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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성은 동굴에 진입하자마자 숨을 들이켰다.
여섯 번째 뿌리, 그 내부에 존재하는 적들이 보였다.
천천히 몰려드는 수는 총 여덟.
한유성은 전방으로 기감을 흘렸다.
적들의 등급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6위계 급만 여덟….
포위하듯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는 여덟 마리의 최흉.
기감으로 확인된 그들은 전부 6위계 급이었다.
이전의 다섯 번째 뿌리처럼, 회복을 담당하는 피통 역할의 개체도 없고.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없었다.
하지만 숫자에서 오는 압박감은 분명했다.
“이번엔 좀 간단하네.”
반 이네르의 목소리가 한유성의 귓가에 계속 흘러들어왔다.
“각자 네 놈씩 맡으면 되겠지.”
한유성은 옆에 선 반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왜, 벅차? 내가 두 마리쯤 더 맡아줄까?”
“아냐. 네 놈씩, 깔끔하게. 좋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건 이쪽이었다.
콰득!
한유성은 남아있던 용혈의 혈청을 옆구리에 주사했다.
곧이어 극한의 숨결까지 복용했다.
“후우….”
반 이네르 역시 숨을 내쉰 뒤 극한의 숨결을 주사했다.
한유성의 검에 백광이 맺혔다.
새하얀 입자들이 허공에 흩날렸다.
땅바닥을 강하게 즈려밟고 나아가는 한유성의 왼쪽 눈에는 변화가 있었다.
의안(義眼).
일종의 의안이라고 볼 수 있는 장착형 렌즈 아티팩트가 한유성의 왼쪽 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티라일 오큘러스.
상대방의 약점을 군청색의 선으로 표시하는 아티팩트라고 했다.
몬스터 뿐만 아니라, 사물이나 여타 생명체의 특이점도 알아낼 수 있는 아티팩트라고 했다.
개척자 선배에게 차원 간 거래로 인해 받은 아이템.
- 개척자) 나도 등반자 너처럼 가진 게 없었던 상태에서 탑에 소환됐거든. 애초에 그냥 무역선 선원 출신이었고.
- 개척자) 딱 죽기 좋은 상황에서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아이템이 스콜라의 눈이라는 아이템이거든.
- 개척자) 그걸 토대로 내가 직접 만들어낸 아티팩트야.
하드 난이도 종결자인 개척자 선배가 전투와 전혀 무관한 삶을 살던 사람이라는 건 한유성으로서도 놀라운 사실이었다.
- 개척자) 보일 약점이 한두 군데는 아닐 거야. 약점을 한 가지만 가진 몬스터는 생각보단 드물거든. 약점이 반드시 치명적인 약점인 것은 또 아니니까.
- 개척자) 치명적 약점은 군청색 기류가 더 강렬하게 흐르는 것처럼 보일 거야.
- 개척자) 발동 조건은 극소량의 마력을 티라일 요큘러스에 주입하는 것.
한유성은 개척자 선배의 말대로 의안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적, 최흉들의 약점이 눈에 보였다.
도핑으로 인한 효과로 몸의 감각은 끝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유성의 왼발이 최흉의 오른발을 강하게 짓눌렀다.
육체를 제어하는 힘을 잃은 최흉의 몸뚱이가 앞쪽으로 쏠렸다.
섬전처럼 쏘아진 한유성이 검으로 최흉의 허리를 베고 그 기세로 머리통까지 날렸다.
핏방울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반 이네르도 한유성과 마찬가지로 극한의 숨결을 주입한 채 적의 멱을 노렸다.
촤아아아악!
둘은 거의 같은 속도로 적들을 도륙했다.
츠츠츠츠…!
반은 마력을 나선으로 휘감은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신체 혈류 가속.
카디오퓨리(CardioFury).
3단계 중 3단계.
으저적!
몸뚱이가 비명을 질렀다.
반의 벽안에 핏발이 섰다.
카디오퓨리의 3단계를 사용하는 건 가문 내에서도 사용하는 걸 극도로 꺼리는 최종단계였다.
전투 중에 전조 증상도 없는 '탈진' 상태에 돌입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손하나 꼼짝할 수 없는 정지의 상태.
특히, 전투가 아주 과열되고 길어지는 상황에서 일어나곤 했다.
그래서 홀로 전투하는 중에 3단계를 쓰면 모순적이게도 혈류 가속 상태에 진입하기 전에는 위협조차 되지 않았던 적에게 죽을 위험이 있었다.
지금 3단계에 돌입하는 건, 탈진 상태에 이르러도 옆에 있는 한유성이 자신을 도와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써거걱!
파육음이 일었다.
한유성과 반은 끝없이 움직였다.
이번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지난 다섯 번째 뿌리와 다르게 도중에 회복이 되는 최흉이 없었기 때문이다.
숨통을 끊으면 그대로 죽었다.
세 마리를 죽였을 때 레벨이 올랐다. 52에서 53으로.
푹!
한유성은 티라일 오큘러스가 알려주는 약점의 위치대로 검로를 이행했다.
어느새, 남아있는 최흉은 둘.
벽 같은 게 없음에도 단번에 여섯 번째 뿌리를 노릴 수 없는 이유도 수문장처럼 철벽같이 뿌리의 앞을 지키고 있는 저 두 최흉 때문이었다.
최흉들이 으스러진 펼쳐진 난장판 속에서.
한유성과 반 이네르는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한유성이 입가를 비틀었다.
'역시나.'
여섯 번째 뿌리 앞에 있는 최흉 중 권역을 쓸 줄 아는 최흉이 아예 없다는 점은 안 그래도 한유성이 의아해하고 있던 것이다.
남은 두 최흉의 발아래에 드넓은 원형이 퍼져나갔다.
그 원에서 퍼져나가는 폭력적인 기세.
뚜두둑- 뚜두둑!
그리고 안 그래도 거대하고 근육질인 최흉의 몸뚱이가 더 부풀어 올랐다.
한유성은 마치 강맹한 맹수와 곤충을 뒤섞어놓은 듯한 기괴한 이족보행 괴물, 최흉을 보며 검에 백광의 검기를 다시 맺었다.
공포심이 아예 들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투쟁심이 그 공포심을 완전히 짓눌렀다.
저 두 놈을 반드시 꺾어야만 뿌리를 격퇴할 수 있었다.
반이 입을 열었다.
“전형적인 강화형 권역 같네. 육체 강화와 마력 증폭 중심의 영역.”
한유성은 동의했다.
"그런 것 같네."
한유성은 두 최흉이 권역을 전개한 뒤에도 '티라일 오큘러스'로 보이는 약점이 변화하지는 않는 걸 확인했다.
치명적 약점은 똑같이 뒤쪽 목덜미.
그 목덜미의 안쪽에 깊이 박혀있는 핵이었다.
"목덜미 깊이 있는 핵? 알았어."
한유성의 설명을 들은 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른발을 강하게 내디뎠다.
반의 몸이 사라졌다.
촤아아악!
사라졌던 신형은 곧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팔의 위에서.
단단한 팔의 껍질과 육신을 검으로 베고 상체를 올라타고. 어느새 등 위까지 올라왔다.
한유성은 눈을 부릅떴다.
설명은 미리 들었다.
3단계 카디오퓨리를 사용할 거라고.
육신이 으스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한계 너머로 향하는 기술을.
근데 저 정도로 신속하고 날카로워질 줄은 몰랐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나, 반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최흉의 목 아래로 검을 들이민 반은 팔을 들어 올리며 최흉의 목 반절을 잘라 내버렸다.
그리고 뒤쪽 목덜미를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시퍼런 벼락이 목을 파고들고 핵을 깨부쉈다.
문제는 그 직후였다. 수문장 둘 중 하나를 죽인 반 이네르가 땅으로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고 곤두박질쳤다.
쾅!
한유성은 다급히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가 떨어지는 반을 받아냈다.
콰아아앙!!
그리고 남은 한 마리가 내리찍은 회색 철퇴를 피하기 위해 몸을 바로 뒤로 내뺐다.
온몸이 피와 땀에 절어 있었다.
"하아…."
옅게 내쉬는 숨.
그리고 흐려진 동공.
'탈진.'
한유성은 이게 반이 말했던 카디오퓨리 3단계 중 겪을 수 있는 탈진 상태라는 걸 알아차렸다.
명칭과 달리, 체력 소진으로 인한 탈진 상태는 아니었다. 혈류가 꼬여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다.
탈진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은 카디오퓨리의 시작점인 좌측 관자놀이의 반대편인 우측 관자놀이에 마력을 옅게 휘감은 검지를 누르라고 했다.
한유성은 마력을 섬세하게 휘감은 검지를 반의 우측 관자놀이에 눌렀다.
한유성은 반 이네르의 몸을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녀올게."
반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옅게 웃는 게 보였다.
한유성은 그대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반은 이번에도 제 몫을 해냈다.
나머지 한 마리는 자신의 몫이었다.
아티팩트, 티라일 오큘러스의 능력으로 보이는 마지막 최흉의 취약한 약점을 모조리 타격 타격했다.
물론 최흉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최흉의 공격을 피해내면서 최흉에게 공격을 먹여야 했다.
촤아악!
팔을 날리고.
콰직!
다리를 꺾어, 무릎을 완전히 꿇렸다. 그리고 뒷목을 향해 백색 검기를 내리찍었다.
크라악! 키르악! 쾅! 콰앙! 콰아앙!!
최흉의 울음과 발버둥이 멎을 때까지 계속.
한유성은 최흉이 더는 움직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여섯 번째 뿌리에 신성의 돌을 찍어눌렀다.
[13층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셨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Lv.53 → Lv.56]
"여."
주저앉은 채, 친근한 얼굴로 손을 들고 있는 반 이네르가 보였다.
"잘했어."
한유성도 오른손을 들고서 그 말에 화답하려는 순간.
화아아악─
새하얀 빛이 한유성의 시야를.
아니, 동굴 전체를 뒤덮었다.
***
"……."
시야를 가득 뒤덮었던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한유성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눈앞에 있는 건 투명한 벽.
그리고 13층 스테이지에서 단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는 괴상한 존재가 서있었다.
"뭐야, 넌?"
통상적인 사람과는 거리가 먼 덩치의 머리 부분에는 마치 수십 바늘로 꿰맨 것 같은 기이한 천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너머에는 또다시 투명한 벽이 있었고. 그 안에는 반 이네르가 서있었다.
정체불명의 존재는 한유성의 앞에 있는 불투명한 벽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아아, 반갑습니다. 저는 탑의 2급 관리자 플레셰크라고합니다."
"관리자…?"
플레셰크는 한유성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2분 뒤부터 플레이어님이 치르셔야 할 결투에 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2분.
한유성은 미간을 와락 구겼다.
대체 이 플레셰크라는 존재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저희 관리자들은 매 기수마다 최상층부에서 [리뉴얼]에 대한 명령을 하달받습니다."
리뉴얼.
"한유성 플레이어님께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드리자면, 몇몇 층계의 [밸런스 패치]나 새로운 [컨텐츠 공급]이 필요할 때, 그게 리뉴얼로 이루어지는 것이죠."
설명은 길게 이어졌다.
"그런데 간혹 그런 [오류]가 있는 층계가 있습니다."
"한 번이라도 [클리어]를 하지 않으면, [리뉴얼]이 불가능한 오류가 있는 층계가 말이죠."
"그런데 현재 [13층]의 난이도는 겪으셨다시피, 혼자서 클리어할 수 있는 수준의 난이도를 월등히 상회하고 있습니다. 판데모니엄 난이도에 걸맞은 플레이어가 13층에 도달한다고 해도 혼자서는 절대 클리어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지난 분기에서 가장 높은 최대 기록을 세웠던 [반 이네르]. 지난 기수에서 사망한 그녀를 저희의 능력으로 현재 층계, [13층에서만 살아있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존재의 활성화는 지금처럼 13층에 다른 등반자가 진입했을 때만으로 한정됩니다만."
"어쨌든, 두 명의 플레이어가 13층 스테이지를 진행하도록 만들어야 했습니다. 반드시 이 층계가 공략되길 바랐으니까요."
한유성은 플레셰크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이제야 그 개요를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그리고 드는 의문은 당연한 의문이었다.
"…언제는 혼자 공략 할만 했는 줄 아냐?"
지금껏 몸소 경험한 바로는 이 판데모니엄에 혼자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는 층계 따위는 없었다.
단 한 층계도.
플레셰크는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하긴, 그 말씀이 맞죠. 사실을 고하자면-."
플리셰크의 말이 잠시 텀을 두고 덧붙여졌다.
"이 13층 리뉴얼의 명령을 내린 것도. 그 오류의 수정을 위해서 필요한 공략 성공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며 지난 기수의 플레이어인 반 이네르 님을 조건부 부활 시킨 것도. 이 [판데모니엄 탑]이 직접 내린 결정입니다."
플리셰크는 또다시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저희도 놀랐죠. 탑이 적극적 의사표현을 하는 건 지극히 드문 경우인지라."
플리셰크는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것이. 한유성의 머릿속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저같은 일개 관리자가 최상층부도 쩔쩔매는 탑의 자체적인 결정을 어떻게 거부하겠습니까."
플레셰크는 그 말 직후, 갑자기 대뜸 고개를 숙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두 분은 훌륭하게 공략을 해내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관리자는 이 골치 아픈 13층을 클리어해준 반 이네르 님과 한유성 님에게 진심 어린 경의를 표합니다."
"마음 같아선, 두 분이 함께 판데모니엄의 등반을 하실 수 있게 만들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한유성은 플례셰크의 입에서 튀어나올 다음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반 이네르 님께서 완전히 플레이어로서 부활하고 14층에 올라가기 위해선, 한유성 님이 죽으셔야합니다. 반드시."
예상대로였다.
"저희가 동의도 없이 육체를 다시 일으켜 세운 반 이네르님에 대한 무례를 최대한 갚기 위해, 며칠 전에 이런 사실을 먼저 알려드렸습니다."
"스테이지를 끝낸 직후에 스테이지에서 한유성 플레이어님을 죽이거나, 지금 이곳. 결투장에서 죽여야 한다고."
한유성은 투명 벽의 너머, 텅 빈 공간 뒤. 또 다른 투명 벽 뒤에 서 있는 반 이네르를 바라보았다.
"저는 반 님께서 스테이지를 끝낸 직후, 한유성 님이 아무런 예상도 하지 못했을 때 죽이는 걸 추천해 드렸습니다만. 그러지 않으시더군요."
한유성을 마주보고 있는 반 이네르는 옅게 웃고 있었다.
"음, 이제 1분이 남았군요. 1분 뒤에는 양쪽 투명 벽이 걷히고. 지금 양측의 좌측에 있는 촛불을 먼저 끄는 쪽이 승리하는 겁니다. 물론, 상대방의 촛불 말입니다."
한유성은 좌측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투명 벽과 유사하게 생긴 사각형 안에 초가 들어있었다.
불이 붙어있는.
"둘 다 올라갈 방법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거냐…?"
한유성의 말에 플레셰크가 고개를 내저었다.
"필연적입니다. 반드시 이 자리에서 두 분 중 한 명이 죽어야 합니다."
그 말이 한유성은 증오스러웠다.
플레셰크에게 주먹을 뻗었지만.
콰앙!
투명 벽에 가로막혔다.
"결투가 시작되고 10분 안에 승자가 가려지지 않으면, 저희가 상흔의 정도나 타격 성공 횟수 등등을 토대로 승자를 가려낼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플레셰크는 공간의 가운데로 걸어가더니, 정좌 자세로 가만히 앉았다.
한유성은 벽 너머에 있는 반 이네르를 바라보았다.
"반─!"
한유성은 소리쳤다.
반 이네르의 이름을 계속 외쳤다.
하지만 그 소리는 투명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백광의 검기를 집결시킨 검으로 투명 벽을 내리쳐도 벽에는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다.
벽 바깥에 있는 플레셰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벽을 부수려면 위계를 더 올리셔야 합니다. 지금 듣고 계시다시피, 제 목소리는 벽의 법칙을 무시할 수 있지만 저도 벽을 부수지는 못하죠."
쾅! 콰아앙!
"그게 이 신성 결투장의 법칙입니다."
요란한 소리만 벽 안에서 울려 퍼질 뿐이었다.
***
반 이네르는 한유성을 바라보았다.
방금 막 이번 일에 대해 알게 된 한유성과 다르게.
자신은 며칠 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 당신은 강합니다. 반 이네르.
- 당신은 다섯 번째 뿌리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 다섯 번째 뿌리는 카디오퓨리의 3단계를 발동, 적들의 공격을 회피하며 벽을 부수고 뿌리를 마비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 당신이 죽은 건 여섯 번째 뿌리죠. 사인은 탈진 상태에서 맞은 일곱 번의 치명상.
- 당신은 강합니다. 저자를 죽이고 온전한 부활을 하여 14층에 충분히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 플레셰크는 당신을 경외하며, 응원합니다.
결투.
플레셰크의 말을 듣고 계속 고심했다.
활을 쏘면서 고민을 했고.
한유성과 캐치볼을 하면서도 고민을 했다.
고민은 길었다.
자신도 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사라질수록, 깊어졌던 고민의 결론은 손쉽게 내려졌다.
'네 입장에서는 꽤나 이기적인 선택일지도 모르겠네.'
한유성의 의견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이기적이었다.
대화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이곳, 탑은 그런 곳이니까.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면 삶에 대한 욕심이 생길 뿐이다.
저 친구와 같이 올라가고 싶은 생각이 강해질 뿐이다.
반 이네르는 그렇게 확신했다.
'나도 살고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기 위해서 한유성을 죽일 수는 없다.
그래서 단호해질 수 있었다.
자신에게 이 대결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고 사라졌던 플레셰크가 한 번 더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 그 목숨줄과 같은 촛불은. 언제부터 끌 수 있는 건데.
- 투명 장막이 내려가면 전투가 시작되면서 초를 둘러싼 장막도 내려갑니다. 그때부터 건드릴 수 있죠.
- 결투 시작 전, 대기 시간에 초를 건드리게 해줘.
- 예? 하하, 저도 반 이네르 님께 최대한 편의를 맞춰 드리고 싶습니다만…그런 식의 특혜를 드릴 수는.
- 한유성 초 말고.
- 예?
- 내 초를 건드리게 해달라고.
반의 오른손이 초를 둘러싼 장막을 투과했다.
초를 오른손으로 든 반 이네르는 자신의 앞에 들었다.
한유성은 앉아있는 플레셰크를 가리키며 무언가를 외치고 있었다.
투명 장막 때문에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예상은 쉽게 할 수 있었다.
아마도, 함께 힘을 합쳐서 저놈부터 죽여보자. 뭐 그런 내용이겠지.
자신도 처음 플레셰크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죽여버리려고 검을 뽑았으니까.
- 절 죽이셔도 이 결투에 대한 변화는 없습니다. 제가 죽어도 결투의 진행은 이어질테니까요.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썩 이기적이지만, 이해를 해줬으면 해.'
결국, 둘 다 살아서 올라가는 일은 없다.
'후회는 없어. 나는 너랑 다르게 고민을 정말 오래 했거든.'
저벅-
반 이네르는 자신의 앞에 있는 투명 장막 앞에 도달했다.
장막이 올라가고.
전투가 시작되어버리기 전에.
결정한 대로 해야만 했다.
***
한유성은 초를 든 채 자신을 바라보는 반 이네르를 마주했다.
한유성은 반의 이름을 외쳤다.
아우성에 대한 반의 반응은.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댄, 조용히 하라는 수줍은 손동작이었다.
반 이네르의 입이 천천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 살아.
입 모양만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유추가 될 정도로.
- 아, 맞다. 한유성.
반은 말하는 내내 웃고 있었다.
- 그 캐치볼이란 거.
아주 환하게.
- 정말 재밌었어.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 너랑 해서.
반은 그 말을 끝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바람이 불었다.
반 이네르의 입에서 흘러나온.
촛불이 꺼졌다.
[기권 발생.]
한유성은 무너지듯 천천히 쓰러지는 반 이네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플레이어' 반 이네르, 결투를 포기했습니다.]
['플레이어' 반 이네르, 사망.]
['플레이어' 한유성, 5초 후 자동으로 14층 층계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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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성은 얻은 심상에 대한 갈무리를 끝내고 숙소의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드르륵-
몸을 일으키고 문을 여는 순간.
한유성은 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옅게 웃었다.
“아직 네 목이 날아갈 걱정은 마. 계속 주시하고 있으니까. 내 말대로 네가 일정 거리를 잘 유지하고 있고.”
연설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한유성은 겉보기엔 연설아에게 별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최대한 할 수 있는 방비는 해둔 상태였다.
아이템.
14층을 클리어하고 보상으로 획득한 아이템인 파명전가부(把銘轉嫁符)를 연설아에게 준 상태였다.
전가부의 효과는 소지자가 공격을 받았을 때, 미리 정해놓은 대상이 그 공격을 대신 받으며 그뿐만 아니라 공격을 전개한 존재마저 대상의 앞으로 전이가 되는 것이다.
척 봐도 쓰임새가 정해진 물건이었다.
위험한 존재 둘을 상대할 때 한 놈에게 대상 지정을 하면, 그 강적 둘을 격돌하게 할 수 있는 아이템.
‘아마도 그렇게 써먹으라고 준 아이템이 맞겠지.
하지만 한유성은 이 아이템이 가진 10회의 전이 횟수를 모두 자신에게 발생하도록 설정했다.
눈앞에 있는 연설아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파명전가부가 일차적으로 만들어놓은 방어선.
2차 방어선으로 구성한 건 단순히 육체에 방어막을 치는 아이템. 글라벨 실드.
하지만 그래봤자 글라벨 실드는 B+등급 아이템.
5위계 이상의 무인이 전력으로 공격을 하면 몇 차례 버티지 못할 터였다.
2차 방어선까지 도달하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1차 방어선.
자신에게 적들이 전이되었을 때 무조건 끝낼 생각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한유성은 그런 행운으로 점철된 전개가 자신에게 주어질 거란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바, 방금 벌이신 대전 때문에 정말 쟁천무회 제일인이 저희 호북연가의 대리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진심으로 상상하기 시작했잖아요.”
한유성은 호들갑을 떠는 연설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침착해, 아직 한참 멀었으니까,”
네 번은 더 이겨야 우승이다.
이길수록 적들의 수준은 점점 더 높아질 거고.
한유성은 아직 많은 위기가 들이닥칠 거라고 예상을 했다.
숙소를 나선 한유성과 연설아는 비무대의 앞쪽으로 걸어갔다.
한유성은 자신에게 쏟아진 시선을 느꼈다.
“…점창파의 석이준을 쓰러트린 자다.”
“이름이 한유성이라고 했나?”
한유성은 조금 전에 눈앞에 나타났던 알림창을 떠올렸다.
‘이름이 알려졌다라….
중원 무림에 이름 석 자가 알려졌다.
득도 있겠고. 실도 있을 것이다.
이계가 배경이었던 세계에서도 그랬듯이, 이 탑의 이야기는 단일 층계로서 끝이 나지 않는다.
다음에 무림 테마의 층계가 걸린다면, 지금과 시간 선이 이어질 확률이 높았다.
이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연 단위로 시간의 흐름이 뛸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
다른 이들의 경기를 눈으로 보려고 나온 의도도 있었지만, 초월갤 선배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촬영할 사진이 있었다.
한유성은 관객석의 최상층에 있는 이들을 단말기로 촬영했다.
바로 오대세가의 가주들을 촬영한 것이다.
허공에 팔을 뻗는 모습으로 보일 뿐이었으니,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없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온 한유성은 초월자 갤러리에 무림맹에 소속된 오대세가 가주들의 얼굴이 담긴 사진을 첨부한 게시물을 올렸다.
제목 : 자, 선배님들이 원하는 무림맹 소속 가주들의 얼굴임.
작성자 : ㅇㅇ*
첨부파일 : 128310923829038.jpg
그리고 일단 본선 진출하고 1승은 달성함. 백리세가나 그놈들이랑 연합한 걸로 보이는 하북팽가 측에서 연설아를 언제까지 가만히 놔둘지 모르겠네.
ㄴ 창왕) 흐으음, 가주들의 이름이 죄다 아는 놈들이랑 다른 걸 보니 아예 한 세대가 지나간 게 맞는 것 같구나.
ㄴ 당하연) 저희와 함께했던 무인들은 뒷방…아니닛, 원로원에 있을 검다!!
ㄴ 밀실론자) 내가 경험한 바로는 무림계도 겉으로 막 나서는 양반들보다 흑막처럼 암약하는 놈들이 더 강한 구석이 있었지, 원로원도 그 범주에 들어간다. - 이 세상은 거대한 밀실로 이루어짐
ㄴ 무녀) 하와와, 맞아워요오오.
ㄴ 天魔) 대가 끊어지고 다른 놈이 가주가 되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늙은이들의 얼굴에 늙은이들의 면면이 남아있어.
ㄴ 대마법사) ㄹㅇ 그렇네. 모용세가 가주가 그나마 좀 젊구나.
ㄴ 절대군주) 무림맹주…이름이 남궁원이라고 했나? 저놈이 십 대 후반일 때 본 것 같기도 하구나.
ㄴ 마룡왕) 벨투이- 벨투이도 만났던 것 같아요오.
ㄴ 天魔) 제갈가의 가주놈이 6위계 밖에 되지 않는구나, 무재(武才)가 부족하군…그래도 전대 가주는 7위계 중위까지는 이루어 냈던 놈이었는데.
ㄴ 창왕) 뭐, 저놈들은 정치질과 인맥과 전통으로 살아남는 놈들이잖소.
ㄴ 얼음여왕) 꽁꽁…! 등반쟈가 계속 무림계를 등반하다 보면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ㄴ 수왕) 그럴 것 같다!! 육신이 거의 늙지 않는 놈들도 있으니까 말이야.
ㄴ 무녀) 하와와, 소녀와 친구를 먹은 이들도 어딘가에선 살고 있을 것이와요.
한유성은 무림계가 이계보단 선배들의 등반 시기보다 시간이 더 많이 흘렀음을 알게 되었다.
***
“점창의 둘째가 벌써 패배할 줄은 몰랐군.”
사천당가의 가주 당명허의 말에 모용진천이 입꼬리를 올렸다.
“강한 신인이 등장했지 않은가.”
무림맹주 남궁원이 하북팽가의 가주 팽무일을 바라보며 낮게 속삭였다.
“부디 가문의 일을 쟁천무회까지 끌고 오지 말기를 바네.”
남궁원의 말에 팽무일은 미간을 좁혔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시오?”
남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알지 않은가? 자네를 믿지만, 그저 맹주로서 하는 경고일 뿐이야.”
남궁원도 알고 있었다.
하북팽가와 백리세가가 긴밀한 관계인 건 중원에서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사실이지만, 하북팽가가 직접 나서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한유성이라는 애송이를 죽이려는 의지는 있어도, 동맹 관계 정도라고 할 수 있는 백리세가를 움직일 터.
남궁원은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시헌을 바라보았다.
오대세가 가주 중 유일하게 6위계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제갈세가가 가지는 입지는 흔들릴 리는 없었다.
무림맹의 전반에 강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으니.
“진법에 문제는 없소?”
남궁원의 질문에 제갈시헌이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이름을 올린 맹원 분들을 제외한 7위계 이상의 무인들은 결코 쟁천무회장의 땅을 밟지 못할 겁니다.”
남궁원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7위계 이상의 적들은 등장하지 않을 테니, 그나마 그자에겐 숨 쉴 틈이 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유성이라는 애송이가 온전히 호북연가의 여식을 지켜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백리세가 측에서 결승이 시작되기 전에는 손을 쓸 것이다.
남궁원은 이 쟁천무회가 끝나기 전, 그 전에 한유성의 목숨이 끊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확신에 가까운 예상을.
**
5일이 흘렀다.
한유성은 본선 진출 후 있었던 첫 번째 승리 이후, 두 번의 대결에서 더 승리했다.
이제 두 번의 승리를 더 거두면 쟁천무회의 우승을 쟁취할 수 있었다.
한유성은 두 번의 승리 뒤에 레벨 1을 또 올릴 수 있었다.
이번에도 경험치 상승의 이유는 중원 무림에 이름을 떨쳤다는 이유였다.
소림파 출전자 자선은 밝게 웃었다.
“내 예상대로 여기까지 올라오셨구려, 시주.”
비무대 위에 두 사람은 서있었다.
쟁천무회의 규칙.
6위계는 대전 중에서 ‘권역’을 사용하지 못한다.
물론, 한유성은 자선이 권역을 펼친다고 해도 자신이 패배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검을 아주 잘 쓰시오. 이번에도 검을 쓰시는 게 좋을 듯하군.”
자선의 주먹에 금빛 권기가 휘감겼다.
자선의 걸음은 가벼웠다.
관객석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 서로를 향해 격돌하는 한유성과 자선에게 쏠렸다.
한유성과 마찬가지로 전신에 호신강기를 씌운 자선이 한유성에게 쇄도했다.
한유성의 검이 허공을 베어냈다.
자선의 주먹도 대기를 갈랐다.
서늘한 격차.
찰나의 간극.
둘은 서로의 수준을 알아보듯, 공격들을 교차시킨 둘은 다시 맞부딪혔다.
츠츠츠츠…!
촥 펼쳐진 자선의 오른손에 금빛의 기류가 휘감겼다.
관음청강수(觀音靑剛手).
대기의 흐름이 자선의 손짓에 의해 꺾여나갔다.
한유성은 백색검기를 맺은 검으로 그 찬란한 공격을 막아냈다.
자선의 움직임은 끝나지 않고 물결처럼 흘렀다.
백보신권(百步神拳).
백보 바깥에 있는 적이라도 격살하는 권.
소림의 대표적인 무학이 자선의 손에서 펼쳐졌다.
한유성은 고강한 검기를 뽑아냈다.
피엘뷔르트 4식.
경검(傾劍).
쩌어어어어어엉!
주먹의 형상으로 퍼져나가는 강맹한 기파를 검격의 궤적이 파절시켰다.
한유성이 펼친 횡 베기가 자선이 뻗은 권로(拳路)의 균형을 뒤튼 것이다.
한유성의 몸뚱이 너머에 풍경이 와락 일그러졌다.
조금만 늦었다면, 몸뚱이가 으스러졌을 터.
한유성은 자선의 양손을 바라보았다.
권기가 권강(拳罡)의 형태로 치환되었다.
권기는 엷게 퍼져 팔에 넘실거리는 불꽃 같았다면, 권강은 그 불꽃을 응집한 결집체였다.
권강.
기가 강으로 치환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초월갤 선배들의 댓글에서 본 바가 있었다.
반 이네르가 줬던 피엘뷔르트 검법서의 초장에 적혀있던 부분이기도 했다.
- 창왕) 네가 검강(劍罡)를 출수할 수 있는 단계는 6위계부터다.
- 天魔) 검강이 검기보다 우월하다고 할 순 없다. 검강은 정해진 형태가 있는 게 아니라, 검기를 극한으로 조율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섰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 빛의검) 6위계부터는 육신에 방호용으로 펼치는 호신강기도 공격형으로 치환할 수가 있다.
- 현자) 결국, 중요한 건 시전자의 역량이라는 뜻이오.
한유성은 자신을 집어삼키듯 뻗어 나오는 금빛 섬광들을 직시했다.
쾅! 콰과광!
유구한 역사를 지닌 권격들을 검을 휘둘러 맞받아쳤다.
물론, 막아내지 못한 공격도 더러 있었다.
타격을 허용한 몸 곳곳에서 묵직한 고통이 치밀어올랐다.
한유성은 무시했다.
쩌어어어엉!
자신의 호신강기에 균열을 내며 복부를 강타해버린 권격을.
한유성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자선은 오른손을 정면으로 펼쳤다.
자선의 전신에서 서려 있던 호신강기가 출렁이더니, 모조리 한유성을 향해 쏘아졌다.
천수여래장(千手如來掌).
한유성은 자세를 낮추며 무수한 권격들의 간격 내로 들어섰다.
카가가각! 카가각!
자선의 의지대로 꺾이는 수십 갈래의 장을 튕겨냈다.
거리는 충분히 좁혔다.
이제 결판을 낼 차례였다.
그 생각을 하는 건 자선도 마찬가지였다.
자선의 양손이 대기를 훑었다.
둘이 서 있는 비무대에 서늘한 기파가 퍼져나갔다.
금강복마권(金剛伏魔圈).
공백을 뒤덮은 회색의 권강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자선이 권역을 펼친 것도 아닌데 그에 비견되는 중압감이 내려앉았다.
한유성의 움직임에 망설임은 여전히 없었다.
활로로 삼을 여백 따윈 없었다.
한유성은 5일 전, 석이준과의 전투가 끝난 당일 밤 그에게 물어보았다.
마지막 일격을 전개할 때 어떤 방식으로 검기를 운용했느냐고.
석이준은 말 그대로 미친놈 보듯 한유성을 바라보았다.
- …지금 네가 한 문파의 비기를 어떻게 쓰는 건지 물어보고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는 거냐?
석이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알려줘도 문제없는 요건들은 썩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한유성은 일순간 그때 자신을 마주하고 있던 석이준의 공격 자세를 떠올려냈다.
오른팔을 뒤로 당겼다.
해를 쏘는 검.
그게 심상의 원천이라고 했다.
‘하지만 난 그런 거창한 심상을 그려낼 능력이 아직 없다.
한유성은 목표를 간단하게 세웠다.
저 주먹의 영역을 부순다.
그리고 자선의 목에 닿는다.
쿵-
한유성이 오른발을 내디뎠다.
심상은 그리지 못하지만, 얻은 개념을 섞을 수는 있었다.
두 눈으로 본 사일검법과 용살검의 2식, 히야르타그니르를 겹쳐낸다.
검에 맺힌 백색빛이 수십 번 점멸했다.
주변의 풍광이 뒤로 훅 밀려났다.
공간이 뚫렸다.
금강복마권이 만들어낸 반달 모양의 기파가 모조리 일그러졌다.
키이잉.
검 끝이 미약하게 떨렸다.
자선의 목에 한유성의 검이 겨눠져 있었다.
자선은 멍한 얼굴로 상황을 파악한 뒤, 아주 인자한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시주의 승리오.”
쟁천무회장이 조용해졌다.
앞선 한유성의 승리들도 파문은 일으켰지만, 이번의 경우는 파급력의 차원이 달랐다.
소림파의 자선은 신진 고수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
한유성과 소림파 자선의 대결 후.
3시간가량이 흘렀다.
연설아는 화산파의 유화윤과 함께 있었다.
기감의 탐지가 닿는 숙소의 바로 앞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기에 놔두었다.
한유성은 유의미한 성과를 얻고서, 눈을 천천히 떴다.
그 순간, 바로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몸을 일으킨 한유성의 눈에 보이는 건.
치지직! 쩌저적!
정면의 대기에 일어난 공간의 균열이었다.
총 일곱 번의 균열.
공간에서 튀어나와 땅에 발을 내디딘 흑의의 사내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이?”
“분명히 그 계집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 이렇게 되었다.”
쿵-
일곱명 중 가장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네놈, 계집의 몸에 어떤 사술을 펼쳐놓은 것이냐?”
한유성은 대답을 하지 않고 복면을 쓰고 있는 이들을 훑었다.
머리 위에 뜨는 알림창에 따르면, 5위계가 다섯, 6위계가 둘이었다.
‘모두인가.
연설아에게 손을 쓰기 위해 들이닥친 자들, 그들이 모조리 다 전이 된 게 분명했다. ‘파명전가부’의 효과로.
[NPC 6위계 무인 홍기륜]
“쯧, 뭐 잘됐다. 이놈은 결국 죽여야했으니.”
홍기륜이 턱짓을 했다.
“진법을 펼친다. 아무런 변수가 없도록.”
홍기륜은 검에 검강을 맺었다.
‘그래도 소림파의 자선을 꺾은 놈이니까.
홍기륜은 뒷말은 내뱉지 않았다.
곧 죽일 놈의 콧대를 세워 줄 필요는 없었다.
홍기륜은 한유성의 눈을 바라보았다.
세차게 흔들려도, 눈물을 뚝뚝 흘려도 모자라지 않은 상황에.
“…….”
저놈은 지나치게 고요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옅은 위화감은 무시했다.
저놈, 한유성이 여기서 살아나갈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고 여겼다.
5위계 한 명을 죽일 때 쓰기엔 과한 진법까지 펼쳤으니까.
“시작해라.”
일곱 명의 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앙에 서 있는 한유성의 목을 베어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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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성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펼쳐진 게 분명한 진법을 자세히 살폈다.
진법에 대한 건 초월자 갤러리 선배들이 말해준 바가 있었다.
진법의 용도는 말 그대로 상대방을 완벽하게 죽이려는 것.
그리고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는 의도에서 펼치기도 한다고 했다.
숙소의 지면에 내려앉아있는 진법은 자신의 발을 완전히 묶고 있었다.
진법은 마치 대못들이 길게 늘어진 것 같은 형상으로 존재감을 피력하고 있었다.
- 시궁창검성) 진법은 사냥꾼이 깔아놓는 함정이라고 할 수 있다.
- 당하연) 진법은 역이용할 수 있는 구석도 있는 검다!! 진법을 시전한 쪽은 진법 내에선 권역을 사용하는 걸 극도로 꺼리는 검다!
- 天魔) 진법에 걸렸을 때의 대처법이 뭔가. 간단하다.
- 天魔) 쫄지 말고 진법의 중심이 되는 진원(陳源)을 부수면 된다.
‘…진원을 부순다.
하나, 당장으로선 그 진원이란 것의 위치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한유성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몸을 맨 끝으로 날렸다.
촤아아아아악!
쫓아오는 게 불가능하게 하려고 횡 방향의 원거리 참격을 내뻗으며.
초월자 단말기를 잽싸게 꺼내, 영상 촬영 기능인 비소그라피카를 작동시켰다.
‘찍을 건 찍어야지.
비소그라피카의 남은 사용 가능 횟수는 2회.
하지만 이번 전투는 찍을 가치가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었다.
한유성 이외의 존재들에겐 보이지 않는 촬영 드론이 활공을 시작했다.
“…뭘 하는 거냐, 저놈은?”
6위계 홍기륜은 갑자기 몸을 뒤로 훅 빼낸 한유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동일 위계의 부하인 6위계 가진풍이 입을 열었다.
“진법의 진원을 찾기 위해서 거리를 확보한 것 같습니다.”
쯧-
홍기륜이 혀를 찼다.
