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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나타날 아서의 후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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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에게 선별 될 영웅의 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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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존재와의 만남을 멀린은 지난 수백 년간 몇번이고 머릿속으로 그려봤었다. 물론, 그 누구도 아서보다 위대해질 수는 없을 테지만··· 적어도 엑스칼리버에게 선택받았단 것은 자질은 갖추고 있단 의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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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만큼은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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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영웅으로서의 격을 갖춘 인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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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얼마 전 검이 뽑혔을 때, 멀린이 머릿속으로 떠올려 봤던 후보군 역시 이 시대의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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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라 불리는 소드마스터? 아니면 검의 교단을 이끄는 검성? 그도 아니라면 오래된 기사의 계율을 지키는 긍지 높은 기사단의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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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후보군이 썩 눈에 차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을 줄 만했다. 엑스칼리버를 쥘 명성과 실력, 그리고 인성을 두루 갖춘 이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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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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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눈앞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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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빛나는 검을 쥔 채 몹시나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년이 하나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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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것도 아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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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대단한 인격자인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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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으로서 완성된 격을 지니지도 않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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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과 업적 또한 전무한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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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울 점이라 해봐야 아서를 모욕한 전적이 있다는 점뿐인데, 이건 감점이면 감점이지 점수를 줄만한 부분은 아니었다. 멀린은 머릿속으로 눈앞의 소년에게 점수를 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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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점은커녕 낙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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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을 보라고 면접장에 데려다 놨더니, 면접관에게 도발과 함께 중지를 날린 격의 후보자. 멀린은 이마가 지끈해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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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딴 게······ 후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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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딴 건 아서의 후계자가 아니야, 하고 외치며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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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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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나진의 손에 들린 검을 흘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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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별의 검, 엑스칼리버. 아서왕의 죽음 이후 아서의 의지를 대변하게 된 한 자루의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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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저런 애송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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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죽고 사라진 자신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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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아서를 떠올린 멀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별의 검은 영웅의 재목을 선택한다. 하지만 영웅이 걸어갈 길을 선별하는 것은 선별의 지팡이인 멀린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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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눈앞의 소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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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꼬움을 지울 수는 없지만, 소년이 아서를 모욕했단 사실과 사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멀린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찌 됐든 눈앞의 빌어먹을 애송이는 검을 뽑았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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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의 정적을 깨고 검을 뽑은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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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가 소년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 도대체 무슨 가능성을 보았기에 소년을 선별(選別)했는지. 그걸 자신도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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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가다듬은 멀린이 눈을 감았다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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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호수와도 같은 눈동자. 그 눈동자 위로 별이 떠올랐다. 마치 호수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별자리가 수면 위로 부상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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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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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나진을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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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거 감당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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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이자 조언이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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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멀린이 던지는 하나의 시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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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인간이 가질 검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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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감당할 수 없는 검이란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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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분명 무너질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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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전의 아서 역시 경험한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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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영웅이라 불리기 이전의,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이전의 아서에게 던졌던 질문을 멀린은 눈앞의 소년에게 똑같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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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분명 무너질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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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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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선별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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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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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자질과 가능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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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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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분명 무너질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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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의 말에 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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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뜻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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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쥐고 있는 그 검. 엑스칼리버를 뽑았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너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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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손가락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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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쥔 검을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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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를 뽑았다는 건, 단순히 네가 아서의 후계자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야. 검을 손에 쥐고 있는 이상 너는 ‘반드시’ 영웅의 길을 걸어야 해. 엑스칼리버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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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별의 검, 엑스칼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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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재목을 선택함과 동시에 검을 쥔 자가 영웅이 될 것을 강요하는 검. 동화 속에서는 이를 무척이나 숭고하고 아름답게 묘사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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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검을 쥐고 걷는 길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존재하지. 