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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로 기네스북에 오른 새만금 방조제를 따라 전북 군산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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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참으로 요상하게도 생긴 건물 앞에 차를 댔다. 생김새가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호 뱃머리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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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교수가 새만금 개발청에 잠시 다녀오는 동안, 나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차 안에서 갯벌과 바닷물을 경계짓는 수평선을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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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전 친환경 농지조성 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현대에 들어서 1차 산업의 중요성이 떨어짐에 따라 난항을 겪은 새만금 간척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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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간척된 땅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나 했더니 우연찮게도 마전(mana field)이 발견되면서 정말 소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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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전이라는 말보다는 마류(mana stream)라는 말이 더 적절하겠지만 이미 고착화된 단어니까 어쩔 수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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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는 석유와 달리 정지해있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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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가 빼곡하게 차 있는 전생에서의 세계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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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지구의 태평양을 관통하는 거대한 마나 원줄기(trunk)가 있었고, 그로부터 뻗어있는 원가지(scaffold), 그리고 덧원가지(secondary scaffold branch)에서만 마력발전소를 증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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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용어까지는 아니지만 편의상 1차 가지, 2차 가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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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의 모세혈관처럼 뻗어있는 가지에서는 못 쓸 정도로 마압이 매우 낮았는데, 이는 우리가 발전소와 통신하는 ‘저장’ 과정 없이는 마법 사용이 어려운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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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도로 바로 가는 배는 없고, 비안도까지 가서 그쪽 주민들에게 개인적으로 부탁을 하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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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교수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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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만나고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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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기 개발청장이 내 아는 사람이라서, 뱃길이 있나 물어보고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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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할 정도로 인맥이 넓은 천교수는 싸구려 믹스커피를 홀짝이며 항구로 다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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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한 향... 맛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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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어어? 우리도 뭐 어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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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리! 도! 두리도까지 이 분들 데려가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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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두리도? 거기는 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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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미안해요 우리 할압씨가 워낙 귀가 어두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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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이렇게 도움을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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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안도에서 김 양식장을 운영하시는 노부부에게 도움을 청해 다시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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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짭조름한 냄새와 조각배 엔진의 기름냄새가 마구 뒤섞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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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워낙 화창해서인지 항구와 갯벌이 그리 멀어지지도 않은 것 같은데 건너편의 항구가 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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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두리도에도 사람이 살았었나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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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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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에도 사람이 살았었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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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바람을 뚫을만큼 소리를 크게 질러보지만 여전히 귀가 잘 안 들리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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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사냐고? 아무도 안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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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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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봉곤 할배 다시 왔나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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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수확없이 다시 갑판 위로 올라가 천교수 옆에 서서 난간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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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손가락으로 방금 떠나온 육지 한군데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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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가 군산 마력발전소란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1차가지 위에 지어진 곳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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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시추 장비밖에 지어지지 않은 휑한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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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중앙저장국이라든지, 기지국이라든지 세울 건물들이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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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우리나라는 운이 지지리도 없네요. 바로 옆 나라 일본만 해도 스캐폴드만 5군데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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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도 안 나, 광물 자원도 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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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 흔하다는 마전도 2차 가지밖에 발견이 안 돼서 군산 발전소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울며 겨자먹기로 울산, 강릉 이런 곳에 지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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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북한산에도 하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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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군산 마력발전소가 완공되면 한국도 마나세가 줄어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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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그건 잘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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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얘네들이 가격을 내릴 리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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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올린 가격은 절대 내리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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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누군가의 성과급으로 들어가 지갑을 두둑이 만들 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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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교수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 사이 눈 깜짝할 사이에 두리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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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사람의 흔적은 남아있었지만 비안도와는 다른 불길한 고요함 때문에 정말 무인도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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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배가 하나 더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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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말이다. 사람이 확실히 살긴 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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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전상망에는 확실히 무인도로 지정된 섬인데도 사람의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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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우리가 찾아야 할 사람은 최소한 3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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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아린, 같이 입양된 여섯 살 터울의 오빠 백민우, 그리고 아린이가 언급한 ‘무서운 할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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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렇게 버리고 가도 될랑가 모르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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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괜찮습니다.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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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아무튼 이상한 사람들이여. 왜 굳이 이런 험한 곳까지 와서 무인도를 찾는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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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시렁대면서도 해줄 건 다 해주는 할아버지의 도움 덕택에 하루만에 섬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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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배가 떠난 경로 상에 생긴 하얀 거품들이 저녁 노을을 받으면서 반짝반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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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떨어지기 전에 빨리 찾아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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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일단 길 따라서 쭉 가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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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언뜻 보기에도 꽤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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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도 한국대학교의 절반 크기였으니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면 섬을 다 돌고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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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선착장에서부터 쭉 이어진 길가를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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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만한 오르막길은 어느 순간 뚝 끊겼는데, 그 뒤로부터는 계속 풀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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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히 자란 잡초를 유심히 살펴보니 군데군데 꺾인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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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밟고 지나간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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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아주 최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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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려 천교수에게 눈짓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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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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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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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로 하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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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도둑이 된 심정으로 성큼성큼 다리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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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신푹신한 땅이 푹푹 꺼지는 게 자칫 넘어질까봐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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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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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니? 