“멀리 떨어지면 진원이 잘 보이기라도 한단 말이냐? 이상한 놈이로다.”
홍기륜은 검에 검강을 일으켰다.
“빨리 끝내야 한다. 쟁천무회의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홍기륜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지금 적으로 두고 있는 한유성이 두려운 게 아니라, 소란이 크게 벌어져 호북연가의 연설아를 납치하려던 걸 들키는 게 두려웠다.
그럼 자신이 충성하고 있는 백리세가에게 피해가 갈 테니까.
무림맹주인 남궁원은 오늘의 일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하북팽가의 영향력에 묵인해주고 있는 것일 뿐.
하북팽가는 일이 잘못되어도 백리세가라는 꼬리를 잘라 내버리고 책임에서 회피하겠지만.
“저놈을 죽이는데 다섯이면 충분하다. 둘은 빠져서 계집을 쫓아라.”
흑의를 입은 사내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린 둘의 발걸음이 숙소의 문 쪽으로 향했다.
직후.
바닥에 칼자국이 그려졌다.
써걱.
파육음이 거칠게 울려 퍼졌다.
뒤편 끝에 있던 한유성의 몸은 어느새 문 앞에 도달해있었다.
무언가 치솟아 올랐다.
푹! 촤아악!
양손을 모조리 잘린 둘의 비명이 입 밖으로 뱉어지기도 전에.
좌측에 있는 놈의 목에 깊이 검이 쑤셔박히고.
우측에 있는 놈의 심장이 꿰뚫렸다.
정적이 숙소를 내려앉았다.
한유성은 기감을 펼쳤다.
숙소 바깥에 있는 연설아에게 멀어져 있던 유화윤이 다시 다가와 있었다.
화산파의 출전자인 유화윤.
당신에게 할 말이 있는데.
어젯밤, 한유성은 유화윤에게 언질을 해두었다.
애가 조만간 목숨이 노려질 거니까, 한 번 위험해지고 나서 명분 생기면 도와줘. 그냥 막 도와주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한유성은 그냥 막 도와주려는 선인들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했다.
유화윤은 웃으며 그렇게 해주겠다고 대답을 했다.
- 시궁창검성) 화산파는 대체로 선하다. 대체로 말이다.
- 당하연) 반드시 선하진 않는 검다!!!
한유성도 그 정도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현 상황에서 조치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우선 신경을 끄고.
지금 눈앞에 있는 적들에게 집중할 때였다.
화산의 유화윤은 6위계.
백리세가 측에서 보낸 주요 전력으로 보낸 이들을 자신이 제대로 막고 있으면, 연설아가 죽을 일은 없다고 믿고 움직여야 했다.
한유성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호신강기를 먼저 일으키고.
백색의 검기를 검신에 흘려보냈다.
한유성은 걸음을 내디뎠다.
둘을 죽였다.
남은 건 다섯.
홍기륜은 미간을 좁혔다.
저놈이 만만치 않은 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자신이 소림파 자선과의 전투를 객석에서 목격한 이들 중 한 명이었으니까.
하지만 움직임.
순식간에 둘을 죽인 한유성의 움직임은 몇 시간 전에 보았던 것과 괴리감이 들었다.
꽈르르르릉!
한유성은 자신의 앞에 내리치는 적색 섬광을 직면했다.
‘진법의 힘인가.
다섯의 무인은 서서히 한유성을 포위하듯 전방위로 좁혀들었다.
“…진법의 힘을 극대화한 상태에서 동시에 몰아붙이면 아무런 피해 없이 죽여버릴 수 있을 거다.”
홍기륜의 명령은 계속되었다.
“천칭을 내려찍을 거다. 동시에 달려들어서 숨통을 끊어라.”
진법을 조율하는 홍기륜이 지면에 검을 내리찍었다.
“이곳이 저놈의 묫자리다.”
붉은 별들이 한유성의 몸을 휘감았다.
천칭이란 게 뭔지 절로 체감이 되었다.
몸을 움직일 시도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압박감이 정수리를 짓눌렀다.
마치 거대한 대못이 몸을 관통하고 있는 것 같은 이질적이면서도 불쾌한 감각.
한유성은 검기를 모조리 가라앉히고.
다시 쌓아나갔다.
화악-
검기를 덧씌웠다.
한없이 짙어지는 검기.
한 겹, 두 겹, 세 겹.
그리고 검 끝에서 휘돌아가는 나선.
홍기륜을 비롯한 이들의 얼굴에 이변이 일어났다.
한유성의 검을 타고 흐르는 기류는 도저히 검기라고 부를 수 없는 형상을 띄고 있었다.
검강(劍罡).
6위계 이상의 전유물.
홍기륜의 미간이 구겨졌다.
5위계였다.
몇 시간 전에 소림의 자선과 전투를 벌일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한유성은 자선과의 전투를 끝낸 직후.
6위계에 돌입했다.
근간을 담당하고 있는 중추의 양옆으로 자리 잡은 세 개의 기둥이 한유성이 6위계에 올랐음을 방증했다.
소림파 출전자 자선과의 대결 후, 또다시 이름을 알렸다는 알림창과 함께 2레벨의 상승이 이루어졌고.
최상의 상태에서 창안한 고유의 내공심법을 공전 시킨 결과였다.
갑작스러운 위계의 상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셀 수도 없이 계속 두드리고 있던 벽.
그 벽이 이제야 허물어졌을 뿐.
- 빛의검) 진법의 진원 위치를 파악하는 방법은 간단하다면 간단하다.
- 시궁창검성) 진법에 아주 강대한 공격을 먹이면 진원에서 퍼져나가는 흐름이 보일 거다.
- 天魔) 아무리 네놈이라도 곧바로 권역을 쓰는 건 역부족일 거다.
- 빛의검) ‘권역’의 창안은 6위계를 들어서는 것만큼이나 많은 시일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다.
- 마룡왕) 벨투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어디까지인가- 그걸 스스로 알 필요가 있어요오.
- 당하연) 6위계의 무인은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게 많은 검다!! 단, 스스로 알아내야 하는 검다!
한유성은 진법을 부술 수 있을 만한 검로를 떠올렸다.
용살검 중에도 있으나, 그중에서 고르기엔 아직 학습이 부족한 면이 있었다.
가장 직관적으로 떠오른 건, 반 이네르의 검술.
피엘뷔르트의 극의 중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처럼 이동의 제약이 걸려있을 때도 대기를 뒤덮을 수 있는 검법.
검강(劍罡)의 상태를 유지한 채, 검신에 검강의 기류를 압축시킨다.
아주 날카롭게.
6위계로서 할 수 있는 것.
그것에는 검기의 세밀한 조율도 포함되어 있었다.
6위계란 즉, 심상을 검로에 이끌어낼 수 있는 경지.
한유성은 지금부터 행할 무공이 펼쳐내야 할 풍광을 머릿속에 그려냈다.
공격의 방향과 범위.
거기에 걸맞은 검강이 조각되었다.
한유성의 오른팔이 움직였다.
하단부터 백색의 참격이 대각선으로 치솟아 올랐다.
곡검의 세 번째 변주.
흉천(凶天).
써걱.
공간에 무언가 그어졌다.
대각선의 백색 섬광.
진법이 뒤흔들렸다.
붉은 핏방울이 허공을 떠다녔다.
“──!”
6위계, 홍기륜의 오른팔이 검격의 방향을 따라 대기에 떠 있었다.
홍기륜의 찢어질 듯이 커진 두 눈이 정신없이 굴러다녔다.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5위계 둘의 상체에 돌이킬 수 없는 검흔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 명은 이내, 숨통이 끊어졌다.
한 명은 죽지는 않았으나,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쿵.
홍기륜의 오른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홍기륜은 기를 일으킨 왼손으로 완벽히 잘려나가 비린 단면을 움켜쥐었다.
콰아악!
지독한 고통이 뇌리를 후벼팠으나.
으드득!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무섭게 쏟아내라던 피가 멎었다.
고통보다 허탈감이 몇 배는 더 했다.
진법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 참격이었다.
‘재능.
홍기륜은 이제는 잊고 살았던 단어를 떠올렸다.
아무리 고민해도 해결이 되지 않는 말.
자신이 재능이 6위계가 한계라는 걸 인정했다.
이제 더 이상 올라갈 곳도 없이 없다는 것을.
근데 눈앞에 나타난 새파란 애송이가.
직전까지는 5위계였으며, 조금 전에 6위계로 올라온 게 분명한 애송이의 손에 오른팔이 완전히 절단되어버렸다.
‘일이…이딴 식으로.
진법의 원활한 가동 때문에 펼치지 않고 있던 권역을. 이제는 강제로 펼치지 못하게 된 꼴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권역은 일순간 막강한 힘을 끌어올리는 순수 무력 쪽에 치우쳐 있어, 몸뚱이가 멀쩡해야 운용이 가능했다.
홍기륜은 입을 열었다.
“네가 어떤 판에 끼어들어 설치고 있는지 알고 있나, 애송이.”
“그건 모르겠고.”
인벤토리에서 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10층에서 쓰러트린 기사 데칸의 검.
[유칼레타의 이빨]
“여기가 내 묫자리가 아니라는 건 알겠어.”
6위계가 되어,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한유성은 지금 처음 시도하려는 걸, 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검을 던지는 것.
투검(投劍).
투검의 체공 시간 중, 그리고 목표물을 맞히는 그 순간까지 검에 서린 검기를 유지할 수 있을 거란 확신.
‘흉천’의 일으킨 파장으로 인해, 진법의 진원이 은은한 적색 빛을 대기에 흩뿌리고 있었다.
검강을 맺은 데칸의 검을 던졌다.
쿠구구궁─!
진법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광!
숙소의 구조물과 함께.
한유성은 미약하게 짓누르고 있던 압박감이 녹듯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몸이 깃털처럼 움직였다.
뻗어나간 섬광의 끝에는.
또 다른 6위계인 가진풍의 심장이 있었다.
불가피했다.
한유성의 뒤편에 펼쳐진 자욱한 칼바람을 끝내기 위해선, 가진풍을 죽여야 했다.
가진풍의 왼손에 쥐고 있던 도(刀)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한유성은 자신의 몸뚱이에 대각선으로 그어진 상흔을 바라보았다.
그간 쌓인 고통 내성이 드디어 효과를 발휘했는지, 생각보단 참을 만했다.
회복 물약의 절반은 상흔에 들이붓고. 절반은 입에 털어 넣었다.
찰나였다.
동 위계인 6위계 간의 전투도.
한순간의 판단과 선택이 생사를 갈랐다.
한유성을 향해 달려들기 위해 발걸음을 내디딘 홍기륜의 움직임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림자가 드리웠기 때문이다.
무수하고.
강대한 그림자들이.
[NPC - 하북팽가 가주 7위계 팽무일]
[NPC - 모용세가 가주 7위계 모용진천]
[NPC - 사천당가 가주 7위계 당명허]
[NPC - 남궁세가 가주 7위계 남궁원]
[NPC - 제갈세가 가주 6위계 제갈시헌]
무너진 건물의 지붕 위에.
정파 무림의 핵심들이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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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성은 검에 흘리고 있던 검기를 증발시켰다.
그리고 가주들의 면면을 살폈다.
부서진 지붕에서 내려온 가주들은 하나같이 자신에게 무언가 대답을 요구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유성은 우두커니 서 있는 홍기륜을 바라보았다.
홍기륜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한유성은 지금이 기회라고 여겼다.
홍기륜이 어떤 말을 하기 전에 선수를 칠 기회.
“호북연가의 여식, 연설아를 해하기 위해 온 습격자들을 제압했습니다.”
오른손 검지로 엉거주춤 서 있는 홍기륜을 가리켰다.
“저자가 이 일을 주동한 대장쯤 되는 것 같습니다.”
저 새끼가 나쁜 새끼에요!
─라는 의미였다.
- 유명한거지) 무슨 일이 벌어지면 일단 판의 흐름을 잡아야 하는 거요. 윗놈들은 예의를 차려주는 걸 좋아하지.
- 유명한거지) 할 수 있겠소?
- 무녀) 하와와, 억울한 척을 좀 해야 하는 것이와요.
홍기륜이 입을 열어서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옆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한유성 소협 말이 맞아요.”
화산파 유화윤의 말에 무림맹 핵심 인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주변에 모인 이들은 이제 무림맹 관계자들뿐 아니라, 각지에서 온 무림인들도 몇몇 있었다.
무림맹의 무사들이 제지를 했지만, 이미 끌린 시선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연설아 소저가 습격당한 걸 직접 목격했어요.”
현재 가문 상황 자체가 좋지 않은 연설아나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신지 고수인 한유성의 말에 비해서, 화산파 유화윤의 말은 강한 신뢰도가 있었다.
무림맹주 남궁원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증언 고맙군.”
남궁원의 시선은 한유성을 보고 있었지만, 그가 집중하고 있는 대상은 한유성이 아니라 하북팽가의 가주, 팽무일이었다.
검증된 증인도 있군, 이러면 널 묵인해주는 건 상관없어도. 백리세가까지 그냥 넘어가 줄 수는 없게 되었다.
팽무일의 머릿속에 남궁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음이었다.
팽무일은 욕이 치밀어올랐지만, 분노의 감정을 바깥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무림맹주의 말대로, 일이 커져 버렸으니까.
남궁원은 오른손을 들어 올리더니 홍기륜의 머리 위에 올렸다.
금빛의 기류가 남궁원의 손아귀에서 번쩍였다.
홍기륜의 양쪽 무릎이 단번에 굽혀지고.
홍기륜은 강제로 무릎을 꿇는 형상이 되었다.
“끄르륵…끄륵!”
홍기륜의 입가에 거품이 물렸다.
홍기륜은 뇌가 타는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말하거라.”
남궁원의 말이 홍기륜의 귓가를 매섭게 파고들었다.
“누가 네게 이런 일을 지시했는지.”
홍기륜은 핏발이 선 눈으로 남궁원을 바라보았다.
무림맹의 주요 가문 가주들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통제되었다.
하지만 이곳, 쟁천무회장에 들어서 있는 세가나 문파들은 대부분 중원 무림의 사정에 밝은 부류들이었다.
호북연가의 여식인 연설아가 왜 갑자기 습격을 당했는지.
습격의 사주를 한 것은 어느 쪽인지 대부분이 예상하고 있었다.
연설아의 납치를 주도한 백리세가의 뒤에 하북팽가가 있다는 사실까진 모르는 이들도 다수였지만 말이다.
백리세가에 대한 충정으로, 홀로 납치를 주도했다고 말하려고 했던 홍기륜의 귓가에 남궁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홀로 주도했다는 말이 되지 않는 소리는 내뱉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사실대로 자백해준다면, 네 죽음으로 끝을 내주겠다. 네 핏줄은 살려주겠다는 말이다.”
남궁원은 검을 뽑아 들었다.
“넌 죽어야겠지만 말이다.”
홍기륜은 사고를 했다.
“…백리세가의 차남, 백리휘가 명령을 내렸습니다.”
“알겠다.”
남궁원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홍기륜은 남궁원이 자신의 말을 듣기도 전에 이미 진실을 알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남궁원은 자신과 홍기륜을 빙 둘러 있는 핵심 가문 가주들을 바라보았다.
“내 선택에 불만이 있는 자가 있다면 의견을 내시오.”
모용세가의 모용진천이 입을 열었다.
“이놈을 바로 죽이는 건 불만이 없는데 말이오. 백리세가에 대한 처분은 어떻게 할 생각이시오?”
“적당히 처분을 내릴 생각이오. 명령을 내렸다는 당사자에게.”
남궁원의 말에 모용진천이 입꼬리를 올렸다.
“호오, 맹주께서 다소 관대해지셨군.”
“이 신성한 쟁천무회를 더럽힌 것은 중죄이나, 장남의 죽음은 백리세가에 있어 큰 악재이니 최소한의 처벌로 끝낼 생각이오.”
모용진천을 제외하곤 맹주 남궁원을 관대하다고 여기는 가주는 없었다.
당가의 가주, 당명허도 그 중 하나였다.
‘이번 일로 백리세가의 입지는 호북연가보다도 줄어들어 버리겠군.
백리세가가 본인들이 계획했던 판대로 실행에 옮기는 걸 성공했다면 호북연가를 그대로 집어삼켰을 수도 있겠으나, 계획이 완전히 실패하고.
이런 식으로 무림의 주목을 받은 이상, 백리세가의 부흥은 향후 몇십 년간은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평생.
“백리세가의 가주 백리태경과 둘째인 백리휘를 데리고 오도록. 저항한다면 무력을 동원해도 좋다.”
무림맹주 남궁원이 자신의 오른팔인 6위계 무인 회백에게 명령했다.
회백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남궁원의 시선은 다시 한유성으로 향했다.
“상처가 적잖이 깊군.”
상체에 직선으로 난 상처를 바라본 남궁원이 뒤를 바라보았다.
“천의(天醫), 이자의 상처를 치유해주시오.”
“알겠습니다.”
천의라 불린 긴 머리카락의 여성은 대답하며 앞으로 나섰다.
여성의 손이 초록빛으로 휘감겼다.
실처럼 뻗어 나간 기류가 벌어져 있는 상흔을 꿰맸다.
“사흘이면 멀쩡해질 거예요.”
한유성은 ‘천의’라는 별호가 썩 과장된 게 아닐까 생각을 했었다.
근데 저 말이 사실이라면 과장된 것 같지는 않았다.
참을 만했으나 분명 묵직하게 올라왔던 통증도 확연히 휘발되었기 때문이다.
모용진천이 한유성을 보며 말했다.
“소림파 자선과의 대전 후 6위계를 달성한 거냐?”
한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모용진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거 참, 아주 난 놈이구나. 내 제자였다면 썩 예뻐해 주었을 텐데 말이야.”
모용진천의 말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공간이 소란스러워졌다.
백리세가의 가주와 둘째 아들이 다가온 것이다.
백리태경과 백리휘가 굳은 얼굴로 다가와 있었다.
둘은 본인들의 무력 수단인 수하들 열댓 명을 데리고 왔지만, 이들을 운용할 수 있는 상황은 오지 않으리란 걸 알아차렸다.
“백리태경, 그대가 쟁천무회의 개시 전날 인사를 건넸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말이네.”
백리태경은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떨고 있는 홍기륜을 보며 미간을 와락 구겼다.
“이자가 이미 자백을 했네, 자네의 아들 백리휘가 주도해서 벌인 일이라고. 맞나?”
백리휘는 고개를 숙였다.
5위계.
비슷한 나이대에선 어딜 가도 무시 받지 않던 고강한 위계였지만, 노괴들이 한데 모여 있는 이곳에선 애송이에 불과했다.
“저, 저는…!”
“물론, 자네는 그러지 않았다고 말을 하겠다만. 호북연가와 백리세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모르는 자는 이 무림에 몇 없으니 말일세.”
백리태경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남궁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이 어떤 책임을 져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소?”
남궁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을 했다.
“팔 하나 정도를 자르고 기둥을 폐해야겠지.”
기둥을 폐한다.
그건 즉, 한 무인이 쌓아 올린 기존의 내공을 완전히 상실하고. 앞으로도 무인으로서 살아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뜻했다.
백리휘의 무인으로서의 생명력을 완전히 끊어버리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백리태경, 그대도 잘 알 것이오. 세가의 일원이 잘못한 것은 세가 전체의 잘못이라는 것을.”
백리태경은 이어지는 남궁원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태경, 그대가 운용하는 주요 병력 중 하나인 백리대를 무림맹 소속으로 옮기도록 하지.”
백리태경은 끌어 오르는 살의를 애써 감추었다.
백리대의 일원을 죽여버리든, 완전한 무림맹의 무력 수단으로 쓰든 무림맹주의 마음대로 하겠다는 선포였다.
‘…말 그대로, 멸문보다는 나은 징벌이군.
남궁원은 앞서 말한 것 중, 그 무엇도 무를 생각이 없었다.
“본 맹주가 아주 관대한 처우를 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시헌은 속으로 혀를 찼다.
남궁원의 냉혹한 판단에 치를 떨었다.
‘백리세가가 자신들의 의도대로, 조용히 호북연가의 여식을 납치하는 데 성공했더라면…아무런 손해도 입지 않고 세가의 성장을 이뤄냈을 텐데.
계획에 실패함으로써 받게 된 대가가 너무나도 컸다.
실패할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보고 있었기에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남궁원은 자신에게 호북연가의 여식이 있는 쪽에 진법이 펼쳐지는 게 확인되어도 일단은 방관하라고 명령했다.
남궁원의 입장에서 별 상관없는 일이기에 그랬겠지.
지금은 무림맹이 주관하는 ‘쟁천무회’가 공개적으로 더럽혀졌기에 나선 것이다.
그마저도 남궁원의 사사로운 유희에 가까워 보였지만.
남궁원은 이번엔 멍하니 서 있는 연설아를 바라보았다.
“호북연가의 연설아라고 했나.”
무림맹주의 말에 연설아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네 오라비가 벌인 살육은 정말인지 아닌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반면, 널 죽이려고 한 이들의 죄는 명명백백하다.”
남궁원은 갑자기 검의 방향을 바꾸더니, 손잡이를 연설아가 잡을 수 있도록 검을 내밀었다.
“네가 저 백리휘의 팔을 베어도 되는 상황이란 말이다.”
연설아가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자, 맹주의 시선이 한유성을 향했다.
“그게 아니라면, 한유성 소협이라고 했나. 소협이 저놈의 팔을 잘라버려도 된다.”
한유성은 양손을 흔들며 거절을 했다.
“음, 제가 백리휘의 팔까지 자르면 너무 미움을 사지 않겠습니까. 좀 사리는 게 좋을 것 같거든요.”
“크하하하하하하!”
한유성의 말에 맹주 남궁원이 호탕하게 웃음을 토해냈다.
“그래, 그 말이 맞군. 내가 강호 신성의 손을 너무 쉽게 더럽히려고 했구나.”
남궁원이 옆에 있는 회백에게 검을 내밀었다.
“네가 행해라.”
“예.”
망설임 없이 대답한 회백은 백리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써걱!
“크아아아악! 하으아아악!!”
백리휘의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우, 안 볼란다.
한유성은 그 장면을 눈에 담지 않고 있었다.
자신도 썩 참혹한 광경을 만들어냈지만, 남이 만들어내는 참혹함까진 보고 싶지 않았다.
백색의 맑은 하늘.
비명과 파육음과 피를 마주하는 대신,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하늘에서 무언가 어긋나는 순간을 가장 먼저 목격했다.
압력.
한유성은 코 밑을 닦았다.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몸이 무형의 기운에 짓눌렸다.
직전까지 겪었던 진법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중압감이었다.
쾅!
오른쪽 무릎이 강제로 꿇렸다.
한유성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연설아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천의가 펼친 방벽 뒤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는 연설아가 보였다.
살아있으면 됐다.
남궁원의 몸에서 짙은 살기가 뿜어졌다.
남궁원이 입을 열었다.
“천마….”
천마요?
한유성은 궁금증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전신에 두른 호신강기를 더 견고하게 한 뒤에.
“…….”
한 여성이 맑은 하늘 위에 서 있었다.
마치 신선처럼 자연스럽게.
[NPC 천마(天魔) 8위계]
귓가에 나지막한 미성이 울렸다.
=몸을 가누는 데 성공했네, 아주 기특하구나.=
‘아, 씨발.
한유성은 고개를 다시 숙였다.
이런 직접적인 관심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8위계.
정확히 말하면, 7위계 이상의 존재들이 가진 위험성에 대해 초월갤 선배들에게 15층 진입 당일 밤 들은 바 있었다.
ㄴ 대마법사) 성좌들 보고 우리가 답도 없는 겁쟁이들이라고 놀려댔지만, 그건 대부분이 8위계라서가 아니야. 8위계씩이나 되어놓고 포기를 해서 비난을 하는 거지.
ㄴ 天魔) 8위계면 자신보다 하위 위계에 있는 이들이 인간이 아닌, 개미 정도로 보일 때다.
ㄴ 시궁창검성) 실제로도 그렇다.
ㄴ 개척자) 손을 대지 않고 죽이려면 죽일 수 있는 수준이지.
ㄴ 개척자) 사실 7위계도 본심을 다하면 그래. 6위계 이상부터는 단순한 숫자 단위 하나 차이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죽어.
ㄴ 수왕) 친구!!! 너도 5위계 이하인 놈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는 거다!! 6위계가 되면!!
ㄴ 엘프다) 넌 5위계 때도 6위계급 괴물들 몇 번 이겨봤다고? 그건 네놈이라서 그런 거야. 보통은 안 그래.
ㄴ 빛의검) 그러니까, 각을 잘 재야 한다는 말이다. 제대로 된 괴물들을 만났을 때 살아남으려면.
ㄴ 절대군주) 대뜸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고 죽게 되는…그런 웃기지도 않는 돌연사를 겪는 일은 없어야겠지만. 네가 오르고 있는 곳은 판데모니엄이니까 말이다.
ㄴ 밀실론자) 판데ㅋㅋㅋ모닠ㅋㅋ엄ㅋㅋ엄엄ㅋㅋㅋ 이 세상은 거대한 밀실로 이루어짐
=네 덕분에 시간을 죽일 수가 있었단다.=
‘시발….
역시, 그 각이라는 게 좀 많이 잘못 재어진 것 같다.
한유성은 머릿속에 이어지는 천마의 전음을 들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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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
천마는 한유성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파 무림을 내려다보고 있는 셈이었다.
“당신이 왜 여기까지 당도했는지, 그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겠소.”
남궁원이 끌어올린 기운을 유지한 채 하늘에 서 있는 천마에게 말을 했다.
한유성은 천마의 기세를 자세히 살폈다.
눈이 갈 수밖에 없는 기세였다.
양옆에 있는 존재들의 기세를 홀로 억누르고 있었으니.
천마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요컨대, 감히 자신을 놔두고서 하늘을 논하느냐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말이 개소리에 가깝다는 건, 무림맹의 일원들 모두 알고 있었다.
쟁천무회라는 이름은 전대 천마가 있을 때도 사용했던 유서 깊은 이름이었다.
남궁원은 뭐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천마신교에는 법칙이 존재한다.
천마는 당대의 천마를 꺾고 탄생한다.
그 상황이 아들이 아버지를 죽여야 할 상황이든.
제자가 스승을 죽여야 할 상황이든.
전대 천마의 자식은 우둔하다고 했다.
그래서 제자가 스승을 죽여버렸다는 비화가 무림까지 도달했다.
전대 천마 장강은 역대 천마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평가받던 인물이었다.
그런 장강을 죽이고 당대의 천마가 된 제자.
그런 천마가 약할 리는 없었다.
전대 천마 청강이 전대 무림맹주에게 쓴 패배를 안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중원 무림 역사에서 흑역사로 점철된 정마대전에 대해 언급을 함에도 무림맹의 일원들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게 약육강식이었다.
오히려, 고위계의 세계라서 더 심한 부분이 있었다.
상대방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전쟁 선포와 별반 남궁원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남궁원의 입이 벌어졌다.
“정마대전을 다시 벌이기라도 하겠다는 것이오?”
한유성의 눈에는 여유롭게 계속 하늘에 떠 있는 천마의 모습이 보였다.
일순간, 천마가 하늘에서 내뿜는 압력.
말 그대로의 중압감이 짙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오, 이런 괴물 같은.
한유성은 마력을 운용하는 것으로 겨우 몸을 가눌 수가 있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남궁원을 비롯한 무림맹 주요 일원들은 천마가 내뿜는 엄청난 기세에 기세로 대해 맞대응할 뿐, 더 이상 말을 붙이지는 못했다.
또다시 천마의 목소리가 한유성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나날이 성장을 하는 게 보이더구나, 그게 아주 신기했단다. =
천마는 마치 쟁천무회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한유성에게 말을 했다.
전음.
한유성도 전음의 원리를 초월자 갤러리 선배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전음의 첫 시도를 갑자기 나타난 천마에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계속 행해지는 전음을 계속 잠자코 듣기만 했다.
= 마지막 전투도 그렇지, 아주 훌륭한 판단이었다. =
건물 내부.
그것도 진법이 쳐진 상태에서 행해진 전투가 천마의 눈에는 다 보였던 모양이었다.
하긴, 8위계 쯤 할 수 있는 것보다 되면 못하는 걸 찾는 게 더 쉬
= 너에 대해 좀 궁금해졌으니, 나중에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구나. =
‘저는 별로 안 그러고 싶은데요.
한유성은 고개를 살짝 들어 저 멀리 보이는 천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 수 있었다.
한유성은 몸을 온전히 가눌 수 있게 된 게 천마가 내뻗고 있던 힘을 거두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천마는 그렇게 도저히 천마가 하지 않을 것 같은 말을 내뱉고는 나타났을 때와 같이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졌다.
“…….”
천마가 사라지고.
쟁천무회장에는 한참 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나간 태풍이 남긴 후폭풍이 너무 컸다.
한유성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붙잡고 물어볼 사람을 한 명은 찾아냈다.
한유성은 굳은 얼굴로 서있는 사내, 소림파 자선에게 전음을 보냈다.
= 물어볼 게 있는데. 저 천마가 이전에도 이런 식으로 나타난 적이 있었나? =
자선은 고개를 돌려 한유성을 바라보았다.
= 시주였군. =
자선의 입가에 인자한 미소가 걸렸다.
= 이런 식으로 나타난 적은 없었소이다. 근 15년간은…. 갑자기 나타나서 사실상 선전포고라고 할 만한 말을 해버렸으니, 정파의 입장에선 청천벽력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오. =
자선의 전음은 이어졌다.
= 아마, 쟁천무회는 이대로 종료가 되지 않을까 싶소. =
= 어차피 시주와 유화윤 소저의 결승전만이 남은 상황이니 말이오. =
끝이 난 줄 알았던 자선의 목소리는 한 번 더 한유성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이 쟁천무회가 어떤 방식으로든 끝이 나면, 시주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많을 것이오. 젊은 6위계 고수라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 말이오. 어디서 폐관 수련이라도 하다가 나오는 게 좋을 것이오. =
한유성은 자선의 말이 맞다는 걸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이번 쟁천무회는 오늘을 기점으로 종료한다.”
남궁원의 말투는 그 누구의 반론도 듣지 않겠다는 듯 단호했다.
반론을 뱉을 상황도 아니었다.
“우승자는…어차피 유화윤이나 이 한유성이. 둘 중 하나일 테니, 공동 우승으로 처리한다.”
불만을 내뱉는 사람은 없었다.
하북팽가 일원은 이미 이번 일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었다.
그리고 백리세가는 방금 막 세가의 존망이 위태로워진 상황이었다.
“고로, 이번에는 둘의 소원을 모두 행해야겠지.”
남궁원은 한유성을 향해 턱짓을 했다.
“근 5년간 적용시킬 규율을 말해라.”
한유성은 고개를 숙였다.
“아시다시피, 제가 대리인이라 호북연가 장녀의 말을 좀 들어봐야겠습니다.”
한유성의 능청스러운 말에 남궁원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야겠지. 이번 일이 끝나면 무림맹에 소속될 생각은 없나?"
"고민을 좀 해보겠습니다."
한유성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 거라 생각했다.
이걸로 연설아의 안전이 확보된 게 되면 15층은 클리어되고. 층계 대기실에 소환될 확률이 다분했으니.
연설아에게 다가간 한유성은 입을 열었다.
"정파 가문 전부 호북연가에게 불리한 일을 행할 수 없다. 그 일은 침략이나 협잡질 등을 모두 포함한다…뭐 이 정도 규율이면 되는 건가?"
연설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러면 될 것 같아요."
연설아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설아는 상황이 진행되는 속도를 머릿속으로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연설아는 멀뚱멀뚱 서있었다.
"뭐해?"
"넷?"
"직접 말하고 와."
한유성은 연설아에게 직접 규율을 세우라고 말했다.
연설아는 일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맹주 남궁원을 향해 걸어갔다.
본인이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라는 걸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5년이란 시간은 길고도 짧았다.
5년 동안 개판이 된 가문을 완전히 끌어 올리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었다.
그런 중대한 일의 시작을 알리는 일은 연설아가 직접 나서야만 했다.
영상 촬영 기능 비소그라피카가 종료되었다는 알림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다음 눈앞에 알림창이 하나 더 떠올랐다.
[15층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셨습니다.]
남궁원 무림맹주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규율에 대한 말을 제대로 한 모양이었다.
그래, 그렇게 어떻게든 살길을 계속 모색해야지.
['플레이어 - 한유성' 15층 스테이지 점수를 집계합니다.]
기존의 15층 랭킹 점수 창이 나타났다.
1위 - 연합장 : 1,127점
2위 - 자명천녀 : 1,101점
3위 - 흑성 : 895점
4위 - 추적중 : 842점
[점수 집계가 완료되었습니다.]
[한유성 : 5,402점]
다른 플레이어들의 점수가 드디어 네자릿수를 돌파한 게 보였다.
2위의 ‘자명천녀’는 14층에서 처음 한유성의 눈에 들어왔다.
14층에선 4위.
초월갤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연합장과 엇비슷한 무력 수준을 평가받는 탑의 정점 중 한 명이라고 했다.
무림 지구 출신, 하드 난이도 등반자.
자명천녀가 그간 순위권 밖에 있어서 한유성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반드시 죽여야 하는 몬스터는 제외하고. 최대한 불살 루트를 지향하는 정신 나간 플레이 스타일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와 자주 함께 다니는 광마(狂魔)라는 존재가 있는데.
광마는 괴상한 면이 있어서 보상이 있을 때도 순위 등록 자체를 안 했다고 한다.
15층 진입 전까지는 뭐 그런 인간이 있나, 싶었는데.
중원 무림이란 판을 겪으니 충분히 그런 종류의 인간이 있을 법했다.
한유성의 15층 스테이지의 점수는 13층이나 14층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한유성은 소림파 자선의 말대로 자신에게 쏘아지는 시선이 늘어난 게 느껴졌다.
당장 옆에 있는 사천당가의 가주, 당명허가 갑자기 기웃거렸다.
“소협이 하고 있는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면 사천당가에 한 번 들리게.”
옆에 있는 모용세가 가주 모용진천도 히죽 웃으며 말했다.
“6위계가 되었다곤 하나…6위계 둘과 5위계들을 혼자 저렇게 만들다니. 아주 대단하다! 모용 가에 들려라. 대련은 실컷 해주지.”
아주 저돌적이었다.
[5분 후에 자동으로 '16층 층계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차피 곧 16층 층계 대기실로 이동이었다.
오대세가의 가주들 뿐 아니라, 각지의 가주들이 다가왔다.
멀리서나마 한유성이 펼쳐놓은 살풍경을 본 이들이 접근한 것이다.
“자네, 낭인인가?”
“소, 소속된 곳이 없으면 우리 가문에 들어와 보는 건 어떤가?”
한유성은 앞을 가로막은 이들을 보며 대충 손을 휘적 거렸다.
“의원실 있죠? 피곤해서 일단 좀 쉬어야겠습니다.”
무림계도 이계의 경우처럼 단발적인 경험으로 끝날 확률은 극히 낮았다.
‘천마가 어떻게든 날 찾으려고 할 것 같은데….
한유성은 다음 층계도 무림계라면 상당히 귀찮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다음에 소환될 경우를 대비해서, 뿅 하고 사라지는 건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게 나았다. 홀로 의원실 구석에 틀어박힌 채 16층 층계 대기실의 소환을 맞이했다.
***
16층 층계 대기실에 소환되자마자 눈앞을 뒤덮는 건 무수한 알림창이었다.
우선, 가장 먼저 뜬 랭킹 점수 등록은 거절을 택했다.
그다음 알림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무림 세계에 이름을 널리 알렸습니다.]
[특수 경험치 보유 조건이 해금되었습니다.]
[더 많은 승리를! 더 많은 명예를!]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Lv.70 → Lv.73]
레벨을 오르기 전에 레벨이 70이었던 이유는.
6위계 돌입 당시에 갑자기 여섯 단계의 레벨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알림창과 함께.
“여로(旅路)에 올라섰다고 했나….”
여로에 올랐다.
아마도 6위계에 오른 것을 뜻하는 것 같았다.
한유성은 질문 거리들을 정리하며 초월자 갤러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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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성은 초월자 갤러리에 글을 썼다.
제목 : 16층 층계 대기실임. 6위계 달성했고.
- 첨부한 영상 보면 알 것.
전투부터 시작해서 그 상황 마무리까지.
첨부파일 : 123112903128309.mkv
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키야, 미친놈 미친놈. 기어이 6위계를 달성한 것인가??
ㄴ 그냥 미친놈이면 달성 못 하지 ㅇㅇ 제대로 미쳐야 가능함.
ㄴ 20층이 되기도 전에 ㄹㅇ
ㄴ 뭐임?? 전투 영상임? 키야악 개꿀이고고고곡-
ㄴ 수왕) 갸르꾸구울-!! 점수, 얼마 받음?
ㄴ ㄹㅇ 점수 등록은 안 해도 점수는 궁금한 것.
ㄴ 얼음여왕) 꽁꽁꽁! 착-석! 재생!
ㄴ 자아아아, 관람 드가자ㅏㅏㅏ
ㄴ 마룡왕) 벨투이- 3, 2, 1, 0. 재새애앵이예요오.
ㄴ 당하연) 이게 무(武)인 검다!!! 하하핫!!
잠시 후부터 달린 댓글들은 영상에 대한 반응이었다.
ㄴ 빛의검) 처음에 신속하게 둘을 죽인 것은 아주 훌륭한 판단이었다.
ㄴ 天魔) 근데 이 시점에서 이미 6위계에 오른 거 아니냐?
한유성은 천마 선배가 용케도 알아차렸다고 생각했다.
ㄴ ㅇㅇ*) 맞음.
ㄴ 여윽시 천마고. 어떻게 알아차린 것??
ㄴ 天魔) 검기의 기파가 더 안정된 게 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진법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벨의 검법인 피엘뷔르트의 한 수를 쓰려고 할 때였다.
검기가 검강으로 변하는 그 순간이 제대로 담겨 있었다.
ㄴ 당하연) 미미(美味)……!! 검에 맺혀있는 검기가 더 강맹해지는 광경…! 아주 아름다운 검다아!
ㄴ 빛의검) 조각을 잘했구나.
ㄴ 대마법사) 이야, 영롱하다. 영롱해. 근데 마법은 진짜 안 써먹는구나?? 좀 서운한데….
대마법사 선배의 댓글을 본 한유성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기껏 친절하게 개량한 마법을 안 써먹고 있으니 서운할 만했다.