수많고 수많은 시련이 존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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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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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시련이 영웅을 만든다. 가시밭길을 걸으며 언제나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줄타기하는 이들. 그것이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의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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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란의 저주받은 것들, 반역의 기사와 그 추종자들, 세상 끝의 용과 버려진 것들의 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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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가 걸음을 내디디는 곳마다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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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영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들의 영과 육을 능욕한 더러운 존재들. 그들이 모두 너를 주목하겠지. 어디 그뿐이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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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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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하늘 위의 수많은 별자리 중, 널 탐탁지 않아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겠어. 또 저 땅 아래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이들 중 너를 없애버리고 싶어 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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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고 수많은 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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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견딜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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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길에 반드시 동반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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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느 정도 완성됐다면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아. 소드마스터든, 영웅이든, 어느 집단의 수장이든, 혹은 아주 고귀한 출신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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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의 길에 오른 소드마스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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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위업과 명성을 쌓은 영웅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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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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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흔들리지 않을 단단한 기반이라도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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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런 것들 중 하나라도 가진 채 검을 뽑았다면, 내가 말했던 것들은 단순한 조언에 불과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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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 중 하나라도 가지고 있다면 몰아치는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으리라. 설령 흔들리더라도 금세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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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넌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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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나진을 똑바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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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 불어오는 바람에 쉽게 흔들릴 거고, 어쩌면 길을 잃을지도 모르며, 강자들의 노리개가, 가지고 놀기 좋은 먹잇감이, 부리기 좋은 인형이 되기 십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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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에게 예견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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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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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게 말이 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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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멀린의 말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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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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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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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게 말이 기냐고요. 요점만 말하면 단순하잖아요. 주제도 모르고 검 뽑았는데, 그거 감당할 수 있겠냐고. 그거 말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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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투가 싸가지 없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멀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진은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멀린을 마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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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님 말씀대로 전 가진 거 없어요. 별 볼 거 없는 거 사실이고, 담그려 한다면 담가지겠죠. 그걸 누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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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말해주지 않더라도, 나진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당장 지상으로 올라오기 위해서 얼마나 개고생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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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이고 죽을 뻔했고, 실제로도 이반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이미 시체가 돼서 지하도시의 어딘가를 굴러다니고 있을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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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들이 날 노릴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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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것들이 날 묻으려 들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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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의 경고에 나진은 코웃음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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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것도 모르겠는가. 검을 향해 손을 뻗을 때 이미 목숨을 걸 각오는 다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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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각오도 안 한 채 검을 뽑은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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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어선 순간부터 나진은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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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게 없는 자신이 유일하게 가질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별을 향한 동경뿐이다. 벌써부터 지레 겁먹고 포기할 바에는 차라리 짓눌려 죽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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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멀린을 흘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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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성좌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 얼추 감이 잡혔다. 물러서고 겁먹어봐야 이도저도 안 된다. 나진은 오히려 당당해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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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왕도 처음부터 대단했던 건 아니잖아요? 아무런 기반 없이 밑바닥부터 올라왔으니 대영웅이라 불렸던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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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고 동화책을 읽었던 나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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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와 멀린의 만남을, 멀린이 아서를 인도해 주는 장면을 몇번이고 다시 읽었던 나진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지금 나진이 내뱉는 말에는 약간의 실망이 섞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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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읽은 동화 속의 멀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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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저런 말을 하지 않는 존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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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이 없는 자에게서 가능성을 보고, 아무것도 아닌 이를 위대한 왕으로 만든 이가 바로 멀린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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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아서왕을 인도한 당신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좀 치사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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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도발하는 거니,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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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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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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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란 걸 눈치챘나?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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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누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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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쁘진 않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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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먹기는커녕, 당당하게 받아치는 기개가 나쁘진 않았다. 멀린은 눈앞의 소년에게 약간의 흥미를 느낀 채 손가락을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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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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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걸음걸이를 따라 일렁이던 아지랑이가 한순간에 나진의 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말로는 뭐든지 쉽다. 