 일종의 교육이네. 어차피 그들도 무인이고, 미리 경험 쌓는다고 봐야지. 어디까지나 지원자만 받아서 간단한 임무부터 대동하여 서서히 경험을 쌓게 하겠다는 총군사님의 의견이라더군. 나는 개인적으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네.”
백호단주가 요즘 애들은 너무 귀하게 자랐다느니, 어쩌고 꼰대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유성은 제갈영영이 의견 냈다는 무림학관 후기지수 지원자 이야기를 듣고 인턴쉽 제도를 떠올렸다.
“그리고 의각주가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이번에 정헌도 살려주었다면서. 전에는 내가 말해도 귓등으로도 안듣던 친구가 어제 술자리에서 자네 이야기만 해대는 통에 서운할 지경이었네.”
백호단주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빼앗겼다며 장난스레 웃었다.
“그래도 제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 크게 다치면 소용없으니 항상 몸조심 하십시오.”
“물론이지. 그 정도는 우리가 알아서 해야지. 아, 자네 남궁유린과 개인적인 친분이라도 있나?"
“네?”
"무림맹에 들어올 생각은 없어 보였는데, 이번에 의각 경계 임무에 혼자 지원했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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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진가장은 작은 무가다.
강호에서 변방으로 취급되는 호남. 그곳에서 거대 문파도 아닌 진가장의 장주는 작은 뱀의 머리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무림맹에서 작은 무력 단체라도 이끄는 자는 용의 몸통 정도는 된다.
비록 몸통의 위치가 꼬리쪽에 가깝더라도.
진영호는 뱀의 머리가 예정된 진가장의 적자다.
그는 용의 몸통과 뱀의 머리 중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할 필요 없다.
둘 다 하면 되니까.
그의 목표는 일단 무림맹의 무사가 되어 높은 자리를 노리다가, 아버지가 늙으면 진가장을 물려받는 거다.
그러면 무림맹 무사, 그것도 꽤 괜찮은 자리에 있었다는 명성으로 호남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무림학관 후기지수들 중 별로 특출나지 않은 그가 무림맹에서 괜찮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방법은 역시 한 가지뿐이다.
“팽형, 백유성 그놈이 이번에 태정헌 부군사님을 살렸다는 소문 말이오, 내가 진실을 알아왔소.”
“진실 말이오?”
팽지산이 흥미를 보이자 진영호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가 찾은 해법은 역시, 미래에 높은 자리에 오를 사람에게 달라붙는 것.
다른 후기지수들에 비해 자신이 특히 잘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부분이다.
그러면 팽지산이 자신을 이끌어 줄 거다.
“처음에 태정헌 부군사님 목이 절반쯤 베여 죽어 가던 중, 총군사님이 지니고 있던 신비한 약으로 이미 위기를 넘긴 상태였다지 뭐요? 백유성은 뒤늦게 상처 조금 꿰매고 그런 명성을 얻은 거요.”
“흥, 그럼 그렇지. 무슨 약인지 몰라도 그것 덕분이었군. 그런데 왜 그놈이 다 고쳤다고 소문이 난 거요?”
“그야 그놈이 평판 관리를 잘했으니 사람들이 알아서 오해해준 것이 아니겠소?”
유성은 제갈영영과 이야기 후, 너무 뛰어난 약효에 잠시 그 정체를 숨기기로 결정했다.
치유 스킬의 존재를 모르는 제갈영영이 보기에, 유성의 의술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약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했다.
유성도 동의했다.
그는 어차피 명성이 필요한 게 아니라 신성력을 얻을 수단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꼭 필요한 상황에 사용하기 위해 성수는 잘 모아두기로 결정.
그런 이유로.
처음 태정헌의 곁에 있던 무사들은 성수에 대해 정확히 모르기에 두리뭉실하게 소문이 난 것을 진영호가 주워 온 것이다.
“그놈의 평판. 앞으로 내 명성이 훨씬 높아질 테니 두고 보시오!”
“물론이오, 팽형. 지금은 흑도들이 활개 치고 있는 난세. 영웅이 나타나기 딱 좋은 시기 아니겠소?
팽지산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하긴, 맹주님도 평범한 무가 출신이고 전 척마대주님은 백정 출신이지. 게다가 그분들보다 훨씬 빨리 절정 고수가 되었으니 내가 모자랄 게 없지. 그렇지 않소?”
진영호는 흠칫 주위를 둘러보았다.
맹주님은 그렇다 치고 전 척마대주님의 출신까지 거론하다니.
누군가 듣고 있었으면 어쩌려고 그런단 말인가?
나중에 무림맹에 들어가겠다는 자가 척마대의 눈 밖에 나서 좋을 일이 없는데 말이다.
아무리 하북팽가의 위세를 업고 있다지만 정말 생각 없는 녀석이다.
그리고.
‘자기는 온갖 영약 처먹고 상승 무공을 익혔으면서. 변변한 영약 하나 못 먹고 화경의 고수가 된 맹주님과, 본격적으로 무공을 배운 것도 한참 늦었던 척마대주님을 단순 비교하는 건 좀…’
물론 진영호는 속마음을 모두 겉으로 꺼내지 않을 정도의 지혜는 있었다.
“물론이요, 팽형이 절대 모자랄 것 없소.”
팽지산은 망상을 키워나갔다.
망상은 어느새 천마의 목을 베고 천하제일인이 된 자신과, 그 옆에 달라붙어 있는 다섯 명 정도의 여자들까지 진행되었다.
한 여자의 얼굴은 그의 짝사랑이다.
‘지난 일로 사이가 좀 소원해졌지만 그쯤 되면 유린이 오히려 내게 달라붙을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팽지산은 남궁유린을 찾아갔다.
지대한 관심으로 그녀가 어디에 있을지 잘 알고 있다.
‘분명 숲 안쪽 공터에 있겠지? 종종 거기서 혼자 시간을 보내곤 하니까 말이야.
언젠가는 함께 시간을 보낼 상상을 하며 팽지산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정체불명의 소리가 들려온다.
곧 팽지산은 그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남궁유린은 평평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풀잎을 불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을 떠난 풀잎 소리는 길게 이어지지 못하고, 눌린 듯 허공에 사그라졌으나, 음악에 조예가 없는 팽지산이 보기에도 꽤 그럴듯했다.
짝짝짝.
박수를 치자 남궁유린이 흠칫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연주다, 유린.”
“여기까지 무슨 일이시죠?”
“나는 천하제일인이 될 거다. 머지 않아 초절정 고수가 된다면 내가 달리 보이겠지. 하하!”
“...”
미친 사람인가 봐.
갑자기 혼자 있는 곳으로 찾아와 맥락 없이 잔뜩 헛소리를 늘어놓는 팽지산에 대한 소감이다.
남궁유린의 속도 모르고 팽지산은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그럼 초절정 고수가 되기 위해 수련해야 하니 이만 가 보겠다.”
조금 전 남궁유린이 풀잎으로 낸 소리를 어설프게 콧소리로 흥얼거리며.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해꾼의 등장으로 중단되었던 연주를 이어 나갔다.
‘무공은 나와 맞지 않아. 이렇게 여유롭게 살고 싶은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오라버니 남궁유현이 방 안에 틀여박혀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고 있기에.
가문 어른들은 오대세가의 수좌 자리를 뺏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남궁유린에게 과도한 짐을 지우려한다.
기댈 곳이 있긴 하다.
백유성이 다 죽어 가던 사람을 살려냈다는 소식을 들은 것.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오라버니를 치료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백의원님 뿐이야. 그런데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하루하루가 버겁다.
전해 듣기로, 가문의 어른들은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배우는 제왕검형을 자신에게 전수하는 일로 논의중이라고 들었다.
자신은 무공에 흥미도 없는데 말이다.
당연히 무림맹에 입맹을 희망하지도 않는다.
***
무림학관 후기지수들에게 공문이 내려왔다.
-지원자들에 한해서 무림맹 임무에 투입될 수 있다!
앞으로 무림맹에 입맹하기를 희망하는 자들에게 실적으로 반영될 수 있단다.
여러 후기지수들이 눈을 반짝였다.
남궁유린과 달리 그들은 입맹에 관심이 많기 때문.
동시에 후기지수들 사이에 은밀한 소문이 하나 돌았다.
-의각주 백유성과 팽지산의 사이가 좋지 않더라. 굳이 팽지산과 척 지고 싶지 않으면 의각 경계 임무에는 지원하지 않는 게 좋겠다!
무림에서는 무공이 뛰어나거나 뒷배경이 뛰어난 자가 최고다.
오대세가중 하나인 하북팽가의 자제이자 당대 최고의 후기지수, 팽지산과 '굳이' 불편한 관계가 되고 싶은 자들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다음은 의각이다. 경계 임무에 지원하는 자는 손을 들어 보거라.”
무림학관 교관은 종이에 기록할 준비를 하며 그렇게 외쳤다.
입맹하여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후기지수들은 약간 위험성이 있는 임무라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훨씬 안전한 경계 임무 역시 인기가 많았다.
당연히 의각 경계 임무도 마찬가지라고 여겼는데.
“아무도 없나?”
의각만 지원자가 없다.
교관이 한 번 더 묻는 사이, 진영호는 팽지산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팽지산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영호, 쓸모가 있구나. 별거 아니지만 백유성이 약간이라도 자존심 상해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때.
가녀린 손 하나가 위로 살며시 올라왔다.
‘누가 감히 내 말을 어기고?
고개를 휙 돌려본 곳에는 그의 짝사랑이 손을 들고 있었다.
‘유린, 어째서…! 분명 내가 천하제일인이 되어 청혼하겠다고 말했는데 내가 싫어하는 일을!
절대 그렇게 말 한 적은 없으나 팽지산은 축약하여 그런 의미로 말 했기에 꽤 서운했다.
“그래, 남궁유린 한 명. 그럼 의각은 남궁유린만 지원하는 거로—”
“저, 저도 의각에 지원하겠습니다!”
팽지산이 다급히 교관의 말을 끊었다.
“쟤가 왜 의각에 지원해? 의각주님이랑 사이 안 좋다던 거 아니었어?”
주변 후기지수들이 속닥였으나 그는 꿋꿋했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 이 정도 철면피는 아무렇지도 않다.
어차피 소문도 진영호가 냈고.
그러나.
“불가하다. 처음 말했듯이 무림맹의 임무는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을 수 있는 게 아니니 신중히 결정하라 하지 않았더냐? 팽지산 넌 이미 외부 임무를 맡았으니 변경할 수 없다.”
“그럼 외부 임무가 끝나면 그때는 다시 임무 배정이 됩니까?”
“물론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남궁유린은 의각 경계 임무의 유일한 지원자가 되었다.
***
“남궁소저, 오랜만입니다.”
유성은 내심 그녀가 반가웠다.
오라버니를 치료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나중에 얼마나 많은 신성력 상승으로 돌아올지 기대되는 점도 좋았고,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운 미녀가 의각 내부 경계조에 속했기에, 칙칙한 남자들만 있던 근무 환경이 화사해진 점도 좋았다.
남궁세가의 유력한 후계자이고 검왕의 손녀이니 간자일 리도 없고.
“아, 네. 서점에서 뵙고 처음이네요. 소식은 전해 들었어요. 이번에 놀라운 솜씨로 태정헌 부군사님을 살리는 공을 세우셨다고요.”
여전히 목소리가 작았지만 의술에 대한 칭찬이 의미 심장하다.
유성은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말을 들려주었다.
“그게 제 일인걸요. 그리고 언젠가는 약속도 지킬 겁니다.”
실력을 키워 남궁유현의 눈을 치료해주겠다는 약속을 언급했다.
희망 고문이 아니다.
결국 남궁유현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줘 틈틈이 감사한 마음을 얻어내기 위함.
일종의 신성력 파밍이랄까.
“네, 기다리고 있어요.”
유성이 약속을 잊지 않아 한결 마음이 편해진 남궁유린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이야기 중이세요? 제가 알아도 되는 이야기일까요?”
남궁유린은 뒤를 돌아보았고, 답했다.
“아, 총군사님이시군요. 죄송해요, 비밀 이야기라서요.”
유성은 오랜만에 제갈영영의 서늘한 시선을 받고 가볍게 몸을 떨었다.
‘다른 건 다 멀쩡한데 한서불침 특성은 불량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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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영영이 의각에 나타난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잠깐 남궁유린과 인사 나누는 사이 진료 시간이 되어 있었으니까.
“다 끝났으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유성은 제갈영영을 진료실 안으로 데려갔다.
성수 관련해 함께 논의할 일이 있다.
남궁유린은 안으로 사라지는 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혹시 총군사님이 나를 싫어하시는 건 아니겠지?
눈초리가 왠지 따가워 그런 생각마저 했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원래 총군사의 눈매는 날카로운 편이다.
딱히 개인적인 일을 비밀로 했다고 싫어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애초에 둘은 딱 두 번 만났을 뿐이니까.
남궁유린은 얌전히 경계 위치에 섰다.
종일도 아니고, 하루에 잠깐 경계 임무 서는 건 크게 부담되지 않지만,
원래 그녀는 입맹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에 아무것도 지원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다른 임무에는 모두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의각 경계 임무에는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후기지수들을 보고 그녀는 짧은 순간 큰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의각 경계 임무에는 아무도, 심지어 나도 지원하지 않았다는 걸 알면 의각주님이 서운해할지도 몰라. 난 의각주님께 오라버니의 치료까지 부탁한 사람이니까.
아무 사이도 아닌 자신에게 의각주가 먼저 호의를 베풀었는데 안면몰수 할 수 없다.
그게 남궁유린이 의각 경계 임무에 지원한 이유다.
그녀는 혹시 모를 자객의 습격으로부터 유성을 지키는 일 역시 오라버니를 치료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고 애써 자위했다.
***
제갈영영은 진료실로 들어와 살짝 목소리를 낮추었다.
지금 하는 이야기는 굳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서 좋을 게 없다.
“말씀하신 성수요. 영술로 만든 거면 영수라는 이름이 낫지 않아요?”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이야기를 꺼내오자 김이 조금 샜지만, 유성이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영수는 좀… 성수라고 불러 주십시오.”
원래 이름도 성수고, 어감도 좋은데 굳이 다른 이름으로 바꾸고 싶지 않다.
“흠, 아쉽네요.”
“어쨌든, 사용해 보셨습니까?”
제갈영영이 소매에서 작은 호리병을 하나 꺼냈다.
그녀가 바빠서 며칠 의각에 들리지 못했다가, 어제 성수를 다시 받아갔었다.
오늘 새벽, 천문진법총해 공부를 재개하고 성수를 사용해 본 거다.
유성이 성수를 받아들고 살짝 흔들어 보았다.
처음 준 것에서 삼분의 이 가량 남아 있는 듯하다.
“삼할 정도 마시니까 두통이 완전히 가라앉았어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되는 거 맞나요?”
“맞습니다. 이제 대략적인 효과를 가늠할 수 있겠군요.”
크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유성.
제갈영영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효과 가늠이라… 이거 혹시 저한테 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머릿결이 부드러워 보이네요.”
“허엄, 네?”
혹시 자신에게 실험한 것이냐 물으려던 제갈영영은 당황했다.
평소 외모 칭찬 따위는 거의 하지 않던 유성이 기습적으로 머릿결을 칭찬하다니.
‘아무도 못 알아보던데 어제 서역에서 들여온 물건으로 머리를 감은 걸 어떻게 알았지? 날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나 봐. 이런 것도 다 알아보고.
아침부터 남궁유린과 유성이 비밀 이야기라는 것을 쑥덕여 약간 기분이 상했던 것이 사르르 풀렸다.
제갈영영은 괜히 머리 끄트머리를 잡고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혹시 잘못 본 거라면 죄송합니다.”
“치, 제대로 봤어요. 티 많이 나나요?”
“...조금요.”
유성이 여자의 머릿결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던졌는데 얻어 걸렸을 뿐이다.
어쨌든 진료실 안의 분위기가 봄이라도 온 듯 부드러워졌다.
제갈영영은 한결 부드러워진 눈매로 이야기를 꺼냈다.
목소리도 마찬가지로 부드럽다.
“아무튼, 성수는 하루에 얼마 못 만든다면서요? 그럼 아껴두세요. 전 어차피 매일 와서 치료받으면 되니까요.”
유성과 생각이 통했다.
성수의 편리함을 보고 매일 제공해 달라고 했으면 오히려 난감했을 텐데.
“알겠습니다.”
“참, 부군사님께 의각 의원을 늘릴 거라는 이야기는 전해 들으셨죠?”
“네, 다만 그 방식은 아직 논의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번처럼 시험을 치르게 되겠죠?”
“방식이 결정 났어요. 오늘 성수 건으로 온 김에 말씀드릴게요. 이번에 의원 두 명 더 뽑을 거예요. 그 정도면 충분할까요?”
“물론입니다. 저까지 세 명이면 충분하지요.”
“다행이네요. 그래서 말인데, 두 사람을 뽑는 건 전적으로 백의원님께 권한을 드리기로 했어요. 혹시 생각해 두신 분 있나요?”
“제가 뽑으라고요? 의각 의원을요?”
“네, 정식 의각주가 되실 분이 뽑게 하는 게 좋겠다고 결론이 났어요. 아무래도 마음 맞는 분과 일 하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무림맹에서 일할 의원 두 사람을 뽑는 권한을 준다는 것도 인상 깊었으나 정식 의각주는 또 무슨 이야기일까.
처음 논의된 것과 다르다.
모용림 장로의 의견으로, 임시 의각주로 시작한 후 한 단계를 더 거치기로 했는데 말이다.
“정식 의각주는 의원들이 늘어난 후 한 번 더 심사를 보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저는 처음부터 의각주가 필요한 의원들을 뽑았으면 좋겠다는 쪽이었어요. 이번에 다시 정정 의견을 냈죠. 뭐, 이유는 아시겠지만 이번엔 반대 의견이 없었어요. 그러니 곧 정식 의각주가 되실 거예요. 미리 축하해요.”
짧은 기간이지만 서열 일위의 달콤함을 맛 봤던 유성으로서 나쁠 게 없는 이야기.
의각 담당자도 그의 편이고 총군사도 도와주니, 의각을 입맛대로 운영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믿을 만한 사람들로 뽑아두면 몇 달간 의각을 떠날 수 있는 체계를 만들 수 있겠는데?
유성이 제갈영영의 가슴에 대못 박을 발칙한 계획을 세우는 줄도 모르고 그녀가 신을 내며 말을 이었다.
“뽑고 싶은 의원 두 사람이 누군지 말해주시면 문제가 없는지 철저히 조사하려고 해요. 아직 안 정해졌으면 천천히 말해주셔도 되구요.”
유성은 제갈영영의 말을 듣고, 자신 역시 뒷조사를 당했으리라 예상했다.
만약 처음에 하지 않았더라도 부군사 사건이 생겼으니 이번에는 출신 성분 정도는 했을 테고.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 조금 궁금했다.
‘아마 절정의 벽에 도전하다가 무공을 잃고 가문에서 쫓겨난 머저리?
유성이 밝히지 않았기에 그가 절정 고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멍청하다 생각할 수도 있고 측은하다 여길 수도 있는 과거인데.
다행히 제갈영영은 호의 가득한 눈빛을 보내오는 중이다.
‘고맙네. 다행이기도하고.
이제 의각에 뽑을 의원 두 사람을 결정해야 한다.
천천히 생각해봐도 되겠지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유성의 머릿속을 스치는 첫 번째 사람은 당연히,
‘차의원님.
…?
‘아니, 잠깐!
유성이 세차게 고개를 휘저었다.
제갈영영이 이상하게 쳐다보았으나 유성은 양의원이 아니라 차의원부터 떠올리는 자기 모습에 당황했다.
무의식적으로 그가 사용하던 벼루로 시선이 갔다.
멋들어진 용이 양각된 고급 벼루의 상단에는 멋진 필체로 적힌 문구가 있다.
[일침신의]
이제 많은 사람이 부르고 있는 신의라는 거창한 별호.
유성은 내심 마음에 들어 요긴하게 쓰고 있다.
그리고 그건.
‘얼마 전에 따로 만났을 때 차의원님이 준 선물이지.
유성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그의 집요함에 말려들었음을.
‘내가 졌다.
대답을 기다리는 제갈영영에게 그의 결정을 들려주었다.
“낙양 의방의 양의원님과 차의원님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겠어요. 차의원님도 실력이 좋으신가 봐요?”
“낙양 의방 출신이시니… 대신 차의원님은 제가 개인적으로 시험을 보고 최종 결정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지요?”
“그럼요. 의각 운영은 백의원님 의견을 최우선으로 반영할 테니까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두통을 치료하고 진법과 수학에 대한 책자만 교환하던 것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이제 다른 환자를 위해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한다.
제갈영영이 진료실 밖으로 나선 순간.
진료실 앞을 지키고 있던 여자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남궁유린.
나이는 자신보다 네 살이나 어리고 배경도 절대 꿀리지 않는다.
가문만 놓고 봤을 때 오대세가의 상석인 남궁세가 대 세 번째인 제갈세가.
게다가 무림맹 총군사 자리는 영원하지 않은데 반해 남궁유린은 나중에 가주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제갈세가는 제갈영영의 오라버니가 가문을 물려받게 될 테니 배경 점수의 우위도 거의 없다.
외모는 또 어떤가.
남궁유린은 눈이 큰 미녀다.
‘남자들은 어리고 청순한 여자를 좋아한다던데…’
날카로운 자기 눈을 떠올리자 왠지 모를 패배감이 든다.
***
무림학관 후기지수들이 임무에 투입되면서, 일부 무림맹 지역에 그들이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지역은 유성이 차의원과 만나러 이동하는 경로에 있었다.
이동하던 유성은 정면에서 꼴 보기 싫은 사람을 마주쳤다.
아마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 팽지산이 스쳐 지나갔다.
***
이튿날, 도왕 팽헌무가 심각한 표정으로 의각에 찾아왔다.
환자의 신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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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천하인들은 수많은 무림세가들 중 상위 다섯곳을 골라 오대세가라고 이름 붙였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항상 첫 번째에 손꼽히는 곳은 검의 명가 남궁세가였다.
대대로 검왕을 배출해 온 그들은 안휘성을 꽉 잡고 있으며 주변 중소문파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첫 번째가 있으면 두 번째도 있는 법.
그 비운의 무림세가가 바로 하북 팽가다.
일부 사람들은 만년 이인자라고 폄하하여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타고난 신력을 바탕으로 패도적인 도법을 구사하는 하북팽가의 당대 가주가 바로 도왕 팽헌무다.
명예에 죽고 사는 정파 무림인의 특성상,
당연히 도왕의 목표는 검왕을 뛰어넘고 팽가가 남궁세가를 뛰어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어렵다.
뛰어난 무재로 화경의 경지에 도달했으나, 지금도 검왕에게 밀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상대의 무공을 잘 알고 있는 도왕은 검왕의 기세만 읽어도 대략적인 무위를 가늠하는 게 가능했다.
도왕은 인정해야 했다.
여전히 하북팽가는 남궁세가의 아래라는 걸.
다만.
‘미래는 그렇지 않지.
남궁세가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인다.
도왕의 세 자식들은 모두 절정 고수가 되었으니까.
가문은 첫째가 물려받겠지만 무재만큼은 막내 팽지산이 가장 뛰어나다.
비록 팽지산이 검왕의 유일한 손자 남궁유현보다 한 살 늦게 절정 고수가 되었을지라도, 세 가지 이유로 팽가의 미래가 더 밝다고 할 수 있겠다.
첫째, 도왕 자신이 검왕보다 어리다.
검왕이 은퇴할 때까지 버티면 팽가의 위상을 더 높일 수 있다.
둘째, 스물 둘에 절정 고수가 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던 남궁유현이 은퇴해야 하는 사고를 당했다.
새로 후계자로 거론되는 남궁유린은 성격이 유약하다. 무공을 익히기 싫어한다는 이상한 소문도 있다.
다른 방계도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원래 오대세가는 직계위주로 돌아가는 곳.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남궁유린이 후계가 될 거다.
셋째, 스물셋에 절정 고수가 된 막내아들 팽지산의 존재다.
스물셋에 절정 고수가 되었다는 의미는 간단하지 않다.
단순 계산으로 스물 넷에 절정 고수가 된 사람에 비해, 초절정의 벽을 뛰어넘을 시기가 한 살 어려지는 게 아니다.
확률의 문제다.
일찍 절정 고수가 될수록 상위 경지에 도달할 확률이 크게 높아진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 왔다.
가끔 전 척마대주 정립과 같은 특수한 자들도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어쨌든, 도왕은 팽지산이 절정의 벽을 넘었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
팽가에 경사가 났다.
친히 그를 다독이고 수련을 독려하기 위해 도왕이 무림학관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만큼 좋은 소식이다.
아마 첫마디는 이렇게 시작할 거다.
‘지산아, 네가 자랑스럽다. 네가 지금처럼 노력하면 도왕이라는 별호는 네 것이 될 것이다. 한눈팔지 말고 정진하거라.
가주 자리는 첫째에게 돌아가겠지만, 무공이 가장 뛰어난 자가 가주가 되는 게 아니니 막내도 이해할 거다.
오히려 무림맹에 속하는 것이 많은 실전경험을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무림맹에서 요직을 차지하는 건 팽가에도 큰 도움이 되는 일.
형제들이 안팎으로 도우면 팽가는 더 빠르게 세를 키울 수 있다.
‘무림학관에 보낸 것이 정말 잘한 일이었구나. 역시 단체생활하면 사람이 성숙해지는 법이지.
팽지산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뛰어난 무재에도 불구하고 사리 분별 못하고 경솔한 언행으로, 팽가 내에서 사고를 많이 쳤다.
특히 한 가지에 꽂히면 앞뒤 가리지 않아, 그나마 팽가 내에서 정상에 가까운 도왕의 큰 우려를 사던 팽지산.
사람 좀 되라고 보낸 무림학관에 잘 적응하여, 큰 사고 쳤다는 소리도 없이 성과를 냈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좋은 일만 가득할 것 같았던 강호행이다.
그런데.
도왕은 호위를 몇 명 데리고 무림학관으로 오다가 정체불명의 무리에게 습격을 받았다.
강호 정세가 불안정하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놀랍게도 상대 무리에는 마공을 사용하는 화경의 고수가 끼어 있었다.
가까스로 그에게 중상을 입히고 물리쳤으나 도왕의 몸 상태도 썩 좋지 못했다.
화경의 고수가 치사하게 독까지 사용했기 때문.
역시 악독한 마인다웠다.
강력한 내공으로 독기를 억제하고 있으나 빠르게 해독하지 못하면 독은 점차 그의 몸을 좀 먹을 것이다.
죽지는 않겠지만 오랜 기간 요양해야 할 수도 있다.
도왕은 급하게 개방의 도움을 받았다.
독을 해독할 수 있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의원을 물색했고,
제일 먼저 무림학관이 아니라 무림맹 의각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것이, 백유성이 갑작스럽게 도왕을 맞이하게 된 배경이다.
진료실 안에 앉아 있는 도왕은 팽지산과 비슷하게 커다란 덩치에, 턱이 각진 중년인이었다.
늙은 팽지산이란 말이 딱 어울렸다.
팽지산에게 좋은 인상이 없는 유성이 보기에는 외관상으로 밉상이라 할 수 있겠다.
“어떤가? 해독할 수 있겠나?”
초조함이 묻어나오는 도왕의 물음에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해독 후 팔도 봐드리겠습니다. 상처가 커 보이는군요.”
도왕의 오른팔에 길게 갈라진 상처가 남아 있었다.
혈을 짚어 지혈했는지, 피는 멎어 있으나 저절로 아물만한 상처가 아니다.
도왕의 큼지막한 도가 왼쪽 허리춤에 달린 모습을 보면 오른손잡이.
꽤 불편했을 거다.
빨리 치료하지 못하면 역시 장기 요양이 필요할 수 있다.
“흥, 이까짓 상처 쯤이야. 상대도 화경의 고수였지. 놀라운 위력의 마공을 사용했으니 아마 마교의 인물이겠지. 놈이 비겁하게 독까지 썼음에도 중상을 입혔으니 내 승리네.”
“...”
도왕은 오른팔을 다친 것을 지적한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어떻게든 상대보다 더 우위에 섰다고 주장하는 모습.
‘팽가 사람들과는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구나.
유성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그럼 치료해드리겠습니다.”
“일침신의의 솜씨가 좋다는 말을 들었지. 그럼 부탁하네.”
해독은 오래 걸리지 않는다.
평소였다면 말이다.
유성은 시험해 볼일이 하나 있다.
장침으로 심장쪽을 찌르는 대신, 도왕의 맥을 잡았다.
‘최근에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무림인들의 혈도 중 미세하게 더 넓은 곳들이 있었지.
유성은 그게 뭔지 알아냈다.
‘내공심법의 운기 경로!
매일 축기하기 위해 기를 운용하는 통로라 더 확장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건 무공을 익힌 기간이 오래될수록 더 감지하기 쉽다.
그 말인 즉.
‘도왕의 독문 내공심법을 살펴볼 좋은 기회!
무림인들은 타인에게 쉽게 맥문을 내주지 않는다.
실력 차이가 크지 않다면 그것만으로 상대에게 제압당할 수 있기 때문.
의원인 것이 이럴 때 도움이 된다.
오랜 기간 발전시켜 온 하북팽가의 내공심법 운기 경로를 대략라도 파악할 수 있다면.
‘언젠가 도움이 되겠지. 상승무공은 구하기 어려우니까.
독을 해독하기 전, 신성력으로 도왕의 혈도 구석구석을 살펴 미세하게 더 넓은 경로들을 모두 기억해 두었다.
언젠가 자기 내공심법을 보완할 재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그럼 해독 시작하겠습니다.”
유성은 한곳에 잘 모여 있는 독기를 신성력으로 감싸고, 해독 스킬을 발현시켰다.
도왕은 즉시 이변을 감지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끊임없이 그의 통각을 자극하던 정체불명의 독.
내공으로 억제해 두고 있던 부분에서 순식간에 독기가 사그라드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쉽게?”
수많은 강호 경험.
독에 중독당해 본 경험도 여러 차례지만 해독이 이 정도로 간단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화경의 고수마저 꼼짝없이 중독시키는 강력한 독이 순식간에 해독되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한 것도 잠시.
“이번엔 팔을 치료해드리겠습니다.”
쓱쓱 붕대를 풀어낸 유성이 환부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
도왕의 눈이 커졌다.
잘못 느낀게 아니라면 길게 찢어진 팔의 상처에서 통증이 점차 감소하는 게 아닌가?
상처도 아까보다 더 아물어 있는 듯했다.
유성은 곧 바늘과 실을 가져와 익숙하게 도왕의 팔을 꿰맸다.
봉합 솜씨가 어찌나 정교한지, 살갗을 파고드는 바늘의 간격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하다.
“다 됐습니다. 다만 며칠 정도는 이곳에 머무르며 실밥까지 제거하고 가시는 게 좋습니다.”
팔을 몇 번 움직여 본 도왕은 흡족하게 웃었다.
“역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의술이군. 실력이 정말 대단해. 큰 신세를 졌네. 여기로 찾아오길 잘했군.”
“과찬이십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세. 알다시피 내가 다칠 일이 조금 많거든.”
도왕의 상체에는 온갖 흉터들이 남아 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수련하고 실전 경험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역시 정상인이라면 무인이 훌륭한 실력을 가진 의원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도움된다는 걸 잘 아는 법이다.
유성 역시 도왕 정도 되는 고수와 친분을 다지는 게 나쁠 일이 없다.
더 친해지면 팽지산의 무례함에 대해 넌지시 흘릴 수 있고.
“아, 무림학관에 내 아들놈도 다니고 있는데 혹시 들은 적 있나?”
“...네.”
“서로 비슷한 또래로 보이니 앞으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군.”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도 아드님의 만행을 꼰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있는데요.
더 친해지면 모를까, 지금 도왕 앞에서 아들을 깎아내릴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다.
유성은 말을 아꼈다.
"그럼 가보겠네. 맹에 머물다가 며칠 후 다시 들르지."
치료가 끝난 도왕이 일어나자 하인 장칠이 말을 전했다.
“도왕 어르신, 다치셨다는 소리를 듣고 밖에 팽지산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 마침 잘됐구나. 백의원, 잠깐 시간 되나? 잠깐 아들놈을 소개시켜 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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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지산이 도왕의 상태를 전해 들은 것은 소식에 밝은 진영호로부터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는 팽지산보다 사교성이 좋아 여러 경로로 정보를 접한다.
‘어차피 진영호가 날 따르니 상관없겠지.
이미 부하 취급이다.
그가 전한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도왕이 습격을 당해 상태가 좋지 못하다! 무림맹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몸을 치료하러 의각으로 향했다더라!
천하에 누가 감히 도왕을 습격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상태가 좋지 못하다니?
팽지산은 마침 외부 임무가 없었다.
교육을 받던 중, 교관에게 양해를 구하고 의각으로 달려갔다.
의각주 백유성과 사이가 좋지 않지만 더 중요한 건 아버지의 안위다.
그가 든든히 버티고 있기에 무림학관의 후기지수들도 자기 눈치를 봤지 않나?
지금은 자신도 절정 고수가 되었으나 도왕이라는 이름값에는 한참 모자란 것이 사실이다.
물론, 아버지를 걱정하는 마음도 크다.
의각에 도착한 그를 하인이 제지했다.
안으로 쳐들어가 직접 아버지의 상태를 살피고 싶었으나, 안에 경계 임무 수행 중인 남궁유린도 있는 걸 보고 점잖게 이야기만 전했다.
잠시 후.
아버지가 치료받고 편안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왔다.
팽지산은 안도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실력은 좋나보군.
처음 전해 들은 것보다 아버지의 상태가 좋아 보인다.
약간의 허풍이 섞여 있더라도 유성의 의술이 못 봐줄 정도는 아닌 듯하다.
“아버지! 몸은 괜찮으십니까?”
“호들갑 떨거 없다. 치료는 잘되었으니 며칠 쉬면 잘 회복될 거다. 그나저나…”
도왕은 팽지산을 살폈다.
전에 봤을 때보다 기세가 날카로워졌고 자세가 바로잡혀 있다.
“과연 절정의 벽을 넘었구나. 훌륭하다.”
“소자 죽을힘을 다 했을 뿐입니다.”
팽지산은 흡족한 표정으로 절정 고수가 된 그를 치하하는 아버지 뒤로, 한 인영을 발견했다.
못마땅한 표정을 한 백유성이 멀뚱히 서 있다.
자신의 연적! (오해다.)
남궁유린을 두고 삼각관계에 있는 그를 보자 기분이 나빠졌다.
애써 시선을 돌렸다.
어린 시절, 한번 무언가에 꽂히면 분노를 참기 힘든 적이 많았으나 자기 나이도 이제 스물셋.
스스로 느끼기에 참을성도 늘었고 성숙해졌다.
지금은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자신했다.
아버지의 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지산아, 여기는 나를 치료해준 백유성 의원이다. 앞으로 알아두면 큰 도움이 될 테니 인사하거라. 마침 서로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으니 친우처럼 지내면 좋겠구나.”
불쑥 반항심이 솟아오른 팽지산과 달리,
유성은 오늘 처음 본 도왕에게 팽지산과의 갈등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 앞에서 아들을 욕하는 건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여기서 팽지산과 데면데면하게라도 인사만 나누면 무난히 넘어갈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는 못합니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팽지산이 기어이 초를 쳤다.
“뭐라?”
심기 불편한 도왕의 목소리.
평소 팽지산이라면 몸이 기억하는 공포에 움츠러들었겠지만,
남궁유린이 의각 안쪽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
그녀를 두고 다투는 녀석에게 숙이고 싶은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
그녀가 남자답지 못하다고 흉볼게 아닌가?
“저 자식이 유린을 울렸단 말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아무튼 전 못합니다!”
백유성 때문에 유린이 자신을 봐주지 않는 것 같다, 라는 말은 쉽게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으니까.
그 행동이야말로 남자답지 못하다.
그냥 이대로 자신이 빠르게 초절정 고수가 되면 해결될 문제다.
그럼 남궁유린도 자기를 다른 눈으로 봐줄 거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조금 꾸지람 들을지라도 숙이지 않을 거다, 라고 팽지산은 생각했다.
다만.
팽지산이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녀가 눈물 흘린 일이 사람들 앞에서 폭로되자 속으로 팽지산을 욕하며 한숨을 내쉰 남궁유린의 마음을 고려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고.
도왕의 체면도 고려하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들이 도왕의 말을 거역한 것이다.
좋은 마음으로 유성에게 아들을 소개해 주려던 도왕은 오랜만에 주먹이 울었다.
허구한 날 사고 치던 아들놈에 대해 수년간 별다른 소식이 들리지 않기에, 조금 성숙해진 줄 알았더니 아직도 철부지였다.
아무리 무력 부서에 비하면 손색이 큰 지원 부서라지만, 무림맹 입맹을 희망한다는 아들이 무림맹 각주중 하나와 공개적으로 대립각을 세울줄이야.
‘몇 년 전, 진주언가의 차녀와 혼인시키려 했을 때 면전에 대고 추녀라서 싫다고 떼쓰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심각한 일이 아닌가?
진주언가의 차녀도 하북에서 꽤 예쁘다고 소문 난 여자였다.
절대 추녀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아니었다.
그러나 과거 용봉지회에서 남궁유린을 보고 온 팽지산은 그때부터 눈이 한껏 높아졌다.
도왕이 만약 천하에 이름 높은 화경의 고수가 아니었고, 그 자리에서 팽지산을 따끔하게 혼내지 않았다면.
하북에 함께 연고를 두고 있는 팽가와 언가의 오랜 관계가 금 갔을지도 모른다.
진주언가의 차녀와 팽지산의 혼인 건은 금 간 수준이 아니라 산산조각 나긴 했으나 가문 사이의 유대가 깨지지는 않았다.
잠깐 남궁유린이라는 아이에게 흥미가 생겼지만, 일단 아들을 의각주에게 사과 시켜야 한다.
진료를 보기 위해 줄 서 있던 무사들이 많은 곳에서 사고를 쳤으니 수습이 필요하다.
“이놈! 잔말 말고 의각주에게 사과하거라. 한낱 무림학관 생도 신분으로 어딜 무림맹 의각주에게 함부로 말하느냐?!”
대부분은 이렇게 호통 치면 아들은 정신을 차린다.
그러나 팽지산은 유독 남궁유린 앞에서는 이성적인 판단하지 못하는 편이다.
“어찌 사내 대장부가 되어 연적에게 숙이라는 말입니까? 저는 절대 못합니다!”
연적이라니!
‘내가 모르는 게 있나?
도왕의 시선이 백유성을 훑었다.
헛웃음 치고 있다.
이번에는 남궁유린에게 시선이 향했다.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오직 팽지산 혼자 씩씩대고 있다.
‘이 녀석이 혼자 오해한 게 아닌가?
아들의 성취를 칭찬하고 독려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사람을 만드는 게 우선인 듯하다.
오랜만에 매라도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무슨 일입니까, 도왕.”
등 뒤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도왕이 돌아본 곳에는 강렬한 안광이 인상적인, 호리호리한 체구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백리단우.
백리세가라는 작은 무가에서 태어나 무림맹주의 자리까지 오른 화경의 고수다.
하지만 그 한미한 출신 때문에, 척마대에 대한 명령권 외에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물론 여러 이해관계 때문에, 출신이 대단했다면 맹주로 선출될 일은 없었을 테지만.
그리고 실권이 없다는 것이지, 권위가 없다는 게 절대 아니다.
최소한 무림맹 내에서는 도왕보다 맹주의 끗발이 훨씬 센 법이다.
도왕은 얼른 포권했다.
“맹주, 오랜만입니다.”
“다쳐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와 보았는데 괜찮아 보입니다. 그런데 소란이 있군요.”
도왕은 얼른 손사래 쳤다.
“아닙니다. 소란이라니요. 오랜만에 아들놈을 교육시키는 중입니다. 안 그래도 맹주님께 인사드리러 가려 했는데 여기까지 찾아오셨군요.”
맹주의 시선이 팽지산을 한번 훑었다.
백유성을 노려보며 이를 갈고 있다.
“그랬군요. 도왕을 습격했다는 무리에 대해 묻고 싶은 것도 있어 겸사겸사 찾아왔습니다만, 아드님이 의각주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건…”
뭔가 곤란한 사정이 있는 모양.
맹주는 정립이 비공식 휴가를 떠나기 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유성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무림맹 내에서 자신에게 강력한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정립의 부탁.
알지 못했다면 모를까, 유성이 엮인 일이니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맹주가 은근히 압박하자 도왕의 얼굴이 붉어졌다.
팽지산은 여전히 유성에게 사과할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들놈 때문에 대신 사과해야 하는 상황이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자식을 잘못 키운 죄로 어쩔 수 없다.
“아들놈이 의각주에게 뭔가 오해를 한 모양입니다.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백의원도 미안하네. 내가 대신 사과할 테니 너그럽게 용서해주게.”
팽지산은 언제나처럼 쥐어 패면 된다.
이제 백유성만 사과받아주면 잘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유성은 팽지산이 자신에게 혼자 오해하고 적대하는 꼴을 더 이상 봐주고 싶지 않았다.
바뀔 기회는 계속 있었으나 그는 한결같았다.
마침 판을 깔기 좋은 환경이다.
“도왕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지요. 팽 소협과 제가 서로 합의하에 풀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오, 그래 주겠나? 둘이 원만하게 풀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일이지. 그럼 난 빠져 있겠네.”
유성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도왕이 밝게 웃으며 물러섰다.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을 테고.
유성은 팽지산을 똑바로 응시했다.
“팽소협, 저번에 서점에서 제안하신 거, 아직 유효합니까?”
서점에서 제안한 것.
유성이 언급한 것이 뭔지 알아차린 팽지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공 없이 맨몸으로 겨뤄 지는 쪽이 유린을 깨끗이 포기하자는 거 말입니까?”
맹주 앞이라고 말투가 바뀌어있다.
“...제 기억으로는 남궁소저에게 사과하라는 조건이었습니다만. 뭐, 어차피 서로 조건을 하나씩 걸어야 하니 그걸 원하시면 따르겠습니다. 사과하라고 하면 팽 소협이 시키는대로 사과도 하지요.
대신 제가 이기면 팽 소협이 제게 지금까지 한 무례들을 사과하고 팽가로 돌아가십시오. 그게 제 조건입니다. 응하시겠습니까?”
어차피 무림맹의 일부 사람들이 자기 출신과 과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거라는 추측이 이런 결정을 내리도록 도왔다.
적을 만들고 싶지 않은 유성이지만, 이미 적이 된 자는 제거하거나 멀리 치워 버려야 한다.
도왕을 겪어본 바, 생긴 것과 다르게 사리 분별 할 줄 아는 사람이니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다.
공평한, 아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유성이 말도 안 되게 불리한 대결이니까.
유성은 이제 지켜줄 사람도 많고.
“뭐라고요? 사과? 팽가로 돌아가?”
팽지산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콧김이 뿜어져 나온다.
유성은 한쪽 입꼬리만 살짝 끌어올렸다.
“왜, 자신 없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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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잘 해결될 거라 기대하고 뒤로 빠져 있던 도왕은 유성의 말이 거듭될수록 당황했다.
둘이 쌓인 게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다.
그리고.
아무리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겨룬다지만 절정 고수인 아들과 의원인 백유성이 어떻게 상대가 된단 말인가?
당장 말려야 한다!
그러나 도왕은 나설 수 없다.
