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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내부는 외부의 초라한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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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기둥과 대리석 바닥은 고대 신전의 웅장함을 그대로 재현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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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는 우아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 신성한 기운이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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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스켈레톤 굴이었으면 달랐겠지만, 여기는 이중 던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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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좋다. 컨디션이 좋아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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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이 작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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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고, 얼굴에는 은은한 광채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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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은 윤기를 머금어, 마치 실처럼 찰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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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던전은, 아니 던전이라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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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설적인 무녀, 이아노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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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한 5년 전쯤, 일본이 발칵 뒤집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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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노가 생전 남겼던 유서가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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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에는 가짜를, 타국에 진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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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에 따르면, 그녀는 도굴을 우려해 가짜 무덤을 일본 본국에 남겼고, 진짜 무덤은 아무도 모르는 타국의 깊은 산속에 숨겼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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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일본에 있던 이아노의 가짜 무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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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유서로 인해 밝혀진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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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간 일본이 지켜온 무덤은 결국 가짜였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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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유서를 바탕으로 전 세계를 뒤져 그녀의 진짜 무덤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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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무덤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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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위계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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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에게 한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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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노는 자신의 무덤을 타국에 던전을 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단단히 숨겨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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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맞은 신성력이 아니면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고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기준이 최소한 3 위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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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까 천여울이 펼친 그 기운은 3 위계의 것이라 보기에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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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난 완전 3 위계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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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내 질문에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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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닌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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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리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역으로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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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던전 내부를 다시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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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이중 던전이다. 원래라면 복잡한 퍼즐과 난관이 이곳저곳을 가득 채우고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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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깨끗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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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석 바닥에는 먼지 한 점 없었고, 어지럽게 얽혀 있어야 할 길은 직선으로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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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서 치트를 사용해 7위계 이상의 사제를 동원했을 때나 발생하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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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사제의 3 위계로는 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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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럴 수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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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급 성수를 사용하긴 했다. 영감이 엄청나게 아끼던 거다, 굉장히 귀중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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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천여울은 평범한 사제가 아니다. 설령 같은 3위계여도 그녀의 신성력의 양과 질은 타 사제와 궤를 달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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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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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외워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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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모든 공략과 퍼즐을 외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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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못 쓰게 되니 속이 쓰린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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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네. 그 조그만 던전 뒤에 이런 게 있을 줄은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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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여유롭게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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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치 레드카펫이 깔린 듯 곧게 뻗은 길을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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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끝에는 거대한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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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가 상당했다, 원래 이 길은 수많은 함정과 퍼즐로 가득 차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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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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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었던 아까의 나를 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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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어떻게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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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며 천여울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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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도 준비해 오고,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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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이 나를 향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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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할 만도 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미리 준비해둔 대답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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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이아노의 무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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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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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의 눈이 살짝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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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노에 대해서는 그녀도 아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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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을 뒤지다가, 이아노가 과거 태백에 방문한 기록을 발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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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일본은 여기까지 와서 수색했었다. 결국 못 찾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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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은 산맥 덕분에 신성한 기운이 흐르는데, 언데드 던전이라니. 앞뒤가 안 맞잖아? 그래서 여기 있을 수도 있겠다 추측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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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경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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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90퍼센트는 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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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조용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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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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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끝날 즈음, 우리는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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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다시 한번 숨을 멎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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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함정을 돌파하면, 자동으로 이 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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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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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우리는 모든 함정을 돌파한 것으로 취급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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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문이 웅장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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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리자마자 내부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는 은은한 꽃향기가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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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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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에서 저절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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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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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동양적인 정취가 가득한 주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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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기와로 얹힌 지붕과 붉은 기둥들, 그리고 정갈하게 다듬어진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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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집 옆에 우뚝 선 벚나무는 하늘을 가릴 정도로 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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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날리는 벚꽃 잎들은 눈처럼 바닥에 내려앉아, 고요한 분위기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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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달라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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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도 놀란 듯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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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이아노의 생가를 본뜬 무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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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당 가운데에는 거대한 동상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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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을 입은 사무라이의 형상이었는데, 땅에 꽂힌 검과 옆에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이곳을 지키고 있는 수호자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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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시간을 초월한 공간에 들어온 듯, 모든 것이 완벽히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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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덤의 풍경을 구경하던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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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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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의 거대한 문이 부서질 듯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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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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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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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있던 거대한 동상이 마치 생명이라도 얻은 듯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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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사적으로 물러서며 거리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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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은 무겁게 땅을 울리며 꽂혀 있던 검을 뽑아 들더니, 우리를 향해 위협적으로 겨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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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은, 과거, 미래, 현재, 그 어떤 시간의 구분도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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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안광이 투구 사이에서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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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거대한 검은 천천히 방향을 틀어 천여울을 겨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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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은… 