하지만 언제나 자격을 증명하는 것은 말이 아닌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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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보고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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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의 걸음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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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인정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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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눈동자에 낀 아지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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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진에게 보여주는 것은, 나진이 앞으로 걸어야 할 길과 도달해야 할 전장들이다. 엑스칼리버를 뽑은 이상 ‘반드시’ 겪게 될 시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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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 전 아서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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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보고도 같은 말을 내뱉을 수 있다면, 그때는 저 소년을 다시 평가하게 되리라. 그리 생각하며 멀린은 딱딱하게 굳은 나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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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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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의 시야에 수많은 풍경이 지나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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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보고 있는 것이지만, 나진은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몸이 떨렸다. 진동하는 악취에 콧잔등이 시큰거렸고, 뜨거운 열기에 살갗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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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하고, 사악한 것들의 전장. 숱한 악마들과 그들의 계약자가 활개 치는 어두운 영지. 그곳에서 악마들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는 숱한 강자들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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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들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진은 그들에게 제 살을 내주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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뜯어먹히고, 망가지고, 죽어서도 안식을 얻지 못한 채 그들의 사역마가 되고 만다. 끔찍한 최후에 몸서리 칠 시간도 없이 시야가 뒤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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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이 탄생하고, 별들이 지는 전장. 본격적으로 별들이 개입할 수 있는 무대. 그곳에서 이미 하늘에 자리 잡은 별들이 부리는 텃세를 보았다. 그들에게 농락당해 여정을 마무리 짓고 마는 숱한 영웅들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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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되려는 이들을 짓밟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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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꿈꾸는 이들을 망가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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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가진 별을 빼앗는 타락한 성좌들을 나진은 보았다. 그들은 탐욕스레 제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그들이 나진을 시야에 담은 순간, 나진은 거대한 무언가에 짓눌려 바스러졌다. 존재의 근간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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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숱한 풍경들을 넘어선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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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은 마지막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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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의 저 너머에 자리 잡은 죽음의 땅을. 앞선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들이 자리 잡은 곳을. 이번에 나진은 그곳에 서 있지는 않았다. 단지 아주 멀리서 그곳을 지켜보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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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의 너머에서 무언가 파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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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산맥이 파도를 치는듯한 모습이었으나, 이내 나진은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용이었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용. 그 용과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았지만 그 존재를 인식한 순간 나진의 영혼은 잘게 바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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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의 땅, 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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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의 편린을 마주한 순간 나진의 영혼은 무너졌다. 그 과정이 몇차례고 반복되자, 아지랑이가 꼈음에도 여전히 빛나고 있던 나진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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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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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지켜보던 멀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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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렸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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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지고 말았다. 하기야, 저런 애송이의 정신으로 저런 풍경들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기고 나는 강자들조차 저 풍경을 바라본 순간 몇달은 앓아누울 테니까. 그들 중 몇은 아예 꺾여버릴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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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는 이 풍경을 보고도 곧장 일어서선 각오한 바라며, 멀린에게 쏘아붙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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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서라서 가능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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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그 누가 아서처럼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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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말을 내뱉는 소년의 모습에 조금은 기대했지만, 역시 말뿐이었던 걸까. 멀린은 실망감과 함께 소년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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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랑이를 거두고, 기억을 지운 뒤 성검을 회수할 생각이었다. 고작 여기서 무너진다면 소년에겐 가능성이 없을 테니까. 타락한 것들의 노리개가 되게 내버려 두느니 여기서 끝 마치는게 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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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멀린의 손가락이 나진의 이마에게 닿으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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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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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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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뻗어 나온 손이 콱, 하고 멀린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멀린은 눈을 크게 뜬 채 제 손목을 붙잡은 나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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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했던 눈동자에 초점이 잡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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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에서 아지랑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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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보여준 환상을 나진은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왔다. 아지랑이가 사라지고 드러난 나진의 눈동자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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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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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놀라움을 느낄 틈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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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입을 열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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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습니다. 제가 별 볼 일 없다는 거. 아서왕처럼 고결하지도, 숭고하지도 않다는 거 알아요. 눈에 안 차는 게 당연하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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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몰아쉬며 나진이 말했다. 호흡은 가빴고 부릅뜬 눈동자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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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가 시대를 타고났을 풍운아라는 거,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어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아서왕은 그 누구보다도 위대했고··· 저 밤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별을 건 가장 빛나는 존재라는 걸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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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암흑기를 걷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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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악마들을 쓸어 넘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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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성좌들을 모조리 떨어트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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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는 캄란의 시간을 멈춰버린 위대한 대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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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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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빛나는 존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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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서왕처럼, 아니 아서왕보다 더 높은 곳에 가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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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로 삼을 의미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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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타고난 풍운아가 아닌, 시대를 이끌었던 대영웅이기에 도전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진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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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가로막든 간에 갈 겁니다. 