이미 유성에게 맡기고 빠지기로 선언한 이상 다시 개입하면 꼴이 우스워진다.
도왕의 시선이 맹주에게 향했다.
-의각주가 갑자기 왜 저런답니까? 좀 말려주십시오.
전음을 보냈으니 맹주가 잘 말려줄 거다. 그도 원하는 결과가 아닐 테니.
그러나.
-당사자들끼리 푸는 게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맹주마저 헛소리를 해댔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대로 의각주가 망신 당하는 꼴을 지켜보자는 말입니까? 아들놈은 제가 나중에 잘 교육시키겠으니 어서 말려주십시오.
다급한 도왕의 전음을 뒤덮는 소리가 있었다.
“자신 없냐고요? 그럴 리가! 나중에 딴소리나 하지 마십시오!”
“물론입니다.”
팽지산이 덥썩, 유성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원래대로라면 의각에서 진료를 봤어야 할, 대기 중인 무사들이 웅성거렸다.
갑자기 팽가의 후기지수와 의각주가 대련을 한다니, 놀라운 흥미거리가 아니겠나.
얼핏 듣기로 여자 문제도 엮여 있는 듯하다.
무사들의 가슴이 흥분으로 불타올랐다.
어느새 둘의 대련이 기정 사실처럼 되어 버리자 도왕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유성이 큰 망신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팽가에 있을 때는 진주언가와 문제를 일으키고, 무림학관에 와서는 무림맹 의각주와 또 문제를 일으키다니.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라더니, 괜히 무림학관에 보냈나보구나. 차라리 가문에 잡아 두고 무공 수련만 시켜야 그나마 써먹을 구석이라도 있겠구나!
탄식만 나왔다.
맹주도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고, 도왕은 이 일이 큰 여파없이 마무리되기를 빌었다.
그리고 대련이 끝나자마자 팽지산을 끌고 팽가로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더 이상 사고 치게 놔둘 수는 없다.
반면, 맹주는 나름대로 계산을 마쳤다.
‘팽지산이 돌발행동을 자주 하고 통제가 어렵다지?
원래 하북팽가에서도 망나니로 유명했다.
무림학관에 입관하고 처음에는 괜찮은 듯하더니, 절정 고수가 되면서 통제가 어려워진다는 보고를 여러 차례 받았다.
아직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으나, 교관들도 슬슬 버거워한다.
굳이 무림맹에서 품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이 일이 발생한 거다.
그리고 맹주는 도왕과 다른 정보를 하나 알고 있다.
‘의각주가 열여섯의 나이에 이미 절정의 벽에 도달했다지? 열일곱에 주화입마에 빠져 무공을 잃었다면 아마 그는 절정의 경지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안정적인 정파의 내공심법은 절정 고수가 아니라면 주화입마에 빠질 확률이 극히 적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내공 없이 권각술로 붙는다 해도 백유성이 팽지산에게 보이는 자신감이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내공도 없는 몸으로 팽가의 타고난 신력을 어떻게 극복하려는 것인가, 의각주.
백유성의 몸은 현역 무인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탄탄하다.
그러나 팽지산의 덩치에 비할 바는 아니다.
병장기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니 체급차이 역시 분명히 고려되어야 하는 변수다.
무재 하나로 무림맹주의 자리까지 오른 백리단우는 맹주가 되기 전 무공에 미친 자였고, 이 신기한 대결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조건을 정확히 하겠습니다! 제가 이기면 의각주는 유린을 깨끗이 포기하고 제 가랑, 흠, 무릎 꿇고 제게 잘못했다고 사과하십시오!”
“남궁소저와 저는 아무 사이 아닙니다만 그 조건으로 괜찮겠습니까?”
“제가 똑똑히 봤는데! 딴소리 하지 말고 받아들일지만 결정하십시오!”
“받아들이겠습니다. 제 조건은 같습니다. 제가 이기면 팽 소협은 제게 저지른 무례들을 사과하고 팽가로 돌아가십시오.”
“좋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여기서 붙읍시다!”
남궁유린 앞에서 유성을 망신 주겠다는 속셈이다.
유성 역시 거절하지 않았고, 무사들이 빙 둘러 자리를 마련했다.
맹주가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마침 이 자리에 있으니 내가 공증을 서겠소. 오늘 대련으로 서로의 조건을 이행하고, 그 외 다른 원한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될 것이오.”
“알겠습니다.”
유성과 팽지산이 동의했다.
맹주는 팽지산과 유성을 차례로 불렀다.
“그럼 내공을 금제하겠소.”
점혈하여 팽지산의 내공을 금제한 맹주의 손길이 유성에게 닿았다.
맹주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활짝 열린 의각의 정문 사이로, 여러 경계 무사들이 팽지산과 백유성의 대립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함께 경계를 서며 안면을 튼 무사 하나가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는 남궁유린에게 물었다.
“유린, 팽 소협이 쫓아 다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의각주와는 언제…?”
“절대 아니에요! 팽 소협이 일방적으로 내건 조건이잖아요.”
“흠,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팽소협은 왜 그런 조건을 걸었지?”
“저도 모른단 말이에요…”
남궁유린은 수치심에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경계 임무 수행 중이라 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단지.
‘의각주님은 왜 저런 말도 안 되는 내기를 받아들이신 거야?
하북팽가는 도법으로 천하에 이름 떨치고 있다.
그러나 팽가 정도 되는 전통 깊은 무가에는 도법 외에도 다양한 호신공이 존재하는 법이다.
타고난 신력을 바탕으로 펼치는 권법 역시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다.
내공 없이 싸운다 해도 의원의 몸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절대 아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맹주를 제외한 이 자리의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떠올리고 있는 것과 같았다.
***
종학진은 빠르게 움직였다.
유성이 그를 좋아하는 것도 종학진이 알아서 상황에 맞게 판단하기 때문.
제일 먼저, 도왕 다음 진료 차례였던 무사들에게 달려갔다.
다행히 촌각을 다투는 급한 환자는 없다.
“사정은 알고 계실 겁니다. 혹시 진료를 조금 미뤄도 되겠습니까? 어쩌면 오늘 진료가 힘들 수도 있습니다만.”
“물론이네. 이런 구경거리를 놓칠 순 없지.”
“나도 마찬가지네.”
그들도 역시 무인들.
팽지산과 의각주가 내공 없이 대련을 벌이겠다는 흥미거리에 밖으로 뛰쳐나왔다.
배울 점은 없을지라도 원래 이런 싸움이 가장 재밌는 법이다.
생사결이 아닌 규칙이 존재하는 대련이다.
여러 준비가 이루어지는 사이.
다른 무사들의 의사도 모두 확인한 종학진은 습관적으로 코 옆에 박힌 커다란 점을 긁적거렸다.
종학진이 생각하기에도 유성이 팽지산에게 사과하게 될 거다.
그러나 그에게 지는 것은 절대 흠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 팽지산이 무리한 대결을 벌였다고 욕먹을지도 모르는 일.
쉽게 생각했다.
종학진의 고민은 다른 부분이다.
‘할까? 말까?
그의 주력 부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무림맹과 의각의 규정집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처음 규정집을 받았을 때부터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폈기에 확신할 수 있다.
아무 문제없다.
어찌 보면 빈틈일 수도 있고, 전례가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이번에 해 보고 안 된다면 관두지 뭐. 분명 규정에는 없으니까.
유성이 일 잘하는 그를 꽤 믿는다는 점도 용감한 시도하게 만들었다.
‘경고 한번 먹더라도 잘리지만 않으면 되지.
얼른 의각 안으로 달려가 개인 짐 보따리에서 나무판 하나와 종이를 꺼내와 두 개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백유성, 팽지산.
종학진은 먼저, 경계 임무를 서고 있는 무사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사님들, 혹시 내기에 참여하시겠습니까? 누가 승리할지를 두고 작은 판이 벌어졌지 뭡니까?”
“내기? 난 근무 중인데?”
“특수한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딱히 자리 벗어나지만 않으면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흠, 그렇기는 하지.”
무사는 내기라는 말에 흥미를 보였다가 금방 식었다.
“그런데 이건 너무 일방적이 아닌가? 누가 의각주에게 건단 말인가?”
“끙…”
종학진은 조심스럽게 적은 금액을 꺼내 유성에게 걸었다.
어딘가 역배를 노리는 무사들도 있겠으나, 일단 판이 시작 되어야 수수료라도 챙길 수 있다.
일종의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 의각 시험에서 유성 덕에 번 돈도 많고.
“일단 저부터.”
그제야 무사가 관심을 보였다.
“그럼 조금 걸어볼까. 난 팽 소협에게.”
“나도 팽 소협에게 걸지.”
“나도.”
어느새 내기판은 남궁유린의 앞까지 향했다.
“...”
잘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팽지산에게 확연히 쏠려 있는 배당.
남궁유린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유성의 이름 옆은 초라했다.
그러나 어울려 줄 수는 없다.
어처구니없지만 내기 조건중 하나에 그녀가 연관되어 있으니 더 그렇다.
“전 생각 없어요.”
“그러지 말고 조금만 걸지 그래?”
“그래, 별거 아니지만 돈이 많이 걸린 쪽이 승리한다는 말도 있다고 들었는데.”
“오, 나도 들어 본 적 있지. 응원 하는 셈치고 조금 거는 것도 좋아. 그럼 그 사람이 얼마나 힘이 나겠어?”
여러 무사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남궁유린은 고민에 빠졌다.
그들의 말을 모두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응원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제발 팽지산 좀 그만 보고 싶다.
백유성이 이기면 팽지산은 무림학관을 관두고 떠나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내 응원이 의각주님께 도움이 될까?
고민에 빠진 그녀를 두고 무사들끼리 의미심장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순진한 구석이 있다고.
남궁유린은 전낭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걸자. 그냥 응원하는 건데 뭘.
유성이 이기기만 한다면 최고의 결과다.
타인의 시선을 잠시 접어두고 오직 팽지산의 퇴관에만 집중했다.
남궁유린의 비단 전낭이 유성의 이름 위에 올랐다.
“통째로 거시는 겁니까?”
종학진이 전낭을 열어 보았다.
남궁유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항상 넉넉히 돈을 지니고 다닌다.
그녀는 오대세가의 수좌이자 안휘성의 패자, 그리고 온갖 상인들이 줄을 대기 위해 방문하는 남궁세가의 직계.
넉넉함의 기준이 타인과는 꽤 다르다.
전낭을 열어본 종학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금빛!
금편이 들어 있다.
일방적인 상황이라, 이번 판은 작게 열리리라 예상했던 종학진이 완전히 틀렸다.
팽지산의 승리에 돈을 건 사람들의 배당률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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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학진이 자기 장기를 살려 무림맹 한복판에서 내기판을 벌이는 사이.
또 다른 낙양 의방 출신 하인 하나도 그의 장기를 살리고 싶어 안달이 났다.
떠벌이라는 별명을 가진 장칠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의각주와 팽지산이 대련을 한다니!
이 사실을 모르는 누군가를 붙잡고 소문을 내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마침 종종걸음으로 의각을 가로질러 가는 군사부 소속 하인을 발견했다.
부군사 태정헌이 의각에 올 때 자주 대동하고 다니던 하인으로, 이미 장칠과 안면이 있다.
장칠은 재빨리 그에게 달려갔다.
“이보게, 많이 바쁜가?”
군사부 하인은 군사부로 부지런히 발을 놀리며 대꾸했다.
“바쁘지. 빨리 전해야 하는 물건이 있으니 할 말 있으면 같이 가면서 하세.”
아쉽지만 진득하게 이야기할 틈은 없었다.
장칠도 대련을 구경하러 돌아가야 하니까.
입맛을 다신 그는 빠르게 핵심 상황만 전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조미료를 치는 것도 잊지 않았고.
“지금 의각주님과 팽지산 소협이 글쎄…”
“뭐?! 그래서 다들 저렇게 모여 있단 말인가?”
“물론이지. 이 내기에 뭐가 걸렸냐면…”
신이 나 떠드는 장칠의 말을 흥미롭게 들은 군사부 하인이 군사부로 복귀했다.
그는 복귀하자마자 총군사실로 향하는 부군사를 발견했다.
그의 손에는 보고서가 들려 있다.
부군사 태정헌은 백유성에게 생기는 모든 일을 직접 챙기기 원하는 사람이었다.
목숨을 구함 받은 뒤로 군사부 일을 제외하면 항상 의각을 예의주시 했고,
하인에게 듣는 소식이 있으면 말해 달라 당부해 왔다.
“부군사님.”
“아, 무슨 일인가?”
“지금 의각에서 일이 하나 벌어졌답니다.”
“의각에서? 자세히 말해 보게.”
군사부 하인은 방금 장칠에게 들은 소식들을 전했다.
하인이 말을 전하자 마자 부군사가 크게 소리쳤다.
“아니! 의각주님이 팽지산과 대련이라니! 어쩌다가!”
총군사실 인근 복도에서 난 소음.
긴급한 보고서들을 처리하고 차라도 한잔 할까, 하던 제갈영영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그게 무슨…’
팽지산이라면 요즘 말 많고 탈 많은 절정 고수가 아닌가?
그와 유성의 대련이 어떻게 성사된 건지 의문이다.
그리고 걱정도 됐다.
싸움이 아니라 대련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걸 보니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다칠 수 있지 않겠나?
유성이 절정 고수였을 수도 있다는 추측은 그녀도 했지만, 무공에 손 놓은 지 오래 아닌가.
다쳐도 금세 치료할 만큼 신비한 의술을 펼치는 사람이지만 그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마음이 아플 것 같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물어봐야겠어.
제갈영영이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총군사실을 나서기 위해 문손잡이를 잡았다.
“뭐? 진 사람이 남궁유린을 포기하기로 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그녀는 더 이상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했다.
벌컥—
총군사실 문이 열리며, 매서운 눈빛의 제갈영영이 신법을 펼치며 뛰쳐나갔다.
의각 방향으로.
부군사와 하인이 놀라 그쪽 방향을 바라만 보았다.
소문을 낼 때 자기 엉뚱한 추측을 더하기로 낙양 의방에서 악명 높았던 장칠은 이번에도 애꿎은 피해자를 만들어냈다.
***
종학진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무사들과 쑥덕거리는 모습은 당연히 맹주의 시야에 들어왔다.
뛰어난 시력과 청력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차렸으나 맹주는 눈감아 주었다.
두 사람의 대결을 자신마저 흥미롭게 여기고 있다.
저들 역시 마찬가지리라.
맹주는 남들에게만 엄격한 사람이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아쉽군.
명문세가 출신도 아닌 무림맹주는 체통을 지키느라 가만히 있을 뿐 다른 남자들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속으로 유성을 열렬히 응원하고 있다.
어쨌든, 대련 준비가 모두 끝났다.
아까보다 열배는 더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 무사들이 둥글게 원을 만들어 놓은 공터 한가운데.
팽지산과 유성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팽지산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정말 궁금하군요. 제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대련 제안을 하십니까?”
“제가 당연히 질 거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의서나 뒤적이더니 정신이, 큼, 정상적인 판단이 안 되나 봅니다?”
“그럼 서점에서는 본인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으면서 공평한 척 그런 대련을 제안하신 겁니까?”
지금 유성이 제안한, 내공 없는 맨몸 대련은 전에 팽지산이 먼저 꺼낸 조건이었다.
“...시작이나 합시다.”
반박할 말이 없는 모양.
팽지산이 자신 있게 하북팽가 호신 권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절정 고수답게 그럴듯한 자세가 잡힌 모습에, 무림맹 무사들 사이에서 작은 감탄성과 함께 커다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팽 소협 힘내시오!”
딱히 그가 호감이라 응원하는 건 아니다.
무사들이 평소 지니고 다니던 돈은 많지 않았고, 모두 합쳐도 남궁유린이 내놓은 돈보다 적었다.
즉, 팽지산이 이기면 그들은 한몫 단단히 잡게 된다는 소리다.
아직 의각주에게 큰 도움을 받은 적 없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그런 내막까지는 잘 모르는 팽지산의 어깨가 으쓱했다.
“모두 절 응원하는 모양—”
척.
유성이 육합권의 기수식을 취하자, 잘난 체 하려던 팽지산의 말이 뚝 끊겼다.
항상 일반인처럼 흐트러진 유성의 자세만 보아왔던 그는, 갑자기 상당한 수준으로 자세가 잡힌 유성을 보고 당황했다.
‘과거에 무공을 익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 수준이었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저 녀석이 절정 고수일 리 없지 않은가?
이제 스무 살이라고 들었는데!
진영호로부터 유성이 열일곱에 주화입마에 걸렸었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다.
그때 팽지산은 유성이 마공이라도 익힌게 아니냐고 몰아세웠으나, 정말 절정 고수여서 주화입마에 걸렸던 것이라면?
‘열일곱에 절정 고수라니, 절대 그럴 리 없다!
팽지산은 현실을 부정했다.
그리고 혹시 그렇더라도 자신이 육합권 따위에게 질 리 없을 테고.
***
대련 당사자는 현실을 부정했으나, 유성의 정보를 토대로, 절정 고수였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점치고 있던 맹주는 기수식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저런 천고의 무재가 어쩌다가 주화입마에 빠졌단 말인가…’
정파 무림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금 전 내공 금제를 핑계로 단전 부근을 살폈을 때, 산산조각 난 단전 조각들을 직접 확인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의각주는 모든 의원이 포기했던 정립을 치료할 정도로 신비한 의술을 사용하는 자니.
만약 유성이 주화입마를 치료할 방법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정립과 유성의 친분이 깊으니 자신이 도와주면 충분히 포섭할 수 있을 거다.
비록 지금은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지만 맹주도 백리세가를 키우고 싶은 야망이 있었다.
도왕도 유성의 자세를 보자마자 맹주쪽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의각주가 무공을 익히고 있었구나. 게다가 스물에 저 정도 수준… 대단하구나. 맹주는 이미 알고 있었어. 어쩐지 전혀 말리지 않더라니… 의각주에게서 승산을 본 거구나. 서로 내공을 금제했으니 의각주가 권의 고수라면 지산과 해볼 만하다.
유성이 지금 보여주는 자세에 비해, 내공 수준이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으나.
강호에는 내공 수준이 드러나지 않는 특수한 심법도 존재한다.
물론 도왕은 유성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없었기에 착각한 것이지만.
도왕은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유성이 아들놈을 이겨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앞으로 훨씬 중대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보다, 지금 한번 꺾여 정신을 차리는 것이 낫다는 판단.
무공만으로 가주가 결정되지 않는 팽가에서, 만장일치로 도왕이 가주로 결정된 이유가 있었다.
***
팽지산은 원래 선공을 양보하려 했다.
남궁유린 앞에서 선공을 양보하고 유성을 통쾌하게 꺾는다면 더 멋질 테니까.
그러나 유성이 상당한 수준인 걸 알게 된 이상, 그럴 여유가 없었다.
더 멋지게 보이는 것보다 일단은 이기는 게 중요했다.
어차피 서로 기수식을 취하는 상황.
팽지산은 기습적으로 보법을 밟으며 유성의 가슴을 향해 일권을 내질렀다.
“흐앗!”
타고난 신력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공격 초식.
상대가 방어하면 통째로 날려 버릴 수 있다.
허겁지겁 피하면 다음 초식으로 이어가려 했으나, 유성이 전혀 반응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인다.
‘자세만 그럴듯 하지 별거 없구나!
여차하면 변초도 준비하던 그가 일권에 온 힘을 집중시켰다.
곧 유성이 형편없이 뒤로 나뒹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
예상이 빗나갔다.
타고난 신력도 닿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 없는 법.
유성이 사선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하며 간발의 차이로 그의 주먹을 피하고 반격을 시도했다.
팽지산은 이겼다고 방심해 온 힘을 실었기에 자세가 살짝 흐트러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복부!
그는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으며 방어초식을 펼쳤다.
이번에야말로 유성의 공격이 자기 팔에 가로 막힐 거라 의심하지 않아으나.
스르륵.
정직하게 뻗을 것 같던 주먹이 마치 뱀과 같은 움직임을 보이며 팽지산의 팔을 타고 올랐다.
팽지산은 황급히 몸을 뒤로 날렸다.
‘피했다!
그러나.
유성의 주먹이 간발의 차이로 팽지산의 코를 스쳤다.
살짝 스친 코에서 코피가 뿜어져 나왔다.
쌍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팽지산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으아아!!”
악지르며 돌진하는 모습이 화가 단단히 난 황소 같았다.
‘그래, 코피만으로는 부족하지.
숨이 끊어질 때까지 몸통에 창을 하나씩 꽂아 넣어 줄 거다.
유성은 기꺼이 투우사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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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망토를 흔들어 도발할 필요는 없다.
눈앞의 황소는 이미 머리끝까지 분노로 가득 차 있어, 망토 없이도 투우사를 향해 저돌적으로 돌진했으니까.
유성은 그의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해냈다.
무공에 대해서 만큼은 멍청하지 않은지, 이번에는 팽지산의 주먹이 횡으로 변화를 일으키며 쫓아온다.
이미 예상했다.
소림 보법의 묘리가 가미된 유성의 독문 보법이 펼쳐지자 변초마저 무위로 돌아간다.
‘맞으면 위험하겠지만 혜강 스님과 비교하면 어린아이 수준이야.
절정 후기의 고수와 절정 초입의 차이도 있고,
권각법을 주력으로 삼는 소림의 절예에 비하면 팽지산이 펼치는 권법은 깊이도 얕았고, 숙련도도 한참 부족했다.
새로운 무공을 배울 수 있을까 기대했던 유성은 김이 살짝 샜다.
‘기대했는데 그냥 타고난 힘으로 찍어 누르는 권법일 뿐이구나.
아마 지금까지는 그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어차피 도가 주력이고, 권법은 도법을 펼칠 수 없을 때 버티는 용도일 테니까.
상대에게 초식을 적중시킬 수 있다면 무섭겠지만, 유성에게는 움직임이 뻔히 보였다.
팽지산이 계속 초식을 펼쳤으나 유성은 간발의 차이로 피해냈다.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는다.
익히고 있던 모든 초식을 쏟아부어도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팽지산의 움직임이 점점 커졌다.
반면 유성의 주먹은 그의 몸 이곳저곳에 틀어박혔다.
“큭!”
방금 옆구리에 또 주먹을 허용한 팽지산의 눈에 초조함이 깃든다.
가슴, 복부, 어깨, 팔, 옆구리.
옷 안이라 보이지 않을 뿐, 그의 몸에는 이미 여러 개의 멍 자국이 새겨져 있다.
이곳저곳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올라온다.
‘무슨 주먹이!
팽지산이 인상을 썼다.
남들이 보기에 가볍게 스치듯 맞은 것으로 보여도, 당사자인 그는 한번 유성에게 맞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덩치도 자기보다 크지 않은데 어떻게 저런 힘이 숨겨져 있었는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
주먹보다 더 자신 없지만 변수를 만들기 위해 각법도 꺼내 들었다.
마침 서로의 거리가 가깝다.
기습적으로 유성의 허벅지를 터트릴 기세로 허리를 비틀며 휘둘러진 발차기!
스르륵.
그러나 이번에도 간발의 차이로 발끝이 유성의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간다.
‘무슨 저딴 보법이 다 있어?
내공도 쓰지 못하는 몸.
자신의 보법으로는 따라잡을 방법이 없었다. 수준 차이가 심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두 다리로 굳건히 설 때와 비교해 형편없을 정도로 자세가 흐트러졌기 때문.
아니나 다를까, 간신히 자세를 잡은 팽지산의 눈앞으로 주먹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퍼억—!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정신없는 와중, 그는 팔을 마구 휘저었다.
지금 추가 공격이 들어오면 패배다!
팽지산은 황급히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그러나 한참 거리를 벌리고 나서, 유성이 그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혼자 팔을 휘저으며 미친 듯 물러선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분노가 머리끝까지 잠식했다.
“날 농락해!”
“보기 좋군요.”
“뭐?”
유성은 시퍼렇게 멍들어가는 팽지산의 왼쪽 눈을 보며 슬쩍 웃었다.
이미 몇 개의 창을 꽂아 넣었음에도 지치지 않는 황소는 잡을 맛이 난다.
이제 유성이 먼저 달려들었다.
팽지산의 눈에 결연함이 떠오르더니 유성의 공격을 무시하고 마주 주먹을 뻗어왔다.
하수가 고수를 상대할 때나 펼칠만한 수법이지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으니 맷집을 믿고 동귀어진의 초식을 펼친거다.
하지만.
퍼억—!
팽지산의 회심의 일권은 유성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고 유성의 주먹은 그의 오른쪽 눈에 꽂혔다.
유성은 양쪽 눈에 시퍼런 멍을 새겨 넣은 후 그 모습을 감상했다.
지혈도 하지 못한 코에서는 쌍코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양쪽 눈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다.
팽지산은 그런 꼴을 하고도 항복할 생각이 없는지 다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포기하지 않아 주니 오히려 고맙다.
몸을 뒤로 슬쩍 빼며 미친 소처럼 달려드는 그의 다리를 걷어차자 팽지산이 자세가 일순 무너졌다.
포기하지 않길래 몇 차례 더 걷어차주자 이제 한쪽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린다.
유성은 슬쩍 주위를 살폈다.
가장 우려했던 도왕의 표정은 뜻밖에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더 즐기고 싶지만 사람들이 슬슬 불편해하는 표정이네.
주변 무사들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
팽지산이 너무 심하게 당한다고 여기는 걸지도 모른다.
유성은 평판 관리를 위해서라도 이쯤 하기로 했다.
‘하긴, 내가 봐도 몰골이 말이 아니네. 그래도 딱 한 방만 더 먹이고.
미친 황소의 숨통은 끊어 주어야 하니까.
진각을 밟으며 팽지산의 품으로 파고든 유성은, 팽지산이 마지막 발악으로 휘두른 공격마저 피해냈다.
그의 경악에 가득 찬 안면이 훤히 드러났다.
‘이번엔 훨씬 아플 거다.
팽지산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콰앙—!!
가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팽지산이 눈이 풀린 채 허물어졌다.
***
“이럴 수가… 의각주님이 저렇게 고수였다고?”
“내 돈!”
“이게 이렇게 된다고?”
호구 하나 물어 든든하게 한몫 챙길 수 있다는 생각에 지니고 있던 돈을 탈탈 털었던 무사들은 망연자실했다.
곳곳에 머리를 쥐어 짜는 자들도 있다.
팽지산의 상태를 걱정한 자들은 하나도 없지만 돈은 중대 문제다.
졸지에 상당한 돈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중에는 대부분의 돈을 몸에 지니고 다니던 무사도 있었다.
종학진은 신이 났다.
뜻밖에 판이 커져 수수료도 상당했고 유성에게 돈을 걸었던 것도 따게 된 것.
내기의 승리는 언제든지 짜릿하다.
‘의각주님, 충성!
그리고 대련을 지켜보며 손에 땀을 쥐고 유성을 응원했던 남궁유린은.
그가 간발의 차이로 피할 때는 비명을 지를 뻔하다가, 팽지산에게 공격을 성공 시킬 때는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대련을 보며 진심을 담아 누군가를 응원해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마침내 팽지산이 쓰러지자, 그녀는 방방 뛰며 환호했다.
‘이제 지긋지긋한 팽지산을 그만 볼 수 있어!
오라버니가 다쳐 억지로 무공을 수련하게 된 이후로, 그녀는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가문의 어른들이 주는 압박감.
친구처럼 지냈던 시녀에 대한 미안함.
억지로 수련해야 하는 무공에 대한 회의감.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것이 떠오르지 않았고, 순수하게 즐거웠다.
유성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했다.
***
제갈영영은 의각으로 달리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유성이 어느새 팽지산과 남궁유린을 두고 다툴 정도로 그녀와 사이가 진척된 건지.
처음에는 질투심이 치솟아 앞뒤 가리지 못했으나 점차 이성이 돌아왔다.
‘이야기가 전달 과정에서 잘못되었을 수도 있지.
유성의 주변을 매일 예의주시 했으나 그런 낌새를 눈치챈 적이 없다.
장칠이라는 입 싼 하인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고.
이 부분은 확인해 보면 된다.
그래도 제갈영영은 다급하게 움직였다.
혹시 유성이 다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러나.
제갈영영이 도착했을 때는 유성의 마지막 공격이 팽지산의 안면에 틀어박힌 순간이었다.
털썩 쓰러진 팽지산이 피떡이 되어 있었음에도 유성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는다.
제일 먼저 든 감정은 안도였다.
‘다행이다. 별로 다친 곳은 없는 거 같아.
마음이 풀린 제갈영영의 귓가로, 주변 무사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럼 이제 팽지산은 팽가로 돌아가는 건가?”
“그전에 사과부터 해야지.”
“참, 그렇지. 그런데 남궁유린이랑 의각주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나?”
“그건 팽지산 혼자 그렇게 주장한 거 아닌가?”
“그럼 남궁유린은 왜 저렇게 좋아해?”
“돈 땄잖아.”
“돈?”
“참, 넌 내기 참여 못했지? 남궁유린이 의각주님이 이기는데 걸었거든. 돈 좀 만졌을 걸?”
“아…”
과연 의각 안의 남궁유린을 보니, 환호하고 있다.
평소 조용하면서도 당돌한 구석이 있다고 여겼으나 저렇게 즐거워할 줄도 알고.
색다른 모습이다.
“총군사도 왔소?”
마침 맹주와 눈이 마주쳐 제갈영영이 그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
도왕이 유성에게 다가 갔다.
“의각주가 무공도 익힌 줄 몰랐군.”
도왕은 유성의 과거를 모르기에 그가 절정 고수라고 생각했다.
내공 수준을 알아챌 수 없으나 강호에는 내공 수준을 숨길 수 있는 심법도 존재한다.
유성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단전이 깨진 것만 주화입마로 변형 시켜서.
납득할 수 없는 이유보다는 주화입마라는 핑계가 편리하다.
“그런 일이 있었는 줄 몰랐네. 안타까운 일이야.”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죄송합니다.”
유성의 시선이 개구리처럼 뻗어 있는 팽지산에게 머물렀다.
“아닐세. 상대를 제대로 만난 셈이지. 저놈은 저럴 필요가 있었네. 내가 교육 한다고 시켰는데도 저 모양이라 우려가 커. 깨어나면 내가 책임지고 사과 시킨 후 팽가로 데려가겠네.”
“죄송합니다. 평소 저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 듯하여 그런 조건을 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괜찮네. 어차피 이 대련의 결과가 어떻든 팽가로 데려갈 생각이었네. 저놈은 그게 맞는 것 같네.”
유성은 도왕에 대한 생각을 조금 수정했다.
외관은 여전히 밉상이고 호전적인 성격이지만, 사리 분별 할 줄 아는 진짜 어른이었다.
“그나저나 미안한 말이지만 대련이 끝났으니 내 아들놈을 치료해 줄 수 있겠나? 꼴이 좀…”
쌍코피가 코와 인중에 그대로 굳어 있고 양 눈이 시퍼런 모습은 시각적으로 보기 안 좋았다.
이미 충분히 재미를 봤으니 그 정도는 해주기로 했다.
도왕도 이렇게 부탁하는데.
“알겠습니다.”
코피를 멎게 하고 눈 부분의 멍기를 조금 빼주었다.
이번에는 팽지산의 머리를 짚었다.
뇌에 정밀하게 치유 스킬을 사용하면 기절 상태를 해제할 수 있다.
유성이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그런데.
팽지산의 뇌에 회색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예전에 자주 겪어본 적 있는 증상.
‘이 새끼, 정신병을 앓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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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의 개념이 정확히 잡힌 것은 꽤 현대로 알고 있다.
미쳤다는 개념 정도는 있었으나 질환으로 취급된 것은 한참 후라는 이야기다.
정신병은 선천적 요인도 있고 후천적 요인도 있는데, 유성이 경험한 것들은 주로 후천적 요인이었다.
버츄얼 판타지는 절대 평화로운 세상이 아니었고 다양한 전쟁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환자들이 많았다.
그 외에도 여러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신성력으로 뇌에 회색 아지랑이가 감지되는 것이 정신병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돌이겨 보면, 팽지산은 남궁유린과 관계되었을 때, 유성에게 강한 공격성을 보였다.
만약 정신질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면 팽지산의 증상을 대략 정의할 수 있었겠지만,
유성은 그저 평범하게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조울증, 조현병, 망상 장애, 분노 조절 장애 등.
뉴스에서 가끔 접한 적 있는 질병들만 대략 아는 수준으로는 명확히 진단 내릴 수 없다.
다만 팽지산의 종잡을 수 없는 행보가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만 약간 이해했을 뿐.
그렇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밉상이다.
유성은 일단 도왕에게도 이 사실을 숨겼다.
정신질환을 설명하는 것도 복잡하다.
-내 아들이 미친놈이라는 소리인가?
이런 반응이 돌아올지도 모르고.
‘어차피 지금은 치료할 방법도 없지.
정신 질환은 의선의 손녀 임연화 만큼의 정신 오염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정신에 작용하는 문제.
정화 스킬을 얻어야 치료할 수 있다.
결국 의선의 손녀를 치료해 준 후 고민해볼 문제다.
[치유]
기절한 팽지산이 눈을 뜨며 상체를 일으켰다.
“...”
잠깐 어리둥절 두리번거리던 그가 유성을 발견했다.
그의 허망한 시선과 유성의 눈이 마주쳤다.
다시 얼굴이 일그러진다.
“유, 유린을 차지하기 위해 여태 실력을 숨겨 왔다니, 너같이 음험한 녀석에게 절대—”
퍼억!
도왕이 팽지산의 뒤통수를 때렸다.
“이놈! 네가 노래 부르던 대로 사내 대장부라면 결과에 승복하거라. 어서 의각주님께 사과하거라!”
“아, 아버지. 하지만!”
“어허!”
팽지산은 도왕과 얼마간 투닥거렸으나 그도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체념했다.
“크흑! 미안하다. 내가—”
퍼억!
“공손하게!”
때리는 도왕도, 맞는 팽지산도 꽤 익숙해 보인다.
팽지산은 남궁유린쪽을 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누가 보면 그녀와 사귀다가 실연이라도 당한줄 알겠다.
“의, 의각주님, 죄송합니다. 그동안 무례했던 언행들 모두 사, 사과드리고 약속대로 팽가로, 크흑… 돌아가겠습니다.”
팽지산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날 이후, 무림맹 내에 유성의 과거 경지가 널리 퍼졌다.
팽지산을 철저하게 깨부순 후 더 이상 유성이 절정 고수였다는 것을 의심하는 자들은 없다.
얼마간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을 받긴 했으나, 그 시선도 곧 사그라졌다.
유성이 계속 절정 고수였다면 모를까, 동정 어린 시선조차 그에게 상처가 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며칠 후, 무림학관을 그만둔 팽지산을 숙소에 처박아 둔 채 도왕이 팔의 치료를 마무리 짓기 위해 유성을 찾아왔다.
그는 이번 습격 관련해서 무림맹 회의에 참여해 꽤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들었다.
“아들놈은 내가 철저히 교육시킬 테니 나를 봐서라도 용서해주게.”
“노력해 보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봤을 때는 팽 소협이 더 성숙해져 있으면 좋겠군요.”
“저놈도 점차 나아지겠지.”
팽지산이 앓고 있는 이름 모를 정신병.
그걸 치료하지 못하면 여전할 것 같지만 도왕의 통제 하에 있으면 유성을 더 이상 귀찮게 하지는 못할 거다.
그리고 남궁유린에게도.
***
팽지산을 꺾은 후, 남궁유린이 유성을 따로 찾아왔었다.
-의각주님, 팽 소협을 이겨 주셔서 감사해요. 그동안 얼마나 절 괴롭혔는지 몰라요.
-역시 그랬군요. 저도 쌓인 게 많았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녀는 큰 눈을 반짝이며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이렇게 말이 많은 모습은 처음이다.
항상 조용하고 뒤에 빠져 있는 모습만 봐 왔는데.
-대련을 지켜보는 게 괴롭지 않은 건 처음이었어요.
남궁유린은 그 말을 뱉고 나서 아차 싶은 표정으로 황급히 인사하고 가 버렸다.
무가인 남궁세가의 자제가 대련을 지켜보는 게 괴롭다는 건 무슨 이유일까?
유성이 의문을 가졌으나 그녀의 속이라도 들여다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이야기다.
***
유성의 휴무일.
침통만 챙겨든 유성이 무림맹 정문으로 나서자, 커다란 마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 안에 익숙한 얼굴도 보인다.
“오랜만에 뵈어요, 의각주님. 그동안 내부 정리가 끝나지 않아 저번 휴무일에는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어요.”
“괜찮습니다, 소옥님. 이제 문주님이라고 불러드려야겠지요?”
띠동갑녀가 민망한 웃음을 짓는다.
“그냥 편하게 불러 주세요. 취임식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어색하네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바쁘실 텐데 오늘은 왜 직접 나오셨습니까?”
“처음이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매 주 나오고 싶은데, 이제 그 정도 여유는 없어서 아쉽네요.”
소옥은 얼마 전 정식으로 하오문주가 되었다.
정연이 요양을 핑계로 태상문주로 물러났으며, 그 사이 여러 장로들이 교체되는 등 하오문이 꽤 시끌벅적 했다고 전해 들었다.
마차에 타고 이동을 시작하자 소옥이 작은 비단 주머니를 전해주었다.
손으로 만져 보았다.
작고 네모난 돌멩이 같은 게 들어 있는 듯하다.
“이게 뭡니까?”
“천운석이에요.”
“...!”
놀라 열어 보니 정말 천운석이 들어 있다.
다만 그 크기가 너무 작았다.
기존에 구한 천운석보다 더 작았으니까.
“더 많은 양을 구하는 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유성은 약간 실망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도움받는 처지에 성과가 미미하다고 화를 낼 수는 없다.
“아닙니다. 계속 신경 써 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사실 더 많이 구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천운석을 가진 자들에게 충분한 돈만 지급하면 되살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유성이 하오문에 기대한 부분도 그런 쪽이다.
운 좋게 운석이 떨어져 천운석을 새로 발굴해 내지 못하는 한, 중원 전역에 퍼져 있는 천운석을 사모으는 게 최선일 테니까.
그리고 그건 중원 전역에 인적 네트워크를 가진 하오문이나 개방이 최고겠지만, 개방은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무슨 문제가 있나 보군요.”
소옥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어떤 문제입니까? 혹시 돈이 부족하면 제가 보태겠습니다.”
빈민들을 치료할 때 필요한 약재나 환경을 모두 하오문에서 제공해주니 유성이 돈 쓸 일이 확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천운석을 수집한 이력이 있던 부호들을 수소문해봤는데, 대부분이 그걸 도둑 맞았더라구요.”
“천운석을 도둑맞아요?”
“네, 아직 널리 퍼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천운석을 훔쳐 간 자리에는 검은 나비 표식이 새겨져 있었어요.”
“검은 나비요? 저는 견문이 짧아 잘 모르겠습니다.”
“검은 나비는 전설적인 도둑 무영신투가 사용하던 표식이에요. 오십 년 전 마지막으로 발견된 후 여태 흔적이 없었으나, 최근 몇 년 전부터 다시 나타났어요. 물건을 훔치고 그 자리에 표식을 남겨두는 거죠.”
일이 귀찮게 됐다.
하필 천운석을 훔쳐 가는 도둑이 활동한지 수년째란다.
아무리 중원이 넓다지만 도둑의 손길이 어디까지 퍼졌을지 모른다.
“그래도 아직 훔치지 못한 천운석들이 많이 있겠죠?”
“맞아요. 그 혼자 모든 걸 훔칠 수는 없겠죠. 대신 천운석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자들은 거의 도둑맞은 게 문제예요.”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문도들이 열심히 알아보고 있으니 분명 더 구할 수 있을 거예요.”
너무 상심한 표정을 지었나보다.
소옥이 조심스럽게 위로했다.
“물론입니다. 안 된다면 그 도둑의 정체라도 밝혀주십시오.”
“그럼요. 그 부분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어쩌면 한 번에 의각주님이 원하시는 만큼의 천운석을 얻게 될지도 몰라요.”
맞다.
그 도둑만 잡으면 오히려 그가 여태 모아 놓은 천운석을 한 번에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화제를 돌려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차는 곧 하오문에서 준비한 장소에 도착했다.
안에는 저마다 꾸민 기녀들 십여명이 기다리고 있었고, 빈민가에서 온 듯 허름한 복장을 한 사람들도 스무명 정도 모여 있었다.
“하루 동안 얼마나 환자를 보실지 몰라 가장 상태가 안 좋은 자들로 준비해봤어요. 만약 원하시면 환자를 늘릴 수도, 줄일수도 있으니 제 마부에게 말해주세요.”
소옥은 이전에 본 적 있는 마부를 소개해 주고 잠시 일을 보러 떠났다.
유성은 진료실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빈민들 중 제일 중해 보이는 자들을 치료해 준 후, 유성은 기녀 한 명을 들였다.
“어머, 이렇게 잘생기셨는 줄 몰랐네요?”
기녀가 들어서며 유성에게 눈웃음 쳤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교태가 몸에 배어 있다.
‘꽤 예쁘긴 하지만 화장도 진하고… 요즘 내 눈이 너무 높아졌나?
제갈영영과 남궁유린이 떠오른다.
보름달과 반딫불 정도로, 기녀와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의 차이.
예쁘장한 기녀를 봐도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는다.
“괴질을 앓고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이거 때문에 일도 못하고 죽겠다니까요?”
툴툴거린 기녀가 예고도 없이 치마를 활짝 들어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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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녀는 짓궂은 구석이 있었다.
겉 치마 안에는 또 다른 치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다.
“...그럼 증상을 정확히 말씀해주십시오.”
정연과 처음 만났을 때, 지금은 태상문주가 된 정연이 기녀들의 상태를 대략 설명해 주었다.
남자를 상대하는 기녀들이 걸리는 괴질.
그걸 듣자마자 유성은 당연히 성병을 의심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았다.
치료할 때 환부를 전혀 안 볼 수는 없기에,
기녀의 짓궂은 행동을 무시한 채 최대한 담담하게 행동했다.
환부에서 고름이 나오고 안 좋은 냄새가 났다.
가려움과 통증도 있다니, 불편함이 심했을 거다.
손님도 받기 힘들었겠지.
유성의 성병에 대한 짧은 지식으로는 매독인지 임질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병명을 모른다고 치료까지 못 하는 건 아니다.
조용히 침을 꺼내 들었다.
“침 놓으시게요? 안아프게 놔주세요~”
“좀 아플 겁니다.”
“아이 참, 안아프게— 앗!”
기녀에게 신경 써서 가장 아프게 침을 놔주고, 치유 스킬을 발동시켰다.
역시 치유 스킬은 질병에 최고의 효과를 발휘한다.
기녀도 처음에만 따끔하지, 가려움증과 통증이 가시는지 신기해했다.
이어서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다른 기녀들도 모두 치료해주었다.
한참 후, 소옥이 돌아왔다.
“벌써 치료 다 마치셨다면서요? 아무도 치료하지 못한 괴질인데… 무슨 병이던가요?”
소옥과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기는 조금 민망해 유성은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해 주었고.
“낙양에 이런 기녀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꽤 많아요. 급속도로 퍼지고 있거든요.”
성병은 신체 접촉으로 퍼진다.
피임기구도 없으니 예방도 잘 안 될 테고.
환부가 좀 그렇지만, 사용할 수 있는 신성력의 양만 늘어난다면 한 번에 치료할 수 있는 기녀들을 더 늘릴 수 있다.
