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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전, 나는 아직 선생님이라는 호칭보다는 학생이라는 말이 더 익숙한 어리바리한 인턴 나부랭이였다.
그리고 그날도 나는 평화롭게 응급실에서 온갖 잡일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평화란 내 손으로 직접 환자의 생사를 결정할 책임이 없다는 데서 오는 수동적인 평화다.
인턴이 하는 일이 그렇지 뭐.
에어슈터가 점검중인 새벽 3시에 ABGA 검체를 들고 검사실까지 전력 질주하는 것.
오전 7시에 밀려있는 EKG 용지 수십 장을 처리하는 것.
오후 2시에 CT를 찍어야 하는 환자를 덜컹거리는 스트레쳐에 실어 영상의학과까지 이송하고 한 시간 뒤에 다시 데리러 가는 것.
그리고 끝도 없이 울려대는 전화를 받아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인턴의 일상이었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단연코 채혈이었다.
“아얏!”
내 손에 들린 주삿바늘이 할머니의 얇고 약한 혈관을 또다시 빗나갔다.
벌써 다섯 번째 시도였다.
할머니의 앙상한 팔뚝은 내 무능함의 증거처럼 시퍼런 멍 자국으로 가득했다.
“선생님… 꼭 피를 뽑아야 하나요… 우리 엄마 아파하시는데….”
결국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간호사가 깊은 한숨과 함께 내게 다가왔다.
“인턴 쌤, 잠깐 비켜봐요.”
책임간호사 선생님은 토니켓을 다시 묶었다.
그리고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찾지 못했던 그 혈관을 정확히 찾아냈다.
주사기 안으로 검붉은 피가 부드럽게 차올랐다.
나는 그 옆에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으로 서 있었다.
피 검사를 위해 환자들의 팔을 여러번 찔렀고, 결국에는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스테이션으로 돌아와서는 레지던트 선배에게 ‘너는 손이 달려있긴 한 거냐’는 갈굼을 당하는 그런 사람.
내가 의대생 시절 상상했던 응급실의 모습과 내가 인턴으로서 마주한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드라마 속 응급실은 언제나 극적이었다.
매일같이 심장이 멎은 환자가 실려오고 천재 의사가 기적처럼 환자들을 살려낸다.
나는 그 영웅의 모습을 꿈꿨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내가 인턴으로 응급실을 돌던 그 한 달 동안 수십 명의 심정지 환자가 소생실로 실려 왔다.
우리는 미친 듯이 흉부 압박을 하고, 약물을 쏟아붓고, 제세동을 했다.
하지만 그들 중 살아서 응급실을 걸어 나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심정지 환자들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죽었거나, 혹은 우리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소생실 침대 위에서 싸늘하게 식어간다.
응급실은 매일매일 죽어가는 환자들만 보는 곳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어제부터 코가 좀 막히는데, 콧물 약 좀 처방해 주세요.
‘회사 근처라서요.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비타민 수액 한 대만 놔주세요.
‘인터넷 찾아보니까 제 증상이 췌장암 말기랑 똑같던데, 지금 당장 CT랑 MRI 다 찍어주세요.
그리고 응급실의 의사들은 내가 상상했던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다.
영웅이라기보단 질병과, 외상과, 그리고 때로는 환자나 다른 과 의사들과도 지독하게 싸우는 싸움꾼처럼 보였다.
응급의학과 의사는 아니었다.
그저 자기 앞에 놓인 환자 한 명을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혹은 다른 곳으로 무사히 살아있는 상태로 넘기기 위해 발버둥 치는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
인턴 생활을 하며 많은 환상이 깨졌다.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환상. 생명의 경이로움에 대한 환상.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환상까지도.
맨 처음 나는 응급의학과를 지망했었다.
학생 시절 나는 희대의 명작이라 불리던 한 의학 드라마에 미쳐 있었다.
화면 속 응급실은 언제나 긴박했고 의사들은 언제나 영웅이었다.
주인공은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 속에서도 절대 환자를 포기하지 않았고 기적처럼 생명을 살려냈다.
나는 그 드라마의 모습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을 봤다.
저게 진짜 의사구나.
삶과 죽음의 최전선에서 온몸으로 환자의 생명을 지켜내는 사람.
저거다.
저게 바로 내가 되고 싶은 의사의 모습이다.
그래, 아마도 그 드라마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의 모든 환상은 그 잘 짜인 각본과 화려한 연출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이다.
“백은서, 너 미쳤냐? EM이 워라밸 좋다는 것도 옛말이야. 단점이 더 많다니까?”
“네 성격에 응급실 가면 한 달도 못 버티고 뛰쳐나온다. 매일 밤 주취자랑 싸우고, 보호자한테 멱살 잡히고, 피 토하는 환자 뒤치다꺼리하는 게 네 꿈은 아니잖아.”
대학 시절 수많은 선배들과 동기들의 만류 섞인 외침에도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조언들은 내 뜨거운 사명감 앞에서는 그저 패배자들의 변명처럼 들릴 뿐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을 한심하게 여겼다.
그들에게는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환자를 살리겠다는 열정이 없다고.
나는 응급실에 갈 날만을 손꼽아 고대해왔다.
하지만 인턴이 되어 마주한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그 어떤 지옥보다도 더 끔찍했고, 그 무엇보다 더 거대한 괴리감으로 나를 덮쳤다.
드라마 속에서는 심장이 멎은 환자가 실려 오면 주인공이 달려들어 기적처럼 살려냈다.
하지만 현실의 응급실에서 내가 처음 목격한 CPR은 실패했다.
드라마 속에서는 초보 의사가 획기적인 진단과 술기로 환자를 살려내고 칭찬받는다.
현실에서 내가 처음으로 흉부 압박을 했던 환자는 내 눈앞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선고를 하는 교수님의 무감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복도로 뛰쳐나가 주저앉아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질병과 싸우고, 외상과 싸웠다.
그리고 동시에 막무가내인 환자와 싸웠고, 병실을 내주지 않으려는 다른 과와 싸웠으며, 병원의 삭감 지침과 싸웠다.
얼굴에는 사명감보다 지독한 냉소만이 가득했다.
그 현실은 그 어떤 선배나 동기의 만류 섞인 외침보다도 나를 응급의학과에서 더 멀어지게 했다.
‘아, 이건 아니구나.
인턴 생활이 끝나갈 무렵 마침내 깨달았다.
내가 꿈꿨던 영웅은 이 지옥에는 없다.
아니, 애초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응급의학과를 포기했다.
하지만 의사라는 길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생명을 다루는 다른 과에 가자.
이 지옥 같은 최전선이 아니라면, 조금 더 정돈되고 예측 가능한 환경이라면 어쩌면 나는 내가 꿈꿨던 의사의 모습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내가 가졌던 순진한 신념을 그나마 지켜주는 마지막 일일듯 싶었다.
물론 응급실의 사람들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특히 나와 가장 많이 마주쳤던 1년 차 선배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한현재, 조수연 선배는 친절했다.
내가 수십 번을 실패했던 ABGA 채혈을 한현재 선배는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자기 환자를 보는 틈틈이 옆에 와서 각도는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동맥의 맥박은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를 차분하게 가르쳐주었다.
물론 실제로 시범을 보여주시진 않으셨지만.
왜 그러셨던거지?
김지훈 선배는… 그냥 늘 바빠 보였다.
언제나 스테이션 컴퓨터 앞에서 무언가를 미친 듯이 타이핑하고 있거나, 전화기를 붙들고 전화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최민준 선배는… 그냥, 조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늘 멍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어 다녔고 가끔은 자신이 방금 무슨 오더를 냈는지조차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미안, 선배.
이건 그냥 내 솔직한 감상이다.
1년 차 선배들도 다들 좋은 분들이었다.
하지만 선배들의 지친 모습은 내게 오히려 더 큰 경고처럼 다가왔다.
저게 내 1년 뒤 모습일 것이다.
나는 결코 저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 EM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응급실에서의 마지막 날 굳게 다짐했었다.
저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는 응급의학과 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겠다고.
그렇게 그 날.
외상 환자가 실려 왔다.
사이렌 소리도 없이, 예고도 없이.
복부에 철근이 박힌 채 피를 쏟아내며 바닥으로 쓰러진 남자.
모두가 허둥댔고, 모두의 얼굴에 절망이 서려 있었다.
혈압은 바닥을 쳤고 환자의 심장은 멎기 직전이었다.
나는 그 광경을 소생실 구석에서 뛰어다니며 바라보고 있었다.
‘거 봐. 이게 현실이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바로 응급실의 본모습이다.
드라마 속 영웅은 없다.
그저 압도적인 죽음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져 내리는 평범한 인간들만이 있을 뿐.
그때였다.
한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년 차 한현재 선배.
목소리, 손짓, 모든 것이 변했다.
“칼.”
그 한마디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선배들이 미쳤냐고 소리쳤다.
면허가 날아갈 거라고 절규했다.
나는 봐버렸다.
한 선배의 손이 내가 실습하며 본 그 어떤 외과의사의 손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을.
베타딘을 들이붓고 멸균 포를 까는 그 모든 과정이 마치 한 편의 예술처럼 느껴졌다.
한 선배의 손에 들린 메스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꺼져가는 생명을 구원했다.
내 눈에는 오직 그 한 사람만이 보였다.
피와 죽음의 한복판에서 모든 규정과 상식을 뛰어넘어 오직 환자를 살리겠다는 단 하나의 신념만으로 칼을 든 의사.
아, 이거구나.
내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게 내가 봤던 드라마에서의 그 모습이구나.
물론 모습은 달랐다.
드라마처럼 고귀하지 않았다.
처절했다.
하지만 그 본질은 같다.
이게 응급의학과구나.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마음을 고쳐잡았다.
그래.
나는 굳게 다짐했다.
응급의학과로 가자고.
저 사람처럼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저런 괴물이 될 자신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저 사람의 등 뒤에서, 저런 전쟁터의 한복판에서 도망치지 않는 의사가 되고 싶다.
나는 그날 밤 내 꺾여버린 꿈의 조각들을 다시 주워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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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희미한 소음, 그리고 다음은 퀴퀴한 소독약 냄새.
“으어… 어….”
신음과 함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내가 쓰러졌구나.
바로 그때.
촤르륵
침대 옆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선 이민재가 짜잔 하고 나타났다.
뭐야, 이 양반 왜 모습이 이따구야.
이민재는 의사 가운이 아닌 목이 늘어난 회색 후드티에 츄리닝 바지 차림이었다.
머리는 까치집이 지어져 있었고.
‘지금 뭔 꼴이냐 진짜.
나는 내 몸을 내려다봤다.
환자복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팔에는 수액 라인이 꽂혀 있었고.
“어… 선생님? 그 옷은.. 퇴근하신 겁니까?”
내 쉰 목소리에 이민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들고 있던 캔커피를 내 머리맡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래 이 새끼야. 퇴근했다고 인마.”
이민재는 의자를 끌어와 내 침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 몇 신지는 아냐? 시계 봐봐.”
나는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바늘은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후 10시다 10시. 퇴근 시간에서 3시간이나 더 지났다고, 인마.”
“아….”
나는 멍하니 탄식을 뱉었다.
내가 쓰러진 게 아침 9시 반쯤이었으니까… 딱 12시간 언저리 정도 기절해 있었네.
30분에 12시간 정도 페널티니까, 아니. 왜 안 깎아주는 걸까.
이번에는 빙의를 절반도 안 썼는데요.
“몸은? 이제 좀 괜찮냐?”
“아, 저… 네. 괜찮습니다.”
물론 구라다.
아직도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시고 아프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아프다고 징징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깐.
“그래. 괜찮아야지.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
이민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미친놈 아니야 진짜. 이제 2년 차 주제에 두 번이나 사람 배를 깐 놈이 어디있냐? 외과도 아니고. 아까 외상외과 전태정 교수님이 잠깐 네 상태도 보고 가시더라. 아무 말 없이 너 자는거 한 5분 쳐다보다가 그냥 가셨어.”
“아 그러셨습니까….”
“에휴….”
이민재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다시 한숨을 쉰 뒤 입맛을 다셨다.
“그… 하… 아오 씨발. 호들갑을 떨 힘도 안 나온다 이제.”
이민재는 정말로 지쳐 보였다.
“뭔진 모르겠지만. 잘했어. 결과적으로는. 그렇게만 따졌을 때는 잘했고… 아니… 하… 이걸… 칭찬을… 해야 돼 말아야 돼….”
이민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근처를 서성였다.
이민재는 나를 한번 쳐다봤다가, 다시 벽을 쳐다봤다가 마침내 내 침대 앞에 멈춰 섰다.
이민재는 잠시 숨을 골랐다. 어깨가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입이 열렸다.
“그래! 현재야! 모르겠다!”
그는 내 어깨를 부서져라 꽉 잡았다.
“이게! 바로! 응급의학과 의사의 모습이란다!! 계산하고, 재고, 절차 따지는 샌님 같은 새끼들이 아니라! 눈앞의 사람을 살리기 위해 면허고 나발이고 그냥 다 던져버리는! 이 미친 짓이야말로! 우리 응급의학과의 심장이라고! 알겠냐 인마!”
나는 열정적인 쉐이킹에 아직 회복되지 않은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느끼며 그저 영혼 없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 양반은 한결같다 증말.
“환자, 환자는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근육통보다 내가 저지른 그 미친 짓의 결과가 더 두려웠다.
내가 한 모든 것이 결국 헛수고는 아니었을까.
“아, 환자?”
이민재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탁 쳤다.
“그건 니 눈으로 직접 봐야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그는 구석에 처박혀 있던 병원 노트북을 들고 와 내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쾅하고 올려놓았다.
꽤나 구형인지 팬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무리 낡은 노트북이어도 회사 비품인데, 좀 살살 다루면 안 되나.
이 양반 성격 하고는.
“자.”
이민재가 노트북 전원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EMR에 로그인해보렴. 네가 직접 그 환자의 다음 이야기를 확인해 보라고.”
“..네.”
나는 노트북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익숙한 병원 로고 화면.
[CUMC - EMR SYSTEM]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엔터키를 누르자 복잡한 환자 목록과 오더 창이 화면 가득 펼쳐졌다.
병록번호를 치고….
엔터.
차트가 열렸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스크롤을 내리기 시작했다.
음, 내원 이유는 TA… 교통사고고, GCS 별로… 혈압 낮고… 개방성 골반 골절….
그래, 이런 건 빨리 넘기자.
내가 다 아는 내용이니까.
나는 응급실 기록을 빠르게 훑어 내렸다.
[ER서 hemorrhagic shock control 위해 REBOA 시행함.]
..이 기록이 남겨져 있네.
음, 어디 보자. 이건 다 됐고.
수술 기록지는… 어차피 봐도 모르는 내용 투성이일 테니 패스.
가장 중요한 건 중환자실 입원 후 기록이지.
나는 경과 기록 탭을 클릭했다. 외상외과 팀이 작성한 입실 기록부터 시작해서, 시간대별로 빼곡하게 적힌 기록들이 화면을 채웠다.
TICU 입실 시 V/S BP 80/50…
시험적 개복술을 또 시행 하셨고… 외고정술도 하셨고….
“..수술 시간 엄청 길었네요. 거의 8시간 넘게 했네.”
“그치. 빡셌을 거야. 피바다였을 테니. 제대로 안 해놨으면 아마 수술 시작도 못 하고 테이블 위에서 죽었을걸.”
이민재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나는 계속해서 기록을 읽어 내려갔다.
ARDS(*급성 호흡곤란 증후군) 소견 보여 인공호흡기 세팅 한번 변경했고.
패스 패스… 온갖 복잡한 처치 기록들을 빠르게 넘겼다.
그래서 이 환자는 지금 살아있는가.
마침내 가장 최근의 바이탈 기록과 간호 기록이 보였다.
V/S BP 110/70, HR 90회, SpO2 98%.
오….
나는 나도 모르게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모니터 속의 숫자들이 기적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옆에 앉은 이민재를 쳐다봤다.
“..일단 살았네요.”
이민재는 내 눈을 마주하며 피식하고 웃었다.
“그치? 살았어.”
그는 아주 현실적인 말을 덧붙였다.
“물론 뭐… 이제부터 시작이지. 저런 대형 외상 환자는, 수술 끝나고 중환자실 올라가고 나서부터가 진짜 전쟁이니까. 패혈증, DIC(* 파종성 혈관내 응고장애), 다발성 장기 부전… 온갖 좆같은 합병증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고. 앞으로 저기서 온갖 쌩지랄을 다 하면서 버텨내는 일이 남긴 했지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한번 나를 쳐다봤다.
