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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그렇게 웃고 나니, 어색했던 공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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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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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왕 이렇게 만난 거. 내가 연구소까지 데려다줄게. 혼자 가게 둘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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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괜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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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긴 뭐가 괜찮아. 또 땅 파면서 가다가 사고 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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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이마를 가볍게 가리키며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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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건 아까 꿀밤에 대한 보답. S급 헌터가 돼서 어린애 이마 하나 못 뚫는 체면을 세워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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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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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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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헌터의 에스코트를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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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부탁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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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꽉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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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가 내 허리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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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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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간, 발밑의 땅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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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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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나는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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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잠깐,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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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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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줘! 나 높은 거 무서워한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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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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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의 울부짖다시피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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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는 내 예상치 못한 반응에 크게 당황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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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알았어! 바로 내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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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허둥지둥 고도를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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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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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덜덜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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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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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얼굴이 새하얗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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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앞에 쭈그려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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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참 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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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김수호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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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눈 좀 감아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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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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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람을 아주 세심하게 조종해서, 움직이는 느낌이 전혀 안 들게 해 줄게. 그냥 잠깐 눈 감았다 뜨면 도착해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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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의 목소리는 믿음직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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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 상태로 다시 하늘을 날 용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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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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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가 다시 마력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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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아까와 같은 부유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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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소리도, 흔들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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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고요한 방 안에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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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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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눈 떠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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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피곤이 섞인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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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나는 완전히 다른 장소에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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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밑에는 커다란 H가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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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으로 도시의 마천루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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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옥상. 헬기 주차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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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옥상에 위치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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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는 조용했다. 마치 종합 병원처럼 느껴지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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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가 안내 데스크로 다가가자, 그를 알아본 직원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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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헌터의 방문은 이곳에서도 흔한 일은 아닌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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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신원 확인 절차를 마친 후, 우리는 방문객용 소파에 앉아 은미래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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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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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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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고 차분한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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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곡선을 강조하는 원피스와, 그 위에 대충 걸친 연구용 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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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트러짐 하나 없이 깔끔하게 올려 묶은 짙은 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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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바로 A급 빙결 마법사, 은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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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가 우리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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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표정한 얼굴에 아주 희미한 의문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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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 여긴 어쩐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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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지나갈 일이 있어서, 겸사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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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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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자연스럽게 내게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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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은미래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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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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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는 나와 김수호를 몇 번이나 번갈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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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에 빠진 듯한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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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은미래는 결론을 내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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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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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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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그렇게 큰 아이가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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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탄했지만, 담긴 내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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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안 했잖아. 언제 낳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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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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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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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는 방금 전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듯,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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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헛소리야? 내 애일 리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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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한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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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나는 장난기가 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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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소매 끝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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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순수하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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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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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가 고장 난 것처럼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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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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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그러니까 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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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는 필사적으로 무언가 해명하려 했지만,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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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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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흡, 푸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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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휴, 어이가 없어서…. 하여튼, 얘가 너랑 오늘 만나기로 했던 그 뉴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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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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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은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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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의 패닉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내게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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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나를 더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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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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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의 차가운 눈이 현미경처럼 내 얼굴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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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스러운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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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웃음을 뚝 그치고 뒷걸음질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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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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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의 입술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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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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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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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작아서 바람 소리에 섞여 사라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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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똑바로 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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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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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는 즉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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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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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는 짧게 헛기침을 하더니, 나와 김수호의 머리카락을 눈 깜짝할 사이에 한 가닥씩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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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자연스럽고 빠른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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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얏!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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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거!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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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김수호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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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는 우리의 반응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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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아낸 두 가닥의 머리카락을 투명한 샘플 봉투에 소중하게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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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가 지극히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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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자 검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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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자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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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의 절규가 로비를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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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은미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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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는 샘플 봉투를 가운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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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모르는 일이니까. 확실하게 데이터를 확보하고 넘어가는 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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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는 한 치의 농담기도 섞여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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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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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는 모든 용무를 마쳤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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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김수호를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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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돌아가도 좋아. 여기까지 데려다준 건 고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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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래…. 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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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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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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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와. 일단… 기초 신체 데이터부터 측정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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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저는 유물 보려고 온 건데 왜 신체검사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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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들이 있어 나조차도 순간 까먹었지만, 애초에 내가 여기 온 목적은 드워프의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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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반지의 효과로 유물을 복원할 수 있는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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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검사라면, 예전에 서울 왔을 때 협회에서 이미 전부 다 했어요. 김수호 씨랑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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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은미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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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빛이 나를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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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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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 검사는 필요해. 네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작고 어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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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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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하는 검사가 100배는 더 정확해. 문외한이 기계 몇 번 딸깍거리면서 측정한 거랑, 대한민국의 최고 천재인 내가 직접 정밀하게 분석하는 건 차원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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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의 말에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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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자신감에 압도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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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똑똑한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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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까, 최고의 천재가 직접 봐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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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랑은 몸이 많이 달라지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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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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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따라 들어간 곳은 온통 새하얀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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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의 벽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복잡한 기계들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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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중앙에는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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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는 내게 침대 위에 누우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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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기본적인 것부터 확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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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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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금속 패치가 팔과 다리에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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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은미래의 차가운 손이 옷 속으로 들어와 배까지 올라왔을 때, 나는 기겁하며 몸을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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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런 곳까지 붙이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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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당연한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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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는 내 반응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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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심장 소리를 들으려면 당연히 가슴에 청진기를 대야지?라고 하는 듯한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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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그녀에게 이것은 의료행위에 가까운 지극히 당연한 절차일 뿐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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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저항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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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는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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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에 나는 알아볼 수 없는 그래프가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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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는 그 데이터들을 잠시 훑어보더니, 이번에는 내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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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전도율 측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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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의 시선이 잠시 내 손가락 끝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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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새끼손가락을 확인한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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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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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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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내가 민감하게 여길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언급하지 않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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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손등과 손바닥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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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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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부드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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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의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엄지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내 손등을 부드럽게 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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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상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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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그녀의 다른 쪽 손이 뻗어 와 내 볼을 콕, 하고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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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볼이 그녀의 손가락에 눌렸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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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검사 맞아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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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지적에 은미래는 손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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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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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표정은 여전히 너무나 진지해서, 정말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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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확실한 것은, 빙결 마법사라 그런지 그녀의 손이 엄청나게 차갑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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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별생각 없이 그 부분을 입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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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엄청 차갑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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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은미래의 움직임이 화들짝 놀란 듯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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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당황한 기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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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가 당황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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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안. 내가 빙결 계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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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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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살짝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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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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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는 정신을 차린 듯 헛기침을 하더니, 이전보다 훨씬 더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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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이제 진짜 검사를 시작해 볼까. 일단 내시경을 하면서 몸을 모래로 만드는 것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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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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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럼 지금까지 한 건 뭐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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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외침에 은미래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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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선이 허공을 방황하며 초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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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거…? 그건… 그러니까, 예비 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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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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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해부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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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그만하고! 그 물건이나 보여줘요! 저 그거 때문에 온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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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단호한 외침에 은미래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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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아직 연구하고 싶은 건 시작도 못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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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목소리에는 진한 미련이 묻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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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도 더 이상 억지를 부릴 수는 없다고 판단한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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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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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래는 마침내 나를 유물이 있는 방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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