주기적으로 신성력을 파밍 할 수 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천운석으로 침을 만들 수 있으면 좋다.
“혹시 천운석을 가공할 수 있는 장인은 알아 보셨습니까?”
“마침 관련된 소식을 듣고 오는 길이에요.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천하에 이름이 알려진 자들 중에서는 사천당문이 유일해요.”
“역시 거기 뿐입니까?”
버츄얼 판타지에서 드워프들이 오리하르콘을 다루었으니, 여기서도 많지 않으리라 예상은 했다.
그러나 실제로 사천당가로 확인 되자 아쉬운 마음이 든다.
“원래 철가장이라는 곳도 있었어요. 유서 깊은 대장장이 가문인데 일할 때 도움이 되려고 비전 무공까지 익힌 자들이에요. 보유한 실력 좋은 대장장이만 해도 수십 명에 가까웠다고 하죠.”
“...”
“그들 중 일부 장인들은 천운석을 다룰만한 실력이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이십 년 전, 철가장이 망해 버렸어요.”
“그렇게 실력 좋은 장인들이 왜 망했습니까?”
“소문으로는 중요한 납품건에서 심각한 품질 문제가 있었다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긴 해요.”
석연치 않아도 이십 년 전 있었던 일이라면 이제 와서 어떻게 밝힐 방법도 없다.
“그런데 혹시 철가장이 망했어도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남아 있지 않습니까?”
소옥이 고개를 저었다.
“의각주님의 부탁을 받고 그들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가 방금 나온 거예요. 철가장의 후인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실종되었어요.”
이상한 일이지만 이제 와서 그들을 찾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사천당가 뿐이라고 하신 거군요.”
“맞아요.”
유성이 사천에 다녀오려면 이동 시간만 해도 최소한 두, 세달은 걸릴 거다.
무림맹에 매여 있는 몸으로 아무 명분없이 몸을 뺄 수 있을 리 없다.
혼자 가면 위험하기도 하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
유성이 의각에서 일 한지도 한 달이 훌쩍 넘었다.
그사이 의각이 꽤 바빠졌다.
매일 환자들이 줄을 선 것은 똑같았으나 호기심에 찾던 어중이떠중이들은 찾아와도 진료받지 못할 만큼 환자가 몰렸다.
그중에는 꽤 심각한 부상을 당한 자들도 있었다.
듣기로, 여러 일들이 터져 무림맹 무사들의 외부 임무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거의 머릿수 채우기 용으로 따라다닌 무림학관 생도들도 조금씩 다쳐 돌아오는 상황에, 더 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무사들의 몸이 성할 리 없다.
“단주님까지 다치실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습니까?”
종학진이 경증을 파악한 순서에 따라 이번에는 백호단주가 진료실로 들어왔다.
전에 백호단원들도 여럿 다쳐와서 그의 상태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살펴보니 외상은 없으나 가슴에 내상을 입은 채였다.
시퍼런 손자국. 장법의 흔적이다.
“사파놈들이 뭉쳐 다니면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더군. 방심해서 한대 얻어맞았을 뿐이네. 그런데 치료할 수 있겠나?”
“당연하지요. 말끔하게 치료해드리겠습니다.”
“후, 다행이군. 복귀하는 날 친구들과 한잔하기로 했거든. 의각주도 생각 있으면 함께 하겠나? 내 친구들도 정식으로 소개해주지.”
“...”
이런 술에 미친 사람을 봤나.
처음으로 유성은 백호단주가 술을 끊게 만들었어야 하나 후회했다.
다친채로 돌아오면서도 내내 술과 고기를 뜯을 생각만 했을게 아닌가?
그러나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어 싱글벙글 웃는 모습을 보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런 사람이 술 끊으라는 말을 순순히 들을 리가 없지.
백호단주를 치료해준 후에도 진료줄은 끊이지 않았다.
신성력이 늘어나는 점은 반갑지만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시간적 여유도 필요하고 신성력을 아낄 필요도 있다.
며칠 후.
반가운 얼굴들이 도착했다.
“이야~ 드디어 여기서 일하게 되는군. 이게 다 의각주 덕이야!”
한 명은 의각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유성의 손을 붙잡고 연신 흔들었고.
“혼자 고생 많았네. 바쁘다고 들었는데 내일부터 최선을 다해 돕겠네.”
다른 한 명은 믿음직하게 유성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의원과 양의원이다.
차의원은 유성이 개인적으로 평가한 시험에서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을 받았다.
양의원에게 듣기로, 유성이 차의원에게 시험을 볼 거라고 통보한 후,
그는 귀찮을 정도로 양의원을 찾아와 함께 의술을 공부하자고 했단다.
올 때마다 손에 뭔가를 바리바리 싸왔다던가.
나름대로 의각에 들어오기 위해 그만의 방식으로 노력한 모양이다.
낙양 의방에서 두 명을 쏙 빼왔기에 소옥에게 조금 미안 했는데,
그녀는 유성의 말을 듣고 웃었다.
-낙양 의방은 걱정하지 마세요. 무림맹 의각 의원 세 명을 모두 여기서 배출했다는 말에 천하에 이름난 의원들이 지원하고 있어요. 환자들도 더 신뢰하는 분위기예요.
-그렇군요. 괜히 사람 빼와서 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 걱정했습니다.
-물론 의각주님을 대체할 사람은 없겠지만요. 양의원님도요.
소옥은 차의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의 합류는 유성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튿날부터 의각이 조금 더 체계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성은 중상 환자부터 받아 쉽게 완치가 가능한 자는 치료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상태를 완화시켜 양의원과 차의원에게 넘긴다.
양의원은 굳이 유성의 도움이 필요 없는 환자들을 받다가 유성에게서 넘어온 환자들을 맡고.
차의원은 주로 경상 환자를 보다가 가끔 중상 환자들을 보는데 손을 보탠다.
그리고 밤마다 한 명씩 돌아서 의각에서 잠을 자며, 혹시 밤에 찾아올 수 있는 환자를 바로 돌볼 수 있도록 대처했다.
의각은 잘 굴러가고 있다.
그런데 유성의 눈에, 얼마 전부터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 남궁유린이 들어왔다.
팽지산이 무림학관을 그만둔 후 표정이 밝아져 의각 내 총각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던 그녀가 말이다.
남궁유린은 의각 경계 임무에 지원한 유일한 무림학관 생도.
유성과 친분도 있다.
의각의 대소사를 챙길 의무가 있는 유성은 근무가 끝나고 남궁유린에게 다가 갔다.
“요즘 무슨 일 있으십니까? 표정이 안 좋으신데요.”
몸이 아픈 게 아니라면 유성이라고 해도 남궁유린을 도와줄 방법이 없다.
사실 안부 인사에 가까웠다.
남궁유린은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혹시 제가 여기에 있는 게 도움이 되었을까요?”
앞뒤 다 자르고 그렇게 물어 오는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
“물론이지요. 남궁소저가 있어 의각 분위기도 더 밝았고 여러모로 도움이 됐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요.”
표정이 한결 나아 보인다.
유성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런 입바른 말 하나로 약간의 근심거리가 가신다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며칠 후, 그녀의 의각 경계 임무 지원 기간이 끝났고, 이번에는 남궁유린 대신 다른 생도들이 의각에 배치되었다.
같은 임무의 지원은 한 차례 건너 가능하단다.
***
떠벌이 장칠은 퇴근하여 집에 가기 전 푸줏간에 들렀다.
“부드러운 소고기로 넉넉히 주시오!”
백정을 향해 호기롭게 외쳤다.
‘역시 의각주님을 따라오길 잘했지.
이번에 받은 월급이 들어 있는 전낭이 두둑하다.
소고기를 사 들고 집으로 향하여 장칠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어머니의 안부를 살피는 거다.
그는 혼인도 하지 않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오늘은 월급 받아서 소고기 사 왔어요.”
어머니는 약 5년 전부터 눈이 흐려져 별다른 일도 못하고 집에만 계신다.
전에 양의원에게 진료 받았는데, 노안이라 어쩔 수 없단다.
다행히 흐릿하게나마 사물을 구별하니 더듬으며 집안일 정도는 할 수 있다.
장칠은 함께 고깃국을 끓여먹고 오늘 무림맹에서 있었던 여러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 글쎄 의각주님이 여 무사 한 명이랑 눈빛을 교환하는데 불꽃이 튄다니까요? 그 여자가 어찌나 예쁜지 종학진 형님도 한때 짝사랑 했다고…”
그도 사리 분별은 한다.
기밀 이야기는 전할 수 없지만 이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면 아직 소녀 같은 마음을 지닌 어머니는 신이나 이것저것 질문하고는 한다.
장칠은 이야기에 계속 조미료를 쳤다.
어느새 남궁유린과 백유성은 무가의 여식과 무공을 잃은 의원으로, 가문의 반대에 부딪혀 서로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애절한 연인 관계로 변해 있었다.
조미료를 치다 못해 세상에 없는 요리를 만들어낸 거다.
곧 어머니가 잠들면 하루 일과가 끝난다.
그런데.
“쿨럭!”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이야기 듣던 어머니가 갑자기 선홍빛 피를 토했다.
“어머니!”
하얀 이불이 붉게 물드는걸 보며, 장칠이 떠올린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당장 의각주님을 모셔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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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 의방 생활을 하며 유성은 외상 환자도 많이 받아보았다.
타박상이나 뼈에 금이 간 사람은 물론 골절을 당한 사람들도 찾아왔으나 결국 모두를 고쳐 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고칠 수 있는 수준의 사람만 찾아왔기 때문이다.
단연코 이 정도로 사경을 헤매는 환자가 의방을 찾아온 적은 없다.
가슴에 검이 박힌 자리는 까딱 잘못하면 장기를 찔렀을지도 모르는 위치로, 겉으로 보이는 출혈도 많았다.
만약 다친 장소가 인근이 아니었다면 의방을 찾아가는 동안 죽었을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당신은 다음에 봐줄 테니 자리 좀 비켜 주십시오!"
유성은 임시 진료실 안에서 진료중인 환자를 내보내고 소년을 안으로 들였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소년을 안고 온 남자가 빠르게 말했다.
"저쪽 골목길에서 소운이 실수로 흑도 놈과 몸이 부딪힌 모양입니다. 사실 무림인이라 하기도 힘든 양아치 같은 놈입니다. 그놈이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칼이 부러지자 오히려 소운에게 역정을 내더니 한번 걷어차고 가 버리길래 제가 의원님이 오시는 날인 게 생각나서 얼른 안고 온 것입니다."
"안고 오는 동안 검은 건들지 않은 것 맞습니까?"
"네, 이런 경우에 절대 뽑으면 안 된다고 설명해주신 게 생각나서 그대로 놔두고 안고만 온 것입니다. 소운을 살릴 수 있을까요? 이놈 불쌍한 놈입니다. 안 그래도 어렸을 때 흑도 무리들에게 부모를 잃고..."
손을 들어 남자의 쓸데없는 말을 막은 유성이 부러진 검날을 잡고 신성력을 흘려보았다.
'출혈이 많지만 다행히 내부가 손 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검이 박힌 채 몸이 심하게 흔들릴 정도로 안고 왔는데 이 정도면 이 소년은 아주 운이 좋은 편이다.'
유성은 바로 판단을 내리고 남자에게 말했다.
"살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이 소년을 치료해야 하니 다른 사람들은 진료 못 할수도 있습니다. 양해해 달라고 전해주시고 당신도 밖에서 대기해주십시오."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 연신 고맙다고, 잘 부탁하다고 인사한 남자가 문을 닫고 나갔다.
임시 진료실 밖에서 소운을 안고 온 남자에게 사람들이 연신 질문을 던져댔다.
그중 가장 화가 난 듯 보이는 남자가 씩씩거렸다.
평소 소운을 예뻐하던 자였다.
"이보게, 불쌍한 소운을 저렇게 만들었다는 놈들이 도대체 누군가? 아무리 흑도 무리가 막 나간다지만 죄 없는 민간인까지 건들다니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나도 모르는 얼굴이었네."
"자네는 개방도가 아닌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지 않겠나?"
"나는 무공도 배우지 않은 일결제자일 뿐인데 무슨 힘이 있어 그런 걸 알아볼 수 있겠나. 소운이 싹싹하고 착해 자네가 아낀다는 걸 잘 알지만 일단 기다리세나. 백의원님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네."
"기다리긴 뭘 기다려? 아무리 백의원님의 실력이 대단하다지만 저렇게 중한 상태를 어떻게 살려낸단 말인가? 그러지 말고 누군지만 좀 알아봐주게. 우리가 힘을 합치면 무림인이라도 복수할 수 있을걸세."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혹시 그자가 누군지 알아낸다 해도 우리는 그자를 이길 수 없네. 허튼소리 말게. 그리고 백의원님의 소문을 제대로 못 들었나보군."
"어떤 소문?"
"백의원님이 의선도 손 놓은 척마대주님을 살려냈다는 소문 말이네. 어쩌면 소운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네."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그건 틀린 소리라던데. 척마대주님은 치료를 포기한 게 아닌가? 조용히 삶을 정리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야. 분타주님께 들은 거라 틀림없을 거네. 척마대주님이 직접 치료가 잘되고 있다고 했다네."
"그럼 정말 소운이 살 수도 있단 말인가?"
***
'신성력을 다 쓰고 남는 시간에 이런저런 기본 상식들을 알려주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칼을 뽑지 않아서 다행이다. 만약 뽑았다면 남은 신성력으로는 못 살렸어.'
습관적으로 장침을 꺼내려던 유성의 시선이 부러진 검으로 향했다.
'굳이 칼을 뽑아내고 침으로 치료할 필요가 없구나. 상처를 그대로 틀어막은 채 치료하면 쓸데없는 신성력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손이 베이지 않게 조심하여 검날을 잡은 유성이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검이 성스러운 황금빛으로 빛났다. 상처가 심각해 힘 조절을 할 여력이 없다.
치유 스킬을 발동하자 검에 찔린 장기가 회복되며 검이 서서히 바깥으로 밀려 나왔다.
너무 빠른 속도로 빠져나오면 날카로운 검날에 불필요한 상처가 생길 수 있다.
집중력을 잃지 않은 유성은 신중하게 소년을 치료해 나갔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까?
검이 피부 근처까지 뽑혀 나오자 유성은 치유스킬의 발동을 멈추었다.
'많은 사람이 이 소운이라는 소년의 상처가 중함을 목격했다. 다행히 의방 생활을 하며 외상 환자 처치에 노하우가 쌓였지.'
유성은 능숙하게 봉합 도구를 꺼내 아물지 않은 피부를 꿰메기 시작했다.
방금 검에 찔린 곳이 씻은 듯이 나아 있다면 큰 의심을 살 수 있다. 피부를 봉합해 두면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신비한 현상을 들키지 않을 수 있다.
봉합까지 얼추 끝내고 금창약을 발랐다.
유성은 치료가 너무 일찍 끝난 것 같아 소운이 깨어나길 기다리는 김에 그를 진맥해 보았다.
기껏 치료해 놨는데 다른 지병으로 죽어 버린다면 억울할 테니까.
'응?'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유성은 조금 더 자세히 소운의 몸을 살펴보았고, 곧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단한 근골이다. 비록 잘못 먹어 왜소해 보이지만 뼈가 단단하고 혈맥이 넓게 뚫려 있어 무공을 익히기 좋겠구나. 이런 빈민가에서 척마대주보다 근골이 더 좋아 보이는 거지 소년이라니.'
이런 좋은 신체조건을 타고난 소년이 아무 무공도 익히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우연히 무림인이나 의원이 살피지 않으면 겉으로만 봐서는 근골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거지인 소년은 의원에게 진료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유성이 신기한 듯 소운의 몸을 이곳저곳 만져 보고 있을 때 그가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소운이라고 했지? 정신이 드느냐?"
"윽... 누구십니까?"
유성은 소운에게 그의 상황을 일러 주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백의원님이셨군요. 꼼짝없이 죽은 줄 알았는데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하지만 무림인들과 분쟁은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큭... 나쁜 놈들... 저는 실수로 못 보고 부딪힌 것이지만 그자는 피할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피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미쳤다고 무림인에게 시비를 걸었겠습니까? 그런데 그자가 검을 휘두르고 제게 '너 때문에 내 검이 부러졌다. 재수 없는 자식'이라고..."
씩씩거리던 소운이 갑자기 휘청거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으니 무리하지 말고 이걸로 당분간은 몸에 좋은 것들을 사 먹도록 해라."
돈이 약간 든 전낭을 주자 소운이 펄쩍 뛰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비록 거지지만 다들 저를 예뻐해주셔서 어디 가서 굶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치료까지 해주셨는데 돈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유성은 그보다 몇 살 어린 소운이 예의를 알고 어른스러워 보여 기특했다.
"이것도 치료의 일환이다. 잘 먹어야 상처가 빨리 아무니 받아두거라."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바깥에 널 데려와 준 분께도 꼭 감사하다고 하고. 그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거다."
"네, 의원님."
유성은 아직 몸을 가누기 힘든 소운을 누워 있게 하고 밖으로 나가 다른 환자들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힐끗 돌아본 소운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왜 우느냐?"
소운이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주먹을 꽉 움켜쥔 채였다.
"별거 아닙니다."
"괜찮다. 혹시 어디 불편한 곳이 있다면 말해 보거라."
망설이던 소운이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습니다. 크게 다쳤었는데 뜻밖에 겉만 아프고 안은 멀쩡한 느낌이라 신기할 뿐입니다. 다만 제가 우는 이유는 흑도놈들 때문입니다."
"그래.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림인에게 봉변을 당했으니 당연히 속상할 것이다."
"그런 이유도 있지만 부모님 생각이 나서 그렇습니다. 저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과 비슷하게 죽을 뻔했다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유성은 아까 소운을 업고 온 남자가 털어놓은 말이 떠올랐다.
흑도 무리들에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했던가?
'원래 참견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렇게 훌륭한 무재를 가졌으니 기회는 줘도 괜찮겠지.'
유성도 평범한 현대인이었던 사람으로서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힘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는 흑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꽤 마음에 든 소운이 이렇게 억울하고 분해 죽으려 하는데 스스로 복수할 수 있는 방도 정도는 알려 줘도 되지 않겠는가?
"소운아, 사실 네가 정신을 잃고 있을 때 네 몸을 조금 살펴봤다. 너는 무재가 뛰어나 보이는구나."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네가 무공을 배우게 된다면 스스로 복수할 힘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
깜짝 놀란 소운을 놔두고 유성은 진료실을 나섰다.
***
유성이 생각보다 많이 아끼게 된 신성력과 익히고 있는 의술로 다른 환자들을 진료하고 돌아간 후.
소운을 안고 온 개방의 일결제자는 황당한 요구를 들었다.
"뭐? 갑자기 방주님께 안내해 달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개방의 방주님이 얼마나 바쁜 분이신지 아느냐?"
"형님께는 말씀드려도 되겠죠. 방금 백의원님이 저보고 무재가 뛰어나다고 했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그러니 절 소개해 주십시오. 얼마 전 형님이 그러셨잖아요. 개방 방주님이 무재가 뛰어난 아이를 찾고 있다고."
"그랬지. 그랬는데 네가 거기에 해당했단 말이냐?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하긴 내가 알아볼 방법이 없었지만."
"꼭 부탁드립니다."
"좋다. 백의원님 말씀이신데 믿을 수 있겠지. 대신 몸이 다 나으면 가자꾸나. 멀쩡해 보여도 속이 말이 아닐 거다."
소운은 가슴 부근을 건드려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속은 멀쩡하고 겉만 아픈 것 같은데... 정말 신기한 일이지.'
***
십만 방도를 거느리고 있는 개방 방주 용화신개 정도 되면 수많은 골칫거리가 있는 법이다.
그중 가장 큰 골칫거리는 개방의 후개 자리가 오랫동안 공석이라는 점이다.
'십만 명이 넘는 개방도 중에 쓸 만한 무재를 가진 놈이 어떻게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사실 대부분의 개방도들은 무공을 익히지 못한 일반 거지들이니 그들 모두를 살피지 못했을 뿐이지만 용화신개의 처지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무림맹에 머무르고 있던 용화신개에게 용감하게도 매듭 한 개의 일결제자가 분타주를 통해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취해 왔다.
"의원에게 무재가 뛰어나 보인다는 소리를 들은 녀석을 하나 데려왔답니다."
용화신개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 놈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내 절기를 물려받으려면 웬만한 무재로는 흉내만 내는 것이 고작이다."
"그럼 돌아가라고 할까요?"
"음, 아니다. 혹시 모르니 한번 만나 보자. 그놈들을 데려와라."
용화신개는 소운을 직접 보고 경악했다.
"이 녀석!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난 것이냐! 내가 널 얼마나 찾아다녔는 줄 아느냐!"
마치 잃어버린 아들이라도 만난 듯 크게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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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양의원이 의각 당직을 서는 날.
차의원은 요즘 인맥을 다지겠다며 백호단주 무리의 술자리에 기웃거린다.
태정헌 부군사의 초대로 한번 참여했다가 거기 사람들과 친분을 다질 필요가 있어 보이는지 자주 참석하는 모양이다.
술도 약하면서 부지런한 사람이다.
유성은 저녁에 무림학관으로 향했다.
몇 차례 고민했지만, 역시 직접 살펴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남궁유린을 찾아가는 중이다.
이미 의각 경계 임무 기간이 끝났기에 직접 찾아가지 않으면 그녀를 만나기 힘들다.
“의각주님이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중간에 유성을 알아본 무림학관 생도가 아는체를 해 왔다.
요즘 무림학관 생도들이 종종 다쳐 의각에 찾아오기에 친분이 생긴 자다.
점차 영향력이 넓어지고 있다.
“아, 남궁유린 소저를 찾고 있습니다. 혹시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남궁유린이라면 아까 저 안쪽 정자에 앉아 있는 걸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성은 생도가 알려 준 곳에서, 용이 수놓아진 푸른 무복을 입은 남궁유린을 발견했다.
그녀는 홀로 정자 한쪽에 걸터앉아 보름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운 자태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그녀가 돌아보았다.
눈에 놀라움이 깃든다.
“의각주님?”
“아, 남궁 소저. 말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남궁유린이 엉덩이를 움직여 옆자리를 내주었다.
정자에 앉혀두고 본론만 꺼내기도 애매해 사양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았다.
“...”
엉덩이 부분이 그녀가 남겨둔 체온으로 따뜻하다.
얼마 전 기녀들의 성병을 치료하고 와서 그런지,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려고 한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괜히 시선 둘 곳이 없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남궁유린도 자리를 권하기는 했지만 어색하기는 마찬가지.
막상 유성이 옆에 앉자 괜히 민망하여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나란히 앉아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을 보고 있는 남녀라니.
이상하게 보일 게 아닌가?
그런데 신기하게, 어색할지언정 지금 이 순간이 싫게 느껴지지 않는다.
약간 간질간질 한 것 같기도 하고…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만약 팽지산이었다면…
‘정신 차려, 의각주님을 누구한테 비교하는 거야!
엉뚱한 생각하던 중.
“좋네요.”
“네, 넷? 뭐, 뭐가요?”
유성이 부드러운 목소리와 그 내용에 순간 남궁유린의 사고가 마비되어 멍청하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보름달이요. 왜 저걸 보고 계셨는지 이해되네요.”
“아, 그렇죠? 저도 그래서 자주 봐요. 달빛 아래 있으면 세상 모든 게 잠시 멈춘 것 같아요. 시간의 흐름도 잊고 괴로움도 잊을 수 있죠.”
그녀는 꽤 감수성이 풍부한 소녀 같았다.
어쨌든 유성이 남궁유린을 찾아온 이유가 방금도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괴로움.
그녀는 무언가에 대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전에 대련을 지켜보는 게 괴롭다는 말도 했고.
유성이 오늘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다.
“오늘 제가 찾아온 이유는…”
꿀꺽.
옆에서 남궁유린이 침 삼키는 소리가 유성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풀벌레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조용한 정자라서 그런지 유독 크게 느껴진다.
“남궁 소저를—”
“의각주님!!”
유성의 말은 멀리서 그를 부르는 한 사람의 소리에 끊기고 말았다.
돌아 보니 이미 퇴근했던 장칠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오고 있다.
장칠은 처음 의각으로 뛰어갔다가, 유성이 무림학관 쪽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수소문 끝에 찾아온 것이다.
양의원은 당직을 서는 중이기도 하고, 유성에 비해 실력이 떨어져 이런 상황에서 유성밖에 믿을 사람이 없었다.
그가 남궁유린과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지만 평소와 달리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유성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저희 어머니가 위독하십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유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각 식구의 어머니가 위독하다는데 한가하게 급하지도 않은 남궁유린의 진료를 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장칠의 행실과 관계없이 환자부터 치료해야 한다.
“어떤 상황입니까?”
“어머니가 누워계시다가 갑자기 피를 토하셨습니다!”
몇 가지 병이 의심되지만 직접 보지 않고는 확신할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좋지 못한 징조라는 거다.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저희 집에 계십니다! 바로 의각으로 가서 호위무사를 모셔오겠습니다!”
“그럴 틈이 없으니 빨리 출발합시다.”
유성이 호위도 없이 장칠을 따라 달려갈 기세로 보이자 남궁유린이 벌떡 일어났다.
“제가 호위 해드릴게요.”
검을 드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드는 건 훨씬 낫다.
여기는 무림맹 인근.
삼류 수준의 흑도 정도만 가끔 돌아다니는 이곳에서 유성도 자신을 지킬 힘이 있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빨리 갑시다.”
장칠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 곳은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그가 방문을 열고 뛰어들어갔다.
“어머니!”
마침 주위에 도움받을 사람이 없었는지 집 안에는 장칠의 어머니만 홀로 쓰러져 있었다.
피비린내가 풍겨 왔다.
“제가 보겠습니다!”
유성은 얼른 장칠의 어머니를 살폈다.
안색이 창백하지만 피를 한번 토한 후로 추가적인 토혈은 없는지 조금만 흘러나오고 있다.
진맥해 보았다.
‘맥이 약하지만 다행히 아직 버틸 수 있어.
입으로 피를 토했다는 건 몇 가지를 의심해볼 수 있다.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피를 토했다고 한다.
의심되는 곳이 있다.
유성은 침통을 꺼냈다.
“의각주님! 저희 어머니 사, 살 수 있습니까?”
장칠은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아무리 유성이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장칠이 보기에 어머니의 안색이 너무 창백하고 지금도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이러다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 게 아닌지 두려웠다.
유성은 장침을 꺼내 장칠 어머니의 가슴에 찔러넣으며 대꾸했다.
“확인중이니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눈을 감고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오면서 장칠에게 들은 바로,
기침하며 토한 게 아니고, 평소 그의 어머니는 쉽게 피로해하고 소화불량도 호소했다고 한다.
이는 간쪽의 문제를 의심해볼 수 있다.
제일 먼저 간을 살폈다.
‘역시.
부드럽고 탄력 있는 원래의 간과 달리 울퉁불퉁하고 단단해 보이는 간.
간경화 증상이다.
간이 굳어 피가 그쪽을 통과하지 못하니, 식도쪽으로 몰려 혈관이 터져 버린 거다.
평범한 의원은 외과적인 시술을 하기 어려우니 이대로 환자를 놓쳤겠지만, 유성에게는 치유 스킬이 있다.
‘일단 급한 혈관부터.
식도쪽을 타고 주욱 살펴보자 한 가닥 혈관이 터져 있다.
다행히 터진 정도가 심하지 않았다.
물론 이대로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방치하면 사망하고 말겠지만,
장칠이 유성을 불러오는 동안 그의 어머니가 버틸 수 있었던 건 혈관이 작게 터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교하게 신성력을 컨트롤했다.
[치유]
혈관이 곧바로 아물며 새어 나오던 피가 멎는다.
“어? 의각주님! 어머님 입에서 피가 조금 덜 나는 거 같은데요? 제가 잘못 본겁니까?!”
장칠이 놀라 소리쳤다.
그가 눈치챌 만큼 효과는 즉각적이다.
더 이상 피가 새어 나오지 않게 되었지만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다시 터질 수 있다.
유성은 대꾸하지 않고 이번에는 굳어 있는 간을 향해 치유 스킬을 사용했다.
질병과 상처에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는 치유 스킬이 간에 퍼지자, 굳어 있던 간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게임으로 접할 때는 자세히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아마 치유 스킬이 작용하는 건 세포나 그런 것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닌가 싶다.
병에 걸려 상태가 악화된 부위를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주는 효과.
신기하게 노화에는 효과가 없었지만, 병에 걸린 부위의 정상화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게 아닐까, 유성은 생각했다.
머지않아 다시 말랑말랑하고 탄력 있는 간의 모습이 돌아왔다.
약초꾼 초산의 일로, 항상 신성력을 어느 정도 남겨두고 있어 다행이다.
유성은 그 후로도 정밀하게 몸 이곳저곳 살펴 안 좋은 장기를 치료 후, 장침을 뽑았다.
“어, 어떻습니까? 치료할 수 있을까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칠에게 씨익 웃어 주었다.
“치료 끝났습니다.”
“네에?”
“으음…”
마침 장칠의 어머니가 신음성을 흘리며 깨어났다.
“어머니!!”
장칠이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와 부둥켜 안는다.
오늘도 사람을 살렸다.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옆에서 소매로 눈가를 찍는 남궁유린이 보인다.
고개를 돌려보자 그녀가 민망한지 얼굴을 붉혔다.
“감동적이어서요.”
“...”
역시 남궁유린은 감수성이 풍부하다.
공감 능력이 좋거나.
잠시 후, 진정된 장칠이 넙죽 큰절을 올렸다.
“의각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평생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사과하는 이유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신성력이 차오르며 그의 진심이 전해진다.
“같은 식구끼리 도와야지요. 그런데 혹시 어머님 눈이…”
장칠 어머니는 눈에 제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았고, 잘 안 보이는지 옆을 더듬기도 했다.
고맙다며 무언가를 찾아 유성에게 건네주려는데 목표물을 한 번에 찾지 못했다.
자세히 보니 눈동자 색도 탁하고, 아무래도 눈이 불편해 보인다.
“아, 몇 년 전에 양의원님이 봐주셨는데 노안이라서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의선이나 양의원이라고 해도 현대에 알려진 질병까지 알 수는 없다.
이 시대에는 노인에게 나타나면 늙어서 그렇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정연의 치매도 그런 경우였고.
이번에는 장칠의 어머니에게 직접 물었다.
“어머님, 혹시 앞이 전혀 안 보이시는 겁니까?”
“아이고, 전혀는 아니예요. 안개 낀 것처럼 흐릿하긴 한데 앞에 뭐가 있다 정도는 대충 알 수 있어요.”
몇가지 질문 끝에, 그녀는 희미한 시력에 의지해 간신히 사물의 존재를 인지하는 수준이었다.
노안으로 시력이 나빠질 수는 있어도 앞이 거의 안 보이는 정도까지 가던가?
유성이 알기로 그렇지는 않다.
‘혹시 백내장 같은 거 아닐까?
백내장은 노화로 인한 노안과 달리 질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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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이 어머니의 눈에 대해 물은 후 고민에 빠지자 장칠은 불안했다.
“의각주님, 혹시 무슨 문제 있습니까? 호, 혹시 머지 않아 어머님이…”
차마 입으로 내뱉지 못한 말.
‘눈이 완전히 멀어 버리게 되시는 건가요?
어머니의 시력이 완전히 멀어 버리면 장칠은 의각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모셔야 할지도 모른다.
모시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언젠가 그렇게 될 거라고 각오도 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안 된다.
종학진이 내기판을 제안 해도 장칠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온갖 유혹을 이겨 내고 열심히 돈을 모았지만.
‘아직 모자라. 몇 년밖에 못 버텨.
하지만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온 세상이 어둠에 물들어 혼자 방 밖도 나가기 힘든 홀어머니는 도대체 누가 모신단 말인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동안 함부로 입을 놀려 하늘의 노여움을 산 걸까?
선뜻 달려와 어머니의 목숨까지 구해주신 의각주님에 대해 함부로 헛소문을 퍼뜨렸던 과거가 미치도록 후회되었다.
그가 혼자 북치고 장구치며 속이 시꺼멓게 죽어갈 무렵.
드디어 생각을 끝낸 유성의 입이 열렸다.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가능성을 봐서 그렇습니다.”
“가능성이요?”
유성은 불안한지 장칠의 팔을 붙들고 있는 그의 어머니에게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님, 제가 눈을 조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제 눈을요?”
장칠은 불안한지 유성의 침통을 힐끗 바라보았다.
시침 한 번으로 거의 모든 병을 치료한다고 일침신의라는 명성까지 얻은 유성이다.
그런데 시침도 시침 나름이지, 괜히 상태를 살핀다고 눈을 찔러 악화시켜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의각주님, 혹시 어머니 눈에도 침을 놓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침 놓으려는 건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그렇다면야…”
“그럼 좀 보겠습니다.”
장칠이 물러서고, 유성은 그의 어머니의 눈에 조용히 손을 덮었다.
‘갑자기 눈은 왜 살펴보신다는 걸까?
장칠의 어머니는 평소 아들로부터 의각주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모시는 분이 얼마나 대단한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어왔음에도 그녀는 유성이 눈 치료를 시도 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의선의 제자라는 양의원에게 어렵사리 진료 받았을 때,
늙은 사람들 중 종종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들었고, 여태 그렇게 알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편히 계시면 됩니다.”
유성의 손에 덮여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작은 등불이 새어 들어왔다.
새어 들어온 빛이 번져 마치 안개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
흐릿한 안개가 점차 걷히기 시작한다.
유성의 손과 눈 사이의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선명해진다.
‘착각은 아닐까?
눈이 손에 뒤덮여 있어 착각한 걸 거다.
어떻게 멀어 버린 눈을 고친단 말인가?
“...”
그러나 유성이 조심스럽게 손을 떼어내고, 어둠에 잠식된 시야가 서서히 돌아왔을 때.
“아아…!”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몇 년 사이 이마에 주름이 늘어난 아들의 얼굴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던 탓이다.
아들은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서서히 사라져가는 시력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 써 왔고,
만약 완전히 눈이 멀어 버리게 된다면 아들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기 위한 결심까지 서 있었는데…
“어머니?”
멀쩡해진 눈으로 다시 한번 아들의 얼굴을 생생히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장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 때문에 정말 고생 많았다…”
그리고 퍼뜩 정신을 차린 듯 유성을 향해 몇 번이고 고개 숙였다.
“아이고, 의각주님! 이 노인네의 눈을 고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무슨 일인지 잘 파악 되지 않던 장칠은 그제야 눈치챘다.
비록 눈물을 흘리고 계시지만, 어머니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맑고 또렷하게 초점이 잡혀 있다는 걸.
“의, 의각주님, 저, 정말 저희 어머니의 눈이 고쳐진겁니까?”
“이놈아! 아주 잘 보인다, 잘 보여! 아이고, 의각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빙그레 웃는 유성을 향해 장칠은 다시 큰절을 올렸다.
수차례나.
장칠의 어머니 역시 늙은 몸으로 아들과 같이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유성과 남궁유린이 황급히 그만하시라고 말려야 할 정도로 두 모자는 계속 감사함을 표했다.
***
한바탕 큰절 세례가 끝난 후.
장칠과 어머니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원래 얼굴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
그리고 남궁유린 역시 커다란 눈에 한가득 물기를 머금은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얼마나 찍어 댔는지, 파란 소매 한쪽이 흥건히 젖어 있다.
“...”
괜히 혼자 냉혈한이 된 것 같아 머쓱한 유성의 오른손을 장칠의 어머니가 끌어 잡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 고마운가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다른 손으로 남궁유린의 왼손도 끌어 잡았다.
“대단한 가문의 무사님이시라고요?”
“남궁유린이에요, 어머님.”
“이름도 참 예뻐요. 듣던 대로 얼굴도 정말 곱고.”
“감사해요.”
예쁘다는 칭찬은 어떤 여자라도 기분 좋을 거다.
남궁유린이 슬쩍 웃었다.
이제 장칠 어머니의 시선이 유성에게 향했다.
“의각주님도 이렇게 미남이신지 몰랐어요.”
“큼.”
민망해 헛기침 하면서도 유성은 슬쩍 장칠을 째려보았다.
남궁유린의 미모는 칭찬했으면서 유성에 대해서는 별말 안한 모양이다.
나름 열심히 깎은 얼굴인데 서운하게.
그런데 장칠의 표정이 이상하다.
왠지 안절부절못 하는 것 같다.
“어, 어머니—”
“두 분, 굴하지 말고 예쁜 사랑 하세요. 의각주님 실력이 이렇게 출중하신데, 무사님이 열심히 가문 설득하시면 두 분 꼭 혼인 할 수 있을 거예요.”
유성과 남궁유린의 손을 겹쳐주며, 어머니가 한 말에 장칠이 양 팔을 휘적이며 괴성을 내질렀다.
“으아아! 죄송합니다아아아!!”
장칠이 어머니에게 뭔가 또 헛소리를 해 놓은 모양이다.
유성이 어처구니없어 남궁유린에게 고개 돌렸다.
그녀도 마찬가지 일 테니까.
그런데.
남궁유린과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그건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설마 장칠, 너…?”
당황한 장칠의 어머니가 손을 놓길래 유성도 남궁유린과 강제로 포개져 있는 손을 빼냈다.
유성의 손을 놓친 남궁유린이 무의식에 허공을 움켜쥐다가 슬며시 손을 거둬들였다.
***
막 회복하여 쉬어야 하는 장칠의 어머니에게 인사하고, 유성과 남궁유린은 밖으로 나섰다.
장칠이 쪼르르 따라와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의각주님! 남궁유린님!”
미안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연신 사과하는 그를 보며 유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그러지 마십시오. 남궁 소저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어머님이 적적해 하셔서 이것저것 이야기해드린다는 게 그만… 저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겁니다.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맹세까지야… 아무튼 믿어보겠습니다.”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어머니 치료해주신 것도요. 아 참, 그리고 이거…”
장칠이 품에서 전낭을 하나 꺼냈다.
“이걸 왜…?”
“치료비 받으셔야지요.”
억지로 장칠이 쥐어 준 주머니가 살짝 열려 있었는데, 안에는 은자들이 꽤 많았다.
비록 유성이 해준 일에 비하면 많지 않을지라도 장칠에게는 분명 큰돈일 텐데.
“너무 많습니다. 같은 식구 어머님인데요.”
“아닙니다. 일 그만두고 어머니 모셔야 하면 쓰려고 모아둔 돈입니다. 다 드려도 아깝지 않지만 생활비만 제했습니다.”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습니다.”
실랑이 끝에 유성은 약간만 챙기고 장칠에게 모두 돌려주었다.
가볍게만 봤던 장칠이 건실한 사람이어서 의외였을 뿐.
무림맹으로 복귀하는데, 남궁유린의 표정이 밝아 보인다.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이 생기가 돌아 보는 사람마저 기분 좋아진다.
‘지금 진료 이야기 꺼내기는 적합하지 않겠네. 진짜 그쪽이면 당장 치료해주지도 못 하는데.
다시 기회를 보기로 한 유성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원래 눈물이 많으십니까?”
“아… 조금요. 그리고 아까 제 오라버니 생각도 나서요.”
“...”
남궁유현도 눈을 다쳤다.
장난 좀 치려다 괜히 남궁유린의 기분만 망쳐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는데.
“그래서, 지금 기분 좋아요. 의각주님이 오라버니 눈 치료해주실 거라 믿으니까요.”
보는 사람조차 기분 좋아지는 밝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
이튿날.
장칠은 여러 군것질거리를 바리바리 싸와서 유성에게 건넸다.
“저희 어머니가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하고, 죄송했습니다!”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잘 먹겠다고 전해드리십시오.”
“네, 의각주님!”
장칠은 뒷걸음질 쳐서 공손하게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친한 하인 하나가 손짓해 그를 불렀다.
“장칠, 잠깐 이리 와봐.”
“왜?”
구석진 곳에서 하인이 장칠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어제 누가 너 무림학관에서 봤다던데 의각주님이랑 남궁유린이랑 같이 있었다며? 둘이 분위기 어떻든? 진짜 막 분홍빛이었어?”
친한 하인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장칠이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맛깔나게 들려주리라.
“뭔 개소리야? 그런 거 하나도 없었으니까 헛소리 할 거면 가서 약재나 들여놔!”
“아니, 갑자기 왜… 어제까지만 해도 너도—”
“쓰읍! 한 번만 그딴소리 하면 너라도 가만 안둔다?”
장칠이 정색하며 가 버리자 하인은 벙쪘다.
‘이런 이야기는 지가 제일 신나 했으면서 왜 저래? 뭘 잘못 처먹었나?
장칠은 새롭게 태어났다.
그는 의각의 소식은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단속하고, 외부 소식들을 유성에게 가감 없이 전하는 충실한 하인이 되었다.
***
어느 날, 장칠이 유성에게 소식을 하나 전했다.
"의각주님, 검왕이 남궁유린님을 찾아와 가문으로 데려가려고 한답니다."
"그래요?"
"네, 왠지 알려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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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휘성의 패자이자 오대세가 중 첫 손가락에 꼽히는 무림세가.
수많은 상인들과 중소 문파들이 줄을 대기 위해 찾아오는 곳.
겉으로 보기에, 안휘성에서 만큼은 황제 부럽지 않은 위세를 떨치는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환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을 맞이했다.
가주는 어른에게 혼나는 어린아이처럼 얌전히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앞에 앉은 노인은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로운 기도를 가진 자였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유린이 복귀하지 않겠다고 했다지?”
“그렇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아버지.”
노인은 바로 가주의 아버지이자 당대의 검왕 남궁진이다.
무표정한 검왕이 차를 들이켰다.
가주는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무림학관에 가 있는 남궁유린이 복귀하라는 말에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가주는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 숙였다.
대대로 검왕을 배출해 온 남궁세가.
가주는 벌모세수부터 시작해 온갖 지원을 받았음에도 아버지처럼 대단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항상 죄송한 마음을 품어 왔던 가주는 아들 남궁유현이 태어나 한시름 놓았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무재를 보인 아들이 순조롭게 성장하며, 검왕이 많이 유해졌던 탓이다.
남궁유현은 바짝 쫓아오는 하북팽가를 뿌리치고 남궁세가가 여전히 최고의 무가로 남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였다.
오대세가 중 다섯 번째만 필사적인 게 아니다.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
그런데.
아들 남궁유현마저 그런 꼴이 되어 집 안에 틀어박혔다.
이제 믿을 구석이라고는 딸 남궁유린 뿐인 상황에서, 딸이 갑자기 말을 안듣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사람을 보내 데려오겠습니다.”
가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자,
검왕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됐다. 내가 직접 무림학관에 들려 데려오겠다.”
가주는 입을 다물었다.
검왕이 한번 선언하면 그의 말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
남궁유현을 최고로 키워내기 위해 가주 자리를 넘겨 주고 태상가주의 위치로 물러났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남궁세가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
검왕은 호위를 꾸리겠다는 가주의 말을 물리치고 홀로 남궁세가를 떠났다.
얼마 전 도왕이 정체불명의 무리에게 습격 당했다고 전해 들었으나, 검왕은 그런 도왕을 비웃었다.
그는 자기 무위에 큰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낙양으로 향하며, 여러 소문을 들었다.
최근 큰 명성을 얻은 신의가 눈이 먼 사람을 치료해냈다던가, 하는 소문.
손자 남궁유현이 떠오르며 귀가 솔깃했지만, 내막을 전해 들은 그는 관심을 접었다.