“그래도 살았어. 테이블 위에서 죽지 않았다고. 어떤 미친놈 덕분에.”
나는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방금 확인한 환자의 생존 기록을 곱씹었다.
살았다.
나는 내 침대 옆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나 마시는 이민재를 쳐다봤다.
“선생님.”
“응?”
“그래서 전 어떻게 됩니까?”
“너?”
이민재가 되물었다. 그의 표정은 읽기 어려웠다.
“네. 저는요.”
이민재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글쎄다….”
이민재는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작년에 네가 그 미친 개복술을 시행하고도 수련위원회에서 그냥 견책에 감봉 1개월로 넘어갔지. 그때도 환자는 살았고. 이번에도 결과는 괜찮았고. 환자는 살아서 중환자실에 누워있고, 심지어 네 덕분에 예후도 좋다고 하니….”
그 말에 내 마음속에 아주 작은 희망이 피어올랐다.
그래, 이번에도 어떻게든….
“음… 잘 모르겠는데. 아마 좆됐을걸?”
뭐요?
아니 아까는 온갖 희망을 다 줘놓고.
이제 와서 이러기 있습니까.
“에?”
내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 우리 함께 곰곰이 생각을 해보자고.”
그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작년엔 네가 1년 차 짬찌였고. 처음으로 사고 친 거였고. ‘환자를 살리려는 뜨거운 열정이 넘쳐서 그만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고 어떻게든 포장이 가능했다고.”
음, 일단 전제부터가 틀린 것 같습니다 선생님. 일단 1년 차가 개복술을 한 게 훨씬 미친짓 아닐까요.
2년 차보다.
저건 객기로 포장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싸늘하게 웃었다.
“너 이제 2년 차야! 응급실 물 좀 먹었다고 깝죽거릴 시기라고. 그것도 작년에 이미 한번 초대형 사고 쳐서 수련위원회까지 갔다 온 전과가 있는 놈이 이번엔 응급실 소생실에서 그것도 외상외과 교수님까지 보는 앞에서 레보아를 꽂았어! 그것도 니가 먼저 하겠다고 나선 거나 다름없었고.”
뭐, 지적 자체는 모두 사실이다.
근데 이 양반의 뇌는 내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1년 차가 개복술을 한 게 더 미친짓 아니냐고.
대체 왜 이게 더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마 초범은 봐준다? 뭐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신게 아닐까.
“그냥 열정으로 포장될 수준이 아니잖냐. 미친놈이지. 구제 불능의 상습범. 시한폭탄.”
이민재가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에는 수련위에서 끝나는 건 아닐 것 같고, 아마 정식 징계위원회 회부로 가지 않을까? 수련 자격을 박탈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고.”
어우, 왜 겁을 계속 주십니까.
자꾸 쫄리게 이 양반아.
바로 그때 이민재가 갑자기 내 등을 후려쳤다.
“괜찮아 괜찮아!”
이민재의 목소리가 다시 평소의 그 경박하고 요란한 톤으로 돌아와 있었다.
뭐가 괜찮아요.
아파 죽겠는데.
“좆돼보면서 환자도 살리고! 그러면서 크는 거지 의사가! 안 그래? 인생 뭐 있냐! 한번 좆돼보는 거지!”
이민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어차피 나도 좆됐어! 빼도 박도 못하게 내 묵인 하에, 아니 거의 내 방조 하에 네가 그 미친 짓을 벌인 거나 마찬가지니까. 나도 같이 징계위원회 불려 가서 개처럼 털리겠지. 같이 가는 거야. 인생 뭐 있냐! 동반 입대! 동반 징계! 으하하!”
“어… 좆된건가요?”
“어.”
이민재가 아주 명쾌하게 대답했다.
“너도 나도. 아주 사이좋게 쌍으로. 좆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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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민재는 먼저 나가보겠다며 응급실을 나섰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나는 천천히 파란 창을 열었다.
그곳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갤러리는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인기 글 목록 최상단에는 방금 전 내 몸을 빌려 썼던 장본인의 글이 버젓이 올라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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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승 구경 후기.txt
작성자: 메스의신
교통사고로 거의 죽어가던 양반 REBOA로 대동맥 틀어막아서 살리고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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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글 밑으로는 온갖 댓글들이 달리고 있었다.
ㅇㅇ (210.94) : REBOA 하고 왔구나… 고생했다 ㅇㅇ.
수술실망령3 : 조오오오오오오온나 부럽다ㅏㅏㅏㅏ
심장내과망령 : 이걸 막네
뼈덕후88 : 그래서 뼈는? 골반 골절이라며. 뼈 사진 안 찍어옴?
나는 요란한 반응을 훑어내렸다.
하… 그래.
잘 하긴 했지.
부정할 수는 없다.
메스의신의 미친 짓이 아니었다면 그 환자는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영안실로 내려갔을 테니까.
헬조선노예1 : 그래서 나 이제 ㄹㅇ 어캄…? 징계위 또 가겠는데.
내 댓글에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ㄴ 메스의신 : 잠시만 ㄱㄷ
메스의신은 짧은 답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화면만 쳐다봤다.
또 무슨 꿍꿍이지.
설마 ‘내가 다 책임지겠다’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당신은 이미 죽었잖아 이 양반아.
그리고 잠시 후.
갤러리에 새로운 글이 하나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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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헬노예는 봐라 ㅇㅇ
작성자: 메스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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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글을 클릭했다.
화면 중앙에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아주 조악한 그림판 실력으로 그려진 졸라맨 하나가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그랜절.
세상에서 가장 극적인 사과의 자세.
그리고 그 그림 밑에 짧은 세 줄의 글이 적혀 있었다.
==================
진짜 미안하다.
화이팅하길 바란다.
그래도 이번엔 반말 안 썼다.
==================
….
나는 그 화면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니면 저 그림판 졸라맨의 목이라도 비틀어야 할지.
반말 안 썼다고?
그랬지.
집중 좀 하게 조용히 하라고 했을 때 빼고는.
장족의 발전이다.
아주 눈물이 날 지경이네.
나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화면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른세수를 하면서.
참 잘했어요 이 개새끼야….
나는 택시 뒷좌석에 시체처럼 몸을 싣고 집으로 향했다.
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양말도 벗지 않고 그대로 현관 바닥에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띠링-
그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액정을 확인하는 순간 내 눈앞이 하얘졌다.
발신자는 교육수련부.
[교육수련부] 응급의학과 2년 차 전공의 한현재 선생님. 금일 발생한 응급실 내 인터벤션 시술 건 관련하여 내일 오전 10시 동관 14층 회의실에서 수련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니 시간 엄수하여 참석 바랍니다.
…일자가… 내일?
아니 뭐야.
미친 거 아니야?
지난번에 배를 쨌을 때는 그래도 며칠의 유예 기간이라도 있었다.
경위서를 쓰고, 소문이 돌고, 마음의 준비라도 할 시간이 주어졌다고.
그런데 이번엔?
하루?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뒤에 바로 소환이라고?
지난번에는 약간의 유예를 주더니, 이번에는 이러는 이유가 뭘까.
설마 나를 반동분자(?)로 낙인찍고 이번에는 아예 보내버릴 작정인 건가?
그래, 나는 확신했다.
병원 측에서 작정하고 나를 조지기로 마음먹었다는 뜻인 거다!
두 번의 대형 사고.
상습범.
시한폭탄.
“으아아아악! 안 돼! 좆됐잖아!!!”
나는 현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절규했다.
이대로 끝인가.
고작 2년 차에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리는 건가.
아니지.
아직 포기할 순 없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려면…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한번 창을 열었다.
내 유일한 희망.
헬조선노예1 : 야!!!! 메스의신 이 개새끼야!!!!! 당장 튀어나와!!!!! 나 내일 수련위원회 끌려간다고!!!!!
내 비상 호출에 메스의신이,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온갖 귀신들이 팝콘을 뜯으며 몰려들었다.
그렇게 밤새도록 메스의신과 자기방어를 준비했다.
나는 여러 조언들과 내 머리를 쥐어짜 만든 사정들로 어떻게든 살아남을 논리를 구축하려 애썼다.
잠은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근육통과 불안감으로 범벅이 된 채 나는 그렇게 아침을 맞이했다.
***
다음 날 낮.
동관 14층 교육수련부 회의실 앞 복도.
나는 어젯밤 밤새도록 다림질한 내 옷 중에서 가장 멀쩡한 세미 정장 차림으로 서 있었다.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했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두근두근.
“하아….”
숨을 고르는데 마침 회의실 문이 열렸다.
교육수련부 직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한현재 선생님, 들어오세요.”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회의실 안의 풍경은 작년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
길고 육중한 테이블.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러 명의 교수.
중앙에는 여전히 무표정한 교육수련부장 오만석 교수.
그 양옆으로는 처음 보는 얼굴의 내과계, 외과계 교수들.
그리고 테이블 가장 끝 내 쪽 구석에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우리 과 과장 박웅.
나는 테이블 앞에 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오만석 교수가 서류에서 눈을 떼고 나를 쳐다봤다.
“…한 선생. 우리 작년에도 비슷한 걸로 한번 보지 않았나?”
‘그러게요. 또 뵙게 돼서 아주 싸발적으로 영광입니다 교수님.
나는 최대한 공손하고 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이런 일로 다시 뵙게 되어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교수님.”
나는 숨을 죽인 채 오만석 교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입에서 나올 단어 하나하나가 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정직? 감봉? 수련 정지? 해고?
오만석 교수는 서류 뭉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종이일까.
내가 보여달라고 하면 보여주려나.
오 교수는 엄청난 종이 뭉탱이를 하나하나 펴 확인하더니 안경을 고쳐 쓰고 입을 열었다.
“본 위원회는 응급의학과 전공의 한현재 선생의 REBOA 시술 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심의하였음을 알립니다.”
…?
잠시만요, 변론 기회도 안 주고 바로 이렇게 결론부터 시작하는 겁니까?
아니,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이번엔 진짜로 병원이 날 보내버리려고 작정한 모양이다.
나는 체념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올 것이 왔다.
“첫째, 본원 내규 및 수련 세칙에 따르면 REBOA 시술은 외상소생술 과정의 일부로서 응급의학과 전공의가 임상강사 또는 스태프의 직접적인 감독하에 제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비록 2년 차 전공의가 주도적으로 시행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나, 규정상 완전히 금지된 행위는 아님을 확인했습니다.”
…네? 잠깐만요. 그런 규정이 있었다고?
잠시만,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빌드업인가?
나를 더 찰지게 때리기 위한 그런 빌드업?
“둘째, 당시 소생실에는 응급의학과 임상강사 이민재 선생이 팀 리더로서 현장을 총괄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해당 시술은 적법한 응급의학과 전문의 자격을 갖춘 임상강사의 감독하에 시행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나를 믿어주긴 했지만… 저걸 감독이라고 부를 수 있나?
아니 잠시만, 진짜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잖아.
“셋째, 시술의 가장 핵심적이고 위험한 단계. 즉 카테터의 최종 위치 선정과 벌루닝은 외상외과 전태정 교수팀이 도착한 이후 전 교수의 직접적인 집도하에 이루어졌습니다. 한현재 선생이 시행한 부분은 초기 혈관 접근 및 가이드와이어 삽입에 국한되며, 시술 전체 과정에서 전공의가 직접적으로 시술을 전담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잠깐만. 위치 잡는 것까지 메스의신이 다 했는데?
전태정 교수는 와이어만 넘겨받아서… 아니지, 그것도 메스의신이 알려준 대로 했잖아.
아니, 굳이 따지자면 전 교수님이 다 하신 게 맞긴 한…가.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수련위원회의 논리는 완벽했다.
규정, 감독, 책임 소재 분산.
뭔가 내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곤 있었지만.
오만석 교수는 마지막 서류를 확인하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따라서, 상기 사유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전공의 한현재 선생의 행위는 비록 절차상 미숙하고 위험천만한 측면이 있었으나 규정을 명백히 위반했다거나 독단적으로 의료 행위를 시행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결과적으로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점을 참작하여….”
오 교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포함한 모든 위원들을 둘러봤다.
“본 수련위원회는, 금번 안건에 대해 불문으로 의결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내 오 교수는 책상 위의 작은 의사봉을 들어 가볍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땅.
땅.
땅.
나는 내가 지금 뭘 들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불문?
아무런 징계도 없이 그냥 없던 일로 하겠다고?
이게 이게 말이 돼?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 건너편 저 멀리 구석 자리에 앉아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전태정 교수의 눈과 마주쳤다.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눈빛은 무언가 복잡하고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했다.
이번엔 빚졌다는 암묵적인 신호였을까. 아니면 다음번엔 국물도 없을 줄 알라는 경고였을까.
나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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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멍한 상태로 수련위원회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살았다.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역시 난 운이 좋아.
하지만 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닫힘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누군가 급하게 뛰어와 엘리베이터 문을 잡았다.
“잠깐!”
익숙한 목소리. 과장이었다.
박웅은 숨을 몰아쉬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고 좁은 공간 안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거 뭔가 데자뷰인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불문이라니.
분명히 징계를 받을 줄 알았는데, 혹시…
“과장님.”
“어.”
“저 오늘…결과 말입니다.”
나는 말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뭐라고 해야 할까.
저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노골적인가.
“어떻게 제가….”
나는 결국 가장 원초적인 질문을 던졌다.
“혹시 과장님께서….”
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과장 박웅은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 내가 뭐.”
“아뇨, 저, 그… 혹시 과장님께서 뭔가 저를 위해서 힘을 좀 써주신 게 아닌가 해서….”
그래, 그거다.
의학 드라마의 가장 흔한 클리셰.
사고 친 부하 직원을 과장이 온몸으로 막아서는 감동적인 스토리.
박웅 과장이 뒤에서 나를 위해 발 벗고 나서준 것이 아닐까?
아까 회의실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것도 사실은 나를 변호하다가 다른 교수들과 싸우고 난 뒤의 탈진 상태였던 것이 아닐까?
내 조심스러운 질문에 과장이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엥? 뭐가.”
…네?
“아뇨, 저, 그… 그러니까 과장님께서 뭔가 저를 변호해주셨다거나….”
“무슨 소리야?”
과장은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난 별거 안 했는데? 그냥 위원회 열린다고 해서 너 인사 평가 관련 서류 몇 개만 행정팀 통해서 제출하고 말았지. 뭐, 평소 근무 태도 성실하고, 동료들과의 관계 원만하며, 학구열이 높고… 뭐 대충 그런 거. 싹싹한 놈이다. 뭐 이런 거.”
그냥 형식적인 서류 몇 장?
“그러면 오늘 징계는… 왜 이렇게….”
“징계?”
과장이 되물었다.
“애초에 징계할 껀덕지가 없었잖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생각을 해봐. 뭐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다 시술했어? 아니잖아. 중간에 전태정 교수가 와서 마무리했지. 그럼 네 책임은 거기까지야. 그리고 네가 시술하는 동안 옆에 임상강사 이민재가 버티고 서 있었잖아. 물론 그놈도 수련의지만, 어쨋건 전문의 면허가 있는 놈이라고. 그럼 규정상 지도 감독 하에 이루어진 술기라고 볼 수도 있는 거고. 결정적으로 네가 우리 병원 규정을 명백하게 위반한 게 있어? 응급실에서 레보아를 꽂으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냐고. 없잖아.”
그… 렇긴 하죠.
물론 전문의의 감독 없이 2년 차가 단독으로 시행하면 안된다는 암묵적인 룰은 있었지만 명문화된 규정은 아니었다.
“그럼 된 거지 뭐.”
과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나는 여전히 멍한 상태로 먼저 내리는 과장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정말로 그냥 껀덕지가 없어서 끝난 거라니.
나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병원 로비는 점심시간이 가까워진 탓인지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환자, 보호자, 그리고 흰 가운을 입은 수많은 의료진들.
과장은 나보다 몇 걸음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아, 맞다.”
과장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너.”
과장이 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손은 진짜 쓸 만한 것 같던데.”
…네?
저는 우리 과 대표 똥손입니다만.
“뭐, 작년에 사고 친 그 개복술 건도 그렇고. 이번에 그 레보아인지 뭔지 그것도 그렇고. 결과적으로는 다 성공시킨 거 아냐.”
그건 메스의신이 성공시킨 건데요.
“아, 아닙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기계적인 겸손 모드를 발동했다.
“쯧. 미친 짓을 2년 연속으로 하는 레지던트가 우리 과에 굴러 들어왔는데 내가 이걸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원….”
과장이 한숨을 쉬었다.
“이민재 그놈도 그렇고. 아주 또라이가 둘이다 둘. 우리 과에.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과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과장의 마지막 말에 반박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또라이는 맞는데 둘이 아니라 셋 아닌가요 과장님.