근데 써먹지만 않은 거지, 마법 수련은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 실전에 도입시킬 자신은 있었다.
ㄴ ㅇㅇ*) ㅈㅅ ㅈㅅ 무림계에선 무공을 써야 한다는 고집을 좀 부렸음.
ㄴ 유명한거지) 뭐, 그 정도면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요.
ㄴ 당하연) 깎!! 맞슴다!! 그게 낭만인 검다!
낭만인 건 모르겠고. 무공만을 고집한 효과는 톡톡히 있었다.
결과적으로 봐도, 무공 쓰는 것에 집중한 덕분에 유의미한 성취를 끌어내 끝에는 6위계 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ㄴ 존나 시원하게 촤아아악 썰어버리네.
ㄴ ㄹㅇ 타격감 오지게 느껴짐 ㅋㅋㅋㅋㅋㅋㅋ
다음 장면은 한유성의 검격에 무너진 지붕 위로 가주들이 들이닥치는 모습이었다.
ㄴ 압박감 오지네.
ㄴ 압박감도 오지고 저분들 얼굴도 좀 빡세네 ㅇㅇ
ㄴ 내가 무림계 진행할 때는 이런 노괴들 면상은 거의 80층계 대에서나 봤는데, 흑흑흑….
ㄴ 유명한거지) 그래도 노괴들한테 도움을 받은 일은 없었던 것 같구려. 잘했소. 괜히 피곤한 일이 벌어지곤 하지.
그리고 상황을 정리하기 위한 한유성과 무림맹주의 대화가 계속되던 무렵.
아무런 전조도 없이 하늘에서 천마가 도래하는 장면이 튀어나왔다.
ㄴ 어우 존나 놀랐네. 뭔데 갑자기 나타남? ㅋㅋㅋㅋㅋㅋㅋ
ㄴ 천마냐???
ㄴ 저딴 식으로 무식한 기 흩뿌리면서 등장하는 연놈들은 천마 아니면 혈마잖냐.
ㄴ ㅇㅇ*) 천마.
ㄴ 그런 것 같더라 ㅇㅇ
직후.
천마가 갑자기 무림맹주를 비롯한 정파의 수뇌들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갑자기 등장한 존재가 갑자기 벌인 미친 돌발행동에 무수한 댓글이 달렸다.
ㄴ 수왕) 저 여자, 제정신이 아니다!!!! 엮이지 마라, 친구약!!
ㄴ 여윽시 천마란 새끼들은 정상이 없음 ㅇㅇ
ㄴ 동의함. 자연의 이치같은 것임.
ㄴ 天魔) ?
가만히 있다가 뒤통수를 처맞은 천마 선배는 ? 하나를 치는 것으로 평정을 유지했는지 더 이상 어그로에 걸려들지 않았다.
대신, 한유성에게 질문을 던졌다.
ㄴ 天魔) 저 자가 개인적으로 네게 한 말은 없었나? 전음이라든가 말이다.
“어?”
어떻게 아는 거야, 그걸.
한유성은 천마의 정확한 예상에 그렇게 생각을 하며 답글을 달았다.
ㄴ ㅇㅇ*) 어떻게 알았음. 전음으로 막 떠들었어.
ㄴ 저 천마도 해봤겠지, 비슷한 짓을.
ㄴ 天魔) 큼, 난 이런 상황에선 직접 말을 했을 터다. 전음을 하는 게 아니라.
ㄴ 창왕) ㄷㄷㄷ 그럼 자네와 대화한 셈이 되는 상대가 정파 측이라면 무려 천마신교 교주와 내통하는 작자로 오해를 받을지도 모르는데, 역시 천마다운 극악한 인성을 가졌구만.
ㄴ 유명한거지) …형씨, 조금만 더 긁으면 현실에서 처맞겠어. 감당할 수 있겠소?
ㄴ 창왕) 크아아아!! 해볼 테면 해보라고 할 뿐이다. 신의 경지에 이른 창술이란 게 뭔지 보여주마.
ㄴ 하긴, 천마가 정배이긴 해도 창왕도 무시할 수 없지. 일단 중원 무림의 절반이 날아갈 것임 ㅇㅇ 대피할 곳 구함.
ㄴ 당하연) 그런 일이 생긴다면…! 식량을 최대한 비축한 뒤에 봉문을 할 검다!! 흐갹!
한유성은 일단 계속 펼쳐지는 혼란의 댓글들을 뒤로하고.
15층 층계의 천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축약해서 댓글을 달았다.
ㄴ ㅇㅇ*) 걍 그 대회, 쟁천무회가 진행되는 중에 내가 계속 성장하는 걸 봤다…그런 식으로 전음을 보내왔음. 나중에 또 봤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고.
ㄴ ?? 뭔 천마가 플러팅을 하고 앉았음?
ㄴ ㄹㅇ 뭐 사지를 분질러버리겠다 그런 거 보내야 하는 거 아니냐.
ㄴ 대마법사) 음, 납치 같은 걸 당하지 않게 조심해야겠네.
ㄴ ㅇㅇ*) ? 납치요?
ㄴ 당하연) 8위계에 천마…! 그리고 시간상 전대 천마라면 꽤나 강했었는데! 그 천마를 죽이고 당대 천마에 올라선 것임다! 그렇다면 당대 천마도 꽤 강하다는 뜻인 검다!
고로, 정신이 나간 데다 꽤 강한 존재인 것 같으니 조심하란 뜻이었다.
한유성은 또다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될 것 같은데.”
ㄴ 마룡왕) 벨투이- 등반자가 내가 있는 세계에 있었다면 잡아서 레어에 가둬놓았을 거예요오. 헤헤.
마룡왕 선배의 댓글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 같아서 더 소름이 돋았다.
슬슬 초월자 갤러리를 종료하려던 한유성은 아직 질문 거리가 하나 남았다는 걸 떠올려냈다.
ㄴ ㅇㅇ*) 6위계에 진입하자마자 여로에 들어섰다는 알림창이 뜨던데. 뭔 말임.
ㄴ 당하연) 여로(旅路)!! 아주 험난한 길에 들어섰다는 검다!
ㄴ 개척자) 6위계에 들어섰다는 걸 빙 둘러서 말하는 거다. 끝도 없는 여행길에 들어섰다는 뜻이자.
ㄴ 절대군주) 인간이란 범주와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
15층 클리어 후.
두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퀘스트 형이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던전, 던전, 던전.
덕분에 한유성은 두 층계에서 성좌들에 대한 차단을 풀고 진행을 하여, 아이템을 다량 받아먹을 수 있었다.
마력의 상승이 중요했기에, 마력 증가 효과를 가진 영약들을 넙죽 받아먹었다.
현재 위치는 20층 층계 대기실.
4단계의 층계를 오를 동안 상승한 레벨은 9.
현재 레벨은 82.
이름 : 한유성
종족 : 인간
Lv.82
힘 : 644
민첩 : 645
체력 : 651
마나 : 597
스킬 : 통각 억제 Lv.20 평정심 Lv.20 엄폐 Lv.20 위기 감지 Lv.20
시야 확장 Lv.20 집중 강화 Lv.20 투사의 움직임 Lv.20
마력 신체 강화 Lv.20 둠브링어 Lv.20 정신 방벽 Lv.20
궤적 간파 Lv.20 어둠 속성 공격 저항력 Lv.20
상태창에 기입되는 스킬 레벨의 최대치는 20.
숙련도가 올라가도 그 이상은 표기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6위계에 들어선 후, 가장 명확해진 생각은 레벨보다는 위계가 더 중요하단 것이었다.
레벨은 육체를 차곡차곡 성장하게 해주는 탑 한정의 시스템인 반면, 위계는 탑 외적으로도 적용되는 세계의 진리 중 하나였다.
단순한 힘은 위계를 쌓으며 제련한 고강한 검기 앞에서 의미가 없어진다.
‘하지만 결국은 레벨업도 중요하지.
그 위계를 쌓을 수 있는 매개체는 결국 건강한 육체다.
그리고 탑에서 쌓아 올린 레벨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육신의 힘과 마력은 탑의 종결 시키고 본래 세계로 귀환한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선배들이 말했으니까.
ㄴ 개척자) 레벨이든 위계든, 이젠 난 네 성장 속도에 대해선 이야기 할 게 없네. 하드 난이도 38층에서 6위계에 도달한 내가 판데모니엄에 15층에 6위계에 도달한 네게 무슨 말을 하겠냐.
ㄴ 해석 : 이 새끼가 얼마나 더 괴물이 될지 나는 예상이 안 되니 더 이상의 예측을 포기하겠다. ㅇㅇ
ㄴ 개척자) 이야, 독심술사냐. 맞다.
한유성은 초월갤 하드 난이도 선배 중에 자신과 같은 아예 노베이스 출신은 개척자 선배 한 명이었기에, 은연중에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나, 개척자 선배는 15층에서 6위계를 달성한 한유성에게 조금 거리감이 생겨버린 모양이었다.
ㄴ ㅇㅇ*) 6위계라고 권역이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구만? 구상 자체가 잘 안되네. 이거.
ㄴ 빛의검) 그건 당연한 일이다. 6위계에서 경지가 멈춰버리는 자들의 특징이 권역을 구상해내지 못해서니까.
ㄴ 대마법사) 마법은 멀쩡히 쓰면서 권역은 못 만들어내는 애들도 있더라고.
ㄴ 天魔) 권역을 창안하는 데만 5, 6년이 걸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나마 유의미하게 촉진되는 탑 내에서도 2년은 기본으로 두고 들어가야 하지.
ㄴ 天魔) 그리고 천재인 본좌가 보기엔 네놈은 그 이상으로 걸릴 수도 있다.
ㄴ ㅇㅇ*) ?? 왜.
ㄴ 天魔) 그냥 천재라면 남들보다 단축된 1년 반 정도 걸리겠지만, 천외천의 천재라면 탑이라도 2년도 넘어선 3년이 걸릴 수도 있다.
ㄴ 天魔) 바로 본좌가 그랬지. 본좌는 탑에 들어오기 전에 겪은 일이다만.
ㄴ 天魔) 그릇이 커서 ‘권역’이 ‘고유영역’ 수준으로 창안되어버리는 거다. 마치, 법칙처럼 말이다.
결론적으로 자신을 천외천의 천재라고 말한 천마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ㄴ 天魔) 하지만 그마저도 세계의 이치다. 조급해하지 마라.
조급함은 일단 내려두긴 했다.
두달 간 조금도 진척이 없으니, 내려놓을 만해서 내려놓은 거지만.
다음날.
화악-
한유성은 20층 스테이지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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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층.
20층은 내게도 의미가 컸다.
탑의 5분에 1에 도달했다는 그 수치 자체로서의 의미.
그리고 일단 해당 층계를 끝으로 성좌들을 원천 차단하려고 정해놓은 층계였다.
어떤 변수가 생기면 차단을 풀게 될 수도 있지만.
유종의 미라도 거두라는 걸까.
퀘스트 형 스테이지가 걸리면 마지막이고 뭐고 그냥 차단한 상태로 내버려 두려고 했었는데.
『판데모니엄 난이도 20층은 던전 형입니다.』
이번 층계도 던전 형이었다.
『해당 던전, '타오르는 관'을 클리어하십시오.』
던전 이름 한 번 무식하게 음산하구만.
왜 던전 이름이 타오르는 관인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바닥에서 치솟아 올랐다.
난 호신강기를 펼쳐, 치고 올라오는 불꽃과 열기를 막아냈다.
일단 이 던전의 구조부터 파악해야 했다.
기감을 펼쳤지만, 당장 알 수 있는 건 아주 좁디좁은 공간에 처박혀있다는 것밖에 없었다.
기감은 투시 같은 능력이 아니다.
기를 구조물이나 풍광에 흘려보내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하고.
그 기에 반응하는 생명체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뿐이다.
그것 또한 충분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투시라고 할 정도의 정확성은 아니라는 뜻이다.
기감에 집중을 하지 않으면 단번에 끝이 나기도 하고.
지금 손에 쥔 검은 13층 달성 보상으로 얻은 아이템.
[연사비광(燕絲飛光)]
무림계 층계 달성 아이템답게 중원 무림의 검이었다.
난 [연사비광]을 [문둠 엑스팅귀트]와 번갈아 사용하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검에 검강을 일으킨 상태로 폐쇄된 던전의 벽면을 내리쳤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내부에서 부술 수 없는. 말 그대로 안에서 공략해야만 하는 던전으로 보였다.
성좌 차단을 풀기 전에. 먼저 초월갤 선배들에게 질문을 먼저 던지기로 했다.
제목 : 뭐 이런 데 갇힌 적 있는 선배 있음?
작성자 : ㅇㅇ*
던전 이름은 타오르는 관…일단 기감으로 살펴본 것만 말하자면 직선의 공간임. 바닥에서는 열기랑 불길 좀 치솟음.
호신강기 없었으면 바로 불에 전신이 타들어 갔겠는데.
빨리 탈출해야겠어.
ㄴ 폐쇄형에 특수 구조물이구나 ㅇㅇ 빨리 탈출해야 하는 게 맞다.
ㄴ 대마법사) 음, 불꽃의 색이 어떻지?
그야 당연히 붉은…색인 줄 알고 그렇게 댓글을 쓰려던 순간, 내 발밑에 일렁거리는 검은 불꽃을 확인했다.
난 두둥실 떠 있는 자판을 빠르게 두드렸다.
ㄴ ㅇㅇ*) 검은색인데?
ㄴ 대마법사) 흑염(黑炎)이네…골치가 좀 아픈 종류의 불꽃인데.
ㄴ ㅇㅇ*) 왜.
ㄴ 얼음여왕) 꽁! 흑염은 상성인 물이나 얼음이 잘 통하지 않아요!
ㄴ 얼음여왕) 물론, 제 얼음은 통해요…! 꽁…!
얼음여왕 선배가 이번 층계에 필요한 아이템을 줄 수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ㄴ 수왕) 하지만!!! 차원 간 거래는 쿨타임이지이이잇!!!!
그래.
차원 간 거래는 빌어먹을 쿨타임이다.
ㄴ 대마법사) 필드에 흑염이 깔려있다면, 보스 몬스터는 같은 놈은 흑염을 제대로 써먹을 텐데.
ㄴ ㅇㅇ*) 아마도 그렇겠지.
그건 20층의 층계를 경험한 나로서도 이제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ㄴ 대마법사) 방법이 있긴 해. 네가 가진 것들로 해결할 방법이.
대마법사 선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난 대마법사 선배에게 그 방법을 듣고 납득을 했다.
초월자 갤러리를 종료하고 단말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
콰지직!
검은 화염이 허공에 짙게 일그러졌다.
조금 전에 성좌들의 차단을 풀어놓은 상황이었다.
['불멸의 영광을 지닌 황제'가 반갑다며 손을 흔듭니다.]
['천 개의 눈을 가진 심판자'가 현 위치가 판데모니엄 20층계 스테이지임을 확인합니다.]
['별을 따르는 길잡이'가 그닥 좋지 않은 곳에 떨어졌다며 당신을 비웃습니다.]
['붉게 타오르는 창성자'가 아주 친숙한 곳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우측 하단에 성좌들이 보내는 알림들이 끝도 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창성자’가 이 층계의 보스 몬스터는 자신의 권능이 없다면 클리어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물론 한유성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대마법사 선배에게 들은 대 흑염 대처법은 아직 써먹고 있지 않았다.
보스 몬스터 급이 아니라서, 본래 하던 공격대로도 충분히 처치할 수 있었다.
[‘심연 속을 유영하는 감시자’가 당신의 위계를 6위계로 추측을 합니다.]
[‘검은 태풍의 검귀’가 당신의 성장 속도에 경악합니다.]
[성좌들이 당신의 성장 속도를 보고 경계합니다.]
힘을 3할 정도는 숨겨두고 있음에도 6위계로 추측을 하니.
이 정도면 예측을 잘한다고 해야 할지 못한다고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초월갤 선배들 말대로라면 ‘악령’에 가까운 형태의 몬스터인 잔향의 유령은 매서운 불빛을 뿜어냈지만, 생각보단 쉽게 소멸이 되었다.
호신강기를 유지한 채 첫 번째 불의 장막을 꿰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연기가 자욱하게 일렁였다.
그 다음 계속 마주한 몬스터는 두 종류였다.
첫째는 생긴 건 잔향의 유령과 비슷하나, 실체가 또렷하고 몸에 달라붙어서 폭발하려고 하는 몬스터 스콜드.
삐빗-!
콰아앙!
스콜드는 썩 앙증맞은 소리 뒤에 우렁차게 터졌다.
스콜드의 폭발은 호신강기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둘째는 ‘불의 감시자’라는 몬스터였다.
해골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병사가 양손으로 든 창을 앞으로 내질렀다.
창에 담긴 불꽃은 6위계가 발현할 만한 강기와 비견되어 보였다.
불의 돌풍이 옆구리 옆을 스쳐지나갔다.
츠츠츠츳!
튀는 불똥 사이로 한유성의 검로가 짓쳐들었다.
해골 머리통이 으깨졌다.
한유성은 마지막 장소로 들어섰다.
바로, 보스룸이었다.
문처럼 생기지 않은 거대한 문을 열어젖혔다.
던전의 이름 때문일까.
말 그대로 관짝의 문을 열어젖히는 기분이었다.
열기가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이제까지 보았던 몬스터들과 달리, 흑염의 농도가 확실히 짙어져 있었다.
[BOSS MONSTER]
[레브나르(Revnarr)]
한유성의 몸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덩치를 가진 몬스터였다.
검은 불꽃이 차곡차곡 쌓인 형상의 악마였다. 거대한 덩치가 양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양손으로 쥔 망치가 땅에 수직으로 떨어졌다.
콰아아앙!!
검은 불꽃이 공중에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몸을 뒤로 쭉 뺀 한유성의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붉게 타오르는 창성자'가 보스 몬스터 레브나르는 자신의 권능을 부여받지 않고서는 처치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붉게 타오르는 창성자'가 당신에게 권능을 부여받을 것을 제안합니다.]
-흑염의 약점은 속성상 상성인 물 부류가 아니라, 흑염보다 더 강한 불꽃이다.
성좌, ‘붉게 타오르는 창성자’가 하는 확신이라는 것은. 초월갤 선배도 앞서 말했던 이 부분을 근거로 삼고 있을 것이다.
이번엔 성좌 퀘스트 알림창이 떠올랐다.
붉게 타오르는 창성자가 걸었나 싶었는데.
퀘스트를 등록한 것은 예상 밖의 성좌였다.
『성좌 퀘스트 발생! '빛을 쫓는 성녀'가 퀘스트를 등록했습니다.
퀘스트 : 어떠한 성좌에게도 권능을 받는 등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해당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십시오.
추가 조건 : 없음.
보상 : 아이템 회복의 용골』
‘음, 일단 보상이 권능 같은 게 아니라 아이템이라 합격….
‘빛을 쫓는 성녀’는 초월자 갤러리 선배들에게 몇 달 전에 따로 이야기를 들었던 성좌였다.
‘애매한 성좌라고 했었지.
한유성 자신에게 완전히 적대적인 위치에 서 있는지, 아니면 성좌라는 입장 때문에 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일지.
ㄴ 대마법사) '빛을 쫓는 성녀'는 아마도, 베디스 마르니아…말 그대로 성녀야. 일단 힐러 포지션이고…탑 끝자락에 다다르면 결국 혼자 등반해야 하는 상황에선 조금 더 불리할 수밖에 없었겠지.
ㄴ 절대군주) 음, 베디스에게 단 한 번이라도 도움을 받지 않은 하드 난이도 등반자는 드물 거다.
ㄴ 수왕) 스스로 무한 회복하면서 몬스터들 두들겨 패던 피 칠갑 성녀인데 무슨 말을 하는 거냐앗!! 재가 나보다 더 강할 때도 있었다아앗!
적어도, 전 기수 등반 당시에는 평판이 멀쩡했던 모양이다.
ㄴ 대마법사) 나도 마르니아에게 도움은 꽤 받았지…근데 그렇다고 ‘빛을 쫓는 성녀’가 된 그녀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야. 어쨌든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성좌는 적일 수밖에 없으니까.
한유성의 생각도 대마법사와 같았다.
성녀는 성좌 차단 안 하고 층계를 클리어하는 조건을 걸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건지, 깜빡한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잘된 일이었다.
‘이제까지 성좌들에게 마법을 보인 적이 없다.
숨길 수 있다면 숨기는 게 나았다.
어차피 20층계 이후로는 어떠한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성좌 차단을 풀 생각이 없었으니.
레브나르의 얼굴은 눈코입이 없는 그저 불꽃 그 자체였지만, 시선이 느껴졌다.
츠츠츠츠……!
검에 검기가 피어올랐다.
그 검기는 곧, 검강(劍罡)으로 변화했다.
조금 전, 대마법사 선배에게 들었던 조언의 핵심이 떠올랐다.
ㄴ 대마법사) 흑염은 물 속성 공격에는 별 영향을 받지 않아.
ㄴ 대마법사) 그런데 더 강한 같은 화염 계열의 공격으로 맞대응하면 무력화시킬 수 있어.
ㄴ 대마법사) 할 수 있겠어?
반드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해볼 만해서 할 뿐이었다.
검에 검강을 피워올린 상태로 왼손으로는 마법 술식을 그려냈다.
불 속성 계열 마법.
엘드르(eldr).
오러와 마법의 동시 전개.
그리고.
융합(融合).
검강에 무언가 한 겹이 더 뒤덮였다.
백색의 검강 속에서 홍염이 일렁였다.
‘됐다.
마력이 가파르게 꺾이는 게 느껴졌지만, 잔여 마력은 충분했다.
마법을 개별적으로 발현시키지 않고.
검강과 마법을 일체로 뒤섞어버리는 기행.
차단을 당해서 못 보는 성좌들이 봤다면 이 장면을 보았다면 경악을 했을 터였다.
그들은 초월갤의 대마법사 선배가 오러회로를 통한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물론, 초월자 선배들도 봤다면 썩 놀랐을 것이다.
오러회로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해도.
검기와 마법의 혼합을 수차례의 시행착오 없이 단번에 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식적으로도.
한유성은 그걸 단번에 해내었고.
한유성은 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불꽃이 보스 몬스터 레브나르의 몸이 양 갈래로 베어냈다.
한유성의 시야를 다시 알림창이 뒤덮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Lv.82 → LV.84]
[20층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셨습니다.]
['플레이어 - 한유성' 20층 스테이지의 점수를 집계합니다.]
기존의 20층 랭킹 점수 창이 나타났다.
1위 - 연합장 : 1,129점
2위 - 자명천녀 : 1,112점
3위 - 흑성 : 914점
4위 - 추적중 : 893점
5위 - 삶은고통이기본값이다 : 891점
[점수 집계가 완료되었습니다.]
[한유성 : 5,410점]
성좌 차단을 풀었다.
차단은 풀어야 보상을 받을 수 있었으니.
반으로 잘린 채 재와 연기를 흩뿌리며 소멸하여가는 모습이 성좌들의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붉게 타오르는 창성자’가 자신의 도움 없이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린 것을 쉽사리 믿지 못합니다.]
한유성은 저 알림은 좀 어이가 없었다.
ㄴ 빛의검) 근데 검강을 최대로 끌어올린 상태로 지속해서 두들겨 팬다면, 굳이 ‘흑염’을 공략하는 관점으로 접근하지는 않아도 될 거다.
사실 빛의검 선배가 달았던 댓글대로 검강과 마법을 융합하지 않았어도, 순수하게 힘을 더 끌어올린 검강만으로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으니.
검기와 마법의 융합을 실행해보기 위해 조금 더 수고를 들인 것뿐이었다.
[‘혈마’가 성좌가 입이 그렇게 가벼워서 쓰냐며 어떤 성좌를 크게 비웃습니다.]
[‘붉게 타오르는 창성자’가 거대한 분노를 표출합니다.]
『'빛을 쫓는 성녀'가 등록한 성좌 퀘스트를 클리어했습니다.』
『보상 : '회복의 용골'이 지급됩니다. 6층 층계 대기실에서 수령하십시오.』
['빛을 쫓는 성녀'가 당신에게 고생하였다고 합니다.]
이 알림창을 끝으로. 21층 층계 대기실로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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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층.
우선 초월자 갤러리를 열고.
무사히 21층 층계 대기실에 왔음을 초월자 갤러리에 글을 올리면서 알렸다.
제목 : 21층 층계 대기실임.
작성자 : ㅇㅇ*
검강이랑 화염계 마법 융합시켜서 쓰러트렸음.
ㄴ ?
ㄴ 그게 무슨 소리니…등반 등반자야. 시잇팔- 그게 융합이 왜 되는 것이냐? 왜?
ㄴ 대마법사가 된다고 설명했는데 왜 갑자기 그랬던 적 없는 것처럼 다들 호들갑이고??
ㄴ 된다고 한 걸 다 해내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거 모르냐??
ㄴ 마룡왕) 벨투이- 아주 맞는 말이에요오.
ㄴ 대마법사) 혹시 사진은 찍었니?
대마법사 선배의 말투가 급격히 부드러워진 걸 보니, 검기와 마법의 융합 형태가 꽤나 궁금한 것 같았다.
ㄴ ㅇㅇ*) ㄴㄴ 못 찍음. 거리가 벌어졌을 때 한 게 아니라서.
하지만 그 찰나의 상황에서 갤러리 단말기를 들고 사진을 촬영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ㄴ ㅇㅇ*) 좀 쉬다가 대기실에서 해서 찍어줌.
생각해보니, 여기서 찍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ㄴ 대마법사) 고마워. 궁금했거든.
ㄴ 스윗- 하네. 등반자.
스윗은 개뿔이.
마법을 비롯해서, 내가 이 판데모니엄 탑에서 아직도 살아있는데 일조를 해준 선배인데 그 정도 수고는 해줄 수 있지.
난 일단 한숨을 돌리며 미래에 대해 고찰했다.
댓글들이 빠르게 더 달리기 시작했다.
ㄴ 주딱) 좀 있으면 또 교류회구나.
ㄴ ㅇㅇ*) 그렇네.
2일 뒤면 교류회였다.
21층 스테이지에 진입하기엔 상당히 애매한 시간.
혼자 수련이나 좀 하다가 교류회를 끝내고 다시 등반을 이어나가는 게 최선이었다.
아, 물어볼 게 하나 남아 있었다.
ㄴ ㅇㅇ*) 회복의 용골이란 아이템을 성좌 빛을 쫓는 성녀에게서 받아냈음. 성좌 퀘스트 클리어해서. 쓸만함? 이거?
ㄴ 수왕) 회복계 GOAT.
ㄴ 주딱) 최상급 회복 아이템 중 하나임. 저것의 최대 장점은 보통 저 정도로 회복력이 뛰어난 아티팩트는 개인용으로 사용하는 게 대부분의 한계인데.
ㄴ 주딱) 그건 다른 이들한테도 효과 적용해 줄 수 있음. 플레이어든 NPC든.
ㄴ ㅇㅇ*) 효과 능력은 어느 정도.
ㄴ 주딱) 몸체 잘린 부위 수복. 내장 파열 수복. 신속하게.
확실히.
그 정도 회복력을 가진 아이템이라면 꽤 놀라웠다.
적어도 내가 가진 아이템 중에선 레벨업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패였다.
슥-
뼈로 만들어진 팔찌처럼 생긴 [회복의 용골]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난 인벤토리에서 야구공을 꺼냈다.
지금 내 손아귀에 있는 야구공은 첫 번째 야구공이 아니었다.
탑 내의 코인 상점에서 산 야구공은 내가 마운드 위에 서서 던졌던 야구공보다도 더 튼튼했다.
그럼에도, 첫 번째로 구매한 야구공은 몇 번 더 던지면 부서질 정도로 마모가 되었다.
15층이 끝났을 시점에.
난 그 첫 번째 공을 던지지 않고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첫 번째 공은 의미가 생겨버렸다.
그 의미를 부숴버릴 순 없었다.
지금 손에 쥔 건 네 번째 야구공이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진작에 박살이 나버린 상황이었다.
야구공을 혼자서 벽에 던지고 받기를 반복했다.
정신이 맑아지게 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가부좌를 틀었다.
행한 일은 ‘권역’을 창안하는 것이었다.
권역을 창안해야만 그다음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런데 권역의 앞쪽에 무언가 채워야 할 빈칸이라도 있는 걸까.
권역 창안의 벽은 생각보다 너무나도 높았다.
권역을 만드는데 필요한 건, 무한한 상상력과 그 상상을 실현할 수 있는 실행력이다.
빛의검 선배의 말이었다.
무한한 상상력까진 몰라도, 권역을 창안할 정도의 상상력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상상력이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뭔가 다른 게 비어있거나.
ㄴ 빛의검) 아마도, 계기가 부족한 거겠지.
ㄴ 天魔) 심상을 구체화할 경험의 부재.
ㄴ 절대군주) 더 큰 역경과 위기.
음.
지금도 역경과 위기는 충분히 겪고 있는데 말이다.
대체 이 판데모니엄 탑은 내가 어느 정도의 역경과 위기를 겪길 바라는 것일까.
6위계에 도달한 과정.
그건 지독한 역경의 반복과 깨달음의 연속이었지.
아마도 그 이상의 경험치가 축적되어야 하는 것 같았다.
심상을 조금이라도 구체화 시키려고 하면 흐지부지 흩어져버리니.
이틀이 그렇게 흘러갔다.
***
[탑 교류회를 시작합니다.]
[탑 교류회 서버#1851]
[탑 교류회 테마 : 임무]
[모집 인원 : 30]
20층대에 들어선 이후, 첫 교류회.
주변 풍경을 보아하니, 위치는 산 아래에 있는 출발점 정도로 보였다.
한유성은 누구 하나 쉽사리 먼저 움직이지 않는 이들의 모습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게 정상이지.
모두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20층대까지 올라왔다면, 이 탑에 적응을 완전히 하진 못하더라도 탑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는 이들.
주제가 ‘비누’가 아닌 이상, 플레이어 간의 살해가 가능하다.
다른 플레이어들을 죽일 생각이 전혀 없는 플레이들만 있다고 해도, 최소한의 긴장감은 흐를 수밖에 없었다.
한유성은 자신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머리 위에는 여느 교류회에서 그랬듯,
21층계 거주자라는 뜻.
오늘은 가면 같은 걸 착용할 생각도. 음성 변조를 할 생각도 없었다.
13층부터는 쭉 층계 랭킹 점수 등록을 하지 않았으니, 자신이 조금 강한 모습을 보여도 ‘비공개’라는 걸 유추하는 건 쉽지 않았다.
교류회의 경우에는 힘껏 싸울 때나, 여타 다른 이들의 힘 정도만 발휘해서 클리어했을 때나. 얻어가는 경험치 차이도 없었기에 머릿속이 복잡하지도 않았다.
‘알아내는 의도로.
한유성은 이번 교류회는 자신과 같은 21세기 지구인들이 20대 층계에선 통상적으로 어느 정도의 레벨인지, 무력은 어떤지. 그 정도를 알아볼 작정이었다.
30층 이후의 정보들이야 를 눈팅할 수 있는 초월자 갤러리 선배들 덕분에 알 수 있었지만 20층 대의 정보는 자신이 얻어야 했다.
30층에 올라온 이상, 아럐 층계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기란 쉽지 않았다.
길드의 길드장인 연합장처럼 길드에 최대한의 인재들을 수급해 넣겠다는 의지 같은 게 있는 경우가 아닌 이상에는 말이다.
저벅저벅
산에서 사람들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반갑다. 용병들이여.”
멀끔한 갑옷을 입은 사내가 플레이어들에게 말했다.
[NPC 5위계 기사 울브그레이]
“용병 길드를 통해 그대들을 부른 목적은 이 산속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라는 황실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다.”
울브그레이의 말이 이어졌다.
“그대들의 인명록을 미리 받아놓은 상태다. 그래서 혼선이 없도록 내가 미리 조를 구성해뒀으니, 배정된 대로 임무를 수행하길 바란다.”
플레이어들은 울브그레이의 말에 그를 보던 시선을 옮겨, 플레이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유성은 눈 앞을 가린 알림창들을 바라보았다.
[임무 발생!]
알림창들은 이번 교류회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로트베르딘 산에 있는 보물을 찾아내십시오!]
[보물을 찾아내면 교류회는 종료됩니다.]
말을 듣던 플레이어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울브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이 있나, 해보도록.”
NPC들이 탑 층계의 흐름과 함께 계속 이어진다.
그 점 때문에 NPC를 본인들과 같은 사람으로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
“…보물은 뭡니까?”
플레이어의 질문에 울브그레이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돌이다.”
“예?”
“찾아보면 그게 보물인 것을 알 거다. 보물의 개수는 총 3개. 3개가 다 나오면 수색을 종료한다.”
울브그레이는 웅성거리는 플레이어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말을 덧붙였다.
“쓸데없이 피를 보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울브그레이의 말을 끝으로 플레이어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알림창에 누군가와 팀이 되었는지, 그 목록이 떴기 때문이다.
이름이 아닌, 층계 숫자 옆에 있는 숫자.
그게 조를 뜻했다.
3인 1조, 총 10팀이었다.
한유성은 21 옆에 있는 숫자를 확인했다.
.
한유성은 자신과 같은 3조의 일원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유성의 눈이 가장 먼저 찾은 3조 일원의 현 층계 위치를 확인했다.
25층 플레이어.
“반갑습니다.”
단발 머리카락의 여성은 한유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반가워요.”
두려움이란 감정이 보이지 않는 썩 침착한 얼굴이었다.
대충 인사를 나누는 중에.
옆에서 쾌활해 보이는 얼굴의 금발 서양인이 다가왔다.
거주 층계 위치는 이었다.
“어차피 길어도 이틀로 끝날 인연 같은데. 이름 같은 거 서로 알려줄 필요 있나. 번호로 하지.”
사내는 스스로를 검지로 가리켰다.
“내가 1번.”
턱짓으로 한유성을 가리켰다.
“당신이 2번.”
여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3번?”
“그래.”
한유성도 사내의 제의에 따랐다.
이번 교류회는 눈에 띌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 잘된 일이었다.
“빨리 찾을수록 좋은 보상을 줄 게 당연하니, 바로 움직이도록 하지.”
27층의 사내는 자신의 층계가 제일 높았기 때문인지, 이 조를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걸 가지고 있는듯했다.
“알았어.”
한유성은 편한 마음으로 앞서는 둘을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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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으로 보물을 찾으면 점수를 더 주겠지.”
금발의 거구 사내. 1번이 말했다.
“하지만 급할 건 없다고 본다. 이 30명이란 인원을 데리고 시작한 임무에서 보물이 3개 밖에 없다는 건 상당히 찾기 어렵다는 뜻일 테니. 3등도 보상이 낮지는 않을 거야.”
1번의 말은 꽤 논리적이었다.
3번이 내게 다가왔다.
“뭐…별일 없겠죠? 본인이 반드시 클리어하고 올라가야 하는 층계 같은 것도 아니고. 보물 못 찾아도 죽지도 않는데. 막 얻으려고 다른 플레이어 죽이고 그러진 않겠지?”
3번.
“헙!”
단발 머리카락의 여성은 자신이 중얼거리곤,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아마, 줄줄이 늘어놓고 나니 본인이 내뱉은 말이 꽤 그럴듯하다는 걸 인지한 모양이었다.
“일리가 있네요. 보물 찾고 얻을 점수가 탐이 나서 서로 죽일 수도 있겠어요.”
20층대.
이쯤 되면, 같은 플레이어를 단 한 번도 죽이지 않은 사람이 매우 희소한 시점이었다.
3번은 내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럼 전 일단 죽지 않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해야겠어요.”
“일단 올라갑시다. 1번은 꽤 의욕이 충만한 것 같으니.”
3번은 내 말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인?”
“…예?”
뭐야, 어떻게 안
“딴 사람들 입 모양을 많이 봐서, 어느 정도 구분이 되거든요. 이제.”
목소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동 번역이 되어 들리지만, 그렇다고 입 모양까지 커버가 되지는 않는다.
“맞아요.”
이름이나 등반 중인 난이도 같은 걸 굳이 말할 생각이 없는 거지, 국가 정도는 들켜도 상관없었지만. 황당하긴 했다.
“전 일본인이에요.”
3번은 출신을 맞췄기 때문일까, 본인이 살던 국가도 바로 말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을 덧붙였다.
“당분간은 그런 게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요.”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겠죠.”
사담은 일단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난 맨 앞에서 전방을 지그시 응시하는 1번을 바라보았다.
“1번, 계속 전방 주시하고 있어. 내가 좌측, 3번이 우측 위주로 볼 테니까.”
1번이 고개를 뒤로 힐끔 돌렸다.
“알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내가 기감을 넓게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둘이 어느 각도를 보고 있든 대처가 가능했다.
바로 옆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야, 대체 보물을 어떻게 찾으란 거냐? 생긴 게 어떻게 생긴 지는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가만히 있어 봐, 딱 보니까 찾을 방법도 이 산에 있을 것 같은데….”
난 곡괭이를 들고 땅을 내리찍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건 어디서 얻어서 들고 있는 거야?”
내 말에 대한 대답이 3번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농가 관련 퀘스트 한 적 없어요? 10층대에서?”
그게 뭔데.
“그때 바닥에 떨어져 있던 걸 주운 것 같은데?”
난 내가 경험하지 않은 퀘스트 유형이 꽤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 직감은 이런 드높은 산이라면 일단 중턱까진 올라가고 봐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지금의 난 온전한 즐기는 자의 마인드였다.
13층부터 쭉 시작된 다층적인 고비들.
그 사이 사이에 있던 교류회들은 내게 비정상적으로 안도감을 주었다.
난 지금 교류회를 그냥 쉬는 구간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일단 중턱까지 올라가자.”
내 말에 1번이 뒤를 돌아서 날 바라보았다.
“아무런 확인도 하지 않고?”
난 1번의 의문을 듣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높은데 중턱 전에 뭐가 있을까 싶어서. 산 정상에 3개가 모여있어도 그닥 이상할 건 없잖아.”
“…그건 맞는 말이군.”
“그리고 찾는다고 바로 끝나진 않을 것 같은데. 누가 먼저 찾으면 충분히 뺏을 수 있을 것 같고.”
내가 보기엔 이번 교류회는 여러모로 악질적인 구석이 있었다.
플레이어는 30명인데 보물은 3개.
아주 대놓고 극렬한 갈등을 조장하는 구성이었다.
“무리 안 하고. 하나만 반드시 찾는 쪽으로 하자고.”