이미 눈에 상처를 입은 봉사 하나가 신의를 찾아간 적이 있단다.
그리고 그자는 여전히 봉사다.
‘단순히 시력이 좀 나빠진 자를 고쳤을 뿐, 유현이처럼 눈에 검상을 입은 사람까지 치료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검왕은 자기 판단을 굳게 믿었다.
그리고.
손녀 남궁유린 역시 그의 지도 아래 있을 때 가장 큰 성취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무림학관 생도들이 술렁거렸다.
화경의 고수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검왕을 실제로 보게 되었으니, 무림인인 그들은 동경의 눈빛을 보냈다.
남궁유린과 검왕의 만남 역시 주목을 받았다.
‘과연 검왕이 왜 남궁유린을 찾아온 걸까?
검왕은 남들이 지켜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남궁유린과 대화를 나누었다.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에 뵈어요, 할아버지.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널 데리러 왔다.”
“...”
검왕이 탐색하듯 남궁유린을 살폈다.
여전한 기도와 자세.
그렇다고 손에 굳은살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편지에 쓴 것과 달리 전혀 성취가 없는 것 같은데 어찌 된 일이냐?”
“그건...”
남궁유린은 무림학관을 그만두고 남궁세가로 복귀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오라버니가 건재할 때는 가기 싫다고 해도 무림학관에 가라더니, 이제 와서 오라버니가 다치자 그녀에게 복귀를 종용했다.
가문으로 돌아가면 후계 수업을 받으며 검왕에게 직접 무공을 배우게 될 거다.
남궁유린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고민하다가 남궁세가로 전서구를 띄웠다.
-여기서 수련에 성취가 있어서 아직은 돌아갈 수 없어요. 때가 되면 돌아갈 테니 기다려주세요.
원치 않아 오게 된 무림학관이었다.
하지만 이곳으로 와서 좋은 점도 있었다.
그건 바로, 어릴 적 친하게 지내던 시녀를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항상 옆에 두고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들어왔었는데, 막상 떨어져 보자 약간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가문으로 돌아가면 다시 그녀를 마주해야 한다.
아직 남궁유린은 스스로 극복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더 지켜보고 싶은 사람도 있어.
생각을 끝내고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가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엄한 할아버지의 말을 거역해 본 적 없지만, 남궁유린은 문득 유성이 떠올랐다.
단전을 잃은 몸으로 도왕 앞에서 그의 핏줄 팽지산을 두들겨 패던 패기!
하물며 남궁유린 자신이 핏줄 앞에서 못할 소리가 뭐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불쑥 용기가 솟아올랐다.
감히 아버지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검왕과 빤히 시선을 맞췄다.
“그건 죄송해요. 하지만 전 아직 돌아가지 않겠어요.”
“...”
검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림학관 생도들이 이쪽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다.
절대 거절당할 리 없을 거로 생각해 당당하게 이야기 꺼냈지만,
소극적일지언정 자신을 거역해 본 적 없는 손녀가 처음으로 거역한 거다.
단번에 이야기가 끝날 것 같지 않다.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꾸나.”
장소를 옮기면서, 검왕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손녀에게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 유약해 걱정했더니, 어느새 내 앞에서 자기주장도 할 줄 알게 되었구나. 긍정적인 변화다.
가문의 중심으로, 일부러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아들도, 손자도 자기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남궁유린도 마찬가지였는데, 무공 실력은 정체되어 있으나 내면의 성장이 있었던 듯하다.
언젠가 가주가 되어야 함에도 유약한 성정이 아쉬웠는데, 그 부분이 채워지고 있는 모습이 기껍다.
접객당 한 곳에 자리 잡고 검왕이 물었다.
“돌아가지 않겠다는 건 그 시녀 때문에 그러느냐?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셈이냐?”
“물론 그 이유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에요. 지금은 밝힐 수 없지만 절 믿어 주세요.”
의각주님이 오라버니의 눈을 고쳐주신다고 했어요.
물론 이건 유성과 비밀로 한 약속이라 공개하지 않았다.
검왕은 억지로 끌고갈 수 있었지만, 처음으로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밝힌 남궁유린을 존중하기로 했다.
어차피 목적도 무공을 전수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좋다. 정 그렇다면 당분간 여기 머물면서 제왕검형을 가르쳐 줄 테니 이건 열심히 수련하겠다고 약속해라. 그럼 당분간 복귀하라고 하지 않겠다.”
남궁세가의 후계자에게만 전수되는 제왕검형.
남궁유현이 익혔던 절기가 이번에는 남궁유린에게 차례가 돌아왔다.
***
유성은 환자들을 보면서 자꾸 남궁유린이 떠올랐다.
‘검왕이 와서 데려가려고 한다라…’
사정도 모르는 남궁세가 내부의 일이다.
장칠의 짐작과 달리 둘은 남녀 간의 사이가 아니기에, 유성이 끼어들 여지는 단 하나도 없다.
단지, 유성은 떠나기 전 그녀를 한번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진료도 못 봤으니까.
그런 핑계를 대며, 진료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오늘따라 환자가 많군.
의각의 의원이 세 명으로 늘어나 조금 일찍 끝나는 날도 많았으나 오늘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아직 환자가 많이 남았습니까?”
진료실로 들어온 장칠에게 물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장칠은 유성에게 양해를 구하고 종학진을 찾아갔다.
아직 환자들이 열 명 이상 남아 있다.
“형님, 위중한 환자 있습니까?”
위중한 환자는 유성에게 가야 하는 수준의 환자를 뜻한다.
종학진이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아니? 왜?”
“그럼 양의원님이랑 차의원님한테 좀 몰아주실 수 있어요?”
“아, 의각주님 일 있으시대?”
“의각주님이 그런 말씀 하신적은 없고요. 그냥 제가 보기에 좀 피곤해 보이셔서요.”
“아이쿠, 그럼 안 되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의각주님 환자는 더 없다고 전해드려.”
“고맙습니다.”
오늘은 차의원이 당직.
장칠의 말을 듣고 짐을 챙겨 진료실을 나선 유성은 아직 환자가 꽤 남아 있는 걸 보고 그의 배려를 눈치챘다.
일반 환자들을 치료해 신성력을 쌓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오랫동안 남궁유린을 더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유성을 무림학관 쪽으로 이끌었다.
“의각주님, 남궁유린님은 지금 무림학관 네 번째 접객당에 있답니다.”
슬쩍 장칠이 전해준 말을 듣고서.
잠시 후.
유성이 네 번째 접객당 앞에 도착했을 때는 접객당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검왕과 함께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안에는 남궁유린 혼자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그녀의 초점 없는 눈이, 유성을 발견하고 초점을 되찾았다.
“의각주님?”
벌떡 일어난 그녀가 다가왔다.
“아직 계셨군요. 전에 못한 말을 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지, 지금요? 이, 일단 들어오세요.”
남궁유린이 왠지 허둥대며 유성을 접객당으로 이끌었다.
누가 주시하고 있지 않은지 주위도 살피고 문도 꼭 닫았다.
“여기 앉으세요.”
유성이 그녀가 권한 자리에 앉자, 남궁유린이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옆자리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손이 가지런하다.
꿀꺽.
남궁유린이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전에도 그러더니, 인후 쪽에 무슨 문제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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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객당은 손님을 맞이하는 곳.
원래 남궁유린이 할아버지인 검왕을 맞이한 장소인데, 그가 보이지 않아 행방을 먼저 물었다.
진료중에 들어오면 괜히 번거로울 테니까.
“여기서 당분간 머무르시기로 하셔서 무림맹에 인사하러 가셨어요.”
다행이다.
“그럼 당장 가문으로 돌아가시지는 않는 겁니까?”
남궁유린은 기뻐보이는 유성을 보자 슬쩍 웃음이 나왔다.
그녀도 기뻤으니까.
시녀를 피할 수 있어서인지, 다른 이유인지는 그녀도 확신하지 못했지만.
“네. 당분간 돌아가지 않아도 돼요. 대신 할아버지께 무공을 배우기로 했지만요.”
“검왕께서 직접 무공을 가르쳐 주신다구요?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검왕에게 직접 무공을 배우는 건 무림인에게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었나?
축하를 건넸음에도 왠지 석연치 않아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유성은 얼른 본론으로 넘어갔다.
“아, 제가 찾아온 이유는—”
“자, 잠시만요!”
흡- 후.
흡- 후.
남궁유린은 심호흡했다.
전에 보름달 아래 정자에 나란히 앉아, 유성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마저 잇지 못한 게 떠오른다.
‘분위기도 그렇고, 분명 고백하려고 하셨을 거야.
장칠이 달려오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이 돌아가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성이 급하게 달려온 듯하다.
‘지금 안 돌아간다고 말씀 드렸는데 의각주님은 왜 이렇게 급하실까?
아직 어떤 답변을 돌려줘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분명 유성에게 호감이 있지만 고백을 받아드릴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모르겠어. 그냥 마음이 이끄는 대로 답하자.
결심한 남궁유린이 입을 열었다.
“이제 말씀해주셔도 돼요. 준비됐어요.”
꿀꺽.
다시 한번 마른침이 넘어간다.
“아, 네. 제가 소저의 몸을 좀 살펴보고 싶습니다.”
“뭐, 뭐라구요? 버, 벌써요?”
“벌써라뇨? 처음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처음이죠! 의각주님, 그렇게 안봤는데 무례하시네요!”
남궁유린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 질렀다.
듣자 하니 못 하는 소리가 없다.
아무리 얼굴 좀 잘생겼기로서 어떻게 처녀에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동안 조금씩 쌓아 가던 호감도가 수직 하락했다.
오라버니의 눈 치료에 관한 것만 아니면 이 음란한 사람과는 아무 말도 섞지 않을 테다, 라고 다짐한 순간.
“진료 받는 걸 그렇게 싫어하실 줄 몰랐습니다. 함부로 요청해서 죄송합니다.”
“...네?”
“네?”
유성이 ‘몸을 살펴보겠다’라고 하는 건 환자에게 으레 사용하는 말이다.
의원이 환자에게 사용하기에 전혀 이상하지 않은 말.
본래 머리만 살펴볼 생각이었으나, 인후 또는 다른 쪽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몸 전체를 신성력으로 살펴볼 생각이었던 것.
뭔가 병이 있다면 조기에 발견하는 게 좋으니까.
그런데.
남궁유린의 얼굴이 급속도로 붉게 물들었다.
홍당무?
그 정도가 아니다.
톡 건드리면 터져 버릴 듯 새빨갛게 익은 홍시 같았다.
분노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뭘 했다고… 트라우마 같은 게 아니라 설마 팽지산처럼 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유성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대화를 나눠봤자 분노만 더 유발할 뿐이다.
“그…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접객당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슥.
유성의 소매가 붙잡혔다.
이어, 모기만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진료… 해주셔도 돼요…”
사람의 태도가 이렇게 순식간에 뒤바뀌어도 되는 걸까?
‘팽지산은 일관적이기라도 했지.
심각한 오해가 생길 뻔했지만, 다행히 그녀의 다음 말에 풀렸다.
“아까는 제가 잘못 들어서 착각했어요. 소리 질러서 죄송해요…”
“아, 그랬군요. 그럼 진료 해 보겠습니다. 몇 가지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거든요.”
그녀가 무슨 착각을 했는지는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고, 유성은 다시 자리에 앉아 남궁유린의 손목을 잡았다.
신성력을 흘려 넣어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역시 남궁세가의 직계라는 건가?'
팽지산의 근골까지 제대로 살펴본 적은 없으나, 남궁유린은 다른 무림학관 생도들보다 월등한 근골을 가지고 있었다.
‘하긴, 그러니까 검왕이 직접 무공을 전수하겠지.
납득한 유성은 그녀의 몸에 특별한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 신성력을 뇌쪽으로 올려보냈다.
그녀를 진료하고 싶었던 진짜 이유.
대련을 지켜보는 게 괴롭다는 말.
어떤 트라우마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마침내 신성력이 뇌까지 도달했을 때,
‘역시…’
유성은 옅은 회색 아지랑이를 발견했다.
팽지산과 같은 계열의 정신병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 하지만,
회색 아지랑이가 옅은 걸 보면 트라우마로 인한 현상일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걸 수도 있고.
다만, 지금은 치료할 방법이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남궁유린이 유성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음...”
어떻게 말해야 할까.
당장 치료할 수 있다면 흔쾌히 공개하겠지만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게 그녀에게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어 망설였다.
그리고 그건 진료받는 당사자의 처지에서는 꽤 공포스러운 일이다.
다 죽어 가는 사람도 살려내던 유성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문제라니!
최악의 가정마저 하게 만들었다.
“호, 혹시 저 죽나요?”
“그럴 리가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심각한 문제라도 있나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이 정도로 물어보는데 더 이상 숨기기는 힘들다.
“...사실 발견한 게 있습니다만, 제가 지금은 별로 도움이 못 될 거 같아 망설여지네요. 제 이야기를 들으면 괴로울 수 있으니 소저가 이야기 들을지 결정해주셔야겠습니다.”
평소였다면 남궁유린은 듣지 않는 걸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자기 몸에 관한 이야기지만 유성이 들려주기를 꺼려하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문제가 커질까 회피하기 바빴던 성격 탓이다.
그런데 조금 전 있었던 경험.
검왕에게 당당하게 의사를 전달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진 일은 자신도 믿기 힘든 성과였다.
제왕검형을 배우는 게 썩 달갑지는 않지만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로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부딪혀 보기로.
“들을게요. 말씀해주셔도 돼요.”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쩌면 소저가 이미 잘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만...”
“...”
“제가 추측하기로, 소저는 심상을 앓고 계신 것 같습니다.”
심상.
마음의 상처.
그리고 유성이 전달하고자 하는 심상의 의미는 정신질환, 그중에서도 트라우마다.
“역시 그런가요?”
남궁유린의 표정이 어둡다.
“알고 계셨군요.”
“네. 혹시 어떤 것 때문인지도 짐작 하시나요?”
“지난번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대련과 관계된 게 아닐까 합니다만.”
남궁유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기억하고 계시네요. 음… 제가 자세히 이야기해드리는 게 도움이 되나요?”
마음의 병을 얻게 된 계기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을지 모른다.
“치료에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좋아요. 그때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끔찍하긴 하지만... 말씀 드릴게요.”
‘이번에도 한 발 나아가 보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가 열 살 무렵.
오라버니 남궁유현이 가문의 일류 무사와 펼치는 진검 대련을 지켜보았다.
평소에도 자주 대련을 지켜보고는 했지만, 그날은 유독 남궁유린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일류 무사는 오라버니의 좋은 대련 상대였다.
오라버니는 대연검법을 거쳐, 직계에게 전수되는 창궁무애검법을 펼치고 있었다.
끝없는 푸른 하늘을 거리낌 없이 누비는 한 자루의 검.
세상의 제약을 넘어 자유롭게 펼쳐지는 검로를 보며 남궁유린이 느끼는 것은 경외였다.
검로가 뇌리에 각인되는 것 같았다.
‘오라버니는 정말 대단해. 나도 오라버니처럼 멋진 고수가 되어야지. 언젠가 창궁무애검법도 배울 거야.
그 무렵의 남궁유린은 무공을 수련하는 것이 즐거웠다.
수련도 자발적으로 열심히 했다.
그녀는 오라버니의 모습을 눈에 담다가 전담 시녀 겸 호위무사인 주연과 함께 다른 연무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언니, 우리도 대련하자!”
남궁유린보다 열 살 많은 시녀는 이류 무사였다.
본격적으로 무공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남궁유린을 상대하기에 충분한 실력자다.
남궁유린은 그날따라 오라버니를 따라 진검을 들고 싶어졌다.
“언니, 진검으로 대련 해도 돼?”
“아가씨,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어요.”
“언니는 고수잖아. 여태 한 번도 못 이겼는데 뭘.”
시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허락했다.
아직 수준 차이가 많이 나서, 자신만 조심하면 다칠 일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요. 대신 제대로 못 다룰 거 같으면 목검을 드셔야 해요.”
“응, 좋아!”
남궁유린은 어릴 적 오라버니가 쓰던 진검을 들었다.
목검보다 묵직했지만, 특수 제작되어 휘두를 정도는 됐다.
태어나 처음으로 진검을 들어 보았다.
‘목검보다 훨씬 느낌이 좋아.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아.
대련이 시작되었다.
평소처럼 대연검법으로 공격을 시작한 남궁유린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검이 답답해하는 거 같은데.
주연과 몇 차례 초식을 주고받았으나 답답함은 가시지 않고 더 커지기만 했다
‘아무래도 이게 아닌 것 같아.
그동안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던 대연검법의 검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궁유린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다음 공격 때 대연검법 초식의 틀을 깨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검을 휘둘러보았다.
무의식중에 펼친 초식은 남궁유현이 펼쳤던 창궁무애검법의 그것과 꼭 닮아 있었고,
주연이 다급하게 펼친 방어 초식을 뚫어내고 그녀의 얼굴을 깊게 베어 버렸다.
촤악—!!
피가 뿜어져 나왔다.
세상이 멈춘 듯했다.
좋아하는 남자와 곧 혼인할 거라고 들떠 있던 주연이 쓰러지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남궁유린의 손이 덜덜 떨렸다.
***
유성은 크게 당황했다.
'아니, 이 정도 이야기일 줄은 몰랐는데!'
눈앞에서 남궁유린이 또 울음을 터뜨렸다.
벌써 몇 번째 보는 눈물인지.
이번에는 자신이 울린 것 같아 큰 죄책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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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유린은 가늘게 어깨를 떨며 하염없이 눈물 흘렸다.
유성은 품속에 가지고 다니던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흑, 가, 감사해요.”
코 훌쩍이는 소리가 조금 귀엽게 느껴진다.
남궁유린이 고개를 돌리고 손수건으로 연신 눈가를 찍어댔다.
‘내 생각보다 훨씬 무거운 과거사인데…’
유성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기에 그녀가 진정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포기했다.
말 한마디로 위로하기란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이다.
몇 번 겪어보지 못했지만, 감수성 풍부하고 공감능력이 뛰어난 그녀가 아닌가?
그녀의 손으로 친한 시녀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건 커다란 상처였을 거다.
지금처럼 성인도 아니고 어린아이였다면 더 그렇고.
잠시 후, 유성의 손수건이 흠뻑 젖었을 무렵, 그녀가 간신히 울음을 멈추었다.
눈이 빨갛다.
“이거 깨끗이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굳이 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나저나, 힘드셨겠군요. 고인의 일은 안타깝습니다.”
“언니 안 죽었거든요?”
남궁유린이 째려보았다.
“앗, 죄송합니다.”
얼굴이 깊숙이 베였다길래 죽은 줄.
살아 있는 사람을 고인 취급했으니 남궁유린의 눈빛이 고울리 없다.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천만다행입니다. 그럼 혹시 어떤 상태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녀가 끔찍한 기억을 떠올린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굴이 길게 베이긴 했지만 목숨은 건졌어요. 대신 상처를 좀… 많이 꿰매야 했어요. 흉이 심하게 남았죠. 결국 언니는 파혼당했어요. 다 저 때문이예요.”
서로 얼굴 안 보고 혼인하는 게 아니면,
이 시대라고 여자의 미모가 중요하지 않을 리 없다.
조금 안예쁜 건 괜찮아도 흉측한 흉이 남아 있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단순히 상대를 다치게 했다는 수준이 아니라, 혼인을 앞두고 벌어진 사고로 한 여자의 인생을 망쳤다고 자책하는 듯하다.
남궁유현의 대련을 지켜본 게 계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대련 중 일어난 사고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그런 점들이 대련에 대한 괴로운 기억을 가지게 만들었을 테고.
“그래서 대련을 지켜보는 것조차 괴로우신 거군요.”
“네…”
마음이 여린 남궁유린이 큰 충격을 받았을 만 하다.
유성이 트라우마의 치료를 목적으로 과거사를 들었지만, 지금은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하는데 까지는 해보자.
“시녀분은 남궁 소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유성이 생각하기에 그건 사고다.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용서해준다면 남궁유린의 마음의 짐이 훨씬 가벼워지지 않을까?
그러나.
남궁유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는 그날의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더라구요.”
‘첩첩산중이네.
큰 충격을 받으면 단기 기억이 날아가는 경우도 있다.
하필 그런 경우에 걸린 모양이다.
그날의 기억이 없다면 진심으로 용서 받지도 못하게 되었을 테고.
결국,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가는 동안 남궁유린의 트라우마가 깊어진 모양이다.
“안타깝네요. 그런데 시녀분은 가문 내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까?”
대우받고 있다면 훨씬 나을 텐데, 남궁유린은 이번에도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정반대예요. 언니는 따가운 눈총 받으며 지내요.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주연 언니가 방심해서 저에게 당한 거라고 생각하시거든요. 오히려 언니의 방심 때문에 제가 이렇게 됐다고 여기시죠.”
“어떻게 그런 생각하실수가 있습니까?”
“제 말을 믿어 주시지 않으신거죠. 의각주님도 물론 믿기 힘드시겠지만 전 거짓말 한 게 하나도 없거든요.”
짐작 가는 건 하나.
“배우지도 않은 창궁무애검법을 펼쳤다는 걸 안 믿어 준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검왕조차 믿어 주지 않았다니, 타인이 무공 펼치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는 건 그도 할 수 없나보다.
시녀 처지에서는 한참 아래 실력이던 남궁유린이 갑자기 배우지도 않은 상승무공을 펼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럼 그때 창궁무애검법을 다시 펼쳤으면 믿어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러고 싶었어요. 그런데 다시 시도해 봤는데, 놀라서 그런지 도저히 펼쳐지지 않았어요. 얼마 후에는 정식으로 창궁무애검법을 가르쳐 주셔서… 결국 해명하지 못했어요.”
“많이 답답하셨겠군요.”
“네. 그런데… 혹시 제 말을 믿어 주시는 건가요?”
남궁유린은 의구심을 가득 담아 유성을 바라보았다.
잠깐 대련을 지켜보고 배운 적도 없는 창궁무애검법을 펼쳤다는 그녀의 이야기.
혈육도 믿어 주지 않았는데, 유성은 마치 믿는 눈치이지 않은가?
그녀를 배려해 믿는 척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연히 믿습니다. 초식을 따라 했다는 것도, 무공을 펼칠 때 답답함을 느꼈다는 것도요.”
“...정말요?”
“물론입니다.”
남궁유린은 유성의 눈빛을 살폈다.
빨려 들어갈 것처럼 깊은 눈동자에 강한 신뢰가 서려 있는 듯하다.
‘진심 같은데…?
혈육도 믿어 주지 않는 말을 선뜻 믿어 준 거다.
‘나, 그동안 많이 힘들었구나.
응어리진 마음 한구석이 약간 풀리는 느낌이다.
할아버지는 정에 이끌려 그런 거짓말로 시녀를 감싸줄 필요는 없다고,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말만 했는데…
물론 유성은 진심으로 믿었다.
그 역시 직접 경험했지 않은가.
유성도 백가장의 무공을 펼칠 때 답답함을 느꼈다.
‘왜 이렇게 뻗어야 하지? 약간만 틀어도 위력이 훨씬 나아질텐데.
그런 답답함은 유성이 끊임없이 무공을 발전시켜 나가려는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내공 운용은 곧바로 따라 하기 힘들지만, 유성도 한번 본 무공 초식을 따라 할 수 있다.
같은 뿌리를 둔 남궁세가의 심법을 익혔으니 남궁유린은 창궁무애검법을 흉내 낼 수 있었을 거다.
단, 한 가지 조건만 충족 된다면.
‘남궁유린이 검왕과 남궁유현을 훌쩍 뛰어넘는 천재라면 말이 돼.
한 가닥 할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정말 그녀의 무재가 심상치 않은 듯하다.
이 정도 천재가 트라우마로 무공을 익히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니, 큰 손해가 아닐 수 없다.
빨리 정화 스킬을 열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추가되었다.
그 후로도 여러 대화를 나누어 본 결과.
“아쉽지만 마음의 상처가 당장 해결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꼭 치료해드리겠습니다. 시녀분 얼굴의 흉터도요.”
이미 아물어 흉진 상처는 지금 치유 스킬로는 무리지만, 치유 스킬의 다음 단계가 있으니까.
남궁유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요? 저도, 언니의 흉터도 치료할 수 있어요?”
“물론입니다. 저 믿으시죠?”
환자에게 신뢰를 심어 주는 건 중요하다.
그래야 상처가 더 악화되지 않을 테니까.
남궁유린은 조금 전에 펑펑 울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촉촉한 눈으로 눈웃음 지었다.
“당연히 믿어요.”
유성이 오늘 본 표정 중에 제일 밝고 예뻤다.
***
유성이 의각으로 찾아간 이튿날.
장칠은 한 가지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는 백유성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지만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문에는 여전히 귀를 귀울였다.
“어제 남궁유린이 검왕 앞에서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대.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넌 뭐 좀 들은 거 있어?”
“나도 모르는데.”
“그래? 아, 무림학관에 연무장 하나를 검왕이 요청했다던데 여기 좀 머무르실건가 봐.”
여러 정보를 전해주는 친구에게 적당히 맞장구 쳐주었다.
그에게 모르겠다고 했지만 장칠은 왠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제는 남궁유린이 가문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소리에 유성이 그녀를 찾아간 날이다.
‘전에 정자에서 두 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라니… 역시 남궁유린님은 의각주님 때문에 돌아가지 않으셨을 거야.
장칠이 전에 본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선남 선녀가 나란히 운치 있는 정자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언가를 속삭이던 모습.
‘확실해. 남궁유린님은 의각주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야. 두 분도 너무 잘 어울리고.
이번에 깨달은 바가 있어 절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을 거지만, 생각은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법이다.
남궁유린은 무림학관 생도 중 유일하게 의각에 지원하기도 했고, 종종 눈빛 교환 하는 모습도 목격했지 않나?
유성이 궁금해할까 봐, 장칠은 그에게 남궁유린의 근황에 대해 알게 되는대로 전했다.
“남궁유린님이 검왕께 무공을 배우신답니다.”
“그렇군요.”
평범한 일과도 전하고.
“요즘 표정이 많이 밝아지셨답니다.”
“그래요? 잘됐네요.”
남궁유린의 기분도 전하고.
“조금 전에는 속상한 일이 있으신지 울적해 보이신다고… 전에 두 분이 계시던 정자쪽으로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네? 아, 네. 그렇군요.”
꼭 알아야 할 것 같은 상황, 그리고 장소까지 전했다.
유성이 어리둥절해했지만, 장칠은 그의 태도가 남궁유린과의 관계를 비밀로 하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교대 준비 중이던 장칠에게 총군사 제갈영영이 말을 걸었다.
“의각주님 안에 계신가요?”
의각을 찾아올 때는 항상 미간을 찌푸리던 그녀의 얼굴이 멀쩡하다.
‘아침에도 다녀가셨으면서, 또 어디가 아프신가?
의문이 들었지만 충실히 답했다.
“의각주님은 퇴근하셨습니다.”
“어? 오늘 당직 아니세요?”
“아… 원래 그랬는데 일이 있으셔서 차의원님과 당직일을 바꾸셨습니다. 혹시 어디가 아파서 오셨는지요?”
“아픈 건 아니구요. 그럼 의각주님은 어디 외출하셨나요?”
“숙소에 계실 겁니다. 집에서 할 일이 있으시다고 가셨거든요.”
“그래요? 고마워요.”
자연스럽게 유성의 숙소로 향하는 제갈영영.
‘안 아픈데 왜…? 한때 그런 의심 한 적도 있지만 아닌줄 알았는데… 설마 의각주님이랑 총군사님도?
장칠은 혼란스러웠다.
***
제갈영영이 유성에게 찾아온 건 일 때문이었다.
“밤늦게 죄송해요. 오늘까지 처리해야 할 안 건 때문에 급하게 찾아왔어요.”
“그게 뭡니까?”
“무림학관에 호남 백가장의 백진성도 지원했어요.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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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유성이 전작을 플레이할 때, 고아의 신분으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비슷할 거로 생각했지만, 뜻밖에 가족까지 있는 신분이라 신기하게 여겼다.
알고 보니 사생아였지만.
물론 사생아의 신분이라는 사실은 게임 속으로 빙의되었다는 걸 깨닫고 나자 사소한 일이 되었다.
현대인이 게임 속에 갇혀 버렸는데, 진짜 부모도 아닌 자들과의 관계가 어떻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며칠간 방황했으나 유성은 곧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만이 답임을 깨닫고 무공 수련에 열중하게 되었다.
어쨌든, 호남 백가장은 유성이 게임을 시작하게 된 곳이고 백진성은 그곳의 적자다.
유성과는 이복 형제.
백진성은 유성을 귀찮게 굴었다.
당연히 가문을 물려받을 거로 생각했던 그의 처지에서는 갑자기 두각을 나타낸 유성이 눈엣가시 였을 거다.
유성이 무공을 잃고 쫓겨나듯 가문을 떠나던 날 비웃던 녀석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백가장이 그렇게 큰 곳은 아닌데 무림학관에 들어올 수 있나 보군요.”
제갈영영이 차분히 설명했다.
“맞아요. 원래 백가장 까지는 순서가 돌아가지 않았지만 이번에 무림학관 생도 중 일부가 정식으로 무림맹 소속이 될 거예요. 빈자리를 보충하려는데 마침 백가장도 적합한 대상이었어요.”
그 말을 하면서 제갈영영은 유성의 눈치를 살폈다.
‘날 배려한 거구나. 지난번 일로 백가장에서 쫓겨난 일이 널리 퍼졌으니.
고마웠다.
원칙상으로 백진성은 무림학관에 입관할 기준에 부합한다.
그런데 제갈영영은 유성을 위해 원칙을 깰 각오로 찾아온 거다.
유성이 원치 않으면 무림학관에 탈락시키려고.
‘별로 보고 싶은 얼굴은 아니긴 하지.
유성은 백진성이 무림학관에 들어오면 자신에게 어떤 해가 될지 생각해 보았다.
무림맹과 무림학관은 연관이 있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같은 소속은 아니다.
그리고 유성은 예전부터 백진성이 무림맹 입맹을 희망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작은 정도 문파가 세를 키우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무림맹 소속이 되는 거다.
흑도 문파와 시비가 걸려도 무림맹이 토벌 올 수 있다는 압박감을 줄 수 있을 테니까.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해 보면, 유성이 백진성을 만나 해가 될 점은….
‘…없는데?
오히려 백진성이 유성의 눈치를 봐야 하지 않을까.
이제 유성의 위상이 그 정도는 된다.
무림맹 무사들이나 무림학관 생도 중 의각의 도움을 받은 자들도 많았고, 특히 친한 자들은 대부분 무림맹 고위직이다.
아무 위협도 되지 않는 백진성 때문에 굳이 무림맹 총군사가 원칙을 어기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저는 괜찮으니 그냥 받으셔도 됩니다. 총군사님이 저 때문에 무리하시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무리한다구요? 저 그 정도 힘은 있어요.”
제갈영영이 턱을 치켜세우며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유성은 그녀가 두통으로 무너진 모습이 떠오르며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전에 책 잡힐 일은 하면 안 된다고 하신 거 같은데….”
둘이 한잔 하며 그런 이야기도 나눈적 있다.
“그건 모용림 장로가 기세등등 했을 때 이야기죠. 의각주님도 아시잖아요. 요즘 모용림 장로 어떤지.”
한때 무림맹 내에서 큰 권력을 휘두르던 그는 사마세가를 열심히 밀었던 죄로 그냥 평범한 무림맹 장로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사마세가가 무림맹에 못된 짓을 하다 걸렸으니 그들과 엮이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고 있다고.
그래도 유성은 제갈영영의 배려를 사양했다.
지금은 모르지만, 나중에 다른 정적이 나타나 꼬투리 잡으면 그녀가 곤란하지 않겠나?
그리고.
오히려 자신이 과거에 백진성에게 당했던 것들을 되갚아 줄 수도 있을 테고.
“알겠어요. 의각주님이 괜찮다니 뭐….”
“그럼 용건은 끝났나보군요. 살펴 가십시오.”
번뜩!
날카로운 제갈영영의 눈초리에 유성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그러나 착각이었다는 듯, 어느새 그녀의 눈매는 다시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차 한잔 주세요. 목이 타네요.”
“아, 그렇지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손님이 왔는데 차 한잔 대접하지 않고 보낼 뻔했다.
유성은 그녀가 주기적으로 선물해주는 차를 타서 내놓았다.
“마실동안 잠깐 이야기나 해요. 그 정도는 괜찮죠?”
“물론입니다.”
제갈영영과 별거 아닌 잡담을 나누었다.
오늘까지 해결해야 할 안건이 있다더니, 생각보다 바쁘지 않은가보다.
“요즘은 공부 잘되십니까?”
매일 아침마다 찾아와 치료받게 만드는 원인.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매일 두통을 호소할 정도니, 보통 수준의 공부는 아닐 테고.
“덕분이에요. 조금 있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거 같아요.”
가슴을 주욱 펴고 뿌듯해하는 모습이 귀엽다.
여기서는 두 살 연상이긴 하지만 현실 세계의 유성에 비하면 훨씬 어리다.
제갈영영이 돌아간 후, 유성은 다시 집에 딸린 작은 마당으로 나갔다.
오늘 차의원과 당직을 바꾸면서 해 보고 싶었던 일을 이어서 해야 한다.
새로 얻은 스킬 시험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에 얻은 스킬은 버프 계열.
버프 스킬은 자신 또는 타인에게 걸어 줄 수 있다.
당장은 활용도가 높은 스킬은 아니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미리 성능을 확인해 두어야 한다.
[신속]
유성의 몸이 순간 금빛으로 번뜩이며 신형이 미끄러졌다.
***
무림학관의 한 연무장.
연무장은 넓지 않지만, 높은 담벼락이 주변의 이목을 차단해 주고 있다.
검왕이 손녀에게 가문의 비기 제왕검형을 전수하기에 적합하다.
엄숙한 표정의 검왕이 의욕 없어 보이는 손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약속이니 최선을 다해 배워야 할 거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가문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
손녀의 얼굴에 약간의 의지가 서린다.
지금 당장 돌아가는 건 무척 싫은 모양.
‘언젠가 극복하리라 믿지만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가문을 이끄는 사람은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서는 안 된다.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고 검왕은 제왕검형 전수를 시작했다.
“제왕검형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있다. 전반부는 신묘한 무리들을 품고 있어, 전반부를 대성하면 이 할애비처럼 화경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제왕검형은 남궁세가의 자부심이다.
남궁세가가 오대세가의 수좌 자리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핏줄과 제왕검형을 통해 대대로 검왕을 배출해 냈기 때문.
신묘한 무리를 품고 있는 제왕검형의 전반부를 이해하면, 다른 무공을 익히는 것에 비해 손쉽게 경지를 올릴 수 있다.
다만, 품고 있는 무리가 어려운 만큼 제왕검형을 익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최소한 검왕의 상식으로는 그랬다.
“…!”
구결을 불러 주고 초식 시범을 한번 보여 준 검왕은, 약간 부족하지만 손녀가 자신이 펼쳐 보인 제왕검형의 전반부를 그럭 저럭 따라 하자 놀라고 말았다.
아직 미진한 부분이 있지만 단 한 번 보고 따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완성도가 높았던 것이다.
‘유현이보다 배우는 속도가 더 빠른 것 같구나.
창궁무애검법을 전수할 무렵 남궁유린은 무공에 대한 의욕이 전혀 없었다.
시녀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남궁유린은 유성 덕분에 마음의 응어리가 조금 풀렸고, 가문으로 끌려갈 수 없다는 목표도 가지고 있다.
마음 가짐이 다르니 익히는 속도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비록 창궁무애검법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아 똑같이 따라 하기는 어려웠으나,
제왕검형 역시 남궁세가의 무공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검왕의 기준으로, 남궁유린은 솜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제왕검형을 익혀나갔다.
의무감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점차 손녀를 가르치는데 푹 빠져들었다.
며칠에 걸쳐 전반부를 봐 준 후.
그는 더 이상 전반부를 봐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여태 손자가 최고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진짜 뛰어난 검재를 가진 아이는 손녀였다니,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검왕은 계획을 변경했다.
“배우는 속도가 대단히 빠르구나. 나머지는 스스로 참오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대신 후반부도 미리 전수해 주마.”
“후반부도요? 어차피 지금 익혀봤자 써먹지 못 하는 거 아닌가요?”
제왕검형의 후반부는 화경의 경지에 오르지 못하면 사용할 수 없다.
이전에 그렇게 설명 들었기에 남궁유린은 의문을 가졌으나, 검왕이 고개를 저었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의 너도 후반부 초식들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화경의 경지에 올라 환골탈태를 이루지 못하면 신체가 버티지 못해 무너지고 만단다. 그렇기에 펼치지 말라고 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네게 미리 전수하는 건 네 배움의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니, 틈 날 때마다 후반부 초식들이 지닌 무리들을 참오하여 화경의 경지에 도달하면 더 빠르게 나아가길 원한 것이다.”
“…네.”
검왕은 전반부 초식들을 펼칠 때처럼 손녀와 거리를 두고 섰다.
“잘 봐라. 이게 네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진정한 제왕검형은 후반부 부터라고 할 수 있다.”
검왕은 검을 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단전에서 진기가 일어나 승천하는 용과 같은 강맹한 흐름을 만들어 낸다.
환골탈태한 몸이 아니었다면 혈맥과 근육이 찢어졌을지도 모르는 파괴적인 기운과 함께, 검왕의 온몸에 푸른 기가 넘실거렸다.
이어.
퍼엉—!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제왕검형의 후반부 초식들이 펼쳐진다.
“…!”
남궁유린이 홀린 듯 검왕이 수놓는 검로를 쫓았다.
검에서 푸른 뇌전이 넘실거린다.
그녀는 몰랐지만, 마치 어렸을 때 창궁무애검법을 처음 보고 느꼈던 충격이 뇌리를 강타했다.
‘저게 진정한 제왕검형!
남궁유린의 몸 안에 내재된 검재가 꿈틀거렸다.
그 순간만큼은 시녀의 일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언젠가 할아버지처럼 저렇게 자유자재로 제왕검형의 후반부를 펼칠 수 있을까?
까마득한 일처럼 느껴졌다.
환골탈태를 이루지 못하면 신체가 버티지 못한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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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 이남은 무림맹의 입김이 세지 않은 곳이다.
흑도 무리가 제대로 터전을 꾸린 광동, 광서에 비하면 훨씬 낫지만, 다른 지방도 흑도 문파들이 많아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다만 호남은 좀 덜한 편이다.
형산파라는 나름대로 규모가 큰 정파가 있기 때문이다.
구심점 형산파에 기대어 여러 중소문파들이 힘을 모으면 흑도 무리가 함부로 활개치지 못한다.
그런 호남 지역의 작은 무가 백가장에 경사가 났다.
가문의 무사들과 하인들이 모두 지켜보는 중에 백가장의 가주는 아들을 크게 치하했다.
“장하다, 진성아! 네가 무림학관에 입관하게 되다니!”
“고생 많았다, 내 아들!”
아버지, 어머니의 말에 백진성은 당당하게 말했다.
“이게 다 아버지, 어머니 덕분입니다. 제가 꼭 무림맹에 입맹하여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겠습니다.”
“그래. 듣자 하니 무림학관 생도 중 무림맹에 입맹하는 비율이 크게 늘었다고 하더구나. 지금처럼 정진하면 너도 꼭 할 수 있을 거다.”
“물론입니다. 거기 가서도 열심히 해서 백가장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꼭 입맹하여 보이겠습니다.”
아버지에게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무림맹에 입맹하여 활동하다가 복귀하기만 해도 호남 지방에서는 어깨에 힘 깨나 줄 수 있게 된다.
“그나저나 정말 이 어미가 같이 가지 않아도 되겠니?”
“어머니, 걱정 하지 마십시오. 무림학관에 제 친우도 있으니 도움받으면 됩니다.”
“아, 진가장의 진영호 말이냐? 그래, 요즘도 연락 자주 하고?”
“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백진성은 부모님께 진영호로부터 연락이 끊긴 지 오래라는 사실을 굳이 털어놓지 않았다.
진영호가 무림학관으로 떠나는 날, 거기 가서 성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거라는 이야기를 나눈 적 있기에, 바쁘게 지내고 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아버지가 말했다.
“아 참, 무림맹에 일침신의라는 분이 계시다는 소문은 너도 들었겠지?”
“물론입니다. 나이도 젊은데 침 하나로 못 고치는 병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저기 오가는 상인들은 여러 이야기를 전하고는 한다.
누가 초절정 고수가 되었다더라, 어느 지역에 마두가 나타났다더라, 요즘은 어떤 의원이 잘 나간다더라.
얼마 전까지는 사람들은 의원들 중에는 의선을 최고로 쳐 주었다.
그러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선으로 불리는 그는 요즘 활동을 중단한 상태다.
그 사이, 역시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침신의라는 의원이 떠오르고 있다.
“그래, 그분께 드릴 귀한 선물도 싸드릴 테니 한번 찾아뵙고 친분을 다져 놓거라. 너도 그 녀석의 일을 잘 알고 있지 않으냐. 그런 대단한 의원과 친분을 다져두어 절대 손해 볼일은 없을 거다.”
백진성은 아버지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백유성.
무재 하나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배다른 형제가 주화입마를 입어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져 버릴 줄은 몰랐다.
자기 처지에서는 천운이었다.
가문의 적자로 태어났음에도 사생아에게 밀려날 뻔했으니까.
하지만.
-참고 기다리면 꼭 기회가 올 테니 절대 포기하지 말거라.
어머니의 말씀대로 그 녀석은 혼자 추락해 버렸다.
백진성은 절대 그런 멍청한 녀석처럼 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조심스럽게 수련을 해 나갔고 얼마 전 일류 무인이 되었다.
덕분에 무림학관에도 입관할 수 있게 되었다.
‘낙양의방 출신이라지? 젊은 나이에 무림맹 의각주가 될 정도면 정말 대단한 의술을 지니고 있나 보군. 아버지의 말이 아니더라도 꼭 친분을 다져두어야 할 자다. 최근 무림학관 생도들도 다치는 일이 많다니 친해지면 큰 도움이 될 거다.
무림학관에 입관 통보만 받았을 뿐, 정식으로 입관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백가장과 백진성은 무림학관에 가서 성공하기 위해 여러 준비를 시작했다.
가산의 일부를 정리하여 인맥을 다지기 위한 선물들을 준비하는 일도 그중 하나다.
실력만으로 경쟁하기에는 다른 후기지수들이 너무 쟁쟁하니까.
***
검왕은 무림학관에 머물며 손녀와 대련하면 할수록 아쉬움을 느꼈다.
무공 수련을 잘 따라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대련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혼자 수련할 땐 공격 초식도 잘 펼치면서 왜 대련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거냐?”
뛰어난 무공 실력을 가졌어도 공격하지 못하면, 대단히 큰 실력 차이가 나지 않는 한 상대를 제압하기 힘들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실전에서는 큰 화가 닥칠 수 있는 것이다.
“...”
남궁유린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도 시녀와 있었던 일을 다시 한번 털어놓았다.
그런데도 믿지 않는 할아버지에게 진실을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닌데…’
공격 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그날의 사고가 떠오르며 몸이 굳어 버린다.
도저히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상태로 상대를 공격할 수 있을 리 없다.
‘의각주님이 보고 싶어…’
유일하게 자기 말을 믿어 준 사람이 떠올랐다.