당신을 포함해서.
우리는 말없이 병원 로비를 가로질렀다.
유리문 밖으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과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조금 더 진지했다.
“작년에 내가 외상센터 파견 교육 관련해서 얘기했던 거. 기억나나?”
“아 네. 기억납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이 타이밍에 다시 그 얘기를 꺼낸다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나 지금 징계위원회 불려 갔다 온 사람인데.
“그거는….”
과장이 잠시 말을 골랐다.
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제발 아니라고 해줘.
“어… 아마 안 갈 것 같다.”
입에서 마침내 내가 기다리던 말이 나왔다.
…예에에쓰!!!!!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강현준 교수와 메스의신의 콜라보레이션 지옥 훈련은 피했다.
나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한 감격을 억누르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아쉽다는 표정은 덤이다.
“음.”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내 모든 안도감을 산산조각 내는, 다음 문장을 덧붙였다.
“대신.”
대신?
“닥터헬기 탈래?”
……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잘못 들었습니다?”
나는 바보처럼 되물었다.
과장은 내 반응이 뭐가 그리 웃긴지, 아니면 그냥 내 존재 자체가 웃긴 건지 모르겠지만 아주 유쾌하게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왜, 싫어? 하늘을 나는 응급실! 얼마나 낭만적이냐! 강현준 교수가 너 탐낸다고 하도 노래를 부르길래 외상센터 대신 이걸로 퉁치기로 했다 내가! 가서 많이 배우고 와!”
과장이 내 어깨를 두들겼다.
닥터헬기.
하늘을 나는 응급실.
좁아터진 공간.
미친듯한 소음과 진동.
낭만?
낭만 같은 소리하네.
헬리콥터? 내가? 하늘을 나는 응급실?
이건 미친 짓이다.
나는 아직 땅 위에서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2년 차라고.
“과, 과장님.”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이 말도 안 되는 명령에서 벗어날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 규정.
언제나 나를 줘패 왔던 그 빌어먹을 규정이라면 이번에는 나를 구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근데 제가 알기로는 응급의료 전용 헬기, 그 닥터헬기에는 응급의학과 전문의나 외상외과 전문의가 탑승해서 현장 처치를 시행해야 하는 걸로 아는데 저는 아직…”
“아, 그래?”
과장은 내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박웅의 얼굴에 ‘어라, 그런 게 있었나? 하는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이거다!
걸렸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역시 나 같은 저년 차는 안 되는 거였어!
“크흠!”
과장은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가슴을 쭉 폈다.
그리고는 아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또 내가 누구냐!”
과장이 자신의 가슴팍을 두 번 툭툭 쳤다.
“그 누구보다 법규와 규정을 철저히 준수하는 우리 청진대학교의료원 응급의학과의 양심! 과장 박웅 아니냐! 내가 설마 그런 기본적인 것도 확인 안 하고 너를 헬기에 태우려고 했겠니!”
네, 그래 보입니다 과장님.
과장은 주머니에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에는 이미 무언가 문서 파일이 띄워져 있었다.
그는 그 화면을 내 코앞에 들이밀었다.
“딱 알아왔지! 자, 봐라!”
화면에는 [응급의료 전용헬기 운용 세부지침]이라는 딱딱한 제목의 문서가 떠 있었다.
중앙응급의료센터 공식 자료라는 로고까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보이냐? NEMC 공식 자료! 이게 바로 닥터헬기의 모든것을 규정하는 바이블이다! 자 여기 페이지를 한번 내려가 보렴! 쭉쭉!”
과장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빠르게 스크롤했다.
나는 그 손가락 끝을 따라 눈알을 필사적으로 굴렸다.
수많은 조항과 세부 규정들이 어지럽게 지나갔다.
마침내 손가락이 한 부분에서 멈췄다.
“자 여기! 읽어 봐라!”
…어디 보자….
(항공의료팀 의료진의 자격)
1) 의사
가) 권역응급의료센터 또는 지역응급의료센터, 권역외상센터에 소속된 전문의.
나는 그 첫 줄을 읽는 순간 다시 한번 희망을 보았다.
“…일단 [가] 항부터 저는 해당 사항이 없는데요 과장님. 제가 전문의로 보이십니까.”
“어허! 이 친구가. 끝까지 읽어보라니까! 계속 봐 봐!”
나는 그 닦달에 마지못해 다음 항목들을 읽어 내려갔다.
나)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이 정하는 소정의 항공의학 관련 교육을 수료한 사람
다) 해당 응급의료 전용헬기(주헬기)에 5회 이상 탑승하여 현장 훈련을 이수한 사람
라) 5회 이상의 헬기 탑승 훈련 후에도 신체적 또는 심리적으로 항공 근무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사람
나는 모든 항목을 다 읽고 고개를 들었다.
“…과장님. 저는 저기에 해당되는 교육도 탑승 훈련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 심리 상태는 지금 당장이라도 정신과 상담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내 진심 어린 호소에 과장은 또다시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어허! 아직 핵심을 못 봤구만! 자, 여길 보라고!”
그는 스크롤을 아주 조금 더 내려 깨알 같은 글씨로 적힌 조항을 가리켰다.
[※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은 위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재난 상황 대응, 헬기 정비 및 점검, 교육·훈련, 사업 평가 및 조사 등의 목적으로 닥터헬기에 별도의 인원을 탑승토록 할 수 있다.]
과장은 교육·훈련이라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콕 찍어 강조했다.
“자, 교육 보이지? 훈련도 보이고! 너는 정식 항공의료팀 의사로 탑승하는 게 아니야! 외상센터 파견 교육의 일환으로! 수련의 자격으로! 교육과 훈련을 위해 타는 거라고! 껄껄. 됐지? 아무런 법적 문제도 없고 절차상 하자도 없어!”
“…네 과장님.”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영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잘 알아들었으면 됐다!”
과장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마침 8월에 우리 병원에서 닥터헬기 신규 인력 교육이랑 훈련 과정이 있을 예정이니까 그때 되면 내가 다시 자세히 알려줄게! 너를 하늘을 나는 의사로 만들어주마! 하하하!”
과장은 혼자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8월.
아직 몇 달이나 남았지만 그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올 것이다.
나는 이미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한 환청을 느끼고 있었다.
“자… 잠시만요, 과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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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택시 뒷좌석에 몸을 기댔다.
흠… 그래도 오늘은 오프니까.
그래. 오프다.
내일 해가 뜰 때까지는 적어도 병원이라는 지옥에서 벗어나 있을 권리가 있다.
일단 불행한 소식은 머릿속 쓰레기통에 처박아두고 이 짧고 소중한 행복한 휴식이나 즐겨볼까.
뭘 할까.
집에 가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냉동 피자나 돌려서 맥주랑 먹을까.
아니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쇼츠나 넘기다가 잠들까.
그렇게 행복 회로를 돌리던 중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갤러리는 뭐 올라온 거 없나.
심심해서?
아니. 습관이다.
어쩌면 중독일지도.
이 미친 귀신들과의 시답잖은 대화 없이는 이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없게 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파란색 인터페이스가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인기 글 목록은 예상했던 대로 온통 내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제목 하나.
[분석] 헬노예가 좆되지 않을 경우의 수…txt
오, 이건 좀 궁금한데.
모두가 나의 파멸을 확신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감히 좆되지 않을 경우의 수를 논한다고?
어떤 미친놈이 쓴 글일까.
나는 그 글을 클릭했다.
[뒤진 의학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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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헬노예가 좆되지 않을 경우의 수…txt
작성자 : ㅇㅇ (39.7)
그런 건 없다 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애초에 저 미친 메스악귀를 두 번이나 빙의시킨 그 지점에서 넌 이미 탈락이다 이거야 ㅋㅋㅋㅋㅋㅋㅋㅋ
니 의사 인생?
응~ 없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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풉.
나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디 실컷 놀려봐라.
어차피 나 징계 안 먹었거든.
불문이다 불문 이 등신들아.
니들이 뭘 알아.
나는 그들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려주며 스크롤을 내렸다.
그 외에도 여러 글이 보였다.
REBOA 말고 환자를 살릴 다른 방법은 정말 없었나? [19]
[분석] 헬노예 REBOA 케이스, 적절성 분석해 봄 ㅇㅇ [8]
Zone 1 REBOA 이후 발생 가능한 합병증 총정리 (헬노예 필독) [3]
오… 뭐, 내 얘기로 가득하긴 하네.
다른 방법은 없었냐는 글을 클릭해 봤다.
[댓글]
메스의신 : 없었어. 내가 봤을 땐 그게 유일한 길이었다.
ㄴ 심장내과망령 : 글쎄, ECMO를 먼저 걸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ㄴ 메스의신 : ECMO 걸러 가는 시간에 이미 어레스트 왔어 이 심장쟁이 멍청아.
음, 그 밑의 적절성 분석 글도.
[뒤진 의학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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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헬노예 REBOA 케이스, 적절성 분석해 봄 ㅇㅇ [8]
작성자 : 수술실망령3
1. 초기 판단 및 MTP 발동 : Good. (조음)
2. 외상외과 콜 타이밍 : Reasonable. (합리적)
3. REBOA 시술 결정 : Controversial but inevitable.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불가피)
4. 시술자 선정 : Fucking crazy. (*발 미침?)
5. 결과 : Miracle. (기적)
[댓글]
ㅇㅇ(118.235) : 4번에서 터짐
음, 내 미친짓.
아니지, 메스의신의 미친 짓이 갤떡으로 돌다니.
잠시만.
뭔가 이상했다.
차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진 기분.
나는 백미러를 힐끗 쳐다봤다.
기사님이 자꾸 거울로 나를 힐끗힐끗 보신다.
나는 내 얼굴을 더듬었다.
혹시 나 표정 관리 안 됐나?
갤러리 글 보면서 혼자 풉 하고 웃고.
미간을 찌푸렸다가, 욕설을 중얼거렸지.
남들이 보기에는 완벽하게 정신 나간 놈의 모습이겠구나.
작년 버스에서의 악몽이 떠올랐다.
[옆 사람 이상함;; 정신과에서 갓 퇴원했나 봐]
…음, 오늘도 미친놈처럼 보였겠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최대한 정상인처럼 보이도록 창밖의 야경을 응시하는 척했다.
조심하자.
귀신들이랑 너무 오래 놀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 감각을 잃어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스흡-하.
택시 뒷좌석의 가죽 시트에 몸을 묻은 채, 나는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밤 풍경을 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오해가 싫어서 버스를 최근 피한 것도 있었다.
작년에 버스 안에서 뇌졸중 할머니를 구했던 그 영웅적인 사건 이후로 나는 대중교통 이용을 극도로 꺼리게 되었다.
그 사건 자체는 좋았지만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고 혼자 웃는 내 모습이 주변 사람들에게 완벽한 정신병자로 비쳤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늘도 택시 기사 아저씨가 흘끗거리던 시선.
게다가 뭔가 내가 환타 재질이 있는 것 같아서 그런 것도 있고.
환타.
환자를 타는 의료진.
가는 곳마다 이상하게 응급 환자가 꼬이거나 유독 재수 없는 사건에 휘말리는 사람들을 일컫는 병원 내 은어.
뭐, 미신 같은 건 안 믿지만 내 지난 2년간의 의사 생활을 돌이켜보면….
글쎄.
남들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온갖 미친 사건들이 유독 나에게만 집중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개복술, REBOA, TTP, 아동 학대 신고까지.
이게 과연 우연일까.
최근에 내가 귀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이 세상 그 어떤 의학 교과서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고 말이지.
어쩌면 정말로 내 어깨 위에 무슨 액운이라도 타고 있는 건지도?
아니면 내 머릿속에 상주하는 저 미친 귀신놈들이 재앙을 몰고 다니는 걸까.
그렇게 쓸데없는 철학을 고민하는 사이에 택시가 익숙한 오피스텔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기사 아저씨는 내가 완전히 내리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치 위험한 짐을 내려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쉬며 사라졌다.
나는 텅 빈 도로에 혼자 서서 내가 사는 낡은 건물을 올려다봤다.
이 오피스텔의 공기.
너무나도 좋아.
병원과는 비교도 안 되는 평온함.
소독약 냄새 대신 어제 시켜 먹은 햄버거 냄새가 뒤섞인 나만의 공간.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면 기분 탓이다.
나는 그렇게 집을 향하며 조금 전 수련위원회에서 얻어낸 기적 같은 승리의 소식을 유일한 청중들에게 알리기로 했다.
[뒤진 의학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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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나 징계 안 받음 ㅇㅇ 불문임 ㅅㄱ
작성자: 헬조선노예1
방금 수련위원회 불려 갔다 왔는데 결과는 불문이다. 아무 징계 없음.
내규상 REBOA가 응급의학과에서 시행 못 할 술기도 아니었고 (물론 감독하에)
환자안전규정 위반한 것도 없고
결정적으로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외과 교수가 마무리했기 때문에 내가 ‘주도적으로’ 시술했다고 보기도 어렵다네?
그냥 소생실에서 제한적으로 참여한 수준이라서 어찌저찌 넘어감.
[댓글]
ㅇㅇ (210.94) : ? 무튼 ㅊㅊ.
라떼는말이야 : 천운인 줄 알아라.
수술실망령3 : 팩트) 저 내규에 감독하에 가능하다는 조항이 없었으면 헬노예는 지금쯤 좆됐다.
ㄴ 히포크라테스후예 : 그걸 누가 모름?
ㄴ 수술실망령3 : 닥쳐 내과 놈.
…뭐, 여전히 개판이구만.
나는 현관문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삑삑삑-
경쾌한 전자음과 함께 집 문이 열렸다.
나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가방도 내팽개치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내 목표는 단 하나.
침대.
일단 눕자.
그리고 나서 숏폼 영상을 보건 뭘 하건 해야지.
나는 침실로 향했다.
그렇게 푹신한 매트리스 위로 냅다 몸을 던졌다.
아….
이제야 좀 살겠네.
‘결과는 좋았잖아.
나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다시 한번 파란 창을 열었다.
아까 올린 ‘징계 안 받음 ㅅㄱ’ 글에 대한 반응이 궁금했다.
바로 그때 예상치 못한 댓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메스의신 : 야.
이 새끼는 또 왜.
메스의신 : 내가 레보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함? 눈깔 똑바로 뜨고 보고 있었겠지?
기억? 솔직히 말해서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내 몸이라는 극장 맨 뒷자리에서 팝콘이나 먹고 있었을걸?
ㄴ 헬조선노예1 : ㅇ? 아니? 기억 안 나는데? 거의 멍때리고 있었음.
ㄴ 메스의신 : 어어어어어어????? 헬노예야 지금 무슨 소리니 그게
…어, 뭔가 불안한데.
메스의신 : 눈앞에서 봤는데 그걸 기억을 못 하니 헬노예야????? 그게 할 말이니?????? 이 몸은 지금 굉장히 화가 났단다.
ㄴ 헬조선노예1 : 아니 인마 정신이 안 들었다니까??
ㄴ 메스의신 : 좋아. 뇌를 다시 포맷해 줄 필요가 있겠군. 지금부터 메스의신 속성 REBOA 강의를 시작한다!
으악! 안 돼! 씨발!!
미친 외과의사의 강의다!
그렇게 나는 오프 날 저녁 시간을 침대에 시체처럼 누운 채로 귀신 강사의 1:1 속성 과외를 받으며 보냈다.
메스의신은 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도 모를 3D 인체 모델을 내 눈앞에 띄워놓고, 대퇴동맥의 정확한 천자 지점부터 가이드와이어의 미세한 각도 조절, 시스 삽입 시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좆같은 합병증들, 그리고 Zone 1 벌루닝의 위험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행해야만 했던 이유까지.
모든 것을 뼈와 살이 분리될 정도로 상세하게 설명했다.
중간중간 쪽지 시험까지 쳐가면서 메스의신은 내 머릿속에 REBOA라는 술기를 강제로 구겨 넣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거의 두 시간이 흘렀을 무렵 강의가 갑자기 멈췄다.
메스의신 : 자! 여기까지!
헬조선노예1 : ? 끝임?
메스의신 : 어차피 가르쳐줘도 못함 ㅇㅇ. 카테터 조작이나 벌룬 부풀리기 같은 섬세한 부분은 다음에 내가 직접 네 몸에 다시 들어가서 가르쳐 주도록 하마. 감사한 줄 아셈 ㅇㅇ.
메스의신은 아주 관대한 척하며 강의를 마쳤다.
오늘의 수업이 예상보다 짧았던 이유는 중간중간 ‘이건 네 손으로는 어차피 평생 못 할 테니 다음에 내가 직접 보여주면서 가르쳐 주겠다’며 건너뛴 부분들이 꽤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너무 지쳐서 그냥 알아듣는 척 영혼 없이 대답한 탓도 있었다.