1번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다.”
3조.
나를 포함한 3조 세 명이 속도를 올려 산을 올랐다.
신속하게.
물론 내 기준에선 조금 느렸다.
하지만 이 교류회의 플레이어들을 기준으론 충분히
농기구로 산의 땅을 내리치는 플레이어들을 지나치고 중턱까지 올라왔다.
3번은 숨을 가쁘게 들이마시며 땀을 닦아내었다.
바닥에 깃발처럼 꽂혀있는 아이템이 보였다.
난 그 아이템을 뽑아 들었다.
삑-!
기다란 작대기는 뽑아내자마자 쓸데없이 맑은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페리움 마정석 탐지기’를 획득하셨습니다!]
[‘이페리움 마정석 탐지기’는 조당 하나만 획득할 수 있습니다!]
내 옆에 있던 1번이 옆에 빙 둘러져 있는 탐지기 중 하나에 손을 뻗었지만, 무언가에 막힌 듯 손이 뒤로 퉁겨지듯 들어 올려졌다.
“조당 하나…?”
내 앞에 뜬 알림창이 1번의 앞에도 뜬 모양.
3번이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아깝네. 만지는 게 되면 부숴버리는 게 나은데. 못 쓰게.”
흠.
역시 아득바득 올라온 20층대 플레이어라 그런지, 성격이 그렇게 원만하진 않아 보였다.
10층대 플레이어까진 그래도 순진한 맛이 남아있는 플레이어가 꽤 있었는데.
이제 나름대로 악전고투를 겪고 20층대까지 올라온 플레이어들이라 그런지 다들 어느 정도의 현실성을 장착하고 있었다.
오히려 짐짝은 될 확률이 없어 보이는 점은 다행이었다.
[‘이페리움 마정석 탐지기’의 사용하는 방법은 마나를 불어넣는 것입니다!]
난 탐지기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탐지기의 윗부분에 있던 빛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끝 지점에서 퍼져나간 마나의 파장이 이번 층계에서 찾아야 할 보물의 위치를 파악해냈다.
1번이 미간을 와락 구겼다.
“하나같이 손쉽게 굴러가는 일이 없군.”
탐지기가 찾아야 할 돌.
이페리움이란 이름의 마정석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까진 탐지기는 제 몫을 다 했다.
하지만 그 찾는 과정이 너무 시끄러운 게 문제였다.
“저쪽이다!”
“저놈들이 돌을 얻는 순간에 제압을 하면 되겠어!”
난 대충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들리는 외침대로, 눈빛에 살기를 띄운 이들이 보였다.
놈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나였다.
3조에서 가장 낮은 층계 위치하고 있었으니, 적들의 입장에선 내가 제일 약자로 보일만 했다.
그런 놈이 마정석 탐지기까지 손에 들고 있으니 빈틈이 많아 보이겠지.
옷도 좀 허술한 가죽 레더를 입고 있으니, 내가 본의 아니게 낚싯대를 올려놓은 상황인가.
3번은 지금 상황이 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탐지기가 저기 널려있는데. 왜 저걸 놔두고 굳이 이쪽을 노리는 거야? 싸워야 하는 걸 굳이 감수하고?”
3번의 지적은 필견 옳았다.
3번이 뱉은 의문에 대답을 한 건 무기를 빼든 이들이 아니라, 나였다.
“보물이 10개씩 있으면 어느 정도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겠지만…3개라서 저러는 것 같은데. 찾자마자 뺏는 게 가장 간단하다는 결론이 났겠지.”
3번은 내 말에 납득을 한 건지 탄성을 토해냈다.
“아…!”
양발을 산에 지탱한 채 검을 들고 있는 8조의 27층 플레이어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지, 그 판단이 옳다.”
저게 날 뻔히 노리고 있는 놈의 입에서 나올 대사인가.
어이가 없네.
난 27층과 대화를 좀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칼 빼 들고 서 있으면, 안심하고 탐지기가 알려주는 곳으로 가서 파밍을 제대로 할 수 있겠냐? 어?”
8조 27층은 미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음, 그 보물이라는 걸 하나 얻을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다.”
“개소리를.”
난 그렇게 말하며 인벤토리에서 봉을 꺼내 들었다.
마석 탐지기는 3번에게 넘기고.
이 20층대 교류회 플레이어들의 수준이 어떤지 아직 묻지 못했으나, 굳이 묻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는 지점이 있었다.
내가 힘을 평상시대로 휘둘러대면 이 플레이어들의 사지가 찢길 거란 확신.
그래서 꺼내든 게 17층 층계를 클리어하고 획득한 무기, [우연을 품은 가지]였다.
ㅇㅇ*) 다수한테 위압감을 주는 방법은 뭐가 있겠냐. 죽이진 않고.
ㄴ 마룡왕) 벨투이- 짓밟아야 해요오.
ㄴ 빛의검) 그럴 땐 본보기가 필요하다.
ㄴ 절대군주) 가장 먼저 튀어나온 놈을 밟아라.
ㄴ 당하연) 험악하게 짓눌러야 하는 검다!!!!!
ㄴ 수왕) 콰-직!
ㄴ 유명한거지) 중요한 건 기선제압이오.
난 8조 27층을 향해 봉을 내질렀다.
플레이어를 죽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냥 찍어 눌러둘 생각이었다.
“이런 미친놈이…!”
츠츠츠츠-!
8조 27층이 검에 검기를 일으켰다.
검기를 일으키면 뭐하나.
허술해서 맞을 수가 없는데.
그래봤자 3위계로 보였다.
검로의 궤적이 훤히 읽혔다.
적의 공격을 걷어내고 직선으로 팔을 뻗었다.
아주 기초적인 무기술로도 충분했다.
놈의 상체 중앙에 봉이 틀어박혔다.
그리고 봉을 그대로 들어 올려 오른쪽 어깨를 내리찍었다.
난 계속 27층의 몸뚱이를 두들겨 팼다.
“크아아악!”
27층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죽을 일은 없게.
콰드득!
목표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
난이도와 별개로, 27층이 21층에게 처맞는 광경은 꽤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인지 근방에 있는 열댓명의 시선이 모두 쏠리는 게 보였다.
“끄아아아악!”
콰직!
27층의 몸뚱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난 27층의 몸뚱이에 최하급 포션을 들이부었다.
“…2번님!”
갑자기 말투가 공손하게 바뀐 3번이 내게 매끈한 질감의 마석을 들이밀었다.
이게 이페리움이겠지.
내가 깽판을 치는 틈에 탐지기를 작동시켜서 이페리움을 찾은 거구만.
처음 막대기를 잡자마자 막대기 몸체가 세차게 흔들리는 걸 보고서. 적어도 마석 하나는 근처에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그 예상이 정답이었나.
음, 3번. 예상외로 유능한데?
일본인 여성, 3번은 할 말이 남았는지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규칙이 발견자인 저한테만 추가로 공개됐어요!”
“뭐라고?”
“1등으로 보물 발견하면서 추가 점수 조건은 달성했어요! 나머지 2개가 모두 찾아질 때까지 보유하고 있으면 점수 그대로 부여!”
3번의 말이 이어졌다.
“근데 1등으로 찾아낸 상으로 이번 교류회가 끝날 때까지 적용될 추가 조건을 부여할 수 있대요! 저희가 보물을 무조건 지킬 수 있도록 하는 종류의 그런 사기적인 조건은 빼고…!”
3번은 발을 동동 굴렀다.
“1분 안에 결정해야 한다는데…! 사십 초 남았거든요!”
내 의견을 묻는 이유는 방금 보여준 모습 때문이겠지.
“불살. 플레이어 간 살인 불가 조건. 비무 테마처럼.”
임무 테마를 비무 테마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조건.
“죽는 위험만 없어지면 보물은 완벽히 지킬 수 있어.”
“아, 알겠어요!”
3번의 말이 끝난 직후.
허공에 알림창이 나타났다.
[첫번째로 ‘보물’을 발견한 3조에 의해 규칙이 개정되었습니다.]
[본 교류회에 새로운 규칙이 정립되었습니다.]
[본 교류회에서는 플레이어 간의 살인이 용인되지 않습니다.]
난 3조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시선도 허공으로 향하는 걸 보았다.
그렇다는 건 모두가 새로운 규칙이 정립되었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
난 이 정도면 충분히 다른 조원들에게 경고할 만한 판은 만들었다고 여겼다.
“안 죽여.”
포션을 부어주었지만,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있는 27층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방금 생긴 새로운 규칙을 세운 게 우린 걸 알고 있잖아. 근데 내가 애를 죽이겠냐?”
웅성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주, 죽일 듯이 팼으면서 그게 모순적인 소리냐?”
“안 죽였잖아.”
난 바닥을 질질 끌었던 봉을 들어올렸다.
“우리 3조는 보물 하나를 얻는 것으로 끝을 낼 거야. 건드리지만 않으면 말이지.”
엄포를 놓은 후.
내가 펼쳐놓은 깽판 때문인지, 따라오는 다른 조의 사람들은 없었다.
산의 중턱.
마치 처마처럼 길게 뻗어있는 그늘의 안쪽에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
3조의 1번은 날 수상하게 바라봤지만, 마석을 1등으로 찾았기 때문인지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
.
제목 : ‘비공개’ 이놈이 몇 층에 있을지 예상을 해보자.
작성자 : 권마
본인의 예측은 하드 난이도 18층임. 아, 근데 설마 뒤지진 않았겠지.
ㄴ 독보) 뒤졌을 리가 있나. 한 19층쯤 오르고 있겠지.
ㄴ 또또 습관성 올려치기 들어간다.
ㄴ 알데라민) 나 같으면 1등 찍으면 계속 점수 등록할 텐데 등록 안 하고 오르는 게 신기하네.
ㄴ ㄹㅇ 1등, 늘 짜릿하고 새로워서 계속 등록할 거 같은데.
ㄴ 쌍검은낭만) 또 궁금한 것은 비공개 이놈 현재 위계가 얼마냐는 것임.
ㄴ 음…5위계?
ㄴ 날카로운창) 빨리 올라갔어도 18, 19층일 텐데. 21세기 지구인 출신이 그 시점에 5위계를 달성할 수 있을 거라고 보냐?
ㄴ 날카로운창) 30층 갓 올라온 21세기 지구인 애들 다 빌빌거리고 있는데.
ㄴ 날카로운창) 위계는 높게 쳐도 4위계다.
ㄴ 인생분석가) 뭐…4위계가 정론은 맞는데. 이제껏 보여준 점수 포텐을 보면 5위계가 아니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해서 그렇지.
ㄴ 또 다른 이슈는 없는 것??
ㄴ 흑성) 광마 그 정신 나간 인간이 66층을 클리어했다. 본인 친위대인 광혼혈위대 데리고. 광마를 포함한 5인 모두 67층에 진입했단다.
ㄴ 오….
ㄴ 삶은고통이기본값이다) 연합장 이 인간이랑 같이 진입했던 공략 연합 길드원 거의 다 뒤지지 않았냐?? 광마 대단하긴 하네. 이 정도면 양강구도(兩强構圖) 아니냐.
ㄴ 검은손) 원래 층계 위치 아니고 무력만 따지면 양강구도 취급이었잖냐.
ㄴ 나는아직살아있다) 연합장이고~~ 광마고 뭐고~~ 비공개 이 새끼 언제 30층 올라오냐고- 네놈이 불러올 대격변만을 기다리고 있다.
ㄴ ㄹㅇ 개판이자 대애애애격변이긴 하겠네.
ㄴ 1. 이제껏 나왔던 층계 점수들이 오류 같은 게 아니라면 이놈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2. 날창이는 처맞게 될 것인가, 아니면 자존심을 지키게 될 것인가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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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불살 같은 조건을 내걸어준 거지?”
1번은 불만이 좀 있나 보다.
“왜.”
1번은 내 되물음에 미간을 좁혔다.
“검기를 사용하지 못해서 안 쓴 게 아니지 않나, 당신.”
1번의 추론은 정답이지만.
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뭐.
“잘됐잖아. 1등으로 추가 점수 획득하는 건 거의 확실시 된 일이고. 보물이 열댓 개 있는 것도 아니고 3개. 이 정도면 우리 2조가 1등이야.”
1번은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정론이라는 걸 인정은 하는 반응이었다.
가만히 옆에서 나와 1번의 대화를 듣고 있던 3번이 찬물을 끼얹었다.
“…그렇겠지? 우리가 1등이겠지. 같은 조가 막 두 개씩 획득하고 그러지 않는 이상?”
난 피식 웃었다.
“그 경우가 일어나면 바로 강탈할 거야. 하나를.”
보물. 마석을 제일 먼저 찾아낸 점수는 이미 확보를 해둔 상태였다.
점수를 확보하는 기준이 몇 분 전 이번 교류회의 법칙을 알려준 사람. 5위계 기사 울브그레이에게 보물을 전달하는 것.
그게 점수 획득의 방법이었다.
그러니, 보물을 두 개 찾는 조가 생긴다면 울브그레이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강탈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냥 쉬고 있는 척, 주변을 계속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을 그르칠 가능성은 작다고 생각했다.
난 25층 플레이어인 3번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지금 교류회 외적인 걸 물어봐도 되나?”
3번은 갑자기 히죽 웃어 보였다.
“음? 뭐, 이상형?”
그런 걸 물어볼 리가 없지.
“당신 레벨.”
내 말에 3번은 혀를 찼다.
“흐으음, 조금 더 재미있는 걸 물어볼 줄 알았는데.”
하지만 말을 안 해줄 건 아닌 모양이었다.
“레벨은 딱 30. 3위계예요.”
왜 위계까지 말해주나 했더니.
30레벨에 3위계인 게 3번의 입장에선 당연해서 그냥 말해준 것 같았다.
“노멀?”
“흐으음, 글쎄 어디일까?”
3번은 난이도를 맞혀보란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난 노멀이 맞다고 그냥 결론을 내렸다.
하드 난이도였다면 노멀이라고 물어본 것 자체에 긁혀서 실토를 했을 테니까.
“당신도 말해줄 수 있나?”
이번에 내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1번이었다.
27층을 거주지로 삼고 있는 사내.
난이도는 내 예상대로면 하드 난이도인데.
“하드 난이도고…4위계다. 남들도 그렇듯, 좀 오랜 시간 27층 층계 대기실에서 보내면서 4위계로 올랐지…쉽지 않았어. 하지만 그러지 못하면 슬슬 죽음 위험이 더 커진다고 하니, 뼈와 살을 깎았지.”
내 예상대로 하드 난이도였다.
그나저나…4위계 된 건데, 왜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냐.
라고 말을 하기엔 1번의 얼굴이 너무 진중했다. 정말 피와 살을 깎는 고통을 겪은 것처럼.
- 수왕) 개척자 저놈도 재능이 넘쳐흐르는 쪽이지. 노베이스 출신인데 38층에서 6위계 찍은 거, 말 안됨 ㅇㅇ
일전에 초월자 갤러리에서 내가 6위계에 도달하고 난 뒤에 올렸던 글. 그 게시물에서 하드 난이도 38층에서 6위계를 달성했던 개척자 선배가 칭얼거렸던 댓글이 떠올랐다.
그 댓글에 달렸던 수왕 선배가 달았던 댓글은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두 명이 나와 같이 21세기 지구 출신인 것도 성장 속도가 이런 이유에 한몫을 하겠지.
내가 21세기 지구인치고 비정상적인 속도를 내고 있는 거고.
교류회는 이렇게 끝났다.
3번의 걱정대로 같은 조가 두 개의 보물을 쓸어 담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탑 교류회' 임무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Lv.84 → Lv.85]
['힘' 수치가 5 상승합니다.]
['민첩' 수치가 6 상승합니다.]
['체력' 수치가 5상승합니다.]
['마나' 수치가 6 상승합니다.]
['탑 교류회' 임무 달성 기여 점수를 계산합니다.]
[당신이 포함된 조, 3조가 '1위'입니다.]
[1위 보상으로 2000코인이 주어집니다.]
[1위 보상으로 아이템이 주어집니다.]
그렇게 21층 층계 대기실로 다시 귀환을 했다.
***
4달 하고도 20일이 지났다.
그 말은 즉, 이제 내가 이 탑에 소환 된 지 1년이 다 되어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현재 층계는 27층.
현재 내 레벨은 95.
난 그간 겪어본 적 없는 벽을 앞에 뒀다고 할 수 있었다.
아직도 6위계의 ‘권역’ 앞에서 성취가 막혀 있었다.
초월자 갤러리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성장 속도가 한참 비정상적이었고.
언젠가 이런 심각한 정체 구간이 오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권역.
그놈의 권역은 왜 내게 손을 흔들어주지 않는 걸까.
화가 안 난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이제는 이름을 정한 내 고유의 심법 ‘파한입도결(破限入道訣)’을 운용했다.
그리고 심상(心象)을 계속 그려냈다.
내 권역의 근간이 될 심상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어느 지점에 다다를 때면 계속 말소되었다.
지반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 구조물이 와르르 무너지듯.
파한입도결을 창안하기 전까지도 느꼈던.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공허.
난 그걸 내가 21세기 지구인이기에 가지고 있는 경험의 부재라고 여겼다.
실제로, 초월자 갤러리 선배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 빛의검) 권역이 제대로 구성이 안 된다는 건, 전에도 말했지만 계기의 부족일 거다.
ㄴ 절대군주) 그렇지, 죽을 위험을 좀 더 겪어야 하는 거다.
ㄴ ㅇㅇ*) 이미 많이 겪었어….
ㄴ 수왕)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존나 더 많이 겪어야 한다는 거다!!!!!!
ㄴ 엘프다) 고생 좀 더 하렴.
ㄴ 대마법사) 그래도 덕분에 네가 마법 익힐 시간이 생긴 건 좀 좋았지.
맞다.
난 지난 4달이란 시간 동안 앞선 시간들 보다는 마법 수련에 힘을 좀 더 쏟았다.
이 빌어먹을 벽에 막혔다는 감각이 들 때, 마법을 수련했다.
그게 내게 있어 시간 낭비를 줄이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내 근본은 결국 무공에 있었다.
마법 류의 권역을 창안 해내기에는 마법 숙련도가 턱없이 부족하기도 했고.
내게 위안이 된 건 마법을 수련하는 것 말고도 하는 더 있었다.
그건, 갤러리를 하는 것이다.
초월갤 선배들은 내 성취가 권역이란 벽에 장기간 막혀 있는 게 안쓰러웠는지, 내 위주로 흘러가던 갤러리의 방향을 조금은 비틀었다.
선배들이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꽤 하게 된 발단이 된 게시물은.
제목 : 봐라, 매화의 검기다.
작성자 : 시궁창검성
첨부파일 : 128703912830912.png
- 영롱하지 않나.
궁창 선배의 영롱한 검기 사진이었다.
검기는 사진은 릴레이 인증이라도 하듯, 줄줄이 이어졌다.
검기 색 인증 릴레이.
그 다음 썩 파장을 일으켰던 건, 빛의검 선배의 구려도 너무 구린 촬영 각도의 셀카였다.
지나치게 상대방을 내려다보는 듯한 각도를 써버렸다든지.
지나치게 정면을 똑바로 바라본다든가 말이다.
ㄴ 으흐흐, 매도 당한다….
ㄴ 이야, 이딴 식으로 찍어도 멀쩡해? 아, 멀쩡한 건 아니구나.
ㄴ 은발 적안은 성공 공식이구만….
ㄴ 무녀) 하와와, 하와와. 역시 예쁜 것은 가끔 보면 눈 정화가 되는 것이와요. 그 등반을 하던 시절이 떠오르는 시선이와요.
물론, 각도를 이상하게 찍어도 반응은 좋았다.
또 어떤 게시물이 있었더라.
아.
그게 있었지.
제목 : 꽁꽁…! 제 왕국이에요!
작성자 : 얼음여왕
첨부파일 : 32904230122.png, 4091267563187.png…
- 여기가 푸르르고 새하얀 곳이 얼음왕국의 중심부인 눈꽃 회랑…! 그리고 여기가 겨울 정원! 꽁꽁! 여기가 은빛 탑!
ㄴ 이야, 미안한데. 다 똑같은 사진 아니냐?
ㄴ 얼음여왕) 꽁꽁! 아니에요!
얼음여왕 선배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어느 곳이든 별 차이가 없긴 했다.
아무튼, 선배들의 글들은 내 어지러운 머릿속을 식혀주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군더더기를 모두 버려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심법을 운용했다.
다음날.
12월 17일.
탑에 소환된 지 1년째가 되기 두 달여 전.
나는 27층 스테이지의 문을 열었다.
차원 간 거래의 쿨타임도 마침 끝난 상황이었다.
문을 열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차가운 한기가 정면으로 매섭게 다가왔다.
***
한유성은 전신을 떨 수밖에 없었다.
“…와.”
입김이 허공에 서리 결정들이 맺히듯 공간을 일그러트렸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발끝부터 차오르는 냉기는 그간 느꼈던 한기 같은 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얼른 호신강기를 펼쳐냈다.
그 직후, 알림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판데모니엄 난이도 27층은 퀘스트 형입니다.』
“여긴 또 어디야?”
사방이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또 뒤에 자리 잡은 풍경을 보자면, 남극이나 북극이 배경 같지는 않았다.
뒤쪽에 자리 잡은 건물을 바라보았다.
“무림계 같은데….”
건물의 양식이 중원 무림 배경에서 봤던 것과 엇비슷했다.
한유성은 일단 인벤토리에서 초월자 갤러리 단말기를 꺼내 앞에 보이는 누각(樓閣)을 촬영했다.
백색의 빙설이 뒤덮은 누각.
한유성은 방금 찍은 사진을 첨부한 게시물을 올렸다.
댓글은 금방 후두둑 달렸다.
ㄴ 음, 어디서 많이 봤는데??
ㄴ 빙궁이잖냐.
ㄴ 天魔) 북해빙궁(北海氷宮)이다.
ㄴ 빛의검) 조심해라. 빙궁주들은 모두 괴상한 측면이 있는 놈들이었다.
ㄴ ㄹㅇ 궁주치고 정상인 놈들을 찾을 수가 없는 거심.
ㄴ 뇌까지 꽁꽁 얼어버렸다는 게 정론임 ㅇㅇ
ㄴ 시궁창검성) 근데 골치가 좀 아프게 되었구나.
ㄴ 무녀) 하와와, 그러게 말이와요. 빙궁의 무인들은 그 배경 속에서 매우 강한 것이와요.
ㄴ ㅇㅇ*) 순수 무력은 강함?
ㄴ 무녀) 강한 편이와요. 우리 기수가 만났던 궁주는 7위계 중위 정도였사와요.
음, 겁나 강한데.
ㄴ 대마법사) 근데 궁주랑 갑자기 싸울 일은 없을 거야…괴상한 측면이 있긴 해도 폭력성이 그렇게 강한 건 아니니까.
ㄴ 얼음여왕) 꽁꽁…!
ㄴ 얼음여왕) 얼어붙은…!
ㄴ 얼음여왕) 드디어, 드디어 등반쟈가 제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도래했어요…!
한유성은 뭔가 심하게 들떠있는 기색을 댓글을 통해서 읽어낼 수 있었다.
ㄴ 얼음여왕) 제 아이템이라면, 이 북해빙궁의 땅에서도 숨을 멀쩡히 쉬면서 걸어다닐 수 있어요! 꽁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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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여왕】
초월자 갤러리 닉네임, 얼음여왕.
스노아 베르글룬드는 하늘색의 머리카락을 묶고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투명한 호리병처럼 생긴 병이었다.
스노아는 상상을 시작했다.
아이템 하나를 만들어 내기 위한 상상이었다.
‘…뭐가 슬픈 일일까아?
스노아는 슬픈 일을 상상했다.
그래야만 만들어지는 아이템이었다.
아무래도, 지금으로서 슬픈 일은.
초월자 갤러리의 유일한 등반자인 한유성의 죽음이었다.
스노아는 감수성이 풍부했다.
정확히는 초월자 갤러리를 할 때만.
맨날 같은 일상만을 보내다가, 초월자 갤러리에서만 특이한 일을 겪으니 그럴 법도 했다.
스노아는 한유성의 부재에 대해 상상을 했다.
놀랍게도 그 상상만으로 아주 슬퍼지기 시작했다.
“흑…흐흑.”
눈가에 눈물이 선명히 맺혔다.
한유성이 보았다면 조금은 섬뜩했을지도 모를 장면이었지만, 스노아로서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울음이었다.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내려, 호리병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찰랑…!
스노아는 그 호리병 안쪽에 담긴 한 방울의 눈물 위에 얼음 조각 하나를 올려놓았다.
이것으로 아이템은 완성되었다.
스노아는 초월자 갤러리 단말기를 꺼내, 한유성에게 차원 간 거래를 신청했다.
차원 간 거래 진행 중에만 활성화되는 채팅창이 단말기 위에 두둥실 떠올랐다.
토독…! 토도독!
스노아는 두 손으로 자판을 빠르게 두드렸다.
[얼음여왕 : 지금 보낼테니까, 받아요! 꽁꽁!]
[ㅇㅇ* : 알겠어. 복용은 어떻게 하는 것?]
[얼음여왕 : 마시면 돼요. 옆구리에 꽂는 건 효력이 없어요. 꽁꽁…!]
[ㅇㅇ* : 알겠음, 근데 내용물이 정확히 뭐야?]
[얼음여왕 : 꽁꽁! 그건 받아 보면 알 거예요.]
***
한유성은 얼음여왕의 마지막 채팅이 마음에 걸렸지만, 호신강기를 운용해도 추위가 몰려오는 상황에서 무얼 잴 여유가 없었다.
퀘스트가 뭔지도 조금 전에 알았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직접적인 전투는 없을 것 같았다.
[실프라 히아르타]
한유성은 퀘스트를 다시 확인했다.
『퀘스트! - 북해빙궁 ‘궁주(宮主) 위무강’이 내뿜는 극빙기류를 피해 북해빙궁의 아이들을 구명하라!』
한유성은 극빙기류가 뭔지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몸을 강하게 휘감고 있는 강렬한 추위.
이 추위는 통상적인 추위와 다른 모양이었다.
한유성은 얼음여왕 선배가 [실프라 히아르타]를 건네며 추가적으로 채팅으로 적어준 점들을 떠올렸다.
[얼음여왕 : 퀘스트 내용을 보면, 이 북해빙궁의 소속자들마저도 버틸 수 없는 한기가 빙궁의 영역을 완전히 뒤덮고 있어서 그걸 극복해야 할 거예요 …! 꽁꽁!]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았다.
새하얀 냉기를 풀풀 뿜어대고 있는 중앙 위치의 궁.
거기서 흘러나온 한기를 피해 도망친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라는 퀘스트였다.
한유성은 얼음여왕 선배에게 받은 호리병 속에 든 액체를 쭉 들이켰다.
그러자, 온몸이 냉기로 가득 찬 것 같은 충만함이 몸을 휘감았다.
두근!
그리고 심장이 빠르게 박동을 했다.
한유성은 자신의 육신에 깃들어 있던 세 개의 기둥에 서리가 피어났다.
육체가 [실프라 히아르타]의 힘에 따라 변화한 것이다.
한유성은 자신의 기둥을 뒤덮은 빙결의 기운을 느꼈다.
스으으으…
입에서 뿌연 한기가 흘러나왔다.
전능감.
그렇게 불러야 마땅한 감각이 몸을 관통했다.
적어도.
[얼음여왕 : 실프라 히아르타의 작동 시간은 딱 10시간! 그 시간 내에는 해결을 보아야 해요! 꽁꽁!]
그 시간 동안은 이 빙궁의 땅에서 저 압도적인 한기의 영향력을 받지 않을 수 있어 보였다.
한유성은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을 찾을 필요를 느꼈다.
한유성은 걸음을 재촉했다.
위치를 특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유성은 풍경들을 바라보며 한 구조물을 떠올려냈다.
수상가옥(水上家屋).
물을 저택이 들어 올리고 있는 모양새의 건물들.
그 수중가옥을 받치고 있는 물 대신,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고 보면 됐다.
한유성은 얼음이 들어 올린 거대 저택에 다가갔고.
그 위에 올라섰다.
한유성은 냉기가 풀풀 풍기는 대지 위를 걸었다.
사방면으로 붙어진 부적이 펄럭펄럭 떨리고 있었다.
기감을 펼쳐내자, 건물 내부에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궁주께서 대체 어떤 일을 겪고 계신 걸까….
서리가 더 강대해졌어.
한유성은 목소리에 집중했다.
한유성은 벽에 몸을 기대고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대로면 빙궁 전체가 얼어버릴 거예요! 이, 이미 얼어져 있지만…! 이대로 계속 냉각화가 되면 걷잡을 수가 없어요!
하늘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한 여성을 바라보며 다급히 말을 이었다.
여성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소년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궁주께서 아무런 방책이 없으실 리는 없단다…조금만 버티면 될 거야.
한유성은 알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이들에게 아무런 방법이 없을 거란 사실을.
당장 눈에 보이는 이들만 해도 20여 명이었다.
이들을 모두 구해내야 하는 상황.
한유성은 얼음여왕 선배에게 진심 어린 경외심이 들었다.
‘할 수 있겠는데.
실프라 히아르타를 복용하지 못했다면, 지금 이 빌어먹을 판데모니엄이 부여한 판의 정식 공략법을 따라야 했을 터.
하지만 지금은 자력으로 구조를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아이템의 효과 지속 시간이 단 10시간인 것이 변수였으나, 얼음여왕 선배의 말대로 오히려 그렇기에 강력한 파괴력을 가질 수 있는 거겠지.
한유성은은 거대한 얼음의 문에 손을 올렸다.
희뿌연 연기가 격렬하게 활개 쳤다.
한유성은 문을 열어젖혔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건 수많은 시선이었다.
지독하지는 않았으나, 옅은 살기들도 느껴졌다.
그야 북해빙궁의 사람들이 입는 옷으로 보이는 군청색의 옷도 입고 있지 않고.
빙궁과는 완전히 무관계한 사람으로 보이니, 살기가 쏘아지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빙궁의 이들도 버틸 수 없는 극한기가 북해빙궁을 뒤덮고 있는 현 상황이 아니었다면 더 적나라한 살기가 들이닥쳤을 것이다.
스으으으…
한유성은 양손을 움직였다.
그 양손의 움직임에 따라, 빙궁 내부의 극한이 천천히 침묵을 집어삼켰다.
한유성은 체내의 냉기를 느끼며 추위를 조율했다.
쩌적-
육신에 세워진 세 개의 기둥에 서늘한 빙결이 맴돌고 있었다.
한유성은 안다.
지금 자신이 이 장소를 통제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얼음여왕 선배가 준 아이템이 뛰어난 것에 있었다.
‘무(武)를 비롯한 전투 감각에 대한 재능은 분명 뛰어나다고 했지만, 그 외적인 분야까지 그 정도 결과물을 낼 수 있을 수는 없다고 했지. 선배들도.
당장 마법만 해도, 무공보다는 펼치기가 훨씬 까다로웠다.
‘일단 이 작자들을 이해시켜서 제대로 끌고 가야 한다.
머릿속을 정리한 한유성 손을 움직였다.
목적은 보여주는 것에 있었다.
자신들에게 위해를 끼칠 생각이 전혀 없음을.
한유성의 손이 한 소년에게 닿았다.
북해빙궁의 사람들도 미처 제대로 살피고 있지 못했던 소년에게.
[NPC 린유]
몸을 웅크린 채 냉기에 강하게 잠식된 소년이었다.
“린유…!”
다른 사람들도 한유성이 소년 린유의 어깨 위에 올리고 나서야, 린유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한유성은 빙결의 기운을 운용했다.
린유의 몸에 침식되어 있는 빙결의 한기와 빙결 조각들이 증발하기 시작했다.
북해빙궁의 사람들은 여전히 한유성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은 인지를 했기 때문인지 방해를 하지는 않았다.
새하얀 서리가 증발하며 얼어붙어 있던 빙결이 증발했다.
벌벌 떨리던 소년의 몸체가 진정이 되었다.
한유성은 이 20여 명 사람 중에 가장 관리책에 가까워 보이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NPC 북해빙궁 5위계 강륜]
“이 정도면 내가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알겠지?”
강륜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당신은.”
한유성은 사내, 강륜의 말을 끊기로 했다.
“내가 내 개인적 용의로 당신들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거든. 그러니 의심은 하지 말고.”
“의심을 더 하게 만드는 말 같은데요.”
한유성은 그럼에도 어쭙잖은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보다는 솔직한 게 좋다고 생각했다.
“살려줬잖아.”
턱짓으로 린유를 가리키니, 강륜은 침묵을 지켰다.
한유성은 입을 열어 말을 덧붙였다.
“당신, 궁주가 뿜어내고 있는 냉기를 피해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곳을 알고 있나?”
강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지만…거기까지 가려면 궁주께서 풍기고 있는 냉기를 뚫어야 해요.”
한유성은 오른손을 움직였다.
한유성의 손짓에 따라, 대기에 응어리진 빙결의 기류가 움직였다.
“봤다시피, 내가 길을 열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강륜은 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빙궁의 혈통도 아니면서 어떻게 이만한 장악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겁니까?”
강륜의 의문을 한유성은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얼음여왕 선배가 준 아이템에 대해 설명할 지식도 없었으니.
“길 안내를 해. 일단 얘들을 모두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상황을 정리하자고. 그러면 알게 될 거야.”
강륜은 한유성의 말의 맞다는 걸, 아직 떨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인정해야 했다.
한유성은 강륜의 길 안내에 따라 움직였고.
현재 북해빙궁에서 가장 유일하게 추위가 배제된 장소. 연위장에 도착했다.
10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구조해야 할 빙궁의 아이들이 20명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존자를 찾아 왕복을 해야 했다.
그리고 80여 명의 안전이 확보된 직후.
한유성은 눈앞에 나타난 창을 응시했다.
『퀘스트! - 북해빙궁 ‘궁주(宮主) 위무강’이 내뿜는 극빙기류를 피해 북해빙궁의 아이들을 구명하라! 퀘스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나타난 퀘스트 클리어 창.
한유성은 그대로 28층 층계 대기실로 이동을 할 줄 알았다.
쩌억.
대기가 일그러지고.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유성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왜 이 인간이 갑자기 이곳에 튀어나오는 건지.
“네 정체에 대해 알 수가 없구나.”
세계가 굳었다.
마치 시간이 뚝 멈춘 것처럼.
날 바라보던 빙궁의 사람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천마의 말이 이어졌다.
“일단 따라와 줘야겠다.”
[NPC 천마(天魔) 8위계]
한유성은 자신을 뒤덮는 그림자를 보았다.
‘이건 또 뭔….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육신을 끌어당겼다.
북해빙궁의 풍경 속에서 한유성의 모습이 사라졌다.
『판데모니엄 27층 층계의 시나리오가 연장됩니다.』
『새로운 퀘스트가 등록됩니다.』
『퀘스트 :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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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층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다리를 움직였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앞에 보이는 의자에 앉아, 몸을 앞으로 기울여 앉았다.
"……."
식은땀이 이마에 맺혔다.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두통이 점점 영역을 넓혀갔다.
감각은 점점 둔해지고, 세상이 멀어지는 것 같았다.
몸은 여기 있는데, 정신은 어딘가 깊은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이질감이 들었다.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왜.
왜 반은 날 위해서 결투를 포기한 걸까.
[13층 돌파 보상으로 2000코인을 부여합니다.]
[판데모니엄 13층 돌파 보상으로 아이템이 지급되었습니다. '인벤토리'를 확인하세요.]
['플레이어 - 한유성' 13층 스테이지의 점수를 집계합니다.]
본래는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직후.
그곳을 벗어나기 전에 눈앞에 나타났던 알림창들이 이제야 떠오르기 시작했다.
기존 13층 랭킹창이 시야 구석에 떠올랐다.
1위 - 연합장 : 956점
2위 - 흑성 : 901점
3위 - 검은손 : 879점
4위 - 추적중 : 841점
5위 - 싱클레어 : 813점
물론, 늘 그렇듯 타인의 랭킹 점수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한유성 : 5,786점]
지금은 내 점수창도 그저 쓸모없는 숫자 놀음으로 보일 뿐이었다.
[13층 랭킹 점수를 등록하시겠습니까?]
[Y / N]
잠깐의 고민도 없이 거절을 눌렀다.
12층 이후부터는 랭킹 순위에 따른 보상도 없다고 한 상황.
굳이 랭킹창에 이름을 닉네임과 점수를 띄울 필요가 없었다.
인벤토리에서 마른 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조금 전, 2급 관리자 플리셰크와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13층은 혼자 클리어하는 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층계라 반 이네르를 그 층계 한 정으로 살려낸 거다?
그 말 자체가 오류투성이였다.
애초부터 생환율 0%의 난이도를 가진 탑, 판데모니엄.
[판데모니엄]이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어려웠던 건 이번 13층계만이 아니라, 13개 층계 전부였다.
그런 내 반응에.
- 하긴, 그 말씀이 맞죠.
플리셰크가 그 말이 맞다고 맞장구를 친 뒤 덧붙인 말들.
그 말들이 계속 뇌리를 맴돌았다.
그 말들을 곱씹었다.
- 이 13층 [리뉴얼]의 명령을 내린 것도. 그 오류의 수정을 위해서 필요한 공략 성공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며 지난 기수의 플레이어인 반 이네르 님을 13층계만을 한정하여 조건부 부활시킨 것도.
-이 [판데모니엄 탑]이 직접 내린 결정입니다.
- 저희도 놀랐죠. 탑이 적극적 의사 표현을 하는 건 지극히 드문 경우인지라.
- 저 같은 일개 관리자가 최상층부도 쩔쩔매는 탑의 자체적인 결정을 어떻게 거부하겠습니까.
탑.
이 같잖은 알림창들을 내뱉고 있는 것도 탑 자체의 시스템이겠지.
이제까지는 아무렇지 않게 보아왔던 알림창의 문장마저 역겹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대체, 뭘 위해서 날 이 빌어먹을 탑에 불러낸 거냐.
양손을 움직일 힘이 분명 있음에도.
무언가를 할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반.
고작 며칠 함께했을 뿐인데.
왜 날 위해서 다시 살아갈 기회를 포기한 거냐.
물론, 그 시간은 내게도 소중했다.
찰나도 버릴 수 없을 만큼.
하지만 사람은. 사람이라면 본인의 목숨이 중요하지 않나.
문득, 반 이네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녀와 나눈 대화와 함께.