가장 높은 곳에 저만의 별을 걸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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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지를 잃지 않은 기사에게 약속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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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보이지 않는 땅에서 맹세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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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이건 돌려드리지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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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엑스칼리버를 콱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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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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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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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진을 멀린은 말없이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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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동자가 바라보는 것은 나진이었으며, 또한 나진이 아니기도 했다. 멀린은 나진에게서 아주 오래전의 과거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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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가로막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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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시대를 이끄는 영웅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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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곳에 내 별을 걸어, 나를 뒤따라오는 이들에게 이정표가 될 생각이다. 그렇기 위해선 상징이 필요하지. 바로 이 검과 같은 상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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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와의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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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보여준 미래에도 굴하지 않았던 아서의 모습을 멀린은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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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건 반납하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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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이 검은 나와 함께 상징이 되어야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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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와, 영광, 그리고 희망의 상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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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외치던 아서의 모습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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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은 길게, 아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숙여 흘러내린 머리칼 탓에 나진은 멀린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멀린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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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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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지운 멀린이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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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처음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더는 소년을 압박하지 않은 채 멀린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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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가 시대의 풍운아라는 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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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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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해야 할 거야. 건방진 꼬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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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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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과 멀린의 태도가 달라져 있었으니까. 멀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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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정신력하고 기개만큼은 인정해 줄 만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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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점을 주기에는 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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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가능성은 보았다. 가능성을 보았기에 멀린은 고민했다. 지금부터 그녀가 선택해야 할 것은, 어쩌면 그녀 자신이 가진 별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중대한 결정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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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은 길었고 또한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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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에 결정의 순간 떠올리게 되는 건, 그녀가 모셨던 왕인 아서가 남긴 유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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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 검의 새로운 주인이 나타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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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를 인도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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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지가 남길 선택 같은 건 믿지 마라. 네 마음대로 해. 네 두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해. 네가 내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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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고 그때의 아서는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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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빛이 보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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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약한 가능성이라도 보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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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개화시키는 게 네 몫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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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선별(選別)의 지팡이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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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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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또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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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떠올리며 멀린은 현재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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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안 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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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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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빛나고 있는 소년의 눈동자를 바라본 멀린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흥미, 혹은 기대감이 서린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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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어 꼬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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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나진에게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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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네가 내뱉은 말에 책임져야 할 것이고, 증명해야 할 거야. 아서가 시대의 풍운아인지 아닌지 네 삶으로서 증명해야만 한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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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이 히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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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 못 하면 넌 내 손에 죽어. 네게 내릴 천벌은 그때까지 미뤄두겠어. 중간에 포기하거나 도망치면 그때 바로 네 머리에 벼락을 꽂아버릴 테니, 뒤로 뺄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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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뻗은 손은 나진의 앞에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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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나, 멱살이 아닌 손과 손을 맞잡기에 적당한 위치. 제 앞에 놓인 손을 바라보며 나진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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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쩌란 거지. 그렇게 쳐다보는 나진의 모습에 멀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으르렁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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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잡아? 죽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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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이 마지못해 멀린의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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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맞잡은 순간 나진의 시야가 뒤흔들렸다. 이곳에 끌려올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감각. 하지만, 그때와는 조금은 다른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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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나진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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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린과 맞잡은 손의 손등에 별자리가 새겨지는 모습을. 그것은 열한 개의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 선별의 지팡이가 지닌 별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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