강의가 끝나자 거짓말처럼 피로감이 조금 가시는 기분이었다.
아니, 피로가 가신 게 아니라 그냥 정신이 나간 건가.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개운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아까보다는 조금 나아진 상태로 마침내 잠에 들었다.
‘아, 내일… 야간 근무네.
시발.
왜 휴일은 빨리 지나가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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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말.
병원은 연말의 어수선함으로 가득 차있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12월 말은 또 다른 의미를 가졌다.
‘신규 레지던트 합격자 발표.
내년 한 해 나의 삶의 질을 결정할 운명의 심판.
과연 우리의 당직 부담을 덜어줄 새로운 노예… 아니, 새로운 후배가 들어올 것인가.
오후 내내 나와 김지훈은 틈만 나면 병원 내부 전산망의 공지사항 게시판을 새로고침했다.
F5 키가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언제 뜨는 거야 대체!”
김지훈이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원래 오늘 오후 중에 뜬다고 했잖아!”
“좀 닥쳐봐. 뜰 때 되면 뜨겠지.”
나는 겉으로는 쿨한 척했지만 내 심장 역시 불안하게 날뛰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페이지가 새로고침되면서 새로운 게시글 하나가 목록 최상단에 떠올랐다.
[공지] 전공의(레지던트) 1년 차 최종 합격자 명단 안내
“떴다!”
나와 김지훈은 거의 동시에 외치며 모니터 앞으로 머리를 맞댔다.
“오… 어디 있냐… 어디 보자…”
나는 스크롤을 미친 듯이 내렸다.
“찾았다!”
[응급의학과 | 정원(TO): 4명]
정원 네 명.
그래, 작년과 똑같다.
그리고 그 밑으로 제발 네 개의 이름이 다 있기를.
[백은서]
[박성정]
TO 4명에… 두 명 지원…?
크아아아악.
내 눈을 의심했다.
이름이 두 개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익숙한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박성정? 얘 결국 EM 왔네…?”
“뭐?”
옆에서 함께 절망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니가 그때 똥꼬에 뭐 들어간 환자 짬 처리했던 그 인턴? 걔가 대체 왜 왔대? 너한테 복수하려고?”
“닥쳐 김지훈.”
나는 비아냥을 씹고 다른 이름 하나를 더 확인했다.
백은서.
지난번에 원서 접수하러 왔던 걔구나.
“음, 뭐. 나쁘진 않네.”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0명보다는 낫잖아.
“야! 두 명이야, 두 명! 반타작이라고! 내년에도 여전히 1년 차처럼 당직을 졸라 서야 한다는 소리야! 내년에도 우리 인생은 조뺑이가 확정이라는 소리잖아!”
“0명보단 낫잖아 이 새끼야.”
없는 것보다야 낫지.
“다른 과들은 뭐 없냐? 우리만 이 꼴이야?”
나는 김지훈의 말에 다른 과들의 합격자 명단을 훑어 내렸다.
“내과랑 외과는 그럭저럭 선방해서 어느 정도 채웠고. 어… 산소는 전멸인데?”
[산부인과 | 정원(TO): 3명]
[none]
[소아청소년과 | 정원(TO): 5명]
[none]
“아이고….”
김지훈이 혀를 찼다.
차라리 아예 비워주지 [none]은 왜 써놓은거야.
“오, 야. 흉부외과 한 명 있다. 미친놈이네.”
[심장혈관흉부외과 | 정원(TO): 2명]
[정재상]
나와 김지훈은 동시에 감탄사를 터뜨렸다.
우리가 그렇게 다른 과의 흥망성쇠를 안주 삼아 떠들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서늘한 그림자가 우리를 덮쳤다.
“혀… 현재야.”
“말 걸지 마 김지훈. 나 지금 다른 과 망했는지 살았는지 구경하느라 바쁘다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등 뒤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 안 하니…?”
“엇.”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고개를 돌리자 천은정 교수가 팔짱을 낀 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 교수님! 아이고! 오신 줄도 몰랐습니다!”
나는 의자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일 해야죠! 당연히 일 해야 합니다! 지금 바로 하겠습니다!”
호다다닥.
***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다.
수많은 환자들이 내 손을 스쳐 지나갔고, 나의 첫 레지던트 생활은 귀신들의 끝없는 잔소리와 함께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맞이한 2월 11일.
레지던트의 1년은 3월에 시작해서 이듬해 2월에 끝난다.
겨울의 끝은 곧 한 해의 끝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언제나 이별이 있었다.
응급의학과 전체 회식.
장소는 병원 앞 고깃집이었다.
갓 들어온 파릇파릇한 1년 차부터 오늘을 마지막으로 병원을 떠나는 4년 차들, 그리고 교수들까지.
나는 멍하니 맥주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R1.
레지던트 1년 차.
그 지옥 같던 시간이 이제 정말로 끝나가고 있다니.
한참 동안 고기가 익고 술잔이 오가던 그때 박웅 과장이 숟가락으로 불판을 내리쳤다.
“자자, 다들 주목!”
소란스럽던 식당이 순간 조용해졌다.
“오늘 이 자리는 지난 4년간 우리 응급의학과를 위해 청춘을 바친 자랑스러운 우리 4년 차 선생들을 떠나보내는 자리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자, 모두 박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
나 역시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자, 그럼 앞으로의 찬란한 미래에 대해 한번 들어봐야지! 유성훈 선생은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게 되나?”
4년 차 유성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뭐, 어쩌다 보니까 운이 좋아서 서울에 있는 오성서울병원 중환자의학과 전임의 과정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캬! 성훈이는 큰 물로 올라가는구나!”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김민욱 선생은 어디라고 했지?”
나와는 거의 엮일 일이 없어 얼굴만 겨우 알던 김민욱이 일어났다.
“저는 부산 생활도 슬슬 정리하고 고향인 통영에 있는 종합병원 응급의학과 과장 자리로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이제 저도 좀 편하게 살아보려고요.”
그 말에 모두가 부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저런 길도 있지.
“그치그치. 고향 내려가서 지역 의료에 힘쓰는 것도 아주 훌륭한 선택이지. 자, 마지막! 우리 의국장! 이민재는?”
모든 시선이 이민재에게 쏠렸다.
이미 몇 달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병원 중 하나인 아성병원의 펠로우 자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민재는 비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여러분. 저…”
이민재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남습니다!!!!”
정적이 흘렀다.
남는다고? 어디에?
“저 이민재! 제 청춘과 영혼을 바친 이곳, 청진대학교의료원에 뼈를 묻겠습니다!”
바로 그때 교수석 테이블에서 “푸웁!”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천은정 교수가 방금 마신 물을 뿜고 사레가 들려 켁켁거리고 있었다.
“뭐? 뭣? 민재야 너 방금 뭐라고? 남는다고? 어디를?”
“모르셨습니까? 교수님들은 다 아시는 줄 알았는데요. 저 그냥 여기 청진의료원에 뼈를 묻기로 했습니다! 저는 응급실을, 그리고 여기 계신 여러분들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하하, 뭐야 이거. 나만 몰랐어요?”
뭐야, 나도 당황했다.
교수가 이걸 모를 수 있는거였어?
천 교수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과장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천 교수가 평소에 민재를 하도 닦달하고 놀려대길래 내가 특별히 천 교수한테만 비밀로 했죠! 서프라이즈!”
“과장님!”
천은정 교수가 배신감에 찬 얼굴로 과장을 쳐다봤다.
그제야 모든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민재의 서프라이즈 폭탄선언으로 회식 자리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한참 동안의 소란이 이어지던 그때 박웅 과장이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과장의 시선은 테이블 가장 끝자리에서 거의 투명인간처럼 앉아있는 두 명의 젊은 얼굴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는 아주 귀한 손님들이 오셨지!”
그 말에 모든 시선이 박성정과 백은서에게 쏠렸다.
예비 1년 차들이었다.
“우리 예비 1년 차 선생들도 오늘 참석하셨는데 소감은 어때? 이 자리에 온 소감이!”
박웅 과장의 질문에 박성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저… 그… EM… 진짜… 참… 좋은… 네… 과 같습니다… 선배님들도 다 좋으시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그 영혼 없는 대답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박성정 선생은 의학 지식보다 포커페이스를 먼저 연습하도록 해야겠네. 하하!”
그렇게 박성정의 신고식이 끝나고,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옆의 백은서에게로 향했다.
“자, 그럼 백은서 선생은 왜 여기 왔나? 응급의학과가 좋아서? 아니면 그냥 성적 맞춰서?”
박웅 과장의 짓궂은 질문에 백은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저. 한현재 선배님이 환자분 개복술 하시는 거 보고 지원했습니다!”
정적의 순간.
시끄럽던 고깃집 안의 모든 소음이 그 순간 거짓말처럼 멎었다.
나는 입에 넣으려던 돼지갈비 한 점을 그대로 접시 위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1초 뒤.
“하하하하하!”
이민재의 폭소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 웃음소리를 신호탄으로 식당 전체가 웃음바다로 변했다.
“와, 저 또라이를 보고도 EM에 지원한 인턴이 다 있었을 줄이야!”
이민재는 거의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고 있었다.
“예비 1년 차.”
옆 테이블에 있던 4년 차 유성훈이 웃음을 참으며 진지하게 조언했다.
“너는 한현재처럼 미쳐가지고 환자 배 째면 안 된다? 알았지? 쟤는 그냥 돌연변이야 돌연변이. 쟤는 면허를 걸었다니까. 미친놈이야.”
“맞아! 심지어 그때 반말까지 했잖아!”
펠로우 박세영이 덧붙였다.
나는 수치심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고개를 숙이고 소주만 들이켰다.
“아앗, 선생님! 예전 이야기를 왜 또 꺼내십니까!”
내 항변은 거대한 웃음소리에 묻혀버렸다.
“아니 뭐 그리 예전 이야기도 아니구만! 불과 몇 달 전이잖아.”
이민재가 나를 놀리며 술잔을 채워주었다.
나는 그 잔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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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마지막 날.
응급의학과 의국은 어수선했다.
4년이라는 시간을 버텨낸 4년 차 레지던트들이 마침내 떠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사물함에서는 4년 묵은 퀴퀴한 냄새와 함께 낡은 교과서와 짝퉁 크록스, 그리고 정체 모를 영양제 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내 자리에서 그 풍경을 조용히 지켜봤다.
시원섭섭했다.
바로 그때 유성훈이 커다란 택배 상자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야야, 보이냐?”
유성훈이 자랑스럽게 펼쳐 보인 것은, 오성서울병원이라는 푸른색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갓 배송된 의사 가운이었다.
“이거 오성 가운. 어제 딱 배송이 왔거든. 핏이 아주 그냥 죽이지 않냐?”
유성훈은 가운을 걸쳐보며 어색하게 맵시를 뽐냈다.
“예예. 자랑도 너무 많으면 독입니다 유성훈 선생님. 눈부셔서 눈을 못 뜨겠습니다.”
“어쭈? 이 새끼 봐라. 이제 나 다른 병원 간다고 아예 남 취급이네? 서운한데?”
그 농담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축하드리는 거죠.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으로 가시는 건데.”
“으휴, 쨋든 뭐….”
유성훈은 어색한 듯 가운을 벗어 다시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는 평소의 그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와 내 어깨를 툭 쳤다.
“고생 많았다? 너 같은 놈이 내 근무때 자주 들어왔으면 나도 좀 편했을 텐데.”
“아이고, 저야 이제 고생할 일만 남았죠, 선생님.”
“그래도 1년 차가 제일 힘든 법이야. 그거 버텼으면 나머지도 어떻게든 버텨.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렇게 유성훈과의 짧은 작별 인사가 끝났다.
유성훈은 상자를 들고 의국을 나섰다.
창문 너머로 유성훈이 응급의료센터 간판 앞에서 잠시 멈춰 서는 게 보였다.
유성훈은 이내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권역응급의료센터’라는 글자를 살살 만져보았다.
그 얼굴에는 후련함과 착잡함이 뒤섞여 있었다.
유성훈의 모습을 보며 감상에 젖어 있는데, 등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내 멱살을 잡았다.
“현재야!”
이민재였다.
“나는! 나는 인사 안 해주니?”
…당신은 남잖아.
“예… 뭐… 그… 선생님과는 앞으로도 인사를 자주 하게 될 텐데요 뭐.”
내 지극히 합리적인 대답에 이민재는 세상이 무너지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현재야! 나는! 우리는! 이 응급실에서 피와 땀을 나누며 뜨거운 심장을 공유하는 전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작 그런 사무적인 인사로 우리의 관계를 끝내려는 것이니! 이 행태는 참으로 실망스럽다!”
…이 양반은 당최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저 열정의 반만이라도 시험공부에 쏟았으면 벌써 전국 수석을 했을 텐데.
듣기로는 전국 5등이었다나.
“무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오늘부터 나는 4년 차 선배가 아니다! 임상강사 이민재라고 한다! 하하!!”
펠로우.
교수와 레지던트 사이의 어중간한 존재가 된 것이다.
“아… 예… 펠로, 아니. 임상강사 과정 밟으시는 거 참 축하드립니다….”
나는 마지못해 손을 잡고 억지 축하를 건넸다.
***
잠시 후, 정문 앞에서 유성훈과 이민재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야, 아쉽냐? 아쉬우면 너도 남지 그랬냐. 컴온.”
이민재가 넉살 좋게 놀려댔다.
“지랄하지 말고. 난 빨리 서울로 올라갈란다. 너나 여기 뼈 묻어라.”
유성훈은 그렇게 받아치고는 미련 없이 택시에 올라탔다.
나는 그 모든 풍경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피식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떠나는 자.
남는 자.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나.
응급실에서도 아주 희미하게나마 사람 사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
그렇게 1년 차의 겨울이 가고, 새로운 3월이 밝았다.
응급실의 공기는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새로운 치프는 최수민이 맡게 되었다.
그리고 이민재는….
“현재야!!! 좋은 아침이다!!!”
의국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민재의 모습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었다.
다만 직책만이 바뀌었을 뿐.
“임상강사의 아침은 레지던트의 아침과는 공기의 밀도부터가 다르구나!!! 느껴지느냐! 이 자유의 향기가!”
이민재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외쳤다.
4년 차 치프 시절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보였다.
여전히 시끄러웠고.
여전히 정신없었으며.
여전히 과했다.
뭐, 전문의를 땄다고 사람의 본질까지 크게 달라지는 건 없는 모양이다.
새로운 3월.
병원에는 새로운 얼굴들이 가득했다.
어리바리한 눈빛의 새로운 인턴들, 그리고 그 인턴 딱지를 갓 떼고 레지던트라는 새로운 계급장을 단 작년의 나와 같은 표정의 새로운 레지던트들.
그리고 한 가지 가장 중요하게 변한 점.
내 입장이 아주 조금 바뀌었다는 거.
“자자, 대강 기본적인 설명은 다 들었을 테고.”
이제는 4년 차가 된 한재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얼어붙어 있는 신규 1년 차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이번 기수들은 전부 우리 병원에서 인턴 하던 애들이니까 적응은 그나마 좀 낫겠네. 병원 구조나 EMR 사용법 같은 기초적인 건 안 가르쳐줘도 되겠지.”
“넵!”
“좋아.”
한재언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너희들을 주로 가르치고, 갈구고, 이끌어줄 사람은 저기 앉아있는 한현재 선생이다. 너희들 뭐 궁금한 거 있으면 무조건 한 선생한테 먼저 물어보고.”
“네?”
커피를 마시며 구경하던 나는 갑작스러운 지명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아니 뭐, 바로 위 1년 선배이기도 하고, 작년에 뭐 소문이 많긴 했거든? 혼자 내과 더블보드를 준비하네, 뭐네….”
“아니, 그, 선생님…? 그건 그냥 헛소문…”
변명하려 했지만 한재언은 내 말을 가볍게 씹었다.
“근데 뭐 실제로도 머리에 든 건 많아. 혼자 뭘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는지. 가끔은 우리 같은 고년차들보다 진단은 더 잘 볼 때도 있고. 쨋든 뇌때가리는 큰 것 같으니까 모르는 거 있으면 자주 조언 구하고.”
“하하… 과찬이십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백은서의 눈이 존경심으로 반짝였다.
제발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말아다오.
“그리고 얘 전설적인 소문은 다들 들어서 알지?”
한재언의 입가에 악마 같은 미소가 번졌다.
“응급실 소생실에서 데미지 컨트롤 한답시고 환자 배를….”