돌이켜 보면 그는 항상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처음 만나 오라버니의 치료를 부탁했을 때도 흔쾌히 치료를 약속했고, 귀찮게 하는 팽지산과 엮였을 때는 그를 퇴치해 주었고, 자기 일과 시녀의 일을 털어놓자 역시 치료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유성을 생각하자 대련 중인 것도 잊고 자꾸 다른 생각이 났다.
‘손수건 돌려드리러 언제 가지? 이걸 돌려드리면 다음 임무까지 만나러 갈 핑계도 없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한눈팔지 말거라!”
손녀가 딴생각 하는 걸 눈치챈 검왕은 다시 검을 들어 공격했다.
챙- 채앵-!
배운 대로 방어 초식을 펼치며 차분히 검왕의 공격을 막아가는 남궁유린.
직접 검왕에게 지도받으며 크게 실력이 늘어났지만 방어만 해서는 반쪽짜리일 뿐이다.
검왕은 결국 검을 거두었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그 시녀와 결판을 내야겠구나. 며칠 후에 할애비와 가문으로 돌아 가자꾸나.”
남궁세가의 미래를 위해서다.
이런 검재를 가진 손녀가 더 이상 반쪽짜리 무인으로 지내게 둘 수 없었다.
정신을 단단히 차리면 극복하지 못할 일은 없다.
‘나 역시 이 경지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위기를 넘겼다. 유린이도 할 수 있을 거다.
검왕은 자기 경험에 빗대어 그렇게 판단했고, 이번에도 그의 판단을 신뢰했다.
손녀에게 약속한 게 마음에 걸리지만 할 이야기는 있다.
“그건…! 약속이 틀리잖아요!”
돌아가지 않기 위해 열심히 무공 수련 중인데 무슨 날벼락 같은 말인가?
펄쩍 뛰는 남궁유린에게 검왕은 엄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를 공격하지 못하는데 그게 어떻게 최선을 다하는 거냐?”
“...”
“네가 빨리 극복하면 다시 무림학관으로 돌려보내줄 테니 긴말하지 말거라.”
“싫어요. 저는 아직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이번에는 소용없다. 이미 나는 결정 했으니 내 말대로 해라.”
이번에는 강력히 주장해도 아무 소용 없었다.
그녀가 알던 엄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거다.
그러나 그날 밤.
검왕은 한 가지 소식을 듣고 남궁유린에게 통보했다.
“잠깐 일이 있어 다녀오마. 곧 돌아올 테니 미리 돌아갈 준비해 두거라.”
“무슨 일이신데요?”
“다녀와서 말해 주마.”
검왕은 배웅 나온 남궁유린을 돌아보았다.
남궁유린이 불만스럽게 그를 바라보고 있다.
“할애비를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다녀오면 할애비가 도와줄 테니 빨리 극복하고 다시 돌아오자.”
“...”
***
검왕이 떠난 이튿날 저녁.
유성이 의각의 당직을 서는 날이다.
깨끗이 빨아 놓은 유성의 손수건을 들고, 남궁유린은 의각으로 향했다.
의각 하인들이 입구를 막고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입구를 통과해야 한다.
남궁유린은 그들에게 인기척을 냈다.
하인 무리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리다가 흠칫 놀랐다.
장칠이다.
“아, 남궁유린님! 의각주님 찾아오셨습니까? 방금 무림맹 회의에 참석하셨는데요.”
유성이 무림맹 회의에 참석할 일이 있던가?
“무슨 일이신데요?”
“청성파에서 의각주님을 찾아왔거든요. 저희도 거기까지만 들어서 그 이상은 모릅니다.”
“그렇군요. 그럼 언제 돌아오시는지는 모르나요?”
“네, 그것까진 못 들었습니다. 혹시 의각주님 돌아오시면 왔다 가셨다고 말씀드릴까요?”
“아니에요. 내일 다시 올게요.”
***
이튿날.
무림학관 교관이 임무 수행 중이지 않은 생도들을 불러 모았다.
“무림맹에서 할당된 새 임무들을 배정하겠다.”
여러 임무들이 나열되었다.
생도들이 저마다 원하는 임무에 지원했다.
“다음은 의각 경계 임무!”
여러 생도들이 손을 들었다.
그들 중에는 유성과 친해지기 원하는 후기지수들도 있다.
‘나도 지원하고 싶은데…’
남궁유린은 지원하지 못했다.
곧 할아버지와 함께 가문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하지만.
“다음은 장기 임무다. 혹시…”
교관이 말을 흐리는 동안 남궁유린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장기 임무? 섬서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도 장기 임무라고 하신 적 없는데?
“오늘 오후에 사천으로 향하는 무림맹 인원들 호위 임무가 하나 있다. 혹시 지원할 생도 있나?”
생도들이 술렁거렸다.
“사천이면 너무 먼데? 넌 지원 할 거냐?”
“미쳤냐? 그동안 여기서 여러 임무 수행하며 높은 분들과 두루두로 안면 익혀두는 게 훨씬 낫겠다.”
“그렇지? 시간도 촉박해. 오늘 당장 출발인데 누가 갑자기 사천까지 가고 싶겠어?”
사천까지는 왕복 이동 시간만 해도 최소 두 달이 걸린다.
특별한 임무라도 수행하고 오면 세, 네달은 훌쩍 지나버릴 게 분명했다.
누구를 호위 하는지도 모르는데 거기까지 가고 싶은 생도가 얼마나 있겠나?
교관도 임무가 할당되었기에 생도들의 의견을 물어봤을 뿐 누군가 지원할 거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을 번쩍 든 생도가 한 명 있었다.
“응? 남궁유린, 정말 지원할 생각이냐?”
“네, 교관님. 제가 가겠습니다.”
남궁유린은 충동적으로 손을 들었지만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할아버지를 따라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 절반,
어쩌면 유성이 일행에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절반이다.
***
시간을 거슬러 남궁유린이 유성을 찾아왔다가 허탕 친 날 저녁.
유성은 청성파에서 찾아왔다는 소식과 함께 무림맹 회의에 불려 갔다.
청성파에서 파견된 장로가 말했다.
“의각주, 청성파를 도우러 와줄 수 있겠소? 의각주의 의견만 남았소.”
이미 무림맹 사람들과는 이야기가 된 눈치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전에 의각주가 도왕의 독을 해독해 준 일이 있었지 않소? 우리 청성파의 장문인께서도 습격 당해 정체불명의 독에 중독되었는데, 그 증상이 도왕과 비슷하다고 하오.”
“장문인께서… 중독 정도는 어떻습니까?”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오. 그래서 여기까지 모셔오지 못했소.”
청성파는 무림맹의 우방이고, 청성파의 장문인 유천진인은 화경의 고수다.
그것만으로 도우러 가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만.
청성파의 장로가 말을 이었다.
“사천당가에서도 사람이 다녀갔으나 해독하지 못했소. 이제 믿을 사람은 의각주 뿐이오. 제발 부탁하오.”
사천에는 당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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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가는 천운석 가공 때문에라도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곳이다.
지금도 한 번씩 필요한 경우에는 천운석을 움켜쥐고 신성력을 증폭시켜 사용하기는 하지만,
침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에 비해 효율이 크게 떨어졌다.
침의 형태면 환부에 깊숙이 접근 할 수 있어 신성력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으니까.
최소한 치료에 있어서는 침의 모양인 것이 최선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 사천으로 가는 게 최선이다. 사천으로 나갈 일이 또 언제 있을지 모르니까. 그런데 사천당가에 들를 시간을 낼 수 있을까?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무림맹의 공적인 일로 가는 건데.
청성파의 일은 하나도 걱정되지 않는다.
해독 스킬은 치유 스킬과 달리 단계별로 효과가 나뉘어 있지 않다.
정말 유천진인이 독에 중독된 거라면 해독 스킬로 도왕처럼 쉽게 치료할 수 있다.
문제는 두 가지다.
청성파의 일을 마무리 짓고 어떻게 사천당가에 들리느냐,
그리고 사천당가에 가서 천운석으로 침을 만들 수 있느냐.
‘그들의 암기를 만드는데도 바쁘다고 들었는데 내 의뢰를 받아 줄까? 천운석 가공 난이도가 결코 쉽지 않을 텐데…’
이건 미리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가서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가서 기회를 만들어 보자. 이번이 아니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까.
마음을 굳히고 청성파의 장로에게 말했다.
“당연히 도와야지요. 청성파는 무림맹의 오랜 우방이 아닙니까?”
장로는 크게 기뻐했다.
“정말 고맙소, 의각주!”
“그런데 가는데만 해도 시일이 꽤 걸릴 텐데 그때까지 유천진인께서 버티실 수 있을까요?”
“거동은 힘들지만 운기하며 버티고 있으시니 가는 동안은 괜찮으실거요. 하지만 최대한 빨리 출발할 수 있으면 좋겠소.”
“알겠습니다. 준비되는대로 출발하지요.”
“정말 고맙소!”
청성파 장로와 대화가 마무리되자,
무림맹 총군사 제갈영영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어려운 결정 내려주셔서 감사해요, 의각주님. 번거로우시겠지만 한 가지 일을 더 부탁드리고 싶어요. 청성파의 일을 도운 후, 사천당가에 들러 주실 수 있을까요?”
“사천당가 말입니까?”
“네, 강호 정세가 심상치 않으니 그들의 지원을 얻고 싶어요. 설득은 다른 분이 할 거예요. 다만 복귀하는 일정이 조금 지체될 수 있다는 점 양해 부탁드릴게요.”
최근 보여주던 부드러운 눈빛과는 달리 무림맹 회의실에서 의견을 내는 그녀의 눈빛은 날카롭다.
이게 평소 일할 때 모습이라는 거겠지.
그리고.
유성은 제갈영영이 나서서 사천당가 이야기를 꺼낸 것이 자신을 위한 거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녀는 유성이 천운석을 가공하기 위해 사천당가에 가고 싶어 했던 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오, 미리 논의된 일은 아니지만 좋은 생각이오. 당가가 힘을 보태준다면 큰 도움이 될 거요.”
“마침 청성파로 가야 할 일이 있어 떠올렸을 뿐이예요.”
다른 장로들과 사전에 논의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올 때 선물이라도 사다 드려야겠네.
***
이튿날, 유성은 사천으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청성파 장로가 최대한 빨리 떠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니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친분 있는 자들에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연락을 돌린 후, 의각의 일을 처리했다.
“양의원님, 차의원님. 제가 사천에 다녀와야 하니 의각을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이네. 내가 양의원님 잘 모시고 있을 테니 잘 해결하고 오게.”
유성은 이번에 따로 양의원과 독대하며 작은 항아리 몇 개를 건네주었다.
“이게 뭔가?”
그가 항아리를 슬쩍 열어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감정 변화를 크게 보이지 않는 그인지라 색다른 광경이다.
“설마?”
“제가 만든 약입니다. 성수라고 이름 붙였지요.”
안에는 유성이 틈틈이 만들어 둔 성수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신비한 약… 설마 전에 군사부에서 간자 사건이 있었을 때 총군사님이 사용했다는 약이 혹시 이건가?”
“맞습니다.”
“정말 놀랍군.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꼭 한번 그 약의 존재를 보고 싶었는데 이걸 의각주가 만든 것인 줄 전혀 몰랐네. 가능하다면 나도 영술이라는 걸 배우고 싶을 정도야.”
당시, 제갈영영은 성수를 우연히 구한 약이라고 사람들에게 밝혔다.
성수의 정체가 공개되면 혼란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비밀로 해왔던 것인데,
이번처럼 장기간 의각을 비워야 할 때 유성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방법으로 성수만한 게 없다.
그걸 의각에서 제일 믿을 만한 양의원에게 맡겼다.
그의 인품은 믿을 만하다.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사용하셔야 합니다. 가능하면 비밀을 지킬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겠네. 스승님께도 비밀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
성수의 효능과 사용 방법 등을 양의원에게 상세히 설명해 준 후.
유성은 오늘의 처음이자 마지막 환자를 맞이했다.
바로 평소보다 훨씬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제갈영영이다.
“으으… 빠, 빨리 좀…”
그녀는 머리를 붙잡고 유성에게 달려와 침을 놔줄 것을 종용했다.
파르르 떨리는 손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짐작이 되었다.
유성은 재빨리 제갈영영의 머리를 더듬었다.
매일 그녀의 머리카락을 헤집다 보니 눈으로 보지 않고 두피만 만져 봐도 백회혈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이제 굳이 백회혈에 시침할 필요는 없지만 신성력 소모도 줄일 수 있고, 뜻밖에 손맛도 즐기게 되어 평소처럼 백회혈에 시침을 마쳤다.
“하아… 살았다. 고마워요. 통증이 싹 가셨어요. 오늘 무리했더니…”
“평소보다 훨씬 안 좋아 보이시기는 했습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제갈영영은 몸을 부르르 떨며 새벽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천문진법총해 두 번째 진법이 거의 마무리 단계야. 몇 달간 의각주님이 안 계시니 오늘 마무리 짓자.
3일 정도 공부해야 할 분량을 하루 만에 마무리 짓기 위해 잠도 줄이고 새벽같이 일어났다.
첫 번째 진법보다 더 난해했지만, 꾸준히 공부하다 보니 결국 두 번째 진법도 모두 익힐 수 있었다.
뿌듯함을 느낀 것도 잠시, 그녀는 참기 힘든 두통에 유성에게 달려온 것이다.
이제 유성이 없으니 당분간 세 번째 진법 공부는 멈춰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보내고 싶지 않지만, 화경의 고수를 잃어서는 절대 안 돼. 게다가 의각주님도 사천당가에 볼일이 있으시니…’
대의를 위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아쉽지 않을 리 없다.
자연스럽게 한숨이 나왔다.
“당분간 의각주님이 안계시니까 무리해서 공부했거든요.”
“아, 그거라면 제가 따로 준비한 게 있습니다.”
유성이 그의 진료실 안쪽에서 무언가 꺼내 왔다.
작은 항아리다.
“성수입니다. 몇 달간 쓸 양은 되지 않지만 공부하시다가 참기 힘든 두통이 찾아오면 조금씩 드십시오. 훨씬 나으실 겁니다.”
“이렇게 많이요?”
“응급 상황에서 다른 환자들에게 쓸 양은 따로 있으니 부담가지지 마십시오.”
제갈영영은 성수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유성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성수를 실제로 사용해 본 사람이 그녀였다.
그로 인해 부군사 태정헌이 죽음에서 생환하지 않았던가.
누군가의 목숨마저 구할 수 있는 귀한 성수를 단순히 공부하며 머리 아플까 봐 만들어 준 유성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고마워요. 아껴 쓸게요.”
“참, 그런데 어제 사천당가에 들러달라는 이야기는… 제가 생각한 거 맞습니까?”
유성 때문에 일부러 사천당가 행을 끼워 넣은 게 아니냐는 이야기.
“알면서 뭘 물어요? 사람 민망하게…”
제갈영영이 살짝 눈을 흘겼다.
“저도 고마워서요.”
“뭐, 마침 사천당가의 지원을 얻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아시다시피 그들의 독공은 집단전에서 큰 도움이 되거든요.”
“그렇긴 하지요. 당가의 지원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천운석 가공도 꼭 성공하세요. 그걸로 침 만들고 싶어 하셨잖아요.”
“그래야지요.”
그녀는 의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마디 남겼다.
“마음 같아선 안전한 곳에 계시길 바랐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네요. 부디 몸조심하세요.”
***
의각의 일까지 마무리 지은 유성은 짐을 챙겼다.
주요 물품으로는 역시 침통과 여러 의료 도구들.
그리고.
천운석 두 조각.
‘꼭 성공하자.
집을 나서 함께 청성파로 떠나는 일행과 만났다.
그중 무리를 이끄는 책임자와 먼저 인사 나누었다.
“의각주. 어서 오게, 이번에 내가 일행을 이끌게 되었네.”
“잘 부탁드립니다, 청운 장로님.”
청운 장로는 곤륜파 출신이다.
전에 의각 시험을 볼 때, 유성이 영술을 익히지 않았냐고 지레 짐작하여 사람들에게 대신 설명해 준 사람이다.
덕분에 스킬을 영술로 포장하여 지금처럼 자유롭게 신성력을 쓸 수 있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요즘 나도 나이가 먹었는지 예전 같지 않네. 가면서 몸도 좀 살펴주게.”
어깨를 과장되게 두들기며 씨익 웃는 모습이 엄살로 보이지만, 유성은 차의원 덕에 사회생활에 대해 배운 점이 많다.
“물론입니다. 사천까지 가는 동안 일행들의 건강은 제가 책임 지겠습니다.”
유성의 호언 장담에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일부 무사들은 이미 의각에도 여러 번 찾아와 안면이 익기도 했다.
그리고.
유성은 일행의 후미에서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다.
“남궁 소저도 지원하셨습니까?”
“네, 의각주님. 저도 같이 가게 됐어요. 잘 부탁드려요.”
남궁유린이 멋쩍게 웃었다.
“사천까지 가는 일인데 너무 멀지 않겠습니까?”
“그건 괜찮아요. 그런데 저희 언제 출발하나요?”
그녀는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왠지 조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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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평소와 조금 달라 보이시는데.”
남궁유린은 유성의 물음에 잠깐 고민했지만, 솔직히 털어놓았다.
더 한 이야기도 털어놓았는데 이 정도쯤이야.
유성에게 들릴 정도로만 속삭였다.
“그게… 할아버지가 가문으로 돌아가자고 하셔서 몰래 떠나는 거라서요. 지금 며칠 자리 비우셨는데 만약 일찍 돌아오시면 절 데려가려고 하실 거예요.”
“그래도 괜찮습니까? 가뜩이나 오래 걸리는 임무인데요.”
유성은 검왕이 평소 엄하다고 들었다.
이렇게 몰래 떠났다가 뒤늦게 검왕이 알게 되면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지금은 돌아갈 자신이 없어서요. 몇 달 후에는... 뭐, 어떻게든 되겠죠.”
생각보다 대책 없는 타입이네.
“자, 그럼 서로 인사 나눴으면 모두 모이시오. 이번 임무에 대해 설명해 주겠소.”
청운 장로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곤륜에 몸담은 청운 장로는 천하를 돌아다닌 경험이 풍부했고, 장거리 여정을 이끌기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무공 수준도 초절정 고수로 뛰어나다.
다른 무림맹 고수들과 함께 하면 웬만한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는 자다.
“아시다시피 이번 임무는 의각주를 성도의 청성파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는 임무요.”
무림맹 무사들은 모두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으나, 남궁유린은 몰랐던 눈치다.
눈이 동그래졌다.
유성에게 보내는 눈빛이 마치 이렇게 묻는 듯하다.
-이게 다 의각주님 호위 임무였어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청운 장로가 이제 이동 경로를 설명했다.
“우리는 장안을 거쳐 관중평야를 따라 진령산맥 북쪽 길로 이동할 것이오.”
청성파 장로, 정우 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문관을 지나시려는 거군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이 정도 규모의 인원이 이동하기에 가장 적합하겠습니다.”
“그렇소. 가는 길에 무림맹 분타들에서 쉬어갈 수 있소. 상황에 따라 객잔을 잡거나 며칠은 야영해야 할 수도 있지만 가장 빠른 길이오.”
일행의 우두머리가 경로를 정했으니, 이제 부지런히 움직이는 일만 남았다.
마차 여러 대를 나눠 타고 일행은 무림맹을 떠났다.
유성은 청운 장로와 함께 마차를 타게 되었다.
그가 제일 고수였고 이 무리에서 꼭 지켜야 할 사람이 유성이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정우 도인과 남궁유린을 포함하여 총 8명의 인원이 대형 마차에 타게 되었다.
청운 장로가 남궁유린에게 물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묻지 못했으나 검왕께서는 가문으로 돌아가셨나?”
유성과 남궁유린이 검왕에 대해 나눈 이야기는 알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조금 전에 다른 일행을 챙기기 바빠 보였으니.
“아니요, 다른 일이 있으시다고 하셨어요.”
“그럼 남궁 소저가 이 임무에 따라 가는 건 알고 계신가?”
“갑자기 맡게 된 임무라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그럼 검왕께서 일 보시고 무림학관에 들리시면 당황하시겠군.”
“네, 하지만 제가 없는 거 알면 가문으로 돌아가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청운 장로는 유성에게도 의각 소식 잘 듣고 있다며 여러 말들을 건넸다.
마차 안의 분위기는 그가 주도했다.
첫 만남 때부터 느꼈지만 아는 바를 뽐내기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나는 사천에 세 차례 가 보았네. 사천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으로는—”
그는 세상을 돌아다녔던 여러 이야기해주었다.
정우 도인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나 청운 장로 덕분에 마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별로 지루하지 않았다.
***
제갈영영은 보고서를 처리한 후, 차를 한잔 타 들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멀리 전각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쪽을 바라보며 차 한잔 마시는 건 생긴 지 얼마 안 된 습관이다.
그러면 왠지 모르게 편안한 기분이 들어 바쁜 와중에도 하루에 몇 번 정도는 꼭 차 마실 시간을 내곤 했다.
“...”
분명 그랬는데.
‘오늘은 그런 기분이 안 드네.
제갈영영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전각은 의각.
그곳의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
앞으로 몇 달 동안은 돌아오지 않는다.
“휴…”
한숨을 쉬고 창문을 닫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 좀 미루고 청성파로 가는 행렬이라도 한번 보고 올걸.
아침에 두통 치료 받고 인사하긴 했지만,
바쁜 일이 있어 따로 배웅하지 못한 게 내심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차를 재빨리 마셔버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때.
부군사 태정헌이 찾아왔다.
“총군사님, 무림학관 생도 임무 현황 보고드리겠습니다.”
“무림학관이요? 특별한 사항 있나요?”
크고 작은 보고들이 몰려오는 군사부의 특성상, 별 볼일 없는 건은 총군사인 제갈영영 선까지 올라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부군사가 무림학관 생도 임무 현황을 보고하러 온 것은 특별한 사항이 발생했다는 뜻.
“네, 한 건 있습니다. 이번에 사천까지 의각주님을 호위하는 장기 임무에 따라간 생도가 한 명 있습니다.”
“신기하네요. 장기 임무인데다 급하게 잡혔는데 지원자가 있었나보군요. 잠깐, 근데 누구죠? 그 생도는?”
제갈영영은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분명 의각 경계 임무도 홀로 지원한 생도가 있었는데...
“남궁유린 생도입니다.”
꾸깃—!
“...!”
태정헌은 총군사가 보고서를 와락 움켜쥐자 깜짝 놀랐다.
“아, 죄송해요. 딴생각하다가 그만. 그 건은 알겠어요. 다른 사항은요?”
순식간에 평온한 모습을 되찾은 제갈영영이 구겨진 보고서를 다시 피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나.
태정헌은 다른 사항들을 보고할 동안 제갈영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러져 있는 걸 똑똑히 목격했다.
‘요즘 신경이 날카로우신가 보군. 조심해야겠다.
의도치 않게 군사부에 긴장감을 심어 준 제갈영영은 퇴근 후 옷을 갈아입고 침상에 드러누웠다.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매일 떠오르던 잘생긴 남자 얼굴이 아니다.
순진 한 척, 커다란 눈을 깜빡이던 여자가 떠오른다.
상상 속 그녀가 갑자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유성님과 저, 둘만의 비밀 이야기예요.
제갈영영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 여우 같은…”
***
이튿날.
제갈영영은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온갖 불길한 상상으로 늦게 잠을 이루었음에도 습관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그녀는 탁자에 앉아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천문진법총해]
두 가지를 익혀냈지만 아직 여덟가지가 더 남아 있다.
전해지는 바로, 천문진법총해를 창안한 조상님은 다른 부분에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당시 여러 진법 가문들이 있었으나 조상님의 활약으로 제갈세가가 천하제일 진법 가문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진법에 관련된 의뢰들을 받아 제갈세가는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였다고.
‘황실에서 의뢰를 맡겼다는 말도 있고.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녀도 이 책을 다 익히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최고의 진법가가 되고 싶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유성이 없으니 적극적으로 공부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려니까 어색하네. 삼단계가 어떤 건지 조금만 살펴볼까?
그런 충동이 들었다.
유성이 주고 간 성수도 있으니 조금만 마셔도 두통을 해소할 수 있다.
‘일단계보다 이단계가 어려웠어. 삼단계는 당연히 더 어렵겠지. 그냥 어느 정도인지 가늠만 해보자.
결정을 내린 제갈영영은 책을 펼쳤다.
책에서 푸른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제갈영영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채 삼단계 진법에 대해 파악하기 바빴다.
‘역시 더 복잡하지만 못 풀 정도는 아냐. 그런데 점점 어려워지면 십단계는 얼마나 어렵다는 걸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제갈영영이 책을 덮었다.
자기도 모르게 홀린 듯 하루치 진도를 나가고 말았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경험상 이틀째는 참기 힘들 정도로 괴로워진다.
시험 삼아 꾹 참고 확인해 본 결과, 삼일째부터는 두통이 서서히 줄어들다가 오일 째는 완전히 해소된다.
유성에게 치료받지 못할 경우, 하루치 진도를 나가면 오일은 쉬어야 하는 것이다.
‘극악한 난이도야. 이러니 조상님들도 이 책을 제대로 못 익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성수를 조금 마셨다.
두통이 해소되며 머리가 다시 상쾌해졌다.
‘귀한 거니까 아껴 마셔야지. 당분간 공부하지 말자.
그러나 이튿날.
은은한 두통이 발생했다.
그녀는 곧 두통의 원인을 알아냈다.
‘삼단계부터는 꾸준히 공부하지 않으면 은은한 두통이 지속해서 발생한다고?
물론, 원인을 안다고 다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공부할 때처럼 심각한 두통은 아니지만 은은한 두통이 사라지지 않고 그녀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부작용이 있었다.
성수의 양은 매일 마실 만큼 넉넉하지 않다.
“망했다…”
그날 이후.
제갈영영의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졌고, 군사들은 더 긴장해야 했다.
부군사가 군사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다들 알다시피 요즘 심상치 않은 일들이 많아 총군사님이 좀 예민하신 것 같다. 며칠만 조심하자.”
정확한 원인을 모르는 그는 제갈영영의 날카로운 기분이 며칠이 아니라 몇 달이 될 거라는 사실은 알 수 없었다.
***
낙양에서 장안으로 향하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다.
유성 일행은 중간중간 마차를 끌다 지친 말들만 교체하며 장안으로 달렸다.
개울이 나오면 물을 마시게 하고, 식사하며 말들도 풀을 뜯게 했다.
“길이 잘 정비되어 있으니 마차가 잘 달리는군요.”
“지금은 그렇지만 진령산맥 쪽으로 가면 속도가 현저히 느려질 걸세.”
사천을 여러 번 가 봤다는 청운 장로가 그렇다니, 맞을 거다.
어쨌든 순조롭다고 생각하던 중.
히이잉—!
쿵—!
말들이 크게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소음이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청운 장로의 물음에 밖의 무사가 답했다.
“선두의 마차를 끌던 말들이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다친 사람은 없나?”
“사람은 괜찮은 것 같지만 말들이 다리가 부러진 것 같습니다.”
“이런, 몇 마리나?”
“세 마리가 다쳤습니다.”
한 마차를 끄는 말들은 네 마리.
그중 세 마리가 다쳤다면 다른 마차를 끄는 것도 큰 지장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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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하인의 헛소문 유포에도 불구하고, 높은 사람이 엮였기에 모두 조심하여 별다른 문제로 불거지지는 않았다.
다만 제갈영영이 자주 찾는 의원이라는 명성 덕에 무림맹 무사들이 백유성을 지목하여 진료받는 일이 잦아졌다.
많은 사람들은 무림인들은 병에도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내공 심법을 수련하고 몸을 움직여 무술을 수련하는 무림인들은 일반인들에 비해 면역력이 뛰어나 더 건강할 뿐 질병에 걸릴 수 있다.
증상도 덜하고 회복도 빠르기에 착각하는 것일 뿐, 제갈영영의 두통만 봐도 한계를 넘어서는 혹사에는 몸이 이상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다.
무림맹 무사들은 크고 작은 질병으로 낙양 의방을 찾는 일이 많았는데, 양의원에 이어 실력도 좋고 적당히 기분 좋게 치켜세워 주는 방법을 아는 조의원이 가장 인기가 많았다.
분명 그랬는데, 최근에 상황이 변했다.
"어서 오십시오. 백호단주님이 아니십니까?"
백호단주는 하얀 무복을 입고 얼굴이 붉은 50대 남성이었다. 그가 유성을 찾아온 것이다.
"반갑소. 부하들이 백의원이 실력이 좋다고 추천하기에 찾아오게 되었소."
"그러시군요. 안 그래도 최근에 백호단원들이 몇 분 다녀가셨지요.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음식을 먹어도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잘되지 않소. 치료를 받아도 그때 뿐이라 속는 셈 치고 와본 것이오. 부담갖지 말고 살펴보시오."
유성은 백호단주의 정보를 떠올렸다.
'술과 고기를 좋아하고 오랜 기간 소화불량을 호소했다. 이는 위 또는 췌장이나 간, 담낭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진맥 결과 간과 담낭쪽 문제로 판단되었다.
간과 담낭은 나이가 들수록 해독과 대사 기능이 떨어지기에 식습관에 따라 이런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간과 담낭의 문제군요."
"역시 조의원과 같은 소리를 하는군. 혹시 약을 지어 주려는 것이오?"
백호단주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다른 원인을 찾아낼까 기대했으나 같은 진단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약은 꾸준히 먹고 있지만 약간의 효과는 있어도 그의 병을 완치시켜 주지 못했다.
부하들의 추천에 백유성을 찾아왔지만 그는 너무 젊은 얼굴을 보고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후회하고 있었다.
가벼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억지로 이번 진료만 받고 다음부터 조의원에게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닙니다. 시침만 할 겁니다."
대뜸 시침만 한다는 게 아닌가?
침이 장기를 보하는 효과가 있어 그도 여러 차례 맞았으나 약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말에 백호단주는 고민에 빠졌다.
유성은 이런 환자들을 많이 보았기에 장담했다.
"믿고 맞아보시지요. 여러 백호단원분들도 크게 만족하셨습니다."
"음..."
여전히 고민하는 그를 보고 유성은 필살기를 시전했다. 당사자가 먼저 그래도 좋다고 허락해주었다.
"총군사님께서도 제 침술이 뛰어나다고 칭찬이 자자하셨습니다. 믿어보시지요."
백호단주는 솔깃했다.
머리가 아파 자주 이마를 찌푸리던 제갈영영이 최근 들어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자신만만한 유성의 태도도 어느 정도 신뢰감을 주었다.
'낙양 의방의 시험이 무척 어렵다고 들었다. 최소한 돌팔이는 아니겠지.'
백호단주가 결정을 내린 후에는 일사천리였다.
미리 설명을 들었음에도 기다란 침이 깊숙이 찔러 들어올 때는 긴장되어 칼자루를 찾았으나, 곧 백호단주는 더부룩한 속이 사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찔끔 새어 나온 피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루면 아물 것이다.
그는 신기한 듯 가슴과 배를 쓸어보았다.
'마치 이십 대로 돌아간 것만 같구나. 보아하니 하루 이틀 사이에 다시 악화할 것 같지도 않다.'
백호단주가 감탄해 입을 열었다.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인지 모르겠소. 어차피 해결할 수 없다 여겼기에 치료받는 중에도 술과 고기를 줄이지 않았소. 그런데 이런 가벼운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줄여볼 용의가 있소. 술과 고기를 얼마까지 줄여야 하겠소?"
편안하지만, 어딘가 심각해 보이는 백호단주.
일반적인 의원이라면 모르겠지만, 유성의 목적은 신성력을 열심히 쌓는 것.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억지로 참아 마음의 병이 쌓이면 더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제가 있으니 적당히 즐기셔도 좋습니다. 속이 안 좋아진다면 저를 다시 찾아오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말끔하게 치료해드리겠습니다."
백호단주는 유성의 뒤로 서광이 어리는 듯했다. 그는 크게 감격했다.
무재가 있어 상당한 경지를 이루었고, 무림맹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여 높은 급여를 받는 그는 술과 고기를 먹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었다.
다른 의원들은 항상 식습관을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했건만, 유일하게 백유성은 그에게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말해 준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중히 포권지례를 올렸다.
"내가 명의를 몰라뵀소.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시면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겠소."
유성은 상당한 양의 신성력이 늘어나는 것을 느끼며 즐거워했다.
백호단주가 얼마나 오랜 기간 소화불량으로 고생해 왔으며, 유성에게 감사함을 느끼는지 알 수 있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평소 무림맹의 영웅분들이 무림의 안녕을 위하여 얼마나 고생하고 계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단주님 주위에 지병으로 고생하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저에게 소개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하하! 내가 두루두루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여 발이 넓으니 나만 믿으시오!"
그날 저녁, 백호단주는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 왔던 지병의 완치 기념으로 그의 인맥들을 초대해 성대한 술판을 벌였다.
불러 모은 지인들의 숫자는 거의 50여명에 달했다.
술에 잔뜩 취해 유성의 대단함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어 댄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조의원이 그의 담당 하인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요?"
"방금 창호단주도 백의원에게 다녀갔다지?"
"그렇기는 합니다만 아직 조의원님을 찾는 무림맹 분들도 많지 않습니까요?"
하인도 조의원이 왜 심기가 불편한지 알고 있었다.
조의원은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꽉 잡고 있다고 생각했던 무림맹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명씩 백유성 쪽으로 옮겨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둑에 균열이 생기면 처음에는 물이 조금씩 새어 나가다가 조금만 지나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갈 것이다.
'내 실수다. 총군사님 한 명으로 끝나지 않을 거로 생각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저쪽으로 옮겨갈 줄은 몰랐구나.'
사실 제갈영영을 통한 유출 효과는 크지 않았다. 얼마 전 다녀간 백호단주가 매일 같이 술자리를 가지며 유성을 찬양한 효과였으나 조의원이 그 사실까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는 벌써 다음달 수입이 걱정되었다.
새로 들인 애첩이 꽤 사치스러웠음에도 아무 걱정 말라고 큰 소리를 쳐 놨는데 이제 와서 지원을 줄이겠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놈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긴 한 모양이야. 몇몇 사람들은 그놈이 양의원보다 더 뛰어날 거라고 떠들기도 하는 것을 보니.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해.'
머리를 쥐어 싸매고 고민하고 있을 무렵, 그를 찾는 환자가 있었다.
"아이고! 척마대주님, 도대체 이게 얼마만이십니까? 어서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진료실로 들어서는 진중한 눈빛의 사내를 보고 조의원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백유성 그놈은 진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단 한 번의 실패도 겪어보지 못했다. 흠결 없는 지금의 성과가 그놈을 더 대단해 보이도록 하고 있지. 하지만 실패를 겪어본다면 뭔가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다.'
음흉한 속내와는 다르게 조의원은 척마대주를 깍듯하게 모셨다.
***
무림맹에 가장 강한 무력부대를 꼽는다면 사람들은 주저 없이 무림맹주 직속인 척마대를 꼽는다.
오직 마를 척결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대외 활동도 삼가하고 자기 무위를 높이는데 열중하는 대원들.
척마대는 개개인이 절정 고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들의 대주 정립은 초절정의 고수였다.
초절정 고수라고 모두가 같은 경지에 이르러 있는 것은 아니다.
오 년 전, 이미 초절정의 끝자락에 이르러 이 넓은 무림에서도 몇 없는 화경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 여겨지는 사내가 바로 정립이었다.
"오랜만에 찾아주셨군요, 대주님. 폐관을 끝내신 것입니까?"
정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오늘 막 끝냈소. 조의원도 정정하시군."
조의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심스럽습니다만, 진료의 일부이니 묻지 않을 수 없군요. 폐관 수련의 성취는 있으셨습니까?"
정립음 침음성을 흘렸다.
"아니오. 깨달음을 얻지 못했소."
"이런... 안타까운 일입니다. 무림의 영웅께서..."
"됐소. 다 내가 부족한 탓이지. 더 버티기 힘들어 온 것이니 전에 말해주신 강력한 진통제를 부탁드리겠소."
온몸의 장기에 악성 종양이 퍼져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정립은 끝없이 화경의 경지에 도전해 왔다.
깨달음을 얻어 화경에 이르면 환골탈태를 이룰 수 있고 온몸이 회복됨은 물론 수명까지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끝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약간의 통증과 함께 모든 장기 기능이 서서히 저하되기 시작하더니 최근에 이르러 극심한 통증이 찾아와 그의 수련까지 방해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조급한 상황에서 끝내 찾아오지 않는구나. 바른 몸과 정신으로 끝없이 정진해도 얻을까 말까 한 것을 이런 악조건에서 얻을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지.'
정립은 몇 년 전, 낙양의방을 찾아와 악성 종양이 온몸의 장기에 퍼졌다는 진단을 받고 마지막 도전으로 폐관 수련에 들었다.
그러나 결국 보기 좋게 실패하고 통증을 완화시키는 강력한 진통제를 얻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강력한 진통제를 먹으면 통증을 완화시킬 수 있으나 감각이 교란되어 깨달음을 얻는데는 오히려 방해된다. 그러나 나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적절한 후임 척마대주를 선임하고 뒤를 부탁하는 것이 내 마지막 소임이다.'
조의원은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그에게 영웅의 기세를 보았으나, 결국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데리고 있어도 도움받을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백유성에게 보내서 진통제를 처방하든 다른 치료를 시도하게 하든 해야겠다. 자기가 맡은 환자가 죽으면 뭔가 약점을 노출할지도 모르지.'
계산을 끝낸 조의원이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수십 년 동안 의원의 길을 걸어온 자로서 직접 대주님을 치료할 수 없어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그러나 미약한 희망이 있어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희망... 말이오?"
"그렇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 얼마 전 들어온 의원 한 명이 심장이 멈춘 사람을 살려낸 일이 있었습니다."
"...!"
"신의라 불러 마땅한 솜씨였지요. 나이는 어려도 그자는 저보다 실력이 훨씬 뛰어나니 뭔가 다른 방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도대체 누구요?"
"백유성이라는 의원으로 이 의방의 제 십 일 진료실에 있습니다. 다만 실력이 부족해 제 환자를 다른 의원에게 권해야 하는 심정이 참담하니 제 이야기는 백의원에게 하지 말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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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신개는 소운의 무재를 확인하고 기뻐하면서도 몰래 분타주에게 명령해 소운의 뒤를 캐보았다.
몇십 년 전부터 이상할 정도로 무재가 뛰어난 아이들을 발견하기 어려워졌다.
백 년 기재 수준이 아니더라도 쓸 만하다 싶은 녀석이 씨가 마른 것이다.
그나마 거대문파나 세가는 상황이 나은편이다. 대를 이어 무재가 뛰어난 아이들이 태어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밑바닥을 전전하는 거지들로 구성된 개방은 뛰어난 무재를 가진 아이를 발견하기가 참으로 어려워 골치 아프던 참이다.
그런 상황에서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소운이 나타났으니 혹시 마교의 간자라도 되는지 철저한 검증을 해 본 것이다.
분타주가 며칠간 조사한끝에 보고를 올렸다.
"깨끗합니다. 오히려 흑도에게 부모를 잃은 불행한 과거가 있어 흑도 무리라면 치를 떤다는군요. 얼마 전에도 흑도 무림인에게 죽을뻔한 것을 한 의원이 살려주는 과정에서 무재가 뛰어나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래? 소운의 사정이 딱하구나. 그러나 나 용화신개는 참으로 운이 좋구나. 어디 적당히 쓸 만한 녀석이 나타나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늘 저렇게 뛰어난 아이가 나타나다니. 무공을 익히기 가장 좋은 시기는 아니지만 크게 늦지는 않았다."
흡족해 보이는 용화신개를 보고 낙양 소속의 분타주 중 하나인 철권개는 속으로 다짐했다.
'사실상 소운이 공석인 후개가 될 것이 확실해 보이는구나. 운 좋게 내가 제일 먼저 알게 되었으니 확실하게 줄을 서야겠다.'
소운은 개방의 방주와 독대하게 되었다.
"나는 너를 제자로 받으려고 한다. 네가 먼저 찾아왔으니 충분히 생각하고 있었겠지?"
"그렇습니다. 마침 친하게 지내 왔고 이번에 제 목숨까지 구해주신 진취 형님이 방주님께서 무재가 뛰어난 아이를 찾고 있더라는 말을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저도 형님이 계신 곳이라면 좋겠다 싶어 제일 먼저 방주님 생각이 난 것입니다."
용화신개는 흡족했다.
소운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일결제자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리라 다짐했다.
"좋다. 구배지례를 올리거라."
소운은 용화신개에게 구배지례를 올리고 정식 사제관계를 맺게 되었다.
"넌 이제부터 나 용화신개의 정식 제자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강호에서 무시당하지 않을 배분이니 항상 당당해야 한다. 그리고 네 나이가 있으니 부지런히 무공을 익혀야 한다."
"네, 스승님. 명심하겠습니다."
'나를 안고 백의원님께 데려다 주신 형님께 감사하다. 그리고 백의원님은 사경을 헤매던 나를 치료해주시고 무재까지 확인해 주셨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구파일방 중 하나인 개방 방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
백유성에게 마음 깊이 감사를 표한 소운은 속으로 다짐했다.
'여기서 충분한 인정을 받은 후, 어릴 적 내 부모님을 죽였던 흑도인들, 그리고 얼마 전 나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 넣은 흑도 무림인을 기필코 찾아 내어 복수해 줄 것이다. 그리고 백의원님과 형님께 은혜를 갚을 것이다.'
소운이 개방 방주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은 아니다. 개방은 강호에서 제일 정보력이 뛰어난 집단이었고, 이를 이용하고 싶어 친한 형님인 진취의 핑계를 대고 개방을 선택한 것이다.
싹싹하고 예의 바른 소운은 뜻밖에 은원이 확실한 아이였다.
용화신개가 여러 일로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소운에게 무공의 기초를 봐주고 다른 일을 보러 떠난 후.
철권개는 소운에게 줄을 대기 위해 작업에 들어갔다.
"흠흠, 소운아. 혹시 내가 도와줄 부분이 없겠느냐?"
"이렇게 연무장을 마련해 주시고 수련에 집중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그런 소리 말거라. 이런 건 당연히 해 줘야지. 넌 장차 우리 개방을 이끌어갈 텐데. 너도 방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지 않으냐?"
"후개를 말씀하시는지요?"
"그렇다. 비록 장로님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지만 네가 지금처럼 무공 수련에 힘쓴다면 그 자리는 당연히 네 차지가 될 것이다. 아, 진취에게는 낙양 분타 내의 편한 업무로 배정해 주었으니 이제 배 곯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형님이 정말 좋아하셨겠군요!"
"그래, 또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거라."
소운은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철권개를 보며 한 가지 부탁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형님 말고도 제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백유성 의원님이 있습니다. 그분께도 뭔가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그 부분은 내게 맡기거라."
고마워하는 소운을 보며 철권개는 흡족했다.
'나도 권력의 중심에 가까워질 수 있겠구나. 기다려라, 개봉 총타여. 후개를 모시고 당당히 입성할 것이다.'
그는 휘하 개방도들에게 항상 백유성의 인근에서 혹시 생길지 모르는 불상사에 대비하라는 명을 내렸다.
***
유성도 소운의 근황을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
무재가 뛰어난 줄은 진맥 당시 알아차렸다.
그러나 체계가 잘 잡혀 있는 거대 문파에 입문해 차근차근 무공을 익혀나갈 줄 알았는데 단숨에 개방 방주의 직전제자가 된 것이다.
배분도 배분이지만 엄청난 배경을 등에 짊어진 것이 아닌가?
