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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한국대학교 역도부에 입부하는 철학과 신입생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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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운동을 처음 해보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경력이 몇 년 되어 보이는 듯한 고인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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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현상을 기술하는 원인이야 많았겠지만 가장 핵심이 되는 사건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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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41 정시생 한국대 철학과 스나 성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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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 50%에 실기면접 50%로 뽑는 정시전형에서 평균 2.6등급대가 덜컥 붙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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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한 커뮤니티에 돌풍을 일으킨 게시글은 급기야 공중파 뉴스에까지 소개됐고, 많은 학부모들과 사교육 관계자들에게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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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도 아닌 한 일반고에 재학 중인 김모군의 풍채는 기겁할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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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1미터 96. 몸무게 115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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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가 아니라 체교과에 입학해야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근육이 울긋불긋한 거구의 사나이는 사람들의 뇌리에 똑똑히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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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면접의 기조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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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철학 트렌드를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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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서양에서는 육체를 강조하는 니체의 이론이 재조명되며 학계의 주류로 부상하였다. 몸을 단련하는 오러학자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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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당사자는 뒤늦게 해명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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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방화대교 폭파사건 때 인명구조에 힘썼던 사실을 입학사정관들이 높이 평가해 뽑아준 것 같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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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도 뉴스에 두세차례 소개된 김모군은 오러를 다루는 이들이 비실비실할 것이라는 편견을 정통으로 깨부순 유명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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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로부터 호감도 살 겸, 실천으로서의 학문을 강조할 겸, 김모군의 입학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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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커뮤니티 글을 그런 식으로 작성한 건 그저 관심을 받고 싶을 뿐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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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해명은 널리 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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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한국대 철학과 교수들조차 이렇게 형성된 기조를 굳이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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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4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졸업시험을 위해 몸을 제대로 만들어야만 하는데, 그 전부터 완성된 아이들이 입학하면 금상첨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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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전문가들의 추측은 결국 현실이 되었고, 이는 현재의 야생적인 철학과가 만들어지는 데 크게 일조한 사건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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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남자들이 많다 했더니,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역도부 사람이었던 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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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는 아니고 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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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논리학 수업이 끝난 지금, 나는 줄줄이 따라오는 남성들을 곁눈질하며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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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논리학 과목은 2학기 때만 열리는 전공과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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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월이 이를 여름계절학기에 미리 당겨서 수강하고 싶다는 말에, 철학과 출신 역도부 남학생들은 다같이 강의개설신청서를 제출하여 그녀를 도와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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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의 여신, 역도부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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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으로부터 거한 러브콜을 받고 있는 반소월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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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메야 이 언니 진짜 강하다? 나메는 혹시 3대 운동이라고 들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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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트 트레이닝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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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맞아! 스쿼트, 벤치프레스, 데드리프트 이 세 개를 합쳐서 3대 운동이라고 부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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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 역도부는 명칭과는 달리 역도를 하는 동아리가 아닌 보디빌딩·피트니스 동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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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번호따기 미션을 완수하지 못한 나는 그들과 함께 역도부 전용 헬스장으로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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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소월이가 오러 없이도 3대 360을 치걸랑.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 본인 몸무게에서는 거의 견줄 사람이 없는 수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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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학생이 반소월의 업적을 자신의 일인 것마냥 들떠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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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메는 아직 어려서 그런 거에 관심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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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교육은 중요한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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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메야 저 오빠 말 무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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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를 오르는 가파른 계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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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나 앞이 안 보이는 반소월이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손을 꽉 잡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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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걱정은 과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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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스스로 오러 영역을 전개해 발밑을 제대로 살펴보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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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를 다루는 게 꽤 자연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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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아 살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익혔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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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감이 장난이 아닐 텐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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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만 잘 다룰 수 있으면 맹인들도 앞을 볼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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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오해인 게 오러를 전개하는 동안에는 크나큰 페널티가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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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머릿속으로는 파이의 소수점 자리를 외우면서, 동시에 물 속에서 숨을 참는 느낌이라고 보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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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감각기관에 오러를 할당하는 만큼 사고에 제한이 생기고, 오래 사용하면 오러하트에도 큰 부담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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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까 팔씨름을 하자고 한 얘기는 뭐였는지 물어봐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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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장 입구에 들어서는 바로 앞에서 그녀가 발을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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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월의 고개가 내쪽으로 딱딱하게 돌아갔다. 그녀의 온화한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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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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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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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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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진심으로 인간이 산을 들어올릴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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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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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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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kg 데드리프트 바벨이 바닥과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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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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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오늘은 잘 안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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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하면 다칠 수 있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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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이 안 그래도 유명한데 여기서 더 유명해지면 어떡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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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메가 촬영하는 한국대학교 홍보영상에 반소월의 모습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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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원들이 원판을 정리하는 동안 그녀는 나메 옆에 털썩 주저앉아 땀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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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수고하셨어요. 여기 수건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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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흥. 고마워 잘 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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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메는 작은 손으로 카메라 버튼을 꾹꾹 누르며 영상이 제대로 촬영되었는지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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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메는 여기 있는 운동기구 써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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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0킬로짜리 빈봉도 못 들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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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헿 당연한 거야. 네 나이 때는 오히려 무리한 근육 운동은 삼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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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 언니, 혹시 신연호씨라고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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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호...? 그게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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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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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메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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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서로 일면식은 있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반소월쪽에서는 기억조차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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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체술대회 8강에서 상대로 만나셨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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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8강... 