대화를 나눈 건 이틀 전이었다.
- 유성, 같이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해?
- 여섯 번째 뿌리, 하나 남았잖아. 같이 올라가야지.
그때 보였던 네 웃음은 그냥 기분이 좋아서 그랬던 건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런 종류의 웃음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 응, 그래야지. 같이 올라가야지.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이렇게 대답을 했던 너는.
여섯 번째 뿌리를 성공적으로 격퇴 시켜도,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겠지.
갑자기 눈앞에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붉은 레이어의 알림창이 떴다.
[주의! '플레이어 - 한유성' 감정 - '우울감' 수치가 급격히 상승했습니다.]
[판데모니엄 14층 이후부터 진행되는 플레이어 멘탈 케어 서비스가 있습니다!]
[감정 치료 관리자가 층계 대기실에 파견됩니다.]
이게 무슨 개소릴까.
알림창이 사라진 직후.
치지지직!
허공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3급 관리자 - 유에리트]
조금 전 결투장에서 내 앞을 가렸던 방어막과 유사한 방어막에 둘러싸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겹겹으로 뒤덮인 방어막은 그 내부에 있는 존재의 형체마저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내 손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관리자'.
그 빌어먹을 단어에 반응을 해버렸다.
콰아아앙!
뻗은 오른손 주먹에 방어막이 파편을 흩뿌리며 부서졌다.
조금 전의 빌어먹을 벽과는 달리, 썩 손쉽게.
내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쩌어엉!
왼손으로 하나의 방어막을 더 부수고 나서야, 부서진 방어막 속에 있던 존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가를 새하얀 천으로 된 안대 같은 것으로 가리고 있는 여성이었다.
분홍색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게 보였다.
"뭐냐, 넌."
"판데모니엄 14층계 이후부터 파견이 가능한 감정 치유 관리자입니다. 주로 플레이어님들의 우울증이나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파견됩니다."
유에리트가 말을 덧붙였다.
"현재 한유성 플레이어님에게 권장되는 것은 약물적 치료입니다. 첫 진료는 무료로 이루어집니다. 스마일 콤파운드를 추천해 드립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 수치가 모든 감정 수치를 웃돌게 됩니다."
스마일…뭐?
나는 어이가 없었다.
"…어떤 기준으로 약을 처방하는 건데?"
"전 한유성 플레이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현재 겪고 계신 감정 수치만으로 계산하여 그에 맞는 약을 처방해드릴 뿐입니다."
유에리트라는 관리자는 일정하게 낮은 음정으로 말을 이었다.
"처방을 거부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기계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감정은 결국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희석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분이 더 불쾌해졌다.
나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관리자를 붙잡고 시간을 끌 이유는 없었다.
"꺼져."
유에리트는 고개를 숙였다.
"첫 파견이라 플레이어님의 의사 존중 없이 소환된 점, 죄송합니다. 코인 상점의 우측 하단에 14층부터 새로 생긴 감정 치료 요청 버튼을 누르시면, 언제든 저와 면담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관리자란 작자가 정보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그건 궁금해졌다.
"그럼, 그딴 거 말고. 다른 걸 좀 물어봐도 되나?"
유에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제게 감정 치유 건을 제외한 대화를 나누는 건 불가능하지만 한유성 플레이어는 주목 등급 특급의 플레이어이기에 어느 정도의 문답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유에리트가 말을 덧붙였다.
"21세기 지구의 관점에서 보면 VVIP 회원에 속하신다는 겁니다. 제가 아는 선에서 답변할 수 있겠지만요."
명칭이 뭐든, 주목도가 높다는 게 딱히 좋게 들리진 않았다.
"첫 번째 질문, 관리자를 죽이는 건 가능한가?"
"네."
유에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테이지에서는 죽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층계 대기실에선 불가능합니다. 공격을 직격 당해도 고통을 느끼지도 않죠."
스테이지에서는 죽일 수 있다.
본인과 관련된 정보를 참 아무렇지 않게 알려주는구나 싶었다.
"탑 자체가 살아있는 존재가 맞다면, 올라가다 보면 그놈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소리냐?"
"제 영역을 벗어난 질문입니다만, 등반을 계속하면 알게 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호한 답변이었지만, 가능하단 소리에 가까웠다.
난 본래 하려던 질문을 세 번째에 꺼내 들었다.
"죽은 플레이어를 부활시킬 방법 같은 게 있나?"
유에리트의 대답은 직전과 같이 곧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제 권한 밖, 지식 밖의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는 모호함도 벗어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족했다.
아예 불가능하다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보다는 저런 식의 대답이 나았다.
지금으로서는.
"더 이상의 질문이 없으시면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어, 가라."
"층계 대기실에 계실 때는 언제든 저를 부르실 수 있습니다."
유에리트는 저렇게 말하고서도 아직도 안 사라지고 서있었다.
"우울감이 분노로 급속도로 치환되는 게 수치로 확인됩니다."
간다고 했으면서 계속 떠들어 댈 용건이 생각 나는 모양이었다.
"분노는 단기간의 우울 극복에는 효과적이지만, 그게 계속되면 자신을 갉아먹게 될 겁니다."
유에리트는 그제야 공간을 찢고 사라졌다.
우울을 분노로 치환하고 있다라.
그 지적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하수구에 처박히는 감정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목표를 세워야만 했다.
일단 올라간다.
계속 올라가서, 그 살아있는 탑이란 새끼랑 대화를 좀 해봐야겠다.
난 인벤토리의 앞쪽에 자리 잡고 있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그건, 화살통이었다.
반 이네르가 자신에게 준 화살통.
툭.
그 화살통을 들어 안을 살폈다.
화살통 안의 화살들을 하나씩 건드렸다.
"뭐야."
화살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화살통의 구석 모퉁이에.
그 잡힌 걸 꺼내 들었다.
새하얀색의 아주 작은 주머니였다.
[소형 아공간 주머니]
매듭을 풀면 주머니 속 아이템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물건을 화살통에 넣은 적이 없었다.
애초에 아공간 주머니 같은 걸 획득한 적도 없었으니까.
- 야, 화살통. 내가 선물로 줬는데 잘 챙겨야지. 어차피 안 쓸 거라고 너무 막 흘리고 다니는 거 아니냐.
여섯 번째 뿌리에 진입하기 전에 이 화살통을 반이 가져다주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나는 주머니의 매듭을 풀었다.
그러자, 주머니가 열리며 안에 있던 아이템들이 쏟아져나왔다.
안에 든 가장 눈에 띄는 아이템은 서적이었다.
반 이네르가 사용했던 검술인 피엘뷔르트의 검법서.
검법서의 첫 장을 펼쳤다.
그 첫장에는 글이 적혀져 있었다.
- 한유성.
- 난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할 거야.
이 두 줄이.
글의 전부였다.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저렇게 말을 하는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선명한 문장이었다.
이 글을 쓴 게 반이 분명할 정도로, 반 이네르다운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모르겠다. 아직."
왜 네가 살아남을 확률이 있었던 결투를 그렇게 쉽게 포기했는지.
첫 장에 무언가 남겼다면, 끝장에도 있을까.
그 직감은 들어맞았다.
- 포기는 하지 마.
"어."
물론이지.
홀로 13층의 전투를 복기했다.
계속 반 이네르라는 존재가 머릿속을 맴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사고하는 것을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속 곱씹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루가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자고 일어나도.
머릿속이 그렇게 개운해지진 않았다.
인벤토리에서 꺼낸 야구공을 매만졌다.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아간다.
다시 나아가야한다.
이제야 슬슬, 초월자 갤러리 단말기를 꺼낼 생각이 들었다.
"개판이네."
─살아있냐???? 등반자야??
─14층? 14층? 14층? 삶?
─ㄹㅇ 일단 제목이랑 내용에 .만 찍어도 되니까 글을 올리렴, 착하지??
─ㅅㅂ 나와, 죽은 게 아니라면 나와아아ㅏ아아악!!!!!!!
─호에에에에, 호에에에 여기 사람이 있어요.
글들의 제목은 하나같이 내 생사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 글은 여러모로 두서가 없었지만, 그래도 초월자 갤러리 선배들은 잘 알아먹을 거다.
생각보다는 섬세한 내 상담가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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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층 시나리오의 연장되었다니.
예상치도 못한 전개에 두통이 치밀었다.
새로 갱신된 퀘스트는 생존.
그리고 그 퀘스트 명 다음에 뜬 퀘스트 기간도 있었다.
생존해야 하는 퀘스트 진행 시간은 60일.
대략 두 달이란 기간을 막연히 살아남으라니.
그것도 날 손가락 하나로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작자가 날 사실상 납치한 이런 상황에서 말이다.
난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그 노력 덕분에 정신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몸을 짓눌렀던 압박감이 그제야 사라졌다.
다행히, 날 죽이려는 생각은 없어 보였다.
무식하게 강력했던 거대한 힘이 완전히 사라진 걸 보면.
난 몸의 중심을 서서히 되찾았다.
“…뭡니까?”
눈앞에 서서 날 바라보고 있는 사람.
[천마]를 향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건지.
천마는 싱긋 웃어 보였다.
“널 납치한 것이지. 이 천마신교에 말이다.”
“그러니까 왜요.”
천마라는 작자는 날 손쉽게 죽일 수 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얌전히 잠자코 있을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천마가 마음을 먹으면 죽는 건 매한가지니까.
다행히 천마는 내 태도 때문에 날 죽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네가 6위계에 도달한 이후, 여섯 달의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는 내가 오르고 있는 탑의 시간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번 한 번만으로 이계 배경보다 무림 배경의 시간 흐름이 느리다고 단언을 내릴 수는 없었다.
초월갤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시간 흐름은 층계마다 다를 수도 있다고 했으니.
난 일단 가만히 천마의 말을 들었다.
“그 여섯 달이란 시간 동안 전 무림을 뒤졌으나, 네놈을 찾아낼 수 없었다.”
난 슬슬 천마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예측할 수 있었다.
“중원 무림에서 본좌의 시선 바깥에 있을 수 있는 존재는 몇 없지. 같은 위계라도 마음을 먹으면 알아낼 수 있는데. 6위계인 네가 본좌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란 말이다.”
그런데 내가 그걸 해냈으니, 그 점을 아주 수상하게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섯 달 동안 어디에 있었지?”
내가 알고 있는 지식 선에서는 돌발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초월자 갤러리 선배들에게 들은 내용이 있었다.
- 주딱) 탑 속 고위계로 갈수록 ‘탑’의 존재는 믿는다.
- 주딱) 받아들이는바, 그 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 빛의검) 물론 그렇다고 자신들이 사는 세계가 그저 탑 세계에 존재하는 세계라고 생각을 하진 않는다.
- 대마법사) 우리가 탑을 종결할 때까지 과연 탑 내의 서사 세계는 실존하는 세계인지 밝혀내지 못했으니까, 사실 진위는 모르지.
- 대마법사) 그저 탑의 허구 세계일 뿐인지, 아니면 정말 또 다른 세계에 우리가 잠시 소환되었던 건지 말이야.
- 마룡왕) 벨투이- 보통 정론이라고 취급받는 건 허구 세계라는 가설이지만 말이예요오.
내 생각은.
나도 잘 모르겠다였다.
단, 27층까지 오를 동안 겪은 일을 되돌아보면. 실존하지 않는 세계치곤 너무 겪은 일들이 너무 생생했다.
짧고 긴 모든 인연이.
난 머릿속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주딱 선배의 말대로라면, 차라리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을 수 있었다.
“말이 안 되는 소리 같다고 뭐 목을 검으로 쳐버린다던가 심장을 터트려버리면 안 됩니다.”
천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좌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러실 수 있으시잖아요.”
천마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거야 그렇지.”
천마는 말을 덧붙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당최 모르겠다만, 해봐라.”
“알겠습니다.”
별수 있나.
일단 질러봐야지.
“탑이란 게 있습니다.”
“탑?”
난 설명을 이어나갔다.
“한 층계씩 올라가면서, 그 층계를 해결하면서 성장을 하는 겁니다.”
“음? 뭐 1층, 2층 그렇게 말인가?”
“예.”
정공법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다 설명을 했다.
그래야 이 천마란 작자가 나를 대략 반년간 못 찾은 걸 이해할 테니까.
“네가 6위계를 달성한 게 15층계…거의 10층 전이라는 뜻이구나.”
“그렇죠.”
“네 말이 사실이라면, 무식한 성장세구나.”
“그 성장세가 지금 좀 막혀있거든요.”
“어디 가서 그런 소리를 하면 돌을 맞을 텐데.”
“원래 본인 고통이 제일 심하게 느껴지는 거 아닙니까.”
천마가 내 말에 피식 웃었다.
“그거야 그렇다만.”
다행히 징징거림에도 어느 정도 동감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해는 했다만, 여전히 믿어지진 않는구나.”
“음, 잠깐만요.”
난 결국 인벤토리를 열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게 제가 한 말들이 진짜라는 증거입니다.”
천마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내 손에 들려있던 게 천마의 양손에 올라갔다.
“…뭐냐? 이건?”
내가 건넨 것의 물건의 뚜껑을 연 천마는 그 물건에 코를 갖다 댔다.
“…생긴 것도 이상한데 냄새도 이상하구나.”
“드셔보시죠.”
“먹는 것 같긴 한데….”
천마에게 준 건 요리였다.
27층 층계에 진입한 지 10시간밖에 시간이 흐르지 않았기에 아직 형체를 잃지 않고 있는 음식, [크림 베이컨 파스타]였다.
천마는 미간을 살짝 구긴 채 크림 베이컨 파스타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맛은 있구나.”
“그렇죠?”
천마는 이제 내 말을 얼추 믿는 모양새였다.
“아, 본좌도 네게 말해줄 게 하나 있었구나.”
“뭔가요.”
“네가 도와주었던 연설아의 남매, 연유신은 본좌의 두 번째 제자로서 신교에서 수련을 하고 있다.”
내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진짭니까?”
천마는 그래도 천마답게, 입에서 음미하고 있던 파스타를 삼킨 이후에 말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본좌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난 소름이 돋았다.
이거….
호북연가가 정파의 오점 취급을 받는 게 오명이 아니라, 마땅히 받을 만한 취급이었나?
“본좌의 제자와 함께 수련하고 있다.”
천마는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백리세가의 장남을 해하고 도주하던 연유신을 신변의 안전을 확보해준 셈이지. 연유신의 말에 따르면, 치명상에 가까운 피해는 입혔지만 죽이진 않았다고 했었지. 아.”
그렇게 말을 한 천마의 눈에는 이채가 흐르고 있었다.
뭐야.
또 어떤 술수를 부리려는 거냐.
“네가 본좌의 제자. 그리고 연유신과 대련을 해서 네 실력을 향상 시키면 되겠구나. 연유신이 널 마주하고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한 적도 있다.”
나도 연유신이 이곳 천마신교에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한번은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든 참이었다.
“근데 방금 제가 한 가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천마는 내가 묻고 있는 게 뭔지 빠르게 알아차렸다.
“내가 지금 밟고 서 있는 땅이 허구의 세계일지도 모른다는 거 말이냐?”
“예.”
“당연히 개소리라고 생각하지.”
천마의 대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설령, 네 말에 한 치의 거짓이 없다고 해도. 내게 넌 그저 이방인의 입장일 뿐이다. 내가 살았음 쉬는 세계에 들어온 이방인.”
이방인.
그 말이 썩 아프게 다가오기도 했다.
나의.
탑을 오르는 ‘플레이어’의 입장에 이방인이란 호칭은 꽤 잘 들어맞았으니까.
탑을 오르는 동안, 어떤 세계에도 명확히 소속될 수 없는 처지.
“내가 살아온 생의 흔적이 있는데 이 세계가 허구일 리는 없지 않느냐.”
“…그렇죠.”
저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었다.
“가자.”
천마는 검지로 네모난 창밖을 가리켰다.
“제자와 연유신은 같은 곳에 있으니.”
***
천마의 뒤를 따라 걸었다.
천마신교의 풍광은 광활했다.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무림계에서 가장 강대한 무력 집단 중 하나라고 했으니.
웅장한 전각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압도적인 풍경의 건물들 아래로, 무수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각주들이 네게 호기심이 많은 모양이구나.”
천마는 그저 얇은 초승달 모양의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을 뿐이지만, 내겐 그 말이 적잖이 서늘하게 다가왔다.
“각주요?”
내 물음에 대답을 한 건, 천마가 아니었다.
“오각주(五閣主)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방금 있던 장소의 문을 열자마자 그 뒤부터 쭉 따라온 흑의를 입은 사내였다.
“이 천마신교에는 다섯 개의 각(閣)이 존재합니다.”
[NPC 패혼십위(覇魂十衛) 칠위(七衛), 6위계 정운복]
패혼십위.
천마신교의 교주, 천마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호위대 열 명이라고 했다.
아무리 봐도 천마에게 호위대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지만.
정운복은 내게 친절히 설명을 이어갔다.
주군의 손님이란 명목으로 존댓말을 계속 쓰면서 말이다.
“검각, 창각, 권각, 천각, 살각.”
지금 나를 보고 있는 건 총 둘이었다.
검각주와 천각주.
[NPC 검각주(劍閣主), 7위계 표위헌]
[NPC 천각주(天閣主), 7위계 목연]
표위헌은 강골을 가진 사내였다.
피가 연상될 정도로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천각주는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여성이었다.
둘 다 천마의 앞이기에 기세를 꺼트리고 있는 것 같은데.
혼자서 마주 했을 때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설마 가만히 있는데 공격을 하고 그러겠어?
“오각은 저희 패혼십위와 달리, 평소 각주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물론, 각주는 교주님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릅니다.”
난 감이 잡혔다.
“독자적인 무력 집단을 가진 최측근…그런 느낌입니까?”
“예, 맞습니다.”
“간혹 교주님보다 각주를 더 따르는 부하들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네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정운복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단언했다.
“각주들과 교주님의 무력 차이가 그 정도로 좁혀진 적은 신교의 역사에 없습니다.”
어떤 일이 생겨도 천마에게 위해가 갈 일은 없으니 내가 염두에 둘 바가 아니라는 뜻이겠지.
아주 잘 알았다.
그렇게 각주 둘을 지나치고.
천마의 걸음이 드디어 멈춰 섰다.
“제자야.”
천마가 뒷짐을 진 채 말했다.
계속 들으면서 느낀 건데, 목소리는 참 좋아.
“무림맹 주최의 쟁천무회 우승자다. 쓰러트려라.”
“예?”
그 좋은 목소리로 뭔 개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의문을 내뱉기도 전에.
쐐애애애애액!
고즈넉한 지붕 위에서 초신속의 원거리 참격이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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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안으로 보일 만큼 지근 거리에 다가왔을 때 날아온 참격을 쳐냈다.
검기의 파편이 자욱하게 흩날렸다.
시선을 위로 들어 올리자 전각 위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NPC - 천마 일제자 6위계 소향월]
흑의를 입은 여성은 검을 든 여성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검을 들고 우선 상황을 보았다.
상황이라 할 것도 없었다.
소향월이 무식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고민은 선택지가 다수일 때나 할 수 있는 거다.
검을 들어 올려 수평으로 찔러 들어오는 공격을 맞받아쳤다.
원거리 참격을 막아냈을 때, 수준 파악은 어느 정도 됐다.
힘을 많이 빼고 상대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8할.
난 그 정도의 힘은 응당 사용할만하다고 판단했다.
카가각!
칼날의 마찰에 따라 불빛이 퍼져나갔다.
소향월의 검로와 내 검로가 대기에서 계속 격돌했다.
일곱 번째 마찰이 생긴 후.
옆에 서 있던 천마에게서 한 줄기의 옅은 기세가 흘러나왔다.
그 기세 때문인지, 소향월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도 움직임을 멈췄다.
천마는 자신의 날 바라보았다.
“밑천을 대놓고 드러내고 싶진 않지?”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죠.”
방금 오는 길에 마주했던 각주라는 양반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연무장 정도로 보이는 현 장소에서 수련하고 있던 걸로 보이는 무사들의 시선이 보였다.
“여기까지 하도록 해라. 어차피 시간은 꽤 남아있으니.”
60일의 기한을 말해서 그런가?
난 의문이 들었다.
무림인이 두 달이란 시간을 길게 여기진 않을 텐데 말이지.
아직 긴장은 전혀 풀지 못하고 있었다.
천마신교.
괜히 퀘스트 내용이 생존이 아니겠지.
그때.
저벅.
기이하게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왜 익숙한지는 머리 위에 있는 이름 창을 보고서 알 수 있었다.
[NPC 호북연가 장남 6위계 연유신]
“은공께서 제 동생을 구해주신 분이시군요. 감사드립니다.”
이쪽도 6위계구만.
“저도 당신이 천마신교에 있는 걸 방금 듣고 좀 놀라긴 했죠…연설아가 무결한 피해자인 줄 알았는데 좀 결점이 있는 피해자였더라고.”
연유신은 내 말에 입꼬리를 올렸다.
“다 각자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이지요. 아, 백리세가의 장남을 죽인 건 제가 아닙니다. 대련한 것도 맞고. 치명상에 가까운 피해를 준 것도 사실이지만요.”
난 놀랍게도 연유신의 말을 들을수록 그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계속 천마신교에 있을 생각입니까?”
내 질문에 연유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하고 있는 벽이 곧 무너질 것 같아서. 그것을 우선 해결해 보고 천마신교를 나갈 생각입니다.”
옆에서 피식 흘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천마의 웃음이었다.
“지금 네가 있는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막 들어왔다가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느냐.”
난 천마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절 여기서 내보내 줄 생각은 있으신 거죠?"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60일. 그 기간을 네가 말했지 않나. 어차피 한 번 이 천마신교에 발을 들인 이상, 이곳의 안이든 밖이든 네 목숨을 노리는 것들은 많을 테니 여기서 지내라.”
이건 또 맞는 말 같긴 했다.
“…뭘 하란 말씀입니까?”
천마가 내 물음에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련이지. 네가 늘 하던 걸 여기서 하면 된다. 너도 원하는 바가 그거 아닌가? 권역을 창안하는 것.”
“맞습니다.”
내 대답에 소향월과 연유신의 눈에 이채가 띄는 게 보였다.
입을 연 건 연유신이었다.
“오호, 은공도 권역 창안의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난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순순히 인정했다.
“예.”
“저도 그 상태입니다.”
“얼마 정도?”
“1년이 조금 지났습니다.”
난 아직 그 절반 정도의 고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연유신이 안타깝다는 생각은 들지는 않았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정체기의 수준을 보면, 그게 두 배로 늘어나는 것 정도는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척-
천마는 갑자기 내 오른손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괜찮다. 내가 그 벽을 어느 정도 허물어줄 방안을 마련해줄 테니.”
그게 대체 어떤 방안일지 예상이 안 되었지만, 여기서 묻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시선이 또 느껴졌다.
소향월의 시선이었다.
“몇 살?”
“어?”
“몇 살이냐고.”
뜬금없이 나이를 물어보는 저의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같은 위계.
그리고 비슷한 벽에 가로막혀 있는 사람이라 나이를 물어보는 모양새였다.
“스물한 살.”
“…젊구나.”
뭘 젊어.
별 차이도 없겠구만.
“그쪽은 몇 살인데요.”
“스물일곱.”
천재는 맞군.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천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선, 본궁으로 귀환하지.”
천마는 돌아오면서도 이상한 소리를 해대었다.
“넌 60일이 끝나기 전에 각주 중 한 명이랑 싸우게 될 거다.”
아주 많이 이상한 소리를 말이다.
“위계는요.”
“7위계 초위 이상이 아닌 각주는 없지.”
“싸우는 건 목숨 걸고?”
내 질문에 천마가 피식 웃었다.
“그럼, 목숨을 싸우지. 대련을 할 생각이었느냐?”
한 마디로.
아직 권역의 창조도 해내지 못하고 있는 내가 최소 7위계 초위의 무인과 싸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60일 이내로.
난 이 27층이 잘못하면 내 묫자리가 되리란 걸 직감했다.
내가 왜 각주 한 명과 싸워야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지만, 천마의 태도로 보아 이미 정한 바를 물릴 인간이 아니었다.
“방안이 대체 뭡니까. 제 벽을 허물.”
“연시옥(延時獄).”
천마는 말을 덧붙였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방이다.”
아.
그래?
천마의 말은 매우 쉽게 이해가 되었다.
이건 서사 매체 성장물에서 아주 많이 등장하는 클리셰였으니까.
난 얌전히 납득을 했다.
“연시옥은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 장소다. 그러니 준비가 될 동안 대련이나 하고 있거라.”
“준비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죠?”
“이틀이면 충분하다.”
진짜 얼마 걸리지 않았다.
“소향월과 연유신을 대련 상대로 붙여주마. 그리고 연시옥이 완성되면 들어가면 되고.”
“알겠습니다.”
천마는 그래도 방은 개인 방을 내주었다.
꽤나 널찍한 방을.
기감을 펼쳤으나, 주변에 무언가가 느껴지는 건 없었다.
다행히 천마도 이미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내 사생활까지 궁금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난 썩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방의 천장을 먼저 찍고. 옆면도 한 차례 촬영한 후 초월자 갤러리를 열었다.
이번에는 쓸 내용이 꽤 많았다.
제목 : 천마에게 납치된 썰 푼다.
작성자 : ㅇㅇ*
첨부파일 : 18230912830940.jpg
천마신교다. 북해빙궁 퀘스트 끝내자마자 갑자기 슉 나타나더니 납치당했다.
뭔 놈의 이상한 일이 계속 일어남.
뭔 층계 시나리오가 연장되었다고 뜨던데.
아, 호북연가 연설아 오라버니 연유신이 여기 있네.
말은 치명상은 입힌 건 맞는데 죽이진 않았다고 하는데 이것도 좀 의심되긴 해.
억울하게 가문이 개판 난 줄 알았더니 용의점이 가득함.
천마가 날 납치한 이유는 놀랍게도 그냥 나에 대한 호기심인 듯.
그리고 내가 강해지는 거에 관심이 있는 듯.
아, 연시옥이란 곳에 날 처박으려는 것 같은데.
시간 느리게 흐르는 공간.
얼마나 느리게 흐를지는 아직 모르겠는데.
그리고 그거 끝나자마자 각주 중 한 명이랑 싸워야 할 것 같은데.
왜 천마가 갑자기 나랑 각주 하나와 싸움을 붙이려고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최소 7위계 초위…답이 없군?
ㄴ 유명한거지) 그쪽 천마도 정상은 아니로군.
ㄴ ㄹㅇㅋㅋㅋㅋ
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 층계 시나리오 연장이 뭔 20층대에 뜨냐.
ㄴ 무슨 억까란 억까는 다 끌어당기고 앉았냐.
ㄴ 주딱) 저 말대로다. 보통 층계 시나리오 연장은 40층계 이후에나 나오는 게 정론인데. 고생을 꽤 많이 하겠구나.
ㄴ 엘프다) ㄹㅇ 왜 시나리오 연장이 지금 이루어지는 것임??
ㄴ 대마법사) 호북연가는 상황이 여러모로 골 때리게 됐네.
ㄴ 시궁창검성) 각주 하나와 싸우게 만들려는 의도는 단순히 네 가능성의 한계가 궁금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ㄴ 빛의검) 아직 권역을 창안해내지 못했으니, 벅찬 상대가 될 순 있겠구나.
ㄴ 빛의검) 검성의 말대로 거나, 각주 중 하나를 죽여야 할 이유가 있는 상태인데 널 이용하려는 거겠지.
ㄴ 현자) 둘 다일 확률이 다분해 보이오.
ㄴ 마룡왕) 벨투이- 이겨낼 수 없는 일은 없는 것이에요오.
ㄴ 얼음여왕) 꽁꽁…! 얼어붙은…! 제가 준 아이템은 잘 사용했나요?
ㄴ ㅇㅇ*) ㅇㅇ 북해빙궁 일은 덕분에 잘 끝냈음.
무언가가 한참은 더 튀어나와서 문제지.
ㄴ 天魔) 죽일 거라면 당장 자비롭게 단숨에 죽여버려야지. 납치라니, 그쪽의 천마는 근본이 없구나.
ㄴ 수왕) 갈!!!!!!!!!!!! 천마야, 동명이인의 죄를 책임지고 반성을 하도록 하랏!!
ㄴ 天魔) ?
ㄴ 무녀) 하와와, 천마는 어리둥절이와요.
ㄴ 상상을 뛰어넘는 개소리를 하는데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지 ㄷㄷ
ㄴ 수왕) 시끄럽다아!!!
ㄴ 天魔) 탑의 천마는 강한가?
ㄴ ㅇㅇ*) 전에 말했듯이 8위계로 뜨고…그냥 직감적으로 붙으면 질 것 같은 느낌은 확 왔지. 말이 질 것 같다는 거지, 한 대 맞으면 즉사 당할 느낌이 확 온다는 거임.
ㄴ 당하연) 그 느낌은! 그저 느낌이 아니라 정답인 검다!!
ㄴ ㅇㅇ*) 그야 그렇겠지.
지금은 범접할 수도 없는 존재로 보일 뿐이다.
ㄴ 당하연) 연시옥은…! 아마 현실에서는 하루의 시간이 흘렀는데 연시옥 속에서는 한 달이 흐른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검다!
ㄴ 주딱) ㅇㅇ 저 정도 효과일 거야.
ㄴ 주딱) 더 많이 느리게 흐르는 공간도 있긴 한데, 그건 무림 쪽이 아니라 이계 쪽에서 나와.
그렇구만.
ㄴ 天魔) 죽지 마라, 특히 네놈을 지금 납치했다는 그 세계의 천마에게는.
ㄴ 天魔) 천마의 이름을 달고 있는 다른 놈에게 네가 죽으면 본좌의 기분이 아주 불편할 것 같으니.
초월자 갤러리의 갤질은 여기까지 하고 단말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하루는 온종일 대련을 했다.
소향월와 연유신.
둘과 번갈아서 치른 대련이었다.
각각 일대일로 행한 대련은 전투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앞둔 벽을 허무는 데는 특별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예상치 못한 만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각주 중 한 명인 천각주 목연이 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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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각주.
목연은 날 바라보았다.
“너구나?”
목연의 시선은 흥미가 가득 차 있었다.
날 아주 신기한 무언가로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천마의 호기심을 단단히 끌어낸 모양인데. 네가.”
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냥 그분이 어지간한 일에는 다 호기심을 가지는 분인 거 아닙니까?”
목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천마가 그것까진 말을 안 한 모양이구나? 너 찾아내려고 계속 중원 무림 전체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닌 거. 물론, 염탐당한 쪽이 그걸 눈치챈 적도 없지만 말이야.”
목연은 말을 덧붙였다.
“아마, 천마는 널 검각주와 싸우게 하려는 걸 거야.”
검각주.
어제 봤던 그 붉은 머리카락의 아저씨 말인가.
이름이 표위헌이었지.
“강합니까?”
내가 싸워야 할 상대라는 소리를 들으니, 내가 그 검각주란 자와 싸워야 하는 이유보다는 강함의 수준이 더 궁금해졌다.
“강하지.”
목연의 이어진 말들은 내 기분을 싸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7위계 중위(中位)야.”
좆됐군.
조금의 과장이나 축소가 없이, 아주 명백히 좆됐다고 할 수 있었다.
“그간 꺾은 적들도 하나 같이 7위계 이상이었고 말이야. 게다가, 동격인 중위(中位)도 한 명 죽였지.”
목연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목연이 내 질문에 대답을 잘해주는 김에 자세히 물어보기로 했다.
“7위계 중위…정확히 누굴 죽인 건지도 알고 계십니까?”
“모용세가 전대 가주, 모용현강.”
모용세가의 전대 가주.
이름값도 높은 사람을 죽였네.
“검마(劍魔) 표위헌. 모용현강을 죽인 걸로 그 이름을 알렸지. 원래 유명하긴 했지만.”
“그렇군요.”
검각주는 말 그대로 직위고. 검마라는 별호가 따로 있었다.
목연은 설명을 이었다.
“천마가 검마를 죽이려는 게 귀찮아서 네게 떠넘기려는 걸 수도 있지.”
“죽이려는 이유는 있을 거 아닙니까.”
“단순해.”
목연은 하늘을 가리켰다.
“놈이 헛소리를 했거든. 사람을 씹어먹으면 저 너머의 경지를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이야. 그리고 실제로 그 식인의 행위를 행했어. 요마(妖魔)와 함께 놀더니, 성질이 좋지 않은 부분까지 닮아간 모양이더라.”
난 또 궁금한 게 늘었다.
“사도인 당신들도 식인…인육을 먹는 것을 명확하게 부정적으로 보는 겁니까?”
목연은 두 눈을 초승달처럼 기울였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별생각을 안 하는 쪽이겠지. 신경도 안 쓰고 말이야. 나도 그렇다.”
목연은 날 지그시 바라보았다.
“물론 검각주가 천마를 거슬리게 지점은 그게 아니야. 그릇된 관념을 고집하는 게 문제지. 감히 그 방식으로 천마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굳게 믿는 것. 그게 천마의 옅은 분노를 끌어냈겠지.”
난 대략적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그 같잖은 믿음을 네 손을 빌려 부수고자 할 뿐일 거야.”
그 감정을 이해하는 데는 좀 많이 걸릴 것 같다만.
“연시옥. 그곳에 날 집어놓고 수련을 시킬 것 같은데. 어떤 방식일 것 같습니까?”
“흠, 꽤나 고생을 좀 하겠구나. 방식은 대련일 거다.”
“대련 말입니까?”
“응.”
“연시옥에 들어가는 건 저 혼자 아닙니까. 대련을 누구랑 하는 거죠?”
“그건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 기대나 하고 있어라.”
그럼에도, 목연은 아주 친절했다.
내 원래 생각보다는.
대화가 완전히 끝이 났다고 여긴 때, 목연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근데 진짜 다른 세계에서 온 거냐? 그…제육 덮밥인가 무언가를 먹긴 했다만 아직 긴가민가하긴 한대.”
“…아, 그 빼앗긴 걸 같이 드셨구나.”
어젯밤.
코인 상점에서 구매해 들고 들어온 [크림 베이컨 파스타]를 천마에게 뜯긴 날.
이런 거 또 없냐며 달려든 천마에게 [제육 덮밥]도 뜯겼다.
“그래도 혼자 먹지 않고 나눠 먹었다니, 덕분에 천마 님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개선되었습니다.”
목연의 눈에 이채가 띄었다.
“원래 천마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더 안 좋았던 거야?”
천마에 대한 본래 인식이라.
“사람 하나를 납치하고. 가지고 있던 음식들을 다 빼앗은…어, 거마(巨魔)요.”
“음! 뜸을 들인 걸 보니 거지라고 생각했구나!”
거, 정답이오.
뭔 놈의 천마가 먹을 것을 왜 이렇게 많이 빼앗아?
***
난 천마가 기거하고 있는 본궁으로 향했다.
그러자, 눈앞에는 기괴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천마가 두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천마의 긴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는 여성이 한 명도 보였다.
[NPC 천마의 시종 여린]
뭐여.
두피 마사지여?
“으음….”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에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아무리 봐도 두피 마사지가 맞군.
천마의 두 눈이 천천히 떠졌다.
천마는 날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음, 왔나. 한유성.”
“네, 왔습니다.”
천마가 턱짓을 하자, 시종은 고개를 깊숙이 숙인 뒤 사라졌다.
천마가 스트레칭을 하듯 목을 천천히 돌렸다.
“이제 연시옥에 들어갈 차례구나.”
“정확히 뭘 얼마나 있어야 하는 곳입니까?”
“네 몸과 정신이 버틸 수 있는 시간 동안이면 상관없다만.”
몸과 정신.
“네가 여기서 생존해야 하는 기간, 이제 하루 지나서 59일 남았나?”
“예.”
“그럼 그 기간을 일단 기준으로 잡으면 되겠구나. 연시옥에서의 시간은 하루당 30일이다.”
30배의 시간을 더 살 수 있다니, 이거 정말 개이득인 걸?
-라고 생각하기엔 아직 경험해본 게 없었다.
난 일단 경험을 해보기로 했다.
“준비된 거면 들어가죠.”
“그래, 경험해보는 게 좋겠지”
“근데 어떻게 만든 겁니까?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공간 같은 건.”
천마가 짓궂게 웃었다.
“들어가서 겪으면 어떻게 만든 건지 절로 알게 될 거다.”
난 일단 순응하기로 했다.
천마가 나를 안내했다.
짙은 안개 속에 가려진 문의 앞에 섰다.
“그냥 들어가면 된다.”
난 발을 들였다.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다가온 건, 광활하다는 인상이었다.
옥(獄)이라기에, 커도 사방이 틀어막힌 층계 대기실만 한 공간일 줄 알았는데.
이건 자연의 일부를 떼어놓은 것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리고 그 공간의 중앙에서 흐릿한 사람의 인영이 나타났다.
[NPC - 벽운철 6위계]
천마의 말을 빌리자면, 눈앞에 있는 존재는 복사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간, 검각주와 싸운 이들의 복사체라고 할 수 있었다.
검각주.
검마 표위헌의 손에 죽은 이들의 혼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이 연시옥 속에서는 살아 숨 쉬고 있는 멀쩡한 사람과 같았다.
놈은 복사체인 주제에 빌어먹게 강했다.
이틀간 만나며 대련했던 소향월과 연유신 또한 6위계였다.
둘 다 나처럼 권역을 열지 못한 상황이라서 그럴까,
목숨을 걸지 않는 대련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공격의 범주가 그렇게 드넓지 않아 보였다.
근데 벽운철은 6위계인데 계속해서 내 숨을 턱 차오르게 만들었다.
벽운철은 권역을 발현하지 않고도 내가 최선을 다하게 했다.
결국은 때려눕힐 수 있었지만 말이다.
벽운철의 심장을 검으로 관통시켰다.
벽운철의 몸뚱이가 뒤로 고꾸라졌다.
사아아…
그의 몸뚱이가 곧 진회색의 연기를 흩뿌리며 산화를 했다.
털썩-
나도 몸에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였다.
바닥에 대자로 뻗은 나는 초월자 갤러리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네가 연시옥에 들어앉아 있는다고 본좌가 그걸 계속 관음하고 있지는 않을 테니, 알아서 살아가면 된다.
천마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난 천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관음을 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그냥 갤질을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다.
단말기 자체는 보일 리 없으니, 왜 허공을 보고 있냐고 물어보면 거기에 대해서만 적당히 둘러대면 되겠지.
연시옥의 풍경을 초월자 갤러리 단말기로 촬영했다.