“아앗, 선생님!! 예전 이야기는 이제!!”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르며 한재언의 말을 막았다.
한재언은 내 필사적인 모습이 아주 재밌다는 듯 껄껄 웃었다.
“그래그래. 현재가 싫어하니까 이쯤에서 관둘게. 무튼 너희는 진짜 축복받았다. 바로 윗 기수에 천재가 있잖아. 다른 과 동기들한테 자랑하라고.”
‘천재라는 말 좀 그만해요, 이 양반아….
나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저 천재라는 단어가 앞으로 내 레지던트 생활을 얼마나 더 피곤하게 만들지.
“무튼! 기타 등등 자세한 건 여기 한현재 선생한테 묻고. 난 이만!”
한재언은 그렇게 모든 책임을 내게 떠넘기고 쿨하게 의국을 나섰다.
“4년 차는 바빠서 말이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하는 일도 1년 전이랑 크게 바뀐 건 없잖아… 4년 차라고 특별히 바빠지는 게 뭐가 있다고 저렇게 폼 잡고 사라지는 건데….
나는 한재언의 뒷모습에 대고 속으로 욕을 뱉으려다 말았다.
하지만 어쩌겠냐고.
저 양반은 떠났고 이 가엾은 어린 양들을 이끌어야 할 책임은 온전히 내게로 넘어왔는데.
나는 반강제로 응급실 신입 투어의 진행자가 되었다.
옷 머리 신발 양말 싹 다 젖어요…
아, 이 투어가 아닌가.
“일단 스테이션으로 가자. 인턴 때 쓰던 EMR 계정은 오늘부로 바뀌었을 텐데 로그인은 새로 해 봤고?”
“아, 아뇨. 아직….”
“지금 바로 해봐. 오늘 너희들 정식 출근 첫날이니까 아마 처방 권한이랑 다 풀려있을 거야. 그거부터 확인해야 돼.”
나는 스테이션 구석의 컴퓨터 두 대를 가리켰다.
백은서와 박성정은 허둥지둥 자기 사번으로 로그인을 했다.
화면에 익숙한 EMR 인터페이스가 떠올랐다.
“어… 일단 출근 시간까지 13분 남았으니까 그전에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다 체크해보자.”
나는 내 자리의 모니터를 가리키며 인턴, 아니 1년 차들을 불러 모았다.
“화면 봐봐. 지금은 조용하지만 곧 새 환자가 들어올 텐데… 아, 마침 누가 접수하네. 저렇게 트리아지가 되면 대강 여기 보이지? 왼쪽 환자 목록 모니터에 이름이랑 나이랑 주호소가 뜨거든.”
나는 화면에 새로고침된 환자 목록을 가리켰다.
“근데 이건 간호사 선생님이 1차로 분류해 준 거지 아직 전산상으로 확정된 게 아니야. 그래서 우리가 환자를 보고 나서 일일이 EMR 차트에다가 진단명이랑 KTAS 등급을 딱 입력을 해줘야 돼. 이거 제대로 안 하면 나중에 환자분 본인부담금이 개처럼 깨지는 수가 있어서 민원 폭탄 맞기 싫으면 무조건 제대로 체크해줘야 하고. 오케이?”
나는 차팅 화면을 열어 진단 입력 창을 보여주었다.
“여기 진단 코드 넣는 칸 보면 제일 위에 KTAS 분류 있지? 주 진단명 넣을 때 잊지 말고 이것도 중복해서 꼭 같이 넣으면 되는 거야.”
“넵! 알겠습니다!”
그렇게 기본적인 인수인계를 마치고 우리 셋은 스테이션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신기하게도 아직 새로운 환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맞다. 성정아.”
나는 옆에 앉은 박성정을 쳐다봤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
“네? 선생님?”
“너 응급의학과 왜 온 거야? 진짜 궁금해서 그래.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잖아.”
박성정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주 솔직하고 현실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아… 그… 워라밸입니다.”
“워라밸?”
“네. 주변 선배들이 응급의학과는 출근과 퇴근이 명확해서 퇴근 후의 삶이 그나마 보장되는 과라고 해서요. 칼퇴가 가능하다고….”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잠시 말을 잃었다.
이거 완전 MZ한데요?
물론 나도 MZ지만.
바로 그때 옆에 있던 백은서가 해맑게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한 선생님. 생각보다 응급실이 되게 조용하네요. 환자도 없ㄱ…”
그 순간.
나는 내 모든 반사신경을 동원해 백은서의 입을 막으려 했다.
“ㅂ… 백은!”
입에서 ‘없고’라는 마지막 음절이 터져 나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뚜루루루루루루-!
늦었다.
스테이션의 전화기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내 이마를 짚었다.
응급실 최고의 금기를 제일 먼저 교육했어야 하는데.
이내 근처에 있던 간호사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청진대병원 응급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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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서가 내뱉은 조용하다는 말은 그 어떤 고대 신의 저주보다도 강력하고 즉각적이었다.
아마도 하나님과 부처님, 알라신을 향해 동시에 쌍욕을 박더라도 이것보다 강렬한 저주가 되기는 힘들지 않을까.
응급실의 짧은 평화가 산산조각 났다.
간호사가 수화기를 들자, 수화기 너머로 다급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고성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간호사의 얼굴이 점점 썩어갔다.
“네, 네, 위치는요? 트럭 대 승용차… 네… 환자 상태는요? 네, 잠시만요. 바로 의사 쌤 연결해 드릴게요.”
트럭 대 승용차?
여기서라도 일단 정보를 알아내야 한다.
트럭 운전자가 실려 오는가, 승용차 운전자가 실려 오는가.
동승자는 있었는가.
“한 쌤! 선생님이 받아보세요! 트라우마 콜이에요!”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네, 응급의학과 한현재입니다.”
[네, 선생님! 동래 사직 구급대입니다! 만덕터널 입구에서 트럭 대 승용차 TA 났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사이렌 소리와 온갖 소음이 뒤섞여 들려왔다.
되게 큰 사고인가 본데.
“환자 나이는요? 구조에 얼마나 걸렸어요? 바로 뺀 거예요?”
[20대 남성 환자분, 승용차 운전자고요! 차량에 끼어있다가 20분 만에 구조됐습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펜을 집어 들고 눈앞에 보이는 빈 A4 용지 위에 미친 듯이 들은 모든 것들을 갈겨쓰기 시작했다.
“환자 상태는 어때요? 바이탈은요?”
[환자 멘탈 stupor(* 혼미)하고 BP 70에 40, 맥박 140회 이상으로 빠릅니다! 골반 부위 오픈 프렉쳐(* 개방성 골절) 의심 소견과 함께 출혈이 심합니다! GCS는 현장에서 E1V2M4, 7점입니다! ETA 5분 걸립니다!]
GCS 7점.
거의 혼수상태.
혈압 70/40.
으흠, 쇼크 상태.
그리고 개방성 골반 골절.
최악 중의 최악.
대동맥이나 대정맥이 손상되었을 가능성?
O.
사망률이 50%를 가볍게 넘는 지옥 같은 손상.
최악인데, 이거.
내 손이 용지 위를 날아다녔다.
- Open Pelvic Fx / GCS 7 / 70/40, HR 140+ / ETA 5min
그 글자들을 쓰는 동안 옆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용지를 쳐다보는 1년 차들이 보였다.
그래, 응급실에 온 걸 환영한단다 베이비들아.
나는 종이의 한 귀퉁이를 찢어 그 위에 휘갈겨 썼다.
‘아무 전문의 선생님 빨리 호출.
그리고 그 종이를 말없이 박성정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내 의도를 깨닫고 의국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나는 여전히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다른 손으로는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중환자실… 중환자실…
[외상 중환자실 (TICU-01)]
[19/20]
‘중환자실… TICU 베드 하나 비어 있다. 오케이. 수술방… 지금 진행 중인 응급 수술 없고.
나는 구급대원에게 질문을 던지며 동시에 머릿속으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었다.
“환자 양팔에 라인 확보됐습니까? 수액은 얼마나 들어갔죠?”
[18게이지로 한쪽 잡았고, 수액 1리터 풀 드랍 중인데 혈압 반응 거의 없습니다!]
바로 그때 이민재가 스테이션으로 뛰어 들어왔다.
나는 말없이 내가 휘갈겨 쓴 메모지를 쓱 밀었다.
이민재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곤 이내 나를, 그리고 내가 띄워놓은 전산 화면을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펜으로 메모지 여백에 짧게 두 단어를 썼다.
‘수용 OK?
이민재는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곧장 나를 보고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나는 다시 수화기를 입에 가져다 댔다.
“네, 저희가 수용하겠습니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는 동시에 내 뒤에 서 있는 이민재를 쳐다봤다.
“환자 도착 5분 전! 지금부터 팀 짠다? 대가리는… 내가 맡을게. 팀 리더는 내가 맡고, 지금부터 역할 분배한다!”
손가락이 한 명 한 명을 정확히 지목하기 시작했다.
“한재언!”
“네 선생님.”
“네가 제일 고참이니까 Airway(*기도) 맡아. 환자 들어오면 C-spine(*경추) 보호하면서 기도 상태부터 보고, 필요하면 망설이지 말고 바로 인튜베이션 준비하고.”
“알겠습니다.”
한재언은 짧게 대답하고는 기관 삽관에 필요한 후두경과 튜브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한현재!”
“네, 선생님.”
“너는 Circulation(*순환). 환자 오면 나랑 같이 양쪽으로 붙어서 눈에 보이는 출혈점부터 찾아서 막는다. 그리고 내가 FAST(* 초음파) 보는 동안 너는 복부나 골반 쪽 압박하면서 혈압 유지하는 거 도와. 정신 똑바로 차려.”
“네!”
“백은서!”
“네 선생님!”
막 1년 차가 된 백은서의 얼굴이, 극도의 긴장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너는 각종 시술. IV 라인 양팔에 18게이지로 잡을 준비 하고, ABGA(*동맥혈 가스 분석) 키트, 폴리(*소변줄) 카테터 세트 미리 다 꺼내놔. 우리가 시키는 대로 바로바로 실행한다. 알겠어?”
“네! 알겠습니다!”
“마지막, 박성정!”
“네, 네!”
박성정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참아.
니 워라밸을 위해선 출근한 시간 동안의 지옥 정도는 감당하라고.
“너는 기록 담당. 저기 화이트보드 앞에 서. 지금부터 우리가 하는 모든 처치, 환자 바이탈, 우리가 쓰는 약물 이름이랑 용량, 그리고 시간을 초 단위까지 정확하게 기록해. 오케이?”
“네!”
그렇게, 오합지졸처럼 보였던 우리는 순식간에 하나의 팀이 되었다.
각자의 역할이 정해졌다.
나는 서둘러 소생실 복도로 달려가 찝찝한 납 조끼를 껴입었다.
그 위로 비닐 가운을 덧입고, 글러브를 끼고, 마지막으로 얼굴에 페이스 쉴드를 착용했다.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와중에 이민재의 불호령이 터져 나왔다.
“야야, 박성정! 페이스 쉴드!”
“아, 네네! 죄송합니다!”
박성정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가장 기본적인 보호 장비 착용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허둥지둥 페이스 쉴드를 찾아 머리에 썼다.
“전쟁터 나가는데 총 안 들고 나갈래? 정신 똑바로 안 차리냐!”
이민재의 갈굼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테이션 쪽에서 백은서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외쳤다.
“쌤! 방금 외상외과랑 정형외과 당직의한테 콜 다 돌렸고요, 지금 하는 거 끝나면 바로 내려오신답니다!”
“좋아!”
간호사들이 뛰어다니며 각자의 위치로 향했다.
한 명은 응급 카트를 끌고 왔고, 다른 한 명은 수액과 수혈 세트를 준비했다.
박성정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마커 뚜껑을 여는 것조차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저거 저렇게 쫄아 가지고 응급의학과 의사 하겠나 저거.
모든 준비가 끝났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소생실 1번 베드 주위로 각자의 위치에 섰다.
침묵.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만이 점점 더 가까워지며 우리의 심장을 옥죄어 왔다.
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앵-
사이렌 소리가, 이제는 응급실 바로 앞에서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지이이이잉-
자동문이 열렸다.
끼이이익- 쾅!
스트레쳐 카트가 거의 문을 부술 듯한 기세로 소생실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20대 남자 환자! 트럭 TA입니다! 구조에 20분 소요됐고 이송 중에 의식 레벨 한 번 더 떨어졌습니다!”
구급대원의 다급한 브리핑 소리.
스트레쳐 바퀴가 바닥에 갈리는 굉음.
그리고 환자의 입에서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끔찍한 신음 소리.
“으… 으… 아… 아….”
모니터를 연결하는 날카로운 기계음까지 그 모든 소리 위로 뒤엉켜 소생실은 순식간에 소음의 지옥으로 변했다.
“하나, 둘, 셋!”
우리는 환자를 침대로 옮겼다.
“바로 석션 할게요 석션 팁 좀!”
한재언이 환자의 머리맡에서 후두경을 들고 외쳤다.
“호흡음 좌측에서 감소한다! 체스트 포터블!(*이동식 흉부 엑스레이) 빨리!”
이민재가 청진기를 가슴에 댄 채 소리쳤다.
“맥박 진짜 얕고, 말초는 아예 안 잡혀요! 혈압 계속 떨어져요!”
백은서가 환자의 손목을 잡은 채 거의 울먹이며 외쳤다.
“야, 야! 라인 하나 더 잡아! 대퇴정맥으로라도 찔러 넣어! 수액 풀 드랍으로 때려 넣고!”
나는 인턴과 함께 가위로 환자의 피와 흙먼지로 뒤덮인 옷을 갈기갈기 찢어내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게 뭐야.
찢겨 나간 바지 아래로 부서진 뼈가 피부를 뚫고 튀어나온 골반 상태가 보였다.
그 주변은 이미 검붉은 피로 흥건했고.
그리고 환자의 배.
전체적으로 시퍼렇게 멍이 든 배.
외견상 심하게 붓지는 않았지만, 손으로 눌러보니 꽤 단단했다.
“씨발… Open pelvic fracture(* 개방성 골반 골절)에 massive hemoperitoneum(* 대량 혈복강)….”
이민재의 입에서 낮은 욕설이 터져 나왔다.
“MTP! MTP(*대량 수혈 프로토콜)! 혈액은행에 전화해서 Rh- O형 혈액 지금 당장 4팩 올리고 나머지 혈액 팩 10개 더 대기시키라고 하고, 빨리!”
순간 박성정이 당황해서 물었다.
“선생님, 아직 혈액형 검사도…”
“크로스 매칭이고 나발이고 그냥 올리라고 해! MTP라고! 환자 죽고 나서 혈액형 찾으면 뭐 할 건데!”
모든 것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환자의 혈압은 수액을 들이붓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떨어졌다.
어렵게 잡은 IV 라인 하나는 혈압이 너무 낮아 피가 역류하며 막혀버렸다.
포터블 엑스레이 기계는 다른 응급 환자 때문에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다.
“개판이네 아주 그냥!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이민재가 수술용 글러브를 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쳤다.
선배, 그거 컨타(* 오염)…됐는데요… 글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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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션!”
환자의 입에서 울컥하고 터져 나온 피와 토사물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소생실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한재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후두경을 쑤셔 넣고 튜브를 박아 넣었다.
기도 확보, Airway.
외상 환자 처치의 알파이자 오메가.
일단 숨은 쉬게 만들어야 다음이 있다.
내 역할은 Circulation.
순환.
이민재와 함께 환자의 몸에서 새어 나가는 피를 어떻게든 막고, 그만큼 채워 넣는 역할.
나는 환자의 축 늘어진 몸 위로 올라탔다.
찢겨 나간 바지 아래로 드러난 끔찍한 상처. 피부와 근육을 뚫고 튀어나온 뼛조각과 그 주변에서 울컥울컥 쏟아지는 피.
개방성 골반 골절.
“Pelvic binder 됐습니다!”
환자의 골반을 거대한 벨트, 펠빅 바인더로 꽉 조였다.
부서진 골반뼈를 안정시켜 내부 출혈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필사적인 발버둥.
하지만 바인더 아래로 스며 나오는 피의 양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게 최악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지난 1년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모든 좆같은 상황들을 정의하는 단어들이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대량 출혈, 쇼크, 대사성 산증, 저체온증, 혈액응고장애.
죽음의 트라이앵글이고 나발이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그냥 곧 죽을 사람인데.
“수액 2리터 들어갔는데 혈압 왜 그대로냐고!!”
이민재가 거의 울부짖듯 소리쳤다.
이민재의 손은 압력백을 쥐어짜다 못해 터뜨릴 기세였다.