조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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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발에 걸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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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씨가 되었는지 단단한 줄기 같은 거에 걸려서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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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교수의 부축에 다시 일어서서 줄기 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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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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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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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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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수박이 열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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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실제로 재배하는 건 처음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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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보는 과일이라 반가운 마음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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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서는 이런 과일이 없어가지고 수박화채가 그리웠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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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쪼그려 앉아서 수박을 통통 두드려보기도 하고, 이리저리 굴려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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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마음에 다른 수박들도 찾아보려고 풀밭을 뒤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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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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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수박인줄 알았던 그림자는 불행하게도 먹을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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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이 아닌 사람의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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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소년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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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몰골을 한 그들은, 피칠갑된 입을 쫘악 벌려 별안간 나를 향해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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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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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에에에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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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깜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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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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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놀랐다고 소리를 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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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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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기는 이쪽이 더 놀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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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사실이지만 괴물이나 흡혈귀 따위가 아니라 멀쩡한 인간이었고, 입가에 묻은 빨간 것도 피가 아니라 수박 과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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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의 칼로리는 혈액의 3분의 1밖에 안 되지만... 어쨌거나 아린은 수박을 허겁지겁 파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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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할아부지인줄 알고 음냐냠... 히끅... 민우 오빠 봐봐 내 말 맞지? 거짓말 아니라고, 나메가 진짜 올 거라고 했잖앙... 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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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든지 먹든지 말하든지 하나만 해. 체하겠다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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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수박을 시식 중인 백아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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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교수에게 부탁해서 수박 하나를 먹기 좋게 잘라 쫄쫄 굶은 남매들에게 한조각씩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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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같이 많았지만 일단 배를 채우는 게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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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많이 길렀네. 한번도 안 잘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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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린이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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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옆에서 조용히 수박조각을 입에 욱여넣는 백민우도 머리가 어깨에 닿을 정도로 꽤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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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빼빼 말랐어? 계속 못 먹고 산 거야? 언제부터 이 섬에 있던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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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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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 하고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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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가 수박 검은씨를 와그작 깨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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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만 바라보는 공허한 눈빛에는 알 수 없는 짐작하기조차 힘든 여러 감정들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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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먹은 수박 껍질을 멀리 던지며 신경질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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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그냥 안 한다고 했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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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빠가 그런 소리를 해! 나보고 포기하지 말라고 한 건 오빠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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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당연히 포기하면 안 되지! 우리가 지금까지 뭘 위해서 이 생고생을 해왔는데! 아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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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찌푸린 민우가 자신의 종아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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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연히 보이는 빨간 실선들, 가운데에는 시퍼런 멍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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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아린아 너도 다리 좀 보여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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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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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했는데 그녀에게도 똑같은 회초리 자국이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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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랬어? 네가 말한 그 할아버지가 때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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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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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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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근데 우리가 다 잘못해서 맞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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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아린아 아무리 잘못을 했다고 해도 그게 맞을 이유가 되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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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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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 입양한 작자도 지금 이 섬에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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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찬이 삼촌? 응, 지금 아마 집에서 저녁 준비하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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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이름이 호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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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백호찬 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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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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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갈리는 심정을 잠시 담아두고, 아린의 종아리를 보살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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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어두워지는 시간대라서 완드를 꺼내 불빛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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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서클 시전: 조직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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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읏...! 차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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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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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제 괜찮아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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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장난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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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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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린이의 핼쑥해진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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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보니까 원래부터 ‘백씨’ 성을 가진 아이들로만 입양을 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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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이런 외딴 섬에서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을 만나보아야할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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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린이가 이렇게 고생할 줄 알았으면 그때 말렸어야 한 건데...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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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아니야! 나메가 봐주러 온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 헤헤에! 난 오랜만에 나메 봐서 진짜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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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선 입술을 꽉 다문 아린이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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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갛게 상기된 볼에는 어느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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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되겠어 일단 늦었으니까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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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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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아래에서 쩌렁쩌렁한 천둥같은 호통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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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썩을 도둑놈의 자식들아! 당장 제자리로 돌아가서 벌 안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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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울릴 만큼 큰 목소리 톤치고는 왜소한 몸집을 가진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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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만 뭐... 뭐시여! 도둑이야! 