제목 : 연시옥 1일 차 진행 중.
작성자 : ㅇㅇ*
일단 생각보다 감옥 같은 곳은 아니네. 숲에 가깝다. 이거.
상대하고 있던 적은 6위계 검사임.
어제 갤러리에 올린 내용대로, 검각주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 확실한 것 같고.
방금 제압한 6위계 검사는 검각주가 생전에 죽였던 사람임. 이쪽 천마의 설명에 따르자면.
ㄴ 상대해야 할 놈이 죽였던 자들을 차례차례 상대하는 느낌으로 진행되나 보구만.
ㄴ ㅇㅇ*) ㅇㅇ 맞음.
ㄴ 天魔) 연시옥은 그쪽 무림 세계관 속 천마신교의 전유물이다.
ㄴ 天魔) 가장 쓸만한 특이점은 연시옥 내에선 죽어도 부활한다는 점이다.
ㄴ 빛의검) 대신, 연시옥에서 이뤄낸 육체적 성장은 유지되지 못할 거다. 내공도 마찬가지고.
ㄴ 빛의검) 얻어갈 수 있는 건 전투 그 자체의 경험치와 깨달음.
ㄴ 당하연) 하지만 권역은 육체보다는 심상, 그리고 의지와 직결된 부분이라 연시옥 내에서 각성을 해낸다고 해도 바깥에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검다!!
ㄴ ㅇㅇ*) 그렇구만.
하긴, 육체적 성장까지 유지되면 계속 연시옥에 처박혀 있지 바깥으로 나올 필요가 없겠지.
ㄴ 절대군주) 쓰러트린 6위계는 권역을 각성해내지 못한 자였나?
ㄴ ㅇㅇ*) 그건 모르겠는데.
ㄴ 절대군주) 권역을 각성해낸 자인데 그걸 써먹지 않고 제압당한 거면, 다시 네 눈앞에 나타나서 전투를 걸 때가 있을 거다. 내가 경험한 바는 그랬으니까.
권역을 각성했는데 권역을 쓰지 않고 죽은 복사체는 다시 나타나서 권역을 사용할 수 있다.
절대군주 선배의 그 말이 맞다는 건 곧바로 알 수가 있었다.
[NPC - 벽운철 6위계]
분명 산화시켰던 복사체가 다시 나타났다.
오른손에 쥔 검에 무언가 험한 것이 휘감겨져 있었다.
그게 당신의 권역인가.
콰과과과과과과!
난 무색의 빛과 함께 찔러 들어오는 궤적들을 직시했다.
무수한 찌르기가 전방위적으로 행해졌다.
이미 나를 스쳐 지나갔던 검의 궤적들이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기존에 날아왔던 참격과 탄막 게임에서 벽에 맞아 되돌아오는 탄환 같은 참격들.
그 모든 것들을 피해내고. 또 부숴내야 했다.
난 500여 번에 이르는 각양의 섬광을 부숴냈다.
공격에 직격당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나, 부수는 도중에 머리통이 으깨자는 감각을 몇 번이고 느꼈다.
모조리 간발의 차이로 피해냈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 판단이 느려졌다면 그대로 즉사였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대기가 요란하게 출렁거렸다.
쩌저정!
검광의 파편들이 자욱하게 흩어졌다.
결국, 모조리 검격들을 깨부수고.
다시금 벽운철의 심장을 꿰뚫었다.
벽운철은 다시금 산화했다.
또다시 땅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그리고 초월자 갤러리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제목 : 뒤이이질 뻔했네.
작성자 : ㅇㅇ*
운철 씨가 슨배들의 예언대로 권역 쥐고 다시 나타났음. 겨우 다시 쓰러트림.
계속 이렇게 대련하면서 전투 경험치 좀 쌓고. 권역 좀 창안해봐야 할 듯.
ㄴ ? 님 사라진지 10초가 안 지났는데?
ㄴ 점마 지금 연시옥에 들어가있잖냐. 시간을 존나 효율적으로 써먹고 있는 거지.
ㄴ 초월자 갤러리 되는 것도 신기한데. 등갤은 보는 건 됐어도 글 쓰면 암호화되고 그러지 않았었냐.
ㄴ 주딱) 맞아. 그랬지. 다행인 거지.
존나 다행이구나.
눈팅만 할 수 있었다면 정신이 나갈 뻔했다.
ㄴ 당하연) 스으읍! 탑 속 무림이 아니었다면 이 당하연! 가는 검다-!라고 외치고 당장 찾아갔을 텐데 아쉬운 검다!!!
ㄴ 무녀) 하와와, 그랬다면 일찍이 다 찾아갔을 것이와요.
ㄴ 유명한거지) 그랬을 거요.
ㄴ 시궁창검성) 시간이 남아도는 김에 매화검법도 수련하도록 해라.
차원 간 거래로 일전에 매화검법을 받은 바 있었다.
ㄴ ㅇㅇ*) ㅇㅇ 다 훑어보려고.
검성 선배의 말대로 매화검법도 보고. 가진 검술들을 다 자세히 뜯으며 수련할 생각이었다.
내가 창안할 권역에 필요한 과정이란 확신도 들었다.
ㄴ 얼음여왕) 꽁꽁! 얼어붙은…! 힘내세요!
ㄴ 빛의검) 운용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으니, 여유를 가져라.
ㄴ ㅇㅇ*) 알겠어.
숨을 좀 고른 뒤, 초월자 갤러리를 껐다.
직후.
쩌적!
또다른 누군가가 공간을 찢고 튀어나왔다.
계속 싸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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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살아있음.
작성자 : ㅇㅇ*
- 14층 층계 대기실임.
반이 죽었어. 나 때문에.
한유성은 그 글을 시작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13층의 [리뉴얼]에 대한 이야기와. 본래 지난 기수였던 반 이네르가 왜 13층 층계에 남아 있었는지.
그 모든 이야기를 달았다.
- 그리고 상대방의 촛불을 꺼야 이기는 결투를 치르게 됐어.
근데 그 결투의 시작 전에 반이 자신의 촛불을 끄고. 죽었어.
- 내 입장에선 관리자 먼저 제압하고 반이랑 생각이라도 나눠보려고 했는데. 방어벽 같은 걸 못 부쉈어.
관리자에 대한 언질은 앞서 짤막하게 들은 적은 있었다.
자기방어의 목적이 아닌 이상, 무력적인 개입은 할 수 없는 탑의 소모품.
하지만 앞을 가로막은 투명한 벽에 가로막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유성은 여섯 번째 뿌리의 전투는 비소그라피카로 촬영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있었다면, 수십 번이고 보고 또 그만큼 좌절했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ㄴ 아니 ㅅㅂ
ㄴ 이걸 혐탑이 또.
ㄴ 아니 반 씨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ㄴ 하…왜 틀리길 바랐던 건 꼭 맞아떨어지는 것이냐.
ㄴ ㄹㅇ 쉽게 둘이 14층계로 올려 보내줄 리가 없다고 예상은 했는데 그딴 식으로 싸움을 붙여버릴 줄은 몰랐네.
ㄴ 잘 가라, 반 이네르.
ㄴ 엘프다) 하아, 세계수 앞에서 둘다 무사히 14층으로 올라가길 염원했는데.
ㄴ 으그그극 시발!!!!!!!!!!!!!!!!!!!!! 리뉴얼이고 오류고 뭐고 같이 올려보내 줄 거 아니면 같이 붙이지 말았어야지이이익------
ㄴ 수왕) 키아아악 끼에에아악!!!! 내 말이 이 말인 것이다아아ㅏㅏ
ㄴ 얼음여왕) …꽁꽁.
ㄴ 얼음여왕) 이렇게 슬플 때는 조금은 울어도 돼요.
ㄴ 마룡왕) 벨투이- 슬픈 것이에요오.
ㄴ 대마법사) 하….
ㄴ 절대군주) 언젠가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싹 다 없애버릴 수 있을 거다.
ㄴ ㄹㅇ 제발.
ㄴ 근데 말 들어보면 탑 측에선 할 거 다 해준 거 아니냐? 혼자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니까 전 기수도 부활 시켜줬고. 그 전 기수가 좀 억울하지도 모를 테니까 한유성 잡고 완전 부활할 기회도 줬고.
ㄴ 아 물론, 결과가 좀 슬프게 된 거지 ㅇㅇ
ㄴ 수왕) 맞긴 한데 좀 맞아야겠다 ㅇㅇ
ㄴ 원래 그놈들 나름대로 '공정'한 거 좋아하잖냐.
ㄴ 그 '나름 공정'의 편차가 존나 심해서 문제지 ㅋㅋㅋㅋㅋㅋㅋ
ㄴ 탑 대변인임??
ㄴ 탑스라이팅 당했네.
ㄴ 빛의검) 한유성, 그닥 힘이 될만한 위로 같은 건 할 수 없다. 잘 알겠지만, 결국 네가 이겨내야만 한다.
ㄴ 대마법사) 음.
ㄴ 대마법사) 어떻게든 다 극복하고 판데모니엄을 싹 쓸어버리든 해야지.
ㄴ 대마법사) 관리자 자체는 너 기준에선 별로 안 강하지. 무력 쓰는 애들이나 4위계나 5위계 수준이고. 그 나머지 예외 부분 관리하는 애들은 3위계. 총 관리자 정도나 6위계.
확실히, 관리자의 무력 수준은 그닥 높지 않았다.
한유성의 기준으로는.
ㄴ 수왕) 총 관리자는 아직 똑같이 라트베일 그 새끼일 거 같은데 ㅇㅇ
ㄴ 시궁창검성) 그렇겠지.
ㄴ 빛의검) 관리자는 아인(亞人)일 뿐이다. 탑이 인간과 유사하게 만들어낸 피조물.
ㄴ 밀실론자) 탑에서 태어나고. 탑에서 소멸해서 생을 마감하는 족속들인 것. - 이 세상은 거대한 밀실로 이루어짐
ㄴ 대마법사) 말 그대로 탑을 운영하기 위해 만들어낸 소모품 정도의 역할. 그래서 죽여도 플레이어들한테 어떠한 페널티도 안 들어가.
ㄴ 대마법사) 간혹 뻗대는 놈들 있는데 그놈들은 본인 무력보다는 본인 부모라고 할 수 있는 탑의 시스템이 자신을 지켜주는 거. 그걸 믿는 거지.
ㄴ 주딱) '탑'이 직접 하달한 일을 수행하고 있는 관리자는 시스템으로 기능하는 부분들이 그 관리자를 최대한 지키게 되어있어.
주딱의 글을 본 한유성의 머릿속에 자신의 앞을 막았던 결투장의 방어벽이 떠올랐다.
그 빌어먹을 벽이.
확실히 그 방어벽 때문에 플레셰크를 건들지 못한 것이지, 플레셰크 자체의 무력을 본 부분은 없었다.
ㄴ 주딱) 관리자 개입 있었지? 이름 밝혔나?
ㄴ ㅇㅇ*) 2급 관리자 플레셰크.
ㄴ 수왕) 누더기 면상?? 걔도 원래 3급이었는데 출세했구만. 아, 그 새끼 5위계임.
ㄴ 수왕) 관리자는 탄생할 때부터 위계가 정해져. 더 강해지고 그런 건 없어.
ㄴ 시궁창검성) 플레셰크, 나도 한 번 만났었는데 그때 죽여버렸어야 했나.
ㄴ 현자) 어차피, 죽였다고 해도 다른 관리자가 같은 임무를 수행했을 것이오.
ㄴ 시궁창검성) 그건 그렇지.
한유성은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관리자는 탑의 소모품에 불과하다.
'내가 겪은 개같은 감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탑 자체를 무너트려야한다.'
결국, 궁극적인 문제점은 탑 그 자체다.
으득-
한유성은 이를 갈았다.
멀다.
멀어도 너무 멀었다.
하지만 차근차근 나아가야 할 뿐이었다.
일단 5위계를 넘어 6위계에 도달하는 걸 당장의 목표로 잡았다.
ㄴ ㅇㅇ*) 죽은 사람, 플레이어를 부활시킬 방법이 있나?
ㄴ 있겠냐?
ㄴ 탑의 존재 이유는 소원을 이루어주는 그런 감성적인 곳이 아니야.
ㄴ 정론은 실시간으로 망하고 있거나, 이미 망했거나, 망할 예정인 세계가 있을 때 그 세계를 구할 힘을 얻게 해주는 역할이라는 게 정론이다.
ㄴ 시궁창검성) ㅇㅇ 저게 정론이긴 해.
ㄴ 대마법사) 불가능…하겠지.
ㄴ 현자) 불가능한 일에 골머리를 쓰면 피곤해질 뿐이다.
한유성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댓글은 계속 달렸다.
ㄴ 주딱) 부활이 가능할 거야.
ㄴ 주딱) 네가 탑을 계속 올라간다면, 언젠가.
주딱이 단 댓글 두 줄.
그 뒤로는 댓글이 일순간 뚝 그쳤다.
"…뭐?"
한유성도 눈을 크게 뜨고 주딱의 댓글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ㄴ ㅇㅇ*) ?
ㄴ ???
ㄴ ㅔ?
ㄴ 대마법사) 뭐?
ㄴ 얼음여왕) 꽁꽁…!!
ㄴ 무녀) 하?와와?
ㄴ 현자) 그게 정말인가?
ㄴ 주딱) 너희들도 100층을 종결했을 때 탑과 대화를 나눴겠지.
ㄴ 시궁창검성) 난 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딴 말만 반복해서 내뱉던데, 그러곤 일방적으로 대화 종결하고 내보내던데.
ㄴ 무녀) 하와와, 소녀와 똑같은 것이와요.
ㄴ 주딱) 난 하드 난이도 탑이랑 대화를 좀 길게 했어.
ㄴ 주딱) 문답이라고 할 정도의 대화도 나눴지.
ㄴ 시궁창검성) ㄹㅇ 초월갤 초창기에 저 소리 듣고, 뭐지? 싶었는데. 난 안 저랬다고 ㅋㅋㅋㅋ
ㄴ 밀실론자) 퍼스트 클리어 플레이어는 여러모로 대우를 해주는 것이겠지. - 이 세상은 거대한 밀실로 이루어짐
ㄴ 아 맞다. 저 인간 하드 퍼클이었지.
ㄴ 위----엄
하드 난이도 퍼스트 클리어(First Clear) 플레이어.
한유성은 왜 주딱이 '주딱'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하드 난이도 탑을 제일 처음 클리어 한 플레이어.
주딱이라는 닉네임의 상징성 때문에 주딱이 주딱인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ㄴ 주딱) 물어봤어. 나도 살릴 수 있다면, 몇 명 정도 살리고 싶은 플레이어가 있었으니까.
ㄴ 주딱) 하드에는 없고. 판데모니엄에는 있다고 했어. 누군가를 살릴 방법이.
ㄴ 주딱) 중간을 넘어서 존재한다고 했지.
ㄴ 주딱) 50층을 넘겨 봐. 일단.
ㄴ ㅇㅇ*) 알겠어.
결국은 '하드 난이도' 탑의 자아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것만으로 한유성의 입장에선 계기가 되어주었다.
다시금 나아갈 계기가.
ㄴ 이야, ㄹㅇ 되는 거냐???
ㄴ 창왕) 퍼스트 클리어 플레이어한테 탑 자아가 거짓말을 하진 않았겠지.
ㄴ 빛의검) 주딱, 그런데 왜 이 사실을 한유성에게 미리 말해주지 않은 거지?
ㄴ 주딱) 반 이네르라는 존재가 갑자기 등장한 것일 뿐, 한유성이 홀로 판데모니엄을 오르고 있다는 게 거의 확정적이었어. 이 부분을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지.
ㄴ 주딱) 그리고. '반 이네르'라는 존재가 한유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살고 싶다는 욕망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면?
ㄴ 주딱) 그런 상황인데 한유성만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혹여 반 이네르를 한유성이 죽여야 할 상황이 왔을 때 쓸데없는 잡생각이 들 뿐이야. 상황 판단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들이.
ㄴ 빛의검) 아니야, 오히려 더 마음 편히 죽였겠지. 부활 시키는 게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ㄴ 주딱) 빛의검, 넌 이 빌어먹을 판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14층 등반자인 한유성의 정신력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데?
ㄴ 빛의검) 아니, 주딱 네가 한유성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ㄴ 주딱) 그건 좀 웃긴 말인데. 너나 나나 타인을 얼마나 믿었다고.
ㄴ 주딱) 정신 차려, 빛의검.
ㄴ 주딱) 어차피 이제 숨길 내용도 없어. 알고 있는 게 특별히 더 있지도 않으니까.
ㄴ 빛의검) 이미 한 번 숨긴 사람 말을 어떻게 믿지?
ㄴ 무녀) …하와와, 누가 좀 말려보는 것이와요.
ㄴ 시궁창검성) 단순 무력만 따지면 GOAT인 둘을 어떻게 말리냐.
ㄴ 얼음여왕) …꽁꽁, 싸우지 마세요오. 둘 다 이해해요.
ㄴ 마룡왕) 벨투이- 빛검 화이팅!
ㄴ 엘프다) 뭔 응원을 하냐? ㅋㅋㅋㅋ 어, 싸우는 게 재밌긴 해. 좀 많이 무섭긴 한데.
한유성은 주딱이 부활에 대해 숨긴 점에 관해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주딱의 말에 그렇게 틀린 부분도 없으니까.
정신력이 한 없이 나약해져 있었다.
무력감을 여실히 느꼈다.
지금부터, 앞으로는 그 감정에 휩싸일 생각이 없었다.
단련해야한다.
스스로를 악착같 제련 시켜야한다.
한 자루의 날카로운 검처럼.
'반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유성은 그 가능성의 존재를 알게 된 것만으로 충분했다.
슬슬 갤러리를 종료해야겠다겠다고 마음먹은 직후.
한유성의 눈길을 이끄는 댓글이 달렸다.
ㄴ 개척자) 반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 같은 거 있나?
한유성의 머릿속에 즉각적으로 떠오른 건 캐치볼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그걸 대뜸 개척자 선배에게 내밀기에는 반과 자신. 둘만이 아는 썩 내밀한 이야기였다.
한유성은 결국 반 이네르가 검법서에 적어주었던 글을 개척자 선배의 댓글에 달았다.
ㄴ ㅇㅇ*)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해서 후회 안 한다고. 그리고 포기하지 말라고.
ㄴ 개척자) 반 답네.
한유성은 갤러리를 끄고 시간이 흐르는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5월 21일.
25일인 교류회까지 남은 기간은 4일.
한유성은 13층에서 얻은 깨달음을 제대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시간으로 쓸 계획이었다.
***
제목 : 슬슬 '비공개'가 랭킹 창 맨 위에 또 오를 때가 됐는데 ㅇㅇ
작성자 : 알데라민
- 이 새끼 왜 안 올라옴? 설마, 죽었나?
ㄴ 12층 부터 랭킹 미등록해도 상관 없잖냐.
ㄴ 나는아직살아있다) 11층까지만 있잖야 보상이. 50층 도달 전에는 보상도 없는데 등록 안 하는 게 비정상은 아니지 ㅇㅇ
ㄴ 알데라민) 아 ㅅㅂ 맞네. 그거겠네.
ㄴ 며칠 뒤면 또 교류회 아님?? 붉은 가면 <<< 이새끼가 비공개인 건 확정이고. 루키 갑자기 또 하나 등장했다고 하지 않았냐?
ㄴ ) ㅇㅇ 비무 테마에서 토끼 인형탈 쓰고 사람들 두들겨 팼다는 미친놈.
ㄴ 왠일로 21세기 지구인 중에 연속으로 쓸만한 존재가 나오냐.
ㄴ 붉은 가면 (비공개) vs 토끼 인형탈 (또 다른 루키)
ㄴ 흑성) 당연히 둘이 붙으면 비공개가 이기지.
ㄴ 흑성) 그냥 비무 서바이벌에서 사람 몇 명 팬 토끼 놈이랑 통상적으로 그 층계 레벨대에서 잡을 수 없는 몬스터들 찍어누른 비공개를 비교하고 앉았네.
ㄴ 삶은고통이기본값이다) 당연히 비공개가 더 강할텐데 토끼 대가리도 느낌은 있는듯.
붉은 가면과 토끼 인형탈이 동일인물인 걸 알지 못하는 등반자 갤러리의 플레이어들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ㄴ 인생분석가) 두 놈 혹시 같은 놈 아님? 10층계 중반 코인 상점에 목소리 변조 하는 거 있지 않나?
명추리를 한 플레이어가 있었지만.
ㄴ 독보) 싸우는 방식이 다르잖냐. 멍청아. 10층계에서 방식 범위 넓은 놈 봤음?? 특히 21세기 지구인들은 삶에서 수련 같은 걸 해본 부류들이 몇 없어서 더 불가능함.
ㄴ 쌍검은낭만) ㄹㅇ 닉값을 못하네. 인생 분석 덜 끝났네.
ㄴ 인생분석가) 그래, ㅅㅂ 반성한다.
쏟아진 반박에 백기를 들었다.
등반자 갤러리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 한유성을 주제로 한 글로 도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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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메르 제국의 바다 앞에는 신화에 가까운 입지적 인물이 살고 있었다.
10년 전, 갑자기 나타나 바다를 가득 메웠던 괴수와 마수를 홀로 쓸어버린 사내.
그리고 그는 바다의 무역을 방해하는 해적들도 깨부쉈다.
【개척자】
금발 녹안의 사내, 베르딘은 바다 저편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반 이네르."
그 이름을 잊은 적은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생명의 은인이었으니까.
***
개척자, 과거.
« 하드 난이도 16층, 등반자 - 베르딘 »
« 현재 위치, 10층계 단위 교류회. »
베르딘의 귓가에 험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새끼, 이상한 놈이야. 몬스터는 제대로 척척 썰어댔으면서 사람은 상대를 잘 못 한다니까."
콰드득!
등에서 강한 고통이 치밀어올랐다.
베르딘은 이를 갈았다.
양쪽 발목이 참혹하게 베여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당장 숨통이 끊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희망의 불씨 따윈 진작에 꺼졌다.
정신은 이미 지옥에 한 발을 담그고 있었다.
옆에 있는 노멀 난이도 등반자, 하이르겐을 믿었다.
썩 친절하게 굴었으니까.
하지만 그 친절은 만만한 먹잇감을 찾기 위한 작업의 일부였다.
던전 형 교류회였다.
교류회답게, 던전의 난이도 자체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고작 고블린. 보스 몬스터로 고블린 로드를 앞두고 있긴 하나, 현재 교류회 인원수인 여덟 명에서 충분히 공략 가능한 적이었다.
베르딘은 특수 재질의 구속구로 묶여버린 양팔을 흘겨보았다.
3위계.
육체의 바깥으로 마력을 흘려보낼 수 있는 단계.
그래서 마력을 내보냈지만, 구속구는 풀어지지 않았다.
하이르겐은 숏소드를 든 오른손을 내질렀다.
베르딘의 옆에 누워있는 플레이어의 목에 숏소드가 파고들었다.
플레이어의 몸이 경련하듯 떨리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죽은 플레이어가 뱉어내는 큐브가 시신 옆에 데구르르 떨어졌다.
"카르낙, 이놈은 네가 죽여. 경험치는 공정 분배해야지?"
"아이템은 뭐 쓸만한 거 있었냐?"
"어, 저놈 고블린 상대할 때 썼던 검만 해도 뭔가 다르긴 했어. 저렇게 형편없이 누워있어도 너랑 같은 하드 난이도 등반자거든, 저놈."
"알겠다."
베르딘은 놈들의 목소리와 피 냄새가 한 데 섞여, 아주 기분이 불쾌해짐과 함께 절망적인 감정이 올려오는 걸 여실히 느껴야 했다.
"하드면 뭐하냐, 노멀한테 이렇게 뒤지는데. 가만 보면 난이도 같은 건 부질 없어. 그치? 몸부림치면 골치 아파 질 수도 있으니까 먼저 발목부터 자르고 시작해야겠다."
카르낙의 말이 끝난 직후.
셋 모두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당신 왜 그러고 누워있어?"
카르낙과 하이르겐의 고개가 동시에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은발 머리카락에 벽안의 눈동자를 가진 여성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방금 고블린들 잡을 때 보니까, 저 둘 본다는 당신이 더 싸울 줄 아는 것 같던데?"
여성은 진심으로 베르딘이 왜 제압된 상태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르낙과 하이르겐으로서는 그저 어이가 없었다.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았던 존재가 갑자기 다가와서 누가 더 강하니 마니를 말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베르딘은 바닥에 쓰러진 상태로, 다가오는 여성의 이름을 떠올려냈다.
'반 이네르.'
교류회 진입 초반에 함께 싸운 사람이었다.
거주 층계는 12층계. 저산의 입으로 밝히기엔 2위계라고 했다.
2위계 치고는 움직임이 깔끔하다고 생각했지만, 2위계를 한참 웃도는 무력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분명, 지금 이 상황에서 끼어들 만한 무력은 아니었다.
"재들이 뒤통수를 쳤구나?"
촤악!
"크악!"
카르낙은 베르딘의 어깨를 칼로 베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라, 저년을 먼저 죽이고 너를 처리해야겠으니."
스릉!
하이르겐이 창을 꺼내 들었다.
"미친년이 적당히 미쳤으면 이런 식으로 덤벼들지 않았을 텐데, 아주 제대로 정신줄을 놨나 보구나."
반 이네르는 천천히 둘과의 거리를 좁혔다.
반 이네르의 오른팔이 움직였다.
검의 궤적이 카르낙과 하이르겐이 들고 있던 검과 도끼를 스쳐 지나갔다.
콰지직! 으직!
"어…으어?"
하이르겐의 입에서 멍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이르겐의 목 우측에서 핏줄기가 뿜어졌다.
카르낙의 심장에는 반의 검이 관통된 상태였다.
"플레이어 몇 명 죽었으니까, 역으로 이렇게 죽는 것도 각오는 했지?"
그게 하이르겐과 카르낙이 생전에 들은 마지막 목소리였다.
베르딘은 겨우 반 이네르의 움직임을 봤다.
반 이네르는 검에 오러조차 두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검기를 일으킨 카르낙이 뭘 하기도 전에 즉사를 시켜버렸다.
그리고 연속으로 하이르겐의 숨통도 끊었다.
압도적인 실력의 격차가 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베르딘은 자신의 옆에 다가온 반 이네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계속 수련해, 죽여야 할 놈은 죽이고. 당신 꽤 가능성이 충만해. 그냥 선원 출신인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철컹!
반 이네르는 베르딘의 양손을 묶고 있는 구속구를 검기를 휘감은 검으로 잘라 내버렸다.
"…감사합니다."
"어, 이건 좀 감사하긴 해야지."
베르딘은 쓰게 웃었다.
반은 히죽 웃었다.
"아주 적절한 팔의 각도, 고블린의 약점만 본능적으로 치밀하게 공략하는 움직임. 그거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당신, 재능은 있는 거야. 충분히."
베르딘은 한숨을 돌린 뒤, 얼굴에 피가 묻어있는 반 이네르를 응시했다.
"당신은 왜 힘을 숨긴 겁니까?"
"얕보고 덤비고 들어오는 놈 죽이려고. 근데 그런 놈들이 당신한테 먼저 달려든 거 같네."
"친구 추가, 받아줄 수 있습니까?"
"왜?"
"목숨값은 갚아야지 싶어서 말이죠."
반은 피식 웃었다.
"오, 다음 회차 교류회에서 갚아주려고?"
"예."
"기대할게."
베르딘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참을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정말 제게 재능이 있어 보입니까?"
반은 베르딘의 질문에 피식 웃었다.
"어, 왜 안 믿겨?"
"네, 사실 그렇습니다."
"믿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천재라는 소리를 많이 들은 인간의 눈이거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뭘 감사를. 아, 나이 비슷한데 다음에 만나면 반말 쓰고.”
은인에게 말을 놓으라는 것이 내키지 않은 베르딘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예.”
판데모니엄.
반을 친구 추가한 베르딘은 반이 판데모니엄 난이도의 등반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판데모니엄의 난이도는 어떻습니까…? 하드 난이도 위에 또 다른 난이도가 있다는 게 아직 믿기지 않는데."
베르딘의 말에 반은 한숨을 내쉬었다.
"뒤지게 힘들지. 난이도 그 자체도 힘들지만, 그보다 더 뭣 같은 건 뭐냐면, 옆에 동료가 없다는 거야. 동료가. 그냥 혼자 쭉 올라왔어."
베르딘은 반 이네르가 겪는 난이도를 예상도 할 수도 없었다.
"뭐, 설마 죽기야 하겠어? 난 살고 싶거든."
베르딘은 기억했다.
"무의미한 죽음은 싫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는 반 이네르의 모습을.
그리고 교류회가 끝난 며칠 뒤.
친구 창에 있던 반 이네르의 이름 칸이 회색이 되었다.
그건 즉 그녀의 죽음을 뜻했다.
***
바다를 바라보며 과거에 관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왕국과 제국을 동시에 오가며 양쪽에 둘 다 요주의 적으로 점지한 해적 놈들이 해상에 나타났습니다."
초월자 갤러리 활동명 【개척자】, 베르딘은 자신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6위계의 검사 마구스의 말에 입을 천천히 열었다.
"예상 위계는."
"앞서 대치하고 있는 부하들의 말에 따르면 7위계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괴상한 짓을 하는 인간 치곤 너무 높은 것 같아 의심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베르딘은 부하들이 판단한 걸 의심하지 않았다.
7위계를 이룩한 놈 중에서 정신 이상자가 많다는 건 탑을 등반하던 시절에 이미 톡톡히 경험했다.
"원래 고위계일수록 정신 나간 놈들이 많다. 갔다 오지."
마구스는 베르딘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진 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베르딘이 이렇게 사라진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베르딘이 다시 나타난 곳은 바다.
바다의 위였다.
세 척의 배가 나란히 전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뭐냐?"
중앙 쪽, 제일 큰 배의 위에 서 있는 해적, 7위계의 전사 겔포드가 베르딘을 올려다보았다.
겔포드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함부로 입을 놀리기엔 새하얀 코트를 펄럭이며 배를 내려다보고 있는 베르딘이 풍기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았다.
"너희들이 지금 억류하고 있는 이들의 신원은."
베르딘의 시선은 배의 앞머리에 꽁꽁 묶여있는 남녀들을 향해 있었다.
겔포드는 뺨에 있는 기다란 흉터가 꿈틀거릴 정도로 짙은 웃음을 지었다.
"약탈한 이들을 파는 건 침략자들의 권한이 아닌가."
"손이 한 짝씩 없는 것 같은데."
겔포드는 베르딘의 말에 턱을 쓰다듬었다.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의 손을 자르는 것도 침략자들의 권리 아닌가."
베르딘의 감정은 요동치지 않았다.
9위계라는 경지에 이르면서 많은 것이 통상적인 인간과는 달라졌다.
분노라는 감정은 어지간한 일로는 표출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은 이런 일에 쓸 분노의 총량은 바닥이 나버렸다.
이미 다른 쪽에 분노를 하고 있었기에.
겔포드는 말을 이었다.
"이 대해의 주인이라는 작자를 찾고 있었다. 9위계의 괴물이라는 헛소리를 들어서 말이다."
"나다."
베르딘의 단촐한 고백에 겔포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주 잘 됐구나, 주인이라면 이 심해에 처박혀도 날 원망하진 않겠지?"
겔포드가 서 있는 배의 양현에서 물줄기가 하늘을 찢을 기세로 솟구쳤다.
« 고유영역, 레비아탄. »
해류가 치솟아올랐다.
바다가 없더라도 바다를 창조할 수 있는, 현실 개변형 고유영역.
지금은 본래부터 공간이 바다인 상황.
고유영역의 힘은 말 그대로 극대화된다.
레비아탄의 능력 중 하나인 해류 조종의 범위는 대략 150m.
그 해류 속에 담기는 것은 겔포드가 쌓아 올린 오러였다.
물의 형태 가짓수는 가히 무한에 가깝다.
표면에 떠오르는 작은 물방울부터 휘몰아치는 해류 소용돌이.
그리고 어떤 검격보다 더 날카로운 물의 참격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랐다.
쿠구구구구구구!
고강한 살상력(殺傷力)을 지닌 수백 형태의 해수가 베르딘을 향해 쇄도했다.
베르딘에게 쏘아진 공격은 고유영역 레비아탄을 기반으로 한 해수 공격뿐만이 아니었다.
4위계 넷과 5위계 하나가 쏘아낸 원거리 참격도 베르딘을 향해 쏘아졌다.
나머지 하위계 부하들이 쏘아낸 잔잔한 공격도.
그 모든 위력이, 마치 천벌처럼 베르딘을 향해 직격하려는 그 순간.
겔포드의 동공이 확장됐다.
“…이게.”
무언가 잘못되었다.
"무슨─.“
바다가.
그의 바다가, 움직이지 않는다.
하다못해, 물방울 하나도.
레비아탄의 영역 전반을 덮어버린 이질적인 존재감.
해류 한 줄기, 물 한 방울조차 겔포드의 의지에서 벗어나 있었다.
베르딘이 오른손 검지를 천천히 움직였다.
촤아아악…
해수가 움직였다.
고유영역 레비아탄을 펼친 겔포드가 아니라, 베르딘의 의지대로.
« 고유영역, 유랑(流浪). »
베르딘의 9위계 고유영역이 레비아탄의 영역 위를 완전히 뒤덮은 상태였다.
베르딘은 겔포드의 영역인 레비아탄의 구조를 간단히 이해했다.
그리고 베르딘이 고유영역 ‘유랑’을 발동시킨 상태에서 타인의 영역을 이해한다는 건.
자신보다 하위 위계의 고유영역. 그 영역의 권리를 박탈한다는 것을 뜻했다.
치솟아 오른 해류가 일제히 항로를 반대 방향으로 틀었다.
모든 해류가 반전되었다.
콰과과과과과광! 콰과과과과광─!!
드높게 솟구친 거대한 파도가 배를 삼켰고, 겔포드의 선원들은 갈가리 찢겨 붉은 피를 흘리며 바다로 침전했다.
그 피를 흘린 이들 중, 인질이라 할 만한 자들은 없었다.
두둥실…
놈들에게 잡혀있던 인질 스물네 명이 몸이 한참 전부터 허공 위에 있는 베르딘의 옆에 떠올랐다.
어떠한 피해도 없이.
베르딘이 극도로 세심한 마력의 조율로 이들을 들어 올린 것이다.
"어어어…."
남녀는 허공에서 방향을 잡으려는 듯,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다.
"가만히 있어도 된다. 중심은 내가 잡고 있다."
"예, 예…."
"네!"
그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를 전하며 베르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베르딘은 마력을 응집시켜, 비교적 온전한 동쪽의 배 위로 그들을 옮겼다.
스스스스-
배 위에 스물넷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커헉! 쿨럭!"
몸을 살짝 하강시켜 갑판 위에서 피를 토하고 있는 겔포드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숨은 붙어 있구나."
하지만 곧 죽을 것이다.
오러가 휘둘러진 온갖 형태의 해류에 몸이 꿰뚫린 상태였으니.
말 그대로, 도륙 당해버린 몸뚱이였다.
그나마 멀쩡한 건 머리통밖에 없었다.
"어…떻게 한 것."
"위계의 차이를 극대화한 거다."
"네…세계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건 아직 네 눈이 얕아서 그렇게 보이는 거다."
겔포드의 눈은 여전히 의문에 가득 차 있었다.
쿨럭-
한 번 더 피를 쏟아낸 겔포드의 고개가 축 늘어졌다.
여전히 그 의문에 잠식된 채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인질들은 몸을 파르르 떨며, 아직 하늘에 땅을 딛고 있는 베르딘을 올려다보았다.
"감사합니다. 두 번째 신이시여…."
베르딘은 미간을 좁혔다.
그닥 유쾌한 호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9위계.
9위계를 이룩한 '초월자'는 신에 가깝다.
초월자가 아닌, 다른 이들이 보기엔.
아마도, 객관적으로 봐도 그럴 것이다.
초월자가 지닌 바 힘은 신에 가깝다.
하지만 진정 그럴까.
다른 초월자들은 몰라도, 개척자 본인은 결국 신은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다.
필멸을 벗어났다고 해서 그게 신으로 정의될 수 있는가.
신에 정말로 가까운 건 베르딘의 머릿속에 셋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의 기준에서 10위계라는 영역에 들어섰다고 짐작되는 건 셋.
대륙의 인원들에게 ‘첫 번째 신’이라고 불리는 빛의검.
그리고 아직 공개적으로 힘을 드러낸 적은 없으나, 이 땅의 질서에 공헌한 주딱.
그리고 이젠 다른 세상에 있으니 볼 수는 없는 천마.
하나, 솔직히 말하면 그 셋도 신에 필적한 건 맞지만. 완벽한 신이라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었다.
베르딘은 다시 반 이네르를 떠올렸다.
참으로 빌어먹을 일이다.
그녀의 손에 목숨을 구원받은 자신은.
자신보다 뛰어난 동급 난이도의 등반자들이 판단을 착오해 죽고.
만용을 부리다 죽는 것을 다 목격하면서, 결국 그들의 시체를 지나 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반 이네르는 죽었다.
반 이네르보다 훨씬 강해졌다.
먼 과거.
교류회에서 자신의 구원자가 되어준 반 이네르의 무력은 이제 손가락 하나만으로 짓누를 수 있을 정도였다.
세계는 너무나도 불공평했다.
자신보다 더 재능이 뛰어난 자였는데. 소환된 난이도가 '판데모니엄'이라서 죽어야 한다니.
반 이네르가 적어도 하드 난이도에 소환되었다면 분명히 살아남았을 것이다.
판데모니엄의 13층에 부활하여, 한 번 더 죽을 일도 없겠지.
그리고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해진 상태로 탑에서 나왔겠지.
이마저도 무의미한 망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만, 간절히 바랄 뿐이다.
언젠가 반 이네르가 자신에게 말했던 것처럼.
- 무의미한 죽음은 싫어.
스스로, 무의미한 죽음이라고 느끼지 않았기를.
***
초월자 갤러리를 사용할 수 있는 단말기.
이걸 내가 1층에서 가질 수 있도록 설계한 건 대체 누굴까.
관리자 플리셰크의 입에서 나왔던 최상층부. 그 최상층부에 있는 존재 중 하나인 걸까, 아니면 판데모니엄 탑 그 자체일까.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외의 존재인가.
생각할 가치는 있는 주제였지만, 고심한다고 답이 당장 나올 주제가 아니었다.