유성은 개방의 후개가 공석이라는 사실까지는 몰랐으나 소운이 언젠가는 개방의 핵심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진료를 시작하기 위해 진료실로 이동 중, 차의원이 넌지시 다가왔다.
"백의원, 자네 진료실 앞에 줄 좀 보게. 시작도 전에 저만큼 줄 설 정도면 오후에는 오늘 온종일 봐도 다 돌보지 못할 만큼 환자가 몰릴 것이네."
유성은 그의 진료실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가만히 헤아려 보았다.
양의원이 종종 환자를 다 돌보지 못할 정도로 줄이 길게 늘어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유성의 줄도 그에 못지 않았다.
이게 다 척마대주가 크게 일을 벌여 준 덕이다.
조의원에게 진료를 보던 환자들이 대거 이탈했고 다른 의원들을 찾던 환자들도 유성의 실력이 좋다는 말에 호기심을 느낀 듯했다.
유성으로서는 진료 시간 동안 끊임없이 환자를 받을 수 있으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환자를 다 보지 못하고 돌려보내야 하는 것은 확실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계속 이렇게 몰리면 다 보기 힘들 수도 있겠군요."
"내 말이 그 말일세!"
손바닥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마주친 차의원이 화색을 띠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일부 환자들을 다른 진료실로 좀 분배해주는 게 어떻겠나? 여차하면 자네가 이어 봐야 할 수도 있으니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내 진료실이 가장 좋겠지."
자기가 환자를 더 받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냈으나 썩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괜히 대기 줄이 긴 데 욕심을 부려 줄 세워두었다가 다 받지 못하면 환자들이 불만을 품을 수 있다.
모든 환자가 유성의 손길을 필요하는 것도 아니고 차의원 정도면 낙양 의방 내에서 그나마 친분이 있는 편이니 이 정도는 도움을 줘도 괜찮으리라.
"괜찮은 생각입니다. 적당한 환자들은 제가 차의원님께 안내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그리고 고맙네!"
유성은 굳이 신성력을 써야 하는 수준이 아니면서 손이 많이 가는 환자들을 차의원에게 보냈고 항상 진료가 조금 일찍 마무리되던 그는 그것만으로도 유성에게 크게 고마워했다.
조의원이 모함할 때도 은근히 유성을 두둔하고 줄을 섰던 것이 빛을 발한 것이다.
치료 행위를 한 것은 아니지만 차의원이 고마운 마음을 품은 것은 미약하지만 분명히 신성력으로 전환되었다.
진료가 끝난 후 차의원은 유성에게 제안했다.
"오늘은 내가 저녁 식사를 대접할 테니 한잔 하러 가지 않겠나?"
유성은 솔깃했다.
정작 대도시 낙양까지 와서 이곳을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현실에 있을 때도 혼밥하러 다니는 편도 아니었으니 함께 갈 사람이 있을 때 낙양의 밤거리를 즐기는 것도 좋아 보였다.
"그러지요."
"하하, 잘 생각했어. 가세나."
식사를 대접하고 앞으로도 환자를 받겠다는 속셈을 가진 차의원이 신이 나서 앞장서 걸었고 유성은 조용히 그를 따랐다.
유성은 골목길을 걸어가며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이런 외진 길에 거지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별로 길지도 않은 골목에 거지들이 참 많군.'
심지어 가끔 눈도 마주친 것 같았다. 그러나 적선을 요구하기 위해 동정심을 유발하는 눈빛은 아니라 애써 무시했다.
소운에게 잘 보이고 싶은 철권개의 지시로 일부 거지들이 백유성을 보호하기 쉬운 곳으로 구걸 장소를 옮긴 사실을 알 수는 없는 법이다.
낙양의 번화가로 향하는 지름길인 골목길들을 제 집 안방처럼 누빈 끝에 차의원은 한 주루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어떻겠나?"
사주는 사람이 안내한 곳이라 불만이 있을 리가 없다.
"원래 이런 곳은 가장 높은 곳이 경치가 좋아. 술도 더 맛있는 법이네."
"자주 와보셨나보군요."
"자주는 아니고 몇 번 와 봤지. 어서 올라가세나."
마침 술 마시기 좋은 밤 시간대는 아니라 자리는 널널했고 점소이는 차의원과 유성을 3층 창가 쪽의 작은 탁자로 안내했다.
차의원이 잘 아는 요리와 술을 시키고 둘은 잡담을 나눴다.
잠시 후, 무복을 입은 십여명의 사람이 우르르 3층으로 올라와 넓은 탁자를 잡고 앉았다.
그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여러 요리와 술들을 풍족하게 시켰다.
"아마 무림학관 후기지수들 같네."
무림학관은 무림맹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학원이라 할 수 있다.
각 문파나 세가에서 뛰어난 후기지수들을 모아 흑도 무리들과 있을 전투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를 가르킨다.
최근 흑도 무리들의 힘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커서 무림맹에서 신경 써서 후기지수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아직 실전을 치르지 않은 탓인지 유성은 그들을 환자로 맞이한 적이 없다. 또는 다른 의원들만 찾았거나.
차의원이 곧 그들에게 신경을 끄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으나 유성은 당당해 보이는 그들에게서 과거 자기 모습을 보았다.
"팽형은 정말 대단하군. 스물셋에 절정 고수가 되다니, 정말 축하하오!"
"하하, 고맙소!"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차의원이 놀라 그들을 한번 보고 유성에게 속삭였다.
"팽가의 후기지수가 절정 고수가 되어 축하하는 자리인 모양이네. 스물셋에 절정 고수면 정말 대단한 게 아닌가? 듣기로 장삼봉 진인 이후 세대 중 가장 빠르게 절정 고수가 된 자가 스물하나라고 들었네. 앞으로 하북 팽가의 미래가 밝겠어."
유성은 간단히 대꾸만 하며 술잔만 기울였다.
'오늘은 취하고 싶은데 만독불침의 몸이라 그런지 취하지도 않는구나.'
새하얀 유성의 얼굴은 앞에서 서서히 벌겋게 물들어가는 차의원의 그것과 확연히 대비되었다.
열다섯에 이 게임 속으로 빙의하여 열일곱에 절정 고수가 되었던 천재가 바로 유성이었다.
지금은 무공을 회복할 방법을 발견해 차근차근 실행해 나가고 있다 해도 한번 손에 쥐었던 것을 놓친 심정이 썩 좋지 않았다.
"백의원, 자네는 왜 하나도 안 취한 것 같지?!"
술이 많이 약한지 금세 취한 차의원의 목소리는 꽤 컸고, 마침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대화가 끊긴 순간을 제대로 파고들었다.
모두 뒤를 돌아보았다.
그중 하나가 외쳤다.
"엇! 넌 백가장의 둘째가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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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립은 흔들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내려 놓았거늘, 다시 한번 헛된 희망이 피어나려 한다.
'심장이 멈춘 사람을 살려냈다라... 그게 정말이라면 한번 걸어볼 만 하겠지. 어차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정립은 그 길로 하인 하나를 불러 백의원의 진료실로 안내를 부탁했다.
하인은 그를 백유성의 진료실 앞으로 안내했다.
"안에 무림맹 무사분이 진료중이시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겠네."
정립을 안내해 준 하인이 돌아가려는 것을 백의원의 담당 하인 장칠이 붙잡았다.
장칠은 새로 생긴 화제거리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속삭였다.
"저분은 조금 전에 오셨다는 척마대주님이 아니신가? 혹시 저분이 직접 여기로 오고 싶다고 하셨나?"
"물론이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찌 조의원님 환자를 백의원님께 모셔왔겠나. 조의원님이 백의원님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걸 뻔히 아는데. 척마대주님께서 조의원님 진료실을 나오셔서 내게 여기로 안내해 달라 부탁하시지 뭔가."
"아, 거기서 나오셨나? 난 또 다른 분들처럼 알아보고 오신 줄 알고 설렜지 뭔가."
"설레다니?"
"그랬다면 조의원님이 길길이 날뛸 게 뻔하지 않은가. '백유성 이놈이 또 내 환자를 가로채! 가만두지 않을 테다!' 이렇게 외치면서 말일세."
"큭큭, 이 사람도."
남이 들을까 조심하며 먼 거리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훔쳐들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초인이라 불리는 사람이나 훔쳐듣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나 마침 이 자리에는 화경을 목전에 두고 있는 초절정 고수가 있었다. 초절정의 경지는 능히 초인이라 불릴 만 하다.
'그렇게 된 일이었군. 천하의 척마대주가 의원들의 정치질에 이용당하는 신세가 될 줄이야.'
조의원의 깍듯한 태도에도 왠지 모를 찜찜함이 느껴지더라니 그가 무언가 목적을 이룰 속셈으로 자신을 백의원이라는 자에게 보낸 것이다.
정립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조의원에게 죄를 물을 생각은 없었다. 다른 의원을 추천하는 권유 자체는 문제가 없으니 일을 키워 봤자 마지막에 추한 모습만 남길 뿐이다.
회의감을 느낀 정립은 발걸음을 돌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기다렸다.
강력한 진통제만 처방 받고 미련 없이 돌아갈 생각이었다.
진료실 너머로 살짝 보이는 백유성의 얼굴이 무척 젊어 그런 생각은 더 커졌다.
'심장이 멈춘 사람을 살려냈다니, 그것도 거짓일 가능성이 높겠구나. 역시 나는 정치와 맞지 않는다. 아무 생각할 필요 없이 마를 멸하는 척마대주의 자리가 제일 어울리는 자리였지.'
자기 삶을 돌아보던 정립은 곧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대기 중인 환자들이 대화하는 소리였다.
"자네가 귀에 피딱지가 생길 정도로 칭찬해서 왔는데 정말 믿어도 되는 거겠지?"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내가 직접 그 자리에 있었단 말이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도저히 믿을 수가 있어야지. 어찌 사람이 죽은 사람을 살려낸단 말인가?"
남자 중 하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는 백의원님께 치료 받고 나서 날 형님으로 모실 준비나 하게."
혼자 온 환자들도 있지만 지인과 함께인 환자들은 저마다 백유성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짓이 아니었단 말인가?'
정립의 가슴에 파문이 일 무렵, 안에서 치료받던 환자가 나왔다.
그는 가슴 어림을 어루만지며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정립이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뺨에 긴 검상이 남아 있는 상대가 먼저 깜짝 놀라 인사했다.
"엇! 대주님, 이게 얼마만이십니까!"
제일 먼저 진통제를 확보하기 위해 의방으로 먼저 왔기에 척마대 부하도 그가 폐관을 끝낸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대련중 내상을 입어 방문했습니다. 한 달은 족히 걸릴 내상이 거의 다 나았습니다. 사나흘만 다스리면 완치될 것 같습니다."
정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정도의 내상이 벌써?"
내상은 요상단이 없다면 아무리 가벼워도 족히 일주일은 정양해야 한다. 그러나 외상에 효과적인 금창약이 구하기 쉬운 것과 달리 좋은 요상단은 극히 드문 편이다.
"백호단주가 이 의원이 용하다고 다치면 꼭 가보라고 신신당부 하던 통에 한번 와봤는데 정말 신기합니다. 안 그래도 한번 대주님께도 진료를 권해볼까 하던 중이었는데, 벌써 백의원님의 소문을 들으신 모양입니다."
자신이 믿는 부하 역시 극찬을 하니 백유성에 대한 정립의 신뢰도가 조금 올라갔다.
'어쩌면 완치는 힘들더라도 얼마간 생명 연장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만약 1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시 전력으로 화경의 벽에 부딪혀 볼 만 하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일단락 되자 앞에서 대기하던 하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들어가실 수 있겠습니까?"
"아, 내가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군. 미안하네."
유성은 방금 치료를 마치고 나간 환자가 진료실 앞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또 무림맹 무사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진료실로 들어서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비록 내공을 잃어 기세를 읽어낼 수는 없으나, 남자의 자세나 몸을 단련한 흔적들이 대단한 무인임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가 빙의하고 나서 본 사람들 중 제일가는 고수로 추정되었다.
'여러 절정 고수들을 봤지만 저자는 그보다 윗줄의 고수로 보인다. 분명히 이름 높은 자일 거다.'
"정립이오."
대단한 무인이라는 정보에 정립이라는 이름을 듣자 유성은 그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척마대주님이셨군요."
"그렇소. 잡설은 치우고 본론만 말하겠소."
성격이 급한 사람이거나 아주 바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시지요."
"나는 몇 년 전에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악성종양이 온몸에 퍼져 있다는 진단을 받았소. 다른 의원들은 모두 나를 치료할 수 없다고 했소. 지금도 극심한 통증이 내 몸을 갉아 먹고 있소."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성을 보며 잠시 뜸을 들인 정립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대가 심장이 멎은 사람도 살려낼 정도의 명의라고 들었소만, 내 병도 치료할 수 있겠소?"
유성의 머릿속은 이미 팽팽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몸 안에 생긴 악성종양은 현대의 병명으로는 '암'이다. 이미 온몸의 장기로 전이가 된 상태로 수년이 지났다면 척마대주는 아마 한계에 달해 있을 것이다.
최근 많은 환자들을 받는 유성도 암을 치료해 본 경험은 없었으나 자신은 있었다.
신의 힘으로 행해지는 치유는 질병에 한해서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온몸에 전이 되었다면 신성력의 양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지. 지금도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완치보다는 자연 치유가 가능한 수준으로 아껴쓰고 있는 상황이니.'
차분한 듯 보이나 일말의 초조함이 깃든 정립을 보며 유성은 그를 기필코 치료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대체로 무림인들을 고쳐주었을 때 신성력이 크게 상승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대단한 고수라면 치료에 성공하면 큰 폭의 신성력 상승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
치료 방법까지 구상해 본 유성이 생각을 마치고 말했다.
"진맥을 하고 자세히 살펴봐야겠지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진심이시오?"
"먼저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순순히 손목을 내준 정립의 맥을 짚은 유성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희미하고 난잡한 맥 상태에 심각해졌다.
'마치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하구나. 아마 이자는 지금도 강력한 내공과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버티고 있음에 틀림없다. 치료에 필요한 신성력 소모도 대단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소모값은 더 커지겠지.'
정립은 유성의 표정이 굳자 희미하게 타올랐던 희망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역시 무리군.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았소. 강력한 진통제를 처방해주시오. 며칠만 버티면 되니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소."
이것으로 되었다. 소중한 시간을 얼마간 허비한 셈이 되었지만 진통제를 받을 수 있다면 마지막 소임을 마무리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유성은 진통제를 처방해주지 않았다.
"척마대주님, 살고 싶으시면 제 말에 철저히 따라주셔야겠습니다. 시침을 할 터이니 저쪽에 누워주십시오."
"...!"
"어서 누우십시오. 한시가 급합니다."
초절정 고수가 되어 척마대주가 된 후로 자신을 향해 이 정도로 강력한 명령조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직속 상관인 무림맹주 또한 부탁조로 명령을 하달하거늘.
하지만 정립은 유성의 눈빛에서 확신을 엿보았다. 무엇에 대한 확신인지는 곧 알게 되리라.
유성은 정립이 한동안 자신을 빤히 바라보다가 자리에 눕는 것을 보고 안도했으나 고비는 아직 남아 있었다.
유성이 몸 내부까지 찔러 넣을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된 젓가락만한 장침을 집어 들었다.
"설마 그것으로 침을 놓는 것이오? 침은 혈자리에 놓는 것이 아니오?"
"악성종양은 너무 많이 퍼져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치료하기 어렵습니다. 저만의 비법이니 믿어 주시지요."
"...알겠소."
모든 것을 내맡긴 정립의 눈이 감기는 것을 보고 유성은 젓가락만한 장침을 가슴 한가운데에 찔러넣었다.
피부, 피하조직, 근막, 늑간근, 흉막 순으로 뚫고 들어간 침을 통해 유성이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신성력을 통제하자 내부 장기의 형태가 마치 CT라도 찍은 듯 머릿속에 그려졌다.
다른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찔렀을 때와 비교해 보면 척마대주의 장기 상태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단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이 암 조직이 전이 되어 있었다.
'역시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구나. 급한 불부터 꺼야겠다.'
치유 스킬이 발현되었다.
***
"아니, 그게 정말인가?"
"차의원님, 이미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분명 치료를 시작했다고요."
차의원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납득이 안 되어 그러네. 정말 척마대주님의 병을 고칠 수 있단 말인가? 자네는 모르겠지만 몇 년 전에 척마대주님이 다녀가신 후 낙양 의방의 의원들이 모두 모여 척마대주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 논의했었네. 양의원님은 의선께 서신까지 보냈었지. 그러나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척마대주님이 대성을 이루길 응원해주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었네."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연거푸 유성에게 척마대주의 치료 가능성에 대해 물은 차의원은 슬그머니 본심을 꺼냈다.
"그럼 혹시... 어떤 방식으로 치료하는지 들을 수 있겠나? 자네는 이미 심장 압박 비법에 대해서도 모든 사람에게 알려 준 적이 있지 않은가?"
유성은 양심 없는 차의원에게 눈을 흘겼다.
심폐소생술에 대해 알려 준 적이 있지만 이번 치료법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 외에 아무도 따라 하지 못할 거로 생각했고.
그러나 나중에, 그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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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산파의 장로 진영주는 바깥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가는 길에 상단 한곳을 방문했다.
그곳은 진영주의 친척이 운영하는 곳으로, 문파 밖으로 나왔을 때마다 한 번씩 들리고는 해서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한 소녀를 만난 일은 특별한 일이 되었다.
'이렇게 충만한 영력이라니, 몇 달 전에 봤을 때는 이렇지 않았거늘 언제 영력이 이렇게 충만해졌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속성이 섞여 있긴 하지만 원래 영력의 속성은 다양한 법이니 문제 될 것도 없고.'
진영주는 소녀, 진은선에게 캐물을 수밖에 없었다.
"은선아, 혹시 몇 달 사이에 무슨 큰일이 있었느냐?"
"네? 고모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보니 네 몸에 영력이 넘치는구나. 분명 큰일이 있었을 것이다. 정말 기억나는 일이 없느냐?"
진은선은 곧 그녀가 죽다 살아난 일과 신비한 존재를 만난 일에 대해 대충 털어놓았으나 진영주가 큰 관심을 보였기에 상세히 고할 수밖에 없었다.
"넌 정말 큰 고비를 넘겼구나. 네가 만난 영적인 존재는 살아 있는 일반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마 죽다 살아난 일이 네게 대단한 기연이 된 모양이구나."
"그게 좋은 건가요?"
"당연하다. 너는 그 일로 무림인들이 꿈에도 이루길 원한다는 상단전을 개방한 것이다. 네 충만한 영력이 상단전 개방의 증거다. 아마 조금만 늦었으면 죽을 뻔했던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음이 틀림없다."
"의원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마 조금만 늦었다면 죽거나 죽는 것만 못한 상황이 되었을 거라구요."
"그렇구나. 은선아, 그럼 혹시 너는 날 따라 모산파로 갈 생각이 있느냐? 네 재능이라면 너는 몇 년만 지나도 대단한 영술사가 될 수 있을 거다."
"그럼 제가 무공을 배우는 건가요?"
"무공과는 조금 다르다. 내공을 쌓아 무술을 수련하는 것과는 달리 영술사는 영력을 키워 술법을 익히고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몸담은 모산파가 바로 천하의 영술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란다."
그리고 영술사는 흔한 무림인과 달리 아무나 될 수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영력을 수련으로 쌓는 속도는 매우 느리기 때문에 타고나지 않으면 불가능 했으니까.
진영주는 진은선이 곧 그러겠다고 할 줄 알았다.
어렸을 때부터 신기한 술법들을 보여주면 진은선은 진영주를 대단하다고 치켜세우며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 고모님을 따라가는 건 어렵겠어요."
"무슨 이유가 있느냐?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하다니. 네 아버지도 흔쾌히 그러라고 할 것인데."
진영주는 진은선의 재능이 아까워 거듭 권유했다.
"그럼 백의원님께 물어보고 결정해도 될까요? 며칠 후에 진료 예약이 되어 있으니 그때 가서 물어볼게요."
"...백의원이 누구길래?"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그분께서 제게 무공을 익히는 게 좋을 거라고 하셨거든요."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도 그렇지 영술을 배울지 무공을 배울지도 그의 허락을 맡아야 한단 말이냐?"
"죄송하지만 제게는 그분의 말씀이 제일 중요해요."
"할 수 없구나."
진영주는 진은선이 고집을 부리자 함께 백유성을 만나러 가기로 하고 며칠간 진은선의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매일 진은선의 영력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수련으로 늘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진영주가 알기로 영술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선천적으로 타고나야 한다. 모산파에서 다루는 것은 주로 타고난 영력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으로, 후천적으로 영력을 늘리는 것은 너무 효율이 나빴다.
'지금도 은선이의 영력은 대단한 수준이지만 매일 이 정도로 영력이 늘어난다면 전대미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드시 은선이를 모산파로 데려가야 한다.'
***
유성이 매일 만나는 무림맹 사람은 이제 두 명이 되었다.
아침마다 모종의 일로 생긴 두통을 치료하고 가는 제갈영영, 그리고 암을 치료 중인 척마대주였다.
모든 신성력을 쏟아 부으면 보름 안에 척마대주의 암을 치료할 수 있었으나 굳이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비록 척마대주의 치료를 성공하면 신성력이 확 늘어날 것이지만 그동안 다른 환자들을 보는데 지장이 생기게 된다.
게다가 완치가 아니더라도 척마대주는 조금씩 호전되는 몸 상태를 느끼고 유성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오늘도 척마대주를 치료한 후, 다음으로 들어 온 환자는 바로 진은선이었다. 그녀는 평소 보호자로 함께 오던 아버지 대신 모르는 중년 여인과 함께였다.
"이분은 제 목숨을 구해주신 백유성 의원님이시고 여기는 제 고모님이세요. 모산파의 장로직을 맡고 계세요."
"반갑습니다. 진영주라고 합니다."
유성은 인사를 나눈 후, 왜 진영주를 자신에게 소개하는지 어리둥절했으나 먼저 할 일 했다.
"은선아, 진맥 결과 별다른 이상이 없구나. 이제 그만 지켜봐도 될 것 같구나."
"감사합니다, 은공. 그런데 무공을 배우는 일로 고모님께서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세요."
진영주가 나섰다.
"듣기로 은선이에게 건강을 위해 무공을 배우라고 했다던데 꼭 무공일 필요가 있습니까?"
"무조건 무공을 배우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한번 사고가 있었으니 건강을 위해 무공을 배우면 좋겠다고 권했을 뿐입니다."
진영주가 진은선을 한번 흘겨보았다.
들어 보니 유성이 강력하게 권한 것 도 아니었건만 진은선이 고집을 부린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주 시집도 백의원님이 정해주는 상대에게 갈 기세로구나."
"시, 시집이요?"
'백의원님이 시집오라고 하시면 난 어쩌지?'
진은선이 망상에 젖어 고개를 푹 숙였고 유성은 진영주와 대화를 나눴다.
"다만 무공이 아니라면 무엇을 익히게 할 생각이십니까?"
"모산파의 영술입니다. 이 또한 몸을 건강하게 해주니 은선이게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영술이요? 제가 견문이 짧아 모산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혹시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진영주는 신비문파인 모산파의 영술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와 동시에 진은선이 갑자기 영력이 생긴 점, 그리고 혹시 몰라 영력이 크게 늘어나는 부분에 대해서도 유성의 생각을 물었다.
진은선이 크게 믿고 있는 의원인데다 직접 비법이라는 것을 통해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무언가 알고 있는 바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성은 영력이 크게 늘어난다는 설명을 듣고 진은선이 매일 그에게 축원을 올린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은선이는 축원을 올린 후 충만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혹시 그건 신성력이 몸에 쌓이는 현상이 아닐까? 나 역시 처음 가이아 여신에게 기도를 드린 후 신성력이 쌓일 때 충만감을 느낀 적이 있으니까.'
유성은 다시 진은선을 진맥해 보았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맥박을 파악한 것이 아니라 신성력을 흘려보냈다는 것이다.
맥문을 통해 거슬러 올라간 유성의 신성력은 마침내 진은선의 가슴부근에 도착했다. 진영주가 상단전이라고 칭하는 그 위치였다.
게임 속 설정인지, 이 세계의 상단전은 가슴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정말 신성력이 있구나! 영력의 존재는 모르겠지만 분명 신성력이 느껴진다!'
놀라운 발견이다.
유성은 신성을 얻었으나 이를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정도로 받아들였지 자신이 신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진은선은 그에게 기도를 올린 후 약간의 신성력을 되돌려 받고 있었다.
'단순히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고 신성력이 쌓이는 건 아닌 듯하다. 매일 신성력으로 척마대주의 가슴 부근을 살폈지만 그에게서 신성력이 발견된 적이 없다.'
사제는 신과 소통하는 자다.
그렇다면 상단전이 열릴 정도로 영력이 큰 자들이 바로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혹시 저에게도 영력이 느껴집니까?"
"왜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영력을 타고납니다. 백의원님도 남들보다 많은 영력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영술사가 되기에는 부족하군요."
타고난 영력이 미미했던 유성은 신성력을 쌓고 있음에도 아직 진영주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그렇군요. 은선이와 독대하고 싶으니 잠시만 시간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럼 대기실에 있을 테니 의원님과 이야기 나누고 오거라."
"네, 고모님."
진영주가 멀리 사라진 후, 유성은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진은선을 불렀다.
"은선아, 고모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영력이 크게 늘어나는 부분이 네가 나에게 축원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정말요?"
"그래서 말인데, 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구나."
진은선의 눈이 반짝였다.
"뭐든지 맡겨 주세요."
유성은 진은선에게 몇 가지를 알려 준 후 돌려보냈다.
'은선이가 잘해주겠지. 어쩌면 신성력을 쌓는 속도가 비약적으로 늘어날지도 모른다. 대신 확실해 지기 전에는 은선이의 고모에게 비밀로 해야겠다.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
유성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
백유성이 자리에 없을 때, 여러 의원들이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조의원은 매일 척마대주가 유성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코웃음 쳤다.
"양의원님은 말이 된다 생각하시오?"
"척마대주를 치료하는 일 말이오?"
"그렇소, 의선께서도 가슴과 배를 갈라 온몸의 악성종양이 전이 된 장기를 절제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백의원이 아무리 난다긴다 해도 절대 치료하지 못할 것이오. 듣기로 이번에도 침이나 놓는다고 하오."
양의원도 조의원의 말에 동의하는 바다. 이번에는 방법을 알면 따라 할 수 있는 심장 압박과는 그 결이 달랐다.
다만 척마대주가 이미 유성을 선택했으니 왈가왈부하지 않을 뿐이다.
"어차피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그쯤 하는 게 좋겠소. 백의원도 다 생각이 있지 않겠소?"
"흥, 생각은 무슨. 요즘 사람들이 좀 칭찬해주니 거만해져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하는 것이지요."
요즘 유성에게 친한 척 달라붙어 있는 차의원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로는 치료가 순조롭게 되고 있다고 했습니다만..."
조의원의 눈이 번뜩였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백의원이 그러더군요. 척마대주님을 치료하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자네도 그런 헛소리에 속는단 말인가? 가만... 혹시 이거 백의원이 척마대주를 속여 기만하는 것이 아니오?"
"..."
"아니, 그렇지 않소? 생각들 해 보시오. 저 남쪽 지방에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용해 먹는 종교가 창궐한 적이 있다지 않소? 척마대주님이 아무리 무공 고수라도 죽음 앞에선 판단력이 흐려질 수밖에 없을 거요."
양의원은 유성이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럴 리 있겠소? 백의원이 무엇을 얻기 위해 그런 위험한 짓을 하겠소."
"그야 모르지요. 척마대주님은 초절정 고수니 뭔가 이용해 먹을 곳이 있다고 생각했다던지. 얼마 남지도 않은 귀한 시간을 여기서 허비하고 계시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소."
조의원은 선동을 거듭했으나 생각보다 다른 의원들의 호응이 없었다.
전에는 양의원 다음가는 자기 말에 대부분 귀를 귀울였을 텐데 요즘에 그의 위상이 크게 떨어진 것이다.
심지어 척마대주는 유성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조의원 자신을 무서운 눈빛으로 바라볼 뿐 대화에도 응하지 않았다.
'흥, 이번에는 그놈이 악수를 둔 것이다. 척마대주가 죽기만 해 봐라. 무림맹에 조사를 의뢰해서라도 기필코 낙양 의방에서 쫓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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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마대주 정립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의 몸 상태가 완전히 낫기 전에는 아무에게나 몸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오직 그의 직속 상관 무림맹주에게만 말했을 뿐이었다. 그는 크게 기뻐하며 치료에 전념하라 당부했다.
'몸 상태가 나날이 좋아지고 있고 백의원님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머지 않아 치료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에게 목숨을 빚지게 된다. 그 은혜는 평생을 두고 갚아야 할 것이다. 아니, 지금도 이미 상당한 수명을 회복했으니 커다란 은혜를 입은 것이다.'
그러던 와중, 치료를 위해 유성을 찾아간 날 정립은 유성의 진료실 안에 선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얌전히 기다리려고 했다.
우연히 예민한 청력으로 듣게 된 대화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솔직히 말해주게. 척마대주님의 치료가 잘되고 있는 게 맞는가? 물론 나는 자네를 믿지만 아까 조의원님이 다른 의원들에게 자네가 대주님을 치료할 수 있다고 속여 뭔가를 얻어내려는 속셈이라고 했단 말이네."
"치료는 잘되고 있습니다. 두 달 안에 완치 가능합니다. 그리고 조의원님의 말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저와 척마대주님의 일인데요."
"어허, 자네는 걸핏하면 자네 흉을 보고 다니는 조의원이 밉지도 않은가? 하인들도 자네와 조의원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다 알 정도인데."
"저도 사람인지라 답답합니다만 저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무림맹 사람들과 친분이 깊은 조의원님과 드잡이질을 할 것도 아니고 별다른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러네만..."
정립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용히 발걸음을 되돌렸다.
"어, 어디 가십니까?"
하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향한 곳은 조의원의 진료실 앞이었다.
그는 원래 신중한 성격으로 남들의 말만 듣고 판단하는 것을 조심히 여겨 왔으나 유성이 직접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지 않은가?
그것으로 충분 했다.
조의원이 그의 은인 백유성을 음해한다는 소리를 듣고 참지 않을 이유로는.
'백의원님은 이 의방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당연히 오래전 여기서 일해온 조의원과 맞서기 쉽지 않겠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충분한 힘이 있다.'
조의원의 진료실 앞에서 잠시 기다리자 하인이 기별을 했고, 놀란 조의원이 뛰어나왔다.
"아니, 척마대주님이 웬일이십니까?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안까지 들어갈 필요 없소. 나는 할 말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오."
"그럼요. 편히 말씀하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무슨 기대를 하는지 조의원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아마 백유성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다시 그에게 돌아왔으리라 기대라도 한 것일까?
안 그래도 엄중한 경고를 하려 했던 정립은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유성에게 자신을 보낸 조의원의 가증스러움이 떠올랐다.
물론 그 덕분에 유성을 알게 되어 몸이 치료되고 있지만, 의도 자체가 불순했기에 조의원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
"조의원, 그대는 내가 그렇게 우습던가!"
초절정 고수가 서릿발 같은 기세를 흘려보내자 무공이 부실한 조의원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그, 그게 무슨 마, 말씀이십니까?"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들도 소란에 놀라 그들을 보고 웅성거렸다.
평소의 정립이었다면 체면이 상할까 싶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은인의 근심거리를 해소해주고 싶었다.
"그대의 정치질에 날 이용해 먹은 것을 그냥 넘어가 주었더니 이제는 백유성 의원님을 음해하고 다닌다지? 내가 그분께 속아 몸을 치료할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을 품고 다닌다고?"
"그, 그것이... 아, 아닙니다. 저는 절대로..."
조의원이 초절정 고수가 쏘아붙이는 기세에 큰 공포를 느끼면서도 필사적으로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당황한 상태로는 평생 흑도 무리들의 간교함을 상대해 온 정립에게 거짓을 숨길 수 없었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거짓된 몸짓이 말해주고 있었다.
정말로 조의원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자 일말의 거리낌도 사라졌다.
"또 그 간사한 혀로 거짓말을 늘어놓는구나. 날 치료할 실력이 없어 차도 살인을 하기 위해 백유성 의원님께 날 보내놓고 다른 의원들에게 내가 그분께 속아 멍청하게 치료될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을 품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흐억...!"
그 정도로 과격한 언사를 한 적은 없으나 비슷한 내용이었다.
정립이 기세를 더 끌어올리자 조의원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옅은 회색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정립은 뒤를 돌아보았다.
일련의 상황으로 사람들은 척마대주와 조의원을 보고 수군거렸다.
조의원이 그럴 줄 몰랐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일부는 정립이 너무하다는 반응이었다.
은인을 위해 일반인과 드잡이질을 하는 것으로 약간의 체면이 깎였겠지만 그는 한 치의 후회도 없었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나는 이런 별것도 아닌 상황을 여태 피해왔구나. 그깟 체면이 뭐라고 그리 중시했던지.'
저지르고 보니 은인의 곤란에 비할 바 없는 하찮은 일이었지 않은가?
그 순간 단전 어림이 꿈틀거렸다.
무언가 변화가 생기려 하는 것이다.
'이럴 수가... 그렇게 노력해도 얻지 못했던 실마리가...!'
무인의 깨달음은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생사결에서 얻을 수도 있고 사소한 것에서 얻을 수도 있다.
천한 출신이었던 정립은 기연을 얻어 높은 성취를 얻은 후 척마대주라는 높은 자리까지 올랐다.
사람들이 그의 천한 출신을 흉볼까 우려되어 고수가 된 후로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체면을 중시해왔던 태도가 그의 깨달음을 방해하고 있었다.
은인의 답답함을 대신 해결해 줄 생각으로 나선 것이 애타게 찾아왔던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다니 인생은 알 수 없다.
그는 곧 폐관에 들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깨달음의 실마리가 선명할 때 잡아야 한다.
지금 시기를 놓치면 흐릿해져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번에는 경고로 넘어가지만 한 번만 더 그 간사한 혓바닥을 함부로 놀리면 다음에는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니 그리 아시게!"
"죄,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연신 죄송하다 사과하는 조의원을 싸늘하게 내려다본 후 정립은 황급히 유성을 찾아갔다.
그리고 치료 중단을 선언했다.
아직 조의원의 진료실 앞에서 일어난 일을 전달받지 못한 유성이 당황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치료가 잘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지금 중단하면 서서히 다시 악화할 것입니다."
"제가 너무 본론만 말했군요. 그런 뜻이 아니라 실마리를 얻은 듯 하여 폐관에 들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실마리라면... 깨달음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이런 이유로 폐관에 들고자 합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성은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조금 전에 엄청난 신성력 상승이 있어 어리둥절했는데 이런 경사가 있나. 만약 그가 화경의 고수가 된다면...!'
"물론 그러셔야지요. 혹시라도 시간이 늦어진다면 다시 치료해 드릴 테니 얼마든지 도전하십시오!"
정립은 눈가가 촉촉해으나 내공을 통제해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는 감추지 못했다.
"그대는 이미 내 은인입니다. 대성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주저 없이 의방을 떠난 정립은 다시 무림맹주에게 보고하고 폐관에 들었다.
***
유성은 뒤늦게 조의원과 척마대주의 일을 전해 들었다.
'척마대주님이 나를 위해 나서 주었구나. 당분간 조의원은 자중하겠지. 그 일로 환자들이 많이 이탈했다고 하고 사람들 앞에서 오줌을 지리는 추태까지 보였다고 하니.'
사실 고소했다.
자신이 대단한 성인군자도 아니고 사사건건 성과를 시기하고 견제하던 조의원이 큰 망신을 당했는데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다만 손뼉이라도 치고 싶은 것을 꾹 참은 것은 이럴 때일수록 자중해야 더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성의 생각은 이제 척마대주의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무엇이 그를 깨달음으로 이끌었는지 모르겠으나 부럽다. 난 언제쯤 단전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그의 신성력이 버츄얼 판타지의 사제 시절보다 더 빠르게 늘어나고 있으나 아직 단전을 회복할 수 있는 스킬까지는 멀었다.
게다가 무공을 익히는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 정론.
아무리 그가 무극지체라는 전설 속 신체를 타고났다 해도 너무 늦게 단전을 회복하면 근골이 다 굳어 고생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고생은 최종 보스를 잡을 때 할지 모르는 고생이다.
'내가 만든 캐릭터로 살아가고 있으니 게임 속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분명 최종 보스도 있을 테고 그를 물리쳐야 하겠지. 현실로 돌아가든, 아니면 이곳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든 모든 것은 최종 보스를 이겨 내야 얻어낼 수 있으니까.'
당장은 뾰족한 방법이 없다. 하루하루 신성력을 쌓아 나가는 수밖에.
"내일도 많은 사람이 모였으면 좋겠네."
***
낙양의방의 의원들은 돌아가면서 휴무일을 가진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루어지는 진료는 꽤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고, 적절한 휴식을 취해주지 않으면 오래 버틸 수 없다.
체력을 타고났고 의료 행위가 곧 신성력으로 이어지는 유성은 쉬는 날마저 아까웠고, 휴무일도 쉬지 않았다.
유성의 휴무일. 그는 낙양의 빈민가로 향했다.
빈민가 사람들은 돈이 없다.
진료는커녕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일반인들 중에서는 많은 신성력을 올려주는 자들이다.
'열악한 처지에 놓인 환자들을 위해 의료봉사를 다니는 의사들이 더 큰 존경과 감사함을 받는 법이지.'
처음에는 계산적인 이유로 시작했으나 요즘 유성은 그에게 치료받은 환자들이 전하는 감사함에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백의원님, 이번에도 와주셨군요! 의방일 하시고 쉬시지도 못하고 매번 죄송해서 어떡한답니까?"
허름한 옷차림이지만 덩치가 좋은 사내가 백유성을 발견하고 얼른 다가와 옆에 섰다.
나름대로 호위 역할을 하려는 것이다.
아무리 무공을 잃었어도 이류 무사 몇 명쯤은 가뿐한 유성이지만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사람들은 많이 모였습니까?"
"아이고, 물론이지요, 의원님이 곧 오실거라고 다들 기대하고 있습니다."
"얼른 갑시다."
사내의 안내받아 도착한 공터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유성을 발견하고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벌써 몇 차례 치료받은 환자도 있고 빈민가에 알음알음 퍼지는 소문을 듣고 처음 온 사람들도 있었다.
유성이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치료하던 중, 뒤에서 소란이 일더니 사람들이 한쪽으로 갈라섰다.
한 소년을 안은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백 의원님! 여기 사람 좀 살려주십시오!"
유성이 보니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열 예닐곱 정도로 보이는 소년의 가슴에는 부러진 검이 박혀 있었고 옷은 피범벅이었다.
볼 것도 없이 심각한 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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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 의방 생활을 하며 유성은 외상 환자도 많이 받아보았다.
타박상이나 뼈에 금이 간 사람은 물론 골절을 당한 사람들도 찾아왔으나 결국 모두를 고쳐 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고칠 수 있는 수준의 사람만 찾아왔기 때문이다.
단연코 이 정도로 사경을 헤매는 환자가 의방을 찾아온 적은 없다.
가슴에 검이 박힌 자리는 까딱 잘못하면 장기를 찔렀을지도 모르는 위치로, 겉으로 보이는 출혈도 많았다.
만약 다친 장소가 인근이 아니었다면 의방을 찾아가는 동안 죽었을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당신은 다음에 봐줄 테니 자리 좀 비켜 주십시오!"
유성은 임시 진료실 안에서 진료중인 환자를 내보내고 소년을 안으로 들였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소년을 안고 온 남자가 빠르게 말했다.
"저쪽 골목길에서 소운이 실수로 흑도 놈과 몸이 부딪힌 모양입니다. 사실 무림인이라 하기도 힘든 양아치 같은 놈입니다. 그놈이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칼이 부러지자 오히려 소운에게 역정을 내더니 한번 걷어차고 가 버리길래 제가 의원님이 오시는 날인 게 생각나서 얼른 안고 온 것입니다."
"안고 오는 동안 검은 건들지 않은 것 맞습니까?"
"네, 이런 경우에 절대 뽑으면 안 된다고 설명해주신 게 생각나서 그대로 놔두고 안고만 온 것입니다. 소운을 살릴 수 있을까요? 이놈 불쌍한 놈입니다. 안 그래도 어렸을 때 흑도 무리들에게 부모를 잃고..."
손을 들어 남자의 쓸데없는 말을 막은 유성이 부러진 검날을 잡고 신성력을 흘려보았다.
'출혈이 많지만 다행히 내부가 손 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검이 박힌 채 몸이 심하게 흔들릴 정도로 안고 왔는데 이 정도면 이 소년은 아주 운이 좋은 편이다.'
유성은 바로 판단을 내리고 남자에게 말했다.
"살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이 소년을 치료해야 하니 다른 사람들은 진료 못 할수도 있습니다. 양해해 달라고 전해주시고 당신도 밖에서 대기해주십시오."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 연신 고맙다고, 잘 부탁하다고 인사한 남자가 문을 닫고 나갔다.
임시 진료실 밖에서 소운을 안고 온 남자에게 사람들이 연신 질문을 던져댔다.
그중 가장 화가 난 듯 보이는 남자가 씩씩거렸다.
평소 소운을 예뻐하던 자였다.
"이보게, 불쌍한 소운을 저렇게 만들었다는 놈들이 도대체 누군가? 아무리 흑도 무리가 막 나간다지만 죄 없는 민간인까지 건들다니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나도 모르는 얼굴이었네."
"자네는 개방도가 아닌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지 않겠나?"
"나는 무공도 배우지 않은 일결제자일 뿐인데 무슨 힘이 있어 그런 걸 알아볼 수 있겠나. 소운이 싹싹하고 착해 자네가 아낀다는 걸 잘 알지만 일단 기다리세나. 백의원님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네."
"기다리긴 뭘 기다려? 아무리 백의원님의 실력이 대단하다지만 저렇게 중한 상태를 어떻게 살려낸단 말인가? 그러지 말고 누군지만 좀 알아봐주게. 우리가 힘을 합치면 무림인이라도 복수할 수 있을걸세."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혹시 그자가 누군지 알아낸다 해도 우리는 그자를 이길 수 없네. 허튼소리 말게. 그리고 백의원님의 소문을 제대로 못 들었나보군."
"어떤 소문?"
"백의원님이 의선도 손 놓은 척마대주님을 살려냈다는 소문 말이네. 어쩌면 소운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네."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
"그건 틀린 소리라던데. 척마대주님은 치료를 포기한 게 아닌가? 조용히 삶을 정리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야. 분타주님께 들은 거라 틀림없을 거네. 척마대주님이 직접 치료가 잘되고 있다고 했다네."
"그럼 정말 소운이 살 수도 있단 말인가?"
***
'신성력을 다 쓰고 남는 시간에 이런저런 기본 상식들을 알려주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칼을 뽑지 않아서 다행이다. 만약 뽑았다면 남은 신성력으로는 못 살렸어.'
습관적으로 장침을 꺼내려던 유성의 시선이 부러진 검으로 향했다.
'굳이 칼을 뽑아내고 침으로 치료할 필요가 없구나. 상처를 그대로 틀어막은 채 치료하면 쓸데없는 신성력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손이 베이지 않게 조심하여 검날을 잡은 유성이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검이 성스러운 황금빛으로 빛났다. 상처가 심각해 힘 조절을 할 여력이 없다.