저 수박 도둑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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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를 들고 무서운 기세로 풀밭을 뚫고 달려오는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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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금 이태원 아니면 찾아보기도 힘든 갓을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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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팍까지 기른 턱수염, 주름으로도 숨길 수 없는 사나운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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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천벌 받을 놈들이! 징벌동에 다시 한번 들어가고 싶은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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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를 하늘 높이 치켜올려 우리들을 잡아 족치려는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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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딱 가만히 있- 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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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그는 그대로 바닥에 풀썩 고꾸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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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내가 걸려서 넘어질뻔한 넝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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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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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헥헥대며 달려오는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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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모습이 낯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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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의 츄리닝, 심지어 위아래도 깔맞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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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행색은 비루하기 그지없었지만 옛날에 보육원에 자주 들린 부잣집 남자가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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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거기서 뭐하세- 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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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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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랩스틱 코미디 마냥 노인이 쓰러진 곳 바로 옆에 얼굴을 진흙에 쳐박은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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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가을이 오지도 않았는데 지랄도 풍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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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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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짐...하지는 않지만 나름 갖출 건 다 갖춘 밥상에 둘러앉아 다들 젓가락을 깨작깨작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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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교수는 그동안 섬을 쭉 탐방하고 오겠다며 한두입 떠먹고는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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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를 제외하면 단백질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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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물 옆에 나물, 그 옆에 나물, 그 옆에도 나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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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슨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도 아니고 생김새만 조금 다르지 다 거기서 거기인 나물들이 줄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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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아이들은 허기가 진 모양이었는지 밥부터 입에 넣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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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그 할아버지라는 작자가 상석에 앉아 밥상머리 교육을 시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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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존재가 사라졌으니 한시름이 놓이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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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는 생선에 젓가락을 가져가는 백호찬을 막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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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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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줘요. 안 그래도 먹을 게 없는데 불쌍하지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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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 근데 너 그 애 맞지? 뉴스에 나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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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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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그렇구나... 아아아아아악! 아휴 됐다. 난 그만 먹을게 많이들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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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찬이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더니 밥상에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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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인지 올빼미인지 모를 새소리가 창호지를 뚫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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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짧은 나도 마찬가지로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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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애들을 이 섬에 데려오신 거예요? 삼촌 부자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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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래... 나 거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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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거지가 캡슐을 두 개씩이나 기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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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거지가 아니었으니까! 거지 되기 직전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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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사정이 있는 듯 싶었지만 물어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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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할아버지가 조금 치매기가 있으셔. 보다시피 정신도 조금 오락가락 하시고... 두세달 전에도 갑자기 쓰러지셔서 오늘내일 하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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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친할아버지라 말하는 백봉곤 훈장은 나이가 거의 아흔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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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먼 거리를 뛸 정도로 정정하시니 진짜 아픈 사람이 맞나 의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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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을 두리도에서 훈장을 하신 분이었어. 물론 대부분의 수업은 저기 비안도에 있는 학교에서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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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두리도에서 태어나 두리도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거주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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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주 압박에 못 이겨 비안도로 이사를 가긴 했지만 몇 년 전부터 치매기가 도져 두리도에 사는 걸 고집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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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게 우리 아린이랑 민우오빠랑 무슨 상관인데요? 역할극이라도 하고 싶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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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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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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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찬이 두 손으로 짝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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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할아버지는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재산을 물려준다고 하셨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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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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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그런 것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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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을 세게 내리치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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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린이의 종아리가 어떻게 된 지 모르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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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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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안. 계속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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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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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찬이 머리를 긁적이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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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끝까지 들어봐 네가 오해하는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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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집안 경제가 안 좋아져가지고 할아버지한테라도 빌붙어서 지금이라도 유언을 잘 받아놔야겠다 이 말 아닌가요? 그런 거라면 차라리 나중에 유류분반환청구소송을 하시지 왜 애들을 끌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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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람 보는 눈이 이토록이나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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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이 섬을 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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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야! 그러면 내가 어린 애들 데리고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을 8개월 동안이나 해왔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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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말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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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도 오기 전에 모두 동의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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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말해보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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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진짜... 너 여덟 살 맞아? 진짜 기 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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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차로 잠시 목을 축인 백호찬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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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도움이 없으면 제대로 상속을 받을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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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도 잘 모르세요? 상속은 피상속인의 사망으로 개시되어 자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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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나 땅, 건물 같은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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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의 눈에는 차마 숨기지 못하는 온갖 애환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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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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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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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비트코인이 들어있는 디지털지갑 비밀번호를 안 알려주고 계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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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화폐 말이에요? 아니 뭐 얼마나 되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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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825개. 오늘 점심 시세로는 대충 2498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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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지금 저기 누워있는 훈장이 비트코인 졸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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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말세다 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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