링거 폴대에 걸린 투명한 수액 팩 두 개는 이미 홀쭉해져 있었다.
맑고 투명한 액체가 굵은 혈관 라인을 타고 환자의 몸속으로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들어가는 속도보다 어딘가에서 터져 나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하지만 모니터 위에서 깜빡이는 숫자는 우리의 기도를 비웃고 있었다.
제발 좀 올라라, 이 개같은 혈압 새끼야.
나는 환자의 복부를 짓누른 채, 내 눈앞 모니터에 떠 있는 숫자를 저주했다. 저 붉은색 숫자들이 내 모든 노력을 비웃고 있었다.
[BP: 65 / 35]
지랄.
나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2리터? 20리터를 들이부어도 안 오를 거다.
수액을 들이붓는데도 오르기는 커녕 더 떨어지고 있다.
혈관 안에 더 이상 흐를 피가 없다는 소리다.
지금 환자 몸은 그냥 밑 빠진 독이다.
한쪽 팔에 잡은 라인으로 수액이 쏟아져 들어가는 동시에 박살 난 골반 아래로는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가고 있다.
[HR: 145]
미친 듯이 깜빡이는 심박수.
그래, 심장 저 새끼 혼자만 지금 존나게 일하고 있다.
몸에 피가 없으니 빈 펌프질이라도 해서 어떻게든 뇌랑 심장에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쥐어짜 보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인 거다.
하지만 저것도 얼마 못 가겠지.
저러다 지쳐서 그냥 V-fib(*심실세동)이나 Asystole(* 무수축)로 넘어가는 건 순식간이다.
[SpO2: 92%]
산소를 15리터짜리 마스크로 코와 입에 거의 쑤셔 박고 있는데도 떨어지고 있다.
산소를 실어 나를 피 자체가 없다는 뜻이다.
도로 위에 차가 없는데 신호등만 파란불이면 뭐 하냐고.
배달 갈 차가 없는데.
“쌤! 엘리베이터 타기도 전에 어레스트 오겠는데요? 외상외과 언제 와요!”
백은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저 순진한 1년 차의 눈에는 지금 이 상황이 세상의 종말처럼 보이겠지.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저 환자에게는 종말이 맞으니까.
이민재가 화이트보드 앞에서 얼어붙은 박성정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박성정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핏기조차 없었다.
그래, 저게 정상적인 1년 차의 반응이지.
저 지옥 한복판에서 뭘 하겠다고 덤비는 내가 미친놈인 거고.
“라인 하나 막혔어요! 역류해요!”
젠장. 간호사의 외침이 들렸다.
아까 역류하던 그 라인이 다시 막혔나?
혈압이 너무 낮아 어렵게 잡은 라인 하나가 죽어버렸다.
“IO 니들 가져와! 뼈따구에 구멍이라도 뚫어서 쏴야겠다!”
이민재는 이제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Intraosseous access(골내주사).
정강이뼈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서 수액을 때려 박겠다는 소리다.
저건 진짜 마지막 수단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그 마지막 수단 말고는 남은 게 없다.
그 와중에도 4년 차 한재언은 묵묵히 환자의 머리맡에서 앰부백을 짜며 기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저 선배의 멘탈은 대체 뭘로 만들어진 걸까.
“한현재! 압박 제대로 해! 손 떼지 마!”
이민재의 불호령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감촉이 끔찍했다. 단단해야 할 복벽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물컹한 피주머니를 누르는 것 같은 불쾌하고 무력한 감각만이 전해져 왔다.
체중을 실어 누르는 이 행위가 과연 의미가 있기는 한 걸까. 그냥 맨손으로 터진 댐을 막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꼴 아닌가.
“피 왔습니다!”
구세주 같은 목소리였다. 혈액은행에서 달려온 인턴의 손에 O형 혈액팩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어, 바로 달아! 빨리!”
이민재가 소리쳤다. 간호사가 수액 라인을 끊고 혈액팩을 연결했다. 압력백을 감아 쥐어짜자 검붉은 피가 튜브를 타고 환자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나는 여전히 환자의 복부를 미친 듯이 압박하고 있었다.
아, 촉감 최악이네 이거.
‘…씨발.
이대로 끝인가. 그냥 이렇게, 내 손 밑에서, 한 사람이 서서히 식어가는 걸 구경만 해야 하는 건가. 이 모든 노력이, 이 모든 발버둥이 그냥 죽음이라는 정해진 결말을 몇 분 늦추는 것에 불과한 쇼인가.
무력감이 온몸을 덮쳤다. 이 지옥 같은 응급실에 들어온 이후로 수없이 겪었던, 하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그 엿같은 감각.
눈앞의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울부짖는 모니터 소리, 선배들의 절규에 가까운 고함, 내 손바닥 아래에서 희미하게 꺼져가는 생명의 온기.
아, 젠장. 갤러리라도 켜?
1년 차 때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빙의.
그리고 메스의신.
빙의를 또 쓰자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이 상태에서 배를 뭘 쓴다고 될 것 같지도 않은데….
배를 가른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고….
그때는 복부만 문제였지만, 지금은 골반 뼈따구도 문제다.
문제가 더블이라고.
괜히 시간만 더 소요되는 결과를 맞이하지 않을까.
오히려 내 몸만 12시간 동안 지옥을 맛보게 되겠지.
환자는 환자대로 죽고 나는 나대로 반병신이 되고.
이건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하 씨, 모르겠다.
나는 애써 그 유혹을 떨쳐냈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일에 집중하자.
“선생님!”
나는 거의 정신이 나간 채 백을 쥐어짜고 있는 이민재를 향해 소리쳤다.
“피! 피는 제가 짤게요! 선생님은 초음파 한 번만 더 봐 주세요!”
“어, 그래! 고맙다!”
이민재는 내게 압력 백을 넘겨주고 다시 초음파 프로브를 잡았다.
“은서야!”
나는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는 백은서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 그거! Pelvic binder 풀리지 않게 양쪽에서 꽉 잡고 있어! 골반에서 피 더 나면 진짜 끝이야!”
“네!”
백은서가 호다닥 바인더를 잡기 시작했다.
이민재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FAST! FAST 좀 보자! 어디서 이렇게 터지는 거야!”
곧이어 이민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비장. 비장이..”
나는 혈액 팩이 담긴 압력 백의 펌프를 미친 듯이 쥐어짰다.
차가운 피가 튜브를 타고 환자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 지금은 백만 짜고 있으니까….
한번 도움을 구해보자.
아까는 뭔가 할 일이 많던 상황이고, 지금은 백만 쥐어짜면 되니까. 지금이 아니면 질문할 시간도 없어.
나는 황급히 허공의 파란 창을 켜고,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뒤진 의학자 갤러리]
제목 : 헬프헬프씨발존나급해요
작성자 : 헬조선노예1
20대/M, TA, Open pelvic Fx c massive hemoperitoneum. BP 60s, HR 140s. MTP 가동중인데 반응 없음. 외상 팀 기다리는중, ETA 10+ min.
[댓글]
ㅇㅇ (210.94) : 와… 좀 심하네. 저 정도면 반쯤 시체 수준 아니냐.
수술실망령3 : 어떠냐 내과 놈들아. 이게 진짜 전장이다. 니들이 맨날 차트만 보면서 딸깍거리는 거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ㄴ 라떼는말이야 : 이딴 댓글 달 시간에 저 환자 어떻게 살릴지나 고민해 봐라 이 싸이코 새끼야.
갤러리는 부질없는 댓글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언제나 명쾌한 답을 알려주던 갤러리마저 의미 없는 댓글들로 찼다는 게 뭘 의미할까.
과연 일부러 해결책이 있는데도 사람 살리기에 진심인 미친 망령들이 저런 댓글을 달까?
아닐 거다.
많이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뜻이겠지.
바로 그때.
환자의 머리맡에서 앰부백을 짜던 한재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왜! 뭐!”
이민재가 고개를 치켜들며 대답했다.
“EtCO2(*호기말 이산화탄소 분압), 20이예요. 심장 곧 멎습니다. 시간 없어요.”
정상 수치는 35에서 45.
EtCO2가 20이라는 것은 심장이 뿜어내는 피가 거의 없어서 폐로 이산화탄소를 운반할 혈액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뜻이다.
심정지의 가장 강력한 예고 신호 중 하나.
그리고 그 예고는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BP 55에 30입니다! 계속 떨어져요!”
간호사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모니터의 심박수는 동시에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미친듯이 치솟고 있었다.
155회.
160회.
165회…
“하, 씨발! 미치겠네! 안 돼! 안 된다고 심장 새끼야! 버텨!”
이민재가 모니터를 향해 절규했다.
나는 그 와중 내 머릿속 갤러리 창에 새로고침된 마지막 댓글 하나를 보았다.
메스의신 : 빙의 써봐라 ㅇㅇ. 내가 해결해 줄게.
……?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해결한다고?
이걸?
ㄴ 헬조선노예1 :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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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의신 : 그건 알 거 없고. 나만 믿고 ㄱㄱ. 빙의시키셈.
그 한 줄이 내 절망으로 가득 찬 시야 속에서 불길하게 빛났다.
해결한다고?
이 개판 오 분 전.
아니, 이미 개판이 끝나고 잿더미만 남은 이 상황을?
나는 압력 백을 쥐어짜는 손에 힘을 주었다.
내 머릿속의 이성과 상식이 비명을 질렀다.
저 새끼는 그냥 미친놈이야.
죽어서도 정신 못 차린 과대망상 환자라고.
지금 이 상황은 신이 와도 못 살려.
ㄴ 수술실망령3 : 와 또 지 혼자 튀네. 헬노예야 차라리 나를 써라 ㅇㅇ
ㄴ 라떼는말이야 : ㅉㅉ. 헬노예야, 신중히 판단해라. 대체 저걸 어떻게 살린단 말이냐.
ㄴ 뼈덕후88 : 내 차례는 언제 오냐! 나도 골절 환자 보고 싶다고! 골수!!! 슬라이드!!
나는 갤러리 화면을 뒤로하고 모니터를 쳐다봤다.
바로 그때였다.
삐빅, 삐빅.
모니터의 혈압 수치가 아주 희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55… 60… 65….
“혈압 오른다! 60대로 올라왔어.”
이민재가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방금 들어간 O형 혈액이 기적처럼 효과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오, 다행이다!”
소생실의 얼어붙었던 공기가 아주 잠시 녹아내렸다.
모두가 다시 희망을 품고 미친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액 라인 하나 더! 빨리! 혈압 잡혔을 때 뚫어야 돼!”
“혈액 팩 다음 거 준비해요! 백 바로 교체할 수 있게!”
“포터블 엑스레이 아직 멀었어?!”
하지만 그 희망은 신기루처럼 짧았다.
“아니 외상외과 대체 언제 오는 건데! 환자 잡겠다!”
이민재가 인터폰을 향해 절규했다.
환자의 혈압은 60대에서 더 이상 오르지 않고 위태롭게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솟아나는 피를 막기에는 들어가는 피의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여전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상황.
이대로라면 혈액은행의 피가 동나거나 환자의 심장이 먼저 멈추거나 둘 중 하나였다.
상황은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전혀 좋지 않았다.
나는 압력 백을 쥔 채 결심했다.
하자고.
이건 도박이다.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결과는 100% 죽음이다.
도박이라도,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걸어야만 한다.
이미 한 번 해 보기도 했고.
그 끔찍했던 개복술의 기억.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게 되는 그 기괴한 감각.
하지만 결과적으로 환자는 살았잖아.
그리고 아주 친절하게 예의를 갖추라고, 앞으로 내 인생을 망치지 말라고 예절 교육도 단단히 시켰으니….
지난번처럼 선배들한테 반말을 까는 미친 짓은 적어도 하지 않겠지.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애써 위로했다.
눈을 감았다.
내 주변의 모든 소음이 멀어졌다.
‘빙의, 메스의신.
그 순간 세상의 모든 빛이 꺼졌다.
암전.
완벽한 어둠.
소리도
감각도
시간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무의 공간.
내가 죽은 건가? 하는 생각이 스치는 찰나.
다시 빛이 들어왔다.
그래, 뭔가 익숙하면 안되는데 이 기분이 익숙하다.
시발. 뭔가 내 인생이 잘못되고 있잖아.
내 몸의 시야는 보이는데 통제권을 완전히 빼앗긴 기분.
나는 내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었지만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무대는 내 몸.
감독 메스의신.
주연 메스의신.
관객 나.
씨발, 이게 뭐지.
손끝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지난번에는 느닷없이 빙의를 당했기에 당황했던 메스의신도 이번에는 내가 자신을 소환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번 빙의와 지난 빙의의 결정적인 차이.
메스의신의 의식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 육체의 통제권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일 중요한 다른점이 하나 더 있다.
존대.
존댓말.
제발 그 아가리에서 존댓말이 나오게 해 다오 이 귀신새끼야.
내 간절한 기도가 통했는지 내 몸을 움직이는 메스의신의 첫 동작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그는 압력 백을 쥐어짜던 내 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소생실 전체를 한번 싹 훑었다. 그의 시선은 삑삑거리는 모니터와 피범벅이 된 환자의 복부, 그리고 패닉에 빠진 의료진들의 얼굴을 차례로 스캔했다.
잘 했다.
적어도 지난번처럼 바로 반말을 뱉지는 않았잖아.
그리고 내 입이 열렸다.
“레보아 키트는 어디 있나?”
…아니, 이 미친놈이.
“아니, 어디 있습니까?”
메스의신은 스스로를 교정하듯 어색하게 존댓말을 덧붙였다.
그 어색한 존댓말에 내 안의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피눈물을 흘렸다.
그래, 장하다.
이 사회성 박살난 귀신새끼야.
최소한의 예의는 장착했구나.
하지만 그 질문을 들은 이민재의 얼굴에는 ‘이 새끼가 드디어 진짜 미쳤구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현재? 레보아? 갑자기 그건 왜 생뚱맞게? 설마 하겠다고?”
REBOA.
Resuscitative Endovascular Balloon Occlusion of the Aorta.
대퇴동맥으로 풍선 카테터를 쑤셔 넣어 대동맥을 안에서 틀어막아 버리는 최후의 지혈술이다.
복부와 골반의 대량 출혈을 막는 몸속의 지혈대 역할을 하는 셈이다.
1년 차는커녕 어지간한 펠로우들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외상외과에서도 가장 고난도의 술기 중 하나로 알고 있다.
“어.”
“…아니아니.”
내 입이 나도 모르게 버벅거렸다.
메스의신이 존댓말을 하는 것에 아직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네. 제가 하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옆에서 앰부백을 짜던 한재언이 끼어들었다.
“제정신 맞냐? 적응증은 맞지만, 이건 네가 할 수 있는 술기가 아니잖아. 기도 확보랑은 완전히 다르다고.”
그 말이 백번 옳다.
REBOA는 미친 소리였다.
적어도 응급의학과 2년 차에게는.
“그냥 배를 째는 거랑 차원이 다른 문제야 이건. 초음파나 C-arm으로 혈관을 보면서 가이드와이어를 넣고 카테터를 대동맥까지 밀어 올린다음에 정확한 위치에서 벌루닝까지, 네가 할 수 있는거 맞아?”
한재언의 목소리가 더 날카로워졌다.
”대동맥을 찢어먹기라도 하면 환자는 그냥 그 자리에서 즉사다. 할 수 있냐고.”
필사적인 반박.
하지만 이민재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잠깐… 아, 씨… 하… 잠시만….”
이민재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너… 너 작년에 배 깠을 때도 이랬냐? 아니, 뭔 소리를. 하, 씨발… 제대로 할 수 있어? 진짜로?”
이민재는 내게 묻고 있었다.
2년 차 한현재가 아닌 그때 그 기적을 일으켰던 정체 모를 무언가에게.
“할 수 있냐고.”
그 물음에 내 입에서 단 잠시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네.”
그 순간 이민재의 모든 이성이 끊어졌다.
“하씨, 오케이.”
그는 간호사를 향해 소리쳤다.
“남 쌤! 레보아 키트랑 C-arm, 지금 당장 소생실로 가져와요! 빨리!”
“현재야.”
“네.”
“난 책임 안 진다?! 진짜로! 나중에 문제 생겨도 나는 너한테 그런 거 시킨 적 없는 거야! 난 니가 미친 짓 한다고 해서 같이 깜빵에 들어가고 싶진 않거든? 그니까 나는 지금부터 그냥… 적극적인 방관자, 뭐 그런 거다! 알았냐!”
이건 책임 회피일까, 아닐까.
겉으로 말하자면 책임 회피지만, 동시에 ‘나는 네가 무슨 헛짓거리를 하건 묵인하겠다’ 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주 요오망한 양반일세.