치유 스킬을 발동하자 검에 찔린 장기가 회복되며 검이 서서히 바깥으로 밀려 나왔다.
너무 빠른 속도로 빠져나오면 날카로운 검날에 불필요한 상처가 생길 수 있다.
집중력을 잃지 않은 유성은 신중하게 소년을 치료해 나갔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까?
검이 피부 근처까지 뽑혀 나오자 유성은 치유스킬의 발동을 멈추었다.
'많은 사람이 이 소운이라는 소년의 상처가 중함을 목격했다. 다행히 의방 생활을 하며 외상 환자 처치에 노하우가 쌓였지.'
유성은 능숙하게 봉합 도구를 꺼내 아물지 않은 피부를 꿰메기 시작했다.
방금 검에 찔린 곳이 씻은 듯이 나아 있다면 큰 의심을 살 수 있다. 피부를 봉합해 두면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신비한 현상을 들키지 않을 수 있다.
봉합까지 얼추 끝내고 금창약을 발랐다.
유성은 치료가 너무 일찍 끝난 것 같아 소운이 깨어나길 기다리는 김에 그를 진맥해 보았다.
기껏 치료해 놨는데 다른 지병으로 죽어 버린다면 억울할 테니까.
'응?'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유성은 조금 더 자세히 소운의 몸을 살펴보았고, 곧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단한 근골이다. 비록 잘못 먹어 왜소해 보이지만 뼈가 단단하고 혈맥이 넓게 뚫려 있어 무공을 익히기 좋겠구나. 이런 빈민가에서 척마대주보다 근골이 더 좋아 보이는 거지 소년이라니.'
이런 좋은 신체조건을 타고난 소년이 아무 무공도 익히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우연히 무림인이나 의원이 살피지 않으면 겉으로만 봐서는 근골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거지인 소년은 의원에게 진료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유성이 신기한 듯 소운의 몸을 이곳저곳 만져 보고 있을 때 그가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소운이라고 했지? 정신이 드느냐?"
"윽... 누구십니까?"
유성은 소운에게 그의 상황을 일러 주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백의원님이셨군요. 꼼짝없이 죽은 줄 알았는데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하지만 무림인들과 분쟁은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큭... 나쁜 놈들... 저는 실수로 못 보고 부딪힌 것이지만 그자는 피할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피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미쳤다고 무림인에게 시비를 걸었겠습니까? 그런데 그자가 검을 휘두르고 제게 '너 때문에 내 검이 부러졌다. 재수 없는 자식'이라고..."
씩씩거리던 소운이 갑자기 휘청거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으니 무리하지 말고 이걸로 당분간은 몸에 좋은 것들을 사 먹도록 해라."
돈이 약간 든 전낭을 주자 소운이 펄쩍 뛰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비록 거지지만 다들 저를 예뻐해주셔서 어디 가서 굶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치료까지 해주셨는데 돈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유성은 그보다 몇 살 어린 소운이 예의를 알고 어른스러워 보여 기특했다.
"이것도 치료의 일환이다. 잘 먹어야 상처가 빨리 아무니 받아두거라."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바깥에 널 데려와 준 분께도 꼭 감사하다고 하고. 그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거다."
"네, 의원님."
유성은 아직 몸을 가누기 힘든 소운을 누워 있게 하고 밖으로 나가 다른 환자들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힐끗 돌아본 소운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왜 우느냐?"
소운이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주먹을 꽉 움켜쥔 채였다.
"별거 아닙니다."
"괜찮다. 혹시 어디 불편한 곳이 있다면 말해 보거라."
망설이던 소운이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습니다. 크게 다쳤었는데 뜻밖에 겉만 아프고 안은 멀쩡한 느낌이라 신기할 뿐입니다. 다만 제가 우는 이유는 흑도놈들 때문입니다."
"그래.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림인에게 봉변을 당했으니 당연히 속상할 것이다."
"그런 이유도 있지만 부모님 생각이 나서 그렇습니다. 저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과 비슷하게 죽을 뻔했다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유성은 아까 소운을 업고 온 남자가 털어놓은 말이 떠올랐다.
흑도 무리들에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했던가?
'원래 참견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렇게 훌륭한 무재를 가졌으니 기회는 줘도 괜찮겠지.'
유성도 평범한 현대인이었던 사람으로서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힘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는 흑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꽤 마음에 든 소운이 이렇게 억울하고 분해 죽으려 하는데 스스로 복수할 수 있는 방도 정도는 알려 줘도 되지 않겠는가?
"소운아, 사실 네가 정신을 잃고 있을 때 네 몸을 조금 살펴봤다. 너는 무재가 뛰어나 보이는구나."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네가 무공을 배우게 된다면 스스로 복수할 힘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
깜짝 놀란 소운을 놔두고 유성은 진료실을 나섰다.
***
유성이 생각보다 많이 아끼게 된 신성력과 익히고 있는 의술로 다른 환자들을 진료하고 돌아간 후.
소운을 안고 온 개방의 일결제자는 황당한 요구를 들었다.
"뭐? 갑자기 방주님께 안내해 달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개방의 방주님이 얼마나 바쁜 분이신지 아느냐?"
"형님께는 말씀드려도 되겠죠. 방금 백의원님이 저보고 무재가 뛰어나다고 했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그러니 절 소개해 주십시오. 얼마 전 형님이 그러셨잖아요. 개방 방주님이 무재가 뛰어난 아이를 찾고 있다고."
"그랬지. 그랬는데 네가 거기에 해당했단 말이냐?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하긴 내가 알아볼 방법이 없었지만."
"꼭 부탁드립니다."
"좋다. 백의원님 말씀이신데 믿을 수 있겠지. 대신 몸이 다 나으면 가자꾸나. 멀쩡해 보여도 속이 말이 아닐 거다."
소운은 가슴 부근을 건드려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속은 멀쩡하고 겉만 아픈 것 같은데... 정말 신기한 일이지.'
***
십만 방도를 거느리고 있는 개방 방주 용화신개 정도 되면 수많은 골칫거리가 있는 법이다.
그중 가장 큰 골칫거리는 개방의 후개 자리가 오랫동안 공석이라는 점이다.
'십만 명이 넘는 개방도 중에 쓸 만한 무재를 가진 놈이 어떻게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사실 대부분의 개방도들은 무공을 익히지 못한 일반 거지들이니 그들 모두를 살피지 못했을 뿐이지만 용화신개의 처지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 무림맹에 머무르고 있던 용화신개에게 용감하게도 매듭 한 개의 일결제자가 분타주를 통해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취해 왔다.
"의원에게 무재가 뛰어나 보인다는 소리를 들은 녀석을 하나 데려왔답니다."
용화신개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 놈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내 절기를 물려받으려면 웬만한 무재로는 흉내만 내는 것이 고작이다."
"그럼 돌아가라고 할까요?"
"음, 아니다. 혹시 모르니 한번 만나 보자. 그놈들을 데려와라."
용화신개는 소운을 직접 보고 경악했다.
"이 녀석!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난 것이냐! 내가 널 얼마나 찾아다녔는 줄 아느냐!"
마치 잃어버린 아들이라도 만난 듯 크게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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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신개는 소운의 무재를 확인하고 기뻐하면서도 몰래 분타주에게 명령해 소운의 뒤를 캐보았다.
몇십 년 전부터 이상할 정도로 무재가 뛰어난 아이들을 발견하기 어려워졌다.
백 년 기재 수준이 아니더라도 쓸 만하다 싶은 녀석이 씨가 마른 것이다.
그나마 거대문파나 세가는 상황이 나은편이다. 대를 이어 무재가 뛰어난 아이들이 태어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밑바닥을 전전하는 거지들로 구성된 개방은 뛰어난 무재를 가진 아이를 발견하기가 참으로 어려워 골치 아프던 참이다.
그런 상황에서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소운이 나타났으니 혹시 마교의 간자라도 되는지 철저한 검증을 해 본 것이다.
분타주가 며칠간 조사한끝에 보고를 올렸다.
"깨끗합니다. 오히려 흑도에게 부모를 잃은 불행한 과거가 있어 흑도 무리라면 치를 떤다는군요. 얼마 전에도 흑도 무림인에게 죽을뻔한 것을 한 의원이 살려주는 과정에서 무재가 뛰어나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래? 소운의 사정이 딱하구나. 그러나 나 용화신개는 참으로 운이 좋구나. 어디 적당히 쓸 만한 녀석이 나타나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늘 저렇게 뛰어난 아이가 나타나다니. 무공을 익히기 가장 좋은 시기는 아니지만 크게 늦지는 않았다."
흡족해 보이는 용화신개를 보고 낙양 소속의 분타주 중 하나인 철권개는 속으로 다짐했다.
'사실상 소운이 공석인 후개가 될 것이 확실해 보이는구나. 운 좋게 내가 제일 먼저 알게 되었으니 확실하게 줄을 서야겠다.'
소운은 개방의 방주와 독대하게 되었다.
"나는 너를 제자로 받으려고 한다. 네가 먼저 찾아왔으니 충분히 생각하고 있었겠지?"
"그렇습니다. 마침 친하게 지내 왔고 이번에 제 목숨까지 구해주신 진취 형님이 방주님께서 무재가 뛰어난 아이를 찾고 있더라는 말을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저도 형님이 계신 곳이라면 좋겠다 싶어 제일 먼저 방주님 생각이 난 것입니다."
용화신개는 흡족했다.
소운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일결제자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리라 다짐했다.
"좋다. 구배지례를 올리거라."
소운은 용화신개에게 구배지례를 올리고 정식 사제관계를 맺게 되었다.
"넌 이제부터 나 용화신개의 정식 제자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강호에서 무시당하지 않을 배분이니 항상 당당해야 한다. 그리고 네 나이가 있으니 부지런히 무공을 익혀야 한다."
"네, 스승님. 명심하겠습니다."
'나를 안고 백의원님께 데려다 주신 형님께 감사하다. 그리고 백의원님은 사경을 헤매던 나를 치료해주시고 무재까지 확인해 주셨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구파일방 중 하나인 개방 방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
백유성에게 마음 깊이 감사를 표한 소운은 속으로 다짐했다.
'여기서 충분한 인정을 받은 후, 어릴 적 내 부모님을 죽였던 흑도인들, 그리고 얼마 전 나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 넣은 흑도 무림인을 기필코 찾아 내어 복수해 줄 것이다. 그리고 백의원님과 형님께 은혜를 갚을 것이다.'
소운이 개방 방주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은 아니다. 개방은 강호에서 제일 정보력이 뛰어난 집단이었고, 이를 이용하고 싶어 친한 형님인 진취의 핑계를 대고 개방을 선택한 것이다.
싹싹하고 예의 바른 소운은 뜻밖에 은원이 확실한 아이였다.
용화신개가 여러 일로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소운에게 무공의 기초를 봐주고 다른 일을 보러 떠난 후.
철권개는 소운에게 줄을 대기 위해 작업에 들어갔다.
"흠흠, 소운아. 혹시 내가 도와줄 부분이 없겠느냐?"
"이렇게 연무장을 마련해 주시고 수련에 집중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그런 소리 말거라. 이런 건 당연히 해 줘야지. 넌 장차 우리 개방을 이끌어갈 텐데. 너도 방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지 않으냐?"
"후개를 말씀하시는지요?"
"그렇다. 비록 장로님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지만 네가 지금처럼 무공 수련에 힘쓴다면 그 자리는 당연히 네 차지가 될 것이다. 아, 진취에게는 낙양 분타 내의 편한 업무로 배정해 주었으니 이제 배 곯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형님이 정말 좋아하셨겠군요!"
"그래, 또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거라."
소운은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철권개를 보며 한 가지 부탁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형님 말고도 제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백유성 의원님이 있습니다. 그분께도 뭔가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그 부분은 내게 맡기거라."
고마워하는 소운을 보며 철권개는 흡족했다.
'나도 권력의 중심에 가까워질 수 있겠구나. 기다려라, 개봉 총타여. 후개를 모시고 당당히 입성할 것이다.'
그는 휘하 개방도들에게 항상 백유성의 인근에서 혹시 생길지 모르는 불상사에 대비하라는 명을 내렸다.
***
유성도 소운의 근황을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
무재가 뛰어난 줄은 진맥 당시 알아차렸다.
그러나 체계가 잘 잡혀 있는 거대 문파에 입문해 차근차근 무공을 익혀나갈 줄 알았는데 단숨에 개방 방주의 직전제자가 된 것이다.
배분도 배분이지만 엄청난 배경을 등에 짊어진 것이 아닌가?
유성은 개방의 후개가 공석이라는 사실까지는 몰랐으나 소운이 언젠가는 개방의 핵심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진료를 시작하기 위해 진료실로 이동 중, 차의원이 넌지시 다가왔다.
"백의원, 자네 진료실 앞에 줄 좀 보게. 시작도 전에 저만큼 줄 설 정도면 오후에는 오늘 온종일 봐도 다 돌보지 못할 만큼 환자가 몰릴 것이네."
유성은 그의 진료실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가만히 헤아려 보았다.
양의원이 종종 환자를 다 돌보지 못할 정도로 줄이 길게 늘어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유성의 줄도 그에 못지 않았다.
이게 다 척마대주가 크게 일을 벌여 준 덕이다.
조의원에게 진료를 보던 환자들이 대거 이탈했고 다른 의원들을 찾던 환자들도 유성의 실력이 좋다는 말에 호기심을 느낀 듯했다.
유성으로서는 진료 시간 동안 끊임없이 환자를 받을 수 있으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환자를 다 보지 못하고 돌려보내야 하는 것은 확실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계속 이렇게 몰리면 다 보기 힘들 수도 있겠군요."
"내 말이 그 말일세!"
손바닥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마주친 차의원이 화색을 띠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일부 환자들을 다른 진료실로 좀 분배해주는 게 어떻겠나? 여차하면 자네가 이어 봐야 할 수도 있으니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내 진료실이 가장 좋겠지."
자기가 환자를 더 받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냈으나 썩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괜히 대기 줄이 긴 데 욕심을 부려 줄 세워두었다가 다 받지 못하면 환자들이 불만을 품을 수 있다.
모든 환자가 유성의 손길을 필요하는 것도 아니고 차의원 정도면 낙양 의방 내에서 그나마 친분이 있는 편이니 이 정도는 도움을 줘도 괜찮으리라.
"괜찮은 생각입니다. 적당한 환자들은 제가 차의원님께 안내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그리고 고맙네!"
유성은 굳이 신성력을 써야 하는 수준이 아니면서 손이 많이 가는 환자들을 차의원에게 보냈고 항상 진료가 조금 일찍 마무리되던 그는 그것만으로도 유성에게 크게 고마워했다.
조의원이 모함할 때도 은근히 유성을 두둔하고 줄을 섰던 것이 빛을 발한 것이다.
치료 행위를 한 것은 아니지만 차의원이 고마운 마음을 품은 것은 미약하지만 분명히 신성력으로 전환되었다.
진료가 끝난 후 차의원은 유성에게 제안했다.
"오늘은 내가 저녁 식사를 대접할 테니 한잔 하러 가지 않겠나?"
유성은 솔깃했다.
정작 대도시 낙양까지 와서 이곳을 제대로 즐겨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현실에 있을 때도 혼밥하러 다니는 편도 아니었으니 함께 갈 사람이 있을 때 낙양의 밤거리를 즐기는 것도 좋아 보였다.
"그러지요."
"하하, 잘 생각했어. 가세나."
식사를 대접하고 앞으로도 환자를 받겠다는 속셈을 가진 차의원이 신이 나서 앞장서 걸었고 유성은 조용히 그를 따랐다.
유성은 골목길을 걸어가며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이런 외진 길에 거지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별로 길지도 않은 골목에 거지들이 참 많군.'
심지어 가끔 눈도 마주친 것 같았다. 그러나 적선을 요구하기 위해 동정심을 유발하는 눈빛은 아니라 애써 무시했다.
소운에게 잘 보이고 싶은 철권개의 지시로 일부 거지들이 백유성을 보호하기 쉬운 곳으로 구걸 장소를 옮긴 사실을 알 수는 없는 법이다.
낙양의 번화가로 향하는 지름길인 골목길들을 제 집 안방처럼 누빈 끝에 차의원은 한 주루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어떻겠나?"
사주는 사람이 안내한 곳이라 불만이 있을 리가 없다.
"원래 이런 곳은 가장 높은 곳이 경치가 좋아. 술도 더 맛있는 법이네."
"자주 와보셨나보군요."
"자주는 아니고 몇 번 와 봤지. 어서 올라가세나."
마침 술 마시기 좋은 밤 시간대는 아니라 자리는 널널했고 점소이는 차의원과 유성을 3층 창가 쪽의 작은 탁자로 안내했다.
차의원이 잘 아는 요리와 술을 시키고 둘은 잡담을 나눴다.
잠시 후, 무복을 입은 십여명의 사람이 우르르 3층으로 올라와 넓은 탁자를 잡고 앉았다.
그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여러 요리와 술들을 풍족하게 시켰다.
"아마 무림학관 후기지수들 같네."
무림학관은 무림맹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학원이라 할 수 있다.
각 문파나 세가에서 뛰어난 후기지수들을 모아 흑도 무리들과 있을 전투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를 가르킨다.
최근 흑도 무리들의 힘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커서 무림맹에서 신경 써서 후기지수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아직 실전을 치르지 않은 탓인지 유성은 그들을 환자로 맞이한 적이 없다. 또는 다른 의원들만 찾았거나.
차의원이 곧 그들에게 신경을 끄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으나 유성은 당당해 보이는 그들에게서 과거 자기 모습을 보았다.
"팽형은 정말 대단하군. 스물셋에 절정 고수가 되다니, 정말 축하하오!"
"하하, 고맙소!"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차의원이 놀라 그들을 한번 보고 유성에게 속삭였다.
"팽가의 후기지수가 절정 고수가 되어 축하하는 자리인 모양이네. 스물셋에 절정 고수면 정말 대단한 게 아닌가? 듣기로 장삼봉 진인 이후 세대 중 가장 빠르게 절정 고수가 된 자가 스물하나라고 들었네. 앞으로 하북 팽가의 미래가 밝겠어."
유성은 간단히 대꾸만 하며 술잔만 기울였다.
'오늘은 취하고 싶은데 만독불침의 몸이라 그런지 취하지도 않는구나.'
새하얀 유성의 얼굴은 앞에서 서서히 벌겋게 물들어가는 차의원의 그것과 확연히 대비되었다.
열다섯에 이 게임 속으로 빙의하여 열일곱에 절정 고수가 되었던 천재가 바로 유성이었다.
지금은 무공을 회복할 방법을 발견해 차근차근 실행해 나가고 있다 해도 한번 손에 쥐었던 것을 놓친 심정이 썩 좋지 않았다.
"백의원, 자네는 왜 하나도 안 취한 것 같지?!"
술이 많이 약한지 금세 취한 차의원의 목소리는 꽤 컸고, 마침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대화가 끊긴 순간을 제대로 파고들었다.
모두 뒤를 돌아보았다.
그중 하나가 외쳤다.
"엇! 넌 백가장의 둘째가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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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학관의 후기지수들은 3층으로 올라올 때부터 인원이 많았다.
유성은 처음 몇 명만 확인하고 곧 관심을 끊었기에 모두를 알 수 없었고, 차의원이 설명하던 중에도 절반은 등지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명이 자신을 알아보았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낙양 의방의 백의원이 아니라 백가장의 둘째로.
유성을 알아본 남자는 꽤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백가장에 있는 동안 스치듯 봤던 자이지만 곧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혹시 진가장의 자제분이십니까?"
"맞다. 진영호다. 네 이름이 백... 이름이 뭐라고 했느냐?"
"백유성입니다."
"그래, 백유성. 네놈의 낯짝은 어째 여전하구나."
신경 써서 커스터마이징 한 덕에 빛나는 유성의 얼굴에 관한 언급이다. 그러나 전혀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빛에 재수 없다는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고, 입가에는 비웃음마저 보였다.
쓰게 웃은 유성이 대꾸할 말을 찾고 있을 때, 팽형이라 불렸던 자가 끼어들었다.
눈썹이 굵고 각진 턱으로 꽤 남자답게 생긴 자였다.
"진형, 아는 사람이오?"
진영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유성에 대해 줄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내용이라는 것이 당사자의 기분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이었다.
"아, 팽형. 저놈은 호남 백가장이라는 곳의 둘째였소. 물론 지금은 아니오. 전해 듣기로 가문에서 쫓겨났다더군요."
심기가 불편해 물었던 팽지산으로서 진영호의 말은 혹하는 것이었다.
가문에서 쫓겨났다니, 얼마나 자극적인가?
아마 자신이 무언가 사고를 치고 하북팽가에서 쫓겨났다면 아마 수치스러움에 죽어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에게 가문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호오, 어지간해서 가문에서 쫓겨날 일이 있나? 무슨 큰 죄라도 지었는지 궁금하군."
말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무림학관의 여자 동기들에게 향했다.
그녀들은 유성의 얼굴을 보고 연신 감탄하다가 유성이 가문에서 쫓겨났다는 소리를 듣고 의아해했다.
'흥, 얼굴이 밥 먹여 주는 줄 아느냐.'
오늘은 팽지산이 절정 고수가 된 날이다.
이제 정파의 후기지수들 중에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경쟁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보다 일 년 빠르게 절정 고수가 된 후기지수가 있었다.
스물 둘에 절정 고수가 되어 팽지산의 질시를 받았던 녀석은 멍청하게 자객에게 암습당하고 말았다.
'백 년기재라는 녀석이 그런 꼴이 되다니, 이제 당대의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이다.'
즉, 앞으로 자기 세상이라는 소리다.
서서히 영향력이 약해지더라도 적어도 오늘만큼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날.
그런데 그런 날 여자 동기들이 유성에게 관심을 쏟았으니 심사가 뒤틀렸다.
와중, 유성이 가문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듣자 기분이 살짝 풀렸다.
진영호가 팽지산의 질문에 답했다.
"내가 백가장의 후계자와 친우사이인데 글쎄 저놈이 형을 제치고 자기가 후계자가 될 욕심을 부렸고, 무리하게 무공을 익히다가 주화입마에 빠졌다지 뭐요? 무공을 잃고 나서 몇 년 전에 가문을 떠났다고 들었소."
"백가장이라면 그래도 호남에서는 들어 본 적 있는 정파로 알고 있는데 안정적인 정파의 내공심법을 익히고 주화입마에 빠지다니 얼마나 형편없다는 말이오?"
"뱁새가 황새 쫓아 가려다 가랑이 찣어진 격이지요."
별 볼일 없는 녀석이 아닌가?
팽지산의 기분이 완전히 풀렸다.
무공을 잃었다는 말 때문인지, 무림학관의 여자 동기들이 급격히 흥미를 잃는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팽지산의 시선이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향했다.
당연히 그녀도 마찬가지 일 거로 생각하며.
'아니? 네가 왜...'
그런데 그녀는 다른 누구보다 유성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여자 동기들이 흥미를 잃은 것과는 달랐고, 팽지산은 다시 질투심이 타올랐다.
저 형편없는 녀석에게 완전히 관심을 끊게 만들고 싶어졌다.
경멸의 눈빛을 보내면 더 흡족할 것 같았다.
"그런데 궁금하군."
"무엇이 말입니까?"
"정파의 내공심법을 익혀 주화입마에 빠지려면 백에 한, 둘을 제외하고 최소한 절정 고수는 되어야 할 텐데, 혹시 저자가 욕심에 눈이 멀어 마공이라도 구해 익힌 것은 아니겠지?"
진영호가 멈칫했다.
'마공이 갑자기 왜 나와? 나는 당연히 백에 한, 둘의 경우라고 생각했는데.'
진영호는 처음에 백유성을 조롱할 생각으로 이름을 모르는 척한 것이다.
의원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으나 호남 백가장의 백유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왜 아니겠나?
호남은 장강 이남에 위치하여 무림에서 변방으로 취급받는 곳이다.
절세 고수라도 나타나지 않는 한 중앙 무림의 관심을 받기 어려운 지역이고 수많은 중소문파들이 치고받고 다투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있는 작은 무가 백가장에서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무재가 튀어나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백가장주가 적자를 제치고 사생아인 유성에 대한 총애를 드러냈을 정도였다.
거기까지는 백가장주의 팔불출로 이해할 수 있으나 백유성은 성과로 보여 주었다.
거의 있는 듯 없는 듯했던 유성이 제대로 무공을 수련한지 고작 1년.
진영호는 친우이자 백유성의 형이 되는 백진성의 한탄을 듣고 유성의 무재를 체감할 수 있었다.
"그놈은 벌써 절정의 벽에 도달했다. 몇 년만 흘러도 얼마나 고수가 될지 모르는 일이지."
어렸을 때부터 무공을 익힌 자신이 막 일류 무사가 되었거늘 벌써 절정의 벽에 도달했다니?
절정 고수로 향하는 벽에서 5년을 허비하더라도 유성의 나이는 스물 한 살이다.
전설로 내려오는 장삼봉 진인과 같은 나이에 절정 고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의 무재라면 5년이 걸릴 것 같지도 않았고.
백가장에 잘된 일이 아니냐는 말은 건네지 못했다.
백진성이 얼마나 유성을 싫어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진영호는 그런 무재를 가진 유성이 무리하여 마공을 익힐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팽지산이 원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어야 한다.
앞으로 무림의 대세로 떠오를 후기지수가 바로 그가 아닌가?
"이런, 팽형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왜 마공을 고려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소. 보자, 저 녀석은 이제 고작 스무 살이고 가문에서 쫓겨난 지도 몇 해 되었으니 당시에 절대 절정 고수였을리가 없소.
이는 과거 달마대사나 초대 천마, 장삼봉 진인도 이루지 못했을 거요.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과연 마공도 가능성이 높군. 팽형의 통찰력에 항상 감탄만 하게 되오."
비록 무림맹이 수많은 흑도 무림인들을 모두 통제하기 어렵다 해도, 마공을 익힌 자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손속을 보여준다.
만약 무림맹에 마공을 익힌 자가 있다고 신고한다면 무려 척마대가 출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무림맹 최고의 무력집단 척마대.
게다가 들리는 소문으로 화경의 고수가 될지도 모르는 척마대주 정립!
팽지산에 이어 진영호마저 마공의 가능성을 언급하자 대부분의 무림학관 후기지수들도 안색이 변했다.
서서히 유성을 향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크흠."
어느새 차의원은 유성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문제가 생긴다면 가차 없이 버리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하는 모습을 보며, 유성은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마공을 익히면 흔적이 남는다. 확인해 보면 금방 드러날 일. 어차피 난 거리낄 것 없지만 아무 인연도 없던 자들이 함부로 말하는 건 좀 짜증 나는구나. 차의원이야 어차피 오해였다는 걸 알면 다시 달라붙을 사람이고. 참 한결같구나.'
자신을 조롱할 목적인 진영호도 짜증 났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적의를 드러내는 팽지산 때문에 자존심도 상했다.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절정 고수가 된 시기로 따지면 한참 후배인 녀석이 기세등등한 모습이란.
'날 곤란하게 할 작정이라면 어느 정도 성공하긴 했네.'
까딱 잘못하면 맥문을 내주어 마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확인이라도 받아야 할 판이다.
그때, 유성의 눈에 어느새 3층으로 올라온 남자가 보였다.
그는 일행들과 함께였는데 유성이 잘 아는 자들도 몇 명 섞여 있었다.
바로 자신에게 진료를 받았던 환자들이다.
그가 다가오자 인기척을 느낀 후기지수들이 뒤를 돌아보다가 황급히 인사했다.
팽지산과 진영호도 예외가 아니었다.
"헉,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남자는 그들에게 고개만 까딱여 대충 인사를 받았다.
마치 그들이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성큼성큼 후기지수들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그가 유성 앞에 서서 팔을 활짝 벌렸다.
"하하! 주루에서 백의원을 만나다니! 안 그래도 언제 꼭 한번 한잔 대접하고 싶었는데 잘 됐소! 나와 한잔 하시겠소?"
그의 커다란 손은 이제 유성의 양손을 덥썩 붙잡고 크게 흔들었다.
유성은 그의 과한 호들갑에서 자신을 도와주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자신과 친하다는 모습을 보여 유성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백호단주님, 감사합니다만 무림학관의 후기지수분들께서 제게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고 해서요. 이야기가 아직 안 끝난 듯 하여..."
"어허, 그랬군."
백호단주가 몸을 돌렸다.
무리보다 한 발자국 앞에 나와 있던 팽지산과 진영호를 훑어보았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백호단주의 등장에 놀랐는지 몸이 살짝 굳어 있었다.
"그래, 우리 백의원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한번 말해 보게들."
팽지산은 형들이 여럿 있어 가문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없다.
그의 꿈은 무림맹에 입맹하는 것이었고 백호단주는 미래의 상관이 될 수도 있는 자였다.
그런 자가 '한번 말해 보게들'이라고 하문했고, 팽지산에게는 꼭 '한번 지껄여 보아라'라고 들렸다.
팽지산은 얼른 진영호를 가리켰다.
백호단주가 3층으로 올라오면서 이전 대화의 일부를 들었을 것이다.
모든 일을 없었던 것으로 여길 수는 없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친구가 이야기 전달 과정에서 오해 살 발언을 하여 잠시 가능성을 따져 보았을 뿐입니다. 진형, 아무래도 마공일 리는 없지 않겠소? 다른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는데."
"마, 마공이라뇨. 당연히 아니겠지요. 단지 여러 가능성들을 검토했을 뿐입니다. 제 생각에는 백에 한, 둘의 경우가 아닌가 하는데... 당연히 그렇겠지요. 아무튼 백...의원에게 더 이상 볼일이 없으니 편히 즐기십시오, 백호단주님."
"흠, 그런가. 알겠네. 백의원, 이제 괜찮겠소?"
유성은 팽지산에게 팽당한 진영호가 당황하는 꼴이 우스웠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괜히 적으로 만들어 좋은 일은 없으니.
"좋습니다. 한잔 하시지요."
"하하, 오늘은 왠지 이 주루로 오고 싶더라니 내가 운이 참 좋소. 잠시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올 테니 기다려주시오."
백호단주는 그와 함께 온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돌려보냈다.
"흠흠, 잘 해결되어 다행이네.
유성은 상황이 일단락 되자 어느새 바짝 옆에 붙어 있는 차의원을 흘겨보았다.
차의원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모습이다.
무림학관의 후기지수들은 백호단주에게 인사하고 황급히 주루를 빠져나갔다.
그들의 탁자에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음식들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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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을 끝내고 주루 밖으로 나온 팽지산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3층을 올려다보았다.
"와하하하하!!!!"
백호단주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1층인 여기까지 들려왔다.
'설마 날 조롱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헤어질 때까지 유성이 딱히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기에 금방 의심을 접은 팽지산은 진영호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괜히 이 녀석이 유성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제대로 축하 자리를 즐기지도 못한 것이다.
시켜 놓은 음식들의 대부분은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상태로 위에 그대로 놓여 있을 것이다.
"진형,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소? 백호단주님이 백의원이라고 부르며 저렇게 친근하게 굴지 않소?"
"팽형, 저 녀석은 백가장의 둘째가 맞소. 그런데 백의원이라면..."
진영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백호단주가 친근하게 굴만한 백의원이라면 한 명 떠오르는 자가 있었다.
"백유성이 설마 그 백의원이라고...? 아니, 의술을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설마 무공을 익히기 전에 의술을 먼저 익히고 있었나?"
"혼잣말만 하지 말고 아는 게 있다면 말해 보시오."
"아, 팽형. 혹시 아까 백유성 그놈... 아니, 그 의원이 낙양 의방의 백의원이 아닌가 해서 그렇소."
"낙양 의방의 백의원이라면... 척마대주님이 싸고 돈다는 그 의원말이오? 아까는 호남 백가장의 자제라고 하지 않았소?"
"백가장의 자제도 맞소. 아무래도 동일인인 듯하오."
이용해 본 적은 없으나 팽지산도 낙양 의방 백의원의 소문을 들었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의원으로, 내상을 입은 무림맹 무사들도 그의 치료받고 나면 금방 떨쳐 내고 일어나게 할 정도로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있단다.
조심스럽게 낙양 의방 제일 의원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흥, 무공에는 재능이 없어도 의술에는 꽤 재능 있나 보군.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그러게 말이오.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번 술은 내가 살 테니 다른 곳으로 갑시다."
진영호의 말에 팽지산도 정신을 차렸다.
약간 체면을 구겼지만 더 이상 백유성이 화제가 되어 좋을 일은 없다.
팽지산은 무림학관 후기지수들을 데리고 다른 장소로 향했다.
남궁유린은 맨 뒤에서 따라가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그녀는 백유성의 이름을 듣자마자 그가 낙양 의방의 백의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듣던 대로 아주 잘생겼고 젊어. 백유성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 중 낙양에 있을 사람은 그밖에 없을 거야.'
남궁유린은 얼마 전 그에 대한 소식을 듣고 낙양 의방에 한번 찾아가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와중 우연한 기회에 그를 먼저 보게 된 것이다.
'백호단주님도 큰 덕을 봤다더니. 오늘 보니 그를 많이 아끼는 모양이야. 실력이 대단한가 보네. 어쩌면 그 사람이 오라버니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백 년 기재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떠들석 하게 만들었던 남궁유현의 여동생이 바로 그녀였다.
"유린. 앞으로 오지 그래."
"잘 따라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뒤로 가지. 진형, 앞장서주시오."
"아, 물론이오."
진영호가 몰래 팽지산에게 주먹을 불끈 쥐며 웃었다.
짝사랑녀와 잘해 보라는 의미다.
***
유성은 해가 뜨기 직전 스르륵 깨어났다.
백호단주, 차의원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으나 숙취는 전혀 없었다.
애초에 취하지를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물로 목을 한번 축이고 마당으로 나가 목검을 집어 들었다.
유성은 내공심법을 운용할 수는 없으나 매일 아침 검법을 수련하고 있었다.
휙- 휙-
목검이 흐물흐물 움직였다.
찌르고 베고, 변화하고.
어지럽게 초식이 펼쳐진다.
백가장의 가전무공 참환검법에서 시작했으나 지금은 그 뿌리조차 알아볼 수 없게 변형이 되어 있다.
다른 무공을 견식할 때 얻은 깨달음이 접목되고 있는 것이다.
'참환검법은 베기 위주의 제법 쓸 만한 검법이다. 그러나 분명 상승무공이라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난 가문에서 나온 몸이니 그대로 사용해서도 안 되고. 나만의 무공이 필요하다.'
내공이 실리지 않았기에 큰 위력은 보이지 않았으나 언젠가 내공을 회복한 후에는 흐물흐물한 움직임에 강맹한 힘이 실릴 것이다.
그때 되면 검법의 진가가 드러날지 모른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새로운 검법은 조금씩, 하지만 꾸준하게 변화해나갔다.
'후, 오늘은 이쯤 할까.'
검법에 이어 권각법, 보법을 얼마간 수련한 유성은 몸을 씻고 식사한 후 의방으로 출근했다.
낙양 의방에 방문하는 환자들은 대부분 삶의 여유가 있는 자들이다.
조금 더 여유가 없는 자들을 위한 의방은 또 따로 있다.
그러나 유성은 그날 오후 허름하고 여기저기 흙범벅된 옷을 입고 있는 남자를 환자로 받게 되었다.
그는 사십 대 정도로 얼굴이 타서 시커멨으나 눈이 쳐져 순박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어깨에 낡은 망태기를 메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약초꾼으로 보였다.
하인이 절뚝거리는 그를 데리고 들어왔다.
"의원님, 제가 약초를 캐다가 산에서 굴렀는데 발목을 접질렀습니다. 의원님이 용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왔는데 혹시 이거 오래 쉬어야 할까요? 꼭 캐고 싶은 약초가 있어서 무리했더니 그만..."
혹시 일을 못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스러움이 표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번 봅시다."
과연 혼자 걷기 힘들 만 했다.
오른쪽 발목이 시퍼렇게 멍들고 퉁퉁 부어 있어 까딱 잘못했으면 산에서 내려오지도 못했을 수준이었다.
최소 몇 주에서 길게는 한 달 이상 쉬어 줘야 할 수도 있다.
유성은 그의 행색을 살폈다.
약초꾼은 몸으로 먹고 사는 직업. 오래 쉬게 되면 먹고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신경 써서 치료해 줘야겠는걸. 신성력이 조금 소모되겠군.'
열심히 쌓아온 덕에 그 정도는 여유가 있다.
"침을 잘 맞으면 될 것 같군요. 잠깐 다른 곳을 보고 있으십시오."
"네? 네."
영문 몰라 하는 약초꾼이 천장을 쳐다보았다.
유성이 시침을 하며 치유 스킬을 발동하자 시퍼런 멍이 빠지며 붓기가 스르륵 가라앉기 시작했다.
실시간으로 이런 현상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잠시간 시선을 돌리는 편이 둘러대기도 좋다.
부은 위치에 침을 찌르자 약간 이마를 찡그렸던 약초꾼의 표정이 갑자가 사르르 풀렸다.
"어?"
통증이 빠져 의아해하는 약초꾼에게 말했다.
"다행히 겉만 요란하고 속은 별거 없었으니 하루 이틀쯤 푹 쉰 후에 괜찮으면 산행을 나가도 좋습니다."
"아니, 붓기가 벌써 빠졌답니까?"
"운이 좋으셨습니다. 다음에 또 다치시면 위험하니 약초를 캐려거든 조금 더 안전한 곳에서 캐십시오."
약초꾼은 신기한지 손으로 발목을 주물러보다 깜빡 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의원님. 제 이름은 초산이라고 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거푸 감사 인사를 한 초산이 사라진 후, 유성은 잠시 후 또 다른 약초꾼을 환자로 받게 되었다.
그는 아예 산에서 굴러 여기저기 타박상이 생겼고 마찬가지로 발목도 조금 부은 사람이었다.
'또 약초꾼 환자가? 오늘은 무슨 날인가 보구나.'
원래 환자가 원치 않으면 일부러 캐묻지 않으나 유성은 궁금해져 이유를 물어보았다.
"오늘만 약초꾼 환자들을 두 명째 받는데 무슨 일 있습니까?"
"아, 저 말고 또 있었답니까? 에휴, 경쟁자가 늘어서 큰일입니다. 사실 소림사에서 약초 수배를 내렸거든요. 다들 그거 찾는다고 뛰어들어서는... 그런데 발목이 이래서야..."
한탄하는 약초꾼의 발목을 치료해 주자 그는 연신 감사 인사하고 떠나갔다.
찾아오면 치료는 해 줄 수 있으나 산에서 다치면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유성은 소림사에서 수배했다는 약초가 뭔지 모르겠으나 더 이상 약초꾼들이 다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난 후.
"죄송합니다, 의원님. 저 또 왔습니다!"
처음 그를 찾아왔던 약초꾼 초산이 또 찾아왔다.
벌써 네 번째 방문이다.
"또 다치셨습니까?"
"그래도 이번엔 조금 덜합니다. 이번에도 잘 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건 제가 직접 캔 것들인데 귀한 겁니다. 건강 챙기시라고 조금 챙겨 왔습니다."
주섬주섬 약초들을 꺼내놓으며 쓸데없이 씩씩한 초산을 보고 유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초산이 두 번째로 찾아온 날, 유성은 그에게 소림사에서 수배 중인 약초 때문이냐고 물었고 그는 그 일을 포함하여 잡다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진료중에 일어난 일이라 크게 시간을 뺏지 않았으나 그는 꽤 수다스러웠고, 네 번째 진료인 오늘 나머지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었다.
약초꾼들이 온 산을 헤집고 다니는 내막은 이렇다.
소림사에는 대환단이라는 대단한 단약이 있다.
먹으면 무림인에게는 1갑자의 내공을, 그리고 일반인에게는 무병장수를 보장한다는 진귀한 보물이다.
그러나 단약을 만드는 과정이 극히 까다로워 거의 30년이 걸린다고 한다.
제조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대환단이 항상 부족한 것은 그런 이유라고 한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 도달해 있는 지금 대환단 제조에 큰 차질이 생겼으니, 마지막 단계에 필요한 50년 이상 된 화령초가 도무지 구해지지 않는다고.
자칫 잘못하면 30년간 들인 공과 지금껏 쏟아부은 진귀한 영약들이 모두 무용지물이 될 심각한 상황이라고 한다.
곧 약초를 구할 수 있겠지, 싶어 느긋하던 스님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져 최근에는 전국의 약초꾼들에게 수배를 내린 상태라고 하고.
"어찌 그런 내부 사정까지 알고 계십니까?"
"사실 제 목숨을 구해주신 소림사 승려분이 한 분 계십니다. 그때 그분과 인연이 생겨 자세한 내막을 들은 것이지요. 어차피 마지막 약초 말고는 제조 방법을 모르니 남들에게 알려주어도 상관없는 내용입니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큰일입니다. 저는 절 구해주신 소림사 승려님께 생명의 빚을 갚고 싶습니다. 그런데 약초꾼들끼리 정보 교류를 해 보니 전국의 진귀한 약초들이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과거였다면 50년 된 화령초는 몇 년에 한번 꼴로 발견 되었으나 최근에는 눈을 씻고 찾기 힘들다더군요. 고작해야 2~30년 산이 끝이랍니다. 아무튼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발 다음에는 오지 마십시오."
이제 정이 들 지경이다.
초산이 돌아간 후 유성은 진료를 끝내고 신성력을 가늠해 보았다.
'아직 다음 스킬을 배울 정도는 안 되는 것 같은데 괜히 초산의 말을 들어서 신경만 더 쓰이는구나.'
다음 예정된 스킬은 [촉진]과 [해독].
유성이 모시던 여신 가이아는 대지와 치유의 여신이다.
하급 신관은 신전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전념해야 했고 밑바닥부터 시작한 유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촉진을 사용한 약초 재배 역시 질리도록 해 보았다.
제때 스킬을 배울 수 있다면 화령초를 급속으로 키워내는 것도 가능할지 모르는데.
그럼 항상 다리를 절뚝이며 나타나 민망한 웃음을 흘리는 초산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벌써 정이 들었나.'
백호단주는 다르게 생각하더라도, 그와 같은 사람이 소화기능 좀 떨어지는 건 별일 아니다.
하지만 초산과 같은 약초꾼이 약초를 캐다가 잘못 다치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다.
***
며칠 후, 모산파로 떠난 진은선으로부터 편지가 한 통 도착했다.
[유성님, 제가 해냈어요!]
얼마나 신이 났는지 첫 마디에는 인사도 생략하고 그렇게 적혀 있었다.
유성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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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하인의 헛소문 유포에도 불구하고, 높은 사람이 엮였기에 모두 조심하여 별다른 문제로 불거지지는 않았다.
다만 제갈영영이 자주 찾는 의원이라는 명성 덕에 무림맹 무사들이 백유성을 지목하여 진료받는 일이 잦아졌다.
많은 사람들은 무림인들은 병에도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내공 심법을 수련하고 몸을 움직여 무술을 수련하는 무림인들은 일반인들에 비해 면역력이 뛰어나 더 건강할 뿐 질병에 걸릴 수 있다.
증상도 덜하고 회복도 빠르기에 착각하는 것일 뿐, 제갈영영의 두통만 봐도 한계를 넘어서는 혹사에는 몸이 이상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다.
무림맹 무사들은 크고 작은 질병으로 낙양 의방을 찾는 일이 많았는데, 양의원에 이어 실력도 좋고 적당히 기분 좋게 치켜세워 주는 방법을 아는 조의원이 가장 인기가 많았다.