아! 기억날 것도 같은데. 나메야 혹시 브이튜브에 영상 좀 틀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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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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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월은 중증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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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이 거의 보이지도 않는데 브이튜브를 틀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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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만 들어도 장면이 다 기억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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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네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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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편견에 사로잡힐 뻔한 나메는 재빨리 2049년 전국체술대회 8강전 4번째 경기를 시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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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예상이라도 했을까요! 고등부 2학년의 다크호스 두 사람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났습니다! 서울 알테어 아카데미의 신연호! 그리고 부산 아스펜 아카데미의 반소월! 어느쪽이 승리하든 간에, 이 경기는 전설로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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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아저씨는 이때도 정말 텐션이 높으셨네. 우리가 마지막 경기라서 힘드셨을 텐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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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한 열일곱 살의 두 남녀는 환한 달빛이 내리는 대련장에 마주보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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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경기가 많이 지체돼서 인사할 시간도 없었거든. 아마 바로 시작했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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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테어 아카데미에서도 최고의 천재라 칭송받는 신연호를 단번에 좌절시킨 인물이 반소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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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시각장애라는 가장 큰 페널티를 안고 시작했음에도, 그녀는 8강, 4강을 재패하여 8년만에 고등부 2학년 출신으로 결승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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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지만 시각 장애인 중에서는 건국 이래 최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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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그녀의 모든 업적에는 언제나 ‘최초’가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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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4강보다 상대하기 버거웠던 것 같기도 해. 이분이 체력이 좋으셔서 장기전으로 가도 안 밀렸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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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월은 ‘중(重)’의 묘리가 담긴 오러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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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그녀가 후천적 시각장애인이라는 점에 기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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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부 시절, 어느 날 세수를 하고 보니 갑자기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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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누가 수돗물에 독약이라도 탄 줄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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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병원에서는 돌연변이에 의한 희귀한 유전질환이라며, 나머지 한쪽 눈에 대해서도 시한부 선고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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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소녀가 받아들이기에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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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과학의 도움을 받아 집 안에서는 잘 생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밖에서는 사람들과 어깨끼리 부딪혀 넘어지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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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파 없는 잔잔한 인생에 폭풍우가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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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기만 해서는 변하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반소월은 달라지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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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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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바위는 수천 년 동안 제자리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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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터 굳건히 바로 세우면 세상이 알아서 비켜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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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월은 중학생으로서는 스스로 생각하기 어려운 고찰들을 끝없이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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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바라는 대로 일어나기를 요구하지 말고, 오히려 일어나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기를 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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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심(不動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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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와 제논의 사상은 반소월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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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는 세 살배기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끝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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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거운 바위는 영원할 거라고 생각해? 만약 비나 눈이라도 내려서 풍화작용이 일어나면 어쩔 건데? 그래도 무거운 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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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가 없는 것들끼리의 비교는 어떻게 해야 돼? 사랑이 무거워 증오가 무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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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질문에 대해서 확실하게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오러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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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월이! 반소월이! 난투극 끝에 신연호를 밀어냈습니다! 2서클의 자기 부상 마법으로 보이는데요! 지금 첫 마법 사용인가요? 말씀드리는 순간 화면에서 사라졌습니다! 신연호 위! 바로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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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것은 단순히 느리고 둔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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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지구도 상상도 못할 만큼의 빠른 속도로 공전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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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은 곧 ‘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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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理)’와 ‘의(義)’로 제대로 향하고만 있다면 ‘중(重)’의 묘리는 극대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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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땅을 밟고 있지 않으면 기감을 펼치지 못할 것이라는 참가자들의 생각을 반소월은 정면으로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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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월은 몸이 붕 뜬 신연호보다 훨씬 높이 뛰어올라 몸을 반바퀴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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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오러가 전개된 환경임에도 그녀는 누구보다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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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발뒤꿈치 한 점으로 모여든 오러는 신연호의 등을 제대로 가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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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사이에 대련장 바닥에서 커다란 홈이 파여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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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벽이 1% 미만 대까지 떨어지며 충격을 미처 다 흡수하지 못한 상태로 신연호는 기절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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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월! 반소월! 반소워어어어얼! 반소월이 이걸 해냈어요! 반소월이 해냈다고요! 아스펜 아카데미의 마지막 불씨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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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반소월에게 편파적인 해설이 들어갔지만 나메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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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만 해도 관중들은 그녀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다들 한마음으로 응원했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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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까지 갔는데 져서 아쉽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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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괜찮아. 사실 예선 때부터 언제 떨어져도 안 이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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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의 판단으로 승부가 뒤엎어지는 게 대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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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월은 경기 내내 자신만의 철학으로 최고의 승부를 펼쳐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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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에서 졌음에도 무거움의 철학은 온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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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자신이 모든 방면에서 부족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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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메가 교실에 들어섰을 때, 그리고 우연히 반소월이 펼친 기감이 그녀와 맞닿았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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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자신의 철학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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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가벼운데, 또 한없이 무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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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념은 공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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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은 있을 지언정 혼용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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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었지만, 언어로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풀어낸 게 겨우 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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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말한 팔씨름 해볼까요? 오러도 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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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나메쪽에서 먼저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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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월의 얼굴에서 화색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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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가까이서 확인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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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오러의 정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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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기면 번호 알려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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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번호는 지금도 알려줄 수 있는데? 