소생실의 공기가 다시 한번 바뀌었다.
한 미친 귀신과 더 미친 2년 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방관하기로 결심한 도박사 선배가 벌이는 세상에서 가장 기괴한 수술장.
이민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소생실은 다시 한번 시끄러워졌다.
의료기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여 C자 모양의 거대한 이동식 엑스레이 기계, C-arm을 낑낑거리며 소생실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육중한 바퀴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굴러왔다.
메스의신은 그 모든 소란을 뒤로한 채 침착하게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손이 움직였다.
메스의신은 초음파 기계의 프로브를 집어 들고 비닐 커버를 씌운 뒤 멸균 젤을 듬뿍 발랐다.
“초음파 이쪽으로.”
간호사가 모니터 스탠드를 침대 옆으로 끌어왔다.
메스의신은 환자의 오른쪽 사타구니 대퇴동맥이 지나가는 부위를 덮고 있던 멸균 포를 살짝 걷었다.
그리고 프로브를 피부 위에 가져다 댔다.
모니터 화면에 꿈틀거리는 혈관의 단면을 보여주는 희미한 흑백 영상이 떠올랐다.
“C-arm 환자 골반 쪽으로 위치시키고 AP view(* 정면 뷰) 띄워주십시오. 네네. 그렇게요.”
방사선사는 아무 말 없이 C-arm의 위치를 조절했다.
이민재는 옆에서 레보아 키트의 포장을 미친 듯이 뜯고 있었다.
“아이 씨, 왜 이렇게 안 뜯기냐.”
투명한 비닐 포장을 찢는 소리가 유난히 날카롭게 들렸다.
모니터의 혈압 수치는 혈액이 계속해서 들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야금야금 떨어지기 시작했다. 65… 62… 59…
“시발, 피 들어가는데도 좀 떨어지네! 현재야 언제쯤 돼?”
이민재의 초조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바로 그때 옆에서 앰부백을 짜던 한재언이 끼어들었다.
“현재야 잠깐만! 지금 환자 혈압 너무 낮다. 일단 MTP 들어온 피로 혈압부터 70대로라도 올리고 시작하자, 제발.”
그 말은 합리적이었고 교과서적으로 완벽했다.
미안 선배.
내 몸의 지금 주인은 교과서 따위는 이미 수십 년 전에 불쏘시개로 써버린 남자거든.
“지금 혈압, 시술 적응증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선생님.”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아니, 그래도 너무 위험하다. 현재야.”
“됐어 됐어.”
이민재가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이미 결정된 거야. 냅둬 그냥. 지금은 저 미친놈 믿는 수밖에 없어.”
그렇게 모든 반론이 묵살되었다.
메스의신이 입을 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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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겠습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하지만 전쟁터에 침묵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
혼돈의 와중에도 시스템은 돌아가야만 했다.
이민재는 환자에게 시술을 진행하는 미친놈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자신은 뒤편의 시스템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이민재는 떨고 있는 박성정에게 속삭였다.
“1년 차.”
“네, 선생님!”
“기록. 시간대별로 들어간 약물들이랑 수액 종류랑 양 다 기록됐어? 지금부터는 초 단위로 적어. 내가 하는 모든 말이랑 한현재가 하는 모든 행동, 환자 바이탈의 모든 변화 전부 다. 지금 기록된 건?”
박성정은 거의 울기 직전인 얼굴로 자신이 휘갈겨 쓴 화이트보드를 더듬더듬 읽어 내려갔다.
“그, 내원 시각 09시 14분. 09시 16분부터 NS(*생리식염수) 1리터 로딩 시작했고, 09시 18분에 트라넥삼산(* 지혈제) 1그램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MTP 발동됐고, 2분 후에 Rh- O형 pRBC 2유닛 수혈 들어갔습니다. STAT으로 나간 랩 결과는 아직…”
“그만하면 됐어.”
이민재는 간결한 브리핑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무너져도 기록은 남겨야 한다.
나중에 우리 목을 살려줄 유일한 동아줄이니까.
그 모든 속삭임과 부산스러움의 중심에서 내 몸의 주인은 오직 한 점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초음파 모니터 속에서 희미하게 박동하는 대퇴동맥의 단면.
그리고 그 위를 덮고 있는 피부와 지방층, 그리고 근육.
메스의신의 왼손은 프로브를 미세하게 움직여 최적의 각도를 찾았고, 오른손에 들린 바늘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멈췄다.
바로 지금이다.
바늘 끝이 환자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
“….”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바늘 끝이 피부에 닿기 직전 그는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왜?
뭐가 문제지?
메스의신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내 이름이 적힌, [응급의학과 한현재]가 적힌 사원증을.
“한… 현재.”
메스의신이 어색하게 내 이름을 읊조렸다.
“그래, 현재야. 미안하다.”
……뭐?
뭐가.
뭐가 씨발.
뭐가 미안한 건데 이 미친 귀신 새끼야.
내 머릿속에서 모든 회로가 타버리는 소리가 났다.
미안하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아니지?
내가 지금 생각하는 그거 아니지?
‘미안하다 현재야. 생각해 보니 이건 내 능력 밖의 일인 것 같구나. 괜히 나섰다가 네 의사 인생만 망칠 것 같으니 나는 이만 돌아가겠다.
…이런 거 아니지?
‘미안하다 현재야. 방금 손이 살짝 미끄러져서 대동맥을 찢어버린 것 같구나. 이 환자는 이제 30초 안에 죽을 것이고 너는 살인자가 될 것이다.
…이런 건 더더욱 아니겠지?
내 안의 내가 공포와 분노로 절규하는 동안 내 몸의 임시 주인은 진짜 속내를 드러냈다.
“그, 거기. 잠시 조용. 집중 좀 하게.”
아.
아니, 이 미친놈이!!!!
나는 깨달았다.
자신의 실패나 환자의 죽음에 대해 사과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위급한 상황 속에서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이민재와 박성정에게 ‘아가리 좀 닥쳐달라’는 말을 메스의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회성을 발휘하여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내 의사 인생이 성격 파탄 난 귀신의 사회성 훈련 교재로 전락하고 있잖아.
사회성이라는 걸 아예 유전자 단위에서부터 탑재하지 않은 미친놈.
메스의신은 다시 완벽한 집중 상태로 돌아가 모니터와 바늘 끝에 모든 신경을 모으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C-arm이 띄워놓은 흑백의 투시 영상을 응시했다.
환자의 골반뼈와 대퇴골의 윤곽이 유령처럼 희미하게 드러나 있었다.
“방사선사 선생님. 지금부터 펄스로 짧게, 계속 쏴주십시오. 멈추라고 할 때까지.”
“네, 넵!”
방사선사의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삑, 삑, 삑.
짧게 끊어지는 음과 함께, C-arm 모니터의 영상이 실시간으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메스의신은 다시 초음파 프로브로 환자의 사타구니를 비췄다.
화면 속에서 대퇴동맥이 검고 둥근 원으로 박동하고 있었다.
그는 바늘을 45도 각도로 눕혔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바늘을 피부 아래로 쑥 찔러 넣었다.
그 움직임에는 내가 채혈할 때마다 겪었던 그 지긋지긋한 망설임이나 손 떨림 따위가 없었다.
어떻게 저런 손을 가진걸까.
난 아직도 채혈을 못…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2년 차 치고는 쪽팔린 손을 가진 게 사실이니까.
피부를 뚫고 지방층을 지나서, 그리고 근막을 통과하는 때의 미세한 저항감.
그리고 마침내 바늘 끝이 모니터 속 혈관의 정중앙을 정확히 꿰뚫는 순간.
바늘 뒤로 선홍색 동맥혈이 작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완벽한 단 한 번의 성공.
그 광경을 본 소생실 구석에서 아주 낮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오….”
몇몇 젊은 의료진들의 입이 경이로움으로 벌어져 있었다.
“저거… 되게 빨리 넣네. 능숙하고.”
“저걸 한 번에 넣어버리네.”
“근데… 근데 이거 원래 외상외과 교수님들이나 영상의학과에서도 인터벤션 담당 쌤들이 하는 거 아닌가….”
“쉿. 조용히 해.”
웅성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뒤쪽에서는 이민재가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네, 혈액은행이죠? 응급의학과 이민재입니다. 지금 트라우마 베이 1번에 있는 트라우마 환자, 네, MTP 발동 중인데 좀 늦어서요. 혈액팩 구성 1대 1대 1 비율로 맞춰서 계속 쏴주세요. 농축적혈구, 신선동결혈장, 혈소판. 네. 멈추지 말고 계속 올려 보내주세요. 네.”
“바이탈 BP 52/palpable, HR 168회. 떨어진다. 조심하고.”
한재언의 점잖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메스의신은 그 모든 소음 속에서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는 바늘 안으로 끝이 구부러진 얇은 가이드와이어를 스르륵 밀어 넣었다.
C-arm 모니터 위로 가느다란 은색 선 하나가 나타났다.
그 선은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었다.
손끝이 계속해서 움찔거렸다.
조심 조심, 아주 작고 미세하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을 다루듯 혈관 벽이 다치지 않도록 아주 미세하게 와이어의 방향을 조절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이런 미친 짓을 하지.
나는 절대로 이런 쪽 전공은 못 할 것 같다.
이걸 어떻게 해. 이 개 쪼꼬만 실선을 갖다가 혈관에다가 집어넣는 일을 어떻게 사람이 하는 건데.
현대의학 스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모두가 숨을 죽였다.
C-arm 모니터 위로 가느다란 은색 선 하나가 혈관을 거슬러 올라가는 광경에 소생실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였다.
이 초현실적인 술기의 한가운데서 나는 내 몸의 주도권을 빼앗긴 채 그저 이 모든 것을 1열 VVIP석에서 관람하는 기분을 낼 뿐이었다.
여기 팝콘은 안 파나요.
바로 그때, 소생실 문이 벌컥 열리며 간호사 한 명이 거의 비명을 지르듯 뛰어 들어왔다.
손에는 방금 출력된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A4 용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선생님! STAT으로 나간 랩 결과 나왔습니다!”
그 외침에 이민재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종이를 낚아채듯 받아 들고 그 위에 적힌 숫자들을 미친 듯이 훑어 내렸다.
“pH 7.1, 젖산 12, 칼륨 6.5, 헤모글로빈 5.8… 아이고, 완전히 맛이 갔네.”
이민재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는 전화기를 붙들고 있던 다른 손을 놓지도 않은 채, 간호사를 향해 오더를 내리기 시작했다.
“바이카보네이트 두 앰플 지금 당장 IV 라인으로 쏴주고, 칼슘 글루코네이트 한 앰플 준비하자. 혈액은행에는 혈소판이랑 FFP(*신선동결혈장) 비율 맞춰서 계속 올리라고 전해주고.”
그가 미친 듯이 오더를 쏟아내는 동안 내 몸의 주인은 그 모든 소음을 마치 다른 세상의 일처럼 완벽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이 초인적인 집중력은 대체 어디서 얻은 걸까.
나는 그저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내 몸의 주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선은 오직 C-arm 모니터 속에서 춤추는 가이드와이어에 고정되어 있었다.
와이어는 이제 장골동맥을 지나 복부 대동맥의 하부를 향해 꾸준히 전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민재가 나를 향해, 아니아니, 메스의신을 향해 물었다.
“어디로 갈 거야? 신장 동맥 아래에서 터뜨릴 거지? 골반 출혈이니까. 이제 거의 다 도착했네.”
그 질문은 당연했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골반에서 철철 나오는 피니까.
합병증 발생율 및 생존율도 가장 낮고.
애초에 Pelvic fracture(* 골반 골절)의 경우 신장 아래에서 터뜨리는 Zone 3 REBOA가 표준으로 여겨진다.
신장이나 장으로 가는 혈류는 최대한 살려둬야 하기에 그런 것이다.
대동맥을 틀어막더라도 최소한의 장기는 살려야 한다는 마지노선.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메스의신의 말은 내가 아는 상식에서 살짝 벗어났다.
“아뇨.”
그는 C-arm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Zone 1에서 터뜨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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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재의 입이 아주 천천히 벌어졌다.
Zone 1.
횡격막 바로 아래, 복부의 모든 주요 장기로 가는 혈관들이 갈라져 나오기 전의 대동맥 최상부다.
즉 거기를 막는다는 건 곧 복부 전체의 혈류를 차단하겠다는 뜻이다.
신장, 간, 장…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소리다.
게다가 다리로 오랜 시간 혈류가 가지 않아 잘못될 경우 환자의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뭐?”
이민재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민재는 무어라 더 소리치려 했다.
이 미친 짓을 당장 멈추게 해야 한다고, 너는 지금 신체 절단을 하려는 것이라고.
하지만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전에 소생실의 자동문이 열렸다.
지이이잉-
수술복 차림의 무리가 일사불란하게 뛰어 들어왔다. 외상외과 팀이었다.
맨 앞에는 외상외과 부교수, 전태정이 서 있었다.
그는 소생실에 들어서는 순간 소생실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피바다가 된 바닥, 모니터의 숫자들, 그리고… C-arm의 기괴한 불빛 아래에서 무언가 끔찍한 의식을 거행하고 있는 정체 모를 무리들.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뭐야 이거? 지금 환자 상태는?”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있던 백은서였다.
그녀는 거의 반사적으로, 외상 환자 브리핑을 읊기 시작했다.
“네, 넷! 교수님! 20대 남성, 트럭 대 승용차 TA로 현장에서 의식 스투퍼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open pelvic fracture와 hemoperitoneum 소견 하에 MTP 발동하여 pRBC 4팩 수혈 중입니다. 방금 전 STAT으로 나간 랩 결과는…”
“아니, 그, 그. 알겠어. 알겠는데….”
전태정 교수는 그녀의 다급한 브리핑을 손짓으로 막았다.
게다가 말까지 더듬었다. 아마 십 년이 넘는 외과 인생에서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시선은 백은서의 뒤, C-arm의 불빛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괴한 행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 저건 뭘 하고 있는 건가.”
내 몸의 임시 주인은 C-arm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아주 무심하게 대답했다.
“REBOA 하고 있습니다.”
“….”
전 교수의 얼굴에, ‘내가 지금 한국말을 듣고 있는 게 맞나’ 하는 혼란이 스쳐 지나갔다.
“…그니까. 그걸, 지금, 누가?”
전태정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REBOA.
응급의학과가?
외상외과 팀도 없이?
내 입이 다시 열렸다.
“제가요.”
그 순간, 전태정의 등 뒤에 서 있던 외상외과 펠로우들과 외과 레지던트들의 입에서 ‘허억’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저, 교수님! 그게!”
이민재가 거의 울상이 된 얼굴로 먼저 필사적으로 끼어들었다. 이민재는 아주 조심스레 전 교수에게 다가가 이 모든 비현실적인 상황을 어떻게든 포장하려 애썼다.
“아, 예, 교수님! 환자 상태가 워낙 위급해서, 외상팀 도착 전에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보려고… 어… 네… 저희 그… 응급의학과 2년 차, 한현재 선생이 지금 REBOA 시술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이민재의 구차하고 필사적인 수습.
하지만 그 수습은 전 교수의 뇌 회전을 돕는 데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전태정 교수는 잠시 이민재와, C-arm 아래의 나(메스의신)를 번갈아 쳐다봤다.
뇌가 [2년 차] [응급의학과] [REBOA]라는 절대로 한 문장 안에 공존할 수 없는 세 단어를 처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입이 열렸다.
“너희 다 미쳤어?!?!”
전태정 교수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REBOA가 뭔지는 알아? 어? 대동맥을 풍선으로 막는 게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아냐고! 응급의학과가, 아니, 내가 응급의학과를 무시하는 건 아닌데. 이건! 이건 우리 외상외과에서도 펠로우 2년 차 이상이 시도하는 술기야! 근데 이걸 지금 너희가, 이 소생실에서 하고 있는 게…!”
그 절규는 안타깝게도 내 몸의 주인에게는 닿지 않았다.
메스의신은 그 모든 외침을 무슨 모기 소음 취급하면서 완벽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시선은 오직 C-arm 모니터에 고정.
메스의신의 손끝에서 가이드와이어는 마침내 목표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오케이… LSA(* 좌쇄골하동맥) 지나서… 됐다. 시스.”
입에서 다음 단계의 장비를 요구하는 무감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시스가 아니라 이 개새끼야!”
전태정 교수는 결국 이성을 잃었다.
그는 내 어깨라도 붙잡을 기세였다.
“너, 내 말 똑바로 안 듣지 지금? 이 미친놈들아! 당장 멈춰! 멈추라고!”