분명 그랬는데, 최근에 상황이 변했다.
"어서 오십시오. 백호단주님이 아니십니까?"
백호단주는 하얀 무복을 입고 얼굴이 붉은 50대 남성이었다. 그가 유성을 찾아온 것이다.
"반갑소. 부하들이 백의원이 실력이 좋다고 추천하기에 찾아오게 되었소."
"그러시군요. 안 그래도 최근에 백호단원들이 몇 분 다녀가셨지요.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음식을 먹어도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잘되지 않소. 치료를 받아도 그때 뿐이라 속는 셈 치고 와본 것이오. 부담갖지 말고 살펴보시오."
유성은 백호단주의 정보를 떠올렸다.
'술과 고기를 좋아하고 오랜 기간 소화불량을 호소했다. 이는 위 또는 췌장이나 간, 담낭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진맥 결과 간과 담낭쪽 문제로 판단되었다.
간과 담낭은 나이가 들수록 해독과 대사 기능이 떨어지기에 식습관에 따라 이런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간과 담낭의 문제군요."
"역시 조의원과 같은 소리를 하는군. 혹시 약을 지어 주려는 것이오?"
백호단주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다른 원인을 찾아낼까 기대했으나 같은 진단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약은 꾸준히 먹고 있지만 약간의 효과는 있어도 그의 병을 완치시켜 주지 못했다.
부하들의 추천에 백유성을 찾아왔지만 그는 너무 젊은 얼굴을 보고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닌가 후회하고 있었다.
가벼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억지로 이번 진료만 받고 다음부터 조의원에게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닙니다. 시침만 할 겁니다."
대뜸 시침만 한다는 게 아닌가?
침이 장기를 보하는 효과가 있어 그도 여러 차례 맞았으나 약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말에 백호단주는 고민에 빠졌다.
유성은 이런 환자들을 많이 보았기에 장담했다.
"믿고 맞아보시지요. 여러 백호단원분들도 크게 만족하셨습니다."
"음..."
여전히 고민하는 그를 보고 유성은 필살기를 시전했다. 당사자가 먼저 그래도 좋다고 허락해주었다.
"총군사님께서도 제 침술이 뛰어나다고 칭찬이 자자하셨습니다. 믿어보시지요."
백호단주는 솔깃했다.
머리가 아파 자주 이마를 찌푸리던 제갈영영이 최근 들어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자신만만한 유성의 태도도 어느 정도 신뢰감을 주었다.
'낙양 의방의 시험이 무척 어렵다고 들었다. 최소한 돌팔이는 아니겠지.'
백호단주가 결정을 내린 후에는 일사천리였다.
미리 설명을 들었음에도 기다란 침이 깊숙이 찔러 들어올 때는 긴장되어 칼자루를 찾았으나, 곧 백호단주는 더부룩한 속이 사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찔끔 새어 나온 피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루면 아물 것이다.
그는 신기한 듯 가슴과 배를 쓸어보았다.
'마치 이십 대로 돌아간 것만 같구나. 보아하니 하루 이틀 사이에 다시 악화할 것 같지도 않다.'
백호단주가 감탄해 입을 열었다.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인지 모르겠소. 어차피 해결할 수 없다 여겼기에 치료받는 중에도 술과 고기를 줄이지 않았소. 그런데 이런 가벼운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줄여볼 용의가 있소. 술과 고기를 얼마까지 줄여야 하겠소?"
편안하지만, 어딘가 심각해 보이는 백호단주.
일반적인 의원이라면 모르겠지만, 유성의 목적은 신성력을 열심히 쌓는 것.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억지로 참아 마음의 병이 쌓이면 더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제가 있으니 적당히 즐기셔도 좋습니다. 속이 안 좋아진다면 저를 다시 찾아오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말끔하게 치료해드리겠습니다."
백호단주는 유성의 뒤로 서광이 어리는 듯했다. 그는 크게 감격했다.
무재가 있어 상당한 경지를 이루었고, 무림맹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여 높은 급여를 받는 그는 술과 고기를 먹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었다.
다른 의원들은 항상 식습관을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했건만, 유일하게 백유성은 그에게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말해 준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중히 포권지례를 올렸다.
"내가 명의를 몰라뵀소.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시면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겠소."
유성은 상당한 양의 신성력이 늘어나는 것을 느끼며 즐거워했다.
백호단주가 얼마나 오랜 기간 소화불량으로 고생해 왔으며, 유성에게 감사함을 느끼는지 알 수 있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평소 무림맹의 영웅분들이 무림의 안녕을 위하여 얼마나 고생하고 계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단주님 주위에 지병으로 고생하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저에게 소개해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하하! 내가 두루두루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여 발이 넓으니 나만 믿으시오!"
그날 저녁, 백호단주는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 왔던 지병의 완치 기념으로 그의 인맥들을 초대해 성대한 술판을 벌였다.
불러 모은 지인들의 숫자는 거의 50여명에 달했다.
술에 잔뜩 취해 유성의 대단함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어 댄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조의원이 그의 담당 하인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요?"
"방금 창호단주도 백의원에게 다녀갔다지?"
"그렇기는 합니다만 아직 조의원님을 찾는 무림맹 분들도 많지 않습니까요?"
하인도 조의원이 왜 심기가 불편한지 알고 있었다.
조의원은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꽉 잡고 있다고 생각했던 무림맹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명씩 백유성 쪽으로 옮겨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둑에 균열이 생기면 처음에는 물이 조금씩 새어 나가다가 조금만 지나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갈 것이다.
'내 실수다. 총군사님 한 명으로 끝나지 않을 거로 생각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저쪽으로 옮겨갈 줄은 몰랐구나.'
사실 제갈영영을 통한 유출 효과는 크지 않았다. 얼마 전 다녀간 백호단주가 매일 같이 술자리를 가지며 유성을 찬양한 효과였으나 조의원이 그 사실까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는 벌써 다음달 수입이 걱정되었다.
새로 들인 애첩이 꽤 사치스러웠음에도 아무 걱정 말라고 큰 소리를 쳐 놨는데 이제 와서 지원을 줄이겠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놈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긴 한 모양이야. 몇몇 사람들은 그놈이 양의원보다 더 뛰어날 거라고 떠들기도 하는 것을 보니.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해.'
머리를 쥐어 싸매고 고민하고 있을 무렵, 그를 찾는 환자가 있었다.
"아이고! 척마대주님, 도대체 이게 얼마만이십니까? 어서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진료실로 들어서는 진중한 눈빛의 사내를 보고 조의원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백유성 그놈은 진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단 한 번의 실패도 겪어보지 못했다. 흠결 없는 지금의 성과가 그놈을 더 대단해 보이도록 하고 있지. 하지만 실패를 겪어본다면 뭔가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다.'
음흉한 속내와는 다르게 조의원은 척마대주를 깍듯하게 모셨다.
***
무림맹에 가장 강한 무력부대를 꼽는다면 사람들은 주저 없이 무림맹주 직속인 척마대를 꼽는다.
오직 마를 척결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대외 활동도 삼가하고 자기 무위를 높이는데 열중하는 대원들.
척마대는 개개인이 절정 고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들의 대주 정립은 초절정의 고수였다.
초절정 고수라고 모두가 같은 경지에 이르러 있는 것은 아니다.
오 년 전, 이미 초절정의 끝자락에 이르러 이 넓은 무림에서도 몇 없는 화경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 여겨지는 사내가 바로 정립이었다.
"오랜만에 찾아주셨군요, 대주님. 폐관을 끝내신 것입니까?"
정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오늘 막 끝냈소. 조의원도 정정하시군."
조의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심스럽습니다만, 진료의 일부이니 묻지 않을 수 없군요. 폐관 수련의 성취는 있으셨습니까?"
정립음 침음성을 흘렸다.
"아니오. 깨달음을 얻지 못했소."
"이런... 안타까운 일입니다. 무림의 영웅께서..."
"됐소. 다 내가 부족한 탓이지. 더 버티기 힘들어 온 것이니 전에 말해주신 강력한 진통제를 부탁드리겠소."
온몸의 장기에 악성 종양이 퍼져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정립은 끝없이 화경의 경지에 도전해 왔다.
깨달음을 얻어 화경에 이르면 환골탈태를 이룰 수 있고 온몸이 회복됨은 물론 수명까지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끝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약간의 통증과 함께 모든 장기 기능이 서서히 저하되기 시작하더니 최근에 이르러 극심한 통증이 찾아와 그의 수련까지 방해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조급한 상황에서 끝내 찾아오지 않는구나. 바른 몸과 정신으로 끝없이 정진해도 얻을까 말까 한 것을 이런 악조건에서 얻을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지.'
정립은 몇 년 전, 낙양의방을 찾아와 악성 종양이 온몸의 장기에 퍼졌다는 진단을 받고 마지막 도전으로 폐관 수련에 들었다.
그러나 결국 보기 좋게 실패하고 통증을 완화시키는 강력한 진통제를 얻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강력한 진통제를 먹으면 통증을 완화시킬 수 있으나 감각이 교란되어 깨달음을 얻는데는 오히려 방해된다. 그러나 나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적절한 후임 척마대주를 선임하고 뒤를 부탁하는 것이 내 마지막 소임이다.'
조의원은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그에게 영웅의 기세를 보았으나, 결국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데리고 있어도 도움받을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백유성에게 보내서 진통제를 처방하든 다른 치료를 시도하게 하든 해야겠다. 자기가 맡은 환자가 죽으면 뭔가 약점을 노출할지도 모르지.'
계산을 끝낸 조의원이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수십 년 동안 의원의 길을 걸어온 자로서 직접 대주님을 치료할 수 없어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그러나 미약한 희망이 있어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희망... 말이오?"
"그렇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 얼마 전 들어온 의원 한 명이 심장이 멈춘 사람을 살려낸 일이 있었습니다."
"...!"
"신의라 불러 마땅한 솜씨였지요. 나이는 어려도 그자는 저보다 실력이 훨씬 뛰어나니 뭔가 다른 방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도대체 누구요?"
"백유성이라는 의원으로 이 의방의 제 십 일 진료실에 있습니다. 다만 실력이 부족해 제 환자를 다른 의원에게 권해야 하는 심정이 참담하니 제 이야기는 백의원에게 하지 말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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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립은 흔들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내려 놓았거늘, 다시 한번 헛된 희망이 피어나려 한다.
'심장이 멈춘 사람을 살려냈다라... 그게 정말이라면 한번 걸어볼 만 하겠지. 어차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정립은 그 길로 하인 하나를 불러 백의원의 진료실로 안내를 부탁했다.
하인은 그를 백유성의 진료실 앞으로 안내했다.
"안에 무림맹 무사분이 진료중이시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겠네."
정립을 안내해 준 하인이 돌아가려는 것을 백의원의 담당 하인 장칠이 붙잡았다.
장칠은 새로 생긴 화제거리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속삭였다.
"저분은 조금 전에 오셨다는 척마대주님이 아니신가? 혹시 저분이 직접 여기로 오고 싶다고 하셨나?"
"물론이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찌 조의원님 환자를 백의원님께 모셔왔겠나. 조의원님이 백의원님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걸 뻔히 아는데. 척마대주님께서 조의원님 진료실을 나오셔서 내게 여기로 안내해 달라 부탁하시지 뭔가."
"아, 거기서 나오셨나? 난 또 다른 분들처럼 알아보고 오신 줄 알고 설렜지 뭔가."
"설레다니?"
"그랬다면 조의원님이 길길이 날뛸 게 뻔하지 않은가. '백유성 이놈이 또 내 환자를 가로채! 가만두지 않을 테다!' 이렇게 외치면서 말일세."
"큭큭, 이 사람도."
남이 들을까 조심하며 먼 거리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훔쳐들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초인이라 불리는 사람이나 훔쳐듣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나 마침 이 자리에는 화경을 목전에 두고 있는 초절정 고수가 있었다. 초절정의 경지는 능히 초인이라 불릴 만 하다.
'그렇게 된 일이었군. 천하의 척마대주가 의원들의 정치질에 이용당하는 신세가 될 줄이야.'
조의원의 깍듯한 태도에도 왠지 모를 찜찜함이 느껴지더라니 그가 무언가 목적을 이룰 속셈으로 자신을 백의원이라는 자에게 보낸 것이다.
정립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조의원에게 죄를 물을 생각은 없었다. 다른 의원을 추천하는 권유 자체는 문제가 없으니 일을 키워 봤자 마지막에 추한 모습만 남길 뿐이다.
회의감을 느낀 정립은 발걸음을 돌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기다렸다.
강력한 진통제만 처방 받고 미련 없이 돌아갈 생각이었다.
진료실 너머로 살짝 보이는 백유성의 얼굴이 무척 젊어 그런 생각은 더 커졌다.
'심장이 멈춘 사람을 살려냈다니, 그것도 거짓일 가능성이 높겠구나. 역시 나는 정치와 맞지 않는다. 아무 생각할 필요 없이 마를 멸하는 척마대주의 자리가 제일 어울리는 자리였지.'
자기 삶을 돌아보던 정립은 곧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대기 중인 환자들이 대화하는 소리였다.
"자네가 귀에 피딱지가 생길 정도로 칭찬해서 왔는데 정말 믿어도 되는 거겠지?"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내가 직접 그 자리에 있었단 말이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도저히 믿을 수가 있어야지. 어찌 사람이 죽은 사람을 살려낸단 말인가?"
남자 중 하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네는 백의원님께 치료 받고 나서 날 형님으로 모실 준비나 하게."
혼자 온 환자들도 있지만 지인과 함께인 환자들은 저마다 백유성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짓이 아니었단 말인가?'
정립의 가슴에 파문이 일 무렵, 안에서 치료받던 환자가 나왔다.
그는 가슴 어림을 어루만지며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정립이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뺨에 긴 검상이 남아 있는 상대가 먼저 깜짝 놀라 인사했다.
"엇! 대주님, 이게 얼마만이십니까!"
제일 먼저 진통제를 확보하기 위해 의방으로 먼저 왔기에 척마대 부하도 그가 폐관을 끝낸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대련중 내상을 입어 방문했습니다. 한 달은 족히 걸릴 내상이 거의 다 나았습니다. 사나흘만 다스리면 완치될 것 같습니다."
정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정도의 내상이 벌써?"
내상은 요상단이 없다면 아무리 가벼워도 족히 일주일은 정양해야 한다. 그러나 외상에 효과적인 금창약이 구하기 쉬운 것과 달리 좋은 요상단은 극히 드문 편이다.
"백호단주가 이 의원이 용하다고 다치면 꼭 가보라고 신신당부 하던 통에 한번 와봤는데 정말 신기합니다. 안 그래도 한번 대주님께도 진료를 권해볼까 하던 중이었는데, 벌써 백의원님의 소문을 들으신 모양입니다."
자신이 믿는 부하 역시 극찬을 하니 백유성에 대한 정립의 신뢰도가 조금 올라갔다.
'어쩌면 완치는 힘들더라도 얼마간 생명 연장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만약 1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시 전력으로 화경의 벽에 부딪혀 볼 만 하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일단락 되자 앞에서 대기하던 하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들어가실 수 있겠습니까?"
"아, 내가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군. 미안하네."
유성은 방금 치료를 마치고 나간 환자가 진료실 앞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또 무림맹 무사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진료실로 들어서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비록 내공을 잃어 기세를 읽어낼 수는 없으나, 남자의 자세나 몸을 단련한 흔적들이 대단한 무인임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가 빙의하고 나서 본 사람들 중 제일가는 고수로 추정되었다.
'여러 절정 고수들을 봤지만 저자는 그보다 윗줄의 고수로 보인다. 분명히 이름 높은 자일 거다.'
"정립이오."
대단한 무인이라는 정보에 정립이라는 이름을 듣자 유성은 그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척마대주님이셨군요."
"그렇소. 잡설은 치우고 본론만 말하겠소."
성격이 급한 사람이거나 아주 바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시지요."
"나는 몇 년 전에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악성종양이 온몸에 퍼져 있다는 진단을 받았소. 다른 의원들은 모두 나를 치료할 수 없다고 했소. 지금도 극심한 통증이 내 몸을 갉아 먹고 있소."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성을 보며 잠시 뜸을 들인 정립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대가 심장이 멎은 사람도 살려낼 정도의 명의라고 들었소만, 내 병도 치료할 수 있겠소?"
유성의 머릿속은 이미 팽팽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몸 안에 생긴 악성종양은 현대의 병명으로는 '암'이다. 이미 온몸의 장기로 전이가 된 상태로 수년이 지났다면 척마대주는 아마 한계에 달해 있을 것이다.
최근 많은 환자들을 받는 유성도 암을 치료해 본 경험은 없었으나 자신은 있었다.
신의 힘으로 행해지는 치유는 질병에 한해서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온몸에 전이 되었다면 신성력의 양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지. 지금도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완치보다는 자연 치유가 가능한 수준으로 아껴쓰고 있는 상황이니.'
차분한 듯 보이나 일말의 초조함이 깃든 정립을 보며 유성은 그를 기필코 치료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대체로 무림인들을 고쳐주었을 때 신성력이 크게 상승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대단한 고수라면 치료에 성공하면 큰 폭의 신성력 상승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
치료 방법까지 구상해 본 유성이 생각을 마치고 말했다.
"진맥을 하고 자세히 살펴봐야겠지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진심이시오?"
"먼저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순순히 손목을 내준 정립의 맥을 짚은 유성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희미하고 난잡한 맥 상태에 심각해졌다.
'마치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하구나. 아마 이자는 지금도 강력한 내공과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버티고 있음에 틀림없다. 치료에 필요한 신성력 소모도 대단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소모값은 더 커지겠지.'
정립은 유성의 표정이 굳자 희미하게 타올랐던 희망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역시 무리군.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았소. 강력한 진통제를 처방해주시오. 며칠만 버티면 되니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소."
이것으로 되었다. 소중한 시간을 얼마간 허비한 셈이 되었지만 진통제를 받을 수 있다면 마지막 소임을 마무리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유성은 진통제를 처방해주지 않았다.
"척마대주님, 살고 싶으시면 제 말에 철저히 따라주셔야겠습니다. 시침을 할 터이니 저쪽에 누워주십시오."
"...!"
"어서 누우십시오. 한시가 급합니다."
초절정 고수가 되어 척마대주가 된 후로 자신을 향해 이 정도로 강력한 명령조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직속 상관인 무림맹주 또한 부탁조로 명령을 하달하거늘.
하지만 정립은 유성의 눈빛에서 확신을 엿보았다. 무엇에 대한 확신인지는 곧 알게 되리라.
유성은 정립이 한동안 자신을 빤히 바라보다가 자리에 눕는 것을 보고 안도했으나 고비는 아직 남아 있었다.
유성이 몸 내부까지 찔러 넣을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된 젓가락만한 장침을 집어 들었다.
"설마 그것으로 침을 놓는 것이오? 침은 혈자리에 놓는 것이 아니오?"
"악성종양은 너무 많이 퍼져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치료하기 어렵습니다. 저만의 비법이니 믿어 주시지요."
"...알겠소."
모든 것을 내맡긴 정립의 눈이 감기는 것을 보고 유성은 젓가락만한 장침을 가슴 한가운데에 찔러넣었다.
피부, 피하조직, 근막, 늑간근, 흉막 순으로 뚫고 들어간 침을 통해 유성이 신성력을 흘려 넣었다.
신성력을 통제하자 내부 장기의 형태가 마치 CT라도 찍은 듯 머릿속에 그려졌다.
다른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찔렀을 때와 비교해 보면 척마대주의 장기 상태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단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이 암 조직이 전이 되어 있었다.
'역시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구나. 급한 불부터 꺼야겠다.'
치유 스킬이 발현되었다.
***
"아니, 그게 정말인가?"
"차의원님, 이미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분명 치료를 시작했다고요."
차의원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납득이 안 되어 그러네. 정말 척마대주님의 병을 고칠 수 있단 말인가? 자네는 모르겠지만 몇 년 전에 척마대주님이 다녀가신 후 낙양 의방의 의원들이 모두 모여 척마대주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 논의했었네. 양의원님은 의선께 서신까지 보냈었지. 그러나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척마대주님이 대성을 이루길 응원해주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었네."
"저는 할 수 있습니다."
연거푸 유성에게 척마대주의 치료 가능성에 대해 물은 차의원은 슬그머니 본심을 꺼냈다.
"그럼 혹시... 어떤 방식으로 치료하는지 들을 수 있겠나? 자네는 이미 심장 압박 비법에 대해서도 모든 사람에게 알려 준 적이 있지 않은가?"
유성은 양심 없는 차의원에게 눈을 흘겼다.
심폐소생술에 대해 알려 준 적이 있지만 이번 치료법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 외에 아무도 따라 하지 못할 거로 생각했고.
그러나 나중에, 그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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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산파의 장로 진영주는 바깥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가는 길에 상단 한곳을 방문했다.
그곳은 진영주의 친척이 운영하는 곳으로, 문파 밖으로 나왔을 때마다 한 번씩 들리고는 해서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한 소녀를 만난 일은 특별한 일이 되었다.
'이렇게 충만한 영력이라니, 몇 달 전에 봤을 때는 이렇지 않았거늘 언제 영력이 이렇게 충만해졌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속성이 섞여 있긴 하지만 원래 영력의 속성은 다양한 법이니 문제 될 것도 없고.'
진영주는 소녀, 진은선에게 캐물을 수밖에 없었다.
"은선아, 혹시 몇 달 사이에 무슨 큰일이 있었느냐?"
"네? 고모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보니 네 몸에 영력이 넘치는구나. 분명 큰일이 있었을 것이다. 정말 기억나는 일이 없느냐?"
진은선은 곧 그녀가 죽다 살아난 일과 신비한 존재를 만난 일에 대해 대충 털어놓았으나 진영주가 큰 관심을 보였기에 상세히 고할 수밖에 없었다.
"넌 정말 큰 고비를 넘겼구나. 네가 만난 영적인 존재는 살아 있는 일반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마 죽다 살아난 일이 네게 대단한 기연이 된 모양이구나."
"그게 좋은 건가요?"
"당연하다. 너는 그 일로 무림인들이 꿈에도 이루길 원한다는 상단전을 개방한 것이다. 네 충만한 영력이 상단전 개방의 증거다. 아마 조금만 늦었으면 죽을 뻔했던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음이 틀림없다."
"의원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마 조금만 늦었다면 죽거나 죽는 것만 못한 상황이 되었을 거라구요."
"그렇구나. 은선아, 그럼 혹시 너는 날 따라 모산파로 갈 생각이 있느냐? 네 재능이라면 너는 몇 년만 지나도 대단한 영술사가 될 수 있을 거다."
"그럼 제가 무공을 배우는 건가요?"
"무공과는 조금 다르다. 내공을 쌓아 무술을 수련하는 것과는 달리 영술사는 영력을 키워 술법을 익히고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몸담은 모산파가 바로 천하의 영술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란다."
그리고 영술사는 흔한 무림인과 달리 아무나 될 수 없다는 점도 강조했다. 영력을 수련으로 쌓는 속도는 매우 느리기 때문에 타고나지 않으면 불가능 했으니까.
진영주는 진은선이 곧 그러겠다고 할 줄 알았다.
어렸을 때부터 신기한 술법들을 보여주면 진은선은 진영주를 대단하다고 치켜세우며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 고모님을 따라가는 건 어렵겠어요."
"무슨 이유가 있느냐?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하다니. 네 아버지도 흔쾌히 그러라고 할 것인데."
진영주는 진은선의 재능이 아까워 거듭 권유했다.
"그럼 백의원님께 물어보고 결정해도 될까요? 며칠 후에 진료 예약이 되어 있으니 그때 가서 물어볼게요."
"...백의원이 누구길래?"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그분께서 제게 무공을 익히는 게 좋을 거라고 하셨거든요."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도 그렇지 영술을 배울지 무공을 배울지도 그의 허락을 맡아야 한단 말이냐?"
"죄송하지만 제게는 그분의 말씀이 제일 중요해요."
"할 수 없구나."
진영주는 진은선이 고집을 부리자 함께 백유성을 만나러 가기로 하고 며칠간 진은선의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매일 진은선의 영력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수련으로 늘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진영주가 알기로 영술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선천적으로 타고나야 한다. 모산파에서 다루는 것은 주로 타고난 영력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으로, 후천적으로 영력을 늘리는 것은 너무 효율이 나빴다.
'지금도 은선이의 영력은 대단한 수준이지만 매일 이 정도로 영력이 늘어난다면 전대미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드시 은선이를 모산파로 데려가야 한다.'
***
유성이 매일 만나는 무림맹 사람은 이제 두 명이 되었다.
아침마다 모종의 일로 생긴 두통을 치료하고 가는 제갈영영, 그리고 암을 치료 중인 척마대주였다.
모든 신성력을 쏟아 부으면 보름 안에 척마대주의 암을 치료할 수 있었으나 굳이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비록 척마대주의 치료를 성공하면 신성력이 확 늘어날 것이지만 그동안 다른 환자들을 보는데 지장이 생기게 된다.
게다가 완치가 아니더라도 척마대주는 조금씩 호전되는 몸 상태를 느끼고 유성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오늘도 척마대주를 치료한 후, 다음으로 들어 온 환자는 바로 진은선이었다. 그녀는 평소 보호자로 함께 오던 아버지 대신 모르는 중년 여인과 함께였다.
"이분은 제 목숨을 구해주신 백유성 의원님이시고 여기는 제 고모님이세요. 모산파의 장로직을 맡고 계세요."
"반갑습니다. 진영주라고 합니다."
유성은 인사를 나눈 후, 왜 진영주를 자신에게 소개하는지 어리둥절했으나 먼저 할 일 했다.
"은선아, 진맥 결과 별다른 이상이 없구나. 이제 그만 지켜봐도 될 것 같구나."
"감사합니다, 은공. 그런데 무공을 배우는 일로 고모님께서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세요."
진영주가 나섰다.
"듣기로 은선이에게 건강을 위해 무공을 배우라고 했다던데 꼭 무공일 필요가 있습니까?"
"무조건 무공을 배우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한번 사고가 있었으니 건강을 위해 무공을 배우면 좋겠다고 권했을 뿐입니다."
진영주가 진은선을 한번 흘겨보았다.
들어 보니 유성이 강력하게 권한 것 도 아니었건만 진은선이 고집을 부린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주 시집도 백의원님이 정해주는 상대에게 갈 기세로구나."
"시, 시집이요?"
'백의원님이 시집오라고 하시면 난 어쩌지?'
진은선이 망상에 젖어 고개를 푹 숙였고 유성은 진영주와 대화를 나눴다.
"다만 무공이 아니라면 무엇을 익히게 할 생각이십니까?"
"모산파의 영술입니다. 이 또한 몸을 건강하게 해주니 은선이게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영술이요? 제가 견문이 짧아 모산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혹시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진영주는 신비문파인 모산파의 영술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와 동시에 진은선이 갑자기 영력이 생긴 점, 그리고 혹시 몰라 영력이 크게 늘어나는 부분에 대해서도 유성의 생각을 물었다.
진은선이 크게 믿고 있는 의원인데다 직접 비법이라는 것을 통해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무언가 알고 있는 바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성은 영력이 크게 늘어난다는 설명을 듣고 진은선이 매일 그에게 축원을 올린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은선이는 축원을 올린 후 충만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혹시 그건 신성력이 몸에 쌓이는 현상이 아닐까? 나 역시 처음 가이아 여신에게 기도를 드린 후 신성력이 쌓일 때 충만감을 느낀 적이 있으니까.'
유성은 다시 진은선을 진맥해 보았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맥박을 파악한 것이 아니라 신성력을 흘려보냈다는 것이다.
맥문을 통해 거슬러 올라간 유성의 신성력은 마침내 진은선의 가슴부근에 도착했다. 진영주가 상단전이라고 칭하는 그 위치였다.
게임 속 설정인지, 이 세계의 상단전은 가슴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정말 신성력이 있구나! 영력의 존재는 모르겠지만 분명 신성력이 느껴진다!'
놀라운 발견이다.
유성은 신성을 얻었으나 이를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정도로 받아들였지 자신이 신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진은선은 그에게 기도를 올린 후 약간의 신성력을 되돌려 받고 있었다.
'단순히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고 신성력이 쌓이는 건 아닌 듯하다. 매일 신성력으로 척마대주의 가슴 부근을 살폈지만 그에게서 신성력이 발견된 적이 없다.'
사제는 신과 소통하는 자다.
그렇다면 상단전이 열릴 정도로 영력이 큰 자들이 바로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혹시 저에게도 영력이 느껴집니까?"
"왜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영력을 타고납니다. 백의원님도 남들보다 많은 영력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영술사가 되기에는 부족하군요."
타고난 영력이 미미했던 유성은 신성력을 쌓고 있음에도 아직 진영주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그렇군요. 은선이와 독대하고 싶으니 잠시만 시간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럼 대기실에 있을 테니 의원님과 이야기 나누고 오거라."
"네, 고모님."
진영주가 멀리 사라진 후, 유성은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진은선을 불렀다.
"은선아, 고모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영력이 크게 늘어나는 부분이 네가 나에게 축원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정말요?"
"그래서 말인데, 네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구나."
진은선의 눈이 반짝였다.
"뭐든지 맡겨 주세요."
유성은 진은선에게 몇 가지를 알려 준 후 돌려보냈다.
'은선이가 잘해주겠지. 어쩌면 신성력을 쌓는 속도가 비약적으로 늘어날지도 모른다. 대신 확실해 지기 전에는 은선이의 고모에게 비밀로 해야겠다.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
유성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
백유성이 자리에 없을 때, 여러 의원들이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조의원은 매일 척마대주가 유성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코웃음 쳤다.
"양의원님은 말이 된다 생각하시오?"
"척마대주를 치료하는 일 말이오?"
"그렇소, 의선께서도 가슴과 배를 갈라 온몸의 악성종양이 전이 된 장기를 절제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백의원이 아무리 난다긴다 해도 절대 치료하지 못할 것이오. 듣기로 이번에도 침이나 놓는다고 하오."
양의원도 조의원의 말에 동의하는 바다. 이번에는 방법을 알면 따라 할 수 있는 심장 압박과는 그 결이 달랐다.
다만 척마대주가 이미 유성을 선택했으니 왈가왈부하지 않을 뿐이다.
"어차피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그쯤 하는 게 좋겠소. 백의원도 다 생각이 있지 않겠소?"
"흥, 생각은 무슨. 요즘 사람들이 좀 칭찬해주니 거만해져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하는 것이지요."
요즘 유성에게 친한 척 달라붙어 있는 차의원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로는 치료가 순조롭게 되고 있다고 했습니다만..."
조의원의 눈이 번뜩였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백의원이 그러더군요. 척마대주님을 치료하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자네도 그런 헛소리에 속는단 말인가? 가만... 혹시 이거 백의원이 척마대주를 속여 기만하는 것이 아니오?"
"..."
"아니, 그렇지 않소? 생각들 해 보시오. 저 남쪽 지방에 사람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용해 먹는 종교가 창궐한 적이 있다지 않소? 척마대주님이 아무리 무공 고수라도 죽음 앞에선 판단력이 흐려질 수밖에 없을 거요."
양의원은 유성이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럴 리 있겠소? 백의원이 무엇을 얻기 위해 그런 위험한 짓을 하겠소."
"그야 모르지요. 척마대주님은 초절정 고수니 뭔가 이용해 먹을 곳이 있다고 생각했다던지. 얼마 남지도 않은 귀한 시간을 여기서 허비하고 계시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소."
조의원은 선동을 거듭했으나 생각보다 다른 의원들의 호응이 없었다.
전에는 양의원 다음가는 자기 말에 대부분 귀를 귀울였을 텐데 요즘에 그의 위상이 크게 떨어진 것이다.
심지어 척마대주는 유성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조의원 자신을 무서운 눈빛으로 바라볼 뿐 대화에도 응하지 않았다.
'흥, 이번에는 그놈이 악수를 둔 것이다. 척마대주가 죽기만 해 봐라. 무림맹에 조사를 의뢰해서라도 기필코 낙양 의방에서 쫓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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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학관의 후기지수들은 3층으로 올라올 때부터 인원이 많았다.
유성은 처음 몇 명만 확인하고 곧 관심을 끊었기에 모두를 알 수 없었고, 차의원이 설명하던 중에도 절반은 등지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명이 자신을 알아보았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낙양 의방의 백의원이 아니라 백가장의 둘째로.
유성을 알아본 남자는 꽤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백가장에 있는 동안 스치듯 봤던 자이지만 곧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혹시 진가장의 자제분이십니까?"
"맞다. 진영호다. 네 이름이 백... 이름이 뭐라고 했느냐?"
"백유성입니다."
"그래, 백유성. 네놈의 낯짝은 어째 여전하구나."
신경 써서 커스터마이징 한 덕에 빛나는 유성의 얼굴에 관한 언급이다. 그러나 전혀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빛에 재수 없다는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고, 입가에는 비웃음마저 보였다.
쓰게 웃은 유성이 대꾸할 말을 찾고 있을 때, 팽형이라 불렸던 자가 끼어들었다.
눈썹이 굵고 각진 턱으로 꽤 남자답게 생긴 자였다.
"진형, 아는 사람이오?"
진영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유성에 대해 줄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내용이라는 것이 당사자의 기분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이었다.
"아, 팽형. 저놈은 호남 백가장이라는 곳의 둘째였소. 물론 지금은 아니오. 전해 듣기로 가문에서 쫓겨났다더군요."
심기가 불편해 물었던 팽지산으로서 진영호의 말은 혹하는 것이었다.
가문에서 쫓겨났다니, 얼마나 자극적인가?
아마 자신이 무언가 사고를 치고 하북팽가에서 쫓겨났다면 아마 수치스러움에 죽어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에게 가문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호오, 어지간해서 가문에서 쫓겨날 일이 있나? 무슨 큰 죄라도 지었는지 궁금하군."
말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무림학관의 여자 동기들에게 향했다.
그녀들은 유성의 얼굴을 보고 연신 감탄하다가 유성이 가문에서 쫓겨났다는 소리를 듣고 의아해했다.
'흥, 얼굴이 밥 먹여 주는 줄 아느냐.'
오늘은 팽지산이 절정 고수가 된 날이다.
이제 정파의 후기지수들 중에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경쟁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보다 일 년 빠르게 절정 고수가 된 후기지수가 있었다.
스물 둘에 절정 고수가 되어 팽지산의 질시를 받았던 녀석은 멍청하게 자객에게 암습당하고 말았다.
'백 년기재라는 녀석이 그런 꼴이 되다니, 이제 당대의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내가 제일이다.'
즉, 앞으로 자기 세상이라는 소리다.
서서히 영향력이 약해지더라도 적어도 오늘만큼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날.
그런데 그런 날 여자 동기들이 유성에게 관심을 쏟았으니 심사가 뒤틀렸다.
와중, 유성이 가문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듣자 기분이 살짝 풀렸다.
진영호가 팽지산의 질문에 답했다.
"내가 백가장의 후계자와 친우사이인데 글쎄 저놈이 형을 제치고 자기가 후계자가 될 욕심을 부렸고, 무리하게 무공을 익히다가 주화입마에 빠졌다지 뭐요? 무공을 잃고 나서 몇 년 전에 가문을 떠났다고 들었소."
"백가장이라면 그래도 호남에서는 들어 본 적 있는 정파로 알고 있는데 안정적인 정파의 내공심법을 익히고 주화입마에 빠지다니 얼마나 형편없다는 말이오?"
"뱁새가 황새 쫓아 가려다 가랑이 찣어진 격이지요."
별 볼일 없는 녀석이 아닌가?
팽지산의 기분이 완전히 풀렸다.
무공을 잃었다는 말 때문인지, 무림학관의 여자 동기들이 급격히 흥미를 잃는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팽지산의 시선이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향했다.
당연히 그녀도 마찬가지 일 거로 생각하며.
'아니? 네가 왜...'
그런데 그녀는 다른 누구보다 유성에게 강렬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여자 동기들이 흥미를 잃은 것과는 달랐고, 팽지산은 다시 질투심이 타올랐다.
저 형편없는 녀석에게 완전히 관심을 끊게 만들고 싶어졌다.
경멸의 눈빛을 보내면 더 흡족할 것 같았다.
"그런데 궁금하군."
"무엇이 말입니까?"
"정파의 내공심법을 익혀 주화입마에 빠지려면 백에 한, 둘을 제외하고 최소한 절정 고수는 되어야 할 텐데, 혹시 저자가 욕심에 눈이 멀어 마공이라도 구해 익힌 것은 아니겠지?"
진영호가 멈칫했다.
'마공이 갑자기 왜 나와? 나는 당연히 백에 한, 둘의 경우라고 생각했는데.'
진영호는 처음에 백유성을 조롱할 생각으로 이름을 모르는 척한 것이다.
의원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으나 호남 백가장의 백유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왜 아니겠나?
호남은 장강 이남에 위치하여 무림에서 변방으로 취급받는 곳이다.
절세 고수라도 나타나지 않는 한 중앙 무림의 관심을 받기 어려운 지역이고 수많은 중소문파들이 치고받고 다투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있는 작은 무가 백가장에서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무재가 튀어나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백가장주가 적자를 제치고 사생아인 유성에 대한 총애를 드러냈을 정도였다.
거기까지는 백가장주의 팔불출로 이해할 수 있으나 백유성은 성과로 보여 주었다.
거의 있는 듯 없는 듯했던 유성이 제대로 무공을 수련한지 고작 1년.
진영호는 친우이자 백유성의 형이 되는 백진성의 한탄을 듣고 유성의 무재를 체감할 수 있었다.
"그놈은 벌써 절정의 벽에 도달했다. 몇 년만 흘러도 얼마나 고수가 될지 모르는 일이지."
어렸을 때부터 무공을 익힌 자신이 막 일류 무사가 되었거늘 벌써 절정의 벽에 도달했다니?
절정 고수로 향하는 벽에서 5년을 허비하더라도 유성의 나이는 스물 한 살이다.
전설로 내려오는 장삼봉 진인과 같은 나이에 절정 고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의 무재라면 5년이 걸릴 것 같지도 않았고.
백가장에 잘된 일이 아니냐는 말은 건네지 못했다.
백진성이 얼마나 유성을 싫어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진영호는 그런 무재를 가진 유성이 무리하여 마공을 익힐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팽지산이 원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어야 한다.
앞으로 무림의 대세로 떠오를 후기지수가 바로 그가 아닌가?
"이런, 팽형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왜 마공을 고려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소. 보자, 저 녀석은 이제 고작 스무 살이고 가문에서 쫓겨난 지도 몇 해 되었으니 당시에 절대 절정 고수였을리가 없소.
이는 과거 달마대사나 초대 천마, 장삼봉 진인도 이루지 못했을 거요.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과연 마공도 가능성이 높군. 팽형의 통찰력에 항상 감탄만 하게 되오."
비록 무림맹이 수많은 흑도 무림인들을 모두 통제하기 어렵다 해도, 마공을 익힌 자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손속을 보여준다.
만약 무림맹에 마공을 익힌 자가 있다고 신고한다면 무려 척마대가 출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무림맹 최고의 무력집단 척마대.
게다가 들리는 소문으로 화경의 고수가 될지도 모르는 척마대주 정립!
팽지산에 이어 진영호마저 마공의 가능성을 언급하자 대부분의 무림학관 후기지수들도 안색이 변했다.
서서히 유성을 향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크흠."
어느새 차의원은 유성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문제가 생긴다면 가차 없이 버리겠다는 각오가 느껴졌다.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하는 모습을 보며, 유성은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마공을 익히면 흔적이 남는다. 확인해 보면 금방 드러날 일. 어차피 난 거리낄 것 없지만 아무 인연도 없던 자들이 함부로 말하는 건 좀 짜증 나는구나. 차의원이야 어차피 오해였다는 걸 알면 다시 달라붙을 사람이고. 참 한결같구나.'
자신을 조롱할 목적인 진영호도 짜증 났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적의를 드러내는 팽지산 때문에 자존심도 상했다.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절정 고수가 된 시기로 따지면 한참 후배인 녀석이 기세등등한 모습이란.
'날 곤란하게 할 작정이라면 어느 정도 성공하긴 했네.'
까딱 잘못하면 맥문을 내주어 마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확인이라도 받아야 할 판이다.
그때, 유성의 눈에 어느새 3층으로 올라온 남자가 보였다.
그는 일행들과 함께였는데 유성이 잘 아는 자들도 몇 명 섞여 있었다.
바로 자신에게 진료를 받았던 환자들이다.
그가 다가오자 인기척을 느낀 후기지수들이 뒤를 돌아보다가 황급히 인사했다.
팽지산과 진영호도 예외가 아니었다.
"헉,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남자는 그들에게 고개만 까딱여 대충 인사를 받았다.
마치 그들이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성큼성큼 후기지수들 사이를 가르고 들어온 그가 유성 앞에 서서 팔을 활짝 벌렸다.
"하하! 주루에서 백의원을 만나다니! 안 그래도 언제 꼭 한번 한잔 대접하고 싶었는데 잘 됐소! 나와 한잔 하시겠소?"
그의 커다란 손은 이제 유성의 양손을 덥썩 붙잡고 크게 흔들었다.
유성은 그의 과한 호들갑에서 자신을 도와주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자신과 친하다는 모습을 보여 유성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백호단주님, 감사합니다만 무림학관의 후기지수분들께서 제게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고 해서요. 이야기가 아직 안 끝난 듯 하여..."
"어허, 그랬군."
백호단주가 몸을 돌렸다.
무리보다 한 발자국 앞에 나와 있던 팽지산과 진영호를 훑어보았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백호단주의 등장에 놀랐는지 몸이 살짝 굳어 있었다.
"그래, 우리 백의원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한번 말해 보게들."
팽지산은 형들이 여럿 있어 가문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없다.
그의 꿈은 무림맹에 입맹하는 것이었고 백호단주는 미래의 상관이 될 수도 있는 자였다.
그런 자가 '한번 말해 보게들'이라고 하문했고, 팽지산에게는 꼭 '한번 지껄여 보아라'라고 들렸다.
팽지산은 얼른 진영호를 가리켰다.
백호단주가 3층으로 올라오면서 이전 대화의 일부를 들었을 것이다.
모든 일을 없었던 것으로 여길 수는 없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친구가 이야기 전달 과정에서 오해 살 발언을 하여 잠시 가능성을 따져 보았을 뿐입니다. 진형, 아무래도 마공일 리는 없지 않겠소? 다른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는데."
"마, 마공이라뇨. 당연히 아니겠지요. 단지 여러 가능성들을 검토했을 뿐입니다. 제 생각에는 백에 한, 둘의 경우가 아닌가 하는데... 당연히 그렇겠지요. 아무튼 백...의원에게 더 이상 볼일이 없으니 편히 즐기십시오, 백호단주님."
"흠, 그런가. 알겠네. 백의원, 이제 괜찮겠소?"
유성은 팽지산에게 팽당한 진영호가 당황하는 꼴이 우스웠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괜히 적으로 만들어 좋은 일은 없으니.
"좋습니다. 한잔 하시지요."
"하하, 오늘은 왠지 이 주루로 오고 싶더라니 내가 운이 참 좋소. 잠시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올 테니 기다려주시오."
백호단주는 그와 함께 온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돌려보냈다.
"흠흠, 잘 해결되어 다행이네.
유성은 상황이 일단락 되자 어느새 바짝 옆에 붙어 있는 차의원을 흘겨보았다.
차의원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모습이다.
무림학관의 후기지수들은 백호단주에게 인사하고 황급히 주루를 빠져나갔다.
그들의 탁자에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음식들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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