이제는 이놈의 탑은 나를 위로 이끌려는지, 아래로 끌어내리려는지도 구분이 되질 않지만.
어쨌든, 위로 올라가야 했다.
올라가야 할 이유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나는 체내의 마나를 운용했다.
6위계.
그것에 대한 갈피를 잡기 위해서.
몸의 중심축을 잡고 있는 오러 회로 옆의 기둥.
세 번째 기둥을 만드는 데 성공하는 것이 즉, 6위계에 들어서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6위계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나는 5위계라는 그릇을 먼저 완성해야 한다는 걸 여실히 깨달았다.
피를 흘리고.
꺾여가면서 얻어낸 성취들을 한 데 모아, 오롯한 그릇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빛의검 선배의 검법서, 용살검에 적힌 문장들이 뇌리를 스쳤다.
- 특별한 마나 운용법은 없어.
- 어차피 너만의 운용법을 만들어야 도달할 수 있어, 6위계부터는.
모든 나를 알아야 한다.
무력한 나도.
강인한 부분이 있는 나도.
고뇌의 시간은 찰나처럼 흐르고.
[탑 교류회를 시작합니다.]
교류회가 또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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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 +1,342 @@
이번 교류회의 테마는 디펜스였다.
별다른 서사나 특이점은 없어 보이는 디펜스.
그래서 미리 착용했던 토끼 인형탈을 벗지 않았다.
이번에는 안 그래도 위계를 올리는 것에 온 정신을 쏟고 있는 상황.
적당히 내 수련이나 하면서 할 일을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
- 야, 저거 봐. 저 인간도 토끼 인형 탈 쓰고 있어. 역시 희소성 없는 건 하면 안 된다니까.
내가 쓴 토끼 인형 탈을 보고 깔깔거리며 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탑의 성벽 앞쪽에서 방패를 들고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는 머리 위에도 토끼 인형 탈이 있었다.
하긴, 이건 붉은 가면처럼 확률적으로 얻기 힘든 아이템 같은 게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분장이었지.
덕분에 저번과 같은 인형 탈을 쓰고 있음에도 내게 시선이 쏠릴 확률은 더 낮아졌다.
최근에 클리어한 2층계는 랭킹 등록을 하지도 않았으니, 내가 현재 있는 층계 위치를 뜻하는 머리 위에 떠있는 라는 숫자로도 뭘 유추할 수 있는 건 없을 것이다.
덕분에 신경 쓰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이번 교류회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교류회 1등만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다가오는 몬스터들이라고 해봤자, 조금 덩치가 큰 리자드맨이나 오크 정도였다.
오크들 또한 덩치가 그간 봐왔던 오크들보다 더 컸고.
오부르크라는 이름의 코뿔소를 닮은 탈것을 타고 다녔지만, 제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제까지 상대해온 몬스터나 적들에 비해선 너무나 쉬운 상대들이었다.
이번 교류회는 권법과 검법만을 이용해 클리어하기로 했다.
쾅! 콰아앙!
"으악!"
어려울 것도 없었다.
힘이 부족하다고 여겨질 때는 망설임 없이 도움-!을 외치자고 시작 전에 토의를 한 결과대로, 도움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쪽에 가서 손을 거들어 주면 되는 일.
이번 교류회는 해가 지기 전까지 충분히 끝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으아아아악! 도와줘어어!"
자신을 노멀 난이도라고 소개한 16층의 플레이어가 아주 간절한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힘을 과하게 쓸 필요도 없었다.
적당한 힘으로 방어만 잘 해 내주면 된다.
그 생각으로 가볍게 내지른 주먹이었다.
쩌어어엉!
공기가 찢겨 나가는 소리가 귓전에 흘러들어왔다.
너무 완벽하게 거대 오크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머리통.
그걸 의도치 않게, 너무 완벽하게 날려버린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말 그대로 소멸을 시켜버렸다.
유연파공결, 수락낙진(水落落震).
분명, 파괴력은 막강하지만 고요하게 적들을 덮치는 초식이었는데.
고요함은 개뿔이.
오크의 머리가 수락낙진을 버틸 정도로 단단했다면 고요한 진입이 되었겠다만.
오크의 머리는 가볍게 짓눌려버렸다.
내 옆에 있던 두 명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어? 진짜 토끼 인형 탈인가?"
살짝 긴가민가한 얼굴로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길드 .
그 길드에 합류가 예정된 이들이 하달받는 정보를 편지로 받는 플레이어들이 있다고 했지.
초월자 갤러리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그렇게 받는 정보 중에 내가 교류회에서 착용했던 가면들을 알 수도 있을 거라고 했었지.
'비공개'로서의 나는 '붉은 가면'이라고 알려져 있고. 토끼 인형 탈은 또 다른 떠오르는 루키로 전파되고 있다는 점이 좀 웃겼다.
아무튼, 그래서 진짜라니 뭐니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입을 꾹 다물고 조금 약하게 몬스터들을 패고 있으니, 별다른 말을 걸지는 않았다.
이번 교류회는 그렇게 아주 빠른 속도로 끝이 났다.
물론, 1등을 달성하는 건 성공했다.
***
교류회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끝나버렸기에 14층을 진입하는 걸 미룰 필요가 없어졌다.
14층도 그렇게 어지러운 구석은 없었다.
아주 명쾌한 던전형 스테이지였다.
그래서 간만에 성좌들의 알림창 차단을 풀고 스테이지를 진행했다.
던전의 이름은 골레트라였다.
그리고 몬스터로 등장한 적도 골레트라.
골레트라는 놈은 골렘인데. 몸체 곳곳에 이식된 마력 동체를 이용해, 더 기묘하게 움직였다.
겉보기엔 닿을 법하지 않은 거리까지 날아오질 않나.
처음에는 좀 고전했다만, 거리감을 좁히는 걸 성공한 뒤에는 제압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달을 삼킨 거인'이 당신의 순간 돌진력에 감탄합니다.]
['분노를 업은 전사'가 골레트라의 육중한 압박을 버티는 당신의 굳건함에 탄성을 터트립니다.]
['천 개의 눈을 가진 심판자'가 무언가를 가늠하기 시작합니다.]
['심연 속을 유영하는 감시자'가 누군가를 보며 혀를 찹니다. 과민한 걱정이라며 누군가를 비웃습니다.]
아주 본인들끼리 뭘 가늠하고 혀를 차고 비웃고 다 하는구만.
어떤 것에 대해 가늠을 하는 건지는 예상이 갔다.
나중에 나와 싸우게 되는 순간이 왔을 때를 가늠하는 거겠지.
응, 지금도 3할은 숨기고 있어.
물론 지금 성좌를 우습게 보고 있지는 않았다.
내가 우습게 볼만한 수준의 적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성좌는 대다수가 8위계라는 초월갤 선배들의 조언이 있었으니.
- 대마법사) 지금의 성좌는 탑에 굴복한 놈들이지.
- 대마법사) 8위계에서 멈춘 것들. 아니면 9위계를 도달하고서도 겁을 집어먹고 등반을 포기한 것들.
- 대마법사) 후자도 극소수지만 있어.
- 대마법사) 물론 탑 측에서 꼬드길 때는 놈들의 자존심이 완전히 바닥을 체면을 살려주려고 했지.
- 빛의검) '성좌'가 10위계로 향할 수 있는 길이라고 꼬드긴 거다.
- 天魔) 하나, 그럴 리가 있겠나. 탑이란 그 공간에 갇혀있어야만 하는 것들이 10위계를 도달할 수 있을 리가.
- 절대군주) 너무 허울만 좋은 말이잖나.
초월자 갤러리 선배들의 입장에선 그저 패배자이겠지만, 내 입장에선 강적인 건 분명하니까.
『'혈마'가 등록한 성좌 퀘스를 클리어했습니다.』
퀘스트 내용은 14층 스테이지의 클리어였다.
혈마가 건 아이템은 영약이었다.
'꺼지지 않는 불의 깃털'이라는 영약.
불 속성 공격 내성이 급상승하는 효력이 자리 잡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14층의 수확은 만족스러웠다.
어제의 교류회와 달리, 결과적으로 2레벨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레벨은 58.
15층 층계 대기실에 도달했다.
이틀 정도는 수련에 힘을 쏟았다. 교류회에서 성좌에게 뜯어낸 영약도 섭취했다.
몸에 별 무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지체 없이 15층에 돌입하기로 했다.
6위계 도달.
그것에 필요한 게 뭔지 갈피는 잡혔다.
우선, 5위계로서의 완전한 끝을 보는 것.
그게 우선 되어야 했다.
그러려면, 혼자 애를 쓰는 것보단 실전을 계속 겪는 게 낫다는 결론이 나왔다.
15층 스테이지의 문을 열었다.
화아아악!
빛.
시야를 뒤덮었던 빛이 사그라들고 펼쳐진 풍광은 아주 단색적인 무언가였다.
양발로 밟고 서있는 무언가가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배?'
일단 나타난 곳이 육지는 아닌 것 같았다.
바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 같았다.
낡아빠진 냄새가 풍겼다.
객실의 문을 열고 위로 올라갔다.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날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시선은 내 옷을 위아래로 훑었다.
현재 착용 중인 방어구는 [바르넬]이란 이름의 갑옷이었다.
12층에서 성좌 퀘스트 보상으로 뜯어낸 갑옷.
전에 꼈던 파에톤의 칠흑 마갑주보다는 갑옷스러움이 매우 줄어든 가죽 갑옷의 형태였으나, 날 보고 있는 이들의 옷 상태를 보니 내 옷에 시선이 갈 만해 보였다.
동양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천 옷들.
얼굴 생김새도 썩 친숙했고.
육지 위에 선 건물들은 아주 동양적인 양식의 건물들이었다.
이러한 모든 게 이제까지 소환되었던 곳들과는 다른 배경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무림?"
『판데모니엄 난이도 15층은 퀘스트 형입니다.』
언젠가 무림 배경의 세계에 소환될 거라고 예상은 했다.
무림 출신의 선배들이 무림 배경이 조만간 나올 거라고 말했다.
예상보다도 더 빨리 나왔을 뿐이었다.
배를 탄 사람들은 날 계속 주목할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은지, 모두 내게서 시선을 떨군 상태였다.
난 초월자 단말기를 꺼내, 배의 모습과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건물들을 모습을 찍었다.
그리고 구석에 앉아 글을 작성했다.
제목 : 무림인듯?
작성자 : ㅇㅇ*
첨부파일 : 1823912839012839.jpg
- 조만간 육지에 도착할 거 같네.
찍은 사진들을 첨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ㄴ 天魔) 오호.
ㄴ 창왕) 키야, 드디어 무림 배경이군.
ㄴ 무녀) 하와와, 그런 것이와요. 범선인 것이와요.
ㄴ 유명한거지) 익숙한 풍광이군.
ㄴ ㅋㅋㅋㅋㅋㅋㅋㅋ무림 것들 다 튀어나오는 것 보소.
ㄴ 주딱) 아, 맞다. 잊고 있었던 애가 있네.
ㄴ ??
ㄴ 아 그분?
ㄴ 얼음여왕) 꽁꽁! 그분인가요…!
ㄴ 시끄러운 아해를 말하는 것이냐.
ㄴ 아해(兒孩)는 새끼야 ㅋㅋㅋㅋㅋㅋㅋ 아무리 그래도 이제 오대세가 가주가 된 인간한테 할 말은 아니지.
ㄴ 시끄럽긴 해.
ㄴ 대마법사) 왜 안 보이나 했더니 활동 정지 먹였었어?
ㄴ 유명한거지) 그렇소. 아마 본인이 신청했던 것 같은데. 일에 집중하여야 한다고.
ㄴ 주딱) ㅇㅇ 4달째에 풀어달라고 했는데 이틀 전이었네. 지금 품.
ㄴ 당하연) 끼아아악!! 주딱공!!!!!!!! 너무한 거 아님까!!!!!!!!!!!!
ㄴ 주딱) 이틀 밖에 안 늦었어.
ㄴ 당하연) 이런 혁신적인 유희의 사건이 터지면 시간 채우기 전이라도 풀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너무 하는 검다!!!
ㄴ 주딱) 사천당가 가주 취임해버려서 현생 살아야 한다며.
ㄴ 당하연) 히유유, 너무함다….
ㄴ 당하연) 눈팅만 하는 거 너무 고통스러웠슴다. 그래도 무림 배경 들어가기 전에는 활정 풀려서 다행인검다! 헤헤! 한유성 공!!! 반갑슴다!!!!
ㄴ ㅇㅇ*) ㅇㅎ
길게 반응해주기엔 정신이 없다.
ㄴ 무림 이게 단가?
ㄴ 그런듯?
ㄴ 마룡왕) 벨투이- 한 명 더 있잖아요오.
ㄴ 창왕) 나와라, 궁창아.
ㄴ 시궁창검성) ㅇㅇ
음?
ㄴ ㅇㅇ*) 검성 선배 무림계 쪽이었음? 이도류를 알려준다고 하지 않았나.
ㄴ 창왕) 왜, 무림계도 쌍검류를 쓰긴 한다. 희귀한 편인 건 맞다만.
ㄴ 유명한거지) 저 선배는 안 쓰는 게 맞소…. 그게 정상적인 것이오.
ㄴ 시궁참검성) 화산에는 매화 이도류라는 절기가 있다.
ㄴ 유명한거지) 제발 시발, 화산검선이시여…! 체통을!
ㄴ 시궁창검성) 매화가 두 배로 피어난다.
개방 방주라고 했었지, 거지 선배가. 천마 선배에게 하던 간청을 검성 선배에게 하네.
ㄴ …어지럽네.
ㄴ 어우 형장, 매화 이도류는 무슨 무근본이오. 씹ㅋㅋㅋㅋㅋㅋㅋ
ㄴ 근데 저 인간이 장문인이라 말릴 놈도 없음.
ㄴ 멸문 직전에서 다시 끌어올린 게 누구다? 저 인간이다~~~
매화 이도류, 뭔지는 감이 안 잡혀도 어감만 들어도 이상하긴 했다.
ㄴ 당하연) 왜 우리 검선 슨배 기를 죽이고 그러심까!!!!!!
ㄴ 유명한거지) 이 무림에 정상이 없다 이 말이오….
거지 선배 말이 맞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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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초월자 갤러리 단말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다시 허름한 객실이 자리 잡은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일부러 낮게 말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떻게든, 쟁천무회장(爭天武會場)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모시겠습니다.
- 고마워, 형로.
벽 뒤편에서 이뤄지고 있는 대화였지만, 기감을 펼치면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 …하지만 대리인(代理人)으로 세우려고 했던 무성락이 죽어버렸으니, 대리인을 다시 구해야만 합니다. 아가씨께서 직접 대결에 나서는 일만은 피해야 하니까요.
그들의 대화가 끝난 직후.
내 눈앞에 알림창이 떴다.
『서사(敍事)의 진상에 도달했습니다!』
예상대로, 퀘스트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람들이었다.
『퀘스트 : 호북연가(湖北燕家)의 장녀 연설아의 안전을 확보하시오.』
『퀘스트 실패의 기준은 연설아의 사망입니다.』
『본 퀘스트의 실패시 중원 무림에서 30일간 생존하기' 퀘스트로 전환됩니다.』
기감을 더 세밀하게 펼쳤지만, 추적자들로 보이는 자들은 없었다.
'배 안에는 없다.'
그렇다면, 범선이 정박하는 위치에 추적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호북연가의 연설아.
단말기를 꺼내 글을 빠르게 썼다.
제목 : 호북연가의 연설아를 보호해내라는데.
작성자 : ㅇㅇ*
- 호북연가. 이곳도 선배들이 겪은 무림에 있었음? 여기 장녀가 부하 하나 데리고 도망치는 중인 듯.
연설아 사망 시 퀘스트 실패. 이건 실패하면 재도전 기회나 다른 루트 같은 거 없고. 그냥 내가 30일 생존해내야 하는 퀘스트로 전환되는 거 같고.
ㄴ ?
ㄴ ?? 연가 자제 놈이 도망을 쳐?
ㄴ 그놈들이 가문 위세나 덩치로 따지면, 탑 무림 세계관 오대세가 바로 밑에 자리 잡고 있는데 왜 도망을 쳐?
ㄴ 대에에에-호오오북 연가의 사람들이 도망을?
ㄴ 뭐 이계 쪽이 몇십 년은 흘렀으니 무림계도 그만큼은 흘렀을 거고…그럼, 연가가 망한 것도 말은 되겠지.
ㄴ 天魔) 그 말대로다. 멀쩡하던 가문이 망하는 건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일이지.
ㄴ 시궁창검성) 여기 산증인이 있지 않은가. 화산도 거의 망했었네. 대문파도 꽤나 손쉽게 망할 수가 있어.
ㄴ 자학 유희 보소 ㄷㄷㄷ
ㄴ 화산파 장문인 "대문파도 생각보다 쉽게 망한다."
ㄴ ㅇㅇ*) 검성 선배 화산은 어떻게 멸문에 가까워졌음?
ㄴ ?
ㄴ 등반자 이새끼…인성이?
ㄴ 수왕) 친구야!!!! 그게 무슨 소리니!!! 그런 질문은 개같이 망한 식당의 주인에게 이 식당이 망한 이유가 뭐냐고 묻는 거나 다를 바가 없지 않냐!!!!!!!
ㄴ 그 의도로 질문한 게 맞는 것 같은데?
ㄴ 어허, 이놈도 생각보다 똑똑하게 잘 맥이는데?
ㄴ 시궁창검성) 문파가 망하는데 생각보다 거창한 이유는 필요가 없다.
ㄴ 시궁창검성) 난세가 도래하고. 굳건하던 가문이 그렇게 파생된 모종의 일로 흔들리는 일은 흔하다. 그리고 한 번 흔들린 가문을 계속 노리고 있던 놈들은 신이 나서 쳐들어가는 거지.
ㄴ 무녀) 하와와, 탑 무림 세계관상 호북에 멀쩡히 자리를 잡은 가문은 그 지리적 위치만으로 먹음직스러울만 한 것이와요.
ㄴ 무녀) 하와와,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말이와요.
ㄴ 창왕) 뭐 다른 말들은 없더냐?
ㄴ ㅇㅇ*) 쟁천무회장, 대리인.
ㄴ 창왕) 아.
ㄴ 무녀) 하와와, 연가 쪽에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지 예상은 되는 것 같사와요.
ㄴ 절대군주) 그렇군. 나도 예상은 된다.
무림 세계 쪽 선배들을 제외하고도 나머지 선배들도 호북연가의 사람들이 무슨 행동을 하려는 건지 예상이 가는 모양이었다.
하긴, 하드 난이도 탑에서도 '무림'을 다들 경험했을 거다.
무림 출신이 아니라고 해도 이 세상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겠지.
ㄴ 대마법사) 약조를 받아내려는 거겠지.
ㄴ ㅇㅇ*) 약조?
ㄴ 당하연) 쟁천무회(爭天武會)는 정파에서 가장 큰 무투회임다! 1위를 하면 적어도 정파들 사이에서는 절대적인 규율을 하나 내세울 수가 있는 검다!!
ㄴ 당하연) 어떻게 절대적일수 있는가! 무림맹주와 오대세가가 약속에 대한 공증을 서주기 때문임다!!
ㄴ 당하연) 아마도 현재 연가에 적당한 무인이 없으니, 대리인을 내세워 우승하고!! 호북연가가 5년간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명분을 세울 생각인 검다!
약속이라.
근데 이계만 생각해도 약속 같은 건 무력에 따라 쉽게 짓눌러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ㄴ ㅇㅇ*) 근데 약속해 봤자, 그거 깨고 공격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님?
ㄴ 당하연) 그 말이 맞슴다!! 역시 등반자 공! 아주 똑똑하심다!! 제갈가(家)가 감탄할 정도임다!
ㄴ ?
ㄴ ? 역대급 억빠 무엇??
ㄴ 역시 사회생활은 이리저리 달라붙는 박쥐형 생존의 가문 사천당가!!!! ㄷㄷㄷㄷㄷ
ㄴ 나도 이제 슬슬 탑 친화적 사고를 이룩하기 시작한 부분에선 좀 감탄을 했다.
ㄴ ㄹㅇㅋㅋㅋㅋ 탑에 걸맞은 성정이 되어가고 있구나.
ㄴ 당하연) 그저 믿음으로 행해지는 일임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경우 지켜지는 게 게 사실임다. 무림맹과 오대세가가 천명하는 약조는 무게가 아주 무겁기 때문임다!! 최강의 공증!
5년간의 안전 확보가 가능한 최선의 방법이라는 건 잘 알겠다.
ㄴ ㅇㅇ*) 근데 퀘스트는 그 쟁천무회인가 뭔가를 1등 먹으라는 건 아니야. 연설아의 안전이 핵심. 그걸 안전을 어떻게 확보할지까지는 제시를 안 해주네.
ㄴ ㅇㅇ*)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게 가장 성공 확률이 높겠음? 쟁천무회란 곳에서 1등을 할 확률이 높을까, 아니면 그냥 호위 대상인 연설아 데리고 도망치는 게 살릴 확률이 높을까.
ㄴ 밀실론자) 조금이라도 연설아의 생존 확률이 높은 건 놀랍게도 쟁천무회에 참여하는 쪽이다. - 이 세상은 거대한 밀실로 이루어짐
ㄴ 빛의검) 내 생각도 같다.
의견을 먼저 내놓은 선배들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ㄴ 밀실론자) 쟁천무회에 참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상당한 위험부담을 지는 선택이지만, 적어도 그 대회의 진행 중에는 안전을 확보할 수 있지. - 이 세상은 거대한 밀실로 이루어짐
ㄴ 빛의검) 맞다. 그리고 일단 기거하고 있는 위치가 확실해지니, 예상치 못한 위협에 대비하기에도 변수가 그나마 덜하다.
ㄴ 당하연) 이목이 쏠리는 만큼, 그 시선이 끌리는 동안은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검다!! 쟁천무회장에서 나가지만 않는다면 말임다!
ㄴ 절대군주) 호북연가가 왜 다른 곳에 노려지고 있는가, 그건 궁금하구나.
나도 그건 궁금했다.
그 이유가 뭐든, 설령 호북연가가 쫓기고 있는 이유가 정당하더라도 내가 호북연가의 측에 서서 연설아를 보호해줘야한다는 사실이 변할 리는 없겠지만.
곧 물어봐야겠지.
난 내 옷을 내려다보았다.
교류회에서 정체를 숨기기 위해 구매했던 검은색 코트였다.
그나마 눈에 덜 띄는 옷을 고른 건데, 그래도 눈에 띄었다.
난 그럭저럭 깔끔한 옷을 옆에 두고 있는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남는 옷 같은 거 있나?"
머리카락이 심히 헝클어진 사내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날 위아래로 훑었다.
"…입고 있는 옷이 특이하긴 하구려, 그래서 옷을 달라?"
"그냥 달라는 건 아니고."
난 인벤토리에서 황금 조각을 꺼내 사내에게 내밀었다.
일전에 싸웠던 골레트라에게서 나온 부산물이다.
"이 정도면 값이 될 거 같은데."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보였다.
"큼큼! 그 옷이라도 달라고 할까 싶었지만, 확실히 그게 더 쓸모가 있겠구려. 옷이 얼마나 필요한 것이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것까지 다 주는 건 안 되고."
탐욕이 스멀스멀 올라온 게 보였다.
황금 조각 300개가 인벤토리에 있는데 급할 때는 충분히 화폐 역할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가장 멀끔한 옷으로 두벌."
"어어, 통이 큰 형장이었구려?"
옷을 들고 내가 소환되었던 객실로 들어갔다.
***
옷을 갈아입고 바깥으로 나온 한유성은 갑판 위로 올라와 있는 연설아와 형로의 대각선에 앉았다.
그리고 존재감을 완전히 죽였다.
연설아와 형로. 둘은 나름대로 얼굴을 애써서 가리고 있었지만, 한유성의 눈에는 둘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이름 창이 보였다.
[NPC 호북연가 장녀 4위계 연설아]
[NPC 호북연가 4위계 무사 형로]
배는 육지에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쿠구구궁…
부두에 닻이 내려졌다.
장강(长江)을 건너, 장강 남안의 진강을 지나 이어지는 수로의 끝자락에 도달한 끝에. 목적지인 소주(蘇州)에 도착한 배였다.
한유성은 저 너머 지면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살의를 관측했다.
'5위계 무인 둘.'
그리고 4위계의 무인이 넷.
나머지는 떨거지들이 일곱.
육지의 끄트머리까지 나선 사람은 5위계 둘이었다.
[NPC - 5위계 낭인무사 양가명]
"얌전히 우릴 따라오시오. 성심을 다해 초빙한 대리자도 이미 죽어버리지 않았소?"
[NPC - 5위계 낭인무사 등정]
"순순히 응해준다면 피를 볼 일은 없을 겁니다. 맹세하지요."
위압적으로 말하는 무인과 타이르듯 말하는 무인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은 둘 다 가공할만한 살기를 짙게 내뿜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이 배의 몇몇 사람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 나머지는 빠르게 하선하도록 하시오."
사람들을 배에서 내리게 만드는 건 그 말이면 충분했다.
무림인 간의 싸움에 휘말려 피를 보고 싶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승객과 선원들이 우르르 내렸다.
연설아와 형로를 제외하면, 남아있는 건 한유성 밖에 없었다.
'그냥 승객들 뒤따라서 같이 내려버릴까 싶었다만.'
그건 그것대로 변수가 발생할 확률이 있었다.
갑자기 쇠뇌를 쏘거나, 암기를 던지고. 그게 연설아의 숨통을 끊어버릴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연설아는 고개를 뒤로 돌려, 우두커니 서 있는 한유성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왜 안 내렸죠?"
"발에 쥐가 났어."
연설아는 한유성의 태평한 말에 입을 멍하니 벌렸다.
한유성은 말을 덧붙였다.
"빨리 내려, 당신들이 내려야 내가 쓸데없는 일에 안 휘말릴 거 아니야."
연설아는 한유성에게서 시선을 떼고 형로를 바라보았다.
"가자."
"제가 미끼가 되어 시간을 벌겠습니다."
"안돼. 허망하게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형로랑 나, 무공 고하 차이가 얼마 나지도 않잖아."
연설아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잡히면 홀로 분투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폐가 될 뿐이야."
"…알겠습니다."
정박 장소에 이미 대기인원을 배치하고 있을 거란 예상은 했다.
마지막 발악을 하겠다고 다짐한 연설아가 오른손에 쥔 검에 검기가 피어올랐다.
절망적 상황이었지만, 나서지 않으면 더한 상황에 치닫게 된다.
등정이 결국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연설아를 보며 입가를 비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부하들에게 말했다.
"옆에 있는 호위는 죽여도 상관이 없다. 목표인 연설아만 제대로 확보하도록."
"뒤에 한 놈이 더 있습니다만, 모르는 얼굴입니다.“
그들의 시선은 한유성까지 닿았다.
”일행이거나, 아니면 게을러터진 나무늘보겠군. 어느 쪽이든 죽여라.“
”올라옵니다. 연가의 장녀.“
연설아는 땅을 밟자마자 앞으로 쇄도했다.
연설아의 검로는 날카로운 궤적을 그렸다. 하나, 양가명의 검에 손쉽게 막혀 버렸다.
연설아와 형로는 4위계.
5위계인 양가명과 등정의 무력을 쉽사리 극복할 수 없었다.
한유성은 나타났다.
신속한 보법으로, 연설아와 양가명의 사이에.
촤아아악!
오른팔이 대각선으로 뻗어 나갔다.
유연파공결과는 상이한 체계의 권로였다.
투박하고 파괴적인 권(拳).
- 天魔) 뒤쪽에 부록처럼 적어놓은 부분은 보았겠지.
- 天魔) 앞부분만 빼면 된다. 파공결.
살기가 짙은 직선의 권로가 양가명의 상체 정중앙에 틀어박혔다.
양가명이 입을 쩍 벌리며 뒷걸음질 쳤다.
양가명은 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후웅-
하나, 검기가 휘감긴 검은 허공을 베는 데 그쳤다.
몸의 균형이 무참히 뒤틀려버렸다. 방금 맛은 단 일격에.
한유성의 양손은 다시 섬전처럼 움직였다.
콰드득!
양가명의 복부와 어깨에서 무언가 붕괴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앙!
양가명의 몸뚱이가 뒤로 넘어갔다.
쿵!
등정은 양가명을 내려다보았다.
‘죽었다…!
무언가 확인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숨통이 끊어진 게 명확했다.
단 세 번의 타격 만에 양가명을 죽인 사람. 한유성을 향해 모든 이의 시선이 쏠렸다.
"뭐하는 놈이냐…!"
"어떤 일에 끼어들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것이오?"
"야, 양형이 이렇게 손쉽게…!"
다양한 말들이 들렸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한유성은 연설아를 바라보았다.
"탈출하려면 힘 조절할 여력은 없어."
연설아가 멍한 얼굴로 반문했다.
"네?"
"적당히 부술 거다."
싸늘한 시신이 된 양가명이 아니라, 추격조 전체를 빗대어 한 말이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추격조를 다 죽여버리는 건 시간을 길게 끌면 가능할지도 모르나, 그럴 시간은 없었다.
그리고 저게 전부일 것 같지 않았다.
적당히 죽이고 상황을 파악한다.
추격이 침체 될 정도의 피해를 입힌다.
그게 한유성이 내린 결론이었다.
"탈출 방향은 네가 잡아야지. 난 초행이거든."
한유성은 한 발자국 더 앞으로 갔다.
일단, 등정까진 무력화를 시켜야 했다.
추격조는 몸을 움찔거리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아가씨, 빠져나갈 기회입니다."
형로의 말에 한유성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연설아는 그제야 사고를 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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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성이 일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땅바닥에 쓰러져있는 건, 총 여덟 명의 무인이었다.
5위계 둘과 4위계 하나는 사망.
4위계 한 명과 나머지 넷은 어딘가가 부서져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한유성은 범선에서 내리기 전에 초월자 갤러리를 통해 강호 생존 속성 강의를 수강한 상태였다.
- 시궁창검성) 자, 중원 무림에선 어떨 때 살인을 해도 되는가? 강론(講論) 들어간다.
ㄴ 화산파 장문인이 직접 말아주는 《강호 살인 강론》 ㄷㄷㄷㄷㄷㄷ
ㄴ 이분 정파 맞나요????? 요리보고 저리 봐도 사파인데????
그냥 막 죽이면 삶이 고달파진다는 말을 덧붙이며 검성 선배는 댓글을 이어나갔다.
- 시궁창검성) 우선, 결국 약육강식(弱肉强食)이다. 압도적으로 강하면 그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지.
- 시궁창검성) 하지만 그건 슬프게도 7위계 이상은 되어야 취할 수 있는 기조이지.
- 유명한거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살행(殺行)을 하란 소리요.
- 시궁창검성)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는 무인은 죽이면 뒤탈이 생기기 마련이다.
- 당하연) 일을 수행하고 있는 존재가 낭인 출신이고. 그 일이 깨끗하지 않은 일이면 보통 책임을 묻지 않는 검다! 일을 사주한 쪽도 구린 구석이 가득하기 때문인 검다!
ㄴ 대 사천당문은 그런 의도로 고용한 낭인들도 잘 챙겨주었겠지?
ㄴ 당하연) 무슨 소림까? 당문이 제일 잘하는 게 꼬리 자르김다! 절대 그런 일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검다!! 그것이 암투 제일가!! 장인 정신!!
ㄴ 이건 뭐 자랑도 아니고 자학도 아니고 뭣이여….
그 말들은 지식으로서 큰 도움이 되었지만, 한유성의 기준이 되어주진 못했다.
5위계는 제압하는 것보다 죽이는 게 간단명료하고 승률이 높았기에 택한 길일 뿐.
결론적으론 옳은 판단이었다.
둘을 단번에 죽여버리니, 나머지는 겁을 집어먹고 얼을 탔으니.
"방향은 잡았나?"
피비린내가 코끝을 훑었다.
연설아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한유성의 입이 다시 얼렸다.
"그럼 가면서 설명을 듣도록 하지. 명가 자제면 보법은 잘하겠지."
한유성과 연설아. 그리고 형로. 셋은 동시에 내달리기 시작했다.
한유성은 인벤토리에서 무녀 선배가 준 부적, 결성부를 꺼내 '비밀의 장막'을 펼쳤다.
그리고 셋의 양옆에 있는 풍광을 왜곡시켜버렸다.
도주할 때는 이만한 아이템이 없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그, 그런데…!"
연설아가 한유성과 발걸음 속도를 그제야 맞추었다. 그리고 옆으로 다가가서 입을 연 것이다.
"왜 절 도와주시는 거죠?"
이미 예상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답도 미리 생각해둔 상태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연가에 은혜를 입은 적이 있다고 말씀을 한 적이 있어. 그리고 배에서 속닥속닥하는 걸 들으니 지금 추격당하고 있다는 호북연가라는 걸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지."
물론 한유성의 아버지는 대한민국에 멀쩡히 살아있을 것이다.
- 당하연) 그 세계관의 호북연가에서 몇십 년 전에 큰 도움을 받았다는 건 이상할 게 없는 검다!
연설아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당하연 선배가 설계해준 신상을 사용하기로 했다.
연설아는 당하연 선배의 조언대로 그럭저럭 빠르게 납득을 해주었다.
"…감사하네요. 은인께서 겪은 일도 아닌데 이렇게 도와주셔서."
"감사는 아직 하지 마라. 까딱하다간 당장 죽을 수가 있는데."
한유성은 냉담하게 말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쟁천무회장으로 향하고 있었지?"
쟁천무회장의 위치는 이곳, 소주.
소주의 중앙점.
셋이 골목길로 들어섰다.
츠츠츠츠!
한유성은 기감을 펼쳤다.
근방 사람들의 위치는 모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무력을 가진 사람이 쫓아오는 경우는 없었다.
추격조를 완전히 끊어냈다.
적어도 현재로선.
연설아는 땀을 닦으며 그제야 한유성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렸다.
"네, 맞아요."
"쟁천무회에 내세우려고 했던 대리 출전자는 죽어버렸고."
연설아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예."
참담한 상황이구만.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한유성의 말에 연설아는 형로와 눈빛을 교환했다.
형로가 입을 열었다.
"가능한 상식선에서 아가씨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호북연가 측에서 내세운 참가자가 쟁천무회의 제일인이 되는 거였습니다만…."
가능한 상식선.
한유성은 천마 선배의 말을 떠올렸다.
상식선 밖의 일을.
- 天魔) 같은 정파 측 가문에게 쫓기고 연가의 장녀가 그쪽 세계의 천마신교에 입단을 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확실한 안전 확보 방법이겠으나, 그런 선택을 호북연가의 장녀가 할 리는 없겠지.
형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은인께서의 무력은 6위계 정도로 보였습니다. 쟁천무회의 최대 기준인 6위계와 동일…저희의 대리 출전자가 되어주신다면, 차후에 막대한 보답을 해드리…."
한유성은 형로의 말을 끊었다.
"6위계 아닌데."
"예?"
"6위계가 아니라 5위계라고."
형로는 내 말에 두 눈을 깜박거렸다.
연설아도 또다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바, 방금 5위계 둘과 4위계. 그리고 나머지를 단번에 쓰러트리셨는데…?"
"그건 쓰러트리는 게 가능하니까 그런 거고. 내가 5위계인 것과는 별개로."
"그러니까 그게 별개가 될 수가 없는데…."
연설아는 정말 믿을 수 없는 말이라는 듯이 계속 중얼거렸다.
한유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대리인으로 참여할 경우, 나한테 있는 불이익 같은 건 없나?"
설명을 한 건 형로였다.
"특별한 불이익 같은 건 없습니다만, 쟁천무회의 절대적인 규칙인 불살…그게 대리인에게 행해졌을 때는 가해자가 받는 피해는 상당히 축소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살인을 쉽게 하려고 하진 않습니다. 인식이 안 좋은 건 매한가지니까요."
한유성은 턱짓을 했다.
"반대로, 내가 상대방을 죽인다면?"
"…무림맹의 압력에 의해 죽게 될 겁니다. 뒷배가 든든한 타 가문의 대리인이라면 몰라도, 낭인은."
"어, 낭인이야."
한유성은 사실 고민을 하고 있지 않았다.
주고받은 문답은 이미 당하연 선배를 통해 들은 이야기들이었다.
'나쁠 건 없지.'
경험으로만 생각해보면, 수많은 대련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5위계를 돌파할 수 있는 감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다른 선택지는 거의 다 허황된 일일 뿐이고. 이게 가장 확률도 높아.'
연설아의 목숨을 구명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 쟁천무회의 제일인이 되는 것.
그럼, 이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대리인, 해주지."
연설아와 형로의 눈에 서린 이채가 보였다.
"감사하지만, 이번에도 왜 도와주시는지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한유성은 당하연의 솔루션을 이번에도 적용하기로 했다.
"내가 산에서 수련만 몇 년을 해서 말이야. 안 그래도 실전 경험이 부족한 것 같은데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뭐."
- 당하연) 산속에서 수련만 하던 사람인 검다…! 신인 운둔…고수!
이게 당하연 선배가 잡아준 설정이었다.
"근데 난 말했다. 5위계라고."
둘은 동시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건 괜찮아요…! 제가 준비했던 대리인보다 더 강하신 것 같으니까요!"
한유성은 입가를 비틀었다.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지 않냐? 그 사람 그대로 진출했으면 바로 지고 끝났을 거 같은데."
연설아는 내 말에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쵸…그건 그것대로 문제죠오."
"쟁천무회장으로 가는 길은 알지?"
"네, 이제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쟁천무회에 참여할 거란 의사표명만 제대로 해두면 방금처럼 대놓고 추격을 하지는 않을 거예요."
연설아는 이제 좀 마음이 안정되었는지, 그나마 차분해진 듯 행동을 했다.
"그래서, 묵을 장소는 있나?"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의사표명을 한다 쳐도, 해가 뜨고 나서 해야 할 터.
"쟁천무회장의 앞에 있는 작은 여관이 있는데. 그곳의 주인이 제가 아는 지인이에요."
"그래?"
그래도 믿고 있는 구석이 하나 정도는 있었구나.
연설아의 말대로, 여관 운몽루에는 해가 될 만한 요소가 보이지 않았다.
"걱정 마시오. 친우의 동생에게 위해를 가할 만큼 못 배운 사람은 아니니."
자신의 이름을 혁운이라고 소개한 사내는 연설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유신이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가?"