그는 C-arm 모니터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게다가 골반에서 피가 난다면서 왜 와이어는 저기 횡경막 바로 밑까지 올라가는데? Zone 1은 왜 노리는 거냐고! 미쳤어?”
그제야 내 몸의 주인이 고개를 돌렸다.
“Zone 3에서 어설프게 막았다가 만약 확인되지 않은 복부 내 다른 출혈이 있어서 혈압이 계속 안 잡히면 다시 풍선을 빼고 Zone 1으로 올릴 시간 없습니다. 이 환자는 그 몇 분 사이에 죽습니다.”
“아니 그건 그렇다 쳐도!”
“초음파 상에서 hemoperitoneum(* 혈복강) 있는 건 확인되지 않았습니까. 백 퍼센트 배 안 어딘가에서도 터졌습니다. 골반만 막는 건 의미 없는 짓입니다.”
논리는 완벽했다.
하지만 전태정은 물러서지 않았다.
“ACS면 어쩌려고! 배 딴딴하다며!”
“bladder pressure(* 방광압) 20 밑이라 괜찮습니다.”
그러자 전 교수는 이 모든 비상식적인 상황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을 찔렀다.
“…아니 그래서 그 모든 게 다 맞다고 쳐도! 그 시술을 왜 니가 하고 있냐고!”
그 질문에
“…….”
처음으로 내 몸의 주인이 말을 잇지 못했다.
음….
메스의신의 뇌리에 이 몸의 원래 주인이 남긴 좆밥 2년 차라는 근본적인 사실이 스쳐 지나간 모양이었다.
몇 초가 지나도 메스의신은 이 질문에 대한 합리적인 대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 말은 뒤의갤의 빠와 까를 모두 미치게 하는 스타다운 행보였다.
“지금 이러다가는 환자 갑니다. 시스 주십시오.”
메스의신은 논리적인 답변을 포기하고 그저 상황의 위급함으로 모든 것을 밀어붙이려 했다.
바로 그때 전태정 교수가 결단을 내렸다.
“야.”
그가 말했다.
“나 줘. 내가 차라리 할 테니까. 대체 어디서 연수라도 보고 와서 시도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전문의가 하는 게 맞아. 너 손 떼. 줘.”
“…….”
메스의신은 잠시 가이드와이어가 삽입된 환자와 장갑을 낀 채 자신을 노려보는 전태정 교수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아마도 생각이란 걸 해 본 모양이다.
자신이 하는 것과 저 외상외과 교수가 하는 것.
어느 쪽이 이 상황에서 더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절차인지.
그리고 그 계산에는 ‘저 외상외과 의사가 이 술기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메스의신 성격에 저 교수가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지가 하겠다고 난리를 부렸을 게 뻔하니까.
메스의신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이 쥐고 있던 가이드와이어의 끝부분을 전태정 교수를 향해 내밀었다.
전태정 교수는 내 손에서, 아니 메스의신의 손에서 가이드와이어를 건네받았다.
“시스 키트.”
그 목소리에, 뒤에 있던 누군가가 재빨리 다음 장비를 건넸다.
전 교수는 와이어를 따라, 딜레이터(* 혈관 확장기)와 시스(* 튜브)를 한 번에 밀어 넣었다.
그 움직임은 메스의신이 보여줬던 신기에 가까운 천재성과는 약간 달라 보였다.
엄청난 경험과 훈련이 만들어 냈을 근육 자체에 각인된 지독하게 숙련된 장인의 움직임.
바로 그때였다.
“각도가 높습니다.”
내 입을 빌린 메스의신이 지적을 시작했다.
전태정 교수의 손이 멈칫했다. 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뭐?”
“각도가 너무 높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그 각도로 진입하면 시스 끝이 후복벽을 긁을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눕혀서 혈관 주행 방향과 평행하게 진입하셔야 합니다.”
“….”
전태정 교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아니, 어디서 연수라도 좀 보고 와서 아는 척하는 모양인데 내가 알아서…”
전 교수는 시스를 밀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무언가 턱하고 걸리는 저항감이 느껴졌다.
C-arm 모니터 위로 시스 끝이 혈관 벽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메스의신은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비슷한 어조로 말했다.
“시스 3mm만 뒤로 빼고 와이어를 살짝 당기면서 시스를 반시계 방향으로 15도 돌린 다음 다시 밀어 넣으십시오.”
전태정 교수는 잠시 망설였다.
외과 의사로서의 자존심과 눈앞의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그리고 꺼져가는 환자의 생명 사이에서.
결국 이성이 자존심을 이겼다.
전 교수는 아무 말 없이 내 몸의 주인이 시킨 그대로 시스를 아주 미세하게 조작하기 시작했다.
3mm 후퇴, 와이어 견인, 15도 회전.
그리고 다시 전진.
스르륵-
거짓말처럼, 시스가 아무런 저항 없이 혈관 속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전태정 교수의 입이, 아주 살짝 벌어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C-arm 모니터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어… 고맙다….”
그의 입에서 감사의 말이 새어 나왔다.
내 안의 나는 그 광경을 보며 경악했다.
외상외과 교수를 가르치고 심지어 감사 인사까지 받아내고 있다니.
그 작은 성공 이후 술기의 주도권은 기묘한 형태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손은 전 교수.
아가리는 메스의신.
아가리 스킨 한현재.
“끝부분 커브 확인하고. 앵글 너무 주지 마십시오.”
“와이어 따라 그대로 올라갑니다. 분기부에서 저항 느껴지면 무리하게 밀지 말고, 살짝 빼서 로테이션.”
“지금 위치 좋습니다. 횡격막 바로 아래 복강동맥 분지부 바로 위입니다. 거기서 스톱.”
메스의신의 참견은 쉴 새가 없었고, 전태정 교수는 처음에는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이내 지시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는 것을 깨닫고 묵묵히 따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카테터가 Zone 1에 완벽하게 위치했다.
“벌루닝 준비.”
전태정 교수의 말에 이민재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생리식염수가 담긴 주사기를 건넸다.
전 교수는 그 주사기를 카테터의 포트에 연결했다.
“지금부터 풍선 팽창 들어간다. 혈압 변화 주시해.”
그는 주사기 피스톤을 아주 천천히 밀어 넣기 시작했다. C-arm 모니터 위로 카테터 끝부분의 작은 풍선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 풍선이 이 젊은 남자의 대동맥을 안에서부터 완벽하게 틀어막는 순간.
소생실의 모든 시선이 단 하나의 목표를 향했다.
바이탈 모니터.
[BP 50 / 28]
모두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풍선이 대동맥을 막았는데 혈압은 여전히 바닥을 기고 있었다.
“안돼….”
이민재의 입에서 절망적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조금만 기다려.”
전 교수가 이민재를 진정시켰다.
1초, 2초, 3초.
그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50이었던 숫자가, 55로 바뀌었다.
그리고 60.
[BP 75 / 40]
“혈압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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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압이 올랐다.
죽음의 문턱에서 맴돌던 그 끔찍한 숫자가 마침내 생존의 영역으로 한 발짝 돌아왔다.
그 작은 변화가 소생실의 분위기를 확 바꿔놓았다.
“살았다….”
누군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전태정 교수의 얼굴에 안도감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옆에 서 있던 외상외과 펠로우가 전태정 교수를 향해 다급하게 물었다.
“교수님, CT 찍고 정확한 출혈점 확인한 다음에 OR로 올릴까요?”
“바로 올려.”
전태정 교수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 판단에 내 몸의 주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REBOA 풍선이 대동맥을 막고 있는 매 순간 환자의 하반신은 피가 통하지 않아 썩어 들어가고 있으니까.
그렇게 마지막 결정이 내려졌다.
“이송 준비하자!”
외상외과 팀이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환자의 몸에는 이동용 인공호흡기가 연결되었고, 수십 개의 라인이 주렁주렁 달린 IV 폴대가 침대 옆에 따라붙었다.
“갑니다! 비켜주세요!”
전태정 교수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침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외상외과 팀과 간호사들이 침대를 둘러싸고 조심스럽고 신속하게 소생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이 자동문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휴….”
메스의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생실에는 우리 응급의학과 팀과 참혹한 흔적만이 남았다.
메스의신의 시선에 벽에 걸린 시계가 걸렸다.
바늘은 오전 9시 3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레보아 시술을 시작한 지 대략 12분 정도가 흘러 있었다.
‘빙의가 얼마나 남았지?
시간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30분짜리였으니까… 12분을 썼고… 그럼 앞으로 18분.
18분.
그 시간 동안 나는 내 몸의 주인이 아니다.
이 귀신이 18분 동안 이 육체를 더 지배한다는 뜻이다.
‘음, 근데 빙의 이거… 어떻게 종료시키지?
끔찍한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스킬 설명에는 사용법만 있었지 종료법 따위는 없었다.
설마 남은 18분이 다 찰 때까지 이 상태로 있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무슨 종료 커맨드라도 있나?
로그아웃이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면 되나?
‘빙의 해제!’하고 중2병처럼 외쳐야 하나?
아니면 ‘귀신 꺼져’?
내 몸의 주도권을 계속 빼앗긴 채로 있어야 하는 건가? Alt+F4라도 눌러야 하나?
내가 내면의 패닉에 휩싸여 허우적대는 동안 내 몸의 주인은 전혀 다른 것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메스의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료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소생실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시선이 벽에 걸린 응급 카트의 약품 목록을 훑었다.
선반에 놓인 제세동기의 패드 종류를 확인했다.
그리고선 우리가 방금 사용했던 C-arm의 모델명을 체크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메스의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선이 벽에 걸린 거대한 장비함에 꽂혔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다가가 [Airway Management]라고 적힌 유리문을 열었다.
안에는 사이즈 별로 정리된 후두경 블레이드와 기관내 튜브, 그리고 비디오 후두경 같은 최신 장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케이 체크….”
그는 다음 칸으로 이동했다.
[Chest Trauma]
메스의신은 서랍을 열어 흉관 튜브와 배액병, 그리고 클램프들을 하나씩 꺼내보았다.
손끝으로 차가운 스테인리스 기구의 감촉을 느껴가면서.
“흠….”
메스의신은 그렇게 소생실에 있는 모든 장비함과 선반들을 하나씩 열어보며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고 혼잣말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제발.
나는 그저 필사적으로 기도할 뿐이었다.
‘제발 그냥 얌전히 구경만 해라. 제발 아무것도 만지지 마.
그때 등 뒤에서 거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재야?”
이민재였다. 이민재는 아주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왔다.
“어. 아니아니, 네?”
내 입에서 여전히 어색하기 짝이 없는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그….”
이민재는 말을 고르기 위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번 하더니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너… 뭐… 뭐… 어떻게 배운 거야? 이거를?”
그 질문에 내 안의 나는 비명을 질렀다.
‘모릅니다! 저도 모른다고요! 이 미친 귀신새끼는 어떻게든 배웠겠죠!
하지만 내 몸의 임시 주인은 아주 그럴듯하고 완벽한 거짓말을 만들어냈다.
“저… 그….”
그는 잠시 시선을 위로 돌렸다.
“작년에, 충남에 있는 병원에 그… 워크샵 갔을 때 거기서 배웠습니다. 시뮬레이션으로 몇 번 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는 경악했다.
충남이라니.
난 내 평생 경상권 밖을 벗어나 본 적이 거의 없는 토종 부산 촌놈인데.
물론 서울에 몇 번 가본 걸 제외하곤 말이다.
이민재의 눈이 동그래졌다.
“레보아를? 충남에서? 워크샵 프로그램으로?”
“네. 운이 좋았습니다.”
“…진짜?”
이민재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추궁하지는 못했다.
너무나도 구체적인 거짓말 앞에서는 의심하는 쪽이 오히려 이상한 놈이 되어버리니까.
그렇게 대화가 끝나고 메스의신은 다시 한번 소생실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 몸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응급 카트의 서랍을 열어보고 제세동기의 설정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술기도 해봤잖아. 이제 그만 좀 하고 내 몸에서 나가줘.
바로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아, 잠깐만.
빙의, 메스의신.
나는 이 스킬을 그렇게 마음속으로 외쳐서 발동시켰다.
‘그렇다면 끄는 것도…?
나는 희망을 보았다.
속으로 ‘빙의, 메스의신’을 생각했으니 빙의 해제도 똑같이 하면 되는 건가?
그래, 그거다.
제발.
제발 맞아라.
‘빙의 해제, 메스의신.
그 단어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세상이 다시 돌아왔다.
스흡-하.
그래, 이거야.
내 몸을 지배하던 그 차갑고 이질적인 감각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소생실의 퀴퀴한 공기야, 정말 반갑다!
10여 분 만이지만 그래도 반갑다, 공기야!
몸의 통제권이 완전히 돌아왔다.
나는 그 해방감에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는 걱정스러운 얼굴의 이민재가 서 있었다.
으악 깜짝이야.
“야, 현재야? 왜 그래? 뭐 혹시 뇌에 이상이 생겼니?”
아무렇지도 않게 인신공격이 될 수 있는 말을 뱉다니. 조금 상처일지도.
“아닙니다. 그냥… 좀 피곤해서….”
빙의가 풀린 내 몸은 힘없이 휘청거렸다.
나는 간신히 옆에 있던 응급 카트를 붙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지독한 피로감.
소생실은 그야말로 개판 5분 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아니, 그냥 개판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지.
여기저기 핏물이 고여 있었고 바닥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의료 폐기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직원들이 말없이 기계적으로 그 잔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피 묻은 거즈를 줍고, 바닥을 소독하고, 사용된 기구들을 정리하는 그 모든 과정이 아주 조용하고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역시, 깔끔한 환경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니까.
나는 그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현실감이 없었다.
내 옆에는 백은서와 박성정이 거의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 있었다.
두 1년 차들의 눈이 허공의 한 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긴, 내가 1년 차였어도 똑같이 바라봤을 것 같긴 하다.
세상에 어떤 2년 차가 4년 차랑 펠로우를 패싱하고 술기를 하면서, 타 과 교수. 심지어 비전문가도 아닌 그 분야의 정점에 선 전문가에게 훈수를 둬 가면서 술기를 관찰한단 말인가.
두 명에게 오늘 밤의 경험은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으로 남겠지.
반면 4년 차 한재언은 이미 이 모든 소동 따위는 과거의 일이라는 듯 스테이션으로 돌아가 다음 환자의 차트를 띄워놓고 있었다.
크, 역시.
응급실의 멘탈 최강 한재언.
“아, 잠시만.”
나는 나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뱉었다.
오른쪽 어깨 근육이 굉장히 기분 나쁘게 씰룩거렸다.
‘…뭐지?
나는 어깨를 몇 번 돌려보았다.
그냥 피곤해서 그런가.
방금 전까지 너무 긴장해서 근육이 뭉친 거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애써 잊으려 했던 기억 하나가 섬광처럼 뇌리를 스쳤다.
‘작년에도 이 시점에서 근육통이 또 왔던 것 같은데.
그래. 응급실에서 1년 차 주제에 개복술을 했던 그날.
메스의신에게 처음으로 빙의 당했던 그날.
모든 것이 끝나고 빙의가 딱 풀리면서 내게 갑자기 찾아왔던 그 지옥 같은 고통.
…아.
그 깨달음과 동시에 통증이 시작되었다.
아.
잠시만요,
신이 계시다면 제 말 좀 잠시만 들어주세요.
진짜 너무 아픈데요.
아파.
누군가 내 몸의 모든 근육 섬유 한 올 한 올을 밧줄처럼 잡고 반대 방향으로 미친 듯이 쥐어짜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었다.
아, 다시는 이 통증을 겪고 싶지 않았는데.
어깨에서 시작된 경련은 순식간에 등과 허리, 팔과 다리로 번져나갔다.
끄흐읍…
“야, 현재야?”
내 옆에서 뒷정리를 돕던 이민재가 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얼굴이 새하얘졌는데?”
“아, 저…”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시야가 터널처럼 좁아지기 시작했다.
소생실의 형광등 불빛이 수십 개의 잔상으로 나뉘며 눈앞에서 춤을 췄다.
이민재의 얼굴, 간호사의 얼굴까지.
모든 것이 흐릿하게 번져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카트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그래, 차라리 기절하자. 기절하고 깨면 좀 낫겠지…’
그렇게 내 의식이 툭하고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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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갤질하는 천재 의사 - 다운로드 진행 상황
## 작품 정보
- **Novel ID**: 372180
- **작품 URL**: https://novelpia.com/novel/372180
- **총 회차**: 회차
- **작가**: 렛츠두딧스
## 다운로드 현황
| 항목 | 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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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다운로드 | EP.0 (0.md) |
| Episode ID | 50002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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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운로드 일시 | 2025-12-03 21: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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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너뜀 | 0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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