자격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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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검에서 나온 기운이 일렁이며 천여울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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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공기가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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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의 붉은 눈이 잠시 빛을 잃더니,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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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격이 인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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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눈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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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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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농담에도 동상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대신 검을 나에게로 겨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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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성녀 후보인 그녀가 인정받는 건 놀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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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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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은… 자격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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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이 이번엔 나를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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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허리춤에 찬 창을 강하게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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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싸워야 할 시간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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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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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내뱉은 말에 천여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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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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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눈을 감으며 깍지를 끼고 기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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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동상은 곧 저 큰 검을 그대로 내리꽂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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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이 터질 듯이 수축했다. 나는 언제든지 튀어 나갈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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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격이 인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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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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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내려놓은 동상이 다시 붉은 안광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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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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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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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를 거스르는 자여, 드디어 짐을 내려놓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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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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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전개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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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대판 싸우고 이긴 다음, 동상에게 인정받는다. 이게 정석적인 전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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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짐을 나누어 짊어진 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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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이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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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게를 느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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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가가가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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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은 말이 끝나자 거대한 검으로 자신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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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간 돌덩이처럼 천천히 무너지며 안쪽에서 반짝이는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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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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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이 조용히 되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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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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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표정에는 어딘가 결의가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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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 서 있던 초석 위에는 십자가와 투명한 병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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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천히 그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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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십자가와 투명한 병에 담긴 액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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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이아노의 십자가로, 상상 이상의 신성력이 스며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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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전설의 영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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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의 통로를 강제로 확장하고, 그 효율을 극한까지 상승시키는 전설 속에나 나오는 영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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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천여울의 몫으로 생각해뒀고, 후자는 성시우의 몫으로 계획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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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의 각각의 가치를 현금화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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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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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이 유물들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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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다, 이럴 거면 분배 요청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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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이 태연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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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십자가를 들고 잠시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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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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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십자가의 신성력을 받아들여도, 그녀가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흡수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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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곳에서 넘겨주는 것이 여러모로 간편했다. 밖으로 나가면 협회가 달려들어 시간이 지체될 게 뻔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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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한 나는 십자가를 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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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가져. 나도 이런 보상이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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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너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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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 말을 듣고 순간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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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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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좋은데, 내가 더 좋은 방법 하나 알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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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게 다가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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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우리 신전에 비싼 돈 받고 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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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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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교단에서는 무조건 나한테 줄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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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한 발짝 물러서며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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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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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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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못한 방법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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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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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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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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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십자가와 영약 모두를 가방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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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약은 어떻게 할 거야? 마실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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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쓸 곳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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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우 먹여야지. 그가 유일하게 타고난 마력 용적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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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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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함께 던전 입구를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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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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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내 팔을 잡으며 멈춰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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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위험할지도 모르잖아? 그 영약 나한테 줘봐. 내가 판단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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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제안은 합리적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에서 영약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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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은 열지 마, 효과가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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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만 열지 않으면 된다. 오랜 시간 응축된 그 기운은 뚜껑을 열자마자 섭취하지 않으면 전부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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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에게 신중히 영약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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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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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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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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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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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을 여는 듯한 소리에 놀란 나는 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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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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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내 입에 영약을 꽂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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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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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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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을 타고 뜨겁게 타오르는 액체가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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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 뒤에서 나를 꽉 붙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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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지… 옳지… 쭉 들이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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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거할 수 없는 기운이 몸속에서 폭발하듯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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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힘이 풀리며 다리의 힘이 빠져 나간다. 나는 그녀에게 기대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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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우리 해인이… 착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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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를 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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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한테 안겨서··· 푹 자고 일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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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용솟음치는 마력의 흐름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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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효가 몸에 돌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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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이게 얼마나 귀한건데. 또 누굴 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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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의식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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