연설아가 힘없이 말했다.
"네, 아직…."
"돌아와야 할 텐데 말이다."
혁운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한유성은 소면 한 그릇과 만두를 먹어치우고 난 뒤에 연설아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제 왜 호북연가가 이런 상황인지 말을 해줘야겠는데."
연설아는 한유성의 질문에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작년에 가문의 장남인 연유신 오라버니가 실종됐어요. 문제는 그전에 오라버니가 했던 일인데…백리세가의 장남인 백리혁과 대련 중에 백리혁을 죽여버리고 실종됐어요."
다른 가문의 장남을 죽이고 실종이라.
"진짜 죽이려고 죽인 건가?"
한유성의 말에 연설아는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그걸 확신하지 못하겠어요. 그 대련의 목격자는 단 한 명인데…그게 백리세가의 사람이거든요."
"그 연유신이란 사람이 살아있다면 물어보는 게 확실할 거 같은데."
연설아가 한유성의 말에 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쵸…! 물어보고 싶은데! 정말 그러고 싶은데! 정말 어디에 틀어박혀 있는 건지!"
나지막이 말을 덧붙였다.
"죽은 것보다는 살아있는 게 낫긴 하지만, 하아."
"백리세가의 장남은 죽은 게 확실하고. 그걸 빌미로 백리세가 측에서 호북연가를 집어삼키려는 움직임을 취하는 건가."
"맞아요. 다른 가문도 아니고 오대세가 중 하나인 하북팽가 측에서 백리세가의 편을 들어주어서…오라버니가 백리혁을 죽인 걸 빌미로 주력 무인들이 간밤에 살해당했어요."
한유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당장 가문의 존폐가 위태로운 거 아니냐?"
연설아의 굳은 얼굴은 풀어질 기미가 없었다.
"아직은 가주인 아버님이 가문을 철저히 지키고 계시지만…점점 더 상황이 힘들어질 게 분명하죠. 6위계 제한이 없었다면 아버님이 직접 참여를 하셨겠지만, 아버지는 7위계이시거든요."
한유성은 현 상황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쟁천무회까지 남아있는 시간은 일주일.
일주일간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가 쟁천무회장으로 향하면 되는 일이었다.
***
일주일 동안 할 일은 차고 넘쳤다.
심법 창안과 무공 수련의 반복.
독방.
나는 쟁천무회장의 건너편 끝자락에 있는 낡은 건물 안에서 가부좌 자세로 앉았다.
고유한 내공심법(內功心法).
같은 말로 고유한 마나 연공법을 창안해내야만, 6위계에 발을 들일 기틀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6위계가 되려면 자신만의 마나 연공법이 필수적이다.
그건, 탑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빛의검 선배가 준 용살검 검법서에 적혀져 있던 부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최근이 아니라, 5위계에 들어선 직후부터 쭉 시도해온 일이지만, 아직도 심법은 완성되지 않았다.
마나 연공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느낀 적은 없다.
내 마나의 기류가 닿지 못한 구간이 있다고 어렴풋이 예상할 뿐이다.
- 빛의검) 넌 지극히 정상이다.
- 빛의검) 6위계를 도달하는 건, 1위계에서 5위계까지의 도달보다 몇 배는 더 험난한 길로 이루어져 있다.
ㄴ 수왕) 계에에에에위- 무서운 사실! 이 말 그대로 7위계에 적용할 수 있고. 8위계에 적용할 수 있고! 9위계에 적용할 수 있드아아아아!!
ㄴ 마룡왕) 벨투-히이이이이익!!
- 시궁창검성) 한유성, 네 그릇이 거대하여 늦는 것도 있겠지.
5위계로서의 그릇이 커서 늦는 거다?
그게 맞다 해도, 어쩌라는 거냐.
- 天魔) 그릇의 크기고 뭐고. 네놈 정도면 성취가 아주 빠른 거다. 등반자.
내가 느린 게 아닌 건 알고 있다.
반.
4위계 상태에서 탑에 진입한 반 이네르.
- 응? 1층부터 13층까지 얼마나 걸렸냐고? 3년하고 2개월?
그 재능이 충분했던 반도 그만한 시간을 소비했다.
- 5위계는 원래 흐릿하게 보였던 때라 금방 올라갔는데. 6위계가 힘들었지. 스테이지 깬다고 오래 걸린 게 아니라 대부분의 시간을 대기실에서 보냈으니까.
- '권역'을 창안 한다고 시간이 한참 더 걸린 것도 있어.
수많은 초월자 선배들의 도움이 있었던 덕에 겁 없이 층계들을 뚫고 올라간 나와 달리, 반은 계속 생존 가능성에 대해 스스로 가늠을 하면서 올라가야 했을 테니까.
하지만 난 나를 기준으로 봐야 한다.
쓸데없는 핑계를 대지 않으려면.
이 정도로 고통스럽다며 고뇌를 하고 징징거릴 틈은 없다.
- 시궁창검성) 심법도 결국 네 심상과 관련되어 있다.
- 빛의검) 네가 싸우던 방식, 네가 전투를 이어나가는 흐름을 떠올려내라.
일주일간 계속 마나 연공법을 연구했다.
가부좌를 틀었다.
마력이 체내를 계속해서 돌기 시작했다.
때로는 부드럽게.
그리고 때로는 폭발적으로.
숨겨진 길을 열기 위해 부단히 마력을 운용했다.
그간 닿지 않았던 두 기둥의 끝 지점까지 마력이 흘러내렸다.
발끝부터 고통이 차올랐다.
아직 오르지 말았어야 할 나무에 올랐다는 듯.
으드득-
근육이 떨리고 뼈가 삐걱거렸다.
수십 개의 검이 몸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모두 짓누르고.
이 검들을 세상 밖으로 내보이겠다는 심상을 바깥으로 표출하고. 내세웠다.
운용을 시작한 지 3일을 넘어, 며칠이 흘렀는지도 까맣게 잊었을 때.
비로소, 고유의 마나 연공법을 창안해낼 수 있었다.
- 天魔) 제대로 창안을 해냈으면 조금이나마 육신이 바뀐 지점이 느껴질 거다.
천마 선배의 댓글대로였다.
세상이 더 선명해졌다.
후우.
숨을 들이 내쉬었다.
흐르는 대기.
이 세계의 호흡 자체가 육체와 더 친숙해진 느낌이었다.
이 세계가 나의 기(氣)를 거부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드디어 6위계로 향하는 전제 조건은 갖춰졌다.
제목 : 연공법 완성했다.
작성자 : ㅇㅇ*
- 이름…은 아직 안 정했고.
ㄴ 수왕) 어! 그거 이름 정해야 더 원활하게 운용 될 건데! 이름은 곧 힘이다!
ㄴ 엌ㅋㅋㅋㅋㅋ 이 고양이 지금 진지한 거임?
ㄴ 대마법사) 그런 건 없단다. 이름이 있는 게 좋긴 하지.
ㄴ 수왕) ???? 읭??? 아부지도 어머니도 할아버지도 다 그렇게 말했는데!!!!! 그런 게 없다고오오!
ㄴ 깔깔깔깔, 몇 대를 걸쳐 공들인 미신 가스라이팅에 제대로 당했네.
ㄴ 天魔) 드디어 5위계의 끝에 온 걸 환영한다.
ㄴ 시궁창검성) 하지만 끝의 끝이 있고 그 끝이 있는 세계다.
ㄴ 아주 저주를 해라 저주를 ㅋㅋㅋㅋㅋㅋㅋ 다 왔다고 해줘야지.
ㄴ 그래, 우리 이지 노멀 범부들은 멀쩡한 심법을 만들어내지 못하지…이제 우릴 짓밟고 올라가라, 역대급 신인이여 ….
ㄴ 얼음여왕) 꽁꽁! 딱 한 번의 거대한 폭풍이 한 번 터지면 곧바로 6위계로 돌입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화이팅!
ㄴ 마룡왕) 벨투이- 거대한 폭바아알이 필요해요오.
ㄴ 당하연) 이제! 쟁천무회! 출전인검까!!!!!!!!!!!
ㄴ ㅇㅇ*) 내일 아침 ㅇㅇ.
ㄴ 당하연) 출격인검다!!!!!
ㄴ 유명한거지) 정치질을 조심하시오. 겉보기엔 머리에 무(武)밖에 들어있지 않게 생긴 놈들이 머릿속에 능구렁이를 키우는 경우는 흔하니.
ㄴ 창왕) 이상한 말 하는 놈들 입을 터트려 버리면 된다.
ㄴ 당하연) 그때는 다시 갤에 오는 검다!!! 맞대응 방법을 알려드리겠슴다!!
ㄴ 시궁창검성) 매화향을 좀 맡게 하면 조용해지는데 말이다.
개방주 선배의 도움이 되는 조언은 그렇지 않은 말들에 빠르게 묻혔다.
***
다음 날 아침.
쟁천무회장의 회장 입구는 소란스러워졌다.
"…평화를 깨트린 혈겁의 원흉이 잘도 쟁천무회에 발을 들이미는구나."
연설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건 백리세가의 둘째 공자, 백리휘의 시선이었다.
"설마, 아직도 연유신의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냐?"
연설아는 그 서슬 퍼런 시선을 무시했다.
철컹!
주홍빛 돌계단이 산등선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벽 아래, 무림맹의 호위대가 엄정한 자세로 줄을 지어 서 있다.
"결국 호북연가의 자제가 참여를 하는 건가?"
"하지만 자네도 들었지 않은가, 호북연가가 준비했던 대리인은 양주(揚州)에서 범선이 출발을 하기도 전에 죽어버렸다고."
또한, 하나같이 위세가 등등한 가문들의 일원들이 주목을 하고 있는 상황.
연설아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건 불가했다.
그래서 5위계의 무인, 백리휘는 날이 선 살기를 연설아에게 쏘아 보냈다.
일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짙은 살기였다.
"그래, 네가 성의껏 준비한 장기 말이 출발선에 서기도 전에 죽었거늘 왜 이곳에 발을…!"
비아냥거리던 백리휘의 시선이 좌측으로 휙 쏠렸다.
서늘한 살기가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자신이 연설아를 향해 쏟아내던 살기가 찢기고.
그보다 더한 살기가 백리휘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 살기의 발원지는 연설아의 뒤에 선 한유성이었다.
백발이 눈에 띄는 무림맹 호위대장의 입이 열렸다.
"이름과 소속을 제대로 밝히지 않으면 체포하겠다. 살기를 거두고 이름을 밝혀라."
한유성은 연설아에게 향하는 백리휘의 살기를 보고서도 조처를 하지 않고 방치한 무림맹 호위대에게 흘렸던 살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호북연가 쟁천무회 대리 출전자, 한유성."
한유성은 연설아를 보며 턱짓을 했다.
"들어가.“
한유성은 연설아가 회장의 입구에 들어서고 나서야 살기를 모두 거두었다.
무림인들의 시선이 한유성에게 쏠렸다.
- 天魔) 살기를 받으면 살기를 돌려줘라. 얕보이면 뜯어먹힌다.
- 시궁창검성) 그런 대회의 경우, 윗선들이 재미있어하는 상활을 만들면 어지간한 짓을 해도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 아주 쾌락이 터져 나오는 상황을 만들어라.
ㄴ 유명한거지) 아주 좋은 거 가르치시고 있구려….
새벽에 초월갤 선배들에게 들었던 조언대로, 저 멀리서 윗선들로 보이는 이들의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유성도 쟁천무회장의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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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성은 쟁천무회장 내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의 집중을 받았다.
그리고 강대한 살기가 한유성의 몸을 짓눌렀다.
한유성은 그 살기를 내뿜는 상대의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NPC - 하북팽가 가주 7위계 팽무일]
'이게 7위계의 살기인가.'
7위계를 만난 것 자체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5층 스테이지, 카르민 에버하트를 벤투라 아카데미에 입학시켜야 하는 내용의 퀘스트 형 스테이지였다.
그리고 그때 만난 벤투라 아카데미 학장, 만델스가 7위계의 대마법사였다.
하지만 만델스는 자신을 위협하기 위한 살기 같은 건 뿜어내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존재감 자체는 여실히 느껴졌지만.
7위계의 살기를 마주한 건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확실히, 마주하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살기였다.
'노리고 있는 호북연가의 대리인으로 나온 게 괘씸한 모양인데.'
한유성은 어제 고유의 마나 연공법을 어제 체득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체득한 뒤로 한층 더 기민하고 섬세하진 마력의 전개. 그리고 그간 철저히 쌓아 올린 정신력이 7위계의 살기를 두 발로 서서, 그것도 썩 태연한 모습으로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한유성은 입을 열었다.
다른 7위계의 면면을 살피면서.
"이런 건 좀 그만두라고 말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쟁천무회의 출전 기준을 6위계 이하로만 한정한 것도 나름의 공정한 판을 만들려고 정한 거 아닙니까."
한유성의 말에 7위계 무인들은 끅끅 거리며 웃었다.
모두 이름값이 드높은 인물들이었다.
[NPC - 모용세가 가주 7위계 모용진천]
[NPC - 사천당가 가주 7위계 당명허]
[NPC - 남궁세가 가주 7위계 남궁원]
초월갤 선배들이 설명해준 오대세가.
그 오대세가의 가주인데 7위계가 아닌 가주는 한 명 보였다.
[NPC - 제갈세가 가주 6위계 제갈시헌]
7위계를 넘는 무인이 어지간하면 없을 거라는 초월갤 선배들의 말이 맞았다.
한유성은 곧이어, 살기가 거둬지는 걸 확인했다.
살기는 거두어들였지만, 하북팽가의 가주 팽무일의 얼굴은 여전히 구겨져 있었다.
한유성은 직선으로 서 있는 이들의 뒤에 섰다.
출전자들의 통제를 맡고 있는 집행관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접수 날이다. 대전은 내일부터 시작한다."
한유성은 주변을 훑었다.
초월갤 선배들의 말대로, 오대세가의 자제는 둘 뿐이었다.
[NPC - 남궁세가 출전자 6위계 남궁율학]
[NPC - 하북팽가 출전자 5위계 팽한위]
오대세가의 자제가 모두 출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지금처럼 한두 명 정도가 대부분.
- 시궁창검성) 이미 무림 내에서 갑의 위치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오대세가 측이니, 쟁천무회의 제일인이 된다고 해서 뭘 특별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말이다.
- 당하연) 간혹, 자제를 내보내는 오대세가의 의중은 결국 자식 자랑임다!
한유성은 그다음 순번으로 주의할만한 필요성이 있다는 자들을 떠올려냈다.
'구파일방.'
[NPC - 소림사 출전자 6위계 자선]
[NPC - 무당파 출전자 5위계 명정]
[NPC - 곤륜파 출전자 5위계 청허율]
[NPC - 점창파 출전자 5위계 석이준]
[NPC - 화산파 출전자 5위계 유화윤]
'화산은 있네.'
이 탑 세계의 무림과는 상관이 있을 리 없지만, 갤러리 선배들이 속하는 가문들이 한유성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화산파는 있었지만, 당가나 개방의 자제는 보이지 않았다.
하긴 모두 출석하는 건 그것대로 이상하겠지.
막상 출전자의 숫자는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50여 명.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에 속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눈에 띄는 이들은 다섯 명 정도밖에 없었지만.
집행인들의 안내에 따라 줄을 섰다.
위계를 확인하기 위한 절차라고 했다.
쟁천무회장을 둘러보며 차례를 기다리니, 집행관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목숨을 해하는 건 절대 금한다. 팔과 다리가 깔끔한 절단면으로 잘렸을 때는 천의(天醫)께서 치료를 해주실 거다. 하나, 상처가 난잡하게 났을 때는 천의께서도 완벽한 치유를 장담하실 수 없으니 어지간하면 피를 보지 않는 걸 추천하지."
집행관은 말을 이었다.
"승패를 내리는 조건은 간단하다. 한쪽이 패배를 선언하면 그 출전자의 패배로 경기가 끝난다. 그리고 무대 위의 심판이 승자와 패배를 가려내면 그걸로 경기가 끝난다. 후자의 경우, 심판은 최대한 그 상황에 맞는 공명정대한 판단을 내릴 거다."
집행관의 말에는 묵직한 무게가 서려 있었다.
"그러니 심판이 내린 승패에 대한 반박은 받지 않는다. 그렇게 반박을 한 출전자가 어떠한 배경을 가지고 있든, 심판의 판단을 존중해야 마땅하다."
집행관의 말이 끝나고. 한유성의 차례가 왔다.
한유성은 작은 단상 위에 서 있는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NPC - 집행원 5위계 조태명]
"손을 내미시오."
앞선 이들의 모습을 봐서 왜 손을 내밀라고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위계의 확인.
한유성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위계를 말해주면서.
"5위계입니다."
한유성의 오른손을 맞잡은 조태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5위계, 확인되었소."
위계를 확인하는 집행원은 접촉한 상대의 위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류에 민감한 사람으로 선택된다.
7위계 이상의 무인은 내력을 탈바꿈시켜 위계를 착각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쟁천무회장에 펼쳐진 제갈가의 진법으로 그런 사술은 잡아낼 수 있었다.
위계의 확인과 함께 접수를 끝낸 한유성은 굳은 얼굴로 앉아있는 연설아의 옆에 앉았다.
"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나?"
한유성의 질문에 연설아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우으으…지금 상황에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렵지 않을까요?"
연설아는 긴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친했던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았는데. 가문의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난 후로는 그나마 친했던 사람들과도 거리감이 생겨버려서."
"그런 건 어쩔 수 없지."
이야기를 나누는 둘의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연설아는 드리워진 그림자의 주인을 보고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유성은 방금 힐긋 바라봤던 사람 중에 있는 사람이란 걸 확인했다.
"설아, 이야기는 들었어. 화산에 왔었다면 도와줬을텐데."
"화윤 언니."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 화산파 출전자 유화윤이었다.
연설아는 손사래를 쳤다.
"아주 잠깐 그럴까 고민했는데…너무 폐를 끼치게 될 거 같아서요. 또, 이런 일은 가문의 힘으로 해결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유화윤의 시선은 연설아의 옆에 앉아있는 한유성에게로 향했다.
"존함이 한유성이라고 하셨죠? 한 소협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한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습니다."
유화윤은 싱긋 웃었다.
"한 소협은 내일은 고생을 좀 하시게 될 거예요."
"고생?"
"현재 50명이 넘는 출전자를 32명까지 줄이는 과정을 내일 치르게 될 거예요."
"32명?"
한유성은 그 숫자를 듣고서 무슨 말인지 예측은 갔다.
"대진 인원을 추리려는 건가?"
"맞아요."
유화윤은 말을 덧붙였다.
"32명이 추려지는 방법은?"
"열여섯 정도의 자동 본선 진출자를 제외한 나머지가 싸우게 될 거예요."
유화윤은 한유성의 질문에 대해 자신이 아는 바대로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이때까지 쟁천무회에 참여하지 않은 가문의 자제나, 대리인들끼리의 싸움을 먼저 이끌어내요."
"그거 좀 여러모로 불공평한 것 같은데요."
"맞아요. 이름값을 덜 쌓아놓은 만큼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거죠."
"친절한 설명 고맙습니다."
유화윤은 싱긋 웃었다.
"뭘요. 그럼, 우리 설아를 지키기 위해서 고용이 된 것 같은데. 그 목적을 제대로 이뤄주세요."
"노력은 할 겁니다."
다행히, 쟁천무회장 내의 숙소는 마련되어 있었다.
호북연가가 아직은 무림맹에 멀쩡하게 속해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배정된 방은 하나였다.
커튼 역할을 하는 천이 있었기에, 한유성과 연설아는 그 천을 기준으로 나눠 앉았다.
연설아는 몸을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천 너머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한 일에 말려들게 해서 죄송해요."
"너무 늦었어."
그런 칭얼거림을 듣기에는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어졌다.
연설아는 이내 풀썩 쓰러지듯 바닥에 쓰러져, 잠에 들었다.
그 모습이 천에 검은색 음영으로 보였다.
한유성은 초월자 갤러리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갤질이나 하다가 잠에 들 생각이었다.
제목 : 쟁천무회 출전 접수 완료.
작성자 : ㅇㅇ*
- 화산파 자제는 출전했는데. 나머지는 없네. 당가나 개방은. 오대세가는 남궁이랑 하북팽가. 구파일방은 소림, 무당, 곤륜, 점창 정도 출전한 듯.
승률은 결국 해봐야 알듯.
댓글은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ㄴ 당하연) 그쪽 사천당가도 쓸데없는 데 힘을 쏟지 않는 부류인 검다!
ㄴ 시궁창검성) 겁이 많은 것에 가깝지 않나.
ㄴ 당하연) 적당히 겁을 먹는 건 안전한 생존을 할 수 있게 해줌다!
ㄴ 창왕) 무공에 관련된 창을 공략하는 법을 알려주마.
ㄴ 天魔) 네 입장에서 까다로운 자는 소림일지도 모르겠군. 아직 무투를 극한으로 익힌 상대를 만난 적이 별로 없으니.
조언들은 무수히 쏟아졌다.
하나같이 맞는 말이었다.
대마법사 선배가 준 마법서는 대기실에서 계속 연습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무림은 마법을 쓰는 놈들이 없는 세계인만큼, 유사한 부류의 기술과 무공으로 상대하고 싶었다.
선배들의 조언을 꼭꼭 씹어 삼킨 한유성은 눈을 붙였다.
***
다음 날 아침.
한유성은 회장에 들어섰다.
"지금부터 아직 무림에 이름을 전혀 알리지 못한, 무림 초출로 예상되는 이들을 먼저 불러 본선 출전 인원을 추리는 예선을 시작하겠소."
한유성은 집행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호명되는 이들은 빈 무대 위로 올라가 자신과 전투할 상대를 지목하시오. 앞쪽에 나열한 목록에 한정하여."
5위계의 무인, 현백세가의 둘째 아들인 현영결은 주변을 훑었다.
'4위계는 쓰러트려봤자 주목을 받지 못한다.'
현영결은 자존심이 단단히 구겨진 상태였다.
'4년 전에도 쟁천무회에 참여했거늘…4위계였을 때, 같은 4위계의 손에 패배해버리는 바람에 두 번째 참가에 5위계임에도 예선에 불려 나가는 꼴이라니.'
5위계를 달성하고서도,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에 진득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경험 삼아 출전한 걸로 보이는 3위계나, 자신보다 낮은 위계인 4위계를 고르면 본선에는 쉽게 올라가겠지.
하지만 그래선 이번에도 같은 취급을 당할 뿐이다.
현영결은 위계와 이름이 적힌 목판의 끝자락을 검지로 골랐다.
5위계, 한유성.
듣도 보도 못한 이름.
대리인으로서 소속된 가문인 호북연가는 모종의 이유로 정파의 수치가 된 상황.
뒷배라고 할 수준도 아니었다.
저벅저벅-
한유성은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한유성은 인벤토리에 검을 집어넣고 있는 상황.
가능한 선까지는 주먹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한유성은 호신강기를 전신에 휘감았다.
현영결은 어젯밤, 수련장에서 권법 수련을 하는 한유성의 모습을 목도하기까지 했다.
겉보기엔 완전한 권사(拳士)인 한유성.
그건, 현영결이 한유성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상성이 제일 만만한 건 무투 쪽이다.'
자신의 무기는 창.
현영결은 창을 양손으로 들었다.
"미안하군."
같은 위계인 이상, 거리 싸움에서 질 수가 없었다.
"다음 기회를 노리길 바라네."
현영결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스스슥…!
창극에 푸르스름한 기류가 맺혔다.
콰과과과과과!!
보기엔 완벽한 찌르기가 허공을 짓이기며 쇄도했다.
한유성은 어젯밤 갤러리에서 본 창왕 선배의 조언을 떠올렸다.
- 창왕) 다수의 무인이 그렇듯, 5위계 쯤 되면 본인이 아주 강해진 줄 착각을 하지.
- 창왕) 그쯤 되면 숨도 못 쉬게 상대를 몰아붙여 본 경험도 있을 테고. 하나, 그 경험이 독이 되는 거다.
- 창왕) 자신이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공격 범위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 창왕) 내뻗는 팔의 방향. 발의 위치. 그걸로 창로는 계산이 가능하다. 단숨에 턱 밑까지 도달해라.
ㄴ 天魔) 거리를 좁혀서 패라는 말을 아주 장황하게 하고 있구나….
ㄴ 대마법사) ㄹㅇ
ㄴ 창왕) 아, 맞네. 같은 소리군?
쐐애애액!
창왕 선배의 말대로, 창로의 방향을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한유성의 전투 감각은 그걸 이미 해내고 있었다.
조언을 듣기 한참 전에도.
현영결은 미간을 구겼다.
두 번의 찌르기. 그 두 번을 찰나의 간격으로 피해낸 한유성.
'베어내 주마.'
한유성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찌르기를 피해낸 덕에.
횡으로 휘두른 창로는 반드시 맞출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무공에서 현영결이 가장 자신 있는 부분.
그게 상대방이 예감도 하기 전에 극도의 변초를 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영결의 양팔을 기민하게 움직인 순간.
콰직.
현영결의 안면이 짓눌렸다.
"케에엑!"
한유성의 주먹을 막고자, 본능적으로 들어 올린 창대.
우지직!
그것도 으스러졌다. 미약하게나마 기류를 흘리고 있었음에도.
창대의 파편이 튀었다.
쾅!
현영결의 오른쪽 어깨가 함몰되었다.
어떤 위대한 초식인 것도 아니다.
단순한 주먹질이었다.
그런데 얼굴에 주먹을 맞기 전에 그 어떤 전조도 없었다.
어떻게 거리를 좁힌 건지 보지도 못했다.
그냥, 수준 차이였다.
한유성은 그저 움직였는데. 자신의 흐름이 부서졌다.
현영결은 왼손을 들었다.
항복 의사였다.
ㄴ 창왕) 창쟁이들 사이에는 쓸데없는 내적 친밀감이 있으니, 한 놈이 너무 쉽게 졌다 싶으면 호전적으로 나설 거다.
창왕 선배들의 말대로, 객석이나 비무대 앞에서 옆에 창이 있는 이들에게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별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한유성은 들것에 실려 가는 현영결을 내려다본 뒤, 너머에 있는 명패들을 바라보았다.
한 번 더 승리하면 본선에 진출하는 상황.
예선 인원 목록에는 6위계가 없으니, 다들 고만고만해 보였다.
한유성은 박수를 세 번 쳤다.
"자자, 아무나 올라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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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리세가의 백리휘가 예선 인원 목록에 있었다면 그자를 직접 지목해서 비무대 위에 세웠겠지만, 아쉽게도 무명(無名)은 아닌 모양인지 목록에 없었다.
두 번째로 결투를 치른 상대는 4위계의 무인이었다.
본인 입으로 호승심으로 인해 올라왔다고 한 작자였다.
검사이길래 검을 쓸까도 잠깐 생각했지만, 예선까지는 권법과 각법만 쓰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무투만으로 상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본선 진출을 확정시켜서 그런지, 시선의 주목을 또 받았다.
연무장에 들어서니, 그 시선의 숫자가 늘어난 게 느껴졌다.
"저자군……호북연가에서 내세운 대리인이."
"강한가?"
"사람을 썩 잘 패는 것 같던데."
그리고 옆에서 힐긋힐긋 보는 게 아니라 직접 다가오는 이들의 숫자도 늘어났다.
"반갑소이다. "
난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습니다."
"예선을 통과하는 모습을 아주 인상적으로 보았소이다. 멋진 권이었소."
"예."
자선은 갑자기 내 옆에서 육체단련을 하기 시작했다.
왜 이러지.
의문은 들었지만, 굳이 말을 얹을 사유는 없었다.
같이 운동이나 했다.
다음 날 아침.
쟁천무회의 본선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쟁천무회장은 서로에게 건네는 덕담과 호승심으로 잔뜩 달아올랐다.
저벅저벅-
회장의 단상 위로 누군가 올라왔다.
무림맹주.
어젯밤에 대진표 아래에 적혀 있던 이름을 확인하고서야, 무림맹주가 남궁세가 가주인 남궁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쟁천무회는 이 무림의 미래를 확인하는 숭고한 과정이다.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도 좋다만, 상대의 목숨을 취하는 일은 삼가도록 해라."
남궁원의 목소리가 널리 울려 퍼졌다.
"그럼 모두 최대의 역량을 발휘해, 후회 없는 결전을 치르길 바란다."
- 시궁창검성) 6위계는 단순히 '권역'을 창안해냈느냐 마느냐로 단계가 나뉘지만, 7위계부터는 세 분류로 나뉜다.
- 시궁창검성) 초위(初位), 중위(中位), 극위(極位).
- 天魔) 그래도 맹주 쯤 되는 놈이면 같은 7위계라도, 극위에 해당할 확률이 높겠지.
난 아직 7위계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당한 적이 없기에 세분화된 수준에 따른 격차를 체감할 수는 없었다.
객석에 앉아 있는 무수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쟁천무회는 그렇게 시작을 알렸다.
벽면에 붙어진 대진표를 바라보았다.
오늘 내가 상대해야 할 적은 점창파, 5위계 석이준이었다.
1차 대전이 정해진 건 어젯밤이었기에 점창파의 무공에 대해선 초월갤 들은 바가 있었다.
본선이 시작되었다.
잠시 후면 내 차례였다.
누군가가 다가왔다.
다가온 상대는 다름 아닌, 본선 첫 번째 상대인 점창파의 석이준이었다.
"어제 당신이 보여줬던 전투는 썩 인상적이었다."
어제의 소림파 출전자와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그런데 계속 생각했던 부분인데 말이야."
석이준이 턱짓을 했다.
"당신 주먹이 아니라 검을 쓰지, 원래?"
엉?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하지?"
"보법이다."
"보법?"
"상대방과 거리를 좁힐 때 미묘한 차이가 보였다. 네 발걸음은 검을 든 자의 움직임이었다."
난 당황을 했다.
검이 주무기라는 걸 눈치를 챌 줄 몰랐으니까.
"보법을 섞어 쓴 것 같던데."
이러면 계속 주먹을 쓸 흥이 좀 식는데.
"검을 써라. 검객이라면."
석이준이 말을 덧붙였다.
"내 검은 그렇게 무르지 않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비무대 위에 서자, 어제와는 차원이 다른 관객의 주목도가 느껴졌다.
내 허리춤에는 예정에 없던 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석이준이 내가 검을 쓴다는 걸 알아차린 이상, 검을 쓸 생각이었다.
선배들의 댓글이 떠올랐다.
- 무녀) 하와와, 점창의 검법은 매섭다와요. 몸이 꿰뚫리지 않도록 조심해야하는 것이와요.
- 창왕) 점창의 검은 무시할 수 없지.
- 天魔) 하지만 5위계. 전력으로 상대하면 네가 이길 거다.
- 빛의검) 뭔가를 얻으려면, 네 쪽에서 어느 정도 힘을 낮추고 들어가야 할 거다.
ㄴ ㅇㅇ*) 그러지, 뭐.
어차피 힘 빼고 싸울 수 있는 경기가 계속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판데모니엄이니까.
- 얼음여왕) 꽁꽁! 화이팅!
- 마룡왕) 벨투이- 다 이겨버리는 거예요오.
- 수왕) 설마 지겠음? 설마 지겠음? 설마 지겠음?
- 당하연) 다 쓸어버리는 검다!!!
***
"검…… 뭐야, 저놈 권법 쓰던 놈 아니었나?"
4위계이거나 그 이하의 위계를 지닌 이들은 대부분 한유성이 검을 쓴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 했지만.
"역시, 검수였나. 중간중간 나오는 거리 재기가 권사 같지 않았지……"
5위계들도 석이준과 같이 눈치가 빠른 이들은 한유성이 권사가 아니라는 건 알아차린 상황이었다.
심판이 흑색 나무 작대기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대결 시작."
석이준이 몸을 아래로 낮추었다.
한유성은 몸을 뒤로 물렸다.
거리 싸움에서 패하여,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함이었다.
광풍이 일렁였다.
스카카각!
쇳소리와 함께 어깨죽지에서 일어난 균열을 체감했다.
호신강기를 제대로 두르고 있지 않았다면, 왼팔이 반쯤 잘려나갔어도 이상할 게 없는 일격이었다.
'다르다.'
한유성은 입가를 비틀었다.
그건 웃음에 가까웠다.
본선의 첫번째 상대가 입만 산 놈이 이나리라는데서 오는 안도감.
위계가 전부가 아니다.
한유성은 그 말을 자신이 아닌, 석이준이 내보이는 움직임에서 느낄 수 있었다.
석이준의 검로(劍路)에는 이질적인 기세가 있었다.
요사스러운 종류의 이질적임이 아닌.
유서 깊은 무공으로서 가지고 있는 절학.
- 天魔) 점창파의 무학은 사납다. 극쾌와 파괴라고 요약을 할 수 있지.
- 天魔) 이때까지 한 말과는 다르게 들리겠다만, 검의 궤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도할 필요는 없다. 끝지점. 끝만 봐라.
- 창왕) 점창을 상대할 때만큼은 거리 조절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거다.
한유성과 석이준의 검이 무수히 맞부딪혔다.
한유성은 용살검 대신, 반 이네르의 검술인 '피엘뷔르트'를 사용했다.
아직은 완전히 습득해내지 못한 검술.
한유성은 석이준의 검과 합을 쌓아나가면서 피엘뷔르트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하는 게 느껴졌다.
'이 검술의 강점은 자유로움에 있다.'
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상황에 따리 변형이 가능했다.
용살검이 극강의 공격에 치중되어있고. 절대군주 선배의 검술인 발세나르츠가 균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피엘뷔르트는 자유로움에 중점이 맞쳐줘 있었다.
마력을 조금 더 한계까지 끌어올리고.
피엘뷔르트가 아닌, 용살검을 사용했다면 진작에 결판이 났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승리로.
그럼에도 피엘뷔르트 검술을 고집한 것은 이 전투에서 얻어갈 수 있는 가치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유성은 턱짓을 했다.
"있지 않나? 가문 검술."
석이준은 웃었다.
"사용하란 말이냐?"
"그럴 만한 판은 만들어준 것 같은데."
한유성의 말에 석이준은 잠깐 고민하듯, 오른팔을 천천히 돌렸다.
잠시 후.
빙빙 돌리던 손목을 뚝 멈췄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객석의 소수들도 느끼고 있는 것.
그건 한 끗 차이긴 해도, 한유성이 계속 석이준을 조금씩 상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유성의 말이 아니라도.
석이준 스스로도 승리를 쟁취 하기 위해선 비기를 쓰는 게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는 걸 절감하고 있었다.
석이준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검을 정면으로 세운 석이준의 몸이 앞으로 훅 쏠렸다.
요란한 소리는 없었다.
검로가 불명확하지도 않았다.
온 신경을 쏟은 상황.
마치, 허공에 전시되듯 정지된 피사체처럼 명확하게 관측되었다.
하나, 검로는 이미 출수된 후.
눈에 보이는 건 이미 쏘아진 검격이 잔상이었다.
한유성은 검기를 끌어올렸다.
상체를 뒤덮은 검로를 깨부쉈다.
검기의 파편이 어꺠죽지에 처박혔다.
호신강기 덕분에 파편이 박하진 않았으나, 서늘함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석이준의 팔이 한 번 더 움직였다.
방금도 충분히 극쾌라는 명칭에 걸맞는 검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빨랐다.
한유성은 심호흡을 했다.
“……….”
보였다.
말 그대로 빛을 쏘아낸 것만 같은 가공할 만한 찌르기.
그 찌르기가 어떤 형태의 검기가 휩싸이고 뒤덮여 만들어진 건지.
검기에서 느껴진 건 세월이었다.
대를 이어 무공의 절학을 관철 시킨 세월.
고뇌로 벼려진 검로.
석이준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내지른 찌르기가 육신에 담겨있었다.
그리고 무수한 반복으로 체화되었을 균형 잡힌 자세는 석이준을 한 자루의 검으로 보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신검합일의 경지와는 거리가 먼 위계를 떠나서.
사일검법(射日劍法).
후예사일(后羿射日).
석이준이 내지른 사일검법의 초식을 바라본 쟁천무회장의 무인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통상적인 5위계의 위력은 넘어 선 고강한 공격.
혹여, 개입을 하면 막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나서기 위해 심판의 뒤에 서있던 무림맹 소속의 무사 곽익은 검의 손잡이에 올린 채 가만히 있었다.
나서려고 했으나, 찰나에 보인 한유성의 얼굴이 너무 평온했다.
한유성은 힘을 조금 내려놓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경탄할 만한 검로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감탄만하고 끝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검기를 끌어올렸다.
땅을 즈려밟았다.
비무대의 바닥이 파편을 흩트리며 퍼져나갔다.
콰─앙
한유성의 주변 풍광이 뒤로 훅 밀렸다.
한유성이 검을 내리그었다.
석이준이 만들어낸 직선의 광휘를 향해.
빛이 양 갈래로 쩌억 갈라졌다.
둘은 그렇게 초근접 거리에서 격돌했다.
서로의 검이 맞부딪혔다.
쾅-
석이준이 쥐고 있던 검이 허공을 치솟아올랐다.
석이준의 몸뚱이가 붕 뜨더니, 순식간에 뒤로 처박혔다.
콰아앙!
빈 벽면에 석이준의 몸뚱이가 처박히기 직전, 관객석에서 무언가 빠르게 튀어나왔다.
“준아!”
남성이 석이준의 몸을 받아냈다.
남성, 석지광은 의식을 잃은 석이준을 보며 혀를 찼다.
몸에서 열기가 흐르는 걸 보면, 이기기 위해서 순식간에 내력을 바닥 끝까지 끌어썼으나 패배를 한 것이 분명했다.
석지광은 비무대 위에 서있는 한유성을 바라보았다.
심판이 그에게 승리를 선언했다.
석지광은 동생이 패배를 인정할 거라고 확신했기에 얌전히 석이준을 회복실로 옮겼다.
한유성은 우선 숙소로 돌아왔다.
가부좌를 틀었다.
다른 이들의 대전을 보는 것도 많은 깨달음을 주겠으나, 우선은 자신이 방금의 전투에서 얻은 수많은 감각을 지금 모두 갈무리 하고 싶었다.
6위계.
그 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비로소 유의미하게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뜬 순간.
[무림 세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특수 경험치 보유 조건이 해금되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Lv.58 → Lv.60]
[더 많은 승리를! 더 많은 명예를!]
시스템 알림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반길 만한 녀석이 튀어나왔다.
한유성은 다시 집중을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