그걸로 괜찮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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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쓸 게 아니라, 신연호씨한테 줄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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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한테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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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메는 대답을 생략하고 바닥에 엎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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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서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전력을 다할 생각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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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월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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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도 긴 머리를 머리끝으로 휘감아 포니테일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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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디 한번 나메의 실력도 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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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월의 기다란 팔에는 아까 막 3대 운동으로 펌핑된 근육들이 튀어나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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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실력만 가늠해보다가 적당히 져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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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라운 작은 손과 굳은살 박힌 거친 손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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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까지 사용하면 팔씨름만으로는 역도부 부장에게도 승리를 따낸 반소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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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방향적인 힘을 발휘할 때 그녀의 오러는 가장 높은 효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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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칙칙한 회색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 틈새 사이로 나메의 황금빛 오러가 반짝반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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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오러를 벌써 이렇게까지 다룰 줄 아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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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순 천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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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하다 못해 따뜻함마저 느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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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월은 빛 잃은 회색 눈동자가 훤히 드러날만큼 놀란 감정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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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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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녀의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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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의지의 오러끼리 만나 생기는 충격파에 머리카락이 조금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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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메의 예상보다 훨씬 강한 힘에 반소월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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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힘은 단순히 재주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야... 설마 벌써부터 세계관을 구축해나가는 단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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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 감응력이 뛰어난 아이는 정신연령도 높다는 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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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도 한두살이어야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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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간힘을 다해 팔을 넘기려는 나메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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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존재가 실제로 눈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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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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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월의 손등이 결국 바닥에 먼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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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져버렸네...! 진짜 대단하다 너 어떻게 이런 오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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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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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마구 칭찬해주려고 할 찰나에 나메가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반소월의 말을 대차게 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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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줬잖아...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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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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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이번엔 왼손으로 해요. 절대 봐주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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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 너의 의견을 수용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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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욕이 넘치는 아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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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메가 이긴 결과에도 승복하지 않는 게 기특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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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우우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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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 오러가 승천하는 용처럼 빙그르르 맴돌더니 반소월의 왼팔 전체를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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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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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숙련되지 않은 인간이라면 오러로 만든 장벽을 뚫어낼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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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월이 전력으로 상대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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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러면 손도 못 잡아보고, 팔씨름은 진행하지도 못 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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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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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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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살결이 다시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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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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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와 동일한 크기, 동일한 느낌, 범아귀부터 느껴진 감각이 손바닥 전체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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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주면 큰일날 거예요 언니. 이번엔 다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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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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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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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나메의 오러는 황금빛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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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는 느끼는 것만으로도 색깔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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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반소월이 느끼는 바로는 현재 나메의 오러는 피를 머금은 듯한 검붉은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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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지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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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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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가 서로를 밀쳐내려는 척력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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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억지로 유지하니 손 주위에서 작은 스파크들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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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초. 3초 뒤에 시작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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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소월은 속으로 셋을 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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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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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메와 맞잡은 손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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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났을 때 어렴풋이 느낀 그 무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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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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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오히려 반소월의 손이 밀려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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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형상을 하던 반소월의 오러에 대항하여 나메의 오러가 형체를 잡아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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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붉은 강기 표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입이 돋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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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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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롭게 변한 오러의 모양은 아마도 입 안의 이빨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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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측한 이빨들이 딱딱 부딪히며 회색 용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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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을 유지하려고 반소월이 계속 오러를 주입해보아도 빨아들이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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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갑자기 뜬금없게도 반소월은 배고프다는 감정이 물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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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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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와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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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뿌연 증기가 안개처럼 뿜어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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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태산 같은 힘이 그녀의 팔을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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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항하는 반소월의 손목에 힘줄이 선명하게 돋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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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팔씨름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콘크리트 벽을 밀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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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한계까지 부풀어오른 자신의 근육을 따라서, 기감을 세밀하게 펼쳐 나메의 얼굴을 자세하게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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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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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욕: 에리시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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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그곳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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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웃지 않았던 소녀가 황홀감에 젖은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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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가에는 투명한 침을 뚝뚝 흘린 채 사랑스럽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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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러다 먹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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